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사기
본기(本紀)
서(書)
연표(年表)
세가(世家)
열전(列傳)
평설(評說)
원전(原典)
· 오늘 :  99 
· 어제 :  258 
· 최대 :  2,389 
· 전체 :  1,536,297 
 
  2010-06-16 08:10:25726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49. 이광(李廣)
운영자
 비장군 이광2.jpg  (56.1K)   download : 53
 이광.jpg  (259.0K)   download : 77
일반

열전49. 李廣(이광)


1277. 勇于當敵(용우당적),

적을 만나면 용감했고

1278. 仁愛士卒(인애사졸),

휘하의 군졸들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랑했다.

1279. 號令不煩(호령불번),

또한 호령은 번거롭지 않고 간결하여

1280. 師徒鄕之(사도향지).

장수들이나 군졸들의 마음을 얻었다.

1281. 作<李將軍列傳>第四十九(작<이장군열전>제사십구)

그래서 <이장군열전> 제사십구를 지었다.


장군 이광은 농서(隴西) 성기(成紀)1) 출신이다. 옛날 연나라 태자 단(丹)을 요동까지 추격하여 잡았던 진나라 때 장군 이신(李信)2)은 그의 선조다. 원래 괴리(槐里)3)에 살았으나 후에 성기로 이사했다. 이광의 집안은 대대로 활쏘는 일을 가업으로 삼아 전수했다.

효문제 14년, 기원전 166년 흉노가 대거 소관(蕭關)4)으로 쳐들어왔다. 이광은 양가의 자제 자격으로 종군하여 흉노를 격퇴하였다. 기마술과 궁술에 능하여 찹수한 수급과 사로잡은 포로가 많아 그 공로로 중랑(中郞)5)이 되었다. 이광의 사촌 동생 이채(李蔡) 역시 중랑이 되어 함께 무기상시(武騎常侍)6)가 되어 800석의 녹봉을 받는 신분이 되었다. 일찍이 문제의 행차를 따라다니며 호위하다가 적진 깊숙히 돌격하여 함락시키고 적군의 돌입을 막았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맹수들과 맨손으로 격투했다. 문제가 보고 한탄했다.

“ 아깝도다, 그대는 때를 만나지 못하였구나! 만약 그대가 고제를 만났더라면 만호후는 충분히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

효경제(孝景帝)가 서자 농서도위(隴西都尉)7)8)가 되었으며 다시 기랑장(騎郞將)9)이 되었다.

효경제 3년(전 154년), 오초칠국의 란이 발발하자 이광은 태위 주아부(周亞父)의 군대에 종군하여 오초군을 공격할 때 적군의 깃발을 빼앗아 창읍(昌邑)10)의 성 아래에서 혁혁한 군공을 세워 이름을 높였다. 이에 양왕이 이광에게 장군의 인을 내렸으나 조정은 경사에 돌아온 이광에게 상을 수여하지 않았다.11) 다시 이광은 상곡태수(上谷太守)12)로 전보되어 흉노와 매일 싸웠다. 전속국(典屬國)13) 공손곤야(公孫昆邪)는 눈물을 흘리며 황제에게 상주했다.

“ 이광은 재주와 용기는 갖춘 인재로 천하에 그와 견줄 사람은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능력을 자부하고 쉴 새 없이 적군과 접전하지 조만간에 목숨을 잃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래서 황제는 이광을 상군태수로 옮겼다. 그 후에도 이광은 변경을 전전하며 농서, 상군, 상곡 등의 임지를 포함하여 북지(北地), 안문(雁門)、대(代), 운중(雲中) 등의 태수가 되어 그때마다 온 힘을 다하여 싸웠음으로 이름이 얻었다.

흉노가 대거 상군을 침입하자 천자가 중귀인(中貴人)14)을 사자로 보내 이광을 따라다니면서 흉노를 공격하기 위한 싸움을 배우도록 했다. 중귀인이 기병 수십 명을 이끌고 마음껏 달리다가 흉노의 군사 세 명을 발견하고 싸움이 벌어졌다. 세 흉노가 몸을 돌려 활을 쏘아 중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가 데리고 갔던 기병들을 거의 살해했다. 중귀인이 도망쳐 이광에게 고하자 이광이 말했다.

“ 그들은 필시 독수리를 사냥할 수 있는 명사수일 것이다.”

이광은 그 즉시 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세 사람의 흉노인의 뒤를 추격했다. 그때 세 흉노인은 말을 잃어버리고 걸어서 자기 부족을 찾아가고 있었다. 일행을 이끌고 수십 리를 달려가 그들을 발견한 이광은 부하들에게 좌우로 날개를 펼치라고 명하고 자신이 직접 세 사람에게 활을 쏘아 두 사람은 죽이고 한 사람은 사로잡아 확인해보니 과연이 독수리를 사냥하는 명사수들이었다. 흉노의 포로를 결박지어 말에 태우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멀리서 수천으로 보이는 흉노의 기병이 보였다. 이광이 일행을 자기들을 유인하려는 기병으로 생각한 흉노가 모두 놀라 산으로 올라가 진을 쳤다. 이광의 기병 백 명은 크게 놀라 두려워하며 말을 달려 도망쳐 본진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광이 보고 말했다.

“ 우리의 대군은 수십 리 밖에 있는데 백 명의 기병으로 도망친다면 흉노가 우리 뒤를 추격해와 활로 우리를 모두 사살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머문다면 흉노는 틀림없이 우리가 대군을 위해 자기들을 유인하려는 부대로 오인하여 감히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는 이광이 부하 기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 앞으로 전진하라! ”

이윽고 흉노의 진영 2리 되는 곳에 이르자 말을 멈추고 다시 명령을 내렸다.

