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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8-24 23:03:466112 
진시황의 업적과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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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秦始皇陵)으로 돌아본 시황제(始皇帝)의 황권과 그의 역사적 위치(位置)




서론(序論)




키가 약 184센티미터나 되고 갑옷을 입은 무사용(武士俑)은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2천 2백 년 전 몇 천 명의 상비군 무사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 제국이 서방에서 그 세력을 확장할 무렵 동아시아의 진이라는 나라의 국왕은 다른 제후국 국가들을 점령해 통일 국가를 만들었다. 역사에 남을 이 승리자는 바로 진시황제(秦始皇帝)다. 그는 중국 최초의 황제이자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건축자이기도 하다. 기원전 210년, 그는 15층 빌딩 높이의 여산릉(驪山陵)이라 일컬어지는 거대한 분묘에 묻혔다. 역사연구에 있어서, 사료란 현재 우리가 과거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길이다. 그 사료와 더불어 역사가 남긴 유적 또한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보다 확실한 과거의 산물일 것이다. 그 둘 중 더욱 우리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바로 유적으로 돌아본 인류의 역사가 아닐까 싶다. 어렸을 적부터 간간히 접하게 된 여러 가지 역사적 유적, 유물 중 내게 경이로움 마저 느끼게 했던 유적이 바로 진시황(秦始皇)이 남긴 유적이었다.







1974년과 1976년에 걸쳐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顯)의 여산릉(驪山陵)유지에서 발견된 진시황(秦始皇) 부속 릉(陵)에서는 계속된 탐사에 결과, 실물 크기의 정교한 병사·병마용(兵馬俑)이 무려 6천구 이상 출토되어 진시황 지배의 막강함에 놀라게 하였다. 그 규모의 웅장함, 그 규모에 뒤지지 않는 정교함.... 그가 남긴 진시황제.병마용갱.만리장성 등 현재 세계의 불가사의로 꼽히고 있는 이를 유적에 대한 내용을 접한다면 누구나 한번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주인공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게 될 것이다. 흔히, 역사상 폭군을 이야기할 때면 어김없이 거론되는 진시황....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였을까? 단순한 무력만으로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왜 이런 어마어마한 공사를 단행한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유적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재위기간 12년에 한 황제가 이룩해 놓았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이러한 유적을 통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했던 진시황 인물적 모습과 그가 가졌던 권력(皇權)에 대해 자세히 고찰해보고, 그가 가지는 역사상의 위치를 재평가 해보고자 한다.







본론(本論)1.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統一 帝國) -진(秦)







B.C. 247년 진에서는 재위 3년만에 급사한 장양왕의 뒤를 이어 정(政)이 뒤를 이었다. 후에 시황제(始皇帝)라 칭해지는 그는 당시 13살이었다. 당시 국정의 실권은 본래 한(韓)의 대상인 출신이었던 여불위(呂不韋)가 장악하고 있었다. 진은 이미 상앙변법 이래 구래의 씨족제를 타파하고, 귀족의 특권을 배제하여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꾀했다. 이와 동시에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실시한 결과 전국(戰國) 이후 진의 영토는 전 중국의 1/3에 달했고, 그 부는 1/2이 넘었으며, 기마전술로 무장한 군단은 갈수록 무적을 과시했다. 반면 나머지 육국은 개혁 조치가 실패하거나 미흡했기 때문에 진(秦)과의 국력차는 갈수록 벌어졌다. 21세가 된 진왕 정(政)은 <노애의 난(奴毐의 亂)>의 계기로 여불위를 제거하고, 유능한 인재를 국적에 관계없이 발탁하여 통일정책을 추진하였다. 한나라의 정국(鄭國), 위(衛)나라의 위료(尉僚), 초나라의 이사(李斯)가 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사는 유가인 순자(荀子)의 제자로서 진왕(秦王) 정(政)을 보좌하여 진(秦)의 정책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진왕 정은 내정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각국에 간첩을 파견해 군신을 이간시키는 방책을 채용해 교묘한 외교술과, 기마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무력을 통해 B. C. 230년 한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필두로 趙(B. C 228). 衛(B. C. 225), 楚(B. C 223), 燕(B. C. 222), 齊(B. C. 221)의 六國을 불과 10년만에 평정하고 통일을 달성했다.







