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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채세가(管蔡世家) 5.주무왕의 형제들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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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세가5. 관숙․채숙(管叔蔡叔)



778. 管蔡相武庚(관채상무경),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은 무경(武庚)의 상(相)이 되어


779. 將寧舊商(장영구상);

장차 옛 상나라의 땅의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780. 及旦攝政(급단섭정),

그러나 주공단(周公旦)이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의 자리에 앉자


781. 二叔不饗(이숙불향);

두 사람은 마음에 의심을 품었다.


782. 殺鮮放度(살선방탁),

이에 주공단은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한 다음


783. 周公爲盟(주공위맹);

어린 성왕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784. 大任十子(태임십자),

대임은 슬하에 아들을 열이나 두어


785. 周以宗强(주이종강).

주나라는 종실로써 강성하게 되었다.


786. 嘉仲悔過(가중회과).

이어서 채호(蔡胡)의 아들 채중(蔡仲)이

그 부친의 잘못을 뉘우쳐 선행을 했음으로


787. 作<管蔡世家>第五(작<관채세가>제오)

<관채세가>제오를 지었다.



관숙선(管叔鮮)과 채숙탁(蔡叔度)은 모두 주문왕의 아들들이고 주무왕의 동생들이다. 주무왕과 한 어머니에게 태어난 형제는 모두 10명이다. 그 형제들 모친의 이름은 태사(太姒)로 주문왕의 정부인이다. 그들은 맏이는 백읍고(伯邑考)이고 2자는 주무왕(周武王) 발(發), 3자는 주공(周公) 단(旦), 4자는 관숙(管叔) 선(鮮), 5자는 채숙(蔡叔) 탁(度), 6자는 조숙(曹叔) 진탁(振鐸), 7자는 성숙(成叔) 무(武), 8자는 곽숙(霍叔) 처(處), 9자는 강숙(康叔) 봉(封)이고 마지막 10번째 막내는 염계(冉季)B재(載)이다. 10형제 중 오직 무왕 발(發)과 주공 단(旦) 만이 덕이 두텁고 재능이 높았다. 그래서 주문왕은 두 사람을 좌우에 두고 보좌하도록 하고 장자 백읍고를 버리고 발을 태자로 세웠다. 이윽고 문왕이 죽자 발이 즉위하니 이가 주무왕(周武王)이다. 그때 백읍고는 이미 죽고 없었다.

은주(殷紂)를 멸하고 천하를 안정한 무왕은 공신들과 동생들을 제후로 책봉했다. 그래서 숙선(叔鮮)은 관(管)에, 숙탁(叔度)은 채(蔡)에 봉해졌다. 두 사람은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綠父)의 상(相)이 되어 은나라 유민들을 다스렸다. 그리고 숙단(叔旦)은 노(魯)에 봉하고 주나라의 재상으로 삼아 주공(周公)이라 했다. 숙진탁(叔振鐸)은 조(曹)에, 숙무(叔武)는 성(成)에, 숙처(叔處)는 곽(霍)에 강숙봉(康叔封)은 위(衛)에 봉하고, 막내 염계(冉季)는 아직 어려 책봉하지 않았다.

무왕이 죽었으나 그 아들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에 그 뒤를 이었기 때문에 주공이 섭정의 자리에 올라 국정을 전단했다. 관숙과 채숙은 주공이 성왕을 해치지 않을까 의심하여 무경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주공단은 성왕의 명을 받아 반란군을 토벌하고 무경의 목을 베고 관숙을 죽였다. 채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했는데 10승의 병거와 죄수 70 명을 주어 그 뒤를 따르게 했다. 또한 은나라의 유민을 둘로 나누어 그 하나는 미자계(微子啓)를 송(宋)에 봉해 은나라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고 다른 하나는 강숙(康叔)을 봉해 위(衛)라 했다. 이가 위강숙(衛康叔)이다. 다시 계재(季載)를 염(冉)1)에 봉했다. 염계와 강숙은 모두 선행을 행하니 주공이 천거하여 강숙은 사구(司寇)에, 염계는 사공(司空)에 임명하여 성왕을 보좌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모두 천하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채숙탁은 나라 밖에서 유랑 중에 죽었다. 그에게는 호(胡)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부의 악행을 반성하며 덕을 쌓고 선행을 행했다. 주공이 듣고 호를 천거하여 자기의 봉지인 노나라의 경사(卿士)를 맡겼다. 그라자 노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주공이 성왕에게 건의하여 호를 옛날 채 땅에 봉해 채숙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이가 채중(蔡仲)이다.