“ 모두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라! ”

부하 기병이 물었다.

“ 흉노의 대군이 가까이 있어 사태가 매우 급한데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

“ 그들은 우리가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말안장을 풀어 달아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 우리가 그들을 유인하기 위한 부대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갖게 된다. ”

결국 이광이 생각대로 흉노의 기병은 감히 이광의 부대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때 백마를 탄 흉노의 장수가 호위병을 이끌고 그들의 진영에서 나왔다. 이광이 말을 타고 10여 기를 이끌고 출전하여 백마를 탄 장수를 사살하고는 다시 그의 부대로 돌아와 말안장을 풀고 군사들에게 말에서 내려 누워 뒹굴도록 했다. 그때 시간은 일몰 때였는데 흉노의 기병들이 결국은 이광의 행동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 밤중이 되자 흉노도 역시 이광의 주변에 매복하고 있는 한군의 본대가 자기들을 야습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물러가고 말았다. 이윽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이광은 본대의 대군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광은 본군은 자기들의 장군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뒤쫓지 못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효경제가 죽고 효무제가 새로 섰다. 황제 좌우 사람들이 이광이 명장이라고 천거하자 황제는 상군태수로 있던 이광을 불러 미앙궁(未央宮)의 위위(衛尉)15)로 삼았다. 정불식(程不識)도16) 함께 불려와 장락궁(長樂宮)의 위위가 되었다.

정불식은 이광과 함께 북쪽 변경 지역의 태수로 주둔군의 장수였다.  그들이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출격할 때 이광의 부대는 대오니 진형을 갖추지 않은 채 행군하고 마실 물이 있거나 목초지가 있으면 쉬고 자게 하여 군사들 각자가 스스로 편한 대로 행동하게 했다. 밤이 되어 숙영할 때도 경계를 하기 위해 조두(刁斗)17)도 치지 않게 했다. 또한 막부에서는 각종 문서나 장부를 작성하는 것도 생략했다. 그러나 척후를 멀리 보내 정찰했음으로 그때까지 한 번도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다. 반면에 정불식의 군대는 편제와 대오 및 진영을 세우는 법이 정연하고 밤에는 조두를 쳐서 경계를 엄히 했으며 군리들은 군사들의 공적과 고과를 문서로 작성하고 공문서와 장부등을 다음 날 새벽까지 정리하느라 군사들은 쉴 틈이 없었으나 그들 역시 그때까지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정불식이 말했다.

“ 이광의 군대는 그 기율이 지극히 간소함으로 적군이 갑자기 습격한다면 그들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군사들 역시 안락하게 지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죽으려고 한다. 우리 군사들은 비록 번잡하고 귀찮은 규율이 많지만 그러나 적군 역시 범하지 못한다. ”

당시 한나라 변경지역을 지키던 이광과 정불식은 모두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흉노는 이광의 군대를 두려워하고 사졸 역시 이광에게 속하는 것을 즐거워했고 정불식을 따르는 것을 고통스러워했다. 효경제 때 정불식은 직간을 서슴치 않아 태중대부(太中大夫)18)가 되었다. 위인이 청렴하고 조정의 법을 엄격하게 지켰다.

후에 한나라가 마읍(馬邑)19)으로 흉노의 선우를 유인하고 대군을 마읍 부근의 계곡에 매복시킬 때 이광은 효기장군(驍騎將軍)20)의 신분으로 호군장군(護軍將軍)21) 한안국의 부대에 속했다. 그러나 마읍으로 들어오던 선우가 깨닫고 도망치자 한군은 아무도 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리고 4년 후에 이광은 위위(衛尉)에서 장군으로 임명되어 안문(雁門)에서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흉노가 많은 병력으로 이광이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는 포로가 되었다. 평소에 이광이 유능한 장군이라는 소식을 듣고 있었던 선우가 부하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었다.

“ 이광을 만나거든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

흉노의 기병이 이광을 생포했으나 그때 그는 부상을 입고 몸이 아픈 상태였음으로 두 말 사이에 그물망에 운구를 만들어 이광을 눕혔다. 그리고 행군하기를 10여 리쯤 했을 때 죽은 채 하고 누워있던 이광이 곁눈질로 살펴보니 자기 곁에 흉노의 소년 한 명이 좋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광이 별안간 운구에서 몸을 일으켜 흉노 소년이 타고 있는 말에 올라타 그 소년을 밀어 땅에 떨어뜨리고 그가 매고 있던 활과 전통을 빼앗아 말에 채찍질을 가하여 남쪽을 향해 달렸다. 10여 리를 달린 이광은 만난 그의 잔병들 이끌고 요새로 들어갔다. 이광을 생표했던 흉노의 기병 수백 기가 그의 뒤를 추격했으나 이광은 흉노 소년에게 빼앗은 활로 추격병을 사살했음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윽고 한나라 조정은 돌아온 이광을 형리에 넘겨 심문하도록 했다. 형리는 이광이 많은 부하들을 잃고 자신은 살아서 포로가 되었음으로 참수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광은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광이 집에 머문 지도 수년이 되었다. 이광은 영음후(潁陰侯)22)의 손자와 함께 은퇴하여 초야에 묻혀 살면서 남전(藍田)의 남산(南山)에서 사냥을 하며 지냈다. 한 번은 밤에 기마(騎馬) 한 명만을 데리고 출타하여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돌아와 패릉정(覇陵亭)23)에 당도했으나 술에 취한 패릉위(覇陵尉)가 소리쳐 이광을 저지하고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광의 기마가 소리쳤다.

“ 이 분은 이광 장군님이십니다. ”

패릉위가 대답했다.

