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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왕비열전(吳王劉濞列傳)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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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46. 吳王劉濞(오왕유비)

오왕(吳王) 비(濞)는 고제(高帝)의 형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고제 7년 기원전 200년, 천하를 평정한 고제가 유중을 대왕(代王)에 봉했다. 흉노가 대(代)를 공격하자 유중이 굳게 지키지 못하고 나라를 버린 채 샛길을 이용하여 낙양으로 도망쳐 천자에게 돌아갔다. 고제는 골육이라 유중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왕을 폐하고 합양후(郃陽侯)로 삼았다.

고제 11년 기원전 196년 가을,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켜 동쪽의 형(荊)1) 땅을 병합하여 그곳의 군사를 빼앗은 후에 서쪽으로 나아가 회수(淮水)를 건너 초(楚)2) 땅을 공격했다. 고제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기 위해 출전할 때 유중의 아들 유비(劉濞)는 당시 패후(沛侯)의 신분이었다. 나이 20의 약관의 나이에 용기와 힘을 갖춘 유비는 고제의 기장(騎將)이 되어 영포의 군대를 기현(蘄縣)3)의 서쪽 회추(會甀)4)에서 격파했다. 싸움에서 진 영포는 달아났다.

영포에 의해 살해된 형왕(荊王) 유고(劉賈)5)에게 후사가 없었다. 이에 황제는 민첩하고 사나운 오나라의 회계(會稽) 사람들을 걱정했으나6) 그들을 누를만한 장년이 된 아들은 없고 모두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유고의 형국(荊國)을 오국(吳國)으로 개명하고 패후(沛侯)의 신분에 있던 유비를 오왕(吳王)으로 세워 3군7) 53개 성을 다스리게 했다. 고제가 유비를 이미 오왕에 봉하고 왕의 인장을 수여하면서 그의 관상을 보고 말했다.

“ 너의 관상에 모반할 상이 있다. ”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후회했지만 이미 왕으로 봉했음으로 그의 등을 두드리며 경계의 말을 해 주었다.

“ 한나라에서 앞으로 50년 뒤에 동남쪽에 난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아마 너일 것이다. 그러나 천하는 유씨 성의 한 집안 것이니 삼가 모반하지 말라”

유비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대답했다.

“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효혜제와 고후(高后)의 때에 이르자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었고 군국이 제후들은 각기 그 백성들을 어루만지는데 힘썼다. 오나라는 예장군(豫章郡)에 구리 광산이 있었음으로 오왕은 천하의 도망자들을 모아 사전(私錢)을 주조하게 하고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어 재정에 충당했음으로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지 않고도 나라는 부유했다.

효문제 때 오나라의 태자가 경사에 들어와 조현을 올린 후에 황태자를 곁에서 모시면서 술을 마시며 장기를 두었다. 오나라의 태자를 가르치는 사부들은 모두 초나라 출신들로써 모두 민첩하고 사나웠으며 또한 오나라 태자도 평소에 거만했다. 장안으로 들어와 기거하던 오나라의 태자와 황태자가 장기를 두다가 다투었다. 오나라 태자가 매우 불손했음으로 황태자가 장기판을 던져 죽였다. 그래서 한나라 조정은 오나라 태자의 시신을 오나라에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이윽고 태자의 시신이 오나라에 당도했으나 오왕이 노하여 말했다.

“ 천하는 유씨의 것인데 장안에서 죽었으면 장안에서 장례를 치러야지 하필이면 이 먼 곳까지 보내 치르게 할 필요가 있는가? ”

그리고는 태자의 시신을 장안으로 돌려보내 그곳에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 오왕이 그 일로 인해 점점 번신(藩臣)으로써의 예를 지키지 않게 되고 결국은 병을 칭하고 조현을 행하지 않았다. 오왕이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병을 칭하고 조현을 행하지 않는다고 의심한 조정은 사람을 보내 확인한 바 오왕은 병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오나라에서 오는 사자들이 들어오는 족족 붙잡아 죄를 물었다. 오왕이 두려워하여 모반할 생각을 더욱 심하게 했다. 후에 가을에 행하는 조현에 다시 다른 사람을 대신 사자로 보내오자 황제가 또다시 오나라 사자를 문책했다. 사자가 대답했다.

“ 왕께서는 실은 아프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많은 오나라의 사자를 잡아 문책함으로 오왕께서 두려워하여 병을 칭한 것입니다. 옛날에 ‘깊은 연못 속의 고기를 본 사람은 상서롭지 못하다.’8)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 날, 저희 오왕께서 거짓 병을 앓으신 이유는 거짓말이 탄로나서 문책을 당하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하게 되어 더욱 문을 굳게 닫고 황제께서 죽이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어쩔 수 없이 꾀를 낸 것입니다. 오로지 황제께서는 옛일은 잊으시고 그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

그래서 천자는 오나라 사자를 사면하고 돌아가게 하면서 오왕을 위해 궤장(几杖)9)을 하사하여 나이가 많음으로 조현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을 내렸다. 죄를 용서받은 오왕은 모반할 생각을 차츰 그만 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구리와 소금으로 재정을 충당하여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걷지 않았고 사병으로 병역에 복역한 자에게도 대역금(代役金)10)을 지불하고 남을 대신해서 병역에 복무한 자는 그때마다 시가에 따라 급여를 지불했다. 매년 때가 되면 나라 안의 인재들을 찾아 안부를 묻고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에게도 상급을 내렸다. 다른 군국의 형리들이 도망친 사람들을 추격하여 체포하려고 하면 그들을 금지시키고 도망자들을 내주지 않았다. 40여 년 동안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리자 그는 능히 오나라의 백성들을 부릴 수 있었다.

그때 태자의 가령(家令)이었던 조조(鼂錯)가 태자의 신임을 받아 여러 번에 걸쳐 오나라의 국세가 너무 큼으로 영토를 삭감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상서는 효문제에게도 올라갔다. 그러나 천성이 관대한 효문제는 차마 오나라를 벌주지 않았음으로 오나라는 날이 갈수록 전횡했다. 이윽고 효경제가 즉위하자 어사대부(御史大夫)11)에 오른 조조가 황제에게 상주했다.

