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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4-14 20:51:256615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11.월(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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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854. 少康之子(소강지자),

소강의 아들 여(餘)는


855. 實賓南海(실빈남해),

남해(南海)의 바닷가로 가서


856. 文身斷髮(문신단발),

몸에는 문신을 하고 머리를 자르고


857. 黿鱓與處(원선여처),

자라와 물고기들과 함께 살며


858. 旣守封禺(기수봉우),

우산(禺山)에 봉해져 그곳을 지키다가


859. 奉禹之祀(봉우지사).

우임금의 제사를 모셨다.


860. 句踐困彼(구천곤피),

그 후손 구천은 부차에게 곤욕을 치렀으나


861. 乃用種,蠡 (내용종,려).

이내 문종(文宗)과 범려(范蠡)를 얻어 신임하였다.


862. 嘉句踐夷蠻能脩其德(가구천이만능수기덕),

구천이 만이(蠻夷)들 속에 있으면서 능히 그 덕을 쌓아


863. 滅强吳以尊周室(멸강오이존주실),

강대한 오나라를 멸하고 주왕실을 받든 것을 기리어


864. 作<越王句踐世家>第十一(작<월왕구천세가>제십일)

<월왕구천세가> 제십일을 지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선조는 우(禹)임금의 후예로 하후제(夏后帝) 소강(小康)의 서자다. 회계(會稽)1)에 봉해져 우임금의 제사를 모셨다.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는 단발에 몸에는 풀잎으로 엮은 옷을 두르고 백성들을 끌어 모아 성읍을 이루며 살았다. 그 후 20세가 지나자 윤상(允常)의 대에 이르렀다. 윤상이 오왕(吳王) 합려(闔閭)와 서로 원수가 되어 싸웠다. 윤상이 죽고 그 아들이 뒤를 이었다. 이가 월왕 구천이다.

구천 원년 기원전 496년, 오왕 합려가 윤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월나라를 쳤다. 월왕 구천이 결사대를 뽑아 전투에 나가, 세 개의 열을 지어 오나라 진영으로 행군하게 한 다음 그 면전에서 크게 구호를 외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게 만들었다. 오나라 군사들이 월나라 죄수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떨자 그 기회를 틈타 월군이 기습을 감행했다. 월군은 취리(欈李)2)에서 오군과 싸워 이기고 오왕 합려를 활로 쏴 부상을 입혔다. 합려는 그 상처가 덧나 죽을 때 아들 부차에게 유언했다.

「결코 월나라에 대한 나의 원한을 잊지 말고 원수를 갚아라!」

구천 3년 기원전 494년, 오왕 부차가 매일 밤낮으로 군사를 조련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월왕 구천은 그것은 바로 월나라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오나라가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범려(范蠡)가 월왕에게 간했다.

「불가합니다. 신이 듣기에 군사란 흉기와 같아 싸움을 구하는 자는 덕에 역행하는 일이라, 먼저 행하고자 다투는 것은 일 중에 가장 저급한 것입니다. 음모를 꾸며 덕행에 역행하고, 흉기에 해당하는 군사를 의 일을 즐겨하며, 몸소 저급한 일에 몸을 담는 일은 상제가 금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결코 이롭지 못합니다.」

월왕이 대답했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소!」

월왕이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향해 진격했다. 오왕이 듣고 전국의 정예군사들을 모아 출전하여 월군을 부초(夫椒)3)에서 무찔렀다. 월왕이 5천의 잔병을 수습하여 회계로 들어가 농성했다. 오왕이 그 뒤를 추격하여 회계를 포위했다.

월왕이 범려에게 말했다.

「경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놓이게 되었소.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범려가 대답했다.

「이룬 공업을 훼손하지 않고 완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도리를 본받아야 하고, 넘어지려는 사람을 도와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의 도리를 알아 남을 숭상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하며, 절제하여 분수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필히 땅의 도리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행동해야 합니다4). 따라서 왕께서는 사자에게 겸손한 언사와 많은 예품을 갖추게 하여 오왕에게 보내십시오. 만일 오왕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왕께서 친히 오왕 앞으로 나아가 오나라에 압송되어 시종이 되어 받들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월왕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그 즉시 대부 문종(文種)을 오나라 진영으로 보내 강화를 청하도록 했다. 문종이 무릎으로 기어서 오왕 앞으로 나아가 고두(叩頭)를 행한 후에 말했다.

「왕의 망국신하 구천이 저로 하여금 감히 왕의 관리에게 청하도록 했습니다. 구천이 청하기를 왕의 노복이 되어 섬기고 그의 처는 왕의 시첩이 되고자 하오니 윤허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왕이 허락하려고 하자 오자서(伍子胥)가 오왕에게 간했다.

