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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52.공손홍주보언(公孫弘主父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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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52. 公孫弘主父偃(공손홍주보언)



1293. 大臣宗室以侈靡相高(대신종실이치미상고),

조정대신들이건 황실의 종친들이건 서로 다투어 사치를 일삼았으나

1294. 唯弘用節衣食爲百吏先(유홍용절의식위백리선).

오로지 공손홍만이 의식을 절약하여 백관들의 솔선수범이 되었다.

1295. 作<平津侯列傳>第五十二(작<평진후열전>제오십이)

<평진후열전>제오십이를 지었다.

1. 공손홍(公孫弘)

승상 공손홍은 제의 치천국(菑川國)1) 설현(薛縣) 출신으로 자는 계(季)다. 어렸을 때 설현의 옥리가 되었으나 죄를 지어 면직되어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해변에서 돼지를 키우며 살았다. 그의 나이 40에 이르기까지 춘추와 여러 학설을 공부하며 효심을 다해 계모를 봉양했다. 건원(建元) 원년 기원전 140년 천자가 새로 즉위하여 천하에 현량(賢良)과 문학을 초빙했다. 그때 나이가 이미 60에 이른 공손홍이 현량으로 초빙되어 박사가 되었다. 흉노에 사자로 갔다가 돌아와 복명했는데 황제의 뜻에 부합되지 않았다. 황제가 노하여 공손홍을 무능하다고 꾸짖었다. 공손홍이 즉시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광(元光) 5년 기원전 130년, 황제의 명으로 천하에 문학을 초빙하자 치천국은 다시 공손홍을 천거했다. 공손홍이 치천국의 관리들에게 사양하며 말했다.

“ 신은 이미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들어갔으나 무능하다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원컨대 다른 사람을 선발하여 보내십시오. ”

그러나 치천국의 관리들이 한사코 공손홍을 천거했음으로 공손홍은 할 수 없이 길을 떠나 서쪽으로 들어가 태상(太常)2)을 만났다. 태상이 령을 내려 소집한 유사들에게 각기 책문을 지어 바치도록 했다. 공손홍은 100여 명 중에 하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책문을 읽어본 황제는 공손홍을 일등으로 뽑았다. 공손홍을 불러 접견한 황제는 그의 풍체가 장려했음으로 그를 박사에 임명했다. 그때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길이 뚫렸음으로 그곳에 군(郡)을 설치한 바 파촉(巴蜀)의 백성들은 부역으로 고통스러워했다. 황제가 명을 내려 공손홍에게 가서 살펴보도록 했다. 공손홍은 돌아와서 황제에게 보고하기를 서남이는 아무 쓸모없는 땅이라고 매우 폄하했다. 황제는 공손홍의 말을 무시했다.

공손홍은 사람됨이 비범하고도 박식했다. 그는 항상 남의 주인 된 사람은 마음을 넓고 크게 쓰지 못하는 것을 병으로 알아야하고 남의 신하된 자는 근검절약하지 못하는 것을 병으로 알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공손홍은 포의시절 두 가지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그의 계모가 죽었을 때는 3년 상을 치렀다. 매번 조회 때는 실마리만을 제시하여 황제로 하여금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그는 황제 앞에서 다른 신하들과 논쟁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천자는 그의 행동거지가 매우 돈후하고 논리가 정연하고 문학과 법령에 익숙했을 뿐만 아니라 유학의 치술에 근거한다고 생각하여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2년 째 되는 해에 공손홍은 좌내사(左內史)3)가 되었다. 공손홍은 자신이 상주한 일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조정에서 논쟁하지 않았다. 늘상 공손홍은 주작도위(主爵都尉)4) 급암(汲黯)과 함께 황제가 한가한 틈을 타서 알현을 청하고는 먼저 급암이 말을 꺼내면 공손홍이 뒤를 이어 조리있게 설명함으로써 황제는 항상 기뻐하여 두 사람이 올린 사안은 모두 들어주었다. 이로써 공손홍은 날이 갈수록 귀한 신분이 되었다. 한번은 공경과 조정에서 의론을 하기로 약속하고 황제 앞으로 나가 그들과 한 약속과는 달리 황제의 뜻을 따랐다. 급암 등이 조정에서 공손홍을 비난하며 말했다.

“ 제나라 사람들은 사람을 잘 속이고 진실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신들과 함께 이 일에 대해 우리와 같이 의논하자고 약속해 놓고 이제 와서 약속을 어기니 그 사람은 불충한 사람입니다.”

황제가 듣고 공손홍에게 묻자 공손송이 사죄하며 말했다.“ 신을 아는 자들은 신을 성실하다고 하고 신을 모르는 사람들은 신을 불충하다고 합니다. ”

황제가 공손홍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황제의 좌우에서 모시는 총신들이 공손홍을 폄하했으나 그럴수록 황제는 그를 후하게 대했다.

원삭(元朔) 3년 기원전 126년, 어사대부 장구(張歐)가 면직되자 공손홍이 그 자리에 올랐다. 그때 서남이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창해와 삭방(朔方)에 군을 설치하자 공손홍이 황제에게 중국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이족을 경영하는 일은 무용지물이라고 하면서 중지해줄 것을 여러 번 간했다. 그래서 천자가 주매신(朱買臣)을 시켜 삭방을 설치하여 얻을 수 있는 10가지 이로움에 대해 공손홍에게 말하게 했다. 공손홍은 한 가지도 조리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공손홍이 즉시 사죄의 말을 올렸다.

“ 산동의 비루한 사람이라 그런 이점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원컨대 서남이와 창해군의 일은 그만두고 삭방의 일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허락했다. 급암이 공손홍을 비난하며 말했다.

“ 공손홍은 막중한 삼공의 자리에 있으면서 높은 봉록을 받고 있음에도 포의를 입고 다니니 그것은 거짓된 행동입니다. ”

황제가 사실인지를 묻자 공손홍이 대답했다.

“ 그렇습니다. 무릇 구경 중에 급암보다 신과 사이가 좋은 자는 없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조정에서 저를 힐난했으니 저야말로 진실로 잘못하고 있음입니다. 무릇 삼공이 포의를 입고 다니는 행위는 거짓을 꾸며 이름을 얻으려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제가 듣기에 관중은 제나라의 상국을 하면서 삼귀(三歸)5)를 소유하고 있어 그 사치가 군주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후에 관중의 보좌로 패자가 된 환공 역시 천자의 권위를 엿보는 참람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안영은 제경공의 상국이 되었으나 두 가지 이상의 고기를 반찬으로 먹지 않았으며 그의 아내마저 비단 옷을 입지 않았으나 제나라에 역시 치세가 오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신의 직위는 어사대부가 되어 포의를 입고 다녀 구경 이하 소리(小吏)에 이르기까지 직위의 고저와 귀천의 차이를 없애버렸으니 진실로 급암의 말이 맞습니다. 만일 급암의 충성된 말이 없었다면 폐하께서는 어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

황제는 공손홍이 겸양의 덕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서 더욱 후대하여 마침내 공손홍을 승상으로 올리고 평진후(平津侯)에 봉했다.

공손홍이라는 위인은 마음속으로는 남을 시기하고 의심했지만 겉으로는 관대한 척했기 때문에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매 번 공손홍과 사이가 벌어진 자들과는 비록 겉으로는 사이좋게 지낸척 했지만 남몰래 보복을 가해 화가 미치도록 했다. 주보언(主父偃)이 살해되고 동중서(董仲舒)가 교서(膠西)로 좌천된 것은 모두 공손홍의 꾸민 일이었다. 자신은 고기반찬 한 가지와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옛날 친구나 사이가 좋은 빈객들이 와서 생활비를 도와달라고 청하면 그의 봉록을 모두 그들에게 다 주어버렸기 때문에 집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선비들은 공손홍을 현능하다고 여겼다.

회남왕과 형산왕이 모반사건으로6) 그들에 대한 치죄가 매우 급한 상황이었지만 공손홍의 병은 매우 심했다. 그래서 공손홍은 자신이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했음에도 후에 봉해지고 지위는 승상에 이르렀음으로 마땅히 현명한 군주를 보좌하여 국가를 안정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신자된 도리를 도리를 지키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제후들이 반역의 음모를 꾸미고 있음은 모두가 재상인 자기가 직책을 다 받들지 못했기 때문이며 와중에 병이 심해 죽기라도 한다면 자기 잘못을 메우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즉시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말했다.

