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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1:47:155419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4.연(燕)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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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세가4. 연소공(燕召公)

소공(召公) 석(奭)은 주왕실과 동성인 희(姬)성이다. 주무왕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를 창건할 때 소공을 연(燕)에 봉했다. 성왕(成王)이 재위시 소공은 삼공(三公)에 임명되어 섬(陝)1) 이서를 다스리고 섬 이동은 주공이 다스렸다. 성왕이 나이가 어렸음으로 주공이 섭정의 신분으로 국가의 대권을 잡고 마치 천자처럼 행동했다. 소공이 주공을 의심하자 『군석(君奭)』이란 글을 써서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그래도 소공이 의심을 풀지 않자 주공은 은나라 때의 역사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탕(湯) 임금에게는 이윤(伊尹)2)이라는 어진 신하가 있어 그 공덕은 하늘을 감동시켰소. 또 태무제(太戊帝)3) 때에는 이척(伊陟)4)이나 신호(臣扈)5)와 같은 현신이 공덕을 쌓아 상제까지 미치게 했고 무함(巫咸)6)은 나라의 왕실을 잘 보좌하여 정치를 일신시켰소. 또 조을제(祖乙帝) 때는 무현(巫賢)과 같은 신하가 있었고, 무정제(武丁帝) 때는 감반(甘般)과 같은 대신이 있었소. 모두가 현능한 사람으로써 신하의 도리를 다하여 온힘을 기우려 왕을 보좌하여 상왕조를 안정시켰소.」 그때서야 비로서 소공은 주공의 섬정에 대해 수긍했다.

  소공이 주나라의 서방을 다스릴 때 백성들 모두는 그를 따랐다. 소공이 향읍을 순시하여 형벌을 정하고 정사를 볼 때는 감당나무 밑에서 천막을 치고 행했다. 그래서 후백(侯伯)과 같은 귀족에서 일반 서민에 이르기 까지 각기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여 자기의 할 바를 잃은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소공이 죽자 백성들은 그의 업적을 사모하여 감당나무를 감히 베어버리지 못하게 하고 노래를 불러 칭송하며 감당(甘棠)7)이라는 시를 지었다.

혜후는 소공부터 9세다. 연혜후(燕惠侯)가 즉위했을 때는 기원전 841년 주려왕(周厲王)이 국인들의 폭동으로 체(彘)로 달아난 공화(共和) 때였다.

혜후가 죽고 아들 리후(釐侯)가 섰다. 기원전 827년 이 해에 공화가 끝나고 주선왕(周宣王)이 즉위했다.

리후 21년 기원전 806년, 정환공(鄭桓公) 희우(姬友)가 정(鄭)에 봉해졌다. 정은 지금의 섬서성 화현(華縣)이다.

리후가 재위 36년만인 기원전 792년에 죽고 아들 경후(頃侯)가 뒤를 이었다.

경후 20년 기원전 771년 주유왕(周幽王)이 음란했음으로 견융(犬戎)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해에 섬진(陝秦)이 처음으로 제후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경후 24년 기원전 767년 경후가 죽고 아들 애후(哀侯)가 섰다. 애후가 재위한지 2년 만인 기원전 765년에 죽고 아들 정후(鄭侯)가 섰다.

정후가 재위 36만인 기원전 728년에 죽고 아들 목후(穆侯)가 섰다. 목후 7년 기원전 722년은 춘추(春秋)가 시작되는 노은공(魯隱公) 원년이다.

목후가 재위 18년 만인 기원전 710년에 죽고 아들 선후(宣侯)가 섰다.

선후가 선지 13년만인 기원전 698년에 죽고 아들 환후(桓侯)가 섰다.

환후 재위 7년 만인 기원전 690년에 죽고 아들 장공(莊公)이 섰다.

장공 12년 기원전 679년 제환공(齊桓公)이 처음으로 패자를 칭하기 시작했다.

장공 16년 기원전 675년 송(宋)、위(衛)와 함께 주혜왕(周惠王)을 공격했다. 주혜왕이 온(溫)으로 달아나자 혜왕의 동생 퇴(穨)를 주왕의 자리에 올렸다.

