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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가(韓世家)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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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한세가(韓世家)15



905. 韓厥陰德(한궐음덕).

한궐(韓厥)이 음덕을 쌓아



906. 趙武攸興(조무유흥);

조무로 하여금 망한 조씨 집안을 다시 일으키게 도왔다.



907. 紹絶立廢(소절립폐),

끊어진 후손들을 잇게 하고 없어진 제사를 다시 지내게 만들었으니



908. 晉人宗之(진인종지).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받들었다.



909. 昭侯顯列(소후현열),

한소후가 열후들 가운데에서 뛰어난 이유는



910. 申子庸之(신자용지).

신불해(申不害)를 임용했기 때문이다.



911. 疑非不信(의비불신),

한왕 안(安)은 한비를 의심하여 믿지 않았음으로



912. 秦人襲之(진인습지).

결국은 진(秦)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913. 嘉厥輔晉匡周天子之賦(가궐보진광부천자지부),

한궐이 진후를 보좌하여 패업을 계속 잇게 하고

다시 주천자의 존엄함을 높였다.



914. 作《<韓世家>第十五》(작한세가제십오)

이에 그 공을 칭송하여 《한세가제15》를 지었다.


한나라 선조①는 주왕실과 동성의 희(姬) 성이다. 그 후손들 중 한무자(韓武子) 만(萬)이 당진(唐晉)을 섬겨 한원(韓原)②에 봉해졌다. 한무자의 삼세(三世) 손인 한궐(韓厥)이 그들의 식읍 이름을 성씨로 삼았다.

진경공(晉景公)③ 3년 기원전 597년, 사구(司寇) 도안고(屠岸賈)가 란을 일으키려는 생각으로 진영공(晉靈公)④을 시해한 원흉은 조돈(趙盾)이라고 진경공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때 조돈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대신 그 아들 조삭(趙朔)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한궐이 도안고에게 그만두도록 간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그래서 한궐이 조삭을 찾아가 다른 나라로 도망치도록 권했다. 조삭이 말했다.

「그대가 틀림없이 우리 조씨 집안의 제사를 끊어지지 않도록만 해 줄 수 있다면 나는 죽어서도 한을 품지 않겠소!」

한궐이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했다. 이윽고 도안고가 조씨 집안을 멸족시키자 한궐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했다. 그러나 한궐은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가 조삭의 유복자 조무(趙武)를 감춰서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경공 11년 기원전 589년, 한궐과 극극(郤克)⑤이 8백 승의 전차를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전했다. 당진군은 안(鞍)⑥에서 제경공(齊頃公)이 이끄는 제군을 크게 무찌르고 봉추보(逢醜父)를 포로로 잡았다. 이 후로 당진국은 육경(六卿)으로 관제를 바꾸고 한궐을 그 한 자리에 임명했다. 한궐의 시호는 헌자(獻子)다.

진경공 17년 기원전 583년, 경공이 병이 들어 점을 치게 한 바, 점괘가 억울하게 죽은 대업(大業)⑦의 후손들이 불만을 품고 귀신이 되어 앙갚음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한궐이 경공을 뵙고 조성계(趙成季)⑧가 선대에 세운 공을 찬양하고 지금에 이르러 그의 제사가 끊어졌음을 말하여 경공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경공이 한궐에게 물었다.

「아직 그의 자손들 중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한궐이 숨어 지내 살고 있던 조무에 대해 말하자, 경공은 그를 불러 옛날 조씨들의 봉지를 돌려주어 조상들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진도공(晉悼公) 7년 기원전 566년, 한궐이 나이가 들었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퇴했다. 이윽고 헌자가 죽자 그의 아들 한선자(韓宣子) 기(起)⑨가 봉읍의 치소를 주읍(州邑)으로 옮겼다.

진평공(晉平公) 14년 기원전 544년, 오나라의 계찰(季札)⑩이 사자의 임무를 띠고 당진에 들어와서 말했다.

「당진국의 정권은 마지막에 가서 한(韓), 위(魏), 조(趙) 3가의 차지가 되리라!」

진경공(晉頃公) 12년 기원전 514년, 한선자 기(起)는 위(魏)와 조(趙) 양가와 기씨(祁氏) 및 양설(羊舌) 두 집안을 멸하고 그 봉읍인 열 개의 현(縣)으로 만들어 서로 나누어 가졌다.

진정공(晉定公) 15년 기원전 497년, 한선자 기(起)와 조간자(趙簡子) 앙(鞅)이 연합하여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공격했다. 이 해에 한선자가가 죽고 한정자(韓貞子) 수(須)가 뒤를 잇고 봉읍의 치소를 평양(平陽)⑪으로 옮겼다.⑫

한정자(韓貞子)가 죽고 아들 한간자(韓簡子)가 뒤를 이었다. 한간자의 뒤를 아들 장자(莊子)가 잇고, 장자가 죽으니 아들 강자(康子)가 이었다. 한강자가 조양자(趙襄子), 위환자(魏桓子)와 함께 지백(智伯)을 공격하여 그 땅을 나누자 그 영지는 더욱 넓어져 당시의 제후국들 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한강자가 죽고 그 아들 한무자(韓武子)⑬가 섰다. 한무자 2년 기원전 423년, 정나라를 공격하여 그 군주 정유공(鄭幽公)을 살해했다. 무자가 재위 16년만인 기원전 409년에 죽자 그 아들 한경후(韓景侯)가 뒤를 이었다.

한경후 원년 기원전 408년 정나라를 공격하여 옹구(雍丘)⑭를 점령했다. 경후 2년 기원전 407년 정나라가 반격을 가하여 부서(負黍)⑮에서 싸워 한군을 무찔렀다. 경후 6년 기원전 403년, 한위조 3가가 함께 주왕의 승인을 받아 제후의 대열에 섰다. 경후 9년 기원전 400년, 정나라가 한나라의 양책(陽翟)을 공격하여 포위했다. 경후가 죽고 거의 아들 열후(列侯) 취(取)가 즉위했다.