1) 秦始皇의 中國 統一 마케도니아의 기마군단이 대장정에 나서고, 로마 대군이 지중해에서 그 위세를 떨칠 무렵 히말라야 산 동쪽의 황하와 양자강 양대 유역의 광활한 땅 위에서는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초(趙)· 위(衛)· 진(秦)의 일곱 제후국이 천하의 패권을 잡기 위해 중원을 내달리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황토 그 어느 곳에서나 대군이 운집해 천하를 다투었다. 그 전쟁의 횟수나 규모나 병사의 숫자를 비롯한 그 어떤 것도 당시 서방의 전쟁이 따라올 수 없는 정도였다. 교전하는 군대의 숫자는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거의 매번 전쟁터에 투입되는 인원이 10만을 넘었다. 또한 전쟁의 방식도 차전(車戰)·진전(陣戰)의 직접적인 대항에서 보병·기병·궁노병을 위주로 하는 야전(野戰)과 여러 변화를 요구하는 포위전으로 흘러갔다. 그 유명한 진나라와 조나라의 '장평(長平)의 전투'의 경우, 전쟁은 기원전 262년부터 26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결과는 조나라의 40만 대군이 투항한 뒤 결국 갱에 생매장되었고, 진나라의 군대 또한 과반수 이상이 죽었다. 무수한 장수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참담하게 죽어 갔으며 하천을 벌겋게 물들인 뜨거운 피로 중원은 몸부림을 치게 되었다. 이러한 급박한 역사는 초인적인 지혜와 강력한 무력으로 통일을 이룰 철혈지도자를 요구하고 있었다. 秦始皇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떨쳐 일어나 "효공·혜문왕·무왕·소양왕·효문왕·장양왕이라는 여섯 선왕의 유업을 계승해 긴 채찍을 치며 말을 몰 듯이 천하를 제어했다." 그리고 천하를 꾸짖는 위엄으로 여섯 나라를 평정하고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위대한 사명을 완수했다. 기원전 237년, 秦始皇은 몸소 출정해 그의 기지와 과감한 기질로 呂不韋와 노애(奴毐)의 무리를 분쇄하고 여섯 나라를 병합하면서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뜻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秦始皇은 진나라의 군사력이 다른 어떤 제후국보다 더 강력해야 함을 깨달았다. 당시 각 제후국 별로 그 역량을 비교해 볼 때, 진나라의 군대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진나라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관동(關東)의 여섯 제후국이었다. 여섯 나라를 이기기 위해 군사를 나누어 ,사방으로 출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지 때문에 각개 격파의 전략을 수립한 것은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다. 각개 격파를 하려면 제후의 합종(合從)을 막아야 했다. 여섯 나라 가운데는 한나라가 가장 약했고 조나라가 가장 강력했다. 李斯의 전략에 따른다면 "먼저 한나라를 취해 다른 나라에 위협을 가하고" 다시 조나라를 중심으로 合從해 진나라에 대항하는 강대한 세력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기원전 241년, 조나라 장군 방훤(龐煖)이 조(趙)·초(楚)·위(衛)·연(燕)·한(韓) 등 다섯 나라의 군사와 합종해 秦에게 대항하고자 했다. 이는 바로 조(趙)나라를 중심으로 한 연합 정책을 통해 진나라를 공략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비자(韓非子)는 먼저 제후국간의 합종을 방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새로운 형세를 감안해 전략 목표를 변화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가 말한 대로 '조나라를 들어(擧趙)' 그 머리를 침으로써 여섯 제후국의 머리를 없앰과 동시에, , '제·연나라와 친해(親齊燕)' 그 몸뚱이를 잘라 버리면 합종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秦始皇은 뛰어난 전략가였다. 李斯 등의 강력한 반대에도 그는 한비자(韓非子)의 전략 방침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먼 곳과 친화해 가까운 곳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조(趙)나라와 더불어 한(韓)나라를 멸망시키려 했다. 당연히 이는 모든 역량을 집중·투입해 조(趙)나라에게 타격을 주겠다는 중요한 군사 전략면에서의 선택을 뜻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236년, 秦始皇은 왕전·양단화·환의 등에게 명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당시 조나라의 장군 방훤(龐煖)은 연(燕)나라를 공격 중이었는데, 진(秦)나라의 군사는 이 틈을 이용해 상당군과 하간 지역을 점령했다. 그 이듬해 진(秦)나라 군사는 평양·무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조(趙)나라 군사 10만이 목숨을 잃었으며 장군 호첩(扈輒)또한 전사했다. 기원전 233년, 진나라는 다시 조(趙)나라의 적려·의안을 공격해 한단성 아래까지 이르렀다. 조(趙)나라는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급히 북방으로부터 匈奴를 방어하고 있던 명장 이목(李牧)을 불러들였다. 이목(李牧)은 뛰어난 기지를 가지고 장수들을 지휘해 진나라 군사와 한단성 밖에서 일대 혈전을 벌였다. 그 결과 진나라 군대는 조나라를 공격한 이래 첫 번째 참패를 당했다. 그러자 전투를 지휘하던 장군 환의는 참패의 죄를 뒤집어쓸까 두려워 연나라로 도망을 갔다. 그 이듬해 진나라 대군은 다시 조나라를 공격했지만 또다시 이목에게 격퇴 당하고 말았다. 진나라 군대가 이처럼 참패를 당하긴 했지만 조나라의 세력 또한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기원전 230년에 조나라는 이전에 없던 가뭄이 들었다. 지속적인 전쟁과 가뭄의 폐해에다 정치적 암울함으로 당시 조나라는 이미 멸망의 날이 눈앞에 다가온 상태였다. 이목(李牧) 장군 또한 두 번이나 진나라 군대를 대패시켰지만 나라를 멸망의 늪에서 구해 낼 수는 없었다. 기원전 229년, 진나라 장군 왕전과 양단화는 두 길로 나누어 조나라로 향했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전전하던 李牧과 司馬尙은 군사를 이끌고 죽음을 불사하고 이에 저항했다. 두 나라의 군사는 몇 백 차례의 교전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1년 남짓한 혈전에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秦始皇은 직접 전쟁터에 나가 그 광경을 관전하면서 한단성을 공격하고 있는 병사들을 격려했다. 또한 尉僚가 제안한 "군신 사이의 관계를 이간시키는" 전략을 이용해 조나라의 권신 곽개를 돈으로 매수했다. 郭開는 조나라 왕에게 李牧을 무고했다. 또한 그는 장군 司馬尙이 반란을 꾀해 성을 지키기만 할 뿐, 적을 공격하지 않아 전세를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고 거짓으로 고자질했다. 진위를 가리기 힘들었던 조나라 왕은 곧바로 조총과 안취를 보내 李牧과 司馬尙의 병권을 대신하게 했다. 李牧은 조총과 안취가 모두 장군의 재목이 아니며 도저히 진나라의 명장 왕전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막강한 적이 코앞에 닥친 급박한 상황에서 李牧은 국가의 존망이 위중하다는 이유로 병권을 내놓을 것을 거절했다. 조나라 왕과 郭開는 사람을 밀파해 李牧을 잡아 사형에 처했으며 司馬尙은 면직시켜 감옥에 가두었다. 李牧이 죽자 조나라 군대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그 결과 진나라 군사는 3개월이 못 되어 한단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강력한 조나라가 멸망하자 약속한 위나라와 연나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더 이상 피하기 어려웠다. 비록 荊軻와 같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죽음으로 이에 대항하는 장수도 있었지만, 이미 패망의 길로 접어든 국가의 운명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 두 나라 또한 조나라의 멸망과 함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위기가 영웅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영웅이라 할지라도 시기를 적절하게 잡지 못하면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네 나라가 멸망하자 진나라가 상대해야 할 적은 제나라와 초나라 둘뿐이었다. 두 나라의 실력을 비교해 볼 때 초나라의 실력이 제나라보다 훨씬 뛰어났다. 또한 진나라는 제나라와 화친한 지 벌써 40여 년이나 되었으며, 초나라의 경우는 원한의 관계를 맺은 것이 몇 차례였다. 초와 제, 서로 다른 관계를 맺고 있는 두 나라를 사이에 두고 秦始皇은 다시 한 번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제나라는 비록 약하기는 했지만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만약 먼저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강대국 초나라와 다시 악전고투를 해야만 했고, 또한 제·초의 合從으로 인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만약 초나라를 멸망시킨다면, 제나라와 진나라 간의 친교를 일부러 파기할 필요도 없고, 제와 초나라의 合從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일단 초나라만 망하게 되면 제나라는 전쟁을 하지 않아도 반드시 투항할 것이었다. 이에 기원전 235년, 秦始皇은 장군 李信을 파견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략케 했다. 그러나 젊고 혈기 왕성한 李信은 적을 과소평가해 참패를 당하고 진나라로 돌아왔다. 기원전 224년, 秦始皇은 이번에는 왕전에게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 국경에 이르렀을 때, 초나라의 명장 項燕은 곧바로 국내의 모두 군사력을 동원해 출정했다. 그러나 왕전은 진영을 지키며 출전하지 않고 일단 충분한 휴식을 통해 전투력을 강화하고 병사들의 투지가 왕성해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출전의 채비를 마친 60만 대군이 홍수처럼 적군 진영으로 돌진하자 초나라 군사들은 이에 대응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초나라의 명장, 項燕 또한 전장에서 전사했다. 얼마 뒤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의 수도 壽春을 함락시킴으로써 초나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미처 대비도 하기 전에 초나라가 망하자 제나라는 완전히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연나라를 멸하고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조나라의 잔존세력이 세운 代를 멸한 왕전의 아들 왕분(王賁)에 의해 급습을 당한 제나라는 결국 망했다. 이로써 중국의 여섯 나라는 진나라 군대의 15년 동안의 정벌로 모두 패망했다. 중원의 땅에서 몇 백 년 동안 존재했던 군웅할거의 혼란스러운 상태도 이로써 끝을 맺고 역사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2) 진시황의 皇帝 지배 체제의 構築