장공 17년, 기원전 674년, 정나라가 연나라의 중보(仲父)를 사로잡고 혜왕을 주왕으로 복위시켰다.

장공 27년, 기원전 664년, 산융(山戎)이 침략하자 제환공이 연나라를 구하기 위해 북정(北征) 길에 올라 산융을 정벌하고 귀환했다. 연나라 군주가 제환공을 나라 경계 밖에까지 나가 환송했다. 이에 환공은 연나라가 군주가 이른 곳까지의 땅을 떼어 연나라 영토로 삼게 하고 다른 제후들과 함께 주천자에게 조공을 올리도록 해서 주성왕 때 신하로써 맡은 직분을 온 몸을 다한 소공의 행위를 본받도록 했다. 다시 연장공으로 하여금 소공이 행한 법도를 새롭게 밝혀 따르도록 했다.

장공이 재위 33년만인 기워전 658년에 죽고 아들 양공(襄公)이 섰다.

양공 26년 기원전 632년 성복(城濮)8)에서 초군(楚軍)을 크게 무찌른 당진의 문공(晉文公)이 제후들을 불러 천토(踐土)에서 회맹을 주재하고 맹주가 되었다.

양공 31년 기원전 627년, 섬진(陝秦)의 군대가 효산(崤山)의 계곡에서 당진군에게 대패했다.

양공 37년 기원전 621년 섬진의 목공(穆公)이 죽었다.

양공이 재위 40년만인 기원전 618년에 죽고 환공(桓公)이 그 뒤를 이었다.

환공이 재위 16년만인 기원전 602년에 죽고 선공(宣公)이 섰다.

선공이 재위 15년만인 기원전 587년에 죽고 소공(昭公)이 섰다.

소공이 재위 13년만인 기원전 574년에 죽고 무공(武公)이 섰다. 이 해에 당진이 극씨의 세 대부를 주멸했다.

무공이 재위 19년만인 기원전 555년에 죽고 문공(文公)이 즉위했다.

문공이 재위 6년만인 기원전 549년에 죽고 의공(懿公)이 섰다.

의공 원년 기원전 548년, 제나라의 대부 최저(崔杼)가 그 군주 장공(莊公)을 시해했다.

의공이 재위 4년만인 기원전 545년에 죽고 아들 혜공(惠公)이 새로 섰다.

혜공 원년 기원전 544년, 제나라의 대부 고지(高止)가 도망쳐 연나라로 망명해 왔다.

혜공 6년 기원전 539년, 혜공은 총애하는 신하들이 많이 두었으나 후에 실증이 나서 다른 신하들을 버리고 송(宋)이라는 총신만을 중용하려고 했다. 이에 여러 대부들이 힘을 합쳐 송을 죽였다. 혜공이 두려워하여 제나라로 도망쳤다.

혜공 4년 기원전 541년, 제나라의 고언(高偃)이 당진으로 들어가 제나라와 함께 힘을 합쳐 연나라를 정벌하고 그 군주를 복위시키자고 청했다. 당진의 평공이 허락하고 제나라와 힘을 합쳐 연나라를 정벌한 후에 혜공을 복위시켰다.

혜공 9년 기원전 536년, 혜공이 바로 죽고 도공(悼公)이 섰다.

도공이 재위 7년 만인 기원전 529년에 죽고 공공(共公)이 섰다.

공공이 재위 5년 만인 기원전 524년에 죽고 평공(平公)이 섰다. 이 해에 당진의 공실이 쇠약해지고 육경(六卿)의 힘이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평공 18년 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闔閭)가 초나라를 무찌르고 영도(郢都)에 입성했다.

평공이 재위 19만인 기원전 505년에 죽고 간공(簡公)이 섰다.

간공이 재위 12년 만인 기원전 493년에 죽고 헌공(獻公)이 섰다. 당진의 조간자(趙簡子) 앙(鞅)이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조가(朝歌)에서 포위했다.

헌공 12년 기원전 48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 군주 간공(簡公)을 시했다.

헌공 14년 기원전 479년 공자가 죽었다.

헌공이 재위 28만인 기원전 465년에 죽고 효공(孝公)이 섰다.

