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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회. 沙邱之變(사구지변), 慕名求相(모명구상)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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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93회 沙邱之變 慕名求相(사구지변 모명구상)

사구궁에서 아사한 조나라의 무령왕과

맹상군의 명성을 사모하여 진나라의 상국으로 삼은 진소양왕

1. 胡服騎士(호복기사)

- 오랑캐 복장의 기병제를 도입하여 강병을 꾀하는 조나라의 무령왕

한편 주현왕(周顯王) 43년 기원전 327년에 조숙후(趙肅侯)의 뒤를 이어 조왕의 자리에 오른 무령왕(武靈王) 옹(雍)은 신장이 여덟 자 여덟 치①에 달하는 거인이었다. 미골(眉骨)이 불룩하게 솟아 용처럼 생긴 얼굴, 새의 부리처럼 튀어나온 입, 무성하게 나서 두 귀를 덮은 살쩍과 곱슬머리, 세 자에 이르는 가슴둘레 등의 체격을 갖춘 거구의 만부부당한 영웅의 기상을 품고 사해를 집어삼키려는 뜻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령왕은 즉위한 지 5년 후에 한왕(韓王)의 딸을 취하여 부인으로 삼고 아들 장(章)을 낳아 태자로 세웠다. 즉위 16년 째 되는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다가 한 미인이 거문고를 타는 꿈을 꾸었다. 꿈에 깨어나서도 그 모습이 너무 생생하여 그 미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사모하게 되었다. 다음날 조당에 나가 군신들에게 꿈속의 미인에 대해 말했다. 대부 호광(胡廣)이 앞으로 나와 그 여인은 거문고를 잘 타는 맹요(孟姚) 같다고 고했다. 무령왕이 맹요를 대릉(大陵)의 고대(高臺)에 불러 접견했다. 맹요는 무령왕이 꿈속에서 본 여인과 똑 같았다. 무령왕은 맹요로 하여금 거문고를 타 보도록 했다. 맹요가 타는 거문고 소리가 역시 꿈속에서 들은 소리와 같았음으로 크게 기뻐하여 맹요를 궁중에 불러들여 살게 하고 이름을 오왜(吳娃)라고 불렀다. 오왜가 아들 하(何)를 낳았다.

왕위에 오른지 19년 째인 기원전 306년 봄, 무령왕은 북쪽의 중산국(中山國)을 공략하고 이어서 방자(房子)②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대(代)나라로 들어가서 북쪽으로 무궁(無窮)③에 다다르고 서쪽으로는 황화산(黃華山)④에 올랐다가 도성으로 돌아온 무령왕이 평소에 품고 있었던 계획을 시행하기 위해 누완(樓緩)⑤을 불러 의논했다.

「우리 조씨 선조들은 시세의 변화에 따라 남쪽 변방의 땅에서 수령 노릇을 하시다가 장수(漳水)와 부수(滏水)⑥의 험고(險固)를 이용하여 장성을 쌓으셨으며, 다시 서쪽으로 나가 인(藺)과 곽랑(郭狼)⑦을 차지하셨소.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 임(荏)⑧ 땅에서 임호(林胡)⑨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이기셨으나 아직 그들을 복종시키지는 못했소. 또한 지금 중산국은 우리 조나라의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에는 연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실정이오. 동쪽으로는 호(胡), 서쪽으로는 우리를 향해 항상 이빨을 드러내 놓고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임호(林胡), 누번(樓煩) 및 진(秦)이 있고 또 한(韓)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나 강한 군사들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어 언젠가는 그들의 침략을 받아 결국은 사직이 망하게 될 운명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소. 이를 어찌해야 하겠소? 무릇 높은 공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행해지는 습속을 위배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고 했소. 나는 조나라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히고자 하오.」

누완은 좋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조나라의 국인 대부분은 무령왕의 계획에 반대했다.

무령왕이 상국 비의(肥義)에게 말했다.

「간자(簡子)와 양자(襄子) 두 분의 선조들께서는 호(胡)와 적(狄) 두 이민족들로부터 이익을 취하여 공업을 이루려고 하셨소. 무릇 신하된 자로, 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을 때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공경하고, 장유(長幼)의 도리에 밝아 순종하는 절조가 있어야 하며, 뜻을 얻었을 때는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 모시고 있는 주군이 공업을 세우도록 도와야 하오. 이 두 가지가 신하된 자의 본분이라고 말할 수 있소. 오늘 나는 양자의 유지를 계승하여 호(胡)와 적(狄)의 땅을 개척하여 조나라의 영토로 삼으려고 하나 나는 죽을 때까지 그런 신하들을 만날 수 없을 성 싶소. 호복제도를 시행하게 되면 적을 약하게 만들 수 있어 적은 힘을 들이고도 많은 공을 세울 수 있으니 이것은 또한 백성들을 고생시키지 않아도 두 분 선조의 유업을 계승할 수 있는 일이오. 『무릇 뛰어난 업적을 이루려면 세상의 습속을 위배했다는 비난을 받기 마련이며, 심모원려의 지혜가 있는 사람의 행동은 오만한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 마련이오!』라는 말이 있소. 오늘 내가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틀림없이 과인을 비난할 터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비의가 대답했다.

「신이 듣기에 『의심스러운 일을 행하면 공을 세우지 못하고, 의심하면서 일을 행하면 명예를 얻을 수 없는 법이다.』라고 했습니다. 왕께서 나라의 오랫동안 내려온 풍속을 위배했다는 비난을 감수하고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려고 이미 마음을 굳히셨으니, 천한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십시오. 『무릇 지고(至高)의 덕행을 추구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풍습을 구애받지 않으며, 커다란 공적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범부와 일을 의논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했습니다. 옛날 순임금은 묘인(苗人)⑩의 춤을 추어 그들을 복속 시켰고, 우임금은 나국(裸國)⑪에 가서 옷을 벗고 그들과 같이 지냈습니다. 이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고,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을 논하여 공업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어리석은 자는 일이 성사가 된 뒤에도 알지 못하나 지혜로운 사람은 일이 이루러지기도 전에 알아봅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왕께서는 주저하지 마십시오.」

「내가 주저하고 있는 이유는 호복의 착용을 싫어하는 백성들 때문이 아니라, 천하 사람들이 나를 비웃지나 않을까를 걱정하기 때문이오. 『무지한 자의 즐거움은 현명한 자의 슬픔이며, 어리석은 자의 비웃음은 지혜로운 자의 통찰이다.』라고 했소. 비록 세상 백성들이 내 명을 따른다 해도 그들은 호복의 효능을 이루 다 짐작할 수 없으니, 설사 백성들이 이 일로 나를 비난한다 해도 북방의 오랑캐 땅과 중산국은 내가 꼭 차지하고 말겠소.」

무령왕은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으라는 명을 내리기 전에 다시 왕설(王緤)을 시켜 공자 조성(趙成)⑫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과인이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하려고 하니 숙부께서도 역시 호복을 입고 나오십시오. 집안에서는 부모의 말을 따라야 하고 나라 안에서는 임금의 명을 따라야 함은 고금을 통한 공인의 행동입니다. 아들 된 자는 부친의 명을 거역해서는 안 되고, 신하는 군주의 명에 역행하지 말아야 하며, 형제는 의로써 서로 우애해야만 합니다. 오늘 과인이 교지(敎旨)를 내려 복식을 바꾸려 하는데 숙부께서 입지 않으신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나의 뜻에 대해 의론이 분분하게 되어 따르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상도는 백성들을 이롭게 해야 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원칙은 영(令)에 따라 하는 행동을 제일로 칩니다. 덕정을 펴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 백성들을 이해 시켜야 하며, 정령을 펴기 위해서는 먼저 귀족들로부터 신임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호복을 입는 목적은 나의 욕망을 채우고,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하는 바를 달성시켜 공적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며, 공적이 일단 이루어지면 끝은 항상 좋은 결말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지금 과인은 정사의 원칙을 위배하여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과인이 듣기에 나라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은 사악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하며, 귀척을 빙자하여 그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원컨대 저는 숙부님의 의로운 이름을 빌려서 호복의 제도를 시행하여 공업을 이루려고 합니다. 이에 왕설을 보내 숙부님을 뵙기를 청하오니 내일 아침 조회에 호복을 입고 나오시라고 청합니다.」

공자 성이 무령왕의 사자로 온 왕설을 향해 두 번의 절을 오린 후에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신은 옛날부터 왕께서 호복의 착용을 시행하려는 뜻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재주가 없고 또한 마침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아직도 왕께 달려가 자주 진언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왕께서 저에게 호복을 착용하라고 명하시니, 신이 이에 대하여 어리석으나 충정을 다하여 말씀드립니다. 신은 알고 있건 데, 이 곳 중화의 땅은 모두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사는 곳이라, 세상의 온갖 만물과 재화가 모여드는 땅이고, 성현의 교화와 인의가 행해지는 땅입니다.《시(詩)》,《서(書)》,《예(禮)》《악(樂)》이 일어나 쓰이는 곳이고, 기이하고 교묘한 기능이 펼쳐지는 먼 지방 사람들이 이 땅의 문물을 관람하러 오는 곳이며, 변방의 만이들이 즐거이 모범으로 삼으려고 하는 땅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이러한 중화의 문물과 문화를 버리시고 먼 지방의 복식을 시행하려고 하시니 그것은 옛 성현의 교화를 개변하는 일일뿐 아니라 옛부터 전해오는 상도를 바꾸려는 행위로써, 백성들의 마음에 반하는 일이고 학자들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왕께서는 이와 같은 이유를 생각하시어 신중하게 처리하십시오.」

왕설이 돌아와 공자성의 말을 전하자 무령왕이 말했다.

「내가 이미 숙부께서 병으로 누워 계시다는 말을 들었으니 직접 가서 뵙고 호복의 착용을 청해야겠다.」

왕이 이윽고 공자성의 집을 방문하여 호복의 착용을 청하며 말했다.

