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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0 22:00:455556 
삼국지로 통해 본 고구려 연대기(1)-고국천왕
양승국

고국천왕 (재위 기원 179 - 197년) 고구려 제 9대 왕으로 신대왕의 둘째 아들이고 산상왕의 부왕이다.

삼국지로 통해 본 고구려 연대기


삼국지로 통해 본 고구려 연대기

기원

중국

고구려

재위

대 사 표

재위

대 사 표

184

영제

17년

4월 장각(張角)이 蒼天已死(창천이사), 黃天當立(황천당립)이라는 도참설을 이용해 황건적의 란을 일으켰다. 10월 황보숭(皇甫嵩)과 노식(盧植), 주준(朱儁)등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장각의 란이 진압되었다.

고국천왕 5년

고국천왕은 신대왕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남무(南武)이고 태어난 해는 미상이다. 기원 179년에 고구려 9대 왕에 올라 197년에 사망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 키가 9척에 우람한 풍채와 힘은 능히 큰솥을 들어올릴 수 있는 장사였으며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관용과 예리함을 겸비했다”라고 했다.

185

18년

황건적의 란을 진압한 공로로 장양(張讓) 등 13명의 환관을 열후에 봉했다. 동탁(董卓)이 서량의 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으나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6

186

19년

강하의 조자(趙慈)가 반하여 남양태수 진힐(秦詰)을 살해하고 본거지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7

한의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입하자 왕은 왕자 계수를 보내어 막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에 왕이 친히 정예병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좌원(坐原)에서 싸워 한군(漢軍)을 대파했다. 왕이 참수하여 쌓아논 적군의 머리가 산처럼 많았다. 이후로 오랫동안 중국이 감히 고구려를 넘보지 못했다.

기원

중국

고구려

재위

대 사 표

재위왕

대 사 표

187

영제

20년

1.장사(長沙) 사람 구성(區星)이 10여 만의 군를 모아 반기를 들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했다. 이에 장사태수로 임명된 손견(孫堅)이 구성을 공격하여 죽이고 반란을 진압했다.

2. 중산상(中山相) 장순(張純), 태산태수 장거(張擧), 오환대인(烏桓大人) 구력거(丘力居)가 연합하여 란을 일으켜 계성(薊城)을 공략하고 지금의 하북성 천안현(遷安縣) 동북의 비여(肥如)에 주둔했다.

고국천왕

8년

188

21년

기도위(騎都尉) 공손찬(公孫瓚)이 장순(張純) 등의 반군을 파하고 그 뒤를 추격하여 요서(遼西)의 관자성(管子城)까지 추격했으나 구력거(丘力居)가 거느린 오환(烏桓) 군에게 포위 당해 식량이 떨어지자 휘하의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고국천왕

9년

기원

중국

고구려

재위

대 사 표

재위왕

대 사 표

189

영제

(靈帝)

22년

소제

즉위

1.영제(靈帝)가 죽고 그 아들 소제(少帝)가 14살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하태후(何太后)가 섭정하고 광희(光憙)로 개원했다. 하태후의 동생 하진(何津)을 대장군 겸 참록상서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2. 원소가 하진에게 환관을 죽이라고 권하자 하진은 건석(蹇碩)만을 죽였다. 이에 원소가 다시 하진에게 권하여 중상시 이하의 의 환관을 몰아내고 모두 문관들로 바꾸라고 권했으나 태후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원소가 지방 군벌의 군사들을 불러들여 태후에게 위협을 가하라고 권하자 하진의 그 말을 따랐다. 주부 진림이 도성의 지방 군벌의 군사들을 불러 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간했으나 하진은 듣지 않았다. 하진은 서량자사 동탁, 동군태수 교모(橋瑁), 무맹도위(武猛都尉) 정원(丁原) 등에게 소집을 명했다.

고국천왕

10

기원

중국

고구려

재위

대 사 표

재위왕

대 사 표

189

영제

22년

3. 8월에 하진이 하태후의 처소인 장락궁으로 들어갔다가 중상시 장양(張讓), 단규(段珪) 등에게 살해되었다. 호분중랑(虎賁中郞) 원술(袁術)이 궁문에 불을 지르고 환관들을 공격했다. 사례교위 원소가 궁안으로 들어가 조충(趙忠) 등의 환관을 살해하자 장양과 단규가 소제와 진류왕을 인질로 삼아 도성 밖으로 달아났다. 노식 등이 그 뒤를 추격하여 장양 등의 환관들이 궁지에 몰리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동탁의 군사들이 당도하여 소제 일행을 영접하여 환궁했다. 동탁이 여포를 사주하여 집금오인 정원을 살해하게 했다. 정원(丁原)은 여포가 의부로 모신 결의부자 지간이다.