 효공 12년 기원전 453년 당진의 한(韓)、위(魏)、조(趙) 삼가가 지백(知伯)을 멸하고 그 영지를 나누어가졌다. 이때부터 한위조 삼가는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효공이 재위 15년 만인 450년에 죽고 성공(成公)이 섰다.

성공이 재위 16만인 기원전 434년에 죽고 민공(湣)이 섰다.

민공이 재위 31년만인 기원전 403년에 죽고 리공(釐公)이 섰다. 이 해에 한위조 삼진(三晋)이 제후의 대열에 섰다.

리공 30년 기원전 373년, 연나라가 제나라 군사를 임영(林營)에서 패주시켰다. 이 해에 리공이 죽고 환공(桓公)이 섰다.

환공이 재위 11년만인 기원전 362년 죽고 문공(公立)이 섰다. 이 해에 섬진의 헌공(獻公)이 죽었다. 섬진의 국세는 더욱 강대해졌다.

문공 19년 기원전 343년, 제위왕(齊威王)이 죽었다.

문공 28년 기원전 334년 소진(蘇秦)이 연나라에 들어와 문공을 접견하고 유세했다. 문공은 소진에게 거마와 금과 비단을 주어 조나라에 보냈다. 조숙후(趙肅侯)가 소진을 재상으로 등용했다. 이로써 소진은 육국을 진나라에 대항시키기 위해 결맹을 맺게 하고 합종장(合從長)이 되었다. 진혜왕(秦惠王)이 딸을 연태자의 부인으로 시집보냈다.

문공이 재위 29만인 기원전 333년에 죽고 태자가 뒤를 이었다. 이가 이왕(易王)이다.

이왕이 처음 섰을 때 제선왕(齊宣王)이 연나라의 국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쳐들어와 연나라의 성 10개를 빼앗아갔다. 소진이 제나라에 들어가 유세하여 빼앗아 간 10개의 성을 찾아왔다.

이왕 10년 기원전 323년 연나라 군주가 왕호를 칭하기 시작했다. 이 해에 연문공의 부인과 사통하고 죽음을 두려워한 소진이 이왕을 설득하여 제나라로 들어가 반간활동으로 제나라를 어지럽히겠다고 자청했다.

이왕이 재위 21년만인 기원전 312년에 죽고 아들 연왕 쾌(噲)가 섰다.

쾌가 연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제나라 사람이 자객을 시켜 소진을 살해했다. 소진이 연나라에 있을 때 상국 자지(子之)와 혼인 관계를 맺고 다시 동생 소대(蘇代)는 자지와 교제했다. 이윽고 소진이 죽자 제선왕은 다시 소대를 등용했다.

연왕 쾌 3년 기원전 318년,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 및 삼진(三晋)과 함께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연나라의 상국이 된 자지는 더욱 귀한 신분이 되어 권세가 커지자 왕 대신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소대가 제나라를 위해 연나라에 사자로 왔다. 연왕이 소대에게 물었다.

「제왕은 어떤 사람인가?」

소대가 대답했다.

「패왕이 될 수 없습니다.」

「어째서인가?」

「제왕이 신하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대는 연왕을 격앙시켜 자지를 더욱 존귀하게 만들려는 속셈에서였다. 그래서 연왕은 자지를 더욱 신임했다. 자지는 소대에게 황금 백 일(鎰)을 주어 마음대로 쓰게 했다.

녹모수(鹿毛壽)가 연왕 쾌에게 말했다.

「상국 자지에게 선양하심이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요임금을 현능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천하를 허유(許由)에게 선양하려고 했다가 허유가 받지 않았음으로 천하에 성인이라는 명예를 얻고 또한 천하도 잃지 않은 실리를 취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나라를 자지에게 선양하신다면 자지는 틀림없이 받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한다면 왕께서는 요임금과 같이 명예와 실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연왕 쾌가 나라를 자지에게 맡겼음으로 자지의 몸은 더욱 존귀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다시 말했다.

