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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 7.위(衛)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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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衛康叔世家(위강숙세가)37

위강숙(衛康叔)의 이름은 봉(封)이다. 주무왕의10명의 동모제 중9번 째 동생이다. 형제들 중 나이가 가장 어린 동생은 염계(冉季) 재(載)다.

주무왕이 은나라의 주왕을 토벌한 후에 은나라 유민들이 살고 있던 땅에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祿父)를 봉하고 다른 제후들과 같은 반열에 세운 후에 그로 하여금 은나라의 대를 이어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무경이 마음속으로 완전히 주나라에 심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무왕은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동생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보내 감시하면서 녹보의 정치를 도와 백성들을 위무하도록 했다. 무왕이 재위에 오른 지8년 만에 죽자 그 아들 성왕(成王)은 당시 강보에 싸인 어린 아이였음으로 주공단(周公旦)이 성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맡았다. 주공단을 의심한 관숙과 채숙은 무경 녹보를 부추겨 란을 일으켜 성주(成周)①를 공격하도록 했다. 성왕의 명을 빌려 은나라를 토벌한 후에 무경 녹보와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한 주공은 녹보가 다스렸던 은나라 유민이 살던 땅에 강숙봉이 책봉했다. 강숙봉은 위(衛)나라의 군주가 되어 황하(黃河)와 기수(淇水) 사이의 옛날 은나라의 땅을 다스렸다.

그때 나이가 너무 어린 강숙봉이 나라를 잘 통치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걱정한 주공단은 여러 번에 걸쳐 경계하는 말을 글로 써서 보냈다.

「너는 필히 은나라의 덕과 재능을 갖춘 현인들과,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군자들과, 경험이 많은 연장자들을 찾아 그들에게 은나라의 흥망성쇠 역사를 물어보고 그 말에 따라 백성들을 보살펴 주어야한다.」

다시 강숙에게 경계하기를 주나라가 멸망한 원인은 음주(飮酒)와 진미(珍味) 및 여색(女色)에 탐닉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어, 주왕(紂王) 대에 이르자 바야흐로 혼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공단은 다시 『재재(梓材)』②를 지어 강숙에게 주며 장인들이 목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규구(規矩)③처럼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기준으로 삼게 했다.『강고(康誥)』,『주고(酒誥)』,『재재(梓材)』라는 제목의 글은 모두 강숙에게 경계를 주었던 글이다. 강숙이 그 경계를 도리로 삼아 봉국을 다스린 결과 나라를 안정시키고 화목케 했음으로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며 따랐다.

이윽고 성인이 되어 친정에 임하게 된 성왕이 강숙을 주나라의 사구(司寇)에 임명하고 수많은 보기(寶器)와 제사 용구들을 하사하여 그의 덕행을 표창했다.

강숙이 세상을 뜨자 그 아들 강백(康伯)이 뒤를 이었다. 강백이 죽고 아들 고백(考伯)이 계위했다. 고백이 죽고 아들 사백(嗣伯)이 잇고, 사백이 죽자 아들 첩백(偼伯)이 이었다. 첩백이 죽고 아들 정백(靖伯)이 군위에 앉고, 정백이 죽자 아들 정백(貞伯)이 계위했다. 정백(貞伯)이 죽자 아들 경후(頃侯)의 대에 이르렀다.

경후(頃侯)가 주나라의 이왕(夷王)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자 이왕은 경백을 후작(侯爵)으로 명하여 원래의 작위로 올려주었다.④ 경후가 재위12년 만에 죽고 그 아들 리후(釐侯)가 섰다.

리후13년 기원전842년, 주나라의 국인들이 란을 일으키자 주려왕(周厲王)이 체(彘) 땅으로 달아났다. 이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힘을 합쳐 정권을 잡고 주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여 공화(共和)가 시작되었다.

리후28년 기원전827년, 주이왕의 태자 정(靜)이 주왕의 자리에 오르자 공화가 끝났다. 태자 정이 주선왕(周宣王)이다.

리후가 재위42년 만인 기원전813년에 죽고 태자 공백(共伯) 여(餘)가 뒤를 이었다. 일찍이 리후는 공백의 동생 화(和)를 총애하여 많은 재물을 물려주었다. 이에 화는 그 재물로 수많은 무사들을 사들여 리후의 묘역에서 공백 여를 습격했다. 공백은 리후의 묘지 안의 갱도로 도망쳤다가 그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위나라 사람들은 공백을 리후의 묘지 곁에다 묻고 공백이라고 부르고 화를 군주로 세웠다. 화가 무공(武公)이다.

무공이 즉위하자 강숙의 무너진 도를 새롭게 쇄신하고 정사에 힘썼기 때문에 위나라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음으로 나라가 마침내 안정되었다.

무공42년 기원전771년, 견융이 주나라를 침범하여 주유왕(周幽王)을 죽였다. 무공이 친히 군사를 인솔하여 주나라에 들어가 주평왕(周平王)을 도와 견융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다. 주평왕이 무공의 작위를 공작(公爵)으로 올렸다.

무공이 재위55년 만인 기원전758년에 죽고 그의 아들 장공(莊公) 양(揚)이 섰다.

장공5년 기원전753년, 장공이 제나라 여인을 취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제녀(齊女)는 미인이었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다. 장공이 다시 진(陳)나라 여인은 취하여 부인으로 삼아 아들 하나를 얻었으나 어려서 죽고 말았다. 진녀(陳女)의 여동생 역시 장공의 총애를 받아 아들을 하나 낳아 이름을 완(完)이라고 했다. 완이 어렸을 때 그 모친이 죽었음으로 장공은 제녀에게 완을 주어 기르도록 했다. 장공은 완을 태자로 삼았다. 장공이 다시 총애하던 첩 사이에 아들을 하나 얻어 이름을 주우(州吁)라 했다.

장공18년 기원전740년, 장공은 장성하여 군사의 일을 즐겨하던 주우를 군대를 이끄는 장군에 임명했다. 위나라의 상경 석작(石碏)장공에게 간언했다.

「군사의 일을 즐겨하는 첩 소생의 아들을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으로 임명한 일은 장차 큰 화란의 원인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장공이 석작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장공이 재위23년 만인 기원전735년에 죽고, 태자 완(完)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위환공(衛桓公)이다.

환공2년 기원전733년, 주우가 교만사치하고 황음방탕하자, 환공이 그의 직위를 파하고 쫓아냈다. 환공에 의해 살해되지나 않을까 걱정한 주우는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환공13년 기원전722년, 정백(鄭伯)의 동생 단(段)이 그의 형 장공(莊公)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달아나자 주우가 단에게 청하여 우호를 맺었다.

환공16년 기원전719년, 위나라의 도망자들을 규합한 주우가 환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위후의 자리에 앉았다. 이에 정백의 동생 단이 정나라를 정벌해 주기를 주우에게 청했다. 주우는 다시 송(宋),진(陳), 채(蔡) 등의 나라에 사자를 보내 단을 도와 군사를 일으켜주기를 청했다. 대부분의 위나라 사람들은 새로 즉위한 주우가 전쟁을 좋아하고 더욱이 환공마저 살해했음으로 따르지 않고 미워했다. 환공의 모친이 진나라 출신임을 알고 있던 석작은 주우를 거짓으로 받든척 하고, 위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 도성의 교외로 출전하여 그곳에서 주우를 토벌할 계책을 세웠다. 석작은 군대의 양식을 보낸다는 구실로 우재추(右宰醜)를 보내, 복양(濮陽)에서 기회를 잡고 주우롤 습격하여 죽였다. 석작은 즉시 형(邢)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환공의 동생 공자진(公子晉)을 모셔와 위나라 군주 자리에 앉혔다. 이가 위선공(衛宣公)이다.

