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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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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1319. 黥布叛逆(경포반역),

경포가 반역을 일으키자

1320. 子長國之(자장국지),

고조의 아들 유장(劉長)이 그 땅을 봉지로 삼고

1321. 以塡江淮之南(이전강회지남),

강회의 남쪽을 평정했다.

1322. 安剽楚庶民(안표초서민).

유안(劉安)은 사납기로 유명한 초나라 백성들을 차지했다.

1323. 作<淮南衡山列傳>第五十八(작<회남형산열전>제오십팔)

<회남형산열전> 제오십팔을 지었다.




열전58. 淮南衡山(회남형산)



회남려왕(淮南厲王) 유장(劉長)은 한고조 유방의 작은 아들이다. 그의 모친은 조왕 장오(張敖)의 미인(美人)이었다. 고조 8년 기원전 199년, 동원(東垣)으로 나아가 조(趙)나라 땅을 지나가게 된 고조에게 조왕이 미인을 바쳤다. 려왕(厲王)의 모가 고조의 총애를 입어 임신을 했음으로 조왕 장오(張敖)는 감히 미인을 궁궐로 들이지 못하고 그녀를 위해 외궁을 지어주고 기거하게 했다. 이윽고 관고(貫高) 등이 고조를 살해하기 위해 꾸민 모반사건이 발각되었다. 체포된 조왕이 치죄 받을 때 유장의 모친도 함께 잡혀가 하내(河內)로 연행되었다. 투옥된 려왕의 모가 옥리에게 말했다.

“ 황제의 사랑을 받아 임신했습니다. ”

옥리가 듣고 황제에게 고했으나 그때 황제는 바야흐로 조왕의 모반사건으로 화가 나있었음으로 려왕의 모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려왕의 이모부 조겸(趙兼)이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를 통하여 여후(呂后)에게 고하게 했으나 질투가 심한 여후가 황제에게 말하지 않았고 벽양후 또한 애써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려왕의 모가 려왕을 낳았으나 아무도 거두는 사람이 없어 한이 품고 자살하고 말았다. 옥리들이 려왕을 안고 황제에게 바치자 황제가 후회하고 려왕을 여후에게 맡겨 기르게 했다. 려왕의 모는 진정(眞定)에 묻혔다. 진정은 원래 려왕의 모 생가가 있는 곳이고 그녀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곳이었다.

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세워 경포가 다스렸던 옛 땅의 4군을 주어 왕으로 삼았다.

황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경포를 공격하여 멸하자 려왕이 즉시 회남왕의 자리에 올랐다. 려왕은 일찍이 모친을 일어 항상 여후에게 의지했음으로 효혜제와 여후 시절 그는 여후의 사랑을 받아 근심이나 화를 입지 않았으나 벽양후에게는 늘상 원한을 품고 있었지만 감히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윽고 효문제가 즉위하자 회남왕은 황제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여 교만하고 불손하여 여러 번 나라 법을 지키지 않았으나 그때마다 황제는 관대하게 용서하곤 했다.

효문제 3년 기원전 177년, 경사에 입조한 회남여왕이 태도가 매우 오만했다. 황제를 따라 어원(御苑)으로 들어가 사냥을 나갔는데 황제의 수레을 함께 타고 매번 황제를 대형(大兄)이라고 불렀다. 려왕은 재주와 힘이 있었다. 힘은 능히 정을 들 수 있는 장사였다. 려왕이 벽양후를 찾아가 보기를 청했다. 벽양후가 나오자 그 즉시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 벽양후를 죽이고 같이 데리고 간 위경(魏敬)을 시켜 목을 자르게 했다. 려왕이 대궐로 달려가 육단(肉袒)으로 사죄했다.

“ 신의 어머니는 조나라의 사건에 연좌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벽양후는 여후의 총애를 받아 힘이 있었음에도 힘써 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죄가 하나입니다. 조왕 여의(如意) 모자는 죄가 없었으나 여후가 죽였습니다. 벽양후가 간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둘입니다. 여후가 여러 여씨들을 왕으로 만들어 우리 유씨들을 위태롭게 만들었으나 벽양후는 간하지 않았습니다. 그 죄가 셋입니다. 신이 삼가 천하를 취해 적신 벽양후를 주살하여 모친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대궐 앞에 엎드려 죄를 청합니다. ”

효문제는 그의 뜻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또한 형제 간이라는 이유로 그의 죄를 묻지 않고 사면했다. 당시 박태후와 태자 및 대신들은 모두 려왕을 매우 싫어했다. 효문제의 사면을 받고 자기 봉국에 돌아온 려왕은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져 한나라 법을 따르지 않고 출입을 할 때는 경필(警驆)을 행하며 자기의 명을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制)라고 하며 스스로 법령을 만들어 마치 천자처럼 행동했다.

효문제 6년 기원전 174년, 남자(男子) 단(但) 등 70여 명과 극포후(棘浦侯) 시무(柴武)의 태자 시기(柴奇)와 모의하여 공거(輂車) 40여 대로 곡구(谷口)에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사람을 민월과 흉노에 보낸 일이 발각되자 황제는 회남왕의 죄를 묻기 위해 사자를 보내 경사로 소환했다. 회남왕이 이윽고 장안에 당도하자 조정의 대신들이 연서하여 표장을 올렸다.

「승상 장창(張倉)、전객(典客) 풍경(馮敬)、행어사대부 사종정(行御史大夫 事宗正) 일(逸)、정위(廷尉) 공손하(公孫賀)、비도적중위(備盜賊中尉) 복매(福昧)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 회남왕 유장(劉長)은 선제가 세운 법을 버리고 천자의 조칙을 받들지 않았으며 거처하는 궁궐은 분수에 넘쳐 법도가 없습니다.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옥(黃屋)으로 치장한 수레를 사용하는가 하면 출입을 할 때는 천자의 행차를 모방하고 법령을 멋대로 만들며 한나라 법을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어서 관할의 관리들을 임명하는 일에는 자신의 낭중 춘(春)을 승상으로 삼고 한나라 제후들의 신사들이나 죄를 얻어 도망친 자들을 불러들여 숨기고는 그들에게 머무를 집을 마련해어 살게 하고는 재물과 작위 및 전답과 저택을 하사하여 그 중에는 작위와 봉록이 관내후(關內侯)에 2천석에 이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그들의 신분으로써는 얻을 수 없는 작록임에도 행한 이유는 그가 반란을 도모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대부 단(但)、사오(士五) 개장(開章) 등의 70여 명과 극포후(棘蒲侯)의 태자 시기(柴奇)와 함께 모반을 일으켜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했습니다. 개장을 시켜 은밀히 유장에게 권하여 민월과 흉노와 내통하고 그들의 군사를 동원하여 모반을 꾀했습니다. 개장은 회남에 가서 유장을 만났고 유장도 여러 차례 앉아서 같이 음식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눈 후에 그에게 집과 아내를 마련해 주고 2천 석의 봉록으로 그를 대우했습니다. 개장이 사람을 대부 단에게 보내 이미 자기들의 계획을 회남왕에게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춘(春)은 사람을 시켜 단에게 보고하도록 시켰습니다. 관리가 알고 장안의 현위(縣尉) 기(奇) 등을 시켜 개장을 체포하도록 했으나 유장이 숨겨 내주지 않고 옛날 중위(中尉)를 지냈던 간기(蕑忌)와 모의하여 그를 죽여 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관(棺)과 곽(槨)을 마련하여 의관을 갖춘 다음 비릉읍(肥陵邑)에 장사지내고는 관리에게 ‘ 어디에 묻었는지 모른다.’고 거짓으로 말했습니다. 다시 거짓으로 분묘를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 표시하기를 ‘ 개장이 죽어 이곳에 묻히다.’라는 팻말을 걸어놓았습니다. 유장은 스스로 죄 없는 자를 직접 죽이고 이어서 관리를 시켜 무죄한 자를 논죄하여 6명을 죽이도록 했습니다. 기시(棄市)에 해당하는 죄를 짓고 도망친 자를 거짓으로 체포하여 숨기고는 그들의 죄를 없애주었습니다. 제멋대로 죄를 뒤집어 쓴 사람들은 억울해도 하소연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단용(城旦舂)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이 14명, 사형을 받아할 죄인을 멋대로 사면시켜 준 사람이 18명, 성단용 이하의 판결을 받은 자가 58명이나 됩니다. 또 자기 멋대로 관작을 내린 자가 관내후 이하가 94명입니다. 일찍이 유장이 병을 앓았을 때 폐하께서는 걱정하는 마음에 사자를 보내 친서와 대추 및 육포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장은 폐하의 하사품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폐하가 보낸 사자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해의 백성들로 여강군(廬江郡) 경내에 사는 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회남의 관리들과 군사들이 이를 쳐서 무찔렀습니다. 폐하께서는 회남의 백성들이 가난으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시고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5천 필의 비단을 하사하시어 노고가 많은 관리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습니다. 이에 유장은 다시 하사품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며 거짓으로 ‘ 노고한 자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남해의 백성 왕직(王織)이 서장을 올려 폐하께 벽옥을 바치겠다는 했으나 간기란 자가 멋대로 그 서장을 불태워 없애고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관리가 알고 간기를 소환하여 그 죄를 물으려고 했으나 유장은 간기를 보내지 않으면서 거짓으로 ‘ 간기가 병이 앓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승상 춘(春)이 장안에 입경하고 싶다고 유장에게 청하자 유장은 화를 내며 ‘ 그대는 나를 떠나 한나라에 붙으려고 하는 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유장은 마땅히 죄를 다스려 기시형에 처해야 합니다. 신 등은 법에 따라 그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황제가 명을 내렸다.