「우임금이 백익(伯益)을 천거하여 자기의 후계자로 삼고서도 아들 계(啓)와 친한 사람들을 관리로 임명했습니다. 이윽고 우임금이 나이가 들자 계의 사람됨이 천하를 맡기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임금의 자리를 백익에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계와 관리들은 무리를 지어 백익을 공격하여 왕위를 빼앗아 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임금이 천하를 백익에게 전했다는 이름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계로 하여금 스스로 왕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 왕께서 명의상으로는 나라를 자지에게 맡겼다고 하나 실제로는 국사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들을 태자의 사람이 아닌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이에 연왕은 봉록이 3백 석 이상되는 관리들의 인장을 모두 거두어 자지에게 주어 자지로 하여금 임용하다록 했다. 자지는 남면하여 왕의 자리에 앉아 왕권을 행사했고 쾌는 늙었음으로 정사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지의 신하가 되었다. 이에 연나라의 국사는 모두 자지의 손에 들어갔다.

자지가 연왕의 자리에 오른지 3년 되는 해인 기원전 314년, 연나라에 대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장군 시피(市被)와 태자 평(平)이 모의하여 자지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제나라의 여러 장군들이 제민왕(齊湣王)에게 말했다.

「이 기회를 이용하면 틀림없이 연나라를 점령할 수 있습니다.」

제선왕이 사람을 보내 태자 평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다.

「의로운 생각을 품고 사사로움을 폐하여 공의를 세우려는 태자께서 군신 간의 도리를 새롭게 하고 부자의 지위를 분명히 밝히려고 한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과인의 나라는 작아 태자를 위해 선봉이나 후위를 맡기에는 힘이 부족하나 태자께서 영을 내리신다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태자가 제왕의 말을 듣고 사람들을 모아 당을 결성하여 장군 시피에게 이끌게 하여 공궁을 포위한 후에 자지를 공격하게 했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 이에 장군 시피와 관리들은 방향을 바꿔 오히려 태자 평을 공격했다. 장군 시피가 싸움 중에 죽자 태자는 그의 시체를 거리에 전시했다. 이로 인해 내란은 수개 월 동안 계속되어 죽은 사람만 수만 명에 달해 백성들은 모두 공포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관리와 국인들은 불화하고 반목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맹자가 제왕에게 말했다.

「지금 연나라를 정벌하면 주문왕과 주무왕이 세운 공적에 필적할만한 업적을 세울 수 있으니 결코 이 기회를 노치면 안 됩니다.」

제왕이 장자(章子)에게 령을 내려 오도(五都)의 군사와 북쪽 땅의 무리들을 이끌고 연나라로 쳐들어갔다. 연나라의 장사와 군사들은 싸우려는 생각을 버리고 성문도 닫지 않고 저항하지 않았다. 연왕 쾌는 싸움 중에 죽고 제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연의 자지는 왕이 된지 2년 만에 죽자 연나라 사람들은 태자 평을 군주로 세웠다. 이가 연소왕(燕昭王)이다.

 연나라가 침략을 당해 망하기 직전에 연왕의 자리에 오른 연소왕은 몸을 낮추고 많은 재물로 현자들을 초빙하려고 하면서 곽위(郭隗)에게 말했다.

「우리 나라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습격해온 제나라로 인해 거의 망할뻔 했소. 나는 연나라는 작고 힘이 약해 원수를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소. 정성을 다하여 현능한 인재를 얻어 같이 나라를 다스려 선왕이 당한 치욕을 설욕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이오. 선생께서 그런 사람을 알고 있으면 알려주시오. 내가 친히 가서 모셔오겠소.」

곽외가 대답했다.

「왕께서 반드시 현사를 모셔오려고 하신다면 먼저 이 곽외를 모십시오. 그러게 하시면 저보다 더 현능한 사람이 어찌 천리 길인들 마다하고 달려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소왕은 곽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자 악의(樂毅)는 위(魏)나라에서, 추연(鄒衍)은 제나라에서, 극신(劇辛)은 조나라에 각각 달려오고 그밖에 많은 현사들은 천하 사방에서 서로 다투어 연나라로 들어왔다. 연왕은 백성들의 상가를 들려 위로하고 고아들을 돌보아가며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했다.