위선공7년 기원전712년, 노나라 사람이 자기의 군주 은공(隱公)을 시해했다.

선공9년 기원전710년, 송나라의 태재(太宰) 화독(華督)이 송상공(宋殤公)과 대부 공보가(孔父嘉)를 죽였다.

선공10년 기원전709년, 당진의 곡옥(曲沃) 장백(莊伯)이 자기의 군주 애후(哀侯)를 죽였다.

위선공 18년은 기원전 701년이다. 처음에 선공이 위후의 자리에 오르자 장공(莊公)의 첩실이었던 이강(夷姜)을 부인으로 세우고 그녀 사이에 낳았던 급(伋)을 태자로 삼았었다. 선공은 우공자(右公子)를 급의 스승으로 임명해 가르치도록 했다. 우공자는 태자를 위해 제나라에서 미녀를 데려왔다. 태자가 미처 혼례를 치르기 전에 제녀가 절세미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선공은 제녀를 자기가 취하고 태자에게는 별도로 다른 여자를 골라 장가들게 했다. 제녀를 취해 정부인으로 삼은 선공은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수(壽)와 삭(朔)을 낳았다. 선공은 좌공자(左公子)를 수와 삭의 스승으로 삼아 가르치게 했다. 태자 급의 모친이 이강이 죽자 선강과 아들 삭(朔)이 선공의 면전에서 태자 급을 모함했다. 원래 태자의 부인을 탈취해 자기의 부인으로 삼은 자격지심에서 태자를 매우 싫어하게 된 선공은 급을 태자의 자리에서 폐하려고 일찍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태자를 참소하는 말을 듣게 된 선공은 노기충천하여 태자 급을 제나라에 사자로 보내놓고 비밀리에 도적떼들에게 명을 내려 변경에서 태자 급의 길을 막은 후 살해하라고 시켰다. 선공은 태자에게 백모(白旄)⑤를 주어 사절의 표시로 삼게 하고는 변경의 도적떼들에게 백모를 들고 지나가는 사절들을 보게 되면 죽이라고 했다. 이윽고 제나라에 사절의 임무를 띠고 길을 떠나려는 태자 급에게 삭과 선공이 태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알게 된 공자삭의 동모형 공자수가 말했다.

「나라의 변경에 도적떼들이 백모를 들고 지나가는 형님을 발견하면 죽이기로 되어있습니다. 형님은 제나라로 길을 떠나시면 안 됩니다.」

태자가 대답했다.

「나는 절대로 부군의 명을 어기고 목숨을 구하지는 않겠다. 」

그리고는 추호도 주저하지 않고 제나라로 길을 떠났다. 공자수는 어쩔 수 없이 백모를 훔친 후에 태자가 탄 수레를 앞질러 달려가 변경에 당도했다. 도적떼들이 약속대로 일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공자수가 태자인줄로 오인하고 달려들어 죽였다. 공자수가 도적떼들에게 살해된 후에 뒤따라온 태자가 도적떼들을 발견하고 말했다.

「너희들이 죽여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

그래서 도적떼들은 태자도 함께 죽인 후에 선공에게 고했다. 선공은 공자삭을 태자로 세웠다. 선공이 재위19년 만인 기원전709년에 죽자 삭이 뒤를 이었다. 이가 위혜공(衛惠公)이다. 좌우 두 공자는 삭이 두 형을 죽이고 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른 극악한 행위에 불만을 품었다.

혜공4년 기원전696년, 좌우 두 공자가 태자 급과 공자수(公子壽)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란을 일으켜 혜공을 공격했다. 혜공이 제나라로 달아나자 두 공자는 태자 급의 동모제 검모(黔牟)를 주나라에서 데려와 군주로 세웠다.

검모(黔牟) 8년 기원전689년, 제양공이 주천자의 명을 받아 제후들의 군사를 규합하여 위나라를 공격했다. 제양공은 위혜공을 복위시키고 좌우 두 공자를 주살했다. 검모는 도망쳐 주나라로 몸을 피했다. 위혜공은 제양공이 도움을 받아 다시 위나라 군주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혜공이 처음 위나라 군주 자리에 오른 지3년 만인 기원전696년에 쫓겨나 제나라로 망명했다가8년 만인 기원전688년에 환국하여 복위되었으니 그 해를 전후 모두 합해서 혜공13년이라고 했다.

혜공25년 기원전675년, 주나라가 검모를 받아들여 보호하고 있는데 불만을 품은 혜공이 연(燕)⑥나라와 힘을 합쳐 주나라를 공격했다. 주혜왕(周惠王)은 온(溫)⑦ 땅으로 달아났다. 위(衛)와 연(燕)은 혜왕(惠王)의 동생 왕자 퇴(頹)를 주왕으로 세웠다.

혜공29년 기원전671년, 정나라가 다시 혜왕을 호송하여 주왕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위혜공이 재위31년 만인 기원전669년에 죽고 그의 아들 의공(懿公) 적(赤)이 뒤를 이었다. 위후(衛侯)의 자리에 오른 의공(懿公)이 학을 기르는데 재물을 낭비하고 음사를 즐겼다.

의공9년 기원전660년, 적족(翟族)⑧이 위나라에 쳐들어왔다. 의공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 적족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으나 군사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배반했다. 신하들의 말했다.

「군주가 학만을 좋아했으니 학을 시켜 적인을 막도록 하십시오!」

적족이 마침내 위나라를 침범하여 의공을 죽였다.

일찍이 의공이 위나라의 군주 자리에 올랐을 때, 백성과 대신들은 모두가 즐겨 복종하지 않았다. 의공의 부군 혜공 삭(朔)이 간계를 써서 태자 급(伋)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오르고 의공이 그 뒤를 이었기 때문에 백성들과 대신들은 항상 삭의 후예들을 밀어낼 궁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혜공의 후손들은 끊어지게 되고 태자 급과 검모(黔牟)의 동생인 소백(昭伯) 완(頑)의 아들 신(申)을 군주로 세웠다. 이가 대공(戴公)이다.

대공 신이 그 즉위 원년인 기원전660년에 죽었다. 적족이 위나라 뿐만 아니라 여러 제후국들을 침범하여 란을 일으키자, 당시의 패자였던 제환공이 제후들의 군사를 규합하여 적족의 군사를 평정하고 초구(楚丘)에 있던 위나라의 성을 개수한 후에 대공의 동생 훼(毁)를 위나라 군주 자리에 앉혔다. 이가 문공(文公)이다. 문공은 당시 적족의 침략을 피해 제나라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제나라 사람들이 문공을 호송하여 위나라로 돌려보냈다. 일찍이 적인이 의공을 죽이자 위나라 사람들은 선공에 의해 살해당한 태자 급의 일을 매우 슬프게 생각하고는 그의 후대를 대신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태자 급의 자손들은 모두 죽고 없었고, 공자 수(壽) 마저도 후손이 없었다. 태자 급에는 두 명의 동모제가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검모인데, 그는 일찍이 혜공을 대신하여8년 동안 위나라 군주 자리에 앉았다가 혜공에 의해 쫓겨나 주나라로 들어갔다. 다른 한 명은 소백(昭伯) 완(頑)이다. 의공이 죽었을 때는 검모와 소백도 모두 죽었기 때문에 위나라 사람들은 소백의 아들 대공(戴公) 신을 그들의 군주로 옹립했었다. 대공이 죽자 위나라 사람들은 다시 그 동생 문공 훼를 세웠다.