「하늘이 월나라를 우리 오나라에 선물로 내렸습니다. 구천의 청을 허락하시면 안 됩니다.」

오왕이 오자서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꾸어 강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문종이 월군 진영으로 돌아와 구천에게 그 결말을 고했다. 구천은 그의 처자와 자식들을 죽이고 궁실의 보기들을 불태운 후에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가 싸우다가 힘이 다하면 죽으려고 했다. 문종이 구천을 저지하며 말했다.

「오나라의 태재(太宰)는 백비(伯嚭)라는 위인인데 성격이 매우 탐욕스럽습니다. 제가 많은 재물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보겠습니다. 청컨대 제가 아무도 몰래 그를 통해 오나라와 강화를 맺으려고 하니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천이 다시 문종으로 하여금 태재 백비에게 미녀와 많은 보물들을 바치도록 했다. 백비가 매우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대부 문종을 오왕 앞으로 인도하여 접견토록 했다. 문종이 오왕에게 고두를 행한 후에 말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구천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월나라는 장차 대대로 내려온 보기들을 전부 오나라에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불행하게도 구천이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구천은 그의 처자와 자식들을 전부 죽이고 보기들을 불태운 후, 그의 5천 병사들을 이끌고 출전하여 대왕과 일전을 치르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나라도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태재 백비가 기회를 보아 앞으로 나와 오왕에게 권했다.

「월왕은 이미 마음을 고쳐먹고 대왕의 신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만일 월왕의 죄를 용서한다면 우리 오나라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오왕이 문종에게 강화를 허락하려고 하자 오자서가 다시 반대하며 간언했다.

「지금 월나라를 멸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해도 그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구천은 매우 현명한 군주이고 대부 문종과 범려 역시 현능한 신하입니다. 만일 구천을 다시 월나라로 돌려보낸다면 틀림없이 오나라에 대해 반기를 들 것입니다.」

오왕이 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월왕을 죽이지 않고 회계산의 포위를 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구천이 회계산에서 포위되어 있을 때 탄식하며 말했다.

「나의 운명은 결국 이곳에서 생을 끝내는 것인가?」

문종이 듣고 말했다.

「상나라를 세운 탕임금은 하대(夏臺)에 투옥되었고, 주나라의 문왕은 걸왕에게 잡혀 유리(羑里)5)에 유폐 되었으며, 당진국의 공자 중이(重耳)는 부군의 박해를 피해 오랑캐 나라인 적(翟)으로 달아났고, 제(齊)나라의 소백(小伯)은 거(莒)나라로 몸을 피했으나 그들은 결국은 모두 왕업을 이루었거나 패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으로써 보건대 지금 우리가 처한 처지가 비록 곤궁하다 할지라도 어찌 복으로 돌릴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오왕의 사면을 받은 구천이 월나라에 돌아와 일을 할 때는 항상 심사숙고한 후에 고심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왕의 자리 위에 쓸개를 걸어놓고 앉아있을 때나 누웠거나 항상 고개를 들어 쳐다보다가 그 쓴맛을 보고, 음식을 먹을 때도 핥곤 했다. 그리고 항상 스스로 묻곤했다.

「구천아! 너는 회계산에서의 치욕을 잊었느냐?」

그는 군주의 몸으로 친히 밭을 갈았고 그의 부인은 몸소 베를 짰으며, 식사를 할 때는 고기요리를 먹지 않았다. 또한 두 겹으로 된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으며, 현인을 대할 때는 자세를 낮추어 예로써 대하여 그 사람의 모든 재능이 발휘토록 했다. 또한 손님을 대할 때는 정성을 다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접대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구제했으며, 죽은 사람이 있으면 상가를 찾아 애도하고 유족들을 위로하여 백성들과 동고동락을 같이 했다. 구천은 범려에게 나라의 정사를 맡기려고 했으나 범려가 사양하며 말했다.

「군사를 움직여 싸움에 임하는 능력은 문종이 저보다 못하나, 백성들을 위무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은 제가 문종보다 못합니다.」

그래서 구천은 나라의 정사는 대부 문종에게 맡기고 범려와 대부 자계(柘稽)를 오나라에 보내 강화를 맺도록 했다. 오나라에 당도한 두 사람은 인질이 되었다가 2년이 지나자 비로소 범려는 월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다.

회계에서 치욕을 당한 후 7년 동안 변함없이 월나라의 사병과 백성들을 위무한 구천은 그 정도면 오나라에 원수를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대부 봉동(逢同)6)이 간언했다.

