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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1:46:147641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2.강제(姜齊)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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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세가2. 강제(姜齊)

739. 申呂肖矣(신려초의)

신(申)과 여(呂) 두 나라가 쇠약해지자

740. 尙父側微(상보측미)

상보(尙父)는 보잘것없는 신세가 되었다가

741. 卒歸西伯(졸귀서백)

결국은 서백에게 귀의하여

742. 文武是師(문무시사)

주문왕과 주무왕의 스승이 되었다.

743. 功冠群公(공관군공)

그가 세운 공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으뜸이었고

744. 繆權于幽(무권우유)

권모술수에 제법 능했다.

745. 番番黃髮(번번황발)

그는 자기의 머리가 황백색으로 변한 90 노구에

746. 爰饗營口(원향영구)

제나라 땅인 영구(營口)를 봉지로 받았다.

747. 不背柯盟(불배가맹)

그의 후손 중 가(柯) 땅의 맹약을 배반하지 않았던

748. 桓公以昌(환공이창)

제환공은 그로 인하여 크게 일어나

749. 九合諸侯(구합제후)

제후들을 아홉 번이나 회합시킬 수 있었고

750. 覇公顯彰(패공현창)

패자가 되어 그 업적이 만고에 빛나게 되었다

751. 田闞전감쟁총)

후에 전상(田常)과 감지(闞가 제나라 군주의 총애를 다투다가

752. 姜姓解亡(강성해망)

이윽고 강성의 제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753. 嘉父之謀(가부지모),

상보(尙父)의 훌륭한 권모를 칭송하여

754. 作<齊太公世家>第二(작<제태공세가>제이)

<제태공세가>제이를 짓는다.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은 동해(東海)1)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요순(堯舜) 시절에 사악(四岳)2)이라는 벼슬을 살았고 하(夏) 나라의 우(禹)임금이 치수를 위해 토목공사를 벌릴 때 그를 보좌하여 큰공을 세웠다. 순(舜)과 우임금 때 여(呂)와 신(申) 땅에 봉해지고 강(姜)을 성(姓)으로 받았다. 하상(夏商) 양대에 걸쳐 신(申)과 여(呂) 땅의 봉지는 강씨들의 방계 자손들에게 전해졌으나 후대에 이르러 몰락하여 평민으로 되었다. 여상(呂尙)은 강씨들의 먼 후손이다. 여상의 본성은 강씨이나 그들의 조상의 봉지가 여(呂)땅이었음으로 그의 이름을 여상(呂尙)이라고 지어 부르게 되었다.

여상은 젊었을 때부터 곤궁하게 살다가 나이가 들어 낚시를 하면서 주나라의 서백(西伯)을 만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서백이 도성 밖으로 순수(巡狩)를 나갈 때 점을 쳐보게 하였다. 점괘가 다음과 같이 나왔다.

「사냥 나가서 잡히는 것은 용이나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나 곰도 아닐 것이다. 잡히는 것은 패왕의 업을 이루게 할 수 있는 신하일 것이다.」

서백이 사냥을 나가서 과연 위수(渭水)의 북쪽 강가에서 태공을 만나게 되었다. 서백이 태공과 대화를 나누어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말했다.

「우리나라의 선군(先君)이신 태공(太公)3)께서 예전에 ‘장차 성인(聖人)이 와서 우리 주나라를 크게 일어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혹시 당신이 바로 태공께서 말씀하신 성인이 아닙니까? 우리는 태공 이래 참으로 오랫동안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여상을 태공이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뜻에서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두 사람이 수레에 같이 타고 도성으로 돌아와 여상을 태사(太師)로 높여 받들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태공은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옛날에 이미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을 섬겼다가 주왕이 무도하여 그의 곁을 떠나서 천하를 돌아다니며 열국의 제후들에게 유세하였으나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하다가 마지막으로 서쪽으로 가서 주의 서백에게 의탁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의 말에 따르면 여상은 곧 초야에 묻혀 사는 처사로 동해의 바닷가에 숨어살다가 주나라 서백이 주왕에게 잡혀 유리(羑里)에 감금당해 있을 때, 서백의 신하인 산의생(散宜生)과 굉요(閎夭)가 여상의 높은 이름을 듣고 불러서 서백의 석방을 부탁했다고 했다. 여상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말했다.

「서백이 어질고 덕이 높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또한 변함없이 노인들을 공경하고 보살피고 있는데 내가 어찌 서백을 위해 가서 힘을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 사람이 서백을 구하기 위해 미녀와 희귀한 보물들을 구해 주왕에게 바치고 서백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빌었다. 서백은 이 일로 해서 구금에서 풀려나 주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비록 여상이 주나라의 신하가 된 과정에 대한 설은 각기 틀리지만 문왕과 무왕의 스승이 되었다는 내용은 공통적으로 일치한다.

서백 창(昌)이 유리(羑里)에서 풀려나 주나라로 돌아오고 나서, 비밀리에 여상과 상의하여 나라에 덕정을 베풀어 신장시킨 국력으로 상주(商紂)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여상이 세운 계획 중에는 많은 부분이 용병에 관한 권모(權謀)와 기계(奇計)였다. 그래서 후대에 논하게 되는 용병술이나 주 왕조 때의 비밀스러운 권모술수는 모두 태공이 세운 기본 책략에 의해서였다. 서백이 이어서 정치를 잘하여 나라를 태평하게 만들었다. 특히 우(虞)4)와 예(芮)5) 나라 사이에 벌어졌던 영토분쟁이 명쾌하게 해결6)된 후에 사람들이 시를 지어 문왕이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다고 칭송하였다. 서백이 다시 숭국(崇國), 밀수(密須)와 견이(犬夷)를 토벌하여 멸하고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일으켜 풍(豊) 땅에 성읍을 건설하였다. 천하의 삼분의 이가 넘는 제후들이 주나라에 복종하였다. 이것은 대부분이 태공이 계획하고 실행한 결과였다.

문왕이 죽고 그 아들 무왕(武王)이 즉위하였다. 재위 9년에 무왕은 문왕의 생각하고 있던 대업을 이어받아 완성하려고 하여 동쪽으로 나가 상주(商紂)를 토벌한다고 하면서 제후들이 모이는지의 여부를 살펴보려고 하였다. 군사들이 출동할 때가 되자 무왕은 태공을 사상보(師尙父)7)로 더욱 높여 부르게 하고 그의 왼손으로는 황월(黃鉞)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백모를 잡게 한 다음 군사들을 향해 맹세하게 하였다.

「창시(蒼兕)7)여, 창시(蒼兕)여! 군사들를 이끌고 배들을 집결하게 하라! 시간에 대지 못하는 자들은 참수하라! 」

그래서 군사들이 모두 맹진(盟津)에 당도하였다. 각국의 제후들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군사들을 이끌고 종군하여 그 수가 8백이 넘었다. 제후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주를 정벌할 수 있겠습니다.」

무왕이 말했다.

「아직 때가 아니다!」

무왕이 군사를 물리쳐 주나라로 돌아가서 태공과 같이 <태서(太誓)8)>라는 책을 썼다.

다시 2년 후에 상주가 충신 비간(比干)9)을 죽이고 기자(箕子)10)를 감옥에 가두었다. 무왕이 다시 상주를 정벌하기 위해 점을 쳐보게 했다. 거북등의 점괘가 불길하게 나오며 갑작스럽게 돌풍과 비바람이 몰아쳤다. 군신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였으나 오로지 태공만이 혼자서 무왕에게 진군하기를 권했다. 무왕이 태공의 권함을 듣고 군사들을 진군시켰다.

무왕 11년 정월 갑자일(甲子日)에 목야(牧野)에 군사를 집결시켜 맹세하고 상주를 정벌하기 위해 진군했다. 상주의 군사들은 크게 붕궤되고 주왕(紂王)은 몸을 피해 도망쳐 녹대(鹿臺)11)에 올랐다. 주나라 군사들이 뒤를 쫓아 주왕(紂王)을 죽였다. 그 다음 날 무왕이 은나라 사직의 제단(祭壇) 앞에 서자, 군신들은 손으로 명수(明水)12)를 받들고, 위강숙(衛康叔)은 채색 비단을 땅에 깔았으며, 사상보(師尙父)는 제사에 쓸 희생을 끌고 왔다. 사일(史佚)은 책서(策書)를 보고 축문을 읽어 상주의 죄를 하늘에 고했다. 녹대의 재물들과 거교(鉅橋)13)의 양식들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비간의 묘를 높이 올리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였다. 구정(九鼎)14)을 옮겨 주나라의 정치를 쇄신하여 온 천하의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으로 일신시켰다. 이러한 일들은 대부분이 사상보의 계책에 따른 것이다.

이로써 무왕은 상나라를 평정하고 천하의 제왕(帝王)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사상보를 제(齊) 땅의 영구(營丘)15)에 봉했다. 태공이 동쪽의 봉지로 부임하러 길을 떠났는데 도중에 여러 날을 역사에 묶어 그 행차가 매우 더디었다. 역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말했다.

「제가 듣기에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고 했습니다. 손님의 몸으로 잠을 매우 편안하게 자니 마치 봉지에 부임하러 가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태공이 듣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바로 출발하여 새벽녘에 영구에 당도하였다. 래후(萊侯)16)가 종족들을 이끌고 와서 영구를 공격하였다. 영구는 래국과 국경이 서로 접해 있었다. 래인은 동이족이 세운 이민족의 나라였다. 주왕이 폭정을 하여 어지러워진 천하를 주나라가 평정은 했지만 먼 변방까지는 아직 령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래국이 영구를 침입하게 된 것이다.

태공이 봉지에 부임하여 정치를 일신하고 당지의 습속을 따르고 예절을 간편하게 하였다. 이어서 상업과 공업을 일으켜 바닷가에서 나는 해산물과 소금으로 이익을 취하자 수많은 백성들이 제나라에 귀순하였다. 이로써 제나라는 동방의 강국이 되었다. 주무왕이 죽고 뒤를 이은 성왕(周成王)이 아직 나이가 어렸음으로 관숙(管叔)17)과 채숙(蔡叔)18)이 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회(淮)와 이(夷)도 주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주공이 소강공(召康公)19)을 시켜 태공에게 천자(天子)의 명을 전하게 했다.

「동쪽으로는 바다에, 서쪽으로는 하수(河水), 남쪽으로는 목릉(穆陵)20), 북쪽으로는 무체(無棣)21)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오후구백(五侯九伯)22)일지라도 잘못을 저지른다면 너희 제나라가 천자를 대신해서 정벌하도록 하라!」

이로써 제나라는 주변의 땅을 정벌하여 대국이 되었다. 제나라는 그 도읍을 영구에 두었다.

강태공(姜太公)은 나이를 백 세를 넘기고 죽었다. 아들 정공(丁公) 급(伋)이 뒤를 이었다. 정공이 죽고 그 아들 을공(乙公) 득(得)이 섰다. 을공이 죽자 아들 계공(癸公) 자모(慈母)가 뒤를 잇고 다시 계공이 죽고 아들 애공(哀公) 부신(不辰)이 차례로 뒤를 이었다.

애공(哀公) 재위시 기후(紀侯)가 주왕에게 참소했다. 애공을 소환한 주왕은 그를 가마솥의 끓는 물에 삶아 죽였다. 주왕은 애공의 동생인 정(靜)을 제후로 세웠다. 이가 호공(胡公)이다. 호공은 제나라의 도읍을 박고(薄姑)23)로 옮겼다. 당시 주나라의 천자는 이왕(夷王)이었다.

애공의 동모형제로써 막내인 산(山)이 호공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규합하여 영구(營丘)의 백성들을 이끌고 호공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스스로 제후(齊侯)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헌공(獻公)이다. 헌공 원년에 호공의 아들들을 모조리 나라 밖으로 추방하였다. 헌공은 제나라의 도성을 다시 박고에서 임치(臨淄)로 옮겼다.

헌공이 재위 9년 만에 죽고 아들 무공(武公) 수(壽)가 그 뒤를 이었다.

무공 9년, 기원전 841년에 주려왕(周厲王)이 국인들의 반란에 의해 도성에서 쫓겨나 체(彘) 땅으로 몸을 피했다. 무공 10년 왕실에 내란이 일어나 대신들이 협력하여 주나라를 다스렸다. 이 시기를 공화(共和)24)라 했다.

무공 24년, 기원전 827년, 대신들이 주선왕을 주왕의 자리에 앉히고 주나라의 정권을 돌려주어 공화가 끝났다.

무공이 재위 26년 만인 기원전 825년에 죽고 그의 아들 려공(厲公) 무기(无忌)가 뒤를 이었다. 려공은 성격이 포학하여 인심을 잃자 옛날 헌공에 의해 쫓겨난 호공의 아들 중 한 명이 제나라에 들어와 군주의 자리를 노렸다. 제나라의 국인들이 호공의 아들을 맞이하여 힘을 합하여 려공을 습격하여 죽였다. 그러나 려공과의 싸움 중에 호공의 아들도 역시 전사하고 말았다. 제나라 국인들은 려공의 아들 적(赤)을 제후로 받들었다. 이가 제문공(齊文公)이다. 그러나 제후의 자리에 오른 제문공은 오히려 려공의 다른 70여 명의 아들들을 모조리 죽였다.

문공이 재위 12년 만인 기원전 804년에 죽고 그의 아들 성공(成公) 탈(脫)이 뒤를 이었다.

성공이 재위 9년 만인 기원전 795년에 죽고 그의 아들 장공(庄公) 구(購)가 뒤를 이었다.

장공 24년 기원전 771년, 견융(犬戎)이 주나라를 공격하여 주유왕을 죽였다. 주왕실은 호경을 버리고 낙읍으로 동천하였다. 섬진(陝秦)이 제후에 임명되어 열후(列侯)의 반열에 서기 시작했다.