「무릇 복장이란 입기에 편리해야 하며, 예란 일을 행하는데 편리해야 합니다. 성인들께서 그 지방의 풍속에 순응하여 알맞은 제도를 만들고, 일의 상황에 따라 예절을 제정하셨던 목적은, 제도와 예절이 백성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국가를 부강하게 해주기 때문이었습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는 문신을 그려 넣으며, 팔에는 그림을 그려 넣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풍속은 구월(甌越)⑬ 일대에 사는 만이들 풍속입니다. 검은 이빨에, 이마에는 무늬를 그려 넣고, 물고기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조악하게 바느질한 의복을 착용함은 오나라 사람들의 풍속입니다. 그런 이유로 의복과 예절는 지방마다 같지 않으나 편리함을 추구하는 점은 같습니다. 각기 사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하는 방법에 변화가 있고, 받드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예법도 바뀝니다. 따라서 비록 성인일지라도 만약에 나라에 이득이 된다고 생각된다면 그것들을 행하는 방법을 꼭 하나로 일치시킬 필요는 없으며, 그것들이 일을 행하는데 편리하다면 예법이 서로 같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자(儒者)의 경우에도 그들이 배웠던 스승은 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예법은 천차만별이고, 중화의 예법은 동일하나 그 교화는 같지 않으니, 하물며 산간벽지에서 행해지는 복식과 예법의 편리함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변화에 대한 진퇴와 취사선택은 비록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항상 그것들과 일치시킬 수 없게 됩니다. 또한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의 복식을 대해서도 비록 성인일지라도 그 일치됨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궁벽한 벽촌에는 다른 풍속이 많으며, 천박한 견해에는 궤변이 많은 법입니다. 알지 못하나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의 의견과 다름에도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음은, 공개적으로 널리 중지를 모아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숙부께서 말씀하신 바는 일반적인 풍속에 대해서이고, 제가 드리는 말씀은 새로운 풍속을 만드는 일에 대해서입니다. 우리 조나라의 동쪽에는 하수(河水)와 박락(薄洛)⑭이 있어 제(齊)와 중산국 두 나라와 같이 국경으로 삼고 있으나, 그것을 지킬 선박이나 시설도 없습니다. 동북쪽의 대(代)에서 상산(常山), 상당(上黨)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는 연(燕), 동호(東胡)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누번(樓煩), 진(秦)과 한(韓)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나 그들을 막을 기병과 궁수가 없습니다. 또한 과인은 선박과 시설도 없이 물가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백성들을 데리고 어떻게 하수(河水)와 박락수(薄洛水)를 지켜야 할지 그 방법에 대해 걱정하고 있습니다. 호복으로 복식을 바꾸어 입혀 기병과 궁수를 양성하여 연(燕), 삼호(三胡)⑮, 진(秦), 한(韓)과의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옛날 선군이신 조간자께서 진양(晉陽)에서 상당에 이르는 지역과 요새를 지어 통하게 하셨고, 그 뒤를 이은 조양자께서는 여러 오랑캐 부족들을 물리치시고 융․적(戎狄)의 땅을 병탄했을 뿐만 아니라 대국(代國)마저도 취하여 세운 공적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제나라의 지원에 힘입은 중산국이 우리 조나라를 쳐들어와 백성들을 포로로 잡고 노략질을 저지른 후에 계속 진격하여 호성(鄗城)⑯을 포위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물에 잠기게 했습니다. 만약 사직을 지키는 신령의 보우하심이 없었다면 아마도 호성은 더 이상 우리의 영토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그 일을 치욕으로 여기셨으나, 아직도 그 원한을 씻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병과 사수를 양성하여 가깝게는 상당의 지형을 이용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고, 가깝게는 중산국에게 그 원한을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숙부께서는 중화의 풍속을 따른다고 하며 간자와 양자의 뜻에 위반하여 복식을 바꾸었다는 오명을 얻지 않으시려는 좁은 생각으로 호성에서 당한 치욕을 잊고 계십니다. 그것은 과인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공자성이 무령왕이 하는 말을 다 듣더니 두 번의 절을 올린 후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이 어리석어 왕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단지 속세의 떠돌아다니는 말만을 했으니 이것은 신의 크나큰 죄입니다. 오늘 왕께서 간자와 양자의 유지를 계승하고 선왕의 뜻을 따르신다고 하시는데 어찌 감히 신하된 자로써 왕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공자성이 말을 마치자 다시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다음 날이 되자 공자성은 무령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호복을 착용하고 조회에 나갔다. 그때서야 무령왕은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으라는 조칙을 내렸다.

조문(趙文), 조조(趙造), 주소(周袑), 조준(趙俊) 등이 모두 나서서 왕에게 호복의 착용을 거부하며 옛날 복식이 편하다고 간했다. 무령왕이 듣고 말했다.

「선왕들께서 따랐던 옛날 복식은 서로 같지 않은데 어떤 법을 따라야 한단 말인가? 제왕(帝王)들은 그 법을 서로 답습하지 않은데 어떤 법을 따라야 한단 말인가? 복희(宓戱), 신농(神農)은 백성들을 교화시키면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았고, 황제(黃帝)와 요(堯) 및 순(舜) 임금은 죄인을 죽이기는 했으나 화를 내지 않았다. 이어서 삼대(三代)에 이르러 시대의 변화에 따라 법을 만들고 받드는 대상을 근거로 해서 예를 제정했다. 법규와 정령 모두는 실제적으로 필요한 바에 따라 제정되었고 의복과 기구 등은 그 사용되는 편리함에 따라 만들어졌다. 고로 예법이라도 꼭 한 가지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고, 나라가 편리함을 추구하는 데는 반드시 옛 것만을 따라야 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옛날 성인들이 일어나 서로 간의 법규를 따르지 않았음에도 왕이 되었으며, 하(夏)와 상(商)이 쇠퇴하여 멸망한 이유는 시대에 따라 예법을 바꾸었어야 함에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것을 위반했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으며, 옛날의 법규를 따랐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잘되었다고 할 수 없는 법이다. 만일 중화의 풍속과는 다른 기이한 복장을 한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방종하다고 한다면 추(鄒)와 노(魯) 두 나라에서는, 예법에 어긋난 괴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길 수 있었겠는가?⑰ 풍속이 바르지 못한 곳에서는 백성들의 행동도 경솔해진다는 속설이 옳다면 어떻게 오나라나 월나라와 같은 나라에서 뛰어난 재사들이 태어났겠는가? 더욱이 옛 성인들은 몸에 편한 것을 의복이라 했고, 편하게 행할 수 있는 것을 예법이라고 했다. 무릇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규정한 절도와 의복의 착용에 대한 제도는 모두 일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규정이지, 현자들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럼으로 일반 백성들은 세상의 풍속과 같이 하고 현자들은 변혁과 함께 한다. 옛말에 『책 속의 지식으로 말을 모는 자는 말의 속성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옛날 법도만으로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는 자는 사리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은 옛날 법규의 효능만을 따르는 자들은, 세속을 벗어나 높은 공을 세울 수 없고, 고대의 학설만을 고집하는 자는 현재의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없다는 뜻이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런 점을 숙고하지 않는가?」

이윽고 무령왕은 호복을 입으라는 조칙을 내리고 기병과 궁수를 모집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인 무령왕 재위 20년 기원전 305년에, 무령왕은 호복을 착용시켜 양성한 기병과 사수를 이끌고 중산국을 공략하고 영가(寧葭)⑱에 이르렀다가 서쪽으로 진군하여 호(胡) 땅을 점령하고 유중(楡中)⑲에 다다랐다. 임호(林胡)의 왕이 말을 바치며 복속해 왔다. 도성인 한단으로 돌아와서 누완(樓緩)은 진(秦)나라에, 구액(仇液)은 한나라에, 왕분(王賁)은 초나라에, 부정(富丁)은 위나라에, 조작(趙爵)은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국(代國)의 상국 조고(趙固)를 시켜 호(胡) 땅에 머물게 하면서 그 땅을 다스리며 군사를 모집했다.

그리고 다시 1년 후인 기원전 304년에 중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20만명에 달하는 조나라의 모든 군사를 일으켜 출격했다. 조소(趙袑)에게는 우군(右軍)을, 허균(許鈞)에게는 좌군(左軍)을 공자 장(章)에게는 중군을 맡기고 왕 자신은 전군을 통솔했다. 또한 우전(牛翦)에게는 전차대와 기병대를, 조희(趙希)에게는 호(胡)와 대(代)의 군사들을 주어 조나라의 깊은 험지를 통과하여⑳ 곡양(谷陽)㉑으로 나와 같이 합류한 후에 계속 전진하여 단구(丹丘)㉒, 화양(華陽)㉓, 그리고 치(鴟)에 세워진 요새㉔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한편 조나라 본국의 군사를 이끌고 중산국으로 쳐들어간 무령왕은 호성(鄗城)을 취하고 석읍(石邑)㉕, 봉룡(封龍)㉖, 동원(東垣)㉗을 점령했다. 중산국이 4개의 고을을 바치며 화의를 청하자 무령왕이 허락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무령왕 재위 27년은 기원전 298년이다. 그해 5월 무신(戊申) 일에, 한비(韓妃)가 죽자 오왜를 정비로 삼고 이어서 태자장을 폐하고 공자하를 대신 세웠다. 공자하가 조혜문왕(趙惠文王)이다. 조나라의 새로운 왕은 조상들의 신위를 모시던 묘(廟)에 가서 제례를 마친 후에 정사에 임했다. 조나라의 대부들은 모두 새로운 왕의 신하가 되기를 맹세했고, 비의를 상국에 머물게 하고 동시에 사부로 삼았다. 무령왕은 스스로를 주보(主父)라 칭했다. 주보는 태상왕을 의미했다.

무령왕은 자기 아들에게는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스스로는 호복을 입고 대부들과 군사들을 거느리고 서북쪽의 호(胡) 땅을 공략하고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에서 남쪽으로 나아가 진나라를 습격하려고 했다. 그래서 스스로 사자로 위장하고 진나라에 잠입하여 그 정세를 살피려고 했다.

혜문왕 2년 기원전 297년 무령왕이 새로 얻은 땅을 보기 위해 순행를 나갔다가 대 땅에서 서쪽으로 나가 서하(西河)에서 누번(樓煩)의 왕을 만나 그들의 군사들을 징발했다.

혜문왕 3년 기원전 296년 마침내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던 중산국을 완전히 멸하여 조나라 영토에 복속시키고 그 왕은 폐하여 부시(膚施)㉘에 옮겨 살게 한 무령왕은 그 땅에 영수궁(靈壽宮)을 짓기 시작했다. 새로 얻은 북방의 땅이 비로소 조나라의 속하게 되자, 그 동안 중산국으로 인해 협소했던 대(代) 땅으로 통하는 길이 크게 뚫리게 되었다. 한단으로 귀환한 무령왕은 신하들에게 대대적으로 논공행상을 한 후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온 나라 백성들에게 음식과 술을 내어 5일 동안 먹고 마시게 했다.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된 공자 장(章)을 대(代) 땅에 봉하고 안양군(安陽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공자 장은 평소에 사치스러웠고 마음속으로는 자기 대신 왕의 자리를 차지한 혜문왕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주보(主父)가 또한 전불례(田不禮)를 보내 공자 장을 보좌하도록 했다.

무령왕이 진나라 산천의 형세를 살피보고 진왕이라는 위인의 사람됨을 알아보기 위해 즉시 자기의 신분을 조초(趙招)라는 이름의 조나라의 사자라고 속이고, 조나라에 새로운 군주가 섰음을 알리는 국서를 지참하고 진나라로 향했다. 무령왕은 몇 사람만의 수행원만을 데리고 진나라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도중 진나라의 지형을 도면에 샅샅이 그려 넣었다. 무령왕의 행렬이 이윽고 함양에 이르러 진왕을 배알하게 되었다. 소양왕이 조나라 사신으로 가장한 무령왕에게 물었다.

「너희 나라 선왕의 나이는 지금 몇 살이나 먹었는가?」

「아직 원기가 팔팔한 장년의 나이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왕위를 그의 아들에게 벌써 물려주었는가?」

「저희 선왕께서는 옛날 왕위를 이어 받으셨을 때 나이가 너무 어려, 나라 일을 하는데 익숙하지 않아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세자를 왕위에 미리 앉혀 나라를 다스리는데 익숙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나라 군주께서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를 비록 주보라고 칭하고 있지만, 나라 일에 아직은 손을 떼지는 않았습니다.」

「그대의 나라도 또한 우리 진나라를 두려워하고 있는가?」

「과군께서 진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그 군사들에게 호복을 입혀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기마병을 훈련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말을 타고 달리며 활시위를 당겨 쏠 수 있는 기마 군사들은 수효가 작년보다 열 배는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그 군사들로 진나라의 군사들을 맞이하여 대항할 수 있거나, 아니면 두 나라가 동등한 조건으로 우호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양왕은 조나라의 사자가 자기의 묻는 말에 전혀 위축됨이 없이 분명한 어조로 대답하여 그를 매우 경건한 태도로 대했다. 이윽고 조나라의 사자가 인사를 올리고 자기의 관사로 돌아갔다. 소양왕이 그 날 저녁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조나라 사자의 풍모가 기골이 장대하고 그 태도가 위풍당당하여 남의 밑에서 신하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를 의심하는 마음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윽고 날이 밝자 소양왕은 즉시 사람을 보내 조나라 사자 조초를 불러오라고 명했다. 진나라 관리가 공관에 가서 진왕의 명을 전했으나 조초의 수행원이 나와서 대답했다.