그리고 나머지 무왕의 다섯 동모제는 각기 봉국으로 돌아가 주나라 조정에서 벼슬을 맡지 않았다.

채중이 죽고 그 아들 채백(蔡伯) 황(荒)이 잇고, 채백 황이 죽자 그 아들 궁후(宮侯)가 이었다. 궁후가 죽으니 그 아들 려후(厲侯)가 뒤를 잇고 려후가 죽으니 그 아들 무후(武侯)가 뒤를 이었다.

무후 23년 기원전 841년 무후 재위시 주려왕이 왕의 자리를 버리고 체(彘) 땅으로 달아나 주공과 소공이 합심하여 정권을 잡자 천하의 수 많은 제후들이 주왕실에 반기를 들었다.

무후가 재위 26만인 기원전 838년에 죽고 그 아들 이후(夷侯)가 뒤를 이었다.

이후 11년 기원전 827년, 주선왕(周宣王)이 즉위하여 공화(共和)가 끝났다.

이후가 재위 28년만인 기원전 810년에 죽고 아들 리후(釐侯) 소사(所事)가 뒤를 이었다.

리후(釐侯) 39년 기원전 771년, 주유왕(周幽王)이 견융(犬戎)에게 살해되어 쇠락한 주왕실은 동쪽의 낙양으로 천도했다. 진(秦)나라는 이때부터 제후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리후가 재위 48년만인 기원전 762년에 죽고아들 공후(共侯) 흥(興)이 섰다.

공후가 재위 2년만인 기원전 760년에 죽고 아들 대후(戴后)가 뒤를 이었다.

대후가 재위 10년 만인 기원전 750년에 죽고 아들 선후(宣侯) 조보(措父)가 이었다.

선후 28년 기원전 722년, 노은공(魯隱公)이 노나라 군위에 올랐다.

선후가 재위 35년만인 기원전 715년에 죽고 아들 환후(桓侯) 봉인(封人)이 뒤를 이었다.

환후 3년 기원전 712년, 노나라의 국인이 노은공을 시해했다.

환후가 재위 20년만인 기원전 695년에 죽고 동생 애후(哀侯) 헌무(獻舞)가 계위했다.

애후 11년 기원전 684년, 애후가 먼저 진(陳)나라 군주의 큰딸과 혼인을 하고 1년 후인 애후 12년인 기원전 683년에 식후(息侯)가 작은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식부인(息夫人)이 출가하여 채나라 경내를 지나 식나라로 들어가는데 애후가 매우 무례하게 대했다. 식후가 듣고 화를 내며 초문왕(楚文王)에게 호소했다.

「왕께서 군사를 이끌고 저희 식나라를 공격하시는 체 하면 맹약에 따라 채후는 우리 식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출병할 것입니다. 그때 왕께서 채나라를 공격하면 싸움에서 승리를 취할 수 있습니다.」

초문왕이 식후의 계책에 따라 식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채애후를 사로잡아 초나라로 압송해 갔다. 초애후는 초나라에 9년 동안 억류되어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애후가 재위 20년만인 기원전 675년에 초나라에 죽자 채나라 사람들은 그 아들 힐(肹)을 옹립하여 그 뒤를 잇게 했다. 이가 목후(穆侯)다. 목후는 그 여동생을 제환공의 부인으로 시집보냈다.

목후 18년 기원전 657년, 제환공과 채부인이 뱃놀이를 하다가 부인이 배를 흔들어 요동치게 만들었다. 제환공이 그녀에게 그만두라고 제지했으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흔들었다. 환공이 대노하여 그녀를 채나라로 돌려보냈으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려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채후는 화를 내고 여동생을 다른 사람에게 재가시켜버렸다. 제환공이 노하여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채나라를 공격했다. 채나라는 싸움에서 대패하고 목후는 포로가 되었다. 제후들을 규합한 제환공은 계속 남진하여 초나라의 소릉(召陵)에 이르렀다. 후에 제후들이 채후를 대신하여 사죄하자 제환공은 채후를 방면하여 귀국시키고 군사를 물리쳐 돌아갔다.