장공 56년 기원전 739년 당진(唐晉)의 국인들이 그 군주인 소후(昭侯)를 죽였다.

장공이 재위 64년 만인 기원전 731년에 죽고 그의 아들 희공(釐公) 록보(祿甫)가 뒤를 이었다.

희공 9년 기원전 722년, 노은공(魯隱公)이 노나라 군위에 올랐다.25)

희공 19년 기원전 712년 노환공(魯桓公)이 그의 이복형 은공(隱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노후의 자리에 올랐다.

희공 25년 기원전 706년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침입해 왔다. 정나라가 세자 홀(忽)을 보내 제나라를 도왔다. 희공이 홀(忽)을 사위로 삼으려 했다. 정세자(鄭世子) 홀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희공의 청혼을 거절했다.

「정나라는 소국이고 제나라는 대국이라, 내가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희공 32년 기원전 699년, 희공의 동모제(同母弟) 이중년(夷仲年)이 죽었다. 이중년에게는 이름은 공손무지(公孫无知)라는 아들이 있었다. 희공이 매우 사랑하여 그의 작록(爵祿) 및 거마(車馬)와 복식(服飾), 봉록(俸祿)의 등급 등을 모두 태자와 똑같이 주도록 하고 그를 대할 때는 태자에게 하는 것처럼 하도록 했다.

희공 33년 기원전 698년 희공이 죽고 태자 제아(諸兒)가 제후의 자리를 이었다. 이가 제양공(齊襄公)이다.

양공 원년 기원전 697년, 옛날 태자 시절에 공손무지와 싸운 적이 있었던 제양공은 그때의 원한을 잊지 않고 있다가, 제후의 자리에 오르자 무지가 누리고 있던 태자에 준하던 대우를 빼앗고 그 봉록을 깎아 버렸다. 무지가 그 일로 인하여 양공을 원망하게 되었다.

양공 4년 기원전 694년 , 노환공)이 그의 부인과 함께 제나라를 방문하였다. 제양공은 이미 옛날에 노부인과 사통한 적이 있었다. 양공의 배다른 여동생인 노부인은 희공이 살아 있을 때 노환공에게 출가했었다. 노부인이 제나라에 들리자 양공은 옛날처럼 노부인과 다시 정을 통했다. 노환공이 알고 그 부인의 행위에 대해 분노했다. 노부인은 그 사실을 양공에게 알렸다. 제양공이 노환공을 술자리에 초청하여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다음, 장사 팽생(彭生)을 시켜 환공을 안아 수레에 태우는 척 하면서 허리를 껴안아 늑골을 부러뜨려 죽였다. 노나라 국인들이 자기들 군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제나라에 추궁하자 제양공은 팽생을 죽여 노나라에 사죄하는 것으로 하였다.

양공 8년 기원전 690년, 기(紀)나라를 정벌하자 기나라는 그들의 도읍을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양공 12년 기원전 688년 연초에 양공이 연칭(連称)과 관지보(管至父)를 시켜 규구(葵丘)26)에 주둔하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게 하면서 다음해 오이가 익는 시절이 돌아오면 교대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연(連), 관(管) 두 장수가 일 년을 주둔하고, 이윽고 계절이 돌아와 오이가 익었음에도 양공은 두 사람을 교대해 주지 않았다. 두 장수가 사람을 보내 교대해 주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노하여 공손무지와 모의하여 란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연칭의 여동생은 양공의 후비로써 궁궐에 살았지만 양공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연칭이 자기의 여동생에게 양공의 동정을 살펴 자기에게 알리라고 하면서 말했다.

「만일 일이 성사되면 제나라의 새로운 군주로 추대되는 무지의 부인이 되도록 하겠다.」

그해 겨울 12월에 양공이 고분(姑棼)27)에 놀러나갔다가 다시 패구(沛丘)로 가서 사냥을 즐겼다. 사냥을 하던 중에 커다란 멧돼지를 보았는데 옆에 있던 시종은 그것을 팽생(彭生)이라고 소리쳤다. 양공이 노하여 활로 멧돼지를 쏘았다. 멧돼지가 사람처럼 두발로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울었다. 양공이 그 소리에 놀라 수레에서 떨어져 발을 다치고 신고 있던 신발을 잃어 버렸다. 공궁으로 돌아온 양공은 자기의 신발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양공의 신발을 관장하던 시종 비(茀)를 채찍으로 300대를 때리고 공궁 밖으로 쫓아냈다. 그때 공손무지, 연칭, 관지보 등은 양공이 수레에서 굴러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공궁을 습격하려고 몰려오다가 공궁 밖에서 서성이고 있던 비(茀)를 만났다. 비가 그들을 보고 말했다.

「제가 안으로 들어가 정세를 살펴보겠습니다. 잠시 밖에 머물어 궁궐 안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궁궐 안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 쉽게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무지가 믿지 않자, 비가 자기의 옷을 벗으며 등뒤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때서야 그들 일행이 비로소 믿고 자기들은 궁궐 밖에서 기다리고 비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비가 양공의 처소로 들어가 그를 문과 문사이의 틈에 숨게 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비로부터 소식이 없자 무지의 일행은 일이 잘못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일제히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비가 안에서 양공이 총애하던 시종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가 무지의 반란군을 공격하였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모두 살해되었다. 무지 일행은 궁궐 안으로 들어와 양공의 행방을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일행 중 한 명이 쪽문 사이로 나와있는 양공의 발을 발견하고 말았다. 문을 열고 보니 과연 양공이 숨어 있었다. 무지가 양공을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 무지는 스스로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제환공(齊桓公) 원년 기원전 685년 봄에 제군(齊君) 무지가 옹림(雍林)28)에 놀러 나갔다. 옛날 무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옹림의 대부가 사람들을 동원하여 무지를 습격하여 죽이고 제나라의 대부들에게 말했다.

「무지가 양공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소신이 삼가 그를 죽였습니다. 부디 대부들께서는 다른 공자들 중에서 가려 제후의 자리에 세우시기 바랍니다. 소신은 오로지 대부들의 처분만 바라겠습니다.」

옛날에 양공이 술자리에서 노환공을 취하게 한 다음 죽이고, 이어서 그 부인과 간통했다. 또한 양공은 부당하게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며, 다른 사람의 부녀자들을 범하고, 대신들을 수없이 속였다. 이에 여러 공자들은 그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양공의 바로 밑의 동생인 규(糾)와 소백(小白)은 타국으로 도망쳐 몸을 피했다. 모친의 노나라 출신인 규는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의 보좌를 받아 노나라로 몸을 피하고, 소백은 포숙(鮑叔)의 보좌를 받아 거(莒)나라로 도망쳤다. 위(衛)나라 출신인 소백의 모친은 제희공(齊僖公)의 총애를 받았었다. 소백은 젊었을 때부터 대부 고혜(高傒)와 친분이 있었다. 옹림(雍林)의 대부가 무지를 죽이고 제후를 세우는 일을 고혜 및 국의중(國懿仲)과 의논하자, 고(高), 국(國) 두 대부가 먼저 사람을 거나라에 보내 소백을 불렀다. 노나라는 무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군사를 내어 공자규를 호송하여 제나라의 군주로 세우려고 하였다. 우선 관중을 시켜 별도의 군사를 이끌고 거나라에서 제나라로 통하는 길을 막게 하였다. 제나라로 가는 길 도중에 매복하고 있던 관중은 소백이 나타나자 활을 쏘았으나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에 맞았다. 소백이 일부러 활을 맞아 죽은 체 하자 관중은 노나라로 되돌아가 자기가 소백을 죽였다고 고했다. 노나라는 이에 안심하고 공자규의 호송을 더욱 지체시켜 6일 만에야 제나라 도성 앞에서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소백이 이미 입성하여 고혜와 국의중의 추대를 받아 제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백이 제환공(齊桓公)이다.

환공은 그때 허리띠에 화살을 맞았으나 일부러 죽은 체 하여 관중을 속이고 온거(溫車)을 타고서 행군을 재촉하여 제나라에 들어갔었다. 제성(齊城)의 고혜와 국의중이 내응하여 소백을 성안으로 맞아들여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앉히고는 군사를 동원하여 노나라 군사들을 막았다. 그해 가을 제환공은 노나라와 건시(乾時)29)에서 싸워 그 군사들을 패주시켰다. 제군이 패주하는 노군의 뒤를 추격하여 퇴로를 차단한 후에 노장공에게 편지를 써서 말했다.

「자규(子糾)는 피를 나눈 형제라 내가 차마 죽이지 못하겠으니 청컨대 노나라가 대신 죽여주기 바란다. 소홀과 관중은 나의 철천지원수라 내가 산채로 잡아온 그들의 살코기를 썰어 젓갈을 담궈 나의 원한을 풀겠다. 나의 청을 거절한다면 노성(魯城)을 공격하겠다.」

노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자규를 생두(笙竇)30)에서 죽였다.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관중은 함거에 실려 제나라에 돌아가기를 청했다. 제후의 자리를 확고하게 다진 제환공은 군사를 동원하여 노나라에 있는 관중을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 포숙아(鮑叔牙)가 말했다.

「신이 주공을 모시는 행운을 갖게 되어 이제 제나라의 군위에 앉으신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군께서 존귀한 군주가 되셨으니 신으로써는 더 이상 주군의 지위를 높일 수 없습니다. 주군께서는 제나라만을 다스릴 생각이시라면 고혜와 이 숙아(叔牙)만으로도 가능한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주군께서 천하를 제패하려는 뜻을 가지고 계시다면 관이오(管夷吾)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오를 불러 제나라에 머물게 한다면 우리 제나라의 국세는 크게 신장될 것입니다. 부디 관이오를 놓치시지 마시고 제나라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제환공은 포숙아의 말을 따랐다. 그래서 원한을 갚는다고 관중의 송환을 원한다고 노나라에 말했지만 사실은 그를 임용하기 위해서였다. 관중은 그 뜻을 알고 스스로 죄수의 몸으로 제나라에 송환되기를 자청했다. 포숙아가 당부(堂阜)31)까지 마중 나가 관중의 질곡(桎梏)32)을 풀어주고 재발(齋袚)33)을 시킨 후에 제환공 앞으로 인도했다. 예를 갖추어 극진하게 관중을 맞이한 환공은 그를 대부의 직에 제수하고 제나라 정사를 맡겼다.

환공이 관중을 얻고 이어서 포숙, 습붕(隰朋), 고혜 등을 등용하여 제나라의 국정을 쇄신하였다. 관중은 오가지병(五家之兵)34)의 군사제도와 경중렴산(輕重斂散)35)의 곡가조절책(穀價調節策)을 시행하고, 동해에서 산출하는 해산물과 소금에서 나오는 이익를 취해 곤궁한 백성들을 구휼하고 어질고 재능있는 사람들을 임용하여 제나라의 정사에 임하자 제나라는 크게 다스려졌다. 제나라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환공 2년 기원전 684년, 담국(郯國)36)을 정벌하여 멸했다. 옛날 거나라로 망명할 때 담국을 지나가게 된 환공을 담국의 군주가 무례하게 대한 원한을 갚은 것이다.

환공 5년 기원전 681년, 노나라를 정벌하여 그 군사들을 패주 시켰다. 노장공이 수읍(遂邑)37)을 바치며 강화를 청했다. 제환공이 허락하고 노장공(魯庄公)과 가(柯) 땅에서 만나 회맹하려고 하였다. 회맹장에 노장공을 따라나선 조말(曺沫)이 제단에 올랐을 때 비수를 들고 제환공을 위협하며 말했다.

「노나라를 침략하여 빼앗아 간 땅을 돌려주시오!」

환공이 위협에 굴복하여 돌려주겠다고 허락했다. 그러자 조말이 비수를 거두고 북면하여 여러 신료들의 반열로 돌아갔다. 환공이 후회하여 땅을 돌려주지 않고 조말을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 관중이 환공에게 말했다.

「대저 위협에 굴하여 허락했다 하더라도 그 말을 뒤집고 위협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단지 조그만 기분풀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제후들의 믿음을 저버리게 되어 천하로부터 신의를 잃게 되는 일이니 마음을 바꾸시면 안 됩니다.」

제환공은 관중이 말을 쫓아 노나라와 세 번 싸워서 얻은 땅들을 모두 노나라에 돌려주어 조말과의 약속을 지켰다. 제후들이 모두 이 일을 전해 듣고 제나라를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환공 7년 기원전 679년, 제후들이 견(甄)38) 땅에서 회맹하였다. 제환공이 이때부터 패자(覇者)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환공 14년 기원전 672년, 진려공(陳厲公)의 아들 진완(陳完)이 망명해왔다. 진완의 호는 경중(敬仲)이다. 제환공이 경(卿)으로 삼으려 했으나 진완이 사양하고 하급직을 원해 공정(工正)39)으로 삼았다. 진완은 나중의 전성자(田成子)40) 상(常)의 조상이 되었다.

환공 23년 기원전 663년, 산융(山戎)41)이 연나라를 침략하자 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제환공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국(孤竹國)42)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연장공(燕庄公)은 귀환하는 환공을 제나라 국경까지 따라와서 전송했다. 환공이 연백(燕伯)에게 말했다.

「천자를 제외하고는 제후들은 손님을 전송하기 위해 국경 밖까지 나오는 행위는 예에 벗어난 일입니다. 나는 연나라에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환공은 그 즉시 도랑을 파게 하여 그 도랑 이북의 땅은 모두 연나라에 주었다. 환공은 연백에게 옛날 소공(召公)의 치세를 이루어 주왕실의 성왕과 강왕 때와 같이 납공(納貢)하도록 명했다. 제후들이 듣고 모두가 제나라에 승복하였다.