“ 신은 듣기에 천하는 다섯 가지 도가 있고 그것을 행하는 데는 세 가지 덕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군신(君臣), 형제(兄弟),부부(夫婦),장유(長幼) 등의 질서가 통용되는 도이며, 지(智), 인(仁), 용(勇) 이 세 가지는 천하에 통용되는 덕으로 도가 행해지게 만드는 수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힘써서 행하는 것은 인에 가깝고, 묻기는 좋아하는 것은 지에 가까우며, 수치심을 아는 것은 용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 세 가를 아는 것은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것이며,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자는 다른 사람을 다스릴 줄 알게 됩니다. 천하에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남을 다스릴 수 있는 경우는 아직껏 없었습니다. 그것은 백세가 되어도 변하지 않은 도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몸소 큰 효를 행하시고 삼왕(三王)7)을 본받으며 주나라의 도를 일으켜 주문왕과 무왕의 지혜와 덕을 겸비하셨습니다. 현능한 사람을 격려하고 봉록을 내리시고 능력을 헤아려 벼슬을 내리십니다. 오늘 신 홍은 아둔한 자질에 한마지로(汗馬之勞)의 공도 없음에도 폐하께서는 졸개들 중에서 파격으로 신을 발탁하시어 열후에 봉하시고 마침내 승상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했습니다. 진실로 신의 능력과 행실은 말할만한 가치가 없으나 평소에 부신지병(負薪之病)8)이 있어 구마지심(狗馬之心)9)을 행하기도 전에 먼저 구학(溝壑)10)이 되어 폐하로부터 입은 은덕에 보답하지도, 책임을 다하지도 못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후의 인장을 바치오니 해골을 돌려주시어 현능한 사람을 위해 길을 열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자가 읽고 답했다.

“ 옛날에는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고 덕이 있는 자는 표창했소. 기업을 일으켰을 때는 문을 숭상하고 변란을 만났을 때는 무를 존중한 도리는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오. 짐은 지난 날 요행히 보위에 오른 이래 나라를 안녕하게 만들지 못할까 두려워했음으로 오로지 여러 대신들과 함께 천하를 다스릴 생각만 했소. 이는 공도 잘 알고 있는 일이오. 모든 군자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고. 공은 언행을 삼갔을 뿐 진퇴는 항상 집의 의중에 있었소. 공이 불행히 상로지병(霜露之病)에 걸렸으나 하필이면 낫지 않는다고 하겠소? 그런데 상소를 올려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사직한다고 하니 이는 짐의 부덕을 드러낸 것이오. 이제 조정의 일이 조금 한가해졌으니 공은 근심을 잊고 정신을 모아 의약으로 몸을 보전하도록 하시오. ”

그리고 황제는 휴가를 주고, 소고기와 술 및 여러 비단을 하사했다. 몇 개 월 후 공손홍의 병세가 다소 호전되었음으로 일을 볼 수 있었다. 원수(元狩) 2년 기원전 121년, 한무제 재위 20년, 공손홍이 병이 들이 결국 승상의 직에 있다가 운명했다. 그의 아들 공손탁(公孫度)이 사위(嗣位)하여 평진후의 작위를 이었다. 공손탁은 산양태수(山陽太守)로 10여 년 재직하다가 법에 저촉되어 후의 작위를 잃었다.

2. 주보언(主父偃)

주보언(主父偃)은 제나라 임치(臨菑) 사람이다. 합종과 연횡에 관한 유세술을 배우고 나이가 들어서는 주역(周易), 춘추(春秋) 및 백가의 학설을 공부했다. 제나라의 여러 유생들을 찾아다니며 유세했으나 아무도 그를 후대하지 않았다.

제나라의 여러 유생들은 서로 힘을 합쳐 주보언을 따돌렸음으로 그는 제나라서 용납되지 않았다. 집이 가난했음으로 남에게서 돈을 차용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북쪽의 연(燕), 조(趙), 중산(中山) 등의 나라를 여행했으나 역시 아무도 그를 후대하지 않았음으로 나그네가 되어 심히 곤공한 처지가 되었다. 효무제 원광(元光)11) 연간에 제후들 중에는 유세를 할만한 자가 없다고 생각한 주보언은 서쪽으로 발길을 돌려 관중으로 들어가 대장군 위청을 찾아갔다. 위청이 여러 번 황제에게 주보언을 천거했으나 항제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이윽고 노자가 떨어진 주보언이 오래 머물자 여러 공들과 빈객들은 싫어했다. 시간에 쫓겨 더욱 곤공하게 된 주보언이 상소문을 써서 조정에 올렸다. 아침에 상주문을 올리니 저녁 때 부름을 받고 황제를 배알했다. 상소문에 언급한 아홉 가지 일 중에서 여덟 가지는 율령에 관한 것이었고 한 가지는 흉노를 정벌하는 내용이었다.

상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신이 듣기에 밝은 임금은 절실한 간언을 꺼리지 않고 널리 살피며 충신은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간을 올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계책을 남겨 그 공은 만세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신은 감히 충간을 감춰 죽음을 피하지 않고 어리석은 계책이나마 올립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잠시 살펴십시오.

사마법(司馬法)12)에 「나라가 비록 강대하다고 해도 전쟁을 좋아하게 되면 반드시 망하게 되고, 천하가 비록 태평하다 해도 전쟁을 잊으면 위태롭다.」고 했습니다. 천하는 이미 평안하고 천자께서는 대개(大凱)13)를 연주하시고 봄과 가을에 각각 사냥14)을 행하시나 제후들은 봄에는 군사들을 정비하고 가을에는 군사를 훈련시켜 전쟁을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릇 노여움을 품은 것은 덕을 거슬리는 행위이며 병은 흉기이고 다투는 일은 말단입니다. 옛날 남의 군주 된 사람이 한 번 노하면 반드시 사람을 죽여 시체에서 피가 흐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왕들은 행동을 신중하게 했습니다. 무릇 싸움에 이기기를 힘써 무력을 다 사용하는 사람 중에 후회하지 않은 자는 없습니다. 옛날 진시황은 싸움에서 승리를 취한 위세를 이용하요 천하를 잠식하기 시작해서 전국을 병탄하여 한 나라로 통일했음으로 그 무공은 삼대와 같았습니다.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써 휴식도 잊은 채 다시 흉노를 공격하려고 하자 이사가 간했습니다.

「불가합니다. 무릇 흉노는 성곽을 짓지 않고 살기 때문에 창고에 저장해 놓고 지킬 것이 없습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를 마치 새 떼가 날아다니는 것과 같아 그들을 잡아 제압할 수 없습니다. 가벼운 장비로 그들의 땅에 깊이 들어간다면 양식은 필시 떨어진다고 해서 양식을 짊어지고 행군한다면 무거운 치중으로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또한 그 땅을 얻는다 해도 아무런 이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백성들을 만난다면 그들을 부려 지키게 할 수도 없으니 승리를 취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반드시 죽여야 하는데 그것은 백성들의 부모로써 할 일이 아닙니다. 중국을 피폐하게 하면서 흉노를 쳐 통쾌한 마음을 얻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진시황은 듣지 않고 몽염(蒙恬)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여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하수(河水)를 경계로 삼았습니다. 그 땅은 원래 소택지에 염분이 많은 곳이라 오곡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천하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북하(北河)15)를 지키면서 10여 년 동안 폭염과 풍찬노숙으로 죽은 군사들의 수효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나 종내에는 북하를 건너 북쪽으로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찌 군사의 수효가 부족하거나 병장기와 물자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습니까? 또한 진나라 조정은 천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초와 양식을 신속하게 운반하도록 명하여 말먹이와 식량을 시간을 다투어 나르게 하면서 황현(黃縣)16)과 수현(腄縣)17) 및 낭야(琅邪)18)와 같은 바다를 등진 여러 군에서 북하까지 30종(鐘)을 전하고 전하여 운송했으나 현지에 당도한 것은 한 섬[石]19)에 불과했습니다. 남자들은 온갖 고생을 해가며 농사를 지어도 군량미에 충당하기에 보족했고 여자들은 베를 열심히 짜도 장막을 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이로써 백성들은 생활이 피폐해져 쓰러졌고, 과부들과 노약자들은 서로 부양할 수 없어 길바닥에 쓰러져 죽은 시체는 서로 줄을 이었습니다. 그래서 천하는 진나라를 배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천하를 평정한 고황제께서 변경의 땅을 공략하시려고 할 때 흉노가 대(代) 땅 밖의 골짜기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들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사(御史) 성(成)이 말했습니다.

