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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가(趙世家)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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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가(趙世家)13


조씨들의 선조들은 섬진(陝秦)과 같은 조상들이다. 중연(中衍)1)의 대에 이르러 은나라의 대무제(大戊帝)2)의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가 되었다. 그 후손인 비렴(蜚廉)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아들의 이름을 오래(惡來)다. 오래는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섬기다 주무왕에게 살해당했다. 오래의 후손이 진나라를 세웠고 오래의 동생 계승(季勝)의 후손이 조나라를 세웠다.

계승이 맹증(孟增)을 낳고 맹증은 주성왕(周成王)의 총애를 받았다. 이가 택고랑(宅皐狼)3)이다. 고랑은 형보(衡父)를 낳고 형보는 조보(造父)를 낳았다. 조보는 주목왕(周穆王)의 총애를 받았다. 조보가 도림(桃林)4)에서 도려(盜驪), 화류(驊騮), 녹이(綠耳)5) 등의 명마 8필을 얻어 목왕에게 바쳤다6). 목왕은 조보를 마부로 삼아 서쪽으로 순수를 나갔다가 서왕모(西王母)7)를 만나 함께 놀다가 돌아갈 생각을 잊었다. 이 때 서언왕(徐偃王)8)이 반기를 들자 주목왕은 하루에 천리를 달려가서 서언왕을 공격하여 벌어진 싸움에서 크게 이겼다. 주목왕은 자기의 수레를 몰던 조보의 공을 치하하여 조(趙) 성을 내렸다. 이로부터 조씨 성이 생겼다.

조보로부터 6세에 이르러 엄보(奄父)가 태어났다. 자를 공중(公仲)이라 했는데 주선왕(周宣王)이 융족(戎族)을 정벌할 때 그의 어자가 되었다. 천무(千畝)에서 싸울 때 엄보가 주선왕을 위험에서 구했다. 엄보가 숙대(叔帶)를 낳았다. 숙대 때 주유왕(周幽王)이 황음무도하자 주나라를 떠나 당진으로 가서 문후(文侯)를 섬겼다. 숙대로 인해 당진에서 조씨들이 비로소 일어서기 시작했다.

숙대 이후로부터 조씨 종족들은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여 5세에 이르자 조숙(趙夙)이 태어났다. 진헌공(秦獻公)이 그의 재위 16년인 기원전 661년에 곽(霍), 위(魏), 경(耿)9) 등의 제후국을 정벌할 때 조숙은 당진의 장수가 되어 곽을 공격했다. 곽나라의 군주는 제나라로 달아나 구원을 청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당진에 큰 가뭄이 들자 점을 쳐 다음과 같은 점괘를 얻었다.

「곽태산(霍太山)의 신령이 노하여 당진에 재난을 내렸다.」

헌공이 조숙을 제나라에 보내 곽국의 군주를 불러오도록 해서 그 나라를 돌려주고 곽태산에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그러자 당진에 풍년이 들었다. 헌공이 조숙에게 경(耿) 땅을 하사했다. 같은 해 조숙이 공맹(共孟)을 낳았다.

노민공(盧閔公) 원년 기원전 661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공맹이 조쇠(趙衰)를 낳았다. 조쇠의 자는 자여(子餘)다. 조쇠가 당시 당진의 여러 공자 중 누구를 섬길지에 대해 점을 쳤으나 모두 불길하게 나왔다. 다시 공자 중이(重耳)를 섬기면 어떨지에 대해 을 치자 길하게 나왔다. 조쇠가 즉시 달려가 중이를 섬겼다. 중이가 여희(驪姬)의 란으로 당진에서 도망쳐 적(翟)나라로 망명할 때 조쇠도 같이 따라갔다. 적나라가 장구여(廧咎如)10)를 정벌하고 그 군주의 두 딸을 얻었다. 적나라 군주가 두 딸 중 동생은 중이에게, 언니는 조쇠에게 주어 각각 그들의 처로 삼게 하였다. 적녀가 조쇠와의 사이에서 조돈(趙盾)을 낳았다. 옛날 조쇠는 당진에 살았을 때 그의 본처와의 사이에서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제(趙嬰齊)등을 두고 있었다.11) 조쇠가 중이를 따라 나라 밖으로 19년 동안이나 돌아다니다가 돌아 올 수 있었다. 시호가 문공인 중이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르자 조쇠를 대부로 봉해 원(原)12)에 머물면서 국정을 돌보게 했다. 진문공이 환국하여 당진의 군주자리에 오르고 다시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은 모두 조쇠의 계책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조쇠에 대한 사적은 당진세가(唐晉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조쇠가 당진으로 귀국하자 그의 본처가 한사코 적국에 있던 적녀를 데려오자고 고집했다. 이윽고 적녀가 그의 아들과 함께 당도하자 그의 처는 적녀의 아들인 조돈을 적자로 삼아 조쇠의 뒤를 잇게 하고 본처의 세 아들을 그 밑에 두었다. 진양공(晉襄公) 6년인 기원전 622년 조쇠가 죽어 그 시호를 성계(成季)라 했다.

조돈이 성계의 직위를 이어받아 당진의 국정을 돌본지 2년 만에 진양공이 죽었다. 조돈은 태자 이고(夷皐)가 나이가 어려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양공의 동생 공자옹(公子雍)을 세우려고 했다. 당시 공자옹은 섬진으로 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자를 보내 모셔오려고 했다. 태자 이고의 모친이 밤낮으로 통곡을 하다가 조돈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돌아가신 선군께서 무슨 죄가 있다고 그의 적자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는단 말입니까?」

그 일로 인해 공실과 대부들에게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한 조돈이 두려운 마음이 되어 다시 태자를 즉위시켰다. 이가 영공(靈公)이다. 조돈은 군사를 일으켜 공자옹을 영접하러 섬진에 간 사람들을 돌아오지 못하게 막았다. 영공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 조돈은 당진의 국정을 더욱 전단했다.

영공이 선지 14년이 되는 해는 주광왕 6년으로 기원전 607년이다. 영공은 장성함에 따라 더욱 교만해졌다. 조돈이 여러 번에 걸쳐 간했으나 영공은 귀를 기우리지 않았다. 한 번은 영공이 곰발바닥 요리를 먹다가 잘 삶아지지 않았다고 요리사를 죽여 그 시체를 궁궐 밖으로 내가는 시자들의 모습을 조돈이 발견했다. 이 일로 조돈에 대해 두려운 생각을 갖게 된 영공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조돈은 평소에 사람에게 인자하고 애정으로 대했다.

옛날 조돈이 뽕나무 밑에서 식사를 하다가 굶주려 아사 직전의 사람을 발견하고 구해 준 일이 있었다.13) 조돈은 그 사람의 도움과 보호로 영공의 마수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해 도망칠 수가 있었다. 조돈이 도망쳐 미처 국경을 벗어나지 못했을 때 조돈의 조카인 조천(趙穿)이 영공을 살해하고 양공의 동생 흑둔(黑臀)을 세웠다. 이가 성공(成公)이다. 조돈이 다시 돌아와 국정에 임했다. 당진의 군자들이 조돈을 비난하며 말했다.

「당진의 국정을 맡았던 정경(正卿)으로서 국경 밖으로 도망치지지 않았으면서도 돌아와 그 군주를 시해한 반역도를 잡아서 죄를 주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당진의 태사(太史) 동호(董狐)가 사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돈이 그 군주를 시해했다.」

조돈은 성공의 뒤를 이은 경공(景公) 때 죽었다. 시호는 선맹(宣孟)이고 아들 조삭(趙朔)이 그의 자리를 이었다.

당진의 경공 3년 째 되는 해에 조삭은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 출동하여 초장왕(楚莊王)과 하상(河上)에서 싸운 당진군(唐晉軍)의 하군을 이끌고 참전했다.14) 조삭의 부인은 성공의 손위 누이이다.

같은 해 대부 도안가(屠岸賈)가 조씨들을 멸족시키려고 했다. 옛날 조돈이 살아 있을 때, 꿈속에서 그들의 조상인 조숙대가 자기의 허리를 붙들고 매우 슬피 울다가, 이어서 울음을 그치더니 큰 소리로 웃으며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했다. 조돈이 점을 쳐보니 불로 태운 거북 껍질의 균열이 처음에는 끊어졌다가 나중에는 다시 이어 졌다. 조씨 집안의 태사 원(援)이 풀이했다.

「대감이 꾼 꿈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그 화가 대감에게는 직접 미치지는 않겠지만 대감의 아들에게 미칠 징조입니다. 그것들이 모두 대감이 저지른 잘못 때문입니다. 손자 때에 가서는 조씨 집안은 더욱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도안가라는 사람은 옛날 조천에게 시해당한 영공의 총애를 받다가 다시 경공의 눈에 들어 사구(司寇)가 되어 난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옛날 영공의 시해 사건에 대한 책임이 조돈에게 있다고 하며, 당진국의 유력한 여러 종족들의 수장들을 불러 말했다.

「조돈이 비록 영공의 시해 건에 관해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역시 그는 시해사건의 수괴다. 신하의 신분으로 그 군주를 시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손들은 여전히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살고 있으니 어찌 다른 죄인들을 벌 줄 수 있겠는가? 조씨들은 주살되어야 마땅하다.」

조씨들의 문객으로 있다가 출사한 한궐(韓厥)이 조씨들을 변호했다.

「영공이 시해될 때 조돈은 나라 밖에 있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선군들 께서 조돈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러 장수들이 그 후손을 주멸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선군들의 뜻을 거스르며 나라의 유력한 세족을 멋대로 죽였다는 죄명을 얻는 일이 됩니다.」

도안가는 한궐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궐이 조삭을 찾아가 죽음을 피해 도망치라고 권했으나 그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도와 우리 조씨들의 제사가 끊어지게 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한궐이 조삭의 부탁을 허락하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도안가는 그 군주에게 주청하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여러 종족들의 장수들과 함께 조씨들이 살던 하궁(下宮)을 공격하여 조삭(趙朔),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제(趙嬰齊) 등을 포함하여 조씨 종족들을 모조리 죽였다.

조삭의 처는 성공의 손위 누이로 당시 경공에게는 고모가 된다. 란이 일어나자 그녀는 아이를 밴 몸으로 공궁(公宮)으로 들어가 몸을 피했다. 조삭의 문객에 공손저구(公孫杵臼)라는 사람이 있었다. 저구가 조삭의 친구인 정영(程嬰)에게 말했다.

「왜 같이 죽지 않소?」

정영이 대답했다.

「조삭의 부인이 유복자를 임신하고 있소. 다행히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우리가 맡아야 길러야 하오. 그렇지 않고 여아를 낳는다면 우리가 그때 가서 죽는다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조삭의 부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사내아이를 낳았다. 도안가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공궁을 수색했다. 조삭의 부인이 갓난아이를 그녀의 속바지 가랑이 사이에 넣고 속으로 기도를 했다.

「조씨 종족들을 멸족시키려면 네가 울고, 멸족되지 않으려면 울지 말아라!」

군사들이 공궁에 들어와 수색을 했으나 아이는 뜻밖에 울지 않았다. 이윽고 아이가 위험에서 벗어나자 정영이 공손저구를 향해 말했다.

「오늘 도안가란 놈이 수색을 했으나 아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후에 반드시 다시 수색을 할 것이오. 그때는 어떻게 위험에서 벗어나겠소?」

저구가 정영에게 되물었다.

「고아를 맡아 기르는 일과 지금 죽는 일 중 어느 편이 쉽다고 생각하시오?」

「죽는 것은 쉬운 일이고, 고아를 맡아 기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오.」

「그대는 조씨들의 선대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있는 힘을 다해 어려운 일을 맡아주고 나는 쉬운 일을 맡아 먼저 죽겠소.」

이어서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어 궁리한 끝에 다른 사람의 아이를 등에 업고 화려하게 수를 놓은 비단 강보에 싸서 산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정영이 다시 산속에서 나와 여러 종족의 장수들에게 말했다.

「이 정영이 불초하여 조씨의 일점 혈육을 기를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만일 조씨의 고아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면 누가 능히 나에게 천금을 주겠소?」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며 정영에게 천금을 주기로 하고 그를 앞세워 군사를 이끌고 공손저구가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저구가 거짓으로 말했다.

「정영 소인배 놈아! 옛날 조씨들의 하궁(下宮)에서 변을 당할 때 같이 죽지 않고 나와 함께 모의하여 조씨의 고아를 몰래 숨겨 기르기로 해 놓고 오늘 다시 돈에 욕심이 나서 나를 팔았구나! 아무리 네가 조씨 고아를 부양할 능력이 없어서라고 하지만 어찌 네가 돈에 눈이 멀어 나를 팔아먹을 수 있단 말이냐?」

공손저구가 말을 마치더니 조씨 고아를 품에 안고 외쳤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조씨 고아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여러 장군들게 부탁건대, 제발 어린아이만은 살려 주시고 이 저구의 목숨만 가져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여러 종족의 장수들이 허락하지 않고 공손저구와 어린아이를 같이 죽였다. 자기들이 죽인 아이가 진짜 조씨의 고아인 줄 알았던 여러 종족들의 장수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조씨의 진짜 고아는 살아서 정영이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그리고 15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때 당진의 경공이 병이 들어 점을 쳤다. 대업(大業)15)의 후손이 하늘이 바란 대로 되지 않아 재앙이 생겼다는 점괘가 나왔다. 경공이 한궐에게 그 점괘에 관하여 물었다. 한궐은 조씨의 일점 혈육이 아직 살아 있다고 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업의 자손 중 당진에서 그 후사가 끊긴 집안은 조씨들이 아닙니까? 무릇 중연(中衍)의 후손들의 성은 모두 영(嬴)씨입니다. 중연은 사람의 얼굴에 입은 새의 부리처럼 생겼었습니다. 그가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은나라의 대무(大戊) 임금을 보좌했으며 그 후손은 주나라 조정에서 벼슬을 하며 공을 세우는 등, 모두 덕을 베푸는데 힘썼습니다. 이어서 주나라 말기에 유왕(幽王)이 포학무도하여 조숙대가 주나라를 떠나 당진으로 들어와 우리의 선군인 문후(文侯)를 섬기기 시작하여 성공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공을 세워 그들의 제사는 아직까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유독 주공께서 조씨 종족들을 멸족시켜 국인들이 그것을 애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한 징조가 귀갑(龜甲)과 시초(蓍草)의 점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이를 헤아리십시오.」

「조씨 가문에 남아있는 후손이 있는가?」

한궐이 옛날 조씨 가문의 고아에게 있었던 진상을 고했다. 이윽고 경공과 한궐이 상의하여 조씨 고아를 불러 조씨 종족들의 후사를 세우기로 했다. 경공이 아무도 몰래 조씨 고아를 불러 궁궐에 숨겼다. 여러 종족들의 장수들이 궁궐에 들어와 경공의 병문안을 드렸다. 경공은 한궐이 거느린 군사들로 여러 장수들을 위협하여 그들이 조씨 고아를 만나도록 했다. 조씨 고아의 이름은 조무(趙武)다. 여러 종족의 장수들은 어쩔 수 없이 조씨 종족들을 멸족시킨 일에 대해 실토를 했다.

「옛날 하궁의 난은 모두 도안가가 시켜서 한 일입니다. 도안가는 군주의 명이라고 사칭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난에 가담하도록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감히 우리가 난을 일으킬 수 있었겠습니까? 비록 주군께서 그 일로 해서 병이 나지 않았더라도, 저희들은 원래 조씨들의 후손을 다시 세우기 위해 주청을 드리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오늘 주군께서 명을 내리시니, 그것은 저희들이 바라던 바입니다.」

이윽고 경공이 조무와 정영을 불러 여러 종족의 장수들에게 인사를 올리게 한 후에 옛날과는 반대로 그들은 연합하여 도안가의 종족을 공격하여 멸하고, 옛날 조씨들이 전답과 봉읍은 모두 돌려주었다.

조무가 관례(冠禮)를 행하고 성인이 되니 정영이 당진의 여러 대부들에게 감사의 말을 올린 후에 조무를 보고 말했다.

「옛날 하궁의 난 때 나와 저구는 같이 따라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때 죽지 않은 이유는, 조씨들의 후사를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당신이 성인이 되어 다시 조씨들의 후사를 잇고 옛날 조씨들의 작위를 찾게 되었으니, 나는 이제 지하에 가서 조선맹(趙宣孟)과 공손저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되겠습니다.」

조무가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고 한사코 간청하며 말했다.

「제가 이 몸을 바쳐 그대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는데, 어찌 나를 버리고 죽으려고 하십니까?」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공손저구는 내가 능히 일을 맡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오늘 내가 가서 일 일을 알리지 않는다면 저구는 우리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기고 비탄에 빠져 슬퍼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일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알고 슬퍼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영은 곧이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무는 재최(齊衰)16)를 입고 3년 상을 지낸 다음 정영의 제사를 받들기 위해 제읍(祭邑)17)을 마련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기를 대를 이어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조무가 복권한지 11년 되는 해인 기원전 573년에 당진의 려공(厲公)이 그 대부 삼극(三郤)18)을 살해했다. 그 화가 자기에게 미치게 됨을 두려워한 란서(欒西)가 려공을 시해하고 양공의 증손자인 주(周)를 세웠다. 이가 당진의 도공(悼公)이다. 당진의 대부들 세력은 이때부터 공실의 힘보다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조무가 복권되어 조씨 종족들을 이끈 지 27년 만인 기원전 558년에 에 당진의 도공이 죽고 평공(平公)이 섰다. 평공 12년 기원전 546년 에 조무가 당진의 정경이 되었다. 그 다음해에 오나라의 연릉(延陵) 계자(季子)19)가 당진에 사신으로 왔다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돌아갔다.

「당진의 정권은 마지막에 조무자(趙武子)20), 한선자(韓宣子)21), 위헌자(魏獻子)22) 세 사람의 손에 떨어지 될 것이다.」

조무가 죽자 시호를 문자(文子)라 했다.

문자가 경숙(景叔)을 낳았다. 경숙이 살아 있을 때 제경공(齊景公)이 안영(晏嬰)을 사자로 보냈다. 안영이 당진의 숙향(叔向)23)에게 말했다.

「제나라의 정권은 결국은 모두 전씨(田氏)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숙향도 역시 안영에게 당진의 앞날에 대해 예언했다.

「당진의 정권도 머지않아 모두 육경(六卿)을 차지하고 있던 종족들에게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육경이 자신들의 군주를 안중에 두지 않고 방자하게 굴고 있지만, 군주 된 자는 아무 것도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조경숙(趙景叔)이 죽고 그의 아들 조앙(趙鞅)이 작위를 계승했다. 이가 조간자(趙簡子)다. 경공(頃公) 9년 기원전 517년, 당진의 정경이 된 조간자는 제후들을 소집하여 주나라를 지켰다. 그 다음 해에 주경왕(周敬王)을 호위하여 주나라에 입국시켰다. 이전에 주경왕이 그의 동생 자조(子朝)에게 쫓겨나 외지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24)

당진 경공(頃公) 12년 기원전 514년, 육경이 공족 출신의 기씨(祁氏)와 양설씨(羊舌氏)가 법을 위반하자 멸족시키고 그들의 봉읍을 나누어 현(縣)으로 삼아 육경의 종족들을 그 대부로 임명했다. 당진 정공(定公) 11년 기원전 501년,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제나라에서 도망쳐와 조간자에게 뇌물을 바치자, 조간자는 양호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조간자가 병에 걸려 5일이 지나도록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자 대부들이 모두 걱정하였다. 명의 편작(扁鵲)이 와서 살펴보고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조간자의 가신 동안우(董安于)25)가 편작의 뒤를 따라가 묻자 편작이 말했다.

「조공(趙公)의 혈맥이 이미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들은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옛날 섬진의 목공(穆公)이 이와 같은 병에 걸렸다가 7일 만에 깨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목공이 곁에 있던 공손지(公孫枝)26)와 자여씨(子與氏) 삼형제27)에게 말하기를 나는 상제가 살고 있던 곳에 가서 매우 즐겁게 지내고 왔다. 내가 그곳에서 오래 머물렀던 이유는 마침 배워야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제가 나에게 『앞으로 당진에서 큰 난리가 나서 오세(五世)28)에 이르도록 안정되지 못하다가 후에 패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패주는 얼마 살지 못하다가 죽고 그의 아들이 장차 천하를 호령하면서 너의 섬진 사람이라면 남녀 구별 없이 죽이게 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공손지가 목공의 말을 받아 적어 보관했습니다. 진나라의 예언서 진참(秦讖)은 이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당진은 헌공 때 내란이 일어났고, 문공 때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공의 아들은 양공(襄公)은 섬진의 군사들을 효산(殽山)의 험지에서 전멸시키고 도성으로 돌아간 후에 음란한 생활에 빠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 일입니다. 지금 조공도 그와 같은 병에 걸리셨습니다. 3일이 지나기 전에 병이 낫고 깨어나면, 그때 필시 여러 대부들에게 전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이윽고 편작이 말한 대로 이틀하고 한나절이 더 지나자 조간자가 깨어나서 여러 대부들에게 말했다.