환공 27년 기원전 659년, 환공의 여동생이며 노민공(魯湣公)의 모(母) 애강(哀姜)이 공자 경보(慶父)와 사통했다. 이에 경보는 민공을 시해했다. 애강이 경보를 노후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으나 노나라 국인들은 희공을 앉혔다. 환공이 애강을 제나라로 불러 도중에 죽였다.

환공 28년 기원전 658년, 위문공(衛文公)이 적군(狄軍)의 침입을 받아 나라를 잃고 도망쳐서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제환공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이끌고 와서 초구(楚丘)에 성을 쌓고 위나라를 다시 세워주었다.

환공 29년 기원전 657년, 환공과 그 부인 채희(蔡姬)가 궁중의 연못에 뱃놀이를 나갔다. 채희는 자기가 평소에 물에 익숙한 것을 믿고서 배를 좌우로 매우 흔들어 댔다. 환공이 매우 놀라 그만하도록 명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배에서 나언 환공이 크게 화를 내고 채희를 채나라에 돌려보냈으나 부부의 인연만큼은 끊지 않았다. 쫓겨온 채희를 본 채후(蔡侯)도 역시 분개하여 채희를 다른 제후국으로 개가를 시켰다. 환공이 듣고 또한 노하여 군사를 소집하여 채나라 정벌 길에 올랐다.

환공 30년 기원전 656년 봄, 제환공이 제후들을 인솔하고 채나라를 공격하자 채나라의 군사들은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이어서 군사들을 계속 남쪽으로 진군하게 하여 초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초성왕(楚成王)도 역시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하여 먼저 사자를 보내 제환공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먼 길을 행군하여 우리나라 땅을 범하는가?」

관중이 초나라 사자에게 대신 대답했다.

「옛날 주천자께서 소강공(召康公)을 시켜 우리나라 개국조이신 태공께 명하시기를 ‘오후구백(五侯九伯)이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면 너희 제나라는 임의로 정벌하여 주왕실을 보필하라.’라고 하셨소. 그리고 우리의 선군께 정벌해야할 경계를 정해주시기를,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하수, 북쪽으로는 무체수(無棣水), 남쪽으로는 목릉(穆陵)에 해당한다고 하셨소. 초나라가 포모(包茅)43)를 공물로 바치지 않아 왕실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사용하는 술을 거르지 못하게 하여 우리가 이에 대한 죄를 묻고자 함이며 옛날 주소왕(周昭王)이 남쪽에 순수 나왔다가 돌아오지 않은 연유를 묻기 위해서요.44)」

초왕이 대답했다.

「우리가 공물을 바치자 않은 것은 과인에게 죄가 있다고 하겠으나 소왕이 남쪽으로 나와 돌아가지 않은 것은 어찌하여 한수의 물가에 가서 물어보지 않는 것인가?」

제환공이 이끄는 중원 제후들의 연합군은 형(陘)45) 땅으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여름이 되자 초왕이 굴완(屈完)을 사자로 보내 제환공이 이끄는 연합군들의 전진을 막게 했다. 중원의 연합군은 소릉(召陵)46)으로 후퇴하여 그곳에 진을 치고 주둔했다. 환공이 굴완에게 중원 제후국들의 연합군을 열병시켜 그 수가 많음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굴완이 보고 말했다.

「군주께서 만일 도리로써 우리를 대하면 우리가 승복하겠으나 만일 힘으로 대하겠다면 우리는 방성(方城)47)을 의지하고 강수(江水)와 한수(漢水)를 해자로 삼아 군주의 군사들의 진격을 막을 것인데 군주께서 어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제환공이 굴완과 삽혈의 의식을 행하여 회맹을 맺고 돌아갔다. 환공의 군사들이 진(陳)나라를 지날 때 진나라 대부 원도도(袁濤塗)가 거짓말을 하여 제나라 군사들을 동쪽으로 우회해서 진군하도록 만들었다.48). 환공은 행군도중에 원도도에게 속은 사실을 알고 그해 가을 제나라가 진나라를 정벌했다. 이해에 당진이 태자 신생(申生)을 죽였다.

환공 35년 기원전 651년 여름, 제환공이 제후들을 규구(葵丘)로 불러 회맹 하였다. 주양왕(周襄王)이 재공(宰孔)을 왕사로 삼아 문왕과 무왕에게 제사 지낸 고기와 동궁호시(彤弓弧矢), 대로(大輅)를 하사하면서 절을 올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환공이 왕명에 따르려고 하자 관중이 옆에서 불가하다고 하면서 절을 올리고 하사품을 받들라고 간했다. 관중의 말을 따른 환공이 땅에 엎드려 재배를 올린 후에 하사품을 받았다. 그해 가을 다시 제후들을 규구에 소집한 환공은 그 태도가 더욱 교만했다. 주나라가 재공을 보내 회맹에 참석하게 하였다. 제후들 중 제나라에 승복하지 않는 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진의 헌공(獻公)이 회맹에 참석하다가 도중에 병이 나서 시간에 대지 못하고 늦게 오다가 회맹이 끝나 돌아가던 재공을 만났다. 재공이 당진의 헌공에게 말했다.

「제후(齊侯)가 교만하니 참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

그래서 헌공이 회맹장에 가다말고 돌아갔다. 그해에 진헌공이 죽었다. 당진의 리극(里克)이 해제(奚齊)와 탁자(卓子)를 죽였다. 섬진(陝秦)의 목공(穆公)이 그 부인의 부탁으로 공자 이오(夷吾)를 호송하여 당진의 군주로 세웠다. 환공이 당진의 란을 평정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고량(高粱)49)에 이르렀다가 섬진이 이오를 환국시켜 당진의 군주의 자리에 이미 앉혔다는 소식을 듣고 습붕(隰朋)을 사자로 삼아 당진국에 보내 이오의 즉위를 인정하게 하고 자기는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이때에 이르자 주왕실의 세력은 더욱 쇠미해지고 오로지 제(齊), 초(楚), 당진(唐晉), 섬진(陝秦) 네 나라의 세력이 더욱 강성하게 되었다. 당진은 헌공 때 처음으로 중원 제후국들의 회맹에 참석하려고 하였으나 헌공이 곧바로 죽고 다시 당진은 내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섬진의 목공은 자기 나라는 스스로 변방의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여 중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초성왕(楚成王)은 형만(荊蠻)의 땅을 모두 병합하고 스스로 이적(夷狄)임을 자처하였다. 오로지 제나라만이 중원의 제후국들을 이끌고 회맹을 중재하였으며 제환공이 덕을 세상에 선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후들이 소집에 응하여 맹회에 참석하여 승복하였다. 그래서 환공이 스스로의 공을 자랑하며 말했다.

「과인이 남정하여 소릉에 이르러 웅산(熊山)50)을 바라볼 수 있었고, 북쪽으로는 산융(山戎), 이지(離支)51), 고죽(孤竹)52)을 정벌하였다. 서쪽으로는 대하(大夏)53)를 정벌하고 유사(流沙)54)를 건너 속마현거(束馬懸車)55)하여 태항산을 넘어 비이산(卑耳山)56)에 오르고 돌아왔소. 제후들 중 아무도 감히 과인의 명을 거역하지 못했으며 병거를 타고 회맹을 소집하기를 세 번, 수레를 타고 회맹을 소집하기를 여섯 번, 모두 구합제후(九合諸侯)57)를 하고 한번은 주왕실을 바로 잡았소. 옛날 삼대(三代)58)가 천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를 연 공업과 무엇이 다르겠소? 이로써 나는 태산(泰山)과 양보산(梁父山)에 봉선(封禪)59)을 행하려고 하오.」

관중이 한사코 말렸으나 환공은 듣지 않았다. 결국은 먼지방의 제후들로 하여금 진기한 보물들과 기이한 물건들60)이 나타나야만 봉선(封禪)을 행할 수 있다고 하자 환공이 그만 두었다.

환공 38년 기원전 648년, 주양왕(周襄王)의 동생 대(帶)가 융(戎), 적(翟)과 통하여 주나라를 공격하자, 환공이 관중을 시켜 융과 주나라 사이를 화해하게 만들었다. 주양왕이 관중을 상경(上卿)61)에 해당하는 예로써 자기를 조현(朝見)하라고 하자 관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은 배신(陪臣)62)이온데 어찌 감히 상경이 취하는 예를 행할 수 있겠습니까?」

관중이 세 번을 사양하고 결국은 하경(下卿)이 행하는 예를 따라 천자를 조현하였다.

환공 39년 기원전 647년, 주양왕(周襄王)의 동생 대(帶)가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제나라가 중손(仲孫)을 보내어 대를 대신하여 용서를 청했다. 천자가 화를 내며 허락하지 않았다.

환공 41년 기원전 645년, 섬진의 목공이 당진의 혜공(惠公)을 싸움 중에 포로로 잡았다가 다시 놓아주었다. 그해 관중과 습붕이 연달아 죽었다. 관중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있을 때 환공이 문안을 와서 그 후임에 대해 물었다.

「군신들 중 누구에게 상국의 일을 맡길만 합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신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 군주가 제일 잘 알고 있는 법입니다.」

「이아(易牙)63)는 어떻겠습니까?」

「자기의 자식까지 죽여 주군을 모시고 있으니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결코 쓰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개방(開方)64)은 어떻습니까?」

「자기의 부모를 등지고 주군을 모시고 있으니 역시 사람의 도리에 벗어난 자입니다. 결코 가까이 두지 마십시오.」

「수도(豎刁)65)는 어떻습니까?」

「스스로 거세하여 주군을 모시고 있으니 사람의 도리에 벗어난 자입니다. 결코 총애하면 안 됩니다.」

얼마 후에 관중이 죽었으나 환공은 관중의 말을 듣지 않고 세 사람을 계속 가까이 두고 지냈다. 세 사람의 환공의 총애을 믿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환공 42년 기원전 644년, 융(戎)이 주나라를 침략해 왔다. 주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다. 제환공이 제후들에게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주나라를 지키라고 명하였다. 그해에 당진의 공자 중이(重耳)가 제나라로 망명해 왔다. 환공이 종녀를 뽑아 중이의 처로 삼게 하였다.

환공 43년 기원전 643년, 제환공이 죽었다. 원래 제환공에게는 정부인이 세 명이 있었다. 이름하여 왕희(王姬), 서희(徐姬), 채희(蔡姬)라고 했는데 모두 슬하에 소생이 없었다. 환공은 평소에 여색을 매우 좋아하여 많은 총희(寵姬)가 있었다. 그 중에서 정부인에 준하는 부인 여섯을 두었다. 장위희(長衛姬)는 무궤(無詭)를, 소위희(小衛姬)는 원(元)을, 정희(鄭姬)는 소(昭)를, 갈영(葛嬴)은 반(潘)을, 밀희(密姬)는 상인(商人)을, 송화자(宋華子)는 옹(雍)을 낳았다. 관중이 살아 있었을 때 환공과 상의하여 소(昭)를 태자로 삼고 그 뒤를 송양공에게 부탁하였다. 옹무가 장위희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내시 수조가 옹무를 다시 환공에게 좋은 말로 천거하자 환공이 옹무도 같이 총애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환공에게 무궤를 태자로 세워야 한다고 청하자 환공이 허락하였다. 관중이 죽자 다섯 명의 공자들이 서로 세자가 되려고 다투었다. 그해 겨울 10월 을해(乙亥) 일에 제환공이 죽었다. 이아(易牙)와 수조가 환공의 침실로 들어가 내총(內寵)66)들과 힘을 합하여 여러 관리들을 죽이고 공자 무궤를 군주의 자리에 앉혔다. 태자 소는 송나라로 달아났다. 환공이 병들어 눕게 되었을 때부터 다섯 공자들이 서로 사당을 만들어 제나라 군주의 자리를 다투었다. 이윽고 환공이 죽자 여러 공자들은 사병들을 동원하여 서로 싸워 궁궐에는 사람이 사라져 환공의 시신을 위한 관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환공의 시신이 침상에 방치된 상태로 67일이나 지나게 되어 시체에서 생긴 벌레가 건물 밖에까지 기어 나왔다. 12월 을해(乙亥) 일에 무궤(無詭)가 제후의 자리에 오르고 이어서 시신을 관에 안치하고 부고를 발했다. 이어서 신사(辛巳) 일 밤에 염빈(殮殯)67)을 행하였다.

환공의 십여 명의 아들 중 후계를 다툰 아들들은 다섯 명이었다. 무궤는 선지 3달만에 죽어 시호가 없고, 세자 소(昭)가 효공(孝公)으로, 반(潘)이 소공(昭公)으로 상인(商人)이 의공(懿公)으로, 원(元)이 혜공(惠公)으로 차례로 군위에 올랐다.

효공 원년 기원전 642년, 3월에 송양공(宋襄公)이 제후들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태자 소를 제후(齊侯)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제나라를 정벌했다. 제나라 국인들이 두려워하여 그들의 군주인 무궤를 죽였다. 제나라 국인들이 태자 소를 맞이하여 제후로 받들려고 하였으나 네 공자들의 무리가 힘을 합하여 태자를 공격하자 태자는 다시 송나라로 도망쳤다. 송나라가 다시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네 공자들의 사병들과 싸웠다. 5월 송나라 군사들이 네 공자들의 사병들을 패주 시키고 태자 소를 제후의 자리에 세웠다. 이가 제효공(齊孝公)이다. 환공이 살아 있을 때 태자의 후견인으로 송양공을 지명했기 때문에 송나라가 군사를 동원하여 제나라를 정벌한 것이다. 제나라의 내란으로 인하여 환공의 장례는 8월에 가서야 마칠 수가 있었다.

