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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월열전(東越列傳)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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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54. 동월(東越)



1300. 吳之叛逆(오지반역),

오나라가 반역을 일으키자

1301. 甌人斬濞(와인참비),

구인들은 오왕 비의 머리를 베어 한나라에 바쳐

1302. 葆守封禺爲臣(보수봉우위신).

그 공으로 우산(禺山)에 봉해져

사직을 지키고 한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1303. 作<東越列傳>第五十四(작<동월열전>제오십사)

이에 <동월열전>제오십사를 지었다.

민월왕(閩越王) 무저(無諸)와 월나라의 동해왕(東海王) 요(搖)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후예로 성은 추씨(騶氏)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왕위를 폐하여 군장(君長)으로 삼고 그 땅을 민중군(閩中郡)에 속하게 만들었다.

그 뒤 제후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무저와 요는 월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파양(鄱陽)1) 현령 오예(吳芮)에게 귀순했다. 오예는 파군(鄱君)으로 불리웠는데 제후들이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종군하여 도왔다. 그때 제후들을 호령하고 있던 항우가 무저와 요를 왕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초나라를 따르지 않았다. 한나라가 항우를 공격하자 무저와 요는 월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한나라를 도왔다. 한고조 5년 기원전 202년, 무저를 민월왕으로 삼아 민중의 옛 땅을 다스리게 하고 동야(東冶)2)를 도읍으로 정했다. 효혜제(孝惠帝) 3년 기원전 192년, 고제(高帝)을 위해 월나라가 세운 공적을 열거하고 말했다.

“ 민군(閩君) 요는 공로가 많으며, 그의 백성들은 그를 좋아하여 잘 따른다. ”

그리고 요를 세워 동해왕(東海王)으로 삼고 동구(東甌)3)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세상에서는 그를 동구왕(東甌王)이라 불렀다.

그로부터 여러 대를 지나 효경제(孝景帝) 3년 즉 기원전 154년에 이르렀을 때,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반란을 일으켜 민월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민월은 따르지 않았고. 동구만이 오나라를 따랐다. 그러나 오나라가 멸망할 때, 동구는 한나라가 현상금을 내건 오왕을 단도(丹徒)4)로 유인하여 죽였다. 이 때문에 동구 사람들은 죽음을 모면하고 자기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민월로 달아난 오왕의 아들 자구(子駒)는 그의 아버지를 죽인 동구에 원한을 품고 항상 민월에게 동구를 치라고 권유했다. 건원(建元) 3년은 한무제 3년에 기원전 138년이다. 이 해에 이르러 민월은 군사를 일으켜 동구를 포위했다. 식량이 떨어져 곤궁한 처지에 놓인 동구가 항복할 지경에 이르자 급히 천자에게 사신을 보내 고했다. 천자가 그에 대한 처리를 태위(太尉) 전분(田蚡)에게 묻자, 전분이 대답했다.

“ 월인들이 서로 공격하여 싸우는 것은 본래부터 흔히 있던 일이며, 또 자주 배반과 귀순을 일삼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을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가서 도울 필요는 없습니다. 진(秦)나라도 그들을 내버려둔 채 굳이 귀속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

그러자 중대부 장조(莊助)5)가 전분을 힐책하며 말했다.

“ 힘으로 월나라를 도울 수 없고, 덕으로 월나라를 덮을 수 없음을 걱정일 뿐입니다. 만일 참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무엇 때문에 버려두겠습니까? 진나라는 함양(咸陽)조차도 버렸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월나라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작은 나라가 궁지에 빠져 천자께 달려와 위급함을 알렸는데, 천자께서 구원하지 않으면 그들은 어느 곳으로 가서 호소해야 합니까? 또 어떻게 모든 나라를 자식처럼 여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천자가 말했다.

“ 태위는 함께 의논할 상대가 못되오. 나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으므로 호부(虎符)6)를 내어 군(郡)과 국(國)에서 군사를 징발하고 싶지 않소.”

그리고는 장조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회계군(會稽郡)으로 가서 군사를 징발하여 동구를 돕게 했다. 그러나 회계 태수는 호부(虎符)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군사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장조는 사마(司馬) 한 사람의 목을 베어 천자의 명을 밝힌 뒤에야 마침내 군사를 내어 바다를 건너 동구(東甌)를 구원하러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민월(閩越)은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동구는 나라를 들어 중국으로 옮겨 올 것을 청한 뒤 백성들을 이끌고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사이로 와서 살았다.

