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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세가(魏世家)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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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세가(魏世家)


위씨들의 선조는 필공(畢公) 고(高)의 후손들이다. 필공 고는 주왕실과 동성인 희씨(姬氏) 성이다. 주무왕(周武王)이 주왕(紂王)을 토벌할 때 고는 필 땅에 봉해졌다. 그래서 성을 필(畢)이라고 했다. 후대에 이르러 봉작이 끊겨 평민으로 전락하여 일부는 중원으로 다른 일부는 이적(夷狄)의 땅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의 후손 중에 필만(畢萬)이라고 있었는데 당진 헌공(獻公)의 신하가 되었다.

진헌공 16년 기원전 661년, 조숙(趙夙)은 어자로 필만은 차우(車右)가 되어 헌공을 호위하여 곽(霍), 경(耿), 위(魏) 등을 정벌하여 멸하고 당진의 땅으로 병합한 후에 경(耿)에는 조숙을 위(魏)에는 필만을 봉하여 대부로 삼았다. 복자(卜者) 언(偃)이 말했다.

「필만의 후손을 필시 크게 귀하게 되리라! 만(萬)은 모두 채워진 수다. 위(魏)는 큰 이름이다. 이것은 하늘이 그들의 봉작과 상을 크게 내려 위씨를 도우려고 함이다. 억조(億兆)의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을 천자라 하고 만민을 다스리는 사람을 제후라 한다. 금일에 그가 봉해진 고을의 이름이 크고, 가득 채워진 수가 뒤따르니 그의 후손은 필시 많은 백성들을 포용하게 되리라!」

당초에 필만이 점을 치던 시자에게 당진의 군주에 대해 길흉을 물었다. 『둔(屯)』이라는 점괘와 그 변괘(變卦)로 『비(比)』를 얻었다1). 신료(辛廖)라는 사람이 점괘를 해석했다.

「길합니다. 둔괘(屯卦)의 상은 견고한 것을 차지한다는 뜻이며 비괘(比卦)의 상은 그것을 차지하여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니 어찌 이보다 더 길한 점괘가 있겠습니까? 장차 자손이 번성하여 크게 일어난다는 괘입니다.」

필만이 위 땅에 봉해진 후 11년 되는 해에 죽었다. 그때 헌공의 네 아들이 군위를 놓고 서로 싸워 당진은 내란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러나 필만의 자손들은 시간이 갈수록 계속 늘어만 갔다. 얼마 후에 필만의 후손들은 그들의 성씨을 위(魏)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위무자(魏武子)2) 주(犨)는 필만의 아들이다. 위무자는 위씨들을 대표하여 당진의 공자 중이(重耳)를 섬겼다. 당진의 헌공 21년에 위무자는 중이가 유망의 길을 떠날 때 같이 따라나섰다가 19년 후에 다시 당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중이가 환국하여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문공(晉文公)이다. 문공이 위무자에게 위씨의 작위와 봉지를 이어 받게 하고 대부의 대열에 서게 했다. 위무자가 자기 봉지를 다스리기 위해 위읍(魏邑)을 축조하여 관부(官府)로 삼았다. 위무자는 도자(悼子) 과(顆)를 낳았다.

위도자(魏悼子)는 봉지의 관부(官府)를 곽(霍)으로 옮겼다. 도자는 다시 위소자(魏昭子) 강(絳)을 낳았다.

위강(魏絳)은 당진의 도공(悼公)을 섬겼다.

도공 3년 기원전 570년, 당진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의 의식을 거행했다. 그때 도공의 동생 양간(楊干)이 행군하는 군사들의 대오를 어지럽히자 위강(魏絳)은 양간을 욕보이고 그의 종자들을 죽였다. 도공이 노하며 말했다.

「제후들을 불러 회맹을 행하는 목적은 나의 이름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서인데 신하된 자가 나의 동생을 욕보였으니 이는 나를 기만한 것이다.」

도공이 위강을 주살 하려고 하였다. 좌우 사람들이 도공에게 불가하다고 간하자 도공이 즉시 자기의 뜻을 굽혔다. 후에 결국은 위강을 임용하여 당진의 정사를 맡기고 위강을 융(戎)과 적(狄) 땅에 보내어 수호를 맺도록 했다. 위강으로 인하여 융과 적은 당진에게 귀의하게 되었다. 도공이 그의 재위 11년 되는 해에 말했다.

「내가 위강을 임용한 이래 8년 동안 아홉 번에 걸쳐 제후들을 모이게 할 수 있었고 융적(戎狄)의 오랑캐들을 우리 당진에 귀의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모두 위강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도공이 위강에게 악기와 아름다운 악대를 하사했다. 위강이 세 번에 걸쳐 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받았다. 위강은 종족들을 다스리는 치소를 곽(霍) 땅에서 다시 안읍(安邑)으로 옮겼다. 위강의 시호는 소자(昭子)다. 위강은 위영(魏嬴)을 낳고 위영(魏嬴)은 위헌자(魏獻子) 서(舒)를 낳았다.

당진의 경공(頃公) 12년 기원전 514년, 한선자(韓宣子) 기(起)가 나이를 이유로 물러나자 위헌자가 정경이 되어 국정을 주재했다. 당진의 종실 출신의 기씨(祁氏)들과 양설씨(羊舌氏)들이 서로 반목하자 육경(六卿)이 힘을 합해 그들을 멸족시키고 그들의 봉읍을 전부 몰수한 후에 10현(縣)으로 만들어 6경 자제들로 그 현의 대부로 삼았다. 위헌자(魏獻子)는 조간자(趙簡子), 중행문자(中行文子), 범헌자(范獻子)와 함께 당진국의 경이 되었다.

그후 14년이 지나자 공자가 노나라의 재상의 일을 대리하여 국정을 주재했다. 다시 4년 후에 조간자가 진양(晉陽)의 란을 무사히 넘기고 한씨와 위씨들과 힘을 합하여 범씨와 중행씨들을 공격했다. 위헌자가 위양자(魏襄子) 치(侈)를 낳았다. 위치가 조앙(趙鞅)과 함께 범씨와 중행씨들을 다시 공격했다.

위치의 손자 위환자는 한강자(韓康子), 조양자(趙襄子)와 함께 지백을 공격하여 그 종족들을 전멸시키고 그 영지를 나누어 가졌다.


위환자의 손자가 위문후(魏文侯) 사(斯)다.

위문후(魏文侯) 원년 기원전 424년, 섬진(陝秦)의 영공(靈公) 원년이다. 위문후와 한무자(韓武子) 계장(啓章), 조환자(趙桓子) 가(嘉) 및 주위열왕(周威烈王)은 동시대 사람이다.

문후 6년 기원전 419년, 소량(少梁)3)에 성을 쌓았다.

문후 13년 기원전 412년, 태자 격(擊)을 시켜 번(繁)과 방(龐) 두 땅을 공격하여 그 곳의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살게 했다.

문후 16년 기원전 409년, 섬진을 공격하여 임진(臨晉)과 원리(元里)를 빼앗아 그곳에 성을 쌓았다.

문후 17년 기원전 408년, 중산국을 공격하여 멸했다. 이어 태자격을 보내 지키게 하고 조창당(趙倉唐)으로 하여금 보좌하도록 했다.

태자격이 문후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던 전자방(田子方)을 조가(朝歌)에서 만났다. 태자가 수레를 옆으로 비키게 하여 길을 양보하게 하고 자신은 수레에서 내려서 인사를 드렸다. 전자방이 수레를 탄 채로 답례도 하지 않으며 지나쳤다. 태자가 전자방이 탄 수레의 뒤를 쫓아가 말했다.

「부귀한 자가 교만해야 하는가? 아니면 빈천한 자가 교만해야 하는가?」

전자방이 대답했다.

「빈천한 자가 교만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무릇 제후가 교만하게 되면 나라를 잃고, 대부가 교만하게 되면 그 종족을 잃는다. 그러나 빈천한 자는 모시는 사람의 행위가 자기의 뜻에 맞지 않고, 또한 자기의 말이 쓰이지 않게 되면 초나라나 월나라 등 다른 나라로 신발을 거꾸로 신고 가버리면 그만인데 어찌 부귀한 자와 빈천한 자가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태자격이 마음이 상해 물러갔다. 위나라가 군사를 내어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격하다가 정나라에 이르러 다시 돌아갔다. 낙음(雒陰)과 합양(合陽)에 성을 쌓았다.


문후 22년 기원전 403년, 위(魏), 조(趙), 한(韓) 나라의 수장이 제후(諸侯)의 반열에 섰다.

문후 24년 기원전 401년, 진나라가 공격해 와서 양호(陽狐)에 이르렀다.

문후 25년 기원전 400년, 태자격이 아들 앵(罃)을 낳았다.


문후가 자하(子夏)에게 경전과 기예를 배우고, 단간목(段干木)은 손님에게 대하는 예를 취했다. 그가 단간목이 사는 고향을 지날 때는 항상 경건한 마음으로 식례(軾禮)4)를 올리며 한 번도 그냥 지나간 적이 없었다. 진나라가 오래 전부터 위나라를 공격하여 잃어버린 서하의 땅을 찾으려고 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이 말했다.

「위나라 군주가 현자들을 특별히 존중하여, 위나라 사람들이 하나같이 위군(魏君)의 어짐과 후덕함을 칭송하며 상하가 모두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 위나라를 도모할 수 없습니다.」

문후가 이로 인해서 제후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문후는 서문표(西門豹)를 업군(鄴郡)5)의 태수(太守)에 임명하여 하내6)에 치세가 이루어졌다.

위문후가 이극(李克)7)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예전에 과인에게 가르침을 주시기를 『집안이 곤궁하게 되면 좋은 부인을 생각하게 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비어 있는 재상의 자리에 위성(魏成)과 적황(翟璜) 두 사람 중 누구를 임명하면 좋겠습니까?」

이극이 대답했다.

「신은 듣기에 『신분이 천한 자는 존귀한 사람들이 꾀하는 계획을 대신할 수 없고, 사이가 소원한 사람은 친근한 사람들이 꾀하는 계획을 대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의 직분은 궁문 밖에 있으니 감히 그 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선생은 사양하지 마십시오.」

「군주께서 저에게 하문하신 바는 그 두 사람의 인품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평소에 어떤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지를 보시고, 그가 부유하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과 교분을 맺었는지를 보시고, 그가 현달하여 높은 관직에 올랐을 때 어떤 사람들을 천거하였는지를 보시고, 그가 뜻을 얻지 못하여 불우하게 되었을 때 그가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인지를 보시고, 그가 가난으로 인하여 곤궁하게 되었을 때 그가 취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시면 될 것입니다.[居視其所親(거시기소친), 富視其所與(부시기소여), 達視其所擧(달시기소거), 窮視其所不爲(궁시기소불위), 貧視其所不取(빈시기소부취)] 이 다섯 가지만을 고찰하시면 능히 후임 재상으로 누구를 앉혀야 할지 아실 수 있을 텐데 구태여 저에게 물으십니까?」

「잘 알겠습니다. 선생께서는 집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저는 이미 후임 재상을 누구로 세울지를 결정했습니다.」

이극이 궁문을 나와 집으로 가다가 적황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 적황이 집에 있다가 나와 이극을 보고 말했다.

「제가 오늘 주군께서 후임 재상을 결정하기 위해 선생을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선생은 과연 누구를 천거하셨습니까?」

이극이 대답했다.

「위성자(魏成子)를 재상으로 삼아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적황이 이극의 말을 듣더니 갑자기 얼굴색을 바꾸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도 보고 기억할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진 사람일진대, 내가 어떤 면에서 위성자보다 못하단 말입니까? 서하(西河)의 태수로 있는 오기(吳起)를 제가 천거하여 위나라의 서쪽 변경을 안정시켰으며, 업군(鄴郡)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 근심하고 있던 주군에게 서문표(西門豹)를 천거하여 업군에 치세가 올 수 있도록 했으며, 중산국(中山國)을 정벌하려는 주군에게 제가 악양(樂羊)을 천거하여 그 땅을 위나라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중산국을 얻기는 했으나 그 곳을 지킬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다하여 제가 선생을 주군에게 천거했습니다. 주군의 태자가 사부가 없다고 해서 굴후부(屈侯鮒)를 찾아냈습니다. 제가 어찌해서 위성자보도 못하단 말입니까?」

「나는 그대가 이 사람을 주군 천거한 이유가 장차 그 대가로 큰 벼슬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군께서 저에게 물으시기를 『위나라의 후임 재상에 위성과 적황 두 사람 중 누구를 세우면 좋겠소?’라고 물으시어 제가 대답했습니다. 『 주군께서는 어찌하여 살피시지 않으십니까? 그가 평소에 어떤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지를 보시고, 그가 부유하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과 교분을 맺었는지를 보시고, 그가 현달하여 높은 관직에 올랐을 때 어떤 사람들을 천거하였는지를 보시고, 그가 뜻을 얻지 못하여 불우하게 되었을 때 그가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인지를 보시고, 그가 가난으로 인하여 곤궁하게 되었을 때 그가 취하지 않은 바가 무엇인지를 보시면 알 수 있는 일인데 구태여 이 극에게 물으십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주군께서 알아들으셨음으로 위성자가 재상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대가 어찌하여 위성자에 비해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위성자는 천종(千鍾)8)에 달하는 봉록 중 10분의 9는 바깥일을 하는데 사용하고 나머지 10분의 1만 그 집안일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깥일에 사용되는 비용은 동쪽의 땅에서 복자하(卜子夏),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을 불러오는데 사용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주군이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인데 그대가 천거한 사람은 모두 주군의 신하된 사람이 아닙니까? 그것을 보면 그대가 어찌 위성자와 비교될 수 있단 말입니까?」

적황이 머뭇거리다가 이극을 향해 재배하며 말했다.