새로 위후의 자리에 오른 문공은 백성들의 세금을 가볍게 해주고 범인들의 저지른 죄를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며 온 마음을 다해 노력하여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함으로 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문공16년 기원전644년, 당진의 공자 중이(重耳)가 유랑하다가 위나라를 들리게 되었으나 문공은 중이를 예를 갖추어 대접하지 않았다. 문공17년 기원전643년, 제환공이 죽었다.

문공이 재위25년 만인 기원전635년에 죽고 그 아들 성공(成公) 정(鄭)이 뒤를 이었다.

성공3년 기원전632년, 당진국이 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나라에 길을 빌리자고 청했으나 성공이 거절했다. 당진이 다른 길을 취하여 황하를 건너 송나라를 구했다. 당진국이 다시 위나라에 군대의 파견을 요청했다. 위나라 대부들은 당진국의 요청을 따르려고 했으나 성공이 다시 거절했다. 대부 원훤(元咺)이 성공을 공격하자 성공은 나라밖으로 달아났다. 진문공 중이가 과거 위나라를 지나가던 자신에게 위문공이 무례를 범하고 다시 송나라를 구원할 때 길도 빌려주지 않아 이에 원한을 품고 위나라를 공격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진문공은 위나라 일부의 땅을 떼어 송나라에 주었다. 나라 밖으로 달아난 위성공은 진(陳)나라로 들어가 머무른 지2년이 지나자 주천자에게 가서 진문공(晉文公)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여 자기의 귀국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진문공은 사람을 보내 짐독(鴆毒)으로 위성공을 죽이려고 했다. 성공이 자신을 독살하기 위해 주왕실에서 보낸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짐독을 엷게 타서 마신 결과 죽음을 면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주천자가 진문공에게 위성공의 환국을 청했다. 위나라에 들어가 군주 자리에 다시 오른 위성공은 원훤을 죽였다. 성공의 망명생활 중에 위나라 군주 자리를 차지했던 위군(衛君) 하(瑕)는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성공7년 기원전628년, 진문공이 죽었다.

성공12년 기원전623년, 위성공이 당진에 들어가 진양공(晉襄公)에게 조현을 올렸다.

성공14년 기원전621년, 진목공(秦穆公)이 죽었다.

성공26년 기원전609년, 제나라의 병촉(邴歜)이 그의 군주 제의공(齊懿公)을 시해했다.

성공35년 기원전600년, 위성공이 죽고 그의 아들 목공(穆公) 속(遫)이 그 뒤를 이었다.

목공2년 기원전598년, 초장왕이 진(陳)나라를 공격하여 그 군주를 시해한 하징서(夏徵舒)를 죽였다.

목공3년 기원전597년, 초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하자 정나라 군주가 항복했다. 초장왕은 항복한 정나라 군주를 석방했다.

목공11년 기원전589년, 손량부(孫良夫)를 시켜 노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손량부는 제나라에게 빼앗긴 위나라 영토를 수복했다. 이 해에 목공이 죽고 그 아들 정공(定公) 장(臧)이 뒤를 이었다.

정공이 재위12년 만인 기원전577년에 죽고 그 아들 헌공(獻公) 간(衎)이 계위했다.

헌공13년 기원전564년, 헌공이 악사 조(曹)에게 명하여 그의 첩에게 거문고 타는 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첩이 공부를 게을리 했음으로 조가 태형을 가해 벌을 주었다. 헌공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그 첩은 헌공에게 조를 헐뜯어 고의로 중상했다. 헌공은 조에게300대에 태형에 처했다. 헌공18년 기원전559년, 헌공이 주연을 열기로 하고 손문자(孫文子)⑨와 영혜자(寧惠子)⑩를 청했다. 두 사람이 약속한 시간 전에 도착하여 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나 헌공은 두 사람을 부르지 않고 원림에 가서 기러기를 사냥했다. 할 수 없이 원림으로 찾아간 두 사람을 헌공은 사냥복도 벗지 않고 입은 채로 접견했다. 두 사람은 마음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물러나와 숙(宿)⑪으로 가버렸다. 손문자의 아들은 수시로 헌공의 술시중을 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헌공은 악사 조(曹)를 시켜 『교언(巧言)』⑫이라는 노래의 마지막 구절을 부르게 하곤 했다. 옛날 헌공에게300대의 태형을 맞은 일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던 악사 조는 노래로 손문자를 격분시켜 헌공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했다. 손문자가 거백옥(蘧伯玉)⑬에게 헌공의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거백옥은 신하된 자로써 아는 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손문자가 위헌공을 공격했다. 헌공은 달아나 제나라로 들어갔다. 제나라는 헌공을 취읍(聚邑)⑭에 머물게 했다. 손문자와 영혜자 함께 정공(定公)의 동생 추(秋)를 위나라 군주로 세웠다. 이가 위상공(衛殤公)이다.

상공 원년 기원전558년, 상공은 숙(宿)을 손문자의 봉지에 더해 주었다.

상공12년 기원전547년, 영희와 손림보가 군주의 총애를 다투어 서로 시기했다. 상공이 영희 편을 들어 그로 하여금 손림보를 공격하도록 했다. 손림보는 도망쳐 당진으로 들어가 옛날 쫓겨난 헌공을 위후의 자리에 복위시켜 주기를 청했다. 당시 헌공은 제나라에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에 소식을 들은 제경공(齊景公)도 헌공을 데리고 당진으로 들어가 헌공의 복위를 청했다. 당진이 위나라 정벌군을 일으켜 위상공과 회맹을 하자고 유인했다. 상공이 회맹 요청에 응하여 영희와 함께 당진으로 들어가 진평공(晉平公)과 만났다. 이에 당진은 상공과 영희를 붙잡아 구금하고 위헌공을 호송하여 위나라 군주 자리에 앉혔다. 헌공은 군주의 자리에서 쫓겨 난 후 외국에서 망명생활을 한지12년 만에 복위할 수 있었다.

헌공 후원년 기원전546년, 헌공이 영희를 주살했다. 헌공 후3년 기원전544년, 오나라의 연릉(延陵) 계자(季子)⑮가 중원제후국들에 사자로 길을 떠났다가 도중에 위나라에 들렸다. 계자가 거백옥(蘧伯玉)과 사추(史鰌)를 보고 말했다.

「위나라에는 군자들이 많이 살고 있어 나라가 큰 재난을 당하지 않겠소.」

그리고 숙(宿)을 지나가다 머물게 되자, 손림보가 계자(季子)를 위해 경(磬)⑯을연주했다. 계자가 듣고 말했다.

「경의 소리가 즐겁지 않습니다. 곡조가 매우 슬프니 위나라의 동란은 여기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이해에 헌공이 죽고 그의 아들 양공(襄公) 오(惡)가 뒤를 이었다.

양공6년 기원전538년, 초영왕(楚靈王)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행했으나 양공은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양공9년 기원전535년, 양공이 죽었다. 일찍이 양공에게는 총애하던 소첩이 있었다. 그 소첩이 아이를 뱄는데 꿈에 사람이 나타나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강숙(康叔)이다. 네가 벤 아이는 위나라 군주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아들이니라! 네가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원(元)이라고 하라!」

꿈에서 깨어난 소첩은 매우 괴이하게 생각하고 공성자(孔成子)⑰에게해몽을 부탁했다. 공성자가 말했다.