천하를 통일한 秦王 政은 통일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가장 먼저 천하에 오직 하나 군림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권위의 확립에 나서 왕이라는 칭호의 개명을 촉진하였다. B. C. 221년 동방의 강국 齊를 타도하여 중국을 통일한 秦王 政은 천년에 걸쳐 무수한 소국이 분립하고 군웅이 할거했던 중국에 한족(漢族)을 주체로 한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를 제일 처음으로 성립시켰다. 따라서 秦王은 秦 일국의 왕일 뿐 아니라 전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단순히 왕(王)이라 호칭해서는 그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秦王 政은 六國을 통일한 후, 丞相 王棺, 어사대부(御史大夫) 풍겁(馮劫), 정위(廷尉) 李斯로 하여금 "이름이 불편하고 자신이 세운 공을 드러내 후세에 전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제호(帝號)를 새로 만들 것을 의논토록 하였다. 李斯 등이 논의한 결과 秦王의 공적이 고대의 오제(五帝)보다 크다고 여겨, 전설의 '三皇' 중 가장 존귀한 泰皇으로 칭호를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 秦王 스스로도 공이 오제보다 크고 영역은 삼황보다 넓다고 생각하여 '三皇五帝'의 존호에 맞추어 '皇帝'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皇의 字義를 살펴보면 '皇'은 '天皇' '地皇' '泰皇'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神聖性을 표시하고 있는데 金文에 보이는 '皇'의 원의는 빛나는 太陽을 의미하고, 그 뜻은 '광휘' '위대한' 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 제의 의미를 보면 제는 원래 현세군주의 칭호는 아니었다. 은대에는 우주만물의 造物主였고 절대신이었던 천을 '上帝' 또는 '帝'라고 불렀다. 그러나 주대에 시조신을 配天·祭祀하는 과정에서 제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또 전설상의 賢主를 帝堯·帝舜이라고 불렀고 군국시대 五行思想이 유행함에 따라 이것이 체계화되었다. 여기에서 제는 단순히 상제뿐만 아니라 聖王·賢主의 존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전국시대에 제민왕(濟湣王)과 진소양왕(秦昭襄王)이 각기 東帝·西帝라고 칭함으로써 제(帝)가 현세군주의 尊號로 극히 짧은 기간이나마 사용되었다. 그러나 秦王 政이 군주의 새로운 존호로서 채택한 帝는 단순히 聖王·賢主의 존호로서 채택한 것 같지 않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제는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고 규제했던 上帝를 의미했는데 秦皇 政은 이같은 의미에서 帝를 군주의 존호로서 결정한 것 같다. 따라서 皇帝는 '광휘의 上帝' 또는 '위대한 上帝'로 이해되며 그 의미는 단순히 중국을 통일한 통일제국 군주의 권위와 위엄만을 내포한 것이 아니었다. 상제가 천상에서 우주 삼라만상을 규제하고 있는 것과 같이 皇帝는 지상을 지배하는, 즉 지상의 상제를 꿈꾸었던 秦王 자신의 통치이념을 대변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皇帝는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부르고 신하와 백성에게 명령을 '제(制)'와 '조(詔)'라고 했다. 신하들은 반드시 피휘(避諱)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여, 말과 문자 중에 皇帝의 이름과 자(字)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문서 안건에 '皇帝'라는 두 글자를 쓸 때마다 반드시 행을 달리하여 맨 위에 쓰도록 했다. 요컨대 皇帝권을 더 이상 높일 수 없는 지위까지 올렸는데 이것은 봉건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수립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秦王은 또 아주 옛날의 제왕에게는 호(號)만 있었고 시(諡)가 없었으나 이후 호 이외에 죽은 이후 살아서의 행위를 기준으로 시를 추정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자식이 부친을 평가하고 신하가 군주를 평가하게 됨과 같아 체통을 지킬 수 없다고 여겨 시법(諡法)을 폐지키로 결정하고, 스스로 '始皇帝'라고 칭한 후 후세에는 순서에 의거하여 "2세.3세라 칭하고 만 세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秦王 政이 통일사업을 이룩하고 천하를 순시할 때에 건립한 추역산(鄒嶧山)·낭야산(琅耶山)· 지부산(之罘山) ·각석문의 비문에는 秦王 政의 덕을 나타내는 황제의 尊號는 보이는데 始皇帝의 尊號는 보이지 않는다.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秦王 政은 생전에는 황제로서 군림·통치하였으며, 그 사후에 아들 胡亥가 즉위한 후 始皇帝로 명한 것 같다.