「이 사람은 참으로 비루한 사람입니다. 제가 선생에게 실례를 했습니다. 원컨대 평생토록 선생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문후 26년 기원전 399년 괵산(虢山)9)이 무너져 황하의 물길을 막았다.

문후 32년 기원전 393년, 정나라를 정벌하여 산조(酸棗)10)에 성을 쌓았다. 진나라 군사와 주(注)11) 땅에서 싸워 이겼다.

문후 35년 기원전 390년, 제나라가 쳐들어와 양릉(襄陵)12)을 빼앗아 갔다.

문후 36년 기원전 389년, 진나라가 음진(陰晉)13)을 공격했다.

문후 38년 기원전 387년,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무하(武下)14)의 싸움에서 패했으나 진나라 장수 식(識)을 사로잡았다. 이 해에 문후가 죽고 그의 아들 격(擊)이 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위무후(魏武侯)이다.

무후(武侯) 원년 기원전 386년, 조나라에서는 경후(敬侯)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 공자 삭(朔)15)이 란을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고 위나라로 도망쳐 왔다. 위나라는 공자삭과 함께 한단을 공격했으나 역시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철수했다.

무후 2년 기원전 385년, 안읍(安邑)과 왕원(王垣)16)에 성을 쌓았다.

무후 7년 기원전 380년, 제나라를 공격하여 상구(桑丘)17)까지 진격했다.

무후 9년 기원전 378년, 적(翟) 족이 쳐들어와 위나라 군사를 회수(澮水)18)에서 패퇴시켰다. 오기(吳起)를 시켜 제나라를 정벌하게 하여 영구(靈丘)까지 진격했다. 제위왕이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무후 11년 기원전 376년, 한(韓), 조(趙)와 함께 당진(唐晉) 공실의 영토를 삼분하여 나누어 갖고 구 사직을 멸했다.

무후 13년 기원전 374년, 섬진의 헌공이 역양(櫟陽)19)으로 천도했다.

무후 15년 기원전 372년, 위나라가 조나라 군사들을 인(藺)20) 땅에서 격파했다.

무후 16년 기원전 371년, 위나라 군사들이 초나라를 향해 쳐들어 가 노양(魯陽)21)을 점령했다. 무후(武侯)가 이 해에 죽었다. 무후의 아들 자앵(子罃)이 그 뒤를 이어 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위혜왕(魏惠王) 혹은 양혜왕(梁惠王)이다.

혜왕 원년 기원전 370년, 무후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자앵과 공중완(公中緩)22)이 위나라 태자의 자리를 놓고 싸웠다. 공손기(公孫頎)23)가 송나라에서 조나라를 거쳐 한나라에 들어가 한의후(韓懿侯)에게 유세했다.

「위나라의 자앵과 공중완이 태자의 자리를 놓고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군주께서는 들으셨습니까? 지금의 형세를 보면 왕착(王錯)24)의 보좌로 인하여 상당(上黨)의 땅을 확보한 자앵은 위나라의 땅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앵을 제거한다면 위나라는 필시 무너지고 말 것이니 결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한의후가 기뻐하며 즉시 조성후(趙成侯)와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했다. 한조 연합군이 탁택(濁澤)25)에서 위나라 군사를 대패시키고 자앵을 포위했다. 조성후가 한의후게에 말했다.

「위나라 군주를 죽이고 공중완을 즉위시킨 후에 위나라 땅을 떼어서 나누어 갖고 철수하면 우리들에게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한의후가 대답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위나라 군주를 살해한다면 사람들이 필시 우리를 잔인하고 포학하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또한 위나라 땅을 나누어 가진 후에 철수한다면 사람들은 필시 우리가 탐욕스럽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차라리 위나라는 갈라 두 나라로 만들면 어떻습니까? 위나라를 나누어 두 나라로 만든다면 송(宋)이나 위(衛)나라 보다 강하지 못하게 되니 우리 두 나라는 위나라로 인하여 근심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조성후는 위나라 땅을 나누어 갖자는 한의후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의후가 불쾌하여 휘하의 젊은 군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후퇴해 버렸다. 이로써 위혜왕은 죽지 않았으며, 또한 위나라는 둘로 갈라지지도 않았다. 이것은 한과 조 두 나라가 의견이 맞지 않아 불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만일 조나라가 한나라의 의견을 따랐더라면 위나라는 필시 두 나라로 분열되어 소국의 처지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가 생전에 적자를 세우지 않고 죽게 되면 그 나라는 쳐부술 만하다고 한 것이다.

혜왕 2년 기원전 369년, 위나라가 마릉(馬陵)26)에서 한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회(懷)27) 땅에서 조나라 군사들을 패주 시켰다.

혜왕 3년 기원전 368년, 제나라가 쳐들어와 위나라 군사들을 관(觀)28)에서 격파했다.

혜왕 5년 기원전 366년, 택양(宅陽)29)의 땅에서 한나라 군주와 회동했다. 무도(武堵)30)에 성을 쌓았다. 위나라 군사가 진나라 군사들과의 싸움에서 패했다.

혜왕 6년 기원전 365년, 송나라를 공격하여 의대(儀臺)31)를 점령했다.

혜왕 9년 기원전 362년, 한나라를 공격하여 회수(澮水)32)에서 격파했다. 진나라와 소량(少梁)33)에서 싸우다가 위나라의 장수 공손좌(公孫痤)34)가 포로로 잡혀갔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방(龐)35) 땅을 점령했다. 진헌공(秦獻公)이 죽고 그의 아들 효공(孝公)이 섰다.

혜왕 10년 기원전 361년, 조나라를 공격하여 피뢰(皮牢)36)를 점령했다. 혜성이 나타났다.

혜왕 12년 기원전 359년, 유성(流星)이 대낮에 떨어지면서 큰 소리가 났다.

혜왕 14년 기원전 357년, 조왕과 호(鄗) 땅에서 회동했다.

혜왕 15년 기원전 356년, 노(魯), 위(衛), 송(宋), 정(鄭)37) 등의 네 나라 군주38)들이 들어와 혜왕에게 조현을 드렸다.

혜왕 16년 기원전 355년, 진효공과 두평(杜平)39)에서 회동했다. 송나라를 공격하여 황지(黃池)40)의 땅을 점령했으나 얼마 후에 송나라가 다시 찾아갔다.

혜왕 17년 기원전 354년, 진나라와 원리(元里)에서 싸웠다. 진나라가 소량(少梁)을 공격하여 빼앗아 갔다. 조나라를 공격하여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혜왕 18년 기원전 353년, 조나라의 한단성을 함락시켰다. 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제나라가 전기(田忌)와 손빈(孫臏)을 보내 구원하게 했다. 제나라 군사와 계릉(桂陵)41)에서 싸워 패했다.

혜왕 19년 기원전 352년, 제후(諸侯)42)들이 쳐들어와 양릉(襄陵)43)을 포위했다. 장성(長城)을 축조하고 고양(固陽)44)에 관새를 지었다.

혜왕 20년 기원전 351년, 점령한 한단을 조나라에 돌려주고 장수(漳水)의 강상에서 맹약을 맺었다.

혜왕 22년 기원전 349년, 진왕과 동(彤)45) 땅에서 회동하였다. 조성후가 죽었다.

혜왕 28년 기원전 343년, 제위왕(齊威王)이 죽었다. 중산군46)(中山君)을 위나라 재상으로 삼았다.

혜왕 30년 기원전 341년, 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47) 제선왕이 손빈의 계책을 받아들여 한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 도성인 대량성을 목표로 진군했다. 위나라는 즉시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방연(龐涓)을 대장으로, 태자 신(申)을 상장군으로 삼아 제나라 군사들을 막도록 했다. 위나라 군사들이 외황(外黃)48)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그곳의 서자(徐子)라는 사람이 찾아와 태자에게 말했다.

「신에게 백전백승의 계책이 있습니다.」

「제가 그 계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계속해서 서자가 말했다.

「태자께서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싸움에 이겨 거(莒) 땅을 점령한다 해도 그것으로 생기는 부(富)는 위나라를 소유해서 생기는 것보다는 못하고 존귀하기는 위왕의 자리에 앉는 것보다 못합니다. 만약에 제나라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지기라도 한다면 만세에 이르도록 자손에게 전해질 위나라는 없어 지게 됩니다. 이것이 신이 말씀드리고자 한 백전백승의 계책입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반드시 선생의 말대로 군사를 거두어 회군하도록 하겠습니다.」

「태자께서 비록 그럴 마음이 있다하나 결코 회군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태자께 싸움을 하도록 권한 자들 중에서 전공을 세우려고 하는 자가 매우 많아 태자께서 비록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가시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태자가 군사를 돌려 회군하려 하자 태자의 수레를 몰던 어자가 말했다.

「장수가 출전하여 싸워보지도 않고 돌아가는 행위는 싸움에서 패배를 당한 경우와 같습니다.」

태자가 거느린 위나라 군사들은 과연 제나라 군사들과 마릉에서 싸워 졌다. 제나라 군사들은 태자 신을 포로로 하고 장군 방연을 죽여고 위군을 크게 파했다.

혜왕 31년 기원전 340년, 진(秦), 조(趙), 제(齊) 세 나라가 일제히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장수 상앙(商鞅)이 속임수를 써서 위나라 장수 공자앙(公子卬)을 사로잡고 그 휘하의 군대를 습격하여 빼앗아 위군(魏軍)을 패퇴시켰다. 진나라가 상앙을 임용하여 동쪽으로 나아가 위나라의 서하의 땅을 빼앗아 그 경계를 황하에 이르게 하였다. 제와 조 두 나라가 여러 번에 걸쳐 위나라를 침략해 왔을뿐만 아니라, 위나라의 서울이었던 안읍(安邑)이 진나라와 가까워서, 위나라는 그 도성을 대량(大梁)으로 천도했다. 공자 혁(赫)을 태자로 삼았다.

혜왕 33년 기원전 338년, 진효공이 죽자 상앙이 진나라에서 도망쳐 위나라로 들어왔다. 위나라 사람들이 노하여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혜왕 35년 기원전 336년 위혜왕과 제선왕이 평아(平阿)49)의 남쪽에서 회동했다. 혜왕이 여러 번에 걸쳐 거행한 대외 정벌의 실패로 위나라의 국력이 피폐해지자, 공손한 예절과 많은 예물로 현자들을 초빙했다. 추연(鄒衍)50), 순우곤(淳于髡)51), 맹가(孟軻)52) 등이 양혜왕(梁惠王)의 초빙을 받고 대량)으로 들어왔다. 양혜왕이 맹가를 보며 말했다.

「과인이 무능하여 외국에 의해 세 번이나 군사가 꺾이고, 태자는 적국의 포로가 되었으며, 상장을 싸움 중에 잃고 나라는 이로 인하여 텅 비게 되었소. 선조들과 종묘사직(綜廟社稷)53)에 치욕을 안기고 과인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었소. 노인께서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다행히 폐국에 친히 왕림해 주셨으니 어떻게 해야 우리나라가 이(利)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군주는 이(利)라는 말을 입에 담으시면 안 됩니다. 군주가 이를 생각하면 대부들도 이를 바라게 되고, 대부들이 이를 바란다면 그 밑의 백성들도 이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윗사람들은 윗사람대로 밑에 사람들은 밑에 사람들대로 모두가 이를 가지고 다툰다면 나라는 머지않아 위태로워지게 됩니다. 일국의 군주가 취할 바는 오로지 인(仁)과 의(義) 뿐인데 어찌 이만을 말씀하십니까?」

혜왕 36년 기원전 335년, 제나라의 견(甄)54) 땅으로 들어가 제위왕(齊威王)과 회동했다. 이 해에 혜왕이 죽고 그의 아들 혁(赫)이 뒤를 이었다55). 이가 위양왕(魏襄王)이다.