건원 6년에 이르러 민월이 남월을 쳤다. 남월은 천자와의 약속을 지켜 감히 제멋대로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 천자에게 고했다. 천자는 대행(代行)7) 왕회(王恢)8)를 예장(豫章)으로 나가게 하고, 대농(大農)9) 한안국(韓安國)10)을 회계(會稽)로 나가게 하여 모두 장군으로 삼았다. 한나라 군대가 양산령(陽山嶺)11)을 넘기 전에 민월왕 영(郢)이 군사를 보내 험한 곳에서 맞서 지키고 있었다. 이때 민월왕의 아우 여선(餘善)이 재상 및 종족들과 의논하여 이렇게 말했다.

“ 우리 왕은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켜 남월을 치면서 천자에게 주청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천자의 군사가 우리나라를 치려고 왔다. 지금 한나라 군사는 많고 강하다. 지금 요행히 이긴다 해도 앞으로 더욱 더 많은 군사가 쳐들어와서 결국 우리나라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지금 왕을 죽여 사죄하여 천자가 듣고 군사를 멈추면, 나라는 그대로 무사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천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 가서 힘껏 싸우고 이기지 못하면 바다로 도망쳐 들어가자.”

사람들은 모두 말했다.

“좋습니다.”

그들은 즉시 왕을 창으로 찔러 죽인 뒤, 사신을 보내 그 머리를 대행에게 바쳤다. 대행은 말했다.

“ 우리가 온 목적은 민월왕을 베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민월왕의 머리를 보내 사죄를 하였으니 싸우지 않고도 해결되었다. 이보다 더 큰 이익은 없다.”

그래서 군대의 행군을 멈추고 대농 한안국에게 통보하는 한편, 사람을 시켜 민월왕의 머리를 가지고 말을 달려 천자에게 보고했다. 천자는 조서를 내려 두 장군의 토벌을 멈추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영(郢) 등이 반란의 원흉이다. 그러나 무제의 손자 요군(繇君) 축(丑)만은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다. ”

천자가 즉시 낭중장(郎中將)12)에게 명을 내려 축을 월나라의 요왕(繇王)으로 세워 민월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영을 죽인 여선의 위엄과 명령이 나라 안에서 행해지자 많은 백성들이 그를 추종했다. 여선은 마음속으로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요왕은 여선의 무리들을 휘어잡아 바로잡을 수 없었다. 천자 역시 이 소식을 들었으나, 여선 때문에 다시 군대를 일으킬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선은 영과 함께 자주 반란을 모의하기는 했지만, 뒤에 앞장서서 영을 베었기 때문에 한나라 군사가 수고스럽게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는 여선을 동월왕으로 세워 요왕과 병립하게 했다.

원정(元鼎) 5년 기원전 112년에 이르러 남월이 모반을 하자, 동월왕 여선은 글을 올려 군사 8,000명을 이끌고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따라 종군하여 여가(呂嘉)13) 등을 치겠다고 청했다. 여선의 군대가 게양(揭陽)에 이르렀을 때, 바다에 풍랑이 심하다는 구실로 더 나아가지 않고, 두 마음을 갖고 몰래 남월로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한나라 군사가 파우(番禺)를 깨뜨릴 때까지 당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선장군이 사람을 경사로 보내 글을 올려 군사들의 방향을 돌려 동월을 치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천자는 사졸들이 지쳐있다고 생각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사를 해산시키고 교위들을 예장군(豫章郡)의 매령(梅嶺)에 주둔시켜 천자의 명령을 기다리도록 했다.

원정 6년 가을, 여선은 누선장군이 자기를 죽일 것을 요청했으며, 한나라 군사가 국경까지 와서 곧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모반을 일으켰다. 그리고 군대를 보내 한나라 군사의 길을 막고, 장군 추력(騶力) 등을 탄한장군(呑漢將軍)이라 부르며, 백사(白沙)ㆍ무림(武林)ㆍ매령으로 쳐들어가게 하여 한나라의 교위 세 명을 죽였다. 이때 한나라는 대농(大農) 장성(長成)과 산주후(山州候)였던 치(齒)를 주둔군의 장군으로 삼았지만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전한 곳으로 물러났다. 때문에 이들은 둘 다 겁이 많아 적을 두려워한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여선은 ‘무제’라는 옥새(玉璽)를 새겨 스스로 서서 그 백성들을 속이고 망언을 일삼았다. 천자는 횡해장군(橫海將軍) 한열(韓說)을 보내 구장(句章)15)에서 출격하여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부터 나아가게 하고, 누선장군 양복에게는 무림(武林)에서, 중위 왕온서(王溫舒)18)에게는 매령으로부터, 월후(越侯) 엄(嚴)과 갑(甲) 두 사람은 과선장군(戈船將軍)과 하뢰장군(下瀨將軍)으로 각각 삼아 약야(若耶)19)와 백사(白沙)로부터 출격하게 했다. 원봉(元封) 원년 기원전 110년, 겨울에 이들은 다 같이 동월로 들어갔다. 동월은 미리부터 군대를 보내 험한 곳을 지키고 순북장군(徇北將軍)에게 무림(武林)을 지키게 하고 누선장군의 교위(校尉) 몇 명을 패주시키고 장리(長吏)를 죽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누선장군의 부하인 전당(錢唐) 출신의 원종고(轅終古)가 그의 부속군을 이끌고 순북장군을 베어 죽여 그 공으로 어아후(禦兒侯)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한나라 본대가 당도하기 전에 일어났다.