“ 옛날 고제께서 처음으로 천하를 평정했으나 여러 형제들은 수가 적고 아들들은 어렸음으로 이에 같은 유씨 종족들을 대거 제후왕으로 봉했습니다. 그래서 서장자(庶長子)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는 제나라의 70여 개성의 왕이 되고, 동모제(同母弟)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는 초나라의 40여 개 성의 왕이 되었으며, 장조카 유비(劉濞)는 오나라의 50여 개 성의 왕이 되어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의 황족이 거느리고 있는 땅은 한나라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오늘 오왕이 황상의 옛날 태자시절 생긴 일을 구실로 병을 사칭하여 조현을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죄는 법에 따르면 주살에 해당되나 선황께서 차마 법을 집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궤장(几杖)을 하사하시고 덕을 후하게 베푸셨습니다. 마땅히 잘못을 고쳐 스스로를 새롭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왕은 더욱 오만방자하게 되어 광산에서 사전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어 생긴 돈으로 천하의 도망자들을 모아 반란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지금 봉지를 삭감하면 지금 반란이 일어나고 삭감하지 않아도 역시 반란이 일어납니다. 지금 삭감하면 반란은 빨리 일어나 그 피해는 적지만, 지금 삭감하지 않으면 반란은 늦게 일어나겠지만 그 피해는 클 것입니다.”

효경제 3년(전 154년) 겨울, 초왕이 조현을 올리기 위해 경사에 들어오자 조조는 초왕 유무(劉戊)12)가 옛날 박태후(薄太后)의 상중에 궁중에서 궁녀와 몰래 간음을 저질렀다고 하면서 주살할 것을 상주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사면령을 내렸으나 그 벌로 초나라는 동해군(東海郡)과 오나라는 예장군(豫章郡) 및 회계군(會稽郡)을 삭지했다. 그 전에 조왕(趙王) 유수(劉遂)13)가 죄를 지어 하간군(河間郡)을 삭지당하고,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이 매작(賣爵)과 간음(姦淫)한 일로 영지 6개 현을 삭지당한 일이 있었다.

한나라 조정은 마침내 오나라의 봉지를 삭지할 것을 의논했다. 이에 오왕 유비는 자기의 봉지가 계속 삭지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결국 이 일로 인하여 계획을 세워 모반할 것을 결심했다. 더불어 같이 일을 도모할만한 제후들이 없음을 생각한 오왕 유비는 교서왕 유앙(劉卬)이 용기와 기개를 갖추고 용병을 즐겨했기 때문에 제 땅의 여러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중대부 응고(應高)를 사자로 보내 회유하려고 했다. 응고는 오왕의 서한 대신 구두로 교서왕에게 오왕의 말을 전했다.

“ 오왕이 불초하여 머지않아 닥칠 우환을 걱정하여 감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저를 보내 그의 호의적인 마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 무슨 가르침이 있습니까? ”

“ 오늘 황제께서 간신들에게 현혹당하고 사악한 신하들에게 가려져서 사소한 것들을 좋아하시며 참언을 일삼는 도적같은 신하들의 말을 들으시고 계십니다. 이런 간신들과 사악한 신하들은 자기 멋대로 율령을 바꾸고 제후들의 봉지를 침탈해가며 요구하여 거두어가는 것들은 점점 많아지고 선량한 사람들을 죽이고 벌을 주는 일이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시정에 돌아다니는 말에 ‘쌀겨를 핥다보면 쌀까지 먹게 된다.’고 했습니다. 오와 교서는 그 이름이 제후들 사이에 이름이 나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이라고 조정의 감찰을 받게 되면 안녕과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왕께는 몸에 속병이 있어 20여 년간을 조현을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일로 조정의 의심을 받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명백하게 증명을 하지 못해 근심하고 있습니다. 오늘 어깨를 움츠리고 두 발을 오그리며 조심하고 있지만 오히려 용서받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으니 대왕께서는 작위(爵位)에 관한 일로 죄를 받아 봉지가 깎일 것이라는 소문이 제후들 사이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죄는 봉지를 깎일만한 일이 아니나 오히려 이 일로 인해 봉지가 깎이는 것만으로 그칠 일이 아닐 것 같아 걱정됩니다.”

“ 그렇소. 그런 일이 있었소. 그대라면 내가 장차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겠소?”

“미워하는 것이 같은 자는 서로 돕고, 좋아하는 것이 같은 자는 서로 붙들어 머물며, 뜻이 같은 자는 함께 이루고, 하고자 하는 일이 같으면 함께 길을 달려가며, 이익을 같이 하는 자는 서로를 위해 죽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오왕 자신도 왕께서 근심하고 계시는 걱정거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원컨대 시세의 순리를 쫓아 몸을 던져 천하의 근심거리를 제거해주시기 바랍니다. 생각하면 이것 역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교서왕이 놀라 두려운 기색을 띠고 말했다.

“ 과인이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소? 지금 황상이 비록 급하게 나를 압박한다고 해도 당연히 죽음이 있을 뿐이지 어찌 받들지 않는단 말이오? ”

“ 어사대부 조조가 천자를 미혹시켜 제후들의 봉지를 침탈하고 또한 충신들을 가리고 현인들의 앞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의 신료들은 그에 대해 질시하고 원한을 품고 있으며 제후들은 모두 배반할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이로써 세상의 일이 극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혜성이 하늘에 출몰하고 황충(蝗蟲)이 비번히 발생하니 이것은 만세에 한 번 있는 일입니다. 만백성이 고생하고 근심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성인이 몸을 일으켜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오왕께서는 조정 내부의 조조를 토벌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고, 밖으로는 대왕의 병거 뒤를 따라 천하를 뛰어다니려고 합니다. 대왕의 수레가 향하는 곳은 모도 항복할 것이며 대왕이 가리키는 곳은 모두 함락될 것인데 천하의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진실로 허락한다는 다행스러운 말을 해주신다면 오왕 전하께서는 초왕을 이끌고 함곡관을 공략하고 형양(滎陽)의 오창(敖倉)에 쌓여있는 곡식을 지키며 한군의 군사를 막고 군영을 설치해 대왕의 행차를 기다리겠습니다. 대왕께서 다행히 군영에 임해주신다면 천하를 차지할 수 있어 두 왕께서 분할하여 나누어 가질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

“ 좋소 ”

응고가 오나라에 돌아와 오왕에게 복명하자 오왕은 여전히 그가 거사에 참여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자신이 직접 사자가 되어 교서왕을 만나 결맹을 맺었다.

그때 교서왕의 신하 한 사람이 왕이 모반을 계획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했다.

