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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열전(匈奴列傳)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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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50. 흉노(匈奴)





1282. 自三代以來(자삼대이래),

삼대이래로


1283. 匈奴常爲中國患害(흉노상위중국환해);

흉노는 항상 중국에 해를 끼치는 우환의 대상이었다.


1284. 欲知强弱之時(욕지강약지시),

흉노의 세가 강하고 약할 때의 시기를 알기 위해


1285. 設備征討(몰비정토),

만반의 준비 끝에 정벌에 나섰다.


1286. 作<匈奴列傳>第五十(작<흉노열전>제오십).

이에 <흉노열전>제오십을 지었다.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夏後氏)의 후예로 순유(淳維)1)라고 한다.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이후에는 산융(山戎)、험윤(獫狁)、훈육(葷粥)2)으로 불리며 북만(北蠻)에서 목축을 하며 이리저리 옮겨 살았다. 그들이 기르는 가축은 주로 말, 소, 양이고 진기한 가축으로는 낙타, 나귀, 노새, 결제(駃騠)、도도(騊駼)、탄해(驒騱)3) 등이다. 물과 풀을 쫓아 옮겨 다니며 성곽(城郭)과 일정한 거처[常處]가 없고 농사짓지 않으나 각 부족은 영역을 분명히 나누어 가졌다. 문자와 서적이 없고 언어(言語)로써 약속했다. 어린 아이도 능히 양(羊)을 타고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며, 조금 더 자라면 여우나 토끼를 쏘아 잡아 식량으로 먹는다. 장정들의 힘은 능히 활을 당길 수 있어 모두 무장한 기병이 된다.

그들의 풍속은 평상시에는 목축에 종사하며 새나 짐승을 사냥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긴급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각기 싸움을 연습하여 다른 부족들을 침략하여 약탈했다. 그들의 천성이 그러했다. 그들이 먼 곳을 공격하는 무기는 활과 화살이고 단병전을 행할 때 쓰는 무기는 칼과 자루가 짧은 창으로 선(鋋)이다. 유리하면 진격하고 불리하면 퇴각하면서 도망가 숨는 행위를 수치로 여기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으면 예의(禮義)를 차리지 않는다. 군왕(君王) 이하가 모두 가축의 고기를 먹으며 그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어 입고 털이 달린 모피는 외투로 입었다. 장정들은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약자들은 나머지를 먹었다. 건장한 자를 귀히 여기고 노약한 자를 천하게 여겼다. 부친이 죽으면 그 후처를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형수나 제수 등은 남은 형제가 취해 아내로 삼는다. 그들의 풍속에서는 이름이 있고 이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성(姓)이나 자(字)는 없다.


하(夏)나라의 사회기강이 무너지자 공유(公劉)4)가 그의 농사일을 관장하는 벼슬인 직관(稷官)을 잃자 서융(西戎)으로 들어가 빈(豳) 땅에 도읍을 정했다. 그리고 3백여 년 후에 융적(戎狄)이 고공단보(古公亶父)5)를 공격하자 고공단보는 도망쳐 기산(岐山) 밑의 주원(周原)에 자리 잡았다. 이에 빈 땅의 주족들은 모두 단보를 따라와 도읍으로 삼았음으로 주나라의 기업이 시작되었다. 그 후 백여 년 후에 주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이 견이씨(畎夷氏)6)를 정벌했다. 그리고 10여 년 후에 주무왕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낙읍에 도읍을 정한 후에 다시 풍호(酆鎬)에 살며 융이(戎夷)들을 경수(涇水)와 낙수(洛水) 북쪽으로 쫓아내 해마다 조공을 바치게 하고 그들을 부르기를 황복(荒服)7)이라고 불렀다. 그후 2백여 년 후에 주나라의 도가 쇠해지기 시작했을 때 주목왕(周穆王)8)이 견융을 정벌하여 네 마리의 흰 이리와 사슴을 잡아서 돌아오자 이때부터 황복의 이족들은 조현을 행하지 않았다. 이에 주나라는 보형(甫刑)9))이라는 법을 만들었다. 이윽고 주나라 말년이 되어 주유왕(周幽王)이 포사(褒姒)에게 빠져 왕비를 내치자 왕비의 친정아버지 신후(申侯)와 틈이 생겼다. 기원전 771년 신후가 노하여 견융과 함께 여산(驪山) 밑에서 주유왕을 죽이고 주나라의 초획(焦獲)10)을 점령하고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사이의 땅에 옮겨 살며 중원의 제후국들을 침략했다. 그때 진양공(秦襄公)11)의 구원을 받은 주나라는 풍호를 버리고 동쪽의 낙양으로 나라를 옮겼다.


당시 진양공은 융족을 정벌하기 위해 기(岐)에 이르자 비로소 제후들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65년 후인 기원전 706년에 연(燕)나라 국경을 넘어온 산융(山戎)이 제(齊)나라를 침범하여 제희공(齊僖公)이 이끄는 제군과 제나라의 교외에서 싸웠다. 그리고 다시 42년후인 기원전 664년 산융이 다시 연나라를 침공했다. 연나라가 위급함을 제나라에 고하자 제환공이 북쪽으로 원정을 행하여 정벌했음으로 산융은 도망쳤다. 그 후 다시 20여 년 후인 기원전 636년 융적이 낙읍에 이르러 주양왕을 공격했다. 이에 양왕은 정나라의 범읍(氾邑)으로 몸을 피했다. 원래 주양왕은 정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융적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여 융적의 지원병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양왕이 적후(狄后)를 쫓아내었음으로 융적의 군주가 원한을 품었다. 그때 양왕의 계모 혜후(惠后)에게는 자대(子帶)라는 아들이 있었다. 자대를 주왕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혜후는 적후(狄后) 및 자대와 내응하여 융병을 위해 성문을 열어주었음으로 융적이 입성하여 주나라 군사들을 격파하고 양왕을 나라 밖으로 쫓아낸 후에 자대를 주왕의 자리에 앉혔다. 그때부터 융적은 육혼(陸渾)12)에 거주하기 시작해서 동쪽으로는 위(衛)나라 국경까지 진출하는 등 중원의 제후국들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기 때문에 제후국들은 그들을 싫어했다. 그래서 고대의 시인들은 그들의 포학한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융적을 치도다[戎狄是膺(융적시응)]”,


“험윤을 쳐부시어[薄伐獫狁(박벌험윤)],

태원에 이르렀도다[至於大原(지어대원)]”


“수많은 수레를 내어[出輿彭彭(출여팽팽)],

저 삭방에 성을 쌓는다.[城彼朔方(성피삭방)]”


나라 밖에서 4년을 머물던 주양왕이 사자를 진나라에 보내 위급함을 고했다. 그때 막 진(晉)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라 패업을 이루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진문공은 군사를 일으켜 융적(戎翟)을 토벌하여 쫓아내고 자대를 죽여 주양왕을 영립하여 낙읍으로 모셔 주왕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그 당시 섬진(陝秦)과 당진(唐晉)은 강국이었다. 진문공은 융적(戎翟)을 쫓아내 하서(河西) 및 은수(誾水)와 락수(洛水) 사이의 땅에 거주하게 하고 적적(赤翟) 과 백적(白翟)으로 각각 불렀다. 또한 진목공(秦穆公)은 유여(由餘)를 얻어 서융(西戎)의 여덟 나라를 진나라에 복속시켰다. 그 여덟의 융족 나라는 농서(隴西) 서쪽의 면제(綿諸), 곤융(緄戎)、적(翟)、원지융(豲之戎)과 기산(岐山), 양산(梁山)과、경수(涇水)와 칠수(漆水)의 북쪽으로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지(烏氏) 구연(朐衍) 등이었다. 그리고 당진(唐晉)의 북쪽에는 임호(林胡)와 루번(樓煩)의 융족들이 있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東胡), 산융(山戎) 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산의 계곡에 거주하면서 각기 군장들이 있어 때때로 100여 개의 부족들이 합치는 경우는 있었지만 하나로 통일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 진도공(晉悼公)16)은 위강(魏絳)을 시켜 융적(戎翟)과 강화를 맺게 하자 융적은 당진에게 조현을 행했다. 그리고 다시 백여 년 후에 조양자(趙襄子)17)가 구주산(句注山)18)을 넘어가 대(代)를 무찔러 조씨 종족의 땅에 병합하고 호맥(胡貉)에 이르렀다. 그후 한위(韓魏) 두 종족과 힘을 합쳐 지백(智伯)을 멸하고 당진국을 셋으로 분할하여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즉 조나라는 대(代)와 구주산 이북의 땅을 점령하고 위나라는 하서와 상군을 차지하여 융족과 경계를 접했다. 그후 의거(義渠)의 융족들은 성곽을 쌓고 스스로 지켰으나 진나라에 의해 서서히 잠식당해 진혜왕(秦惠王) 대에 이르러 의거의 25개 성을 함락시켰다. 진혜왕은 위나라를 쳐서 위나라의 서하와 상군에 이르는 모든 땅을 점령했다.

진소왕(秦昭王) 때 의거의 융왕과 선태후(宣太后)와 밀통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선태후는 의거의 융왕을 속여 감천궁(甘泉宮)으로 유인하여 죽이고 군사를 내어 의거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진나라는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을 연결하는 장성을 축조하여 흉노의 침입을 막았다.

한편 조나라의 무령왕(武寧王)은 조나라의 풍속을 개변시켜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히고 말을 타고 활쏘는 방법을 가르쳐 북쪽의 임호(林胡)와 루번(樓煩)을 무찌르고 장성을 쌓아 대(代)에서부터 음산(陰山) 산맥의 기슭을 따라 고궐(高闕)에 이르는 지역을 요새로 만들었다. 조나라는 그 땅에 운중(雲中)、안문(雁門)、대(代) 등의 군을 설치했다. 그 후에 연나라의 현능한 장군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잡혀가 그들의 신임을 얻은 후에 연나라에 귀국해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동호를 패주시켰다. 동호는 이로써 천여 리나 물러갔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했던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다. 연나라 역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을 연결하는 장성을 쌓고 상곡(上谷), 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서(遼西)、요동(遼東) 등의 군을 설치하여 흉노를 막았다. 당시 의관속대의 풍속으로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는 전국칠웅이 있었는데 그 중 세 나라가 흉노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후에 조나라의 장군 이목이 있는 동안은 흉노는 감히 조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후에 육국을 멸한 진나의 시황제는 몽염(蒙恬)을 시켜 10만의 군사로 흉노를 공격하여 하투(河套)의 남쪽 지역을 모두 진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황하를 요새로 삼아 황하의 강변을 따라 44개의 현성(縣城)을 축조하고 죄수들을 군사로 보충하여 지키게 했다. 직도(直道)를 건설하여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까지 개통시켰다. 또한 험준한 산의 능선을 국경으로 삼고 계곡을 참호로 삼아 수선이 가능한 곳은 보수하여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 만여 리에 이르는 장성을 건설했다. 또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에 거점을 마련하고 북가(北假)를 점령했다.


당시에는 동호(東胡)의 세력이 강하고 월지(月氏)가 번성했다. 그때 흉노의 선우는 두만(頭曼)이었다. 두만은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자 북쪽으로 옮겨 살았다. 그리고 10여 년 후에 몽염이 죽고 제후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중국은 혼란에 빠졌음으로 진나라가 변경을 지키기 위해 보냈던 죄수들로 이루어졌던 군사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흉노는 마음 놓고 서서히 황하를 건너와 살면서 옛날의 요새를 경계로 삼아 중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두만 선우에게는 모돈(冒頓)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후에 연지(閼氏)를 사랑하여 작은 아들을 낳은 선우가 모돈을 폐하고 작은 아들을 세우려고 했다. 그래서 두만은 모돈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에 즉시 월지를 기습했다. 이에 월지는 모돈을 살해하려고 했다. 모둔은 좋은 말을 훔쳐 타고 자기 나라로 돌아왔다. 두만이 모돈의 행위를 장하게 여겨 그에게 만 명의 기병을 주어 이끌게 했다. 그러자 모돈은 명적(鳴鏑)21)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그것으로 말타고 활을 쏘는 훈련을 시키며 명령을 내렸다.

“ 명적이 향하는 곳으로 활을 쏘아라.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인다. ”

이윽고 짐승을 사냥할 때 명적이 향하는 곳을 향해 화살을 쏘지 않은 자들은 가차 없이 죽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모돈은 명적을 자기의 애마에게 날렸다. 그러자 자기 좌우의 기병들 중에서 차마 쏘지 못한 자가 있었다. 모돈은 자기의 애마를 향해 활을 쏘지 않은 자를 모두 참수했다. 그리고 또 얼마 후에 다시 명적을 자기의 사랑하는 처에게 날렸다. 좌우의 기병들 중 겁이 난 나머지 감히 활을 쏘지 못한 자가 있자 모돈이 역시 그들을 죽였다. 또 얼마 후에 모돈이 사냥을 나가 명적을 선우의 애마를 향해 날리자 좌우의 기병들이 모두 활을 쏘았다. 이로써 모돈은 그의 좌우 기병들을 모두는 쓸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자기의 아버지인 두만 선우를 따라 사냥나간 모돈은 명적을 두만을 향해 쐈다. 그의 좌우 기병들은 모두 명적이 향하는 곳을 따라 화살을 쏘아 두만 선우를 죽이고 그의 계모와 동생 및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자들을 모조리 주살했다. 모돈은 흉노의 선우 자리에 스스로 올랐다. 모돈이 흉노의 선우가 되었을 때는 동호의 세력이 강성했다. 모돈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흉노의 선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호가 사자를 보내와 두만이 타고 다니던 천리마를 얻고 싶다고 했다. 모둔이 여러 군신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자 모두 말했다.