「짐은 회남왕을 차마 법으로 다스릴 수 없으니 그 일을 2천 석의 관리들과 다시 상의해 보기 바란다.」

「신 창(倉)、경(敬)、일(逸)、복(福)、하(賀)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 신들은 삼가 열후와 하후영 등의 2천석의 관리 43명과 함께 의논했습니다. 모두를 말하기를『유장은 한나라의 법도를 받들지 않았으며 천자의 조명을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도망자들을 모아 모반을 꾀하고 망명자들을 길러 반역을 도모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그래서 신 등은 의논하기를 그를 법대로 다스려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황제가 다시 명을 내렸다.

「짐은 차마 회남왕을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겠다. 유장을 죽을 죄를 면하게 하고 왕위에서 폐하도록 하라」

「신 창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유장이 죽음에 해당하는 대죄를 지었음에도 폐하께서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사면을 하시고 왕의 자리에서 폐하셨습니다. 신 등은 유장을 촉군(蜀郡)의 엄도현(嚴道縣) 공우(邛郵)로 유배 보내시고 그의 아들을 낳은 희첩들을 따르게 하여 같이 기거하도록 하십시오. 현(縣)에게 명을 내려 그들을 위한 집을 짓고 모두 늠식(廩食)과 땔나무, 소금, 채소와 취사도구, 식기, 돗자리 등 일체를 제공하도록 하십시오. 신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옵건대 천하에 포고문을 내려 알리십시오.」

황제가 명을 내려 말했다.

「유장에게 먹을 것으로는 매일 고기 다섯 근과 술을 두 말을 내리도록 하고 미인(美人)과 재인(才人) 중에서 그가 사랑하는 자 10명을 따르게 하여 같이 살게 하고 그 밖의 다른 것은 의논한대로 하라.」

그리고 회남왕과 모의한 자들은 모두 잡아서 주살했다. 이에 회남왕을 치거(輜車)에 태우고 지나가는 현으로 하여금 차례로 호송하여 전하게 했다. 그러자 원앙(袁鞅)이 간했다.

「폐하께서 평소에 교만한 회남을 그대로 두고 보시며 엄격한 태부와 승상을 보내지 않아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더욱이 성격이 강직한 회남왕이 하루아침에 그 세력이 꺾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회남왕이 나쁜 기후로 인해 병이 들어 죽기라도 한다면 폐하께서는 동생을 죽게 만들었다는 이름을 얻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쩌시려고 하십니까?」

「나는 그저 그를 고생시키려고 할뿐이고 그런 다음 왕위를 돌려 줄 것이다.」

각 현에서 호송하는 회남왕을 전할 때 수레를 봉한 포장을 감히 열어 살피보려고 하지 않았다. 회남왕이 시자를 보고 말했다.

「누가 나를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냐? 내가 어찌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나는 교만했음으로 남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이처럼 구차하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굶어죽었다. 이윽고 회남왕을 태운 수레가 옹(雍)에 이렀을 때 현령이 수레의 봉함을 열고서야 회남왕이 죽을 것을 알고서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가 통곡하며 심히 슬퍼했다. 황제가 원앙을 불러 말했다.

「내가 공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회남왕을 잃고 말았소.」

원앙이 대답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스스로 마음을 넓게 가지십시오.」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승상 및 어사와 상의하여 관련자들을 참수하여 천하에 사과하십시오.」

황제가 승상과 어사에게 명하여 각 현에서 회남왕을 호송하면서 수레의 봉함을 뜯고 문을 열지 않은 자, 음식을 보낸 자, 시중을 든 자 등을 모조리 잡아들여 고문하고 모두 기시의 형에 처했다. 이어서 열후에게 행하는 예로써 회남왕을 옹에서 장사지내고 30호의 민가를 정해 무덤을 지키게 했다.

효문제 8년 기원전 172년, 회남왕을 가엾게 여긴 황제는 나이가 모두 7-8세의 어린 그의 네 아들을 후에 봉했다. 유안(劉安)은 부릉후(阜陵侯),유발(劉勃)은 안양후(安陽侯),유사(劉賜)는 양주후(陽周侯),유량(劉良)은 동성후(東成侯)에 각각 봉했다. 。

효문제 12년 기원전 168년, 민간에서 회남려왕을 위해 노래를 지어 불렀다.

베 한 척도 꿰메어 입을 수 있고

곡식 한 말도 찧어 나누어 먹을 수 있는데

형제 두 사람은 서로 용납하지 못했네

一尺布尚可縫(일척포상가봉)

一鬥粟尚可舂(일투속상가용)

兄弟二人不能相容(형제이인불능상용)

황제가 듣고 한탄하며 말했다.

「요순 두 임금도 골육을 내쫓았고 주공은 동생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죽였으나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성인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어째서인가? 사사로운 일로써 공적인 일을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하는 어찌 내가 회남왕의 땅을 탐냈다고 하는가?」

그리고는 즉시 성양왕(城陽王)을 회남왕의 옛 땅에 개봉하고 죽은 회남왕의 시호를 여왕으로 추존했으며 능원을 만들어 제후왕으로써의 위의를 갖추도록 했다.

효문제 16년 기원전 164년, 회남왕 유희(劉喜)를 다시 옛날의 성양왕으로 옮겼다. 황제는 회남여왕이 한나라 법을 폐하여 따르지 않다가 나라를 잃고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여 그의 세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부릉후 유안은 회남왕, 안양후 유발은 형산왕(衡山王),주양후 유사는 여강왕(廬江王)으로 세우고 회남여왕의 봉지를 삼분하여 나누어 가지제 했다. 동성후 유량은 그 전에 후사가 없이 죽었기 때문에 봉할 수 없었다.

효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오나라가 사자를 회남국에 보내 반란에 참가하도록 권하자 회남왕이 호응하려고 했다. 회남의 상국이 말했다.

「대왕께서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의 거사에 호응하시려고 하시려면 신을 대장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회남왕이 즉시 군사를 상국에게 속하게 했다. 그러자 상국은 군사를 이끌고 성을 굳게 지키며 한나라를 위해 회남왕의 명을 받들지 않았다. 한나라 역시 곡성후(曲城侯) 충첩(蟲捷)에게 군사를 주어 회남을 구원하도록 했다. 회남국은 그런 연유로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오나라가 여강왕에게도 사자를 보냈으나 여강왕은 응하지 않고 단지 월나라에 사자를 보내 왕래를 했을 뿐이었다. 형산왕 역시 오나라 사자의 방문을 받았으나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굳게 지켰을 뿐이었다.

효경제 4년 기원전 153년, 오초(吳楚)의 란이 이미 평정되자 형산왕이 조현을 올리기 위해 경사에 들어왔다. 형산왕의 심성이 곧고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 황제가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말했다.

「남방의 땅은 지대가 낮고 습하다.」

그리고는 형산왕을 제북왕(王濟北)으로 옮겨 그의 충성심을 포상했다. 이윽고 형산왕이 죽자 유사에게 정왕(貞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여강왕이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월나라에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서로 왕래를 해왔다고 생각한 황제는 여강왕을 옮겨 형산왕으로 삼아 강북(江北) 땅을 다스리게 하고 회남왕은 예전처럼 그대로 두었다. 회남왕 유안은 위인이 독서와 거문고 연주를 즐겨했다. 주살로 하는 사냥이나 사냥개를 데리고 말을 달리는 일을 싫어했다. 또한 백성들에게 음덕을 베풀어 보살펴서 자신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하려고 했다. 그는 때때로 회남여왕의 죽음에 대해 황실을 원망하여 때가 이르면 반란을 일으키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으나 단지 마땅한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건원 2년 기원전 139년, 회남왕이 조현을 올리기 위해 입조했다. 평소에 회남왕과 친한 사이었던 무안후 전분(田蚡)은 당시 태위(太尉)에 직에 있으면서 회남왕을 패상(覇上)까지 나가 마중나가 말했다.

「지금 황상께서는 태자가 없으시고 대왕은 고황제의 친손으로 행하시는 인의는 세상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어느 날 갑자기 황상께서 붕어라도 하신다면 대왕 대신 누가 마땅히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대단히 기뻐한 회남왕이 무안후에게 황금과 재물을 후하게 선물했다. 이에 회남왕은 비밀리에 빈객들을 모으고 백성들을 어루만져 반역을 도모했다.

건원 6년 기원전 135년, 혜성이 나타났음으로 회남왕은 마음 속으로 괴이하게 여겼다. 어떤 사람이 회남왕에게 말했다.

「옛날 오나라가 군사를 일으킬 때 혜성이 나타나 그 길이가 여러 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죽은 사람의 피가 수천 리에 흘렀습니다. 지금 혜성이 나타나 그 긴꼬리가 하늘을 가로지르니 천하에 군사들이 크게 일어날 징조입니다.」

황제에게는 태자가 없으니 만일 천하에 변란이 일어난다면 제후들이 서로 다툴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한 회남왕은 더욱 힘써 무기와 기계 및 공성기구(攻城器具)들을 정비했고 황금과 돈과 재물을 쌓아 놓고 군국(郡國)과 제후들의 유사(游士) 및 기재(奇才)들에게 뇌물로 주어 매수했다. 모략을 잘 꾸미는 여러 변사들이 함부로 요사스러운 말을 지어 왕에게 아첨하니 왕은 기뻐하며 많은 황금과 돈으로 상을 주었다. 이로써 반역을 위한 음모는 더욱 심해졌다.

회남왕은 총명하고 구변이 좋은 유릉(劉陵)이라는 딸이 있었다. 유릉을 매우 사랑한 회남왕은 그녀에게 항상 많은 금전을 주어 장안에 기거하면서 황실의 주변을 정탐하게 하고 황제의 측근들과 친교를 맺도록 했다.

