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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16 08:57:433364 
고구려는 어디에 있었나?
양승국

출전 : 남프라이스

작성자 : 대륙조선

요즘 중화인민 공화국에서 고구려사를 그들의 영역으로 하려한다는 말들이 많다. 과연 그들의 역사연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동북3성의 지역의 관할권을 확장하여 정당화하려는 것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더 써야 할 것이다. 과연 고구려 강역은 어디인가? 그리고 진정 고구려역사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역사 가운데 가장 아쉽게 여기고 있는 것이 고구려 땅이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무찌르고, 또 고구려까지 물리침으로써 신라가 통일을 이룩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광활한 대륙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발해의 역사까지도 제대로 관심 밖의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고구려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 고구려의 역사마저 일본인의 연구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1980년대 말부터 북한과 중국 자료의 획득이 훨씬 쉬어졌고, 만주 지역의 답사가 가능해짐에 따라 고구려의 역사를 연구가 상당히 개선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그 동안에 제대로 연구되지 못한 고구려 역사에 관한 인식이 달라져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상당히 크다고도 하였다.

이런 견해차이가 크다고 하더라도 오종철(吳鍾哲)은 "高句麗國의 주된 강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永定河·桑干河 이북과 내몽고자치구 일부, 그리고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 전부와, 한반도 중·북부, 그리고 몽고 동부와 러시아 공화국 극동의 남부 일부까지였다."고 하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서북쪽으로 상당히 확장시키고 있으며, "고구려의 강역 대부분이 현재 중국쪽으로 편입되었다 해서 고구려가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 왕조로 인식되거나, 되어지게 해서는 안된다. 고구려는 단군조선이 경영했던 강역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장수왕 15년에「평양」(안학궁지; 이병도)천도를 결행한 지 159년이 지난 평원왕 28년에「長安城」(지금 평양: 한반도; 이병도)이 그 핵심인 都城이었으며, 역대 왕과 왕비의 능침이 반도내로 몰려 와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우리 민족이 건립한 선행 왕조 중의 하나라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병도의 학설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이론에 지나지 않는, 작은 학자로서의 새로운 시각의 차이일 뿐이다.

특히 노태돈이 주장한 이론에서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하면서도 관심의 대상은 무엇보다도『三國史』「高句麗本紀」의 초반 부분의 기사의 신빙성에 관한 것이며, 고구려의 국가구조와 정치체제, 대외관계의 성격, 6세기 중반 이후의 정세변동 등에 관한 논의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삼국사』자체에 대한 초반 부분의 기사이므로, 고구려라 하여 백제나 신라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태돈(盧泰敦)은『고구려사 연구』(사계절, 1999)에서 이런 지적을 하였다.

"구체적인 문헌비판의 방법은 인접국 사서와의 대비를 통한 검토다. 주로 중국측 사서의 기록을 기준으로 해서 이와의 상충 여부가 판단의 잣대가 되었다. 이에는『삼국사기』가 늦은 시기에 편찬된 것인데 비해 중국측 자료는 당대(當代)의 것이거나 인접 시기에 편찬된 것이라는 점, 자국(自國) 사서일 경우 과장과 때로는 정치적 목적에 따른 날조 등이 행해졌을 수 있는 데 비해 제3국인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객관성을 지닌다는 판단 등이 작용하였다. 그러한 방법과 시각에 입각한 그간의 작업 결과를 보면, 고구려본기의 초기 부분 기사는 대부분 후대에 조작된 것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라 신빙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노태돈 자신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중국측 사서의 기록이 정확한 잣대가 된다는 것이며,『삼국사』는 초기 부분만이 조작된 것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태돈의 이러한 인식은 곧 津田左右吉·池內宏·武田幸南 등이 일부 중국 사서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된 사실 외의 부분은 전설이나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으로 넘겨져 버렸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데 기인한다고 본다. 물론 철저한 문헌비판에 입각한 의고주의적 검토는 합리성 추구라는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노태돈은, 고구려 계루부 왕실의 시조라는 주몽의 출신지에 대한 기록을 세 가지로 말하면서, 하나는 광개토왕비와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등 5세기 초에 쓰여진 고구려 금석문에서 전하는 북부여출자설(北扶餘出自說)과, 다른 하나는『舊三國史記』와『三國史記』및『三國遺事』등에 전하는 동부여출자설(東扶餘出自說)과,『魏書』고구려전과『周書』 및『隋書』고려전,『梁書』고구려전 등에서 전하는 부여출자설(扶餘出自說)이 있다고 했다.