효공 6년 기원전 637년 봄, 송나라가 제나라에서 열리는 회맹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서, 제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했다. 그해 여름 송양공이 죽었다.

효공 7년 기원전 636년 중이(重耳)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이고 진문공(晉文公)이다.

효공 10년 기원전 633년, 제효공(齊孝公)의 동생 반(潘)이, 효공의 아들을 죽인 개방(開方)의 도움으로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제소공(齊昭公)이다. 소공은 환공의 아들로 그 모는 갈영(葛嬴)이다.

소공 원년 기원전 632년 당진의 문공이 초나라 군사들을 성복(城濮)에서 대파한 후에 제후들을 불러 천토(踐土)에서 회맹하고 주천자에게 조배를 드렸다. 주천자는 당진의 문공에게 방백의 칭호를 내렸다.

소공 6년 기원전 627년 적(翟)이 제나라를 침공해왔다. 당진의 문공이 죽었다. 섬진군(陝秦軍)이 효산(殽山)의 험지에서 당진군에게 크게 꺾였다.

소공 12년 기원전 621년, 섬진의 목공이 죽었다.

소공 19년 기원전 614년 5월 제소공이 죽고 그 아들인 세자 사(舍)가 뒤를 이었다. 사의 모(母)가 소공에게 총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국인들이 승복하지 않았다. 소공의 동생 상인은 환공이 죽었을 때 그 후계를 놓고 다투다가 뜻을 못 이루자 아무도 몰래 현사(賢士)들과 교분을 맺고 백성들을 따뜻하게 대하자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이윽고 소공이 죽고 그의 아들 사가 뒤를 이었으나 그는 어린 나이에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고 또한 유약하였다. 상인이 그해 10월에 소공의 묘소에 있던 사를 그의 무리들과 함께 가서 죽이고 스스로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제의공(齊懿公)이다. 의공은 환공의 아들이며 그 모친은 밀희(密姬)이다.

의공 4년 기원전 609년 봄의 일이다. 옛날 의공이 공자시절에 병융(丙戎)의 부친과 함께 사냥을 나가서, 사냥감을 놓고 다투다가 병융의 부친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다. 이윽고 의공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 그 때는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힌 시신을 꺼내어 그 다리를 잘랐다. 그리고 나서 의공은 병융을 융거를 모는 어자로 삼았다. 다시 용직(庸職)의 처가 아름답게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의공이 궁궐로 불러 잠자리를 같이하고는 용직에게는 참승(驂乘)을 시켰다. 그해 5월 의공이 신지(申池)에 놀러나갔다. 두 사람이 연못에서 멱을 감으며 서로 장난을 치며 놀다가 용직이 병융에게 말했다.

「발을 잘린 자의 자식놈아!」

병융이 듣고 용직에게 대꾸하였다.

「아내를 빼앗긴 놈아!」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상하여 이어서 의공에게 원한을 갖게 되었다. 서로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의공과 대나무 밭으로 놀러 나가자고 의논한 후에 수레 위에서 의공을 시해하고 시체를 버려둔 채로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의공이 제후의 자리에 오르자 그 태도가 교만해졌음으로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다. 제나라 국인들이 의공의 아들을 폐하고 위나라에 도망가서 살고 있던 공자원(公子元)을 모셔와 제후로 세웠다. 이가 제혜공(齊惠公)이다. 혜공은 환공의 아들이며 그의 모친은 소위희(小衛姬)이다. 혜공은 제나라의 내란을 피해 외가이던 위나라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혜공 2년 기원전 607년 쳐들어온 장적(長翟)을 왕자성보(王子成父)가 공격하여 죽이고 그 시체를 임치성 북문 밑의 땅을 파고 묻었다. 당진의 조천(趙穿)이 그 군주인 영공(靈公)을 시해하였다.

혜공 10년 기원전 599년, 제혜공이 죽고 그의 아들 경공(頃公) 무야(無野)가 뒤를 이었다.

최저(崔杼)는 일찍이 혜공의 총애를 받았다. 이윽고 혜공이 죽자 고(高)와 국(國) 두 종족이 최저의 핍박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그를 나라 밖으로 쫓아냈다. 최저는 위나라로 도망쳤다.

경공 원년 기원전 598년 초나라의 장왕(庄王)이 그 강대함을 믿고 진(陳)나라를 정벌하였다. 이어서 다음 해에 정나라를 포위하자 정백이 초나라에 항복하였다. 초장왕이 정나라를 다시 복국시켜 주었다.

경공 6년 기원전 593년, 당진에서 절름발이 극극(郤克)68)이 사자로 왔다. 경공이 자기의 모부인(母夫人)으로 하여금 장막 뒤에 숨어서 지켜보도록 했다. 극극이 전당에 오르자 모부인이 장막 뒤에서 보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극극이 알고 당진으로 돌아오다가 하수에 이르러 맹세의 말을 했다.

「내가 이 치욕을 갚지 않으면 다시는 이 하수를 건너지 않으리라!」

당진에 돌아온 극극은 그 군주에게 제나라를 정벌전을 일으키겠다고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제나라 사자가 당진에 당도하자 극극이 네 명의 사자를 하내(河內)에서 잡아 모두 죽였다.

경공 8년 기원전 591년, 당진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제나라가 공자 강(强)을 당진에 인질로 보냈다. 당진의 군사들이 물러갔다.

경공 10년 기원전 589년 봄, 제나라가 노와 위 두 나라를 공격했다. 노와 위 두 나라의 대부들이 사자로 당진국에 가서 구원을 청했다. 이 일은 모두가 극극으로 인해 일어났다. 당진의 군주가 극극에게 군사 800 승을 주어 중군을, 사섭(士燮)은 상군을, 란서(欒西)는 하군을 맡게 하고 노와 위 두 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그해 6월 임신(壬申) 일에 당진의 군사들은 제후가 거느린 군사들과 미계산(靡笄山)69) 밑에서 조우했다. 계유(癸酉) 일에 안(鞍)70) 땅에 진영을 세웠다. 그 때 방축보(逄丑父)는 차우(車右) 장군이 되어 제경공을 호위하였다. 제경공이 군사들을 향해 외쳤다.

「앞으로 돌격하라! 당진의 군사를 파하고 나서 잔치를 벌려 배불리 먹자.」

이때 극극은 날아오던 화살에 맞아 유혈이 낭자하게 되어 흐르는 피가 발끝을 적셨다. 극극이 진격하다 말고 자기의 진영으로 돌아가려 하자 그의 전차를 몰던 어자가 말했다.

「저는 처음에 돌격할 때 이미 활을 두 대나 맞았지만 군사들이 놀랄까 감히 아프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원컨대, 원수께서도 잠시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수레를 앞으로 몰아 싸움을 다시 벌였다. 그때 제경공이 타는 융거의 차우장군은 방축보(逄丑父)였다. 싸움이 제나라에 불리하게 전개되자 자신의 군주가 적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한 방축보가 옷을 서로 바꾸어 입고 자기는 경공(頃公)의 자리에 서고 경공은 자기자리에 서게 했다. 이윽고 병거가 앞으로 나아가다 나무에 걸려 멈추어 서자, 당진의 소장(小將) 한궐(韓闕)이 제후(齊侯)가 탄 수레 앞으로 달려와 땅에 엎드리며 말했다.

「저희 군주께서 신으로 하여금 노(魯)와 위(衛) 두 나라를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축보(丑父)가 차우장군으로 가장하고 있던 경공(頃公)에게 소리쳐 마차에서 내려가 마실 물을 길러오라고 명했다. 경공이 수레에서 내려 물을 길러간다고 하면서 결국은 도망쳐 제나라 진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당진의 극극이 알고 죽이려고 하자 방축보가 소리쳐 말했다.

「죽음을 불사하고 그 군주를 대신하여 충성을 다했는데 이렇게 죽임을 당하니 후세 사람들 누가 목숨을 바쳐 그 군주에게 충성을 하겠는가?」

극극이 축보를 용서하고 방면하여 제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이윽고 당진의 군사들은 후퇴하는 제군의 뒤를 추격하여 마릉(馬陵)71)에 이르렀다. 제후가 제나라의 보기(寶器)를 바치면서 사죄를 하며 화의를 청했으나 극극이 허락하지 않았다. 극극은 제후에게 요청하기를 자기를 모욕한 제후의 모부인 소동숙자(蕭桐叔子)를 반드시 인질로 보내야 하며 또한 제나라의 밭고랑을 동서방향으로 모두 바꾸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제나라의 사신이 말했다.

「숙자는 우리 군주의 모친입니다. 제나라 군주의 모친이라면 역시 당진군주의 모친과도 같은데 장군이 어떻게 감히 인질로 달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장군께서는 의(義)로써 우리를 정벌한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이렇듯 잔폭(殘暴)하게 대하니 우리가 어찌 장군의 말을 받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극극이 제나라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제나라로 하여금 노와 위 두 나라로부터 빼앗아간 땅을 돌려주라고 했다.

경공 11년 기원전 588년, 당진이 처음으로 육경(六卿)을 두기 시작하고 안(鞍)에서의 싸움에 대한 논공행상을 했다. 제경공이 당진에 가서 당진의 경공(景公)을 천자에 대한 예로써 조배를 올리려고 했다. 당진의 경공이 감히 받아드리지 못했다. 제경공은 이어 제나라에 돌아왔다. 제나라에 돌아온 경공은 자기의 사냥터를 백성들에게 개방하고 부세를 경감해 주었으며, 나라 안의 고아, 과부나 병자들을 문안하고 나라의 부고를 털어 백성들을 구휼했다.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제경공은 또한 제후들에게도 예를 극진하게 행하여 이웃나라와도 사이좋게 지냈다. 경공이 죽자 백성들은 모두 슬퍼하였으며 제후들은 결코 제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았다.

제경공이 재위 17년 만인 기원전 582년에 죽고 그의 아들 영공(靈公) 환(環)이 즉위하였다.

영공(靈公) 9년 기원전 573년, 당진의 란서(欒西)가 그 군주인 려공(厲公)을 시해하였다.

영공 10년 기원전 572년, 당진의 도공(悼公)이 제나라를 정벌하자 제나라가 공자광(公子光)을 당진에 인질로 보냈다.

영공 19년 기원전 563년 공자광을 태자로 삼고 고후(高厚)를 태부(太傅)로 했다. 제후(齊侯)가 제후들을 소집하여 종리(鍾離)72)에서 회맹 하였다.

영공 27년 기원전 555년 당진의 평공(平公)이 중행헌자(中行獻子)를 시켜 제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제나라 군사들이 싸움에서 지자 영공은 싸움터에서 벗어나 임치(臨淄)로 달아나려고 했다. 안영(晏嬰)이 달아나려는 영공을 붙잡고 말렸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안영이 영공에게 말했다.

「주군께서는 용기가 없으십니다!」

당진의 군사들이 영공의 뒤를 쫓아와서 임치성을 포위했다. 영공은 임치성 안에 틀여박혀 지키기만 할 뿐 감히 밖으로 나와 싸울 생각을 못했다. 당진의 군사들이 곽중(郭中)73)에 있던 고을을 불태우고 물러갔다.

영공 28년 기원전 554년, 옛날 영공이 노녀(魯女)를 부인으로 취하여 공자광을 낳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다시 중희(仲姬)와 융희(戎姬)를 후비로 두었는데 특히 융희를 사랑하였다. 중희가 아들 아(牙)를 낳아 융희에게 맡겼다. 융희가 영공에게 아를 태자로 세워주기를 청했다. 영공이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했다. 중희가 전해 듣고 영공에게 말했다.

「그것은 불가한 일입니다. 광은 이미 태자의 자리에 오래 있어 제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 왔는데 지금 아무런 죄도 없이 그를 폐하신다면 주군께서는 필시 이 일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겠다는데 누가 반대한단 말인가?」

영공은 중희의 말을 듣지 않고 광을 태자에서 폐하고 아를 대신 세웠다. 광을 동쪽의 한적한 고을로 옮겨가 살도록 조치한 영공은 고후를 새로운 태자의 태부로 삼았다. 이윽고 영공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최저가 광을 모셔와 태자의 자리에 세웠다. 이가 장공(庄公)이다. 장공은 융희를 죽였다. 그해 5월 임신(壬申)일에 영공이 죽었다. 장공이 즉위하자 태자 아를 구두(句竇)74)의 언덕에서 잡아와서 죽였다. 그해 8월 최저가 고후를 죽였다. 제나라의 내란을 알게 된 당진이 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병하여 고당(高唐)75)에 이르렀다.

장공 3년 기원전 551년, 당진의 대부 란영(欒盈)이 제나라에 도망쳐 왔다. 장공이 란영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안영과 전문자(田文子)가 당진과의 우호관계를 걱정하여 간했으나 장공은 듣지 않았다.