「불가합니다. 무릇 흉노의 속성은 짐승처럼 모였다가 새처럼 흩어지기 때문에 그들을 쫓음은 마치 그림자를 따라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성덕(盛德)으로 흉노를 공격한다고 해도 신은 삼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황제께서 듣지 않으시고 북쪽으로 진공하여 대 땅의 계곡에 이르렀다가 과연 평성(平城)20)에서 포위되었음으로 고황제께서는 이를 심히 후회하시고 유경(劉敬)을 보내 화친의 조약을 맺도록 시킨 연후에야 비로소 천하는 전쟁의 일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고로 옛날 병법에「군대 10만을 동원하게 되면 매일 천금의 비용이 든다.」21)라고 했습니다. 무릇 진나라는 항상 사나운 군사 수십 만을 모아 변방으로 보내 비록 적군을 전멸시키고 선우를 사로잡는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흉노로부터 원한을 사서 깊은 복수심에 불타게 만들었고 그 비용은 천하가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무릇 외국을 정벌하는 일은 위로는 나라의 부고를 비우고 밑으로는 백성들의 생활를 피폐하게 만들게 하니 그런 일에 전념하는 일은 완전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무릇 흉노는 얻기도 힘들고 복종시키기도 어렵다는 사실은 한 세대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도적질을 자행하고 변경을 침략하여 백성들을 잡아가는 것은 그들의 생활방식으로 본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위로는 우(虞)나 하은주(夏殷周) 삼대부터 지금까지 중국은 그들을 원래의 규범을 두어 감독하지 않고 금수처럼 여기고 길렀을 뿐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우나 하은주 삼대가 행한 통치방법을 살피지 않고 근래의 실패한 방법을 사용하시어 백성들을 고통속으로 몰아넣게 됨을 신은 크게 걱정합니다. 무릇 병사의 일을 오래 계속하면 즉 변란이 발생하게 되고 백성들의 일이 고통스러우면 마음을 고쳐먹게 됩니다. 이는 또한 변경의 백성들을 피폐하고 고달프게 만들어 나라에 마음을 떠나게 합니다. 장수들과 관리들은 서로 의심하게 되어 외부의 세력과 결탁하여 옛날의 위타(尉陀)22)와 장한(章邯)23) 처럼 사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진나라의 정령이 이행되지 않았던 이유는 권력이 두 사람에게 모두 주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고로 주서(周書)에 「나라의 안위는 정령에 달려있고 나라이 존망은 인사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상세히 살피시고 잠시 깊이 심사숙고하십시오. ”

그때 조나라 사람 서락(徐樂)과 제나라 사람 엄안(嚴安)이 함께 각기 상소문을 올려 당시의 일에 대해 말했다.

서락의 상소문은 다음과 같았다.

“ 신은 듣건대 천하의 우환거리는 토붕(土崩)에 있는 것이지 와해(瓦解)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어째서 토붕이라고 하겠습니까? 진나라 말년에 진섭은 천승의 존귀한 몸도 아니었고, 한 치의 땅도 갖지 못했으며 출신성분은 왕공이나 대족의 후예도 아니었고 시골마을에서 조차도 명성이 없었습니다. 또한 공자(孔子), 묵자(墨子), 증자(曾子)와 같은 현능함도 갖추지 못했고 도주공(陶朱公)과 의돈(猗頓)과 같이 부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난뱅이들이 사는 골목에서 몸을 일으켜 창자루를 휘두르며 몸을 일으켜 한쪽 어깨를 들어내어 크게 한 번 소리치자 천하 사람들은 바람처럼 몰려와 그를 따랐습니다. 그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백성들은 곤궁한데 임금은 그들의 처지를 돌보지 않았고, 밑에서는 원망을 하고 있었음에도 임금은 그것을 몰랐으며 세상은 혼란에 빠져 정령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섭은 이 세 가지를 밑전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경우를 토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하의 근심거리는 토붕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와해라고 합니까? 오(吳), 초(楚), 제(齊), 조(趙)의 병란이 바로 그것입니다. 칠국이 모의하여 대역죄를 범하면서 스스로 만승(萬乘)의 임금이라고 칭하면서 무장한 군인 수십 만을 이끌고 위세는 나라 안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고 재물은 그 군사들을 유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쪽의 땅을 한 치도 빼앗지 못하고 그 몸은 중원에서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권력은 필부의 것보다 가볍고 군사는 진섭의 것보다 약해서가 아닙니다. 당시의 형세로써는 선제의 은덕이 아직 쇠하지 않아 편안히 한 곳에 정착하여 풍속을 즐기려는 백성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후들을 국경 밖에서 도와주는 세력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와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하의 근심은 와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천하는 진실로 토붕의 형세에 놓이게 되면 비록 포의의 곤공한 선비 중에 어떤 자는 악행을 제창하여 해내를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데 그 사람이 진섭인 것입니다. 하물며 삼진(三晋)24)의 군주들과 같은 강자가 존재한다면 어쩌겠습니까? 천하는 아직 크게 다스려지지 못하고 있다하나 진실로 토붕지세가 없다면 비록 강대국이 강한 군대를 일으킨다 해도 결국 발꿈치를 돌리기도 전에 그들의 몸은 사로잡히게 되었으니 그들이 바로 오, 초, 제, 조 등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하물며 군신과 백성들이 어떻게 능히 란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 요체는 국가의 안위에 직결되는 것으로써 현능한 군주는 유의하고 깊이 살펴야 합니다. 이즈음 관동에는 오곡이 몇 년 째 여물지 않아 아직 수확이 회복이 되지 않아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었고 변경의 전쟁이 겹쳤습니다. 이것을 순리에 따라 살펴보면 앞으로 그곳이 불안하게 여기는 백성들이 생길 것입니다. 백성들이 불안하게 생각하면 쉽게 동요되고 쉽게 동요되는 것은 토붕의 형세입니다. 그래서 옛날 현능한 군주들은 만물이 변화하는 원인을 살펴서 안정되거나 위태로움의 관건을 분명히 밝히고 조정에 앉아서 정무에 열중하여 화란이 형체를 드러내기 전에 없앴습니다. 그 요지는 천하에 토붕의 형세가 나타나지 않도록 미리 조치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강대국의 고강한 군대가 쳐들어오더라도 폐하께서는 단지 도망다니는 짐승을 쫓고 하늘을 나는 새를 쏘며 잔치를 여는 정원을 더욱 넓혀서 마음껏 즐기고 말을 몰아 사냥의 즐거움을 더할 수 없이 누린다 해도 아무런 일이 없는 듯 평온할 것입니다. 금석사죽(金石絲竹)25)에서 나오는 음악이 폐하의 귀에서 끊이지 않고 장막 안에서 미녀들과의 운우지정을 나누시며 배우들과 난쟁이들의 웃음소리가 폐하의 면전에서 사라지지 않을지라도 천하에는 근심이 오래도록 쌓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명망이 상탕(商湯)과 주무왕(周武王)과 같기를 바랄 필요가 있을 것이며 퐁속이 주성왕(周成王)과 강왕(康王) 시대와 같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성군(聖君)의 자질을 타고 태어나시어 관후하고 인자하시니 성의를 다하여 천하를 다스리기에 힘쓰신다면 탕왕이나 무왕과 같은 명망을 얻는 일은 어렵지 않고 성강(成康)의 풍속을 다시 부흥시킬 수 있습니다. 이 토붕과 와해라는 두 가지를 피하는 근본을 확립한 연후에 존위하고 안전한 상태에서 당대에 명망과 영예를 드높여 천하 백성들과는 친하게 지내고 사방의 오랑캐들은 복종시키면, 은혜와 덕은 수대에 걸쳐 융성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폐하께서 하실 일은 조정에서 남면하여 도끼 무늬가 그려진 병풍을 의지하여 소매를 걷어부치고 왕공과 대인들로 하여금 읍을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왕업을 기도하여 비록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나라를 안정시키기에는 충분하다고 합니다. 천하가 편안해지면 폐하께서 구하시는데 어찌 못 얻을 것이 있겠으며, 무슨 일을 하던 어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을 것이며 어디를 정벌하던 어찌 복종시키지 않을 곳이 있겠습니까?”

또한 엄안(嚴安)의 상소문은 다음과 같았다.