열후 3년 기원전 397년, 섭정(聶政)⑯이 한나라의 재상 협루(俠婁)를 죽였다. 열후 9년 기원전 391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의양(宜陽)⑰으로 진공하여 주변의 6개 성읍을 점령했다. 열후 13년 기원전 387년, 열후가 죽고 그의 아들 문후(文侯)가 즉위했다. 이 해에 위문후(魏文侯)가 죽었다.

한문후 2년 기원전 385년, 한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여 양성(陽城)⑱을 점령했다. 다시 송나라로 계속 진공하여 팽성(彭城)⑲을 함락시키고 그 군주를 포로로 했다. 문후 7년 기원전 380년, 제나라를 공격하여 상구(桑丘)⑳를 함락시켰다. 정나라가 명목뿐인 진(晉)나라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문후 9년 기원전 378년, 한나라가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여 영구(靈丘)㉑를 함락시켰다. 문후 10년 기원전 377년, 한문후가 죽고 그의 아들 애후(哀侯)가 즉위했다.

애후 원년 기원전 376년, 한위조 3가가 진(晉)나라 공실 소유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애후 2년 기원전 375년, 한나라가 정나라를 멸하고 그 도성을 신정(新鄭)으로 옮겼다. 애후 6년 기원전 371년 한엄(韓嚴)이 그 군주 애후를 시해했다. 애후의 아들 의후(懿侯)가 즉위했다.

의후 2년 기원전 369년, 마릉(馬陵)㉒에서 위나라 군사와 싸워 패했다. 의후 5년 기원전 366년, 한의후와 위혜왕(魏惠王)이 택양(宅陽)㉓에서 회견했다. 의후 9년 기원전 362년, 위군이 회수(澮水)㉔에서 한군을 패퇴시켰다. 의후 12년 기원전 359년, 의후가 죽고 그의 아들 소후(昭侯)가 섰다.

한소후 원년 기원전 358년, 진군이 서산(西山)㉕에서 한군을 격파했다. 소후 2년 기원전 357년, 한나라가 송나라에게는 황지(黃池)㉖를, 위나라에게는 주읍(朱邑)㉗을 빼앗겼다. 소후 6년 기원전 353년, 한군이 동주국(東周國)을 공격하여 능관(陵觀)과 형구(邢丘)를 점령했다. 소후 8년 기원전 351년, 신불해(申不害)가 한나라의 재상이 되어 군주가 신하를 다스리는 방법과 수단을 의미하는 술(術)을 펼치고 법가사상에 입각한 치국의 도를 행했다. 이로써 국가가 잘 다스려져 제후들의 침략과 정벌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 소후 11년 기원전 348년, 소후가 진나라에 들어갔다. 소후 24년 기원전 335년, 진나라 군사가 한나라의 의양(宜陽)을 함락시켰다. 소후 25년 기원전 334년, 한해(旱害)가 들자 소후가 고문(高門)을 세우기 시작했다. 굴의구(屈宜臼)가 보고 말했다.

「소후는 살아서는 결코 이 문 밖으로 나갈 수 없으리라! 어째서 인가? 시의(時宜)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시의란 날짜를 뜻하지 않는다. 사람이란 원래 순리에 맞는 때와 순리에 맞지 않는 때에 따라 일을 행해야 하는 법이다. 소후가 일찍이 순리에 따랐다면 지금에 이르러 비로소 고문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작년에는 한나라의 중요한 요충지인 의양성이 진나라에 의해 함락되고 금년에는 한해를 닥쳤음에도 소후는 백성들의 위난을 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사치를 더했다. 즉 소후는 어려울 때에 삼가지 않고 오히려 사치스러운 생활을 더해 순리를 따르지 않았기 대문이다.」

소후 26년 기원전 333년 고문이 완성되었으나, 소후가 죽어 과연 굴의구의 말대로 살아서는 고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소후의 아들 선혜왕(宣惠王)이 즉위했다.

선혜왕 5년 기원전 328년, 장의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선혜왕 8년 기원전 325년, 위군이 한나라의 장수 한거(韓擧)가 이끄는 한군을 격파했다. 선혜왕 11년 기원전 322년, 군주의 칭호를 왕호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이 해에 조왕과 구서(區鼠)에서 회견했다. 선혜왕 14년 기원전 319년, 진나라 군사들이 언릉(鄢陵)까지 진공하여 한군을 무찔렀다.

선혜왕 16년 기원전 317년, 진군이 수어(脩魚)㉘에서 한군을 무찌르고, 다시 탁택(濁澤)㉙에서 한나라 장수 수(䱸)와 신차(申差)를 포로로 잡았다. 한나라가 위급해지자 재상 공중(公仲)㉚이 왕에게 말했다.

「믿을만한 동맹국이 없습니다. 지금 진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하려는 야욕은 오래 전부터 드러난 일입니다. 왕께서는 장의를 통하여 진왕과 강화를 맺고 우리의 이름난 성읍을 뇌물로 바친 후, 군대를 정비하여 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면 이것이야 말로 하나를 주고 둘을 얻는 계책입니다.」