“ 한 사람의 황제를 모시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오늘 대왕과 오왕이 서쪽으로 진격하여 설사 일이 성사된다 할지라도 두 군주께서 갈라서서 다투실 것이니 환란을 그곳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제후들의 봉지는 한나라가 직할하는 군의 10분의 2도 안 됩니다. 그럼에도 모반하신다면 왕의 태후님이 근심하실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

교서왕이 듣지 않고 즉시 사자를 치천(菑川), 고동(膠東)、제남(濟南)、제북(濟北) 등의 나라에 보내 모두 군사를 일으키기로 허락을 받고 말했다.

“ 성양(城陽)의 경왕(景王)은 의리가 있어 옛날 려씨들을 토벌했다. 그를 거사에 참여시키지 말고 일이 성사되어 사세가 정해지고 나서 나누어주면 될 것이다. ”

제후들은 이미 새로운 벌로써 영지를 삭감당했음으로 매우 두려워했음으로 조조를 심하게 원망했다. 이윽고 삭지령이 회계와 예장군에 전해지자 오왕이 즉시 군사을 일으켰다. 교서왕은 정월 병오(丙午) 일에 한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2천석 이하의 관리들을 주살했다. 이에 호응하여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 초왕, 조왕도 군사를 일으켜 서쪽의 장안을 향해 진군했다. 제왕 유장려(劉將閭)가 후회하고 약을 먹고 자살하여 약속을 배반했다. 제북왕은 그의 성이 파괴되어 미처 수리가 끝나기 전에 낭중이 그를 납치하여 지켰음으로 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 교서왕이 우두머리가 되어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 등을 이끌고 임치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조왕이 역시 반란에 참가하여 사자를 비밀리에 흉노에 보내 연합하려고 했다.

칠국이 군사를 일으키자 오왕은 그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면서 온 나라에 안에 명을 말했다.

“ 과인은 나이가 이미 62세가 되었으나 스스로 장수가 되었다. 과인의 어린 아들은 나이가 14세인데 사졸이 되어 역시 선봉에 섰다. 무릇 위로는 과인과 같은 나이에서부터 아래로는 과인의 어린 아들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싸움에 나서도록 하라! ”

그렇게 동원한 군사들은 20만 명에 달했다. 남쪽으로 사자를 보내 민월(閩越)과 동월(東越)에 보내자 두 나라도 역시 군사를 일으켜 오왕의 명을 따랐다.

효경제(孝景帝) 3년 기원전 154년 처음으로 광릉(廣陵)에서 군사를 일으킨 오나라가 서쪽으로 진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여 군사를 합해 그 세력을 키우고 사자를 제후들에게 보내 격문을 전했다.

“ 오왕 유비가 삼가 교서왕,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 조왕, 초왕, 회남왕, 형산왕(衡山王), 려강왕(廬江王), 그리고 돌아가신 장사왕(長沙王)의 왕자님께 묻사오니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한나라에 적신(賊臣)이 있어 천하에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으면서 제후들의 땅을 침탈하고, 관리들을 시켜 탄핵하고, 구속하고, 심문하고, 치죄를 자행하여 제후들을 능멸하고 있습니다. 제후들을 유씨들의 골육으로 대하여 예우하지 않고 선제의 공신들의 후손을 끊고 간악한 무리들을 천거하고 임명하여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어 사직을 위태롭게 만들려고 합니다. 황제폐하께서는 지금 병이 많아 정신을 잃어 일을 잘 살필 수 없습니다. 이제 군사를 일으켜 저 간악한 무리들을 주살하려고 하니 삼가 가르침을 바랍니다. 우리 오나라는 비록 협소하지만 땅은 3천리나 되고 백성들은 많지 않으나 정예스러운 병사들은 50만을 갖출 수 있습니다. 과인이 평소에 남월을 30여 년 동안 받들어 그의 군왕들은 모두 군사를 나누어 과인의 뒤를 따르기를 거절하지 않으니 그들로부터 30만의 군사를 더 얻을 수 있습니다. 과인이 비록 불초하나 이 몸을 바쳐 여러 왕들을 따르고자 합니다. 남월과 장사(長沙)가 접하고 있는 곳은 장사왕의 왕자께서 장사 이북의 땅을 평정한 후에 서쪽의 촉과 한중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동월왕, 초왕, 그리고 회남의 세왕께 고하건대 과인과 함께 서쪽으로 나아가고, 제나라의 여러 왕들과 조왕은 하간(河間), 하내(河內)를 평정한 후에 임진관(臨晉關)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낙양에서 과인과 합류하시기 바랍니다. 연왕과 조왕은 원래의 흉노와의 약속이 있으니 연왕은 대(代) 땅과 운중(雲中)을 평정한 후에 흉노의 군대를 모아 소관(蕭關)으로 들어가십시오. 우리는 곧바로 장안으로 달려가 천자를 바로잡고 고제의 사당을 안정시키겠습니다. 원컨대 여러 왕들께서는 힘써주십시오. 초원왕의 왕자, 회남의 세 왕들은 10여 년 동안이나 목욕과 머리 감는 일조차 잊으며 골수에 맺힌 원한을 한 번 풀려고 생각한지 오래 되었으나 과인이 아직 여러 왕들의 뜻을 알지 못해 감히 따르지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 왕들께서 능히 망하여 후사가 끊어진 나라를 존속케 하고, 약자를 도와 난폭한 자들을 벌주어 유씨들을 안정시킨다면 이는 사직이 바라는 바입니다. 우리 오나라가 비록 가난하나 과인은 의식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약하고 금전을 저축하며, 병사와 무기를 갖추고 양식을 저장하는 일을 밤낮으로 계속해서 30여 년이 지났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이 번 거사를 위해서였습니다. 원컨대 여러 왕들께서는 이것을 이용하는데 힘써 주시기바랍니다. 능히 대장을 참하거나 사로잡는 자에게는 황금 5천 근을 상금으로 주고 만호후에 봉하며, 별장(別將)의 경우는 황금 3천 근과 5천 호, 비장(裨將)의 경우는 2천근과 2천 호, 2천석의 관리는 천 근과 천 호에, 천석의 관리는 오백 근과 오백 호에 해당하는 열후에 모두 봉하겠소. 자기의 성읍이나 군대를 이끌고 항복해 오는 자로써 군졸이 만 명, 읍이 만 호인 경우는 대장을 참하거나 포로로 잡는 경우와 같이 대우할 것입니다.