양왕 원년 기원전 334년, 서주(徐州)로 들어가 제위왕과 회견하고 서로 왕호를 사용하기로 하고 그 부군인 혜왕을 왕으로 추존했다.

양왕 5년 기원전 329년, 진나라가 장수 용고(龍賈)가 이끌던 위나라 군사 4만 5천 명을 조음(雕陰)56)에서 파하고 계속 진격하여 곡옥(曲沃)과 초성(焦城)57)을 포위했다. 진나라에게 하서(河西)58)의 땅을 할양했다.

양왕 6년 기원전 328년, 진왕과 응(應)59) 땅에서 회견했다. 진나라가 쳐들어와 위나라의 분음(分陰)60)과 피지(皮氏)61)와 초(焦)를 빼앗아 갔다. 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형산(陘山)62)에서 패배시켰다.

양왕 7년 기원전 327년, 상군(上郡)63)의 모든 땅을 들어 진나라에 바쳤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포양(蒲陽)64)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양왕 8년 기원전 326년, 진나라가 빼앗아간 초(焦)와 곡옥(曲沃)의 땅을 되돌려 주었다.

양왕 12년 기원전 322년, 초나라가 쳐들어와 위나라 군사들을 양릉(襄陵)에서 패주시켰다. 각 제후국의 집정대신들과 진나라 재상 장의가 교상(嚙桑)65)에서 회동했다.

양왕 13년 기원전 321년, 장의(張儀)가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위나라에서 여자가 변해 남자가 된 사람이 있었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곡옥(曲沃)과 평주(平周)66)의 땅을 빼앗아 갔다.

양왕 16년 기원전 318년, 양왕이 죽고 그의 아들 애왕(哀王)이 섰다67). 장의가 진나라로 돌아갔다.

애왕 원년 기원전 317년, 오국이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애왕 2년 기원전 317년, 제나라가 쳐들어와 위나라의 군사를 관진(觀津)68)에서 싸워 이겼다.

애왕 5년 기원전 314년, 진나라의 저리자(樗里子)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위나라의 곡옥(曲沃)의 땅을 빼앗아 갔다. 위나라의 서수(犀首)69)가 안문(岸門)으로 쫓겨갔다.

애왕 6년 기원전 313년, 진나라가 위나라에 압력을 가해 공자 정(政)을 그들의 태자로 삼게 만들었다. 진왕과 임진(臨晉)70)에서 회동했다.

애왕 7년 기원전 312년, 제나라를 공격했다. 다시 진나라와 힘을 합하여 연나라를 공격했다.

애왕 8년 기원전 311년, 위(衛)나라를 정벌하여 두 개의 성읍(城邑)을 빼앗았다. 위(衛)나라 군주가 두려워했다. 위(魏)나라의 대부 여이(如耳)가 위(衛)나라 군주를 찾아와 말했다.

「저를 사자로 삼으시면 위(魏)나라의 군사를 물러가게 하고 그 장수 성릉군(成陵君)을 면직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위군(衛君)이 말했다.

「선생이 과연 그와 같이 하실 수 있다면 나는 세세대대로 위나라를 들어 선생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여이가 위(衛)나라를 위해 성릉군을 찾아와 말했다.

「옛날에 위(魏)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양장판(羊腸坂)71)을 점령하여 그 통로를 끊고 연여(閼與)72)를 함락시켜 장차 조나라를 분할시키려 했습니다. 이윽고 위나라가 조나라를 두 개로 쪼개고도 망하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위나라가 합종장을 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멸망의 순간에 봉착한 위(衛)나라가 장차 서쪽의 진나라를 섬겨 그 위기를 벗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衛)나라를 구원하기위해 진나라로 하여금 달려가게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위(魏)나라가 그 포위망을 풀고 위(衛)나라를 용서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위(衛)나라는 틀림없이 위(魏)나라로부터 받은 은덕(恩德)에 대해 감격하여 영원토록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선생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여이(如耳)가 다시 위왕(魏王)을 찾아가 말했다.

「신이 옛날에 위(衛)나라 군주를 찾아가 뵌 적이 있었습니다. 위(衛)나라는 본시 주왕실(周王室)과 동종입니다. 위(衛)나라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소국이라 하지만, 옛날부터 전해져 소유하고 있는 진기한 보기(寶器)가 수없이 많습니다. 지금 그 나라가 존망의 위기를 맞이했음에도 그 보기들을 가지고 와서 위(魏)나라에 바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마음속으로 위(魏)나라가 위(衛)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던가, 아니면 관용을 베풀어 그 포위망을 풀어주던가 하는 모든 일은 대왕께서 직접 주관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나라 사람들이 장차 비록 보기들을 가져다 바칠 상황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결코 대왕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곰곰히 생각건대, 먼저 위(衛)나라에 대한 포위망을 풀어주겠다고 말한 자가 있다면 그자는 필시 그 나라로부터 뇌물을 받은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여이가 위왕(魏王) 앞에서 물러나 돌아가고 뒤이어 성릉군(成陵君)이 알현하고 위(衛)나라에 대한 포위망을 풀어주겠다고 청을 올렸다. 위왕은 성릉군의 말을 듣고 위(衛)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군사를 거두었으나 성릉군을 면직시키고 평생토록 다시 보지 않았다.

애왕 9년 기원전 309년, 진왕과 임진(臨晉)에서 회동하였다. 장의와 위장(魏章)73) 두 사람이 위나라에 돌아왔다. 위나라 재상 전수(田壽)가 죽었다. 초나라가 장의, 서수(犀首) 및 설공(薛公)74)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초나라 재상 소어(昭魚)75)가 소대(蘇代)에게 말했다.

「죽은 위나라의 전수(田壽)의 뒤를 장의나 서수 혹은 설공이 그 뒤를 잇게 된다면 우리 초나라 사람들은 두렵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감께서는 누가 위나라의 재상이 되어야 좋겠습니까?」

「위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재상이 되었으면 좋겠소.」

「대감이 바라던 바를 이루기 위해 북쪽으로 가서 반드시 태자가 스스로 위나라의 재상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대감을 양왕이라고 생각하고, 대감을 한 번 설득시켜 보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위나라에 가서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이 소대가 초나라에 들어가 접견한 재상 소어가 매우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전수가 죽었으니 장차 위나라의 재상의 자리에 장의나 서수 혹은 설공이 앉는다면 참으로 초나라로서는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소.’라고 말했다고 하고 다시 제가 소어 대감에게 ‘양왕(梁王)은 현명한 군주라 필시 장의 등의 세 사람을 재상의 자리에 앉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의를 신임 재상의 자리에 앉히게 되면 장의는 필시 진나라를 받들고 위나라를 경시할 것입니다. 또한 서수를 재상의 자리에 앉힌다면 한나라를 중시하고 위나라를 경시할 것이며, 설공을 재상으로 삼는다면 제나라를 높이고 위나라를 낮출 것입니다. 양왕께서는 현군이라고 절대로 불리한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양왕이 ‘그렇다면 누구를 후임 재상으로 앉히면 좋겠오?’라고 물을 것입니다. 제가 양왕에게 ‘태자께서 직접 재상의 자리에 앉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태자가 스스로 위나라의 재상의 자리에 앉는다면 이 세 사람은 모두가 태자가 영원히 위나라의 재상 자리에 앉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각기 자기들 나라로 하여금 위나라를 섬기도록 하여 장차 위나라의 승상자리에 오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위나라의 강함과 3만 승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나라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위나라는 필시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런 이유로 태자가 친히 위나라의 재상 자리에 앉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소대가 이윽고 북쪽의 위나라로 들어가 양왕을 만나 그대로 고했다. 위나라는 과연 소대의 말대로 태자를 재상으로 삼았다.

애왕 10년 기원전 309년, 장의가 죽었다.

애왕 11년 기원전 308년, 진무왕(秦武王)과 응(應) 땅에서 회동했다.

애왕 12년 기원전 307년, 위나라 태자가 진나라에 들어가 조현을 드렸다. 진나라가 쳐들어와 피지(皮氏)를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애왕 14년 기원전 305년, 진나라가 무왕후(武王后)를 위나라에 돌려보내 주었다.76)

애왕 16년 기원전 303년, 진나라가 쳐들어와 위나라의 포판(蒲坂), 양진(陽晉)77) 및 봉릉(封陵)78) 등을 함락시켰다.

애왕 17년 기원전 302년, 진왕과 임진(臨晉)에서 회동하고 빼앗아 간 포판의 땅을 되돌려 주었다.

애왕 18년 기원전 301년, 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쳐들어갔다.

애왕 21년 기원전 298년, 제(齊) 한(韓)과 힘을 합쳐 진나라를 공격하여 함곡관에서 진군(秦軍)을 무찔렀다.

애왕 23년 기원전 296년, 진나라가 위나라에게 하외(河外)79)와 봉릉(封陵)의 땅을 화해의 조건으로 돌려주었다. 애왕이 죽고 그의 아들 소왕(昭王)이 즉위했다.

소왕(昭王) 원년 기원전 295년, 진나라가 쳐들어와 양성(襄城)80)을 함락시켰다.

소왕 2년 기원전 294년, 진나라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소왕 3년 기원전 293년, 한나라를 도와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24만에 달하는 위한(魏韓) 두 나라 연합군은 진나라 장군 백기(白起)가 이끄는 진군(秦軍)과 이궐(伊闕)에서 싸워 패배했다.

소왕 6년 기원전 290년, 진나라에 하동(河東)의 땅 4백리를 들어 바쳤다. 망묘(芒卯)81)가 지모가 있다고 해서 중용했다.

소왕 7년 기원전 289년, 진나라가 다시 쳐들어와 위나라 61개의 크고 작은 성을 빼앗아 갔다.

소왕 8년 기원전 288년, 진소왕(秦昭王)은 서제(西帝), 제민왕(齊湣王)은 동제(東帝)라 칭하다가 한 달이 조금 지나 제호를 버리고 왕호로 돌아갔다.

소왕 9년 기원전 287년, 진나라가 쳐들어와 신원(新垣)82)과 곡양(曲陽)83)의 성을 함락시켰다.

소왕 10년 기원전 286년, 제나라가 송나라를 멸했다. 송왕84)은 온(溫)85) 땅에서 죽었다.

소왕 12년 기원전 284년, 연(燕)나라가 진(秦), 조(趙), 한(韓)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서(濟西)의 땅에서 제군을 대파하자 제민왕(齊湣王)은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이어서 4국 사이의 이견으로 3국의 군사들은 철수하고 연나라 홀로 계속 진격하여 임치성을 점령하였다. 소왕이 진왕과 주나라 땅에서 회동했다.

소왕 13년 기원전 283년, 진나라 군사가 위나라의 안성(安城)86)을 함락시키고 대량에 이르렀다가 물러갔다.

소왕 18년 기원전 278년, 진나라가 초나라의 도성인 영성(郢城)을 함락시키자 초나라는 진(陳) 땅으로 나라를 옮겼다.87)

소왕 19년 기원전 277년, 소왕이 죽고 그 아들 안리왕(安釐王)이 새로 섰다.

안리왕 원년 기원전 276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두 성을 함락시켜 빼앗아갔다.

안리왕 2년 기원전 275년, 진나라가 다시 위나라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대량성에 이르자 한나라가 구원군을 보냈다. 위나라가 온(溫) 땅을 진나라에 떼어주자 진군은 물러갔다.

안리왕 3년 기원전 274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4개 성을 함락시키고 위군 4만 명의 목을 베었다.

안리왕 4년 기원전 273년, 진나라가 위(魏), 한(韓), 조(趙) 3국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삼국의 포로 15만 명의 목을 베어 죽였다. 위나라의 대장 망묘는 싸움에서 지고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위나라 장수 단간자(段干子)가 진나라에 남양(南陽)의 땅을 주고 휴전을 하자고 청했다. 소대가 위왕에게 말했다.

「높은 관직을 원하고 있는 자는 단간자이고 땅을 원하는 자는 진왕입니다. 오늘 왕께서 땅을 원하는 자로 하여금 높은 관직을 원하는 자를 제어하게 하시고, 높은 관직을 원하는 자로는 하여금 땅을 원하는 자를 제어하신다면 위나라의 땅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한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하물며 땅을 바치면서까지 진나라를 섬긴다면 그것은 마치 섶을 안고서 불 속에 뛰어드는 격이며 섶이 다 타지 않는다면 그 불은 꺼지지 않음과 같습니다.」

위왕이 대답했다.