한왕이 좋다고 허락했다. 이어서 나라에 동원령을 내리고 공중치로 하여금 서쪽의 진나라에 사자로 가서 수호를 맺도록 했다.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한 초왕이 진진(陳軫)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진진이 말했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마음먹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진나라는 이미 한나라의 이름난 성좌 한 개를 얻고 동시에 회갑(盔甲)과 병기들로 무장한 후 한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는 행위는 진나라가 그 동안 그들의 사당에 기도하면서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사업입니다. 오늘 드디어 진나라가 바라던 일이 이루어 졌으니 필시 초나라를 향한 공격은 불문가지입니다. 왕께서는 신의 의견을 들으시어, 우선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시고, 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고 선언하십시오. 그리고 명을 발해 전차로 도로를 꽉 메우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사신에게 예물을 후하게 실은 거마를 주어 한나라에 보내어 한나라로 하여금 대왕께서 그들을 구원하려고 한다고 믿게끔 만드시기 바랍니다. 만일 한왕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한나라는 틀림없이 대왕의 은덕에 깊이 감격하여 필시 초나라 공격군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나라와 한나라 사이를 불화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도 설사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초나라를 공격해 온다 할지라도 초나라에게는 그리 큰 위협은 되지 않는 일이고 만일 한나라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진나라와 강화를 맺는 일을 중지하게 되니, 대노한 진나라는 한나라에 대한 원한이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또한 우리 초나라와 수교를 맺은 한나라는 진나라를 태만하게 대하며 높이 받들지 않게 되니 이것이야 말로 진과 한 두 나라 사이를 이간시켜 초나라의 근심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초왕이 훌륭한 계책이라고 말하고 나서 즉시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는 포고령을 내려 전차를 도로 위에 가득 채우게 한 후에 예물을 후하게 실은 거마를 준비하여 사신에게 주어 한나라에 보냈다. 초왕의 사자가 한왕에게 말했다.

「폐국은 작은 나라라 이미 전군을 동원하여 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원컨대 진나라의 군사행동에 대해 귀국이 능히 원하는 바대로 따를 수 있다면 우리 초나라 군주께서는 초군에게 장차 한나라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싸우라는 명을 내리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한왕이 듣고 매우 기뻐하며 진나라와 화의를 맺기 위해 길을 떠나려는 공중치의 출발을 중지시켰다. 이에 공중치가 한왕에게 말했다.

「불가합니다. 실제적인 무력으로 우리 한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는 나라는 진나라고, 말만으로 우리나라를 구원하겠다는 나라는 초나라입니다. 대왕께서는 초나라의 허명에 의지하여 강력한 무력을 소지한 진나라와 가벼이 국교를 끊으시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필시 천하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는 행위입니다. 하물며 초와 한 두 나라는 형제의 나라도 아니며 더욱이 예전에 한 번도 같이 맹약을 맺어 진나라를 공동으로 도모하려고 한 바도 없습니다. 신은 이미 진나라와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자고 제의하여 그 실행이 목전에 있습니다. 이때 초나라가 비로소 목소리를 크게 높여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구원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필시 초나라에 머물고 있는 세객 진진의 계책이 틀림없습니다. 더욱이 대왕께서는 이미 사람을 진나라에 보내 우리의 계획을 진나라에 통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제가 진나라에 대한 방문을 그만둔다면 그것은 바로 진나라를 속이는 결과가 됩니다. 경솔하게 처신하여 강대한 진나라를 속이고, 초나라를 섬기자는 모신(謀臣)의 말을 따르니 후에 대왕께서 크게 후회하지 않을까 매우 두렵습니다.」

한왕은 공중치의 말을 따르지 않고 결국 진나라와 국교를 끊었다. 진나라가 이로 인해 매우 노하여 군사들을 보탠 후 한나라로 진공하여 두 나라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초나라의 구원병은 결코 오지 않았다.

선혜왕 19년 기원전 314년, 진군이 한군을 안문(岸門)㉛에서 대파했다. 한나라는 할 수 없이 태자 창(倉)을 인질로 보내 진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선혜왕 22년 기원전 311년, 한나라가 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장 굴개(屈丐)가 이끄는 초군을 무찌르고 단양(丹陽)㉜에서 8만 명에 달하는 초나라 군사들의 목을 베었다. 이 해에 선혜왕이 죽고 태자 창이 진나라에서 돌아와 한왕의 자리에 즉위했다. 이가 한양왕(韓襄王)이다.

양왕 4년 기원전 308년, 진무왕(秦武王)과 함께 임진(臨晉)에서 회견했다. 이해 가을에 진나라가 감무(甘武)를 대장으로 삼아 한나라의 의양을 공격했다. 양왕 5년 기원전 307년, 진나라가 의양성을 함락시키고 한나라 군사 6만 명의 목을 베었다. 진무왕이 죽었다. 양왕 6년 기원전 306년, 진나라가 무수(武遂)㉝를 한나라에 돌려주었다. 양왕 9년 기원전 303년, 진나라가 다시 한나라에 돌려 준 무수를 공격하여 빼앗아 갔다. 양왕 10년 기원전 302년, 한나라의 태자 영(嬰)이 진왕에게 조현을 올린 후에 돌아왔다. 양왕 11년 기원전 301년, 진나라 군사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양읍(穰邑)을 점령했다. 한과 진 두 나라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당매(唐昧)가 이끄는 초군을 무찔렀다.

양왕 12년 기원전 300년, 태자 영(嬰)이 죽었다. 공자 구(咎)와 공자 기슬(蟣虱)이 태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그때 기슬은 초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소대(蘇代)가 한구(韓咎)에게 말했다.

「지금 초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기슬을 초왕이 특별히 생각하여 그를 한나라에 귀국시켜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합니다. 지금 십수 만의 초군이 방성산(方城山)㉞ 북쪽 변두리에 주재하고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초나라로 하여금 한나라의 옹지성(雍氏城) 옆에 만호의 성좌(城座)를 건설하도록 요청하십시오.㉟ 초나라가 성을 쌓게 되면, 옹지성을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야 하는 한왕은 틀림없이 공자를 한군의 대장에 임명할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초나라와 강화를 맺은 후에 한과 초 두 나라의 병력을 이용하여 기슬을 태자로 옹립하십시오. 공자의 도움으로 한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기슬은 장차 공자의 말을 완전히 믿게 되어 한초의 국경지역 땅을 공자에게 맡길 것입니다.」

한구가 소대의 계책을 따랐다.