이러한 칭호 개명 외에도 秦始皇의 다섯 차례의 화려한 전국 순행 중 기원전 219년 제2차 천하순시 때에 태산에 이르러 封禪을 행하였다. 封禪에 대해서는 창업을 이룩한 수명(受命)의 군주가 그 위업을 천제에게 고하는 儀式 또는 우주의 전지전능의 절대신인 天에게 不老不死의 청원을 하는 儀式이라는 등 학설이 분분하다. 始皇帝가 이떠한 형식의 封禪儀式을 태산에서 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始皇帝는 封禪을 행하기 전에 유생들에게 그 儀式·절차를 하문한 적이 있으나 그가 행한 封禪儀式은 비밀로 하였으며, 그 후 한무제 또한 封禪을 행하였으나, 역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封禪儀式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람은 후한의 광무제인데 그는 封禪儀式을 비밀로 하지 않고 군신이 나열해 있는 가운데 報天告代의 封禪儀式을 행하였다. 그러나 封禪儀式에 관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封禪儀式을 통해 황제가 천과 직접 會合·對話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인데 始皇帝가 행한 封禪儀式이 報天告代의 儀式이었는지 不老長生을 염원했던 儀式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생각건대 야심 많은 始皇帝는 이 두 가지 목적을 다 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統一을 공고히 하기 위한 政策




秦始皇은 새로운 봉건왕조를 건립한 후 전국적으로 통일을 공고히 하고 중앙집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 경제 및 문화. 사상 방면에서 일련의 강경조치를 취했다. 당시의 역사 조건으로 보면 이들 조치는 필수적인 것이었고 결과도 성공적이었지만 일부 조치는 지나치게 어리석고 잔혹했던 것도 사실이다.




가) 무기회수와 호족.부호의 강제이주




기원전 221년 통일 후, 六國 봉건귀족의 세력 회복과 광대한 백성의 반항을 방지하기 위해 천하의 무기를 몰수하여 녹여 12金人을 만들었는데, 각각의 무게가 천 석(石), 24만 근(斤)으로 咸陽宮내에 두었다. 또 천하의 호족과 부호 12만 호를 咸陽으로 옮겨 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또 다른 六國 귀족 및 지방의 호족들은 강제로 남양(南陽) 혹은 파촉(巴蜀)으로 이주시켜 그들의 본거지와 절연시킴으로써 활동 능력을 약화시켰다.




나) 제방의 決潰, 馳道의 건설, 천하 巡行




秦始皇은 통일 후 각국이 변경 지역에 쌓았던 성곽과 요새와 망루 등을 철거하고 제방을 터뜨려 통하게 하고 험준한 지형도 없애 六國 봉건귀족과 지방세력이 할거할 수 있는 수단을 없앰으로써, 교통의 발전과 지역경제의 연계성 및 통일의 공고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와 동시에 또 치도(馳道)건설에 착수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강화했다. 당시 수도 咸陽을 중심으로 한 도로는 동쪽으로 옛 연(燕)과 제(齊) 지역과 통했고 또 한 도로는 남쪽으로 吳와 楚 등의 지역에 이르렀다. 치도의 넓이는 50보였고 도로 곁 3丈 간격마다 푸른 소나무를 심었는데 도로의 지반이 높고 또한 견고하여 매우 장관이었다. 북방의 방어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기원전 212년 다시 蒙恬에게 '직도(直道)'를 건설토록 하였는데 咸陽에서 운양(雲陽)을 거쳐 북쪽 변경의 구원군(九原郡)에 이르기까지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총길이가 1,800여 里나 되었다. 이외에도 '서남이(西南夷)'와 통교하기 위해 '오척도(五尺道)'를 닦았고, 영남(嶺南)과 통하도록 '신도(新道)'를 닦았다. 그리고 秦始皇 본인은 기원전 220∼210까지 11년간 다섯 차례에 걸쳐 치도를 따라 천하를 순행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비석에 공(功)을 세겨, 위엄과 덕을 선양하고 대일통(大一統)과 법치(法治)를 드러내어 사방을 복종케 하고 秦王朝의 통치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秦始皇은 7차례 각석(刻石)하였는데 5곳은 산동성의 역산(嶧山). 태산(泰山). 낭야(琅耶) .지부(之盃)및 지부의 동쪽이고 나머지 두 곳은 갈석(碣石, 하북성 창려현〈昌黎懸〉)과 회계(會稽, 절강성 소흥〈紹興〉남쪽의 회계산)에 있다. 새겨진 글은〈秦始皇本記〉에 보이며 혹 탁본과 모사본이 전하는데 原刻은 단지 낭야각석과 태산각석의 잔사(殘辭)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 文字의 統一




중국의 문자는 신석기 시대에 이미 그 맹아가 있었다. 현재 발견된 가장 이르면서도 가장 계통이 있는 문자는 상주(商周)시대의 갑골문(甲骨文)과 청동기 명문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1)춘추시대 말기부터 남방의 오(吳). 월(越). 채(蔡). 초(楚)의 여러 나라는 王을 위한 儀仗用의 병장기에 미술적 자체(自體)를 새겨 넣었는데 자체에 미관(美觀)을 추구하여 예술적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2)춘추전국시대 특히 전국시대에 들어온 이후, "생산의 발전에 따라 문자의 사용도 날로 빈번해졌고 동방의 六國에서는 경제 . 문화의 발전에 따라 문자도 간략히 한 결과 '초전(草篆)' 혹은 '고예(古隸)'라고 칭해지는 것이 등장했는데, 이는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의 과도기였다. 또한 지역의 차이와 각각의 발전에 따라 소위 "언어가 달라지고 문자도 다른 모양이 되는" 현상이 생기게 되자 문화와 경제의 교류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秦始皇은 통일 후 '서동문자(書同文字)'의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李斯와 趙高와 호무경(胡毋敬) 등에게 은주 이래의 고문자 즉 '대전(大篆)'을 정리 . 규범화하여 소전(小篆, 혹은 陳戰〈秦篆〉이라고도 함)을 만들게 하고, 소전을 사용하여《창힐편(倉頡篇)》(아동을 위한 글자교본),《원력편(爰歷篇)》(옥리〈獄吏〉강습용), 《박학편(博學篇)》(역법〈曆法〉강습용)을 나누어 편찬하게 하여 표준 글본으로 삼았다. 이것은 역사 발전에 순응한 적극적인 조치로서 당시 정책과 법령의 시행에 편리하였을 뿐 아니라 후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라) 思想의 통일과 焚書坑儒