「나라가 얼마 전에 망했다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국력이 조금 회복되었습니다. 만일 이때 우리나라가 군비를 정돈하기 시작한다면 오나라는 반드시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게 되면 월나라에게는 재앙이 닥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흉맹한 큰 새가 목표물을 낚아챌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몸을 숨겼다가 불시에 공격합니다. 지금 오나라 군대는 북방으로 원정을 나가 제와 당진 두 나라를 압박하고 있으며 또한 초와 우리 월나라와는 불구대천의 원한을 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오나라의 명성이 천하에 빛나고 있다지만 실제로는 주나라 왕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오나라는 천하에 베푼 덕은 적은데 이룬 공업은 매우 커서 틀림없이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 월나라를 위해 말씀을 드린다면, 월나라는 제나라와 수호를 하고 초나라와 가까이 지내며 당진에 의지하며 오나라를 지극히 높여 받들어야 합니다. 오왕은 높고 먼 뜻만을 추구하고 있어 병사의 일을 가볍게 여기고 필시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월나라는 진(晉), 초(楚), 제(齊) 세 나라로 하여금 힘을 합쳐 오나라를 정벌하게 하고 우리 월나라가 그 기회를 타서 공격하면 오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구천이 좋은 계책이라고 했다.

그리고 2년 후인 기원전 488년, 오왕이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오자서가 간했다.

「불가합니다. 신이 듣기에 구천은 두 가지 이상의 맛있는 요리를 먹지 않으며 백성들과는 동고동락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자를 죽이지 않으면 필시 우리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 오나라에 있어서 월나라가 심복지환이라면 제나라는 마치 발등에 난 조그만 옴에 불과할 뿐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제나라를 치는 대신 월나라를 먼저 쳐서 멸하십시오.」

주경왕(周敬王) 36년 기원전 484년, 오왕이 오자서의 간언을 무시하고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로 쳐들어가 애릉(艾陵)7)에서 싸워 10만의 제군을 섬멸하고 다섯 대부를 포로로 잡고 개선했다.8)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크게 이긴 오왕이 돌아와 제나라 정벌전을 반대한 오자서를 견책했다. 오자서가 말했다.

「왕께서 너무 기뻐하지 마십시오.」

오왕 부차가 노기를 띠자 자서는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오왕이 듣고 만류했다.

대부 문종이 말했다.

「신이 보기에 오왕이 정무를 너무 교만하게 행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저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어 시험해보려고 하니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왕에게 곡식을 빌려달라고 하고 그가 우리 월나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문종이 오왕에게 식량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오왕이 곧바로 허락하려고 하자 오자서가 빌려주면 안 된다고 간했다. 그래도 오왕이 양식을 빌려주었다. 월왕이 듣고 매우 기뻐했다. 오자서 말했다.

「왕이 내 간언을 듣지 않으니 앞으로 3년 이내에 오나라는 틀림없이 폐허로 변할 것이다.」

여러 번에 걸쳐 오자서와 월나라에 대한 대책을 논쟁했던 태재 백비가 그 말을 전해 듣고 그것을 기화로 오자서를 참소했다.

「오자서는 겉으로는 충성스럽게 보이지만 실제는 무척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부친과 형의 죽음도 슬퍼하지 않은 사람인데 어찌 군왕의 죽음인들 애석해 하겠습니까? 예전에 왕께서 제나라를 공격한다고 할 때 자서는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후에 왕께서 싸움에서 이겨 공업을 세우자 그는 오히려 그것을 한으로 여겨 대왕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방비하지 않으시면 그는 장차 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백비가 봉동과 공모하여 참소했으나 오왕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오자서가 제나라에 사자로 가서 그의 아들을 제나라의 대부 포씨(鮑氏)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오자서가 어찌 감히 과인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오자서가 사자의 임무를 완수하고 마치고 돌아오자 오왕은 촉루검(屬鏤劍)을 오자서에게 보내 자살하도록 했다. 오왕이 보낸 촉루검을 받은 오자서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의 부친을 패자로 만들었고 또한 그를 오왕으로 세운 공이 있다. 그래서 그가 떼어 준다는 오나라의 반도 내가 받지 않았다. 그 일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고 얼마 전의 일인데 오왕은 오히려 참언을 믿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아...아! 그는 절대로 오나라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오자서가 다시 오왕이 보낸 사자를 향해 말했다.

「내가 죽거든 내 눈알을 뽑아 도성의 동문 위에 걸어 놓으시오. 내가 친히 월나라 군사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겠소!」

그리고 오자서는 부차가 보낸 촉루검으로 목을 찔러 죽었다. 오자서를 죽인 부차는 백비를 상국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에 구천이 범려에게 물었다.