초나라가 옹지를 포위하자, 한나라는 진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진나라가 구원군을 보내지 않고 대신 공손매(公孫昧)를 사자로 보냈다. 공중치가 공손매에게 말했다.

「당신은 진나라가 장차 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원군을 보낸다고 보증할 수 있습니까?」

공손매가 대답했다.

「진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진군은 남정(南鄭)과 남전(藍田)의 길을 취하여 군사를 진격시켜 초나라에서 한군을 기다리겠다.’고하시면서 한군이 시간에 맞춰 당도하지 못하지나 않을까를 걱정하셨습니다.」

공중치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도 생각도 같습니까?」

공손매가 대답했다.

「진왕은 틀림없이 진나라가 전통적으로 채택해 왔던 장의의 정책을 따를 것입니다. 옛날 초위왕(楚威王)이 위나라를 공격했을 때, 장의가 진왕에게 유세하기를 ‘진초(秦楚)가 연합하여 위나라로 진공하면, 위나라는 싸움에 패하여 초나라에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한나라는 원래 위나라의 동맹국이니 진나라만 홀로 고립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 진나라는 차라리 출병하는 체 하고 초와 위 두 나라를 미혹시켜 크게 싸우게 해서 그 틈을 이용하여 우리는 서하(西河) 이외 지역의 영토를 점령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진왕은 표면상으로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몰래 초나라와 관계개선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공께서는 진나라 군대가 당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초군과 가볍게 교전하십시오. 진나라가 한나라를 위해 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던 초나라가 뜻밖에 전장터에 당도한 진나라의 구원병을 보면, 한군과의 싸움에 전력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 공이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취할 수 있고 진나라는 공과 함께 공동으로 초나라를 제어할 수 있으며, 그 여세를 몰아 삼천(三川) 일대의 주나라에 위력을 과시하는 공적을 세우고 회군하실 수 있습니다.㊱ 또한 만일 공께서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취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초나라는 삼천 지역으로 통하는 길을 막고 지키게 되어 공자에게는 옹지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공의 근심하는 바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근자에 이르러 진나라의 객경 사마경(司馬庚)㊲은 초나라의 영도(郢都)를 세 번이나 오갔으며, 진나라 재상 감무(甘武)는 초나라의 상국 소어(昭魚)와 상오(商於)의 땅에서 회합을 행하면서, 표면상으로 진나라가 소어에게 식읍을 주어 봉한다고 하고, 이에 소어는 그 봉인(封印)을 받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으나, 사실은 쌍방 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일종의 밀약을 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공중치가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다.「사실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손매가 대답했다.

「공께서는 반드시 한나라를 먼저 생각한 연후에 진나라가 과연 구원군을 보낼지의 여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스스로를 구할 방법을 생각하고, 그 후에 장의가 구사한 진나라의 모략에 대응하는 방법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공께서는 지금 즉시 제와 초 두 나라와 동맹을 맺으시기 바랍니다. 제와 초 두 나라는 필시 한나라의 국사를 공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 후에 초나라는 옹지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이 일이 있기 직전 소대가 진나라 선태후(宣太后)의 동생 미융(羋戎)㊳에게 말했다.

「한나라의 공숙(公叔) 백영(伯嬰)㊴은 진나라가 초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기슬(蟣虱)을 한나라에 들여보내지 않을까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군께서는 어찌하여 한나라를 위해 기슬을 돌려보내 주기를 초나라에게 청하지 않으십니까? 초나라가 만일 공자 기슬을 군의 요청을 받고도 한나라에 돌려보내기를 거부한다면, 한나라의 백영은 진(秦)과 초(楚) 두 나라가 기슬을 그다지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필시 진과 초 두 나라와 연합하게 됩니다. 이에 진과 초 두 나라의 지원 하에 한나라는 위(魏)나라를 압박하여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고 위나라는 감히 제나라와 연합할 생각을 갖지 못하게 되어 결국은 제나라는 고립되고 맙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군께서 초나라에게 기슬을 인질에서 풀어 진나라에 보내라고 청하십시오. 진나라의 위세에 눌린 초나라가 기술을 진나라에 보낸다면, 한나라는 초나라에 원한을 품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제와 위 두 나라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초나라를 포위할 수 있습니다. 고립된 초나라는 진나라의 지원을 얻기 위해 공을 매우 중하게 여기게 되고 이로써 진과 초 두 나라도 같이 공을 중하게 여기게 되고 기슬을 진나라에 억류함으로써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백영은 장차 나라를 들어 공을 받들 것입니다.」

그래서 기슬은 결국은 한나라에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태자가 된 백영은 얼마 후에 죽고 공자 구(咎)가 그 뒤를 이었다. 제왕과 위왕이 한나라를 방문했다.

양왕 14년 기원전 298년, 한나라가 제(齊)와 위(魏) 두 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여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러 진영을 세우고 주둔했다. 양왕 16년 기원전 296년, 진나라가 하외(河外)㊵의 땅과 무수(武遂)의 땅을 한나라에 돌려주었다. 양왕이 이 해에 죽고 태자 구가 즉위했다. 이가 한리왕(韓釐王)이다.

리왕 3년 기원전 293년, 공손희(公孫喜)를 대장으로 삼아 주(周)와 위(魏)나라 군대와 함께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가 반격을 가하여 한나라의 군사 24만 군을 이궐(伊闕)㊶에서 대파하고 공손희를 포로로 잡았다. 리왕 5년 기원전 291년, 진나라 군사가 한나라의 완성을 공격하여 빼앗아 갔다. 리왕 6년 기원전 290년, 한나라가 무수 일대 2백 리에 달하는 땅을 진나라에 바쳤다. 리왕 10년 기원전 286년, 진나라 군사가 하산(夏山)㊷에서 한군을 파했다. 리왕 12년 기원전 284년 진소왕과 서주(西周)에서 회견하고 진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는 싸움에서 지고, 제민왕은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리왕 14년 기원전 282년, 진왕과 동주와 서주 사이의 땅에서 회견했다. 리왕 21년 기원전 275년, 포연(暴鳶)을 대장으로 삼아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으나 진군에게 패하고 포연은 도주했다.