“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주지 마십시오. ”

그러자 모돈이 말했다.

“ 어찌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는데 말 한 마리를 아끼겠는가? ”

그리고는 천리마를 동호의 사신에게 내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모돈이 자기들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한 동호가 사자를 보내 선우의 연지(閼氏) 중 한 명을 달라고 말했다. 모돈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노하여 말했다.

“ 동호가 무도하여 연지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청을 물리치십시오.”

모돈이 말했다.

“ 어찌 남의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면서 여자 한 명을 아끼겠는가?”

그리고는 즉시 자기가 사랑하는 연지를 동호에게 주었다. 동호가 더욱 교만하게 되어 서쪽으로 나아가 흉노의 변경을 침범했다. 동호와 흉노 사이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땅이 천여 리나 되었다. 두 나라는 그 땅 변경에 각각 초소를 세워 수비하고 있었다. 동호가 사자를 보내 모돈에게 말했다.

“ 흉노와 우리나라 경계를 지키는 초소 밖의 땅은 버려진 땅으로 흉노에게는 어차피 소용이 없으니 우리가 갖도록 하겠소!. ”

모돈이 역시 좌우의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신하들 가운데에 이렇게 대답한 자가 있었다.

“이 땅은 어차피 버려진 땅이라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

모돈이 대노하여 말했다.

“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찌하여 남에게 주자고 하는가? ”

그리고는 땅을 동호에게 주자고 말한 자들을 모두 죽였다. 모돈이 말에 올라 나라 안에 영을 내려 후에 달려온 자는 모두 죽이겠다고 했다. 마침내 모돈은 동쪽으로 달려가 동호를 습격했다. 처음부터 모돈을 얕보고 있었던 동호는 아무런 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 모돈은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하여 동호의 군사를 격파하고 그들의 왕을 죽였으며 백성들과 가축들을 노획했다. 본국으로 개선한 흉노는 서쪽의 월지국을 공격하고 남쪽의 루번과 백양(白羊)의 하남왕 땅을 병탄했다. 진(秦)나라가 몽염(蒙恬)을 시켜 빼앗은 흉노 땅을 모두 다시 되찾아간 흉노는 한나라와 더불어 옛 하남(河南)의 요새에서 관문을 맞대고 조나(朝那)23), 부시(膚施)24)에까지 이르렀고 마침내 연(燕), 대(代)를 침범했다. 당시 한나라 군대는 항우(項羽)와 서로 대치하느라 중국이 전란으로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묵돈이 스스로 강성해질 수 있었고 활시위를 당길 수 있는 군사만도 30여 만에 달했다.


순유(淳維)부터 두만(頭曼)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동안 때로는 강대하고 때로는 약소하기를 반복하고 이합집산하기를 오래 했으니 대대로 전해오는 바를 모두 차례대로 적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돈 치세에 이르러 흉노가 가장 강대해졌으며 북쪽의 이족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남쪽으로는 중국과 대적했다. 그래서 대대로 전해오는 그들의 관호(官號)를 다음과 같이 기록할 수 있다.

좌우현왕(左右賢王),좌우곡려왕(左右谷蠡王),좌우대장(左右大將),좌우대도위(左右大都尉),좌우대당호(左右大當戶),좌우골도후(左右骨都侯) 등이 직을 두었다. 흉노의 말에 현능한 자를 ‘도기(屠耆)’라고 했다. 그래서 태자를 ‘좌도기(左屠耆)’라고 불렀다. 좌우현왕부터 당호에 이르기까지 큰 자는 만 명부터 적은 자는 천 명의 기병을 거느린 자가 모두 24명이 있었는데 부르기를 모두 만기(萬騎)라 했다. 여러 대신들의 관직은 세습했다. 호연씨(呼衍氏),란씨(蘭氏),뒤의 수복씨(須卜氏) 등의 세 성은 흉노의 귀족가문이었다.


모든 좌방(左方)의 왕들과 장수들은 동쪽에 거주하며 상곡군(上谷郡) 이동에서 곧바로 예맥(穢貉), 조선(朝鮮)에 국경을 접하고 우방(右方)의 왕들과 장수들은 장(將)들은 서쪽 땅에 거주하면서 상군(上郡)이서에서 곧바로 월지(月氏), 저(氐), 강(羌)의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그들은 각기 나뉘어진 영역이 있으며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는데, 좌우현왕(左右賢王), 좌우고려왕(左右谷蠡王)의 영역이 가장 크고 좌우골도후(左右骨都侯)는 선우의 정치를 보좌했다. 여러 24장(長)은 각자 천장(千長), 백장(百長), 십장(什長), 비소왕(裨小王), 상봉(相封), 도위(都尉), 당호(當戶), 저거(且渠)와 같은 속관을 두었다.


매 년 정월에 24장(長) 모두는 정(庭)25)에서 소회(小會)를 열고 제사지낸다. 5월에는 롱성(蘢城)26)에서 대회(大會)를 열고 그들의 선조와, 하늘과 땅, 그리고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가을에 말이 살찌면 대림(蹛林)27)에서 대회를 열어 사람과 가축의 숫자를 헤아린다. 흉노의 법에서는 칼을 한 척(尺) 이상 뽑으면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하면 그의 가산(家)을 몰수한다. 작은 죄를 저지르면 알형(軋刑)28)에 처하고 큰 죄를 지으면 사형에 처한다. 오래도록 옥에 가두어도 열흘을 넘지 않고 나라 전체를 통틀어 죄수가 수 명을 넘지 않았다.

선우는 아침에 영(營)을 나와 솟아오르는 해에게 절하고 저녁에는 달을 향해 절한다. 그들이 자리에 앉을 때는 장자가 왼쪽을 차지하고 북쪽을 향한다. 날은 무일(戊日), 기일(己日)을 길하게 여긴다. 그들이 장례를 치를 때는 관곽(棺槨)에 시신을 넣고 금은(金銀)이나 의복 및 갖옷을 같이 합장했으나 봉분이나 나무를 심지 않고 상복도 입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사랑 받던 신첩(臣妾)으로 순장되는 자가 많을 때는 수천 수백 명에 달했다.

나라에 큰일을 치를 때는 별과 달을 살펴 달이 차면 공격하고 달이 이지러지면 물러간다. 그들이 싸울 때는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를 잡은 자에게 한 잔의 술을 내리고 노획품을 그에게 주고 포로는 노비로 삼는다. 이 때문에 그들이 싸울 때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익을 다투며 적을 유인하는 군사를 따로 두어 적을 포위하는데 능하다. 그래서 그들이 적을 발견하면 이익을 쫓아 새처럼 모여들고 그들이 궁지에 몰려 싸움에 질 때는 무너져 구름처럼 흩어진다. 싸울 때 전사한 동료의 시신을 가지고 귀환한 자는 그 전사자의 재산을 모두 얻는다.


그리고 후에 모돈은 북쪽으로 혼유(渾庾), 굴역(屈射), 정령(丁零) , 격곤(鬲昆), 신려(薪犂) 등의 나라를 복속시켰다.29) 이로써 흉노의 귀족과 대신들은 모두 탄복하여 모돈 선우를 현명하다 여겼다. 그 당시 한나라는 새로 서로 중국을 안정시키고 한왕 신(信)의 봉국을 대(代) 땅으로 옮겨 마읍(馬邑)에 치소를 두고 흉노를 막게 했다. 흉노의 대군이 마읍을 포위하자 한왕 신이 흉노에게 항복했다. 한왕 신을 얻은 흉노가 군사를 이끌고 구주산(句注山)을 넘어와 태원(太原)을 공격하고 진양(晉陽)을 함락시켰다. 고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흉노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몰아친 큰 추위와 우설(雨雪)을 만나 사졸들 가운데 10의 2-3이 동상에 걸렸다. 이에 모돈은 거짓으로 싸움에 져서 도망치는 것처럼 가장하고 한나라 군사들을 유인했다. 한나라 군사들이 모돈의 뒤를 추격하자 모돈은 저예병들을 모두 숨겨두고 노새와 노약자로 이루어진 군대를 보여주었다. 이에 주로 보졸로 이루어진 32만에 달하는 한나라는 모든 군사를 휘몰아 모돈의 뒤를 추격하여 북진했다. 고제가 먼저 평성(平城)30)으로 들어가고 보졸들이 미처 당도하기 전에 모돈이 40만의 기병을 이끌고 고제를 백등산(白登山)으로 몰아넣고 포위했다. 이윽고 포위된 지 7일이 동안 한군의 안팎에서 연락이 두절되어 구원이나 식량을 보급 받지 못했다. 백등산을 포위한 흉노의 기병들은 그 서쪽에는 모두 백마를, 동쪽에는 청색말을, 북쪽에는 모두 흑색말을, 남쪽에는 붉은 말을 타고 있었다. 고제가 사자를 보내 흉노의 연지에게 많은 선물을 주자 연지가 목돈에게 말했다.

“ 두 나라 군주는 서로 곤궁한 처지에 몰아넣으면 안 됩니다.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해도 선우께서는 결국 이곳에 살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한왕에게는 하늘의 도움이 있는 것 같으니 선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

전에 한왕 신의 장수 왕황(王黃)、조리(趙利)의 군사들과 합류하기로 약속했던 모돈은 그들이 군사가 오지 않았음으로 그들이 한나라와 공모하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연지의 말을 쫓아 그들의 포위망 한 곳을 풀어주었다. 그래서 고제는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모두 활시위를 힘껏 잡아 당겨 밖을 향해 겨누게 하고 포위망이 풀린 쪽을 통하여 성을 곧바로 나가 본대의 대군과 합류했다. 그러자 모돈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한나라 역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간 후에 유경(劉敬)을 사자로 보내 화친의 조약을 맺도록 했다. 후에 한왕 신이 흉노의 장수가 되어 그의 장수 왕황과 조리 등과 함께 빈번히 화친의 약속을 위반했음으로 대군과 운중군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진희(陳稀)가 반란을 일으켜 한왕 신과 연합하여 대(代) 땅을 공격했다. 한나라는 번쾌(樊噲)를 시켜 진희를 토벌하도록 했다. 번쾌는 대, 안문, 운중의 여러 현성들을 함락시켜 수복했으나 장성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그때 수많은 한나라 장군들이 찾아와 항복을 받은 흉노는 수시로 대 땅을 침범하여 노략질해 갔다. 이를 걱정한 고제는 유경을 시켜 종실의 공주를 자기의 딸이라고 속여 선우의 연지로 보내고 매 년마다 흉노에게 무명, 비단, 술, 곡식 등을 보내주기로 하고 형제의 의로써 화친을 맺게 했다. 그러자 모돈은 노략질을 얼마 동안 중지했다. 후에 연왕 노관(盧綰)이 반해 그의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흉노에게 항복하자 모돈은 상곡군 동쪽 이동지역에 출몰하여 주민들을 괴롭혔다. 이윽고 고조가 붕어하고 효혜제가 서고 여태후가 집정했을 때는 한나라가 천하를 안정시킨 지 얼마되 지 않았음으로 흉노의 태도는 매우 교만했다. 모돈이 편지를 써서 여후에게 보내 함께 살면 어떻겠냐고 하면서 망언했다. 대노한 여후가 흉노를 치려고 하자 여러 장군들이 말했다.

“ 현능하시고 무예가 출중하신 고제께서도 옛날 평성에서 곤란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후가 흉노를 정벌할 생각을 그만두고 그들과 화친했다. 다시 효문제가 서자 흉노와 화친의 약속을 새롭게 확인했다. 그 후 한문제 3년, 기원전 177년 5월 달에 흉노의 우현왕이 하투(河套)의 남쪽을 침입하여 주둔하며 상군(上郡)의 요새를 공격하여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나라 편의 만이들을 살해했다. 그래서 효문제는 승상 관영(灌嬰)에게 조칙을 내려 거기(車騎) 8만 5천을 동원하여 고노(高奴)에 이른 우현왕의 공격하게 했다. 우현왕은 도망쳐 요새 밖으로 나갔다. 문제가 태원에 순행을 나간 틈을 이용하여 제북왕(濟北王) 유흥거(劉興居)가 반란을 일으켰음으로 장안으로 돌아오고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출격한 승상의 군사를 해산시켰다. 그 다음 해에 선우가 한나라에 편지를 보내 말했다.