“ 신은 듣기에 천하를 소유한 주나라의 300년 치세 중에 가장 융성했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의 치세에는 40여 년 동안이나 형벌을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고 했습니다. 이윽고 주나라 정치가 쇠미해지기 시작해서 역시 300여 년이 지나자 오패(五覇) 번갈아 일어났습니다. 오패는 언제나 천자를 보좌하여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주고 해로운 것을 제거하여 포악한 자를 주살하며 사악한 짓을 금지시켜 해내를 바로잡고 천자를 높였습니다. 이윽고 오패가 사라지자 현인이나 성군이 끊어져 뒤를 잇지 않으니 천자는 고립되고 허약해져서 천자의 명은 행해지지 않았고 제후들은 멋대로 행하여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욕하고, 다수가 소수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제나라의 전상(田常)26)은 국권을 찬탈했고 진(晉)나라의 육경(六卿)은 그 나라를 서로 나누어가짐으로써 천하는 전국(戰國)으로 병합되어 이때부터 백성들의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로써 강한 나라는 이웃나라를 침략하는데 힘썼고 약한 나라는 지키느라 여념이 없게 되어 나라 간에 합종(合縱)과 연횡(連橫)을 무상으로 반복하여 사자들이 탄 수레는 그 바퀴살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분주하게 치달리고, 군사들의 갑옷과 투구에는 서캐가 우글거려도 백성들은 그 고통을 하소연할 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진왕(秦王)이 즉위하자 천하를 잠식하더니 마침내 전국을 모두 병탄하여 황제라고 칭하고 해내의 정치를 오로지했습니다. 제후들의 성을 허물고 그들의 병장기를 녹여 종거(鐘虡)27)를 만들어 다시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선량한 백성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밝은 천자를 만나 전쟁의 재화를 면할 수 있게 되어 모든 사람들은 다시 세상에 태어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때 만일 진나라가 형벌을 완화하고 부세와 요역을 줄이며, 인의를 귀하게 생각하고 권세와 이익을 천하게 여기며, 독실하고 후덕한 것을 높이고 약삭빠르고 기교를 부리는 것들을 낮추어 풍숙을 변화시켜 해내를 교화했더라면 세상은 세세대대로 안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나라가 풍속을 교화시키지 않고 예전의 풍속대로 약삭빠르고 기교를 부리며 권세와 이익을 쫓는 자들을 등용하고 독실하고 후덕하며 충성스럽고 신의를 쫓는 자들을 물리쳤습니다. 법은 엄하고 정령은 가혹했으며 아첨하는 자들만 주위에 가득하여 매일 그들의 칭송하는 말만을 듣다보니 뜻은 커지고 마음은 교만해졌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위세를 나라 밖에까지 떨쳐보고 싶은 마음에 몽염을 시켜 장병들을 이끌고 북쪽의 흉노를 치게 만들었습니다. 나라의 땅을 개척하여 북하(北河)의 땅을 지키게 하고 말먹이와 군량을 실은 수레를 뒤따르게 했습니다. 다시 위(尉)인 도수(屠睢)28)를 시켜 수군을 이끌고 남월을 공격하게 하고 사록(史祿)을 시켜 영거(靈渠)29)를 굴착하여 운송한 군량으로 월(越)의 땅을 깊이 들어가자 월인들은 모두 도망가 숨었습니다. 부질없이 세월이 지나가 양식은 떨어지자 월인들이 반격을 가해 진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진나라가 다시 위(尉)인 조타(趙陀)를 시켜 군졸들을 이끌고 월나라 지역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당시 진나라의 화란은 북쪽의 흉노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월에 걸쳐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주둔한 군대도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점령한 땅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러기를 10여 년 동안 장정들은 갑옷을 입고 젊은 부녀자들은 군수물자들을 실어 나르느라 당하는 고생을 못참고 삶을 포기하고 길가의 나무에 목을 매는 자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윽고 진시황이 죽자 천하에는 대란이 일어났습니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진(陳) 땅에서, 무신(武臣)과 장이(張耳)는 조(趙) 땅에서, 항량(項梁)은 오(吳) 땅에서 몸을 일으켰으며, 계속해서 전담(田儋)은 제(齊) 땅에서 ,경구(景駒)는 영(郢) 땅에서,주불(周市)은 위(魏) 땅에서, 한광(韓廣)은 연(燕) 땅에서 거병했습니다. 심지어는 심산유곡에 사는 호걸들까지 거병에 합세하여 그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공후의 후예이거나, 장관을 지낸 관리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한 뼘의 세도 없는 단지 시골의 골목길에서 몸을 일으켜 몽둥이와 장대를 들고 시류에 응해 몸을 움직여 함께 하기로 모의하거나 같이 모이기로 약속하지도 않았음에도 점거한 땅을 넓히고 진군하여 마침내는 패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것은 시세의 가르침이 그랬기 때문이었습니다. 귀하기는 천자의 신분이었고 부유하기로는 천하를 모두 소유했던 진나라였지만 황실은 멸족되고 제사는 끊어졌으니 그것은 바로 전쟁을 너무 자주 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나라는 나라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천자의 자리를 잃었고 진나라는 너무 강했기 때문에 천자의 자리를 잃었던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남이(南夷)를 부르고, 야랑(夜郞)을 입조케 하며, 강(羌)과 북(僰)의 항복시키려고 할뿐 아니라 예주(濊州)30)를 공략하여 성읍(城邑)을 건설하고 흉노의 땅에 깊이 들어가 롱성(蘢城)31)을 불태우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을 논하는 자들은 모두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신하된 자로써 이익이 될지는 모르나 천하를 위해서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지금 중국은 개짖는 소리에 놀랄 일도 없는 아주 태평스러운데 나라 밖 먼 곳의 수비에 매달려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니 그것은 백성들을 자식으로 삼아야할 도리가 아닙니다. 끝없는 욕망을 행하여 만족한 마음을 갖는 일은 흉노와의 원한만을 쌓게 되어 변방을 안전하게 만드는 길이 아닙니다. 일단 맺힌 화란이 풀어지지 않으니 군사들이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게 되어 가까이 있는 자는 근심과 고통에 시달리고 멀리 있는 자는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한다면 천하를 오래 지탱할 수 없습니다. 지금 천하는 갑옷을 수리하고 칼을 숫돌에 갈며, 화살을 바로잡고 시위를 점검하며 군량을 수송하느라 잠시도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하 사람들의 근심하고 있는 바입니다. 동원된 군사들이 오래가면 변란이 일어나게 되고 일이 번거롭게 되면 생업을 걱정하게 됩니다. 지금 나라 밖으로 개척한 수천 리나 되는 땅에 수십 개의 성을 세워 산과 하천의 지형에 의지하여 백성들을 통제하고 부근의 제후들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실과 황가에 이로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 진(晉)나라와 제(齊)나가 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공실의 지위는 낮아져 힘이 쇠약해지고 육경(六卿)의 크게 번성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근자에 진(秦)나라가 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형법이 지나치게 혹독하고 욕심은 끝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군수들이 갖고 있는 권력의 중함은 육경의 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그들이 다스리는 수천 리에 달하는 땅은 육경들이 근거지로 삼았던 몇 개의 골목에 비할 바가 없이 광할합니다. 그들의 갑병(甲兵)이나 병기들은 육경들이 사용했던 창자루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형세 하에서 만세의 변란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

상서가 천자에게 올라가자 천자는 세 사람을 불러 접견하고 말했다.

“그 동안 공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어찌하여 만나기가 이렇게 늦었는가?”    그리고 황제는 그 즉시 주부언, 서락, 엄안 세 사람을 낭중(郎中)에 임명했다. 주보언이 여러 번 황제를 접견하고 국사에 대해 상소하자 황제는 그를 알자(謁者)로 제수하더니 중대부(中大夫) 등으로 자리로 1년에 네 번이나 옮겼다. 주보언이 상서를 올려 말했다.

“ 옛날의 제후들은 그 봉지가 백리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국세가 강하건 약하건 간에 통제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후들은 수십 개의 성이 늘어선 사방 천리의 땅을 소유하고 있어 풀어주면 교만하고 사치해져 음란한 짓을 저지르고, 다그치면 그들의 힘이 세다는 것을 믿고 다른 제후들과 합종하여 조정에 반역을 꾀할 것입니다. 지금 법으로 그들의 봉지를 삭감하면 그 즉시 반역의 기운이 싹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조조(鼂錯)의 경우입니다. 지금 제후들 중 어떤 이는 자제가 수십 명에 달하나 그 뒤를 적자로 잇게 하고 나머지 골육들은 한 치의 땅도 수유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부모로써의 인(仁)과 자식으로써의 효(孝)를 다하지 못해 도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제후들에게 령을 발하시어 나머지 자제들에게도 은혜를 넓혀 그 봉지를 나누어 주고 그 땅을 근거로 제후에 봉하십시오. 제후에 봉해진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얻었다고 기뻐할 것이고 황제께서는 또한 은덕을 베푸시게 되나 실은 그들의 나라를 나누게 되니 그들의 땅을 삭감하지 않아도 서서히 약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황제는 주보언의 계책을 따랐다.32) 다시 주보언이 상서를 올려 황제에게 말했다.“ 무릉(茂陵)에 새로이 현을 설치하는 일이 이제 막 끝났습니다. 그곳에 천하의 호걸, 부호, 그리고 란동을 일으킨 백성들을 모두 옮겨 살게 하여 안으로는 경사의 내실을 기하고 밖으로는 간교한 무리들을 없애도록 하면 이것이야말로 죽이고 않고 해로운 것들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

황제가 주보언의 계책을 따라 시행하도록 했다. 위자부를 높여 황후로 세우도록 하고 연왕(燕王) 유정국(劉定國)의 음탕한 행위33)를 적발하는데도 공이 있었다. 그의 입을 두려워한 대신들이 뇌물로 바친 돈이 수천 금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이 주보언에게 말했다.

“ 전횡이 너무 지나칩니다. ”

주보언이 대답했다.