원삭 3년 기원전 126년은 한무제 재위 15년이다. 이 해에 황제는 회남왕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면서 입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칙을 내렸다. 회남왕은 왕후 도(荼)를 사랑했다. 왕후 도가 태자 천(遷)을 낳았다. 천이 장성하자 천은 수성군(脩成君)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 회남왕은 반군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기구들을 태자비가 알게 되어 일이 안에서 누설되는 일을 두려워하여 태자와 모의하여 태자로 하여금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척하며 석 달 동안이나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도록 했다. 왕은 이어서 태자에게 거짓 노한 척하며 태자를 유폐시켜 그로 하여금 태자비와 같은 방에서 석 달을 지내도록 했으나 태자는 끝내 태자비를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침내 태자비가 친정으로 돌아가려고 청하자 회남왕은 서장을 황제에게 올려 사죄를 하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왕후 도(荼)、태자 천(遷) 및 딸 릉(陵)은 왕의 총애를 받자 나라의 국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백성들의 전답과 저택들을 침탈하고 사람들을 함부로 소환하여 옥에 가두었다.

원삭(元朔) 5년 기원전 124년으로 한무제 재위 17년이다. 자기가 배운 검술은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다고 여기고 있던 태자 유천(劉遷)이 낭중(郎中) 뇌피(雷被)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 그와 겨루었다. 한 두 차례 사양하던 뇌피가 잘못해서 태자를 찔러 상처를 입혔다. 태자가 노하자 뇌피는 매우 두려워했다. 이때 흉노에 종군을 원하자는 자가 있으면 신속히 지원자를 경사에 보내야하는 법이 있었다. 뇌피는 그 즉시 종군하여 흉노 정벌전에 참가하기를 신청했다. 태자 천이 여러 번 뇌피를 헐뜯었음으로 회남왕은 낭중령에게 명해 뇌피를 면직시키도록 하고 이후로는 그러한 일을 금지시키도록 했다. 뇌피가 마침내 장안으로 도망쳐서 서장을 황제에게 올려 일의 사정을 스스로 밝히려고 했다. 황제가 조명을 내려 정위(廷尉)와 하남군(河南郡)의 도위(都尉)에게 사건을 조사하도 했다. 하남의 도위가 그 사건을 다스리기 위해 태자를 체포하려고 하자 계략을 꾸며 태자를 보내려고 하지 않던 회남왕과 왕후는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계획을 주저하여 10여 일이나 지체하고 말았다. 이윽고 조명이 당도하여 하남의 도위가 태자를 신문했다. 이때 회남의 상국은 수춘(壽春)의 승(丞)이 태자를 체포하지 않은 행동에 분노하여 그를 불경죄로 탄핵했다. 회남왕이 회남의 상국에게 선처를 부탁했으나 상국은 듣지 않았다. 회남왕은 사람을 시켜 서장을 황제에게 올려 상국을 고발했다. 황제는 그 일을 정위에게 맡겨 조사하도록 명했다. 사건의 전말이 자신에게까지 연루되자 회남왕은 사람을 시켜 한나라 조정의 공경대신들의 동태를 염탐한 결과 공경대신들은 자신을 체포하여 죄를 다스리라고 상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회남왕이 역모의 계획이 드러날 것을 걱정하여 모략을 꾸민 태자가 말했다.

「조정이 사자를 보내 부왕을 체포하려고 하니 부왕께서는 사람을 위사(衛士)로 분장시켜 극을 잡고 궁궐의 뜰에 서 있다가 부왕의 곁에서 시비가 생기면 즉시 그들을 찔러 죽이게 하십시오. 저도 역시 사람을 시켜 우리 회남국의 중위(中尉)를 찔러 죽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거병을 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황제는 공경대신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고 단지 한나라의 중위 굉(宏)만을 보내 회남왕의 의중을 떠보게 했을 뿐이었다. 한나라 사자가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회남왕은 즉시 태자와 모의한 계책을 시행하기로 했다. 이윽고 회남국의 궁궐에 들어온 한나라 중위의 얼굴색이 온화한 것을 본 회남왕은 중위가 단지 뇌피를 파면시킨 일만을 물었음으로 자신의 음모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스스로 추측하고 거병하지 않았다. 중위가 돌아와 고하자 회남왕의 죄를 다스리라고 청했던 공경대신들이 말했다.

「회남왕 안(安)은 흉노를 물리치기 위해 종군하려는 뇌피 등을 믹아 명문으로 된 조칙을 파기했으니 그의 죄는 마땅히 기시에 해당합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공경대신들은 다시 회남왕을 왕위에서 폐위시켜야한다고 청했다. 황제가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다시 공경대신들은 회남국의 영지에서 5개 현에 해당하는 땅을 삭감해야 한다고 했다. 2개 현만을 삭감하라고 한 황제는 이어서 중위 굉에게 회남왕의 죄를 사면하고 그 벌로써 영지를 삭감하라고 명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중위 굉이 회남국의 경계에 들어가 회남왕의 죄를 사면한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회남왕은 처음에 한나라의 공경대신들이 자신을 주살하라고 요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고 그때까지 자신의 죄를 사면하고 삭지로 벌을 대신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한나라 사자가 온 것으로 생각한 회남왕은 예전에 태자와 모의했던 계획대로 사자를 찔러 죽이려고 했다. 이윽고 중위가 당도하여 회남왕에게 치하의 말을 올리자 회남왕은 거병하려는 계획을 중지했다. 그 후 스스로 그 일을 애통해하며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인의를 행해왔는데 오히려 삭지를 당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삭지를 당한 후에도 회남왕은 모반하려는 시도를 더욱 심하게 했다. 많은 사자들이 장안으로부터 왕래하면서 망녕되고 요사스러운 말로 황제에게는 아들이 없고 또한 한나라는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면 회남왕은 그때마다 즉시 기뻐했고, 이와 반대로 한나라 조정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앞으로 황제가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 회남왕은 화를 내며 망언이라고 하면서 옳지 않은 말이라고 했다.

회남왕은 매일 밤 오피(伍被)와 좌오(左吳) 등과 함께 여지도(輿地圖)를 보며 각 부서의 군사을이 장안으로 진입하는 진로를 살폈다. 회남왕이 말했다.

「황제가 아들이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면 조정의 신하들은 필시 교동왕(膠東王)이 아니면 상산왕(常山王)을 불러 제위에 올리려 할 것이고 제후들은 서로 다툴 것이다. 내가 어찌 준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나는 고조의 직계 손자로써 친히 인의를 행했음으로 폐하께서 나를 후하게 대했음으로 이제껏 참을 수 있었으나 만세 후에 내가 어찌 능히 북면하는 신하가 되어 어린 애들을 모실 수 있겠는가?」

회남왕이 동궁에 머물며 오피를 불러 같이 모의하며 말했다.

「장군은 위로 오르시오.」

오피가 창백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황제께서 관대한 마음으로 대왕을 사면했는데 왕께서는 어찌하여 다시 망국의 말을 다시 하십니까? 신은 옛날 오자서(伍子胥)가 오왕에게 간했으나 오왕이 듣지 않자 말하기를 ‘ 신은 지금 고소대에서 미록(麋鹿)이 노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신도 역시 회남국의 궁궐 뜰에서는 가시나무가 자라고 이슬에 옷이 적시는 것을 볼 것입니다.」

회남왕이 노하여 오피의 부모를 잡아 석 달을 감옥에 가두었다. 후에 다시 오피를 불러 말했다.

「장군은 과인의 청을 받아들이겠는가?」

「방아들일 수 없습니다. 신이 곧바로 달려온 이유는 대왕을 위해 계획을 말씀드리려고 해서입니다. 신은 듣기에 귀가 밝은 자는 소리가 없는 곳에서 듣고, 밝은 것을 볼 수 있는 자는 형체를 갖추지 않는 데에서 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성인은 만 번을 일어나면 만 번을 다 성공했습니다. 옛날 주문왕이 한 번 움직여서 이룬 공은 천세에 빛나 그 몸은 삼왕(三王)의 대열에 섰습니다. 이는 소위 천심에 따라 움직였음으로 해내가 약속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일은 천 년 전의 일로써 가히 살펴볼만한 일입니다. 무릇 백년 전의 진(秦)나라, 그리고 근자에 이르러 오초(吳楚) 두 나라의 실례를 살펴보면 역시 국가의 존망지사(存亡之死)를 알 수 있습니다. 신도 감히 오자서와 같이 주살됨을 피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지만 원컨대 대왕께서도 오왕 부차(夫差)처럼 충성스러운 말을 물리치지 마십시오. 옛날 진나라는 성현의 도를 끊고 술사(術士)를 살해했으며 시서(詩書)를 불태우고 예의를 버렸습니다. 또한 사술과 폭력을 숭상하고 형벌에 의지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며 동쪽 해변에서 나는 양식을 운송하여 서하에 쏟아 부었습니다. 당시로써는 남자들이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지게미조차 얻어먹기 힘들었으며 여자들이 아무리 날을 지새워 베를 짰지만 군막을 치기 위한 휘장도 치기 부족했습니다. 이윽고 몽염을 보내 장성을 축조케 하니 동서로 수천 리에 달해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병사들은 항상 수십 만에 달해 와중에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 그 시신은 천리에 널려 있고 시체에서 흐르는 피는 논밭을 적셨습니다. 백성들의 힘은 모두 고갈되어 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자는 열 집 중 다섯 집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서복(徐福)을 바다로 나아가게 하여 신기하고 기이한 물건들을 구해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돌아온 서복이 말했습니다.