「오왕이 이미 오자서를 죽이고 그 주위에는 아첨배만 득실거리니 이제는 오나라를 공격해도 되지 않겠소?」

범려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시 2년 후 봄에 오왕이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황지(黃池)에서 제후들과의 회맹에 참석하여 맹주를 다투었다9). 이때 오나라의 정예병들은 모두 오왕을 따라 회맹에 참석하고 그 도성에는 태자가 노약자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지키고 있었다. 구천이 다시 오나라를 쳐도 되겠느냐고 범려에게 물었다. 범려가 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구천은 수전에 능한 군사 2천, 훈련으로 조련된 정예군사 4만,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친위대 6천, 군관 1천 명으로 된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월군이 오군을 무찌르고 그 태자를 잡아서 죽였다. 오나라가 위급함을 오왕에게 고했다. 오왕은 그때 황지에서 제후들과 회맹의 맹주 자리를 다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경우를 걱정하여 비밀로 붙였다. 이윽고 황지의 회맹이 끝나자 오왕은 사자를 월나라에 보내 예물을 후하게 보내 강화를 청했다. 월나라도 아직 오나라를 멸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오나라의 강화 요청을 허락했다.

그후 4년 기원전 478년, 월나라가 다시 오나라를 공격했다. 그때는 오나라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있었을 뿐만 아니라 날래고 용감한 군사들은 모두 제(齊)와 당진(唐晉)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상태였었다. 월군이 입택(笠澤)에서 오군을 대파하고 오나라 도성을 3년 동안 포위했다. 오왕이 도성에서 탈출하여 고소산(姑蘇山)으로 들어가 농성하자 월왕이 추격하여 다시 포위했다. 오왕의 사자 공손웅(公孫雄)이 육단(肉袒)과 슬행(膝行)10)으로 월왕을 접견하고 월왕에게 강화를 청하며 말했다.

「고립무원의 외로운 신하 부차가 감히 속마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 제가 회계에서 대왕에게 죄를 얻어 제가 감히 대왕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대왕과 강화를 맺게 해주시고 본국으로 철군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오늘 대왕께서 외로운 신을 징벌하기 위해 옥보(玉步)를 옮기셨으니 신은 당지 그 명에 따를 뿐이옵니다. 원컨대 저의 사사로운 마음으로는 예전 회계산에서의 일처럼 이 부차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천이 차마 모질게 대하지 못하고 부차의 청을 허락하려고 했다. 범려가 보고 말했다.

「회계에서의 일은 하늘이 우리 월나라를 오나라에 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나라가 받지 않아 오늘은 하늘이 오나라를 우리 월나라에 주고 있습니다. 어찌 대왕께서는 하늘의 명을 거역하려고 하십니까? 다시 말씀 드린다면 왕께서 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정사를 보셨던 이유는 원래 오나라를 얻기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오나라를 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 노력하기를 22년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오나라를 버리고 돌아가려고 하십니까? 하물며 하늘이 내린 선물을 왕께서 받지 않으시면 훗날 오히려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伐柯者 其則不遠(벌가자 기즉불원), 즉 나무를 베는 도끼자루를 만들 때 자루의 모양은 멀리 있지 않다’11)1)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회계에서의 치욕을 잊으시고 오왕을 용서하려고 하십니까?」

구천이 대답했다.

「내가 경의 말을 따르려고 해도, 차마 오왕의 사자에게 그렇게 대할 수 없어서요.」

범려가 북을 두드려 군사를 진군시키며 말했다.

「왕께서 저에게 정무를 모두 나에게 맡기셨소. 내가 명하노니 오나라 사자는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그렇지 않고 머뭇거린다면 나는 그대에게 죄를 묻겠소.」

오왕의 사자로 온 공손웅(公孫雄)이 상심한 나머지 슬피 울며 자리에 일어나서 오군 진영으로 돌아갔다. 구천이 애처롭게 여겨 오왕에게 사자를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내가 그대를 용동(甬東)12)으로 보내 일백 가를 주어 살게 하겠소.」

오왕이 사양하며 말했다.

「나는 이미 늙어 왕을 모실 수 없소!」

말을 마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었다. 죽을 때 자기의 얼굴을 물건으로 가리게 하고 말했다.

「나는 죽어서 오자서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음이라!」

월왕 구천이 오왕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주고 백비는 잡아서 죽였다.

주원왕(周元王) 3년 기원전 493년, 구천이 오나라를 멸한 후,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회수(淮水)를 건너 서주(徐州)에서 제와 당진 등의 제후들과 회맹을 행했다. 이윽고 회맹이 끝나자 월왕은 주왕실에 공물을 헌상했다. 주원왕이 사자를 보내 제사를 지낸 고기를 월왕에게 하사하고 방백(方伯)으로 삼아 제후들을 호령하게 했다. 서주를 떠난 월왕은 회하를 건너 남하하면서 회수 유역의 땅을 모두 초나라에 돌려주고, 다시 오나라가 송나라부터 빼앗은 땅을 모두 다시 원래대로 돌려주었다. 또한 사수(泗水) 이동의 사방 백리의 땅도 노나라에 주었다. 그때 월나라 군대는 장강에서 회수 이동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유자재로 드나들었다. 제후들은 모두 월나라에 하례의 사절을 보내어 월왕을 패왕으로 칭했다.