장공 4년 기원전 550년, 장공이 란영을 당진의 곡옥(曲沃)으로 잠입시켜 기회를 보다가 내응하도록 하고 자기는 군사를 이끌고 그의 뒤를 따랐다. 장공은 태항산(太行山)을 넘어 맹문(孟門)76)에 머물렀다. 곡옥성으로 잠입한 란영이 싸움에서 패하자 제나라 군사들은 후퇴하던 길에 조가(朝歌)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장공 6년 기원전 448년, 원래 동곽씨(東郭氏)의 딸인 당공(棠公)의 처가 미색이 아름다웠었는데 당공이 죽자 최저가 자기 부인으로 삼고 당강(棠姜)이라고 불렀다. 장공이 당강과 사통하고 빈번히 최씨의 집에 들려 최저의 관을 들고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주곤 하였다. 이에 최저의 시종까지도 감히 최저에게 거역하였다. 최저가 노하여 장공이 당진을 정벌하는 틈을 타서 당진의 힘을 빌려 제나라를 습격하도록 모의하였으나 기회가 닿지 않아 감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공이 옛날에 환관인 고거(賈擧)를 채찍으로 매우 심하게 때린 적이 있었으나 다시 그를 불러들여 시종으로 삼았다. 최저가 접근하여 그에게 자기의 원한을 갚으라고 부추겼다. 그해 5월 거자(莒子)77)가 제나라에 조례를 드리러 왔다. 제후가 갑술(甲戌) 일에 거자(莒子)를 위해 잔치를 열어 접대하였다. 최저가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연희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음 날인 을해(乙亥) 일에 장공이 최저의 문병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그의 집으로 행차하여 당강을 불렀다. 당강이 내실로 나가더니 문을 잠그고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장공이 당강을 기다리면서 란간을 붙들고 노래를 불렀다. 환관 고거가 장공을 수행하던 시종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닫아걸었다. 최저의 부하들이 무기를 들고 들고일어났다. 장공이 루각 위로 올라가 자기를 풀어주면 모든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고 말했으나 최저의 부하들은 거절했다. 장공이 다시 최저와 같이 하늘에 대고 맹세를 하겠다고 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또다시 태묘(太廟)에 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장공에게 말했다.

「주군의 신하인 최저는 지금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있는 관계로 주군의 명을 받들지 못 합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공궁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최저님의 신하들인 저희들은 간음한 자를 붙잡은 일에 외는 다른 명을 알지 못합니다.」

장공이 자기의 요청이 다 거절당하자 담장을 넘어 달아나려고 하였다. 최저의 부하들이 장공을 향해 활을 쏘아 장공의 다리를 맞추자 장공이 담장에서 굴러 떨어졌다. 최저의 부하들이 달려가 칼로 찔러 죽였다. 최저의 집 문 밖에 있던 안영이 안에서 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소리쳤다.

「군주된 자가 사직을 위해 죽었다면 신하된 자는 마땅히 따라 죽어야 하겠지만, 군주가 사직을 버려두고 도망친다면 그 신하된 자도 마땅히 도망치는 법이다. 군주가 자기의 개인적인 일로 죽거나 도망친다면 그의 총신이 아닌 바에야 누가 감히 그를 위해 따라 죽겠는가?」

안영이 말을 마치고 최저의 집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장공의 시신을 자기 무릎에 올려 눕히고는 곡을 하면서 세 번을 땅위에서 뛰어 장공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집밖으로 다시 나왔다. 최저의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안영을 죽여야 합니다.」

최저가 말했다.

「안영은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를 놓아 준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살 수 있다.」

정축(丁丑) 일에 최저가 장공의 이모제(異母弟)인 저구(杵臼)를 제나라의 군주로 세웠다. 이가 경공(景公)이다. 경공의 모친은 노나라의 숙손선백(叔孫宣伯)의 딸이다. 경공이 제후의 자리에 서자 최저는 우상(右相)이, 경봉(慶封)은 좌상(左相)이 되어 제나라의 정사를 전횡하였다. 최저와 경봉 두 사람은 자신들의 전횡에 반하여 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제나라의 대부들을 불러다 놓고 자기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맹세하게 하였다.

「최저와 경봉과 함께 뜻을 같이하지 않는 자는 저 하늘이 용서치 않으리라!」

안영이 자기 차례가 오자 말을 바꾸어 맹세했다.

「여러분들은 주군에게 능히 충성을 다하고 사직을 위해 힘써야 하되, 만일 여러분들 중 주군에게 충성하려고 하는 이 안영의 마음과 다른 마음을 갖고 있는 자가 있다면 하늘에 계시는 상제(上帝)께서 용서치 않으리라!」78)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 맹세를 하지 않은 안영을 경봉이 죽이려고 하였으나 최저가 말리며 말했다.

「충신이오. 용서하시오!」

제나라의 태사(太史)가 사서(史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최저가 그 군주인 장공을 시해했다.」

최저가 사서를 보고 태사를 죽였다. 그 동생이 태사의 직을 이었으나 그 형이 쓴 것과 똑 같이 기록했다. 최저가 다시 그 동생을 죽였다. 그 막내 동생이 태사의 직을 물려받아 두 형이 똑같이 사서에 기록했다. 최저가 결국은 태사의 막내동생을 용서했다.

경공 원년 기원전 547년, 원래 최저는 첫번째 부인으로부터 성(成)과 강(强) 두 아들을 얻었으나 부인은 일찍 죽었다. 최저가 과부였던 동곽씨의 딸인 당강을 부인으로 얻어 명(明)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동곽녀(東郭女)가 그 전 남편인 당공과의 소생인 당무구(无咎)와 자기의 친정 동생인 동곽언(東郭偃)을 불러 최씨부의 집사로 삼았다. 최성이 최씨부에 죄를 짓자 두 집사가 서둘러 치죄를 하고 최명을 최저의 후계자로 삼았다. 최성이 은거하여 살겠다고 하면서 최읍(崔邑)79)을 자기에게 물려달라고 최저에게 청했다. 최저가 허락하였으나 두 집사가 최저의 말을 듣지 않고 말했다.

「최읍은 최씨 문중의 종읍이라 후계자 이외의 사람에게 줄 수 없습니다.」

최성과 최강이 듣고 화를 내고 경봉에게 달려가 자기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경봉과 최저는 평소에 사이가 벌어져 있었기 때문에 최저를 제거할 마음을 평소에 품고 있었던 중이었다. 경봉의 도움을 받은 최성과 최강은 최저의 집으로 쳐들어가 당무구와 동곽언을 죽이자 최씨 부중의 사람들이 놀라 모두 달아나 버렸다. 최저가 보고 화를 냈지만 자기를 도와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환자(宦者)로 하여금 수레를 몰게하여 경봉의 집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경봉이 최저에게 말했다.

「내가 우상을 위해 두 사람을 죽여주리다!」

경봉은 즉시 호위무사 노포별(盧蒲嫳)을 시켜 최저를 위해 최씨 부중을 공격하여 최성과 최강을 죽이고 나머지 최씨들을 멸족하도록 명했다. 최저의 부인 당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저는 돌아가 갈 곳이 없자 역시 자살했다. 경봉이 상국이 되어 제나라의 권력을 오로지 했다.

경공 3년 기원전 545년 10월, 경봉이 성밖으로 사냥을 나갔다. 최저를 죽인 경봉은 더욱 교만해져 술독에 빠져서 항상 취해 있거나 아니면 사냥에 몰두하고는 정사는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경봉은 자기 아들인 경사(慶舍)에게 정사를 모두 맡겼지만 이미 그들 내부에서도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문자(田文子) 수무(須无)가 경봉을 곁에서 모시고 있던 아들인 전환자(田桓子) 무우(无宇)에게 경계의 말을 주었다.

「장차 내란이 일어날 것이다.」

전(田), 포(鮑), 고(高), 란(欒) 씨들이 서로 상의하여 경씨들을 도모하기로 했다. 경사가 갑병들을 동원하여 경씨부를 지켰지만 사가(四家)의 사병들이 힘을 합하여 공격하자 당해내지 못하고 싸움에 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경봉이 사냥터에서 돌아왔으나 경씨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경봉은 따르던 사람들을 인솔하고 노나라로 도망쳤다. 제나라가 사자를 보내 경봉의 일로 노나라를 비난하자 경봉은 다시 노나라를 떠나 오나라로 도망쳤다. 오나라는 주방(朱方)80)을 경봉과 그 일족에게 주어 살게 하였다. 경봉은 주방에서 제나라에 있을 때 보다 더 많은 재물을 모았다. 그해 가을 제나라 사람들이 장공의 묘를 다시 개장하고 최저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육시를 한 다음 시정에 전시했다.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경공 9년 기원전 539년, 제경공이 안영을 당진에 사자로 보냈다. 안영이 숙향(叔向)과 만나 은밀히 말했다.

「제나라의 정권은 결국은 전씨(田氏)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전씨들이 비록 큰 공덕을 세상에 쌓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공실의 권력을 사사로이 사용하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으니 백성들이 모두 전씨들을 따르고 있습니다.」

경공 12년 기원전 536년, 경공이 당진을 방문하여 평공(平公)과 회견하고 당진의 힘을 빌려 연(燕) 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경공 18년 기원전 530년, 경공이 다시 당진을 방문하여 소공(昭公)과 회견했다.

경공 26년 기원전 522년, 경공이 노나라와의 경계에서 사냥을 하다가 노나라 국경을 밟게 되었다. 그래서 안영을 대동하고 노나라에 들어가 노후를 문안하고 예를 갖추었다.

경공 31년 기원전 517년, 노소공(魯昭公)이 계손씨(季孫氏)들의 란을 피해 제나라로 도망쳐 왔다. 제나라가 노소공을 천사(千社)81)를 주어 제나라 땅에 봉하려고 했다. 노소공을 수행하던 자가(子家)82)가 제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소공에게 간하여 말렸다.

경공 32년 기원전 516년, 혜성이 나타났다. 경공이 백침대(柏寢臺)83)에 올라 한탄하였다.

「아 위풍 당당하도다! 누가 이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

주위에 있던 여러 군신들이 듣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안영(晏嬰)이 보고 웃었다. 경공이 화를 내자 안영이 말했다.

「신이 웃은 것은 여러 신하들의 아첨이 너무 심해서 입니다.」

「혜성이 동북에 나타나 제나라가 분야(分野)84)에 해당되어 과인이 이를 걱정하는데 경은 어찌하여 웃는단 것이요?」

안자가 대답했다.

「주군께서는 대를 높이 지으시고 연못을 깊이 파시면서 부세를 못 걷게 되지나 않을까, 백성들이 형벌을 무섭게 여기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계시어 이제 장차 폐성(茀星)85)이 나타날 텐데 어찌 저따위 혜성 따위를 걱정하십니까?」

「양(禳)86)으로써 제사를 지내면 재앙을 막을 수 있겠소?」

「귀신은 제사를 지내면 오고 양을 지내면 물러가는 법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고통으로 원한을 품게 된다면 비록 주군의 한마디로 양을 지낸다한들 어찌 능히 저 수 많은 중생들의 입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제경공은 궁실을 호화롭게 수축하고 세상의 좋은 사냥개와 명마들을 모으고, 사치를 즐겼으며,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중하게 걷고 벌을 가혹하게 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자가 이를 두고 빗대어 간한 것이다.

경공 42년 기원전 506년,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초나라를 정벌하여 그 도성인 영도(郢都)에 입성했다.

경공 47년 기원전 501년,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그 주인인 계손씨를 공격했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제나라로 도망쳐 왔다. 양호는 제나라에 노나라의 정벌을 청했다. 포자(鮑子)87)가 경공에게 간하여 양호를 잡아 옥에 가두도록 했다. 양호는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감옥에서 빠져나와 당진으로 달아났다.

경공 48년 기원전 500년, 노정공(魯定公)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협곡(夾谷)88)에서 회합하였다. 리서(犂鉏)가 경공에게 계책을 내었다.

「공구(孔丘)는 아는 것은 많지만 겁쟁이입니다. 래인(萊人)89)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족의 음악을 부르게 하여 정신이 혼란해져 있을 때 노후를 붙잡는다면 주군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경공은 후에 노나라가 공자를 재상으로 삼아 패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리서의 계책을 따랐다. 이윽고 두 군주의 회견의 의식이 끝나고 래인이 들어와 이족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공자가 보더니 계단을 한걸음에 올라가 군리를 시켜 래인(萊人)의 우두머리를 잡아 참수토록 하여 예로써 경공을 견책하였다. 경공이 심히 부끄러워하며 노나라에게서 빼앗아 간 땅을 돌려주고 회합을 파하고 돌아왔다. 그해에 안영이 죽었다.

경공 55년 기원전 493년, 당진의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가 그들의 군주에 반하였다. 당진이 두 종족을 재빨리 공격하자 두 종족은 제나라에 양식을 청했다. 당시 제나라의 대신이던 전걸(田乞)이 반란을 일으키려는 역심을 품고 범씨와 중행씨와 사당(私黨)을 맺으려는 마음으로 경공을 설득하였다.

「범씨와 중행씨는 여러 번에 걸쳐 우리 제나라에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어서 경공은 전걸을 시켜 식량을 두 종족에게 전해주도록 했다.

경공 58년 기원전 490년, 경공의 부인 연희(燕姬)가 낳은 적자가 죽었다. 경공의 총희 예희(芮姬)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도(荼)라고 했다. 도의 나이는 아직 어리고 그의 생모의 출신은 미천하여 품행도 좋지 않았다. 도가 제나라의 후사를 이어 받게 되는 경우를 걱정한 제나라의 대부들은 나이가 많고 어진 사람을 택하여 태자로 새우라고 경공에게 간했다. 당시 경공은 이미 나이가 들어 자기의 후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또한 예희를 총해하여 도를 태자로 세우고 싶어했지만 먼저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대신들이 먼저 태자의 문제를 거론하자 경공이 여러 대부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즐거운 일이 많은데 나라에 어찌 군주가 없게 될까봐 걱정하는가?」

그해 가을 경공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국혜자(國惠子)와 고소자(高昭子)에게 명하여 어린 도를 태자로 세우고 나머지 공자들은 모두 쫓아내어 래(萊) 땅에 모여 살게 하라고 했다. 이윽고 경공이 죽고 태자 도가 즉위하였다. 이가 안유자(晏孺子)다.

그해 겨울 경공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전에 여러 공자들은 살해 될 것을 두려워하여 모두가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도의 여러 이모형제들 중 수(壽), 구(駒), 검(黔)은 위(衛)나라로 도망치고 장(駔)과 양생(陽生)은 노나라로 몸을 피했다. 래인(萊人)들이 이 일을 두고 노래를 불렀다.