“ 하늘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가 삼가 황제께 문안을 드립니다. 그간 무양하십니까? 지난 번 황제께서 화친을 말씀하신 뜻이 제 마음에도 합당했습니다. 한나라의 변경을 지키는 관리들이 우리의 우현왕의 영지를 침범하여 모욕을 가하고 우현왕 역시 선우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후의(後義), 로후(盧侯), 난지(難氏)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한나라 관리들과 다투어 우리 두 군주들의 약속을 깨뜨리고 형제의 정을 이간시켰습니다. 황제로부터 그 일을 책망하는 편지가 두 번이나 도착했음으로 우리도 사신을 보내 편지로 알렸으나 아직 돌아오지 않고 한나라 사자도 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한나라가 우리와 화친하지 않겠다면 우리도 이웃나라와 가까이 지낼 수 없습니다. 오늘 흉노의 작은 관리가 우리의 화친 약속을 깨뜨렸기 때문에 그 책임을 우현왕에게 물어 벌로써 서쪽의 월지국을 정벌하도록 했습니다. 하늘이 돕고, 관리와 사졸들은 우수하고, 말은 굳셌음으로 월지국을 멸하고 항복한 적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루란(樓蘭), 오손(烏孫), 호게(呼揭)를 포함하여 부근의 26개 국을 평정하여 우리에게 복속시켰습니다. 이로써 활을 당길 수 있는 모든 백성들은 모여 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북변의 땅이 이미 안정되었음으로 원컨대 싸움을 중지하여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말을 길러 앞서의 일을 잊어 옛날의 약속을 회복하여 변경이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당초의 친선관계로 돌아가 젊은이들을 탈 없이 자라고 노인들은 처소에서 평안한 생활을 세세대대로 누리게 하고 싶습니다. 황제의 뜻이 어떤지 알지 못하므로 낭중(郎中) 계우천(係雩淺)을 보내 서신을 받들고 가서 뵙기를 청합니다. 낙타 1필, 기마(騎馬) 2필, 가(駕)를 끄는 말 2사(駟)를 바칩니다. 우리 흉노가 요새 가까이 접근하는 일을 황제가 바라지 않는다면 관리와 백성들에게 조령을 내려 멀리 떨어져 머물도록 하십시오. 사자가 도착하면 곧바로 되돌려 보내주십시오.”


6월 중순에 흉노의 사자가 신망(薪望)31) 땅으로 왔다. 편지가 도착하자 한나라는 흉노를 공격하는 것과 화친하는 것 중 어떤 편이 유리한 지를 의논했다. 공경(公卿)들이 모두 말했다.

“ 선우가 이제 막 월지(月氏)를 격파해 승세를 타고 있으니 공격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흉노 땅을 얻어도 소금기가 많은 땅이라 그곳에 거주할 수 없습니다. 화친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한나라가 화친을 허락했다.

효문제(孝文帝) 전원년 7년 기원전 174년, 한나라가 흉노에게 서신을 보냈다.

“황제(皇帝)가 삼가 묻노니 흉노 대선우는 무양(無恙)하십니까. 낭중(郎中) 계우천(係雩淺)을 시켜 짐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현왕이 나에게 청하지도 않고 후의(後義), 노후(盧侯), 난지(難氏)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한나라 관리와 서로 다투어 두 나라 임금의 약속을 끊고 형제로서 친애의 정을 떼어놓았습니다. 한나라가 이런 이유로 우리 흉노와 불화한다면 이웃하는 나라인 우리도 가까이 지낼 수 없습니다. 지금 작은 관리(小吏)들이 약속을 깨뜨렸으므로 우현왕(右賢王)을 벌하여 그로 하여금 서쪽으로 월지(月氏)를 공격하게 하여 모두 평정했습니다. 원컨대 전쟁을 멈추고 사졸들을 쉬게 하며 말을 기르고 앞서 있었던 일을 청산하고 옛 약속을 회복하여, 이로써 변경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어린아이들은 탈 없이 잘 자라고 노인들은 자신의 거처에서 안거하며 세세토록 평안하게 즐기도록 하게 하십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짐은 이를 훌륭한 말이라 생각하며 이는 옛 성주(聖主)들의 뜻입니다. 한나라가 흉노와 더불어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기에 선우에게 매우 후한 선물을 보냈으나 약속을 어기고 형제의 친애하는 정을 떼어놓는 쪽은 늘 흉노였습니다. 그러나 우현왕이 벌인 일은 사면령이 내려지기 전의 일이니 선우는 그를 너무 심하게 벌하지는 마십시오. 선우가 만약 이 서신의 뜻이 마음에 맞아 여러 관리들에게 분명히 고해 약속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여 신의를 지킨다면 짐 또한 삼가 선우의 서신에서 말씀하신대로 하겠습니다. 흉노의 사자가 말하길 선우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다른 나라를 정벌하여 공을 세우느라 군사의 일로 인해 매우 수고가 많다고 했습니다. 짐이 입고 다니는 복식인 수겹기의(繡袷綺衣)32), 수겹장유(繡袷長襦)33), 금겹포(錦袷袍)34) 각 한 벌, 비여(比余)35) 한 개, 황금식구대(黃金飾具帶)36) 한 개, 황금서비(黃金胥紕)37) 한 개, 수(繡) 놓은 비단 10필, 채색비단 30필, 적제(赤綈)38), 녹증(綠繒)39), 각 40필을 중대부(中大夫) 의(意)와 알자령(謁者令) 견(肩)을 통해 선우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모돈이 죽고 그의 아들 계육이 섰다. 계육은 노상선우(老上單于)라고 호칭했다. 노상선우가 처음 즉위하자 효문제는 다시 종실의 처녀를 공주라고 속여 선우의 연지로 보내면서 연나라의 환관 중항열(中行說)을 공주의 부(傅)로 삼아 함께 보내려고 했다. 중항열이 흉노에 가는 것을 싫어했으나 한나라가 강제로 보내자 열이 말했다.

“ 내가 가서 반드시 한나라에 우환을 안겨 줄 것이다. ”

중항열이 흉노의 땅에 당도하여 흉노에게 항복하자 선우는 그를 매추 총애했다. 흉노 사람들이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 및 음식 등을 좋아하는 것을 본 중행열이 말했다.

“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개 군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흉노가 강한 이유는 입고 먹는 것이 그들과 다르고 한나라의 것을 부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선우가 한나라의 풍속과 물건들을 좋아하게 되면 그들의 물자를 10에 2도 소비하기도 전에 흉노의 모든 것은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얻게 되시면 그것들을 입으시고 초원과 가시밭을 달리십시오. 상의와 바지가 모두 찢어지고 해져 우리 흉노가 입고 다니는 모직물이나 가죽으로만든 옷만큼 튼튼하지도 좋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한나라에서 보내온 음식은 드시지 마시고 버리십시오. 운반하기 편한 점에서 젖과 유제품을 따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십시오. ”

그리고는 선우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조목조목 기록하는 법을 가르쳐 그들의 인구 수와 가축을 헤아려 기록하게 했다.

한나라가 선우에게 서신을 보낼 때는 1척 1촌 크기의 독(牘)에 ‘황제가 삼가 묻노니 흉노 대선우는 무양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을 쓰고 보내는 물품과 이러저러한 말을 적었다. 이에 중항열(中行說)은 선우로 하여금 한나라에 서신을 보낼 때 1척 2촌의 독(牘)에 도장과 봉니(封泥)도 모두 더 넓고 크고 길게 만들도록 하고는 다음과 같이 쓰게 했다.

“하늘과 땅이 낳고 해와 달이 세워주신 흉노 대선우가 삼가 묻노니 한나라 황제는 무양하십니까? 천지(天地)가 낳고 일월(日月)이 세워주신 흉노 대선우가 삼가 묻노니 한나라 황제는 무양하십니까.”

이와 같이 인사말을 거만하게 쓰고 보내는 물품과 이러저러한 말을 적도록 했다.

어떤 한나라 사자가 말했다.

“ 흉노에는 노인을 천대하는 풍속이 있다.”

그러자 중항열(中行說)이 한나라 사자를 몰아붙이며 말했다.

“당신네 한나라 풍속에도 군역을 위해 수자리를 나가는 아들에게 그의 늙은 부모가 스스로 자신의 따뜻하고 두꺼운 옷을 벗어주고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내놓아 먹고 마시게 하지 않소?”

한나라 사자가 ‘그렇소!’라고 대답하자 중항열이 말했다,

“흉노는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일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노약자는 싸울 수 없으니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장건한 자에게 먹고 마시게 하여 이로써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오. 이와 같이 하여 부자(父子)가 각기 서로 보전할 수 있으니 어찌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고 말할 수 있겠소?”

한나라 사자가 말했다,

“흉노는 부자(父子)가 같은 천막 속에서 기거하고 잠을 자오.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그 후모(後母)를 처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남은 형제가 모두 죽은 이의 처를 취해 아내로 삼고 있소. 관모속대(冠帽束帶)하는 문화적인 풍속도 없고 궁중에서는 예의가 없소.”

중항열(中行說)이 대꾸했다.

“흉노의 풍속에서는 사람들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국을 마시고 그 가죽을 옷으로 입는다. 가축은 풀을 뜯어 먹고 물을 마시며 수시로 옮겨 다니며 살고 있다. 그리하여 급박한 때에는 사람들이 기사(騎射)를 익히고 여유로울 때는 태평함을 즐길 수 있다. 그들의 약속은 간단해 지키기가 쉽고 군신(君臣)의 관계는 간편해서 나라의 정치는 한 몸처럼 행해지고 있소. 부자나, 형제가 죽었을 때 그의 처를 취해 아내로 삼는 행위는 종족이 끊길까 꺼려하기 때문이오. 이 때문에 흉노의 혼인 풍습이 비록 어지러워져도 필히 본래의 종족을 세울 수 있소. 지금 중국이 비록 겉으로는 부형(父兄)의 처를 취하지는 않으나 친척과 종족들은 더욱 멀어져 서로 살륙하고 역성혁명까지 일어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이런 데서 비롯된 일이오. 게다가 예의(禮義)의 폐단으로 위아래가 번갈아 원망하고 궁실과 가옥을 짓는데 지나치게 힘을 들여 지어 백성들의 힘을 소모시키고 있소. 힘써 밭 갈고 누에 쳐서 얻은 옷과 음식에 만족하고 성곽(城郭)을 쌓아 스스로를 지키니 이 때문에 그 인민들은 급박할 때는 전공(戰功)을 익히지 못하고 여유로울 때는 작업하느라 피폐해져 있소. 아! 흙과 돌로 지은 집에 사는 한인들이여 여러 말 마시오. 옷자락을 살랑살랑 휘날리며 소근거리고 관(冠)을 쓰고 다닌들 무슨 쓸모가 있겠소?”

  이후로는 한나라가 사자가 와서 변론을 하려고 할 때마다 중항열은 재빨리 말하곤 했다.

“한나라 사자는 여러 말 마시오. 다만 한나라가 흉노에게 보내기로 한 비단과 무명, 곡식과 누룩의 수량이 정확히 맞고 품질이 좋으면 그만이요.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이오? 또한 보내는 물품이 제대로 갖추어지고 질 좋으면 그만이나, 만약 갖추어지지 않았거나 질이 나쁘면 곡식이 익는 가을이 되길 기다려 말을 타고 달려가 당신네 농작물을 짓밟아버릴 것이오.”

그리고는 밤낮으로 선우에게 유리하고 해로운 진공시기와 진공지점에 대해 가르쳤다.

한문제 14년 기원전 166년, 흉노의 선우가 14만의 기병을 이끌고 조나(朝那와 소관(蕭關)을 침입하여 북지군의 도위 손앙(孫卬)을 죽이고 수많은 백성들과 가축들을 노략질해 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팽양(彭陽)40)까지 쳐들어와 돌격부대를 풀어 회중궁(回中宮)41)을 불태우고 척후로 보낸 기병부대는 옹(雍)의 감천궁(甘泉宮)에 이르렀다. 그래서 문제는 중위(中尉) 주사(周舍)와 낭중령(郎中令) 장무(張武)를 장군으로 삼아 병거 천 승, 기병 10만을 동원하여 장안성 주위에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다시 창후(昌侯) 노경(盧卿)을 상군장군(上郡將軍),영후(甯侯) 위속(魏遬)을 북지장군(北地將軍),융려후(隆慮侯) 주조(周灶)를 농서장군(隴西將軍),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를 대장군, 성후(成侯) 동적(董赤)을 전장군(前將軍) 등으로 임명하고 대대적으로 거기(車騎)를 동원하여 흉노를 치게 했다. 선우는 장성 안의 요새에서 한 달여를 머무른 후에 물러갔다. 한나라 군사들은 그들을 쫓아 요새 밖으로 출동했지만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흉노는 날이 갈수록 교만해져서 해마다 국경을 침범하여 백성들과 가축들을 수없이 노략질해 갔다. 특히 운중과 요동 지역의 피해가 컸고 대군(代郡)의 경우는 살해되거나 죽은 사람이 만여 명에 달했다. 한나라가 이를 걱정하여 사자를 파견하자 흉노도 당호(當戶)를 사자로 삼아 보내 사과했음으로 다시 화친의 일을 의논하게 되었다.

한문제 후원2년 기원전 162년, 흉노에게 사자를 보내 편지를 보내 말을 전했다.