「선생의 말씀이 옳기는 하지만, 그러나 일이 이미 행해졌으니 바꿀 수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박국(博局)88) 놀이에서 효(梟) 말을 가장 중시하는 이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형세가 유리하면 상대방의 말을 먹어버리고 불리하면 행마를 멈춥니다. 오늘 대왕께서『일이 이미 행해졌으니 다시 바꿀 수 없다.』라고 하시는 말씀은 지혜를 쓰심이 효를 쓰심만도 못한다고 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안리왕 9년 기원전 268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회(懷) 땅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안리왕 10년 기원전 267년, 위나라에 인질로 와있던 진나라 태자가 죽었다.

안리왕 11년 기원전 266년, 진나라가 쳐들어와 처구(郪丘)89) 함락시키고 빼앗아 갔다.

진나라의 소양왕(昭襄王)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지금의 한(韓)과 위(魏) 두 나라는 그 국세를 옛날과 비교했을 때 더 강한가 아니면 강하지 아니한가?」

진나라의 신하들이 대답했다.

「두 나라의 국세는 옛날이 더 강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여이(如耳)와 위제(魏齊)90)는 옛날의 맹상군(孟嘗君)과 망묘(芒卯)에 비해 누가 더 현명한가? 」

「여이와 위제가 맹상군과 망묘에 미치지 못합니다.」

「옛날 맹상군과 망묘의 현명함으로 강한 한(韓)과 위(魏)두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에 쳐들어왔음에도 그들은 나를 어쩌지 못했소. 그런데 오늘날 여이와 위제와 같은 무능한 자들이 한(韓)과 위(魏) 두 나라의 허약한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온다 한들 나를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 아니겠소?」

좌우에 있던 진나라의 신하들이 모두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러자 거문고에 타던 악사 중기(中期)91)라는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대왕께서는 천하의 형세를 잘못 판단하고 계십니다. 옛날 당진이 육경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을 당시, 그 중에서 가장 세력이 센 종족은 지씨(智氏)들이었습니다. 지씨들은 육경 중 범(范)과 중행(中行) 두 종족들을 멸했으며 남은 한(韓)과 조(趙) 두 종족들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조씨들의 종읍인 진양성(晉陽城)을 포위했습니다. 지백은 진수(晉水)의 제방을 터뜨려 진양성으로 흘려보내 삼판(三版)92) 이하의 모든 땅을 물에 잠기게 했습니다. 지씨들의 종주 지백이 진양성으로 흘러들어가던 물길을 순찰할 때는 위환자(魏桓子)는 어자(御者)로, 한강자(韓康子)는 참승(驂乘)으로 삼고서 말했습니다.『내가 옛날에 물길이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소. 분수의 물을 끌어들이면 안읍(安邑)93)을 잠기게 할 수 있고 강수(絳水)의 물을 끌어들으면 평양(平陽)94)을 잠기게 할 수 있으니 두 사람도 이 점을 명심해서 조심해야 할 것이오.』그 말을 들은 위환자는 한강자를 팔꿈치로 치고, 한강자는 위환자의 발등을 밟아, 위환자의 팔꿈치와 한강자의 발등이 수레 안에서 서로 마주치니 지씨들의 땅은 삼분되었으며, 지백은 목숨을 잃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진나라가 비록 강국이라고 하나 당시 지씨들의 세력보다는 강하지 못하고, 한(韓)과 위(魏) 두 나라의 세력이 비록 약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그 당시의 진양성 아래에서 지백에게 이끌려 다닐 때보다는 낫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팔굼치와 발등으로 연합하여 우리 진나라를 공격할 때인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방심하지 마십시오.」

진왕은 그 말로 듣고 두려워하였다.

제(齊)와 초(楚) 두 나라가 협약을 맺고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위나라는 사자를 진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진나라와 위나라 사이를 오가는 사신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으나 진나라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위나라에는 당저(唐雎)라는 90세가 넘은 노인이 있었는데 위왕을 찾아가 말했다.

「이 늙은이가 서쪽의 진나라에 들어가 진왕을 설득하여 신보다 먼저 진나라의 구원병을 출동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위왕이 당저를 향해 두 번이나 절을 올리고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당저를 진나라에 보냈다. 이윽고 당저가 진나라에 도착하여 궁궐로 들어가 진왕을 접견했다. 진왕이 당저를 보고 물었다.

「노인께서는 노구를 이끌고 아득히 먼 이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과인은 위나라에서 여러 차례 구원을 청하는 사자들을 접해 그 위급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위나라의 위급함을 이미 잘 알고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구원병을 보내지 않고 계시는 이유는 대왕을 위해 계책을 세워야하는 신하들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무릇 위나라는 일만 승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제후국으로서 서쪽의 진나라를 섬기면서 동쪽의 변경을 지키는 속국이 되어, 진나라의 관제를 받아들이고, 봄과 가을에 조공을 바치려고 하는 까닭은 진나라가 강대하여 족히 그 동맹국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제와 초 두 나라의 병사들이 쳐들어와 위나라의 성 밖에 당도했음에도 진나라가 구원병을 출병시키지 않고 있는 이유는 단지 우리 위나라의 형세가 다급하지 않다는 말로써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나라가 그들의 공격으로 크게 위급하게 되면 그들에게 위나라의 땅을 떼어주고 맹약을 맺을 터인데 대왕께서는 그 때에도 위나라로부터 구할 땅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 위나라가 다급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구하시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동쪽의 변경을 지키는 속국으로서의 위나라를 잃고 또한 위나라가 두 개의 적국인 제(齊)와 초(楚) 두 나라에 붙을 테인데 그때 가서 대왕께서는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소양왕은 즉시 군사를 내어 위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위나라는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조나라 사자가 위왕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나라를 위해 범좌(范痤)95)를 죽여주시면, 조나라의 70리에 달하는 땅을 위나라에 바치겠습니다.」

위왕이 조나라 사신의 청을 허락하고 이졸들을 시켜 범좌를 포위하도록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 범좌가 지붕 위로 올라가 용마루를 타고 위왕의 사자에게 말했다.

「범좌의 시체를 가지고 하는 거래보다는 살아 있는 범좌를 가지고 하는 거래가 유리합니다. 만일 내가 죽어버린다면 조나라는 아마도 위나라에 땅을 주지 않을 텐데 그때는 왕은 어쩌시려고 하십니까? 그러니 먼저 땅을 떼어 받고 나를 죽이십시오.」

위왕이 범좌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 죽이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 사이 범좌는 위왕의 동생인 신릉군에게 편지를 썼다.

「이 범좌는 위나라의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임에도 조나라가 땅을 들어 저를 죽이려고 하자 대왕께서는 조나라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후로 강국인 진나라가 조나라의 계책을 답습하여 군(君)의 목숨울 요구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하겠습니까?」

신릉군이 범좌의 말을 위왕에게 전하자 위왕은 범좌를 감옥에서 꺼내 방면했다.

진나라가 구원군을 보내 위나라를 구원한 것을 고맙게 생각한 위왕이 진나라와 가까이 지내고 한나라를 정벌하여 옛날 잃어버린 땅을 찾으려고 했다.

신릉군 무기(無忌)가 위왕에게 말했다.

「진과 융적(戎翟)은 그 뿌리가 같은 야만족이라 항상 호랑이와 늑대와 같은 심성을 갖고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마음과 잔인한 심성에 이익만을 추구하며 신의가 없습니다. 예의와 덕행도 모릅니다. 이득이 있는 곳이라면 친척이나 형제도 돌아보지 않고 마치 금수와 같이 행동합니다. 이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로서 그들은 지금까지 덕을 베풀거나 쌓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진왕의 모후(母后)96)는 쫓겨나 울분에 차서 죽었으며 양후(穰侯) 위염(魏冉)은 진왕의 외삼촌일뿐 아니라 그가 진나라에 세운 공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으나 결국은 쫓겨나고 말았으며97) 아무 죄도 없는 그의 두 동생은 그 봉읍을 빼앗겼습니다.98) 진왕의 각박함은 그 친척이나 형제에게도 그와 같이 행하니, 그의 원수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대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위나라가 진나라와 군사를 합하여 한나라를 정벌한다면 진나라에 의한 환란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뿐이니 신은 그것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신다면 대왕께서는 밝은 임금이 되지 못하고, 그것을 알고도 말씀드리지 않는 신하가 있다면 그것은 불충을 저지르는 행위가 됩니다.

지금 한나라는 한 여자가 나약한 어린 임금을 보좌하고 있으니99) 안으로는 큰 환란거리가 있고 밖으로는 강력한 진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들이 노리고 있으니 왕께서 생각하셔도 한나라는 머지않아 망한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한나라가 망하면 그 땅은 진나라에 속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대량과 인접하게 될 텐데 그때에도 대왕께서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또 왕께서는 옛날 우리의 옛 땅을 찾는 일에 강력한 진나라와의 친분에 의지하여 그 힘을 빌리려고 하십니다. 진나라와 함께 한나라 땅을 얻게 되더라도 과연 우리가 강대한 진나라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진나라는 섬길만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한나라가 망하게 되면 진나라는 다시 일의 사단을 찾게 되고, 그 사단이라는 것도 필시 쉽고도 가장 유리한 목표를 찾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목표란 것도 초(楚)나 조(趙) 두 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무릇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한나라를 공격하여 그 상당(上黨)으로 통하는 길을 끊고 강한 조나라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옛날 연여(閼與)의 일100)을 답습하게 되는 일이고, 진나라는 필시 그러한 일을 반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내(河內)로 통하는 길을 취하여 업성(鄴城)과 조가(朝歌)를 뒤로하고 장수(漳水)와 부수(滏水)를 건너, 조나라 군사들과 한단에서 싸우는 방법은 옛날 지백(智伯)의 화를 재연하는 일으로, 진나라로써는 감히 행할 수 없는 방책입니다. 그렇다면 초나라를 공격한다고 협곡을 지나 3천리를 행군하여 명액(冥阨)의 요새101)를 공격해야 하는데 행군해야 할 길이 너무 멀고, 요새를 함락시키는 일은 너무 어려우니, 진나라는 또한 이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진나라가 하외(河外)의 길을 취하여 대량(大梁)을 뒤로하고 우로는 상채(上蔡)와 소릉(召陵)을 끼고서 진성(陳城)의 교외에서 초나라와 결전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진나라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진나라는 필시 조(趙)나 초(楚) 나라도 공격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위(衛)나 제(齊) 나라도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한나라가 멸망한 다음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키는 날에는 필시 그 대상은 우리 위나라가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진나라는 원래 회(懷), 모(茅)102), 형구(邢丘)103) 등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가 후에 궤진(垝津)104)에 성을 쌓고 하내와 마주 대하게 되자, 우리의 하내에 있던 땅인 공(共)105)과 급(汲)106)이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진나라가 한나라의 신정성(新鄭城)을 차지하고 원옹(垣雍)107)을 얻어 형택(熒澤)의 물을 터뜨려 대량성을 잠기게 하면 위나라는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108) 위나라의 사신이 진나라에 왕래하면서 안릉군(安陵君)109)을 중상하니, 진왕은 안릉군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지 오래 되었습니다. 진나라의 엽양(葉陽)110)과 곤양(昆陽)111)은 우리 위나라의 무양(舞陽)112)과 이웃해 있으니 진왕이 사신들의 모함을 듣고 안릉군을 죽인다면 무양은 진나라로 들어 가게 되고, 무양을 점령한 진나라는 그곳을 북쪽으로 돌아 동으로 허(許) 땅에 이르게 되면 남쪽 땅은 필시 위험해지니 어찌 위나라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한나라를 증오하고 안릉군을 좋아하지 않음은 가하다고 하겠으나, 위나라의 남쪽 땅을 노리고 있는 진나라를 걱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큰 잘못입니다. 옛날 진나라가 하서(河西)의 진(晉) 땅과 마주 대하고 있을 때는 우리 대량성과는 천리나 떨어져 있었으며, 강과 산으로 막혀 있었으며, 주나라와 한나라가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진나라는 임향(林鄕)113)의 싸움 이래로 우리 위나라를 7차례나 쳐들어 왔으며 그 중 5번은 유중(囿中)114)까지 이르렀습니다. 와중에 진나라와 접한 위나라의 변경의 모든 고을은 진나라에 의해 점령당했고 문대(文臺)115)는 파괴되었으며 수도(垂都)116)는 불타버렸습니다. 삼림은 모두 베어졌으며 미록은 그 종자가 말랐고 이윽고 국도인 대량성은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를 당했습니다. 또한 대량성을 북쪽으로 크게 돌아 동쪽으로 나아가 도(陶)와 위(衛) 땅의 근교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평감(平監)117)에 접했습니다. 진나라에게 빼앗긴 땅은 산남(山南)과 산북(山北)118), 하내(河內)119)와 하외(河外)120) 일대에 있던 큰 고을은 수십 개, 이름 있는 고을은 수백 개가 넘습니다. 진나라가 옛날 당진의 땅과 접해 있을 때는 대량과는 천리가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 화가 그와 같았는데, 이제는 다시 한나라가 없어지고 그 땅을 차지하여 그 사이에 하천이나 산도 없고 또한 한나라나 주나라도 없어 그 거리가 백 리도 안 되니 그로 인해서 화를 입게 됨은 필연입니다.