景公死乎 弗與埋(경공사호 불여매)

경공의 시신도 죽어서, 같이 묻지도 않고

三軍事乎 弗與謀(삼군사호 불여모)

삼군의 일도, 같이 도모하지도 않고

師乎師乎 戶黨之乎(사호사호 호당지호)

군사들이여! 공자를 따르던 무리들이여!

모두 어디로 갔는가?

안유자 원년 기원전 489년 봄, 전걸(田乞)이 국혜자와 고소자를 섬기는 체 하면서 매일 아침 조회에 갈 때마다 참승이 되어 두 사람에게 말하곤 했다.

「상국들께서 주군의 신임을 얻고 계시니 여러 대부들이 스스로 불안하게 생각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다시 대부들을 만나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소자가 여러 대부들을 두려워하고 있으나 아직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으니 대부들께서 먼저 선수를 치시기 바랍니다.」

대부들이 전걸의 말을 따라 고소자를 먼저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해 6월 전걸과 포목(鮑牧) 등 여러 대부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제나라 궁궐로 쳐들어가 고소자를 공격했다. 나라에 변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고소자는 국혜자와 함께 제후(齊侯)를 구원하려고 했으나 여러 대부들의 많은 군사들을 당하지 못하고 싸움에서 패하고 말았다. 전걸이 공실 군사들의 뒤를 추격하자 국혜자는 거나라로 도망쳤다. 전걸이 추격을 멈추고 돌아와 고소자를 죽였다. 안영의 아들 안어(晏圉)는 노나라로 도망쳤다.

그해 8월 제나라의 대부 병의자(秉意玆)가 란을 피해 노나라로 도망쳤다. 전걸이 고국 두 상국의 군사들을 물리치자 즉시 사람을 노나라에 보내 공자 양생을 모셔오게 하였다. 양생이 제나라에 들어와 전걸의 집에 숨어 지냈다.

그해 10월 무자(戊子) 일에 전걸이 여러 대부들을 자기 집에 청하면서 말했다.

「전상(田常)90)의 모가 오늘밤 어숙지제(魚菽之祭)91)를 준비하였으니 부디 왕림하시어 즐겨주시면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여러 대부들이 전걸의 집에 모여 제사 음식을 먹으려 즐겼다. 전걸이 양생을 전대에 넣어서 연희장의 중앙에 놓았다가 술자리가 무르익자 전대를 풀고 양생을 나오게 하면서 여러 대부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 제나라의 군주님이 여기 계십니다.」

여러 대부들이 양생을 보자 좌석에서 엎드려 절을 올렸다. 이어서 여러 대부들과 함께 양생을 제후의 자리에 세우겠다는 맹세의 의식을 행하기 위해 포목이 술에 취한 틈을 타서 없는 말을 꾸며 말했다.

「나와 포상국(鮑相國)이 상의하여 양생 공자님을 제군(齊君)으로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포목이 듣고 화를 내며 말했다.

「그대는 앞서간 선군의 명을 잊었는가?」

포목의 말을 들은 여러 대부들은 양생에게 엎드려 절을 올려 제후로 세우겠다는 뜻을 밝힌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다. 양생이 여러 대부들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 말했다.

「나를 세울 만하면 세우시고 아니면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포목이 화가 자기에게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말을 바꾸어 말했다.

「모두가 선군의 아들인데 어찌 불가하다 하겠습니까?」

이어서 여러 대부들이 양생을 옹립하기로 맹세의 의식을 행했다. 이가 도공(悼公)이다. 도공이 여러 대부들과 공궁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시켜 안유자(晏孺子)를 태(駘)92)로 옮겨 살게 하였으나 목적지에 미처 당도하기 전에 도중에 장막을 치고 그 안에서 죽였다. 안유자의 생모인 예희(芮姬)는 나라 밖으로 추방하였다. 원래 예희는 신분이 미천하고 안유자는 나이가 어려 나라의 권력을 차지하지 못해 국인들이 이들을 가볍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도공 원년 기원전 488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여 환(讙)93)과 천(闡)94) 땅을 빼앗아 갔다. 옛날에 양생이 노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때 계강자(季康子)의 여동생을 얻어 처로 삼았다. 이어서 양생이 제나라에 돌아가 제후의 자리에 앉게 되자 사람을 보내어 제나라로 데려오도록 했다. 계희(季姬)가 그의 숙부인 계방후(季魴侯)와 정을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사(情事)를 호소하니 노나라는 감히 계회를 제나라에 보내지 못했다. 이런 문제로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여 두 고을과 함께 계희를 빼앗아 간 것이다. 계희가 도공의 총애를 받자 제나라는 다시 두 고을을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포목과 도공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공 4년 기원전 485년, 오나라와 노나라가 힘을 합하여 제나라의 남쪽 지방을 공격해 왔다. 포목이 도공을 시해하고 오나라에 부음을 전했다. 오왕 부차(夫差)가 군문에서 3일 동안 곡을 하여 도공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어서 바닷길로 나아가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제나라가 오나라의 수군을 패주 시켰음으로 오나라가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당진의 조앙(趙鞅)이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뢰(賴)95)에 이르렀다가 물러갔다. 제나라 국인들이 도공의 아들 공자임(公子壬)을 제후로 세웠다. 이가 간공(簡公)이다.

간공 4년 기원전 481년 봄, 원래 간공과 그 부친 양생이 같이 노나라에 살고 있을 때 감지(闞止)가 따라와 양공을 모시며 총애를 받고 있었다. 양생이 귀국하여 제후의 자리에 앉자 제나라의 정무를 맡겼다. 전걸의 아들 전성자(田成子) 상(常)이 이를 꺼려하여 조당에 나가 있을 때마다 감지(闞止)의 동태를 살피며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간공의 어가를 모는 어자 전앙(田鞅)이 간공에게 간했다.

「전상과 감지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주군께서는 필히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택하셔야 합니다.」

간공이 전앙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만조(晩朝)96)시간에 감지가 우연히 전역(田逆)이 살인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체포하여 공궁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 전씨 종족들은 유독 단결심이 강했다. 전씨들은 전역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간수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죽이고 전역을 도망치게 하였다. 자아(子我)97)가 전씨들의 종가 집인 전상의 집에 가서 서로 맹세하였다. 옛날 먼 전씨 종족이었던 전표(田豹)가 자아의 가신(家臣)이 되려고 대부 공손(公孫)에게 부탁하여 자기를 천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전표가 상을 당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결국은 전표는 자아의 가신이 되어 그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자아가 전표를 보고 말했다.

「내가 전씨들을 모두 멸하고 그대를 대신 전씨들의 종가로 세우려고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전표가 대답했다.

「저는 전씨의 먼 방계입니다. 대감의 명을 거역하는 자들은 불과 몇 명뿐인데 구태여 전씨들을 모조리 죽일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이어서 전표가 전씨 부중에 가서 감지의 말을 전했다. 자가 자행(子行)인 전역이 말했다.

「감지는 군주의 명을 받들고 있으니 우리가 먼저 선수를 쓰지 않으면 필시 그에게 해를 입을 것입니다.」

자행(子行)98)은 공궁(公宮) 안으로 돌아가 안에서 내응하려고 하였다.

그해 여름 5월 임신(壬申) 일에 전상을 필두로 한 전씨 형제들이 4대의 수레에 나누어 타고 공궁(公宮)으로 들어갔다. 자아(子我)가 장막 안에 있다가 궁문 밖으로 나와 전성자 일행을 맞이하였다. 전씨 일행들은 재빨리 공궁으로 들어가 곧바로 공궁의 문을 닫아걸고 감지가 뒤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공궁 안의 환관들이 전씨들에게 항거하려고 하였으나 전역(田逆)에 의해 모두 살해되었다. 그 때 간공은 후궁들과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전상이 간공 앞으로 달려가 거처를 침궁(寢宮)으로 옮겨야한다고 말했다. 간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과를 잡더니 전상을 찌르려고 하였다. 태사 자여(子余)가 간공을 향해 말했다.

「주군을 해치려고 함이 아니라 나라에 해악을 끼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성자가 물러 나와 무기고에 머물다가 간공이 여전히 분을 풀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라 밖으로 도망치려고 하면서 말했다.

「어디 간들 모실만한 군주가 없겠는가?」

전역이 듣고 칼을 뽑아 전성자를 겨누면서 외쳤다.

「우유부단한 놈아! 머뭇거리는 자야말로 일을 망치는 주범이다. 여기 전씨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는가? 내가 도망치는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나야말로 전씨가 아니다!」

전상이 도망가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한편 자아(子我)는 자기의 무리들을 모아 공궁의 위문(闈門)99)과 대문(大門)을 모두 공격하였지만 열 수가 없었다. 전씨들이 군사들을 규합하여 감지의 뒤를 추격했다. 풍구(豊丘)100)의 백성들이 자아를 붙잡아 놓고 전상에게 고했다. 감지를 공궁으로 호송하라고 명한 전상은 감지가 곽관(郭關)101)에 이르자 그곳에서 죽였다. 전성자가 대륙자방(大陸子方)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전역(田逆)이 청하여 용서하였다. 자방이 간공의 명이라고 하여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의 수레를 취하여 임치성 북문인 옹문(雍門)을 통하여 성밖으로 나갔다. 전표(田豹)가 듣고 다시 그에게 수레를 내어 주려고 하였으나 받지 않으며 말했다.

「전역이 청하여 나의 죄를 면하게 해 주었는데 전표가 다시 나에게 수레를 준다면 나는 전씨들로부터 사사로운 은혜를 입게 된다. 내가 자아를 섬겼으면서 그의 원수들로부터 다시 은혜를 입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내가 망명하여 살고자 하는 노나라나 위나라의 인사들을 대하겠는가?」

경신(庚申) 일에 전상이 간공을 서(舒) 땅에서 붙잡았다. 간공이 말했다.

「내가 옛날에 전앙의 말을 따랐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테인데!」

갑오(甲午) 일에 전상이 간공을 서(舒) 땅에서 죽이고 그의 동생 오(驁)를 제후로 세웠다. 이가 평공(平公)이다. 평공이 즉위하자 전상은 스스로 제나라의 상국이 되어 제나라의 정권을 오로지 하였다. 전상은 다시 제나라의 땅을 나누어 안평(安平)102) 동쪽의 모든 땅을 전씨들의 봉읍으로 삼았다.

평공 8년 기원전 473년,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했다.

평공 25년 기원전 456년, 평공이 죽고 그의 아들 선공(宣公) 적(積)이 뒤를 이었다.

선공이 재위 51년 만인 기원전 405년에 죽고 그 아들 강공(康公) 대(貸)가 뒤를 이었다. 그해에 전회(田會)가 름구(廩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강공 2년 기원전 403년 한(韓), 위(魏), 조(趙)가 제후(諸侯)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강공 19년 기원전 386년 전상의 증손 전화(田和)가 제후(諸侯)가 되고 강공은 동해의 해변가로 보내어 살게 했다.

강공 26년 기원전 379년 강공이 죽어 여씨(呂氏)들의 제사가 끊기게 되고 제나라의 강토는 모두 전씨들의 소유가 되었다. 후에 제위왕(齊威王) 때에 이르러 천하의 강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 나는 제나라에 가본 적이 있다. 서쪽의 태산이 동쪽의 랑야산(琅邪山)에 까지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비옥한 땅이 이천리에 달한다. 그 백성들은 활달한 성격에 깊은 지혜가 많은데 그것은 그들의 천성이라 할 수 있다. 태공이 성스럽고 밝은 마음으로 제나라의 기업을 닦고 다시 제환공이 성덕으로 선정을 베풀어 여러 번에 걸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하여 패주가 되었다. 이것은 하늘의 순리에 따른 당연한 일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성대한 모양이 과연 대국의 풍모가 있었다.」

<제태공세가 끝>

1) 동해(東海)/ 현재의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의 해안 지역 일대를 말한다.

2) 사악(四岳)/ 요순(堯舜)때 사시(四時)를 관장하고 사방(四方)을 순수(巡狩)하는 것을 임무로 한 관직의 장으로 태악(太岳)이라고도 한다.

3) 태공(太公)/ 여기서의 태공이라 함은 서백(西伯) 창(昌) 즉 문왕의 조부인 고공단보(古公亶父)를 말한다. 고공단보는 주족(周族)을 선주지인 현 감숙성(甘肅城)과 섬서성(陝西省) 경계지방에 있던 빈(豳)땅에서 거느리고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고 양산(梁山)을 넘어 기산(岐山) 밑으로 이주해와 살았다. 그래서 여상(呂尙)의 이름을 태공이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칭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고 지어 부르게 된 것이다.

4) 우(虞)/ 현 산서성 평륙현(平陸縣)에 있었던 제후국.

5) 예(芮)/ 현 섬서성(陝西省) 대려현(大荔縣)에 소재했던 제후국

6) 우(虞)와 예(芮) 두 나라가 자기들의 영지의 경계로 서로 싸움을 하여 오래 동안 해결보지 못하자 두 나라의 군주가 그 시비를 밝혀 달라고 서백에게 청하기 위해 주나라에 왔다. 두 군주가 주나라의 경계에 들어와서 길을 가다가 밭을 가는 주나라의 농부들이 서로 자기 땅의 경계를 상대방에게 양보하고 길을 가던 행인들도 가던 길을 양보하며 예의를 지키며 남녀가 구분하며 다니며 노인들은 존중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두 나라의 군주들이 매우 부끄러워하여 서백을 찾아가다 말고 스스로 자기나라로 돌아가 분쟁이 일어난 땅을 서로 내어 한지(閑地)로 만들었다.

