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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와 고구려
양승국

삼국지와 고구려

나관중의 삼국지에는 고구려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고구려는 삼국지 후반부의 주요 인물인 관구검(母丘儉)의 업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관구검은 지금의 산서성 문희현(聞喜縣)인 하동(河東) 사람으로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양주도독(揚州都督), 진동장군(鎭東將軍) 등을 지낸 사람이다. 관구검은 방형진법(方形陣法)의 대가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성품이 강직한 위나라의 대표적인 충신 중의 한 사람으로 후에 사마의(司馬懿)의 아들 사마사(司馬師)가 위나라 황제 조방(曹芳)을 폐위시키자 사마사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기도 한 사람이다.


삼국지 내용 중에 가려진 고구려는 크게 두 가지 사건을 통하여 한족의 역사와 깊이 관련을 맺게 된다. 하나는 관구검이 사마의를 도와서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할 때 이들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요동 지역을 정벌했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동천왕이 통치하는 고구려가 요동을 사이에 두고 관구검과 왕기가 이끄는 위나라와 결전을 벌이는 사건이다. 물론 이전에도 한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기원 172년), 고구려의 노장 명림답부(明臨答夫)는 좌원(坐原)에서 견벽청야(堅壁淸野)의 지구전으로 한군을 궤멸시켰고 고국천왕은 한군을 포위하여 섬멸하기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한족들에게는 고구려가 매우 성가시고 때로는 무서운 국가였음에 틀림없다. 고구려의 강건한 기상이나 전투력은 물론이고 지형적으로 항상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을 약탈할 수밖에 없는 경제 구조도 한족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고구려인들은 결혼과 더불어 수의(壽衣)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점은 한족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고구려인들이 결혼과 함께 수의를 만든 것은 언제라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대체로 고대인들은 명예롭게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고구려 2대 유리왕의 태자였던 해명은 인접한 나라와의 국제관계 속에서 강경책을 고수하다 부왕에게 오해를 사서 자결할 것을 명령받자 땅에 창을 꽂아 놓고 말을 달려와 창에 찔려 장렬하게 죽은 일도 있었다. 고구려의 국가 이데올로기는 천손(天孫) 사상이다. 즉 하늘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 역시 유목민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주몽이 하늘의 자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고구려의 벽화에는 이 같은 천손사상을 대변하는 해와 달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이 사상이 주변국에 위험한 이유는 주변의 다른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 또한 한족에는 성가신 일이었다.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에서 한족들과 패권을 겨룰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고구려인이 가진 강인한 상무정신과 군사기술의 발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마치 현대의 자가용처럼 수레가 집집마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레는 폭이 좁고 가벼운데 이것은 수레 주위에 쇠로 만든 테를 둘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수레는 강하면서도 가벼운 특징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전쟁에 사용될 경우는 가공할 전투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안악 3호 고분을 보면 고구려 군대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고분은 대력 375년 경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철갑기병, 경기병, 창수, 환도수(還刀手), 부월수(斧鉞手) 등의 모습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초급 교육기관인 경당에서부터 신분에 관계없이 활쏘기 교육을 시켰다. 특히 고구려는 말 위에서 쏘는 각궁이 있었는데 이것은 활 길이가 짧아 다루기가 쉽고 화살도 멀리 날아가는 것이 특징이었다고 한다. 나아가 고구려에는 현대의 태껸과 유사한 각종 신체단련 무술들이 발달하였다. 고구려인들이 남긴 수많은 벽화를 통해 보면 고구려는 쌀과 조가 주식이었으며 육식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고구려는 전형적인 병영국가의 모습을 띄고 있다. 따라서 한족들에게는 고구려는 매우 위험한 국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삼국지 시대에도 이와 똑같은 형태는 아니었겠지만 그러나 거의 유사한 형태의 병영국가 체제였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1. 고구려와 위나라 연합군의 공손씨 토벌전
- 서기 238년의 제1차 요동전쟁과 고구려-위의 관계 -

서기 236년 위나라 명제(明帝) 조예(曹睿)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요동 남부 지역에 보내 주둔시켜 요동지방의 공손연과 고구려의 세력을 견제하게 했다.