군졸이나 읍호(邑戶)가 5천인 경우는 열장(列將)을 얻는 경우와 같이 대우하고 군졸이나 읍호가 3천인 경우는 비장을 얻는 경우와 같이 하고, 군졸이나 읍호가 천인 경우는 2천 석의 관리를 얻는 경우처럼 대우하겠습니다. 그 아래 하급관리들이 투항해오면 모두 등급에 따라 작위와 상금을 내릴 것입니다. 그 외에 모든 봉작과 상급은 지금의 한나라 군법에 정한 것보다 2배로 하겠습니다. 원래 작위와 식읍이 있는 자는 따지지 않고 그대로 두고 다시 그 위에 더하겠습니다. 원컨대 여러 왕들께서는 명을 사대부들에게 분명히 밝히십시오. 과인은 결코 속이지 않겠습니다. 과인의 금전은 천하의 어디를 가던 있을 것이니 반드시 오나라에서 가져갈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왕들은 오나라의 돈을 밤낮으로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상금을 주어야할 사람이 있으면 과인에게 알려주십시오. 과인이 달려가 주도록 하겠습니다. 삼가 알립니다.”

칠국의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보고하는 문서가 천자에게 보고되자 천자는 즉시 태위 주아부(周亞父)16)를 장군으로 삼아 36명의 장군을 통솔하게 하여 오초(吳楚)를 향해 진격시켰다. 곡주후(曲周侯) 역기(酈寄)는 조나라를, 장군 란포(欒布)는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대장군 두영(竇嬰)은 형양(滎陽)에 주둔시켜 제와 조 두 나라의 연계를 끊으라고했다.

오초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문서가 올라왔지만 아직 군사를 출동시키기 전으로 두영이 떠나기 전에 오나라 승상을 지냈던 원앙(袁鞅)이라는 사람을 천자에게 천거했다. 그때 원앙은 집에 있었음으로 천자의 조명을 받고 입조했다. 그때 마침 천자와 조조는 군대의 병력과 식량의 조달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황제가 원앙을 보더니 물었다.

“ 옛날 오나라 상국을 지낸 그대는 오나라의 대장군 전록백(田祿伯)이 어떤 인물인지 혹시 알고 있소? 그리고 지금 오초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아시오? ”

원앙이 대답했다.

“ 전록백이라는 인물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 오왕은 산에서 나는 구리로 화폐를 주조하고 바다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어 그 돈으로 천하의 호걸을 불러 모아 머리가 하얗게 된 나이에 거사를 했소. 일이 이와 같은데 그에게 완벽한 계책이 없다면 어찌하여 군사를 일으켰겠소? 어찌하여 그들이 무능하다고 하오?”

“ 오나라가 구리와 소금의 이득이 있다고 하지만 어찌 천하의 호걸들을 모을 수 있었겠습니까? 진실로 오왕이 천하의 호걸들을 끌어모았다면 그들 역시 의로써 오왕을 보좌했을 것임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나라가 불러 모은 자들은 모두가 무뢰한 자들 뿐이고 도망쳐 돈을 만드는 간사한 무리들로 그런 자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

조조가 듣고 거들었다.

“ 원앙의 말이 맞습니다. ”

황제가 원앙에게 물었다.

“ 무슨 좋은 계책이 있소?”

“ 원컨대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쳐주십시오. ”

황제가 사람들을 내보냈으나 조조는 물러가지 않고 혼자 남자 원앙이 다시 말했다.

“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남의 신하된 자가 알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황제는 조조에게 자리를 떠나라고 명했다. 조조는 빠른 걸음으로 동상(東廂)17)으로 물러나면서 심히 한스러워했다. 황제가 마침내 묻자 원앙이 대답했다.

“ 오초가 서로 주고받은 서한의 내용은 ‘고제께서 왕자들과 자제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오늘날 적신 조조가 제 멋대로 제후들의 잘못을 문책한다고 하면서 제후들의 땅을 삭탈하고 있다. ’라고 했습니다. 즉 오초가 반란의 명분으로 삼은 것은 서쪽으로 진군하여 조조를 주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자기들 봉지를 찾게 되면 군사를 해산할 것입니다. 지금의 유일한 계책으로는 조조를 참하고 사자를 오초칠국에게 보내 그들의 삭지를 회복시켜 준다고 한다면 병사들의 피를 칼에 묻히지 않고도 그들 군사들을 물러가게 할 수 있습니다. ”

황제가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마침내 입을 열어 말했다.

“ 진실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한 사람의 목숨에 연연하지 말고 천하에 사죄해야 한단 말이오? ”

“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 계책 외는 없사오니 황제께서는 심사숙고 하십시오.”

황제는 즉시 원앙을 태상(太常)18)으로 임명하여 오왕의 조카 덕후(德侯)19)를 종정(宗正)20)으로 삼았다. 원앙은 행장을 꾸려 사자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10여 일 후에 황제는 중위(中尉)를 시켜 조조를 불렀다. 중위는 조조를 속여 수레에 태워 동시(東市)로 나아갔다. 조조는 조복 차림으로 동시에서 처형되었다. 그리고는 황제는 즉시 원앙은 종묘를 받들고 종정은 황족들을 바르게 보좌한다는 유지를 내려 그들로 하여금 오나라 보내 원앙의 계책대로 고하게 했다. 이윽고 원앙의 일행이 오나라에 당도했을 때는 오초의 군사들은 이미 양나라의 보루를 공격하고 있었다. 종정은 오왕의 조카였음으로 먼저 들어가 접견한 오왕에게 절을 올려 황제의 명을 받들라고 말했다. 원왕도 함께 왔다는 말을 듣자 오왕은 그도 역시 자기를 설득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 내가 이미 동제(東帝)가 되었는데 아직도 내가 누구에게 올린단 말인가? ”

오왕이 원앙의 접견을 허락하지 않고 군중에 잡아두고 위협을 가하여 자신의 장군으로 쓰려고 했다. 원앙이 거부하자 오왕은 사람을 시켜 그를 지키게 하고 이어서 죽이려고 했다. 원앙은 밤을 이용하여 오왕의 진영을 탈출하여 도보로 도망치다가 양나라 군사들을 만나 장안으로 돌아와 오나라에서의 일을 복명했다.

  조후(條侯) 주아부(周亞父)가 육전승(六傳乘)을21)을 타고 출전하여 형양(滎陽)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과 합류하려고 했다. 주아부의 수레가 낙양(雒陽)에 이르렀을 때 극맹(劇孟)22)을 만나게 되자 기뻐하며 말했다.