「강숙은 위나라를 세운 시조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소첩이 과연 아들을 낳아 양공에게 예전의 꿈 이야기를 했다. 양공이 말했다.

「그 아이는 하늘이 점지해 준 아들이다.」

그리고는 그 아이의 이름을 원(元)이라 지었다. 그때 마침 양공의 정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음으로 원을 그녀에게 주어 적자로 삼은 후에 태자로 세웠다. 그래서 원이 위후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가 위영공(衛靈公)이다.

영공5년 기원전530년, 영공이 당진에 들어가 진소공(晉昭公)에게 조현을 올렸다.

영공6년 기원전529년, 초나라의 공자 기질(棄疾)이 그의 형인 초영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평왕(楚平王)이다.

영공11년 기원전524년, 위나라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영공38년 기원전498년 공자(孔子)가 위나라에 왔다. 위나라는 공자가 노나라에 있을 때 받았던 녹봉과 똑 같이 주었다. 후에 위나라 군주와 틈이 생기자 공자가 위나라를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에 공자는 열국을 주유하다가 위나라에 다시 들어왔다.

영공39년 기원전497년, 영공의 부인 남자(南子)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태자 괴외(蒯聵)가 그녀를 죽이려는 생각으로 그의 가신 희양속(戱陽遫)과 모의했다. 괴외는 회양속에게 조회를 볼 때 기회를 노려 남자를 죽이라고 했다. 이윽고 기회가 왔으나 회양속이 후회하고 손을 쓰지 않았다. 괴외가 여러 번 눈짓으로 회양속에게 손을 쓰라고 재촉하자 남자가 눈치를 채고 두려움에 떨며 큰 소리로 외쳤다.

「태자자 나를 죽이려고 한다!」

영공이 크게 노하자 태자는 나라 밖으로 도망쳐 송나라로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당진국으로 들어가 조씨(趙氏)들에게 몸을 의탁했다.

영공42년 기원전494년 봄, 영공이 교외에 나들이를 나갈 때 자영(子郢)⑱으로하여금 어가(御駕)를 몰도록 했다. 자영은 영공의 막내아들로 자가 자남(子南)이다. 영공이 나라 밖으로 도망친 태자 괴외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자영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장차 태자로 세워 나의 뒤를 잇게 하겠다.」

그러자 자영이 대답했다.

「이 영은 군주의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없어 나라를 욕되게 할 뿐입니다. 부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그해 여름 영공이 죽었다. 부인 남자가 자영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면서 말했다.

「이것은 선군의 명이다.」

자영이 대답했다.

「나라 밖으로 도망친 태자 괴외의 아들 첩(輒)이 있습니다. 저는 막중한 군주의 자리를 차지할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그래서 위나라 국인들은 첩을 위후(衛侯)로 세웠다. 이가 위출공(衛出公)이다.

이해6월 을유(乙酉) 날에 조간자(趙簡子)가 괴외를 위나라에 환국시키기 위해 양호(陽虎)와10여 명의 사람들에게 상복을 입혀 위나라로 가는 사자로 가장시켜 태자를 영접하기 위해 왔다고 진후(晉侯)를 접견하여 말하게 했다. 그리고 조간자 자신은 위나라로 환국하는 태자를 환송했다. 위나라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군대를 출동시켜 괴외의 일행을 공격했다. 그래서 괴외는 위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단지 숙(宿)의 땅에 머물며 스스로를 보전하자 위나라 군대도 물러갔다.

출공 첩(輒) 4년 기원전489년, 제나라의 전걸(田乞)이 자기의 군주 유자(孺子)를 시해했다.

출공8년 기원전485년, 제나라의 포자(鮑子)⑲가그 군주 도공(悼公)을 시해했다. 공자(孔子)가 진(陳)나라에서 위나라로 왔다.

출공9년 기원전484년, 공문자(孔文子)⑳가 공자에게 군사에 관해서 가르침을 청했다. 공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노나라 군주가 공자를 모셔가기 위해 사람을 보내자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갔다.

위출공12년 기원전481년 초, 공문자(孔文子) 어(圉)가 아내로 맞이한 태자 괴외의 누이에게서 아들 공리(孔悝)를 낳았다. 공문자의 가복(家僕) 혼량부(渾良夫)는 그 외모가 영준하고 늠름했다. 이윽고 공문자가 죽자 혼량부와 리(悝)의 모친이 서로 정을 통했다. 그때 태자 괴외가 숙(宿)에 머물고 있었음으로, 리의 모친은 혼량부를 태자가 머물고 있던 곳으로 보냈다. 태자가 혼량부를 보고 말했다.

「내가 위나라 군주 자리에 오르는데 그대가 도와준다면, 높은 수레를 타고 다닐 수 있는 대부에 봉하여 보답하겠고, 그대가 비록 죽을죄를 세 번 범한다하더라도 모두 용서하여 죽음을 면하게 해 주겠다.」㉑

두 사람이 맹세의 의식을 행하고 다시 혼량부가 공리(孔悝)의 모친을 아내로 맞이해서 살아도 좋다고 했다. 윤12월, 혼량부와 태자 괴외가 위나라 도성으로 들어와 공리의 집 후원에 숨어 있다가 저녁이 되자 두 사람은 여자의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에는 두건을 두른 다음 환관 나(羅)에게 수레를 몰게 하여 공씨 집으로 갔다. 공씨들의 가신 란녕(欒寧)이 누구냐고 묻자 공씨들 친척의 시첩들이라고 대답하고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공씨 집안으로 들어가 곧바로 공리의 모친인 백희(伯姬)의 처소로 들이닥쳤다. 일행이 식사를 마치자, 백희가 과를 들고 앞장서서 공리의 처소로 일행을 끌고 갔다. 갑옷을 입은 다섯 사람이 수퇘지 한 마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역시 갑옷 차림으로 무장한 태자의 뒤를 따랐다. 공리를 헛간으로 강제로 끌고 간 백희가 태자 앞에서 맹세를 시키고 다시 억지로 고대(高臺)에 오르게 했다. 그때 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즐기려고 고기를 굽고 있던 란녕은 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중유(仲由)㉒에게알리고 같이 있었던 소호(召護)는 고기 안주에 술을 마신 후에 수레를 몰고 출공에게 달려가 태워서 노나라로 달아났다.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중유는 공씨 집으로 가기 위해서 성문을 통해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공씨 집에서 도망쳐 나오고 있는 자고(子羔)㉓를만났다. 자고가 자로에게 말했다.

「성문이 이미 닫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로가 대답했다.

「내가 잠시 들어가서 한 번 살펴봐야 되겠다.」

「가봐야 어찌할 수 없습니다. 사형이 가시게 되면 화를 입게 될 뿐입니다.」

「내가 공리의 녹봉을 받고 있는데 어려움에 빠진 그를 보고 모른 체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자고는 달아나고 자로는 계속 앞으로 달려가 성문 앞에 당도했다. 그때 성문을 지키던 공손감(公孫敢)이 황급하게 성문을 닫으면서 자로를 향해 말했다.