월왕의 곁을 떠나 제나라로 망명하여 살던 범려가 대부 문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없게 되면 좋은 활은 창고에 묻히게 되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나운 사냥개는 삶겨져 죽게 됩니다. 월왕은 목이 길게 나오고 새처럼 입이 삐죽이 튀어 나왔으니 단지 어려움은 같이 할 수 있으나 영화는 같이 나눌 수 없는 사람입니다.13) 어찌하여 아직도 그의 곁에 머무르고 계시는 것입니까?」

문공이 편지를 읽고 병을 칭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문종이 아마도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참소했다. 월왕이 즉시 문종에게 칼을 주며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오나라를 멸하기 위해서 7가지 계책을 알려주었소14). 과인은 그 중 3가지만 사용해서 오나라를 멸했소. 아직 그대는 4가지의 계책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는 지하에 계신 선왕을 뒤쫓아 가 그 계책을 나에게 써보도록 하시오.」

문종이 즉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구천이 죽자 그 아들 석여(鼫與)가 뒤를 이었다. 왕 석여가 죽고 그 아들 불수(不壽)가 섰다. 왕 불수가 죽고 아들 옹(翁)이 잇고, 옹이 죽자 아들 예(翳)가 잇고, 예가 죽고 아들 지후(之侯)가 이었다. 지후가 죽고 무강(無强)이 섰다.

왕 무강 때, 월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는 제나라를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중원의 제후국들과 강대함을 다투려고 했다. 그때 초나라의 군주는 위왕(威王)15)이었는데 월왕이 북쪽으로 나아가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제위왕(齊威王)16)이 사자를 보내 월왕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

「월나라가 초나라와 싸워 굴복시키지 못하면 크게는 왕호를 칭할 수 없고 적게는 패자도 칭할 수 없습니다. 월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는 원인을 살펴보니 한(韓)과 위(魏) 두 나라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입니다. 한위 두 나라는 원래 초나라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만일 한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한다면 한나라 군대는 전멸되고 장수들은 살해되어 섭(葉)17)과 양책(陽翟)18)이 위태롭게 됩니다. 또한 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한다면 역시 위나라 군대는 전멸하고 장수들은 살해되어 진陳)과 상채(上蔡) 지방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한위 두 나라가 월나라를 받들고 있기 때문에 그 군대는 복멸되지 않고 장수들은 살해되지 않음에도 월나라에 대해 한마지로(汗馬之勞)를 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어찌하여 한위 두 나라의 지지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십니까?」

월왕이 대답했다.

「내가 한·위 두 나라에 원하는 바는 초군과 단병접전의 싸움을 벌려 적을 죽여야 내가 사는 사활을 건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일이 아닌데 하물며 성읍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일이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바는 위나라 군사들이 대량성 밑에서 집결하면, 제나라는 남양(南陽)19)과 거(莒)20)에서 조련한 군대를 상(常)21)과 담(郯)22)의 변경에 집결시킬 것이고, 이에 초나라의 방성(方城)23) 이북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는 남하하지 못하게 되고,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사이의 초군도 동쪽으로의 진군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상(商)24), 오(於)25), 석(析)26), 역(酈)27), 종호(宗胡)28) 등의 중원으로 통하는 초나라의 서쪽 지역의 군대는 진나라의 남하를 저지하는데 충분치 않고, 강남과 사상(泗上)의 초군은 우리 월나라의 공격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齊), 진(秦), 한(韓), 위(魏) 네 나라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자기들의 원하는 바를 취할 수 있습니다. 한·위 두 나라는 초나라와 싸우지 않고도 그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으며, 경작을 하지 않고도 곡식을 수확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한·위 두 나라가 그와 같이 전략을 행하지 않는다면 황하와 화산 사이에서 서로 공격을 번갈아가며 싸우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기회를 제·진(齊秦) 두 나라가 이용하여 어부지리를 취하게 됩니다. 한·위 두 나라가 이와 같은 실책을 범하고 있는데, 내가 어찌 그들에게 의지하여 왕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

제나라가 사자가 말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음에도 월나라가 아직까지 망하지 않음은 참으로 요행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왕께서 계획하고 있는 책략은 마치 사람의 눈과 같아 그렇게 훌륭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눈은 솜털 같은 미세한 것도 볼 수 있지만 자신의 앞에 나 있는 속눈썹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왕께서 한·위 두 나라의 잘못된 책략은 알고 계시면서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왕의 지모를 눈의 경우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왕께서 한·위 두 나라로부터 바라는 바는 그들의 한마지로에 의한 전공도 아니고 함께 맺는 동맹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초나라 군사들을 분산시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초나라는 이미 그들의 군대를 사방으로 분산시켜 놓았는데, 한·위 두 나라로부터 무엇을 더 바란다는 말입니까?」