“ 한나라 황제는 삼가 흉노의 대선우를 문안합니다. 그간 무양하십니까? 당호 겸 차거(且居)42) 조거난(雕渠難)、낭중(郎中) 한요(韓遼)를 사자로 삼아 짐에게 보낸 말 2필이 이미 당도했음으로 삼가 잘 받았습니다. 선제께서 조명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 장성 이북의 활쏘기에 능한 나라의 백성들은 선우의 명을 받고 장성 내의 의관속대를 행하는 나라의 백성들은 짐이 다스리겠노라! 천하 만민들에게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며 사냥을 해서 의식을 해결하여 부자가 떨어져 살게 하지 않으며 신하와 군주가 서로 평안한 마음으로 다스려 포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사악한 무리들이 탐욕스럽게도 이익에 눈이 멀어 의리를 배반하고 약속을 어기며 만민들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두 나라 군주 사이의 우의를 갈라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선우가 보낸 편지에 ‘두 나라가 이미 화친하여 두 임금이 기쁘고 즐거우니 전쟁을 멈추어 병졸들을 쉬게 하고 말을 기르며 대대로 번성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새로이 출발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짐은 이를 매우 훌륭하다고 여깁니다. 짐과 선우가 성인(聖人)의 도를 따라 날로 새로워지고 허물을 고쳐 다시 시작하여 노인들은 안식을 얻게 하고, 어린아이들은 잘 자라게 하여 각기 그 생명을 보전해 천수을 누리게 합니다. 짐과 선우가 이 도(道)를 따라 하늘에 순응하고 백성을 돌보며 대대로 서로 전해 무궁토록 베푼다면 천하에 두루 편안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한나라와 흉노는 이웃하며 대적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흉노는 북쪽에 있어 춥고 무서운 냉기가 일찍 옵니다. 그래서 짐이 관리에게 명을 내려 선우에게 해마다 얼마간의 누룩, 황금, 비단, 무명 및 그 밖의 물건들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천하가 크게 편안하여 천하 만민들은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짐과 선우는 백성들의 부모입니다. 짐이 지난 일을 돌이켜보건대 하찮은 일로써 모두 신하들의 잘못된 계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형제의 우의를 떼어 놓을만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짐이 듣건대 하늘은 한쪽으로 엎어지는 일이 없고 땅은 기울어지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짐은 듣기를 하늘은 한쪽으로 치우쳐 덮지 않고 땅은 한쪽으로 치우쳐 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와 선우는 옛날의 작은 오해들을 모두 버리고 대도를 받들어 과거의 불쾌했던 일들을 잊고 장구한 계책을 세워 두 나라의 백성들이 한 집안의 자녀처럼 살 수 있게 만들고 싶습니다. 선량한 천천만만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래로는 물고기와 자라에서부터 위로는 날아다니는 날짐승에 이르기까지 기어다는 것, 숨을 쉬는 것, 꿈틀대는 것 등까지도 모두 편안하게 살면서 이익을 얻게 하여 위험으로부터 몸을 피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고로 찾아오는 자를 막지 않음이 하늘의 도리이니 옛날 일을 모두 잊도록 합시다. 짐은 옛날 흉노로 달아난 한나라 사람들을 모두 용서했습니다. 선우도 장니(章尼)와 같은 사람에 대해 아무 말 하지 마십시오. 짐은 듣기에 옛날이 제왕들은 약속이 분명하고 식언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선우께서 화친에 뜻이 있다면 천하는 크게 안정되고 화친이 이루어진 후에는 한나라는 결코 먼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선우께서는 이 점을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

마침내 선우가 화친을 약속했음으로 황제가 어사에게 명을 내리며 말했다.

“ 흉노의 대선우가 짐에게 편지를 보내 화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했다. 흉노에서 도망쳐 온 자들은 우리 한나라의 인구를 늘리는데도 땅을 넓히는데도 도움이 될 수 없다. 흉노가 장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한나라도 장성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이 약속을 어기는 자는 죽여 흉노와의 화친을 영원토록 유지할 수 있고 훗날 잘못도 발생하지 않아 서로 이로울 것이다. 짐은 흉노와의 화친을 이미 허락했으니 천하에 이를 포고하여 모두를 알게 하라! ”

한문제 후원4년 기원전 160년, 노상선우 계육(稽粥)이 죽고 그의 아들을 군신(軍臣)이 그 뒤를 이어 선우가 되었다. 효문제가 다시 흉노와 화친의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중항열이 다시 새로운 선우를 모시게 되자 군신선우 4년에 마침내 흉노가 화친을 끊고 상군과 운중에 각기 3만의 기병을 이끌고 대거 침범하여 그곳의 백성들을 무수히 살륙과 노략질을 자행하고 돌아갔다. 그래서 한나라는 세 장군43)을 보내 북지군, 대군(代郡)의 구주산(句注山), 조 땅의 비호구(飛狐口)44)에 주둔시키고 또한 변경의 요새지에도 각기 군사를 파견하여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여 굳게 지키도록 했다. 또다시 세 장군45)을 서안장안의 서쪽 세류(細柳), 위수(渭水) 북안의 극문(棘門), 패상(覇上) 등에 배치하여 흉노의 공격에 대비하게 했다. 흉노의 기병으로 구성된 대군이 구주산 국경을 침범하자 봉화가 감천(甘泉)과 장안 사이를 쉬지 않고 올랐음으로 출병한 한군이 변경에 이르렀을 때는 흉노의 기병은 요새를 넘어 멀리 사라진 후였기 때문에 한나라는 군사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1년여 년 후 효문제가 죽고 효경제가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조왕 유수(劉遂)46)가 비밀리에 흉노에 사자를 보내 내통했다. 이윽고 얼마 후에 오초(吳楚)가 반란을 일으키자 흉노가 조나라와 병사를 합하여 한나라의 국경을 침범하려고 했다. 한나라가 조나라를 포위하여 함락시키자 흉노 역시 계획을 중지했다. 그 뒤 효경제는 흉노와의 화친을 다시 맺고 변경지역에 교역시장을 열어 흉노에게 물자를 보급하고 공주를 시집보내 옛날처럼 약속을 지켰다.

이로 인하여 효경제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는 때때로 변경을 소규모로 침범하여 노략질 한 적은 있었지만 대대적으로는 행한 적은 없었다.


금상황제께서 즉위하자 다시 화친이 약속을 명백하게 밝히고 흉노를 후하게 대해 요새에 시장을 열어 물자를 풍족히 보급했다. 흉노는 선우 이하 모두가 한나라를 친근하게 여겨 장성 밑을 빈번히 왕래했다. 이때 한나라가 마읍(馬邑)에 사는 섭옹일(聶翁壹)을 시켜 고의로 금령을 위반하여 물자를 운반하여 흉노와 교역하게 만들고 그로 하여금 거짓으로 마읍성을 흉노에게 팔아넘기는 것처럼 꾸며 선우를 유인하도록 했다. 선우가 믿고 마읍의 재물이 탐이나서 10만의 기병을 이끌고 무주(武州)47)의 요새로 들어왔다. 그때 한나라는 마읍의 근방에 30여 만의 군사를 매복시키고 있었다. 어사대부 한안국이 호군장군의 신분으로 네 장군을 거느리고 선우를 공격하기 위해 매복하고 있었다. 이미 한나라 요새 안으로 들어선 선우는 마읍 못 미쳐 백여 리 되는 곳에서 들판에 가축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데 돌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음을 보고 괴이하게 생각한 나머지 근방의 한나라 척후초소인 정(亭)을 공격했다. 그때 마침 안문군의 위사(尉史)48)가 순찰하고 있던 중 적군을 발견하고 정에 들어가 지키고 있었다. 한군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위사를 생포한 선우가 죽이려고 하자 위사는 한나라 군사가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과 장소를 알려주었다. 선우가 크게 놀라 말했다.

“ 내가 원래 의심하고 있었다. ”

그리고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요새를 빠져나오면서 말했다.

“ 내가 위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도움이다. 하늘이 위사를 시켜 알려 준 것이다. ”

그리고는 위사를 천왕(天王)이라고 불렀다. 그때 한나라 군사들은 선우가 마읍성에 들어가면 군사를 풀어 공격하기로 약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선우가 당도하지 않았음으로 한나라 군사들은 아무런 소득을 얻을 수 없었다. 한나라 장군 왕회(王恢)의 부대는 대군에서 출격하여 흉노의 치중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윽고 되돌아온 선우가 이끌고 온 병력이 많음을 보고 감히 출격하지 못했다. 한나라는 원래 왕회가 작전을 계획한 당사자임에도 진격하지 않았다고 해서 왕회의 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했다. 이후로 화친관계를 단절한 흉노는 화친을 끊고 도로와 통하는 변경의 요새를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수시로 한나라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을 자행했는데 회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흉노는 관문에서의 교역을 계속하고 한나라의 재물을 즐겼다. 한나라 또한 여전히 관문의 교역을 계속하게 하여 관계를 끊지 않고 그들의 뜻에 부합하려고 했다.

마움의 사건이 일어난 지 5년 되는 해 가을에 한나라가 네 장군에게 각기 1만의 기병을 주어 관문의 교역시장에서 흉노를 공격했다. 장군 위청은 상곡에서 출격하여 롱성(蘢城)에 이르는 동안 흉노의 수급과 포로 7백을 얻었으나 운중(雲中)에서 출격한 공손하(公孫賀) 장군은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했다. 또한 대군(代郡)에서 출격한 공손오(公孫敖) 장군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패해 7천의 군사를 잃고 안문(雁門)에서 출격한 이광(李廣) 장군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말았으나 후에 이광은 도망쳐 한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나라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광과 공손오를 감옥에 가두었다. 두 장군은 속죄금을 물고 서인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그해 겨울 흉노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여 노략질해 갔는데 특히 어양의 피해가 심했다. 한나라가 장군 한안국을 어양에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게 했다. 그 다음 해 가을, 흉노가 2만의 병력으로 한나라 국경을 침입하여 요서태수를 살해하고 그곳의 백성 2천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다시 어양태수가 지휘하는 천여 명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태수 한안국을 포위했다. 한안국의 군사는 천여 명밖에 안 되고 그것마저 거의 전멸 당하기 직전에 마침 연나라로부터 구원병이 도착했기 때문에 흉노의 군사는 물리칠 수 있었다. 흉노는 후에 다시 안문을 침범해서 천여 명의 백성들을 노략질해 갔다. 그래서 한나라는 위장군 위청에게 3만의 기병을 주어 안문에서, 이식(李息)은 대군에서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한군은 흉노의 포로 천여 명을 얻었다. 그 다음 해, 위청이 다시 운중에서 출격하여 서쪽으로 나아가 농서에 이르는 동안 흉노의 누번(煩)과 백양(白羊)의 왕들을 하투(河套)의 남쪽에서 공격하여 흉노의 포로 수천 명과 소와 양 백여 만 마리를 노획했다. 한나라는 이로써 하남지역을 수복하여 삭방군(朔方郡)을 설치하고 옛날 진나라 때 몽염이 축조했던 요새를 수리하여 하남의 땅을 굳게 지키려고 했다. 한나라 역시 상곡의 멀리 떨어져 흉노의 땅에 깊숙이 들어간 조양(造陽) 등의 십여 개의 현을 흉노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해는 한나라 원삭(元朔) 2년으로 기원전 127년이었다.