「성안으로 다시 들어올 수 없소.」

「당신은 공실의 일원이 아니오? 다른 사람의 녹을 받아먹고 있으면서 그 사람이 위난에 처해있는데 어찌 몸을 피한단 말이오!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하겠소. 다른 사람의 녹봉을 받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위난에 빠졌을 때는 반드시 도와야 한다고 나는 알고 있소!」

그때 어떤 사람이 성문을 열고 안에서 나오지 자로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의 공리 집 앞에 당도한 자로가 소리쳤다.

「태자께서는 공리를 잡아서 어디다 쓰려고 하십니까? 설혹 공리를 죽인다한들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할 뿐입니다.」

자로가 다시 큰 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태자께서는 용기가 없으시니 만일 내가 고대에 불을 지른다면 공리를 놓아줄 수 밖에 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고대에서 자로가 외치는 소리를 들은 태자가 두려워한 나머지 석걸(石乞)과 우염(盂黶)을 고대에서 밑으로 내려 보내 자로를 대적하도록 명했다. 두 사람이 과(戈)로 공격하자 자로의 갓끈이 끊어졌다. 자로가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군자는 관을 바르게 써야 한다고 했소!」

자로가 갓끈을 이어 관을 바르게 쓴 다음 죽었다. 노나라에 머물고 있던 공자가 위나라에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고시(高柴)는 살아 돌아오겠지만 중유(仲由)는 돌아오지 못하고 죽고 말겠구나!」

결국 공리는 어쩔 수 없이 태자가 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데 동의하고야 말았다. 이가 위장공(衛莊公)이다.

장공 괴외는 출공 첩(輒)의 아버지다. 오랫동안 나라밖에서 살면서 자기를 모셔가지 않은 나라 안의 대부들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장공 즉위 원년인 기원전480년, 장공이 위나라의 대신들의 잘못을 열거하며 모두 주살하려고 하면서 말했다.

「내가 오랫동안 나라 밖에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대들은 그 소식도 듣지 못했는가?」

그 말에 군신들이 작당하여 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장공이 어쩌지 못하고 죽이려는 생각을 그만뒀다.

장공2년 기원전479년, 노나라의 공자가 죽었다.

장공3년 기원전478년, 장공이 성벽에 올라 융주(戎州)㉔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찌하여 융인(戎人)과 같은 오랑캐 따위가 성읍을 지어 가까이 살고 있단 말인가?」

융인들은 장공의 말을 전해 듣고 위나라가 쳐들오지 않을까 매우 두려워했다. 그해10월에 융주의 융인들이 당진의 조간자(趙簡子)에게 고하자, 조간자가 군사를 보내어 위나라를 포위했다. 11월 장공이 다시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위나라 국인들이 공자 반사(斑師)를 군주로 세웠다. 이에 다시 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로 쳐들어와 반사를 잡아갔다. 위나라 국인들이 다시 공자기(公子起)㉕를군주로 세웠다.

위군 기(起) 원년 기원전477년, 위나라의 대부 석만부(石曼尃)㉖가위군 기를 몰아내자 기는 제나라로 망명했다. 출공 첩이 제나라에서 들어와 위군의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일찍이12년 동안 위나라 군주의 자리에 있었던 출공은 외국으로 도망쳐 살다가4년 만에 다시 환국하여 복위했다.

출공 후원년 기원전476년, 출공은 자기를 따라 제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사람들에게 포상을 했다.

출공 후원년21년 기원전456년, 출공이 죽었다. 출공은 기원전493년에 위군의 자리에 올라12년 후인 기원전481년에 제나라로 망명하고4년 후에 환국하여 복위하여21년 동안 재위에 있다가 죽었다.㉗출공이 죽자 그의 숙부 검(黔)이 출공의 아들을 쫓아내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위도공(衛悼公)이다.

도공5년 기원전451년, 도공이 죽자 그의 아들이 경공(敬公) 불립(弗立)이 뒤를 이었다. 경공이 재위19년 만인 기원전432년에 죽자 그의 아들 소공(昭公) 규(糾)가 계위했다. 이때 삼진(三晋)이 일어서서기 시작했고 위(衛)나라는 소제후국으로 떨어져 조나라의 부용국(附庸國)이 되었다.

소공6년 기원전426년, 공자미(公子亹)가 소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위군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가 회공(懷公)이다.

희공11년 기원전415년, 공자퇴(公子頹)가 회공을 시해하고 군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가 신공(慎公)이다. 신공의 아버지는 공자적(公子適)이고 공자적의 아버지는 경공(敬公)이다.

신공42년 기원전373년, 신공이 죽고 그 아들 성공(聲公) 훈(訓)이 섰다.

성공11년 기원전362년, 성공이 죽고 그의 아들 성후(成侯) 속(遫)이 섰다.

성후11년 기원전351년, 위나라 공실의 서출(庶出) 공손앙(公孫鞅)이 진(秦)나라에 들어갔다.㉘

성후16년 기원전346년, 위나라 군주의 호칭이 공(公)에서 후(侯)로 깎였다.

성후29년 기원전333년, 성후가 죽고 그 아들 평후(平侯)가 섰다. 평후가 재위8년 만인 기원전325년에 죽고 그의 아들 사군(嗣君)이 뒤를 이었다.

사군(嗣君) 5년 기원전320년, 위나라 군주의 칭호가 다시 후(侯)에서 군(君)으로 격하되고, 위나라의 영토라고는 모두 주위의 열국들에게 빼앗기고 복양(濮陽)의 땅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사군이 재위42년 만인 기원전283년에 죽고 그의 아들 회군(懷君)이 섰다.

회군31년 기원전252년, 위(魏)나라가 조현을 올리려 들어간 회군을 잡아서 살해하고 그의 동생을 군주로 세웠다. 이가 원군(元君)이다. 원군은 위왕(魏王)의 사위였다.

원군14년 기원전239년, 진(秦)나라가 위(魏)나라의 동쪽 지방의 땅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에 그 땅에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진나라는 위군(衛君)과 그 백성들을 복양의 땅에서 야왕(野王)㉙으로옮겨 살게 하고 원래의 위(衛)나라 땅은 동군의 관할로 했다.

원군25년 기원전228년 원군이 죽고 그의 아들 각(角)이 뒤를 이었다. 위군 각9년 기원전221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진왕 영정(嬴政)이 최초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위군21년 기원전210년, 진나라의 이세(二世) 황제가 위군(衛君)을 폐하고 서민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위나라의 사직은 끊어지게 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내가 세가에 기록된 기사를 읽다가 위선공(衛宣公)이 태자비의 미모에 혹하여 태자를 살해하고, 태자는 다시 그의 동생 공자수(公子壽)와 서로 죽음을 대신하겠다고 다투다가 모두 죽게 되는 장면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진의 태자 신생(申生)이 여희(麗姬)의 잘못을 감히 세상에 알리지 못한 일과 같으니, 모두가 부친의 명예를 상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국은 죽고 말았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부자가 서로 죽이고, 형제가 서로 죽이니, 어찌 이런 일이 세상에 있단 말인가?」

<위강숙세가 끝>

주석

①성주(成周) :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한 후 전국을 주나라의 본거지인 서쪽은 호경(鎬京)을 중심으로, 동쪽은 성주(成周)를 중심으로 다스렸다. 호경은 지금의 섬서성 장안 부근이고 성주는 낙양이다.

②재재(梓材) : 상서의 편명으로 주공단이 위강숙에게 경계를 주기 위해 쓴 글이다. 서한 때의 공안국(孔安國)이 본편의 이름에 재재라고 붙였다. 재재의 내용은 목수가 목재를 다루듯이 군주도 정치를 행할 때 목수처럼 해야 한다고 했다.