옛날에 합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초(楚)와 위(魏)가 서로 의심하고 한나라를 끌어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한나라가 진나라로부터 3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침략을 받은 끝에 굴종을 당하여 강화를 강요받고 있음에도, 진나라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인질을 조나라에 보낸 이유는 한나라가 천하 제후들의 선봉이 되어 결사적으로 싸우겠다는 의사의 표시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진나라의 탐욕은 끝 간 데가 없어 모든 제후국들이 망하여 진나라의 신하나 속국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신은 대왕을 위하여 계책을 올리니 대왕은 속히 초(楚)와 조(趙) 두 나라와 합종을 맺고 한나라에 인질을 요구한 후에 한나라를 존속시키고 옛날 우리의 땅을 요청하신다면 한나라는 필시 우리의 청을 들어줄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들에게 수고로움을 끼치지 않고도 옛 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니 그 공은 진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멸하고 다시 강한 진나라와 국경을 접해서 생기는 화를 당하는 일 보다는 클 것입니다.

무릇 한나라를 존속시키고 위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은 천하에 이로움이 될 것이며, 이것 역시 하늘이 대왕께 주신 절호의 기회입니다. 상당군과 통하기 위해 공(共)과 영(寧)121)의 길을 한나라에 개방하여 안성(安城)에 이르게 한다면 우리는 한나라부터 출입세를 받게 되어 우리 위나라의 국부는 충분히 늘어남과 동시에 한나라의 귀중한 상당군을 저당 잡는 일과 같습니다. 한나라는 위나라가 베푼 덕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위나라를 사랑하고, 높이 받들며, 두렵게 생각할 것입니다. 결코 위나라를 배반할 수 없는 한나라는 곧 위나라의 속현이 됨을 의미합니다. 위나라가 한나라라는 속현을 얻게 되면 위(衛), 대량(大梁), 하외(河外)의 땅은 필시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한나라가 존속되지 못하고 멸망하여 진나라에 속하게 된다면 이주(二周)와 안릉(安陵)의 땅은 위태롭게 될 것이며, 이어서 진나라가 초(楚)돠 조(趙) 두 나라 군사들을 파한다면 위(衛)나 제(齊)와 같은 나라들이 서쪽의 진나라에 달려가 그 신하가 되는 것은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닙니다.」

안리왕 20년 기원전 257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성을 포위했다. 신릉군 위무기가 왕명을 빙자해서 대장 진비(晉鄙)로부터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했다. 조나라는 이로써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신릉군은 이 일로 인해 위나라에 돌아가지 못하고 조나라에 머물었다.

인리왕 26년 기원전 251년,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죽었다.

안리왕 30년 기원전 247년, 신릉군이 위나라에 돌아와 오국의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여 하외(河外)의 땅에서 진군(秦軍)을 대파하고 몽오를 도망치게 만들었다. 당시 위나라 태자 증(增)은 인질로 진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진왕이 노하여 태자 증을 잡아 감옥에 가두려고 했다. 어떤 사람이 진왕을 찾아와 말했다.

「옛날 공손희(公孫喜)122)라는 사람이 위나라 재상에게 말했습니다. 『위나라가 군사를 내어 급히 진나라를 공격하면 진왕이 노하며 필시 태자를 잡아 감옥에 가두게 되고 위왕도 역시 노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면 진왕은 결국 태자를 죽일 것입니다.』오늘 과연 대왕께서 태자 증을 가두려고 하니 이것은 곧 공손희의 계략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만약 태자 격을 후하게 대접하고 위나라와 강화를 맺는다면 제(齊)와 한(韓) 두 나라가 위나라를 의심하게 되어 그들의 합종은 깨트릴 수 있습니다.」

진왕이 태자 격을 잡아서 가두려는 생각을 그만 두었다.

안리왕 31년 기원전 246년, 영정(嬴政)이 진나라 왕 자리에 올랐다. 이가 후의 진시황(秦始皇)이다.

안리왕 34년 기원전 243년, 안리왕이 죽고 태자 증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위경민왕(魏景湣王)이다. 신릉군 위무기가 죽었다.

경민왕 원년 기원전 242년.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20여개의 성을 빼앗아 그곳에 진동군(秦東郡)을 설치했다.

경민왕 2년 기원전 241년, 진나라가 조가(朝歌)를 빼앗아 갔다. 위왕(衛王)이 야왕성(野王城)123)으로 옮겨가 명맥을 유지했다.

경민왕 3년 기원전 240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급(汲) 땅을 점령했다.

경민왕 5년 기원전 238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원(垣), 포양(蒲陽), 연(衍) 땅을 공격하여 빼앗아 갔다.

경민왕 15년 기원전 228년, 경민왕이 죽고 그 아들 가(假)가 뒤를 이었다.

왕가(王假) 원년 기원전 227년, 연나라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라는 자객을 보내 진왕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진왕에게 사전에 발각되었다.

왕가 3년 기원전 224년, 진나라 군사들이 하구(河溝)의 물을 끌어들여 대량성을 물에 잠기게 하고 왕가를 포로로 잡아 위나라를 멸하고 그 자리에 군현을 설치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내가 옛날 대량성의 폐허에 갔을 때 성 안의 사람이 한 말을 들었다.『진나라 군사들이 하구의 물을 끌어들여 대량성을 잠기게 하자 삼 개 월만에 대량성은 무너지고 위왕은 항복하여 위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말하기를 위나라가 신릉군의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의 국력은 더욱 쇠약해지고 결국은 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하늘이 바야흐로 진나라에 천명을 내려 천하를 통일하라고 했으나 미처 그 과업이 완수되지 못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위나라가 비록 상나라를 일으킨 이윤(伊尹)과 같은 사람의 보좌를 받았다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위세가 끝』


주석

1)둔(屯)과 비(比)의 점사(占辭)는 다음과 같다. (홍신신서간 주역 전재)

수뢰둔(水雷屯) / 둔의 괘는 강(剛 : ― 乾)과 유(柔 : ­­坤)가 처음으로 교합하여 새로운 것을 태어나게 하는 그 고난의 때이다. 그러나 고난에 굽히지 않고 활발하게 움직여(震) 나아간다. 그래서 마침내 막히는 것 없이 뻗어나가 번영한다. 마침 천둥과 비(震. 坎)의 기가 하늘과 땅 사이에 넘쳐서 큰비가 되어 지상의 만물을 적셔 줌과 같다. 지금은 혼란과 암흑이 지배하고 있다. 초조하다고 서둘러서는 안 된다. 인재를 뽑아서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꾸준히 노력하여 이루려는 계획을 밀고 나아가야 한다.

수지비(水地比)/ 비의 괘는 길한 것을 나타낸다. 무슨 일이라도 친하고 화목한 마음으로 행하면 모든 사람이 그를 흠모하여 따르리라. 깊이 생각하고 의논하여 대범하고 변함없는 친화의 도를 가진다면 허물이 있을 수 없다. 중정(五陽)의 도를 행하면 상하(群陰)가 모두 호응하게 되니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자도 마침내 사모하여 모여든다. 이 대열에서 뒤떨어지는 자는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여 화를 입을 것이다.

2) 위무자(魏武子)/ 위주(魏犨)를 말함.

3)소량(少梁)/ 지금의 한성시(韓城市) 부근에 있던 성읍(城邑)으로써 섬서성(陝西省)과 산서성(山西省)의 경계를 짓는 황하 서안의 도시임.

4)식례(軾禮)/ 수레 앞턱에 댄 가로나무를 잡고 몸을 굽히어 절을 올리는 고대의 인사법.

5)업군(鄴郡)/ 지금의 하북성 임장현(臨漳縣) 서북에 설치한 위나라 영토로써 서문표가 이곳의 태수로 부임하여 하백(河伯)을 핑계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있던 무당들을 장하에 빠뜨려 죽이고 장하의 물을 이용한 관개수로(西門渠)를 만들어 농업생산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6)하내(河內)/ 춘추전국시대 때 황하 이북과 태항산맥(太行山脈) 남록(南麓) 사이의 땅을 하내(河內)라 불렀다.

7)이극(李克) /기원전 455년에 나서 395년에 죽은 전국 초의 정치가. 이회(李悝)라고도 한다. 위문후(魏文侯)가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자 그는 『토지의 생산력을 높이는 방안(盡地力之敎)』에 대한 글을 써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창했다. 「 곡식의 값이 폭등하면 백성들의 삶이 고달파지고, 곡식의 값이 너무 싸면 농사 짓기가 어려워진다」고 하여 『평적법(平糴法)』을 제정하였다. 매년 마다 농사의 작황을 상중하(上中下)로 나누어 남은 곡식을 거두어 흉년이 들어 발생하는 부족분을 보충하게 했다. 그 결과 수해나, 한발로 인하여 기근이 발생했음에도 곡식값이 폭동하지 않아 백성들이 흩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극의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하여 위나라는 경제적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기하게 되어 춘추초기에 제일의 강국으로 대두하였다. 그는 다시 각국의 법률을 종합 정리하여 『법경(法經)』이라는 법전을 편찬하여 후에 등장하는 법가(法家)의 시조가 되었다. 법경은 중국 역사 상 최초로 완비된 법전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이극서(李克書)』 7편(編)이 전한다. 자하(子夏)의 제자이다. 한비자 내저설 상에 이극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 이극(李克)을 상군(上郡)의 태수로 임명하여 진나라의 서진을 막았다. 이극이 상군태수에 부임하자 백성들이 모두 궁술에 뛰어나게 만들기 위해 영을 내리기를 「 백성들 사이에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송사가 있을 경우는 활을 쏘게 해서 명중하는 사람이 옳고 명중시키지 못한 사람은 옳지 않다고 판결하겠다」 라고 했다. 백성들이 이극이 내린 영을 듣고 모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궁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서쪽의 진나라가 쳐들어와 전쟁을 하게 되자 활로써 진나라 군사들을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

8) 천종(千鍾)/ 종(鍾)은 은 열 섬이니 천종은 만 섬을 말한다.

9)괵산(虢山)/ 지금의 하남성 섬현(陝縣) 경내 서쪽에 있었던 옛 산 이름.

10)산조(酸棗)/ 지금의 하남성 연진(延津) 서남. 춘추 때 정나라 땅이었다가 후에 위(魏)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위문후 32년 기원전 393년 위문후(魏文侯)가 정나라의 정벌하고 산조(酸棗)에 성을 쌓았다.( 魏文侯32年『 伐鄭, 城酸棗) 후에 진나라가 산조현(酸棗縣)을 설치했다

11)주(注)/ 지금의 하남성 임여현(臨汝縣) 서북

12)양릉(襄陵)/ 지금의 한남성 수현(睢縣) 부근

13) 음진(陰晉)/ 지금의 섬서성 화음현(華陰縣) 동. 전국 때 위나라 영토였다가 후에 진나라 땅이 되었다. 진나라는 이름을 영진(寧秦)으로 바꿨다.

14)무하(武下)/ 무성(武城)을 말하며 지금의 섬서성 화음현(華陰縣) 동쪽이다. 전국 때 위나라 영토였다.

15) 삭(朔)/ 제15권 육국연표(六國年表)와 제43권 조세가(朝世家)에 따르면 조(朝)의 오기(誤記)이다. 조조(趙朝)가 일으킨 반란의 동기를 알기 위해 조나라 초기의 군주의 계보를 살펴보면 조나라를 실질적으로 세운 사람은 진양성 싸움에서 지백을 패망시킨 조양자(趙襄子)다. 그가 죽을 때 적자였던 백로(伯魯)가 자기 때문에 조씨 종족들의 종주 자리를 잇지 못하게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자기 아들을 세우지 않고 백로의 아들 대성군(代成君)을 후계로 세웠다가 대성군이 일찍 죽었음으로 다시 대성군의 아들 완(浣)이 그 뒤를 잇게 했다. 양자가 죽자 완이 즉위했다. 이가 조헌후(趙憲侯)이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헌후를 양 동생 환자(桓子)가 내쫓고 대(代) 땅에서 스스로 조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나 일 년만에 죽었다. 그러자 국인들이 환자의 아들을 죽이고 헌후를 복위시켰다.

헌후가 죽고 그의 아들 열후가 그 뒤를 이었다. 열후가 죽고 그의 동생 무공(武公)이 즉위했다. 무공이 죽자 다시 국인들은 열후의 아들 장(章)을 즉위시켰다. 이가 조경후(趙敬侯)다. 이에 무공의 아들 조조(趙朝)가 불만을 품고 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위나라로 도망친 사건이다.