그해 겨울 흉노의 군신선우가 죽고 그의 동생 좌곡려왕(左谷蠡王) 이치사(伊稚斜)가 군신선우의 태자 오단(於單)을 물리치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한나라에 항복하고 망명한 오단을 한나라 조정은 섭안후(涉安侯)에 봉했으나 몇 개월 후에 죽고 말았다. 선우의 자리를 확고히 한 이치사는 그해 여름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대군으로 쇄도해 쳐들어가 대군태수 공우(恭友)를 죽이고 그 백성 천여 명을 노략질해 갔다. 그해 가을 흉노가 다시 안문을 침입하여 천여 명의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갔다. 그 다음해, 흉노가 다시 대군, 정양(定襄), 상군(上郡) 등에 각 3만의 기병을 이끌고 쳐들어가 수천 명의 백성들을 살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흉노의 우현왕은 한나라가 하남의 땅을 뺏어가 그곳에 삭방성을 축조한 행위에 원한을 품고 여러 차례 침입하여 변경을 노략질하면서 이윽고 삭방의 땅을 소란하게 하고 그곳의 수많은 관리와 인민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갔다. 그 다음해 봄, 한나라가 위청을 대장군이 휘하에 여섯 장군49)과 10만 명의 군사를이끌고 삭방과 고궐(高闕)에서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한나라 군사들이 감히 그렇게 깊숙이 쳐들어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우현왕은 술을 마셔 취해 있었다. 한군이 요새에서 나와 6-7백 리를 진격해 들어가 밤에 우현왕의 진영을 포위하자 우현왕은 크게 놀라 몸을 빼내 도망치고 그의 정예기병들도 그의 뒤를 따라 달아났다. 한군은 우현왕에 속한 남녀 1만 5천 명과 비소왕(裨小王) 10여 명도 포로로 잡았다. 그해 가을에 흉노의 기병 만여 명이 대군의 경계를 침입하여 도위 주영(朱英)을 살해하고 천여 명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다음 해 봄, 한나라가 다시 대장군 위청에게 장군 6명50)과 기병 10여 만 명을 주어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위청은 다시 정양(定襄)에서 수백 리나 흉노의 땅으로 들어가 공격하여 전후로 합하여 흉노의 수급 및 포로 등 모두 1만 9천여 명을 얻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도 두 장군이 전사했고 3천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우장군 소건(蘇建)은 단신으로 탈출할 수 있었고 전장군 흡후(翕侯) 조신(趙信)은 전세가 불리하자 흉노에게 항복했다. 원래 조신은 흉노의 소왕(小王) 출신이었는데 한나라에 항복하자 흡후로 봉해진 사람이었다. 전장군 조신은 우장군과 군사를 합쳐 본대와 떨어져 행군하다가 선우의 군사를 만나 전군이 모두 전멸했기 때문에 혼자 선우에게 항복한 것이었다. 선우는 조신을 선우 다음 가는 자차왕(自次王)으로 임명하고 그의 누이를 주어 부인으로 삼게 했다. 선우가 조신에게 한군에 대한 계책을 물었다. 조신은 선우에게 사막 북쪽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한병을 유인하여 피로하게 만든 후에 그들이 극도로 지쳤을 때 공격하고 한나라의 요새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 선우는 조신의 계책을 따랐다. 그 다음 해에 흉노의 기병 1만 기가 상곡을 침범하여 수백 명의 백성들을 살해했다. 그 다음 해 봄, 한나라가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郭去病)에게 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농서에서 출격하여 언지산(焉支山)을 지나 천여 리나 깊숙히 들어가 흉노를 공격하여 흉노의 수급과 포로 1만 8천을 얻었다. 곽거병은 휴도왕(休屠王)을 무찌르고 그가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황금상(黃金像)을 노획했다. 그해 여름 표기장군이 다시 합기후(合騎侯) 공손오와 함께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농서와 북지(北地)에서 출격하여 2천 리나 진격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그는 거연(居延)을 지나 기련산(祁連山)의 흉노를 공격하여 흉노 3만여 명의 수급과 포로 및 비소왕(裨小王) 이하의 귀족 72명을 을 얻었다. 그때 흉노 역시 대군과 안문을 침범하여 그곳의 백성 수백 명을 살해했다. 한나라가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과 장군 이광으로 하여금 우북평(右北平)에서 출격하여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하도록 했다. 좌현왕이 이광 장군이 이끄는 군사는 4천 명을 공격하여 한군을 거의 전멸 직전까지 몰고 갔으나 한군이 적의 군사를 죽이거나 사로잡은 숫자는 더 많았다. 이윽고 박망후의 군사가 당도했음으로 이장군은 살아날 수 있었다. 한나라 군사들은 수천 명이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표기장군과의 약속한 기일에 지키지 못하고 늦게 당도했음으로 이광은 합기후와 박망후와 함께 사형에 해당되었으나 속죄금을 물고 서인이 되었다. 그해 가을, 혼야왕(渾邪王)과 휴도왕(休屠王)이 서쪽에 머물면서 한나라 군사들에 의해 수만 명의 흉노인이 살해된 것에 분노한 선우가 두 왕을 소환해서 죽이려고 했다. 혼야왕과 휴도왕이 선우를 두려워하여 한나라에 항복하려고 하자 한나라는 표기장군을 시켜 그들을 맞이해오도록 했다. 휴도왕을 죽인 혼야왕이 그의 군사와 종족들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항복한 흉노는 모두 4만 명에 달했는데 호칭하기는 10만 명이라고 했다. 한나라가 혼야왕을 얻자 농서, 북지, 하서 등의 지역에는 흉노의 침범이 더욱 줄어들었다. 이에 관중의 빈민들을 흉노로부터 빼앗은 하남과 신진중(新秦中)51) 지방으로 이주시켜 그 지역에 백성들을 보충하고 북지군 이서의 수졸들의 수를 절반으로 감축했다. 그 다음 해에 흉노가 우북평과 정양을 각기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침범하여 천여 명의 백성들을 살해하고 물러갔다. 그 다음 해 봄, 한나라 조정이 전략을 세우며 말했다.

“ 선우가 흡후 조신의 계책을 듣고 사막의 북쪽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한나라 군사들이 그곳까지 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한나라는 말에게 곡식을 충분히 먹인 후에 10만 명에 달하는 기병을 출동시키니 기병의 보급물자를 실은 치중을 제외하고도 기병들의 사물을 실은 말만도 14만 필이나 뒤를 따랐다.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군사를 반으로 나눠 각기 인솔하게 하고 대장군은 정양에서, 표기장군은 대에서 출격하여 사막을 가로질러 가서 흉노를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선우가 듣고 그의 치중을 더 먼 곳으로 보내고 정예병을 이끌고 사막의 북쪽에서 한군을 기다렸다. 흉노와 대장군 위청의 부대는 막북에서 교전에 들어가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는데 저녁때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대풍이 크게 일어나 그 틈을 이용하여 좌우익 기병을 풀어 선우를 포위했다. 한나라 대군과 싸울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 선우는 건장한 수백의 기병과 함께 한나라의 서북 쪽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숨어버렸다. 한나라 군사들은 그 뒤를 추격했으나 밤중이었음으로 잡지 못하고 행군 중 포로로 잡거나 참수한 흉노의 수급은 1만 9천이나 되었다. 한군은 북쪽의 전언산(闐顏山)에 세운 조신성(趙信城)까지 진격했다가 돌아왔다. 선우가 도망쳐 숨을 때 그의 군사들은 무수히 한군과 혼전을 벌리며 선우의 뒤를 쫓았기 때문에 선우는 오랫동안 그의 군대와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우곡려왕(右谷蠡王)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에 원래의 선우가 살아서 돌아와 그의 군대와 다시 만나 군권을 장악했음으로 우곡려왕은 선우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우곡려왕으로 돌아갔다.

한편 대군에서 출격한 한나라의 표기장군 곽거병의 군대는 좌현왕과 싸워 흉노의 포로와 수급 1만 7천을 얻었다. 좌현왕은 그들의 기병을 모두 이끌고 도망가 숨었다. 표기장군은 랑거서산(狼居胥山)에서는 봉제(封祭)를 지내고 고연산(姑衍山)에서는 선제(禪祭)를 지낸 후에 한해(翰海)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그때 흉노는 멀리 도망쳐 숨었기 때문에 사막의 남쪽에는 왕정(王庭)이 없었다. 한나라가 하수를 건너 삭방(朔方) 이서에서 영거(令居)에 이르기까지 도랑을 파서 농사를 짓고 관리와 병졸 5-6만 명을 파견하여 서서히 흉노의 땅을 잠식하여 흉노와의 접경지역을 북쪽으로 옮겼다.

당초 한나라 두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선우를 공격하기 시작해서   그때까지 포로로 잡거나 살해한 흉노인들은 모두 8-9만 명에 달했으나 한나라 사졸도 수만 명이 전사하고 죽은 전마도 십수 만 마리에 달하고 소비한 물자도 막대했다. 흉노가 피로에 지쳐서 멀리 달아나버렸지만 한나라 역시 전마가 줄어들어 다시 대군을 흉노의 땅으로 출격시킬 수 없었다. 흉노는 조신의 계책을 사용하여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로 화친을 청했다. 천자가 화친 여부를 조정에서 의논하도록 하자 어떤 사람은 화친하자 하고 어떤 사람은 흉노를 신하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승상부의 장사 임창(任敞)이 말했다.

“ 흉노는 이제 피폐해져 곤궁한 처지에 있음으로 마땅히 귀순한 외신으로 삼아 매년 봄과 가을에 변경에서 조현을 행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한나라가 임창을 사자로 삼아 선우에게 보냈다. 선우가 임창이 계획을 듣고 붙잡아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에 앞서 한나라가 흉노의 사자를 귀순하게 만들어 돌려보내지 않았음으로 선우도 한나라 사자를 억류시켜 이에 상응한 행동을 한 것이다. 한나라가 다시 군사와 전마를 징집하려고 하는 찰나에 표기장군 곽거병이 병이 들어 죽었음으로 중지했다. 이후로 한나라는 오랫동안 흉노를 치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이치사(伊稚斜) 선우가 재위 13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오유(烏維)가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한나라 원정(元鼎) 3년으로 기원전 113년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한나라 천자가 군현으로 순행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후 한나라는 남쪽의 동월과 민월을 정벌해야 했음으로 흉노를 공격하지 않자 흉노도 역시 한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았다. 오유선우가 선지 3년 되는 해에 남월을 이미 멸한 한나라는 태복(太僕) 공손하에게 1만 5천의 기병을 주어 구원(九原)에서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하도록 했다. 공손하는 2천여 리를 진격하여 부저정(浮苴井)에 이르렀다가 돌아올 동안 단 한 명의 흉노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한나라가 다시 종표후(從驃侯)였던 조파노(趙破奴)에게 만여 기를 주어 흉노의 땅으로 들어가게 했다. 조파노는 영거(令居)에서 출격하여 수천 리를 진군하여 흉하수(匈河水)에 이르렀다가 돌아왔으나 그 역시 행군 중에 한 명의 흉노인도 볼 수 없었다. 그때 천자는 변경으로 순행을 나가 삭방에 이르러 18만 명의 기병을 사열하여 그 군세와 절도를 보이고 곽길(郭吉)을 사신으로 선우에게 보내 깨우쳐주도록 했다. 곽길이 흉노에 당도하자 흉노의 주객(主客)52)이 사자로 온 뜻을 물었다. 곽길은 예의바르고 겸손하게 좋은 말로 말했다,

“제가 선우를 뵌 뒤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곽길이 선우를 만나 말했다,

“남월왕(南越王)의 머리가 이미 한나라 북궐(北闕)에 걸렸습니다. 지금 선우가 능히 전진해 한나라와 싸울 수 있다면 천자께서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변경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그리 하십시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남면(南面)하여 한나라의 신하가 되십시오. 어찌 헛되이 멀리 달아나 막북(幕北)의 춥고 고달프고 물과 풀도 없는 땅에 숨어 계십니까? 그러시면 안 됩니다.”

곽길이 말을 마치자 대노한 선우는 주객(主客)을 참(斬)하고는, 곽길을 억류하여 돌려보내지 않고 북해(北海) 근처로 옮겼다. 그러나 선우는 끝내 한나라 변경을 침범하지는 않았고 사졸들과 군마를 쉬게 하고 사냥을 하면서 사격술을 익혀 양병을 하는 한편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좋은 말과 감언으로 화친을 청했다.

한나라가 왕오(王烏)을 시켜 흉노를 엿보게 했다. 흉노의 법에 의하면 한나라 사신이라도 부절을 버리지 않고 얼굴에 먹물을 들이지 않은 사람은 흉노의 장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북지(北地) 출신으로 흉노의 풍속에 익숙한 왕오는 그의 부절을 뗀 후에 얼굴에 먹물을 들이고 흉노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선우가 그를 좋아하여 감언(甘言)으로 허락하는 것처럼 자신의 태자를 한나라로 들여보내 볼모로 삼게 하고 화친을 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한나라가 다시 양신(楊信)을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당시 한나라는 동쪽으로 예맥(濊貉)과 조선(朝鮮)을 함락해 그 땅에 군을 설치하고 서쪽으로는 주천군(酒泉郡)을 흉노와 강(羌)이 통하는 길을 두절시켰다. 한나라는 또한 서쪽으로 월지(月氏), 대하(大夏)와 통하고 공주를 보내 오손왕(烏孫王)의 처로 삼게 하여53) 흉노 서쪽의 동맹국들로부터 고립시켰다.54) 또한 북쪽으로 농지를 더욱 확대하여 현뢰(胘靁)55)에까지 요새를 건설했으나 흉노는 끝내 이에 관해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때 흉노로 돌아간 자차왕 조신도 죽어 한나라 집정자들은 흉노가 이미 쇠약해졌음으로 충분히 복종시켜 신하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양신이라는 위인은 성격이 강직하고 굴복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양신의 지위가 높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우는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다. 선우가 천막 안으로 불러 만나려고 했으나 양신이 결코 한나라 사자를 표시하는 부절을 버리지 않으려 했음으로 선우는 자신이 장막 안으로 나와서 양신을 만났다. 양신이 선우를 보고 말했다.

“화친을 하고 싶으면 선우의 태자를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야 합니다.”

선우가 대답했다.

“ 그것은 옛날 한나라가 우리와 한 약속과는 틀리오. 옛날 약속한 바에 따르면 한나라는 항상 옹주(翁主)를 우리의 연지(閼氏)로 보내고 비단, 무명, 먹을 것과 물자들을 보내어 화친을 행하고 그 보답으로 우리 흉노는 한나라의 변경지방을 소란스럽게 만들지 않았소. 그런데 본래의 약속과는 달리 우리에게 태자를 인질로 보내라고 하니 한나라가 이와 같이 한다면 화친을 맺을 수 없소. ”

흉노의 풍습에 한나라의 사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환관이 아니고 유생 출신이면 자기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온 것으로 생각하고 그의 변설을 꺾으려고 했고 나이가 어리면 자객으로 온 것으로 알고 그의 용기를 꺾으려고 했다. 그리고 한나라가 흉노로 들어올 때마다 흉노도 그 즉시 대응하는 사자를 보내 한나라가 자신들의 사자를 억류시키면 흉노도 같이 한나라 사자를 억류시켜 반드시 한나라와 대등한 수단을 취하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양신이 돌아온 뒤 한나라는 왕오를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흉노가 다시 감언으로 아첨하며 한나라 재물을 많이 얻어내기 위해 왕오를 속여 말했다.