목후가 재위 29만인 기원전 646년에 죽자 아들 장후(莊侯) 갑오(甲午)가 뒤를 이었다.

장후 3년 기원전 643년, 제환공이 죽었다.

장후 14년 기원전 632년, 진문공(晉文公)이 성복(城濮)에서 초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장후 20년 기원전 626년, 초나라의 태자 상신(商臣)이 그 부왕 성왕을 시해하고 자립했다.

장후 25년 기원전 621년, 진목공(秦穆公)이 죽었다.

장후 33년 기원전 613년, 초장왕(楚莊王)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장후가 재위 34만인 기원전 612년에 죽고 아들 문후(文侯) 신(申)이 뒤를 이었다.

문후 14년 기원전 598년, 초장왕이 진(陳)나라 일어난 내란사건을 진압하고 그 주모자 하징서(夏徵舒) 주살했다.

문후 15년 기원전 597년,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을 포위하자 정양공(鄭襄公)이 성을 들어 항복했다. 초나라가 정양공을 석방했다. 이 해에 초나라가 필(邲)에서 당진과 싸워 크게 이겼다.

문후가 재위 20년만인 기원전 592년에 죽고 아들 경후(景侯) 고(固)가 뒤를 이었다.

경후 원년 기원전 591년, 초장왕이 죽었다.

경후 49년 기원전 543년, 경후가 초나라 여인을 데려와 태자 반(般)과 혼인시켜 며느리로 삼았다. 경후가 후에 며느리와 간통하자 태자가 경후를 죽이고 스스로 채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영후(靈侯)다.

영후 2년 기원전 541년, 초나라의 공자위(公子圍)가 그 군주 겹오(郟敖)를 시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영왕(楚靈王)이다.

영후 9년 기원전 534년, 진나라의 사도(司徒) 공자초(公子招)가 진애공(陳哀公)을 죽였다. 초나라가 공자기질(公子棄疾)을 보내어 진나라를 점령하자 진나라는 망했다.

영후12년 기원전 531년, 초영왕이 영후를 속여 신(申) 땅으로 유인한 후, 부군(父君)을 시해했다는 죄명을 들어 죽였다. 초영왕은 주연을 열어 무장한 갑병들을 매복시키고 초대한 채영후를 술에 취하게 한 다음 틈을 타서 붙잡아 죽인 것이다. 그때 영후를 수행한 70여 명의 사병들도 모두 해를 당해 죽었다. 초영왕은 다시 진(陳)나라의 옛 땅을 통치하고 있던 공자기질에게 명하여 채나라를 포위하라고 했다. 그해 11월 초나라가 마침내 채나라를 멸하고 그 땅에 공자기질을 봉하여 채공(蔡公)이라고 했다.

초나라가 채나라를 멸한 3년 후인 기원전 528년, 초나라의 공자기질이 초영왕을 죽이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평왕(楚平王)이다. 초평왕이 채경후의 작은 아들 자려(子廬)를 찾아내어 군주로 세워 채나라를 복국시켰다. 이가 평후(平侯)다. 이 해에 초나라는 다시 진(陳)나라도 복국시켰다. 형을 시해하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초평왕은, 제후들과 관계를 개선하여 자기의 왕위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진(陳)과 채(蔡) 두 나라를 복국시켰다.

평후 9년 기원전 522년, 평후가 죽자 채영후의 손자 동국(東國)이 평후의 아들을 쫓아내고 스스로 채후의 자리에 앉았다. 이가 도후(悼侯)다. 도후의 부친은 은태자(隱太子) 우(友)다. 우는 원래 영후(靈侯)의 태자였으나 채후의 자리를 차지한 평후에 의해 살해되었었다. 그래서 평후가 죽자 은태자의 아들 동국이 평후의 아들을 쫓아내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도후가 재위 3년만인 기원전 519년에 죽자 그 동생 소후(昭侯) 신(申)이 뒤를 이었다.

소후 10년 기원전 509년, 소후가 초소왕에게 조현(朝見)을 행하기 위해 초나라에 들어 갈 때, 진귀한 가죽 옷을 두벌 가지고 가서 한 벌은 초소왕에게 선물하고, 나머지 한 벌은 자기가 입었다. 초나라의 영윤 자상(子常) 낭와(囊瓦)가 남은 가죽옷을 자기에게 달라고 청했으나 소후는 주지 않았다. 자상이 초소왕에게 참소하여 소후를 초나라에 3년이나 구류시키도록 했다. 후에 자기가 구류된 이유를 알게 된 소후는 가죽옷을 자상에게 바쳤다. 가죽옷을 받은 자상은 그때서야 비로소 초왕에게 건의하여 소후로 하여금 자기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채나라로 돌아온 소후는 당시의 패권국이었던 당진(唐晉)으로 들어가 채나라를 도와 초나라를 정벌해달라고 청했다.