秦始皇 34년(213년 B.C) 咸陽宮에서 주연을 베풀어 博士 70명이 축수(祝壽)했다. 복야(僕射) 주청신(周靑臣)이 공덕을 칭송하고 秦始皇이 제후를 평정하고 군현을 설치하여 천하가 평안해짐을 찬양하자,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비판을 하였다. 순우월은 군현제가 은주시대의 분봉제(分封制)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옛 것을 본받지 않고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 했습니다" 라고 하고, 또 주청신이 아부하므로 충신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丞相 李斯가 국가의 제도와 정책 . 법령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어져야 하는 것인데, 단지 어리석은 儒生만이 옛 것을 옳다고 하고 현실을 비판하여 백성을 혼란케 한다고 반박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1) 秦 王국의 역사서인《秦記》를 제외하고 모든 六國의 역사서를 태워 버릴 것.

2) 박사관이 직무상 갖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천하에《시경》과《서경》및 제자백가서를 소지하고 있는 자는 일률적으로 군수와 군위에게 바치게 하여 태워 버릴 것. 명령이 있은 뒤 30일이 지나도 태워 버리지 않는 자는 경형(?刑)에 처하고 아울러 '성단(城旦)' (4년간의 축성(築城) 노역)에 복역시킬 것. 3) 감히 사사로이《시경》과《서경》을 담론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옛 것으로서 현실을 비판하는 자는 멸족시킬 것, 다른 사람의 이러한 범죄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동일한 죄목으로 다스릴 것.

4 의약 . 복서(卜筮) . 종수(種樹) 등의 서적은 태워 버리지 말 것.

5) 사학(私學)을 엄금하고 국가의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관리를 스승으로 삼을 것(以吏爲師).




秦始皇이 이사의 건의를 승인함으로써 전국적으로 대규모 분서사건이 발생했다. 분서 후 이듬해 일부 유생과 방사(方士)들이 사사로이 秦始皇을 비방하였는데 그 내용은 秦始皇이 권세에 탐욕스럽고 형벌을 좋아하며 옥리(獄吏)를 중시하고 박사를 경시하므로 서로 떠나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秦始皇이 이를 알고 크게 분노하여 조정을 비방하고 허황된 말로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죄목으로, 460여 명을 체포하여 엄히 고문한 뒤 모두 咸陽에서 생매장하였다. '焚書坑儒'의 목적은 사상을 통일하여 儀式형태의 영역에서 봉건적 제왕의 통치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전제주의는 오로지 사상을 질식시키고 언로(言路)를 막고 문화 전적(典籍)을 없애고 통치계급 내부의 분열을 조성할 뿐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에서는 물론 후세에 대한 영향이라는 측면에서도 마땅히 역사의 질책을 받아야 할 어리석고 잔혹한 조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秦始皇이 폭군이라 불리는데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이 焚書坑儒 사건에서 관건이 되는 한 인물에 대해 주위를 기울이는 사람은 극히 적다. 秦始皇이 자행한 것으로 알려진 분서갱유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바로 승상 李斯이다. 李斯가 사건의 중요 인물이라 말하는 이유는 바로 대량의 서적을 불태운 것이 그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사실을 과장해 떠들지 않았다면 사건의 종말은 또 다른 상황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李斯는 당시 이미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군주를 위해 충성해야 하는 사대부 계층에 불과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반 사대부보다는 좀더 많은 실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중국 역사에서는 이렇게 계층 내부에서 스스로를 자멸케 하는 사건이 가끔 발생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전국 시대의 선빈(孫臏)은 자신의 동창인 방연에게 두 발이 잘리는 악형을 당하자 이후 마릉도에 병사를 매복시켜 방연을 죽게 만들었다. 진나라 시대에 李斯는 뛰어난 계략으로 자신과 같이 순자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한비자에게 독약을 먹여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이후에는 秦始皇의 손을 빌어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유생들을 황량한 벌판에 매장시키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李斯 또한 동료에게 咸陽 거리에서 요참을 당하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이러한 사대부 계층의 자멸 행위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어 갔다. 많은 이들이 秦始皇의 焚書坑儒가 중국 문화를 파멸시켰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죄를 秦始皇 한 사람에게 돌리고 있지만 이는 秦始皇의 죄를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焚書坑儒는 법가를 대표로 하는 진나라 시대의 문화가 유가를 대표로 하는 관동문화를 파괴한 사건이다. 秦始皇이 도서의 개인 소장을 금지시키고 焚書坑儒를 일으켰지만 당시 관동의 수구 세력은 여전히 완강한 저항을 하면서 秦始皇의 명령에 대항했으며,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서를 비밀리에 소장하는 한편 유가 학설의 부활을 꾀했다. 그들은 이후 더욱 번성해 중국 문명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면서 세력을 지켜 오게 되었다. 한나라가 흥기했을 때, 민간에서는 소장하고 있던 제자백가의 서적을 모두 풀어 놓았다. 전국 시대 백가쟁명의 여운이 다시 일어나 음양가·도가·묵가·법가·명가 등의 학설이 유가와 병존했다. 그러나 한무제 시기에 "백가를 축출하고 오직 유가만을 숭상한다" 는 정책이 집행되면서 각 학설은 중국 정치 문화의 중심에서 벗어나고 오로지 유가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들에게 秦始皇의 '금서' 정책이 그리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준다. 객관적으로 볼 때 秦始皇의 분서갱유가 중국 문화를 단절시키거나 큰 재해를 가져다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項羽로 대표되는 관동 세력에 의해 빚어진 전화가 당시 선진 문화와 기술에 더욱 치명적인 폐해를 가져다주었다. 그 찬란한 조소·서예·회화·문학·음악 등의 예술과 뛰어난 주조·야금 제련 등의 과학 기술의 정수는 바로 項羽로 인해 그 맥이 단절되었다. 秦始皇 兵馬俑과 동거마에서 출토된 그 실물 유적들이 이러한 주장을 증명해 준다. 그렇지 않다면 兵馬俑의 사실적 표현 예술, 도기 제작, 동거마의 야금 주조와 청동검의 크로마이징 처리라는 선진 기술 또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전달되어 좀처럼 풀기 어려운 과학 기술 공예의 수수께끼를 풀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項羽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욱 치명상을 준 것은 한무제였다. 項羽가 초래한 전화는 당시 세계에서 으뜸가는 중국 문명을 단절시켰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지만, 한 무제가 취한 儒家獨尊의 문화 정책은 중국 문명을 철저하게 쇠락시키고 끝내 파괴시키는 지경까지 몰고 갔다.