7)사상보(師尙父)/ 스승과 아버지처럼 높이 받든다는 뜻이다.

7) 창시(蒼兕)/ 물 속에 사는 맹수의 이름. 힘껏 헤엄쳐 앞으로 돌진해서 능히 배를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외뿔소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수사(水師)와 주사(舟師)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관직의 이름이다.

8) 태서(太誓)/ 주무왕(周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맹진(盟津)에 당도하여 군사들에게 내린 맹세문. 태서(泰誓)도 같은 말이며 오래 전에 망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고문상보(古文尙父) 중에 나오는 <태서(泰誓)>는 후세 사람들의 위작이다.

9)비간(比干)/ 상나라 왕 태정(太丁)의 아들이며 주왕(紂王)의 숙부이다. 주왕이 음락을 밝히고 정치를 포학하게 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죽음을 무릅쓰고 선행을 행하고 덕을 닦으라고 삼 일 밤낮을 간하여 물러나지 않았다. 주왕이 고민하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결국은 분노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말했다. 「 비간은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하니, 내가 듣기에 성인의 심장에는 7개의 구멍이 나 있다고 했다. 내가 직접 그것을 확인해 봐야겠다.」 주왕이 비간을 죽여 그 배를 갈라 비간의 심장을 살폈다.

10)기자(箕子)/ 비간과 형제로 주왕의 숙부다. 벼슬은 태사(太師)이고 봉읍은 지금의 산동성 태곡현(太谷縣) 동북의 기(箕)다. 정치와 문화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비간이 주왕에게 살해되자 일부러 미친척하여 노예가 되었으나 주왕이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다.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한 후, 기자를 감옥에서 꺼내어 나라를 다스리는데 자문을 구했다. 그의 사적은 <상서(尙書), 홍범(洪範)>에 기록되어 있으나 많은 부분이 후세 사람들의 위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11) 녹대(鹿臺)/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 축조한 대(臺)의 이름으로 전설에 의하면 폭이 사방 3리(里) 높이가 1000자(尺)에 달했다고 했다. 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 경내에 있었으며 주왕이 백성들에게 부세를 높여 징수하여 폭정을 행하여 이 녹대를 지어 놓고 상나라의 모든 재화들을 이곳에 보관하려고 하였다.

12) 명수(明水)/ 제사드릴 때 사용하는 맑고 깨끗한 물

13) 거교(鉅橋)/상나라의 양식 창고. 지금의 하남성 곡주현(曲周縣) 동북

14) 구정(九鼎)/ 하나라의 우(禹) 임금이 천하의 물길과 땅을 평정한 다음 구주(九州)로 나누고 그것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정(鼎)을 주조(鑄造)하였다. 이후로 천하의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보물이 되었다.

15) 영구(營丘)/ 제나라의 도성이었던 임치(臨淄)의 옛 이름. 지금의 산동성 임치시(臨淄市) 동북에 당시의 성터가 남아있다.

16) 래(萊)/ 산동성(山東省)과 강소성(江蘇省) 해안 일대에 살고 있던 동이족(東夷族)의 일파가 세운 소국으로써 지금의 산동성 황현(黃縣) 일대에 있었다.

17) 관숙(管叔)/ 주무왕의 아들로써 주공단(周公旦)의 바로 밑의 동생이다. 주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그 영토에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 녹보(綠父)를 봉했다. 다시 은나라 영토를 용(鄘), 패(邶) 위(衛) 셋으로 나누어 관숙(管叔) 외에 채숙(蔡叔) 및 곽숙(霍叔) 세 아들을 그곳의 감국으로 삼아 무경녹보를 감시하게 하였다. 이어서 무왕이 죽고 성왕이 나이가 어려 주공이 섭정의 자리에 올라 주나라를 통치하자 관숙은 무경 녹보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주공이 반란을 진압한 다음 관숙은 죽이고 채숙과 곽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했으며 은나라는 멸하고 그 영토에는 무왕의 막내아들인 강숙을 봉하고 나라 이름을 위(衛)라 했다. 은나라 유민 일부는 은나라의 원래 도읍지였던 상(商) 땅에 이주시켜 주왕의 형이었던 미자개(微子開)를 봉해 은나라 조상의 제사를 잇도록 했다.

18) 채숙(蔡叔)/ 주공단(周公旦)에 의해 나라 밖으로 추방당한 채숙은 유랑 중에 죽고 그의 아들인 채호(蔡胡)가 그의 부친의 잘못을 뉘우치며 덕을 쌓고 선행을 행하였다. 주공단이 듣고 채호를 불러 노나라의 경사(卿士) 직을 맡겼다. 채호의 노력에 의해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 지자 주공단이 그 공을 높이사서 성왕에게 품하여 호(胡)를 채읍에 봉하고 채숙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채호(蔡胡)가 채중(蔡仲)이다.

19) 소강공(召康公)/ 연(燕)나라의 시조인 소공(召公) 석(奭)을 말한다. 주공(周公), 태공(太公)과 함께 주나라를 일으킨 삼공(三公)의 하나다. 무왕이 죽고 성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주공이 섭정(攝政)할 때 소공은 주공을 도와 락읍을 중심으로 섬동(陝東) 지역의 통치를 맡았다. 성왕이 장성하여 주공이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통치권을 성왕에 물려주자 소공도 물러나 봉지인 연나라에 부임했다.

20)목릉(穆陵)/ 지금의 산동성 임구현(臨胊縣) 남. 후에 기(紀)나라의 영토가 되었다가 제양공에 의해 제나라에 편입된다.

21) 무체(無棣)/ 지금의 산동성 무체현(無棣縣) 남.

22) 오후구백(五侯九伯)/ 오후(五侯)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의 작위를 말하고, 구백(九伯)은 아홉 주로 나눈 중국의 지방장관을 의미한다. 백은 한 주를 다스린 지방장관을 말함.

23) 박고(薄姑)/ 지금의 산동성 박흥현(博興縣) 동남에 있었던 고을로 원래는 상나라 때 제후국이었다가 주성왕 때 무경 녹보를 따라 주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멸망했다.

24)공화(共和)/ 주문왕(周文王) 부터 11대인 려왕(厲王)이 폭정을 하자 주나라의국인(國人)들이 반란을 일으켜 려왕은 체(彘 : 현 산서성 곽현(霍縣))으로 피신하였다. 주나라 왕도인 호경(鎬京)에서는 소공(召公)과주공(周公)이 협력하여 왕을 세우지 않고 려왕(厲王)을 대신하여 통치하다가 려왕이 체(彘)에서 죽자 당시 태자 정(靜)을 왕위에 앉히고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태자 정이 선왕(宣王)이다. 즉 려왕이 체(彘)로 피신한 기원전 841년에서 그곳에서 죽은 기원전 828년 동안에 해당하는 14년간 소공과 주공이 주나라를 통치한 것을 공화(共和)라 한다. 사마천의 사기 중 12제후 연표는 이해를 기점으로 시작되는데 즉 기원전 841년 이전의 역사적 사실은 모든 기록이 확실하지 않아, 주나라 역대 왕의 정확한 재위연대 조차도 확인이 안되다가 기원전 841년 이후의 모든 기록은 분명해 졌다. 일본에서 활약중인 중국인 역사학자 진순신(陳舜臣)은 이 해를 중국사의 원년으로 삼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서양사람들이 중국에 와서 republic이라는 말을 한문으로 번역하는데 마땅한 말을 찾지못하다가 왕 없이 통치를 한다는 뜻에서 사용했던 것이 공화국(共和國)의 유래가 되었다.

25)노은공(魯隱公) 원년 기원전 722년은 공자가 편찬한 춘추(春秋)의 기년(起年)이다. 춘추는 공자가 죽기 2년 전인 노애공 14년인 기원전 481년에 끝난다.

26)규구(葵丘)/ 송나라 경내에 있던 곳으로 현 하남성(河南省) 란고현(蘭考縣)과 산동성 조현(曹縣) 사이에 있었던 고을로써 후에 제환공(齊桓公)이 제후들과 아홉 번에 걸쳐 회맹을 행할 때( 九合諸侯 ) 그 중 첫 번째 회맹을 이곳에서 했다.

27)현 산동성(山東省) 임치시(臨淄市) 북서쪽 약 40km 지점 현 박흥현(博興縣) 경내.

28)옹림(雍林)/ 춘추좌전 장공(莊公) 8년 조에 옹름(雍廩)이 무지를 죽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옹름의 관직은 거구대부(渠丘大夫)였다. 또한 진본기 무공(武公) 13년에도 같은 기사가 있다. 옹림은 사마천(司馬遷)의 착오이다.

29) 건시(乾時)/지금의 산동성 익도현(益都縣) 경내

30)생두(笙竇)/ 지금의 산동성 하택시(荷澤市) 북 소류집향(小留集鄕) 경내. 하남성과의 접경지역이다.

31)당부(堂阜)/ 지금의 산동성 몽음현(蒙陰縣) 서북. 노나라 도성인 곡부(曲阜)에서 동쪽으로 약 100키로 되는 곳임.

32)질곡(桎梏)/질은 차꼬와 곡은 수갑을 말한다. 질(桎)은 기다란 두개의 토막나무 틈에 가로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그 구멍에 넣고 자물쇠로 채우게 된 형구(刑具)를 말하며 곡(梏)은 나무로 만든 수갑을 말한다.

33) 재발(齋袚)/ 옛날에 큰 행사를 치를 때 술과 고기요리를 삼가하고 목욕을 한 다음 여자를 멀리하여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에 정중하고 공손한 태도에 임하는 것을 재(齋)라하고, 푸닥거리를 벌려 신에게 재앙을 없애고 복을 달라고 비는 행위를 발(袚)이라 한다.

34) 오가지병(五家之兵)/ 관중이 시행한 제나라의 군제. <국어(國語)>의 제어(齊語) 편에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오가(五家)를 궤(軌)라하고 십궤(十軌)를 리(里)라 했다. 사리(四里)를 연(連)이라 하고 십련(十連)을 향(鄕)으로 했다. 외국과의 싸움이 일어날 때 매 일가(一家)에서 군사 한명 씩을 차출하여 일향(一鄕)에서 2천 명의 군사를 동원했다.. 오향(五鄕)의 군사 만 명을 일군(一軍)이라 하고 전국을 삼군으로 조직했다.

35)경중렴산(輕重斂散)/ 나라에 풍년이 들 때는 곡가가 떨어져 나라가 이를 사들여 가격의 과도한 하락을 막고, 흉년에는 곡가가 폭등함으로 풍년이 들 때 사들인 양식을 방출하여 가격의 안정시켰던 제도. 관중이 제나라에 시행한 곡가조절정책.

36) 담(郯)/ 지금의 산동성 담성현(郯城縣) 동북

37) 수읍(遂邑)/ 지금의 산동성 영양현(寧陽縣) 북

38) 견(甄) / 춘추 때 위(衛)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鄄城縣) 서북

39)공정(工正)/ 장인(匠人)들과 과 각종 건축을 담당하는 관리들을 감독하는 벼슬

40)전성자(田成子)/ 전상(田常)을 말하며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諡號)이다. 기원전 481년 제간공(齊簡公)을 죽이고 평공(平公)을 대신 세웠다. 스스로는 제나라의 상국(相國)이 되어 제나라의 정권을 전횡하였다. 전성자 이후 그의 5대 손인 태공(太公) 전화(田和)가 기원전 376년에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강씨들의 정권을 대신했다.

41) 산융(山戎)/ 북융(北戎)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북성 동쪽에 거주하 던 춘추시대의 북방민족의 이름

42)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 동

43)포모(包茅)/ 포모(包茅), 청모(菁茅) 등으로도 불리우며, 띠풀의 일종이다. 일명 삼척모(三脊茅)라고도 한다. 고대에서 청모초(菁茅草)를 볏단으로 만들어 그 위에 부어 거른 술로 제사를 지냈음. 초나라의 특산물로써 주왕실에서 공물로 바쳐 주왕실은 그것으로써 제사에 지내는 술을 빚었다.

44)昭王南征不復(소왕남정불복)/ ‘주소왕(周昭王)이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남정(南征)길에 올라 한수(漢水)의 도하지점에 이르렀으나 당지의 토인들이 소왕이 탄 배에 구멍을 내놓고 다시 아교로 막아 배를 마련했다. 소왕이 탄 배가 강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아교가 녹아 소왕이 물에 빠져 죽게 만든 일’(주본기)을 말한다.

45) 형(陘)/ 춘추 때 초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언성현(偃城縣) 동

46) 소릉(召陵)/ 지금의 하남성 언성현 동.

47) 방성(方城)/ 춘추시대 초나라 땅으로써 지금의 하남성 엽현(葉縣) 남쪽에 있던 산 이름을 말하기도 하고, 다른 설에는 지금의 하남성 방성현(方城縣) 북쪽에서 필양현(泌陽縣) 동북쪽에 이르기까지 초나라가 쌓은 장성을 말하기도 한다.

48) 진나라는 제나라의 대군이 자기나라의 영토를 통과할 경우 백성들이 피폐해질 것을 걱정하여 제환공을 속여 동쪽의 해안가의 길을 이용하여 회군하도록 권한 것이다. 해안을 따라 회군하 가다가 길이 험한 것을 알게 된 제환공은 진나라를 원망했다. 그해 가을 제나라가 그 죄를 물어 진나라를 정벌하였다.

49) 고량(高粱)/ 지금의 산서성 임분현(臨汾縣) 동북

50)웅산(熊山)/ 웅이산(熊耳山)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남성 서부 노씨현(盧氏縣)과 락녕현(洛寧縣) 사이의 남쪽에 있는 산을 말한다.