“ 현직 장군이라도 야간통행은 불가한데 옛날 장군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

패릉위가 이광 일행을 통과시키지 않고 정자 밑에서 밤을 새게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흉노가 침입하여 요서태수(遼西太守)를 죽이고 재관장군25)의 신분으로 어양에 주둔하고 있던 한안국(韓安國)25)의 군대를 패주시켰음으로 한안국은 우북평으로 전출시켰다. 그 사건으로 천자는 이광을 불러 우북평의 태수로 임명했다. 이광은 임지로 가기 전에 패릉위와 함께 출전하기를 황제에게 청했다. 그리고 임지에 함께 당도한 이광은 패릉위를 참수했다. 이윽고 이광이 우북평에 주둔하자 흉노가 듣고 그를 ‘한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부르며 몇 년 간을 피해다니며 감히 우북평을 침입하지 못했다. 불렀다.

 한 번은 이광이 사냥 나갔다가 풀섶에 바위 하나를 발견했는데 마치 호랑이처럼 보였음으로 활을 쏘았다. 화살이 바위에 맞았는데 화살촉이 보이지 않아 보니 바위에 박혀있었다. 그래서 다시 활을 쏴봤으나 아무래 해도 바위에 박히지 않았다. 이광은 부임한 군의 관할 내에 호랑이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항상 스스로 사냥을 나가 활로 쏘아 잡았다. 우북평에서도 호랑이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가 이광을 덮쳐 상처를 입었으나 결국은 활로 쏘아 죽였다.

이광은 청렴하고 상을 받으면 그 즉시 그 부하장수들에게 나누어주고 음식을 먹을 때는 그들과 함께 했다. 이광이 죽을 때는 그가 2천석 녹봉의 관리로 40여 년간을 재직했지만 집에는 남은 재산이 하나도 없었으나 시종일관 재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광은 신장이 크고 원숭이 같이 긴 팔을 갖고 있어 그는 천성적으로 활쏘기를 타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비록 그의 자손이나 남들이 궁술을 아무리 배워도 이광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이광은 눌변이었음으로 말이 적었다. 사람들과 함께 기거할 때는 땅에 그림을 그려 군진을 표시하고 활쏘기로 원근을 판별하여 지는 자에게 술을 먹였다. 그는 오로지 활쏘기만을 놀이로 취미로 삼아 일생을 마쳤다. 이광이 장병을 거느리는 방법은 행군 중에 식수와 식량이 떨어진 경우라도 일단 물을 발견하면 사졸들이 모두 마신 뒤에야 이광도 물을 마시고 사졸들이 음식을 모두 먹지 않으면 이광은 먹지 않았다. 이광은 부하들을 관대하고 가혹하지 않았음으로 사졸들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쓰임을 당하기를 원했다. 그가 활을 쏠 때는 적이 가까이 다가와 위급하게 되어 수십 보 내에 들어오지 않거나 쏘아도 맞지 않을 것 같으면 쏘지 않았으며 쏘기만 하면 활시위 소리와 함께 적군은 쓰러졌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그의 장병들은 여러 번 곤경에 처했으며 맹수를 쏠 때도 그러했음으로 부상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낭중령(郎中令) 석건(石建)26)이 죽자 황제는 이광을 불러 그를 대신 시켰다. 원삭(元朔) 6년 기원전 123년, 이광은 다시 후장군(後將軍)27)에 임명되어 대장군 위청(衛靑)이 정양(定襄)에 서 출격하여 흉노를 칠 때 종군했다. 여러 장군들은 흉노의 포로를 많이 얻었음으로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으나 이광의 군대만은 공이 없었다. 그리고 2년 후에 이광은 낭중령으로 기병 4천을 이끌고 우북평으로 출격할 때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은 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함께 했는데 서로 다른 길을 취했다. 이윽고 이광이 수백 리를 행군했을 때 흉노의 좌현왕(左賢王)이 4만의 기병으로 이광의 군대를 포위하자 이광의 군사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이광은 즉시 그의 아들 이감(李敢)을 시켜 흉노의 진영을 향해 달리게 하여 포위망을 뚫게 했다. 이감이 수십 기의 기병들과 함께 곧바로 흉노의 진영을 돌파하여 그들의 좌우를 뚫고 달려와 보고했다.

“ 흉노의 진영을 돌파하기는 너무 쉽습니다. ”

그러자 군사들이 비로소 안심했다. 이광은 군사들을 밖을 향하여 원형으로 진을 치게 하자 흉노의 기병들이 급하게 공격했다. 비 오듯이 쏟아지는 흉노의 기병들 화살에 한나라 군사들은 절반 이상이 전사했다. 그리고 한나라 군사들의 화살도 거의 떨어진 상태였다. 이광은 사졸들에게 명하여 화살을 장전한 상태로 유지한 채 쏘면 안 된다는 명을 내리고 자신은 대황(大黃)이라는 쇠뇌로 흉노의 비장을 쏘고 또 몇 명을 쏴서 죽이자 흉노의 기세가 조금 누구려졌다. 이윽고 해가 저물어 어둠이 깔리자 군리와 사졸들은 사색이 되어 두려움에 떨었으나 이광의 기색은 여전하여 더욱 군사들을 용기를 독려했다. 군중에서는 이로 인하여 이광의 용기에 탄복했다. 다음날 다시 온 힘을 다해 싸우던 중에 박망후의 군대가 당도했음으로 흉노의 군대는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그때 한나라 군사들은 지쳤음으로 흉노의 군사들 뒤를 쫓을 수 없었다.