『신이 바다 한 가운데서 대신(大神)을 보았는데 말하기를 ‘ 너는 서쪽 땅 황제의 사자가 아니더냐? ’라고 물어서 신이 ‘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대신이 ‘ 무엇을 구하려고 왔는가?’라고 물었습니다. ‘ 복용하면 수명을 더하여 연장할 수 있는 신약을 찾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신이 말했습니다. ‘ 너희 진왕은 예의가 박하여 그 약을 볼 수는 있으나 얻어서 복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신이 즉시 그 대신을 따라 동남쪽의 봉래산에 이르러 영지(靈芝)로 이루진 궁궐을 보았는데 구리빛을 띤 용의 형상을 한 사자가 나타나 하늘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신이 재배하고 ‘ 마땅히 무엇을 바쳐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해신이 대답하기를 ‘ 양가집 사내 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백공(百工)을 바치면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진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동남동녀 3천 명과 오곡의 각종 씨앗과 백공들이 만든 물건들을 가져가게 했습니다. 서복은 비옥하고 넓은 평원을 얻자 그곳의 왕이 되어 그곳에 머물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마음이 비통해져서 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자들은 열 집에서 여섯 집으로 늘어났습니다. 다시 위타(尉佗)를 시켜 오령(五嶺)을 넘어 백월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위타는 당시 중국이 극도로 피폐해졌음을 알고 그 곳의 왕이 되어 머무르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시황에서 서장을 올려 사졸들의 옷을 꿰매는데 필요하다고 하면서 남편이 없는 부녀자 3만 명을 구하자 진시황은 그에게 1만 5천 명의 부녀자들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은 와해되어 더욱 멀어져 열 집 중 일곱 집이 란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어떤 손님이 고황제에게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해 기병을 하라고 권하자 고황제께서 ‘ 기다려라, 성인이 마땅히 동남쪽에서 일어날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이 미처 되기도 전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고황제께서는 풍패(豊沛)에서 몸을 일으켜 천하를 향해 한 번 외치니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호응하는 자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런 경우를 도가후간(蹈瑕候間) 즉 약점을 노려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다는 말로써 진나라의 약점을 노리다가 망하게 되자 비로소 일어난 경우라 하겠습니다. 백성들은 원하는 바도 그와 같아 마치 가뭄에 단비를 기다리는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행군 중의 군진에서 몸을 일으켜 천자의 자리에 올라 그 공은 삼왕보다 높고 베푼 덕은 만세에 무궁하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대왕께서는 고황제께서 천하를 쉽게 얻은 사실만을 생각하고 오로지 근자에 일어난 오초(吳楚) 두 나라의 경우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릇 오왕은 호를 하사 받아 유씨들의 종묘를 받드는 좨주가 되었고 조현을 올리지 않아도 되었으며 4개 군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으로써 영지는 사방 수천 리에 달했고, 내지에서는 동을 녹여 화폐를 주조했으며 동해에서는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었고 강릉에서 산출되는 목재로 건조한 선박은 한 번에 실을 수 있는 물건은 중국의 수레 수십 량에 해당하여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들은 많았습니다. 주옥과 금백(金帛)을 제후, 종실의 귀족들, 그리고 조정의 대신들에게 뇌물로 나누어 주었으나 오로지 두(竇)씨들에게만은 주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계책이 정해지고 모의가 이루어지자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했으나 대량(大梁)에서 격파당하고 호보(狐父)의 싸움에서 졌습니다. 결국 동쪽으로 달아나 단도(丹徒)에서 월나라 사람들에게 사로잡혀 몸은 죽고 사직은 끊어져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무릇 오월의 백성들로도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실로 하늘의 뜻에 역행하여 그 시기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야흐로 현재 대왕의 군사들이나 백성들은 오초의 십분의 일도 못 미치고 천하는 진나라 때보다 만 배는 더 안녕하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신의 말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대왕께서 신의 계책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결국 대왕께서는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고 말이 먼저 새나가게 될 것입니다. 신은 듣기에 옛날 미자계(微子啓)가 폐허가 되어버린 은나라의 옛 도성터를 지나다가 슬픔에 잠겨 맥수지가(麥穗之歌)를 지어 은나라의 주왕(紂王)이 왕자 비간(比干)의 계책을 듣지 않아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일을 애통해했습니다. 그래서 맹자가 말했습니다.

『주왕은 천자의 귀한 신분이었으나 죽어서는 일찍이 필부보다 못했다.』

그것은 주왕이 살아서는 천하 사람들을 스스로 끊었기 때문이었지 , 죽음에 임했을 때 천하인들이 주왕에게 등을 돌려 버렸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신도 역시 대왕께서 천승의 군주 자리를 버리시려고 하시는 일을 슬퍼하오니, 장차 목숨을 끊으라는 글을 필히 내려주시어 군신들에게 앞서서 동궁에서 죽겠습니다.」

그래서 회남왕은 노기와 원망이 가슴 속에서 서로 얽혀 어두운 신색이 되어 눈물이 눈자위에 그득하게 차더니 만면에 줄줄 흘리며 즉시 자리에 일어나 한 걸음 씩 계단을 딛고 내려와 가버렸다.

회남왕의 장남은 유불해(劉不害)로 서자였음으로 왕이 사랑하지 않았다. 왕과 왕후, 그리고 태자는 그를 자식이나 형으로 여기지 않았다. 불해에게는 유건(劉建)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재능이 뛰어나고 자못 용기가 있었다. 그는 항상 자기의 부친을 보살피지 않은 태자를 원망했다. 또 원삭 2년 기원전 127년에 황제가 반포한 추은령(推恩令)으로 인해 제후들은 모두 자제들에게 봉지를 나누어 후에 봉했지만, 아들이 둘 밖에 없는 회남왕만은 모든 영지를 태자에게만 주고 유건의 부친만은 후에 봉하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그래서 유건은 은밀히 무리를 만들어 결당하고 태자를 밀고하여 패하게 하고 그의 부친을 대신시키려고 했다. 태자가 알고 건을 체포하여 결박짓고 매질했다. 태자가 한나라의 중위를 살해하려고 했던 일을 상세히 알고 있었던 유건은 즉시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수춘(壽春)의 장지(莊芷)를 시켜 황제에게 서장을 올려 고하게 했다. 이 일은 원삭 6년으로 기원전 123년, 한무제 재위 18년 째 되는 해에 일어났다.

「독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의를 행하는데는 이롭다고 했습니다. 지금 회남왕의 손자 유건(劉建)은 재주가 뛰어난 인재이나 왕후 도(荼)가 낳은 태자 천(遷)은 항상 건을 시기하여 해치려고 합니다. 건의 부친 불해는 죄가 없음에도 멋대로 죄를 조작하여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살해하려고 합니다. 지금 유건을 불러서 심문하시면 회남왕이 획책한 모의를 구체적으로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서장을 읽어 본 황제가 정위에게 그 일을 맡기자 정위는 다시 하남의 도위에게 조사를 맡겼다. 그때 승상 공손홍(公孫弘)과 평소에 사이가 좋았던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의 손자 심경(審卿)은 옛날 회남여왕이 자신의 조부를 격살한 일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심경은 회남왕의 일을 매우 과장해서 홍에게 전했다. 이에 홍은 회남왕이 반역을 꾀한다고 의심하여 그 일을 깊고 철저하게 다스렸다. 하남의 도위가 건을 소환하여 심문하기 위해 회남의 태자와 그 무리들도 함께 불렀다. 그 일을 근심한 회남왕이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오피를 불러 물었다.

「한나라 조정은 잘 다스려지고 있는가?」

「천하는 잘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오피의 대답을 불쾌하게 생각한 회남왕이 다시 물었다.

「공은 무슨 이유로 지금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있다고 말하는가?」「제가 가만히 조정의 정치를 가만히 살펴보니 군신 간에 의가 있으며 부자는 친애하고 부부는 유별하고 장유는 순서가 있어 모두 도리에 맞습니다. 또한 황제도 옛날부터 전해지는 도를 잘 지키고 있으며 풍속과 기강은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습니다. 재물을 가득 실은 수레를 타고 부유한 상인들은 천하를 돌아다니고 있으며 길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교역의 길은 뚫려 있습니다. 남월이 귀순하여 복종하고 있으며 강(羌)과 북(僰)의 이족들이 한나라 조정에 들어와 공물을 바치고 있으며 동구(東甌)는 이미 항복했고, 장유(長榆)는 넓혔으며 삭방의 관문을 열어 놓으니 흉노는 날개가 꺾이고 깃이 상하니 원조는 끊기고 사기는 진작되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옛날 태평성대에는 미치지는 못한다고 하지만 역시 잘 다스려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남왕이 노하자 오피가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죄했다. 왕이 다시 오피를 향해 물었다.

「산동에서 병란이 일어나면 한나라 조정은 틀림없이 대장군 위청(衛靑)을 시켜 산동을 제압하려고 할 것이오. 공은 대장군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신과 평소에 친한 황의(黃義)가 대장군을 따라 흉노를 친 일이 있었는데 그가 돌아와 저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대장군은 사대부를 예로써 대하고 사졸들에게는 은혜를 베풀며 사람들은 모두가 그에게 쓰이는 것을 즐겨합니다. 말을 타고 산을 오르내리는 모습은 마치 나는 것과 같고 재주는 뭇 사람에 비해 뛰어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의 재능이 그와 같으니 또 여러 차례 격전을 치르면서 군사의 일을 익혔으니 그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 알자(謁者) 조량(曹梁)이 장안에 사자로 갔다가 돌아와 말하기를 대장군은 호령이 분명하고 적을 맞이해서는 용감무쌍하며 항상 사졸들 앞에 선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한 휴식을 취할 때는 우물을 파고 물이 충분이 나오지 않으면 항상 사졸들이 다 마신 뒤에야 비로소 감히 마신다고 했습니다. 군대가 돌아올 때는 사졸들이 모두 강을 건넌 후에야 비로소 자신도 건너고 황태후가 하사한 황금과 비단은 모두 군리들에게 나누어주니 비록 옛날의 명장들도 그보다 훌륭하지 못할 것입니다.」

회남왕이 묵묵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건이 이미 불려가 심문을 받고 있음으로 나라의 비밀스러운 일이 발각되지나 않을까 걱정한 회남왕이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오피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회남왕이 다시 오피를 불러 물었다.