“내가 한나라에 들어가 천자를 만나 면전에서 서로 형제의 의를 맺고자 하오.”

흉노에서 돌아온 왕오로부터 보고를 받은 한나라는 선우를 위해 장안에 별도의 관저를 지었다. 흉노가 듣고 말했다,

“한나라 천자의 총애를 받은 귀한 사람이 사신으로 오지 않으면 나는 그와 더불어 참된 마음으로 대화를 하지 않겠소.”

그리고는 흉노가 귀족 한 사람을 한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그러나 한나라에 당도한 사자는 병이 들었음으로 한나라가 약을 주어 치유하려 했으나 불행히 죽고 말았다. 이에 한나라가 노충국(路充國)에게 2천 석 관리의 인장과 인끈을 패용시켜 그의 영구를 호송하고 수천 금에 달하는 후한 폐물을 들려 보내며 일렀다.

“이 사람이야 말로 한나라의 귀인(貴人)이오.”

한나라가 자신의 사자를 죽였다고 생각한 선우는 노충국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때까지 선우가 한 말은 다만 왕오를 헛되이 속이기 위한 것이었을 뿐 친히 한나라로 들어오거나 태자를 볼모로 보낼 뜻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선우는 여러 차례 기병(奇兵)을 보내 한나라 변경을 침범했다. 이에 한나라는 곽창(郭昌)을 발호장군(拔胡將軍)으로 삼아 착야후(浞野侯) 조파노와 함께 삭방 동쪽에 주둔시켜 흉노를 방비했다. 노충국(路充國)이 흉노에 억류된 지 3년 만에 선우가 죽었다. 13년 동안 선우의 자리에 있었던 오유선우의 뒤를 아들 오사려(烏師廬)가 이어 흉노의 새로운 선우가 되었다. 당시 오사려는 나이가 어렸음으로 부르기를 아선우(兒單於)라고 했다. 원봉 6년 기원전 105년으로 한무제 재위 36년의 일이었다. 이후로는 선우는 근거지를 더욱 서북쪽으로 옮겨, 좌쪽 방변의 군사들은 운중(雲中), 우쪽 방변의 병사들은 주천(酒泉)과 돈황(敦煌)의 군들과 마주보았다. 


아선우(兒單于)가 즉위하자 한나라는 사자 두 명을 동시에 보내 한 명은 선우를 조문하고 한 명은 우현왕을 조문하여 흉노를 이간시키려고 했다. 두 사자가 당도하자 흉노는 그들 모두를 선우에게로 보냈다. 선우가 분노하여 한나라 사자를 모두 억류했다. 흉노에 의해 억류된 한나라 사자는 전후로 10여 명에 이르렀고, 한나라도 또한 흉노의 사자를 빈번히 억류하여 서로 똑같이 대응했다.

이 해에 한나라는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56)를 서쪽의 대원(大宛)을 치게 하고 인우장군(因杅將軍) 공손오를 시켜 수항성(受降城)57)을 쌓게 했다. 그해 겨울, 흉노에 큰 눈이 내려 굶거나 얼어서 죽은 가축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어린 선우가 살육과 전쟁을 좋아하니 대부분의 국인들이 불안해했다. 흉노의 좌대도위(左大都尉)가 선우를 죽이기 위해 사람을 한나라 진영에 보내 은밀히 고했다,

“내가 선우를 죽이고 항복하려고 하나 한나라가 너무 멉니다. 한나라 군대가 와서 나를 맞이한다면 거사를 일으키겠습니다.”

원래 한나라는 이 일로 인해 수항성을 축조했었는데 한나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태초 2년 봄, 한나라가 착야후(浞野侯) 조파노(趙破奴)에게 2만여 명의 기병을 주어 삭방(朔方)으로부터 출격하여 북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준계산(浚稽山)58)에까지 나아가 좌대도위를 맞이해서 되돌아오겠다고 약정했다. 착야후는 약속한 곳에 도착했으나 좌대도위(左大都尉)는 거사계획이 발각되어 선우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좌대도위를 주살한 선우는 좌방의 군사를 보내 착야후를 공격했다. 착야후는 후퇴하면서 그들과 싸워 수천 명의 수급을 얻었으나 수항성(受降城) 못미처 4백 리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흉노병(匈奴兵)의 8만에 달하는 기병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착야후가 밤중에 몸소 물을 구하여 진영 밖으로 나왔다가 잠복해있던 흉노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혔다. 흉노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한군을 기습했다. 그때 한군의 군중에서 호군(護軍)59) 곽종(郭縱)과 거수(渠帥)60)유왕(維王)이 서로 모의하며 말했다.

“ 여러 교위들이 장군을 잃은 죄로 치죄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있소. ”

조파노의 군대는 마침내 흉노의 기병에게 전멸되고 말았다. 흉노의 아선우가 크게 기뻐하며 기병(奇兵)을 보내 수항성을 공격하도록 했 으나 함락시키지 못했음으로 물러가면서 변경을 침범했다. 그 다음 해, 선우가 수항성을 공격하기 위해 친히 장수가 되어 출격했으나 미처 당도하기 전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아선우는 선우의 자리에 오른지 3년 만에 죽은 것이다. 그의 아들 역시 어렸기 때문에 흉노는 즉시 그의 작은 아버지이며 오유선우의 동생인 우현왕 구리호(呴犁湖)를 선우의 자리에 추대했다. 태초 3년 기원전 102년의 일이었다.

구리호가 흉노의 선우에 새로 서자 한나라는 광록훈(光綠勳)61) 서자위(徐自爲)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오원(五原)에서 수백 리, 멀게는 천여 리에 성벽과 장벽을 건설하고 그 사이를 성책과 망루를 지어 연결하여 여구(廬胊)62)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유격장군 한열(韓說)과 장평후(長平侯)에게는 그 주변에 주둔하여 지키게 하고 강노도위(彊弩都尉) 노박덕(路博德)에게는 거연택(居延澤)에 성을 짓도록 했다. 그해 가을 흉노가 대거 정양(定襄)과 운중(雲中)을 침범하여 그곳의 백성 수천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면서 2천석의 여러 고관들을 패주시키고 돌아가는 길에 예전에 광록훈이 건설했던 성채를 파괴했다. 다시 우현왕을 시켜 주천(酒泉)과 장액(張掖)을 침범하여 수천 명을 죽이거나 노략질했지만 그때 마침 임문(任文)이 공격하여 구원했음으로 흉노는 얻은 것을 모두 잃고 퇴각했다. 이해에 이사장군 이광리가 대완을 공격하여 무찌르고 그들의 왕을 목을 베 개선하려고 했으나 흉노가 중간에 길을 차단했음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해 겨울 선우가 수항성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병으로 죽고 말았다. 구리호는 선우가 된지 1년 만에 죽은 것이다. 흉노는 즉시 그의 동생 좌대도위(左大都尉) 차제후(且鞮侯)를 선우로 세웠다. 한나라가 대완국을 정벌하고 그들의 왕을 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나라의 위세는 주변의 나라를 진동시켰다. 천자가 흉노를 더욱 세차게 몰아 부치기 위해 조칙을 내려 말했다.

“ 고황제께서는 짐에게 평성에서 당하신 원한을 남기셨고, 또 고후 때에는 선우가 패역을 저지르는 편지를 보냈다. 옛날 제양공(齊襄公)이 9대나 묵은 원수를 갚은 일은 춘추의 대의다. ”63) 태초 4년은 한무제 40년으로 기원전 101년의 일이었다.


차제후가 선우의 자리에 오르자 한나라 사자로써 항복하지 않은 사람을 모두 귀환시켰다. 그때 로충국(路充國)도 포함해서 돌아올 수 있었다. 막 선우의 자리에 올라 한나라의 공격을 두려워한 차제후 선우가 스스로 말했다.

“ 나는 어린 아이라 어찌 감히 한나라 천자와 대등하기를 바라겠는가? 한나라 천자는 나의 어른이시다.”

한나라 조정은 중랑장 소무(蘇武)를 사자로 삼아 많은 예물을 들려 선우에게 보냈다. 이에 선우가 더욱 교만하고 무례해졌음으로 이는 한나라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그 다음 해에 촉야후 조파노가 도망쳐 한나라로 돌아왔다. 또 그 다음 해에 한나라가 이사장군 이광리를 시켜 3만의 기병을 이끌고 주천에서 출격하여 천산(天山)의 우현왕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사장군은 1만이 넘는 흉노의 수급과 포로를 얻어서 돌아왔다. 흉노는 대군을 동원하여 회군 중의 이사장군을 포위하자 한군은 거의 빠져나올 수 없는 곤궁한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한군은 10에 6-7이 전사했다. 한나라가 다시 인우장군 공손오에게 서하에서 출격하여, 강노도위 로박덕과 탁도산(涿塗山)64)에서 합류하도록 했으나 아무런 전과를 올릴 수 없었다. 또 기도위(騎都尉) 이릉(李陵)에게는 보졸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거연에서 나가 진군하도록 했다. 천여 리를 행군한 이릉의 군대는 거연 북쪽 천여 리 되는 곳에서 선우가 이끄는 흉노의 대군을 만나 교전에 들어갔다. 이릉의 군대는 흉노의 군사 만여 명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혔으나 병사들도 거의 죽고 양식도 떨어졌음으로 포위망을 뚫고 퇴각하려고 했다. 흉노가 이릉을 포위하자 힘이 다한 이릉은 흉노에 항복하고 그의 5천 군사는 거의 전멸하고 단지 4백 명만이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선우가 이릉을 귀하게 대하여 그의 딸을 이릉에게 주었다. 그리고 2년 후에 다시 이사장군이 6만의 기병과 10만의 보병을 이끌고 삭방에서 출격했다. 강노도위 로박덕은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사장군의 군대에 합류하고 유격장군 한열은 보졸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3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원에서 나가고 인우장군 공손오는 3만여 명의 기병과 보졸을 이끌고 안문에서 출격했다. 흉노가 듣고 그들의 가족과 재산을 전부 모아 멀리 여오수(余吾水)65) 강변에 숨겨두고 선우가 직접 10만의 기병을 이끌고 이오수 남쪽에서 한군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흉노와 한군이 회전에 들어갔으나 개활지를 벗어나기 위해 후퇴하면서 10여 일을 싸우던 이사장군은 그의 가족이 무고(巫蠱)의 란66)으로 멸족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사장군은 그의 군사들과 함께 흉노에게 항복하고 한나라에 돌아온 자는 천 명 중 1-2명에 불과했다. 유격장군 한열은 아무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인우장군 공손오가 좌현왕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남은 군사를 이끌고 귀환했다. 이 해에 흉노로 출격한 한나라 군사들 중에는 공을 논할 만한 자는 없었다. 공을 세운 자가 있었더라도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태의령 수단(隨旦)을 체포했다. 그는 이사장군의 가족이 멸족되었다는 사실을 누설하여 이사장군으로 하여금 흉노에 항복하게 만든 장본이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 공자가 춘추를 저술하면서 노나라의 은공(隱公)67)과 환공(桓公)68) 사이에 있었던 일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자신의 시대에 재위했던 정공(定公)69)과 애공(哀公)70) 사이의 일은 애매하게 기록했다.  

그것은 당세의 일을 기록하는 일이기 때문에 포폄(褒貶)을 행하지 못하고 기휘(忌諱)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 흉노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때의 권세를 얻기 위해 요행을 바라며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이도록 아첨하는데 애쓸 뿐이고 편견에 사로잡혀 흉노와 한나라의 실제적인 정황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나는 근심한다. 장수들은 중국의 크고 넓은 땅만을 믿고 기고만장하고 천자는 또한 그것을 믿고 정책을 결정했음으로 크고 깊은 공업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요임금이 비록 현능하다고 했으나 혼자서는 사업을 일으켜 성공하지 못하다가 우임금을 얻고서야 구주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성왕들의 뜻을 이어받아 공업을 일으키려한다면 오로지 현능한 장수와 재상을 가려서 쓰는데 있을 뿐이다. 오로지 장수와 재상을 가려서 쓰는데 있을 뿐이다.


<흉노열전 끝>


주석

1) 순유(淳維)/ 은(殷)나라 때에 북변(北邊)으로 달아난 흉노의 시조다. 상탕(商湯)이 무도한 하걸(夏桀)을 명조(鳴條)에서 토벌한 후 3년 뒤에 죽었다. ‘걸의 아들 훈육(獯粥)이 걸(桀)의 여러 첩들을 아내로 삼아 북야(北野)로 피해 도망쳐 들어가 방목생활을 하자 중국(中國)에서 이를 흉노(匈奴)라고 했다. 하후(夏后)의 묘예(苗裔)란 말의 어원이다. 이 때문에 후한의 응소(應劭는 그의 풍속통(風俗通)에서 ’‘은나라 때 훈육(獯粥)을 고쳐 흉노(匈奴)라고 불렀다.’고 했다. 또한 후한의 복건(服虔)은 ‘요임금 때는 훈육(葷粥)이라 하고 주(周)나라 때는 험윤(獫狁)이라 하고 진(秦)나라 때는 흉노(匈奴)’라고 했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위소(韋昭)도 ‘한나라 때 흉노라 했고 훈육(葷粥)은 그 별명(別名).’이라고 했다. 즉 순유(淳維)는 그들의 시조(始祖)로 훈육(獯粥)과 동일인이라고 했다.