리왕 23년 기원전 273년, 조(趙)와 위(魏) 두 나라의 군대가 화양(華陽)㊸을 공격하자 한나라가 위급함을 진나라에 고했으나 진나라는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한나라의 상국이 진서(陳筮)㊹에게 말했다.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소. 원컨대 그대가 병중이라고 하지만 나라를 위해 밤낮으로 달려 진나라에 한 번 다녀와야 되겠소.」

진서가 진나라에 당도하여 양후(穰侯) 위염(魏冉)을 만났다. 양후가 말했다.

「한나라의 사정이 매우 위급한 듯 하오! 그래서 그대가 이렇게 달려온 것 아니겠소?」

진서가 대답했다.

「그렇게 급하지 않습니다.」

양후가 화를 내며 힐난했다.

「급하지 않다면 어째서 그대의 군주는 그대를 나에게 사신으로 보냈소? 한나라가 빈번히 사신을 진나라에 보낸 목적은 모두가 위급함을 고해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소. 그런데 오늘 그대는 오히려 한나라가 위급하지 않다고 하니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왔단 말이오?」

진서가 말했다.

「한나라가 정말로 위급하다면 나라의 외교정책을 바꾸어 다른 나라를 따를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위급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달려왔을 뿐입니다.」

「그대는 구태여 진왕을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즉시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구원토록 하겠소.」

그리고 8일 만에 진나라가 군대가 한나라에 당도하여 화양에서 조와 위 두 나라 연합군을 무찔렀다. 이 해에 리왕이 죽고 그의 아들 환혜왕(桓惠王)이 즉위했다.

환혜왕 원년 기원전 272년, 한나라 군사가 연나라를 공격했다. 한혜왕 9년 기원전 264년, 진군이 한나라의 형성(陘城)㊺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분수(汾水) 강안에 성을 쌓았다. 환혜왕 10년 기원전 263년, 진군이 태항산에서 한군을 공격하여 패주시키자 한나라의 상당군(上黨郡) 태수가 그 땅을 조나라에 바치고 투항했다. 환혜왕 13년 기원전 260년, 진군이 조나라의 상당군을 빼앗고, 장평에서 조괄이 이끌던 조나라 항졸 4십만 명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17년 기원전 256년, 진군이 한나라의 양성(陽城)과 부서(負黍)를 점령했다. 한혜왕 22년 기원전 251년,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죽었다. 환혜왕 24년 기원전 249년, 진군이 한나라의 성고(城皐)와 형양(滎陽)을 점령했다. 환혜왕 26년 기원전 247년, 진군이 한나라의 상당군의 남은 전 지역을 점령했다. 환혜왕 29년 기원전 244년, 진군이 한나라의 13개 성을 점령했다. 환혜왕 34년 기원전 239년, 환혜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한왕 안(安)이 뒤를 이었다.

한왕 안 5년 기원전 234년, 진군이 한나라로 진격하자 한나라의 운명이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한비(韓非)를 진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진나라가 한비를 억류시켰다가 후에 죽였다. 한왕 안 9년 기원전 230년, 진군이 한왕 안을 포로로 잡고 한나라의 영토는 전부 진나라에 귀속되었다. 진나라는 한나라 땅에 영천군(潁川郡)을 설치했다. 한나라는 이로써 망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한궐(韓厥)이 진경공(晉景公)의 마음을 움직여 조씨고아(趙氏孤兒) 조무(趙武)에게 조씨들의 작위를 잇도록 했다. 이것은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와 함께 대의를 밝힌 일로써 천하에 보기 드물게 행한 음덕이다. 당진국에 큰 공을 세웠다고 자부할 수 없는 한씨들이 마침내 조씨, 위씨와 마찬가지로 십 몇 대에 걸쳐 오랫동안 제후의 자리를 누릴 수 있었음은 그 음덕에 힙입었다고 할 수 있다.」

『한세가 끝』

주석

①한나라의 선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좌전 희공(僖公) 24년 조에 ‘ 우(邘), 진(晉), 응(應), 한(韓)은 주무왕(周武王)의 목(穆)이라고 했다. 즉 한나라의 선조는 주무왕의 아들이고 처음에 지금의 하북성 고안현(固安縣) 동남 한채영(韓寨營)에 봉해졌다가 주선왕(周宣王) 때 명을 받아 섬서성 한원(韓原)의 제후가 되었다는 설로. <시경(詩經).대아(大雅).한혁(韓奕)>은 그 일을 노래한 시가이다. 한나라는 춘추 때 당진의 문후(文侯)에 의해 멸망되었다. 다른 한 가지 설은 좌전에 의하면 한나라의 선조 한만은 당진의 곡옥(曲沃) 환숙(桓叔)이라고 했다. 곡옥의 무공(武公)을 보좌한 공으로 한에 봉해졌다. 한(韓)은 산서성 하진현(河津縣)으로 한원과는 다른 곳으로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다. 한무자(韓武子)는 한만의 시호다.

②한원(韓原)/ 지금의 산서성 직산(稷山)부근이다. 분수(汾水)의 하류 북쪽의 평원을 말하며 당진의 도성 강주(絳州)로부터는 약 150키로 떨어져 있다.