③규구(規矩) : 옛날 장인들이 가지고 다니던 자와 콤파스를 말한다.

④원문은 頃侯厚賂周夷王,夷王命衛為侯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 주해는 『康誥稱命爾侯于東土,又云「孟侯,朕其弟,小子封」,則康叔初封已為侯也。比子康伯即稱伯者,謂方伯之伯耳,非至子即降爵為伯也。故孔安國曰「孟,長也。五侯之長,謂方伯」。方伯,州牧也,故五代孫祖恆為方伯耳。至頃侯德衰,不監諸侯,乃從本爵而稱侯,非是至子即削爵,及頃侯賂夷王而稱侯也』이다. ( 강고(康誥)에 경백(頃伯)을 동쪽 땅의 후(侯)에 명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제후들의 우두머리여! 짐의 동생이여! 나이 어린 봉(封)이여!」라고 한 것은 처음부터 강숙의 작위는 후작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의 아들 강백(康伯)의 백(伯)은 당시의 지방장관에 해당했던 방백(方伯)을 말함이지 강백의 작위가 후작에서 백작으로 강등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공안국의 해설에 따르면 「맹(孟)은 우두머리로 오후(五侯) 즉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장(長)으로 방백을 뜻한다. 방백은 주목(州牧)으로 강숙의 오대손 긍(恆)이 방백에 임명되었다가 경후(頃侯)에 이르러 덕이 무너지자 제후들을 이끌 수 없어 방백의 백(伯) 칭호를 버리고 원래의 후(侯)로 칭하게 되었고 경후가 이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후작의 작위를 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⑤모(旄) : 군주가 사자에게 신표(信標)로 주는 기를 절모(節旄)라 하는데 모(旄)는 그 깃대 끝에 다는 소의 꼬리털을 말한다.

⑥연(燕) : 역사상 북경 부근의 소공 석(奭)이 봉해진 연(燕)과는 다른 길(姞) 성 제후국으로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延津縣) 동북의 남연(南燕)을 말한다. 개국조는 황제(黃帝)의 후예라는 전설상의 백조(伯鯈)다

⑦온(溫) : 현 하남성(河南省) 온현(溫縣). 낙양(洛陽)에서 동쪽 약60km 지점으로 황하(黃河) 북안(北岸)의 도시

⑧적(翟) : 중국 고대의 이민족 이름이다. 적(狄)이라고도 한다. 원래 귀방(鬼方)의 한 지파로 춘추 때 섬서성과 산서성 북부, 하북성 서북에서 내몽고 지역에 퍼져서 거주하면서 당진국을 공격하고 형(邢)과 위(衛)를 패주시켜 나라를 옮기게 했다. 전국 때 백적(白狄)의 일파인 선우(鮮虞)는 중산국을 세웠고, 대부분의 부족은 한족의 제후국들에게 흡수되었다. 나머지 부족은 대막(大漠)의 남산(南山)으로 이주하여 당지의 부족과 결합하여 흉노와 동호족의 선조가 되었다.

⑨손문자(孫文子) : 춘추 때 위(衛)나라의 대부 손림보(孫林父)다. 손량부(孫良夫)의 아들로 문자는 그의 시호다. 위정공(衛定公) 5년 기원전584년 겨울 정공에게 죄를 지어 당진으로 달아났다. 정공12년 기원전577년, 당진국이 손림보를 지원하자 정공은 부득이 그의 작위와 봉읍을 돌려주었다. 후에 대부 영식(寧殖)과 모의하여 헌공(獻公)을 폐위시키고 정공의 동생 상공(殤公)을 옹립했다. 헌공은 달아나 제나라에 몸을 의탁했다. 상공12년 기원전547년 대부 영희(寧喜)와 권력을 다투었다. 상공이 영희를 시켜 손림보를 토벌하자 그는 다시 달아나 당진국으로 들어가 군사를 얻어 헌공을 복위시키고 영희를 죽였다.

⑩영혜자(寧惠子) : 춘추 때 위(衛)나라의 대부로 이름은 식(殖)이다. 기원전559년 대부 손림보(孫林父)와 힘을 합쳐 위헌공(衛獻公)을 쫓아내고 상공(殤公)을 세웠다. 위헌공은 달아나 제나라에 몸을 의탁했다.

⑪숙(宿) :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濮陽市) 북쪽에 있었던 고을로 좌전에는 척(戚)이라고 했다.

⑫교언의 마지막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彼何人斯 居河之麋(피하인사 거하지미) 대체 저 사람이 누구이길레, 하수의 물가에 산다고 하는가? : 無拳無勇 職爲亂階(무권무용 직위란계) 주먹도 용맹도 없으면서, 덮어놓고 난리의 불씨 일구네: 旣微且尰爾勇伊何(기미차종 이용이하) 다리는 부어올라 종기가 났으니, 그대에게 무슨 용맹 있겠는가? : 爲猶將多 爾居徒幾何(위유장다 이거도기하) 하는 일이라곤 모략뿐이지만, 그대와 같은 패거리 얼마나 되랴?(전문을 미주로 전재했다.)

⑬거백옥(蘧伯玉) : 춘추 때 위나라 대부. 이름은 원(瑗)이고 자가 백옥(伯玉)이다. 위헌공(衛獻公) 18년 기원전559년 위헌공이 신하들에게 쫓겨나자 그도 란을 피해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후에 위나라에 돌아와 위상공(衛殤公), 위양공(衛襄公)을 모시며 어진 이름을 얻었다. 영공이 서자 사어(史魚)의 추천으로 다시 조정에 나와 영공의 총애를 받았다. 오나라의 계찰(季札)이 중원을 유람하기 위해 위나라에 들려 「거백옥이야 말로 군자로다!」고 말했다.공자와 교유하였고 공자 논어에 두 번 나온다. 처음은 헌문(獻文) 26편에 나오고 두 번 째는 위영공6편에 「군자로다, 거백옥은!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벼슬에 나아가고, 도가 없을 때는 거두어 물러나는 구나!(君子再擧伯玉. 邦有道 則仕. 邦無道則可卷而懷之)」라는 구절이 있다.

⑭취읍(聚邑) : 제나라의 성읍이나 정확한 소재는 미상이다.

⑮계자(季子) : 춘추 때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다. 연릉(延陵)에 봉해져 연릉계자(延陵季子)라고 부른다. 원래 수몽이 오왕의 자리를 네 아들 중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해서 계찰에게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계찰은 형이 있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수몽이 그 자리를 장자인 제번(諸樊)에게 물려주면서 이후로는 오나라의 군주 자리는 부자상속 대신에 형제상속을 행하여 계찰에게 왕위가 돌아가도록 유언을 하고 죽었다. 제번이 그 부왕의 뜻을 받들어 그 자리를 넘겨주려 했으나, 계찰은 받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오왕의 자리는 제번에 이어 이매(夷昧), 여제(餘祭)등으로 차례로 형제간에 이어졌다. 여제4년 기원전544년 계찰은 여제의 명을 받들어 노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례(周禮)를 살펴보고 그 뜻을 모두 알고 있어 노나라 사람들의 공대를 받았다. 다시 제(齊), 정(鄭), 당진(唐晉) 등의 나라를 방문하여 당시의 현인들로 이름이 난 안영(晏嬰), 자산(子産), 숙향(叔向) 등이 명현(名賢)들과 교유를 맺고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후에 중국 역사의 흐름은 대체적으로 계찰이 예견한 대로 진행되었다. 여제가 죽자 오왕의 자리는 그의 아들 왕료(王僚)가 이었다. 기원전512년 왕료의 명을 받들어 당진에 사신으로 가 있던 중에, 왕료가 제번의 아들인 공자광(公子光)에 의해 살해되었다. 공자광이 오왕 합려(閤閭)다. 계찰은 귀국하여 합려에게 사신으로 갔다온 일을 복명한 후에 왕료의 묘를 찾아 곡을 올렸다. 후에 공자(孔子)가 친히 계찰이 묻힌 무덤을 찾아가서 『유오연릉계자지묘(有吳延陵季子之墓)』라고 비문을 썼다. 계찰은 공자보다 한 세대 전 사람이다.

