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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월열전(南越列傳)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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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53. 남월(南越)



1296. 漢旣平中國(한기평중국),

한나라가 중국을 평정하자


1297. 而佗能集楊越以保南藩(이타능집양월이보남번),

조타(趙佗)는 양월(楊越)에 흩어진 세력들을 능히 수습할 수 있어
이를 기반으로 한나라의 번국(藩國)이 되어



1298. 納貢職(납공직).

종실에 공물을 바쳤다.



1299. 作<南越列傳>第五十三(작<남월열전>제오십삼)

이에 <남월열전>제53을 지었다.



남월왕(南越王) 위타(尉佗)는 진정(真定)① 출신이다. 성은 조(趙)다. 진나라가 천하를 병탄할 때 양월(楊越)②을 공략하여 평정하고 계림(桂林), 남해(南海), 상(象) 등의 세 개의 군을 설치한 후에 죄를 지은 백성들을 이주시켜 월인들과 섞여 살게 한지 13년이 되는 해였다. 위타는 진나라 때 남해군 관하 용천(龍川)③의 현령(縣令)이었다. 이윽고 진시황이 죽고 이세황제가 뒤를 이었을 때 남해의 위(尉) 임호(任囂)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용천령 조타를 불러 말했다.

「내가 들으니 진승 등이 란을 일으켰으나 무도한 진나라로 인하여 천하가 고통을 당하자 항우(項羽), 유방(劉邦),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등이 주군(州郡)의 백성들을 모으고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다투고 있다고 하오. 이에 중원은 혼란에 빠져 언제 안정될지 알 수 없고 호걸들은 진나라를 배반하여 서로 자립하여 왕을 칭하고 있소. 이곳 남해는 중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도적들이 이곳까지 쳐들어 올까 나는 걱정하고 있소. 내가 군사를 내어 중원과 통하는 길을 끊어 제후들의 변란에 스스로 대비하려고 했으나 불운하게도 내 병이 심하게 되었소. 이곳 반우(番禺)는 험준한 산을 등지고 남해의 바다로 막혀 있으며 동서로 수천 리나 뻗쳐있을 뿐만 아니라 중원의 사람들이 서로 돕고 있어 한 주의 중심지로 나라를 세울 수 있소. 군내의 높은 직위의 관리들 중에 함께 의논할만한 사람이 없기에 공을 불러 이 말을 하게 되었소.」

임호는 즉시 조타를 남해군의 위에 임명하는 문서를 만들어 그로 하여금 군의 직무를 맡아보게 했다. 이윽고 임호가 죽자 조타는 횡포(橫浦)、양산(陽山)、황계관(湟谿關)④에 격문을 돌려 말했다.

「중원의 도적떼들이 쳐들어오려고 한다. 서둘러 길을 끊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지키도록 하라!」

그리고는 서서히 법령을 이용하여 진나라가 임명한 군내의 높은 관리들을 죽이고 자기 사람을 대리하게 했다. 이윽고 진나라가 파멸하자 조타는 이웃하는 계림(桂林)과 상(象) 두 군을 병합하고 스스로 남월왕에 올라 무왕(武王)이라고 호칭했다. 그리고 항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천하를 안정시킨 고제(高帝)가 중국의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여 조타를 토벌하여 주살하지 않았다. 한나라가 선지 11년 되는 해인 기원전 196년, 한나라 조정은 육가(陸賈)를 사자로 보내 조타를 남월왕으로 봉하고 부절을 쪼개서 나누어 사절을 교환했으며 백월의 백성들을 한 데 모아 화목하게 만들어 한나라의 남쪽 변경이 침범을 받지 않도록 했다. 남월은 한나라의 장사국(長沙國)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고후(高后) 때 한나라의 관리들이 남월의 철기를 관시(關市)⑤에서 사고팔지 못하도록 상소했다. 소식을 들은 조타가 말했다.