4. 9월에 동탁이 소제를 폐하여 홍농왕으로 하고 진류왕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이가 헌제(獻帝)이다.

고국천왕

10

190

헌제

원년

초평

원년

1. 관동의 여러 군벌들이 동탁 토벌군을 일으키고 그 대장에 원소를 추대했다.

2. 동탁이 헌제를 위협하여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200만의 백성들을 새로운 도성으로 이주시켰다.

11

중위대부이며 패자(沛者)인 어비류(於畀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 권세를 부렸으며 그 자제들은 교만하고 사치하여 남의 아녀자와 전택을 강탈함으로 나라 사람들의 원한을 샀다

기원

중국

고구려

재위

대 사 표

재위왕

대 사 표

190

헌제

원년

3. 장사태수 손견이 기병하여 북상하여 원술과 군사를 합했다. 원술은 손견의 도움을 받아 남양을 점령하여 그곳은 근거지로 했다.

4. 황제가 조칙을 내려 유표(劉表)를 형주자사로 임명했다. 유표는형주의 치소를 양양에 두었다.

5. 동탁이 공손탁(公孫度)을 요동태수에 봉했다. 공손탁은 그 치소를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인 양평(襄平)에 두었다.

고국천왕

11

왕이 듣고 노하여 그들을 죽이려고 하자 좌가려 등은 네 연나(椽那)와 함께 모반하였다.

191

2년

1. 손견이 지금의 하남성 임여현(臨汝縣) 서쩍의 양현(梁縣)에서 싸워 동탁의 휘하의 장수 화웅의 머리를 배고 동탁, 여포, 의 군사를 파하고 낙양에 들어갔다. 동탁이 장안으로 돌아가자 손견도 낙양에서 나와 노산(魯山)으로 철수했다.

2. 원소가 부장 국의를 시켜 한복이 다스리던 기주를 탈취했다.

3. 공손찬이 청주의 황건적 30만을 패주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원소를 공격하자 기주가 진동했다. 유비는 공손찬이 황건적을 토벌할 때 관우, 장비, 조운과 함께 도웠다. 공손찬은 유비를 평원군의 군승으로 삼았다.

고국천왕

12

1. 4월에 좌가려 등의 반군이 무리를 지어 왕도를 공격해 옴으로 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군을 토평했다.

2. 좌가려의 모반은 모두 정치가 잘못 시행한 왕의 잘못이라고 하고 왕이 속한 계루부를 제외한 4부에 명하여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3. 이에 4부의 수장들은 모두 동부(東部)에 속한 안류(晏留)라는 사람을 천거했다. 왕이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고 하자 그는 서압록곡에 사는 을파소를 자기 대신 천거했다.

4. 왕이 안류의 말을 쫓아 을파소를 불러 국상에 임명하고 고구려의 정사를 맡겼다.

기원

중국

고구려

재위

대 사 표

재위왕

대 사 표

191

4. 원술이 점령한 남양에서 가혹한 세금을 징수하자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원술이 손견으로 하여금 형주의 유표를 공격하여 양양성을 포위했다. 손견은 남양으로 돌아가다 흐르던 화살에 맞아 죽었다.

고국천왕

12

5. 을파소(乙巴素)가 국상이 되어 고구려가 크게 다스려지자 왕은 안류를 불러 포상하고 대사자(大使者)에 임명했다.

192

헌제

3년

1. 원소가 공손찬(公孫瓚)을 지금의 하북성 위현(威縣) 동쪽의 계교(界橋)에서 파하고 하북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2. 이 해 4월에 사도 왕윤이 여포를 시켜 동탁을 살해했다. 동탁과 여포는 결의부자를 행한 사이였다.

3. 청주에서 황건적이 창궐하여 연주자사부를 공격했다. 연주자사 유대가 싸움 중에 죽었다. 이에 조조가 출병하여 황건적을 파하고 패잔병 중 정예를 선발하여 청주병이라 칭했다.

4. 동탁의 부장 이각(李傕)과 곽사(郭汜)가 장안으로 진입하여 사도 왕윤을 살해하고 정사를 독단했다.

5. 공손찬이 원소를 공격했으나 다시 패하고 유주로 퇴각했다.

주)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고국천왕이 을파소(乙巴素)를 기용한 것은 중국 은왕조(殷王朝)의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유비(劉備)가 제갈공명을, 전진(前秦)을 세운 부견(符堅)이 왕맹(王猛)을 얻은 것과 같다고 평했다.