“ 오초가 반란을 일으켜 내가 육전승(六傳乘)을 타고 가다가 이곳에 이르기는 했지만 안전하게 당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또한 제후들이 이미 극맹 당신을 데려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움직이지 않았소. 내가 형양에 주둔하면 그 이동은 전혀 걱정할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소. 이윽고 회양(淮陽)23)에 당도한 조후는 옛날 부친 강후(絳侯)의 문객이었던 등도위(鄧都尉)에게 물었다.

“ 무슨 좋은 수가 없습니까? ”

“ 오나라 군사들은 매우 정예함으로 그들과 예봉을 다툴 수 없고 초나라의 군사들은 경무장으로 조급하니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제가 장군을 위해 계책을 말씀드린다면 지금 군사를 이끌고 동북쪽으로 나아가 창읍(昌邑)24)에 누벽을 쌓고 양나라는 오나라에 맡겨버리십시오. 오나라는 필시 정예병들을 이끌고 전력을 다해 양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 사에 장군께서는 해자를 깊이파고 보루를 높여 굳게 지키고 있다가 발이 빠른 군사를 내어 회사구(淮泗口)25)를 막아 오나라 군사들의 양도를 끊으십시오. 오와 양 두 나라는 서로 싸움에 지치고 또한 오군은 양식이 바닥이 날 것입니다. 그때 온전하고 강한 군사로 극도로 지친 군사를 제압하는 경우가 될 것임으로 오군을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

“ 훌륭한 계책입니다. ”

조후가 등도위의 계책을 쫓아 창읍의 남쪽에 견고한 방벽을 세우고 경무장한 군사를 내어 오나라의 양도를 끊게 했다.

오왕이 군사를 발진할 때 오나라의 신하 전록백(田祿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전록백이 계책을 말했다.

“ 대군이 한 군데에 모여 서쪽을 진격하려고 하는데 특별한 계책이 없으면 공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5만의 장병을 주시면 별동대로 만들어 강수(江水)와 회수(淮水)를 돌아 북상하여 회남(淮南), 장사(長沙)를 점령하고 무관(武關)으로 들어가 폐하의 본대와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의 특별한 계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오왕의 태자가 반대하며 말했다.

“ 부왕께서는 반군의 이름으로 군사를 일으켰음으로 군사를 다른 사람의 지휘 하에 두는 일은 불가합니다. 이 사람 또한 부왕에게 반하면 그때는 어찌하시렵니까? 항차 다른 사람이 병권을 장악하여 단독으로 행동하면 얼마나 많은 다른 이해관계가 생길지 알 수 없으니 그것은 단지 명백한 손해일 뿐입니다.”

오왕이 결국 전록백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나라의 젊은 장군 환(桓)이 오왕에게 말했다.

“ 오나라 군사들은 보병이 많으니 보병은 험지에 이점이 많고 한군은 병거와 기병이 많으니 평지에 이점이 많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진군하다가 함락되지 않은 성이 있으면 곧바로 버리고 재빨리 서쪽으로 달려가 낙양의 무기고를 점거하고 오창의 양식을 군량으로 삼은 후에 산하의 험지에 의지하여 제후들을 호령하면 비록 관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해도 천하는 이미 평정된 것이나 다름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천천히 진군하시고 성읍을 공략하느라 오래 머무르시다가 한군의 병거와 기병이 당도하여 양나라와 초나라의 교외로 달려가게 되면 우리의 일은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양왕이 주위의 여러 노장들에게 물었다. 노장들이 말했다.

“이것은 한갓 어린아이가 무기를 들고 돌격하여 적의 예봉과 접전할 때나 쓰는 작전입니다. 어찌 원대한 계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래서 오왕은 환장군의 계책도 쓰지 않았다.

오왕은 모든 군사들을 통합하여 지휘하여 진군하다가 회수를 미처 건너기 전에 여러 빈객들을 장군, 교위(校尉), 후(候)26), 사마(司馬) 등으로 임명했으나 단지 주구(周丘)라는 사람만은 임용되지 못했다. 주구는 원래 하비(下邳) 사람으로 오나라에 망명하여 술장사를 하면서 품행이 좋지 않다고 소문이 나서 오왕이 박대하고 결국은 그를 임용하지 않았다. 주구가 오왕을 찾아와 말했다.

“ 신이 무능하여 죄를 받아 군중에 있으면서 임용되지 못했습니다. 신이 감히 장수의 자리를 구할 수 없으나 원컨대 왕께서 한나라의 부절한 개를 저에게 주시면 제가 반드시 왕께 보답하겠습니다. ”

그래서 오왕이 주구에게 부절을 주었다. 부절을 얻은 주구는 밤낮으로 말을 달려 하비로 갔다. 그때 하비 사람들은 오나라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하비의 전사(傳舍)27)에 당도한 주구는 현령을 불렀다. 현령이 들어오자 그의 죄명을 열거하고 따라온 종자들을 시켜 목을 벴다. 이어서 평소에 지방의 아전들과 친하게 지내던 그의 집안 형제들을 불러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 오나라가 반군을 일으켜 조만간에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그들이 오면 이곳 하비는 한 식경도 안 되어 도륙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먼저 항복하면 집안을 모두 완전하게 보전할 수 있고 현능한 자들은 모두 후에 봉해질 것이다. ”

이윽고 그들이 달려가 그 말을 전하자 하비의 모든 사람들은 항복하여 주구는 하루 밤 사이에 3만 명의 군사를 얻은 후에 그 사실을 오왕에게 보고했다. 이어서 그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의 나아가 성읍들을 공략하여 마침내 성양(城陽)에 이르렀을 때는 군사들은 10만 명으로 불어났다. 주구는 성양의 중위가 이끄는 군사를 격파했다. 그러나 오왕이 한군과의 싸움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는 거사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군사를 이끌고 하비로 돌아갔다. 하비에 미처 당도하기 전에 등창이 나서 죽고 말았다.

이월 중에 오왕의 군대가 이미 싸움에서 지고 패주하자 천자가 여러 장군들에게 제조(制詔)28)의 명을 내려 말했다.