「고제(高帝)가 나를 남월왕으로 세우고 사절을 통하고 물자의 교역을 허락했다. 오늘 고후가 신하들의 참소하는 말을 듣고 우리를 만이로 차별하여 철기와 물자의 교역을 끊어버렸다. 이것은 장사왕(長沙王)의 계략이 틀림없다. 중국의 힘을 빌려 우리 남월을 격멸하고 그 땅을 차지하여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는 야심 때문이다.」

그래서 조타는 즉시 자신을 남월무제(南越武帝)라고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장사국의 변경 고을을 공격하여 몇 개의 현을 함락시키고 물러갔다. 고후가 장군 융려후(隆慮侯) 조(竈)⑥를 장군으로 삼아 남월을 정벌하도록 했으나 마침 더위와 우기를 만나 사졸들 사이에 큰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오령(五嶺)⑦을 넘어 남월의 경내로 쳐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일 년 후인 기원전 180년에 고후가 죽었음으로 군사들은 물러갔다. 이에 그 기회를 이용한 조타가 군사를 내어 한나라의 변경을 위협하고 재물을 내어 민월(閩越), 서구(西甌)⑧, 낙월(駱越)⑨ 등을 회유하여 복속시켜 강역을 만여 리나 넓혔다. 이어서 천자만이 타고 다니는 황옥(黃屋)⑩에 좌독(左纛)⑪을 꽂고 다니며 자기의 말을 제(制)라고 하면서 중국과 나란히 했다.

이윽고 효문제 원년 기원전 180년, 처음으로 천하가 진무(鎭撫)되자 제후와 주변의 이족들에게 사자를 보내 효문제가 대(代)에서 들어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뜻을 알리고 성덕(盛德)을 깨우치도록 했다. 이어서 진정(眞定)에 있는 위타의 부모 무덤에 민호(民戶)를 설치하여 해마다 제사를 받들도록 하고 그의 종형제들을 불러 관직에 임명하여 높이고 후한 상급을 하사하여 총애한다는 뜻을 밝힌 효문제가 승상 진평 등에게 남월에 사자로 보낼만한 사람을 천거하라고 명했다. 진평이 호치(好畤) 출신의 육가(陸賈)가 선제 때 남월로 사자로 다녀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황제가 육가를 불러 태중대부로 삼은 후에 남월에 사자로 보내 위타가 스스로 황제가 된 일과 그 후로는 한 사람의 사절도 보내지 않은 행위를 꾸짖도록 했다. 이윽고 육가가 남월에 당도하자 위타가 매우 두려워하며 글로 써서 사죄했다. 서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만이의 대군장인 신 위타는 옛날 고후께서 남월을 차별하신 일은 장사왕의 참소 때문이라고 의심했었습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소문에 신 조타의 종족들을 모두 주살하고 선조들의 분묘를 파헤쳤다고 해서 이에 자포자기하여 장사국의 변경을 침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곳 남방은 지대가 낮고 습한 지역으로 만이 사이에 있어 그 중 동월과 민월에서는 천 명의 군장에 불과한 자도 왕이라고 칭하고 서구(西甌)나 락나(駱裸) 국까지도 역시 왕호를 칭하고 있습니다. 노신이 망녕되게 제호를 칭한 것은 스스로 즐겨서 한 것 뿐인데 어찌 감히 이 일을 천왕(天王)에게 전하여 알 수 있도록 하겠습니까?」

남월왕은 육가를 만나서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고 영원히 번신(藩臣)이 되어 조공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남월왕이 나라 안에 명을 내렸다.

「나는 듣기를 두 사람의 영웅은 동시에 설 수 없고 두 사람의 현능한 자는 세상에 나오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황제는 현능한 천자다. 이후로는 내가 제호(帝號)를 버리고 제(制)라는 칭호와 황옥 및 좌독을 버리겠다.」

육가가 돌아와 보고하자 효문제는 크게 기뻐했다. 이어서 효경제 때 신하를 칭하여 사자를 보내 조현을 올렸다. 그러나 남월은 여전히 자기 본국에서는 조정 몰래 제호를 사용했으며, 조정에 사자를 보낼 때만 제후들처럼 칭왕했다. 남월왕 위타는 건원(建元) 4년, 기원전 137년 (한무제 4년)에 죽었다.


위타의 손자 호(胡)가 남월왕에 올랐다. 이때 민월왕 영(郢)이 군사를 일으켜 남월의 변방을 침입했다. 이에 호가 사자를 보내 황제에게 상소했다.