북부여출자설로 볼 때, 4세기 전반의 고구려가 북진하여 녹산(鹿山) 즉 길림(吉林) 지역을 장악하자, 북부여는 서쪽의 농안(農安)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북옥저 방면의 동부여는 본국과 차단되어 독자적 국가를 영위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부여출자설로 볼 때, 금와왕(金蛙王)의 전설은 해부루의 천도설화와 연결되고, 김알지(金閼智) 설화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든, 두만강 유역에 금와왕 전설과 연관성이 있는 설화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미 동부여는 5세기 초에 소멸이 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연구 내용을 보더라도 노태돈의 글이나, 다른 고구려 역사 내지 강역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흑룡강 유역과 난하(난: 삼水변+欒河) 유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과연 그럴까? 하는 것이다. 중국측 사료라는 것을『後漢書』부터『新唐書』까지만 보자.

A. 부여국은 현도의 북쪽 1000리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붙어있고, 북쪽은 약수가 있다. 국토이 넓이는 사방 2000리이며, 본래 예의 땅이다.(『後漢書』卷85「東夷列傳」第75 <夫餘國> "夫餘國 在玄 北千里. 南與高句驢, 東與 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本濊地也.")
A'. 고구려는 요동 동쪽 1000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경계가 붙어있다. 그 나라의 넓이는 사방 2000리이다.(『後漢書』卷85「東夷列傳」第75 <高句驢> "高句驢 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地方二千里")

B. 부여는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에서 1000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붙어있고, 북쪽은 약수가 있다. 국토이 넓이는 사방 2000리이다.(『三國志』卷30「魏書」第30 <烏桓鮮卑東夷列傳 第30> "夫餘在長城之北, 去玄 千里, 南與高句麗, 東與 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二千里")
B'.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000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경계가 붙어있다. 환도의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그 넓이는 사방 2000리이다.(『三國志』卷30「魏書」第30 <烏桓鮮卑東夷列傳> "高句麗 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

C. 백제는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000여 리 밖에 있었다. 그 뒤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진평현이라 한다.(『宋書』第97「列傳」第57 <蠻夷> "百濟國 本高驢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驢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D. 그 나라(고구려)는 漢나라 때에 현도군에 있었다. 요동의 동쪽에 있으며, 요동에서 1000리쯤 떨어져 있다. 漢나라·魏나라 때에는 남쪽으로 조선·예맥, 동쪽으로 옥저, 북쪽으로 부여와 붙어있었다. …고구려의 국토는 사방 약 2000리이다. 나라 가운데 요산이 있고, 요수가 흘러나온다.(『梁書』권54「列傳」第48 <諸夷> "高句驪者 …其國漢之玄 郡也. 在遼東之東, 去遼東千里. 漢魏世,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 句驪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E. (고구려는) 요동에서 남쪽으로 10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 책성, 남쪽으로 소해에 이르고, 북쪽으로 예전의 부여에 이르며, … 나라는 동서의 길이가 2000리, 남북의 길이가 1000여 리나 된다.(『魏書』卷100「列傳」第88 <高句麗> "高句麗者… 云, 遼東南一千餘里, 東至柵城, 南至小海, 北至舊夫餘, …其地東西二千里, 南北一千餘里.")
E'. 물길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옛날의 숙신 지역이다. … 낙양에서 5000리 떨어져 있다.(『魏書』卷100「列傳」第88 <勿吉國> "勿吉國在高句麗北 舊肅愼國也. …去洛五千里.")