“ 무릇 듣건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하늘이 복을 내려주고 그렇지 않은 자는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고 했다. 고황제께서 친히 공덕을 표창하여 제후들을 세웠는데 후사가 끊긴 조유왕(趙幽王)29)과 제도혜왕(齊悼惠王)은 왕위를 후손들에게 전하지 못했다. 효문제가 이를 가엽게 여겨 은혜를 베풀어 유왕의 아들 수(遂)를 조왕으로 세우고 도혜왕의 아들 유앙(劉卬) 등을 제후왕으로 세워 그들의 선왕의 종묘를 받들게 하고 한나라의 번국으로 삼으셨다. 그 덕은 하늘과 땅 만큼 크고, 해와 달처럼 밝다고 하겠다. 덕을 배반하고 의리를 저버린 오왕 비는 천하의 도망 다니는 죄인들을 불러 모아 천하에 통용되는 화폐를 문란하게 만들고 병을 거짓으로 칭해 20여 년 동안 조현을 행하지 않았다. 이에 관리들이 그의 죄를 열거하여 비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청했으나 효문황제께서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여 그가 잘못을 고쳐 올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오늘 날 오왕 비는 초왕 무(戊), 조왕 수(遂), 교서왕 앙(卬), 치천왕 현(賢), 교동왕 웅거(雄渠) 등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켜 대역무도한 짓을 행하고 군사를 일으켜 종묘를 위험에 빠뜨리고 대신들과 조정의 사자들을 죽였으며 천하 만민들을 겁박하고 죄없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또한 민가를 불태우고 분묘를 파헤치는 등 그 행위가 심히 포학했다. 지금 교서왕 등은 대역무도한 짓을 거듭 행하여 종묘를 불사르고 황실의 기물을 노략질했으니 짐이 이를 매우 애통해 하고 있다. 이에 짐은 정전에 감히 머무를 수 없어 소복을 입고 피해 있으니 장군들은 사대부들을 독려하여 반역도들을 공격하라. 반역도들을 공격하는 자들은 깊이 쳐들어가 많이 죽인 것을 공으로 여기겠으며, 사로잡은 자들 중에 비삼백석(比三百石) 이상의 역도들은 모두 죽여 놓아주지 말라! 감히 이 조서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이 조서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요참형에 처하리라!”

반란 초기에 오왕이 회수를 건너 초왕 유무(劉戊)와 함께 서쪽으로  진군하여 극벽(棘壁)31)을 함락키고 승세를 타고 전진할 때는 그 예기가 매우 날카로웠다. 양효왕(梁孝王)이 두려워하여 6명의 장군을 보내 오나라 군사를 맞이해서 싸우게 했으나 다시 양나라의 두 장군이 싸움에서 패하고 사졸들은 모두 달아나 양나라로 돌아왔다. 양왕이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조후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했으나 조후는 결코 응하지 않았다. 이에 조후에게 원한을 품은 양왕이 황제에게 보고하자 황제가 사자를 조후에게 보내 양나라를 구원하라고 명했으나 조후는 여전히 창읍을 굳게 지키기만 할 뿐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양왕이 한안국(韓安國)과 초왕에게 간하다가 살해당한 초나라 승상의 동생 장우(張羽)를 장군으로 삼아 간신히 오나라 군사를 얼마간 꺾을 수 있었다. 오나라 군사들이 서쪽으로 진격하려고 했으나 양나라가 굳게 지켰음으로 감히 서쪽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즉시 조후의 군영이 있는 쪽으로 진격하여 하읍(下邑)32)에서 조우했다. 오나라 군대가 싸우고 싶었으나 조후는 방벽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기만 하고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이윽고 오나라 진영에 군량이 떨어져 굶주리기 시작한 군사들이 여러 번 도전하다가 야음을 이용하여 조후의 방벽을 습격하기 위해 동남쪽 방향을 소란하게 했다. 조후가 방벽 서북쪽의 경계를 강하시키자 과연 오군은 서북쪽에서 공격해왔다. 오나라 군대는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많은 사졸들이 아사했으며 대부분은 흩어져 달아났다. 이에 오왕은 그 휘하 장사들 수천 명과 함께 야음을 틈타 도망쳐 강수는 건너 단도33)로 들어가 동월왕의 보호를 받으려고 했다. 동월에서 만여 명의 군사를 모을 수 있어 사람들을 시켜 도망치던 사졸들을 모으게 했다. 한나라 사자가 이익으로써 동월왕을 유혹하자 동월왕은 오왕을 속여 밖으로 나가서 군사들을 위로하는 오왕을 사람을 시켜 모극(矛戟)으로 찔러 살해했다. 동월왕이 오왕의 머리를 잘라 그릇에 담아 치전(馳傳)34)에 실어 한나라 조정에 보고했다. 오나라의 왕자 자화(子華)와 자구(子駒)는 도망쳐 민월(閩越)로 들어갔다. 오왕이 그의 군사들을 버리고 도망치자 그의 군대는 마침채 무너지고 속속 태위와 양나라에 투항했다. 초왕 유무는 그의 군대가 싸움에서 패하자 자살했다.

교서, 교동, 치천 등의 세 왕에 의해 포위 당해 공격을 받고 있던 제나라의 임치성은 3개 월이 지나도록 함락되지 않았다. 이윽고 한나라의 구원병이 당도하자 세 왕의 군대는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교서왕은 육단에 맨발로 짚 위에 앉아 물을 마시며 왕의 태후에게 사죄했다. 교서왕의 태자 유덕(劉德)이 말했다.

“ 한나라 군대는 멀리 왔기 때문에 제가 살펴보니 그들은 이미 지쳐있으니 기습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한군을 기습해서 혹시 이기지 못한다면 그때는 바다로 들어가 도망쳐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

교서왕이 대답했다.

“ 우리의 병사들은 이미 무너졌기 때문에 다시 일으킬 수 없다. ”

그리고는 태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나라 장수 궁고후(弓高侯) 한퇴당(韓頹當)35)이 교서왕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 황제의 명을 받들어 불의한 자를 주멸하고 항복한 자들은 그 죄를 사면하여 옛날의 지위를 돌려주려고 합니다. 항복하지 않으면 멸하려고 하니 왕께서는 어느 곳에 거하려고 하십니까? 회답에 따라 일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교서왕이 육단으로 고두(叩頭)를 행하며 한군의 벽루 앞에 와서 퇴당을 보고 말했다.

“ 신 유앙은 법을 받들어 삼가지 않고 백성들을 놀라게 했으며 장군으로 하여금 먼 길을 오는 수고로움을 끼쳐 궁벽한 나라에 임하게 만들었으니 감히 청컨대 저를 죽여 육젓을 담그는 형벌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궁고후가 군대를 지휘할 때 사용하는 쟁이와 북을 가지고 와서 교서왕을 보고 말했다.