그 때 이광의 군대는 거의 전멸하기 직전에서 싸움이 끝나 귀환했다. 한나라 법에는 박망후가 약속한 기일에 늦게 당도한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박망후는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이광의 군공은 과실이 반반이라 상을 받을 수 없었다.

옛날 이광은 그의 사촌 동생 이채(李蔡)와 함께 효문제를 모셨다. 경제가 서자 이채는 자신이 세운 군공으로 이천석의 녹봉을 받게 되고 효무제 때는 대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원삭(元朔) 5년(전 124년)에 경거장군(輕車將軍)이 되어 대장군 위청의 원정에 종군한 이채는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을 공격하여 세운 공로로 락안후(樂安侯)에 봉해졌다. 원수 2년 기원전 121년 공손홍(公孫弘)의 후임으로 승상이 되었다. 이채라는 위인은 하품에서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형편없는 사람으로 이광의 명성에 비해 한참 떨어졌다. 그러나 이광은 작위에 따르는 식읍을 얻을 수 없었고 관직도 구경을 넘지 못했으나 이채는 열후에 봉해졌고 관직은 삼공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이광의 부대에 종군했던 군리와 사졸들 중에도 후에 봉해진 사람도 있었다. 일찍이 이광은 운기(雲氣)를 보고 점을 치는 왕삭(王朔)이라는 사람에게 물었었다.

“ 한나라가 흉노를 공격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 사람은 그 현장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소. 그런데 재능이 중간에도 못 미치는 여러 부대의 교위(校尉) 이하의 장졸들이 흉노의 군대를 공격하여 군공을 세워 후(侯)에 봉해진 사람이 수십 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만은 유독 재능이나 군공이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지지 않음에도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여 봉읍을 받지 못했으니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ㄱ소? 내 상이 후에 적합하지 않아서요? 아니면 내 운명이 그래서인 것이오? ”

왕삭이 대답했다.

“ 장군께서는 한 번 스스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옛날 원한을 살만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으셨습니까? ”

“ 내가 옛날 농서태수로 있을 때 반란을 일으켰던 강족(羌族)을 유인하여 항복을 받아 냈는데 모두 8백 명에 달했소. 내가 그들을 속여 같은 날 모두 죽였소. 지금 내가 유일하게 한스럽게 생각하는 일이오.”

“ 항복한 사람을 죽여서 받는 화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아 그 일 때문에서 장군께서는 후(侯)의 작위를 얻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

이는 것보다 더 큰 이 반란을 일으켰

그리고 2년 후에 대장군과 표기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할 때 이광도 같이 출전할 것을 청했다. 천자는 이광이 늙었음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참 후에 허락하고는 전장군(前將軍)에 임명했다. 이 해가 원수(元狩) 4년 기원전 119년의 일이었다.  

이광이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출격하여 관색(關塞) 밖으로 나갔다. 위청이 흉노를 포로로 잡아 선우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스스로 정병을 이끌고 달려가면서 이광에게 우장군 조이기(趙食其)의 군사를 함께 인솔하여 동쪽의 길을 취하여 따라오게 했다. 동쪽의 길은 좁고 멀리 우회해야 했기 때문에 대군이 행군하기에는 식수와 풀이 부족하여 주둔하거나 행군하기에도 그 세가 어려웠다. 이광이 대장군을 찾아가 말했다.

“ 신의 부서는 전장군 임에도 지금 대장군께서는 저의 부서를 옮겨 동쪽의 길로 나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흉노와 계속 싸워왔습니다. 이제야 말로 선우와 일전을 벌이고 싶으니 저를 선두에 서게 해 주십시오. 선우와 싸우다가 죽겠습니다. ”

그때 대장군은 황제로부터 이광은 늙고 운수가 좋지 않으니 선우와 대적하게 하면 안 될 것이며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가 뜻한 대로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밀지를 받고 있었다. 그때 공손오(公孫敖)는 후의 작위를 싫고 중장군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 종군하고 있었다. 대장군 역시 공손오와 함께 선우를 대적하려고 했기 때문에 전장군 이광의 임무를 바꾼 것이었다. 이광이 알고 한사코 대장군에게 자기의 부서를 사양했지만 대장군은 결코 허락하지 않고 장사에게 명하여 문서로 만들어 이광의 막사로 보내면서 말했다.

“ 즉시 소속부서로 가서 지시를 따르라! ”

대장군에게 출전인사도 고하지 않고 길을 떠난 이광은 마음속에 커다란 분노를 품고 부서로 가서 우장군 조이기의 군사와 합류하여 동쪽의 길을 취하여 진군했다. 그러나 군대의 길을 인도하는 자가 없었음으로 길을 잃어 대장군이 정한 기일을 어기게 되었다. 대장군은 선우의 군대와 교전했으나 선우가 도망쳐 숨어버리자 잡지 못하고 돌아오다가 사막의 남쪽에서 전장군과 우장군의 군사와 만났다. 대장군을 만난 이광은 자기 군영으로 돌아갔다. 대장군이 장사를 시켜 건량(乾糧)과 탁주를 보내고 이광과 조이기에게 길을 잃은 이유를 물어보게 했다.

위청은 천자에게 이광과 조이기가 길을 잃은 곡절을 서장으로 만들어 보고하려고 했으나 이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장군이 장사를 시켜 이광의 막부로 보내 엄히 문책하여 조서를 작성토록 했다. 이광이 보고 말했다.

“ 여러 교위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길은 잃은 것은 모두 내 잘못이다. 내가 직접 가서 심문을 받도록 하겠다! ”

이광이 막부로 돌아와서 자기 부하들에게 말했다.