「민월과 남월은 한나라의 번신임으로 자기 멋대로 군사를 내어 서로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민월이 군사를 일으켜 신을 공격했으나 신은 감히 군사를 동원할 수 없어 오로지 천자의 조명만을 받들 뿐입니다.」

그래서 천자는 여러 번 남월이 의를 지켜 직분과 약속을 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군사를 일으켜 두 장군을 파견하여 민월을 토벌하게 했다. 한나라의 군대가 미처 남령(南嶺)을 넘기 전에 민월왕의 동생 여선(餘善)이 영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이에 한나라 군대는 물러갔다.


천자가 장조(莊助)⑫를 사자로 보내 남월왕에게 황제가 행한 민월의 일을 전하게 했다. 남월왕 호가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가 전한 말을 받들었다.

「천자께서 신을 위해 군사를 일으켜 민월을 토벌했으니 죽어도 그 은혜를 갚지 못할 것입니다!」

남월왕은 태자 영(제嬰齊)를 한나라에 보내 숙위(宿衛)⑬하게 하고 장조를 향해 말했다.

「나라가 새롭게 외적의 침략을 받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사자께서 먼저 가시면 이 호는 밤낮으로 행장을 준비하여 머지않은 시일 내에 입조하여 천자께 조현을 올리겠습니다.」

엄조가 떠난 후에 대신들이 남월왕에게 간했다.

「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민월왕 영(郢)을 주살한 일은 우리 남월에게도 두려운 일입니다. 이에 예전에 선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자를 받들기를 예를 잃으면 안 되고 또한 그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입조하여 조현을 올리는 일도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입조해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라가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호는 병을 핑계하고 결국은 입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10년이 되는 해에 호가 중병에 걸리자 태자 영제(嬰齊)가 귀국을 요청했다. 이윽고 호가 죽자 시호를 문왕(文王)이라고 했다.


문왕의 뒤를 이어 남월왕의 자리에 오른 영제는 그의 증조부 무제(武帝)가 사용했던 옥새를 감추어버리고 제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영제가 입조하여 장안에서 숙위로 있을 때 한단의 규씨(樛氏) 딸을 취하여 아들 흥(興)을 얻었다. 영제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자 상소를 올려 규씨의 딸을 왕후로 세우고 흥을 세자로 세우겠다고 청했다. 한나라 조정은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영제를 설득하여 한나라에 들어와 조현을 행하기를 넌지시 권유했다. 그러나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일을 즐겼고 행동을 멋대로 행해 온 영제는 자신이 입조하게 되면 한나라 법에 따라 제후들처럼 처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한사코 병을 칭하고 결국은 조현을 올리지 않았다. 영제는 그의 아들 차공(次公)을 입조케 하여 숙위하게 했다. 이윽고 영제가 죽자 시호를 명왕(明王)이라 했다.


태자 흥이 뒤를 이어 남월왕에 오르고 그의 모친은 태후가 되었다.  태후가 미처 영제의 희첩이 되기 전에 패릉(覇陵) 사람 안국소계(安國少季)와 정을 통한 적이 있었다. 이윽고 영제가 죽은 후에, 원정 4년기원전 113년(한무제 재위 28년)에 한나라가 안국소계를 사자로 보내 남월왕과 왕태후를 한나라의 제후들처럼 입조하도록 회유하게 했다. 언변이 좋은 간대부(諫大夫)⑭ 종군(終軍)⑮ 등을 수행시켜 그 내용을 선포하고, 용사 위신(魏臣) 등에게는 그 부족한 점을 보완하게 했다. 위위(衛尉) 노박덕(路博德)⑯은 군대를 이끌고 계양(桂陽)⑰에 주둔하며 사자를 기다렸다. 남월왕은 나이가 어렸고 태후는 중국인으로써 옛날 정을 통했던 안국소계가 다시 사자로 왔음으로 그와 다시 몰래 정을 통했다. 남월의 국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대부분이 태후를 싫어하자 란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걱정한 태후 역시 한나라의 힘을 의지하려는 생각으로 여러 번 왕과 신하들에게 한나라에 신복하라고 권했다. 남월이 사절을 보내 상서를 올려 한나라의 제후들과 같이 신하 되기를 청하고 3년에 한 번씩 조현을 올리겠으니 변경의 관문을 없애달라고 청했다. 이에 천자가 허락하고 남월의 승상 여가(呂嘉)에게는 은(銀)으로 만든 인장과 그 밖에 내사(內史), 중위(中尉), 태부(太傅) 등의 인장을 만들어 보내고 나머지 관직에 대해서는 스스로 알아서 만들도록 했다. 예전의 경형(黥刑)과 의형(劓刑)을 폐지하고 한나라 법을 채택하여 한나라 제후국과 같은 지위가 되었다. 한나라 사자는 월나라에 계속 머무르면서 백성들을 진무하게 하고 왕와 왕태후는 예물을 후하게 갖춘 후에 행장을 채비하여 한나라에 입조하여 조현을 행하려고 했다.