“ 내가 댕기머리의 젊은 시절부터 공부를 하기 위해 40여 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녔으면서도 생각하는 바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친부모는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고, 형제들은 받아주지 않았으며 빈객들은 나를 버려 나는 오랜 세월 곤공하게 지냈습니다. 하물며 장부가 태어나서 오정식(五鼎食)34)을 먹을 수 없다면 오정(五鼎)에 삶겨지는 형벌을 받아 죽게 될 뿐입니다. 나는 해는 저물었으나 갈 길은 머니[日暮途遠] 일을 거꾸로 행하여 사납게 전횡하게 되었습니다. ”

주보언이 또 황제에게 완강하게 주청했다.

“ 비옥하고 풍요로운 삭방의 땅은 외부로는 황하에 막혀있어 몽염이 성을 쌓아 흉노를 쫓아냈습니다. 안으로는 운송의 수고로움과 변경에 주둔하며 국경을 지키기 위해 조운으로 운반하는 군자의 비용을 줄여 중국의 땅을 넓히는 것이 흉노를 멸하는 근본적인 대책입니다. ”

황제가 상소문을 보고 조정에 내려보내 신하들로 하여금 상론케했다. 모든 신하들은 그 일을 불편하다고 하며 반대했다. 공손홍이 말했다.

“ 진나라가 매년 3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하(北河)에 성을 쌓았으나 결국은 그 땅을 얻지 못하고 지금은 이미 버려진 땅이 되었습니다. ”

주보언이 다시 완강하게 삭방에 성을 쌓을 경우의 편리함을 주장했다. 황제가 주보언의 계책을 받아들여 삭방의 땅에 군을 설치했다.

원삭(元朔) 2년은 기원전 127년으로 한무제 재위 14년이다. 주보언이 제려왕(齊厲王) 유차경(劉次景)35)의 궁내에서 저지른 음란하고 사악한 행위를 고하자 황제는 그를 제나라 상국에 임명하고 그 일을 조사하도록 했다. 이윽고 제나라에 당도한 주보언은 널리 흩어져 잘고 있던 형제들과 빈객들을 부른 후에 가지고간 오백 금의 돈을 풀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며 힐책했다.

“ 내가 옛날 가난했을 때 형제들은 나에게 의식을 주지 않았으며 빈객들은 나를 그들의 집으로 들이지 않았소. 지금 내가 제나라의 상국이 되니 여러분들은 나를 맞이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소.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과 이후로는 영원히 절교할 것을 선언하니 다시는 이 사람의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기 바라오. ”

그리고는 그 즉시 누이의 통간한 일로 제왕을 핍박했다. 결국 죄를 면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제왕은 예전에 연왕이 논죄당해 죽은 것처럼 자신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곧바로 자살하고 말았다. 제나라의 관리가 이 사실을 황제게 고했다.

주보언이 불운하게 지낼 때 연(燕)과 조(趙) 나라 사이를 다니며 유세한 적이 있었다. 후에 주보언이 귀한 신분이 되어 연나라 일을 들추어내자 그가 조나라의 화근이 될 것을 두려워한 조왕이 황제에게 그의 비밀스러운 글로 써서 고하려했으나 주보언이 항상 황제의 곁에 있었음으로 감히 보내지 못했다. 이윽고 주보언이 제나라 상국이 되어 관문을 나가 동쪽으로 떠났음으로 즉시 사람을 시켜 서장을 올려 주보언이 제후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하여 수많은 제후의 자제들이 후에 봉해졌다고 고했다. 이윽고 제왕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한 황제가 주보언이 제왕을 겁박하여 자살에 이르게 했다고 생각하여 칙명으로 그를 관리에게 넘겨 치죄토록 했다. 주보언이 제후들에게 금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제왕이 자살한 것은 겁박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자백했다. 황제가 주보언을 처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때에는 공손홍이 어사대부의 자리에 있었다. 공손송이 말했다.

“ 자살한 제왕에게는 후손이 없어 나라가 없어져 군에 편입되었습니다. 주보언은 원래 악의 수괴입니다. 폐하께서 주보언을 죽이지 않는다면 천하의 백성들에게 사과할 길이 없게 됩니다. ”

그리고 결국 주보언은 멸족되었다.

주보언이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한 신분이 되었을 때는 빈객이 천여 명에 이르렀으나 그가 멸족 당하자 아무도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안했다. 오직 효현(洨縣)36)교공거(洨孔車) 한 사람만이 나서서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냈다. 천자가 듣고 공거를 장자라고 여겼다.

태사공이 말한다.

“ 공손홍이 비록 품덕과 행위는 훌륭했지만 그러나 역시 때를 잘 만났다. 한나라가 흥기한지 80여 년이 지나 황제께서는 바야흐로 문학을 숭상하여 뛰어난 인재들을 초빙하여 유가와 묵가의 학을 세상에 넓힐 때 공손홍이 가장 두각을 빨리 드러냈다. 주보언이 잘 나갈 때는 수 많은 사람들이 그와 사귀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했지만 그가 실추하여 몸은 주살되었을 때는 선비들은 다투어 그의 악행을 비난했다. 참으로 슬픈지고! ”

태황태후37)가 대사도(大司徒)38)와 대사공에게 조칙을 내리노라! 39)

“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데부터 시작되고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요체는 절약하고 검소하는데 있다고 했다. 효경(孝經)에 말했다.

『황제를 평안하게 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길은 예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예는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차라기 검소한 것이 좋다.』

옛날 관중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제환공을 패자로 만들어 제후들과 아홉 번 회맹을 행하고 1번 천자의 자리를 바로잡았으나 공자께서는 그를 예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것은 바로 관중의 사치가 그의 군주와 비교될 정도로 과도했기 때문이었다. 하우(夏禹)는 누추한 궁실에 살면서 헤진 의복을 입고 다녀 후대의 성인들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이것으로 볼 때 치리의 가장 좋은 방법은 덕이 가장 우선이며 검약보다 높은 것은 없다고 하겠다. 검약은 속세의 백성들을 교화시켜 높고 낮은 신분이 순서를 찾게 되고 골육은 서로 아끼게 되어 서로 다투거나 싸우는 일은 근본적으로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백성들을 풍족하게 함으로써 형벌을 사용하지 않고 능히 다스릴 수 있는 것이 나라의 근본이다. 어찌하여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힘쓰지 않는가? 무릇 삼공이라는 직위는 백관들의 총수로써 만민들의 지표로다. 이제껏 곧은 표지를 세워놓고 굽은 그림자를 얻은 적은 없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바로 이끈다면 누구인들 감히 바르게 되지 않겠는가?』『선한 사람을 천거하여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교화한다면 그들의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는가?』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고굉지신(股肱之臣)들과 재상들은 몸소 근검절약을 실천하여 재물을 경시하고 의를 중하게 여겼지만 이제껏 죽은 승상이면서도 삼베로 만든 이불을 사용하고 탈곡한 곡식으로 밥을 지어 고기반찬은 한 가지 이상을 먹지 않았다. 평진후는 사이가 좋은 빈객들과 친구들에게 자신의 봉록을 모두 나누어주어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진실로 마음속으로는 검약할 줄 알았고 밖으로는 제도를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급암(汲黯)은 그의 행위가 위선적이라고 힐난하자 그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어 황제가 알게 되었다. 그의 행위는 규정된 제도의 본뜻을 훼손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시행은 가한 일이다. 덕이 넉넉하면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친다. 안으로는 극도로 사치를 누리면서도 겉으로는 거짓으로 허름한 옷을 걸쳐 헛된 명예를 낚시질하는 자와는 그 부류가 틀리다. 그가 병이 들어 걸해골(乞骸骨)을 청하자 효무황제께서는 조명을 내려 말했다.

『공이 있는 자는 상을 주고 덕이 있는 자는 표창하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일은 공도 잘 알고 있는 일이오. 근심을 덜고 정신을 모아 의원과 약으로 몸을 보존하시오.』

그리고는 휴가를 주어 병을 치료하도록 하고 우주(牛酒)와 여러 가지 비단을 하사했다. 몇 달이 지나자 병을 치료하고 예전처럼 승상의 직무를 계속했다. 원수(元狩) 2년 한무제 20년(기원전 121년), 그는 마침내 승상으로 재직하다가 생을 마쳤다. 무릇 군주만큼 그 신하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듯이 효무제와 공손홍 사이가 바로 그랬다. 공손홍의 작위는 아들 공손탁(公孫度)이 이엇다. 공손탁은 후에 산양태수(山陽太守)가 되었다가 법을 위반하여 후의 작위를 잃고 말았다. 덕을 포상하고 의를 밝힘으로써 풍속을 인도하여 교화에 힘쓰는 것은 성왕의 법도라 쉽게 바꾸면 안 된다. 공손홍의 후손으로 서열상으로 해당하는 자에게 관내후(關內侯)에 봉하고 식읍 3백호를 내린다. 불러서 공거(公車)41)에 나아가게 하여 상서(尙書)42)에 이름을 올리라. 내가 친히 나아가 그를 임명하리라!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43)가 칭송했다.