③진경공(晉景公)/ 기원전 599년에 즉위하여 581년에 죽은 춘추 때 당진국의 군주로 희(姬) 성에 이름은 거(据)다. 성공(成公) 흑둔(黑臀)의 아들이다. 경공 3년 기원전 597년, 정나라에 대한 종주권을 쟁탈하기 위해 당진과 초(楚) 두 나라의 대군은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 북서의 필(邲)에서 교전에 들어갔으나 당진군은 지휘계통이 무너져 싸움에서 일패도지하고 중원에 대한 종주권은 초장이 이끄는 초나라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경공 11년 기원전 591년, 지금의 산동성 역성(歷城)인 안(鞍)에서 제군(齊軍)과 싸워 크게 무찔렀다. 그 다음 해인 기원전 590년, 당진의 군대를 6군으로 개편하여 안에서의 승리를 얻는데 공을 세운 공신들인 한궐(韓厥), 공삭(鞏朔), 조천(趙穿), 순추(荀騅), 조괄(趙括), 조전(趙旃) 등을 6경으로 임명하여 각 군을 지휘토록 했다. 경공 15년 기원전 587년, 한궐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읍을 강(絳)에서 신전(新田)으로 천도했다. 19년 기원전 583년, 초나라와 수호하고 이어서 몸에 병이 들어 눕게 되자 그의 아들 수만(壽曼)인 진려공(晉厲公)에게 군주의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났다가 몇 개월 후에 죽었다.

④진영공(晉靈公)/ 춘추 때인 기원전 620년에 즉위하여 607년에 죽은 당진(唐晉)의 군주로 희(姬) 성에 이름은 이(夷)다. 영공(靈公) 4년 기원전 617년, 섬진(陝秦)을 정벌하여 지금의 산서성 한성(韓城)인 소량(少梁)을 점령했다. 다시 6년인 기원전 615년, 조돈(趙盾), 조천(趙穿), 극결(郤缺) 등 세 사람을 장수로 삼아 섬진을 공격케 하여 섬진군을 하곡(河曲)에서 크게 무찔렀다. 하곡은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永濟縣) 남쪽의 풍릉도(風陵渡) 일대이다. 8년 기원전 613년 주경왕(周頃王)이 죽자 그 신하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조돈(趙盾)에게 군사를 주어 주나라에 들어가 란을 진압하고 광왕(匡王)을 세우도록 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장성함에 따라 사치를 일삼고 무도하여 멋대로 사람을 죽여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다. 14년 기원전 하여 507년, 조돈의 동생 조천(趙穿)이 도원(桃園)에서 그를 습격하여 죽이고 그 숙부 공자 흑둔(黑臀)을 주나라에 불러와 옹립했다. 흑둔이 성공(成公)이다.

⑤극극(郤克)/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87년에 죽은 춘추시대 때의 당진의 상경이다. 극결(郤缺)의 아들로 시호는 헌자(獻子)다. 진경공(晉景公) 8년, 기원전 592년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제경공(齊頃公)의 모부인인 소동숙자(蕭桐叔子)는 극극의 신체상의 불구를 보고 희롱했다. 이에 대노한 극극이 그 치욕을 갚겠다고 맹세를 하고 당진국으로 귀국하여 군사를 청하여 제나라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으나 경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진경공 11년 그가 당진의 상경이 되어 집정에 취임하자 노(魯), 위(衛) 등과 연합하여 제나라 군사를 안(鞍) 땅에서 대파했다. 사기 <진세가(晉世家)>에서는 타배(駝背) 즉 곱사등이라 했고,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서는 할일목(瞎一目) 즉 애꾸눈이라 했으며 춘추좌전(春秋左傳)은 극극은 두 다리의 길이가 서로 다른 절름발이라고 했다.

⑥안(鞍)/ 지금의 산동성 역성(歷城)이다.

⑦대업(大業)/ 섬진과 조나라 선조의 한 사람으로 전설상의 인물이다. 전욱제(顓頊帝)의 후손으로 여수(女修)의 아들이라고 했다. 전설에 ‘여수가 베를 짤 때 검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고 날아가 버리자 여수가 이 알을 받아먹고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다’고 했다(진본기). 일설에 의하면 대업은 순임금 때 형법을 관장했던 고도(皐陶)를 가리킨다고 했다.

⑧조성계(趙成季)/ 조돈의 부이며 조삭의 조부인 조쇠(趙衰)의 별호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22년에 죽은 춘추 때 당진의 대부이다. 영(嬴) 성에 조(趙) 씨이며 자는 자여(子餘)다. 진헌공(晉獻公) 때 경(耿)의 대부로 시봉된 조숙(趙夙)의 동생, 아들, 손자 등 설이 분분하다. 진헌공 때 공자 중이(重耳)를 받들었던 호언(狐偃), 고타(賈佗). 선진(先軫), 위무자(魏武子) 주(犨)와 함께 오현사(五賢士)의 한 사람으로 호칭되었다. 진헌공 22년 기원전 655년, 중이가 죽음을 피해 나라 밖으로 망명할 때 같이 따라가 모두 19년 동안 유랑생활을 했다. 후에 중이가 환국하여 군주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은 대부분 그의 계획에 의해서였다. 그 공으로 원(原)의 대부에 봉해지고 진문공이 중원의 패자가 되는데 보좌했다. 문공의 뒤를 이어 양공(襄公)이 서자, 그는 당진군의 중군(中軍)의 보좌가 되어 섬진군을 팽아(彭衙)에서 무찔렀다. 팽아는 지금의 섬서성 징성(澄城) 서북이다.

⑨한선자(韓宣子) 기(韓起)/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14년에 죽은 당진(唐晉)의 정경(正卿)이다. 진도공(晉悼公) 7년 기원전 566년 한헌자 궐의 직위를 이어받아 그 봉지의 치소를 주읍(州邑)으로 옮겼다. 주읍은 지금의 하남성 심양현(沁陽縣) 동남이다. 이로써 한씨들은 주읍을 근거지로 그 세력을 펼칠 수 있었다.