“ 이 광은 상투를 틀 때부터 흉노와 싸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대소 70여 회의 전투를 벌였다. 지금 다행히 대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선우의 군사들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대장군은 다시 이 광의 부서를 옮겨 먼 길을 우회하게 만들었음으로 결국은 행군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으니 이것이야 말로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란 말인가? 60 평생을 살아온 내가 일개 도필리에게 심문을 당할 수 있겠는가? ”

그리고는 즉시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다. 이광의 문무 군리들과 사졸들은 모두 통곡했다.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이광을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노인이건 청년이건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결국 우장군 혼자 형리에 넘겨져 사형을 판결 받았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이광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당호(當戶)、초(椒)、감(敢)으로 모두 낭관이 되었다. 천자와 후비 한언(韓嫣)이 놀고 있는데 나이가 어린 한언이 불손하자 당호가 한언을 때렸음으로 한언은 도망쳤다. 천자는 당호가 용기가 있다고 칭찬했다. 당호가 젊어서 죽자 천자는 이초를 대군태수로 삼았으나 모두 이광보다 먼저 죽었다. 당호에게 이릉(李陵)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광이 군중에서 자살할 때 막내아들 이감은 표기장군 곽거병의 부대에서 종군하고 있었다. 광이 죽은 다음 해에 승상의 자리에 있었던 이채는 효경제의 능원 담장 밖에 있는 빈 땅을 침범한 지은 죄로 형리에게 넘겨져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이채는 자살하여 심문을 받지 않았음으로 그의 봉국은 몰수 되었다. 이감이 교위의 신분으로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라 종군하여 흉노의 좌현왕과 싸울 때 힘껏 싸워 좌현왕의 북과 깃발을 빼앗고 적의 수급을 많이 베었다. 이감은 그 공로로 관내후에 봉해지고 2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이감은 이광의 직을 이어 낭중령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감은 그의 부친에 대한 대장군의 행위에 원한을 품고 대장군을 공격하여 부상을 입혔다. 대장군은 그 사실이 알려질 것을 꺼려해서 숨겼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사냥을 위해 옹현(雍縣)의 감천궁(甘泉宮)으로 행차한 황제를 호종한 이감을 표기장군 곽거병이 활로 쏘아 죽였다. 곽거병은 위청의 생질이다. 그때 곽거병은 황제의 총애를 받아 매우 귀한 신분이었음으로 황제는 사실을 감추고 이감은 사슴에 받쳐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곽거병은 병이 들어 죽었다. 이감의 딸은 태자의 중인(中人)31)이 되어 태자의 사랑을 받았음으로 이감의 아들은 이우(李禹)도 함께 총애를 받았으나 이를 탐했음으로 이후로 이씨 집안은 쇠락해지기 시작했다.

이당호의 아들 이릉이 자라 청년이 되자 건장감(建章監)32)으로 뽑혀 기랑(騎郞)들을 감독했다. 이릉은 활쏘기에 능하고 사졸들을 사랑했다. 천자는 이씨들이 대를 이어 장수를 배출했음으로 이릉의 직위를 올려 8백 명의 기랑을 지휘하도록 했다. 한 번은 흉노의 땅 깊숙이 2천여 리를 들어가 거연택(居延澤)33)을 지나 지형을 살폈으나 흉노의 무리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귀환했다. 황제는 이릉을 기도위(騎都尉)에 임명하고 단양(丹陽) 출신의 초나라 출신의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게 하여 그들에게 사격술을 가르쳐 주천(酒泉)과 장액(張掖)34)에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을 막게 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천한(天漢) 2년 기원전 99년 가을,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35)가 3만의 기병을 이끌고 기련산(祁連山)과 천산(天山)으로 나아가 흉노 우현왕의 군대를 공격할 때 이릉으로 하여금 휘하의 보졸로 이루어진 궁사 5천 명을 이끌고 거연의 북쪽 1천여 리를 진군하도록 했다. 이는 흉노의 군사들을 분산시켜 이사장군의 본대에 집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릉이 철수할 날이 이미 닥쳐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 선우의 8만에 달하는 기병이 이릉의 부대를 포위했다. 이릉의 군대는 5천 명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화살도 바닥이 나고 전사자도 이미 반이 넘었지만 죽인 흉노의 기병들도 만여 명이 넘었다. 한편으로 후퇴하고 한편으로는 싸움을 하면서 8일 간을 계속해서 전투를 벌였으나 거연에 당도하기에는 아직 1백여 리나 남아있었다. 흉노가 좁은 길목을 막자 이릉 군대는 양식이 떨어지고 구원병마저도 오지 않았다. 흉노가 이릉의 부대를 급하게 몰아 부치면서 항복을 권하자 이릉이 말했다. 무슨 면목으로 황제 폐하를 뵐 수 있겠는가? “

그리고는 흉노에 항복했다. 그의 군대는 거의 전멸하고 한나라에 돌아갈 수 있었던 자는 4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릉을 얻은 선우는 평소에 이씨 가문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고 또한 싸움에 임해서도 용감했음으로 그의 딸을 이릉에게 주어 사위로 삼아 귀하게 대했다. 한나라가 소식을 듣고 이릉의 모친과 처자들을 모두 처형했다. 이 일이 일어난 이후로 이씨들의 명성은 모두 사라지고 이씨 집안의 문객이었던 농서의 사족들은 모두가 치욕으로 여겼다.

태사공이 말한다.

“ 옛말에 전하기를 「자신의 몸을 바르게 하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행해지며, 자신의 몸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비록 명령을 내린다 해도따르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은 이광장군을 말하는 바가 아닌가? 내가 이장군을 본 적이 있는데 후덕한 모습이 순박한 시골사람 같았으며 말투는 눌변이었다. 그가 죽었을 때, 천하는 그를 알고 있던 모르고 있던 간에 모두 진심으로 애통했다. 그의 충실한 마음이 사대부들에게 진실로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속담에「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말이 없어도 그 밑에는 저절로 길이 생기는 법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큰 도리를 깨우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석

1) 성기(成紀)/ 지금의 감숙성 진안현(秦安縣)이다.