 연소왕 28년 기원전 284년, 연나라는 부유하게 되었으며 장사와 병졸들은 출격을 즐겨하여 싸움을 가볍게 여기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악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진(秦)、초(楚)、삼진(三晉) 등의 군사들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는 싸움에서 지고 제민왕은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다른 나라 군사들은 철수했으나 연나라는 단독으로 계속해서 제군의 뒤를 추격해서 임치성에 입성하여 제나라의 보기들을 모두 취하고 궁실과 종묘를 불살랐다. 제나라 성읍 중 점령하지 못한 곳은 오로지 요성(聊城), 거성(莒城) 및 즉묵(即墨) 등의 세 성뿐으로 나머지 70여 개의 제나라 성읍은 모두 연나라에 속하게 되어 6년을 다스렸다.

 소왕이 재위 33년 만인 기원전 279년에 죽고 아들 혜왕(惠王)이 섰다.

 혜왕은 태자 때부터 악의와는 사이가 나빴다. 이윽고 그가 연왕의 자리에 오르자 기겁(騎劫)을 대신시키고 악의를 파면했다. 악의는 조나라로 도망쳤다. 즉묵을 지키고 있던 제나라의 전단(田單)이 연군을 공격하여 무찌르고 기겁을 살해했다. 이에 연나라 군사들은 회군하고 제나라는 옛날의 성읍을 모두 수복할 수 있었다. 제민왕은 거성에서 초나라의 구원군 대장 요치(淖齒)9)에 의해 살해당했음으로 그의 아들이 뒤를 이었다. 이게 제양왕(齊襄王)이다.

혜왕이 재위 7년 만인 기원전 272년에 죽자 한(韓), 위(魏), 초(楚) 3국이 연나라를 공격했다. 연무성왕(燕武成王)이 연왕의 자리를 이었다.

무성왕 7년 기원전 265년, 제나라의 전단이 연나라를 공격하여 중양(中陽)을 함락시켰다.

무성왕 13년 기원전 259년, 진나라가 장평(長平) 조나라와 싸워 40여 만의 군사를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10)

무성왕이 재위 14년만인 기원전 258년에 죽고 아들 효왕(孝王)이 섰다.

효왕 원년 기원전 257년, 한단을 포위하고 있던 진군이 물러갔다.

효왕이 재위 3년 만인 기원전 255년에 죽고 아들 연왕 희(喜)가 섰다.

연왕 희 4년 기원전 251년, 진소왕(昭王卒)이 죽었다. 연왕이 상국 율복(栗腹)에게 명하여 조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5백금의 황금을 들고가 연회석 상에서 조왕의 축수를 빌게 했다. 임무를 끝내고 연나라에 돌아온 율복이 연왕에게 복명했다.

「조나라의 장정들은 모두 장평의 싸움에서 죽고 남은 사람들이라고는 고아나 어린 아이들 뿐입니다. 지금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며 조나라를 취할 수 있습니다.」

연왕이 창국군(昌國君) 악간(樂間)을 물러 의견을 물었다. 악간이 대답했다.

「조나라는 사방의 적국과 싸움을 해오면서 그 백성들은 전투에 익숙합니다. 조나라는 정벌할 수 없습니다.」

연왕이 악간의 말을 듣지 않고 말했다.

「내가 다섯 배의 군사를 동원해도 안 되겠소?」

「그래도 불가합니다.」

연왕이 노하자 군신들은 모두 조나라를 공격할 수 있다고 했다. 마침내 2개의 군과 병거 2천 승을 일으켜 율복에게는 일군을 이끌고 나아가 호(鄗)를, 경진(卿秦)에게는 남은 일군을 이끌고 대(代)를 공격하도록 했다. 오로지 대부 장거(將渠) 혼자서 연왕에게 매달려 충간했다.

「이웃 나라와 관문을 열고 서로 통하여 맹약을 맺어 수호하기로 약속하고 5백 금이라는 황금을 보내 그 나라 왕을 축수했으면서, 사자가 돌아와 복명한 말 한 마디로 오히려 공격하자고 하니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군사를 보내도 공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연왕이 듣지 않고 친히 일대의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임하려고 했다. 장거가 연왕이 찬 옥새의 인끈을 붙잡으며 앞을 막았다.