한나라 조정은 당시 강회지간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던 월나라 출신의 연후(衍侯) 오양(吳陽)을 월나라에 들여보내 여선을 타이르게 했다. 그러나 여선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않았다. 횡해장군(橫海將軍)이 먼저 도착하자 연후 오양은 자기 고향 사람 700명을 거느리고 한양(漢陽)20)에서 월나라 군사를 공격했다. 그리고 건성후(建成侯) 오(敖)를 따라 그의 무리들과 함께 요왕(繇王) 거고(居股)에게로 가서 모의했다.

“여선은 원흉으로 우리를 위협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지금 한나라 군사가 이르렀는데, 수도 많고 강합니다. 여선을 죽이고 스스로 한나라 장군들에게 귀순하면 다행히 죽음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양의 무리는 드디어 여선을 죽인 후 부하들을 인솔하여 횡해장군에게 항복했다. 그로 인해 요왕 거고를 동성후(東成侯)로 봉하여 만호후(萬戶侯)가 되게 하고, 건성후 오를 개릉후(開陵侯)에 봉했으며, 월나라의 연후 오양을 북석후(北石侯)에 봉했다. 또 횡해장군 한열을 안도후(案道侯)에, 횡해교위(橫海校尉) 복(福)을 요앵후(繚嫈侯)에 봉했다. 복은 성양(成陽) 공왕(共王)의 아들로서 원래는 해상후(海常侯)였는데, 법을 어겨 후의 지위를 잃었다. 그는 원래 종군하여 군공을 세우지 못했으나 종실이라는 이유로 후로 봉해진 것이다. 여러 장수들도모두 군공을 세우지 못해 후로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 동월의 장수 다군(多軍)은 한나라의 군사가 쳐들어오자 자기 군대를 버리고 항복했으므로 무석후(無錫侯)에 봉해졌다. 천자는 이렇게 말했다.

“동월은 좁고 험한 곳이 많으며, 민월은 사람들이 사나워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이 많다.”

군리에게 조서를 내려 그곳 백성들을 모두 장강과 회수 사이로 옮겨 살게 했다. 그리하여 동월 땅은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월나라는 만이(蠻夷)의 나라이긴 하나 그들 조상은 백성들에게 큰 공덕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리 오래도록 나라를 유지했겠는가! 여러 대를 지나오면서 언제나 군왕으로 있었고, 구천(句踐)은 한 차례 패자로 일컬어졌다. 그렇지만 여선에 이르러서 대역을 저질러 나라는 멸망하고 백성들은 옮겨 살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조상의 자손인 요왕(繇王) 거고(居股) 등은 오히려 만호후에 봉해졌다. 이것으로 월나라가 대대로 공후가 될 수 있었음은 우(禹)임금이 남긴 공덕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주석

1) 파양(鄱陽)/ 지금의 강서성 파양(波陽) 동북에 진나라가 설치한 현으로 한나라가 따랐다.

2) 동야(東冶)/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福州市) 민후현(閩侯縣)이다.

3) 동구(東歐)/ 지금의 절강성 온주시(溫州市)다.

4)단도(丹徒)/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따른 현 이름으로 치소는 지금의 강소성 단도현 단도진(丹徒鎭)이다. 춘추 때 오나라 령이었던 주방(朱方)이다. 진시황이 주방에 왕기(王氣)가 있다하여 죄수 3천 명을 보내 지맥을 끊고 이름을 단도로 바꾸었다.

5)장조(莊助)/ 서한 때의 관리로써 한명제(漢明帝) 유장(劉莊)의 이름을 휘하기 위해 엄조(嚴助)

6) 호부(虎符)/ 호랑이 모양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부(符)로 군사 이동 등에 사용되었다. 이것을 둘로 나누어 오른쪽은 황제가 왼쪽은 군사 통솔자가 지녔다가 함쳐모아 일치하면 병사를 일으키는 증거가 되었다.