2) 이신(李信)/ 진나라 때 장군으로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興平縣) 괴리(槐里)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건장하고 용기가 있었다. 일찍이 군사를 이끌고 수천 리를 행군하여 연나라 태자단을 연수(衍水) 강안까지 추격했다. 연수는 지금의 요녕성 본계시(本溪市)와 요양시(遼陽市)를 지나 영구시(營口市)에서 발해에 유입되는 태자하(太子河)다. 결국 이신은 연군을 격파하고 태자단을 사로잡아 시황으로부터 현능하고 용기가 있는 장군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진시황은 그에게 20만의 대군을 주어 초나라 정벌군 대장에 임명했다. 처음에 초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기세가 오른 이신은 교만하여 적을 가볍게 보아 싸움에 대패하고 말았다. 진시황은 어쩔 수 없이 왕전을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3) 괴리(槐里)/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興平縣)이다.

4) 소관(蕭關)/ 지금의 영하성 고원현(固原縣) 동남에 있었던 옛날부터 색북(塞北)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5) 중랑(中郞)/ 지금의 영하성 고원현(固原縣) 동남에 있었던 관문으로 옛날부터 색북(塞北)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6) 무기상시(武騎常侍)/ 중랑에서 선발된 황제를 호위하는 호위기병이다.

7) 농서(隴西)/지금의 감숙성(甘肅城) 청수현(靑水縣)과 임조현(臨洮縣) 일대를 관할했던 군명으로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설치했다. 촉(蜀)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전략적 요충지이며 실크로드로 통하는 길목이다.

8) 도위(都尉)/ 전국 때 처음으로 시작되어 진과 한나라가 답습한 무관직으로 고위 무장 밑의 중급무관이었다. 진과 한나라 초에는 그 직위는 교위(校尉) 보다 낮았으며 관명은 하는 일의 성격에 따라 예를 들면 호군도위(護軍都尉), 부마도위(駙馬都尉), 강노도위(强駑都尉) 등으로 호칭되었다. 한나라 때의 봉록은 2천 석이었다. 한경제 때 군위(郡尉)의 명칭을 도위(都尉)로 바꾸고 군수의 보좌하여 군사의 일을 관장토록 했다. 한무제 때 다시 관도위(關都尉), 농도위(農都尉), 속국도위(屬國都尉) 등을 전국의 요지에 관에 설치했다. 봉록은 모두 비 2천석이었다.

9) 기랑장(騎郞將)/ 외랑장(外郞將)의 별칭으로 진나라와 한초에 황제의 호위기마부대의 기병을 관장하고 충원했다. 봉록은 비2천석이다.

10) 창읍(昌邑)/ 양나라의 성읍으로 지금의 산동성 금향현(金鄕縣) 서북쪽에 있었다.

11) 이광이 싸운 장소는 양나라 경내였음으로 이에 양왕이 이광의 공을 높이 사서 이광을 장군에 임명했으나 이는 하나라 중앙정부의 법률을 위반한 제후왕의 월권행위였다. 때문에 이광이 개선 후에 그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상을 내리지 않았다. 양왕의 월권행위로 인해 이광이 피해를 본 것이다.

12) 상곡(上谷)/ 지금의 북경시 북쪽에서 장성에 이르는 지역을 관할했던 군(郡)으로 흉노와 접촉이 잦았던 지역이었다.

13) 전속국(典屬國)/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제로 한무제 때 도위(都尉), 승(丞), 후(候), 천인(千人) 등의 속관을 두어 기구를 확장했다. 한성제(漢成帝) 원년(전 28) 대홍려(大鴻臚)에 합병되었다. 소수민족의 이민이나 귀항 및 조공 등의 일을 관장했다. 봉록은 중이천석이고 열경(列卿)의 지위였다.

14) 중귀인(中貴人)/ 궁중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환관을 말한다.

15) 위위(衛尉)/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명으로 9경의 일원이다. 봉록은 중2천석이다. 궁중의 위병을 지휘하고 궁내의 숙위를 관할했다. 한경제 초에 중대부령(中大夫令)으로 개칭했다가 후에 다시 위위로 환원시켰다.

16) 정불식(程不識)/ 서한의 명장으로 한경제 때 이광과 함께 한나라의 북쪽 변경지역의 태수로 있으면서 여러 번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부하 사병들을 매우 엄격히 다뤘음으로 사병들과 함께 생활하여 군기를 관대하게 적용했던 이광과 비교되었다.

17) 조두(刁斗)/ 군대가 행군할 때 낮에는 솥으로 사용하고 밤에는 야경을 돌며 소리를 내어 신호로 삼은 바라.

18) 태중대부(太中大夫)/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직으로 조정의 공론과 고문에 응하는 직책으로 일정한 일이 없이 황제의 명이 있을 때에 한하여 업무를 보았다. 궁중에 기거하면서 명의상으로는 낭중령(郎中令 :궁중의 광록훈(光祿勛))의 속관이었으나 실제로는 광록훈의 지휘를 받지 않고 황제의 고급 참모 역할을 했다. 봉록은 1천석으로 급사중(給事中), 시중(侍中)으로 불리며 황제의 측근에서 보좌했기 때문에 영향력과 권력이 매우 컸다.