⑩계찰(季札)/ 춘추 때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다. 연릉(延陵)에 봉해져 연릉계자(延陵季子)라고 부른다. 원래 수몽은 아들 중 가장 현능하다고 생각한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그는 형이 있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수몽이 그 자리를 장자인 제번(諸樊)에게 물려주면서 이후로는 오나라의 군주 자리는 부자상속 대신에 형제상속을 행하여 계찰에게 왕위가 돌아가도록 유언을 하고 죽었다. 제번이 그 부왕의 뜻을 받들어 그 자리를 넘겨주려 했으나, 계찰은 받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오왕의 자리는 제번에 이어 이매(夷昧), 여제(餘祭)등으로 차례로 형제간에 이어졌다. 여제 4년 기원전 544년 계찰은 여제의 명을 받들어 노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례(周禮)를 살펴보고 그 뜻을 모두 알고 있어 노나라 사람들의 공대를 받았다. 다시 제(齊), 정(鄭), 당진(唐晉) 등의 나라를 방문하여 당시의 현인들로 이름이 난 안영(晏嬰), 자산(子産), 숙향(叔向) 등이 명현(名賢)들과 교유를 맺고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후에 중국 역사의 흐름은 대체적으로 계찰이 예견한 대로 진행되었다. 여제가 죽자 오왕의 자리는 그의 아들 왕료(王僚)가 이었다. 기원전 512년 왕료의 명을 받들어 당진에 사신으로 가 있던 중에, 왕료는 제번의 아들인 공자광(公子光)에 의해 살해되었다. 공자광이 오왕 합려(閤閭)다. 계찰은 귀국하여 합려에게 사신으로 갔다온 일을 복명한 후에 왕료의 묘를 찾아 곡을 올렸다. 후에 공자(孔子)가 친히 계찰이 묻힌 무덤을 찾아가서 《유오연릉계자지묘(有吳延陵季子之墓)》라고 비문을 썼다. 계찰은 공자보다 한 세대 전 사람이다.

⑪평양(平陽)/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경내다.

⑫이 단락의 기사는 사기의 잘못이다. 춘추좌전에 의하면 한선자 기(起)가 죽은 해는 노소공 28년으로 기원전 514년의 일이라고 했다. 또한 진정공(晉定公) 15년 기원전 497년에 조간자 앙(鞅)과 함께 범씨와 중항씨를 공격한 사람은 한선자가 아니라 한간자(韓簡子) 불신(不信)이다.

⑬한무자(韓武子)/ 한씨의 시조인 한무자 만(萬)과는 다른 전국시대 한나라 군주다. 한강자 호(虎)의 아들로 기원전 424년에 군주의 자리에 올라 409년에 죽었다. 희(姬) 성에 한(韓) 씨에 이름은 계장(啓章)이다. 주위열왕 2년 기원전 423년 정(鄭)나라를 공격하여 정유공(鄭幽公)을 죽였다.

⑭옹구(雍丘)/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

⑮부서(負黍)/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⑯섭정이 엄수(嚴遂)의 부탁으로 한나라 재상으로 있던 협루를 죽이는 이야기는 자객열전 참조

⑰의양(宜陽)/ 전국(戰國) 때 한나라가 신정성(新鄭城)으로 천도하기 전의 도성(都城)이다. 지금의 하남성 의양현(宜陽縣)이다. 한나라는 건국에서 진나라에 의해 망할 때까지 그 도성을 평양(平陽 ;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 의양(宜陽) → 양책(陽翟) → 신정성(新鄭城)으로 옮겼다.

⑱양성(陽城)/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동남의 고성진(告城鎭)

⑲팽성(彭城)/ 지금의 강소성 서주시(徐州市). 후에 초한 쟁패시 항우(項羽)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⑳상구(桑丘)/ 경성(敬城)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북성 서수현(徐水縣) 경내로 보정시(保定市) 북쪽이다.

㉑영구(靈丘) :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고당현(高唐縣) 남. 제남시(濟南市) 서북의 하북성과의 경계에 있음.

㉒마릉(馬陵)/ 지금의 하남성 장갈시(長葛市) 북쪽이다. 기원전 341년 손빈이 이끌던 제군(齊軍)이 방연의 위군(魏軍)을 대파한 마릉지전이 벌어진 곳과는 다른 곳이다.

㉓택양(宅陽)/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鄭州市) 북

㉔회수(澮水)/ 산서성 익성현 북에서 발원하여 분수(汾水)와 합류한다. 진(晉)나라의 도성 강성(絳城)은 회수 강안에 세워진 도시이다.

㉕서산(西山)/ 지금의 하남성 노산현(魯山縣)과 의양시(宜陽市) 일대의 서쪽 지방에 산재한 산들을 뜻한다.

㉖황지(黃池)/ 지금의 하남성 봉구현(封丘縣) 서남 쪽에 있었던 고을. 기원전 482년 제후들이 회맹을 행한 곳으로 오왕 부차가 맹주의 자리를 당진의 정공과 다투어 패자가 되었다.

㉗주읍(朱邑)/ 위치 미상이다.

㉘수어(脩魚)/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서남으로 정주시의 북동쪽 황하 북안에 있었다.

㉙탁택(濁澤)/ 산서성 운성시(運城市) 동남의 위(魏)나라 성읍으로, 하남성 청풍현(淸豊縣) 동남의 정나라 성읍이었던 관택(觀澤)의 오기이다.