「공은 군사를 일으킨 오나라가 옳다고 여기는가? 아니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오?」

「옳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지극히 부유하고 존귀한 신분의 오왕이 군사를 일으켰으나 일이 잘못되어 단도에서 목숨을 잃고 머리와 다리가 분리되었으며 자손들은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신이 듣기에 오왕은 매우 심하게 후회했다고 했습니다.」

「남아대장부가 죽을 때 한 마디면 족하오. 그러나 오왕이 어찌 조반(造反)의 원리를 이해했겠는가? 한나라 장수들 중 하루에 성고(成皐)의 관문을 통과해 간 자만 40여 명이나 되었소. 지금 내가 루원(樓緩)에게 명하여 먼저 성고의 입구를 차단하도록 하고 주피(周被)에게는 영천(潁川)으로 내려가 공격한 후에 그 군사들로 하여금 훤원(轘轅)과 이궐(伊闕)의 길을 막도록 하며, 진정(陳定)에게는 남양의 군사를 일으켜 무관(武關)을 지키도록 하겠소. 하남태수 홀로 낙양(雒陽)을 지킬 수 있을 뿐이니 어찌 걱정할 바가 있겠소? 그러나 하수 북쪽으로는 아직 임진관(臨晉關)、하동(河東)、상당(上黨)과 하내(河內) 및 조나라가 건재하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소.

『성고의 입구를 끊으면 천하가 통하지 않는다!』

삼천의 험애에 의지하여 산동의 군사들을 부르는 일이니 거사를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공은 어떻게 생각하오?」

신은 단지 그 화만 볼 수 있을 뿐이고 복은 보이지 않습니다.」

「좌오(左吳)、조현(趙賢)、주교여(朱驕如) 등은 모두 나의 계획이 복이 있어 십의 구 정도로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째서 공만 혼자서 화만 있고 복은 없다고 하오?」

「대왕이 가까이 두고 총애하던 신하들 중 군사를 잘 부리는 자들은 예전에 모두 체포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고 있는데 남은 무리들 중 쓸만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하십니까?」

「진승(陳勝)、오광(吳廣)은 송곳을 찌를만한 땅도 없었음에도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대택향(大澤鄕)에서 기병하여 분기탱천하여 팔을 크게 휘둘러 천하를 향해 한 번 고함을 치자 천하가 모두 호응했소. 이어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희수(戱水)에 이르렀을 때는 군사들은 무려 120만 명에 달했소. 오늘 내가 비록 나라는 작지만 백성들 중 군사를 쓸 수 있는 자는 10여 만 명에 달하고 있소. 이들은 죄를 지어 북방에서 수자리를 하는 무리들도 아니고 또 낫이나 끌 및 장대를 잡은 농민 출신도 아니오. 그런데 공은 어찌하여 내가 군사를 일으키면 화만 있지 복은 없다고 하는 것이오?」

「옛날 진나라는 무도하여 천하를 잔인하게 해쳤습니다. 만승의 군사를 일으켰으며 백성을 동원하고 재물을 들여 아방궁을 짓느라 백성들의 수입을 대부분 부세로 거두어들였습니다. 여좌(閭左)의 농민들을 징발하여 수자리를 서게 하고 아비는 자식을 편안하게 보살피지 못했으며 형은 동생을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정치는 가혹하고 형벌은 엄해 천하는 마치 불속에서 익는 고기의 처지와 같아, 백성들은 모두 목을 길게 빼고 무엇인 가를 갈망하고, 귀를 기우려 무슨 소리를 듣고자 했으며, 슬픈 소리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가슴을 치며 황제를 원망했습니다. 이에 진승이 한 번 크게 외치자 천하가 모두 돌아서서 호응한 것입니다. 지금 천하에 군림하시고 계시는 금상폐하는 백성들을 잘 통제하고 있으며 해내를 가지런히 하여 통일시켜 널리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덕을 펼쳐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입을 열어 말하기도 전에 그 소리는 벼락보다 빨리 전해지고, 또한 령이 발하기도 전에 귀신처럼 재빨리 교화되며, 마음 속에 품은 바가 있으면 그 위엄은 만리 밖의 사람 마음까지 움직입니다. 아래로부터 위로 호응하는 모습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가고 메아리가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대장군 위청(衛靑)의 재능은 장한(章邯)과 양웅(楊熊)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합니다. 진승과 오광의 일을 들어 비유하는 대왕의 말씀은 이 피(被)가 생각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면 요행이라도 바랄 수 없단 말이오?」

「그렇다면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오?」

「지금 제후들은 반심을 품지 않고 있고,백성들 또한 원망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삭방 땅의 농지와 땅은 넓고 강물과 초목은 아름답지만 이주하는 백성들이 적어 그 땅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거짓으로 승상과 어사대부의 주청하는 문서를 위조하여 군국의 호걸과 임협(任俠)들과 내죄(耐罪) 이상의 죄를 범한 자들을 사면하여 그 죄를 면하게 하고, 재산이 50만 전 이상이 된 자 등을 모두 그의 가족과 함께 삭방의 땅으로 이주시키고 군사들을 더 많이 동원하여 그들을 감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당도하는 날짜를 독촉하도록 하십시오. 또 좌우도사공(左右都司空), 상림원(上林苑), 중도관(中都官) 등의 명의로 조옥(詔獄) 문서를 위조하고 제후들의 태자와 황제의 총신들을 체포하십시오. 그과 같이 행하면 황제에 대해 백성들은 원망하고 제후들은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변사를 시켜 시세의 도리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면 혹시 요행으로 십분의 일 정도는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의 방도가 가능하겠다고는 하나 내 생각에는 그와 같이 되지는 않을 것 같소!」

그래서 회남왕은 그 즉시 관노에게 명을 내려 즉시 궁궐에 들게 하여 황제의 옥쇄, 승상, 어사대부, 대장군, 군리, 중이천석, 도관령(都官令)、그리고 승(丞)의 인장과 가까운 주위의 태수와 도위의 인장, 한나라 사절이 사용하는 법관(法冠)을 위조하도록 하여 오피의 계획대로 행하라고 했다.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죄를 짓게 하여 서쪽 경사로 보내 대장군 위청과 승상을 받들도록 하다가 어느 말 아침에 군사를 일으키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대장군을 찔러 죽인 후에 승상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만드는 것은 마치 머리에서 수건을 벗어내는 일처럼 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회남왕이 나라 안의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한편으로는  회남의 상과 이천석의 관리가 자기의 명을 받들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래서 왕은 오피와 모의하여 먼서 상국과 이천석의 관리를 죽이기 위해 먼저 궁중에 몰래 불을 질러 그들이 불을 끄기 위해 달려오면 죽이기로 했다. 그러나 여전히 계획을 단행하지는 못하고 다시 사람에게 구도(求盜)의 옷을 입혀 우격(羽檄)을 지참하고 동쪽으로부터 달려오게 만들어 ‘ 남월의 군사들이 경계를 침범했다.’라고 외치게 했다. 그것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키려는 계획에서였다. 또 사람을 시켜 여강(廬江)과 회계(會稽)에 사람을 보내 도적을 대대적으로 추포하는 것처럼 가장했으나 역시 군사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회남왕이 오피를 불러 물었다.

「내가 거병하여 서쪽으로 진군하면 제후들은 호응할 것 같소? 아니면 응하지 않을 것 같소? 그들이 호응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오?」「남쪽의 형산(衡山)을 접수하여 그 병력으로 여강(廬江)을 치고 심양(尋陽)의 배를 차지하여 하치(下雉)의 성을 지키십시오. 구강(九江) 포구를 연결하고, 예장(豫章)의 입구를 끊고, 강노(强弩)를 배치하여 장강(長江)을 지켜 남군(南郡)에서 내려오는 군사들을 막으십시오. 동쪽의 강도(江都)、회계(會稽)를 거두어,남쪽의 굳센 남월과 통하여 강수와 회수 사이를 굳게 지키면 얼마간의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어떤 계획과도 발꿀 수 없는 훌륭한 계책이오. 사태가 급하게 전개되면 남월로 도망치면 그뿐이오.」

한편 정위(廷尉)는 회남왕의 손자 유건의 진술에 따라 회남왕의 역모와 연루되어 있음을 알고 황제게 고했다. 황제가 정위감(廷尉監)을 파견하여 회남의 중위가 태자를 만나는 틈을 이용하여 체포하도록 했다. 이윽과 정위감의 일행이 회남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회남왕은 태자와 모의하여 상국과 이천석의 고관들을 모두 소집하여 모두 살해하고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다. 이윽고 회남의 상국이 왕의 부름에 응하여 당도했으나 내사는 출타 중이었기 오지 않았다. 그리고 회남의 중위도 말했다.