「왕께서 가시면 절대 안 됩니다. 가시더라도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연왕이 장거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나 장거는 계속 울면서 말했다.

「신이 왕의 앞길을 막는 이유는 왕을 위함이지 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윽고 연나라 군사가 송자(宋子)11)에 이르자 조나라가 염파와 악승(樂乘)을 장군으로 삼아 각각 막도록 시켰다. 염파는 율복의 연군을 호(鄗)12) 땅에서 격파하고 악승은 대에서 경진의 군대를 각각 격파했다. 염파는 패주하는 연군의 뒤를 5백 리나 추격하여 결국은 연나라 도성 계(薊)를 포위했다. 연나라가 화의를 청하자 조나라가 받아들이지 않다가 장거가 강화를 맺는 사절로 오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연나라가 장거를 상국으로 임명한 후에 강화를 청해왔다. 조나라는 장거와 화의를 맺고 계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연왕 희 6년 기원전 249년, 진나라가 동주를 멸하고 그 땅에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했다.

연왕 희 7년 기원전 248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유차(榆次)를 포함한 37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그 땅에 태원군(太原君)을 설치했다.

연왕 회 9년 기원전 246년, 이 해에 진왕 정(政)이 즉위했다.

연왕 희 10년, 기원전 245년,조나라가 장군 염파를 시켜 위나라의 번양(繁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해에 조효성왕(趙孝成王)이 죽고 도양왕(悼襄王)이 섰다. 악승을 장군으로 삼아 염파를 대신시키자 염파가 명을 따르지 않고 악승을 공격했다. 악승은 달아나고 염파는 위나라의 대량성으로 망명했다.

연왕 희 12년 기원전 243년, 조나라가 장군 이목(李牧)을 시켜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자 이목은 연나라의 무수(武遂)와 방성(方城)을 함락시켰다. 원래 연나라 장군 극신(劇辛)은 조나라 사람인데 조나라 장군 방훤(龐暖)과 친분이 깊었다. 후에 극신이 연나라로 도망쳐오자 연나라는 극신을 장군으로 삼았다. 연나라가 보니 조나라는 여러 차례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피폐해졌고 또한 명장 염파는 다른 나라로 달아나버리고 대신 방훤을 대장으로 삼았음으로, 옛날 율복이 실패를 복수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피폐한 조나라를 공격하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극신에게 조나라를 공격하면 어떨지 묻자 극신이 대답했다

「방훤은 쉽게 대적할 수 있습니다.」

연나라는 극신을 대장으로 삼아 조나라 정벌군을 다시 일으켰다. 이에 조나라는 방훤을 대장으로 삼아 연군을 맞이해서 싸우도록 했다. 방훤은 연나라 군사 2만 명을 포로로 잡고 극신을 살해했다. 이 해에 진나라는 위나라의 20개 성을 함락시키고 그 땅에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연왕 희 19년 기원전 236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업성(鄴城)을 포함 9개의 성읍을 함락시켰다. 이 해에 조나라의 도양왕이 죽었다.

연왕 희 23년 기원전 232년, 진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태자 단(丹)이 도망쳐 연나라로 돌아왔다.

연왕 희 25년 기원전 230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왕 안(安)을 포로로 잡았다. 진나라는 한나라의 옛 땅에 영천군(潁川郡)을 설치했다.

연왕 희 27년 기원전 228년, 진나라가 조왕 천(遷)를 포로로 잡고 조나라를 멸했다. 조나라의 공자 가(嘉)가 대(代) 땅으로 들어가 스스로 대왕(代王)의 자리에 올랐다.

 진나라가 장차 육국을 멸망시키고 그 군사들이 조만간에 역수에 이르러 화란이 연나라에 밀어닥칠 것을 연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태자 단은 장사 20명을 양성하고 형가(荊軻)를 시켜 독항(督亢)을 할양하는 지적도를 진나라에 바치게 하면서 그 기회를 이용하여 진왕을 찔러 죽이도록 했다. 일이 사전에 드러나 형가를 살해한 진왕은 장군 왕전(王翦)을 시켜 연나라를 공격하다도로 r시켰다. 연왕 희 29년 기원전 226년, 진군이 연나라이 도성 계(薊)를 함락시키자 요동으로 도망쳐 나라를 옮긴 연왕은 태자 단의 목을 베어 진왕에게 바쳤다.