마) 郡縣制의 全國的인 實施




우선 전국을 통일한 후에 가장 시급한 것은 예전 秦 본래의 영토에 비해 엄청나게 거대해져 버린 모든 국토를 잘 다스릴 효과적인 통치체제의 설립이었다. 그 통치제도를 정하는데 있어서 당시 승상이었던 王綰은 서주시대처럼 王室의 자제를 遠地 에 封爵하는 분봉제도를 제안했으나 延尉 李斯는 군현제의 확대를 주장하면서 분봉제도는 시간이 흐르면 각 王族들 사이가 거리 가 멀어지게 되고 또다시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분열시대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결국 이 논쟁의 결과는 始皇帝가 끝을 맺게 되는데, 始皇帝는 봉건제의 재실시는 제후에게 軍備를 허용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李斯의 의견을 채택하게 된다. 그 결정에 대한 다른 원인은 李斯가 또 다시 각 제후가 갈라져 相爭하는, 즉 새로운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발언이 가장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새로운 춘추전국시대라는 것은 바로 전국을 통일한 始皇帝의 위업이 완전히 헛수고가 되어, 無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과 동의어였을 것이므로, 그런 것은 始皇帝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군현제의 경우, 皇帝의 민중 개개인의 지배로서 풀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皇帝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데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군현제 실시는 이미 진을 비롯한 전국시대부터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秦 최후의 봉건적 지역은 노애의 난 - 여불위의 숙청 이 후로 완전히 사라졌다. 전국을 36郡으로 나누고(이는 후에 남월과 匈奴정벌 등에 의해 40여 군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郡은 다시 縣으로 나누었다고 하며 그 수는 대략 1400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중앙정부, 즉 始皇帝는 현령은 수시로 부임지를 이동시켜 한 지방에 정착해서 호족화하는 것을 막았다. 철저한 중앙집권을 위한 정책이랄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러나 부임된 관리들은 대부분 통일과정에 공적을 세운 군인들이 맡았기 때문에 민정에 익숙하지 못해 강압적 통치를 추진하여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전국 후기, 진국은 告奸을 목적으로 戶籍相伍제도를 수립하여 통치강화를 도모하였다. 秦始皇 16년 처음으로 남자의 연령을 기록한 것과 31년 백성으로 하여금 실전을 신고하게 하였다. 이렇게 호적의 연령과 토지점유 사항으로 조사함으로서 병사의 징발과 조세의 징수에 대단히 편리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봉건사회에 있어 농민의 유망을 방지하는 제도였지만 정부의 사회지배력을 한층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었다.




바) 官僚制의 制定




진 제국에서 또 그냥 넘어가서 안될 것은 최초의 전 중국을 통일한 제국로서 넓은 대륙을 지배할 수 있는 지배체제, 즉 통치에 있어서 효율적인 관료제를 확립시켰다는 것이다. 진대의 관료제를 三公九卿制라고 한다. 우선 중앙에는 최고 통치기관으로서 左右 (또는 한 명) 丞相과 丞相을 보좌하는 御史大夫, 전국의 군정을 담당하는 太尉가 있어 이를 三公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 아래에 九卿으로서 실제적인 군사행동을 지휘하는 장군, 사법관으로 廷尉, 국가재정을 관장하는 治粟內史, 제실, 재정을 담당하는 少府 등 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관제가 설치되었다. 이들은 皇帝에 의해 임명되고 국가의 재정내에서 그들의 봉록이 지급되었다. 지방관으로는 군수, 현령 외에 군에는 군사를 주관하는 郡尉, 군수를 감찰하는 監御史가 있고 현의 장관은 관할하의 호수가 1만 호 이상인 경우 令, 이하는 長이라고 불렀다. 令, 長 아래에는 縣丞이 있어 보좌역으로 문서 사법을 관장했으며 현위는 군사를 맡았다. 군현의 관리는 어디까지나 皇帝가 임명하지만 그 아래의 관리는 三老라고 해서 그 지방의 유력자들을 임명하였다. 이는 중앙정부가 지방을 완전히 통제하고 다스리기는 어려웠으므로 지방과는 어느 정도 타협을 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각 지방관에 대해 그들을 감찰하는 관리를 따로 지정한 것으로 보아 지방의 단독행정과 반란의 가능성을 막고 지방에 대한 중앙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확대시킨 군현제를 실시하여 모든 권력을 皇帝에게 집중시키는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런 군현제는 漢 帝國時代를 비롯하여 2000년간의 중국의 기본행정제도가 되었다. 이렇듯 진이 고대제국으로서 상당한 완성도를 보였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4) 진나라의 滅亡