7) 대행(大行)/ 예관(禮官)으로 주로 빈객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8) 왕회(王恢)/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24년에 죽은 서한의 장군이다. 연(燕)나라 출신으로 한무제 건원 중에 민월과 동월이 서로 싸우자 그는 예장의 군사를 이끌고 회계의 군사를 거느린 한안국과 합류하여 남월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다. 한군이 미처 민월에 이르기도 전에 민월의 장수가 그의 왕을 살해하고 항복해 왔음으로 한군은 군사를 파했다. 융노가 화친을 청해 옴으로 무제가 의견을 묻자 그는 전에 여러 번 변방의 관리로 있어 흉노의 일에 익숙하다고 하며 흉노와의 화친을 반대하고 군사를 일으켜 흉노를 정벌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원흥(元興) 원년 기원전 134년, 둔장군(屯將軍)에 임명된 그는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흉노를 공격했으나 마읍(馬邑)에서의 작전이 실패하여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 왕회가 흉노 선우의 치중을 공격하지 않고 자의로 군대를 물리친 것에 노했다. 그가 비록 힘껏 자기의 행동을 변명했으나 무제의 마음을 돌릴 수 없자 다시 승상과 태후의 도움으로도 죄를 면할 수 없었다. 무제가 그를 주살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9) 대농(大農)/ 농업과 곡물의 일을 관장했던 관직명으로 전설상의 요임금 때 이미 설치했다고 했다. 삼대세표(三代世表)에 의하면 ‘ 주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의 선조인 후직(后稷)을 대농에 임명했다..... 요임금이 그의 현능함을 알고 그를 대농으로 세웠다.’ 진한(秦漢) 때는 치속내사(治粟內史), 대사농(大司農), 대농령(大農令), 대농승(大農丞) 등의 일괄해서 부른 호칭이다.

10)한안국(韓安國)/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27년에 죽은 전한(前漢)의 대신이다. 자는 장유(長孺)이고 지금의 하남성 임여현(臨汝縣)인 양국(梁國) 성안(成安) 출신이다. 원래 양효왕(梁孝王) 유무(劉武)를 받들다가 중대부(中大夫)에 임명되었다. 경제(景帝)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란 때 그는 장우(張羽)와 함께 출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워 반군이 양나라 땅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후에 양나라의 내사(內史)가 되었다. 한무제 건원(建元) 중에 황제의 명으로 북지군(北地郡)의 도위(都尉)가 되고 이어서 대사농(大司農),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원광(元光) 2년 기원전 133년,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마읍(馬邑)에서 흉노(匈奴)를 무찔렀다. 원삭(元朔) 2년 기원전 127년, 재관장군(材官將軍)이 되어 어양(漁陽)에 주둔하며 흉노를 포로로 잡은 후 흉노가 멀리 달아나 숨어버렸다고 공언하고 이어서 어양의 주둔군을 파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얼마 후에 흉노가 대거 상곡(上谷)과 어양(漁陽)을 침입하여 한나라 군사를 크게 패주시켰다. 후에 주둔지가 우북평(右北平)으로 옮겨졌으나 흉노와의 싸움에서 패한 것에 화병이 나서 죽었다.

11) 양산령(陽山嶺)/ 지금의 광동성 남령(南嶺)으로 호남성에서 광동성을 가르는 군사적인 요충지다.

12) 낭중장(郎中將)/ 서한 왕조 초기 랑관의 장으로 질록은 1천석이다.

13)여가(呂嘉)/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11년에 죽은 남월의 재상이다. 3대에 걸쳐 재상을 역임한 결과 그 권세가 왕보다 커졌다. 무제 원정 5년, 한나라에 반기를 들고 남월왕과 태후와 한나라 사자를 살해했다. 무제가 복파장군(伏波將軍) 로박덕(路博德) 등에게 군사를 주어 정벌토록 했다. 복파장군은 6년 만에 여가를 잡아 죽이고 그 나라를 멸했다.

14) 매령(梅嶺)/ 지금의 대유령(大庾嶺)으로 강서성과 광동성 가르는 요해지다.

15) 백사(白沙)/ 지금의 강서성 성도 남창시 동북이다.

16) 무림(武林)/ 지금의 강서성 여천현(餘千縣) 동북의 무릉산(武陵山) 일대다.

17) 구장(句章)/ 지금의 절강성 여도현(餘桃縣) 동남이다.

18) 한대의 유명한 혹리(酷吏) 중 한 사람이다.

19) 약야(若邪) /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紹興縣) 남쪽의 산 이름이다.

20) 한양(漢陽)/ 지금의 복건성 포성현(浦城縣) 북

-동월열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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