「조초 사자는 병이 들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원컨대 병이 차도가 있으면 곧바로 알현하겠습니다.」

그리고 3일이 지났으나 사자가 그때까지 입조하지 않았다. 소양왕이 노하여 사람을 보내 강제라도 잡아오라고 명했다. 진나라의 관리가 곧바로 관사에 들려 조나라 사자를 찾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고 자기가 진짜로 조나라의 사자 조초라고 주장하는 그의 수행원만을 잡을 수 있을 뿐이었다. 진나라 관리가 그 수행원을 붙잡아 소양왕 면전으로 끌고 왔다. 소양왕이 물었다.

「네가 진짜 조초라면 며칠 전의 그 자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란 말인가?」

「그분은 실은 우리 조나라의 왕인 주보입니다. 주보께서 대왕의 위용을 몰래 살펴보시기 위해 사자로 가장하여 이곳에 왕림하셨습니다. 주보께서는 함양성을 나가신 지 이미 3일이 되었습니다. 주보께서 소신 조초에게 이곳에 남아 대왕의 치죄를 기다리라고 특별히 명하셨습니다.」

소양왕이 크게 놀라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조왕이 어찌 나를 이렇게 크게 속였단 말인가?」

소양왕은 즉시 경양군에게 백기와 함께 정예 기마병 3천을 이끌고 밤낮으로 그 뒤를 추격하게 했다. 경양군과 그의 군사들이 함곡관에 이르자 그곳의 수장과 사졸들이 고했다.

「조나라 사자는 3일 전에 이미 이 관문을 빠져나갔습니다.」

경양군이 돌아와 소양왕에게 그 경과를 보고했다. 소양왕은 그 날 이후며칠 동안 가슴이 두근거려 편안히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이윽고 얼마간의 시일이 지나서야 소양왕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초에게 예를 갖추어 후하게 대접한 후에 조나라에 귀국하도록 허락했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이 일을 논했다.

맹호가 함양성 내에 버티고 있음이 분명한데

누가 감히 함곡관 안을 넘겨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용의 형상을 한 조나라의 주보가 있어

마침내 당상에 올라 호랑이 같은 진왕을 대면했도다!

分明猛虎据咸陽(분명행호거함양)

誰敢潛窺函谷關(수감장규함곡관)

不道龍顔趙主父(부도용안조주보)

竟從堂上認秦王(경종당상인진왕)

다음 해에 주보가 한단성에서 북쪽으로 나가 운중(雲中)을 순행했다. 다시 대(代) 땅으로 나갔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누번으로 진군하여 그곳에서 군사들을 점고했다. 이어서 군사들을 이끌고 영수(靈壽)로 나와 중산국(中山國)을 다스리기 위해 그곳에다 성을 쌓고 이름을 조왕성(趙王城)이라 했다. 다시 오왜(吳娃)를 위해 비(肥)㉙ 땅에 성을 쌓고 부인성(夫人城)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때가 조나라가 삼진 중에서 가장 강성할 때였다.

그해에 진나라에 억류되어있던 초회왕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하여 조나라로 도망쳐 왔다. 그러나 조혜왕과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결과 만일 초왕을 받아 주었다가는 진나라의 노여움을 살뿐만 아니라 주보인 무령왕도 멀리 떨어진 대 땅에 있어 감히 혜왕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즉시 관문을 닫고 초회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갈 데가 없어진 초회왕은 할 수 없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위나라의 대량성을 향했으나 진나라 군사들의 추격을 받아 결국은 사로잡히게 되었다. 초회왕은 다시 경양군에게 잡혀 함양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회왕은 울화가 치밀어 입에서 피롤 한 말이 넘게 토하더니 이어 병이 나서 얼마 후에 죽었다. 진나라는 즉시 초왕의 시신을 초나라에 보내주었다. 진나라에 의해 속임을 당하여 외국의 땅에서 객사한 초왕의 신세를 불쌍하게 생각한 초나라 사람들은 초왕의 시신을 맞이하러 나와서 통곡하는데 마치 자기의 부모형제가 죽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제후들은 모두가 진나라가 무도하다고 생각하여 다시 합종을 맺고 진나라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2. 懷沙投江(회사투강)

- 조국이 망하는 모습을 보고 돌을 가슴에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진 굴원 -

초나라 신하들 중 특히 대부 굴원은 회왕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자란과 근상의 잘못으로 회왕이 죽었음에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옛날의 자리에 그대로 남아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모습을 본 굴원은 마음속으로 분노했다. 경양왕이나 그를 모시고 있는 신하들은 모두가 일신의 안락함을 탐한 나머지 회왕의 원수를 갚을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자 굴원은 누누이 앞으로 나가 간하여 경양왕에게 어진 사람을 쓰고 망신(妄信)을 멀리하며 장수들을 뽑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회왕이 진나라에 잡혀가 죽은 치욕을 갚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란은 굴원이 뜻한 바를 깨닫고 근상을 시켜 경양왕 앞으로 나가 굴원을 참소하도록 했다.

「원래 굴원은 자기가 공실과 동성임에도 불구하고 중용 되지 않아 가슴속에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대왕이 진나라에 대한 원한을 잊고 있으니 불효한 사람이고, 자란 등은 진나라에 대한 정벌을 주장하지 않으니 불충한 자라며 떠들고 다닙니다.」

경양왕이 크게 노하여 굴원의 관직을 빼앗고 향리로 쫓아냈다.

굴원에게는 이름이 수(嬃)라는 누이가 있었다. 수가 시집가서 멀리 살고 있다가 굴원이 추방되어 향리에 돌아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夔)㉚이라는 고을에 있던 옛날 집에 살고 있던 굴원을 찾아왔다. 그때 굴원은 산발을 하고 세수를 하지 않은 얼굴에는 떼가 잔뜩 낀 몰골에 야위어 수척해진 몸으로 강변에 나가 실성한 사람처럼 시만 읊어대고 있었다. 수가 굴원을 보고 말했다.

「초왕이 너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너로서는 온 마음을 다하여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데, 너 혼자 이렇듯 노심초사한들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다행히 집안의 전답이 있으니 힘들여 밭을 갈아 스스로의 먹을 것을 해결하여 남은 여생을 조용히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굴원이 자기 누이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즉시 가래를 들고 나가 밭을 갈았다. 동네 사람들은 굴원이 충신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추방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불쌍히 여겨 모두 달려와 굴원의 밭가는 일을 도와주었다. 굴원이 한 달 넘게 열심히 밭가는 일에 열중하자 수는 조금 안심이 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굴원이 한탄하며 말했다.

「초나라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나는 차마 초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살아서는 보지 못하겠다.」

굴원이 강수의 강변을 따라 배회하다가 호수가에 이르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노래를 부르며 배회했다. 안색은 초췌하고 몸은 비쩍 말라 야위어 있었다. 강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가 보고 물었다.

「그대는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닌가?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가?」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모두 탁했으나 나 혼자만은 맑았으며 세상사람들은 모두 취했으나 나 혼자만은 깨어 있었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쫓아 냈소.」

어부가 다시 물었다.

「옛날 성인들께서는 어느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시는 법이 없으셨고 세상의 돌아가는 추이에 따라 능히 어울릴 수가 있었소! 세상사람들이 모두 탁하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그 세상 사람들이 빠져 있는 진흙탕에 같이 들어가 그 흙탕물을 튀겨서 파고를 일으켜 보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으면 어찌하여 세상 사람들이 먹다 남긴 술찌꺼기를 얻어 배불리 먹고 그 거른 술을 마셔 같이 마시지 않는가? 그대의 생각이 얼마나 깊고 몸은 또한 얼마나 고고하다고 스스로 화를 취하여 쫓겨나게 되었는가?」

「내가 들기에 새로이 머리를 감고자 하는 사람은 필히 관을 벗어서 털어야 하고 새로이 몸을 씻고자 하는 사람은 필시 자기의 옷을 벗어 흔들어야 한다고 했소. 어찌 이 맑고 깨끗한 몸으로 더럽고 욕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내가 설사 상수에 빠져 수장되어 고기들의 밥이 된다 할지언정 어찌 희고 깨끗하며 결백한 마음의 내 몸에 이 속된 세상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

어부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노를 뱃전에 두드리며 떠나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맑고 맑은 창랑의 물결이여

내 갓끈을 씻을 만 하구나

탁하고 탁한 창랑의 강물이여

내 발을 씻을 만 하구나!

滄浪之水淸兮(창랑지수청혜)

可以濯吾纓(가이탁오영)

滄浪之水濯兮(창랑지수탁혜)

可以濯吾足(가이탁오족)

어부는 마침내 가 버리더니 다시는 그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굴원은 《회사(懷沙》㉛라는 부(賦)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햇볕이 따가운 초여름이라

초목이 무성도 하구나.

쓰라린 마음에 영원한 슬픔 안고

유유히 흘러서 남쪽 땅으로 가련다.

쳐다만 보아도 아득하고 멀어서

소리조차 없이 조용하구나!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

시름에 겨워 못내 괴롭지만

정(情)을 억누르고 뜻을 헤아려

원통함을 삼키고 스스로 참는다.

陶陶孟夏兮(도도맹하혜)

草木奔奔 (초목망망)

傷懷永哀兮(상회영애혜)

汩徂南土(율조남토)

瞬兮杳杳(순혜묘묘)

孔靜幽黙(공정유목)

鬱結紆軫兮(울결우진혜)

離愍而長鞠(이민이장국)

撫情效志兮(무정효지혜)

寃屈而自抑(원굴이자억)

모난 것을 깎아서 동그라미 만들어도

일정한 규범은 바꾸지 않으니

근본이나 초지를 고치는 바는

군자가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다.

먹으로 분명히 그려 놓은

옛날의 설계는 고치지 않으며,

충정이 후덕하고 성질이 올바르기를

대인이 기리는 바로써

교수(巧倕)라도㉜ 자르지 않는데

누가 그 칫수의 바름을 알겠나?

刓方以爲圜兮(완방이위환혜)

常度未替(상도미체)

易初本廸兮(이초본적혜)

君子小鄙(군자소비)

章畫志墨兮(장화지묵혜)

前圖未改(전도미개)

內厚質正兮(내후질정혜)

大人所盛(대인소성)

巧倕不斲兮(교수불착혜)

孰察其揆正(수찰기규정)

검은 무니가 어두운데 놓이면

청맹과니는 불분명타 하고

이루(離婁)㉝가 실눈을 뜨더라도

소경은 못 보는 줄로 여기지.

흰색을 바꾸어 검다고 하고

위를 거꾸로 아래라 한다.

봉황(鳳凰)은 새장 속에 있는데

닭과 집오리는 활계치며 춤을 추네.

옥(玉)과 돌을 한 곳에 섞어 놓고

하나의 평미래로 재려고 하니

저 도당들의 비천함이여!

내가 가진 것의 값어치를 모른다.

玄文處幽兮(현문처유혜)

矇睡謂之不章(몽수위지부장)

離婁微睇兮(이루미제혜)

瞽以爲無明(고이위무명)

變白以爲黑兮(변백이위흑혜)

倒上以爲下(도상이위하)

鳳凰在笯兮(봉황재노혜)

雞鶩翔舞(계목상무)

同糅玉石兮(동류옥석혜)

槪面相量(일개면상량)

夫惟黨人之鄙固兮(부유당인지비고혜)

羌不知余之所藏(강부지여지소장)

무거운 짐을 많이도 실어

바퀴가 빠져서 움직이질 않고.

아름다운 보석을 품고 있지만

길이 막혔으니 보일 데를 모르겠다.

마을 개들이 떼지어 짖음은

이상한 사람 있어서고

영웅과 호걸을 비방하는 건

본래가 용렬해서 그렇다.

무늬와 바탕은 안으로 갖췄으니

중인들은 이채로운 걸 모르고

재목과 원목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내 것인 줄을 모른다.

어짐이 겹치고 정의가 이어지고

근신과 온후함이 풍성하여도

순임금님은 만날 수 없으니

누가 나의 거동을 알아나 줄까?