F. 그 지역(고구려)은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지나니, 동서의 길이가 2000리요, 남쪽은 백제와 붙어있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남북의 길이가 1000여 리다.(『周書』卷49「列傳」第41 <異域上> "高麗者…其地 東至新羅, 西遼水二千里, 南接百濟, 北隣靺鞨千餘里.")
F'. 백제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에 고구려와 붙어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바다이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 리이다.(『周書』卷49「列傳」第41 <異域上> "百濟者…故其地界 東極新羅, 北接高句麗, 西南俱限大海, 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G. 고구려는 요동 동쪽 1000리 밖에 있다. …나라는 사방 약 2000리이다. 나라 가운데 요산이 있고, 요수가 흘러나온다.(『南史』第79「列傳」第69 <夷貊下>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G'.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000여 리 밖에 있다. 나라의 동쪽은 큰 바다이고, 남과 북은 고구려·백제와 붙어있다.(『南史』第79「列傳」第69 <夷貊下> "新羅…在百濟東南五千餘里. 其地東濱大海, 南北與句麗百濟接.")

H. 그 나라(고구려)는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지나니, 동서의 길이가 2000리요, 남쪽은 백제와 붙어있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남북의 길이가 1000여 리다.(『北史』卷94「列傳」第82 <高句麗> "高句麗…其國 東至新羅, 西度遼二千里, 南接百濟, 北隣靺鞨一千餘里.")
H'. 그 나라(백제)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에 고구려와 붙어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바다이고, 소해의 남쪽에 있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 리이다.(『北史』卷94「列傳」第82 <百濟> "百濟之國…其國東極新羅, 北接高句麗,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 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I.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낙랑군의 옛땅으로 京師에서 동쪽으로 5100리 밖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 말갈에 닿는다. 동서의 길이가 3100리이고 남북의 길이는 2000리이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 <東夷> "高麗者…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東渡海至於新羅, 西北渡遼水至于營州, 南渡海至于百濟, 北至靺鞨.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I'. 백제는 일찍이 마한의 옛 땅으로 경사에서 동쪽으로 6200리,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있다.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越州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 <東夷> "百濟國…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I″ 신라는 본디 변한의 후예이다. 낙랑의 땅에 있으니,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서쪽은 백제와 붙어있고, 북쪽은 고구려와 이웃하였다. 크기는 동서의 길이가 1000리, 남북으로 2000리이다.(『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 <東夷> "新羅國…本弁韓之苗裔, 其國在漢時樂浪之地, 東及南方俱限大海, 西接百濟, 北隣高麗.東西千里. 南北二千里")

J. 고구려는 …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남쪽으로도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며,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닿고, 북쪽으로 말갈과 붙어있다. 그 나라의 도읍지는 평양성인데 장안이라고도 한다. 경사에서 5000리 밖에 있다.(『新唐書』卷220「列傳」第145 <東夷> "高麗…地東跨海距新羅, 南亦跨海距百濟, 西北渡遼水與營州接, 北靺鞨. 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漢樂浪郡也, 去京師五千里.")
J'.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경사에서 동쪽으로 6000리쯤 바닷가 북쪽에 있는데, 서쪽은 越州, 남쪽은 왜국, 북쪽은 고구려와 경계를 이루며, 모두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리고 동쪽은 신라이다. 임금은 동쪽과 서쪽의 두 성에 산다.(『新唐書』卷220「列傳」第145 <東夷> "百濟夫餘別種也. 直京師東六千里而 , 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 王居東西二城.")
J″신라는 변한의 후예이다. 낙랑의 땅에 있으니, 가로(동서)로 1000리, 세로(남북)로 3000리이다. 동쪽은 장인국에 닿고, 동남쪽을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 북쪽은 고구려이다.(『新唐書』卷220「列傳」第145 <東夷> "新羅弁韓苗裔也, 居漢樂浪地, 橫千里. 縱三千里, 東拒長人, 東南日本, 西百濟, 南瀕海, 北高麗.")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의 위치가 결코 한반도 북쪽에 있는 백두산을 중심이 되는 만주벌판에 있었다고 보기에는 아무래도 꺼림칙할 것이다. 여기서 거의 공통적으로 고구려의 크기가 사방 2000리라는 것이며, 요동 동쪽 1000리라는 것이다.