월왕이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초나라의 세 대부는 군대를 분산하여 배치시켜 놓고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곡옥(曲沃)과 오중(於中)에 포위망을 두르고 곧바로 무가관(無假關)까지 연장하여 그 전선은 장장 3천 7백리에 뻗치고 있습니다. 또한 경취(景翠)의 군대는 북쪽의 노(魯), 제(齊) 등의 변경과 남양(南陽)에 집결하고 있으니, 초나라의 병력이 어떻게 이 보다 더 넓게 분산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왕께서는 한·위 두 나라와 초나라를 싸우게 만들어야 하는데 한·위와 초가 싸우지 않으면 월나라는 출병할 수 없게 되니 이는 두 개의 5는 아시면서 한 개의 10은 모르시는 경우와 같습니다. 월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 제나라는 이로써 월왕은 크게는 왕업을 추구할 마음이 없고 작게는 패업을 이루려는 마음이 없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만 수(讎)29), 방(龐)30), 장사(長沙)31) 등은 초나라의 곡창지대이며, 경택릉(竟澤陵)32)은 목재의 산지입니다. 월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무가관(無假關)을 공격하여 통하면 그 네 곳의 지역에서 산출되는 양식이나 목재를 초나라의 도성 영성에 보내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왕업을 이루려다가 칭왕하지 못하게 되면 패업이라도 이루어 패자를 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왕도를 잃게 되면 패업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때문에 대왕께서는 진공 방향을 바꾸어 초나라를 공격하십시오.

그래서 월왕은 제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바꿔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위왕이 반격에 나서 월군을 공격하여 크게 무찌르고 월왕 무강을 죽였다. 이어서 오나라의 옛 땅과 절강(浙江)33)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모두 점령하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서주(徐州)에서 제군을 격파했다. 그후 월나라 종족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 종족들끼리 다투다가 어떤 자는 왕을 칭하고 또 어떤 자는 군(君)을 칭하며 강남의 바닷가에 살면서 초나라에 신복했다.

그후 7대인 민군(閩君) 요(搖)에 이르러 제후들이 진나라를 공격하는데 참전했다. 한고조가 그 공으로 민군 요를 월왕에 봉해 월나라의 선조들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동월(東越), 민군(閩君) 등은 모두 월왕 요의 후손들이다.


태사공이 말한다.


「우임금의 공은 실로 크도다! 아홉 개의 하천을 통하게 하고 아홉 개의 주를 안정시키니 오늘날까지 중화의 온 세상이 평안하구나! 그 후손 구천은 몸의 고단함도 개의치 않고 힘써 노력하고, 먼 장래를 내다보는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여 결국은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으로 진출하여 주왕실을 받들고 패자를 칭했다. 어찌 구천을 현능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대체적으로 우임금이 남긴 풍조일 것이다. 범려는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겨 모두 영화와 명성을 얻어 후세에 까지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신하와 군주가 능히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으니 드러나지 않고자 하여도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월왕구천세가 끝>




주석

1) 회계(會稽)/ ① 넓은 의미로는 지금의 절강성 포양강(浦陽江)과 조아강(曹娥江) 사이의 솟아 있는 회계산맥을 가리킨다.

②좁은 의미로는 지금의 소흥시(紹興市) 경내의 해발 300미터 좌우의 산이름으로 월왕 구천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오왕 부차가 이끄는 오군에 대항해 농성했던 산이다. 이 산자락에 대우릉이 있다.

③진시황이 강남을 정벌하고 설치한 군 이름으로 치소를 둔 오현(吳縣) 즉 지금의 소주시(蘇州市)를 회계군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회계군의 관할은 장강 이남의 안휘성과 강소성 남부와 절강성과 복건성 전 지역을 포괄했다.

2)취리(欈李)/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가흥시(嘉興市) 남 45리의 옛 지명이다.

3)부초(夫椒)/ 지금의 강소성(江蘇省)의 태호(太湖) 내의 섬인 동정서산(洞庭西山)을 말한다.

4)持滿者與天, 定傾者與人, 節事者以地.

5)유리(羑里)/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 남의 탕음현(湯陰縣) 경내. 주문왕이 서백(西伯)의 지위에 있을 때 은나라 주왕에게 잡혀 갇혀 있었던 곳이다.

6)봉동(逢同)/ 춘추 때 월나라의 대부다. 월절서(越絶書)에는 풍동(馮同),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부동(扶同)이라 했다. 오나라로 들어가 인질이 되어 범려를 석방시켰다. 오나라에 있으면서 백비와 모의하여 오자서를 모함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후에 월나라에 돌아와 장군에 임명되어 구천을 따라 오나라 정벌전에 종군했다.

7)애릉(艾陵)/ 현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경내 남쪽에 있는 노산(魯山) 서쪽 산록. 이곳에서 제나라는 기원전 기원전 484년 오(吳)나라와 싸움에서 크게 패해 10만이 넘는 군사를 잃었다.