任重載盛兮(임중재성혜)

陷滯而不濟(함체이부제)

懷瑾握瑜兮(회근악유혜)

窮不知所示(궁부지소시)

邑犬之群吠兮(읍견지군폐혜)

吠所怪也(폐소괴야)

非俊疑傑兮(비준의걸혜)

固庸態也(고용태야)

文質疏內兮(문질소내혜)

衆不知余之異采(중부지여지이채)

莫知余之所有(막지여지소유)

材朴委積兮(재박위적혜)

重仁襲義兮(중인습의혜)

謹厚以爲豊(근후이위풍)

重華不可迕兮(중화불가오혜)

孰知余之從容(숙지여지종용)

옛날부터 성군과 현신이 같이 나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알기나 하랴?

탕(湯)과 우(禹)는 먼 옛날이야기

아득하여 생각할 수도 없다.

잘못을 뉘우치고 원한을 삭이고

마음을 억눌러서 스스로 참아

시름이 겨워도 변하지 않으리니

이 뜻을 본보기로 하리라!

길을 나아가 북쪽에 다달으니

해는 뉘엿뉘엿 어두워진다.

시름을 풀고 서글픔을 달래며

지나간 큰일들을 마감하리라.

古固有不竝兮(고고유불병혜)

豈知其何故(기지기하고)

湯禹久遠兮(탕우구원혜)

邈而不可慕(막이불가모)

懲違改忿兮(징위개분혜)

抑心而自强(억심이자강)

離愍而不遷兮(이민이불천혜)

願志之有像(원지지유상)

進路北次兮(진로북차혜)

日昧昧其將暮(일매매기장모)

舒憂娛哀兮(서우오애혜)

限之以大故(한지이대고)

노래 끝에 이르기를,

넘실거리는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두 갈래로 굽이쳐 흐르고

닦아 놓은 길은 깊숙이 숨어버려

저쪽 편 먼 길은 사라져 버린다.

가슴에 품은 도타운 정은

비할데 없이 우뚝하지만

백락(伯樂)㉞이 이미 죽었으니

천리마를 어찌 알아보려나?

만민이 한 세상에 태어나

각기 제자리가 있거늘

마음을 정하고 뜻을 넓히면

내 무엇을 두려워하랴?

상심이 더하여 서럽게 울며

기다랗게 한숨을 쉰다.

세상이 혼탁하여 알아주는 이 없으니

사람의 마음을 일깨울 수 없구나.

죽음을 물릴 수 없음을 알고서

애석하다 여기지 말아라.

분명히 군자에게 고하노니

내 이제 충신의 본보기가 되리라!

亂曰(난왈)

浩浩沅湘(호호원상)

分流汩兮(분류율혜)

脩路幽蔽(수로유폐)

道遠忽兮(도원홀혜)

懷質抱情(회질포정)

獨無匹兮(독무필혜)

伯樂旣沒(백락기몰)

驥焉程兮(기언정혜)

萬民之生(만민지생)

各有所錯兮(각유소착혜)

定心廣志(정심광지)

余何畏懼兮(여하외구혜)

增傷爰哀(증상원애)

永歎喟兮(영탄위혜)

世溷濁莫吾知(세혼탁막오지)

人心不可謂兮(인심불가위혜)

知死不可讓(지사불가양)

爰勿愛兮(원물애혜)

明告君子(명고군자)

吾將而爲類兮(오장이위류혜)

굴원은 얼마 후에 갑자기 새벽에 일어나더니 돌을 가슴에 품고 멱라수(汨羅水)㉟에 빠져 죽고 말았다. 굴원이 강물에 빠져 죽은 날이 5월 5일이라 단오절의 기원이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굴원이 몸을 강물에 던졌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다투어 작은 배를 끌고 나와 강심으로 나가 굴원을 찾으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나무 잎에 세모지게 싼 기장밥을 강물에 던져 굴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 기장밥을 색실에 메달아 강물에 던졌는데 그것은 물속의 고기가 달려와 가로채서 먹지나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멱라수 강변에 살던 사람들은 굴원이 죽은 5월 5일이 되면 작은 배들을 끌고 나와서 강은 빨리 건너기 위한 용주(龍舟)㊱ 놀이 시합을 하였다. 이것도 역시 굴원의 시신을 찾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배를 몰고 나온 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도 초나라와 오나라의 강변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해마다 단오절이 되면 거행하는 민속놀이의 한 가지가 되었다. 굴원이 살았을 때 그가 갈던 밭에서 백옥과 같은 하얀 쌀을 얻었다고 해서 그 밭의 이름을 ‘옥미전(玉米田)’이라고 불렀고 굴원을 위해서 사당을 지은 동네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자귀향(姊歸鄕)이라고 이름지었다. 지금의 형주부(荊州府) 관하 귀주(歸州)라는 이름도 역시 자귀향(姊歸鄕)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 송조(宋朝) 원풍(元豊)㊲ 연간에 굴원을 청렬공(淸烈公)에 봉하고 이어서 굴원의 누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당을 세워 그곳의 이름을 자귀묘(姊歸廟)라 불렀다. 후에 다시 굴원에게 봉호를 더하여 충렬왕(忠烈王)이라 칭했다. 염옹(髥翁)이 이곳을 지나가다 《충렬왕묘시(忠烈王廟詩)》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굴원을 노래했다.

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사당의 모습이 늠름하구나!

충렬왕을 기리는 향불은 오늘도 타오른다.

간신배의 뼈는 어디에 썩어 있는가?

용주는 해마다 푸른 물결 일으키며 그의 넋을 기리네!

峨峨廟貌立江傍(아아표모입강방)

香火爭趨忠烈王(향화쟁추충렬왕)

佞骨不知何處朽(영골부지하처후)

龍舟歲歲弔滄浪(용주세세조창랑)

3. 主父餓死(주보아사)

- 사구의 변을 만나 굶어죽은 조나라의 무령왕 -

한편 조나라의 주보 무령왕은 운중을 순행하고 한단으로 돌아와서 그 동안의 일에 대해 논공행상을 행하고 온 나라의 백성들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여 옛날 중산국을 멸한 기념으로 행했던 것처럼 5일 동안이나 먹고 마시며 즐기게 했다. 조나라의 모든 신하들이 조정으로 나와 무령왕이 이룩한 업적을 축하했다. 무령왕이 이윽고 혜왕으로 하여금 정사를 주재하도록 하고 자기는 그 옆에 자리를 마련하여 여러 신하들이 혜왕에게 조례를 드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혜왕 하(何)는 어린 나이에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용하여 남면하여 왕좌에 앉아 있는데 비해, 체구가 장대하고 훤칠한 장부가 된 장자 공자장은 오히려 북면하여 왕에게 절을 올렸다. 동생에게 허리를 굽히고 있는 공자장을 본 무령왕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조회가 파한 후에 무령왕은 곁에 서있던 공자승(公子勝)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말했다.

「네가 보기에 안양군의 모습이 어떻냐? 비록 신하들의 대열에 서서 배례를 드리고 있지만 얼굴에는 달갑지 않는 기색이 역력하구나! 내가 조나라를 둘로 나누어 장을 대왕(代王)으로 삼아 조왕과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하냐?」

「부왕께서는 옛날에 이미 일을 잘못 처리하여 지금은 군신(君臣)간의 관계가 정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안양군을 대왕으로 봉하시겠다하니 이것은 사단을 다시 일으키는 일입니다. 앞으로 변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모든 일의 결정은 내 생각에 달려 있는데 무엇을 걱정한단 말이냐?」

무령왕이 궁궐로 돌아오자 부인 오왜가 왕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물었다.

「오늘 조당에서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내가 조당에서 큰아들 장을 보니 형 된 자가 동생에게 배례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그래서 장을 대왕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승이라는 놈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해서 내가 주저하며 생각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오.」

「옛날 진목후(晉穆侯)가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구(仇)라 했고 작은아들은 성사(成師)라 했습니다. 목후가 죽자 큰아들인 구가 사위하여 그 도읍을 익성(翼城)에 정하고 자기의 동생 성사를 곡옥(曲沃)에 봉했습니다. 그 후에 시간이 지나자 곡옥의 세력이 본국인 익성보다 더 강해져 결국은 성사의 후손들이 구의 후손들을 멸하고 본국인 익성을 병탄했습니다. 이것은 대왕께서도 알고 있는 일입니다. 동생의 신분이었던 성사의 후손들도 형의 후손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었는데 하물며 형의 신분으로서 그 동생에게 임하는 일은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어린 사람에게 임하는 일과 같으니, 장차 우리 모자는 어육(魚肉)이 되어 목숨을 잃게 됨은 자명한 일입니다.」

무령왕이 오왜의 말에 혹하여 장을 대왕으로 삼으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안양군 장이 옛날 태자의 신분으로 동궁에 기거할 때 옆에서 시중을 들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주보가 나라를 나누어 한 쪽을 안양군에게 주려고 주위 사람들과 의논한 일을 곁에서 듣고 아무도 몰래 찾아와 고했다. 공자장이 전불례(田不禮)와 그 일에 대해 의논했다. 불례가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나라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던 주보의 결정은 공정한 마음에서 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힘들여 간하여 그 뜻을 막았습니다. 왕의 나이는 아직 어리고, 나라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니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온 힘을 다하여 대사를 도모한다면 주보도 역시 어쩌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일은 오로지 경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대사가 이루어진다면 부귀를 같이 나누도록 하리다!」

한편 상국 비의와 평소에 교분이 두텁게 지내던 혜문왕의 태부 이태(李兌)가 몰래 그를 찾아와 은밀히 고했다.

「안양군은 기개가 높은 사람이지만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있어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매우 많습니다. 더욱이 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음을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전불례는 원래 기가 세고 마음이 잔인한 자입니다. 두 사람이 한 무리가 되었으니 그들은 요행을 바라며 모험을 걸어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감은 이 나라의 정사를 돌보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재상의 몸이고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니 변란이 일어난다면 필시 그 화가 먼저 대감의 신상에 닥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몸에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재상의 자리를 공자성에게 넘기고 은퇴한다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보가 이 비의 직위를 존귀한 상국에 올려 어린 왕의 안전을 위탁하셨소. 아직 그 화가 형체를 들어내지 않고 있는 마당에 내가 먼저 몸을 사려 일을 회피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일신의 안전만을 탐하는 소인배라고 욕하지 않겠소?」

이태가 탄식하며 말했다.

「대감이야말로 진정한 충신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지혜로운 선비는 못되는 것 같습니다.」

이태가 말을 마치고는 한참동안 앉아서 눈물만을 흘리더니 이윽고 자리에 일어나서 돌아갔다.

이태가 돌아간 뒤 비의는 그가 남기고 간 말을 생각하느라고 음식을 먹어도 목으로 삼킬 수가 없었으며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어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했으나 좋은 계책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세운 이태는 아침이 되자 조당으로 나가 혜왕을 모시던 근시 고신(高信)을 불러 당부의 말을 했다.

「오늘 이후로 어떤 사람이 왕을 부르는 일이 생기거든 반드시 나에게 먼저 알려야만 하오. 」

고신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보와 혜왕이 동행하여 사구(沙邱)로 놀이를 나가는데 안양군 장도 역시 수행하게 되었다. 사구에는 높은 대가 세워진 궁궐이 두 곳이 있었다. 상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의 이궁으로 서로 5-6리를 사이에 두고 지은 궁궐이었다. 주보와 혜왕이 각각 한 궁 씩을 사용하고, 안양군의 관사는 마침 두 이궁 사이의 중간에 있었다. 전불례가 안양군에게 말했다.

「왕이 유람을 나와서 도성 밖에 있으니 따라온 병사들의 수가 많지 않습니다. 만약 이 기회를 이용하며 주보의 명이라고 속여 왕을 부르면, 왕은 틀림없이 부름에 응할 것입니다. 제가 중도에 군사들을 매복시켜 놓았다가 그가 나타나면 죽인 후에 주보의 명을 받들었다고 왕의 추종자들을 선무한다면 누가 감히 명에 거역하겠습니까?」

「참으로 훌륭하신 계책입니다.」

안양군이 즉시 심복 내시를 주보가 보내는 사자로 꾸며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혜왕에게 보내 주보의 거짓 명을 전하게 했다.