소후 13년 기원전 506년, 소후와 위영공(衛靈公)이 소릉(召陵)의 회맹에 참석하여 회견했다. 채후가 몰래 회맹에 참석한 주나라의 대부 장홍(萇弘)에게 부탁하기를 회맹의 의식을 행할 때 채나라의 서열을 위나라보다 앞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위나라가 사추(史鰌)2)를 보내 위강숙(衛康叔)의 덕이 높고 이룬 공이 크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위나라의 서열은 채국보다 앞에 서게 되었다. 그해 여름, 채나라가 당진의 뜻에 따라 초나라를 따르던 심(沈="冉)을" 멸했다. 초왕이 대노하여 군사를 보내 채나라를 공격했다. 채소후는 그의 아들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같이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겨울, 채소후와 오왕 합려(闔閭)가 초군을 크게 무찌르고 초나라의 서울 영도(郢都)에 입성했다. 자기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던 채소후를 두려워한 자상(子常)은 정나라로 도망쳤다.

소후 14년 기원전 503년, 초나라의 영윤이 채나라에 원수를 갚기 위해 계획을 세운 후에 백성들을 향해 북을 쳐 알리면 읍(泣)만을 행하게 하고 소리는 내지 못하게 했다. 채소후가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했다.

소후 26년 기원전 493년, 공자가 채나라에 들렸다. 초소왕이 채나라에 쳐들어오자 채후는 두려움에 떨며 오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오왕이 채후에게 말하기를 채나라는 오나라와 너무 멀기 때문에 매번 구원군을 보내기가 어려우니 나라를 오나라와 가까운 곳으로 옮기겠다면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겠다고 말했다. 채소후가 대부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아무도 몰래 오왕의 말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채나라를 구원한 오나라 군대는 채나라를 주래(州來)3)로 옮겼다.

소후 28년 기원전 491년, 소후가 조현을 행하기 위해 오나라로 길을 떠나려고 하자 채나라의 대부들이 다시 나라를 옮기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이름이 이(利)라는 사람을 도적으로 변장시켜 도중에 소후를 살해했다. 후에 대부들은 다시 군주를 시해한 죄를 물어 이(利)를 죽였다. 그런 다음 소후의 아들 삭(朔)을 추대하여 군주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성후(成侯)다.

성후 4년 기원전 487년, 송나라가 조(曹)나라를 멸했다.

성후 10년 기원전 48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의 군주 간공(簡公)을 시해했다.

성후 13년 기원전 478년,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했다.

성후가 재위 19년만인 기원전 472년에 죽고 그의 아들 성후(聲侯) 산(産)이 계위했다.

성후(聲侯)가 재위 15년만인 기원전 457년에 죽고 아들 원후(元侯)가 뒤를 이었다.

원후가 재위 6년만인 기원전 451년에 죽고 아들 후제(侯齊)가 뒤를 이었다.

후제 4년 기원전 447년, 초혜왕(楚惠王)이 채나라를 멸했다. 후제는 나라 밖으로 도망가고 채나라는 이로써 제사가 끊어지고 나라는 망했다. 진(陳)나라가 망한지 33년 후였다.

백읍고(伯邑考)의 후손들은 어디에 분봉되었는지 알 수 없다.

무왕 발(發)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은 『주본기(周本紀)』에 기록했다.

관숙선은 반란을 일으켜 피살되었기 때문에 후손들을 남기지 못했다.

주공단은 노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후손들에 대한 기록은 『노주공세가』에 기록했다.

채숙탁의 후손들은 채나라의 군주들임으로 『관채세가』에 기록했다.

조숙진탁(曹叔振鐸)의 후손들 역시 조(曹)나라의 군주들로써 『관채세가』에 기록했다.

성숙무(成叔武)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곽숙처(霍叔處)의 후손들은 곽(霍) 땅에 봉해졌다가 후에 당진의 헌공(獻公)에 의해 멸망했다.