「나는 상제가 있는 곳에 가서 매우 즐겁게 보내고 왔다. 여러 신들과 하늘의 중심지인 균천(鈞天)29)에서 놀았다. 천하의 모든 춤과 함께 광락(廣樂)30)을 아홉 번이나 연주하였다. 삼대의 음악과는 같지 않았지만 그 소리는 내 마음을 감동시켰다. 곰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나와서 나를 잡아가려 하니 상제가 나에게 활로 쏘라고 명했다. 곰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다시 말곰이 나에게 다가와서 내가 다시 활로 쏴서 맞혀 죽였다.31) 상제가 기뻐하며 나에게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 두 개를 주었는데 그 안에 각각 작은 소쿠리가 하나씩 더 있었다. 또 내가 보니 내 아들이 상제 곁에 앉아 있었다. 천제가 나에게 적(翟) 땅이 원산지인 개 한 마리를 주면서 『네 아들이 장성하거든 이 개를 주라!』고 말했다. 상제가 또 나에게 이르기를 『당진국은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쇠약해져 이후 7세에 이르게 되면 망하고 되고 영씨(嬴氏)가 강성해져 주나라 사람들을 범괴(范魁)32)의 서쪽에서 크게 무찌를 것이다. 그러나 또한 나라를 영원히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다.33)』라고 말했다.

동안우(東安于)가 조간자의 말을 받아 적어 보관했다. 다시 동안우가 편작이 한 말을 보고하니 조간자는 그에게 전답 4만 무(畝)를 상금으로 주었다.

어느 날 조간자가 외출을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길을 막고 있는데 쫓아도 비키지 않아, 시종이 화가 나서 칼로 찔러 죽이려고 했다. 그 사람이 말했다.

「내가 조공을 만나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시종이 그 사람의 말을 전하자 조간자가 그를 불러오게 하여 보더니 말했다.

「아! 누군가 했더니 내가 옛날 한 번 만난 적이 있던 자석(子晰)이라는 사람이 아니오?」

자석이 말했다.

「제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주위의 사람을 물리쳐 주시기 바랍니다.」

조간자가 주위에 있던 사람을 물러가게 하여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자석이 입을 열어 말했다.

「주군께서 병이 났을 때 꿈속에서 본 상제 곁에 앉아 있던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조간자가 놀라 외쳤다.

「그렇습니다. 그대가 상제 곁에 앉아있었지요. 그때 그대가 봤을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상제가 시킨대로 작은 곰과 큰 곰을 활로 쏘아 모두 죽였습니다.」

「그랬었지요. 그런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앞으로 당진국에 대란이 일어나면 조공께서는 제일 먼저 그 해를 당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상제께서 조공에게 명하여 이경(二卿)34)을 멸하도록 했습니다. 작은 곰과 큰 곰은 이경의 집안이 모시고 있는 선조입니다.」

「상제께서 나에게 하사하신 대나무 상자 안에 모두 작은 보조상자가 들어 있던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조공의 아들이 장차 적(翟) 땅에서 두 나라35)를 쳐서 이기게 됨을 말합니다. 두 나라의 성은 모두 자성(子姓)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 하나가 상제 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고, 상제가 나에게 한 마리의 적견(翟犬)을 주면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이 장성하기를 기다렸다가 주어라!』라고 했습니다. 내 아들에게 적견을 주라고 한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 어린아이는 조공의 아들이고 적견은 대(代)나라의 선조입니다. 조공의 아들은 틀림없이 대나라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조공의 후손 중에 정치를 개혁하고 오랑캐의 복장36)을 한 후에 적 땅의 두 나라를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조간자가 자석의 성씨를 묻고 그에게 관직을 주려고 했으나 자석이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일개 야인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단지 상제의 말씀을 전해주었을 뿐입니다.」

자석이 말을 마치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조간자가 자석과 이야기한 내용을 글로 써서 부고(府庫)에 비밀리에 간직해 두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고포자경(高布子卿)37)이 찾아오자 조간자가 자기의 여러 아들을 모두 불러 관상을 보게 했다. 자경이 관상을 다 보고 나서 조간자에게 말했다.

「장군이 될만한 상을 가지고 있는 아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조씨들이 망한다는 말입니까?」

「제가 오다가 어린 아이 한 아이를 봤는데 아마도 조공의 아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간자가 아직 나이가 어린 무휼(毋恤)을 불러오도록 했다. 무휼이 이윽고 당도하자 자경이 갑자기 자리에 일어나더니 말했다.

「이 아이야말로 진정 장군의 재목입니다.」

「이 아이의 모는 천한 적(翟)나라의 출신의 천비인데, 어찌 그 소생이 귀하게 되겠는가?」

「하늘이 내려주신 그의 운명은 비록 천하게 태어 났다하더라도 나중에는 필시 귀한 신분이 될 것입니다.」

그후로 간자가 그의 모든 아들들을 불러 여러 가지 대화를 해 본 결과 무휼이 가장 지혜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윽고 조간자가 그의 아들들에게 말했다.

「내가 보물과 같은 부절을 상산(常山)에 감춰 놨다. 먼저 찾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

조간자의 아들들은 모두 상산으로 달려가 부절을 찾았으나 결코 얻을 수가 없었다. 무휼이 돌아와 조간자에게 고했다.

「제가 부절을 이미 찾았습니다.」

「부절의 내용을 말해보라!」

「상산의 꼭대기에서 대나라를 바라보았는데, 대나라를 차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간자는 이로써 무휼이 진정으로 지혜롭다고 사실을 확인하고 즉시 태자 백로(伯魯)를 폐하고 무휼을 대신 세웠다.

그리고 2년이 지난 당진의 정공 14년 기원전 498년 범씨와 중행씨가 란을 일으켰다. 다음 해 봄에 조간자가 한단(邯鄲) 대부 조오(趙午)에게 명을 전했다.

「위(衛)나라 백성 500호를 나에게 보내시오. 내가 장차 그들을 진양(晉陽)에 살게 하겠소.」

조오가 허락하고 한단에 돌아왔으나 그의 부형들이 말을 듣지 않아 조간자의 명을 어기게 되었다. 조오를 붙잡아 진양의 감옥에 가둔 조간자가 한단에 자신의 명을 전하게 했다.

「내가 만약 조오를 주살한다면 여러분들은 누구를 대신 세우겠는가?」

그리고는 조간자가 조오를 죽였다. 조직(趙稷)과 섭빈(涉賓)38)이 한단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진의 정공이 적진(籍秦)을 보내 한단을 포위하도록 명했다. 원래 범길석(范吉射)과 순인(荀寅)은 조오와 서로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한단의 반란을 진압하려는 적진에게 협조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직 등과 합세하여 장차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을 조앙의 가신 동안우(董安于)가 알게 되었다. 그해 10월에 범씨와 중행씨가 군사를 일으켜 조앙을 공격했다. 두 종족은 조앙이 진양으로 달아나자 당진의 여러 종족들이 군사를 일으켜 한단을 포위했다. 범길석과 순인의 원수인 위양(魏襄)39) 등이 모의하여 두 사람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양영보(梁嬰父)40)와 범고역(范皐繹)41)을 각각 대신하게 하려고 하였다. 순력(荀躒)42)이 정공에게 말했다.

「선군께서 명하시기를 란을 일으킨 자는 죽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세 대신이 란을 일으켰으나 유독 조앙만 쫓겨갔습니다. 이는 형벌이 불공평하게 집행되었음을 뜻합니다. 청컨대 범씨와 중행씨도 쫓아내시기 바랍니다.」

그해 11월에 순력이 한불영(韓不佞)43), 위치(魏侈)와 함께 정공의 명을 받들어 범씨와 중행씨를 공격했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 범씨와 중행씨가 오히려 정공을 공격했으나 정공의 반격을 받고 싸움에 패하여 달아났다. 정미(丁未) 일에 두 사람은 그들의 종족을 이끌고 조가(朝歌)로 들어갔다. 한불영과 위치가 정공에게 조앙의 죄를 용서하라고 주청했다. 12월 신미(辛未) 일에 조앙이 강도(絳都)로 들어와 정공 앞에서 충성을 맹세했다. 그 다음 해, 지문자 순력이 조앙을 만나 말했다.

「범씨와 중행씨가 비록 란을 일으켰다고는 하나 모든 일은 동안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즉 두 집안이 동안우와 함께 모의하여 발단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당진의 국법으로는 란을 일으킨 자는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제 범씨와 중행씨 두 사람은 모두 죄를 받아 나라 밖으로 축출되었으나 오로지 동안우만은 무사합니다.」

조앙이 그 일을 걱정하자 동안우가 말했다.

「제가 죽으면 나라 안과 조씨 가문은 안정을 찾게 되는데, 제가 너무 늦게 죽는 것 같습니다.」

동안우가 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씨들이 동안우의 죽음을 순력에게 알렸다. 그리고 조씨들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

공자는 조간자가 당진의 군주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한단의 조오를 잡아서 진양으로 데려가 죽인 일에 대해 춘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조앙이 진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조간자에게는 주사(周舍)라는 가신이 있어 직간하기를 좋아했다. 주사가 죽자 간자가 매일 조회에 나와 다른 신하들의 말을 듣고 항상 불쾌하게 생각했다. 대부들이 죄를 청하자 간자가 말했다.

「대부들에게는 죄가 없소. 천장의 양가죽도 단 한 장의 여우 겨드랑이 가죽만 못하다고 했소. 대부들이 매일 조회를 할 때 오로지 『예, 예』라는 헛된 소리만 듣게 되고, 주사의 서슴없는 직간을 듣지 못해, 이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오.」

조간자가 이렇게 함으로써 능히 조씨의 영지들을 다스릴 수 있었고 백성들을 안무할 수 있었다.

당진의 정공 18년 기원전 494년 조간자가 조가로 들어간 범씨와 중행씨 종족들을 포위했다. 중행문자(中行文子) 순인(荀寅)은 한단으로 다시 도망쳤다. 다음 해인 기원전 493년 위영공(衛靈公)이 죽자 조간자가 양호를 시켜 위(衛)나라의 태자 괴외(蒯聵)를 위나라에 들여보내 위후(衛侯)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으나 위나라 국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괴외는 척읍(戚邑)에 머물며 위나라 군주 자리를 노렸다.

당진의 정공 21년 기원전 491년 조간자가 한단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순인은 백인(栢人)44)으로 달아났다. 조간자가 그 뒤를 추격하여 백인을 포위하자 순인과 범길석은 다시 종족들과 함께 제나라로 도망쳤다. 조씨들은 마침내 한단과 백인을 차지했다. 범씨와 중행씨의 남은 봉읍들은 모두 당진의 공실에 속하게 되었다. 조앙은 명목상으로 군주 밑의 경이었지만, 실제적으로 당진의 정권을 독차지 하였으며, 그 봉지는 다른 제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당진의 정공 30년 기원전 482년, 정공과 오왕 부차(夫差)가 황지(黃池)45)의 회맹에서 맹주의 자리를 다투었다. 조간자가 정공을 호종했으나 맹주의 자리는 오왕이 차지하였다. 정공이 재위 37년 만인 기원전 475년에 죽자 조간자가 3년상을 폐하고 1년 만에 끝냈다. 이 해에 월왕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멸하고 오왕 부차를 죽였다.

당진의 출공(出公) 11년 기원전 464년, 순력의 아들 지백(智伯)46)이 정나라를 공격했다. 조간자가 그때 마침 병이 들어 태자 무휼(毋恤)을 대신 종군시켰다. 지백이 술자리에서 취하여 무휼의 얼굴에 술을 뿌리고, 구타하였다. 무휼의 가신들이 지백을 죽이겠다고 허락을 청했다. 무휼이 제지하며 말했다.

「부친께서 나를 태자로 삼은 것은 내가 능히 이런 치욕을 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이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 일로 해서 무휼은 지백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되었다. 지백이 귀국하여 조간자를 만나 무휼을 폐하라고 권했다. 조간자는 지백의 말을 듣지 않았으나 무휼이 알고 지백에 대한 원한이 더욱 깊어졌다. 당진의 출공 17년 기원전 458년 조간자가 죽자 태자 무휼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조양자(趙襄子)이다.

조양자(趙襄子) 원년 기원전 457년 월나라가 오나라를 포위했다. 양자가 부친상을 지내면서 거친 음식을 먹었다. 가신 초륭(楚隆)을 사신으로 보내 오왕(吳王)을 위문했다.47)


조양자의 누이는 옛날 대왕(代王)의 부인이 되었다. 양자의 그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미처 상복을 벗기고 전에 북쪽의 하옥산(夏屋山)48)에 올라 잔치를 벌리고 대왕을 초청했다. 양자(襄子)가 요리사로 하여금 구리로 만든 국자를 들고 대왕과 그 시종들에게 음식을 바치며 술을 따르게 했다. 이윽고 주연이 무르익게 되자 양자가 아무로 몰래 이름이 락(犖)이라는 요리사로 하여금 구리로 만든 큰 국자로 대왕과 그 시종들을 쳐서 죽이도록 했다. 조양자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대국(代國)의 땅을 평정하고 조씨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양자의 누이가 본국에 있다가 그 부군의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호소를 하다가, 그녀의 비녀를 뾰쪽하게 갈아 찔러 죽었다. 대나라 사람들이 이를 가엾게 여겨 그녀가 죽은 곳의 이름을 마계산(摩笄山)49)이라고 불렀다. 양자는 점령한 대 땅에 백로의 아들 주(周)를 봉해 대성군(代成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백로는 양자의 형으로써 태자의 자리에 있다가 그의 부친 조간자가 양자를 세우기 위해 폐위되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의 형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주를 대 땅에 봉한 것이다.

양자 재위 4년 즉 기원전 453년 지백(知伯)이 조(趙), 한(韓), 위(魏) 삼가와 함께 범씨와 중행씨들의 옛날 땅을 모두 나누어 가졌다. 당진의 출공(出公)이 노하여 제(齊)와 노(魯) 두 나라의 힘을 빌려 사가(四家)를 정벌하려고 했다. 사경이 두려워하여 힘을 합쳐 출공을 공격했다. 출공은 제나라로 도망쳤다. 지백은 즉시 소공의 증손자 교(驕)를 당진의 군주로 세웠다. 이가 당진의 의공(懿公)이다.


지백이 더욱 교만하게 되어 한과 위 두 종족에게 땅을 요구했다. 두 가문은 지백의 요구를 받들어 땅을 나누어 주었다. 이어서 지백이 조씨들에게도 땅을 요구했으나 조양자는 거절했다. 옛날 정나라를 정벌할 때 지백에게 받은 치욕을 생각해서였다. 지백이 노하여 한과 위 두 종족과 힘을 합하여 조씨들을 공격했다. 조양자가 그들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진양성(晉陽城)으로 들어가 농성전으로 돌입했다.

조양자의 가신인 원과(原過)가 조양자의 뒤를 따라가던 중, 왕택(王澤)50)에 이르렀을 때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허리 위로는 볼 수 있었지만, 허리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그 세 사람이 원과에게 앞뒤가 꽉 막힌 대나무 마디 2개를 주면서 말했다.

「우리를 대신해서 이 대나무 토막을 조무휼에게 전해주어라!」

원과가 조양자의 일행과 합류하게 되자 그 일을 고하고 대나무 토막을 전했다. 양자가 3일 동안 목욕재계하여 몸을 정결하게 한 다음 대나무를 갈랐다. 대나무 안에는 붉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조무휼아, 우리들은 곽태산(霍泰山)의 주인인 산양후(山陽侯)가 보낸 천사이니라! 3월 병술(丙戌) 일에 우리들이 장차 너로 하여금 지씨들을 멸하게 해 주겠다. 너도 역시 우리들을 위해서 백 개의 고을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 준다면, 우리는 장차 너에게 임호(林胡)51)의 땅을 주겠노라! 너의 후세 중에 굳세고 용감한 왕이 나타나리라! 검붉은 용의 얼굴에 새부리 같은 입, 잘 어우러진 귀밑머리와 눈썹, 콧수염 및 구레나룻을 가졌고, 넓고 큰 가슴에 하체는 길고 상체는 우람하며,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갑옷을 입은 호복기사(胡服騎士)의 모습으로 말을 타고 천하를 호령할 것이다. 그는 하수(河水)의 중류 일대를 포함하여 휴혼(休溷)52)과 제맥(諸貊)53) 등의 땅을 모두 차지할 것이며, 남쪽으로는 당진의 여러 성들을 점령하고 북쪽으로는 흑고(黑姑)를 멸하여 모두 조나라 땅으로 만들 것이다.」

대나무 통을 향해 재배를 올린 조양자는 원과가 만났다는 세 천사(天使)의 명을 받들었다.

진양성을 포위한 지한위(智韓魏) 삼가가 공격한지가 1년이 넘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분수(汾水)의 물을 끌어들여 진양성을 잠기게 했다. 진양성 안의 삼판(三版)54) 이하의 곳은 모두 물에 잠겨 취사를 할 때는 솥을 공중에 메달야만 했으며, 식량이 떨어져 그 자식들을 서로 바꾸어 먹었다. 이윽고 여러 신하들은 딴 마음을 품기 시작하여 조양자에 대한 예의에 더욱 태만하게 되었으나 오직 고공(高共)만이 감히 예의를 잃지 않았다. 양자가 이를 두려워하여, 날이 어두워지자 장맹동(張孟同)을 시켜 비밀리에 한(韓)과 위(魏) 두 가문의 군영을 방문하게 했다. 장맹동은 한과 위 두 집안과 모의하여 3월 병술(丙戌) 일을 기해 삼가가 거꾸로 지씨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이어서 조양자가 논공행상을 할 때 고공에게 제일 높은 상을 주었다. 장맹동이 보고 말했다.

「진양에서의 싸움에서 고공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조양자가 대답했다.

「진양성이 바야흐로 풍전등화와 같이 위험하게 되었을 때 여러 신하들은 모두 나에 대한 예를 갖추는데 태만히 하였으나, 오로지 고공만이 감히 신하로써의 예의를 잃지 않았소. 그래서 그의 공을 제일 앞에 놓았소.」

이로써 조씨 종족들은 그 영지를 북으로는 대나라를 점령하고 남쪽으로는 지씨들의 땅을 겸병하여 한과 위 두 나라보다 강한 국력을 갖게 되었다. 이어서 조나라의 백여 개의 고을에 사당을 짓고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원과에게는 곽태산의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도록 했다.

후에 양자는 공동씨(空同氏)55)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다섯을 두었다. 양자는 자기로 인하여 장자 백로가 종주(宗主)로 서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자기의 아들을 세우려하지 않고 백로의 아들 대성군(代成君) 조주(趙周)에게 자기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성군이 자기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완(浣)을 태자로 세웠다. 양자가 재위 33년 만인 기원전 425년에 죽고 완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조헌후(趙獻侯)다.

헌후가 즉위했을 때는 나이가 어렸다. 중모(中牟)56)에 치소를 두어 조씨들의 영지를 다스렸다.

양자의 동생 환자(桓子)가 헌후를 쫓아내고 대 땅에서 스스로 조씨들의 수장 자리에 앉았으나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환자가 조씨들의 수장 자리를 차지한 것은 조양자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 조씨 종족들은 힘을 합하여 그의 아들을 죽이고 도망친 헌후를 불러들여 다시 세웠다.

헌후 10년 기원전 414년 중산(中山)57)의 무공(武公)이 새로 섰다. 13년 기원전 411년 평읍(平邑)58)에 성을 쌓았다. 헌후가 재위 15년 만인 기원전 409년 죽고 그의 아들 열후(列侯) 적(籍)이 뒤를 이었다.

열후 원년 기원전 408년 위문후(魏文侯)가 중산을 멸하고 태자 격(擊)을 보내 지키게 했다. 열후 6년 기원전 402년 당진의 한위조(韓魏趙) 삼가가 삼가가 서로 제후가 되기로 하고 헌자(獻子)를 헌후(獻侯)로 추존했다.

열후가 음악을 좋아한 나머지 재상 공중련(公仲連)에게 말했다.

「과인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높은 벼슬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공중련이 대답했다.

「부유하게 만드는 일은 가하나 높은 벼슬을 내림은 불가합니다.」

「그렇다면 정나라의 가인 창(槍)과 석(石) 두 사람에게 내가 각각 만무(萬畝)의 전답을 주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공중련은 두 사람에게 전답을 주지 않았다. 이윽고 한 달이 되어 열후가 대 땅에서 돌아와 공중련에게 가인 두 사람에게 전답을 내 주었는지 물었다. 공중련이 대답했다.

「마땅한 땅을 찾고 있는데 아직 줄만한 땅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며칠이 지나자 열후가 다시 물으려 했으나 공중련이 끝내 전답을 내 주지 않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회에도 나오지 않았다. 파오군(番吾君)59)이 대 땅에서 공중련을 찾아와 말했다.

「상국께서 선정을 베푸시려는 뜻은 알겠으나 그 실행하는 방법은 모르시고 계시는 듯합니다. 지금 대감께서 조나라의 상국의 자리에 앉은지 4년이 되는데 지금까지 어진 사람을 몇 명이나 천거하셨습니까?」

「아직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축(牛畜), 순흔(荀欣), 서월(徐越) 등은 모두 어진 사람들로 천거할만한 재사들입니다.」

공중련이 반오군의 말을 쫓아 그 세 사람을 천거했다. 그리고 며칠 후 공중련이 조회에 참석하자 열후가 물었다.