16)왕원(王垣)/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원곡(垣曲) 동남. 전국 때 위나라 땅. 그 땅이 왕옥산(王屋山)에 있다고 해서 왕원(王垣)이라 명명된 것이다. 그 땅에 한나라 때 원현(垣縣)을 설치했다.

17)상구(桑丘)/ 지금의 하북성 서수(西水) 서남. 전국 때 연나라 땅이었다가 제환공(齊桓公 : 재위 전 374- 356년) 15년 기원전 360년에 제나라가 침공하여 제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18)회수(澮水)/ 산서성 익성(翼城) 동남의 회산(澮山)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곡옥(曲沃)을 거쳐 분수(汾水)에 합쳐진다.

19)현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縣) 동북. 진헌공(秦獻公)이 옹성(雍城)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20)인(藺)/ 지금의 산서성 이석(離石) 서. 전국 때 조나라 땅이었다가 진나라에 병합되었다.

21)노양(魯陽)/ 지금의 하남성 노산(魯山)을 말한다. 춘추전국 때 초나라 영토. 육국연표 초숙왕(楚肅王) 10년 위나라가 초나라의 노양 땅을 빼앗아 갔다. 한나라 때 이 곳에 노양현(魯陽縣)을 설치했다.

22)공중완(公中緩)/ 위무후(魏武侯)의 아들로서 성은 위(魏)이고 이름은 완(緩)이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공자완(公子緩)으로 되어있다. 무후가 죽기 직전에 위앵(魏罃)과 위나라 군주 자리를 놓고 형제간에 다투다가 한(韓)과 조(趙) 두 나라 군사들의 도움을 얻어 탁택에서 위앵의 군사를 대패시켰다. 탁택에서 승리한 한과 조 두 나라가 사이가 벌어져 한나라 군사들은 철수하고 공중완과 조나라 군사들은 위앵에게 피습당해 싸움에서 패하고 조나라 망명했다. 위혜왕 7년 기원전 363년 그는 다시 한과 조 두 나라의 지원군을 얻어 위나라에 쳐들어와 다시 위나라 군주 자리를 노렸으나 공손좌(公孫痤)의 위군에 의해 패주했다.

23)공손기(公孫頎)/ 송나라의 책사로 위무후가 죽고 그 아들들인 위앵과 공중완이 서로 군주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조와 한 두 나라에 달려가 두 나라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공중완을 돕도록 유세하여 위나라가 망하도록 획책했다. 후에 한조 연합군이 위나라 군사들을 대파했으나 한과 조 두 나라 사이에 의견이 충돌하여 결국은 공손기의 생각은 실현되지 못했다.

24)왕착(王錯)/ 전국 때 위나라 대부로서 『전국책(戰國策)』에는 왕종(王鍾)으로 되어있다. 위무후(魏武侯)가 즉위하자 오기를 모함하여 그가 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망명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위혜왕(魏惠王) 2년 기원전 368년 위나라에서 죄를 짓고 한나라로 망명했다.

25)탁택(濁澤)/ 지금의 하남성 장갈시(長葛市) 서남으로 전국시 위나라 영토.

26)마릉(馬陵)/ 지금의 산동성 범현(范縣) 남서 쪽에 있던 계곡으로 후에 손빈(孫臏)이 지휘하던 제군(齊軍)이 방연(龐涓)이 이끌던 위군(魏軍)을 대파하고 방연을 전사하게 만든 곳이다.

27)회(懷)/ 지금의 하남성 무척현(武陟縣) 서남(西南)에 있었던 고을 명으로 춘추 때는 정나라 땅이었다가 전국 때 위나라 땅이다. 후에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이곳을 점령하고 회현(懷縣)을 설치하여 진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28)관(觀)/ 지금의 하남성 청풍현(淸豊縣) 서남에 있던 고을로서 전국시대 때 위(魏)나라 땅.

29)택양(宅陽)/ 북택(北宅)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서남 쪽에 있던 전국 때 위나라 땅이다.

30)무도(武堵)/ 전국연표 위혜왕 5년 기원전 366년 조에는 무도(武都)로 쓰여 있다. 전국 때 위(魏)나라 영토였으나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다.

31)의대(儀臺)/ 혹은 영대(靈臺)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남성 우현(虞縣)으로 춘추전국시대 때 송나라 령이다. 송나라 도성인 수양성(睢陽城) 동쪽 20키로에 있었다.

32)각주 19번 참조

33)소량(少梁)/ 지금의 산서성 한성현(韓城縣) 동남의 소량촌(少梁村)을 말한다. 이민족 국가였던 양(梁)나라의 도성이었으나 진목공(秦穆公)이 멸망시키고 진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진강공(秦康公) 4년 기원전 617년 당진의 영토가 되었다. 기원전 327년 섬진의 혜문왕(惠文王)이 위(魏)나라로부터 탈환하고 그 이름을 하양(夏陽)으로 개명했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출생지이다.

34)공손좌(公孫痤)/상군열전의 공숙좌(公叔痤)를 말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위혜왕 10년인 기원전 361년에 죽었다. 성은 희(姬)이고 씨는 위(魏)이고 이름은 좌(痤)이다. 위나라 공족 출신으로 위무후) 때 전문(田文)의 뒤를 이어 위나라 재상이 되었다. 왕착과 함께 오기를 모함하여 오기가 초나라로 달아나게 했다. 위혜왕 8년 기원전 362년 그는 위나라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회수(澮水) 북안에서 한(韓), 조(趙) 두 나라의 연합군을 대파하고 조나라 땅으로 진공하여 피뢰(皮牢)의 땅을 점령했다. 같은 해 진나라가 위나라 땅인 소량(少梁)을 공격해 오자 공손좌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출전하여 싸웠으나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후에 진나라로부터 석방되어 돌아와 위나라의 재상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공손앙(公孫鞅= 商鞅)은 오래 전부터 그의 가신이었다. 그가 병이 들어 눕게 되자 위혜왕이 찾아와 그의 후임을 물었다. 공손좌는 자기의 후임으로 공손앙을 추천하고 다시 말하기를 그를 쓰지 않을 경우는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다. 양혜왕은 공손앙을 쓰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후에 진나라로 들어간 공손앙은 진효공에게 유세하여 변법을 시행하도록 하여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어서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군 대장 공자앙을 사로잡고 그 군사들을 크게 무찔렀다. 그 공으로 위앙은 상오의 땅 15개 성에 봉해져 상군(商君)이라 부르게 되었다.

35)방(龐)/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동남 쪽에 있었던 고을로 전국 때 진나라 령이다.

36)피뢰(皮牢)/ 전국 때 조나라 령으로 지금의 산서성 익성현(翼城縣) 동쪽의 뇌채촌(牢寨村)에 있던 고을이다. 산서성 하진현(河津縣)이라는 설도 있다.

37)정군(鄭君)/ 기원전 356년은 한애후(韓哀侯)가 정나라를 멸하고 도읍을 양책(陽翟 :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에서 신정성(新鄭城)으로 옮긴 해이다. 정군은 한애후(韓哀侯 : 재위 기원전 363-337년)를 말한다.

38)네 나라 군주들이란 한애후(韓哀侯) 외에 노공후(魯公侯), 위성후(衛成侯), 송환후(宋桓侯)를 말한다.

39)두평(杜平)/ 지금의 섬서성 징성현(澄城縣) 경내에 있던 고을로 전국 때 진나라 영토이다.

40)황지(黃池)/ 지금의 하남성 봉구현(封丘縣) 서남쪽에 있던 고을로 오왕 부차가 기원전 482년 이곳에서 열국의 제후들을 소환하여 회맹을 주재했다.

41)계릉(桂陵)/ 계양(桂陽)이라고도 한다. 전국 때 위나라 령으로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서남에 있던 고을이다.

42)제후(諸侯)/ 여기서 제후들이란 제(齊), 송(宋), 위(衛) 나라의 군주를 말한다.

43)양릉(襄陵)/①진본기 기사에 소양왕(昭襄王) 29년 기원전 278년 「진왕과 초왕이 양릉(襄陵)에서 회동했다.」는 양릉의 소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지금의 산서성 임분현(臨汾縣) 동남의 고성장(古城庄)으로서 당시 위나라 땅으로 후에 진나라가 이 땅에 양릉현을 설치했다는 설과,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에 있는 양릉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하며, 혹은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에 있었던 송양공(宋襄公)의 장지를 말한다고 했다.

②전국연표 위혜왕 19년 기사에 「제후들이 쳐들어와 양릉을 포위했다.」의 양릉은 지금의 산동성 추현(鄒縣)이라는 설과 하남성 수현(睢縣)이라는 설이 있다.

44)고양(固陽)/ 지금의 섬서성 동쪽 합양현(郃陽縣)이다.

45)동(彤)/ 지금의 섬서성 화현(華縣)으로 전국 때 진나라 령이다.

46)중산군(中山君)/ 전국 때 위나라의 대신. 위문후가 악양(樂羊)을 시켜 중산국을 멸하고 위나라 영토로 삼은 뒤 그 아들 태자 격(擊)을 중산군에 봉하고 그곳을 지키게 했다. 문후가 죽자 태자 격이 위나라 군주 자리를 이었다. 이가 위무후(魏武侯)이다. 이에 중산군에는 다른 사람을 택해 봉했으나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위혜왕 28년에 중산군이 위나라 서울에 들어와 재상이 되었으나 얼마 가지 못해 병으로 죽었다.

47)원문은 「魏伐趙, 趙告急齊,」이다. 그러나 손자오기열전에 보면 「 魏與趙攻韓, 韓告急齊 즉 위와 조나라가 연합하여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라고 되어 있다. 사기정의(史記正義)의 설에 따르면 세가(世家)의 기사가 잘못이라고 했다.

48)외황(外黃)/ 지금의 하남성 민권현(民權縣) 서쪽이 있었던 고을로 전국 때 위나라 령이다.

49)평아(平阿)/ 전국 때 제나라 땅으로 지금의 안휘성 회원현(懷遠縣) 서남 평아향(平阿鄕)을 말한다.

50)추연(鄒衍 혹은 騶衍)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340년에 죽은 전국 때 직하학사(稷下學士) 중의 한 사람이다. 음양가의 대표적인 학자로써 추자(鄒子)라 한다. 제나라 출신으로 위혜왕이 어진 선비를 세상에서 널리 구할 때 위나라에 들어가자 위혜왕이 도성 밖 교외에까지 나가 맞이하고 갈석궁(碣石宮)이라는 집을 지어 그곳에 살게 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제선왕 때 직하(稷下)에 머물게 하고 상대부의 봉록을 내리고 신선의 일에 대해 연구하도록 시켰다. 연소왕(燕昭王)이 즉위하자 그는 제나라를 떠나 연나라로 들어가 소왕의 신임을 받았다. 만년에 제나라를 위해 조나라에 사신으로 가자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이 그를 접대하면서 감히 그와 마주 대하며 앉지 못했다. 그의 학설은 오행상생(五行相生)을 근거로 하여 저술한 『오덕종시(五德終始)』 56편이 있었으나 모두 실전하여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51)순우곤(淳于髡)/ 제나라 직하(稷下) 학사 출신으로 박학하기로 유명하다. 여러 차례에 걸쳐 제위왕(齊威王)과 추기자(騶忌子)로 하여금 내정을 개혁할 것을 건의하였다. 후에 위(魏)나라로 들어갔가 양혜왕이 상경(上卿)의 자리를 제의하자 사양하고 위나라를 떠났다. 다음은 『사기(史記)』 『열전(列傳)』 중 『골계열전(滑稽列傳)』에 순우곤이 제위왕을 설득하는 구절이다.

『 순우곤이 은어로써 제위왕에게 말했다. 「나라 안에 커다란 새가 있어 지금 조정의 뜰에 머물러 있습니다. 삼 년이 되도록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대왕께서는 이 새가 어떤 새인지 아시고 계십니까?」 위왕이 대답했다. 「이 새는 날지 않으나 한 번 날기 시작하면 하늘에 닿고, 울지 않으나 한 번 울면 천하의 백성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史記』淳于髡說之以隱曰 「國中有大鳥 止王之庭 三年不蜚又不鳴 王知此鳥何也?」 王曰 「此鳥不飛卽已 一飛沖天 不鳴卽已 一鳴驚人.

52)맹가(孟軻)/ 맹자(孟子)를 말한다.

53)종묘사직(綜廟社稷)/ 종묘(宗廟)는 고대의 제왕이나 군주가 자기들의 선조들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사직(社稷)은 제왕이나 군주들이 토신(土神)과 곡신(穀神)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세운 제단(祭壇)을 말한다. 사(社)는 토신(土神)이고 직(稷)은 곡신(穀神)이다. 종묘사직이라 함은 국가권력의 상징으로서 국가 자체를 의미하는 말로 쓰여졌다.