⑯경(磬) : 옥이나 돌로 만든 일종의 타악기다.

⑰공성자(孔成子) : 춘추 때 위나라의 정경(正卿)으로 이름은 증서(蒸鉏)다. 위정공(衛定公) 때 경(卿)의 자리에 올라 헌공(獻公)과 상공(殤公)을 거쳐 양공(襄公)이 서자 정경(正卿)이 되었다. 양공이 죽자 양공의 둘째 아들 원(元)을 군주로 세웠다. 원이 위영공(衛靈公)이다.

⑱자영(子郢) : 위영공의 막내아들이다. 자는 자남(子南)이다.

⑲포자(鮑子) : 춘추 때 제나라의 정경(正卿)으로 이름은 포목(鮑牧)이다. 제경공(齊景公) 때 공자 양생(陽生)과 사이가 나빴다. 경공이 죽자 그는 전걸의 협박을 받고 경공의 적자 안유자(晏孺子)를 퇴위시키고 공자 양생(陽生)을 제나라 군주 자리에 앉혔다. 이가 제도공(齊悼公)이다. 도공 재위4년에 그는 도공을 시해했다. 제나라 사람들의 도공의 아들 임(任)을 군주로 세웠다. 이가 간공(簡公)이다.

⑳공문자(孔文子)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480년에 죽었다. 춘추 때 위나라의 정경(正卿)이며 이름은 어(圉)다. 논어에는 중숙어(仲叔圉)라고 되어 있다. 노애공 원년 기원전494년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제와 노 연합군을 도와 당진(唐晉)을 공격하여 당진의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를 구했다. 영공이 죽자 그는 영공의 손자이며 괴외(蒯聵)의 아들인 첩(輒)을 군주로 세우고 노나라의 정경이 되어 정사를 주관했다. 위나라의 현인이라는 명성이 있었다. 공자가 그에 대해 「학문을 즐겨하고 이해가 빨랐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라고 칭송했다.

㉑세가지의 사죄를 면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세 가지의 죽을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혼량부에게 허락하여 특권을 부여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죽을죄를 세 번 저지르더라도 모두 사면하겠다는 설이다. 후에 혼량부는 출공 첩의 아들이며 장공의 손자로 태자의 자리에 오른 질(疾)에게 잡혀 죽었다. 그 때 혼량부에게 적용한 죄명은 군주만이 입을 수 있는 자색 옷을 입은 행위, 양팔이 없는 여우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착용한 행위, 칼을 허리에 찬 채로 식사를 한 행위 등 세 가지 죽을죄에, 해외에 망명 중인 출공 첩(輒)을 불러들여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를 한 가지 더 추가해서 살해했다. (『左傳哀公17年 春』 衛侯爲虎幄于藉圃, 成, 求令名者而與之始食焉. 太子請使良夫. 良夫乘衷甸兩牡, 紫衣狐裘. 至, 袒裘, 不釋劍而食. 太子使牽以退, 數之以三罪而殺之).

㉒중유(仲由) :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의 이름이다. 공자보다9세 연하다. 이때 자로는 위나라에 출사하여 공(孔)씨의 읍재(邑宰)를 지내고 있었다.

㉓자고(子羔) : 공자의 제자 고시(高柴)의 자(字)로 공자보다30세 연하다. 기원전521년에 태어났으나 죽은 해는 알 수 없다. 신장은5척에 체 못 미쳤으며 그 외모는 못났다. 공자는 그를 가르칠 때 우직하다고 평하고 자고로 인해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면 안 되는 이유를 알았다고 했다.

㉔융주(戎州) : 지금의 산동성 조현(曹縣) 동남 쪽의 고을로 융인들이 세운 성읍이었다. 12제후연표에는 ‘장공이 융주의 사람들을 욕보이자 융주인과 조간자가 군사를 내어 장공을 공격했다.’라는 기사가 있다.

㉕공자기(公子起) : 영공(靈公)의 아들이다.

㉖좌전에는석포(石圃)로 되어 있다.

㉗索隱按:左傳,莊公本由 晉趙氏納之, 立而背晉,晉伐衛, 衛人出莊公, 立公子般師。晉師退,莊公復入, 般師出奔。初,公登城見戎州己氏之妻髮美, 髡之以為夫人。又欲翦戎州,兼逐石圃,故石圃攻莊公 。莊公懼, 踰北牆折股, 入己氏,己氏殺之。 今系家不言莊公復入及死己氏,直云出奔, 亦其疏也。 又左傳云衛復立般師, 齊伐衛, 立公子起, 執般師。 明年, 衛石圃逐其君起, 起奔齊, 出公輒復歸 。是左氏詳而系家略也。

㉘진본기에의하면 공손앙이 진나라에 들어간 해는 효공 원년인 기원전361년이고6국연표에 의하면 성후는 효공과 즉위년이 같다고 했다. 따라서 공손앙이 진나라에 들어간 해는 성후11년이 아니라 성후 원년인 기원전361년이다.

㉙야왕(野王) : 지금의 하남성 황하 북안에 있는 심현(沁縣)에 있었던 성읍이다. 춘추 때는 당진(唐晉), 전국 때는 한(韓)나라 영토였다. 기원전262년,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진시황이 위(魏)나라의 동쪽 땅과 위(衛)나라를 점령하고 그 땅에 동군을 설치한 후 위군(衛君)을 야왕으로 옮겨 그 사직을 보존시켜 주었다.

미주: 巧言(교언) 전문은 다음과 같다. 교언은 소아(小雅) 소민지습(小旻之什)의 한편이다.

巧言(교언)

一.

悠悠昊天 曰父母且(유유호천 왈부모차)

아득하고 높은 저 하늘은 부모와 같다고 이르거늘

無罪無辜 亂如此憮(무죄무고 란여차무)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어지러움이 이와 같이 크단 말인가?

昊天已威 予愼無罪(호천이위 여신무죄)

위대한 하늘이여 저는 죄가 없습니다.

昊天泰憮 予愼無辜(호천태무 여신무고)

하늘의 위엄이 실로 크다 해도 저는 정말로 죄가 없습니다.

유유(悠悠)는 원대한 모양이다. 차(且)는 어사(語詞)다. 무(憮)는 큼이다. 이(已), 태(泰)는 모두 심함을, 신(愼)은 살핌이다.

참소에 상심한 대부가 하늘에 하소연하며 말했다. 「사람의 부모가 되는 원대한 하늘이 어찌하여 죄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난리를 만나게 하여 이처럼 큰 재난을 당하게 하는가? 하늘의 위엄이 실로 크다 하나 저는 정말로 죄가 없습니다.」

이는 스스로 하소연하여 재난을 면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二.