「가인들에게 하사하기로 한 전답은 어찌 처리되었소?」

「이제서야 가까스로 좋은 곳을 고르고 있는 중입니다.」

우축이 조정에 나와 열후의 곁에서 인의(仁義)와 왕도(王道)에 대해 말하자 열후가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다음 날 순흔이 열후를 모시면서 유능하고 노련한 사람을 선발하고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여 관리로 임명하여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삼 일 째 되는 날 서월의 차례가 되자 열후에게 재물을 아끼고 검소한 생활에 대해 말하고 신하들의 공덕을 헤아려 살펴야 한다고 말하자 열후가 대단히 기뻐하였다. 열후가 기뻐한 이유는 세 사람이 건의한 말이 모두 도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열후가 사람을 상국인 공중련에게 보내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가인들에게 전답을 주는 일을 중지하도록 하시오!」

이어서 열후는 우축을 사(師)60)로, 순흔은 중위(中尉)61)로, 서월(徐越)은 내사(內史)62)로 임명했다. 열후가 상국 공중련에게는 상하로 된 의복 두 벌을 하사했다.

열후가 재위 9년 만인 기원전 400년에 죽고 그의 동생 무공(武公)이 뒤를 이었다. 무공이 재위 13년 만인 기원전 387년에 죽고 열후(列侯)의 태자였던 장(章)을 다시 세웠다. 이가 조경후(趙敬侯)다. 이 해에 위문후(魏文侯)가 죽었다.

경후 원년 기원전 386년 무공의 아들 조(朝)가 란을 일으켰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위(魏)나라로 달아났다. 조나라가 그 도성을 한단(邯鄲)으로 옮겼다.

경후 2년 기원전 385년 조나라의 군사가 제군(齊軍)을 영구(靈丘)63)에서 격파했다. 3년 기원전 384년 름구(廩丘)64)에서 제군을 대파하고 위군(魏軍)을 구했다. 4년 기원전 383년 토대(兎臺)65)에서 위군과 싸워 졌다. 강평(剛平)66)에 성을 쌓고 위(衛)나라를 공격하는데 전진기지로 삼았다. 5년 기원전 382년 제(齊)와 위(魏) 두 나라가 위(衛)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조나라를 공격하여 강평을 점령했다. 6년 기원전 381년 초나라에서 군사를 빌려와 위(魏)나라를 공격하고 극포(棘蒲)67)를 빼앗았다. 8년 기원전 379년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그 황성(黃城)68)을 점령했다. 9년 기원전 378년 제나라를 공격했다. 이어서 제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여 조나라가 연나라를 구했다. 10년 기원전 377년 중산국과 방자(房子)69)에서 싸웠다.

11년 기원전 376년 한위조 삼국이 모의하여 당진국을 멸하고 그 땅을 나누었다. 군사를 일으켜 중산국을 공격, 중인(中人)70)에서 싸웠다. 12년 조경후가 죽고 그의 아들 성후(成侯) 종(種)이 뒤를 이었다.

성후 원년 기원전 374년, 공자승(公子勝)이 성후와 조나라 군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자 조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

성후 2년 기원전 373년, 6월에 큰 눈이 왔다.

성후 3년 기원전 372년, 태무오(太戊午)가 조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같은 해 위(衛)나라를 공격하여 크고 작은 고을 73여 개를 빼앗았다. 위(魏)나라와 인(藺)71) 땅에서 싸워 패했다.

성후 4년 기원전 371년, 진(秦)나라와 고안(高安)72)에서 싸워 이겼다.

성후 5년 기원전 370년, 제나라의 견(鄄)73)에서 싸웠다. 회(懷)74)에서 위(魏)와 싸워 졌다. 정나라를 공격하여 그 군사를 격파하고 빼앗은 땅을 한나라에 주자, 한나라는 조나라에게 장자(長子)75)를 주었다.

성후 6년 기원전 369년, 중산국이 장성을 쌓았다.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탁택(濁澤)76)에서 무찌르고 위혜왕을 포위했다.

성후 7년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장성까지 진격했다. 같은 해 한나라와 힘을 합하여 주나라를 공격했다.

성후 8년 기원전 367년, 한나라와 모의하여 주나라 영토를 양분했다.

성후 9년 기원전 366년, 제나라와 아하(阿下)77)에서 싸웠다.

성후 10년 기원전 365년, 위나라를 공격하여 견(甄)78)을 차지하였다.

성후 11년 기원전 364년, 진나라가 위(魏)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가 석아(石阿)79)로 나가 구원했다.

성후 12년 기원전 363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소량(少梁)80)을 공격하자 조나라가 군사를 내어 구원했다.

성후 13년 기원전 362년, 진헌공(秦獻公)이 서장(庶長)81) 국(國)을 시켜 위나라의 소량을 공격하여 태자와 공숙좌(公叔痤)82)를 포로로 잡아갔다. 위나라가 쳐들어와 회수(澮水)83)에서 막아 싸웠으나 패하고 피뢰(皮牢)84)를 빼앗겼다. 조성후(趙成侯)와 한소후(韓昭侯)가 상당(上黨)의 땅에서 회동했다.

성후 14년 기원전 361년, 한나라와 힘을 합쳐 진나라를 공격했다. 성후 15년 기원전 360년, 위(魏)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공격했다.

성후 16년 기원전 359년, 한(韓)과 위(魏)가 당진(唐晉)의 남은 땅을 나누어 갖고 군주를 단지(端氏)85)에 봉했다.

성후 17년 기원전 358년, 조성후(趙成侯)와 위혜왕(魏惠王)이 갈얼(葛孽)86)에서 회동했다.

성후 19년 기원전 356년, 제(齊)와 송(宋) 두 나라와 평륙(平陸)87)에서 회동하고 연(燕)나라와는 아(阿)88) 땅에서 만났다.

성후 20년 기원전 355년, 위나라가 최고급 목재로 만든 서까래를 바쳐 그것으로 단대(檀臺)를 지었다.

성후 21년 기원전 354년, 위나라가 쳐들어와 한단을 포위했다.

성후 22년 기원전 353년, 위혜왕이 한단을 함락시키고 회군하던 중에 계릉(桂陵)의 싸움에서 제나라 군사들에게 패했다.

성후 24년 기원전 351년, 위나라가 한단을 돌려주고 조나라와 장수(漳水)에서 회맹을 했다. 진나라가 쳐들어와 인(藺)을 포위했다.

성후 25년 기원전 350년, 성후가 죽었다. 공자 조설(趙緤)과 태자 숙후(肅侯)가 왕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조설이 싸움에서 패하고 한나라로 도망쳤다.

숙후 원년 기원전 349년, 당진의 군주에게 주었던 단지(端氏)의 땅을 빼앗고 둔류(屯留)89)에 옮겨 살게 하였다.

숙후 2년 기원전 348년, 위혜왕(魏惠王)과 음진(陰晉)90)에서 회동했다.

숙후 3년 기원전 347년, 공자 조범(趙范)이 한단을 습격했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전사했다.

숙후 4년 기원전 346년, 숙후가 주천자에게 조현을 올렸다.

숙후 6년 기원전 344년, 제나라를 공격하여 고당(高唐)을 빼앗았다. 숙후 7년 기원전 343년, 공자 조각(趙刻)이 위나라의 수원(首垣)을 공격했다.

숙후 11년 기원전 339년, 진효공(秦孝公)이 상군(商君) 위앙(衛鞅)을 시켜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 장수 공자앙(公子卬)을 사로잡았다. 이에 조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했다.

숙호 12년 기원전 338년, 진효공이 죽자 상군은 잡혀 살해되었다. 숙후 15년 기원전 335년, 수릉(壽陵)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숙후 16년 기원전 334년, 숙후가 대릉(大陵)91)으로 놀러 나가기 위해 성의 록문(鹿門)을 통과하자 대무오(大戊午)가 숙후의 수레를 끌던 말의 고삐를 잡으며 간했다.

「농사일이 급할 때입니다. 지금 하루를 짓지 않으면 백일 치의 양식이 없게 됩니다.」

숙후가 수레에서 내려 대무오에게 사죄했다.

숙후 17년 기원전 333년, 위(魏)나라의 황성(黃城)을 포위했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 장성(長城)을 쌓았다.

숙후 18년 기원전 332년, 제(齊)와 위(魏) 두 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오자 조군(趙軍)은 하수의 제방을 터뜨려 적군을 물에 잠기게 했다. 두 나라 군사들이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다.

숙후 22년 기원전 328년, 장의가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 조자(趙疵)가 진나라 군사들과 싸워 패했다. 진나라 군사들은 하서(河西)에서 조자를 죽이고 인(藺)과 이석(離石)의 땅을 빼앗아 갔다.

숙후 23년 기원전 327년, 한거(韓擧)가 제(齊). 위(魏) 두 나라 연합군과 싸우다가 상구(桑丘)92)에서 죽었다. 위혜왕(魏惠王)이 죽었다.

숙후 24년 기원전 326년, 숙후가 죽자, 진(秦), 초(楚), 연(燕), 제(齊), 위(魏) 등의 나라가 정예병사를 각각 만 명씩을 보내 장례를 도왔다. 숙후의 아들 무령왕(武靈王)이 뒤를 이었다.


무령왕 원년 기원전 325년, 양문군(陽文君) 조표(趙豹)를 재상으로 삼았다. 위양왕(魏襄王)과 그의 태자 위사(魏嗣), 한선왕(韓宣王)과 태자 한창(韓倉)이 조나라의 신궁(信宮)에 들어가 무령왕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무령왕이 즉위했을 때는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다. 그래서 조나라의 대신들은 박식한 사람 셋을 뽑아 스승으로 삼고, 좌우에 사과(司過)93) 세 사람을 두어 보좌하게 했다. 이어서 무령왕이 나이가 들어 정사에 임하게 되었을 때 선군인 조숙후가 총애했던 비의(肥義)에게 모든 일을 먼저 물은 후에 행했다. 무령왕은 비의의 작위와 봉록을 높였다. 나라의 80이 넘는 삼로(三老)94)들에게 매월 선물을 보냈다.

무령왕 2년 기원전 323년, 호(鄗)95) 땅에 성을 세웠다.

무령왕 4년 기원전 321년, 한나라 군주와 구서(區鼠)96)에서 회동했다.

무령왕 5년 기원전 320년, 한나라 여인을 맞이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무령왕 8년 기원전 317년, 한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다섯 제후국이 서로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조나라만이 혼자 왕호를 사양하며 말했다.

「실질적으로 제후에 불과하면서 어찌 감히 왕호를 사용할 수 있겠는가?」

무령왕은 그 국인들에게 자기를 『군(君)』이라고 부르게 했다.

무령왕 9년 기원전 316년, 한(韓), 위(魏) 두 나라와 힘을 합쳐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싸움에서 지고 8만 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진나라가 다시 쳐들어와 관택(觀澤)97)에서 조군(趙軍)을 격파했다.

무령왕 10년 기원전 315년, 진나라가 쳐들어와 중도(中都)98)와 서양(西陽)99)을 빼앗아 갔다. 제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여 무찔렀다. 연나라의 상국 자지(子之)가 군주 자리에 오르고, 그 군주는 거꾸로 자지의 신하가 되었다.

무령왕 11년 기원전 314년, 무령왕이 한나라에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연나라의 공자 직(職)을 데려가 연왕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장군 악지(樂池)로 하여금 호송하도록 했다.

무령왕 13년 기원전 312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인(藺) 땅을 빼앗고 장군 조장(趙莊)을 포로로 잡아갔다. 초와 위 두 나라의 왕이 조나라의 한단을 방문했다.

무령왕 14년 기원전 311년, 조하(趙何)를 시켜 위(魏)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무령왕 16년 기원전 309년, 진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이 죽었다. 무령왕이 대릉(大陵)으로 놀러나갔다. 어느 날 왕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처녀 한 사람이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으며 노래를 불렀다.


아름답고 눈부신 미인이여!

능소화(凌霄花) 같이 농염한 모습이로다!

가련한 내 운명이여, 내 운명이여!

어찌하여 이 영(嬴)을 몰라주는 것인가?

(美人熒熒兮, 顔若苕之榮, 命乎命乎, 曾無我嬴)


그리고 며칠 후에 왕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신하들에게 꿈이야기를 하며 그 여인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오광(吳廣)이라는 사람이 부인을 통해서 무령왕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딸 왜영(娃嬴)을 궁궐로 들여보냈다. 무령왕은 외영을 맹요(孟姚)라고 불렀다. 맹요는 무령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후에 그의 정비(正妃)가 되었다. 이가 혜비(惠妃)다.

무령왕 17년 기원전 308년, 왕이 구문(九門)100)으로 나가 들판에 조망대를 세우고 제나라와 중산국의 정세를 살폈다.

무령왕 18년 기원전 307년, 진무왕이 맹열(孟說)과 함께 주나라에 들렸다가 용무늬가 그려진 붉은 색의 정(鼎)을 들다가 슬개골이 부러져 죽었다. 무령왕이 대나라의 상국 조고(趙固)를 시켜 진무왕의 동생 공자직(公子稷)을 연나라에서 영접하여 진나라로 들여보내 무왕의 뒤를 잇도록 했다. 이가 진나라의 소양왕(召襄王)이다.

무령왕 19년 기원전 306년 봄 정월에 신궁(信宮)에서 백관들로부터 조하를 받았다. 비의를 불러 천하의 일을 논하다가 5일 만에 끝마쳤다. 무령왕은 북쪽의 중산국을 공략하고 이어서 방자(房子)101)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대나라로 들어가서 북쪽으로 무궁(無窮)102)에 다다르고 서쪽으로는 황화산(黃華山)103)에 올랐다. 왕이 누완(樓緩)104)을 불러 의논하며 말했다.

「나의 선조들께서는 시세의 변화에 따라 남쪽 변방의 땅에서 수령 노릇을 하시다가 장수(漳水)105)와 부수(滏水)106)의 험고(險固)를 이용하여 장성을 쌓으셨으며, 다시 서쪽으로 나가 인(藺)과 곽랑(郭狼)107)을 차지하셨다.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 임(荏)108) 땅에서 임호(林胡)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이기셨으나 아직 그들을 복종시키지는 못했다. 지금 중산국은 우리 조나라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북쪽에는 연나라와 이웃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호(胡), 서쪽으로는 임호(林胡), 누번(樓煩) 그리고 진(秦), 한(韓)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나 강한 군사들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어 결국은 사직이 망하게 될 지경에 있다.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무릇 세상에 높은 공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행해지는 습속을 위배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조나라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히고자 한다. 」

누완은 좋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조나라의 대부분의 국인들은 무령왕의 계획에 반대했다.

이에 곁에 있던 비의를 보고 왕이 말했다.

「간자(簡子)와 양자(襄子) 두 분의 선조들께서 이루신 공업은 호(胡)와 적(狄) 두 이민족들로부터 이익을 취하신 것이오. 무릇 신하된 자로, 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을 때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공경하고, 장유(長幼)의 도리에 밝아 순종하는 절조가 있어야 하며, 뜻을 얻었을 때는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 공업을 세우려는 그의 임금을 도와야 하오. 이 두 가지가 신하된 자의 본분이라고 말할 수 있소. 오늘 내가 양자(襄子)의 유지를 계승하여 호(胡)와 적(翟)의 땅을 개척하려고 하는데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런 신하들을 만나지 못할 것 같소. 내가 뜻한 바를 이루게 되면 적을 약하게 만들어 적은 힘을 들이고도 많은 공을 세울 수가 있으니 이것은 또한 백성들을 고생시키지 않아도 두 분 선조의 유업을 계승할 수 있음을 의미하오. 『무릇 세상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려면 세상의 습속을 위배했다는 비난을 받기 마련이며, 심모원려의 지혜가 있는 사람의 행동은 오만한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 마련이다.』109)라고 했소. 오늘 백성들에게 호복(胡服)을 입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는 과인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틀림없이 비난을 받을 것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비의가 대답했다.

「신이 듣기에 『의심스러운 일을 행하면 공을 세우지 못하고, 의심하면서 일을 행하면 명예를 얻을 수 없다.』110)라고 했습니다. 왕께서 이미 나라의 오랫동안 내려온 풍속을 위배했다는 비난을 감수하시려고 이미 마음을 굳히셨으니, 아마도 천하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셔야 할 것입니다. 『무릇 지고(至高)의 덕행을 추구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풍습을 구애받지 않으며, 커다란 공적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범부와 일을 의논하지 않는 법입니다.』111) 옛날 순임금은 묘인(苗人)112)의 춤을 추어 그들을 복속 시켰고, 우임금은 나국(裸國)113)에 가서 옷을 벗고 그들과 같이 지냈습니다. 이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고,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을 논하여 공업을 이루고자 노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일이 성사가 된 뒤에도 알지 못하나 지혜로운 사람은 일이 이루러지기도 전에 알아봅니다.』114) 왕께서는 주저하실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무령왕이 다시 말했다.

「과인이 주저하는 이유는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히는 일을 아니라, 천하 사람들이 나를 비웃지나 않을까를 걱정하는 것이오. 『무지한 자의 즐거움은 현명한 자의 슬픔이며, 어리석은 자가 비웃는 일은 지혜로운 사람이 이미 통찰하고 있는 일이오.』115) 비록 세상 백성들이 내 명을 따른다 할지라도 그들은 호복의 효능을 이루 다 짐작할 수 없을 것이라, 설사 백성들이 이 일로 나를 비난한다 할지라도 오랑캐 땅과 중산국은 내가 꼭 차지하고야 말겠소.」

이어서 무령왕은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으라는 명을 내리고 왕설(王緤)을 보내 공자 조성(趙成)116)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과인이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하려고 하니 숙부께서도 역시 호복을 입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집안에서는 부모의 말을 따라야 하고 나라 안에서는 임금의 명을 따라야 함은 고금을 통한 공인의 행동입니다. 아들 된 자는 부친의 명을 거역해서는 안 되고, 신하는 군주의 명에 역행하지 말아야 하며, 형제는 의로써 서로 우애해야 합니다. 오늘 과인이 교지를 내려 복식을 바꾸려 하는데 숙부께서 입지 않으신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나의 뜻에 대해 의론이 분분하게 됨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상도가 있는 법이니,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근본이며, 정치에 참여하는데 원칙이 있으니,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일을 제일로 칩니다. 덕정을 펴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 백성들을 이해 시켜야 하며, 정령을 펴기 위해서는 먼저 귀족들로부터 신임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호복을 입는 목적은 나의 욕망을 채우고,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행하여 목적하는 바에 도달해야만 공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일단은 공업이 이루지면 결과는 좋게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과인은 정사의 원칙을 위배하여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과인이 듣기에 나라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은 사악한 마음을 갖으면 안 되고, 귀척을 빙자하여 그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는다고 했으니, 원컨대 저는 숙부님의 의로운 이름을 빌려서 호복의 제도를 시행하여 공업을 이루려고 합니다. 이에 왕설(王緤)을 보내 숙부님을 뵙기를 청하오니 내일 아침 조회에 호복을 입고 나오시라고 부탁드립니다.」

공자성이 무령왕의 사자로 온 왕설을 향해 두 번의 절을 오린 후에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신은 옛날부터 왕께서 호복의 착용을 시행하려는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재주가 없고 또한 마침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아직도 왕께 달려가 자주 진언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왕께서 저에게 호복을 착용하라고 명하시니, 신이 이에 대하여 어리석으나 충정을 다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은 알고 있건 데, 이곳 중화의 땅은 모두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사는 곳이라, 세상의 온갖 만물과 재화가 모여드는 땅이고, 성현의 교화와 인의가 행해지며,『시(詩)』,『서(書)』,『예악(禮樂)』이 일어나 쓰이는 곳입니다. 또한 기이하고 교묘한 기능이 펼쳐지는 땅이라, 먼 지방의 사람들이 이 땅의 문물을 관람하러 오는 곳이며, 변방의 만이들이 즐거이 모범으로 삼으려고 하는 땅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버리시고 먼 지방의 복식을 시행하려고 하시니 그것은 옛 성현의 교화를 개변하려는 행위이며, 옛부터 전해오는 도를 바꾸려는 것입니다. 이는 백성들의 마음에 반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학자들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행위이며 중화의 문물과는 동떨어진 조치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께서는 이와 같은 이유를 생각하시어 신중하게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왕설이 돌아와 공자성의 말을 전하자 무령왕이 말했다.

「내가 이미 숙부께서 병으로 누워 계시다는 말을 들었으니 직접 가서 뵙고 호복의 착용을 청해야 겠다.」

왕이 이윽고 공자성의 집을 방문하여 호복의 착용을 청하며 말했다.