연왕 희 30년 기원전 225년 진나라가 위(魏)나라를 멸했다.

연왕 희 33년 기원전 222년, 진군이 요동을 함락시키고 연왕 희를 포로로 잡아 연나라를 멸했다. 이 해에 진나라 장군 왕분(王賁)은 대왕(代王) 가(嘉)를 포로로 잡았다.

 태사공이 말한다.

「소공 석(奭)은 어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백성들은 그가 정무를 보던 감당나무도 그리워했는데 항차 소공 그 사람에 대해서는 어떠하겠는가? 연나라는 북쪽의 만맥(蠻貉)13)에 대항하고 안으로는 제(齊), 진(晉) 등 강국 사이에 끼어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한 국력이 가장 약한 나라로써 거의 멸망할뻔 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직을 제사는 8-9백 년을 올릴 수 있었으며 희성 제후국으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가 망했으니 어찌 소공의 열렬한 공덕의 덕분이 아니겠는가?」

< 연소공세가 끝 >

주석

1) 섬(陝)/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三門峽市)의 옛 이름이다. 춘추 때 당진에 속했다가 전국 때 한나라 땅이 되었다. 주나라 초기 때 성왕이 어린 나이로 무왕의 뒤를 잇자 주공과 소공이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했다. 섬(陝) 땅을 경계로 해서 섬 이서의 땅은 소공이 섬 이동의 땅은 주공이 분할하여 통치하다가 성왕이 장성하자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지금 쓰고 있는 섬서성의 어원이 되는 고을이다.

2) 이윤(伊尹)/ 탕(湯)임금을 도와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을 토벌한 상(商)나라의 창업공신. 이름은 지(摯)이고 아형(阿衡)이라고도 불렀다. 원래는 탕임금의 비인 유신씨(有辛氏)의 몸종이었다가 탕임금에 의해 발탁되어 상나라의 국정을 맡았다. 후에 탕임금의 뒤를 이은 외병(外丙)과 중임(中壬) 두 임금을 보좌했다. 중임의 죽자 태갑(太甲)을 왕으로 옹립하여 올바른 정치와 법도에 대해 가르쳤다. 태갑이 선지 3년이 되자 정치를 포학하게 하고 탕왕이 세운 법도를 어지럽히자 이윤은 태갑을 쫓아내고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올라 상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3년 후에 태갑이 자기의 과오를 뉘우치자 그는 태갑을 맞아들여 왕위에 복위시켰다. 태갑의 뒤를 이은 옥정(沃丁) 임금 때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윤에 의해 쫓겨난 태갑이 7년 후에 돌아와 이윤을 살해했다고도 한다.

3) 태무제(太戊帝)/ 무제(大戊帝)라고도 한다. 상나라의 10대 왕으로 태강(太康)의 아들이며 옹기(雍己)의 동생이다. 옹기의 뒤를 이어 은나라 왕위에 올랐으나 당시의 은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태무가 이척(伊陟)과 무함(巫咸)을 차례로 재상에 기용하여 은나라에 치세를 오게 하고 국세를 회복했다. 태무는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스려 천명을 공경하고 두려워했으며, 항상 백성들을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 만을 생각하여 감히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지 않았다. 구이(九夷)가 래조하여 조공을 올렸으며 제후들이 귀의함으로써 은나라 왕실은 부흥하였다. 75년 간 재위에 있었으며 시호는 중종(中宗)이다.