“ 왕께서는 군사의 일로 고통을 받고 계신데 원컨대 군사를 일으킨 자초지종을 듣고 싶습니다. ”

교서왕이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 얼마 전까지 조조는 천자가 임용한 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고황제가 만드신 법령을 멋대로 바꾸어 제후들의 영지를 침탈했습니다. 이 앙(卬)을 포함한 여러 왕들이 그것이 잘못된 일로써 천하를 어지럽히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칠국이 군사를 일으켜 조조가 주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들으니 조조는 이미 주살되었다고 해서 이 앙을 포함한 여러 왕들은 이미 군사를 파해 돌아왔습니다. ”

퇴당이 말했다.

“ 왕께서 진실로 조조가 옳지 못했다고 생각했다면 어찌하여 황제께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병부도 받기도 전에 마음대로 군대를 동원하여 의로운 나라를 공격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왕의 뜻은 조조를 주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황제의 조서를 꺼내 교서왕을 위해 읽었다. 조서를 읽기를 마친 퇴당이 말했다.

“ 왕께서는 스스로 알아서 하십시오.”

교서왕이 대답했다.

“신과 같은 사람은 죽어서도 죄가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태후와 태자도 그 뒤를 따랐다. 교동, 치천, 제남의 왕들도 역시 자살하고 봉국은 폐해져 조정에 귀속되었다. 한편 장군 역기가 조나라의 도성을 포위한지 10개 월 만에 함락시키자 조왕은 자살했다. 제북왕은 협박을 받았다고 인정되었음으로 주살되지 않고 봉국을 치천으로 옮겼다.

  

처음에 오왕이 맨 먼저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의 군사와 합치고 다시 조나라와 연합했다. 정월에 기병하여 3월에 모두 싸움에 졌으나 조나라만은 후에 함락되었다. 다시 초원왕의 막내아들 유평(劉平)이 평륙후의 신분에서 초왕으로 올라 원왕의 후사를 잇게 했다. 오나라의 옛 땅에는 여남왕(汝南王) 유비(劉非)36)를 옮긴 후에 강도왕으로 이름을 바꾸게 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 오왕 유비가 왕이 된 것은 그의 부친이 유중이 강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능히 부세를 가볍게 거두고, 무리들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산과 바다의 이익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란의 싹은 그의 아들로 인해 일어났다. 장기를 다투는 데서부터 재난 일어나 결국은 그 뿌리마저 망하게 했다. 월과 가까이 하여 동종을 도모하려고 했다가 결국은 이족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조조는 나라의 먼 장래를 내다봤으나 화는 오히려 자신의 몸에 가까이 있었다. 원앙의 권모에 능하고 유세를 잘해 처음에는 총애를 받다가 후에 그 몸은 욕됨을 입었다. 그래서 옛날 제후들의 땅은 백리를 넘지 않았고 산과 바다가 있는 땅에는 봉하지 않았던 것이다. ‘ 이적들과는 친하게 지내지 말고 동족들과는 소원하게 지내지 말라’라고 한 만들은 어찌 오나라에만 해당되는 말이겠는가? ‘권모를 쓰는데 앞장서지 말라 그 화는 오히려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조조와 원앙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 오왕비열전 끝 >

주석

1) 형(荊)/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荊州市) 일대를 가리킨다.

2) 초(楚)/ 지금의 강소송 서주시(徐州市)로 초한쟁패시 항우가 도읍으로 삼았던 팽성(彭城)을 일대다.

3) 기현(蘄縣)/ 지금의 안휘성 북부의 숙주시(宿州市) 남쪽으로 지금의 지명도 기현이다. 진승이 진나라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대택향(大澤鄕)은 기현의 동쪽의 고을이었다.

4) 회추(會甀)/ 지금의 안휘성 기현집(蘄縣集) 서쪽이다.

5) 유고(劉賈)/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96년에 죽은 서한의 창업공신으로 제후왕이다. 한고조 유방의 사촌형제다. 한왕 원년 기원전 206년, 고조가 한중에서 나가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 장군이 되어 종군했다. 계속 동쪽으로 나가 항우를 공격할 때 전공을 쌓았다. 한왕 5년 기원전 202년 제후군과 힘을 합하여 해하에서 항우를 공격하여 격멸시켰다. 한고조 6년 한고조에 의해 형왕(荊王)에 봉해져 재위 6년 차에 반란을 일으킨 회남왕 영포이 공격을 받아 싸움에서 지고 도망치다가 부릉(富陵)에서 잡혀 살해되었다. 부릉은 지금의 강소성 홍택(洪澤) 서다.

6) 이 말은 한고조 유방과 천하를 놓고 다툰 항우와 강동 자제 8천 명으로 이루어진 초군의 주력군이 오나라의 회계군 출신임을 말한다. 한고조는 초한쟁패시 내내 용맹한 항우와 초나라 군사들을 매우 두려워했다.

7) 3군/ 동양군(東陽郡), 장군(鄣郡), 오군(吳郡)이다. 한서(漢書) 유비전의 기사다. 上患吳、會稽輕悍”(《漢書·吳王濞傳》,苦於自己兒子年幼,加之荊王劉賈無後,劉邦改荊國爲吳國,封劉濞爲吳王,統治三郡五十三城,以廣陵爲都。廣陵是戰國時期楚懷王熊懷在邗城舊址上所建之城,因爲這裏當時是一片丘陵,就取“廣被丘陵”之意而名。揚州別稱廣陵也就始於此時。 .

8) 원문은 察見淵中魚(찰견연중어),不祥(불상)이다. 한비자(韓非子) 세림(說林) 편에 나오는 말로 ‘ 군주가 신하의 은밀한 곳을 알게 되면 그 신하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고를 일으키게 되어 화란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9) 궤장(几杖)/ 궤(几)는 연로한 사람이 앉을 때 기대는 책상이고 장(杖)은 지팡이다. 옛날 왕조시대에는 나이든 사람을 공경한다는 표시로 왕이 직접 궤장을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10) 대역금(代役金)/ 원문은 천경(踐更)으로 자신이 직접 군영에 복무하는 자를 말하고 대역금을 내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복역시키는 자는 과경(過更)이라고 한다. 즉 자신이 직접 병역에 복무하는 자에게도 정부의 재정으로 대역금을 지불했다는 뜻이다.

11) 어사대부(御史大夫)/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진한시대의 중앙정부 최고의 관직이다. 관리의 감찰과 법의 집행, 중요문서와 도적(圖籍)의 관리 등을 맡았다. 군사를 담당하는 태위, 행정부의 장인 승상(丞相)과 함께 삼공(三公)이라고 칭했다.