먼저 A『後漢書』(25∼219년간)로써는 요동이 기점이 되어 그 남쪽은 조선과 예맥이 있었고, 동쪽에 옥저, 북쪽에 부여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쪽의 朝鮮은 어떤 의미일까? 기점이 되는 요동은 과연 어디일까? 나라의 크기가 사방 2000리라면, 750㎞(1尺을 20.81㎝로 계산)이다. 요동에서 1000리라면, 375㎞이다. 이 요동이 요수(遼水; 遼河)를 지금의 요동반도가 있는 동경 123°선상으로 본다면, 거기서 동쪽으로 백두산 서쪽의 중강진(中江鎭)쯤이 1000리가 된다. 그러면 거기서 동쪽으로 2000리까지가 고구려의 강역이라면, 동경 135°선까지로 루드나야프리스탄(Rudnaya Pristan)이 옥저와의 경계가 된다는 것이며, 그 옥저는 결국 동해 바다 가운데 있게 되는 웃지 못할 그림이 되어버린다. 그런데도 옥저가 있는 곳을 하바로프스크(Khabarovsk) 동쪽으로 시호테알린산맥(Sikhote Alin Mts.)이 있는 곳으로 붙여 놓거나, 한반도의 원산(元山)이 있는 곳으로 붙여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사료의 고구려 강역이 되는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지금의 한반도 북쪽에 설정한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보다 훨씬 서쪽으로 옮겨져야 한다.『삼국유사』에는 소동파(蘇東坡: 蘇軾: 1036∼1101)가 지은『지장도(指掌圖)』에 "진한(辰韓)의 북쪽에 남흑수(南黑水)·북흑수(北黑水)가 있다. …흑수(黑水)가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고, 옥저(沃沮)는 장성(長城)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 장성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이 만리장성의 남쪽에 옥저가 있었다는 것을 한반도의 동북쪽 바닷가로 옮겨놓아서는 안된다. 이곳은 만리장성의 서쪽 끄트머리쯤 되는 감숙성 장액현(張掖縣)의 기련산(祁連山)·랑남산(廊南山)에서 흘러서 장액현을 휘돌아 흐르는 장액하(張掖河)가 곧 흑수(黑水)요, 약수(弱水)가 흐르는 지역이다.

사료 B『三國志』(220∼265년간)에 부여도, 고구려도 그 크기가 사방 2000리라고 하였다. 부여는 현도에서 1000리쯤 되고, 그 남쪽에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에는 선비가 있으며, 북쪽은 약수가 있다고 했다. 통상 현도가 요동이 있는 근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므로, 그 동쪽 1000리에 있다는 부여는 A의 고구려의 위치와 중복되므로, 부여의 남쪽에 고구려가 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사료에서 부여와 고구려의 기록에서 나타낸 나라들의 상대적 위치가 매우 다르다.