남월의 재상 여가(呂嘉)는 나이가 많이 먹도록 세 왕을 오래 모시고 그의 종족들 중 출사하여 높은 관리만 된 자만해도 70여 명에 달했다. 여씨 종족들 중 남자는 모두 왕녀들과 결혼했고 처녀들은 모두 왕실의 종실 형제들에게 시집갔으며 창오(蒼梧)⑱의 진왕(秦王)과도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남월국 안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남월 사람들이 믿고 따르며 그를 위해 눈과 귀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여가는 왕보다 백성들의 마음을 더 많이 얻고 있었다. 남월왕이 한나라 조정에 상서를 올릴 때마다 여러 번 그러지 말라고 간했으나 왕은 결코 말을 듣지 않았음으로 여가는 결국 마음속에 반심을 품기 시작하고 병을 핑계로 한나라 사자를 만나지 않았다. 한나라가 사절들이 여가의 태도를 눈치챘으나 분위기가 죽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월왕과 태후 역시 여가가 먼저 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술자리를 벌려 한나라 사절들의 권세에 의지하여 여가와 그 무리들을 주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나라 사신들은 서쪽, 태후는 북쪽, 왕은 남쪽, 재상 여가와 대신들은 모두 동쪽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여가의 동생은 장군의 신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궁궐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술잔이 몇 번 돌자 태후가 여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남월이 한나라에 복속하는 것은 나라의 이익이 되는 일이오, 상국은 어찌하여 그 일이 이롭지 않다고 싫어하시오?」

왕태후는 자기의 말이 한나라 사자들을 격노케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자들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서로 미루며 아무도 감히 나서지 않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여가가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연회장에서 나갔다. 태후가 노하여 창을 들고 여가의 뒤를 쫓아가 그를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왕이 태후를 막았다. 여가가 궁궐 밖으로 나가 그의 동생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을 나누어 거느리고 자기 집으로 가서 병을 칭하고 왕과 사자를 만나려고 하지 않고 대신들과 음모를 꾸며 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왕은 평소에 여가를 죽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여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달 동안이나 란을 감행하지 않았다. 태후는 자신의 음행으로 인하여 국인들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여가 등을 주살하고 싶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해 실행할 수 없었다.

 천자는 여가가 왕의 명을 받들지 않고 왕과 왕태후는 세가 약하고 고립되어 여가를 복종시킬 수 없으며 사자들은 겁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왕과 태후가 이미 한나라에 복속했음으로 여가 혼자서 란을 일으킨다 해도 군사를 움직일만한 일이 못된다고 생각해서 장삼(莊參)에게 2천 명의 군사를 주어 남월에 사절로 보내려고 했다. 장삼이 황제에게 말했다.

「친선을 위해 사자로 갈 것 같으면 몇 사람이면 족하고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갈 것 같으면 2천 명의 군사로는 부족합니다.」

장삼이 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자 천자는 장삼을 그만두게 했다. 겹(郟)⑲ 땅의 장사 출신으로 제북왕(濟北王)의 승상을 지낸 한천추(韓千秋)가 강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잘 것 없는 월나라에 더욱이 왕과 태후가 내응하고 있는데 단지 재상 여가 혼자만 반대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용사 2백 명만 딸려주시면 반드시 여가의 목을 베어 폐하께 보답하겠습니다.」

그래서 천자는 한천추와 태후의 동생 규락(樛樂)에게 2천의 군사를 주어 남월국으로 들어가게 했다. 한천추와 그 일행이 월나라의 경계로 들어가자 여가가 즉시 반란을 일으켜 나라 안에 격문을 돌렸다.