「신은 황제의 사자를 접견해야 하기 때문에 왕의 부름에 응할 수 없습니다.」

회남왕은 속으로 상국만 죽이고 내사와 중위가 오지 않는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고 상국을 돌려보냈다. 왕은 결국 주저하여 결행을 하지 못했다. 한편 태자 천은 자기가 죄를 짓게 된 것은 한나라의 중위를 죽이려고 모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만일 함께 모의한 자가 죽고 없게 된다면 왕을 벌 줄 구실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여러 신하들 가운데에 쓸 수 있는 자는 모두 죄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이제는 함께 할만 자가 없습니다. 부왕께서 때가 아님에도 군사를 일으켰다가 아무런 공적도 없게 될 것이 걱정되니 원컨대 제가 체포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왕 역시 거사를 잠시 멈추고 싶었기 때문에 태자의 청을 허락했다. 태자가 즉시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죽지는 않았다. 오피가 스스로 관리를 면담하고 자신이 스스로 회남왕과 함께 모반을 꾀하였고 모반의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고했다.

관리가 이로써 태자와 왕비를 체포하고 왕궁을 포위하여 왕과 함께 모의에 참가한 나라 안의 빈객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반역의 기구를 찾아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공경대부들에게 모반의 죄를 다스리게 하고 회남왕의 모반에 연루된 열후(列侯), 이천석 및 호걸 등 모두 수천 명을 경중에 따라 주살 등의 죄로 모두 다스렸다.

 형산왕(衡山王) 유사(劉賜)는 회남왕의 동생으로 마땅히 연좌되어 처벌을 받아야 했음으로 관리가 그를 체포해야 한다고 청하자 황제가 말했다.

「제후들은 각기 자신의 나라를 그 근본으로 삼으니 형산황을 연좌시킴은 옳지 않다. 담당 관리는 제후왕, 열후와 모여 승상과 함께 의논해보기 바란다.」

조왕 유팽조(劉彭祖), 열후 조양(曹襄) 등 43명이 모여 상의했는데 모두 말했다.

「회남왕 안(安)은 대역무도한 모반죄를 저질렀음이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마땅히 주살해야 합니다.」

교서왕(膠西王) 유단(劉端) 역시 상의하며 말했다.

「회남왕 안(安)은 함부로 법을 폐하고 사악한 행위를 일삼으며 사심과 거짓된 마음으로 천하를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혹세무민했습니다. 종묘를 배반했고 요언을 망녕되이 퍼뜨렸습니다. 춘추에 ‘ 남의 신하 된 자는 군사를 갖을 수 없으며, 군사를 부리면 죽여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유안의 죄는 군사를 부리는 것보다 무겁고 모반은 이미 형체를 이루어 정해졌습니다. 신 단(端)이 살펴 본 바, 문서, 부절, 인장, 지도 등 증거가 명백하고 대역무도함이 매우 심하니 마땅히 법에 따라 주살해야 합니다. 또한 봉록이 이백석 이상인 자와 이와 동등한 자, 종실과 가까운 신하로 왕의 총애를 받은 자 중에서 비록 법은 어기지는 않았으나 서로 깨우쳐 가르치지 못한 자는 모두 관직에서 파면하고 작위를 깎아 사졸로 만들어 다시는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 밖에 관리가 아닌 사람들은 속죄금으로 황금 2근 8량을 바쳐 죽음을 면하게 해야 합니다. 이로써 유안의 죄상을 알려 천하로 하여금 신하된 자로써의 도리를 밝혀 다시는 감히 모반의 사악한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승상 공손홍, 정위 장탕 등이 이 표문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천자는 종정에게 부절을 주어 유안의 죄를 다스리게 했다. 종정이 미처 당도하기 전에 회남왕은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왕비 도, 태자 천과 모반에 참여한 자는 모두 멸족되었다. 천자는 오피의 문사가 공손하고 여러 번 한나라의 훌륭함을 칭송했다고 생각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자 정위 장탕이 말했다.

「오피는 회남왕을 위해 모반을 계획한 사람으로 그의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오피도 처형되었다. 회남국은 없어지고 구강군(九江郡)이 되었다.

형산왕(衡山王) 유사(劉賜)는 왕비 승서(乘舒) 사이에서 세 자녀를 낳았다. 장남 유상(劉爽)은 태자가 되고, 차남은 유효(劉孝)이고 딸은 유무채(劉無采)다. 다시 희첩 서래(徐來)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두었고 미인 궐희(厥姬) 사이에서는 아들 2명을 낳았다. 형산왕과 회남왕은 형제 사이였으나 서로 책망하고 예절을 잃어 사이가 좋지 못했다. 회남왕이 모반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형산왕이 빈객들과 결탁하여 호응하려고 한 것은 자신의 봉국이 회남왕에게 병합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원광 6년 기원전 129년(한무제 재위 12년), 형산왕이 입조할 때 따랐던 그의 알자(謁者) 위경(衛慶)이 방술(方術)로써 상서를 올려 천자를 모시고 싶다고 했다. 형산왕이 노하여 고의로 위경을 죽을죄에 해당한다고 탄핵하고 붙잡아 심하게 고문하여 강압으로 자백하게 만들었다. 형산의 내사(內史)가 그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위경의 옥사를 접수하지 않았다. 왕이 사람을 시켜 내사를 고발하는 상서를 올리게 했다. 내사가 조사를 받으면서 형산왕의 처사가 바르지 못하다고 고했다. 형산왕은 여러 번 남의 전답을 침탈하고 또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내고 전답을 만들었다고 했다. 해당 관리가 형산왕을 체포하여 죄를 물어야한다고 황제에게 청했다. 천자가 허락하지 않고 2백석 이상의 관리들을 조정에서 직접 임명토록 조치했다. 이로써 형산왕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해자(奚慈)、장광창(張廣昌) 등과 모의하여 병법에 정통하고 점성(占星)과 천문기상을 살필 줄 아는 자를 구했다. 그들은 왕에게 모반할 것을 종용하며 밤낮으로 비밀리에 모의했다.

왕비 승서가 죽자 서래로 하여금 뒤를 잇게 했다. 그때 궐희도 함께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투기했다. 궐희가 왕비 서래를 태자에게 헐뜯으며 말했다.

「서래가 비첩을 시켜 무고를 행하게 하여 태자의 모친이 죽었소.」

태자가 마음속으로 서래를 원망했다. 태자가 형산을 방문한 서래의 오빠와 술을 마시다가 비수로 찔러 상처를 입혔다. 서래 또한 크게 노하여 원망하며 여러 번 태자를 왕에게 헐뜯었다. 태자의 여동생 무채는 시집갔다가 버림받고 친정으로 돌아와 노비와 간통했다가 다시 빈객과 간통했다. 태자가 이를 책망하자 무채 또한 태자를 원망하며 왕래하지 않았다. 왕비가 듣고 무채를 잘 대했다. 무채와 그의 작은 오빠 유효는 어렸을 때 친모가 죽었기 때문에 왕비에게 의지했다. 왕비는 계획적으로 그들을 좋아하는 채 하며 그들과 함께 태자를 비방했다. 형산왕은 이로 인해 여러 번 태자를 매질했다. 원삭 4년 기원전 125년 (한무제 재위 16년), 어떤 사람이 왕비의 계모를 찔러 부상을 입히자 왕은 태자가 사람을 시켜 상하게 한 것으로 의심하여 태자를 매질했다. 후에 왕이 병이 나자 태자도 마침 병을 칭하고 병 수발을 하지 않았다. 유효, 왕비, 무채가 함께 태자를 비난하며 말했다.

「태자는 실은 아프지 않고 스스로 병이 들었다고 하지만 얼굴에는 오히려 기쁜 빛을 띠고 있습니다.」

형산왕이 대노하여 태자를 폐하고 동생 효(孝)를 세우려고 했다. 왕이 태자를 폐하기로 결심한 것을 알게 된 왕비는 또한 효도 함께 폐하려고 했다. 왕비의 시자 중에 춤을 잘 추는 시자 있었는데 왕이 매우 총애했다. 왕비가 그 시녀을 시켜 효와 음란한 일을 벌려 효의 몸을 더럽혀 두 형제를 폐하고 그의 아들 유광(劉廣)을 세우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태자 상은 그후에도 자기를 계속 헐뜯으며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와 음란한 일을 벌려 그녀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왕비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왕비의 축수를 위한다고 앞으로 다가가 왕비의 허벅지를 만지며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왕비가 노하여 그 사실을 왕에게 고했다. 왕이 태자를 불러 포박을 지우고 매질했다. 왕이 항상 자신을 폐하고 효를 세우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태자가 왕에게 말했다.

「효는 왕의 시녀와 간통했고 무채는 노비와 간통했습니다. 부왕께서는 식사에 신경쓰시어 원기를 진작시키는데 힘쓰십시오. 저는 황제에게 상서를 올리겠습니다.」

태자가 즉시 왕으로부터 뒤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를 막으려고 했으나 제지할 수 있는 자가 없어 왕이 직접 수레를 몰고 뒤따라가 태자를 붙잡았다. 태자가 망녕된 말을 함부로 하자 왕은 족쇄를 채워 궁중에 가두었다. 유효는 날이 갈수록 왕의 총애를 받았다. 유효가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왕은 왕의 인장을 두르게 하고 장군이라고 칭하며 궁궐 밖의 저택을 거처로 마련해 주고 많은 돈을 주어 빈객을 모으게 했다. 빈객으로 몰려든 자들은 회남왕과 형산왕에게 역모의 계획이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매일 밤낮으로 반역을 일으키기를 부추겼다. 형산왕은 이내 유효를 시켜 강도(江都) 사람 구혁(救赫)과 진희(陳喜)를 시켜 병거, 수레, 화살촉과 화살대 등을 만들게 하고 천자의 옥새와 장군과 상국 및 군리들의 인장을 새기게 했다. 왕은 매일 주구(周丘) 등과 같은 장사들을 구했고 수시로 옛날 오초(吳楚)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의 계획을 칭송하면서 후일을 약속했다. 그러나 형산왕은 회남왕이 추구했던 천자의 자리를 감히 바라지 못하고 단지 그의 나라가 회남국에 병탄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회남왕이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의 수도를 향해 서쪽으로 진군하고 나면 형산의 군사로 강회(江淮) 지간의 땅을 평정하여 점령할 생각 뿐이었으니 그의 바람은 그와 같았다.