2) 요임금 때는 훈육(葷粥), 주나라 때는 험윤(獫狁), 진(秦)나라 때 흉노(匈奴)라 불렀다

3) 결제(駃騠)는 북적(北狄)의 준마(駿馬)로 숫말과 암노새 사이에 태어난 라(驘)라는 노새의 새끼다. “태어난 지 7일이 되면 (몸집이) 어미보다 커진다.”고 했다. 도도(騊駼)는 푸른색의 말로 음은 ‘도도(淘塗)’와 같다고 했다. 탄해(驒騱는) 야생마(野馬)의 일종으로 청색 가라말에 흰색 비늘(青驪白鱗)을 지녔고 그 무늬가 악어와 같다고 했다.

4) 공유(公劉)/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의 후예로 선조들을 따라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사의 일을 돌보며 종족들을 위해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위수(渭水)를 건너 목재를 벌목하여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주었으며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종족들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 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다른 종족들도 모두 그의 선행에 감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공유가 죽고 그의 아들 경절(慶節)이 뒤를 잇고 빈(豳) 땅에 도읍 하여 나라를 세웠다.

5) 고공단보(古公亶父)/ 주문왕(周文王)의 조부. 원래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旬邑縣)인 빈(豳) 땅에 살던 주족을 고공단보가 이끌고 기산(岐山) 밑으로 이주하였다. 고공단보의 증손인 주무왕이 천하를 통일하고 주왕조를 세우자 고공단보를 태왕으로 높였다.

6) 견이씨(畎夷氏)/ 융적의 일파인 견융(犬戎)을 말한다.

7) 황복(荒服)/ 고대 왕조의 수도 일대를 말하는 왕기(王畿) 이외의 지역을 거리로 구분해 불렀던 용어로 왕기로부터 가까운 순서대로 후복(侯服), 전복(﹑甸服),﹑ 수복(綏服), 요복(﹑要服), 황복(﹑荒服) 등이다. 복(服)은 천자에게 복종한다는 뜻이다.

8) 주목왕(周穆王)/ 이름은 희만(姬滿)이고 기원전 977년에 왕위에 올라 922년에 죽은 서주의 5대 왕이다. 주소왕(周召王)의 아들로 소왕이 초나라 원정 도중에 행방불명되자 임시로 왕위에 즉위했다가 소왕이 죽은 것으로 판명되자 정식으로 즉위했다. 팔준마(八駿馬)라는 천리마를 타고 다니며 중국을 여행했으며 견융을 정벌하고 서언왕의 반란을 평정했다. 팔준마는 흙을 밟지 않을 정도로 빠른 「절지(絶地)」, 새를 추월하는 「번우(翻羽)」, 하룻밤에 5,000km를 달리는 「분소(奔霄)」,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하는 「월영(越影)」, 빛보다 빠른 「유휘(踰輝)」와「초광(超光)」, 구름을 타고 달리는 「등무(謄霧)」, 날개가 있는 「협익(挟翼)」등의 8마리이다. 또 그는 서쪽의 저 멀리 있는 신들이 산다고 여겨진 곤륜산(昆倫山)을 방문하여 서왕모를 만났고 서왕모가 나중에 입조했다고 했다. 목천자전(穆天子傳)은 신화와 전설이 가미된 목왕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9) 보형(甫刑)/ 주목왕이 사구(司寇) 여후(呂侯)에게 명해 『여형(呂刑)』으로 불리는 형법을 정해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지만 3천개나 되는 많은 조항 때문에 오히려 제후나 민중의 반감을 샀다. 여후는 후에 보후(甫侯)로 개봉(改封) 되었기 때문에 여형도 보형으로 바뀌게 되었다.

10) 초획(焦獲)/ 중국 고대의 늪지대의 이름으로 초호(焦護)라고도 한다. 소재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지금의 섬서성 경양(涇陽) 북쪽 혹은 산서성 양성(陽城) 서쪽이라는 설이 있다.

11) 진양공(秦襄公)/ 기원전 780-766년에 재위한 섬진(陝秦)의 군주다. 서주가 견융의 침입으로 호경(鎬京)에서 낙양으로 천도할 때 당시 진나라는 주나라의 부용국(附庸國)에 불과했었으나 진양공이 군사를 보내와 주평왕(周平王)을 도와 주나라가 낙양으로 동천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에 주평왕은 진양공을 진백(秦伯)에 봉하여 정식 제후국으로 삼아 호경(鎬京) 이서의 땅에서 견융을 몰아 낼 경우 그 땅은 모두 진나라에 속한다고 명했다.

12) 육혼(陸渾)/ 지금의 하남성 숭현(嵩縣) 서남이다.

13) 鲁颂·.閟宫

14) 小雅.六月

15) 시경(詩經) ․ 소아(小雅) ․ 녹명지습(鹿鳴之什) ․ 출거(出車)

16) 진도공(晉悼公)/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58년에 죽은 춘추 때 당진국의 군주다. 이름은 주(周)고 진양공(晉襄公)의 증손이다. 기원전 572년에 폭정을 행한 려공(厲公)을 습격하여 살해한 당진국의 대신 란서(欒書)와 순언(荀偃)은 공실의 방계로써 당시 주나라에 들어가 살고 있던 그를 데려와 군위을 잇게 했다. 즉위 후, 신하의 예를 취하지 않는 대신 7명을 쫓아냈으며 옛날에 세운 공업을 새로이 밝히고, 덕과 은혜를 펼쳐 문공이래 구 대신들을 거두어 문공과 양공이 이룩했던 공업을 자기가 이어 받고자 했다. 3년 기원전 570년 대신이 기해(祁奚)의 천거를 받아 기오(祁午)와 양설적(羊舌赤) 즉 숙향(叔向)을 중군정위(中軍正尉)와 중군부위(中軍副尉)에 각각 기용했다. 4년 위강(魏絳)을 융(戎)에 파견하여 강화를 맺도록 하자 융족들이 모두 찾아와 귀의했다. 8년 제후들을 9번에 걸쳐 소집하여 회맹을 행하자 초나라가 감히 당진국과 다투지 못함으로써 당진국은 진문공이 이룩한 패권을 차지했다. 재위 15년 만에 죽었다.

17) 조양자(趙襄子)/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25년에 죽은 춘추 말 당진국(唐晋國)의 대부로 영성(嬴姓) 조씨(趙氏)에 이름은 무휼(無恤)이다. 조간자(趙簡子) 조앙(趙鞅)의 아들로 당진국의 육경(六卿) 중의 한 사람이었다. 조간자가 아들 가운데 비록 천비 소생이기는 하지만 무휼이 현명하다고 생각해서 적자이며 큰 아들인 백로(伯魯)를 폐하고 그의 후계자로 삼았다. 이윽고 조앙이 죽고 조양자가 집정하자 그는 지(智), 한(韓), 위(魏) 등의 삼가와 힘을 합하여 육경 중 범씨와 중항씨(中行氏)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후에 세력이 강성해진 지씨들의 종주 지백(智伯)이 당진국의 군주 출공(出公)을 쫓아내고 의공(毅公)을 세워 정권을 멋대로 휘두르며 발호했다. 이어서 지백이 공개적으로 조씨들을 향해 영지의 할양을 요구하자 조양자가 거절했다. 이에 지백은 한(韓)과 위(魏) 두 종족과 연합하여 조씨들을 공격했다. 세가 불리했던 조양자는 지금의 산서성 태원(太原)의 진양(晋陽)으로 들어가 농성하며 대항했다. 지백은 분수(汾水)의 물을 막아 진양성으로 흘려보내 잠기게 했다. 이에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조양자는 그의 가신 장맹담(張孟談)을 보내 한강자(韓康子)와 위환자(魏桓子)에게 당진국의 패권을 혼자 차지하려는 지백의 야욕을 설파하고 조씨들과 연합할 경우의 이해득실을 논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백에게 등을 돌리게 하였다. 주정왕(周定王) 16년 기원전 453년 조(趙), 한(韓), 위(魏) 삼가가 지가(智家)에게 반격을 가하여 멸하고 지가의 영지와 당진국의 공실의 땅 전부를 삼분하여 나누어 가졌다. 이 일을 역사상 삼가분진(三家分晋)이라 한다.

18) 구주산(句注山)/ 지금의 산서성 대현(代縣) 서북에 산의 모양이 갈고리를 돌려 놓은 것 처럼 생긴 것이 마치 물이 쏟아지는 모습을 띠고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서형산(西陘山), 형령(陘嶺). 안문산(雁門山)이라는 별명이 있다. 고대 중국의 북방을 지키는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19) 하투(河套)/ 북쪽으로 흐르는 황하(黃河) 음산(陰山)산맥의 남쪽 기슭에서 만곡하는 부분과 만리장성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로 사막 ·초원 ·염호(鹽湖)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르도스란 15세기 중엽 이후 이곳이 내몽골 여러 부(部)의 하나인 오르도스부의 목축지를 이룬 데서 연유한 것으로서 현재 어얼둬쓰[鄂爾多斯]라고 표기하나, 본래 중국에서는 BC 3세기 이래 하남(河南), 후에는 하투(河套) ·투중(套中) 등으로 불렀으며, 몽골 유목민과의 교섭 또는 공방(攻防)의 요지로 삼아 왔다

20) 직도(直道)/ 진시황이 건설했던 중국 고대의 도로 명이다. 진시황 35년 기원전 212년 몽염에게 명하여 건설하도록 했다. 북쪽 변경의 구원(九原 : 지금의 내몽고 포두시(包頭市) 서북)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운양(雲陽 : 지금의 섬서성 순화현(淳化縣) 서북)에 이르렀다. 관중평원과 하투(河套) 지구를 통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21) 명적(鳴鏑)/ 발사하면 소리를 내는 화살

22) 白羊河南王/ 백양은 흉노의 일족인데 하투 이남으로 남하하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23) 조나(朝那)/ 한나라 때 조나(朝那)의 옛 성이 원주(原州) 백천현(百泉縣) 서쪽 7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안정군(安定郡)에 속했다. 안정군(安定郡)은 한무제 원정(元正) 3년(B.C 114년)에 새로 설치되어 이때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조나(朝那)는 북지군 소속이었다. 漢書新注」에서는 조나를 현재 영하회족자치구 固原市 남동쪽이라고 했는데 진혜왕이 오지(烏氏)를 멸망시키고 설치했다.

24) 부시(膚施)/ 당시 상군(上郡)의 치소로 지금의 섬서성 楡林市 魚河堡 부근이다.

25) 정(庭)/ 선우가 머무는 곳으로 유목민들에게는 치소에 해당한다. 당시의 선우의 정이 있던 곳은 지금이 몽고공화국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었다.

26) 롱성(蘢城)/ 한서에는 “용성(龍城)”으로 적혀 있고 또는 “롱(蘢)”으로도 적혀있다. “서방(西方)의 호(胡)는 모두 용신(龍神)을 섬기니 이 때문에 대회를 여는 곳을 용성(龍城)이라 불렀다.”고 했다.「후한서」에서 “흉노의 풍속에서는 매년 세 번의 용사(龍祠)를 지내며 천신(天神)에 제사지낸다.”라고 했다. 지금의 몽고공화국 중앙부를 흐르는 Tamir 강(塔米尔河) 부근으로 비정된다.

27) 대림(蹛林)/ 흉노가 추사(秋社)를 지내기 위해 8월 중에 모두 모이는 곳이다. 대(蹛)의 음은 대(帶)라 했다.

28) 알(軋)/ 죄인의 몸에 수레바퀴를 지나가게 하는 형벌. 혹은 칼로 죄인이 얼굴을 새기는 형벌이라고 했다.

29)「魏略」에 정령(丁零)은 강거(康居)의 북쪽에 있고 흉노의 왕정이 있는 접습수(接習水)로부터 7천 리 떨어져 있다고 했다. 또한 흉노 북쪽에 혼유국(渾窳國)이 있다고 했다. 접습수는 安習水라고도 했다.

30)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시(大同市)다.

31) 신망(薪望)/ 한나라이 국경지대의 지명으로 추측되나 어디를 뜻하는 지는 알 수 없다. 일설에는 신망은 봉수대의 척후(斥堠)라는 설도 있다.

32) 수겹기의(繡袷綺衣)/ 천자가 입는 옷으로 繡(수)는 겉에 입고 綺(기)는 안에 입었다. 모두 비단으로 만든 옷이다. 袷衣(겹의)는 솜[絮]이 없다.

33) 수경장유(繡袷長襦)/비단에 수를 놓아 지은 긴 겹옷

34) 금겹포(錦袷袍)/ 겉 감에 큰 꽃무니로 채색하고 속은 솜을 댄 비단옷

35) 비여(比余)/ 금으로 만든 빗

36) 황금식구대(黃金飾具帶)/ 황금으로만든 허리띠

37) 황금서비(黃金胥紕)/ 황금으로 만든 허리띠 고리

38) 적제(赤綈)/ 붉고 두꺼운 비단

39) 록증(綠繒)/ 푸른색 비단

40) 팽양(彭陽)/ 지금의 감숙성 진원현(鎭原縣) 동남이다.