공손홍과 복식(卜式)、아관(兒寬) 등은 모두가 홍점지익(鴻漸之翼)44)의 큰 재주를 지녔음에도 제비나 참새와 같은 무리들에게 곤욕을 당하고 멀리 양이나 돼지 무리 속에서 지냈는데 그들이 때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능히 그러한 지위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그때는 한나라가 일어선지 60여 년이라 해내가 모두 안정되었다고 하지만 사방의 이족들은 여전히 복종하지 않고 제도도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황제께서 문무의 인재들을 등용하기 위해 찾으면서 구할 수 없을까봐 마음을 애태웠다. 처음으로 부들로 바퀴를 두른 수레를 보내 매생(枚生)을 초빙하고, 주보언을 보자 늦게 만났음을 탄식했다. 이에 군신들이 흠모하여 이인들이 한꺼번에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복식(卜式)은 목자들 중에서 등용되었고 상홍양(桑弘羊)은 상인들 무리에서 발탁했으며 위청(衛青)은 노복의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으며 김일제(金日磾)는 항복한 흉노에서 나왔다. 이것은 또한 옛날 노예의 신분으로 판축(版築) 일을 하던 부열(傅說)45)이나 소에게 꼴을 먹이던 영척(寧戚)46)과 같은 인재들을 등용한 경우와 같다고 하겠다. 한나라가 인재를 얻음이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고아한 유학자로는 공손홍, 동중서(董仲舒), 아관(兒寬)이 있었고, 독실하고 후덕한 인사로는 석건(石建), 석경(石慶), 질박하고 솔직한 인사로는 급암(汲黯), 복식(卜式), 현인을 잘 천거하는 인사로는 한안국(韓安國)과 정당시(鄭當時), 법령을 제정하는 데는 조우(趙禹)와 장탕(張湯), 문장으로는 사마천(司馬遷)과 사마상여(司馬相如), 골계(滑稽)로는 동방삭(東方朔)과 매고(枚皋),응대에는 엄조(嚴助)와 주매신(朱買臣)、역법과 천문에는 당도(唐都)와 락하굉(落下閎),음악과 음률에는 이연년(李延年),계산과 회계에는 상홍양, 외교 사절의 임무는 장건(張騫)과 소무(蘇武), 장군으로는 위청과 곽거병, 유조를 받아 어린 군주를 보필하는 데는 곽광과 김일제가 있었다. 그 밖에 나머지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공업을 일으켜 흥성하게 만들어 제도와 문들을 남기니 후세에 이르러서도 이에 미치지 못했다. 선제(宣帝)께서 적통을 이어받아 대업을 새로이 하고 육예를 강론하여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소망지(蕭望之)、양구하(梁丘賀)、하후승(夏侯勝)、위현성(韋玄成), 엄팽조(嚴彭祖)、윤갱시(尹更始) 등은 유학으로 관계로 진출했고, 유향(劉向)、왕포(王襃)는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장상(將相)으로는 장안세(張安世)、조충국(趙充國)、위상(魏相)、병길(邴吉)、우정국(于定國)、두연년(杜延年)이 있었고 백성들을 다스리는데는 황패(黃覇), 왕성(王成)、공수(龔遂)、정홍(鄭弘)、소신신(邵信臣)、한연수(韓延壽)、윤옹귀(尹翁歸)、조광한(趙廣漢)과 같은 인사들이 있어 그들이 남긴 공적은 모두 후세에 칭송되었다. 명신들이 많기로는 이때가 무제 시대의 다음이 된다.  

< 공손홍주보언열전 끝 >

주석

1) 치천국(菑川國)/ 한문제 16년 기원전 164년, 임치군(臨淄郡)을 나누어 동쪽에 치천국을 세우고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의 아들 유현(劉賢)을 치천왕으로 봉했다. 서한말까지 제후국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동한이 서자 동해군(東海郡)에 편입되었다.

2) 태상(太常)/ 종묘(宗廟)의 의례(儀禮)를 관장했던 한나라의 구경(九卿) 중의 하나로 진나라 때 봉상(封常)으로 불리다가 한경제 때 태상으로 바꿨다. 봉록은 2천석으로 일반적으로 충효(忠孝)스럽고 몸가짐이 조신하고 덕이 높은 사람을 임명했다

3) 좌내사(左內史)/ 원래 진나라가 경사의 행정을 담당하도록 설치한 지방관으로 내사를 설치하여 한나라가 답습했다가 한경제 때 내사를 놔우내사로 분리했다가 한무제가 좌풍익(左馮翊) 우부풍(右扶風)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했다.

4) 주작도위(主爵都尉)/ 한경제 중원(中元) 원년 기원전 144년 주작중위를 개칭해서 설치하고 제후들의 봉작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했다. 녹봉은 2천석으로 구경 중의 한 명이다. 무제 태초(太初) 원년 기원전 104년, 다시 우부풍(右扶風)으로 개편되어 내사(內史)의 좌우의 관할 중 우측 땅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의 명칭이 되고 봉작에 관한 일은 대홍려(大鴻臚)가 담당하게 되었다. 남월열전(南越列傳)에 주작도위 양복(楊僕)이 루선장군(樓船將軍)에 임명되어 남월 정벌에 나섰다.라는 기사가 있다.

5) 삼귀(三歸)/ 원래의 뜻은 관자(管子). 산지수(山之數) 편에 ‘ 백성들은 산에서 얻은 이익의 10분의 3을 위에 바쳐야한다.’는 말에서 즉 백성들은 10분 3의 세율로 조세를 바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에 관중과 관련되어 여러 가지 말로 바뀌었다. ➀ 관중이 채읍 이름 ➁관중의 집에 세운 대의 이름 ➂ 관중이 금은을 보관했던 부고의 이름 ➃ 세 명의 정실을 위해 지은 세 채의 저택을 지었다는 뜻이다. 통상적으로 대의 이름이거나 세 명이 정실을 거느렸다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6) 회남왕과 형산왕의 모반사건/ 당시 회남왕과 형산왕 고조의 막내 아들 회남여왕(淮南厲王) 유장(劉長)의 아들들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열전58. 회남형산 참조

7) 삼왕(三王)/ 하우(夏禹), 성탕(成湯), 주문왕(周文王) 의 세 성왕을 가리킨다.

8) 부신지병(負薪之病)/ 나무를 하다가 얻은 지병 즉 가난한 생활로 인해 생긴 병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9) 구마지심(狗馬之心)/ 개나 말이 그의 주인을 위해 정성을 다해 노력하는 행위를 뜻한다.

10) 구학(溝壑)/ 원래의 뜻은 물건을 버리는 곳이라는 뜻이나 까닭없이 물건을 받는 사람을 구학이라고 한다.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가 몹시 곤궁하게 살았음으로 전자방(田子方)이 갖옷을 보내면서 자사가 받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 나는 남에게 빌려준 물건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일단 남에게 주는 물건은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라고 했다. 자사가 사양하고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 망령되게 주는 것은 버릴 물건을 구학(溝壑)에 버림만도 못한 것인데 , 내 아무리 가난해도 차마 내 몸으로 구학을 만들 수는 없다.’라고 한 고사에서 나온 성어다.

11) 원광(原鑛) / 한무제의 두 번 째 연호로 기원전 134-129년 동안의 기간이다.

12) 사마법(司馬法)/ 사마양저병법을 말한다. 원래 150편이 있었다고 했으나 지금은 대부분 망실되고 5편 밖에 전하지 않는다. 인용되는 부분은 <사마법 ․인본편(仁本篇)>이다.

13) 대개(大凱)/ 주나라의 음악으로 군대가 천자에게 개선을 아뢰면서 연주했다.

14) 봄과 가을의 사냥/ 원문은 춘수추선(春蒐秋獮)이다. 중국고대에서는 4계절에 따라 각각 사냥을 행했는데 춘수, 하묘(夏苗), 추선, 동수(冬狩)라 하고 그 방법이 각각 달랐다. 춘수는 새끼를 밴 짐승은 사냥하지 않고 하묘는 농작물을 보호해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추선은 맹수를 사냥해서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동수(冬狩)는 사냥터를 포위해서 그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짐승을 사냥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짐승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자연계의 생태계에 평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15) 북하(北河)/ 옛 황하의 지류 이름으로 청해성에서 발원한 황하가 북류하여 내몽고 지역으로 접어들면 지금의 임하시(臨河市) 부근에서 음산(陰山)산맥을 사이에 두고 남북 두 곳으로 흐르다 오납특전기(烏拉特前旗)에서 다시 합류한다. 그 북쪽의 지류 이름을 북하(北河), 남쪽의 것을 남하(南河)라고 했다.

16) 황현(黃縣)/ 지금의 산동성 황현(黃縣)으로 연태시 서 50키로

17) 수현(腄縣)/ 지금의 산동성 연태시 남이다.