19) 마읍(馬邑)/ 지금의 산서성 삭현(朔縣)으로 한나라 초에 한왕 신(信)이 도읍으로 삼았다가 후에 흉노에게 항복할 때 바쳐 흉노의 땅이 되었다. 후에 한나라가 한신을 토벌하고 마읍을 되찾았다.

20) 효기장군(驍騎將軍)/ 한무제 원광 2년에 설치한 잡호(雜號) 장군으로 그 직위는 경(卿)에 해당했다.

21) 호군장군/ 원광 2년에 한무제가 설치한 무관직으로 잡호장군 중 수석이었다.

22)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의 손자 관강(灌强)이다.

23) 패릉(覇陵)/ 한문제의 능으로 지금의 서안시 동쪽 교외의 백록원(白鹿原)에 조성하고 이 능의 관리를 위해 현을 설치했다.

24) 재관장군(材官將軍)/ 한무제가 임시로 설치한 잡호장군의 하나로 활쏘기가 특기인 군사로 편성된 특종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이다.

25) 한안국(韓安國)/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27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이며 장군이다. 자는 장유(长孺)고 지금의 하남성 임여현(臨汝縣)인 양국(梁國) 성안(成安) 출신이다. 처음에 한경제의 동모제인 양효왕 유무(劉武)에게 출사하여 중대부가 되었다. 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란이 일어나자 그는 장우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힘껏 싸워 반군이 서쪽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았다. 계속해서 양나라의 내사(內史)로 전임되었다가 무제 건원(建元) 연간에 경사에 불려가 북지군의 도위(都尉)가 되었다.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대사농(大司農)이 되었다가 어사대부로 승차했다. 원광(元光) 2년 기원전 133년 군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마읍에서 흉노를 무찔렀다. 원삭(元朔) 2년 기원전 127년 재관장군(材官將軍)이 되어 어양(漁陽)에 주둔하며 흉노를 막았다. 일찍이 흉노의 포로를 잡았음으로 흉노는 멀리 도망가 숨었다고 생각하여 상서를 올려 어양의 둔전병들을 해산시키겠다고 청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흉노가 대거 상곡(上谷)과 어양을 침입하여 한군이 크게 패했다. 후에 우북평(右北平)으로 임지를 옮겼다가 울분에 차서 죽었다. 그에 관한 열전의 제목을 한장유로 한 것은 사마천이 그의 스승 공안국의 이름을 휘했기 때문이다. (열전48.한안국 참조)

26) 석건(石建)/ 열전43. 만석장숙열전 참조

27) 후장군(後將軍)/ 고대 중국의 군대 편제는 중군, 좌군, 우군 등의 삼군으로 구성되어 중군대장이 원수가 되어 전체 군사를 지휘하고 좌군과 우군은 그를 보좌했다. 후에 좌우 대신 전후로 바뀌었다. 직위는 상경(上卿)과 같고 금인자수(金印紫綬)를 사용했다.

28) 경거장군(輕車將軍)/ 한무제가 설치한 잡호장군의 하나로 전차부대를 통솔했다. 직위는 열경(列卿)에 준했다.

29) 조이기(趙食其)/ 서한의 장군으로 지금의 섬서성 요현(耀縣)인 대우(祋祤) 출신이다. 무제 때 주작도위(主爵都尉)에 임명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 정벌전에 참가하여 세운 군공으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원수 4년 다시 우장군의 신분으로 위청을 따라 종군하여 정양(定襄)에서 출격했을 때 길을 잃었음으로 군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속죄금을 내고 후의 작위를 잃고 서인이 되었다.

30) 공손오(公孫敖)/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93년에 죽은 서한의 장군이다. 지금의 감숙성 합수현(合水縣)인 북지군(北地郡) 의거(義渠)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기 시작해 기마술과 사격술에 뛰어났다. 한경제 때 양가의 자제 신분으로 흉노정벌전에 참전하여 용기와 무예를 드러냈음으로 궁중으로 불려가 기랑(騎郞)이 되었다. 후에 한무제를 모시다가 위청(衛靑)과 친구가 되었다. 위청이 평양공주의 가인들에게 잡혀가 감옥에 갇혀 죽게 되었을 때 구한 적도 있었다. 관직이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올랐다. 원광(元光) 6년(전129년) 기장군(騎將軍)에 임명되어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청과 함께 길을 나누어 흉노를 공격했으나 휘하의 군졸들을 대부분 잃었다.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무용을 발휘하여 힘껏 싸운 것이 인정되어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원삭(元朔) 5년 (전124) 교위로 기용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 종군하여 흉노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합기후(合騎侯)에 봉해졌다. 다음 해에 중장군(中將軍)이 되어 위청을 따라 흉노를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원수(元狩) 2년 (전121년) 곽거병과 길을 나누어 흉노를 공격하기로 했으나 중도에 길을 잃어 곽거병과의 약속한 기일을 지키지 못해 참수형의 판결을 받았다. 다시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다시 얼마 후에 교외로 기용되어 태초(太初) 원년(전 104년) 인우장군(因杅將軍)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음산(陰山)의 북쪽에 수항성(受降城)을 건설했다. 천한(天漢) 4년(전97) 이광리(李廣利)와 함께 길을 나누어 흉노를 치다가 흉노의 좌현황의 주력부대를 만나 많은 군사를 잃었음으로 참수형을 선고 받고 옥에 갇혔으나 자살을 위장하여 도망쳐 민가에 숨어 살다가 발각되어 태시(太始) 4년(전 93년)에 사형에 처해졌다.

31) 중인(中人)/ 위호(位號)를 받지 못한 궁중의 희첩이다. 당시의 태자는 후에 일어난 무고(巫蠱)의 란으로 살해된 유거(劉據)였다.