「주보께서 갑자기 병이 나서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급히 왕을 찾고 있으니 속히 가서 뵙도록 하십시오.」

고신이 즉시 상국 비의에게 달려가 주보가 왕을 찾는다고 고했다. 비의가 듣더니 말했다.

「몸이 강건하여 평소에 병치레를 한 적이 없었던 주보께서 이 야심한 밤에 왕을 부르다니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음이 틀림없다!」

비의가 즉시 침소에서 주보를 뵙기 위해 준비 중에 있던 혜왕에게 말했다.

「신이 앞서겠으니, 기다리셨다가 저에게 아무런 변고가 생기지 않으면, 그 때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비의가 다시 고신을 향해 말했다.

「궁문을 단단히 잠그고, 절대로 함부로 문을 열어주지 말라!」

비의가 몇 명의 기병들을 데리고 사자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윽고 비의와 그 행렬이 중간쯤 왔을 때 안양군이 매복시켜 놓았던 복병들이 일어나 비의를 왕으로 오인하여 그 일행을 모조리 죽였다. 전불례가 횃불을 들어 살펴보니 죽은 사람은 곧 비의였다. 전불례가 크게 놀라 장을 향해 외쳤다.

「일이 이미 어그러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거사 계획이 들어 나지 않았으니 거느리고 있는 군사들을 모조리 끌고 가서 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습격하면 혹시나 일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불례가 안양군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혜왕이 기거하는 궁궐로 쳐들어가 공격을 감행하여 성안으로 진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비의의 분부를 받은 고신은 이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불례는 있는 힘을 다해 혜왕이 머물고 있는 이궁을 공격했으나 성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자 고신이 왕의 호위군사들에게 궁궐의 지붕 위로 올라가 활을 쏘도록 하자 수많은 반군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화살이 다 떨어져 사태가 위급하게 된 혜왕 측의 군사들도 나중에는 지붕의 기와를 떼어내어 성벽 밑의 반군을 향해 던졌다. 승세를 잡은 전불례가 군사들에게 명하여 커다란 바위를 통나무에 잡아매 성문을 향해 던지게 했다. 큰 돌들이 궁문에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요란했다. 혜왕의 운명이 바야흐로 위급한 처지에 놓이려는 순간에, 갑자기 궁문 밖에서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크게 나더니 좌우 양쪽에서 기마대들이 나타나 반군을 향해 돌격해 왔다. 전불례와 반군들은 졸지에 싸움에서 대패하고 분분히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원래 도성 안에 남아 조왕이 유람을 나간 틈을 이용하여 안양군이 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던 공자성과 이태가 서로 상의한 결과, 각기 한 대의 기병들을 이끌고 출동했다가, 마침 혜왕이 기거하는 궁궐을 포위하고 있던 반군들과 조우하게 되어 위기에 빠진 혜왕을 구할 수 있었다.

안양군이 싸움에 패하고 도망치다가 전불례를 향해 물었다.

「지금은 내가 어찌해야 합니까?」

「주보의 처소에 빨리 달려가서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해 달라고 애걸하면 주보께서는 틀림없이 군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저는 잔병을 수습하여 있는 힘을 다해 추격병을 막겠습니다.」

전불례가 잔병을 수습하여 다시 공자성과 이태가 거느린 기병들과 싸움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싸움에서 패하고 그 자신은 사로잡혀 이태에게 목이 잘렸다. 안양군이 주보 외는 몸을 의탁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태는 즉시 군사들을 이끌고 주보가 머물고 있는 궁궐을 포위했다. 이태와 공자성 두 사람은 궁문을 열고 성안으로 진입하여 장검을 손에 들고 군사들의 앞장에 서서 주보의 처소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주보를 보자 엎드려 절을 올리고 고했다.

「안양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법에 따라 처단해야 합니다. 원컨대, 주보께서는 안양군을 저희에게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아직 이곳에 오직 않았다. 내 말을 못 믿겠으면 두 사람은 이 곳을 수색해도 좋다. 」

이태와 공자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주보에게 안양군을 넘겨달라고 청했지만 주보는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이태가 말했다.

「어차피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마땅히 이 궁궐을 한 번 수색해봐야 되겠습니다. 반적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제가 죄를 받겠습니다.」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두 사람이 즉시 자기가 데리고 온 친위군 수백 명을 궁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궁중 안을 샅샅이 뒤져서 마침내 이중으로 된 벽 속에 숨어있던 안양군을 찾아냈다. 군사들이 안양군을 끌어내어 이태 앞으로 대령시키자 이태가 번개같이 칼을 뽑아 안양군의 목을 베었다. 이 모습을 본 공자성이 이태를 보고 말했다.

「어찌 이리 일을 급하게 처리하십니까?」

「만약 우리가 주보라도 만나 그가 우리에게서 안양군을 빼앗아 가려고 덤빈다면, 우리는 마땅히 대항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신하된 자가 군왕을 범하는 일이 됩니다.어쩔 수 없이 주보의 뜻을 따르게 된다면 적도를 놓아주어야만 하니 차라리 죽이는 편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를 베었습니다.」

공자성이 이태의 행위를 스긍했다. 안양군의 수급을 들고 궁 안에서 밖으로 나오던 이태는 주보가 안양군의 죽음을 슬퍼하며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이태가 뒤따라오던 공자성을 향해 말했다.

「주보께서 성문을 열고 장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를 심히 가엾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장을 붙잡기 위해 주보가 거처하는 궁궐을 포위하고 다시 궁궐을 뒤져 장을 찾아내어 죽였으니 주보는 그 마음이 얼마나 상심이 되었겠습니까? 이 일이 마무리되고 사태가 평상으로 돌아오게 되면 주보는 궁궐을 포위한 죄를 물어 우리들의 목숨은 물론 멸족을 시킬 것입니다. 지금 왕은 나이가 어려 함께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우리 두 사람이 스스로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태가 즉시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내 명에 의히자 않고는 절대로 포위를 풀지 말라!」

이태는 사람들을 시켜 혜왕의 명이라고 거짓으로 궁궐 안의 사람들에게 전하게 했다.

「지금 궁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먼저 나온 사람들은 죄를 묻지 않겠으나 나중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반란군으로 간주하여 멸족시키겠다.」

주보를 따라나선 관리와 내시들은 조왕의 명령을 전해 듣자 서로 앞 다투어 궁 밖으로 나왔다. 결국은 궁 안에는 주보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주보가 사람들을 불러보았으나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궁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문은 이미 밖에서 자물쇠로 굳게 잠가 놓은 후였다. 며칠간 계속해서 궁중에 갇혀 있던 주보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파 견디기 어려웠으나 아무도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주보는 궁정 뜰 안의 나무 위에 있었던 참새 둥지에서 새알을 꺼내어 먹고 연명하다가 이윽고 한 달이 조금 지나서 굶어 죽었다. 염선이 시를 지어 한탄했다.

호복으로 사방을 횡행하며 변경을 안정시켰고

웅대한 야심은 진나라마저도 집어삼키려고 했다.

그러나 오왜의 소생 하나로 화를 입게 되었으니

꿈속의 거문고 소리가 영웅의 앞길을 망쳤도다!

胡服行邊靖虜塵(호보행변정로진)

雄心直欲幷西秦(웅심직용병서진)

吳娃一脉能貽禍(오왜일맥능이화)

夢里琴聲解誤人(몽리금성해오인)

성을 포외하고 있던 군사들은 주보가 이미 죽은 사실을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이태 등도 감히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석 달여를 기다리다가 비로소 궁문의 열쇠를 열고 들어가 살펴보았다. 그때는 이미 주보의 시신은 말라비틀어지고 썩어 버려 흉측하게 변해있었다. 공자성이 혜왕을 모시고 사구궁으로 달려와 시신을 거두어 상을 발하고 대(代) 땅에 묻었다. 지금의 영구현(靈邱縣)이라는 지명의 이름은 무령왕의 묘를 쓴 언덕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혜문왕이 한단성으로 돌아와 공자성을 상국으로 이태를 사구(司寇)로 임명하여 안양군 장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를 표창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공자성이 노환으로 죽자 혜왕은 자기의 동생 공자승을 상국의 자리에 임명하여 공자성의 후임으로 삼았다. 옛날 나라를 둘로 나누려는 주보의 생각에 반대하여 그만두도록 한 일을 포상하기 위해서였다. 공자승은 평원(平原)의 땅에 봉해지고 평원군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이가 전국 사군자 중의 한 명인 조나라의 평원군이다.

4. 美人笑躄(미인소벽)

- 절름발이 선비를 비웃은 미인의 목을 치다. -

평원군 조승(趙勝)역시 어진 선비들과 사귀는 일을 좋아하여, 제나라의 맹상군과 같은 풍류를 갖고 있었다. 그가 조나라의 상국이 되어 그 지위가 높아지자 빈객들을 더욱 많이 초청하여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항상 천여 명이 넘었다. 평원군이 거처하는 상부(相府)에는 기둥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누각이 있었는데 미녀들이 살았다. 그 누각은 담장 하나 사이로 민가를 위에서 굽어보고 있었다. 그 민가의 주인은 한쪽 발을 저는 절름발이였다. 그 집주인은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발을 절룩거리며 물을 길러 나르곤 했다. 미인들이 누각 위에서 발을 절며 물을 길러 나르는 그 집주인의 모습을 보고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절뚝발이 집주인이 평원군의 부중 문을 두드리며 접견을 청했다. 평원군은 그에게 예를 갖춰 읍을 행하고 부중 안으로 맞이했다. 그 절뚝발이가 말했다.

「제가 들으니 상국께서 선비들과의 사귐을 좋아한다 하여, 천하의 수많은 선비들이 천리 길도 멀다하지 않고 달려와 상국의 처소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국이 선비를 귀하게 여기고 미색을 천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불행히도 조금만 걸어도 몸이 피곤해지는 병에 걸려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국의 첩실들이 내가 힘들게 걷는 모습을 보며 큰소리로 웃으니, 소인은 아녀자들로부터 욕됨을 받게 되어 그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나를 비웃은 부인들의 머리를 얻고 싶습니다.」

평원군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소!」

다리를 저는 이웃집 사람이 돌아가자 평원군이 웃으면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로다! 사람을 보고 한 번 웃었다는 이유로 나의 후궁들을 죽이겠단 말인가?」

평원군의 집에는 규칙이 한 가지 있었다. 즉 손님의 접대를 책임 진 사람은 매 달마다 한 번씩 손님들의 명부를 만들어 손님의 많고 적음을 근거로 하여 금전과 양식에 대한 예산을 세웠다. 예전에는 빈객의 수가 늘기만 했지 결코 줄지는 않았는데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는 달이 바뀔수록 빈객들이 떠나 일 년이 지나자 그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평원군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종을 울려 빈객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물었다.

「이 승이 여러분들을 대접하면서 아직까지 예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일 년 동안 많은 분들이 계속해서 이 사람의 집을 떠났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빈객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평원군을 향해 말했다.

「군께서 다리를 저는 사람을 비웃은 첩실들의 목을 베지 않자 많은 사람들은 모두 그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군께서는 미색을 좋아하고 선비를 천하게 여긴다고 여겨 이 집을 떠났습니다.」

평원군이 크게 놀라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빈객들 앞에서 말했다.

「그 일은 이 승의 큰 잘못입니다.」

그는 즉시 허리에 찬 칼을 풀어 좌우의 측근들에게 주어 누각에 살고 있던 미인의 목을 베어오라고 명했다. 평원군은 스스로 미인의 목을 들고 절름발이의 집을 찾아가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죄를 청했다. 절름발이는 미인의 목을 받아들고 기뻐했다. 그 이후로 문객들은 평원군의 어진 마음을 칭송하였고, 빈객들은 다시 예전처럼 평원군의 집을 찾아왔다. 당시의 사람이 세 글자로 된 시를 지어 평원군을 칭송했다.