「무릇 복장이란 입기에 편리해야 하며, 예란 일을 행하는데 편리해야 합니다. 성인은 그 지방의 풍속에 순응하여 알맞은 제도를 만들고, 일의 상황에 따라 예절을 제정하니 그것들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국가를 부강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는 문신을 그려 넣으며, 팔에는 그림을 그려 넣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복식은 구월(甌越)117) 일대의 만이들 풍속입니다. 검은 이빨에, 이마에 무늬를 넣고 물고기 가죽으로 만든 모자에, 조악하게 바느질한 의복을 입는 것은 오나라의 풍속입니다. 그런 이유로 의복과 예는 지방마다 같지 않으나 편리함을 추구하는 목적은 다 같습니다. 그래서 각기 사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하는 방법에 변화가 있고 받드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예법도 바뀝니다. 따라서 비록 성인일지라도 만약에 그것들이 나라에 이득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들을 행하는 방법을 꼭 하나로 일치시킬 필요가 없고, 또한 그것들이 일을 행하는데 편리하다면 행하는 예법이 서로 같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자(儒者)의 경우에도 그들이 배웠던 스승은 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예법은 천차만별이고, 중화의 예법은 동일하나 그 교화는 같지 않으니, 하물며 산간벽지에서 행해지는 복식과 예법의 편리함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변화에 대한 진퇴와 취사선택을 함에 있어서,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라 해도 항상 그것들과 일치시킬 수 없습니다. 또한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의 복식을 대해서도 비록 성인일지라도 일치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궁벽한 벽촌에는 다른 풍속이 많으며, 천박한 견해에는 궤변이 많은 법입니다.118) 알지 못하나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의 의견과 다름에도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음은, 공개적으로 널리 중지를 모아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숙부께서 하신 말씀은 일반적인 풍속에 대해서이고, 제가 하는 말은 새로운 풍속을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 조나라의 동쪽에는 하수(河水)와 박락(薄洛)119)이 있어 제(齊)와 중산국(中山國) 두 나라와 같이 국경으로 삼고 있으나, 그것을 지킬 선박이나 시설도 없습니다. 동북쪽의 대(代)에서 상산(常山), 상당(上黨)120)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는 연(燕), 동호(東胡)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누번(樓煩), 진(秦)과 한(韓)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나 그들을 막을 기병(騎兵)과 사수(射手)가 없습니다. 또한 과인은 선박과 그 시설도 없이 물가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백성들로 어떻게 하수와 박락수를 지킬야 할지 그 방법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호복으로 복식을 바꾸어 입혀 기병과 궁수를 양성하여 연(燕), 삼호(三胡)121), 진(秦), 한(韓)과의 국경을 방비하려고 합니다. 옛날 선군이신 조간자께서 진양(晉陽)에서 상당에 이르는 지역에 요새를 지어 통하게 하셨고, 그 뒤를 이은 조양자께서는 융적(戎狄)의 땅을 병탄하고 대나라를 취하여 여러 오랑캐 부족들을 물리치치고 세우신 공업은 조나라의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제나라의 지원에 힘입은 중산국이 우리 조나라를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고, 이어서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간 다음 계속해서 호성(鄗城)122)까지 진격하여 그곳에 강물을 끌어들여 포위했습니다. 만약 사직을 지키는 신령의 보우하심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호성을 지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이것을 치욕으로 여기셨으나, 아직까지도 그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병과 사수를 양성하여 가깝게는 상당의 지형을 이용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고, 가깝게는 중산국에게 그 원한을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숙부께서는 중화의 풍속을 따른다고 하며 간자와 양자의 뜻에 위반하여 복식을 바꾸었다는 오명을 얻지 않으려고 호성에서 당한 치욕을 잊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인이 바라고 있는 바가 아닙니다.」

공자성이 무령왕이 하는 말을 다 듣더니 두 번의 절을 올린 후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이 어리석어 왕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단지 속세의 떠돌아다니는 말만을 했으니 이것은 신의 크나큰 죄입니다. 오늘 왕께서 간자와 양자의 유지를 계승하고 선왕의 뜻을 따르신다고 하시는데 어찌 감히 신이 왕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공자성이 말을 마치자 다시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무령왕이 공자성에게 호복 한 벌을 하사하자 다음 날이 되자 호복을 착용하고 조회에 나가니 그때서야 무령왕은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으라는 조칙을 내렸다.

조문(趙文), 조조(趙造), 주소(周袑), 조준(趙俊) 등이 모두 나서서 왕에게 호복을 입지 말고 옛날 복식이 편하다고 간했다. 무령왕이 듣고 말했다.

「선왕들께서 따랐던 옛날 복식은 서로 같지 않은데 어떤 법을 따라야 한단 말인가? 제왕(帝王)들은 그 법을 서로 답습하지 않은데 어떤 법을 따라야 한단 말인가? 복희(宓戱)123), 신농(神農)124)은 백성들을 교화시키면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았고, 황제와 요순임금은 죄인을 죽이기는 했으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이어서 삼대에 이르러 시대의 변화에 따라 법을 만들고 받드는 전장제도를 근거로 해서 예를 제정했다. 법규와 정령 모두는 실제적으로 필요한 바에 따라 제정되었고 의복과 기구 등은 그 사용되는 편리함에 따라 만들어졌다. 고로 예법이라 해도 꼭 한 가지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고, 나라가 편리함을 추구하는 데는 반드시 옛 것만을 따라야 할 필요가 없다. 옛날 성인들이 일어나 서로 간의 법규를 따르지 않았음에도 왕이 되었으며, 하(夏)와 상(商)이 쇠퇴하여 멸망한 이유는 시대에 따라 예법을 바꾸었어야 함에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옛 것을 위반했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으며, 옛날의 법규를 따랐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잘 되었다고 할 수 없는 법이다. 만일 중화와 다른 기이한 복장을 한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방종하다고 한다면 추(鄒)와 노(魯) 두 나라에서는, 예법에 어긋난 괴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며125), 풍속이 바르지 못한 곳에서는 백성들의 행동도 경솔해진다는 말대로라면 오나라나 월나라에는 뛰어난 재사들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옛 성인들은 몸에 편한 것을 의복이라 했고,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예법이라고 했다. 무릇 나아가고 물러날 때 행하는 절도와 의복을 규정한 제도는 일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이지, 현자들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럼으로써 일반 백성들은 세상의 풍속과 같이 하고 현자들은 변혁과 함께 하는 것이다. 옛 말에『책 속의 지식으로 말을 모는 자는 말의 속성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옛날 법도만으로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는 자는 사리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126)라고 했으니 옛날 법규의 효능만을 따르는 자들은, 세속을 벗어나 높은 공을 세울 수 없고, 고대의 학설만을 고집하는 자는 현재의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없는 법이다127). 그대들은 이런 점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윽고 무령왕은 호복을 입으라는 조칙을 내리고 기병과 사수를 모집했다.

무령왕 20년 기원전 305년, 무령왕은 중산국을 공략하고 영가(寧葭)128)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호(胡) 땅을 점령하고 유중(楡中)129)에 다다랐다. 임호(林胡)의 왕이 말을 바치며 복속해 왔다. 도성인 한단으로 돌아와서 누완(樓緩)은 진(秦)나라에, 구액(仇液)은 한나라에, 왕분(王賁)은 초나라에, 부정(富丁)은 위나라에, 조작(趙爵)은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국(代國)의 상국 조고(趙固)를 시켜 호(胡) 땅에 머물게 하면서 그 땅을 다스리며 군사를 모집했다.

무령왕 21년 기원전 304년, 중산을 공격했다. 조소(趙袑)에게는 우군을, 허균(許鈞)에게는 좌군을 공자 장(章)에게는 중군을 맡기고 왕 자신은 전군을 통솔했다. 또한 우전(牛翦)에게는 전차대와 기병대를, 조희(趙希)에게는 호(胡)와 대(代)의 군사들을 지휘하게 하여 조나라의 깊은 험지를 통과하여130) 곡양(谷陽)131)으로 나와 같이 합류한 다음에 계속 전진하여 단구(丹丘)132), 화양(華陽)133), 그리고 치(鴟)에 세워진 요새134)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한편 조나라 본국의 군사를 이끌고 중산국으로 쳐들어간 무령왕은 호성(鄗城)을 취하고 석읍(石邑)135), 봉룡(封龍)136), 동원(東垣)137)을 점령했다. 중산국이 4개의 고을을 바치며 화의를 청하자 무령왕이 허락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무령왕 23년 기원전 302년, 중산국을 다시 공격했다.

무령왕 25년 기원전 300년, 혜후가 죽었다. 주소(周袑)에게 호복을 입고 왕자 하(何)를 가르치도록 했다.

무령왕 26년 기원전 299년, 다시 중산을 공격했다. 이로써 그 때까지 빼앗은 땅이 북쪽으로는 연(燕)과 대(代), 서쪽으로는 운중(雲中)138)과 구원(九原)139)에 까지 이르렀다.

무령왕 27년 기원전 298년, 5월 무신(戊申) 일에, 무령왕은 동궁에서 조회를 대대적으로 열고 조왕의 자리를 왕자 하(何)에게 물려주었다. 새 왕은 태묘에 가서 제례를 마친 후에 정사에 임했다. 조나라의 대부들은 모두 새로운 왕의 신하가 되기를 맹세했고, 비의를 상국에 임명함과 동시에 사부로 삼았다. 이가 조혜문왕(趙惠文王)이다. 혜문왕은 혜후(惠侯) 오왜(吳娃)의 소생이다. 무령왕은 스스로를 주보(主父)라 칭했다.

무령왕은 자기 아들에게는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스스로는 호복을 입고 대부들과 군사들을 거느리고 서북쪽으로 나아가 호(胡) 땅을 공략하여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에서 남쪽으로 나아가 진나라를 습격하려고 했다. 그래서 스스로 사자로 위장하고 진나라에 잠입하여 그 정세를 살피려고 했다. 진나라의 소양왕은 처음에는 무령왕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생긴 모습이 괴이하고 풍모가 대단히 당당하여 남의 신하 노릇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잡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무령왕은 그때는 이미 진나라의 관문을 벗어난 다음이었다. 남아있던 조나라의 관리를 잡아 심문한 결과 그 사람이 무령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진나라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무령왕이 사자로 위장하여 진나라에 들어간 목적은 스스로 그곳의 지형을 파악하여 후에 진나라를 공격하는데 참조하려고 하였고 또 다른 목적은 진왕(秦王)의 사람됨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혜문왕 2년 기원전 297년 무령왕이 새로 얻은 땅을 보기 위해 순행를 나갔다가 대 땅에서 서쪽으로 나가 서하(西河)에서 누번(樓煩)의 왕을 만나 그들의 군사들을 징발했다.

혜문왕 3년 기원전 296년, 중산국을 멸하고 그 왕을 부시(膚施)140)에 옮겨 살게 했다. 중산국의 땅에 영수궁(靈壽宮)을 짓기 시작했다. 새로 얻은 북방의 땅이 비로소 조나라의 속하게 되자, 대 땅으로 통하는 길이 크게 뚫려 서로 막히지 않게 되었다. 다시 한단으로 돌아와서 논공행상을 한 후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온 나라 백성들에게 음식과 술을 내어 5일 동안 먹고 마시게 했다.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된 공자 장(章)을 대 땅에 봉하고 안양군(安陽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공자 장은 평소에 사치스러운 공자장은 마음속으로 왕의 자리를 차지한 그의 동생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주보가 전불례(田不禮)를 보내 공자장을 보좌하도록 했다.

이태(李兌)가 비의에게 말했다.

「공자 장은 신체가 건장하며 마음에 교만한 뜻을 품고 무리를 모으며 욕심이 크니, 아마도 딴 마음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그를 보좌하는 전불례라는 위인도 잔인하며 살인을 즐겨하고 교만합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면 틀림없이 음모를 꾀하여 반란을 획책하여 일단 일을 벌이면 요행에 의지하여 반란을 성공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무릇 소인배에게 야심이 있으면 그 계획은 경솔하고 천박하여, 단지 그 이익만을 내다보고 그로 인하여 생기는 화를 고려하지 않으며, 유유상종하여 서로 부추김으로써 같이 화난의 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그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막중한 국정을 맡으신 상국께서는 세력이 큼으로 반란은 당신으로 인해 일어나게 되고, 화는 당신의 한 몸으로 모이게 되니, 상국이야말로 제일 먼저 그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인자는 만물을 두루 사랑하고, 지자는 재해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방비하니, 인자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141) 대감께서는 어찌하여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워 조나라의 정사를 공자성에게 맡기지 않으십니까? 원망의 대상이 되지도 말고, 재난을 전달하는 사람도 되지 마십시오.」

비의가 이태의 말에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옛날 주보께서 지금의 왕을 나에게 부탁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당신의 법도를 바꾸지 말고, 당신의 결심을 개변하지 말며, 한 마음을 견지하면서 당신의 일생을 마치도록 하시오.』라고 해서 나는 재배하고 왕명을 받든 후에 서책에 기록해 두었소. 그런데 지금에 와서 전불례의 란을 두려워하여 내가 적어 놓은 기록을 잊어먹는다면 이보다 더 큰 변절이 어디 있겠소? 조정에 나가 지엄한 왕명을 받고, 물러 나와서는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심한 변절이 어디 있겠소? 또한 변절하고 배신한 신하는 형벌도 관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 옛날 속담에『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살아 있는 자는 결코 그에 대해 부끄럽지 않다.』라고 했소. 내가 이미 전에 왕 앞에서 언약을 했으니, 나는 단지 그 언약을 지킬 뿐이라, 어찌 내 일신상의 안전만을 생각하고 정사를 남에게 맡길 수가 있겠소! 더욱이『지조 있는 신하는 재난이 닥쳐야 그 절조가 나타나고, 충신은 재앙에 연루되어야 그 행위가 분명하게 된다.』142)고 했소. 그대는 이미 가르침과 충고로 나를 깨우쳐 주었지만, 나는 옛날에 내가 한 언약이 있으니 내가 비록 목숨을 잃더라도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소!」

「대감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재난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제가 대감을 뵐 수 있는 시간도 금년 한 해 뿐이겠습니다.」

이태가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갔다. 이태는 수시로 공자 성을 찾아가 전불례의 반란에 대한 대비를 세웠다.

그러던 어느 날 비의가 신기(信期)143)를 불러 말했다.

「공자장과 전불례 참으로 걱정스럽소. 그들은 겉으로는 의와 선을 말하나, 사실은 악독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불효한 자식에 불충한 신하라고 할 수 있소. 내가 들으니 간신이 조정에 있으면 나라가 해를 입고, 거짓된 신하가 있으면 그는 국왕의 좀벌레라고 했소. 그 두 사람은 탐욕스럽고 야심이 크니 안에서는 군주의 총애를 받으면서 밖에서는 포악합니다. 그들은 왕명을 빙자하여 방자하게 굴다가 어느 날 아침 마음대로 왕명이라고 사칭하여 명을 내리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으로 장차 그 화가 나라에 이르게 될 것이오. 지금 나는 이 일로 인해 걱정하는 마음이 생겨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고, 배가 고파도 먹는 때를 잊고 살고 있소. 도적이 장차 출몰할 예정이니 내가 방비하지 않을 수 없소. 앞으로는 왕을 알현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먼저 만나도록 하여 내가 먼저 몸을 던져 막아보고 이상이 없다면 왕을 만나도록 하겠소.」

「참으로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혜문왕 4년 기원전 295년, 왕이 조회를 열고 여러 신하들을 모이게 하자 안양군 장(章)도 참석했다. 주보가 영을 내려 왕으로 하여금 정사를 보게 하면서 옆에서 여러 신하들과 종친들이 행하는 예절을 지켜보았다. 장자인 안양군의 모습이 의기소침하여 형의 신분이나 오히려 신하의 몸으로 북면하여 동생에게 몸을 굽히는 모습을 보고 마음 속으로 측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 주보는 조나라를 양분하여 장에게 대 땅의 왕으로 봉하려고 했으나, 그 생각도 주저하며 시행하지 못했다.

주보가 혜문왕과 함께 사구(沙丘)144)로 유람 나갔다가 서로 다른 궁에 기거하였다. 공자장이 그의 일당들 및 전불례와 함께 란을 일으켰다. 주보의 명을 사칭하여 혜문왕을 불렀으나 비의가 먼저 당도하자 죽였다. 고신(高信)은 즉시 왕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공자 장에게 대항했다. 도성을 지키고 있던 공자성과 이태가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반란군에 대항하여 공자장과 전불례를 죽이고 그 도당들을 멸하여 왕실을 안정시켰다. 공자성은 재상이 되어 안평군(安平君)이라는 봉호를 받았고 이태는 사구(司寇)가 되었다. 그 전에 공자장이 싸움에 패했을 때 도망쳐 주보를 찾아가자, 주보는 문을 열어주고 그를 받아 들였다. 공자성과 이태가 주보가 묵고 있던 궁궐을 포위하고 수색하여 공자장을 잡아서 죽인 후에 두 사람이 모의하였다.

「공자장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주보가 묵고 있는 궁궐을 포위했으니, 만일 우리가 포위를 푼다면, 우리 두 사람은 반란죄로 멸족당할 것이다.」

두 사람은 주보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고 궁궐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영을 내렸다.

「궁궐에서 늦게 나오는 자는 모두 멸족을 시키겠다.」

그러자 궁궐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주보도 같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고, 또한 음식을 구할 수도 없어 참새 새끼를 잡아먹다가, 결국은 석 달 만에 사구궁(沙丘宮)에서 굶어 죽었다. 주보의 죽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비로소 상을 발하고 제후들에게 부음을 전했다.

그때는 혜문왕의 나이가 어렸던 관계로, 공자성과 이태가 정권을 담당했으나 주보에게 죽임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두 사람이 주보를 포위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옛날 주보가 공자장을 태자로 세웠다가, 후에 오왜를 얻어 총애하고 이어서 몇 년간을 그녀의 궁에서 떠나지 않고 살다가 공자하를 얻자 공자장을 태자의 자리에서 폐하고 조왕의 자리를 공자하에게 물려준 것이다. 오왜가 죽자 공자하에 대한 사랑이 식고 옛날 태자였던 공자장을 측은하게 여겨 조나라를 두 개로 쪼개 왕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그것도 시행하지 않고 주저한 관계로 반란이 일어나 부자가 같이 죽음에 이르게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고 하겠다.

주보가 죽은 해인 혜문왕 5년, 즉 기원전 294년에 막(鄚)145)과 역(易)146) 땅을 연나라에 주었다.

혜문왕 8년, 기원전 291년 남행당(南行唐)147)에 성을 쌓았다. 9년 조량(趙梁)이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공격하여 노관(魯關)148)까지 진격했다.

혜문왕10년 기원전 289년, 진나라 왕이 스스로 서제(西帝)라 칭했다.

혜문왕 11년 기원전 288년, 동숙(董叔)을 장군으로 삼아 위(魏)나라와 함께 송나라를 공격한 결과 위나라로부터 하양(河陽)149)의 땅을 얻었다. 진나라가 쳐들어와 경양(梗陽)150)의 땅을 빼앗아 갔다.

혜문왕 12년 기원전 287년, 조량(趙梁)이 군사들을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했다.

혜문왕 13년 기원전 286년, 한서(韓徐)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로 쳐들어갔다. 무령왕의 딸이며 혜문왕의 누이인 공주가 죽었다.

혜문왕 14년 기원전 285년, 연나라의 재상 악의(樂毅)가 조(趙), 진(秦), 한(韓), 위(魏), 연(燕) 등의 오국 연합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영구(靈丘)151)를 빼앗았다. 진나라 왕과 중양(中陽)152)에서 회동했다. 15년 기원전 284년, 조나라를 방문한 연소왕(燕昭王)과 회견했다. 조나라가 위(魏), 진(秦), 한(韓), 연(燕) 나라 등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왕이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쳤다. 사국의 군대가 진격을 멈추자 연나라 단독으로 제나라를 깊숙히 쳐들어가 그 도성인 임치성(臨淄城)을 점령했다.