18) 낭야(琅邪)/ 지금의 산동성 청도시 남서 50키로

19) 종(鐘)과 석(石)/ 진한 때 한 말[두(斗)]은 1.94리터이고 1곡(斛)은 열 말이다. 1 종은 6곡 4말 즉 64말이고, 석(石)은 10말이다. ,

20)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大同)으로 한고조 유방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진격했다가 한고조의 선발대가 흉노의 기병에게 포위되자 백등산에 올라 7일 동안 외부와의 연락이 끊겨 위험에 처했다가 흉노의 선우의 왕비 연지(閼氏)에게 뇌물을 바쳐 간신히 탈출했다. 이 일을 평성의 치욕이라고도 한다.

21) 손자병법 용간(用間)에 실려 있는 문구다.

22)위타(尉陀)/ 조타(趙陀)의 별명이다. 지금의 광동성을 포함한 호남성 이남 일대를 평정한 진시황(秦始皇)은 그 땅에 남해(南海)·계림(桂林)·상(象)의 3군(郡)을 설치했다. 진시황이 죽고 중국이 분열되자 남해군위(南海郡尉)를 대행한 용천현령(龍川縣令) 조타가 BC 203년에 지금의 광동성 광주시(廣州市)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진나라의 멸망과 함께 계림·상의 2군을 합쳐 남월국(南越國)을 창건하고 무왕(武王)이라 칭했다.

23)장한(章邯)/ 중국 진(秦)나라 말기의 장수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일으킨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환관(宦官) 조고(趙高)의 박해(迫害)를 받아 항우(項羽)에게 투항하였다. 기원전 205년 한고조 유방(劉邦)이 한중에서 나와 삼진을 평정할 때 한군(漢軍)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자살하였다.

24) 삼진(三晋)/ 원래 춘추시대 북방이 패권국 진(晉)나라의 한위조(韓魏趙) 삼가(三家)가 진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한(韓), 위(魏), 조(趙) 세 나라를 세워 전국시대를 열었다. 한위조 세 나라를 삼진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진섭과 같은 세력이 있는 사람이 일어나는 대신 한위조와 같은 강국이 반기를 드는 경우를 비유했다.

25) 금석사죽(金石絲竹)/ 금석(金石)은 타악기, 사(絲)는 현악기, 죽(竹)은 관악기를 칭하는 말로 음악을 통칭하는 말이다.

26) 전상(田常)/ 춘추 때 제나라의 대신으로 원래 이름은 항(恒)이었으나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을 휘(諱)하여 상(常)이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다. 전걸(田乞)의 아들로 제간공(齊簡公 : 재위 전484-481년) 밑에서 상국이 되어 감지(闞止)와 정권을 다투었다. 그 부친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 줄 때 큰 되를 사용하고 받을 때는 작은 되를 사용하도록 하여 민심을 얻은 후 기원전 481년 군사를 일으켜 제간공(齊簡公)과 감지(監止)를 죽이고 간공의 동생 평공(平公) 오(驁)를 대신 세우고 자신은 상국(相國)이 되어 제나라의 정권을 전횡하였다. 전상 이후 그의 5대 손인 태공(太公) 전화(田和)가 기원전 376년에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강씨들의 정권을 대신했다.

27) 종거(鐘虡)/ 종을 거는 틀을 거(虡)라고 한다. 즉 종과 거다.

28) 도수(睹睢)/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대략 기원전 214년에 죽은 진나라의 중삳.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도수를 대장으로 삼아 50만의 군대를 5로로 나누어 영남(嶺南)의 남월 즉 백월(百越) 땅으로 진군시켰다. 그 전에 진시황은 대군을 수송하기 위해 사록(史祿)이라는 토목기술자에게 군졸들을 딸려 보내 상수(湘水)와 이수(漓水)을 연결하는 갑문식 운하인 영거(靈渠)를 건설하여 진나라 군사들의 보급을 확보했다. 백월의 일족인 서구(西歐)로 진공하여 그들의 군장 역우송(译吁宋)을 살해했으나 서구의 월인들은 항복하지 않고 밀림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군장을 추대하고 진나라 군사들에게 저항했다. 서구의 월인들은 그들의 뒤를 쫓아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밀림으로 들어온 진군을 향해 야습을 감행하여 도수를 죽이고 진군을 몰살시켰다. 진시황이 임효(任囂)와 조타(趙陀)를 증파하여 서구의 월인들의 저항을 평정하고 영남지구를 완전히 진나라 영토에 복속시켰다.

29) 영거(靈渠)/ 진시황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지 3년 후인 기원전 218년에 사록(史祿)이라는 토목기술자를 보내 건설하기 시작해서 기원전 214년에 완성한 운하다. 지금의 광서성 계림시(桂林市) 동북 50키로의 흥안현(興安縣)의 산악지대를 흐르던 상수(湘水)와 주강(珠江)의 지류인 이강을 연결하여 건설한 갑문식운하다. 진시황은 이 운하를 이용하여 도수(屠睢)를 대장으로 삼아 50만의 군사를 주어 영남을 정복하도록 하고 그곳에 계림(桂林), 남해(南海), 상(象) 등의 세 군을 설치했다. 이후로 영거는 중국과 영남 사이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역할을 했다.

30) 예주(濊州)/ 맥(貊)족의 거주지로 즉 동이(東夷)를 말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부여전(夫餘傳)>에 ‘ 부여국에는 예성(濊城)이라는 이름의 옛성이 있는데 원래 예맥의 땅이다라고 했다. 조선을 멸한 한무제는 그 땅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단단대령(單單大嶺 : 지금의 개마고원 혹은 태백산맥)) 이서의 땅을 모두 관할로 삼게 하고 그 이동의 땅은 7개의 현을 두어 도위(都尉)의 관할 하에 두어 모두 예(濊)라는 지명으로 불렀다. 그 땅은 지금의 한반도의 강원도와 그 북쪽 일부 땅이다라고 했다.

31) 롱성(蘢城)/ 한서에는 “용성(龍城)”으로 적혀 있고 또는 “롱(蘢)”으로도 적혀있다. “서방(西方)의 호(胡)는 모두 용신(龍神)을 섬기니 이 때문에 대회를 여는 곳을 용성(龍城)이라 불렀다.”고 했다.「후한서」에서 “흉노의 풍속에서는 매년 세 번의 용사(龍祠)를 지내며 천신(天神)에 제사지낸다.”라고 했다. 지금의 몽고공화국 중앙부를 흐르는 Tamir 강(塔米尔河) 부근으로 비정된다.

32) 원삭(元朔) 2년 기원전 127년 한무제 재위 14년, 주보언의 주장을 받아들인 한무제는 조칙을 발하여 추은령(推恩令)을 시행했다. 제후들에게 분봉된 영지를 적장자에게만 물려주지 말고 다른 자제들에게도 나누어주어 황제의 은덕을 널리 베풀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33) 유정국은 고조의 먼 친척으로 여태후에 의해 연왕(燕王)에 봉해진 유택(劉澤)의 손자다. 그는 그의 부왕 유가(劉嘉)의 희첩을 간음하고 자신의 세 딸과도 통간했으며 제수를 빼앗아 자기의 첩으로 삼았다. 이에 자기의 비행을 고변하려고 했던 비여(肥如)의 현령(縣令)을 죽여 입을 막았다. 비여현령의 동생들이 조정에 연왕의 비행을 고발했음으로 주보언이 이를 밝히자 연왕은 자살했다.(荊燕世家 참조)

34) 오정식(五鼎食)/ 귀한 신분이 되어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원래 오정이란 고대의 제후들이 연회를 벌릴 때 소, 돼지, 닭, 사슴, 생선 등의 다섯 가지 고기를 오정에 각각 담아 음식으로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35) 유차경(劉次景)/ 고조의 서장자 유비(劉肥)의 증손자다. 제왕의 자리는 유비의 아들 양허후(楊虛侯) 유장려(劉將閭)로 이어졌다가 다시 의왕(懿王) 유수(劉壽)를 거쳐 원광(元光) 4년(전 131년)에 유차경이 올랐다. 그의 누이와 통간한 경차를 주보언이 알고 무제에게 고하자 무제는 주보언을 제나라 상국으로 임명하여 내려 보내 그 일을 조사하라고 맡겼다. 주보언이 추궁을 받은 제왕은 자살하고 말았다.(제도혜왕세가 참조)

36) 효현(洨縣)/ 지금의 안휘성 고진현(固鎭縣) 동쪽이다.

37) 태황태후(太皇太后)/ 당시의 황제인 한평제(漢平帝)의 조모인 한성제(漢成帝)의 황비 왕정군(王政君)이다. 한성제는 한무제 이후 소제(昭帝), 선제(宣帝)를 거쳐 , 원제(元帝)를 이었고 평제의 뒤는 애제(哀帝)를 거쳐 평제로 이어졌는데 평제가 재위 5년 만에 죽고 아들 유영이 어렸음으로 당시 승상 왕망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여 서기 9년 신왕조가 시작되었다.