㉚공중(公仲)/ 이름은 치(侈)다. 전국 때 한선왕(韓宣王 : 재위 전 332-312)의 재상으로 한군이 진군에 의해 수어(修魚)에서 패하자 그는 진나라와의 강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초나라가 한나라에 원군을 보내줄 것이라고 믿고 있던 한왕이 공중치의 말에 따르지 않고 안문(岸門)에서 진군과 싸워 대패하자 공중치는 태자를 인질로 진나라에 보냈다. 기원전 312년 초나라가 한나라의 옹지(雍氏)를 포위하자 그는 진나라에 구원을 청하려고 했으나 진나라 사자 공손매(公孫眛)를 통해 진나라가 한나라를 돕는 체 하면서 실은 한나라를 도모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간파하고 마음을 바꿔 제(齊)와 초(楚) 두 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려고 했다. 선왕의 뒤를 이은 양왕은 그를 계속해서 재상으로 등용했다. 후에 진나라가 의양(宜陽)을 점령하자 그는 명을 받고 진나라에 들어가 사죄를 하고 강화를 맺었다. 이때 공중치와 교유를 맺은 진나라의 재상 감무(甘武)는 후에 진나라가 점령한 무수(武遂)를 돌려주었다.

㉛안문(岸門)/ 하남성 허창시(許昌市) 서북

㉜단양(丹陽)/ 단수(丹水)의 북쪽 고을로 섬서성 상주시(商州市) 부근에서 발원하여 호북성 단강구(丹江口)에서에서 합류하는 한수의 지류다. 단양은 단강구 부근의 석천현(淅川縣)이다.

㉝무수(武遂)/ 지금의 산서성 원곡현(垣曲縣) 남쪽의 고성향(古城鄕)으로 황하(黃河)의 북안에 있던 고을이다. 춘추전국시대 때 황하를 건너는 나루터가 있었다.

㉞방성산(方城山)/ 지금의 하남성 방성현(方城縣) 경내의 산을 말한다.

㉟옹지(雍氏)/ 하남성 우현(禹縣) 동북이다. 초나라가 방성에서 나와 그 외곽에 주둔하면서 한나라로 진군하여 성을 축조하고 옹지를 포위한 목적은 한나라에 무력을 시위하여 공자 기슬을 한왕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이다.

㊱한나라가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진나라는 한나라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참전하여 그 이권을 나누자고 할 것이니, 한나라는 그 위세를 주왕실에 떨치고 회군할 수 있다는 뜻이다.

㊲사마경(司馬庚)/ 전국 때 진나라 사람으로 전국책에는 강(康)으로 되어 있다. 당(唐)이라고도 했다. 주난왕 원년 기원전 314년, 초나라가 한나라의 옹지를 포위하자 한나라가 진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진나라는 두 나라의 싸움을 관망하다가 표면적으로는 한나라에 구원군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마경을 초나라에 사자로 3차례나 보내 수호를 행한다고 하면서 두 나라와의 싸움을 부추겼다.

㊳미융(羋戎)/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의 생모 선태후(宣太后)의 동생으로 신성군(新成君)을 말한다.

㊴공숙(公叔) 백영(伯嬰)/ 한나라 태자 영(嬰)을 말한다. 영(嬰)이 태자로 책정되기 전 기슬과 그 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일에 대한 기사다.

㊵하외(河外)/지금의 섬서성 화음(華陰)에서 하남성 섬현(陝縣)에 이르는 일대의 땅을 통칭하는 말이다.

㊶이궐새(伊闕塞)를 말한다. 지금의 하남성 낙양의 남쪽에 있으며 두 산봉우리가 이수(伊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어 마치 궁궐과 같이 보인다고 해서 이궐이라 했다. 진나라의 대장은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으로 뽑히는 백기(白起)였다.

㊷하산/ 위치 미상이다.

㊸화양(華陽)/ 지금의 하남성 신정시(新鄭市) 동쪽에 있는 산이름이다. 전국 초 위나라 영토였다가 진나라 령이 된 섬서성 화산(華山) 남쪽의 화양과는 다른 곳이다.

㊹진서(陳筮)/ 제나라 공족출신으로 한나라에서 대부를 지냈다.

㊺형성(陘城)/ 지금의 산서성 곡옥(曲沃) 복쭉의 분수(汾水) 강안의 성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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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04-05-12
[일반] 진세가(晉世家) 9. 진(唐晉)

세가9. 진(晉) 826. 武王旣崩(무왕기붕), 주무왕이 죽고 827. 叔虞邑唐(숙우읍당). 그 아들인 성왕이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를 당(唐)에
양승국 04-05-12
[일반] 초세가(楚世家) 10.

초세가(楚世家) 초(楚)나라의 선조는 오제 중의 한 사람인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다. 고양씨는 황제(黃帝)의 손자이며 창
양승국 04-05-12
[일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11.월(越)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854. 少康之子(소강지자), 소강의 아들 여(餘)는 855. 實賓南海(실빈남해), 남해(南海)의 바닷가로 가서
운영자 08-04-14
[일반] 정세가(鄭世家) 12

정세가(鄭世家) 865. 桓公之東(환공지동), 정환공(鄭桓公) 우(友)가 동쪽의 땅으로 봉지를 옮긴 것은 866. 太史是庸(태사시용). 주왕실의
운영자 08-04-17
[일반] 조세가(趙世家) 13

조세가(趙世家)13 조씨들의 선조들은 섬진(陝秦)과 같은 조상들이다. 중연(中衍)1)의 대에 이르러 은나라의 대무제(大戊帝)2)의 수레를 모는 어자
운영자 08-04-19
[일반] 위세가(魏世家) 14

위세가(魏世家) 위씨들의 선조는 필공(畢公) 고(高)의 후손들이다. 필공 고는 주왕실과 동성인 희씨(姬氏) 성이다. 주무왕(周武王)이 주왕(紂王)
운영자 08-05-01
[일반] 한세가(韓世家)15

한세가(韓世家)15 905. 韓厥陰德(한궐음덕). 한궐(韓厥)이 음덕을 쌓아 906. 趙武攸興(조무유흥); 조무로 하여금 망한 조씨 집안을
운영자 0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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