혜문왕 16년 기원전 283년, 진나라가 다시 조나라와 힘을 합쳐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를 매우 두려워했다. 소려(蘇厲)가 제나라를 위해 조나라 왕에게 서신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듣건대, 옛날 고대의 어진 군주들은 덕행이 해내(海內)에 널리 펼쳐지지도 않았고, 교화는 백성들에게 충분하게 행해지지 않았으며, 사시사철 제사를 행하면서 항상 조상들에게 음식을 바치지도 않았지만 감로(甘露)가 내리고 비가 알맞게 와서 매년마다 풍년이 들었고, 백성들은 질병에도 걸리지도 않았으며, 모든 백성들은 이를 찬송하였음에도, 오히려 현명한 군주는 더욱 분발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도 어진 행동과 공업을 세우는데 힘쓰시고 계시지만 그것들이 항상 진나라에 은혜로써 베풀어지는 것도 아니며, 또 진나라도 제나라에 대해서 원래 그렇게 심한 원망이나 쌓인 분노가 특별히 심한 정도는 아닙니다. 진(秦)과 조(趙) 두 나라는 서로 연합하여 강제로 한나라에 출병하기를 요구했는데, 이는 진나라가 진실로 조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진나라가 정말로 제나라를 미워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정이 도에 지나친다면, 현명한 군주는 마땅히 냉정한 마음으로 주위를 관찰해 봐야 합니다. 진나라는 조나라를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제나라를 증오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 이유는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동주(東周), 서주(西周) 즉 이주(二周)의 두 소국을 삼키기 위해 제나라를 미끼로 삼아 천하를 유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이 성공하지 못할까 걱정한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위와 조 두 나라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또한 천하 제후들이 진나라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인질을 보내 신임을 얻으려 하고 있으며, 더욱이 천하 제후들이 갑자기 합종을 맺고 진나라에 대해 반기를 들지나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군대를 동원하여 한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나라가 겉으로는 다른 나라에 덕을 베풀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국내가 텅 비어있는 한나라를 공격하려는 계획이니, 신은 생각하기에 진나라의 계책은 분명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무릇 세상일은 원래 형세가 다르면서도 그 우환은 같은 법이라, 위(魏)와 제(齊) 두 나라가 초나라를 오랫동안 공격을 하는 바람에 그 틈을 탄 조나라가 중산국을 멸망시켰습니다.153) 또한 한나라를 후원하는 제나라가 오랫동안 공격을 당하니 한나라는 머지않아 필시 진나라의 공격을 받고 망하게 됨은 불문가지입니다. 그와 반대로 제나라를 무찌르게 되면 그 이익을 나머지 다섯 나라와 나누어 가질 수 있으나 한나라를 멸망시키면 그 이익은 진나라가 독점하게 되며, 이어서 이주(二周)를 접수하여 천자가 사용하는 제기는 모두 진나라의 차지가 됩니다. 경작지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일지라도 그 효과를 따지는 법인데, 왕께서 얻을 이익은 진나라와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많겠습니까?」

어느 유세객이『한나라가 삼천(三川)154)의 땅을 잃고 이어서 위(魏)나라가 원래의 당진 땅을 잃게 되면 머지않아 재앙이 조나라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연나라가 제나라의 북부 지역을 모두 점령하면, 조나라의 사구(沙丘)와 거록(鉅鹿)155)까지는 300리도 되지 않으며, 한나라의 상당에서 조나라의 도성인 한단까지는 100리 밖에 안되니 연(燕)과 진(秦) 두 나라가 수호를 맺고 좌우에서 협공하여 조나라의 땅을 빼앗으려 한다면 지름길을 통하여 300리면 통할 수 있게 됩니다. 진나라의 상군(上郡)과 인접한 정관(挺關)156)에서 유중(楡中)까지는 1500리가 되니 진나라가 상기의 삼군(三郡)157) 지역의 군사를 징발하여 조나라의 상당군(上黨郡)158)을 공격한다면 양장(羊腸)159) 서쪽과 구주산(句注山)160) 남쪽의 땅은 이미 왕의 소유에서 벗어나 남의 땅이 됩니다. 진나라가 구주산을 넘어 상산(常山)으로 나아가 그 길을 차단하고 지킨다면 300리의 거리로 연나라와 통할 수 있으며, 대 땅의 말과 호 땅의 들개는 더 이상 조나라의 동쪽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곤산(昆山)161)의 옥도 또한 조나라로 운송하지 못하게 되니 조나라의 이 세 가지 보물은 더 이상 왕의 소유가 아니게 됩니다. 왕께서는 오랫동안 제나라를 공격해 왔고, 강성한 진나라를 따라 한나라를 공격해 왔으니, 필시 그 화가 앞서 든 상황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어느 편이 유리한 지를 심사숙고 하십시오.

더욱이 제나라가 조나라로부터 정벌을 당한 이유는 제나라가 조나라를 섬겼기 때문이며, 또한 천하의 제후들이 군대를 집결 한 목적은 조나라를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연(燕)과 진(秦) 두 나라의 맹약이 이루어져 조나라의 남북 양쪽에서 출병할 날도 그리 머지 않았고 계속해서 오국(五國)162)이 조나라를 삼분하기 위해 합종을 행하려고 시도하겠으나, 우리 제나라는 그들과 맹약을 깨뜨려 조나라를 위해 희생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나라 군사들을 서쪽으로 출병시켜 강한 진나라 군사들을 제압하고, 또한 진나라로 하여금 제호(帝號)를 버리고 조나라에 복종하도록 만들겠으며, 위나라로부터 빼앗아 간 고평(高平)과 근유(根柔)163) 두 고을을 돌려주도록 하겠고, 경분(巠分)과 선유(先兪)164)는 조나라에 돌려주도록 만들겠습니다. 제나라는 대왕을 섬기는 일이야 말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대왕은 오히려 우리 제나라를 치죄하려고 하니, 신은 천하의 제후들이 후에 대왕을 받드는 일을 감히 스스로 행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어떻게 하는 편이 유리한 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제 대왕께서 천하의 제후들과 함께 우리 제나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한다면, 천하의 제후들은 필시 대왕께서 의로운 일을 행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대왕의 은혜로 사직을 보존할 수 있게 된 제나라는 조나라를 더욱 열심히 받들게 되고 그 결과 천하의 제후들은 필시 온 힘을 다하여 대왕의 의로운 뜻을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왕께서는 천하의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며, 만일 진나라가 포학하게 굴면 대왕께서는 천하의 제후들을 이끌고 제압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나라가 군사를 물리치고, 진나라의 제의를 거절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조왕과 연왕이 회동했다. 염파(廉頗)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하여 석양(昔陽)165)을 빼앗았다.

혜문왕 17년 기원전 282년, 연나라에서 도망쳐 온 악의(樂毅)가 조나라의 장수가 되어 위나라의 백양(伯陽)166)을 공격했다. 그러자 진나라는 예전에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거절한 조나라의 행위에 대해 원한을 품고 조나라를 침략하여 두 개의 성을 빼앗아 갔다. 혜문왕 18년 기원전 281년, 진나라가 다시 쳐들어와 석성(石城)167)을 빼앗아갔다. 혜문왕은 다시 위(衛)나라의 동양(東陽)168)으로 가서 황하의 제방을 허물어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그때 마침 큰비가 와서 홍수가 지고, 장수(漳水)가 범람했다. 진나라의 위염(魏冉)169)이 와서 조나라 상국의 자리에 앉았다.

혜문왕 19년 기원전 280년, 진나라가 쳐들어와 조나라의 군사를 격파하고 2개의 성을 빼앗아 갔다. 조나라가 위나라에게 백양(伯陽)의 땅을 돌려주었다. 조사(趙奢)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하여 맥구(麥丘)를 점령했다.

혜문왕 20년 기원전 279년, 염파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했다. 조혜문왕(趙惠文王)과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서하에서 회동했다170) 혜문왕 21년 기원전 278년, 조나라가 장수(漳水)의 물길을 바꿔 무평(武平)171) 서쪽으로 흐르게 하였다.

혜문왕 22년 기원전 277년, 나라에 큰 역병이 돌았다. 공자 단(丹)을 태자로 세웠다.

혜문왕 23년 기원전 276년, 조나라가 누창(樓昌)을 대장으로 삼아 위나라의 기(幾)172) 땅을 공격하게 했으나 빼앗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에 염파가 장수가 되어 기(幾) 땅을 다시 공격하여 점령했다.

혜문왕 24년 기원전 275년, 염파가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방자(房子)173)를 공격하여 빼앗은 후에 그곳에 성을 쌓고 돌아왔다. 다시 안양(安陽)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혜문왕 25년 기원전 274년, 연주(燕周)가 장수가 되어 창성(昌城)174), 고당(高唐)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위나라와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장수 백기(白起)가 조나라의 군사들을 화양(華陽)175)에서 격파하고 그 장수 한 명을 사로잡았다.176) 혜문왕 26년 기원전 273년, 동호(東胡)에게 빼앗겼던 대 땅을 다시 찾았다.

혜문왕 27년 기원전 272년, 이번에는 장수(漳水)의 물줄기를 바꾸어 무평(武平)의 남쪽으로 흐르게 하였다. 조표(趙豹)177)가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하수가 범람하여 큰 홍수가 났다.

혜문왕 28년 기원전 271년 인상여(藺相如)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평읍(平邑)178)에 이르러 그 성의 북쪽의 구문(九門)에서 행군을 멈추고 큰 성을 쌓았다. 연나라 장수 성안군(成安君)과 공손조(公孫操)가 그들의 국왕을 살해했다. 29년 기원전 270년 진(秦)과 한(韓) 두 나라가 서로 연합하여 조나라를 침략하여 연여(閼與)179)를 포위했다. 조나라가 조사(趙奢)를 장수로 삼아 진나라 군사들을 막도록 했다. 조사는 진나라 군사를 연여성 밑에서 크게 무찔렀다. 조왕은 조사에게 그 공으로 마복군(馬服君)에 봉했다.

혜문왕 33년 기원전 264년, 혜문왕이 죽고 태자단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조효성왕(趙孝成王)이다.

효성왕 원년 기원전 263년, 진나라가 쳐들어와 성 세 개를 빼앗아 갔다. 조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태후가 섭정을 행 했음으로 진나라가 기회를 노리고 공격해 온 것이다. 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제나라가 말했다.

「장안군(長安君)180)을 인질로 보내 주어야만 군사를 보내 주겠다.」

태후가 제나라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하자 조나라의 대신들이 강력하게 간해 장안군을 제나라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태후가 대신들에게 명확하게 자기의 뜻을 밝혔다.

「앞으로 또 다시 장안군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야 된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 자의 면상에 침을 뱉어 주리라!」

좌사(左師) 촉용(觸龍)이 태후를 접견하고 싶다고 말하자, 태후는 노기발발하여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촉용이 들어와 서서히 잰 걸음로 걸어와 앉더니 스스로 사죄을 말을 올리며 말했다.

「제가 나이가 들어 발에 병이 나 걸음을 잘 걸을 수 없어 오랫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만히 제 몸을 살펴 미루어 보니, 태후님의 옥체도 또한 불편하지나 않으신지 걱정되어 뵙고자 한 것입니다.」

태후가 대답했다.

「이 늙은 몸은 가마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소.」

「하시는 식사는 줄지 않으셨습니까?」

「죽을 먹을 수 있을 뿐이오.」

「저는 근래 식욕이 좋지 않아 매일 마다 하루에 3-4사리를 걸어 이제는 식욕을 다소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몸에 좋은 것 같습니다.」

「이 늙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소.」

그러나 태후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조금 누그러져 보였다. 촉용이 다시 태후를 향해 말했다.

「노신의 아들 서기(舒棋)는 나이가 가장 어리고 불초하지만 신이 이미 늙어 마음 속으로 그를 매우 사랑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흑의(黑衣)181)의 결원을 보충하여 왕궁을 지키는 위병(衛兵)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그런데 아들은 몇 살이나 먹었소?」

「15살입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원컨대 제가 죽어 땅에 묻히게 되면 그 애의 장래가 걱정되어 이렇게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들 남자도 역시 어린 아들들을 사랑하오?」

「아마도 부인들보다도 더 사랑할 것입니다.」

태후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 않소. 부인들이야말로 그의 어린 자식들을 각별히 사랑하는 법이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태후께서는 장안군보다 연후(燕侯)182)를 더 사랑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대감은 잘못 생각하고 있소. 나는 연후를 장안군보다 더 사랑하고 있지 않소.」

「부모된 자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그들을 위해서 보다 깊고 넓게 생각해야 됩니다. 옛날 태후께서 연후를 연왕에게 시집보내실 때 그녀의 발뒤꿈치를 붙들며 눈물을 흘리시며 슬퍼하셨는데, 멀리 떠나가는 딸을 생각해서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녀가 시집을 가버린 후에도 그리워하지 않은 바는 아니나, 제사를 지내며 선조들에게 기도를 드릴 때는『절대로 연후가 돌아오지 않게 해 주소서!』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태후께서 생각을 깊고 멀리하셔서 당장에 보고 싶은 마음에 앞서 연후의 자손이 대를 이러 연나라의 왕이 되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겠소.」

「지금으로부터 3대 이전에 조나라 역대 왕의 자손으로써 후(侯)에 봉해진 사람의 후손으로써 지금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소.」

「그렇다면 조나라 외에 다른 여러 나라의 제후들 후손들 중 그 지위에 아직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소.」

「이는 가까이 있는 화는 자신에게 미치고, 멀리 있는 화는 자손에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어찌 군주의 자손으로 후에 봉해진 사람들이 모두 선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나라에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으면서 그 지위는 높고, 나라를 위해 힘쓴 것도 없으면서 봉록은 후하여 단지 진기한 보물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태후께서 장안군의 지위를 올려 주시고, 비옥한 땅에 봉하며, 귀중한 많은 보물들을 하사하셨으나, 오늘 그로 하여금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게 하지 않는다면 태후께서 돌아가신 다음에는 장안군이 어찌 조나라에서 몸을 보전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노신은 장안군을 위한 태후님의 생각이 너무 짧다고 여겨 그를 사랑하심이 연후보다도 더 못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대감의 말씀을 잘 알아듣겠소. 장안군을 제나라에 꼭 보내야만

한다면 그리 하도록 하시오.」

그래서 조나라는 장안군을 위해 백승(百乘)의 수레를 준비하여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니, 제나라는 비로소 구원군을 보내주었다.

조나라의 현인, 자의(子義)가 듣고 그 일에 대해 듣고 말했다.

「군주의 아들은 군주와 골육을 나눈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공로도 없이 누리는 높은 지위나, 아무런 공헌함도 없이 받는 녹봉만으로는 자신의 권력이나 부를 지킬 수 없으니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야 말 할 필요가있겠는가?」


제나라 안평군(安平君) 전단(田單)이 조나라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의 중양(中陽)183)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이어서 방향을 한나라로 돌려 주인(注人)184)의 땅을 빼앗았다.

효성왕 2년 기원전 262년, 태후 혜문후(惠文后)가 죽었다. 제나라의전단이 들어와 조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효성왕 4년 기원전 260년, 효성왕이 저녁에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좌우의 색깔이 서로 다른 옷을 입고서 비룡(飛龍)의 등뒤에 타고 하늘로 올라가다가 끝까지 이르지 못하고 떨어졌는데 그 옆에는 황금과 옥이 쌓여 산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다음 날, 효성왕이 시초(蓍草)를 사용하여 점을 치는 서사(筮史) 감(敢)을 불러 점을 치게 하였다. 서사 감이 말했다.

「꿈에 좌우의 색깔이 다른 옷을 입었다 함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룡을 타고 하늘로 오르다가 땅에 떨어졌다 함은 기세는 있지만 실익이 없음을 말하고, 다시 산처럼 쌓여 있는 황금과 옥은 우환이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꿈을 꾼지 3일 째 되는 날, 한나라의 상당군의 태수 풍정(馮亭)이 보낸 사자가 와서 고했다.

「한나라가 상당군을 지킬 능력을 갖지 못해, 장차 진나라에 병합될 운명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의 관리들과 백성들은 조나라에 합쳐지기를 바라고, 진나라에 편입되기를 원치 않고 있습니다. 상당군 관하의 17개에 달하는 현성의 관리들과 백성들 모두는 재배하여 조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으니, 왕께서는 상당군 관하의 관리와 백성들의 청을 들어주실 것인지를 결정하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효성왕이 크게 기뻐하며 평양군(平陽君) 조표(趙豹)를 불러 조고에게 그 사실을 알리며 말했다.

「한나라의 상당군 태수가 그 휘하의 성읍 17개를 들어 우리 조나라에 바치려하고 있는데, 그것을 받아야 하오? 아니면 받지 말아야 하오?」

「옛 성현들이 말씀하시기를 이유 없는 이익은 재앙의 원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베푼 덕을 사모하여 그 땅을 바치겠다고 하는데 어찌 이유가 없다고 하시는 것이오?」

「대저 진나라가 한나라를 끊임없이 계속 침략하여 그 땅을 잠식해 들어가 한나라 국내의 도로를 중간에 차단하여 서로 통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진나라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상당의 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한나라가 그 땅을 진나라에 바치려고 하지 않고 조나라에 바치려고 하는 이유는 그로 인해서 생기는 화를 조나라에 떠넘기기 위해서입니다. 수고는 진나라가 하고 이익은 조나라가 취하려고 하니, 비록 강대국이라 한들 약소국의 이익을 쉽게 취할 수 없거늘, 하물며 약소국의 입장에서 강대국이 얻게 될 이익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상당군을 차지하는 행위가 어찌 이유가 없는 이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진나라는 우전(牛田)185)의 수로를 이용하여 양식을 운반하여 한나라 땅을 잠식하고, 진나라가 소유하고 있는 가장 성능이 좋은 병거들만을 동원하여 힘껏 싸워, 한나라를 남북으로 쪼개 놓았습니다. 따라서 상당군에 대한 진나라의 정령은 이미 시행되고 있어 그들을 대적할 수 없으니 결코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오늘 날 우리가 백만에 달하는 군사를 동원하여 타국을 공격한 이래 몇 년이 지나도 그들의 땅 중 단 한 개의 성도 차지하지 못했소. 그런데 오늘 성읍만 해도 17개나 되는 땅을 얻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커다란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조표가 물러가자 왕은 평원군(平原君)186)과 조우(趙禹)를 불러 다시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두 사람이 말했다.

「우리가 백만대군을 동원하여 타국을 공격해왔으나 몇 년이 지나도록 단 한 개의 성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성읍만 17개를 얻게 되니 그 이익이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왕께서는 결코 물리치지 마십시오.」

「알겠소!」

효성왕은 즉시 평원군에게 명하여 상당의 땅을 접수하도록 했다. 평원군은 상당의 현지로 나아가 사자를 보내 풍정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이 조승은 조나라의 신하로써, 저희 왕께서 저로 하여금 왕명을 전달하도록 하셨습니다. 풍정 장군에게 만호의 인구를 갖은 성읍 3개의 태수로 삼고, 또한 휘하의 모든 현령에게 1000호의 인구를 가진 성읍 3개씩에 봉하여 모두 대대로 제후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또 관리와 백성에게는 진나라 작급으로 3급187)에 해당하는 봉록을 주고 또한 그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모두에게 6근의 황금을 하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사자를 통해 평원군의 말을 전해들은 풍정은 눈물을 흘리며 집안에 틀어 박혀 사자를 접견하지도 않은 채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저는 세 가지의 불의를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지키지 못했으니 그 첫 번째 불의이며, 진나라에 땅을 들어 바치라는 군주의 명을 어겼으니 이는 두 번째 불의이고, 땅을 팔아 식읍을 얻으니 이것이 세 번째 불의입니다.」

이윽고 조나라가 군사를 보내 상당군의 땅을 취했다. 염파는 조나라의 장군이 되어 장평(長平)에 주둔했다.

같은 해 조나라는 염파를 대신하여 조괄(趙括)을 대장으로 삼았다. 진나라 군사들이 조괄을 포위하자, 조괄은 싸움 중에 죽고 조나라 군사들은 진나라에 항복했다. 그러나 진나라 군사들은 40여 만의 조나라 군사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조왕은 조표의 간언을 듣지 않아 장평싸움으로 인해 화난을 얻었다고 후회했다.

조왕이 한단으로 돌아와 진나라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자, 진나라는 군사를 내어 한단을 포위했다. 무원(武垣)188)의 현령인 부표(傅豹)와 왕용(王容), 그리고 소석(蘇射) 등 세 사람이 연나라의 백성들을 이끌고 연나라로 돌아갔다. 조왕은 조나라 땅인 영구(靈丘)에 초나라의 재상 춘신군(春申君)을 봉했다.

효성왕 8년 기원전 256년, 평원군 조승이 초나라에 가서 구원을 청했다. 그는 돌아 올 때 초나라의 구원군을 데리고 왔다.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도 구원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구원하러 오자 진나라는 한단의 포위망을 풀고 물러갔다.

효성왕 10년 기원전 254년, 연나라가 창장(昌壯)189)을 공격하여 그 해 5월에 함락시켰다. 조나라 장수 악승(樂乘)190)과 경사(慶舍)가 신량(信梁)이 이끌던 진나라 군사를 무찔렀다. 태자가 죽었다. 진나라는 서주(西周)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도보기(徒父祺)191)가 군사를 이끌고 국경 밖으로 나가 진나라 군사들의 침략에 대비했다.

효성왕 11년 기원전 253년, 원지(元氏)192)에 성을 쌓고 상원(上原)193)을 현으로 삼았다. 무양군(武陽君) 정안평(鄭安平)194)이 죽자 그의 봉지를 걷어 국고로 귀속시켰다.

효성왕 12년 기원전 252년, 한단의 마초 창고에서 불이나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효성왕 14년 기원전 250년, 평원군 조승이 죽었다.

효성왕 15년 기원전 249년, 위문(尉文)195)의 땅에 염파(廉頗)를 봉하고 신평군(信平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연왕이 승상 율복(栗腹)을 조나라에 보내어 수호를 청하고 예물로 황금 500근을 조왕에게 보냈다. 율복이 사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연왕에게 말했다.

「조나라의 젊은 장정들은 모두 장평의 싸움에서 죽어 그 고아들이 아직 장성하기 전이라 지금 조나라를 공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연왕이 창국군(昌國君) 악한(樂閒)을 불러 그의 의견을 물었다. 악한이 대답했다.

「조나라는 사방으로 접한 외국과 계속 전쟁을 해 그 백성들이 싸움에 익숙하여 우리가 공격한다 해도 이길 수 없습니다.」

「내가 많은 수의 병력으로 적은 수의 병력을 공격하려고 하오. 만일 2명의 군사로 1명의 군사를 정벌하게 한다면 이길 수 있겠소?」

「그래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섯 배의 병사를 동원하여 조나라를 친다면 어떻겠소?」

「안 됩니다.」

연왕이 크게 화를 냈다. 그러나 악한을 제외한 연나라의 모든 신하들은 조나라를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연왕에게 말했다. 연왕은 드디어 2군(軍)의 부대와 병거 2천 승을 일으켜 율복을 장수로 삼아 조나라로 쳐들어가 호성(鄗城)을 공격하게 하고, 경진(卿秦)에게는 대 땅을 공략하도록 했다. 조나라는 염파를 대장으로 삼아 출격시켜 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율복을 잡아서 죽이고 경진과 악한은 사로잡았다.