「왕은 어리고 원래 중국 태생으로 중국의 사신과 간통을 저지르고 있는 태후는 오로지 한나라에 복속하려는 마음뿐으로 선왕의 보기(寶器)들을 모조리 지참하고 천자에게 바쳐 스스로 아첨하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가 노예로 팔려고 한다. 태후 자신은 한 때의 이익을 취해 스스로 몸을 빼려고 할 뿐 조씨들의 사직을 돌보아 대대손손을 위한 장구한 계책을 세울 생각이 없다.」

여가는 즉시 그의 동생과 군사를 일으켜 왕과 태후, 그리고 한나라의 사절들을 살해했다. 한편으로는 사자를 창오의 진왕과 주변의 여러 군에 보내 명왕(明王)의 월나라 여인이 낳은 큰 아들 술양후(術陽侯) 건덕(建德)을 왕으로 세웠다. 그때 월나라의 경계에 진입한 한천추와 그의 군사들이 몇 개의 작은 고을을 깨뜨리자 남월은 즉시 길을 열어주고 식량을 공급했다. 이윽고 한천추의 군사들이 반우에서 40리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남월의 군사들이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리고는 한나라의 사절의 부절을 함에다 넣고 봉한 후에 요새에다 감추어 두고 거짓으로 한나라에 사죄하는 척하며 군사를 내어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 그러자 천자가 말했다.

「한천추는 비록 일을 성사시켜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용감한 군인이었다.」

천자는 천추의 아들 한연년(韓延年)을 성안후(成安侯)에 봉하고 규락은 그 누이가 왕태후의 신분으로 앞장서서 한나라에 복속되기를 원했음으로 그의 아들 규광덕(樛廣德)을 용항후(龍亢侯)에 봉했다. 황제가 사면령을 내리며 말했다.

「천자가 미약하여 제후들이 정사에 힘써 적당들을 토발하지 않은 신하들을 꾸짖지 못하고 있다. 작금에 이르러 남월의 여가와 건덕이 반란을 일으키고 자립하여 태연히 왕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에 령을 내리니 죄인들과 강회 이남의 수군 10만으로 남월을 토벌하라!」

원정 5년 기원전 112년(한무제 재위 29년) 가을, 위위(衛尉) 노박덕(路博德)이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계양(桂陽)⑳에서 나아가 회수(匯水)㉑의 강변을 따라 진군하고 주작도위(主爵都尉)㉒ 양복(楊僕)㉓은 누선장군(樓船將軍)이 되어 예장(豫章)㉔에서 출격하여 횡포관(橫浦關)㉕으로 진군했다. 옛날 한나라에 귀순하여 후에 봉해진 월인 두 사람은 과선장군(戈船將軍)과 하려장군(下厲將軍)이 되어 영릉(零陵)에서 출격하여 한 사람은 이수(離水)의 순류를 타고 진격하고 한 사람은 창오(槍梧)로 나아가게 했다. 다시 치의후(馳義侯)에게는 파촉(巴蜀)의 죄인들과 야량(夜郎)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장가강(牂柯江)을 따라 내려가 반우에서 모이기로 했다.

원정 6년 기원전 111년 루선장군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먼서 심협(尋陜)㉖을 함락시키고 남하하여 반우로 들어가는 관문 석문(石門)㉗을 깨뜨리고 남월의 군량과 전선을 노획했다. 이에 승세를 타고 앞으로 진군하여 남월의 선봉부대를 무찌르고 수만 명의 군졸들과 함께 복파장군의 부대를 기다렸다. 복파장군의 군사들은 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행군해야 했던 거리가 멀었음으로 약속한 기일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루선장군의 부대와 만났을 때는 휘하의 군졸들은 천여 명에 불과했다. 두 장군은 곧이어 반우성을 향해 진격했다. 루선장군의 부대가 선두에 서서 반우로 진군하자 건덕과 여가가 함께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루선장군이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여 성의 동남에 주둔했고 뒤따라온 복파장군은 성의 서북에 주둔했다. 이윽고 날이 저물자 루선장군이 남월의 군사를 패주시키고 화공을 행하여 반우성을 불태웠다. 평소에 복파장군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던 남월 사람들은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그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복파장군이 영채를 세우고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투항자들에게는 한나라가 임명하는 관직의 인장을 주고 다시 그들을 성안으로 보내 다른 사람들을 항복시켜 데려오게 했다. 루선장군은 있는 힘을 다하여 적군을 화공으로 공격하여 그들을 복파장군의 진영으로 몰아부쳤다. 새벽 무렵 성안의 적병들은 모두 복파장군에게 항복했다. 여가와 건덕은 한밤중에 이미 그의 부하 수백 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서쪽으로 달아났다. 복파장군이 투항한 남월의 귀족들을 통해 여가가 달아난 곳을 알고 사람을 보태 그의 뒤를 추격하도록 했다. 그 결과 교위 사마소홍(司馬蘇弘)은 건덕을 사로잡아 해상후(海常侯)에 봉해졌고 남월의 랑관(郞官) 도계(都稽)는 여가를 붙잡아 임채후(臨蔡侯)에 봉해졌다.