38) 대사도(大司徒)/ 원수(元壽) 2년(기원전 1년), 한애제 2년 승상을 개칭하여 대사도라고 했다. 대사공(大司空)/ 수화(綏和) 원년(기원전 8년) 한성제 24년 어사대부를 개칭하여 부른 명칭이다. 후에 대자를 뺀 사공은 통상 공부상서를 의미했다.

39) 이하의 문단은 한원제 시중(始中) 연간(서기 1-5년)에 반포한 글로써 후인이 한서(漢書) 공손홍전(公孫弘傳)) 말미에 부기하여 공손홍의 행적을 찬미했다. 당시 대사도는 마궁(馬宮)이고 대사공은 견풍(甄豊)이었다.

40) 걸해골(乞骸骨)/ 해골을 빈다는 뜻으로, 늙은 신하가 나이가 들어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주군에게 맡긴 몸이나 해골이나마 돌려주어 고향으로 보내달라는 뜻으로 사직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진평의 이간책에증 빠진 항우가 범증을 의심하자 범증이 항우에게 사직을 청하며 했던 말이다. 범은 고향 팽성으로 돌아가다가 울분에 찬 나머지 등창이 나서 도중에 죽었다.

41) 공거(公車)/ 궁궐의 사마문을 관장하고 야간에 궁내를 순시하며 상서와 공물들을 관리하는 관리다. 장관은 공거령(公車令)으로 질록(秩祿)은 6백석이다.

42) 상서(尙書)/ 전국 때 설치한 관직명으로 주서(主書) 혹은 장서(掌書) 등의 이름으로 호칭되었다. 제후들의 문서를 관장했다. 진대에 이르러 소부(小府) 내에 상서를 설치하고 속관으로 령(令)과 승(丞)을 두고 표장과 상소문을 관장하게 했다. 진나라의 제도를 답습한 한 대에 이르러 상서 4인으로 상시(常侍), 이천석(二千石), 민(民), 객(客) 등의 사조(四曹)를 두었다가 무제 때에 한 명을 더 추가하여 5인으로 기구를 확대하고 1인은 상서복야(尙書僕邪)로 칭했다. 이후로 상서는 궁정 내의 정치기구로 자리잡아 권력이 점차 증대되었다.

43) 반고(班固)/ 후한의 역사가로 자는 맹견(孟堅)이고 섬서성 함양(咸陽) 출신이다.32년에 태어나서 92년에 죽었다. 역사가 반표(班彪)의 아들이고. 서역도호(西域都護)를 지낸 반초(班超)의 형이며 여류역사가 반소(班昭)의 오빠다.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이어 고향에서 《한서(漢書)》 편집에 종사하였으나, 62년경 국사를 개작(改作)한다는 중상모략으로 투옥되었다. 반초의 노력으로 명제(明帝)의 용서를 받아, 20여 년 걸려서 《한서》를 완성하였다. 79년 여러 학자들이 백호관(白虎觀)에서 오경(五經)의 이동(異同)을 토론할 때, 황제의 명을 받아 《백호통의(白虎通義)》를 편집하였다. 화제(和帝) 때 두헌(竇憲)의 중호군(中護軍)이 되어 흉노 원정에 수행하고, 92년 두헌의 반란사건에 연좌되어 옥사하였다. 문학 작품에 《양도부(兩都賦)》 등이 있다.

44) 홍점지익(鴻漸之翼)/ 점(漸) 점차적으로 높이 날아오르는 것으로 재주가 점차적으로 높이 오를 수 있는 기러기의 날개와 같이 크다는 뜻이다.

45) 부열(傅說) /하나라의 무정제(武丁帝)가 즉위하여 쇠락해진 은나라를 부흥시키려고 하였으나 자신을 보좌해줄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冢宰)에게 맡겨놓고 나라의 기풍을 유심히 살폈다. 무정제가 꿈속에서 성인을 만났는데 그 이름을 열(說)이라 하였다. 무정제는 꿈에서 본 열의 모습을 대신과 관리들 속에서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백관들에게 나라 밖에서 찾아보게 했는데 드디어 부험(傅險)이란 곳에서 열을 찾아냈다. 열은 죄를 짓고 노역에 끌려나가 부험에서 길을 닦고 있었다. 무정제가 보고 “ 바로 이 사람이 내가 꿈속에서 본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과연 성인이었다. 이에 열을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으니 은나라는 훌륭히 다스려졌다. 무정제는 열을 부험이라는 곳에서 찾았다하여 그를 부열(傅說)이라고 불렀다.

46) 영척(寧戚)/ 춘추 때 제(齊)나라의 대신이다. 원래는 위(衛)나라 출신으로 집이 가난하여 수레를 끌어 먹고 살았다. 후에 제나라로 이주해서 예전처럼 수레를 끌었다. 한 번은 수레에서 내려 소를 돌보면서 쇠뿔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는데 마침 지나가던 제환공이 듣고 관중에게 명하여 맞이해오라고 했다. 영척을 접견한 환공은 그가 현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 즉시 상경에 임명했다고 후에 상국으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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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급정열전(汲.鄭列傳)60

1329. 正衣冠立于朝廷(정의관립우조정), 의관을 바르게하고 조정에 서면 1330. 而群臣莫敢言浮說(이군신막감언부설), 여러 신료들이 이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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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순리열전(循吏列傳)59

열전59 循吏(순리) 1324. 奉法循理之吏(봉법둔리지리), 법을 받들어 도리를 밝히는 관리들은 1325. 不伐功矜能(불벌공긍능), 자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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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9. 黥布叛逆(경포반역), 경포가 반역을 일으키자 1320. 子長國之(자장국지), 고조의 아들 유장(劉長)이 그 땅을 봉지로 삼고 1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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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57. 사마상여(司馬相如) 1313. <子虛>之事(<자허>지사) <자허부(子虛賦)>에 실린 일과 1314. <大人>賦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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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10-08-26
[일반] 조선열전(朝鮮列傳) 55

열전55. 조선(朝鮮) 1. 朝鮮王滿者(조선왕만자), 조선왕 위만은 ▶조선 : 사기정의(史記正義)에 고려의 도읍은 평양성(平壤城)이며, 평양
운영자 10-08-25
[일반] 동월열전(東越列傳) 54

열전54. 동월(東越) 1300. 吳之叛逆(오지반역), 오나라가 반역을 일으키자 1301. 甌人斬濞(와인참비), 구인들은 오왕 비의
운영자 10-08-25
[일반] 남월열전(南越列傳) 53

열전53. 남월(南越) 1296. 漢旣平中國(한기평중국), 한나라가 중국을 평정하자 1297. 而佗能集楊越以保南藩(이타능집양월이보남
운영자 10-08-25
[일반]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52.공손홍주보언(公孫弘主父偃)

열전52. 公孫弘主父偃(공손홍주보언) 1293. 大臣宗室以侈靡相高(대신종실이치미상고), 조정대신들이건 황실의 종친들이건 서로 다투어 사치
운영자 10-08-24
[일반] 위장군표기(衛將軍驃騎列傳) 51. 衛靑·霍去病(위청곽거병)

열전51. 衛靑·霍去病(위청곽거병) 1287. 直曲塞(직곡색), 구불구불한 변새의 길을 똑바르게 했으며 1288. 廣河南(광하남), 하남의
운영자 10-08-23
[일반] 흉노열전(匈奴列傳) 50

열전50. 흉노(匈奴) 1282. 自三代以來(자삼대이래), 삼대이래로 1283. 匈奴常爲中國患害(흉노상위중국환해); 흉노는 항상 중국에
운영자 10-08-23
[일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49. 이광(李廣)

열전49. 李廣(이광) 1277. 勇于當敵(용우당적), 적을 만나면 용감했고 1278. 仁愛士卒(인애사졸), 휘하의 군졸들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랑
운영자 10-06-16
[일반]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48. 한안국(韓安國)

열전48. 한안국(韓安國) 1274. 智足以應近世之變(지족이응근세지변), 지혜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았고 1275. 寬足用以得人(관족용이
운영자 10-06-16
[일반]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47. 두영과(竇嬰) 전분(田蚡)

열전47. 두영전분(竇嬰田蚡) 1269. 吳楚爲亂(오초위란), 오초가 연합하여 란을 일으켰을 때 1270. 宗屬唯嬰賢而喜士(종속유
운영자 10-06-15
[일반] 오왕비열전(吳王劉濞列傳) 46

열전46. 吳王劉濞(오왕유비) 오왕(吳王) 비(濞)는 고제(高帝)의 형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고제 7년 기원전 200년, 천하를 평정한 고
운영자 1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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