8)애릉의 싸움은 오왕 부차 12년 월왕 구천 13년인 기원전 484년의 일어났다.

9)황지의 회맹은 주경왕 38년 기원전 482년의 일이다. 즉 애릉의 싸움은 기원전 484년에 일어났고 그 해에 오자서가 살해되었다. 이어서 2년 후인 기원전 482년에 오왕 부차가 황지의 회맹에서 맹주를 다투었다. 즉 오자서 죽은 후 3년 후에 구천이 범려에게 오나라에 대한 공격 여부를 묻는 것과 다시 그 2년 후에 황지의 회맹에 참석했다는 사기의 기년은 잘못이다.

10)육단(肉袒)은 웃통을 드러내는 것이고 슬행(膝行)은 무릎으로 기는 것으로 모두 항복할 때 행하는 의식이다.

11)시경(詩經) 빈풍(豳風) 중 벌가(伐柯)라는 시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도끼로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들 때 그 모양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도끼에 붙어 있는 자루에 있다는 의미로 부차가 옛날 회계산에서 구천을 용서하여 살려 두었기 때문에 지금은 거꾸로 부차가 구천에게 용서를 빌게 되었듯이 다시 구천이 부차를 용서하면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며 그 교훈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구천 자신에게 있지 않느냐는 의미로 인용한 것이다. 벌가의 전문은 미주로 싣는다.

12)용동(甬東)/ 현 절강성(浙江省) 영파시(寧波市) 앞 주산도(舟山島)를 말함. 후에 주산도의 보타산은 중국 불교의 사대 본산의 하나가 된다.

13)蜚鳥盡 良弓藏 狡免死 走狗烹. 越王爲人長頸鳥喙,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14)문종이 구천에게 오나라를 멸하기 위해서 건의한 7가지 계책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재물을 보내어 상대국의 임금과 신하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준다

둘째, 곡식의 가격을 올려 그들의 창고를 비우게 한다.

셋째, 아름다운 미녀를 보내어 그들의 마음과 의지를 빼앗는다.

넷째, 솜씨 좋은 목공과 좋은 재목을 보내어 그들의 궁실을 크게 짓게 하여 그 나라의 재물들을 탕진하게 만든다.

다섯째, 아첨을 잘하는 신하를 보내어 그들의 생각을 어지럽힌다.

여섯째, 직간 하는 충신들을 구석으로 몰아 스스로 죽게 만들어 그 나라의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인재의 벽을 얇게 만든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는 그들로 하여금 사사로이 재물을 축적하게 하며 한편으로는 군사를 동원하여 대외원정 하게 하여 그 나라의 재정을 피폐하게 만든다.

(1. 捐貨幣, 以悅其君臣 2.貴糴粟槁, 以虛其積聚 3. 遣美女, 以惑其心志 4. 遣之巧工良材, 使作宮室, 以罄其財 5. 遣之諛臣, 以亂其謀 6.强其諫臣使自殺, 以弱其輔 7.積財練兵, 以承其弊.)

15)초위왕(楚威王) : 기원전 339년에 즉위하여 329년에 죽은 전국 때 초나라의 군주다. 미(羋) 성에 이름은 웅상(熊商)이다. 주경왕 36년 기원전 333년 제나라 군사와 서주(徐州)에서 싸워 이겼다. 서주는 지금의 산동성 등주시(滕州市) 동남이다.

16)제위왕(齊威王)/ 전국 때 제나라의 군주로 기원전 356년 즉위하여 기원전 320년에 죽었다. 전(田) 성에 이름은 인제(因齊)다. 재위시 정치를 개혁하고 군대를 정비했으며 추기(鄒忌)를 재상으로 기용하고, 손빈(孫臏)을 군사로 삼아 신장된 국세로 중원을 크게 진동시켰다. 계릉(桂陵)과 마릉(馬陵)의 싸움에서 당시의 패권국 위(魏)나라의 군대를 대파하고 위(魏)를 대신하여 패자를 칭하여 제후들을 호령했다. 그로 인해 제후들은 감히 20여 년 동안 제나라에 대해 군사행동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임치성 동문 밖 직하(稷下)에 학자들을 초빙하여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를 열었다.

17)섭(葉)/ 지금의 하남성 섭현(葉縣) 남으로 전국 때 한나라의 남방을 지키는 중요한 성읍이다.

18)양책(陽翟)/ 전국 때 한 나라의 영토로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 일대다. 우왕(禹王)이 세운 하(夏)나라의 도읍이었다. 춘추 때는 정나라 땅으로 역읍(櫟邑)이었다가 전국 때 한나라 령이 되어 양책으로 이름이 바꾸었다. 진나라의 문신후 여불위(呂不韋)는 이곳 출신의 상인이었다.

19)남양(南陽)/ 전국 때 남양이라는 지명은 세 곳이 있었다. 여기서는 3항의 남양을 말한다.