亂之初生 僭始旣涵(란지초생 참시기함)

난리가 일어남은 참소가 받아들여지기 때문이고

亂之又生 君子信讒(란지우생 군자신참)

난리가 또다시 발생함은 군자가 참언을 믿기 때문이다.

君子如怒 亂庶遄沮(군자여노 란서천저)

군자가 노하면 난리는 금방 멈추고

君子如祉 亂庶遄已(군자여지 란서천이)

군자가 복을 내리면 난리는 금방 멈춘다.

참시(僣始)는 불신의 실마리이다. 함(涵)은 용서한다는 말이다. 군자(君子)는 임금을 가리킨다. 천(遄)은 빠름이요, 저(沮)는 그침이다. 지(祉)는 기뻐하는 희(喜)와 같다.

난리가 생기는 이유는 믿지 못할 참인(讒人)의 말을 왕이 그 진위를 살피지 않음에서 연유하고, 난리가 또다시 발생하는 이유는 이미 그 참인을 믿고 썼기 때문이다. 군자가 믿지 못할 말을 하는 참인을 노하여 책망하고 현자의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아들인다면 난리를 빨리 그치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참언에 솔깃하여 받아들이기를 끊이지 않으니 난리가 그치지 않는다. 때문에 참언하는 무리들은 날로 기승을 부리고 군자는 날로 병이 든다. 송나라 때 문인 소식(蘇氏)가 말하기를 「소인배가 그 임금에게 참소할 적에는 반드시 적은 일부터 시작하니, 처음에 참언을 던져보아 임금이 용납하고 막지 않으면 말을 꺼려야 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다시 참언은 진전하게 되어 이윽고 임금이 믿고 따르게 되어 난리가 일어나게 된다.」라고 했다.

三.

君子屢盟 亂是用長(군자루맹 란시용장)

군자께서 맹세만 자주 하신 까닭에 난리는 더욱 더 자라났고

君子信盜 亂是用暴(군자신도 란시용폭)

군자께서 도적의 말을 믿으신 까닭에 난리는 더욱 사나워졌으며

盜言孔甘 亂是用餤(도안공감 란시용담)

도적의 말 달게 받아들였기에 난리는 더욱 심해졌네

匪其止共 維王之邛(비기지공 유왕지공)

사람들이 맡은 일에 충실치 않으니 임금에게 재앙만 될 따름이네!

루(屢)는 자주이다. 맹(盟)은 이웃나라에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희생을 죽이고 피를 발라서 신에게 아뢰고 서로 약속하는 의식이다. 도(盜)는 참인(讒人)을 가리키고 담(餤)은 나아감이요, 공(邛)은 병이 듬이다.

군자가 난리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여러 번 맹약하여 서로 약속만한다면 난리는 이 때문에 조장되고, 군자가 참소를 막지 못하고 도적을 믿고 충성된 사람을 학대한다면 난리는 더욱 포악해진다. 참언을 아름답게 여기기를 단것 먹듯이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맛을 보게 하여 싫증나게 하지 않는다면 난리가 이 때문에 진척된다. 그러나 참인은 능히 맡은 바 직무를 행하지 못하니 오로지 왕에게는 재앙일 뿐이다. 그래서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을 다스림에는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하기에는 이로우니, 참언이 달다 하여 기뻐한다면 나라는 위태롭게 되는 법이다.

四.

奕奕寢廟 君子作之(혁혁침묘 군자작지)

성대한 저 종묘는 군자께서 힘들여 지으셨으며

秩秩大猷 聖人莫之(질질대유 성인막지)

질서정연한 태도는 성인이 도모해서 정하셨다.

他人有心 予忖度之(타인유심 예촌탁지)

남들이 품은 마음 미루어 헤아리긴 어렵지 않으니

躍躍毚兎 遇犬獲之(적적참토 우견획지)

쏜살같이 달리는 약은 토끼도 사냥개 만나면 잡히는 법이지!

혁혁(奕奕)은 큼이요, 질질(秩秩)은 차례가 있음이다. 유(猷)는 큰 길이요 막(莫)은 정함이다. 적적(躍躍)은 빨리 뛰는 모양이고 참(毚)은 교활한 토끼다.

크고 빛나는 저 종묘는 군자가 지었고 질서정연한 큰 도리는 성인이 지어서 타인의 마음을 내가 헤아릴 수 있고, 또 뛰어다니는 교활한 토끼가 개를 만났음을 비유했다. 그래서 참인들의 마음을 내가 모두 얻어서 능히 그 정을 숨길 수 없다고 했다.

五.

荏染柔木 君子樹之(임염유목 군자수지)

저 부드러고 좋은 나무는 군자가 심었고

往來行言 心焉數之(왕래행언 심언수지)

오가며 주고받은 하찮은 말은 마음으로 분별해야 하네

蛇蛇碩言 出自口矣(이이석언 출자구의)

세상을 기만하는 큰 소리는 입으로 낼 수 있다지만

巧言如簧 顔之厚矣(교언여황 안지후의)

피리 불 듯 교묘한 말은 뻔뻔스러운 자들이 하지

임염(荏染)은 부드러운 모양이고 유목(柔木)은 오동나무 등과 같은 좋은 나무로 재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나무다. 행언(行言)은 길가면서 나누는 말이다. 수(數)는 변별함이다. 이이(蛇蛇)는 편안하며 느릿느릿하게 하는 말이고 석(碩)은 크다는 뜻이니, 좋은 뜻의 말이다. 안후(顔厚)는 후안무치의 뜻으로 수치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부드러운 나무는 군자가 심었고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는 말은 마음속에서 능히 분별할 수 있다. 좋은 말(善言)이 입에서 나옴은 마땅하거니와 생황과 같은 교묘한 말은 어찌 입에서 낼 수 있는가. 잘못된 말도 한갓 부끄러워하건만 저 얼굴이 두꺼운 자들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교언에 능한 자는 치욕을 모른다」라고 했으니, 참언을 하고도 얼굴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를 지칭하셨다.

六.

彼何人斯 居河之麋(피하인사 거하지미)

대체 저 사람이 누구이건대 하수의 물가에 산다고 하는가?

無拳無勇 職爲亂階(무권무용 직위란계)

주먹도 용맹도 없으면서 덮어놓고 난리의 불씨 일구네

旣微且尰爾勇伊何(기미차종 이용이하)

다리는 부어올라 종기가 났으니 그대에게 무슨 용맹 있겠는가?

爲猶將多 爾居徒幾何(위유장다 이거도기하)

하는 일이라곤 모략뿐이지만 그대와 같은 패거리 얼마나 되랴?

하인(何人)은 참인을 가리키는 말로 천히 여기고 미워했으나 그 이름을 알지 못하여 하인(何人)이라 했다. 사(斯)는 어조사이고 수초(水草)가 자라나는 물가를 미(麋)라 한다. 권(拳)은 힘을 쓴다는 뜻이고 계(鷄)는 사다리다. 정강이뼈에 난 부스럼을 미(微)라 하고 다리에 난 종기를 종(尰)이라 한다. 유(猶)는 꾀요, 장(將)은 크다는 뜻이다.

참소하는 사람이 음습한 땅에 살면서 비록 힘이 없어 난리를 일으킬 수는 없으나 모함하는 말로 일으킨 분란에 사다리를 만들어 난리로 연결시킨다. 또한 비록 용맹스럽지는 않지만 남을 모함하는 데에는 능하니 필시 돕는 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와 함께 사는 무리들은 얼마나 되겠느냐며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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