효성왕 16년 기원전 248년, 염파가 군사를 이끌고 나와 연나라를 포위하였다. 악승(樂乘)을 무양군(武陽君)에 봉했다.

효성왕 17년 기원전 247년, 임시로 조나라의 재상의 자리를 맡았던 악승이 연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을 포위했다.

효성왕 18년 기원전 246년, 연릉(延陵)196)을 지키던 조나라의 장수 균(鈞)이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나와 위나라를 공격하는 대장 신평군(信平君) 염파를 도왔다. 진나라가 쳐들어와 유차(楡次)197)를 포함한 37개의 성을 빼앗아 갔다.

효성왕 19년 기원전 245년, 조나라와 연나라가 땅을 서로 바꿨다. 조나라는 용태(龍兌), 분문(汾門), 임락(臨樂)198) 등의 세 고을을 연나라에 주고 연나라는 조나라에게 갈(葛), 무양(武陽), 평서(平舒)199)를 주었다.

효성왕 20년 기원전 244년, 진왕(秦王) 정(政)이 진나라의 왕 자리에 처음으로 올랐다. 이가 진시황(秦始皇)이다. 진나라가 조나라의 진양성(晉陽城)을 빼앗아 갔다.

효성왕 21년 기원전 243년, 효성왕이 죽었다. 효성왕의 아들 언(偃)이 조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조도양왕(趙悼襄王)이다. 염파가 장수가 되어 위나라의 번양(繁陽)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도양왕이 악승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하자 염파는 불복하고 악승을 공격했다. 악승은 싸움에서 지고 도망치고 염파는 위나라로 망명했다.

도양왕 원년 기원전 242년,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여 위나라와 수호를 맺었다. 평읍(平邑)과 중모(中牟) 사이의 도로를 통하게 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도양왕 2년 기원전 241년, 이목(李牧)200)이 장수가 되어 연나라를 공격하고 무수(武遂)201)와 방성(方城)202)을 빼앗았다. 진나라는 태자인 춘평군(春平君) 조천(趙遷)을 불러서 억류했다. 진나라의 대신 설균(泄鈞)이 춘평군을 위해 문신후(文信侯) 여불위에게 진언했다.

「조나라의 태자 춘평군은 조왕이 매우 총애하여 낭중(郎中)들 마저도 시기하고 있습니다. 옛날 낭중들이 서로 『춘평군이 진나라에 들어간다면 진나라는 필시 태자를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모한 끝에 태자를 진나라에 들여보냈습니다. 오늘 대감께서 조나라의 태자를 억류하고 있음은 조나라의 후사를 잇지 못하게 하려는 낭중들의 계략에 떨어지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따라서 대감은 춘평군을 조나라와 가까운 평도(平都)203)에 머물게 하십시오. 춘평군을 총애한 조왕은 조나라의 많은 땅을 떼어 진나라에 몸값으로 주고 평도에 있는 춘평군을 되찾아 갈 것입니다.」

문신후 여불위가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고 춘평군을 평도로 보냈다. 같은 해 조나라는 한고(韓皐)204)에 성을 쌓았다.

도양왕 3년 기원전 240년, 조나라의 장수가 된 방훤(龐煖)이 연나라를 공격하여 그 대장 극신(劇辛)을 사로잡았다.

도양왕 4년 기원전 239년, 방훤이 조(趙), 초(楚), 위(魏), 연(燕) 등 사국의 정예군사들을 이끌고 진나라의 최(蕞)205) 땅으로 쳐들어갔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제나라 땅으로 움직여 요안(饒安)206)을 점령했다.

도양왕 5년 기원전 238년, 조나라가 부저(傅抵)를 장수로 삼아 평읍(平邑)에 그 군사를 주둔시키게 하고 경사(慶舍)로는 하여금 동양(東陽)207)과 하수의 남쪽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하수를 건너는 다리를 지키게 했다.

도양왕 6년 기원전 237년, 장안군(長安君)208)을 요(饒)209)에 봉했다. 위나라는 조나라에 업(鄴) 땅을 바쳤다.

도양왕 9년 기원전 234년,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여 이양성(狸陽城)을 공격했다. 조나라 군사들이 물러가기도 전에 진나라가 업 땅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도양왕(悼襄王)이 죽고 그 아들 유목왕(幽穆王) 천(遷)이 뒤를 이었다.

유목왕 천(遷) 원년 기원전 233년, 백인(栢人)210)에 성을 쌓았다.

조왕 천 2년 기원전 235년, 진나라가 무성(武城)을 공격하자 호첩(扈輒)이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나와 싸웠으나 패하고 자신은 전사했다.

조왕 천 3년 기원전 234년, 진나라가 적려(赤麗)와 의안(宜安)211)을 공격하자 이목이 군사를 이끌고 비성(肥城)212) 밑에서 싸워 물리쳤다. 조왕은 이목을 무안군(武安君)에 봉해 그 공로를 표창했다.

조왕 천 4년 기원전 233년, 진나라가 다시 쳐들어와 파오(番吾)213)를 공격하자 이목이 다시 싸워 물리쳤다.

조왕 천 5년 기원전 232년, 대 땅에 대지진이 일어나 악서(樂徐)214) 서쪽에서 북쪽으로 평음(平陰)에 이르기까지 누각, 가옥 및 담장 등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땅이 동서로 130보 정도의 넓이로 갈라졌다.

조왕 천 6년 기원전 231년, 조나라에 대기근이 들어 백성들 사이에 요언이 널리 퍼졌다.


趙爲號, 秦爲笑(조위호, 진위소)

조나라 사람들은 크게 울고, 진나라는 사람들은 크게 웃네!


以爲不信, 視地之生毛(이윕불신, 시지지생모)

믿지 못하겠거던, 밭에 난 농작물을 보소!


조왕 천 7년 기원전 230년, 진나라가 다시 조나라를 공격해 오자 조나라가 이목을 대장으로 사마상(司馬尙)을 장수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나가 출전케 하여 물리쳤다. 이어서 이목은 진나라의 반간계에 걸려 죽임을 당하고 사마상은 장수의 직에서 면직 당했다. 두 사람의 자리는 조총(趙怱)과 제나라 출신의 장수 안취(顔聚)가 대신했다. 이어서 벌어진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조군은 대패하고 조총은 살해되었으며안취는 다른 나라로 도망쳐 버렸다. 조왕 천은 하는 수 없이 진나라에 항복했다.

조왕 천 8년 기원전 229년, 10월 한단은 진나라 땅이 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내가 옛날 풍왕손(馮王孫)에게서 「조왕 천(遷)의 모친은 노래하는 여인으로써 도양왕의 사랑을 받았다. 도양왕은 적자인 가(嘉)를 폐하고 천을 세웠다. 천은 원래 품행이 올바르지 못하고, 아첨하는 말을 믿고 훌륭한 장수 이목을 죽이고 간신 곽개(郭開)를 중용했다.」라고 들었다. 참으로 잘못되지 않았는가? 진나라가 조왕 천을 사로잡자 조나라의 대부들은 대 땅으로 도망쳐 가(嘉)를 왕으로 세우고 6년을 지냈다. 진나라가 군사들이 대 땅으로 진격하여 가의 군사들을 격파했다. 이로써 마침내 조나라는 망하고 진나라의 군현(郡縣)이 되었다.


『조세가 끝』


1)중연(中衍)/ 상나라 때의 전설상의 인물로 황제(黃帝)의 자손이고 대렴(大廉)의 현손(玄孫)이다. 섬진(陝秦)의 조상으로 새의 몸을 하고 사람의 말을 했다. 상나라의 10대 군주인 태무제(太戊帝)를 모셨다.『 새의 몸에 사람의 말을 했다는 『조신인언(鳥身人言)』이라는 말은 실제로 그가 새를 훈련시킨 조련사였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된다.

2)대무제(大戊帝)/ 태무제(太戊帝)라고도 한다. 상나라의 10대 왕으로 태강(太康)의 아들이며 옹기(雍己)의 동생이다. 옹기의 뒤를 이어 은나라 왕위에 올랐으나 당시의 은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태무가 이척(伊陟)과 무함(巫咸)을 차례로 재상에 기용하여 은나라에 치세를 오게하고 국세를 회복했다. 태무는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스려 천명을 공경하고 두려워했으며, 항상 백성들을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 만을 생각하여 감히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지 안했다. 구이(九夷)가 래조하여 조공을 올렸으며 제후들이 귀의함으로써 은나라 왕실은 부흥하였다. 75년 간 재위에 있었으며 시호는 중종(中宗)이다..

3)택고랑(宅皐狼)/ 지금의 산서성 이석현(離石縣)의 옛날 지명이다. 주성왕이 맹증을 총애하여 그를 고랑(皐狼)에 살게 하자 택고랑은 맹증의 호가 되었다.

4)도림(桃林)/ 지금의 하남성 북서 지방의 효산(殽山) 일대의 산악지방을 말한다. 중원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일차 관문인 함곡관(函谷關)이 있는 곳이다.

5)도려(盜驪), 화류(驊騮), 녹이(綠耳) 등은 조보가 얻은 8마리의 말 중세 마리의 말 이름이다. 목천자전(穆天子傳)에 따르면 나머지 말의 이름은 적기(赤驥), 백희(白犧), 거황(渠黃), 유륜(踰輪), 산자(山子) 등이다.

6)다음은 조나라의 선조인 조보(造父)가 도림(桃林)에서 얻은 팔준마(八駿馬)에 대한 내력이다.

『조보가 과보산(夸父山)에서 얻은 야생마를 길들여 목왕에게 바쳤다. 이 야생마가 그 유명한 주목왕의 팔준마(八駿馬)이다. 이 야생마는 원래 주무왕(周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고 천하를 평정한 후에 화산(華山)의 과보산에 풀어 놓은 전마(戰馬)가 낳은 말들인데 예전의 훌륭한 혈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조보는 수레를 잘 몰 뿐만 아니라 말을 길들이는 데에도 뛰어났다. 팔준마는 조보가 야생마를 길들인 명마들이었다. 이 팔준마의 이름은 도려(盜驪), 화류(驊騮), 녹이(綠耳), 적기(赤驥), 백희(白犧), 거황(渠黃), 유륜(踰輪), 산자(山子)였다. 팔준마는 땅을 밟지 않고 달렸으며 하늘을 나는 새보다 더 빠르고, 하룻밤 사이에 만리를 달렸다. 또 어떤 말은 등에 날개가 달려 있어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닐 수가 있었다.』

7)서왕모(西王母)/ 산해경에 서왕모는 『표범의 꼬리에, 호랑이의 이빨, 쑥대머리에 비녀를 꽂은 채 전염병과 형벌을 관장하는 무시무시한 신의 모습』(西王母, 其狀如人, 豹尾, 虎齒, 蓬髮, 霍然白首. 石城金穴, 居其中.“을 하고 있다고 했다.

8)서언왕(徐偃王)/ 서주 때 서이(西夷) 족의 왕이고 영성(嬴姓)이고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주목왕(周穆王) 때 그는 지금의 안휘성, 강소성(江蘇省)의 회수(淮水) 일대 오백여 리를 점령하고 인의(仁義)로써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의 인심을 샀다. 이어서 주위의 30여 제후국의 옹립을 받아 왕이 되었다. 이어서 주궁(朱弓)과 적시(赤矢)를 얻어 스스로 하늘의 서기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언왕(偃王)이라고 칭했다. 주목왕이 서쪽으로 순수를 나가 오랫동안 나라를 비운 틈을 타서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서쪽으로 나가 하수의 강변에 이르렀다. 주목왕이 나라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전해 듣고 수레를 휘몰아 돌아와 초나라와 연합하여 서안왕을 공격했다. 서언왕은 주나라 군사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싸움 중에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서언왕은 싸움에서 패하자 도망쳐 동해의 섬으로 들어가 성을 쌓고 그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또한 한비자 오두(五蠹) 편에 『 춘추 때 서국의 군주로 국세가 비록 강성했지만 오로지 문덕에만 힘쓰고 무력을 도외시 하여 결국은 초문왕(楚文王)에게 나라를 뺏기고 자신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9)곽(霍)/현 산서성 곽현(霍縣). 산서성을 관통하고 있는 분수(汾水) 중류의 강안 도시다. 춘추 초기 문왕의 아들 곽숙처(霍叔處)가 봉해진 고을이다.

위(魏)/지금의 산서성 예성(芮城) 경내. 하수의 하곡부(河曲部) 북안에 있었다. 헌공(獻公)을 모시던 필만(畢萬)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봉해져 후에 당진을 삼분하여 전국칠웅 중의 한 나라가 된 위(魏)나라의 발흥지다.

경(耿)/ 지금의 산서성 하진현(河津縣) 동남에 있었던 서주와 춘추 때 소제후국. 기원전 601년 당진에 의해 멸망했다.

10)장구여(廧咎如)/ 춘추전국 시대 때 이민족 이름으로 지금의 하남, 산서, 하북 세 성의 경계지역인 임주시(林州市) 경내에 있었다. 후에 당진에 편입되었다.

11)이 기사는 춘추좌전(春秋左傳)의 내용과 틀리다. 중이가 환국하여 당진(唐晉)의 군주가 되자, 19년 동안 자기를 따라 다니며 보필한 공로로 자기의 딸인 조희(趙姬)를 조쇠에게 주어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조동(趙同) 등의 세 사람이라고 했다. 중이는 적국(翟國)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적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딸 각 한 명씩을 낳았다. 후에 아들은 중이의 뒤를 이어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른 양공(襄公)이며 딸은 조쇠에게 시집보낸 조희(趙姬)다. 결국은 조쇠는 처조카와 결혼해서 산 셈이다. 된다. 열국연의는 좌전의 내용을 따랐다.

12)원(原)/지금의 하남성 제원현(濟源縣) 북쪽 약 10키로 지점. 주나라 대부 원백(原伯) 관(貫)의 봉지이다.

13)시미명(示未明)을 말한다. 그 자세한 내용은 사기(史記) 당진세가 영공 14년 조에 실려있다. 사기 진세가의 내용은 여러 날을 굶어 아사 직전에서 살아나 그 보답으로 영공이 기르던 맹견을 죽여 조돈을 구했다.

14)중원 쟁패를 위해 당진과 초나라가 정나라를 사이에 두고 싸운 필성(邲城)의 싸움을 말한다. 기원전 597년 초장왕이 이끌던 초군과 순림보(荀林父)가 이끌고 있던 당진군 사이에 정나라 형양성(滎陽城) 북쪽의 황하 연안 필(邲)의 땅에서 벌어진 싸움이다. 중군부수 선곡(先穀)과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전(趙旃) 등의 강경파가 순림보의 명령을 듣지 않고 초나라와 전투를 시작하여 싸움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으나 그에 대한 대책을 미처 세우지 못한 당진군은 대패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초장왕은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고 춘추오패 중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연의(演義) 제 54회 참조) 필(邲)은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 북쪽 황하 남안에 있던 고을이다.

15)대업(大業)/섬진 선조의 한 사람으로 전설상의 인물이다. 오제(五帝) 중의 한 사람인 전욱(顓頊)의 후손으로 여수(女修)의 아들이다. 전설에 『 여수가 베를 짤 때 검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고 날아가 버리자 여수가 이 알을 받아먹고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다』고 했다『진본기』. 일설에 의하면 대업은 고도(皐陶)를 가리킨다고 했다.

고도(皐陶)/순임금 때 동이족(東夷族)의 수령으로 형법을 관장하는 벼슬을 지냈다. 백성들은 모두가 그의 공평한 법 집행에 복종했다. 후에 우(禹)임금이 황하의 치수 공사를 할 때 도와 공을 세워 그에게 하나라의 임금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우임금보다 먼저 죽어 전할 수 없었다. 우임금은 그의 후손들을 영(英 : 지금의 호북성 영산(英山) 동북), 육(六), 허(許 : 지금의 하남성 허창시 부근) 등에 봉했다.

16)제최(齊衰)/ 거친 삼베로 지은 상복을 말한다.

17)제읍(祭邑)/ 제사를 지내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지정한 고을.

18)삼극(三郤)/ 세 사람의 극씨 성을 가진 대부로써 극기(郤錡), 극주(郤犨), 극지(郤至) 등의 세 사람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당진세가(唐晉世家) 참조.

19)연릉계자(延陵季子)/오왕 수몽(睡夢)의 넷째 아들 계찰(季札)을 말한다. 원래 수몽이 그의 왕위를 막내인 계찰에 전하려고 했으나 계찰이 받지 않자 수몽은 죽을 때 오나라의 왕위를 전하지 말고 형제 상속을 하라고 했다. 오왕의 자리가 형제들 끼리 전해져 결국은 계찰의 차례가 되었으나 그는 끝내 오왕의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러자 오왕 자리는 셋째인 여매(餘昧)의 아들인 왕료(王僚)에 전해졌다. 이에 수몽의 첫째 아들인 제번(諸樊)의 상속자였던 합려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오자서의 도움으로 왕료를 죽이고 오왕의 자리에 올랐다. 연릉은 지금의 강소성 상주시(常州市)로 계찰의 봉지이다. 제후연표(諸侯年表)와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의하면 계찰이 중원의 제후국에 사신으로 방문한 해는 2년 후인 당진의 평공 14년인 기원전 544년이라 했다.

20)조무자(趙武子)/조문자(趙文子)의 잘못이다. 문자(文子)는 조무(趙武)의 시호이다.

21)한선자(韓宣子)/ 한기(韓起)의 시호(諡號)이다. 당진의 도공(悼公)7년 기원전 566년 당진의 정경(正卿)으로 임명되었다. 그 봉읍을 지금의 하남성 심현(沁縣)으로 옮겨 그 땅을 기반으로 삼아 한씨 종족들의 세력을 키웠다. 기원전 514년인 당진의 경공(頃公) 12년에 죽었다.

22)위헌자(魏獻子)/ 당진의 정경을 지낸 위서(魏舒)의 시호(諡號)다. 위강(魏絳)의 손자 당진의 평공(平公) 때 대부로 봉해져 란영(欒盈)과 친교가 깊었다. 후에 당시의 집정자 범선자( 범개(范匃)의 시호)에게 쫓겨난 란영(欒盈)이 위강의 지지를 믿고 군사를 일으켜 당진의 도성인 강성(絳城)을 공격했으나 범앙의 위협을 받은 위헌자의 배신으로 인해 성공하지 못하고 란씨 일족은 멸족을 당했다. 진평공 17년 기원전 541년 당진의 장군이 되어 순오(荀吳)와 함께 태원(太原)의 적인(狄人)이 세운 무종국(無終國)을 공격했다. 그는 이 싸움에서 험준한 지형으로 인하여 당시까지 싸움의 기본방식이었던 전차전을 폐하고 보병을 위주로 전투방식을 채용했다. 싸움 중에 순오(荀吳)의 가신 중의 한 사람이 그의 총애를 믿고 교만한 행동을 하자 그 자를 잡아 참수형에 처하여 군사들에게 군법의 엄함을 보인 후에 무종국의 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후에 당진의 육경(六卿)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소공(昭公)과 경공(頃公)을 모셨다. 기원전 514년 당진의 경공 12년에 한선자(韓宣子)의 뒤를 이어 정경(正卿)이 되어 공족 출신의 기(祁) 와 양설(羊舌) 씨를 멸하고 두 집안 소유의 봉읍 10개를 현으로 바꾼 다음 위무(魏戊)를 포함한 서자 출신 10명의 현인을 그 고을의 대부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경공의 뒤를 이은 정공(定公) 때 죽었으나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23)숙향(叔向)/춘추 때 당진국의 정경. 희성(姬姓)에 양설씨(羊舌氏)이고 이름은 힐(肹)이다. 숙향(叔向)은 그의 자이며 숙향(叔嚮)이라고도 한다. 봉읍은 지금의 산서성 홍동현(洪洞縣) 경내의 동남에 있었던 양(楊)이었다. 그래서 그를 양힐(楊肹)이라고도 불렀다. 당진의 무공(武公)의 자손인 양설대부(羊舌大夫) 돌(突)의 후예이다. 당진의 도공(悼公) 말년에 태자 표(彪)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태자 표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르자 그의 직급은 상대부로 오르고 태부가 되어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24)주경왕 16년 기원전 504년에 일어난 왕자 조(朝)의 란을 말하는 것이다. 주경왕(周敬王)은 경왕(景王 : 재위 기원전 544-520년)의 아들로 도왕(悼王)과 동복 형제이며 왕자 조(朝)는 경왕(景王)의 서장자(庶長子)다. 경왕 말년에 경왕(景王)이 왕자 조를 사랑하여 태자로 세우려 하다가 갑자기 죽어 도왕(悼王)이 주왕의 자리에 올랐다. 왕자 조(朝)가 도왕을 살해하자 경왕(敬王)이 그 자리에 앉았으나 왕자 조에 의해 쫓겨나 지금의 낙양시 교외의 적천(狄泉)으로 도망쳐 동왕(東王)이라고 칭하고 왕자 조는 왕성(王城)으로 들어가 서왕(西王)이라고 칭하며 대립했다. 이에 조앙(趙鞅)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왕자 조를 죽이고 경왕(敬王)을 천자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25)동안우(董安于)/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96년에 죽었다. 춘추 말기 때 당진 사람으로 조간자(趙簡子) 앙(鞅)의 가신이다. 당진의 육경이 서로 정권을 다툴 때 중행씨(中行氏)와 범씨(范氏)가 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미리 알고 조간자에게 충심으로 그에 대한 방비를 하도록 권했다. 조간자는 동안우의 말을 듣지 않았다. 후에 과연 두 종족이 연합하여 란을 일으켜 조씨들을 공격했다. 후에 지백(知伯)이 동안우의 지혜를 높이 사 그의 문하로 데려오기 위해 그에게 압력을 가하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6)공손지(公孫枝)/당진(唐晉) 공실의 먼 친척으로 섬진(陝秦) 공자집(公子縶)의 추천을 받아 섬진의 목공(穆公)에게 출사했다. 자(字)는 자상(子桑)이다. 백리해(白里亥)를 목공에게 천거하였고 후에 백리해의 뒤를 이어 섬진의 재상을 지낸 사람이다. 연의(演義) 제25회 내용 참조.