54)견(甄)/춘추 때 위(衛)나라 땅이었다가 전국 때 제나라 령으로 되었다.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甄城縣) 서북

55)이 해에 위혜왕이 죽었다는 사마천의 기사는 잘못이다. 다음 해인 기원전 334년에 위혜왕이 제나라 령인 서주(徐州)로 들어가 두 나라 군주가 서로 왕호(王號)를 사용하기로 약속함으로 해서 그 해를 위혜왕 후원년으로 삼은 것이다. 다음은 사마천의 육국연표(六國年表)와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 역사학과 교수인 양관(楊寬)이 저술한 전국사(戰國史)의 전국대사연표(戰國大事年表) 사이의 차이점를 비교한 표이다.

**전국시대 중기 위나라 군주들의 재위연도 비교표

























































군주명


전국대사연표

(戰國大事年表)


사마천(司馬遷)의

육국연표(六國年表)


재위기간


재위년수


재위기간


재위연수


즉위년


몰년


즉위년


몰년


양혜왕

(梁惠王)


369


319


50


370


335


35


양양왕

(梁襄王)


318


296


22


334


319


15


양애왕

(梁哀王)


실존인물이 아님


318


296


22


양소왕

(梁昭王)


295


277


18


295


277


18



56)조음(雕陰)/ 지금의 섬서성 부현(富縣) 북. 전국 때 위나라 땅이었다가 위양왕 5년 기원전 329년에 이곳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지고 진나라에 빼앗겼다. 진나라는 이곳에 조음현을 설치했다.

57) 초(焦)/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三門峽市)에 있었던 당진 령의 성읍. 하수의 남안에 있던 고을로 북괵(北虢)이 당진에게 망하기 전의 상양성(上陽城)에 해당한다. 전국 때 위나라 령이다.

58)하서(河西)/일명 서하(西河)라고도 한다. 전국 때 위나라가 오기(吳起)를 시켜 이곳에 하서군을 설치했다. 황하의 서쪽 땅이라는 데서 얻은 이름이다. 관할지역은 섬서성과 산서성의 접경을 이루고 있는 황하의 남단의 서쪽, 섬서성의 화음(華陰) 이북, 락수(洛水)의 이동(以東), 황룡(黃龍) 이남 사이에 있던 땅이다.

59)응(應)/ 지금의 하남성 노산현(魯山縣) 동쪽에 있던 땅으로 춘추 때 초나라 영토였으나 전국 때 한나라에 속했다가 진나라에 병합되었다. 진소양왕 때의 명신 범수(范睢)가 이곳에 봉해져 응후(應侯)라 불리웠다.

60)분음(分陰)/ 산서성 만영현(萬榮縣) 서쪽에 있었던 고을로 지금도 그 때의 고성 유적이 남아있다. 분수(汾水)의 남쪽 고을이라는 데에서 얻은 이름이다. 전국 때 위나라 령이었다가 진혜문왕 9년인 기원전 329년에 진나라 영토가 되었다.

61)피지(皮氏)/ 지금의 산서성 하진현(河津縣) 서. 전국 때 위나라 령이었다가 분음(分陰)과 같이 진나라에 병합되었다.

62)형산(陘山)/ 현 하남성 상채시(上蔡市) 서쪽 약 10km 지점

63)상군(上郡)/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섬서성 낙수(洛水) 이동과 황량하(黃梁河) 이북, 동북으로는 자장(子長)과 연안(延安) 일대이다. 위문후 때 서하의 북쪽에 상군을 설치하여 융족과 경계를 정하고, 후에 이리(李悝) 즉 이극(李克)을 상군태수로 임명하여 진나라의 서진을 막았다. 이극이 상군태수에 부임하자 백성들이 모두 궁술에 뛰어나게 만들기 위해 영을 내리기를「백성들 사이에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송사가 있을 경우는 활을 쏘게 해서 명중하는 사람이 옳고 명중시키지 못한 사람은 옳지 않다고 판결하겠다.」라고 했다. 백성들이 이극이 내린 영을 듣고 모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궁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서쪽의 진나라가 쳐들어와 전쟁을 하게 되자 활로 진나라 군사들을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한비자 내저설 상)

64)포양(蒲陽)/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전국 때 위나라 령이다.

65)교상(嚙桑)/ ① 지금의 산서성 길현(吉縣)으로 춘추 때 당진의 영토이다. ② 지금의 산동성 패현(沛縣)이다. 전국 때 제나라 령이다. 열국의 집정대신들을 진나라의 재상 장의가 불러서 회동했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 산서성 길현으로 추정된다.

66)평주(平周)/ 지금의 산서성 개휴현(介休縣)으로 전국 때 위나라 령이다.

67)애왕(哀王)/ 죽서기년과 사기색은에 의하면 양왕의 뒤를 이은 왕은 소왕이며 애왕을 낳지 않았다고 했다. 양왕의 재위연도는 양혜왕의 후원년에 해당하고 양왕의 재위기간은 실제로 소왕의 재위기간이라 했다.

68)관진(觀津)/하남성 청풍현(淸豊縣) 서남의『사기색은』설과 하북성 무읍현(武邑縣) 동남의『사기정의』설 두 가지가 있다.

69)서수(犀首)/ 위나라의 관직 이름이로 공손연(公孫衍)을 말한다. 전국때 종횡가(縱橫家)로, 성은 희(姬)이고, 씨는 공손(公孫), 이름은 연(衍)이다. 위나라 음진(陰晉 : 지금의 섬서성 화음현(華陰縣) 동) 사람이며 위나라 혹은 진(秦)나라 공족 출신이라고도 한다. 처음에 진나라에 들어가 진혜왕(秦惠王)에게 유세하여 신임을 닫고 중용되었다. 진혜왕 5년 기원전 333년 대량조(大良造)에 임명되어 진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그 장군 용고(龍賈)를 사로잡고 조음(雕陰 : 지금의 섬서성 감천(甘泉) 서)을 점령했다. 다시 진나라를 위해 제(齊)와 위(魏)나라에 유세하여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조나라를 공격하여 소진(蘇秦)의 합종책을 무너뜨렸다. 후에 장의(張儀)와 사이가 벌어져 위나라로 들어가자 위혜왕은 그를 위나라의 대장으로 삼았다. 그는 한(韓), 조(趙), 위(魏), 연(燕), 중산(中山) 등의 5국의 재상이 되어 합종을 이끌고 진나라의 세력에 대항했다. 이어서 위혜왕 후원년 16년 기원전 319년 위(魏), 조(趙), 한(韓), 연(燕), 초(楚) 등의 5국의 군사를 일제히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고 다시 진나라의 서쪽에 자리잡은 의거(義渠)의 군주와 통하여 진나라의 배후를 기습하도록 하여 동서 양쪽에서 진나라를 공격하여 곤경에 처하도록 했다. 새로 즉위한 진무왕(秦武王)은 장의(張儀)를 쫓아내어 죽도록 하고 공손연을 불러들여 재상으로 삼았다. 공손연을 진나라의 재상이 된 후에도 허리에는 5국의 재상인(宰相印)을 차고 다니며 연횡(連橫)의 약장(約長) 노릇을 했다. 진무왕 4년 기원전 307년 감무(甘茂)에 의해 참소 당하여 진나라에서 다시 쫓겨나 위나라로 돌아갔다. 이어서 얼마 후에 위나라 사람에게 모함을 당하여 위왕에게 살해당했다.

70)임진(臨晉)/ 지금의 섬서성 대려현(大荔縣) 조읍진(朝邑鎭)에 있었던 관문(關門)으로 임진관(臨晉關)을 말한다. 고대에 관중 즉 섬서성 중앙으로 들어가는 길은 세 곳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길은 동관(潼關)을 통하는 길이고, 두 번째는 진령(秦嶺)을 넘어 지금의 단풍현(丹風縣) 무관진(武關鎭)에 있던 무관(武關)이고, 셋째는 임진관을 통하는 길이다.

71)양장판(羊腸坂)/ 태행산 남북으로 나 있는 산길을 말하며 남쪽의 산서성 진성시(晉城市)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호관현(壺關縣) 동남쪽에서 끝난다.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하게 산중에 난 길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72)연여(閼與)/전국 초때 한나라 땅이었으나 후에 조나라에 속했다. 지금의 산서성 화순현(和順縣) 서북.

73)위장(魏章)/ 위(魏)나라 출신으로 전국 때 진(秦)나라 장군. 처음에는 위나라 장수가 되었다가 장의(張儀)와 함께 진나라로 들어가 서장(庶長)에 임명되어 진혜왕(秦惠王)을 섬겼다. 주난왕(周赧王) 3년 기원전 312년,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초나라를 공격했다. 저리질(樗里疾)과 감무(甘茂)의 도움을 받아 초나라의 군사들을 지금의 하남성 단수(丹水)의 북쪽인 단양(丹陽)에서 크게 무찌르고 초장(楚將) 굴개(屈匃)를 사로잡았다. 단양의 싸움에서 승리한 위장은 당시 초나라 령이었던 사방 600리에 달하는 한중(漢中)의 땅을 점령하여 진나라 땅으로 만들고 그 곳에다 한중군(漢中郡)을 설치했다. 같은 해에 다시 란전(蘭田 : 지금의 호북성 종상(鍾祥) 서북)에서 초나라의 대군을 궤멸시켜 초나라의 전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초나라는 이 두 싸움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오랫동안 국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진무왕(秦武王)이 새로 즉위하자 장의와 함께 진나라에서 쫓겨나 위나라로 돌아가 그 곳에서 죽었다.

74)설공(薛公)/ 전국 사군자 중의 한 사람인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을 말한다. 맹상군 이 외에 두 사람의 전문이라는 사람이 있다. 위무후(魏武侯: 재위 기원전 396-370년) 때 오기와 언쟁을 벌려 설복시킨 위나라 재상과 위양왕(魏襄王: 재위 기원전 334-319년) 때 재상을 지낸 위문자(魏文子) 전문(田文)이 있다.

75)소어(昭魚)/ 초회왕(楚懷王)과 경양왕(頃陽王) 때 초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76)진무왕은 위나라의 공녀를 취해 부인으로 삼았다. 무왕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없었음으로 진나라가 무왕후를 그 친정 나라인 위나라에 돌려보내 준 것이다.

77)양진(陽晉)/ 진양(晉陽)을 말한다. 전국 때 위나랑 영토였다가 진(秦)나라의 영토가 된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永濟縣) 경내 남쪽의 황하(黃河) 서안(西岸)의 성읍이다.

78)봉릉(封陵)/ 지금의 산서성 풍릉도(風陵渡) 동쪽으로 전국 때 위나라 영토였다가 진나라 령이 되었다.

79)하외(河外)/ 전국 때 황하를 끼고 있었던 각 나라는 하외라는 명칭의 땅을 각각 갖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 소재지가 위치가 모두 같지 않다. 위나라의 하외라는 땅은 황하의 이서와 이남 지역을 말한다.

80)양성(襄城)/ 전국 초기 때 초나라 령이었으나 후에 위(魏)나라에 속했다가 다시 진(秦)나라에 속했다. 지금의 하남성 양성현(襄城縣)이다.

81)망묘(芒卯)/ 전국 때 위나라 대신. 지모가 있어 위나라에 중용되었다. 위안리왕(魏安釐王) 4년 기원전 273년 진나라 장군 백기가 이끌던 진군(秦軍)을 화양(華陽)의 땅에서 막다가 싸움에서 대패하고 그가 거느린 15만의 위군(魏軍)은 모두 참수 당하고 그는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

82)신원(新垣)/사기지명고에 의하면 확실치는 않으나 왕원(王垣) 즉 지금의 산서성 원곡현(垣曲縣) 동남인 듯하다고 했다.

83)곡양(曲陽)/ 춘추 때 양분(陽焚)을 말하나 그 위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지금의 하북성 곡양현(曲陽縣) 서쪽으로 전국 때 조나라 영토 설과 지금의 하남성 제원현(濟源縣) 동쪽으로 전국 때 위나라 영토 설이다.

84)송왕(宋王)/ 송나라의 마지막 군주 언(偃)을 말한다. 폭군으로 송나라의 걸왕(桀王)이라고 불리워진다. 폭군을 정벌한다는 명분을 세운 제민왕에게 멸망당했다.

85)온(溫)/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 서남으로 서주와 춘추 때 소국(蘇國)의 도읍지였다가 당진(唐晉)에 편입되었다. 전국 때 위나라 령이다.