51)이지(離支)/ 영우(令友)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북성 천안현(遷安縣) 서쪽에 있었던 춘추 때의 이민족 국가

52)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경내에 있었던 이민족 국가. 노룡현은 당산시(唐山市)와 진황도시(秦皇島市) 일대에 있다.

53) 대하(大夏)/ 지금의 산서성 남쪽 일대를 일컫는 말이다. 백화사기(白話史記)에는 감숙성(甘肅城) 임조현(臨洮縣) 서북, 현대어역사기(現代語譯史記)에는 중아아시아 박트리아(Bactria), 그리고 사기정의(史記正義)에는 ‘ 병주(幷州)의 진양(晉陽) (大夏, 幷州晉陽是也)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의 대하는 사기정의에서 말하는 산서성 태원시(太原市) 동쪽의 진양(晉陽)을 가리킨다.

54)유사(流沙)/고대 중국의 서북사막을 일컫는 말로써 통상적으로 감숙성과 신강성의 경계지역을 말한다. 여기서의 유사는 <관자(管子)>의 <소광(小匡)> 편에 ‘ 서쪽으로 유사(流沙)의 서우(西虞)를 복속시키니 섬진(陝秦)과 융(戎)이 비로소 복종하였다. ( 西服流沙西虞, 而秦戎之從)’에 따르면 서우국(西虞國)이 위치했던 지금의 산서성 평륙현(平陸縣)을 말한다.

55)속마현거(束馬懸車)/산길을 올라갈 때 말의 발굽을 천으로 싸고 수레를 줄로 묶어 끌면서 산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56)비이산(卑耳山)/ 산서성 평륙현 서쪽의 벽이산(辟耳山)을 말함.

57)구합제후(九合諸侯)/ 제환공은 아홉 번에 걸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하였음. 참고로 소집한 연도와 장소는 다음 표와 같다.

차수

연도

회맹장

비고

기원전

환공재위

지명

현위치

1

681

5

북행

(北杏)

산동성 동아현(東阿縣) 북

송나라의 남궁장만(南宮長萬)이 일으킨 란(亂)의 결과 송군의 자리에 오른 송환공(宋桓公) 어설(御說)을 승인하기 위해서.

2

680

6

견(鄄)

산동성 견성현(鄄城縣)

3

679

7

견(鄄)

상동

처음으로 패자를 칭하다

4

678

8

유(幽)

산동성 서주시(徐 州市) 동 20키로

패자가 된 환공에게 제후들이 인사를 드리기 위해.

5

660

28

초구

(楚丘)

하남성 활현(滑縣) 동

제후들을 소집하여 이곳에 성을 쌓은 후에 위나라의 도성으로 삼게 했다.

6

656

30

소릉

(召陵)

하남성 탑하시(漯河市)

채나라와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7

655

31

수지

(首止)

하남성 상구시(商邱市)

주나라 세자 정(鄭)의 자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8

652

34

조(洮)

산동성곡부시(曲阜市) 북 20 km

주나라 세자 정(鄭)을 주왕(周王)으로 추대하였다. 이가 주양왕(周襄王)이다.

9

651

35

규구

(葵丘)

하남성란고현(蘭考縣)과 산동성 조현(曹縣) 사이

주양왕이 자기를 천자로 추대한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

58) 삼대(三代)/ 하(夏), 은(殷), 주(周) 세 왕조를 말함.

59) 봉선(封禪)/ 봉태산(封泰山), 선양보(禪梁父)를 말한다. 봉태산(封泰山)은 태산 위에 제단을 흙으로 쌓은 다음 하늘의 공덕에 보답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말하며, 선양보(禪梁父)는 양보산(梁父山)의 평평한 땅위에 땅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봉선(封禪)의 의식은 제왕(帝王)만이 행할 수 있는 하늘과 땅에 지내는 가장 큰 제사이다. 제환공은 천자가 아니고 제후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가 봉선을 행하는 것은 월권적인 행위였기 때문에 관중이 이를 막은 것이다.

60)<봉선서(封禪書)>의 遠方珍寶奇怪之物有 「鄗上之黍, 北里之禾」「江淮之間, 一茅三脊,」「東海比目之魚」「西海比翼之鳥」를 말한다.

61) 상경(上卿)/ 제나라는 주나라에 버금가는 제후국이라 삼경(三卿)을 두었는데 삼경 중 이경(二卿)은 주천자가 임명하여 상경이라고 했고 나머지 한 명은 제나라 군주가 임명하여 하경(下卿)이라 했다. 당시 제나라에는 대대로 고(高)씨와 국(國)씨가 천자의 명에 의해 임명된 상경이 있었고 관중은 환공에 의해 임명되어 하경의 직에 있었다.

62) 배신(陪臣)/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스스로를 칭할 때 쓰는 말.

63) 이아(易牙)/ 환공의 궁중 요리사. 옹(雍) 출신에 이름이 무(巫)였다. 그래서 옹무(雍巫)라고도 부른다. 제환공이 사람고기만은 먹어보지 못했다고 말하자 집에 가서 자기의 어린 아들을 잡아 요리를 해서 바쳤다. 후에 환공이 죽자 세자 소(昭)를 쫓아내고 서출인 무궤를 옹립했다가 제나라 국인들에 의해 무궤와 함께 피살되었다.

64) 개방(開方)/ 위의공(衛懿公)의 적장자로써 위나라 세자 자리를 마다하고 제환공을 섬겼다. 15년 동안 제나라에 있으면서, 위나라와는 그렇게 먼 곳이 아니었지만 한번도 부모를 찾아보지 않았다. 후에 제환공에 죽고 그 뒤를 이어 효공이 즉위하고, 이어서 효공이 아들이 그 뒤를 잇자 개방이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환공의 아들인 반(潘)을 옹립했다. 반이 소공(昭公)이다..

65)수조(豎刁)/ 제환공을 모시던 환관으로 수도(竪刀) 혹은 수초(竪貂)라고도 한다. 이아와 개방 등과 함께 제환공의 총애를 받고 그 측근에서 보좌했다. 환공이 죽자 그 다섯 아들들이 군주 자리를 놓고 다투어 내란을 일으킬 때 수도는 이아와 함께 제나라 관리들을 죽이고 공자 무궤를 옹립함으로 해서 제나라의 내란을 더욱 큰 혼란에 빠뜨렸다.

66) 내총(內寵)/ 여기서의 내총이란 총애 받고 있는 희첩(姬妾)을 말하마 복건(服虔)의 설은 ‘ 내(內)’를 나인으로 , 내총(內寵)은 ‘ 如夫人者六人’이라 했으며 두예(杜預)는 내총을 권력있고 총애를 받는 내관으로 보았다. 현대어역사기(現代語譯史記)에서는 내총을 장위희(長衛姬)로 보았다.

67) 염빈(殮殯) /죽은 사람의 몸을 씻고 옷을 새로 갈아 입히고 염포로 몸을 묶는을 염(殮)이라 하고, 시신에 염을 한 다음 장사 지내기 전에 그 관을 일정한 곳에 안치하는 일을 빈(殯)이라고 한다. 빈(殯)은 빈소(殯所)다.

68)극극(郤克)/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87년에 죽은 춘추시대 때의 당진의 상경이다. 극결(郤缺)의 아들로 시호는 헌자(獻子)다. 진경공(晉景公) 8년, 기원전 592년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제경공(齊頃公)의 모부인인 소동숙자(蕭桐叔子)는 극극의 신체상의 불구를 보고 희롱했다. 이에 대노한 극극이 그 치욕을 갚겠다고 맹세를 하고 당진국으로 귀국하여 군사를 청하여 제나라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으나 경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진경공 11년 그가 당진의 상경이 되어 집정에 취임하자 노(魯), 위(衛) 등과 연합하여 제나라 군사를 안(鞍) 땅에서 대파했다. 사기 <진세가(晉世家)>에서는 타배(駝背) 즉 곱사등이라 했고,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서는 할일목(瞎一目) 즉 애꾸눈이라 했으며 춘추좌전(春秋左傳)은 극극은 두 다리의 길이가 서로 다른 절름발이라고 했다. 여기서는 좌전의 설을 따랐다.

69) 미계산(靡笄山)/ 지금의 산동성 제남시(濟南市) 동북의 화부주산(華不注山)을 말함.

70) 안(鞍)/지금의 산동성 제남시(濟南市) 부근에 있었던 고을

71) 마릉(馬陵)/ 지금의 산동성 익도현(益都縣) 서남쪽에 있던 마형(馬陘)을 말한다. 전국 때인 기원전 343년 제나라의 손빈(孫臏)이 위(魏)나라의 방연(龐涓)을 이긴 마릉(馬陵)과는 다른 곳이다.

72) 종리(鍾離)/ 지금의 산동성 극장시(棘莊市)

73)곽중(郭中)/ 고대의 성은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내성을 성(城)이라 하고 외성(外城)은 곽(郭)이라 했다. 성과 곽 사이의 땅을 곽중(郭中)이라 했다. (춘추좌전 양공 18년 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음)

74) 구두(句竇)/ 지금의 산동성 하택현(荷澤縣) 북

75) 고당(高唐)/ 지금의 산동성 고당현(高唐縣) 동북

76)맹문(孟門)/ 당진(唐晉)이 동쪽으로 나가는 중요한 관문의 하나.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휘현(輝縣) 서

77) 거자(莒子)/ 거나라의 군주를 말함. 거나라는 영성(嬴姓) 제후국으로 지금의 산동성 거현(莒縣)에 있었던 소 제후국이었음. 자(子)는 그 작위가 자작(子爵)을 칭한 것임.

78) 원문은 ‘嬰所不獲, 唯忠于君利社稷者是從’이다.

79)최읍(崔邑)/ 최저(崔杼)가 이끌던 최씨들의 봉읍(封邑). 지금의 산동성 제양현(濟陽縣) 동북

80)주방(朱方)/ 춘추 시 오나라 영토로써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단도현(丹徒縣) 경계. 초나라의 수군이 쳐들어 올 때 방어하던 양자강 북안의 오나라의 전략적 요충지다.

81) 천사(千社)/ 일사(一社)는 25호의 민호(民戶)를 말하며, 천사란 25,000호의 민호가 있는 고을을 말한다.

82) 자가(子家)/노나라의 삼환씨(三桓氏)인 중손씨(仲孫氏)의 중손구(仲孫駒)를 말한다. 계손씨(季孫氏)에 의해 쫓겨난 노소공(魯昭公)을 따라 다니며 모시던 제나라의 대부

83)백침(柏寢)/ 지금의 산동성 광요현(廣饒縣) 동북쪽. 제경공(齊景公)이 이곳에 고대를 세우고 백침대(柏寢臺)라고 했다.

84)분야(分野)/ 고대(古代)의 천문학에서는 하늘을 12 성차(星次)나 28 성수(星宿)로 나누어 지상의 제후국이나 주(州)에 대응시켰는데 하늘을 말할 때는 분성(分星)이라 하고 지상(地上)을 말할 때는 분야(分野)라고 했다.

85)패성(茀星)/ 패성(孛星)이라고도 하며 주성(主星)을 침범하는 요성(妖星)으로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는 별.

86)양(禳)/ 희생을 잡아 사방의 신에 빌어 돌림병이나 악귀를 물리치는 제사. 일명 푸닥거리

87)포자(鮑子)/ 제나라의 대부인 포국(鮑國)을 말한다. 시호는 문자(文字)이며 포숙아(鮑叔牙)의 증손이다.

88) 협곡(夾谷)/ 제나라 영토로써 지금의 산동성 래무현(萊蕪縣) 동남

89)래인(萊人)/ 춘추 때 산동반도 동쪽 지금의 황현(黃縣) 동남쪽에 살던 이민족으로 래이(萊夷)라고 한다.

90)전상(田常)/ 전걸의 아들 전성자(田成子)를 말함. 기원전 481년 제간공(齊簡公)을 죽이고 평공(平公)을 대신 세웠다. 스스로 상국(相國)이 되어 제나라의 정권을 전횡하였다. 전성자 이후 그의 5대 손인 태공(太公) 전화(田和)가 기원전 376년에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강씨들의 정권을 대신했다.

91)어숙지제(魚菽之祭)/ 음식을 간소하게 차린 제사를 말함. 제사상에 삼생(三牲)과 진기한 어물을 올리지 않고 단지 자기 나라에서 나오는 토산물인 콩과 어물들만으로 준비하여 올리는 제사 음식을 말함. 고대의 가정에서는 제사의 준비는 모두 부녀자가 준비하였기 때문에 전상의 모가 준비한 어숙지제라고 하였음.( 常之母有魚菽之祭 )

92) 태(駘)/ 지금의 산동성 임포현(臨胞縣) 경내

93) 환(讙)/ 지금의 산동성 태안현(泰安縣) 남

94) 천(闡)/ 지금의 산동성 동평현(東平縣) 동남

95) 뢰(賴)/지금의 산동성 장구현(章丘縣) 서남

96)만조(晩朝)/ 고대에는 아침 시간을 둘로 나누어 전반부의 아침을 조조(早朝)라 하고 후반부의 아침을 만조(晩朝)라 하여 석(夕)이라 했다.

97)자아(子我)/ 감지(闞止)의 자다.

98)자행(子行)/ 전역(田逆)의 자(字)다.

99)위문(闈門)/ 대궐 정문 옆에 붙어 있는 쪽문

100)풍구(豊丘)/ 전씨들의 봉읍이나 정확한 위치는 미상(未詳)이다.

101)곽관(郭關)/ 제나라 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성곽의 문을 말한다.

102)안평(安平)/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임치구(臨淄區) 동쪽에 있던 고을. 즉 당시 임치성 바로 동쪽 근교에 있던 고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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