32) 건장감(建章監)/ 건장궁(建章宮)의 우림군(羽林軍)의 소속인 기랑(騎郞) 들을 감독하는 관리다. 건장궁은 무제 때 장안성 내의 미앙궁 서쪽의 맞은편에 건립한 궁전이다.

33) 거연택(居延澤)/ 지금의 내몽고 최서단의 액제납기(額濟納旗) 북쪽에 있었던 호수 이름으로 거연수(居延水)의 물이 흘러들어가 형성된 데서 얻은 이름이다.

34) 주천(酒泉)과 장액(張掖)/ 모두 감숙성 내의 성읍이다. 한나라는 실크로도의 무역로를 지키기 위해 감숙성의 하서회랑(河西回廊)에 주천군, 장액군, 돈황군 등을 설치해 운영했다.

35)이광리(李廣利)/ 궁정의 악인(樂人)인으로 한무제의 총애를 받은 이부인(李夫人)의 오빠로 이부인이 창읍왕(昌邑王) 유박(劉髆)을 낳자 장군이 되었다. BC 104년 장건(張騫)의 원정으로 사정이 알려진 서역(西域) 대완(大宛)의 이사성(貳師城)을 공략하여 한혈마(汗血馬)를 얻어, 이사장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후 4년간 고전하면서도 대완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서역 제국과의 통상의 길을 열어 그 공로로 해서후(海西侯)에 봉하여졌다. 그후 이부인이 죽은 후에 흉노(匈奴)와의 싸움에 패한 후 항복했다가 선우에 의해 살해당했다.

목록
8826
[일반] 급정열전(汲.鄭列傳)60

1329. 正衣冠立于朝廷(정의관립우조정), 의관을 바르게하고 조정에 서면 1330. 而群臣莫敢言浮說(이군신막감언부설), 여러 신료들이 이를 보고
운영자 10-10-04
[일반] 순리열전(循吏列傳)59

열전59 循吏(순리) 1324. 奉法循理之吏(봉법둔리지리), 법을 받들어 도리를 밝히는 관리들은 1325. 不伐功矜能(불벌공긍능), 자기들
운영자 10-10-04
[일반]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58

1319. 黥布叛逆(경포반역), 경포가 반역을 일으키자 1320. 子長國之(자장국지), 고조의 아들 유장(劉長)이 그 땅을 봉지로 삼고 13 (2)
운영자 10-10-04
[일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57

열전57. 사마상여(司馬相如) 1313. <子虛>之事(<자허>지사) <자허부(子虛賦)>에 실린 일과 1314. <大人>賦說(<
운영자 10-08-27
[일반]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56

열전56. 서남이(西南夷) 1310. 唐蒙使略通夜郞(당몽사략농야랑) 당몽(唐蒙)을 사자로 보내 야랑(夜郞) 국과 통호하고 1311. 而邛
운영자 10-08-26
[일반] 조선열전(朝鮮列傳) 55

열전55. 조선(朝鮮) 1. 朝鮮王滿者(조선왕만자), 조선왕 위만은 ▶조선 : 사기정의(史記正義)에 고려의 도읍은 평양성(平壤城)이며, 평양
운영자 10-08-25
[일반] 동월열전(東越列傳) 54

열전54. 동월(東越) 1300. 吳之叛逆(오지반역), 오나라가 반역을 일으키자 1301. 甌人斬濞(와인참비), 구인들은 오왕 비의
운영자 10-08-25
[일반] 남월열전(南越列傳) 53

열전53. 남월(南越) 1296. 漢旣平中國(한기평중국), 한나라가 중국을 평정하자 1297. 而佗能集楊越以保南藩(이타능집양월이보남
운영자 10-08-25
[일반]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52.공손홍주보언(公孫弘主父偃)

열전52. 公孫弘主父偃(공손홍주보언) 1293. 大臣宗室以侈靡相高(대신종실이치미상고), 조정대신들이건 황실의 종친들이건 서로 다투어 사치
운영자 10-08-24
[일반] 위장군표기(衛將軍驃騎列傳) 51. 衛靑·霍去病(위청곽거병)

열전51. 衛靑·霍去病(위청곽거병) 1287. 直曲塞(직곡색), 구불구불한 변새의 길을 똑바르게 했으며 1288. 廣河南(광하남), 하남의
운영자 10-08-23
[일반] 흉노열전(匈奴列傳) 50

열전50. 흉노(匈奴) 1282. 自三代以來(자삼대이래), 삼대이래로 1283. 匈奴常爲中國患害(흉노상위중국환해); 흉노는 항상 중국에
운영자 10-08-23
[일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49. 이광(李廣)

열전49. 李廣(이광) 1277. 勇于當敵(용우당적), 적을 만나면 용감했고 1278. 仁愛士卒(인애사졸), 휘하의 군졸들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랑
운영자 10-06-16
[일반]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48. 한안국(韓安國)

열전48. 한안국(韓安國) 1274. 智足以應近世之變(지족이응근세지변), 지혜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았고 1275. 寬足用以得人(관족용이
운영자 10-06-16
[일반]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47. 두영과(竇嬰) 전분(田蚡)

열전47. 두영전분(竇嬰田蚡) 1269. 吳楚爲亂(오초위란), 오초가 연합하여 란을 일으켰을 때 1270. 宗屬唯嬰賢而喜士(종속유
운영자 10-06-15
[일반] 오왕비열전(吳王劉濞列傳) 46

열전46. 吳王劉濞(오왕유비) 오왕(吳王) 비(濞)는 고제(高帝)의 형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고제 7년 기원전 200년, 천하를 평정한 고
운영자 10-06-15
[처음][이전][1] 2 [3][4][5][6][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