41) 회중궁(回中宮)/ 지금의 섬서성 농현(隴縣) 동남에 있었던 행궁 이름으로 진시황 26년 기원전 220년에 시황이 농서로 순행나갔다가 축조한 궁전이다.

42) 차거(且居)/ 차거(且渠)라고도 하며 흉노의 중하급 지휘관이다. 흉노의 기병 지휘관은 좌우현왕부터 대당호(大當戶)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사를 나누어 통솔했는데 많게는 만 기 이상, 적게는 수천 기를 거느렸다. 만 기 이상을 거느리는 지휘관은 모두 24장으로 각자는 휘하에 천장(千長), 백장(百長) 등의 속관을 두었다. 차거는 그들의 속관 중 하나다.

43) 세 장군/ 장무(張武), 소의(蕭意), 영면(令勉)이다.

44) 비호구(飛狐口)/ 지금의 하북성 래원현(淶源縣)과 울현(蔚縣) 사이의 우뚝 솟은 산맥 가운에 나 있는 좁은 통로로 중국의 고대데 하북평원과 북방의 변경을 연결하는 인후에 해당했다.

45) 여기서는 주아부(周亞父), 서려(徐厲), 유례(劉禮)다.

46) 유수(劉遂)/ 유수의 부친은 고조의 가운데 아을 조유왕(趙幽王) 유우(劉友)다. 여씨들의 전횡에 반대했음으로 여태후의 미움을 받아 장안에서 연금되어 굶어죽자 한문제가 그의 아들 조수를 조왕에 세웠다.

47) 무주(武州)/ 즉 무주색(武州塞)으로 지금의 산서성 좌운현(左雲縣)에서 대동시(大同市) 일대의 요새를 말한다.

48) 위사(尉史)/ 현위(縣尉)에 소속된 무관으로 도적을 잡고 야경군의 복무를 감시했다.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제도로 매 백리마다 위(尉)를 설치하고 그 밑에 사사(士史)와 위사(尉史) 각 2명을 두어 국경의 요새를 순행하며 감독하게 했다.

49) 위청이 거느린 여섯 장군 / 원삭(元朔) 5년 봄, 한나라가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청(衞靑)에게 명해 3만 기를 거느리고 고궐(高闕)을 나가게 하고 위위(衞尉) 소건(蘇建)을 유격장군(游擊將軍), 좌내사(左內史) 이저(李沮)를 강노장군(彊弩將軍), 태복(太僕) 공손하(公孫賀)를 기장군(騎將軍), 대상(代相) 이채(李蔡)를 경거장군(輕車將軍)으로 삼고 이들을 모두 거기장군의 영을 받으며 함께 삭방(朔方)을 나가게 하고, 대행(大行) 이식(李息), 안두후(岸頭侯) 장차공(張次公)을 장군으로 삼고 우북평(右北平)을 나가게 하여 모두 흉노를 공격하도록 했다.(위장군표기열전)

50) 6장군/ 이때의 위청 휘하의 6장군은 중장군(中將軍) 공손오, 좌장군 공손하, 전장군 조신(趙信), 우장군 소건(蘇建), 후장군 이광(李廣), 강노장군(强弩將軍) 이저(李沮) 등이다.

51) 신진중(新秦中)/ 하남(河南)으로 불리우며 지금의 내몽고 하투(河套) 이남 지역으로 영하성 청수하(淸水河) 유역, 감숙성 환현(環縣), 섬서성 오기현(吳旗縣) 일대를 포함한다. 관중을 의미하는 진중(秦中)과 연접한 땅이라고 해서 얻은 지명이다.

52) 주객(主客)/ 외국의 사신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흉노의 관직 이름이다.

53) 한무제 원봉(元封) 6년 기원전 105년, 한경제의 손자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 유세군(劉細君)을 오손왕에게 시집보냈다. 오손(烏孫) 은 전한(前漢) 때 서역(西域) 지방인 지금의 카자흐스탄에 할거하던 터키계(系)의 유목 민족으로, 그 세력권은 천산(天山) 산맥 북쪽의 이시크를 호수 부근으로부터 이리하(伊犁河: 일리 강) 유역의 분지를 포함하여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르강 상류의 나린강 계곡에 있던 적곡성(赤谷城:본거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오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성했던 흉노는 북방 몽골 땅을 근거지로 삼고 한나라를 끊임없이 침범했다.

54) 한서 서역전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 흉노는 오손(烏孫)이 한나라와 교통한다는 말을 듣고 노하여 오손을 공격하려고 했다. 또한 한나라가 오손에 사자를 보내고는 그 남쪽을 나가 대원(大宛), 월지(月氏)에 이르러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이에 오손이 두려워하며 사자를 보내 말을 바치며 한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어 서로 형제가 되기를 원했다. 천자가 신하들에게 물으니 이를 의논하여 허락하되 필히 먼저 혼수를 들인 뒤에 여자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오손이 말 1천 필을 혼수로 보냈다. 한나라 원봉(元封) 중(B.C 110-105) 강도왕(江都王) 건(建)의 딸 세군(細君,사람이름)을 공주로 삼아 처로 주었다. 승여(乘輿)와 황제가 쓰는 물품을 하사하고, 관속(官屬), 환관(宦官), 시어(侍御)하는 자 수백명을 갖추어주었고 선물로 보내주는 것이 매우 풍성했다. 오손의 곤막(昆莫)이 그녀를 우부인(右夫人)으로 삼았고 흉노 또한 여자를 보내 곤막의 처로 삼게 하니 그녀는 좌부인(左夫人)으로 삼았다.」

55) 현뢰(胘雷)/ 지금의 신강성위그루자치구 경내의 탑성현(塔城縣) 부근이다.

56) 이광리(李廣利)/ 서한의 음악가인 이연년이 그의 여동생 이부인을 절세가인이라고 노래로 소개하여 한무제에 의해 총애를 받자 이연년의 동생 이광리도 천거되어 장군이 되었다. 한무제 37년(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 장건(張騫)의 원정으로 서역의 사정이 알려지자 이광리가 군사를 이끌고 대원(大宛)의 이사성(貳師城)을 공략하여 한혈마(汗血馬)를 얻어 한무제에게 바쳤음으로 이광리는 이사장군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후 4년간 고전하면서도 대원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서역 제국과의 통상의 길을 열어 그 공로로 해서후(海西侯)에 봉하여졌다. 그후 이부인이 죽고 형 이연년이 실각하자 무고사건에 연루되어 흉노에 투항한 후 선우에 의해 살해당했다.

57) 수항성(受降城)/ 지금의 몽고공화국 남과벽성(南戈壁省瑙) 노목강현(瑙岡縣)의 파음포랍격(巴音布拉格)에 옛 성터가 있다. 한무제 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 축조했다.

58) 준계산(浚稽山)/ 지금의 몽고공화국 내의 고비알타이[戈壁阿爾泰] 산맥의 토랍하(土拉河)와 악이혼하(鄂尔浑河) 상류 일대를 말한다.

59) 호군(護軍)/ 진한 시대에 임시로 설치한 무관직으로 여러 장군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했다.

60) 거수(渠帥)/ 한나라에 항복한 흉노의 군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의 대장을 말한다.

61) 광록훈(光綠勳)/ 진나라가 설치한 낭중령(郎中令)을 한무제가 바꾼 명칭으로 9경 중 한 명이다. 궁궐의 숙위(宿衛), 수문(守門), 총관(總管), 궁내사(宮內事)로 실제적으로 궁내의 일을 총괄하는 중요한 직책이다. 속관으로는 대부, 랑, 알자, 기문(期門), 우림(羽林) 등이 있다.

62) 여구(廬胊)/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다음 두 가지 설이 유력하다.➀ 양산(陽山)의 북록의 산 이름으로 이곳에 방책과 척후 초소를 축조하여 요새 밖에서 구원(九原)과 삭방(朔方)을 기지로 삼았다. ➁ 강이름으로 즉 여구하(廬胊河) 혹은 용거하(龍居河)로 지금의 몽고공화국 영토 내의 극로윤하(克魯倫河 : Keruelen River)를 말한다고 했다.

63) 기(紀)나라는 산동성 익도현(益都縣) 부근에 있던 제후국으로 제나라 도성 임치성(臨淄城)과는 그 동쪽으로 약 30키로 떨어져 있었다. 기원전 690년 제양공(齊襄公)에 의해 제나라에 병합되었다. 제나라와 동성인 강성(姜姓)의 제후국이다. 주이왕(周夷王) 때 주나라의 경사(卿士) 직에 있던 기국의 군주가 제애공(齊哀公)을 참소하자 주이왕은 제애공을 팽살했다. 이후로 제와 기 두 나라는 원수로 지내다가 제양공이 기나라를 멸해 9대 조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 것이다.

64) 탁도산(涿塗山)/ 지금의 몽고공화국의 체체아르크[車車爾勒格,Tsetser

-leg] 남쪽에 있는 산이다. 울란바토르 남서쪽 600키로다.

65) 여오수(余吾水)/ 지금의 몽고공화국 내의 토랍하(土拉河)다.

66) 무고(巫蠱)의 란/정화(征和) 2년 기원전 91년 한무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환관 강충이 태자가 나무인형을 만들어 무제를 저주했다고 모함했다. 태자가 선발제인하여 강충을 살해함으로 란이 발생하여 태자의 군대와 한무제의 군대가 장안성 내에서 5일 동안 격전을 치르면서 수만여 명이 죽은 사건이다. 이 란으로 태자는 자살하고 태자의 두 아들은 살해당했다. 후에 무고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무제가 승상 유굴리 및 관련자를 모두 처형했다.

67) 노은공(魯隱公)/기원전 722년에 올라 711년에 죽은 춘추 초기의 노나라 군주로 희(姬) 성에 이름은 식고(息姑)다. 선군 혜공(惠公)의 서장자로 혜공이 죽었을 때 적자인 윤(允)의 나이가 어렸음으로 그가 대신 섭정을 행했다. 재위 11년 태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태자 윤이 노환공이다. 공자가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인 춘추는 노은공 원년부터 시작해서 노애공 14년인 기원전 481년에 이르는 242년 동안의 기록이다.

68) 노환공(魯桓公)/기원전 711년부터 694년까지 재위한 노나라 군주다. 희(姬) 성에 이름은 윤(允)이다. 사기 본기에는 궤(軌)라 되어 있으며 송무공의 딸 소생으로 노혜공(魯惠公)의 적자다. 기원전 712년 공자휘(公子揮)와 모의하여 그의 서형인 노은공(魯隱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노후의 자리에 앉았다. 그의 처 문강은 제양공(齊襄公)의 여동생이었으나 그녀는 출가 전 남매가 서로 정을 통한 사이였다. 주장왕 3년 기원전 694년 노환공이 그의 처 문강을 데리고 제나라에 들렸다가 문강이 다시 옛날처럼 자기의 오라비와 간통한 사실을 알게 되어 추궁했다. 문강으로부터 그 일을 전해들은 제양공은 노환공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살해했다.

69) 노정공(鲁定公)/ 기원전 509년 재위에 올라 495년에 죽은 노소공(魯昭公)의 아들로 이름은 송(宋)이다. 그의 재위 기간 중인 전 500년 공자를 대동하고 협곡(夾谷)에서 제나라와 회맹을 행했다. 회맹 중에 제후(齊侯)가 정공(定公)을 습격하여 포로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공자가 의례를 주제하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가 제나라의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악인(樂人)들을 질책하여 물리쳤다. 제후(齊侯)가 감히 정공을 해치지 못하고 오히려 제나라가 빼앗아 간 문양의 땅을 사죄의 뜻으로 돌려주었다. 이에 노정공은 공자를 더욱 신임한 노정공은 공자를 대사구(大司寇)에 임명했다. 이로써 노나라는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의 재위 12년에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를 시켜 당시 노나라의 국정을 전단하고 있던 삼환(三桓) 씨들의 성읍의 성벽을 허물고 그들의 사병들을 해산시키려고 했으나 맹씨들이 불복하자 정공이 토벌군을 보냈으나 이기지 못하여 삼환씨들의 성읍을 허물지 못했다. 후에 계환자가 제나라에서 보내온 여자 악사들을 받아들여 정사가 문란해졌기 때문에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고 정공은 3년 후에 죽었다.

70) 노애공(魯哀公)/ 기원전 494년 노정공의 뒤를 이어 노후에 자리에 올랐다가 기원전 468년 삼환씨에게 축출되어 오나라에 망명하여 그 다음해인 467년에 죽은 노나라 군주다. 이름은 장(將)이다. 기원전 481년, 제나라 간공의 재상 전항(田恒)에 살해당하자, 공자가 다시 제나라 정벌을 세 차례나 권하지만, 애공은 들어주지 않았다. 기원전 468년에 삼환씨에게 무력을 행사했으나,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삼환씨의 군사력에 굴복당해, 월나라로 추방되어 기원전 467년에 그 땅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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