우리를 배불리 먹게 하고

우리를 의복으로 따듯이 입혀주었네

그의 관사에 편안히 쉬게 해주고

그의 문 앞에서 즐겁게 노닐게 했도다

제나라의 맹상군도

조나라의 평원군도

모두가 후륭한 공자로다!

어진 주인이로다!

食我飽(식아포)

衣我溫(의아온)

息其館(식기관)

游其門(유기문)

齊孟嘗(제맹상)

趙平原(조평원)

佳公子(가공자)

賢主人(현주인)

5. 모명구상(慕名求相)

- 맹상군의 명성을 사모하여 재상으로 삼은 진소양왕 -

그때 진나라의 소양왕은 평원군이 자기의 아름다운 애첩의 목을 베어 절름발이에게 사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는 상수(向壽)에게 평원군의 어진 마음을 찬탄해 마지않았다. 상수가 소양왕에게 말했다.

「그러나 평원군의 어진 마음은 아직 맹상군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맹상군은 어떤 사람인가?」

「맹상군은 자기의 부친 전영(田嬰)이 살아있을 때부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안의 일을 주관하며 빈객들을 접대해 왔습니다. 빈객들의 수효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자 맹상군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을 빈객들과 구분을 두지 않고 후하게 제공하여 그 일로 인하여 집안이 파산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나라에서 몰려든 선비들은 각기 저마다 맹상군을 자기의 친구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에 대한 뒷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 평원군은 자기의 미인이 절름발이를 보고 비웃은 일을 알고도 죽이지 않고 있다가 빈객들의 자기의 문하에서 떠나버리자 그때서야 비로소 미인의 목을 베어 절름발이에게 사죄를 했으니 역시 뒤늦게 행한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인이 어찌하면 맹상군을 얻어 그와 일을 같이 할 수 있겠소?」

「대왕께서 맹상군을 보고 싶다고 하시면서, 어찌하여 부르지 않으십니까?」

「그는 제나라의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재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인데 내가 부른다고 선뜻 부름에 응하겠소?」

「성의를 다해 대왕의 친자식이나 친동생을 인질로 제나라에 보내고 맹상군을 청한다면, 제나라도 진나라를 믿고 감히 맹상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나라에 당도한 그를 대왕께서 그롤 상국으로 삼는다면 제나라도 필시 대왕의 친아들이나 동생을 그들의 상국으로 삼을 것입니다. 진과 제나라가 서로 상대국 사람을 재상으로 삼으면 그 교분이 필시 두터워져 후일에 두 나라가 힘을 합하여 제후들을 도모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오.」

소양왕이 즉시 자기의 친동생 경양군(涇陽君) 리(悝)를 인질로 제나라로 보내면서 국서 한 통을 써서 제왕에게 바치게 했다.

「원컨대 맹상군의 왕림을 한 번 청하기 위해 나의 친제인 경양군을 보냅니다. 과인이 맹상군의 얼굴을 한번 볼 수 있다면 목마른 사람이 한 모금의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위안이 되겠습니다.」

진왕이 맹상군을 불렀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빈객들은 모두 맹상군이 진왕의 부름에 응해 진나라에 가야 한다고 권했다. 그때 마침 연나라에서 사자의 임무를 띠고 제나라에 와있던 소대가 소문을 듣고 맹상군을 찾아와 말했다.

「오늘 이 소대가 오던 도중에 흙으로 빚은 인형인 토우(土偶)와 나무를 깎아 만든 목우(木偶)가 서로 만나 다투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목우가 토우에게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비가 내리려고 하는데 그때는 너는 비에 젖어 부셔지리라!’ 토우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나야 원래 흙에서 태어났으니 흙에 젖어 부셔지더라도 옛날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겠지만, 너야말로 비가 오면 물살에 떠내려갈 터인데 강물의 밑바닥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겠으니 너의 처지가 참으로 걱정스럽구나!’라고 오히려 토우를 걱정했습니다. 진나라는 호랑이나 승냥이 같은 나라라 맹회를 열자고 해놓고 참석한 초나라의 회왕조차도 억류하여 보내주지 않았는데 하물며 왕도 아닌 대감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만약 대감을 잡아두고 보내주지 않는다면 저는 대감께서 어디에서 생을 마칠게 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맹상군이 소대의 말을 듣고 진나라에 가려는 생각을 그만두려고 했다. 광장(匡章)이 제민왕에게 맹상군의 일을 간했다.

「진나라가 인질을 보내고 그 대신 맹상군의 얼굴을 한 번 보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 제나라와 친교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맹상군이 진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나라의 환심을 잃게 됩니다. 더욱이 진나라에서 자청해서 보내온 경양군을 제나라에 억류해 놓는 처사는 우리가 진나라를 불신하고 있다는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왕께서 경양군을 진나라에 돌려보내시고 맹상군으로 하여금 답례사절로 보내 진나라에 예를 갖추어 대하십시오. 이와 같이 한다면 진왕은 필시 맹상군의 말을 믿고 귀를 기우리게 되면 우리 제나라는 진나라와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민왕이 광장의 말을 옳다고 생각하여 경양군을 불러 말했다.

「과인이 맹상군을 답례로 상국(上國)에 사자로 보내어 진왕의 용안을 뵙도록 하겠습니다. 어찌 우리가 상국의 귀인을 인질로 하여 번거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민왕이 즉시 수레를 준비하게 하여 경양군을 태워 진나라에 호송하여 돌아가게 하고 이어서 맹상군에게도 진나라에 답례사절로 다녀오도록 했다. 맹상군이 자기 문하의 빈객들 천여 명을 백여 대의 수레에 나누어 타고 서쪽으로 나가 함양성으로 들어가 소양왕을 배알하였다. 소양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와 맹상군을 맞이하고 서로 손을 잡고 기뻐하며 자기가 평생토록 맹상군을 사모해왔다고 말했다.

7. 鷄鳴狗盜(계명구도)

- 닭울음소리와 개도둑의 도움으로 사지를 벗어난 맹상군 -

그때 맹상군에게는 하얀 여우가죽으로 만든 갖옷 한 벌을 가지고 있었다. 갖옷의 털 길이가 두 치에, 그 색이 하얗기는 마치 백설과 같아 천금의 가치가 나가는 귀중한 보배라 천하에 이와 비견될 물건은 없었다. 맹상군이 그 귀중한 갖옷을 개인적인 신분으로 소양왕에게 바쳤다. 소양왕은 맹상군이 바친 갖옷을 입고 궁궐로 들어가 평소에 총애하던 연희(燕姬)에게 자랑했다. 연희가 소양왕에게 말했다.

「이런 갖옷은 아무 곳에서나 구할 수 있습니다. 어찌 귀하다고 하십니까?」

「천년을 살지 않는 여우는 그 털이 하얗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이 하얀 갖옷의 여우가죽은 모두 천년 묵은 여우의 겨드랑이 털을 한 조각씩 때내어 실로 기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갖옷의 색이 순백이 되었다. 이 갖옷은 진실로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보배다. 제나라는 산동의 대국이라 이와 같은 세상에 한 벌뿐인 진기한 의복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마침 그때는 진나라의 기후가 아직 추워지기 전이라 소양왕은 갖옷을 벗어서 관리에게 주며 자기가 찾으면 가져오라고 분부하며 창고에 보관시켰다. 이어서 소양왕은 길일을 택해 맹상군을 진나라의 승상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맹상군을 시기하고 있던 저리질은 자기의 권력을 빼앗기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즉시 자기의 문객 공손석(公孫奭)을 시켜 소양왕을 찾아가 상주하도록 했다.

「맹상군 전문(田文)은 바로 제나라의 공족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그를 상국에 임명한다면 그는 필시 제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진나라의 이익을 뒤로 할 것입니다. 무릇 맹상군이 지혜로운 사람이라 그가 한 번 일을 꾀하면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시 그는 천여 명에 달하는 빈객을 거느리고 진나라에 들어왔는데 거기에다 진나라의 승상이 되어 권력까지 갖게 된다면 제나라를 위해 음모를 꾸며 진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것입니다.」

진왕이 공손석이 한 말을 저리질에게 전하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저리질이 말했다.

「공손석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를 제나라에 돌려보내야 되지 않겠소?」

「맹상군은 천여 명이 넘은 빈객들을 거느리고 한 달이 넘게 우리의 도성에 머무르면서 진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모두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를 제나라에 돌려보냈다가는 결국 그는 진나라의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차라리 죽여서 후환을 남기지 마십시오」

진왕이 저리질의 말에 혹하여 일단은 맹상군을 관사에 유폐시키라고 명했다.

그때 진왕의 동생 경양군은 맹상군과 친교를 깊이 맺고 있었다. 그가 제나라에 묵고 있었을 때 맹상군이 그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며 매일 제나라의 맛있는 음식을 챙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그가 진나라에 돌아갈 때는 보기들을 여러 점 선물로 주었기 때문에 맹상군의 후의에 매우 감격하고 있었다. 맹상군이 진나라에 들어와 소양왕에 의해 유폐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경양군은 아무도 몰래 맹상군을 찾아와 장차 그를 살해하려는 진왕의 계획을 알려주었다. 맹상군이 두려워하며 진나라를 빠져나갈 계책을 물었다. 경양군이 대답했다.

「우리 진왕께서는 군의 처리에 대해 아직 마음의 결심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궁중에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후궁은 연희(燕姬)라고 합니다. 왕께서는 연희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고 있습니다. 군께서 가지고 오신 보물을 저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군을 위해 그 보물을 연희에게 바쳐 그녀의 도움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된다면 군께서는 방면된 후 환국하여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맹상군이 백벽 두 쌍을 경양군에게 주어 연희에게 바쳐 자기의 방면을 위해 진왕에게 청을 해 주도록 부탁했다. 연희가 백벽을 보더니 받지 않고 말했다.

「첩이 가지고 싶은 것은 여우가죽으로 만든 갖옷입니다. 내가 들으니 산동의 대국에서 산출된다고 하니, 만약 내가 그 갖옷을 한 벌 갖게 된다면 대왕께 적극 간하여 제나라로 돌아가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 백벽은 필요 없으니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경양군이 돌아와 연희가 한 말을 맹상군에게 전했다. 맹상군이 듣고 말했다.

「그 갖옷은 제나라에 한 벌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미 내가 진왕에게 바쳐버렸는데 어찌 다시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맹상군이 자기의 어려운 처지를 제나라에서 데려온 그의 빈객들을 불러 물었다.

「여우가죽으로 만든 하얀 갖옷을 다시 얻을 수 있겠소?」

빈객들이 모두 속수무책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제일 말석에 앉아 있던 문객 한 사람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제가 그 갖옷을 찾아오겠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그 갖옷을 찾아오겠소?」

「신은 능히 개로 변장하여 갖옷을 훔쳐올 수 있습니다.」

맹상군이 웃으면서 그 문객의 청을 허락했다. 그 문객이 밤이 되자 가죽을 뒤집어써서 개처럼 분장한 후에 개짖는 소리를 내며 개구멍을 통하여 진나라 궁중의 창고로 잠입했다. 궁중의 창고를 관리하던 관리가 도둑을 지키는 개인 줄 알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맹상군의 문객이 창고의 관리가 잠이 든 틈을 이용하여 그의 허리춤에 달린 열쇠를 훔쳐서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괘의 뚜껑을 열었다. 과연 그 안에 백설처럼 흰 갖옷이 들어 있었다. 그 문객이 훔쳐온 갖옷을 받은 맹상군은 경양군에게 주어 연희에게 바치게 하였다. 연희가 백구(白裘)를 받아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날 밤 연희가 진왕과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다가, 진왕이 술에 취해 거나하게 되자 입을 열어 말했다.