강숙봉(康叔封)의 후손들은 위나라의 군주들임으로 『위세가(衛世家)』에 기록했다.

염계재(冉季載)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태사공이 말한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반란은 기록할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주무왕이 죽었을 때, 성왕은 나이가 어렸음으로 천하 사람들 대부분은 섭정을 행했던 주공을 의심했다. 이에 성숙(成叔), 염계(冉季) 등 10명의 동모형제들이 전력을 다하여 보좌를 함으로써 비로소 천하의 제후들이 주왕실을 받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의 사적들을 세가 편에 기록했다.

조숙진탁(曹叔振鐸)은 주무왕의 동생으로 무왕이 은주를 멸한 후에 그를 조(曹)에 봉했다.

숙진탁(叔振鐸)이 죽자 그 아들 태백 비(脾)가 이었다. 태백이 죽고 그 아들 중군(仲君) 평(平)이, 중군(仲君)이 죽자 그 아들 헌백(憲伯) 후(侯)가 계위했다. 헌백이 죽자, 그 아들 효백(孝伯) 운(雲)이, 효백 이 죽자 그 아들 이백(夷伯) 희(喜)가 차례로 뒤를 이었다.

이백 23년 기원전 842년, 주려왕(周厲王)이 국인들에게 쫓겨 체(彘) 땅으로 달아났다.

이백이 재위 30년만인 기원전 835에 죽자 그 동생 유백(幽伯) 강(强)이 계위했다.

유백 9년 기원전 826년, 동생 소(蘇)가 유백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대백(戴伯)이다.

대백 원년 기원전 825년은 주선왕이 주왕의 자리에 오른지 3년 째 되는 해다.

대백이 재위 30년만인 기원전 796년에 죽고 아들 혜백(惠伯) 시(兕)가 뒤를 이었다.

혜백 25년 기원전 771년, 주유왕(周幽王)이 견융에게 살해되고 주나라는 도성을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옮겼다. 이로써 시간이 지날수록 주왕실은 쇠락하고 제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주왕실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섬진(陝秦)이 이때부터 제후들의 반열에 서기 시작했다.

혜백이 재위 36년만인 기원전 760년 죽고 그 아들 석보(石甫)가 계위했으나, 동생 무(武)가 석보를 죽이고 스스로 조백(曹伯)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목공(穆公)이다.

목공이 재위 3년만인 기원전 757년에 죽고 아들 환공(桓公) 종생(終生)이 뒤를 이었다.

환공 35년 기원전 722년, 노은공(魯隱公)이 노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4)

환공 45년 기원전 712년, 노나라 사람이 그 군주 노은공을 시해했다.

환공 46년 기원전 711년 송나라의 태재(太宰) 화독(華督)이 송상공(宋殤公)과 대부 공보가(孔父嘉)5)를 죽였다.

환공이 재위 55년만인 기원전 702년에 죽자 아들 장공(莊公) 석고(夕姑)가 계위했다.

장공 23년 기원전 679년, 제환공이 회맹의 맹주가 되어 패자를 칭했다.

장공이 재위 31년만인 기원전 671년에 죽고 그 아들 리공(釐公) 이(夷)가 뒤를 이었다.

리공이 재위 9년만인 기원전 662년에 죽고 그의 아들 소공(昭公) 반(班)이 뒤를 이었다.

소공 6년 기원전 656년, 제환공이 채나라를 쳐서 이기고 승세를 타고 계속 남쪽으로 진군하여 초나라의 소릉(召陵)에 이르렀다.

소공이 재위 9년만인 기원전 653년에 죽고 그 아들 공공(共公) 양(襄)이 즉위했다.

공공 16년 기원전 637년, 당진의 공자 중이(重耳)가 본국에서 쫓겨나 유랑생활을 하던 중 조나라에 들렸다. 조공공은 예의에 벗어난 일임에도 중이의 신체적인 특징인 변협(駢脇)6)를 보려고 시도했다. 대부 희부기(僖負羈)7)가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래서 희부기는 개인적으로 중이와 친교를 맺었다.

공공 17년 기원전 636년, 당진국으로 환국한 중이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문공(晉文公)이다.

공공 21년 기원전 632, 진문공이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여 공공을 포로로 잡은 후에 돌아가면서 그 군사들에게 희부기의 종족들이 사는 동네는 절대 침입하지 말라는 령을 내렸다. 어떤 사람이 진문공에게 말했다.