조조(曹操)가 원소(袁紹)의 아들 원상(袁尙)을 치기 위해 요동으로 진격해 오자 요동태수 공손강은 원상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바쳤다. 조조는 공손강에게 양평후(襄平侯)라는 작위를 내렸다. 공손강에는 황(晃)과 연(淵)이라는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러나 공손강이 죽었을 때 이들의 나이가 모두 어렸기 때문에 공손강의 동생 공손공(公孫恭)이 뒤를 잇게 되었다. 후에 성인이 된 공손연은 숙부인 공손공의 직위를 빼앗아 요동의 주인이 되자 위나라 황제 조예는 공손연을 요동태수로 임명했다. 이어서 오나라의 손권도 많은 재물을 들려 사신을 보내 공손연을 연왕(燕王)에 봉했지만, 공손연은 위나라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오나라 사신들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바쳤다. 이에 위나라 황제 조예는 공손연을 대사마(大司馬), 낙랑공(樂浪公)에 봉했다.

위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공손씨가 다스리는 요동 지역을 포기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통제할 수도 없는 지역이었다. 왜냐하면 낙양과 요동의 거리가 너무 멀고, 또한 요동 땅은 공손씨가 이미 3대를 이어오며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천자의 영역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식적으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요동 땅은 많은 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동북대평원이나 한반도 지역과 중국의 중간 지점에 있는 곳으로 만약 공손연이 이들을 충동질하여 중원을 유린할 가능성도 있었고 한반도에서 오는 많은 교역물들을 중간에서 임의로 가로채거나 농간을 부려서 비싼 값에 중국으로 돌어 오게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고구려의 입장에서도 공손씨가 통치하는 연나라는 심각한 문젯거리였다. 무엇보다도 정복전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후방이 튼튼해야 하는데 연나라가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중원으로의 진출이나 북방지역의 공략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만약 고구려가 연나라만 정복할 수 있다면 그 여세를 몰아서 위나라를 공격하고 서안평(西安平 : 지금의 신의주 압록강 맞은 편의 단동)을 점령하여 한반도로 들어가는 교두보를 확보하면 경제적으로 큰 효과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한반도로 들어가는 교두보가 결국 상업과 농업 지역을 차지할 수 있는 발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구려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전략이 성공할 경우 고구려는 유목생활과 농경생활을 물론 중개무역의 이익으로 중국과 같은 거대 국가를 말들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손연의 세력이 커지면서 스스로 연왕이라 칭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이 사실을 유주자사 관구검이 즉각 위나라 조정에 통고했다. 관구검의 보고에 따르면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왕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궁전을 다시 짓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북쪽지방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했다. 위나라 황제 조예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군사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서기 237년 공손연이 위나라의 유주자사 경내로 쳐들어오자 관구검은 출동하여 요수(遼水)에 이르렀으나 마침 시작된 장마로 강물이 불어 부득이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공손연은 더욱 기세가 등등하게 되어 공식적으로 연왕이라고 칭하고 그에 따르는 관직을 설치했으며 연호를 사용하여 소한(紹漢) 원년이라고 칭했다. 위나라 조정은 청주(靑州), 유주(幽州), 기주(冀州), 연주(兗州) 등 네 개의 주에서 군선을 건조하여 고구려와 협공작전을 펼쳐 공손연의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서기 238년 봄, 고구려의 동천왕은 주부(主簿)인 대가(大加)의 보필을 받아 위나라의 요동 정벌군에 합류하였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볼 때 위나라도 잠정적으로 적국임으로 고구려는 위군(魏軍)을 전면적으로 도와주기보다는 위나라의 전력도 살펴볼 겸 1-2천여 명의 기병을 파견했다. 사마의와 대가의 연합군은 공손연 군대를 격파하고 공손연의 남은 가족과 고위직에 있었던 장수와 관리들을 색출하여 그 중 70여 명은 참수형에 처하여 요동정벌을 마무리했다. 이로써 1차 요동전쟁은 끈이 나게 되었다.

제1차 요동전쟁은 세 가지 면에서 고구려의 발전과 대외적인 팽창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첫째, 요동지역에서 공손연을 몰아냄으로써 이 지역 사정에 밝은 1차적인 주적(主敵) 공손씨의 세력이 제거되었다는 점, 둘째, 위나라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는 점, 셋째 공손연의 몰락으로 요동지역은 힘의 진공상태가 되었고 이것을 유리하게 이용하면 고구려의 장기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 점등이다.