『三國志』로 보면, 고구려의 북쪽에 부여가 있고, 그 북쪽에 약수가 있다는 것이다. 약수는『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약수(弱水)는 장액군(張掖郡) 산단현(刪丹縣)에 있다."고 했고, 또 "약수는 서해(西海)의 산에서 흐르는데, 서해는 지금의 서녕위(西寧衛) 성 서쪽 300여 리에 있다. … 이것은 부여·읍루의 북쪽 경계를 거쳐서 동해(東海)로 들어간다."고 했다. 장액군은 지금의 중국 대륙의 서쪽인 감숙성에 있다. 바로 그곳에 약수가 있고, 거기에 부여니 고구려니 하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동쪽으로 1000리라면, 녕하자치구가 있는 오르도스(Ordos; 顎爾多斯) 서쪽의 은천(銀川)과 란주(蘭州)가 있는 황하유역이 되며, 그 동쪽에 고구려 땅이 2000리가 된다는 것이며, 그 동쪽의 하북성 일대에 옥저, 부여의 동쪽이고, 고구려의 북쪽에 읍루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읍루는 곧 오르도스의 동북쪽이 되며, 만리장성 북쪽 화림(和林)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여가 長城, 즉 萬里長城 북쪽에 있었다는 말은 곧 감숙성 장액군 북쪽의 가유관(嘉 關)·옥문관(玉門關)·돈황(敦煌)의 북쪽이고, 고비사막(Gobi Desert)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사료 C『宋書』(487∼488년간)에 요동의 동쪽 1000여 리 밖에 고구려·백제가 있었다. 그 뒤에 고구려는 요동(遼東)을, 백제가 요서(遼西)를 경략하여, 진평군·진평현에서 통치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평(晉平)"이라는 말은 晉나라의 터전을 말하는 것이므로, 산서성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 이 요서라는 것은 1911년 손문(孫文) 이후의 역사가들이 말한 요동반도 북쪽의 요양(遼陽)·심양(瀋陽)이 있는 요하가 기준이 되는 서쪽을 말한 것이며, 고구려가 차지한 요동이라는 것은 1911년 이전의 역사에서는 녕하자치구가 있는 은천·난주가 있는 남북으로 흐르는 황하의 줄기가 기준이 되는 동쪽인 녕하자치구와 섬서성 지역을 말한다.

사료 D『梁書』(629∼636년간)는 고구려가 漢나라(BC. 206∼AD. 220) 때 현도군에서 魏나라(220∼265) 때 요동의 동쪽으로 옮겨와 요동에서 1000리쯤 된다고 했으며, 그 나라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이 요수(遼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220년 이전에는 요수(遼水)의 훨씬 서쪽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遼水는 遼河이다. 遼水와 遼山을 중심으로 遼州(요주)·遼縣(요현)·遼山縣(요산현)·遼東郡(요동군) 등의 이름이 생긴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보면, 遼州가 산서 석양현(昔陽縣)이라 했는데, 遼山縣·箕州·儀州·樂平郡·南遼州·遼東郡·遼陽縣이라고도 불렸으며, 遼를 료(僚: 人변 대신 車)라고도 하므로, 료(僚: 人변 대신 車)水·료(僚: 人변 대신 車)河·료(僚: 人변 대신 車)陽이라고도 하며, 료(僚: 人변 대신 삼水변)라고도 하므로, 료(僚: 人변 대신 삼水변)水·료(僚: 人변 대신 삼水변)河라고도 하며, 료(僚: 人변 대신 실絲변)라고도 하므로, 료(僚: 人변 대신 실絲변)水·료(僚: 人변 대신 실絲변)縣이라고도 한다. 이런 이름들은 모두 산서성에 있다. 물론 하북에도, 강서에도, 열하에도 이런 이름을 붙여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 본디 뿌리는 이보다도 훨씬 서쪽 지역 - 적어도 녕하자치구 서쪽 황하이고, 이보다 서쪽인 약수(弱水)가 요수(遼水)임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요동은 지금의 요동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료 E『魏書』(386∼550년간)에서는 고구려가 요동에서 남쪽으로 1000여 리이고, 동쪽으로 책성(柵城), 남쪽으로 소해(小海)에 이르고, 북쪽으로 예전의 부여라고 했으며, 나라의 길이가 남북으로 1000여 리나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북쪽 숙신 지역에 물길(勿吉)이 있는데, 낙양에서 5000리라고 하였다. 다른 사료들에서는 고구려가 요동에서 동쪽에 있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남쪽이라고 한 것이 특징이며, 이로 보아 고구려가 상당히 남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쪽의 책성을 요즘의 훈춘(琿春) 일대인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라고 하였지만, 고구려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었기 때문에 결코 한반도 북부의 훈춘 일대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북쪽에 부여이고, 남쪽에 소해라면, 그 소해는 섬서(陝西) 남쪽, 사천(四川) 지역의 대강(大江: 長江·揚子江)의 줄기인 어느 샛강일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북쪽이고 낙양에서 5000리쯤 되는 곳은 몽골고원(Mongol Plateau)의 알타이(Altay)가 있는 지역이 물길(勿吉: 靺鞨)이 있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료 F『周書』(557∼581년간) 고구려 동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에 요수가 있으며, 남쪽은 백제, 북쪽은 말갈과 붙어있다고 하였다. 이 말은 사료 D에서 설명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백제가 동서로 450리, 남북이 900여 리라고 하여, 그 크기가 한반도의 상황에 맞도록 짜여져 있다.