가) 秦始皇의 죽음과 胡亥

기원전 210년, 秦始皇은 左丞相 李斯와 막내아들 胡亥를 이끌고 중차 부령 趙高를 비롯한 막료와 태감의 호위 아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순행에 나섰다. 대부대가 낙양에서 출발해 무관(武關)을 지나 단수(丹水)와 한수(漢水)의 두 수역을 지났다. 그리고 양자강을 따라 소주의 호구산(虎丘山)과 회계산(會稽山)을 거쳐 갔다. 秦始皇은 회계산에서 大禹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공을 돌에 새겼으며, 또한 남동 지역에 남아 있던 씨족 사회의 혼인 풍습과 남녀의 음란한 현상에 대해 "태평 성세를 위해 천하에 교화의 풍을 계승하여 민속을 정리하도록 한다"라는 새로운 조칙을 내렸다. 회계령을 떠날 때, 秦始皇은 뱃길을 따라 낭야에 이르렀다. 방사 서복의 말에 따라 秦始皇은 쇠뇌수와 함께 상어를 잡으러 바다에 들어갔다. 대어를 잡은 秦始皇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차서 낭야대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다 문득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느끼고 서쪽으로 귀환할 것을 명령한다. 행렬이 평원진에 도달했을 때, 秦始皇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左丞相 李斯는 급히 말을 돌려 咸陽으로 향할 것을 지시했다. 하북 지역의 하구에 다달았을 때, 秦始皇은 이미 ,운명의 시간이 닥쳐왔음을 감지하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李斯와 趙高를 불러 유서를 작성하게 했다. 유언의 내용은 북방에서 匈奴族을 지키고 있는 태자인 부소에게 咸陽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는 것이었다. 중국을 통일한 秦始皇이 나이 50세에 세상을 뜨니, 스스로 始皇帝라 칭한 지 겨우 12년만의 일이었다. 秦始皇이 죽은 뒤 丞相 李斯는 새로운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왕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선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始皇帝의 죽음은 그 자신과 胡亥와 趙高, 그리고 몇 시종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李斯와 趙高는 비밀리에 계획을 세운 뒤,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秦始皇의 시체를 온도가 조절되는 수레에 실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예의에 합단한 듯했지만, 사실 趙高에게는 딴 속셈이 있었다. 그의 강요와 꾀임에 빠져 李斯 또한 결국 秦始皇의 유언을 변조하는 데 찬성했고, 태자 扶蘇와 대장군 蒙恬에게 검을 보내어 자살하도록 명령하고 秦始皇의 막내아들 胡亥를 皇帝로 옹립했다. 부소와 蒙恬이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리느라 행렬은 일부러 길을 돌아 咸陽으로 향하고 있었다. 긴 여정과 무더위로 秦始皇의 시체는 부패해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李斯와 趙高는 소금에 절인 생선 몇 수레를 가져다가 시체 썩은 냄새를 가리려 했다. 행렬이 막 咸陽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 부소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李斯와 趙高는 정식으로 秦始皇의 죽음을 공포했다. 9월에 부패한 秦始皇의 시체가 여산 秦始皇陵에 매장되고 胡亥가 등극했다. 趙高는 丞相에서 낭중령으로 승진되고 李斯는 丞相직을 연임했다. 趙高의 사주로 胡亥는 등극하자마자 제일 먼저 부소를 추종하던 장군 蒙恬에게 독주를 내렸다. 이어서 6명의 왕자와 10명의 공주를 咸陽으로 압송해 길거리에서 참수했다. 그 밖의 皇실의 종친들 가운데 어떤 이는 자살하고 또 어떤이는 도망가다가 피살당했다. 화근을 철저하게 뿌리뽑기 위해서 胡亥는 조정에서 이견을 가진 신료들을 차례로 모두 죽였다. 마지막으로 趙高의 유혹으로 胡亥의 등극을 도왔던 李斯마저 咸陽에서 腰斬에 처했다. 진 제국이 무너지고 또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 경악할 만한 피의 역사도 묻혀져 갔다. 후인들은 당시 조정 안팎에서 어떤 살육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秦始皇의 폭정과 가혹한 형벌, 그리고 노역과 지나치게 긴 병역 때문에 백성들이 이에 반발해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은 물론 진나라를 패망하게 한 중요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 하윤곤이 말한 대로 "진나라가 망한 근본 원인은 胡亥가 王位를 찬탈한 뒤 모든 정책을 순리에 역행해 끌고 갔기 때문이고, 진나라 통치 집단의 모순·분열을 조성해 통치 역량을 나약하게 했기 때문이다."고 볼 수 있다. 만일 胡亥가 王位를 계승한 뒤, 힘써 정치를 하고 사회모순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면 그렇게 빨리 진나라가 와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조정 내부 관료 집단의 단결과 이익을 보호했다면 설사 봉기가 일어났다 해도 이를 막아 낼 충분한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진나라의 토벌군 대장 장한(章邯)이 몇십만의 노역자들을 무장시켰다면 습격해 오는 주장의 농민 봉기군을 대패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북방에서 방어 중이던 진 왕조의 30만 정예병과 대장군 蒙恬이 장한과 병사를 합쳐 공동으로 적에 대응했다면 劉邦이나 項羽의 대군도 함곡관을 넘을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咸陽으로 진격해 진나라를 패망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한 후, 匈奴 대군이 남하에 황하 이남 지역까지 내려 온 사건 후 진나라에는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바로 胡(오랑캐)" 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떠돌았다 한다. 이 때문에 秦始皇은 북방의 匈奴를 정벌하고 萬里長城이라는 성벽을 쌓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결국 진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胡가 아니라, 秦始皇의 막내아들 胡亥라는 예언이었을지 모른다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본다.