한편 원래 남월왕과 동성인 창오왕 조광(趙光)은 한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남월의 게양령(揭陽令) 정(定)과 함께 스스로 한나라에 항복했다. 또한 남월의 계림감(桂林監) 거옹(居翁)은 구월(甌越)과 락월(駱越) 두 종족을 설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게 했음으로 후의 작위를 얻었다. 과선장군과 하려장군의 군사들과 야랑에서 징발한 치의후(馳義侯)의 군사들이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남월은 이미 평정되었다. 한나라는 남월의 땅에 아홉 개의 군을 설치했다㉘. 복파장군은 봉지에 식읍을 늘렸고 루선장군은 반우성을 함락시킨 공을 세웠음으로 장량후(將梁侯)에 봉해졌다.

남월은 이로써 위타가 나라를 세운 이래 5세 93년 만에 망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위타(尉佗)가 남월의 왕이 될 수 있었음은 원래 임효(任囂) 때문이었다. 한나라가 일어서서 천하를 막 평정했을 때는 제후의 반열에 섰다. 융려후(隆廬侯)가 남월을 정벌에 나섰다가 전염병으로 물러가자 위타는 더욱 교만해졌다. 구월과 낙월이 서로 공격하자 남월이 동요되었다. 한나라 군사들이 변경에 이르렀음으로 영제(嬰齊)는 입조하여 조현을 올렸다. 그 후에 나라가 망한 원인은 모두 왕후 규씨 때문이었다. 여가(呂嘉)는 작은 충성심으로 한나라에 반기를 듬으로써 위타의 후사가 끊어지게 만들었다. 루선장군은 욕심이 많아 태만하고 오만하게 굴었기 때문에 미혹에 빠져들었고 복파장군은 곤궁한 처지에 빠졌지만 지혜롭고 사려깊은 행동으로 군사들의 수를 늘려 화를 복으로 만들었다. 일의 성공과 실패는 마치 먹줄을 긋는 것과 같았다.


- 남월열전 끝 -



주석

1) 진정(眞定)/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 경내다.

2) 양월(楊越)/ 양월(揚越) 혹은 양오(楊奧)이라고도 하며 전국시대부터 위진(魏晉) 시기까지 월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로써 원래 양주(揚州)의 관할구역에서 거주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3) 용천(龍川)/ 지금의 광동성 용천현 서북이다.

4) 횡포(橫浦)/ 지금의 광동성 북쪽의 남웅시(南雄市) 부근으로 강서성과의 접경지역、양산(陽山)/ 지금의 광동성 북쪽의 양산시로 호남성과의 접경지역、황계관(湟谿關)/ 지금의 광동성 광주시 북쪽 100키로의 영덕시(英德市)로 당시 남월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5) 관시(關市)/ 한나라 때 이민족들과 교역을 행하기 위해 변방으로 통하는 관문에 설치한 시장을 말한다.

6) 조(竈)/ 성은 주(周)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63년에 죽은 서한의 창업공신이다. 지금의 하남성 영성현(永城縣)인 탕(碭) 출신으로 진2세 2년 기원전 208년, 유방이 탕에 들렸을 때 그의 사졸로 입대했다. 유방이 무관을 통하여 진나라에 들어가 멸할 때 종군하여 연오(連敖)로 승진하고 다시 유방을 따라 한중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진나라로 나와 삼진을 평정할 때 함께 종군하여 공을 세웠음으로 장피도위(長鈹都尉)가 되었다. 후에 해하에서 항우를 멸하는 데 공을 세워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융려후(隆慮侯)에 봉해졌다. 고후 8년 기원전 180년, 남월왕 조타(趙佗)가 장사국(長沙國)의 변경을 공격하자 장군이 되어 남월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때가 여름철이고 우기까지 겹쳐 군영에 전염병이 돌았음으로 남월을 공격하지 못하고 철군했다. 한문제 전원(前元) 2년 기원전 166년, 흉노의 노상선우(老上單于)가 14만에 달하는 기병을 이끌고 장성을 넘어 장안을 향해 쳐들어오자 농서장군(隴西將軍)으로 대장군 장상여(張相如)에 속해 흉노군에 반격을 가해 장성 밖으로 몰아냈다. 한문제 후원 원년 기원전 163년에 죽었다.