①지금의 하남성 제원현(濟源縣)에서 획가현(獲嘉縣) 일대로 태항산 남록과 황하의 북안에 있는 땅으로써 얻은 지명이다. 춘추 때 당진국의 영토였다가 전국시대에는 위(魏)와 한(韓)으로 나뉘어 속했다.

②지금의 하남성 서남부의 남양시(南陽市) 일대로 복우산(伏牛山) 남쪽에 한수(漢水)의 북안에 있는 땅이라고 해서 얻은 지명이다. 전국 때 초(楚), 한(韓), 위(魏) 삼국으로 나뉘어 속했다가 기원전 273년 진나라가 한(韓)과 위(魏)의 남양(南陽) 땅과 초나라의 상용(上庸)의 땅을 빼앗아 남양군을 설치했다.

③ 지금의 산동성 태산(泰山) 이남과 문수(汶水) 북안의 땅으로 춘추 때 제나라와 국경을 접했던 노나라의 땅이었다가 제나라에 빼앗겼다.

20)거(莒)/ 지금의 산동성 남쪽의 거현(莒縣)을 말한다.

21)상(常)/ 상(嘗)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산동성 조장시(棗莊市) 남쪽이다.

22)담(郯)/ 지금의 산동성 담성시(郯城市) 남

23)방성(方城)/ 지금의 하남성 노산(魯山)과 섭현(葉縣) 이남에 초나라가 중원의 제후국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장성이다.

24)상(商)/ 현 섬서성(陝西省) 상주시(商州市)와 상남시(商南市) 일대로 호북성 및 하남성과의 접경지역. 섬진(陝秦)이 동쪽으로 나가는 길은 황하의 하곡부(河曲部)의 동관(潼關)과 진령(秦嶺)을 넘는 상(商) 땅의 무관(武關) 두 길이 있었다. 진나라에 변법을 시행하고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은 위앙(衛鞅)이 그 공으로 책봉된 곳으로 위앙은 그 성을 상(商)으로 바꾸었다.

25)오(於)/ 상군열전(商君列傳)에「위앙이 魏나라를 무찌르고 개선하자 진나라는 그 공으로 그를 오(於), 상(商)의 15읍에 봉하고 상군(商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일설에는 오(鄔)라고도 하며 전국 때 진나라 령으로 지금의 섬서성 상현(商縣) 동남이다.

26)석(析)/ 지금의 하남성 서협(西峽)으로 춘추 때 초나라 령이다. 기원전 524년 초평왕이 허(許)나라의 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다. 후에 진(秦)나라 령이 되었다.

27)역(酈)/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서북에 있었던 옛 지명이다. 전국 때 초나라 령이다. 진나라가 이곳에 역현(酈縣)을 설치하고 치소를 두었다.

28)종호(宗胡)/ 지금의 안휘성 부양시(阜陽市)에 있었던 옛 고을 이름이다. 원래는 호(胡)라는 제후국이었으나 전국 때 초나라 령이 되었다. 호(胡) 성의 본거지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29)수(讎)/ 하남성 노산현(魯山縣) 동남에 있던 전국 때 초나라령의 성읍이다.

30)형(衡)/ 지금의 호남성 형양시(衡陽市) 동의 전국 때 초나라령이다.

31)장사(長沙)/ 지금의 호남성 성도(省都)다.

32)경택릉(竟澤陵)/ 지금의 호북성 잠강현(潛江縣) 서쪽에 있었던 전국 때 초나라의 7개의 큰 호수 중의 하나로 목재의 산지로 유명했다.

33)절강(浙江)/ 강소성과 절강성을 가르는 전당강(錢塘江)을 말한다.


미주 : 『시경빈풍벌가( 詩經∙豳風∙伐柯)』 전문


伐柯如何 匪斧不克(벌가여하 비부불극)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도끼가 없으면 만들 수 없지! 取妻如何 匪媒不得(취처여하 비매부득)

부인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중매쟁이가 없으면 얻을 수 없지!


比(비)이다. 柯(가)는 도끼자루, 克(극)은 능함이다. 媒(매) 는 두 남녀 사이에 말을 통하게 하는 자이다.


伐柯伐柯 其則不遠(벌가벌가 기즉불원)

도끼자루를 만드세, 도끼자루를 만드세! 만드는 방법은 멀리 있지 않네


我覯之子 籩豆有踐(아구지자 변두유천)

마음속의 사람을 우연히 만나면 변두에 음식을 준비하여 혼례를 치루면 되지


覯(구)는 우연히 만나는 것이고 籩(변)은 竹豆(죽두)요 豆(두)는 木豆(목두)다. 踐(천)은 행함이다. ○도끼로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들 때는 바로 그 도끼에 달린 도끼자루를 보면 되지 멀리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따라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변두를 준비해서 혼례를 치르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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