그런데 사료 G『南史』(420∼589년간)에 신라가 백제의 동남쪽 5000여 리 밖에 있다고 했으니, 아무리 따져봐도 그 거리 5000리로써 결코 한반도에다 맞출 수는 없다. 더구나 남쪽과 북쪽에 고구려·백제와 붙어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오히려 신라의 남쪽에 고구려가 있었다는 말이 되기도 하며, 북쪽의 백제와의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지금의 중국 대륙일 수밖에 없다.

사료 H『北史』(386∼618년간)는 사료 F와 다르지 않다. 다만 백제는 동쪽에 신라이고, 북쪽에 고구려와 붙어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바다인데, 소해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다. 이 소해는 물론 사료 E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백제의 크기는 사료 F와 같은 설명이다.

사료 I『舊唐書』(618∼907년간)에서는 고구려가 낙랑군의 옛땅으로 京師에서 동쪽으로 5100리 밖에 있는데, 크기가 동서로 3100리이고, 남북으로 2000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장안에서 동쪽으로 5100리라고 한 것이 마치 한반도 북부가 낙랑군이고, 고구려라는 것으로 심어놓은 것 같다. 그런데 백제가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있다는 말은 한반도의 여건으로서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며, 동북쪽에 신라가 있다는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다만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越州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른다는 말은 한반도의 여건에 매우 근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어서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고 한 말은 그 바다를 한강(漢江)으로 본다면 모르되, 그것을 바다라고도 할 수 없고, 게다가 신라의 크기는 동서로 1000리, 남북으로 2000리라고 하였으므로, 그것은 결국 지금의 중국 대륙을 말한 것이다.

사료 J『新唐書』는 앞에서 설명한 사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특이한 것은 고구려의 도읍지가 평양성인데 장안(長安)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의 동쪽은 신라이고, 신라의 동쪽은 장인국(長人國)에 닿는다고 했으니, 이 또한 한반도의 여건에 전혀 맞지 않는다.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신라의 동쪽은 울릉도 독도가 있는 파도 이는 동해 바다이다. 아마도 이 장인국이라는 것이 한반도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사료를 검증해 보았을 때, 결코 고구려가 한반도에 있었다거나, 그곳을 중심으로 만주벌판이라는 곳에 있었다고 할 수 없다. 그보다 훨씬 서쪽으로 5000리나 6200리 서쪽으로 옮긴 곳이라야 설명이 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구려의 도읍이 평양이고, 그곳이 장안이라는 것이다. 그곳이 곧 고구려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태돈이 말하는 고구려의 강역(疆域)이나, 오종철(吳鍾哲)의『다시찾은 고구려정사(正史)』든, 구자일(具滋一)의『고구려발해지리사』든 이들 또한 약간의 역사전개의 발전은 있었을지라도 고구려의 강역을 비정(比定)에는 옳다고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강역의 뿌리에 접근하기에는 아직도 멀다는 것이며, 그들이 연구하여 제시한 고구려의 지도는 마치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에서, 강역의 문제만큼은,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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