원삭 5년 기원전 124년(한무제 재위 17년) 가을, 형산왕이 조현을 올리기 위해 회남국을 지나가다 회남왕은 마중나와 형제간의 우애를 말하면서 옛날의 감정을 버리고 반역의 준비를 같이 하자고 약속했다. 형산왕은 즉시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병을 핑계로 조현을 행할 수 없다고 고했다. 황제는 서면으로 조현의 의무를 면제했다.

원삭 6년 기원전 123년, 형산왕은 사람을 시켜 태자 유상(劉爽)을 폐하고 동생 유효(劉孝)를 올려야 한다는 서장을 한나라 조정에 올리게 했다. 태자 상이 듣고 즉시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백영(白嬴)을 시켜 장안으로 올라가 상서를 올리게 하여 유효가 몰래 병거와 화살과 화살촉 등을 만들어 반역을 꾀하고 부왕의 시녀와 간통한 사실을 고발하여 유효를 몰락시키려고 했다. 백영이 이윽고 장안에 당도하여 상서를 올리기도 전에 관리들이 그를 체포하여 회남에서의 일에 연좌시켜 감옥에 가두었다. 태자 유상이 백영을 장안으로 보내 상서를 올리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형산왕은 그가 꾸민 음모를 누설할까봐 두려워하여 자신도 즉시 상서를 올려 태자 상이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러 기시에 해당한다고 고발했다. 황제가 그 일의 조사를 패군(沛郡)의 도위에게 시켰다.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 122년(한무제 재위 19년) 겨울, 해당 관리와 공경이 패군에 명을 내려 회남왕의 모반사건에 연루된 자 중에서 그때까지 체포하지 못했던 진희를 형산왕의 아들 유효의 집에서 체포했다. 관리가 진희를 은닉시킨 유효가 반역의 우두머리라고 탄핵했다. 유효는 평소에 여러 번 형산왕과 반역을 모의했던 진희가 그 일을 발설할까봐 걱정했다. 또 법에 먼저 자수하면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효는 태자가 백영을 시켜 모반의 계획을 폭로할 것이라고 의심하여 곧바로 출두하여 자수하면서 구혁과 진희 등의 모반에 참여한 자들을 고발했다. 정위가 심문한 결과 그 일에 대한 증거가 확실했음으로 공경대신들은 형산왕을 당장 체포하여 구금하여 모반죄를 다스릴 것을 황제에게 주정했다. 황제는 대신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고 중위(中尉) 사마안(司馬安)과 대형(大行) 이식(李息)을 보내 형산왕을 심문하도록 했다. 형산왕이 사건의 정황을 사실대로 대답했다. 관리들로 하여금 왕궁을 포위하여 엄중하게 지키도록 조치한 사마안과 이식은 경사로 돌아와 황제에게 사건의 전말을 복명했다. 공경대신들은 종정, 대행 및 패군의 담당관리들를 보내 형산왕의 죄를 다스릴 것을 주청했다. 형산왕이 소식을 듣고 즉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유효는 자수하여 모반 사건을 고했음으로 법에 따라 사면을 받았으나 형산왕의 시녀와 간통한 죄를 적용받아 처형되어 기시에 처해졌다. 왕비 서래(徐來) 역시 전 왕비 승서(乘舒)를 무고(巫蠱)로 살해한 사건에 연루 되었음이 밝혀졌고 태자 상(爽)은 부왕을 고발한 불효를 저질렀음으로 모두 처형되어 기시에 처해졌다. 이로써 형산왕의 모반 사건에 연루된 자들은 모두 멸족되었다. 형산국은 없어지고 형산군이 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시경(詩經)의「융적(戎狄)은 정벌하고 형서(荊舒)는 응징한다.」라고 노래한 것은 진실로 옳은 말이다. 회남(淮南)과 형산(衡山) 두 나라는 친하기가 골육으로 강토는 천리에 달해 제후의 대열에 섰으나 번신(藩臣)과 천자를 보좌하는 책무를 다하기 위해 힘쓰지 않고 오히려 사악하고 간교한 계책을 꾸미는 데 전력하여 반역을 꾀한 결과 마침내 부자가 두 번이나 나라를 망하게 하고 몸은 제 명에 죽지 못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어찌 왕 혼자만의 잘못으로 인한 일이겠는가? 그것 역시 형서(荊舒)의 풍속이 두텁지 않아 신하들이 점점 물들어 그런 결과가 된 것이다. 무릇 형초(荊楚)의 사람들은 날래고 용감하며 민첩하고 사나워 란을 일으키기를 좋아한다. 이는 옛날부터 기록되어 전해오는 사실이다.

<회남·형산열전 끝>

주석

1) 동원(東垣)/ 지금의 하북성 성도인 석가장시(石家莊市) 동쪽이다.

2) 관고 등의 모반사건/ 한고조 7년 고조가 평성(平城)에서 수도 장안으로 돌아가던 중 조나라를 지날 때 조왕 장오에게 매우 무례하게 굴었음으로 관고를 포함한 조왕의 신하들이 자객을 백인(柏人)에 매복시켜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고조가 백인을 그냥 지나쳤음으로 미수에 그쳤다. 후에 관고 등의 음모가 발각되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어 경사로 압송되고 조왕 장오는 조왕에서 폐위되어 선평후로 강등 되었다.

3) 진정(眞定)/ 한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동원현을 진정현으로 개명했다.

4) 회남국의 4군/ 형산(衡山), 구강(九江), 려강(廬江), 예장(豫章) 등의 4개 군이다.

5) 경필(警驆)/ 황제나 제왕이 나들이 할 때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제도

6) 남자(男子)/ 한나라 때 관작이 없는 성인 남자에 대한 칭호다.

7) 국거(輂車)/ 화물을 전문으로 실어 나르는 대형의 수레

8) 곡구(谷口)/ 지금의 섬서성 예천현(醴泉縣) 동북의 경수(涇水)의 입구

9) 사오(士伍)/ 한나라 때 죄를 지어 작위나 봉록을 잃은 사람을 일컫는다.

10) 성단용(城旦舂)/ 성단형(城旦刑) 과 용형(舂刑)이다. 성단형은 진나라가 만들고 한나라 답습한 형벌로 범법자가 남자일 경우 낮에는 변방을 지키고 밤에는 성을 쌓게 했다. 용형은 한나라 때 생긴 형벌로 범법자가 여자일 경우 죄를 지으면 곡식을 찧게 했다.

11) 충첩(蟲捷)/ 한고조의 창업공신 충봉(蟲逢)의 아들이다.

12) 수성군(修成君)/ 한경제의 황후이며 한무제의 친모인 왕지(王娡)가 입궁하기 전에 살았던 전남편 김왕손(金王孫) 사이에 낳은 딸이다. 즉 한무제의 이부 누이다. 무안군 전분은 왕지의 이부 형제다.

13)오피(伍被)/ 지금의 호북성 노하구시(老河口市)인 찬(贊) 출신으로 반고의 한서에 ' 오피는 초인으로 혹자는 오자서의 후예라고 했다.' 오피는 서한 초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모사였다. 오피의 뛰어난 재능은 유안의 막료 중 단연 으뜸이었다. 유안이 후에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오피를 불러 그 의견을 물었다. 오피는 옛날 오자서가 오왕 부차(夫差)에게 간했으나 오왕이 듣지 않음으로 해서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사를 유안에 빗대어 말했다. 유안이 노하여 그의 부모를 붙잡아 3개월 동안이나 감옥에 가두었다. 후에 유안의 모반이 누설되어 오피는 유안과 함께 체포되었다. 오피의 언사가 공손한 것을 본 무제가 목숨을 살려주려고 했으나 어사대부 장탕이 반대하며 ‘오피는 유안의 모반 계획을 꾸민 자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자 결국 오피는 처형당하고 그 사건으로 연루되어 함께 죽은 사람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유안 역시 자살했다. 원래 회남자를 편찬한 유안은 도가에 입각한 자연과 천도를 주창하고 복고를 반대했다. 백가를 쫓아내고 오로지 유가만을 받들었던 무제의 문화정책에 저항한 결과 반란사건으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유안을 오피가 적극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피살되었다고 할 수 있다.

14) 교동왕(膠東王)/ 한경제의 아들 유기(劉奇)로 관할은 지금의 산동성 평도현(平度縣)과 래서시(萊西市) 일대다. 치소는 지금의 산동성 평도현 경내의 즉묵(卽墨)이다.

15) 상산왕(常山王)/ 역시 한경제의 아들 유순(劉舜)으로 관할은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 일대로 치소는 지금의 하북성 원지현(元氏縣)인 원지(元氏)다.

16) 오령(五嶺)/ 광동성, 광서성, 호남성, 강서성, 등의 변경을 이루는 다섯 개의 큰 산맥을 합칭하는 지명으로 즉 대수령(大廋嶺), 시안령(始安嶺), 임하령(臨賀嶺), 계양령(桂陽嶺), 게양령(揭陽嶺) 등을 말한다.

17) 호보(狐父)/ 지금의 안휘성 탕산현(碭山縣)

18) 단도(丹徒)/ 지금의 강소성 진강시(鎭江市) 단도현(丹徒縣)이다.