7) 오령(五嶺)/ 광동성, 광서성, 호남성, 강서성, 등의 변경을 이루는 다섯 개의 큰 산맥을 합칭하는 지명으로 즉 대수령(大廋嶺), 시안령(始安嶺), 임하령(臨賀嶺), 계양령(桂陽嶺), 게양령(揭陽嶺) 등을 말한다.

8) 서구(西甌)/ 고대 중국의 남방에 거주하던 월족의 지족이다. 진나라 때 영남(嶺南)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살았다.

9) 낙월(駱越)/ 낙월(雒)이라고도 하며 고대 중국의 광동, 광서, 해남도, 운남 및 월남의 북부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하여 살았던 백월(百越)의 일족이다. 락(駱)은 수경(水耕)을 의미하는 말로 농업을 위주로 살았다. 전국시대부터 광서에 살었던 락월인들을 서구(西甌)라고 칭하고 옛문헌에는 락월과 서구를 함께 칭했다가 후에 남월로 통합되었다

10) 황옥(黃屋)/ 노란 비단으로 덮개를 씌운 수레로 황제가 누리는 의전의 일종이다.

11) 좌독(左纛)/ 천자의 수레 좌측이 꽂는 쇠꼬리로 만든 깃발로 천자의 의전용 장식이다.

12) 장조(莊助)/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22년에 죽은 서한의 관리이며 사부가(辭賦家)로 후에 한명제(漢明帝)의 이름 장(莊)을 휘(諱)하여 성을 엄으로 바꾸어 엄조(嚴助)라고 불렀다. 회계(會稽) 오현(吳縣) 출신이다. 사부가 엄기(嚴忌)의 아들로 한무제 원년 기원전 140년 책문으로 현량(賢良)을 뽑을 때 무제의 눈에 띄어 중대부로 발탁되었다. 조정의 공론을 주도하여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3년 민월(閩越)이 동구(東甌)를 쳐들어가 포위하자 그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회계의 군사를 발하여 바다로 나아가 동구를 구했다. 6년 남월을 안무하기 위해 남월에 들어가 남월왕을 설득하여 그의 태자를 데리고 와서 황제에게 조현을 올리게 했다. 얼마 후에 회계태수가 되었다가 다시 시중(侍中)이 되어 황제의 측근에서 모시며 부(賦)와 송(頌) 수 십 편을 지었다.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 122년 회남왕과 형산왕이 모반을 획책했을 평소에 맺은 회남왕과의 친교관계 때문에 연좌되어 주살되었다. 한서 예문지에 그가 지은 사부 35편이 전해진다.

13) 숙위(宿衛)/ 원래 숙위는 주나라 때부터 왕궁을 지키는 친위병(親衛兵)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한나라 때부터는 주변의 이민족국가들이 인질로 보낸 왕자들이 황제를 호위하는 위병이 되어 기거하는 제도를 말한다. 주변의 이민족 국가들을 제어하기 위한 인질의 역할과 그들의 환국하여 왕위를 올렀을 때 친중정책을 펼치고 중국문화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한 제도였다.

14) 간대부(諫大夫)/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직으로 조정의 의론을 조정하고 황제의 고문직을 수행했다. 상설직은 아니었으나 많을 때는 수십 명에 달하기도 했다. 한나라에 초에는 두지 않다가 한무제가 원수(元狩) 5년 기원전 118년(한무제 재위 23년)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녹봉은 월 80斛인 비천석과 70곡인 육백석 사인이 비팔백석(比八百石)이다. 궁궐에 상주하며 근무했음으로 명의상으로는 光綠勛위 속관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황제에게 직속된 고급참모로써 給事中이나 侍中의 직을 겸임하여 정무에 참여하여 권세가 컸다.