27)자여씨(子與氏) 삼형제/섬진의 목공 때 재상을 지낸 차씨(車氏) 삼형제인 엄식(奄息), 중행(仲行), 침호(鍼虎)를 말한다. 섬진의 어진 신하들로 삼량(三良)이라고 칭해졌다. 목공이 죽을 때 차씨 삼형제를 포함한 섬진의 대소 신료들 170명을 순장시켜 이후로 섬진은 국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300여 년 후인 효공 때 상앙이 등장할 때까지 중원의 패권 싸움에 끼워들 수 없게 되었다. 차씨 삼형제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한 시가가 『시경(詩經) 진풍(秦風)』에 『황조가(黃鳥歌)』라는 제목으로 올려져 있다.

28)오세(五世)/ 당진의 헌공(獻公), 해제(奚齊), 도자(卓子), 혜공(惠公), 회공(懷公)을 말한다. 해제는 여희(驪姬)의 소생이고, 도자는 여희의 동생인 소희(小姬)의 소생으로 모두 헌공의 어린 아들들이다. 헌공이 죽자 두 사람은 모두 대부 리극(里克)에게 살해당했다. 그 뒤를 이은 혜공은 이오(夷吾)을 말하며, 회공은 혜공의 아들이다. 후에 패자가 된 문공(文公) 중이(重耳)에 의해 살해당했다.

29)균천(鈞天)/ 하늘의 정 중앙으로 상제가 머문 곳으이다.

30)광락(廣樂)/천상(天上)의 음악으로 매우 성대한 음악을 지칭하는 말이다.

31)조간자가 꿈속에서 활을 쏘아 죽인 웅비(熊羆) 즉 곰과 말곰은 당진의 6경 중 범씨와 중행씨들의 토템으로 후에 벌이전 권력투쟁에서 두 가문은 조간자에 의해 몰락한다는 것을 말한다..

32)범괴(范魁)/ 전국 때 조나라 성읍이나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다.

33)조씨(趙氏)는 원래 섬진(陝秦)을 세운 진족(秦族)의 지족이다. 조씨의 선조인 조보(造父)는 주나라 목왕의 마부가 되어 서언왕(徐偃王)의 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지금의 산서성 홍동현(洪洞縣) 북쪽의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들의 시조가 되었다. 여기에서 영씨(嬴氏)란 조씨들을 지칭하며 범괴(范魁)에서 주인들을 크게 무찌른다는 말은 기원전 372년 조성후(趙成侯)가 주나라와 동성인 희씨(姬氏)의 위(衛)나라 땅을 모두 빼앗아 그 영토로 삼는다는 말을 의미한다.

34)이경(二卿)/ 원래 당진은 여섯 가문의 수장으로 구성된 육경(六卿)에 의해 다스려 졌다. 여섯 가문이란, 지씨(知氏), 중행씨(中行氏), 조씨(趙氏), 위씨(魏氏), 한씨(韓氏) 및 범씨(范氏)를 말한다. 기원전 497년 중행인과 범길석이 연합하여 조씨를 공격했으나 공실의 지원을 받은 조씨의 반격으로 두 가문은 망하고 그 땅은 남은 네 가문이 나눠 가졌다. 여기서 이경(二卿)이란 중행인과 범길석을 말한다. 이어서 기원전 453년 진양성(晉陽城) 싸움에서 한(韓), 위(魏), 조(趙) 삼가가 연합하여 제일 강력했던 지씨를 멸하고 당진을 삼분하여 나누어 가짐으로써 전국시대가 열렸다.

35)진양성 싸움에서 멸한 지백(知伯)이 거느린 지씨 종족들과, 대국(代國)을 말한다.

36)오랑캐의 복장/ 호복기사(胡服騎士)를 말하며,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 : 재위 기원전 325-298년)은 기마병들에게 호복을 입혀 이후에 벌어진 싸움에서 기병(騎兵)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어 전쟁의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37)고포자경(高布子卿)/ 성은고포이고 이름은 자경인 정나라 출신의 유명한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다.

38)조직(趙稷)은 조오의 아들이고 섭빈은 조오의 가신이다.

39)위양(魏襄)/ 춘추 말기 당진의 육경을 지낸 위치(魏侈)의 시호다. 위헌자(魏獻子) 위서(魏舒)의 아들이다. 당진의 육경이 되어 정공(定公)을 받들었다. 그가 정경(正卿)이 되었을 때 범길석과 사이가 벌어져 순력(荀躒) 및 한불신(韓不信) 등과 함께 정공의 명을 받들어 범씨와 중행씨를 공격하여 쫓아냈다. 그는 진양으로 달아난 조앙(趙鞅)의 지위를 다시 돌려주도록 정공에게 청했다. 그 후로 당진의 정권은 지씨(知氏), 조씨(趙氏), 한씨(韓氏), 위씨(魏氏) 등의 네 가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40)양영보(梁嬰父)/ 춘추 말기 당진의 대부. 진정공(晉定公) 때 육경(六卿)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지문자(知文子) 순력(荀躒)의 총신(寵臣)이다. 지문자가 중행씨를 대신하여 그를 육경에 임명하기 위해 기원전 497년 한(韓)과 위(魏) 두 종족을 거느리고 범씨와 중행씨를 축출했다. 그는 조씨들의 모신(謀臣)인 동안우(董安于)와 사이가 벌어져 지문자(知文子)로 하여금 조씨들에게 압력을 가해 동안우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41)범고역(范皐繹)/범길석(范吉射)의 서자(庶子)로 좌전(左傳)에는 그 이름이 고이(皐夷)라고 되어 있다.

42)순력(荀躒)/ 지백(智伯), 지력(智躒)이라고 부르며 시호는 지백문자(智伯文子), 혹은 문백(文伯)이다. 주경왕(周景王:재위 기원전 544-519년)이 죽고 그의 여러 아들들이 난립하여 왕위를 서로 다투자 당진이 개입하여 왕자 개(丐)를 주경왕(周敬王)으로 세웠다. 경왕이 당진(唐晉)에서 주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본국에 있던 왕자 조(朝)가 스스로 주왕의 자리에 오르자 경왕은 주나라로 들어가지 못했다. 진경공(晉頃公) 10년 기원전 516년 경공(頃公)의 명을 받고 조앙(趙鞅)과 함께 주경왕(周敬王)을 호송하여 주왕의 자리에 앉혔다.

43)한불영(韓不佞)/ 한불신(韓不信)의 다른 이름이다. 시호는 한간자(韓簡子)다.

44)백인(栢人)/지금의 하북성 융요현(隆堯縣) 서쪽에 있었던 당진의 성읍.

45)황지(黃池)/ 지금의 하남성 봉구현(封丘縣) 서남 쪽에 있었던 고을.

46)지백(智伯)/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53년에 죽었다. 춘추 말 당진의 정경으로 희성(姬姓)에 순씨(荀氏)고 이름은 요(瑤)다. 순앵이 후에 지(智)에 봉해졌기 때문에 성을 지씨로 바꾼 것이다. 지무자(智武子) 순력(荀躒)의 손자에 지선자(智宣子) 지서오(智徐吾)의 아들이다. 진출공(晉出公) 즉위 초에 서오의 뒤를 이어 당진의 정경 자리에 올라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나가 제나라와 정나라를 공격하고, 이어서 중산국(中山國)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기원전 458년 그는 조씨, 한씨, 위씨의 삼가와 연합하여 범씨와 중항씨(中行氏)를 공격하고 그들의 땅을 자기의 봉읍으로 삼았다. 다시 출공을 공격하여 나라 밖으로 쫓아내고 소공(昭公)의 증손인 희교(姬矯)를 다시 세웠다. 이가 진애공(晉哀公)이다. 그는 당진의 국정을 혼자 전횡했으며 대신들을 회롱하고 모욕을 가했다. 후에 한, 위, 조 삼가에게 그들의 땅을 요구하자 한과 위 양가는 그 청을 받아들여 만호에 해당하는 성을 바쳤다. 그러나 조씨들만은 그의 요청을 거절하자 지백은 노하여 한과 위 양가와 힘을 합쳐 조씨들의 근거지인 진양성(晉陽城)을 공격했다. 일 년이 넘어도 진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지백은 강물을 끌어들여 물에 잠기게 했다. 조씨들의 가신 장맹담(張孟淡)이 한과 위 양가의 종주들을 설득하여 삼가가 연합하여 지백에게 반격을 가했다. 지백은 싸움에서 지고 조씨들의 종주인 조양자에게 살해되었다.

47)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부차를 죽인 해는 정공(定公) 37년 기원전 473년이고 조양자 원년은 출공(出公) 17년으로 기원전 457년이다. 윗 단의 기사에 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부차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다시 이 해에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쳐들어가고 초륭이라는 사자를 보내 오왕을 위로했다고 한 것은 사마천의 잘못이다.

48)하옥산(夏屋山)/ 지금의 산서성 대현(代縣) 동북쪽으로 뻗어 있는 항산(恒山) 남쪽에 있었던 산 이름.

49)마계산(摩笄山)/ 지금의 하북성 탁록현(涿鹿縣) 동쪽에 있던 산이름이다. 탁록은 북경시 서북 쪽에 있다.

50)왕택(王澤)/지금의 산서성 신강현(新絳縣) 서남의 지명이다.

51)임호(林胡)/고대의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의 이름으로 춘추 때 지금의 산서성 삭현(朔縣) 일대에 분포되어 살았다. 전국 때는 연나라 북쪽 즉 하북성 북쪽으로 옮겨 살았다. 전국 말 때 조나라의 명장 이목(李牧)에 의해 점령당하고 조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52)휴혼(休溷)/지금의 산서성 개휴현(介休縣) 및 이석현(離石縣) 일대를 말한다.

53)제맥(諸貊)/ 고대 중국 북방에 거주하던 맥족(貊族)의 여러 지파를 말한다. 산서성, 하북성, 내몽고 일대의 융(戎), 적(狄), 임호(林胡)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54)삼판(三版)/판은 옛날 고대의 축성할 때 쓰던 널빤지로 일종의 거푸집에 해당한다. 한 판은 2자에 해당하며 3판은 6자이다.

55)공동씨(空同氏)/ 공동씨(空桐氏)라고도 하며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평량시(平凉市) 서쪽의 성탕(成湯)의 후손이 세운 국가로, 『은본기(殷本紀)』에 따르면 『설(契)에게 자성(子姓)을 하사하고, 그 후손을 봉하고 나라 공동씨를 나라이름으로 삼았다』라는 기사가 있다.

56)중모(中牟)/ 지금의 하남성 탕음현(湯陰縣) 서남

57)중산(中山)/ 지금의 하북성 정현(定縣)과 당현(唐縣) 일대에 있었던 이족(夷族)인 백적족(白狄族)이 세운 제후국으로써 위문후(魏文侯) 17년 기원전 408년 위나라의 장수 악양(樂陽)에 의해 멸망하고 그 영토는 위나라에 편입되었으나 후에 중산국의 후손들이 원래의 위치에서 서쪽인 지금의 하북성 평산현(平山縣) 경내인 영수(靈壽)라는 곳에 나라를 다시 세웠으나 후에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에 의해 조혜왕(趙惠王) 3년 기원전 296년에 완전히 멸망 당하고 그 영토는 조나라에 편입되었다.

58)평읍(平邑)/ 지금의 하남성 남락현(南樂縣) 동북

59)파오군(番吾君)/ 파오(番吾)에 봉해진 대부의 봉호로 지금의 하북성 평산현(平山縣) 동북쪽에 있던 고을의 이름이다.

60)사(師)/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관직이름. 사씨(師氏)의 약칭이다.

61)중위(中尉)/ 전국 때 조나라가 처음 설치한 관직 이름. 인재를 발굴하여 천거하는 일을 맡았다. 진(秦)나라 때 구경(九卿)의 하나가 되었다가 한나라가 이어받았다. 수도의 치안을 관장하고, 한나라 때는 수도 방위군의 북군을 관장했다. 한무제 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 집금오(執金吾)로 개명되었다.

62)서주(西周) 때 시작된 관직의 이름으로 궁중내의 간책(簡冊)을 관리하고 제후와 경대부들의 임면에 관한 왕명의 출납을 관장했다.

63)영구(靈丘)/ 지금의 산동성 고당현(高唐縣) 남쪽

64)름구(廩丘)/ 전국 때 제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운성현(鄆城縣) 서북 쪽에 있었다.

65)토대(兎臺)/전국 때 조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대명현(大名縣) 동쪽에 있었다.

66)강평(剛平)/ 전국 때 조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영양현(寧陽縣) 동북쪽에 있었다.

67)극포(棘蒲)/ 위(魏)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위현(魏縣) 경내에 있었다. 하북성 조현(趙縣)이라는 설도 있다(사기정의)

68)황성(黃城)/전국 때 위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내황현(內黃縣) 경내에 있었다.

69)방자(房子)/조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고읍현(高邑縣) 서남쪽에 있었다.

70)중인(中人)/전국 때 중산국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당현(唐縣) 서남쪽에 있었다.

71)인(藺)/ 지금의 산서성 이석현(離石縣) 서쪽에 있었던 고을.

72)고안(高安)/ 사기정의에 하동(河東)을 말한다 했으나 상세한 지명은 불명이나 일설에 의하면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永濟縣) 포주진(蒲州鎭)이라고 한다.

73)견(鄄)/ 전국 때 위(衛)나라 땅이었다가 후에 제나라에 병합되었다.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鄄城縣) 북구성(北舊城)에 있었다.

74)회(懷)/ 전국 때 정나라 땅. 후에 위(魏)나라 땅이 되었다. 지금의 하남성 무척현(武陟縣) 서남쪽에 있었다.

75)장자(長子)/지금의 산서성 장자현(長子縣) 서남쪽에 있었던 고을.

76)탁택(濁澤)/ 위(魏)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서성 운성현(運城縣) 서쪽에 있었다.

77)아하(阿下)/아(阿)는 제나라의 동아(東阿)를 가르키는 말이다.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東阿縣)을 서남쪽에 있었다.

78)견(甄)/ 위(衛)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甄城縣) 북쪽에 있었다.

79)석아(石阿)/ 『진본기(秦本紀)』와 『육국연표(六國年表)』에 석문(石門)으로 되어 있다. 석아(石阿)는 석문의 잘못이다. 지금의 산서성 습현(隰縣) 북쪽에 있었다.

80)소량(少梁)/ 지금의 산서성 한성시(韓城市)를 말한다.

81)서장(庶長)/ 진나라의 20작위 중의 하나를 말하나 서장에 해당하는 직급에는 10등급의 우서장(右庶長), 11등급의 좌서장(左庶長), 18등급의 대서장(大庶長)이 있어 서장이라는 말로서는 어느 직급에 해당하는 지 알 수가 없다.

82)공숙좌(公叔痤)/상군열전에 나오는 인물로 공손좌(公孫痤)라고도 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위혜왕 10년인 기원전 361년에 죽었다. 성은 희(姬)이고 씨는 위(魏)이고 이름은 좌(痤)이다. 위나라 공족 출신으로 위무후(魏武侯) 때 전문(田文)의 뒤를 이어 위나라 재상이 되었다. 왕착(王錯)과 함께 오기(吳起)를 모함하여 오기가 초나라로 달아나게 했다. 위혜왕 8년 기원전 362년 그는 위나라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회수(澮水) 북안에서 한(韓), 조(趙) 두 나라의 연합군을 대파하고 조나라 땅으로 진공하여 피뢰(皮牢)의 땅을 점령했다. 같은 해 진나라가 위나라 땅인 소량(少梁)을 공격해 오자 공손좌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출전하여 싸웠으나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후에 진나라로부터 석방되어 돌아와 위나라의 재상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공손앙(公孫鞅= 商鞅)은 오래 전부터 그의 문객이었다. 그가 병이 들어 눕게 되자 위혜왕이 찾아와 그의 후임을 물었다. 공손좌는 자기의 후임으로 공손앙을 추천하고 다시 말하기를 그를 쓰지 않을 경우는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할 것이라고 진언했다. 양혜왕은 공손앙을 쓰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후에 진나라로 들어간 공손앙에 의해 위나라의 서쪽 땅을 빼앗겼으며 그 여파로 위나라의 도성을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겨야 했다. 대량(大梁)은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이다.

83)회수(澮水)/산서성 익성현 동남쪽에서 발원, 서쪽으로 흐른 다음 신강시(新絳市)에서 합쳐지는 분수(汾水)의 지류.

84)피뢰(皮牢)/지금의 산서성 익성현(翼城縣) 동북쪽에 있었던 고을 이름.

85)단지(端氏)/지금의 산서성 심수현(沁水縣) 동북에 있었던 고을 이름.

86)갈얼(葛孽)/ 지금의 하북성 비향현(肥鄕縣) 서남쪽에 있었던 고을 이름.

87)평륙(平陸)/ 지금의 산동성 문상현(汶上縣) 북

88)아(阿)/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동(東)

89)둔류(屯留)/ 지금의 산서성 둔류현(屯留縣) 남쪽

90)음진(陰晉)/위(魏)나라 땅으로 섬서성 화음현(華陰縣) 동남

91)대릉(大陵)/ 지금의 산서성 문수현(文水縣) 동북의 대릉촌(大陵村)을 말한다.

92)상구(桑丘)/지금의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북쪽.

93)사과(司過)/ 군주의 과실을 지적해 주는 임무를 맡은 관리를 말한다.

94)삼로(三老)/① 노인을 연령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눈 것을 말한다. 100세 이상은 상수(上壽), 90세 이상은 중수(中壽), 80세 이상은 하수(下壽)라 하여 삼로라고 칭했다. ② 나이가 들어 관직에서 퇴임한 원로대신들을 말한다. ③나라 안의 덕이 높고 명망이 있는 노인을 칭한다.

95)호(鄗)/ 지금의 하북성 백향현(白鄕縣) 북쪽.

96)구서(區鼠)/지금의 하북성 대명현(大名縣) 동북.

97)관택(觀澤)/ 지금의 산동성 양곡현(陽谷縣) 서남으로 하남성(河南省) 및 하북성(河北省)과의 접경지역 부근이다.

98)중도(中都)/ 지금의 산서성 평요현(平遙縣) 서남쪽.

99)서양(西陽)/ 중양(中陽)을 말한다. 지금의 산서성 중양현(中陽縣) 동쪽.

100)구문(九門)/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 동북 20키로.

101)각주 64번 참조

102)무궁(無窮)/ 설이 확실치 않으나 무종(無終)을 칭하며 춘추 때 산융(山戎)이 세운 나라 이름이라고 했다. 원래 지금의 천진시 계현(薊縣)에 있었으나 후에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 북쪽 숭례현(崇禮縣) 일대로 옮겼다고 했다.

103)황화산(黃華山)/ 지금의 하남성 임현(林縣) 서쪽에 있던 산이름이라고 하나 무령왕이 오른 산을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04)누완(樓緩)/ 전국 때 조나라 공족 출신의 귀족으로 조나라의 무령왕이 호복의 도입을 추진하려고 하자 조나라의 모든 대신들은 반대했으나 오직 그만이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기원전 306년 조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망명했다. 소양왕(召襄王)은 그를 진나라의 상국으로 임명했으나 2년 만에 면직되었다.

105)장수(漳水)/ 지금의 하남성과 하북성의 경계로 삼고 있는 장하(漳河)를 말한다. 모두가 산서성 동남부에 발원하는 탁장하(濁漳河)와 청장하(淸漳河) 두 지류가 있다.

106)부수(滏水)/ 하북성 자현(磁縣) 서쪽의 팽성진(彭城鎭) 부산(滏山)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장수(漳水)와 합류하는 강 이름. 조나라의 도성 한단성을 방어하기 위한 장성은 장수와 부수 사이에 있었다.

107)곽랑(郭狼)/택고랑(宅皐狼)의 다른 이름으로 지금의 산서성 이석현 일대를 말한다.

108)임(荏)/지금의 하북성 임현(林縣) 동남

109)夫有高世之功者, 負有俗之累; 唯獨智之慮者, 任傲民之怨

110)疑事無功, 疑行無名

111)夫論至德者不和于俗, 成大功者不謀于衆

112)묘인(苗人)/삼묘족(三苗族)을 말한다. 중국 고대에 지금의 하남성 남부에서 호남성 동정호 및 강서성의 파양호 일대에 분포하여 살았던 이민족 이름으로 순임금때 삼위(三危) 일대로 옮겨 살았다. 삼위에 대한 위치 비정은 지금의 감숙성 돈황 등 많은 설이 있다.