19) 미자계(微子啓)/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이다. 주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멸하고 그 고토에 주왕의 장자인 무경(武庚) 녹보(綠父)를 제후로 봉했으나 후에 삼감(三監)의 부추김으로 녹보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란을 평정한 주공 단은 은나라 유민을 고토에서 분산 소개하여 상구(商丘)로 옮기고 주왕의 서형인 미자계를 찾아 송에 봉했다. 즉 미자개는 춘추전국시대 때 송나라 시조이다.

20)맥수지가(麥穗之歌)/ 보리 이삭이 무성함을 탄식한다는 뜻으로 조국이 멸망한 것을 슬퍼 지은 시가이다. 주왕이 폭정을 행하자 미자(微子)가 몇 번이나 간언했어도 주왕이 들으려고 하지 않자, 그는 태사(太師), 소사(少師)와 상의하고서 은나라를 떠났다. 그러나 비간은 "신하는 죽더라도 임금께 충간(忠諫)해야 한다"면서 계속 주왕에게 간언하였다. 그러자 주왕이 진노하여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라고 하면서 비간을 해부하여 그의 심장을 꺼내보았다. 기자(箕子)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하여 남의 노비가 되고자 했지만 주왕이 그를 잡아 가두었다. 이윽고 주왕은 삼공(三公:왕을 보좌하던 세 제후)의 한 사람이었던 서백[西伯 : 훗날의 주문왕(周文王)]의 아들 주무왕(周武王) 발(發)에게 주살당하고 천하는 주나라로 바뀌었다. 은나라 멸한 주무왕은 은왕조의 봉제사(奉祭祀)를 위해 미자를 송에 봉하고 그 작위를 공(公)으로 했다. 이에 앞서 기자가 망명지에서 무왕의 부름을 받고 주나라의 도읍으로 가던 도중 은나라의 옛 도읍지를 지나게 되었다. 번화하던 옛 모습은 간 데 없고 궁궐터엔 보리와 기장만이 무성했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치 못한 기자가 읊은 시가 맥수지가(麥穗之歌)이다. 즉 은나라의 옛성터를 지나가다 이 노래를 지어 보른 사람은 미자계가 아니라 기자다. 麥秀漸漸兮(맥수점점혜)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禾黍油油兮(화서유유혜)벼와 기장도 윤기가 흐르는구나/ 彼狡童兮(피교동해)저 교활한 철부지야/ 不與我好兮(불여아호혜)내 말을 듣지 않았음이 슬프구나!

21) 장지(莊芷)/ 한서(漢書)에는 엄정(嚴正)으로 기재되어있다. 엄은 후한의 한명제(漢明帝) 유장(劉莊) 이름을 휘하여 성을 바꾼 것이고 지(芷)는 정(正)의 연문(衍文)이다.

22) 장유(長楡)/ 삭방군(朔方郡)에 설치한 요새 이름으로 유목새(楡木塞)라고도 한다. 한무제 때 대행(代行)을 지낸 왕회(王恢)가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유목(느릅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23) 장한(章邯)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5년에 죽은 진(秦)나라 말엽의 장군이다. 자는 소영(少榮)이다. 진나라가 통일전쟁을 수행할 때 그는 내사등(內史騰)과 왕전(王翦)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한나라와 조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이세황제 때 소부(小府)로 임명되고 이세 2년 기원전 208년, 여산의 진시황릉 공사를 하던 형도 20만 명을 이끌고 반기를 든 진승의 기의군 진압에 나섰다. 기의군 대장 주장(周章), 위왕 위구(魏咎),, 제왕 전담(田儋), 초장(楚將) 항량(項梁) 등이 이끄는 농민군을 례로 격파하고 그 장수들을 죽였다. 이어서 하수를 건너 북상하여 조왕과 조나라 군대를 거록성(鉅鹿城)에 가두고 맹공을 퍼부었다. 다음 해 거록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전한 항우와의 싸움에 패하자 이세황제와 조고의 시기와 의심을 받아 부하 장졸들을 이끌고 항우에게 항복했다. 관중을 점령한 항우는 장한을 옹왕(雍王)에 봉하고 치소를 폐구(廢丘)에 두고 함양(咸陽) 이서의 관중(關中) 지방을 다스리며 한왕 유방을 견제하도록 했다. 한왕 2년 기원전 205년, 한군 대장 한신이 전격작전을 구사하여 폐구를 포위하여 수공을 가하자 자살했다. ,

24) 양웅(楊熊)/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7년에 죽은 진(秦) 왕조 말엽의 장군이다. 진이세 3년 기원전 207년,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 소재의 백마진(白馬津)과 중모현(中牟縣)인 곡우(曲遇)의 싸움에서 한고조 유방에 의해 패하고 형양(滎陽)으로 도주했다가 진이세가 보낸 사자에 의해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해 살해되었다.

25) 내죄(耐罪)/ 도형(徒刑) 2년 이상의 판결을 받은 죄

26) 좌우도사공(左右都司公)/ 모두 죄인을 관장하는 부서로 우사공, 좌사공은 소부(少府), 도사공은 종정(宗正)의 소속이다.

27) 중도관(中都官)/ 경사에 소재하는 정부의 각 부서

28) 구도(求盜)/ 도적의 추포를 전문으로 하는 군사

29) 조양(曹襄)/ 한나라 창업공신 조참(曹參)의 현손으로 평양이후(平陽夷侯) 조시(曹時)의 아들이고 한무제의 누이 평양공주(平陽公主)는 그의 모친이다. 한무제 원광(元光) 5년 기원전 130년 평양후를 사위(嗣位)하고 한무제 의 딸 위장공주(衛長公主)를 처로 맞이했다. 원수(元狩) 4년 기원전 119년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 정벌전에 종군했다. 재위 16년 만인 기원전 115년에 죽었다.

30) 서한 때의 한 근은 256g, 한 량은 16g으로 지금의 단위로는 640g에 해당한다.

31) 戎狄是膺(융적시응),荊舒是懲(형서시징)/ 시경 노송(魯頌)·복긍(宓宮)의 다섯 번째 장의 구절로 노희공(魯喜公)의 공적을 칭송하고 그의 장수를 축원하는 노래다.

32) 형서(荊舒)/ 형(荊)은 춘추전국 시대 초나라가 도성으로 삼았던 호북성 강릉시(江陵市)와 형사시(荊沙市) 일대를 가리키고 서(舒)는 지금의 안휘성 합비 이남과 안경시 이북 사이의 땅에 할거했던 서국(舒國)의 땅을 말한다. 모두 초나라의 영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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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25 14:04 
회남국 약사

一、漢高祖四年(公元前203年),劉邦封英布爲淮南王,首置淮南國,都六(今安徽六安),轄九江、廬江、衡山、豫章,會稽5郡。相當於從今河南上蔡、江蘇徐州到浙江、福建兩省及江西北部廣大地域。漢高祖十一年(前196),高後誅殺了淮陰侯韓信,梁王彭越因此,英布內心恐懼反。敗。國除。
  二、高祖十一年(公元前196年),英布獲罪伏誅,改封劉長爲淮南王,都壽春(今壽縣)。轄九江、廬江、衡山、豫章四郡。相當於從今河南上蔡、安徽淮河以南,江西北部區域。 文帝前六年(前174年)陰謀叛亂,事發被拘,謫徙嚴道邛郵,途中不食死。國除。
  文帝前元十一年改封城陽王劉喜爲淮南王。十五年,“複置城陽國”,劉喜“徙城陽”。國除。
  文帝十六年(公元前164年),淮南國一分爲三:淮南、衡山、廬江,分別封給劉長的3個兒子,長子劉安繼任淮南王,都壽春。漢武帝元狩元年(公元前122年),劉安獲罪自盡,廢淮南國,爲九江郡。
운영자
20-08-07 06:55 
1. 한고조(漢高祖) 4년 기원전 203년 유방이 영포를  회남왕에 봉하고 지금의 안휘성 육안시(六安市)를 치소로 삼게 했다. 구강(九江)、여강(廬江)、형산(衡山)、예장(豫章),회계(會稽) 등의 5개 군을 관할했다. 지금의 하남성 상채(上蔡)、강소성 서주(徐州)에서 절강성, 복건성 및 강서성 북쪽 지방을 아우리는 광대한 봉국이었다. 한고조 10년 기원전 197년 여태후가 한신과 팽월을 주살하자 두려움을 느낀 영포가 기원전 196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싸움에 패해 살해당했다.

2. 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영포가 영포를 살해한 유방은 조왕이 바친 미인 사이에서 태어난 유장(劉長)을 회남으로 세우고 치소를 수춘(壽春)으로 삼게 했다. 관할지역은 구강, 여강, 형산, 예장 4군으로 지금의 하남성 상채, 안휘성의 회수 이남, 강서성 북부를 포함했다. 문제 전원년 6년 기원전 174년,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어 사천성 공우(邛郵)로 유배가다가 중도에 음식을 끊고 자살했다. 이로써 회남국은 없어졌다.
 
3. 문제 전원년 11년 기원전 169년 성양왕(城陽王) 유희(劉喜)를 회남왕으로 개봉했다. 15년 다시 성양국을 세우고 유회를 성양왕으로 다시 옮겨 회남국은 없어졌다.

4. 문제 전원년 15년 기원전 164년, 옛 회남국을 회남국, 형산국, 여강국 등의 세 나라로 나누어 유장의 세 아들에게 분봉했다. 장자 유안(劉安)에게 회남왕을 잇게 하고 도읍을 수춘으로 삼게 했다.  한무제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 122년 유안이 죄를 얻어 스스로 목숨을 끊자 회남국은 없어지고 구강군(九江郡)이 되어 조정에 속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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