기원

중국

고구려

연호

대 사 표

재위왕

대 사 표

193

헌제

4년

1. 원술이 유표에게 쫓기다가 다시 조조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남양을 내주고 남하하여 수춘으로 들어갔다.

2, 원소와 공손찬이 연합하여 청주자사 전해(田楷)를 2년에 걸쳐 공격하여 청주를 차지했다.

3. 서주자사 도겸이 서주목이 되었다. 도겸의 별장이 조조의 부친 조숭을 살해했다.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여 사수(泗水) 강안에 살던 10여 만의 백성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3개 현의 닭과 개를 모조리 도살했다.

고국천왕

14

이 무렵 고구려와 접경 지역인 요동에는 공손탁, 유주에는 공손찬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고구려는 공손씨 세력과 대치하게 되었다. 고구려 국내에서는 고국천왕의 형 되는 발기가 불만을 품고 공손탁에 의지하여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94

헌제

5년

흥평 원년

1. 유비가 조조의 공격을 받고 있던 도겸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와 지금의 강소성 패현에 주둔했다.

2. 도겸이 조정에 표장을 올려 유비가 예주자사가 되게 했다. 양식이 떨어진 조조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4. 도겸이 죽으면서 서주자사의 직을 유비에게 전했다.

3. 이해에 몇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아 큰 가뭄이 들었다. 장안의 곡식가는 한 가마에 50만 전에 달했고 사람들은 서로 잡아 먹었따.

15

7월 여름에 서리가 내려 나라에 기근이 들자 왕은 부고를 열어 홀아비, 과부, 고아, 병약자 등을 구휼하고 다시 백성들에게는 매년 3월부터 7월까지는 관곡을 내어 빌려주고 추수가 끝난 10월에 갚도록 하는 진대법을 시행하게 했다.


기원

중국

고구려

재위

대 사 표

재위왕

대 사 표

195

헌제

6년

1. 이각과 곽사가 불화하여 서로 싸우다가 이각은 헌제를, 곽사는 조정의 공경대부들을 인질로 잡아 대치하는 바람에 장안의 궁전이나, 관사, 민가 등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2. 조조가 여포를 패퇴시키고 정도를 점령했다. 여포는 달아나 유비에게 몸을 의탁했다.

3. 헌제가 7월에 장안에서 탈출하여 10월에 화음(華陰) 이르고 12월에 지금의 하남성 영보(靈寶)인 홍농(弘農)에 당도하자 이각과 곽사가 그 뒤를 추격해 왔다. 모사 저수(沮授)가 원소에게 헌제를 영접하라고 권했지만 듣지 않았다.

4. 손책이 원술을 떠나 역양(歷陽)에서 장강을 도하하여 양주자사 유요를 습격했다. 손씨들은 이로써 강동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고국천왕

16

발기가 일으킨 반란의 발단은 고국천왕의 부왕인 신대왕이 장자인 발기를 대신 둘째인 남무(男武)를 태자로 세움으로서 시작된 것이다.


기원

중국

고구려

재위

대 사 표

재위왕

대 사 표

196

헌제

7년

건안

원년

1. 원술과 유비가 서주를 놓고 싸웠다. 여포가 원술과 연합하여 하비를 취했다. 이로써 서주는 여포의 차지가 되었으나 원술과 사이가 벌어져 여포는 유비를 다시 불러들여 소패에 주둔하도록 했다.

2. 7월에 헌제가 천신만고 끝에 낙양에 입성했다. 조조가 8월에 낙양에 입성하자 사례교위의 직을 내렸다. 조조는 허창으로 천도하고 헌제를 옮겨 살게 했다.

3. 손책이 절강(浙江)을 건너 회계(會稽)로 들어갔다.

4. 여포의 공격을 받은 유비는 소패(小沛)에서 도망쳐 조조에게 갔다. 조조는 유비를 예주목에 임명했다.

5. 장제가 군사를 이끌고 형주를 공격하다가 유시를 맏고 죽었다. 장제의 종족 장수가 그 군사를 거두어 완(宛)에 주둔했다.

고국천왕

17

왕의 형 되는 발기가 소나부(消那部)를 회유하여 그 산하 밸석 3만여 호를 이끌고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을 찾아가 항복했다. 이어서 발기는 공손강의 지원을 받아 비류수에서 공손강의 군사들과 합류하여 고구려 도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싸움에서 지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공손강에게 도망쳤다.




기원

중국

고구려

재위

대 사 표

재위왕

대 사 표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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