「첩이 들으니 제나라의 맹상군은 천하의 큰 지혜로운 선비라고 합니다. 진나라는 제나라 재상으로 있던 맹상군을 억지로 초청하여 데려다 놓고, 그를 쓰지 않은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그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대저 남의 나라 재상을 청해놓고 아무 이유도 없이 그를 죽이는 행위는 어진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천하의 어진 선비들이 진나라로 향한 발길을 멈추고 우리나라를 피해 다른 나라로 모두 가버리지나 않을까 첩은 심히 걱정됩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소양왕이 다음날 조회에서, 즉시 거마와 역권(驛券 : 통행증)를 내주어 맹상군과 그 빈객들을 제나라로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맹상군이 듣고 말했다.

「내가 요행히 연희의 도움말 한마디로 호구에서 벗어났으나, 만일 진왕이 나중에라도 후회하게 된다면 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이라!」

맹상군의 문객 중에 각종 증명서들을 가짜로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맹상군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꾸어 역권에 새겨 넣었다. 맹상군은 가짜 역권을 가지고 밤시간을 이용하여 동쪽을 향해 달렸다. 그들의 일행이 이윽고 진나라의 관문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는 아직도 야밤이라 관문이 닫히고 자물쇠로 잠근지 이미 오래된 시각이었다. 맹상군은 혹시 추격군이 따라 오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한시라도 빨리 관문을 통과하고 싶었다. 관문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열고 닫고 했다. 인정(人定)㊳에 문을 닫고 닭이 울면 열었다. 맹상군과 천여 명에 달하는 빈객들은 모두 함곡관 문 앞에서 서로 모여 앉아서 진나라 추격군에 의해 잡히지나 않을까 마음을 심히 졸였다. 그런데 갑자기 닭 우는 소리가 빈객들이 앉아 있던 대열 중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맹상군은 괴이한 생각이 들어 살펴보니 자기의 문객 중 하객(下客)으로 있던 한 사람이 닭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문객이 닭 우는 소리를 흉내 내자 관내의 모든 닭들이 따라 울기 시작했다. 관문을 지키는 관리들이 새벽이 온 것으로 알고 일어나 관문을 열고 역권을 검사한 후에 관문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맹상군과 천여 명에 달하는 그 문객들은 다시 한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수레를 계속 달리면서 두 사람의 문객에게 말했다.

「내가 호랑이 굴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곧 계명구도(鷄鳴狗盜)할 수 있었던 두 분의 재주 덕분이었소.」

맹상군을 따라나섰던 천여 명에 달하는 문객들은 자기들이 두 사람과 같이 공을 세우지 못한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였다. 이후로는 감히 말석에 앉은 사람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두 사람의 재주를 칭송하였다.

참새를 잡는데는 아름다운 구슬보다는

진흙으로 빚은 흙덩어리가 좋고

배고픔을 면하는 데는 값비싼 백벽보다는

항아리 속의 음식보다 못한 법이다!

明珠彈雀(명주탄작)

不如泥丸(불여니환)

白璧療飢(백벽요기)

不如壺餐(불여호찬)

개 짖는 소리를 내어 갖옷을 가져오고

닭 우는 소리를 내어 관문을 열 수 있었음은

비록 성현이 된다 한들

미천한 그들보다 잘했겠는가?

狗吠裘得(구폐구득)

鷄鳴開關(계명개관)

雖爲聖賢(수위성현)

不如彼鄙(불여피비)

시냇물이 흘러 바다를 이루고

티끌이 쌓여 언덕을 이루듯이

생긴 그릇대로 사람을 임용한

맹상군을 품격이 모자란다고 욕하지 마시라!

細流納海(세류납해)

累塵成岡(누진성강)

用人惟器(용인유기)

勿陋孟嘗(물누맹상)

한편 진나라의 저리질은 맹상군이 진왕의 허락을 얻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가 입조하여 소양왕을 알현하고 말했다.

「대왕께서 전문을 죽이시지 않으시겠다면, 마땅히 억류시켜 인질로 삼아야하거늘 어찌하여 돌려보내셨습니까?」

소양왕이 크게 뉘우치고 즉시 사람을 시켜 맹상군의 뒤를 추격하여 다시 잡아오라고 명했다. 진왕의 명을 받은 사람이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함곡관으로 달려와 관문을 빠져나간 사람의 명부를 조사하였으나 제나라 사자 전문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다. 진왕이 보낸 사자가 말했다.

「함양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는 샛길이 없어 결코 다른 길로 빠져나갈 수 없소. 그런데 아직 맹상군과 그 일행이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그들이 이곳에 당도하기 전인 것 같소.」

진왕이 보낸 사자가 반나절 이상을 기다렸으나 맹상군의 행방은 묘연하여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사자가 관문을 지키던 관리를 찾아가 맹상군의 용모와 그를 따르던 문객들과 그리고 그들이 탓던 거마의 숫자를 설명했다. 관문을 지키던 관리가 말했다.

「아마도 오늘 새벽에 관문을 빠져나간 사람인 듯합니다.」

소양왕의 사자가 물었다.

「지금 그들의 뒤를 쫓아가면 잡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관문을 빠져나가자 마치 나는 듯이 수레를 몰아 동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지금쯤은 이미 백리 밖을 달려가고 있어 그들의 뒤를 추격해봐야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자가 돌아와 소양왕에게 자초지종을 복명했다. 소양왕이 한탄해 마지않았다.

「맹상군의 행동은 귀신도 예측하지 못하겠구나! 과연 천하의 지혜로운 선비로다!」

후에 날씨가 추워지자 소양왕이 그 갖옷을 가져오라고 명했으나 창고를 지키던 관리는 결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 갖옷을 입고 있는 연회를 보고 소양왕은 어떻게 그것을 구했냐고 물었다. 소양왕은 맹상군이 자기의 문객들을 시켜 그것을 훔쳐내어 연희에게 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양왕이 다시 탄식했다.

「맹상군의 문객들이 남의 나라 도성의 거리를 자기 짚 안마당처럼 돌아다니니, 그가 원하면 가지지 못할 물건이 없겠구나! 우리 진나라는 그들의 행동에 비해 아직 멀었다고 할 수 있겠다!」

소양왕은 백구를 연희에게 하사하고 창고를 지키던 관리는 용서하고 죄를 묻지 않았다.

《제 94회로 계속》>

주석

①여덟 자 여덟 치: 춘추시대의 한 자의 길이는 약 22.5cm 에서 23cm 였음으로 무령왕의 신장은 약 190cm 에서 2m 정도임

②방자(房子): 전국 때 조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고읍현(高邑縣) 서남쪽에 있었다.

③무궁(無窮): 설이 확실치는 않으나 무종(無終)의 별칭이며 춘추 때 산융(山戎)이 세운 나라 이름이라고 했다. 원래 지금의 천진시 계현(薊縣)에 있었으나 후에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 북쪽 숭례현(崇禮縣) 일대로 옮겼다고 했다.

④황화산(黃華山): 지금의 하남성 임현(林縣) 서쪽에 있던 산이름이라고 하나 무령왕이 오른 산을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⑤누완(樓緩): 전국 때 조나라 공족 출신의 귀족으로 조나라의 무령왕이 호복의 도입을 추진하려고 하자 조나라의 모든 대신들은 반대했으나 오직 그만이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기원전 306년 조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망명했다. 소양왕(昭襄王)은 그를 진나라의 상국으로 임명했으나 2년 만에 면직되었다.

⑥부수(滏水): 하북성 자현(磁縣) 서쪽의 팽성진(彭城鎭) 부산(滏山)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장수(漳水)와 합류하는 강 이름. 조나라의 도성 한단성을 방어하기 위한 장성은 장수와 부수 사이에 있었다.

⑦곽랑(郭狼):택고랑(宅皐狼)의 다른 이름으로 지금의 산서성 이석현 일대를 말한다.

⑧임(荏):지금의 하북성 임현(林縣) 동남

⑨임호(林胡): 지금의 산서성 삭현(朔縣) 북쪽에서 내몽고(內蒙古) 포두시(包豆市) 이남에 분포하여 살었던 유목민 이민족으로 기마술과 사격술에 능하였다.

⑩묘인(苗人): 삼묘족(三苗族)을 말한다. 중국 고대에 지금의 하남성 남부에서 호남성 동정호 및 강서성의 파양호 일대에 분포하여 살았던 이민족 이름으로 순임금때 삼위(三危) 일대로 옮겨 살았다. 삼위에 대한 위치 비정은 지금의 감숙성 돈황 등 많은 설이 있다.

⑪나국(裸國): 옛날 남만의 이민족이 세운 나라 이름으로 후한서 동이전(東夷傳)에 주유(侏儒)가 동남쪽으로 배를 타고 일년을 가니 나국(裸國)이 있다고 했다. 주유(侏儒)라는 말은 키가 아주 작아 주로 잡기(雜技)를 펼칠 수 있는 예인(藝人)을 말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단구(短軀)의 곡예사를 칭한다. 《사기(史記)․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오는 초장왕의 희극배우 우맹(優孟)의 이름은 맹주유(孟侏儒)다.

⑫조성(趙成):조성후(趙成侯)의 아들이며 무령왕(武靈王)의 숙부이다. 당시 조나라의 귀족들의 신망을 받았다. 무령왕이 호복기사를 채용하려고 하자, 처음에는 반대를 하다가 무령왕이 대의를 밝혀 설득하자 지지로 돌아서며 개혁이란 순리에 따라 행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조성은 무령왕이 조왕의 자리를 차자인 혜문왕(惠文王) 하(何)에게 전하자 폐출된 공자 장(章)이 불복하여 마음속으로 반심을 품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윽고 혜문왕 4년 공자 장(章)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자 이태(李兌)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나가 반란군을 진압했다. 공자 장이 싸움에서 패하고 무령왕이 기거하고 있던 궁궐로 몸을 피하자 군사를 궁궐 안으로 진입시켜 장을 잡아서 죽이고 궁궐의 포위를 풀지 않아 무령왕을 굶어 죽게 만들었다. 스스로 상국이 되어 조나라의 국정을 담당했다. 호는 안평군(安平君)이다.

⑬구월(甌越): 지금의 절강성(折江省) 및 복건성(福建省) 일대에 분포되어 살었던 중국 고대의 이민족 이름.

⑭박락(薄洛): 지금의 하북성 광종현(廣宗縣) 서북으로 흐르던 장수(漳水)의 나룻터인 박락진(薄洛津)을 말한다. 광종현은 한단히 동북 약 30키로에 있다. 여기서는 장수(漳水)를 말한다.

⑮삼호(三胡): 임호(林胡), 누번(樓煩), 동호(東胡)의 중국 북방에서 살던 이민족을 통틀어 칭하는 말이다.

⑯호성(鄗城): 지금의 하북성 백향현(柏鄕縣) 북쪽에 있던 고을로 춘추 때 당진(唐晉)의 영토였다가 전국 때 조나라의 무령왕이 그의 재위 3년 때 되는 해에 이 곳에 성을 축조했다. 진나라 때 호현(鄗縣)을 설치했다가 한나라가 그대로 따랐다.

⑰추(鄒)는 맹자의 나라이고, 노는 공자의 나라이다. 즉 이 두 나라만은 유독 옛날 정해진 예법만을 중시했던 나라라고 예를 든 것이다.

⑱영가(寧葭):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 서북쪽

⑲유중(楡中): 지금의 황하 서안의 섬서성 동북부 일대

3)누번(樓煩):춘추전국 때 지금의 산서성 북쪽 지방에 거주하여 기마와 활쏘기에 능했던 이민족.

⑳원문은 조여지형(趙與之陘)으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趙)를 문장 바로 앞의 조희(趙希)로는 경우, 여(與)는 (여러 군사들과) ‘더불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조왕(趙王) 즉 무령왕으로 보는 경우는 여(與)는 ‘주다’ 즉 조왕이 (통과해야 할 골짜기를) ‘지정해 주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형(陘)은 골짜기라는 뜻 외에 형산(陘山)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형산은 지금의 하북성 상산(常山)의 정현(井縣)을 가리킨다.