「옛날 제환공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주재할 때 비록 자기와는 다른 성의 제후였지만 망한 나라를 다시 세웠음에도, 지금 군주께서는 조나라 군주를 가두어 동성의 제후를 멸하려고 하시니, 어찌 제후들에게 령이 서겠습니까?

진문공이 듣고 조공공을 석방하여 귀국시켰다.

공공 25년 기원전 628년, 진문공이 죽었다.

공공이 재위 35년만인 기원전 618년에 죽고 그의 아들 문공(文公) 수(壽)가 계위했다.

문공이 재위 23년만인 기원전 595년에 죽고 그의 아들 선공(宣公) 강(强)이 뒤를 이었다.

선공 17년 기원전 578년, 선공이 죽고 그의 동생 성공(成公) 부추(負芻)가 이었다.

성공 3년 기원전 575년, 당진의 려공(厲公)이 조나라를 공격하여 조성공을 포로로 잡아서 당진으로 데려갔다가 2년 후에 석방했다.

성공 5년 기원전 573년, 당진국의 대부 란서(欒西)와 중행언(中行偃)이 공모하여 정활(程滑)을 시켜 그 군주 려공을 시해했다.

성공이 재위 23년만인 기원전 555년에 죽고 아들 무공(武公) 승(勝)이 즉위했다.

무공 26년 기원전 529년, 초나라의 공자기질(公子棄疾)이 초영왕을 죽이고 대신 초왕의 자리에 앉았다.

무공이 재위 27년만인 기원전 528년에 죽고 아들 평공(平公) 수(須)가 뒤를 이었다.

평공 4년 기원전 524년, 평공이 죽고 아들 도공(悼公) 오(午)가 뒤를 이었다. 이 해에 송(宋), 위(衛), 진(陳), 정(鄭) 등 네 나라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도공 8년 기원전 516년, 송경공(宋景公)이 즉위했다.

도공 9년 기원전 515년, 송나라에 조현을 행하기 위해 들린 도공이 송나라에 의해 구류되었다. 조나라의 대신들은 도공의 동생 야(野)를 추대하여 군주로 삼았다. 이가 성공(聲公)이다. 도공은 결국 송나라에서 죽었다. 조나라가 도공의 시신을 모셔와 장례를 치렀다.

성공 5년 기원전 510년, 평공의 동생 통(通)이 성공을 죽이고 스스로 조나라의 군위에 올랐다. 이가 은공(隱公)이다.

은공 4년 기원전 506년, 성공(聲公)의 동생 로(露)가 다시 은공을 살해하고 자립했다. 이가 정공(靖公)이다.

정공이 재위 4년만인 기원전 502년에 죽자 아들 백양(伯陽)이 뒤를 이었다.

백양 3년 기원전 499년, 송나라의 도성에 살던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수많은 공자들이 토지신을 받드는 사궁(社宮)에 모여 조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상의를 하고 있었다. 그때 조숙진탁(曹叔振鐸)이 말리며 그들에게 공손강(公孫强)이 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공자들이 조숙진탁의 청을 허락했다. 꿈을 꾼 사람이 깨서 조나라를 뒤져 공손강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았으나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경계의 말을 주었다.

「내가 죽은 후에 너희들이 공손강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조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이 나라를 떠나야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조백의 자리에 오른 백양은 사냥을 즐겨 다녔다.

백양 6년 기원전 496년, 조나라에 공손강이란 농부가 있었는데 사냥을 매우 즐겨했다. 그가 하얀 기러기를 활로 쏘아 잡아서 백양에게 바치면서 사냥의 도에 빗대어 정사를 논했다. 백양이 매우 기뻐하며 공손강을 총애했다. 백양은 공손강을 사성(司城)에 임명하여 정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꿈을 꾼 사람의 아들들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조나라를 떠났다. 공손강이 백양에게 패업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논했다. 백양 14년 기원전 488년, 백양이 공손강의 말을 쫓아 종주국인 당진을 배반하고 송나라를 침략했다. 송경공이 반격을 가했으나 당진이 구원하지 않았다. 백양 15년 기원전 487년 송나라가 조나라를 멸하고 백양과 공손강을 잡아가서 죽였다. 이로써 조나라는 망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조공공(曹共公)이 현신 희부기(僖負羈)의 말을 믿지 않고 대부들만이 탈 수 있는 헌거(軒車)에 300명이 되는 미녀와 후궁들이 타고 다닌 일에 대하여 생각해 봤는데 그것은 덕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나라의 시조 조숙진탁(曹叔振鐸)에 대한 꿈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어찌 조나라의 운명을 연장하고픈 생각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공손강이 오히려 국가를 훌륭하게 다스리는 일에 열심이지 않았다면 조숙진탁의 제사상에서 피어오르던 향이 꺼지지 않았을 것이다.」