나) 陳勝·吳廣의 난




萬里長城과 치도의 건설 등은 통일중국의 유지와 미래를 위한 사업이었지만, 阿房宮과 驪山陵은 확실히 皇帝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소모적인 성격의 대역사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들이 약 10년이라는 단기간에 대규모로 진행됨에 따라 엄청난 국력의 소모가 있었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막대한 비용은 농민에 대한 중과세로 나타났고, 노동력은 의무적으로 강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驪山陵과 阿房宮의 건설에 죄수 70만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토목공사까지 합치면 연인원 300만 정도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당시 진의 호구수는 4백만호, 2천만명 정도였다고 추산되므로, 약 15% 정도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더욱이 노동 가능한 연령층이 동원된 것을 감안하면 1호당 1명 꼴로 징발된 셈이다. 二世皇帝는 이러한 토목공사를 계승하며, 가혹한 법치와 함께 과도한 중세와 징발에 따른 농민의 부담은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진제국에 대한 반항의 기치를 든 것은 陳勝과 吳廣이라는 두 빈농이었다. 二世皇帝 원년(B.C. 209)에 회수에서 가까운 대택향에서 두 사람은 북변을 수비하기 위해 징발된 농민 900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가혹한 진의 통치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된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이다. 두 사람은 진나라의 속임수에 의해 국력이 약회되어 멸망하게 됨으로해서 진나라에 대한 반감을 가장 많이 갖고 있던 초나라 백성들의 호응을 얻어내기 위해 초나라를 확장한다는 의미의 張楚를 국호로 삼아, 사방에 봉기 참여를 호소하였다. 과중한 노역과 가혹한 법치에 시달리고 있던 농민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살해하고 이에 호응하였다. 이 중 강소성 패현에서 병사를 일으킨 劉邦과 강소성 소주 부근 오중에서 거병한 項羽가 가장 유력하였다. 그러나 陳勝과 吳廣의 봉기는 주력군이 진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함으로써 불과 반 년 만에 살해되고 그들이 세웠던 농민정권은 붕괴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봉기는 각자의 반진 봉기를 유발하여, 마침내 B.C. 206년 진은 멸망했다. 또한 단기간이지만 왕조를 수립한 陳勝의 행동은 이후 劉邦에 의한 한 왕조의 성립의 선구가 되었다. 陳勝의 장초정권이 멸망하자 項羽와 劉邦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項羽는 초나라에서 대대로 장군을 지냈던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신장이 8척(184cm)이고 괴력을 지녔다고 한다. 劉邦도 초나라 출신이기는 하지만 농민 출신이었다. 어릴 때 유협이 되어 떠돌아 다니다가 향리에 돌아와 치안을 담당하는 정장을 지냈지만, 후에 군도의 수령이 되었다. 한편 진나라 조정 내에서는 趙高가 스스로 皇帝의 자리에 올라가려고 기도하여 B.C. 207년에 李斯에게 죄목을 덮어씌워 사형시키고 다시 二世皇帝를 망이궁(望夷宮)에 유패시켜 결국 자살하게 하였다. 그러나 趙高가 즉위하는 것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二世의 형인 공자 영(嬰)을 제위에 올리는 것으로 곤경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그런 후에도 趙高는 皇帝의 지위에 미련이 있었기 때문에 각지의 반란군에게 자신을 관중의 王으로 세운다면 공자 영을 살해하겠다고 제안했다. 공자 영은 이를 알고 역으로 趙高를 유인하여 살해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진의 군대가 각지에서 반란군에게 패배하여 진의 멸망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項羽와 劉邦은 楚의 懷王을 맹주로 하고 먼저 진의 수도인 咸陽에 입성하는 사람이 진의 본거지인 관중의 王이 되기로 약속하였다. 項羽는 진의 주력군을 격파하였지만, 劉邦은 秦王室의 내분을 틈타 먼저 咸陽에 도착하였다. 劉邦은 진의 궁전이나 창고에 봉인을 하여 이를 보전하는 데 주력했고, 또한 진의 가혹한 법치에 시달렸던 사람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法三章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法三章이란 진의 법률은 모두 폐지하고,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 상해 입힌 자와 도둑질을 한 자는 각각 정도에 따라 처벌한다는 원칙이자 약속이었다. 劉邦보다 1개월 늦게 함곡관에 도착한 項羽는 4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자웅을 겨루려고 하였다. 열세인 상황에서 劉邦은 項羽의 진영으로 나아가 홍문에서 회견하였다. 이를 역사상 유명한 홍문지회라고 하는데, 項羽는 결국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劉邦을 죽일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이후 咸陽으로 진격하여 秦王朝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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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講座중국사Ⅰ』,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 지식산업사, 1996 『중국역사 上』, 중국사연구실, 신서원, 1993 『秦始皇陵』, 위에 난, 일빛, 1998 『史記本紀』, 司馬遷, 까치, 1994 내용출처 : [기타] http://mahan.wonkwang.ac.kr/nonmun/99/9610.htm







(출처 : '秦始皇陵으로 돌아본 始皇帝의 황권과 그의 역사적 位置'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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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04-06-25
[] 서초패왕 항우가 임명한 18제후왕과 그 영지

패공을 한왕(漢王)에 봉하여 파(巴), 촉(蜀), 한중(漢中)을 다스리게 하고 남정(南鄭)을 도읍으로 삼게 했다. 원래의 관중(關中) 땅은 삼분하여 진나
양승국 06-06-12
[] 항우의 거록지전(鉅鹿之戰)

항우가 경자관군 송의를 죽이자 그 위세는 초나라를 진동시키고 그 이름은 제후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즉시 당양군(當陽君)
양승국 06-06-12
[] 오척도의 건설과정

당몽(唐蒙)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길을 내기 위해 천여 리의 도로를 뚫었다. 이로써 서천지방의 광한(廣漢), 파(巴), 촉
양승국 04-10-18
[] 진시황과 알렉산더 대왕의 가상 전투

출전 : http://kr.blog.yahoo.com/sdwoo65/1062780/645496.html?p=1&m=c&pm=l 진시황의 군단 알렉산더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 보병은
양승국 04-07-14
[] 진시황의 업적과 역사적 의미

진시황릉(秦始皇陵)으로 돌아본 시황제(始皇帝)의 황권과 그의 역사적 위치(位置) 서론(序論) 키가 약 184센티미터나 되고 갑옷을 입은
52.5K 운영자 06-08-24
[] 진시황은 왜 만리장성을 쌓았을까?

진시황은 왜 만리장성을 쌓았을까? [오마이뉴스 2006-03-29 10:42] [오마이뉴스 김대호 기자]
양승국 06-08-10
[] 요서 지역의 진시황의 행궁지

<요서지역 고대문화탐방> ④또 다른 '진시황행궁지'들 [연합뉴스 2006-03-02 18:37]
양승국 06-08-10
[] 진시황의 진황도행궁 복원도

(베이다이허<중국 허베이성>="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해중 암석인 강녀분을 중심에 두고 갈석궁지에서 서쪽으로 2㎞를 간
운영자 08-03-10
[] 이릉(李陵)과 소무(蘇武)

이릉(李陵)과 소무(蘇武) 이릉(李陵)은 농서(隴西) 성기(成紀; 지금의 감숙성 태안현) 사람으로, 부친 이당호(李當戶)는
운영자 0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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