86)안성(安城)/전국 때 위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여남(汝南) 동남이라는 설과 같은 성내의 원양현(原陽縣) 서남이라는 설이 있다. (사기지명고)

87)진나라의 장수 백기가 무관(武關)을 통해 나와 초나라의 도성 영성(郢城)을 함락시킨 일을 말한다. 이어서 백기는 초나라 선왕들의 묘와 사직이 세워진 이릉(夷陵)을 불사르고 계속 진격하여 경릉(竟陵)에 이르렀다. 초나라는 진나라의 세력을 피해 그 도성을 진성(陳城)으로 옮겼다. 진나라는 초나라의 영성(郢城)에 남군(南郡)을 설치하여 그 군현으로 삼았다.

88)박국(博局)/ 올빼미(梟 : 효), 사냥개(盧 : 노), 꿩(雉 : 치), 송아지(犢 : 두), 주사위(塞 : 색) 등의 다섯 가지 모양을 나무로 깎아 장기와 흡사하게 행마를 하며 노는 놀이이다. 자세한 행마법은 실전 되어 알 수가 없으나, 다섯 가지 말 중 효(梟)가 가장 강한 것으로 장기로 말하면 차(車)에 해당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89)처구(郪丘)/ 춘추 때 제나라 령으로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東阿縣) 경내라고 하나 『진본기』 소양왕(昭襄王) 41년 기사와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 및 『수호지진간(睢虎地秦簡)』의 『편년기(編年紀)』 등에는 모두 형구(邢丘)로 되어 있다. 형구는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 경내 동북에 있었다.

90)위제(魏齊)/ 전국 때 위나라의 대신. 위나라 공족 출신으로 소왕(昭王)과 안리왕(安釐王) 때 재상을 지냈다. 무고하는 말을 믿고 범수(范睢)를 잡아 태형을 때리고 혼절시킨 다음 자기의 문객들에게 명하여 그의 몸에 오줌을 누게 하였다. 범수는 간신히 몸을 빼내 진나라로 가서 소양왕 밑에서 승상이 되었다. 범수가 옛날의 원한을 갚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여 위제를 잡으려고 하자 그는 조나라로 도망쳐 평원군에 몸을 의탁했다. 진나라가 다시 조나라를 위협하자 다시 조나라의 재상 우경(虞卿)의 도움으로 조나라에서 도망쳐 위나라로 돌아와 신릉군(信陵君)의 도움을 청했다. 신릉군이 위제를 의심하여 주저하자 그는 자살하고 말았다. 상세한 이야기는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참조

91)중기(中旗)/ 진나라의 금(琴)과 슬(瑟)을 관장하는 관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종자기(鍾子期) 혹은 신기(申旗)의 호칭이다. 전국 때 진나라의 유세객(遊說客)으로 음률(音律)에 정통했다. 진소양왕 밑에서 벼슬을 살았다. 『전국책(戰國策)』에는 중기(中期)로 표기되어 있다.

92)판(版)/ 판(板)이라고도 한다. 일판(一板)은 2자 혹은 8자라고도 했다.

93)안읍(安邑)/ 위나라가 주왕으로부터 제후국으로 승인 받기 전 위씨 종족들의 종읍(宗邑)으로써 후에 위나라의 도읍지가 되었다. 지금의 산서성 하현(厦縣)을 말한다. 위(魏)나라가 진(秦)나라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양혜왕 31년 기원전 340년 그 도성을 안읍에서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인 대량성(大梁城)으로 옮겼다. 후에 진소왕(秦昭王)이 재위 21년인 기원전 286년에 사마착(司馬錯)을 시켜 안읍을 공격하게 하자 위소왕(魏昭王)이 안읍(安邑)과 하내(河內)의 땅을 진나라에 바쳐 이후로 안읍은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94)평양(平陽)/ 한나라가 제후국으로 주왕으로부터 승인을 받기 전의 한씨들의 종읍으로써, 한나라가 맨 처음으로 도읍으로 삼은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서남에 있었다.

95)범좌(范痤)/ 전국 때 위나라의 대신. 위안리왕 때 재상을 지냈다. 조나라가 위나라에 미(彌) 땅을 바치고 그를 죽여달라고 청하자 위왕이 허락했다. 그는 위왕의 동생 신릉군(信陵君)에게 편지를 써서 말하기를 「조나라가 땅을 바친다고 하면서 이 범좌를 죽여달라고 하자 조왕께서 그 청을 허락했습니다. 그렇다면 강국인 진나라도 역시 조나라의 계책을 이용하여 군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신릉군의 마음이 움직여, 위왕에게 상주하여 범좌를 방면하게 하였다.

96)모후(母后)/ 소양왕의 생모 선태후(宣太后)를 말한다. 초나라 출신으로 미팔자(羋八子)라고 불렀다. 무왕의 뒤를 이은 소양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나이가 어렸음으로 선태후가 섭정을 행하기 시작하여 무려 41년을 계속했다. 이에 재상이 된 범수(范睢)의 건의에 의해 모후의 자리에 쫓겨났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선태후는 마음에 울화병이 들어 죽었다.

97)양후(穰侯)/ 전국 때 진나라 대신으로 이름은 위염(魏冉)이다. 초나라 사람으로 진소양왕의 모후인 선태후의 이부(異父) 동생이다. 혜왕(惠王), 무왕(武王) 때부터 중책을 맡아 진나라의 정사를 돌봤다. 무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 형제들이 진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위염이 소양왕을 진왕의 자리에 올렸다. 소양왕 2년 기원전 305년 무왕의 동생인 서장(庶長) 장(壯)이 반란을 일으키지 위염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진압하고 장(壯)과 그를 따르던 대소 신료와 공족들을 살해하고 무왕의 부인을 위나라로 쫓아냈다. 이후로 위염의 위세는 진나라를 징동시켰다. 소양왕 7년 기원전 300년 진나라의 재상에 임명되었으며 15년 기원전 292년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인 양(穰)에 봉해지고 다시 지금의 산동성 정도(定陶)를 더하고 양후(穰侯)로 불리워졌다. 전후로 4번에 걸쳐 진나라의 재상을 역임했으며 한 번은 조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일찍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세 번이나 위나를 쳐들어가 위나라 하내(河內)에 있던 크고 작은 성 60여 개의 성을 점령했으며 위나라에 압박을 가하여 하동(河東)의 땅 400리를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위나라의 도성 대량성을 포위했으며, 조(趙)와 위(魏) 두 나라 연합군을 화양(華陽 : 지금의 하남성 신정(新鄭) 북)에서 대파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剛)과 수(壽) 등의 땅을 점령하여 그의 봉지인 도읍(陶邑)의 영지를 넓혔다. 백기(白起)를 발탁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한 때 그의 권력이 강해지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그의 사가의 부는 왕실보다도 더 컸다. 결국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발호하다가 소양왕 41년 기원전 266년 재상의 자리에 파직되었다. 다음 해 선태후가 죽고 그는 봉읍인 도읍(陶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기(史記) 『穰侯魏冉列傳12』 참조

98) 소양왕의 동모제 경양군(涇陽君)과 고릉군(高陵君)을 말한다.

99)당시 한나라는 환혜왕(桓惠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그 모후가 섭정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100)연여지사(閼與之事)/ 기원전 270년 진나라가 장군 호양(胡陽)을 시켜서 한나라의 연여(閼與)를 공격하게 하였다. 조나라가 조사(趙奢)를 보내 진군(秦軍)을 격파하고 연여를 구한 일을 말한다.

101)명액지새(冥阨之塞)/ 춘추전국 시대 때의 험도. 지금의 하남성 신양시(信陽市) 평정관(平靖關)을 말한다.

102)모(茅)/ 찬모(欑茅)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남성 휘현(輝縣) 서남에 있었던 전국 때 원래 위(魏)나라 땅이었다가 진나라 령이 되었다

103)형구(邢丘)/ 90번 주 참조

104)궤진(垝津)/ 사기정의의 설은 연진(延津)의 오기라 했고, 사기지의의 설은 궤(垝), 위(圍), 위(韋) 세 자는 고대에 서로 차용되어 통했음으로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 동에 있었던 동군(東郡) 백마(白馬)의 위진(韋津)을 가리킨다고 했다. 고대의 황하는 지금의 하남 연진의 서북에서 활현 이북으로 흘러 황하를 건너는 나루가 여럿이 있었고 각기 그 나라마다 고유명칭이 있었다. 연진(延津)이라는 이름은 그 일대에 황하를 건너는 여러 나루를 총칭해서 부르던 이름이다.

105)공(共)/ 지금의 하남성 휘현(輝縣) 일대에 있던 땅 이름으로 서주 공화(共和) 기간 중 공백(共伯) 화(和)의 봉읍. 춘추 때 위(衛)나라 땅이었다가 전국 때 위(魏)나라 령이 되었다.

106)급(汲)/ 지금의 하남성 급현(汲縣)으로 전국 때 위(魏)나라 땅이다.


107)원옹(垣雍)/ 지금의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서남으로 춘추 때의 이름은 형옹(衡雍)이다. 전국 때 한나라 땅이 되어 이름이 원옹으로 바뀌었다. 진소양왕 48년 기원전 267년 한나라가 바쳐 진나라 땅이 되었다.

108)결국은 위나라는 신릉군의 예언대로 하구의 물을 끌어들여 대량성을 잠기게 한 진나라 장수 왕분(王賁)에 의해 기원전 225년 망했다.

109)안릉군(安陵君)/ 위양왕(魏襄王)의 아들이며 안리왕은 양왕의 손자이다.

110)엽양(葉陽)/ 지금의 하남성 엽현(葉縣)으로 전국 때 초나라 땅이었다가 후에 진나라 령이 되었다.

111)곤양(昆陽)/ 지금의 하남성 엽현(葉縣)에 있던 고을 이름으로 전국 때 위나라 땅이었다가 진나라 령이 되었다.

112)무양(舞陽)/ 지금의 하남성 무양(舞陽) 서북. 전국 때 위나라 땅이다.

113)임향(林鄕)/ 지금의 하남성 울지현(蔚氏縣) 서, 춘추 때 정나라 땅이었다가 전국 때 위나라 땅이 되었다.

114)유중(囿中)/ 지금의 하남성 중모현(中牟縣) 경내에 있었던 포전택(圃田澤)이라는 못 이름을 말한다.

115)문대(文臺)/ 지금의 하남성 하택현(荷澤縣) 서남에 있던 대 이름으로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가 이곳에서 주연을 베풀었다는 기사가 있다.

116)수도(垂都)/ 지금의 하남성 하택현(荷澤縣) 북쪽의 땅 이름으로 전국 때 위나라 령이다.

117)평감(平監)/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孟津縣) 동과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서남이라는 설이 있는데 여기서는 장원현을 말한다.

118)산남(山南)과 산북(山北)/ 여기소 산이라 함은 지금의 섬서성 화현(華縣) 일대에 있는 화산(華山)을 말한다. 즉 화산 이남과 이북을 일컫는 말이다.

119)하내(河內)/ 춘추전국 시대 때 산서성과 섬서성을 구분 짓는 황하의 이동지역과 산서와 하남을 경계짓는 황하의 이북 지역을 총칭하는 명칭이다. 하곡부(河曲部)라고도 했다.

120)하외(河外)/ 전국 때 섬서와 산서를 경계짓는 황하의 이동과 산서와 하남을 경계짓는 황하 이남 지구를 총칭하는 말이다. 즉 지금의 황하 이남인 하남성 섬현(陝縣)에서 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까지의 일대를 말한다.

121)녕(寧)/ 지금의 하남성 획가현(獲嘉縣)으로 전국 때 위나라 땅이다.

122)공손희(公孫喜)

① 출생연도는 알수 없고 죽은 해는 기원전 293년이다. 전국 때 위나라 장군. 위애왕 18년 기원전 301년( 일설에 의하면 위양왕 18년 기원전 299년이라고도 한다.) 위(魏), 제(齊), 한(韓) 삼국의 연합군 이끌고 초나라로 진격하여 방성(方城)에서 싸워 초장(楚將) 당매(唐昧)를 잡아서 죽였다. 이어서 승세를 몰아 완(宛)과 엽(葉) 땅 이북 일대의 초나라 땅을 점령했다. 위소왕(魏昭王) 3년 기원전 293년 다시 한(韓)과 위(魏) 두 나라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백기가 이끌던 진군(秦軍)에 의해 이궐(伊闕)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자신은 포로가 되어 살해되었다.

② 전국 때 위나라의 책사다. 위안리왕 때 위나라 재상과 태자 증(增)의 사이가 나빴다. 위나라 재상이 태자를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공손희가 위나라 재상에게 계책을 내기를 진나라를 급공하면 진나라가 태자를 감금하여 죽일 것이라고 했다. 위나라 재상은 공손연(公孫衍)이라는 설도 있다.

123)야왕성(野王城)/ 지금의 하남성 심현(沁縣)으로 춘추 때 당진(唐晉)의 땅이었다가 전국 때 위나라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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