㉑곡양(谷陽): 지금의 하북성 곡양현(谷陽縣) 서사하(西沙河) 동쪽

㉒단구(丹丘): 지금의 하북성 곡양현(谷陽縣) 서북

㉓화양(華陽): 지금의 하북성 당현(唐縣) 서북쪽의 항산(恒山) 일대를 말한다.

㉔원문은 치지새(鴟之塞)다. 화양의 북쪽에 세운 요새를 말한다. 홍상새(鴻上塞)라고도 한다.

㉕석읍(石邑):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 서북 쪽

㉖봉룡(封龍): 지금의 하북성 원지현(元氏縣) 경내에 있었던 산이름으로 비룡산(飛龍山)이라고도 한다.

㉗동원(東垣):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 경내의 동북 쪽

㉘부시(膚施): 지금의 섬서성 유림현(楡林縣) 남쪽

㉙비(肥):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石家庄市) 동쪽 경내에 있던 고을이다.

㉚기(夔): 지금의 호북성 자귀현(姊歸縣) 동남에 있었던 고을 이름. 한편 기(夔)는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다리가 하나이고 뿔이 달리지 않은 소의 형상을 한 동물이다. 황제(黃帝)가 판천(阪泉)의 뜰에서 군신 치우(蚩尤)와 싸울 때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기(夔)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수(雷獸)의 뼈로 북채를 만들었다. 우렁찬 북소리에 힘을 얻은 황제가 거느린 군사들이 용기백배하여 치우를 물리칠 수 있었다.

㉛회사(懷沙): ‘돌을 가슴에 품고’라는 뜻이다. 굴원은 이 시를 지은 후에 돌을 가슴에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㉜교수(巧倕): 중국 고대 신화상의 인물 공공(共工-技術官)의 이름이다. 교(巧)는 공공의 재주가 교묘하여 붙인 것이다.

㉠신화 상의 인물로 염제의 후손이다. 인면사신(人面蛇身)에 붉은 털의 몸으로 두 마리의 용을 타고 다녔다. 전욱(顓頊)과 임금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화가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자 하늘을 바치고 있는 기둥을 부러뜨리고 땅을 감싸고 있던 그물을 끊어 싸움에서 승리를 취했다.

㉡요순(堯舜) 때 대신으로 이름은 궁기(窮奇)이다. 공공은 치수를 담당하는 관직의 이름이기도 하다. 요임금이 그 신하들과 자기의 후계자로 누구를 세울 것인가에 대해 의논하자 대신 중에 환도(讙兜)라는 사람이 그를 추천했다. 그러나 요임금이 공공은 입으로는 선을 말하나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을 품고 있고, 겉으로는 공경하는 자세를 취하나 안으로는 커다란 증오심을 품고 있다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순임금이 요임금의 뒤를 잇자 환도가 다시 그 후계자로 공공을 천거했으나 순임금 역시 요임금의 유시를 따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후에 공사(工師)의 직을 맡은 공공은 그의 사악한 행동이 들어나 환도, 삼묘(三苗), 곤(鮌) 등의 3인과 소위 사흉(四凶)이라는 죄명을 받아 유주(幽州)로 추방되었다.

㉝이루(離婁): 눈이 밝아 100보 밖의 가는 털로 볼 수 있었다는 중국 고대 신화상의 황제(黃帝) 때 인물이다.

㉞백락(伯樂): 춘추 때 진나라 목공 때 사람으로 말을 잘 감별했다.

㉟멱라수(汨羅水): 지금의 강서성과의 접경지역에서 발원하여 서남으로 흐르다가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가는 지금의 멱강(汨江)을 말한다. 강하류에 멱라시(汨羅市)가 있으며 그 북쪽에 굴원을 모신 사당이 있다.

㊱용주(龍舟): 뱃머리에 용머리를 장식한 경주 용의 작은 배를 말한다.

㊲원풍(元豊): 북송의 신종(神宗) 때 연호. 신종 원년인 1078년부터 신종 8년인 1085년 동안의 기간이다.

㊳인정(人定): 초경(初更)인 갑야(甲夜)를 말함. 오후 8시. 혹은 이경(二更)인 오후 10시를 말하기도 함.

[평설]

「사구궁(沙邱宮)에서 굶어 죽은 조나라의 주보(主父) 무령왕(武靈王)」 편은 당시 국력이 신장되어 정점에 있었던 조나라가 이 사건을 시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했음을 반영한 이야기다.

조나라는 중국의 북쪽에 위치해 있어, 그 강역은 지금의 섬서성 남부, 하북성 동남부, 산동성의 서쪽 모서리와 하남성 북단에 퍼져 있있다. 그리고 그 북쪽에는 누번(樓煩), 임호(林胡), 동북 쪽에는 연(燕)과 동호(東胡), 동쪽으로는 중산(中山)과 제(齊), 서쪽으로는 한(韓)과 위(魏), 동쪽으로는 진(秦)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 국도는 기원전 425년 진양(晉陽)에서 중모(中牟)로, 다시 기원전 386년 한단(邯鄲)으로 천도했었다.

한·위·조(韓魏趙) 삼가가 당진(唐晉)을 삼분한 후에, 조나라는 조열후(趙烈侯 : 재위 기원전 408-387년)에 의해 관리들의 기강을 쇄신시켜 통치기구들을 개혁하고, 공덕과 능력의 크고 작은 것을 기준하여 인재들을 등용함으로 해서 근검절약의 풍토과 재정수지의 균형을 이루는데 전력을 기우렸다. 그 결과로 조나라는 새로이 일어나는 봉건국가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이어서 조나라의 세계는 경후(敬侯 : 재위 387-375년 ), 성후(成侯 : 재위 375-350년), 숙후(叔侯 : 재위 350-326년)를 지나 무령왕 대에 이르렀다.

무령왕은 조나라를 강대국으로 일으키기 위해서 군제를 개혁해야 되겠다고 결정했다. 당시 조나라의 북쪽 변경에 살고 있었던 호인(胡人)들은 모두가 용맹하고 싸움에 능하여 그들의 장점을 조나라 사람들은 항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었다. 그래서 무령왕은 군사적인 면에서 호인들의 전술을 도입하려고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역사상 호복기사(胡服騎士) 제도의 도입이다. 무령왕은 당시 전차병을 위주로 구성되었던 군대 편제에 기병대를 건설했다. 이것은 확실히 획기적인 조치였고, 당시로써는 인습에 얽매인 수많은 장애를 극복해야만 해야 했다. 그래서 ‘호복기사’라 불리우는 기병들은 모두가 호인들의 복장으로 바꿔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술을 읽혔다. 당시 호인들은 전투를 기병전 위주로 전개했기 때문에 전차전을 위주로 했던 중원 제후국들에 비해 기동성에 있어서 월등한 강점을 발휘했다. 그러나 무령왕이 진행한 호복기사 제도는 조나라에 대대적인 논쟁을 일으켰다. 《전국책(戰國策)ㆍ조책(趙策)》2편에는 당시 조나라의 지배계층이 두 파로 나뉘어 서로 논쟁한 정황이 기재되어있다. 노예제를 근간으로 하는 봉건사회가 시작된 이래, 중국문화는 중원문화를 중심으로 한 방향으로만 전개되어 왔다. 당시 중원민족은 스스로 중원문화야말로 세계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변경의 이민족의 문화를 도입하겠다는 정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봉착했다. 무령왕이 감행한 그와 같은 일련의 조치들은 실사구시에서 기인된 사상이며, 당시의 사회에 흐르고 있던 조류에는 진실로 창조적인 정신의 발로였다. 무령왕이 도입한 호복기사 제도는 중국의 군사사와 철학사 모두에 있어서 한 획을 긋고 있다.

무령왕이 시행한 그와 같은 개혁들은 매우 빠른 효과를 나타냈다. 몇 년 후에 조나라 군대의 전투력은 획기적으로 증대되어 그 힘으로 주변의 땅을 정복하여 그 강역을 크게 넓혔다. 이윽고 조나라의 국력이 어느 정도 신장되었다고 생각한 무령왕은 진나라와 비교해 볼 생각을 갖고 친히 진나라를 방문하여 정탐했다. 무령왕의 행동은 당시의 제후들에게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 운중의 길을 택하여 구원에서 남하하여 궁극적으로 함양성을 공격하겠다는 무령왕의 전략은 진나라의 측면과 배후에서 진나라로 공격하려는 구상은 매우 절묘하고 독특하여 보통사람이 쉽게 생각해 낼 수 없는 생각이었다. 애석하게도 너무 빨리 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이 태상왕이 되었다가 두 아들이 권력투쟁을 벌려 서로 살육전을 전개할 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해 결국은 자신도 그 와중에 굶어죽고 말았다. 이로써 무령왕이 진나라를 기습하려고 했던 원대한 구상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진나라는 그들의 기본 전략을 견지하며 활발하게 동진정책을 추진했다.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관동의 제후국들의 땅을 빼앗고 복종시키던 진소양왕은 맹상군이 쟁쟁한 재사들을 문하에 거느리고 제나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손에 넣기 위한 계책의 일환으로 맹상군을 진나라의 승상에 임명하려고 했다. 진왕의 목적은 제나라와의 관계를 증진시켜 관동의 기타 제후들을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진나라에 당도한 맹상군은 진나라 대신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었다. 소양왕 역시 맹상군이 진나라로부터 획득한 권력을 사용하여 제나라를 위해 음모를 꾸미지 않을까 의심하여 맹상군을 오히려 살해하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진나라의 감시망에서 몸을 빼내 도망치던 맹상군이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처지에 빠지게 되자, 그의 문객들 중 계명구도(鷄鳴狗盜)와 같은 무리의 도움으로 맹상군과 그의 일행들은 순조롭게 진나라를 탈출할 수 있었다. 맹상군은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독특한 혜안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능히 그 그릇의 크기에 따라 사람을 부릴 줄 알았다. 단지 가지고 있는 특기가 무엇이던 간에 그는 모두 문객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와 같은 특기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가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음은 데리고 있던 문객들이 각각의 특기를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맹상군의 인재에 관한 생각은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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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97회. 佯死逃秦(양사도진) 廷辱魏使(정욕위사)

제97회 佯死逃秦(양사도진) 廷辱魏使(정욕위사) 죽음을 가장하여 진나라로 달아난 범수는 위나라의 사자로 온 수가를 욕보여 원수를 갚았다.
양승국 04-05-11
[일반] 제96회 完璧歸趙(완벽귀조), 勇者取勝(용자취승)

제96회 完璧歸趙 單解韓圍(완벽귀조 단해한위) 화씨벽을 완벽하게 보존한 인상여와 진군에게 포위된 한나라를 일격에 구원한 조사 1. 懷
양승국 04-05-11
[일반] 제95회 樂毅滅齊(악의멸제), 火牛破燕(화우파연)

제95회 樂毅伐齊 火牛破燕(악의벌제 화우파연) 제나라를 정벌하여 연나라의 원수를 갚은 악의와 화우진(火牛陣)으로 연군을 물리치고 제나
양승국 04-05-11
[일반] 제94회. 馮驩彈鋏(풍환탄협) 桀宋招亡(걸송초망)

제94회 馮驩彈鋏 桀宋招亡 (풍환탄협 걸송초망) 맹상군의 식객이 되어 장검을 두드리며 노래 부른 풍환과 폭정으로 나라를 망친 송나라의 폭군
양승국 04-05-11
[일반] 제93회. 沙邱之變(사구지변), 慕名求相(모명구상)

제93회 沙邱之變 慕名求相(사구지변 모명구상) 사구궁에서 아사한 조나라의 무령왕과 맹상군의 명성을 사모하여 진나라의 상국으로 삼은 진소양왕
양승국 04-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