<관채세가 끝>

주석

1)염(冉)/ 하남성 평여(平與)로 심(沈), 염(冉) 등으로로 불려진다.

2)사추(史鰌)/ 춘추 때 위나라의 사관으로 자(字)가 자어(子魚)이다. 혹은 사어(史魚)라고도 부른다. 곧은 성격으로 이름이 높았다. 공자가어(孔子家語)란 책에 시간(屍諫)이란 고사가 전해진다. 사어가 병이 깊어 죽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위영공에게 거백옥의 현명함을 알고 자주 천거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고 오히려 불초한 미자하(彌子瑕)를 중용했다. 이에 자어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예를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죽거든 시신을 창문 밑에 놓아두라고 유언했다. 영공이 조문을 와서 보고 괴이하게 여겼다. 그 자식으로부터 전말을 알게 된 영공은 마침내 미자하를 추방하고 거백옥을 등용했다. 즉 사어는 죽어서도 자신의 시신을 갖고 임금의 잘못을 간했다고 하는 말이 시간(屍諫)이란 말이다. 논어 위영공편에 공자가 칭송한 말이 있다. 子曰 直哉 史魚. 邦有道 如矢. 邦無道 如矢. (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 곧은 사람이여,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도 화살과 같이 곧았고, 도가 없을 때도 화살같이 곧았도다!’).

3)주래(州來)/ 지금의 안휘성 수현(壽縣)의 옛 이름이다. 원래 주래국(州來國)이었으나 초나라에 의해 멸망 당했다. 후에 초와 오 두 나라가 번갈아 가며 다투어 점령했다. 1955년 수현(壽縣) 서문에서 채나라 군주의 坑墓가 발견되었는데 청동기 486점과 옥기 금박 등이 부장품을 발굴했다. 학자들은 이 묘가 채소후의 것으로 추정했다.

4)노은공(魯隱公) 원년인 기원전 722년은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가 시작된 기년이다. 춘추는 노은공 원년부터 시작해서 노애공 14년 기원전 481년 까지 242년 동안의 노나라 역사서이다.

5)공보가(孔父嘉)/ 춘추 때 송나라의 대부로써 자(子) 성에 공(孔) 씨에 이름은 가(嘉)다. 공자의 6대조로 송목공 때 송나라의 대사마가 되었다. 목공이 병이 들어 위중하게 되었을 때 그를 불러 그의 후계에 대해 상의하자 그는 목공의 아들 공자풍(公子馮)을 세울 것을 간했으나 목공은 듣지 않았다. 이윽고 목공은 그의 형 선공(宣公)의 아들 공자 여이(與夷)에게 군위를 물려주었다. 이가 송상공(宋殤公)이다. 공자풍은 송나라를 떠나 정나라에 가서 살았다. 태제 화독(華督)이 공보가의 처를 보고 그 미모에 미혹되어 빼앗을 마음을 품었다. 이윽고 기회가 오자 화독은 공보가와 송상공을 죽이고 공보가의 처를 빼앗았다.

6) 변협(騈脇)/ 통갈비다. 갈비가 나란히 붙어 통뼈 같은 늑골이다. 일종의 신체상 기형으로 갈빗대가 나란히 붙어서 통뼈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늑골이다.

7) 희부기(僖負羈)/ 조(曹)나라 대부다. 리부기(釐負羈)라고도 한다. 진문공 중이와 친교를 맺었다. 중이가 유랑하다가 조나라에 들렸을 때 조공공(曹共公)이 무례하게 대하자 그는 개인 적으로 중이 일행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더불어 여비에 보태쓰라고 벽옥을 선물했다. 후에 진문공이 조나라를 정벌하여 공공을 포로로 잡아가면서 군사들에게 그의 거처를 범하지 말라는 특명을 내려 그가 베푼 호의에 보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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