4) 이척(伊陟)/ 상나라의 태무제(太戊帝) 의 재상으로 이오(伊敖)라고도 한다. 일찍이 요사스러운 일은 덕을 쌓는 일보다 못하다고 태무제에게 간언을 올려 태무제로 하여금 덕을 쌓고 요사스러운 일을 믿으면 안된다고 했다. 은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박(亳)에서 뽕나무와 닥나무가 함께 자라기 시작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한아름이 넘게 커지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서, 태무제가 두려워서 이척에게 그 영문을 물어보았다. 이척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자니 요사스러움도 덕행을 이기지는 못한다고 하옵니다. 임금께서 행하신 정치에 잘못은 없었는지요? 임금께서는 덕행의 수양에 힘쓰십시오"라고 아뢰었다. 태무제가 이척의 말대로 하자 뽕나무가 말라서 죽었다. 」

5) 신호(臣扈)/ 이척, 무함과 함께 태무제를 보좌하여 은나라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6) 무함(巫咸)/ 상나라 태무제의 대신으로 별의 위치와 모습으로 점을 쳤다. 지금이 강소성 소주시(蘇州市) 오(吳) 출신이다. 태무제 때 나라의 정치가 불안하여 제후들이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척(伊陟)과 함께 태무제를 보좌하여 상나라의 정치를 일신시키자 제후들의 다시 귀의해왔다. 천문과 산술에 밝아 별로 점을 잘 쳤다. 일찍이 별을 관측하여 많은 별에 이름을 붙였다. 저서에 성경(星經)이 있었으나 일실되고 『무함성명(巫咸星名)』이라는 책은 지금까지 전한다. 지금의 강소성 상숙시(常熟市) 우산(虞山)에 아들 무현(巫賢)과 함께 무덤이 있다.

7) 감당(甘棠)/ 시경 국풍 소남(召南)에 실려 있는 시가의 제목이다.

1. 蔽芾甘棠(폐불감당)우거진 감당나무/勿剪勿伐(물전물벌)자르지도 베지도 말라/召伯所茇(소백소발) 소백께서 주무시던 곳이다. 2. 蔽芾甘棠(폐불감당)우거진 감당나무/ 勿剪勿敗(물전물패)자르거나 꺾지도 말라/ 召伯所憩(소백소게)소백께서 쉬시던 곳이다 3. 蔽芾甘棠(폐불감당) 우거진 감당나무/ 勿剪勿拜(물전물배)자르지도 쓰러뜨리지도 말라/ 召伯所說(소백소설) 소백께서 말씀하시던 곳이다.

8) 성복(城濮)/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濮陽市)로 춘추 때 위(衛)나라 땅이다. 이곳에서 기원전 632년 진문공이 이끄는 당진군 및 중원의 제후연합군과 남방의 강국으로 등장한 초나라 대군이 이곳에 회전했다. 성복대전은 춘추시대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전쟁으로 국세가 크게 신장되어 북방의 중원을 노리던 초나라의 북진을 막을 수 있었다.

9) 요치(淖齒)/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84년에 죽은 전국시대 초나라 장수다. 도치(悼齒) 혹은 탁치(卓齒)라고도 한다. 기원전 284년 연나라가 삼진(三晋) 및 진(秦)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할 때 그는 초왕의 명을 받고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했다. 제민왕은 요치를 제나라 상국에 임명했다. 제민왕이 5국 연합군에 쫓겨 거(莒)로 들어오자 요치는 제민왕의 명리에서 힘줄을 뽑아 대들보에 메달아 죽이고 제나라 영토와 재물들을 연나라와 나누어 가지려고 했다. 제민왕을 모시던 왕손고(王孫賈)가 이끄는 거성의 백성들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10) 장평(長平)의 싸움/ 지금의 산서성 고평현(高平縣) 서북. 진나라 장군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가 기원전 260년 이곳에서 조괄(趙括) 이 이끌던 조나라의 군사들을 대파했다. 이어서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여 만 명을 구덩이 속에 파묻어 죽였다. 전국시대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진나라가 승리함으로 해서 중국의 통일은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하게 되었다.

11) 송자(宋子)/ 지금의 하북성 조현(趙縣) 경내로 하북성 성도 석가장시 동남 30키로다.

12) 호(鄗)/ 지금의 하북성 고읍(高邑)으로 석가장시 남쪽 50키로다.

13) 만맥(蠻貊)/ 동이족의 일족인 예맥(濊貊) 족을 낮추어 부르는 말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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