2. 고구려와 위나라의 대결
- 서기 245년 고구려와 위나라의 제2차 요동전쟁-

요동지역의 주도권을 두고 고구려와 위나라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여 전쟁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1차 요동전쟁 당시 고구려와 위나라가 서로 협력하여 요동의 공손연을 멸망시킨 완충지대였던 요동에 위군이 주둔하면서 서쪽으로 세력을 넓히려던 고구려와 사사건건 충돌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동천왕은 백두산 주변에 있었던 많은 부족국가나 읍락국가들을 정벌하여 복속시키고 북으로 부여뿐만 아니라 남동쪽으로 동옥저까지 병합하는 한편 전국적으로 방을 내려 무예에 능한 청장년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초기에 환도성(桓都城)에 도읍을 정한 것은 넓은 강과 높은 산을 이용하여 수도의 방어히기 위해서 였으나 장기적으로는 국가벌전에 방해요소이기도 했다. 동천왕은 이같은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먼저 요동의 넓은 들판을 정복,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오가는 교통로를 장악함으로써 국가 수입원을 증대시키는 방안이나 요동 땅의 곡장지대를 확보하는 전략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서안평(西安平)을 장악해야 했다. 동천왕은 즉위 후 적극적으로 강공책을 채택하여 무예가 출중한 사람들을 대거 모집했다. 이 당시 발탁된 사람 중 하나가 동부(東部) 고원지대 출신의 유유(紐由)였다.

서기 242년 이후 고구려는 서안평까지 나가 위나라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위나라는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고구려의 침공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관구검은 사마의(司馬懿)와 함께 요동에서 공손연을 정벌 한 후 그 공로로 안읍후(安邑侯)로 봉해져 3,900호의 식읍을 갖고 있었다.

서기 244년 고구려 원정길에 나선 관구검은 자신의 장기인 방형진법과 매복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넓은 평원에서 전투를 치러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환도성 주변의 산악지대에서는 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당시 고구려는 위나라의 공격에 대해 크게 위협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고구려는 이미 70여 년 전 한나라의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 노장 명림답부가 좌원에서 견벽청야의 지구전으로 한나라군을 궤멸시켰고, 다시 50여 년 전에는 고국천왕이 쳐들어온 한나라군을 맞이하여 격파한 적이 있었음으로 해서 위나라군도 고구려의 서안평 공격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해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전에서 고구려군은 위군을 맞이하여 계속적으로 승리를 했기 때문에 동천왕은 적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서기 245년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 관구검은 고구려군을넓은 평원으로 유인하여 섬멸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전략은 주효하여 관구검의 유인작전에 떨어진 고구려군은 위나라군에 의해 대패하고 왕족들을 포함한 고구려의 패잔병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장백산맥을 넘어 남쪽의 옥저로 피신했다. 관구검은 환도성을 점령한 다음 다시 군사를 이끌고 요동의 양평(襄平 ;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으로 돌아갔다.

서기 246년 봄,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에게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그 잔존세력을 섬멸하라고 명했다. 이때 고구려의 결사대를 이끌었던 사람은 밀우(密友)와 유옥구(劉屋句)였다. 그들은 유격전으로 위나라군의 침공을 저지하고 유유는 적진에 침투하여 적장을 암살함으로써 위나라군을 격퇴시켰다. 이로써 전쟁의 양상은 급전하여 고구려군은 위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이윽고 환도성을 탈환할 수 있었다.

환도성으로 입성한 동천왕은 유유와 유유의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환도성으로 운구해 와 빈소를 차리고 국상(國喪)에 준하는 예우로 장례를 치렀다. 동천왕은 유유를 1등공신과 구사자(九使者)에 추중하였고 그의 가족들 환도성으로 불러와 살게 하고 유유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에 임명했다. 이로써 제2차 요동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2차 요동전쟁이 위나라와 고구려에 준 영향은 심대하였다. 위나라는 이후 고구려 정벌을 자제하게 되어 고구려는 요동 전역에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지만 고구려로서도 타격을 받아 대외팽창 정책이 당분간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이 전쟁의 결과 중국은 서기 589년 수문제가 근 400년 동안의 분열시대를 끝내고 다시 통일할 때까지 요동에 발을 붙이지 못했고 그 사이 고구려는 지금의 만주지방 전역을 영토로 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해 있었고 이어서 두 대제국은 건곤일척의 대전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출전 : 김영사간 <삼국지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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