15) 종군(終軍)/ 서한의 관리로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12년에 죽었다. 자는 자운(子雲)이다. 지금의 산동성 장구현(章丘縣)인 제남(濟南)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문명을 크게 떨치고 나이 18세에 박사의 제자로 뽑혔다. 장안에 머물면서 책문을 올려 무제의 인정을 받아 알자(謁者)와 급사중(給事中)에 임명되고 후에 간대부(諫大夫)의 직을 맡았다. 원정(元鼎) 4년(전 114년) 남월에 사절로 파견되어 남월왕을 회유하여 조현을 올리도록 권했다. 다음 해 군사릉 일으켜 한나라에 반기를 든 남월의 상국 여가(呂嘉)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이십 몇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종동(終童)이라고 칭했다. 한서 예문지에 그가 지은 저술이 8편이 있다고 전하는데 본문은 망실되었다.

16) 노박덕(路博德)/ 평주인(平州人)이다. 우북평(右北平) 태수로 표기장군을 쫓아 종군하여 공을 세워 부리후((符離侯)에 봉해졌다. 표기장군이 죽은 후 로박덕은 위위(衛尉)의 직책으로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남월을 공격하여 무찔러 봉지를 늘렸다. 후에 법을 어겨 후의 작위를 잃었다. 강노도위로 복직되어 거연에 주둔하던 중 죽었다

17) 계양(桂陽)/ 지금의 호남성 침주시(郴州市)다.

18) 창오(蒼梧)/ 지금의 광동성, 광서성, 호남성 경계에 존재했던 남월의 분국이다. 당시 진나라가 설치한 계림군에 속했다가 후에 한무제가 멸하고 그 땅에 창오군을 설치했다.

19) 겹(郟)/ 지금의 하남성 겹현(郟縣)

20) 계양(桂陽)/ 지금의 호남성 침주시(郴州市)로 당시 계양군(桂陽郡)의 치소가 있었다.

21)회수(匯水)/ 호남성과 광동성을 가르는 구의산(九疑山) 동쪽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주강(珠江)의 지류인 진수(秦水)와 합류하는 강으로 지금의 연강(連江)이다.

22) 주작도위(主爵都尉)/ 한경제 중원(中元) 원년 기원전 144년 주작중위를 개칭해서 설치하고 제후들의 봉작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했다. 녹봉은 2천석으로 구경 중의 한 명이다. 무제 태초(太初) 원년 기원전 104년, 다시 우부풍(右扶風)으로 개편되어 내사(內史)의 좌우의 관할 중 우측 땅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의 명칭이 되고 봉작에 관한 일은 대홍려(大鴻臚)가 담당하게 되었다.

23) 양복(楊僕)/ 지금의 하남성 의양시(宜陽市)인 의양(宜陽) 출신으로 처음에 오대부(五大夫)의 신분으로 관직에 나가 점차 승진하여 주작도위가 되어 구경의 반열에 섰다. 무제 때 루선장군(樓船將軍)에 임명되어 남월을 정벌전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워 원정(元鼎) 6년 기원전 111년 장량후(將梁侯)에 봉해졌다. 원봉(元封) 4년 기원전 107년 좌장군 순체와 함께 조선정벌군 대장이 되어 출전했다가 싸움에 패해 죄를 받아 후의 작위를 잃고 서인이 되었다.

24) 예장(豫章)/ 한초 쟁패시 설치한 예장군의 치소로 관할구역은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일대이며 지금의 강서성 성도인 남창시(南昌市)다.

25) 횡포관(橫浦關)/ 옛 관문으로 이름으로 지금의 광동성 남웅시(南雄市) 서북과 강서성 대여현(大余縣) 서남 사이에 있는 대유령(大庾嶺) 상의 소매관(小梅關)을 말한다.

26) 심협(尋陜)/ 지금의 광동성 영덕시(英德市) 부근의 정양협(湞陽峽)으로 지금의 광주시 정북 100키로 지점이다.

27) 석문(石門)/ 광주시(廣州市) 서북

28) 남월의 땅에 새로 설치한 9개의 군은 남해(南海), 창오(槍梧), 울림(鬱林), 합포(合浦), 교지(交趾), 구진(九眞), 일남(日南), 주애(珠厓), 담이(儋耳)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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