113)나국(裸國)/ 옛날 남만의 이민족이 세운 나라 이름으로 후한서 동이전(東夷傳)에 주유(侏儒)가 동남쪽으로 배를 타고 일년을 가니 나국(裸國)이 있다고 했다. 주유(侏儒)라는 말은 키가 아주 작아 주로 잡기(雜技)를 펼칠 수 있는 예인(藝人)을 말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단구(短軀)의 곡예사를 칭한다.

114)愚者闇成事, 智者睹米形

115)狂夫之樂, 智者哀焉; 愚者所笑, 賢者察焉.

116)조성(趙成)/조성후(趙成侯)의 아들이며 무령왕(武靈王)의 숙부이다. 당시 조나라의 귀족들의 신망을 받았다. 무령왕이 호복기사를 채용하려고 하자, 처음에는 반대를 하다가 무령왕이 대의를 밝혀 설득하자 지지로 돌아서며 개혁이란 순리에 따라 행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조성은 무령왕이 조왕의 자리를 차자인 혜문왕(惠文王) 하(何)에게 전하자 폐출된 공자 장(章)이 불복하여 마음속으로 반심을 품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윽고 혜문왕 4년 공자 장(章)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자 이태(李兌)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나가 반란군을 진압했다. 공자 장이 싸움에서 패하고 무령왕이 기거하고 있던 궁궐로 몸을 피하자 군사를 궁궐 안으로 진입시켜 장을 잡아서 죽이고 궁궐의 포위를 풀지 않아 무령왕을 굶어 죽게 만들었다. 스스로 상국이 되어 조나라의 국정을 담당했다. 호는 안평군(安平君)이다.

117)구월(甌越)/ 지금의 절강성(折江省) 및 복건성(福建省) 일대에 분포되어 살었던 중국 고대의 이민족 이름.

118)窮鄕多異, 曲學多辯

119)박락(薄洛)/ 지금의 하북성 광종현(廣宗縣) 서북으로 흐르던 장수(漳水)의 나룻터인 박락진(薄洛津)을 말한다. 광종현은 한단히 동북 약 30키로에 있다. 여기서는 장수(漳水)를 말한다.

120)상당(上黨)/ 지금의 산서성 화순현(和順縣)과 유사현(楡社縣) 일대에 설치했던 조나라의 군현 이름이다. 남쪽으로는 한나라가 설치한 상당군과 접했다. 관하에 24개의 현을 거느렸다.

121)삼호(三胡)/ 임호(林胡), 누번(樓煩), 동호(東胡)의 중국 북방에서 살던 이민족을 통틀어 칭하는 말이다.

122)호성(鄗城)/ 지금의 하북성 백향현(柏鄕縣) 북쪽에 있던 고을로 춘추 때 당진(唐晉)의 영토였다가 전국 때 조나라의 무령왕이 그의 재위 3년 때 되는 해에 이 곳에 성을 축조했다. 진나라 때 호현(鄗縣)을 설치했다가 한나라가 그대로 따랐다.

123)복희(虙羲)/삼황오제(三皇五帝) 중의 한 사람으로 복희(伏羲), 포희(庖犧), 태호(太昊)라고도 한다. 여동생인 여와(女媧)와 혼인하여 인류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는 음양 변화의 원리를 터득하여 주역의 시초가 된 팔괘(八卦)를 만들었고, 거미가 거미줄로 집을 짓는 모습을 모고 어망을 처음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다. 또한 숲 속에서 번개가 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불을 인간에게 전해주어 이를 이용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전했다. 금(琴)과 슬(瑟)의 악기를 만들었다 했다. 화서씨(華胥氏)의 딸이 뇌택(雷澤) 속에 남아 있던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하여 낳은 아이가 복희라 했다.

124)신농(神農)/ 삼황오제 중의 한 사람으로 염제(炎帝)다. 사람의 몸에 머리는 소나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농업과 양잠(養蠶), 상업, 의약(醫藥)을 가르쳤고 오현금(五絃琴)을 발명했다.

125)추(鄒)나라는 맹자의 나라이고, 노나라는 공자의 나라이다. 즉 유독 이 두 나라는 옛날 정해진 예법만을 중시했던 나라라고 한 것이다.

126)以書御者不盡馬之情, 以古帝制今者不達事之變

127)徇法之功 不足以高世, 法古之學 不足以制今

128)영가(寧葭)/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 서북쪽

129)유중(楡中)/ 지금의 황하 서안의 섬서성 동북부 일대

130)원문은 조여지형(趙與之陘)으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趙)를 문장 바로 앞의 조희(趙希)로는 경우, 여(與)는 (여러 군사들과) 『더불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조왕(趙王) 즉 무령왕으로 보는 경우는 여(與)는 『주다』 즉 조왕이 (통과해야 할 골짜기를) 『지정해 주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형(陘)은 골짜기라는 뜻 외에 형산(陘山)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형산은 지금의 하북성 상산(常山)의 정현(井縣)을 가리킨다.

131)곡양(谷陽)/ 지금의 하북성 곡양현(谷陽縣) 서사하(西沙河) 동쪽

132)단구(丹丘)/ 지금의 하북성 곡양현(谷陽縣) 서북

133)화양(華陽)/ 지금의 하북성 당현(唐縣) 서북쪽의 항산(恒山) 일대를 말한다.

134)원문은 치지새(鴟之塞)다. 화양의 북쪽에 세운 요새를 말한다. 홍상새(鴻上塞)라고도 한다.

135)석읍(石邑)/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 서북 쪽

136)봉룡(封龍)/ 지금의 하북성 원지현(元氏縣) 경내에 있었던 산이름으로 비룡산(飛龍山)이라고도 한다.

137)동원(東垣)/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 경내의 동북 쪽

138)운중(雲中)/ 지금의 내몽고 탁극탁현(托克托縣) 일대를 말한다.

139)구원(九原)/ 지금의 내몽고 포두시(包頭市) 일대를 말한다.

140)부시(膚施)/ 지금의 섬서성 유림현(楡林縣) 남쪽

141)仁者愛萬物而智者備禍于未形, 不仁不智, 何以爲國

142)貞臣也難至而節見, 忠臣也累至而行明

143)신기(信期)/ 뒤에 나오는 고신(高信)을 말한다.

144)사구(沙丘)/ 지금의 하북성 광종현(廣宗縣) 서북쪽

145)막(鄚)/ 지금의 하북성 임구현(任丘縣) 북쪽의 막주진(鄚州鎭)을 말한다.

146)역(易)/ 지금의 하북성 웅현(雄縣) 서북

147)남행당(南行唐)/ 지금의 하북성 행당현(行唐縣) 북쪽

148)노관(魯關)/ 지금의 하남성 노산현(魯山縣) 서남쪽에 있었던 관문 이름을 말한다.

149)하양(河陽)/ 하옹(河雍)을 말한다. 지금의 하남성 맹현(孟縣) 서쪽이다.

150)경양(梗陽)/ 전국 때 조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太原市) 서남쪽의 청서현(淸西縣)을 말한다.

151)영구(靈丘)/ 지금의 산동성 고당현(高唐縣) 남쪽의 남진(南鎭)을 말한다.

152)중양(中陽)/지금의 산서성 중양현(中陽縣) 동쪽

153)원문은 『楚久伐而中山亡』으로 중산국(中山國)은 원래 제(齊)와 위(魏) 두 나라의 지원 하에 조나라의 침략을 막아왔다. 그러나 제(齊)와 위(魏) 두 나라가 중산국에 대한 지원을 소흘히 하고 초나라를 빈번히 공격하는 바람에 조나라는 그 기회를 틈타 중산국을 멸망시켰다.

154)삼천(三川)/ 한나라가 설치한 군현 이름. 삼천이란 경내의 하수(河水), 이수(伊水), 낙수(洛水)를 말한다.

155)거록(鉅鹿)/ 지금의 하북성 평향현(平鄕縣) 서남 쪽의 고을로 삼국지 초반부의 황건적의 란을 일으킨 장각(張角)의 출신지로 유명한 곳이다.

156)정관(挺關)/ 지금의 섬서성 유림(楡林) 서북에 있었던 조나라의 관문.

157)삼군(三郡)/ 한나라의 삼천군(三川郡)과 상당군(上黨郡)과, 진나라의 상군(上郡)을 말한다.

158)상당군(上黨郡)/ 원래 당진의 속한 군현이었으나 삼가(三家)가 당진을 삼분할 때 조(趙)와 한(韓) 두 나라가 분할해서 나누어 가지고 상당군이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조나라 상당군의 관할 지역은 지금의 산서성 화순(和順)과 유사(楡社) 등의 땅 24개 현이다. 한편 후에 장평대전의 빌미가 되는 한나라의 상당군은 지금의 산서성 심하(沁河) 이동 17개 현은 관할했다.

159)양장(羊腸)/하북성과 산서성을 가르는 태항산맥의 능선길로 남쪽으로는 산서성 진성현(晉城縣), 북쪽으로는 호관현(壺關縣) 쪽에 이르렀다. 길의 모양이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60)구주산(句注山)/ 지금의 산서성 대현 서북쪽에 있었던 산으로 일명 서형산(西陘山) 혹은 안문산(雁門山)이라고도 한다.

161)곤산(昆山)/ 옥(玉) 산지로 유명한 지금의 곤륜산(崑崙山)을 말한다.

162)오국(五國)/ 진(秦), 제(齊), 위(魏), 한(韓), 연(燕) 등의 다섯 나라를 말한다.

163)고평(高平)은 지금의 하남성 맹현(孟縣) 서북 쪽을, 근유(根柔)는 어디인지 미상이다.

164)경분(巠分)의 분(分)은 산(山)의 오자이며 경산(巠山)은 구주산(句注山)을 말한다. 선유(先兪)는 지금의 산서성 대현(代縣) 서북쪽의 고을을 가리킨다.

165)석양(昔陽)/ 지금의 하북성 진현(晉縣) 서북

166)백양(伯陽)/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서북쪽

167)석성(石城)/지금의 하남성 임현(林縣) 서남, 일설에는 지금의 산서성 녹현(鹿縣)에 있던 석읍(石邑)이라고도 한다.

168)동양(東陽)/ 지금의 하북성 청하현(淸河縣) 서북쪽

169)위염(魏冉)/전국 때 진나라 대신으로 시호(諡號)는 양후(穰侯)다. 초나라 사람으로 진소양왕(秦昭襄王)의 모후인 선태후의 이부(異父) 동생이다. 혜왕(惠王), 무왕(武王) 때부터 중책을 맡아 진나라의 정사를 돌봤다. 무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 형제들이 진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위염이 소양왕을 진왕의 자리에 올렸다. 소양왕 2년 기원전 305년 무왕의 동생인 서장(庶長) 장(壯)이 반란을 일으키지 위염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진압하고 장(壯)과 그를 따르던 대소 신료와 공족들을 살해하고 무왕의 부인을 위나라로 쫓아냈다. 이후로 위염의 위세는 진나라를 진동시켰다. 소양왕 7년 기원전 300년 진나라의 재상에 임명되었으며 15년 기원전 292년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인 양(穰)에 봉해지고 다시 지금의 산동성 정도(定陶)를 더하고 양후(穰侯)라는 봉호를 받았다. 전후로 4번에 걸쳐 진나라의 재상을 역임했으며 한 번은 조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일찍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세 번이나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하내(河內)에 있던 크고 작은 성 60여 개를 점령했으며 위나라에 압박을 가하여 하동(河東)의 땅 400리를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위나라의 도성 대량성을 포위했으며, 조(趙)와 위(魏) 두 나라 연합군을 화양(華陽 : 지금의 하남성 신정(新鄭) 북)에서 대파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剛)과 수(壽) 등의 땅을 점령하여 그의 봉지인 도읍(陶邑)의 영지를 넓혔다. 백기(白起)를 발탁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한 때 그의 권력이 강해지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그의 사가의 부는 왕실보다도 더 컸다. 결국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발호하다가 소양왕 41년 기원전 266년 재상의 자리에 파직되었다. 다음 해 선태후가 죽고 그는 봉읍인 도읍(陶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170)조혜문왕이 인상여(藺相如)를 데리고 지금의 하남성 민지(澠池)에서 진소양왕과 회동한 것을 말한다.

171)무평(武平)/ 지금의 하북성 문안현(文安縣) 동북 쪽의 무평정(武平亭)을 말한다. 문안현은 천진시(天津市) 서쪽의 랑방시(廊坊市) 관하다.

172)기(幾)/ 지금의 하북성 대명현(大名縣) 동남쪽

173)방자(房子)/ 각주 64번 참조

174)창성(昌城)/지금의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동남으로 제나라의 도성인 임치성과 약 30키로의 거리에 있었다.

175)화양(華陽)/ 지금의 하남성 신정시(新鄭市) 북

176)이 해는 원래 조혜문왕 26년인 기원전 273년의 일이다. 조(趙)와 위(魏) 두 나라가 한(韓)나라의 화양땅으로 쳐들어오자 진나라가 백기를 장수로 삼아 구원군을 보냈다. 백기는 위장(魏將) 망묘(芒卯)의 군사를 격파하고 그의 군사 13만 명의 목을 베었다. 다시 조군(趙軍)을 이기고 그 군사 2만 명을 하수의 강물에 수장시켜 죽였다. 위나라는 남양(南陽)의 땅을 진나라에 바치고 화의를 맺었다.

177)조표(趙豹)/ 무령왕의 서형이다. 무령왕이 조왕의 자리에 오르자 양문군(陽文君)에 봉하고 상국으로 삼아 자기를 보좌하게 했다. 무령왕의 아들 혜문왕(惠文王) 때 다시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혜문왕의 뒤를 효성왕(孝成王)이 잇자 조표는 한나라가 바치는 상당군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간했으나 효성왕은 듣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장군 백기가 거느린 진나라와 상당군을 차지하기 위해 장평에서 크게 싸워 40만의 조나라 대군이 몰살되었다. 이로써 조나라는 국세가 크게 위축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178)평읍(平邑)/ 지금의 하남성 남락현(南樂縣) 동북

179)연여(閼與)/전국 초 때 한나라 땅이었으나 후에 조나라에 속했다. 지금의 산서성 화순현(和順縣) 서북.

180)장안군(長安君)/ 효성왕의 모후인 혜문왕비가 사랑하던 어린 아들을 가리킨다.

181)흑의(黑衣)/ 왕궁을 지키는 군사들을 말한다.

182)연후(燕后)/연나라 왕에게 시집간 태후의 딸을 말한다.

183)중양(中陽)/ 각주 148번의 중양(中陽)과는 다른 지명이다. 연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당현(唐縣) 서쪽의 중양정(中陽亭)을 말한다.

184)주인(注人)/ 지금의 하남성 임여현(臨汝縣) 서북쪽에 있던 한나라 령으로 주성(注城)이라고도 한다.

185)우전(牛田)/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로는 진나라는 우전(牛田)의 수로(水路)를 보급로로 이용하여 한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을 잠식했다. 우전(牛田)은 지명을 말한다고 하나 미상이다. 둘째로는 진나라는 소를 이용하여 경작을 하고 그 수확물인 양식을 수로를 이용하여 군사들의 양식을 날라 한나라를 잠식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86)평원군(平原君)/ 무령왕의 아들이며 혜문왕의 동생으로 이름은 조승(趙勝)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51년에 죽었다.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과 함께 전국 사군자(四君子) 중의 한 사람이다.

187)진작급(秦爵級)/ 진나라는 시행해 왔던 20개의 작급을 말한다. 1급인 공사(公士)부터 20급인 열후(列侯)까지 있었다. 3급에 해당하는 작급은 잠뇨(簪裊)로 네 마리의 말이 끈는 수레를 타고 다닐 수 있었다.

188)무원(武垣)/ 지금의 하북성 하간현(河間縣)에 있던 고을로 연나라와 접한 조나라의 성읍

189)창장(昌壯)/ 창성(昌城)을 말하며, 지금의 하북성 기현(冀縣) 서북. 원래는 전국 때 중산국에 속해 있었으나 후에 조나라의 땅이 되었다.

190)악승(樂乘)/ 악의(樂毅)의 조카다. 전국시대 연나라에 활동한 장수로 악의가 죽고 몇 년 후에 연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할 때 율복(栗腹)의 부장이 되어 출전했으나 조군의 포로가 되었다. 조나라에 투항한 그는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자 연왕은 조군에게 재물을 바쳐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다. 후에 조왕은 그를 중용하여 염파를 대신하여 대장으로 삼자 염파는 위나라로 달아났다.

191)도보기(徒父祺)/ 전국 때 조나라의 공족대부. 조효성왕 때 진나라가 서주를 멸하고 그 영토로 삼자 그는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 국경 밖으로 나가 진나라의 침략에 대비했다.

192)원지(元氏)/지금의 하북성 원지현(元氏縣) 서북

193)상원(上原)/ 지금의 하북성 원지현(元氏縣) 서쪽의 상원성(上元城)을 말한다.

194)정안평(鄭安平)/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255년에 죽었다. 전국 때 진나라의 장군으로 위(魏)나라 출신이다. 범수와 의형제를 맺은 친구이다. 범수가 위나라에 있을 때 동료의 모함으로 상국 위제(魏齊)에게 잡혀 고난에 처했을 때 온 힘을 다해 그를 도왔다. 후에 진나라의 승상이 된 범수가 정안평을 천거하자 소양왕은 그를 진나라의 장군으로 삼았다. 후에 백기(白起)의 후임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가 한단성을 포위했다가 싸움에 이기지 못하자 진왕에게 죽임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조나라에 항복했다. 조나라는 정안평에게 무양군(武陽君)에 봉했다. 범수는 정안평을 천거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승상의 자리에 물러났다.

195)위문(尉文)/ 사기정의에 의하면 아마도 울주(蔚州)를 말한다고 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울주는 지금의 태항산 이서의 하북성과 산서성 동북 일대를 말한다.

196)연릉(延陵)/ 춘추전국시대 때 연릉이라는 이름의 고을은 두 곳이 있었다. ① 지금의 춘추 때 오나라의 성읍으로 지금의 강소성 상주시(常州市) 남쪽의 엄성(淹城)에 그 유지가 있다. 수몽의 아들인 계찰(季札)의 봉읍이며 그를 연릉(延陵) 계자(季子)라고 부른다. ② 지금의 내몽고 흥화현(興和縣)에 있던 조나라의 북쪽을 지키던 국경도시를 말한다. 여기서는 ②번을 가리킨다.

197)유차(楡次)/ 지금의 산서성 유차현(楡次縣) 경내의 고을로 춘추 때 당진의 유읍(楡邑)이었다가 전국 때 조나라 령이 되었다.

198)용태(龍兌)는지금의 하북성 서수현(徐水縣) 서남이고, 분문(汾門) 서수현 서북으로 이수(易水)의 북쪽 강안, 임락(臨樂)은 하북성 고안현(固安縣) 서남쪽으로 모두 보정시(保定市) 관하이다.

199)갈(葛)은 지금의 하북성 고양현 서남쪽이고, 무양(武陽)은 하북성 이현(易縣) 동남쪽에, 평서(平舒)는 지금의 하북성 대성현(大城縣)이다. 모두 이수(易水) 주변의 고을이다.

200)이목(李牧)전국 때 조나라의 명장. 사마천의 사기(史記) 인상여(藺相如) 염파(廉頗) 열전에 의하면 전부(田部)의 하급 관리였다가 평원군에 의해 발탁된 사람은 이목(李牧)이 아니라 마복군(馬服君) 조사(趙奢)였다. 이목은 오랫동안 조나라의 국경을 수비하며 진나라의 침략을 막았다. 조왕 천(遷) 3년(기원전 233년)에 군사를 이끌고 진(秦)을 공격하여 진나라 군사들을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으나 후에 진(秦)나라의 이간책에 걸려 조왕에게 살해되었다.

201)무수(武遂)/ 지금의 하북성 서수현(徐水縣) 서쪽, 일설에는 지금의 하북성 무강현(武强縣) 동북쪽이라고 한다.

202)방성(方城)/ 지금의 하북성 고안현(固安縣) 서남.

203)평도(平都)/ 그 위치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① 지금의 섬서성 장자현(長子縣) 경내(사기정의) ② 산서성 좌권현(左權縣) 서북(讀史方輿紀要) ③ 산서성 화순현(和順縣) 서(사기지명고) 또한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에는 평도후(平都侯)라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했다.

204)한고(韓皐)/ 미상이다.

205)최(蕞)/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동북쪽

206)요안(饒安)/ 지금의 하북성 염산현(鹽山縣) 서남쪽

207)동양(東陽)/ 각주 164번 참조

208)장안군/ 각주 176번 참조

209)요(饒)/ 지금의 하북성 요양현(饒陽縣) 동북쪽

210)백인(栢人)/ 각주 40 참조

211)적려(赤麗)와 의안(宜安)/ 모두 지금의 하북성 고성현(藁城縣) 경내에 있었다.

212)비(肥)/ 지금의 하북성 진현(晉縣) 서쪽

213)파오(番吾)/ 지금의 하북성 평산현(平山縣) 경내

214)악서(樂徐)/ 지금의 하북성 협원현(浹原縣) 동남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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