12) 유무(劉戊)/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54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왕이다. 한고조 유방의 동모제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의 손자이고 유영(劉郢)의 아들이다. 한문제 6년(전 174년) 부왕의 뒤를 이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한경제(漢景帝) 3년 (전 154년) 한나라 조정이 그의 봉지에서 동해군(東海郡)을 삭감하자 불만을 품고 오왕 유비(劉濞)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역사상 이를 오초칠국지란(吳楚七國之亂)이라고 한다.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周亞父)를 대장으로 삼아 토벌군을 일으켜 결국 양도가 끊겨 싸움에 패한 유무는 자살했다.

13) 유수(劉遂)/ 한고조 유방의 아들인 유우(劉友)의 아들이다. 여후 7년 기원전 181년 그의 부왕 조유왕(趙幽王) 유우가 고후의 핍박을 받아 자살하자 한문제 원년(전179년) 유수가 그 뒤를 이어 조왕의 자리에 앉았다. 조왕 재위 26년(한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조조의 주장에 따라 상산군(常山郡)이 그의 봉지에서 삼감되자 원한을 품은 그는 오(吳)나라 및 흉노와 내통하여 반란을 모의했다. 그의 상국 건덕(建德)과 내사 왕한(王悍)이 간하여 그만둘 간했으나 두 사람을 살해하고 북흉노와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의 서쪽 변경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한나라 장군 역기(酈寄)가 이끄는 관군에게 포위를 당한 후에 공격을 당했다. 오초(吳楚)가 싸움에서 패하자 제나라를 격파한 한나라 장수 란포(欒布)의 공격을 받아 자살하고 말았다.

14) 원래 산동성의 제나라는 한고조 유방의 서장자 유비(劉肥)가 봉해진 나라다.(齊悼惠王世家) 기원전 179년 제도혜왕이 죽자 제왕의 자리는 아들 애왕(哀王) 유양(劉襄)에 이어졌다가기원전 178년 문왕(文王) 유칙(劉則)을 거쳐 다시 기원전 164년 유비의 아들 유장려(劉將閭)가 그 뒤를 이어져 기원전 154년에 발발한 오초칠국의 란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문제 2년 기원전 178년 여씨들의 반란에 공을 세운 도혜왕의 다른 아들인 유장(劉章)과 유흥거(劉興居)를 성양왕(城陽王)과 제북왕(齊北王)에 봉할 때 그들의 다른 형제들도 함께 봉했다.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의 형제들이 그들이다. 제북왕 유흥거는 기원전 177년 반란을 일으켜 살해당하고 그 자리는 동생 유지(劉志)가 이었음으로 오초칠국의 란 당시 제나라 지역의 제후왕들은 모두 제도혜왕의 일곱 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15) 회남의 세 세왕/ 회남왕(淮南王), 형산왕(衡山王), 려강왕(廬江王)을 말한다.

16) 주아부(周亞父)/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43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이며 장군이다. 지금의 강소형 퍠현(縣)인 패(沛) 출신으로 주발(周勃)의 아들이다. 그의 형 주승(周勝)이 주발의 작위인 강후(絳侯) 자리를 이었으나 후에 죄를 짓고 후의 작위를 잃었다. 주발의 공을 잊지 못한 한문제가 그의 재위 후원2년(전162년)에 주아부를 조후(條侯)에 봉했다. 이윽고 흉노가 대거 침공하자 그는 하남을 지키는 장수가 되어 세류(細柳)에 주둔하며 군령을 엄정하게 행했다. 세류는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서남이다.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문제가 친히 군영에 임하기 위해 전령이 먼저 고하려고 했으나 군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군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 우리는 단지 장군의 명만 따를 뿐이지 천자의 조명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문제가 이를 자랑스럽게 여겨 ‘ 주아부야말로 진정한 장수로다!’라고 칭찬했다. 후에 중위(中尉)가 되었다. 이윽고 문제가 죽고 경제가 서자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옳겼다.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태위(太尉)의 신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동진하여 오초(吳楚)의 반군을 공격하여 3개 월만에 평정하고 돌아와 승상이 되어 경제로부터 신임을 크게 받았다. 후에 경제가 율태자(栗太子)를 폐하자 그는 완강하게 반대했음으로 황제와 사이가 소원해졌다. 중원 3년(기원전 147년) 병을 칭하고 승상의 자리에 물러나 집에 은거했다. 후에 그의 아들이 황제가 사용하는 물품을 몰래 사들였다가 연좌되어 옥에 갇히자 음식을 끊고 죽고 그의 후국은 없어졌다.

17) 동상(東廂)/ 상(廂)은 중심이 되는 방이나 가옥의 곁채나 곁방을 말한다. 즉 궁궐의 동쪽 곁에 있는 대기실과 같은 방을 말한다.

18) 태상(太常)/ 종묘(宗廟)의 의례(儀禮)를 관장했던 한나라의 구경(九卿) 중의 하나로 진나라 때 봉상(封常)으로 불리다가 한경제 때 태상으로 바꿨다. 봉록은 2천석으로 일반적으로 충효(忠孝)스럽고 몸가짐이 조신하고 덕이 높은 사람을 임명했다.

19) 덕후(德侯)/ 원래 유비의 동생 유광(劉廣)을 덕후에 봉했으나 이 때는 유광은 죽고 그의 아들 유통(劉通)이 작위를 잇고 있었다.

20) 종정(宗正)/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정부기구로 원래 주나라의 소종백(小宗伯)이 그 효시다. 9경에 속하고 황실의 친족의 일을 주관하고 황족과 외척의 명부를 작성하고 관리했다. 황족들이 지은 범죄 중 곤형(髡刑) 이상의 형벌에 해당하는 것은 먼저 종백에게 고하고 다시 황제에게 보고하게 하고 일반 사법기관의 관리들은 심문할 수 없도록 했다. 녹봉은 중2천석이고 속관으로는 사공(司空), 령(令), 승(丞), 내관장(內管長) 등이 있었다.

21) 육승전(六乘傳)/ 고대에 역참(驛站)에 준비해 두고 정부의 공문을 전달하기 위한 6마리의 말이 끌었던 전거(傳車)를 말한다.

22) 당시의 유명한 협격으로 하남 일대에 명성이 대단했다.

23) 회양(淮陽)/ 회양국(淮陽國)의 치소로 지금의 하남성 회양시(淮陽市)다. 오초칠국의 란 때의 회양왕은 한경제의 동모제 유무(劉武)였다.

24) 창읍(昌邑)/ 지금의 산동성 거야현(巨野縣) 남쪽이다.

25) 회사구(淮泗口)/ 사수(泗水)가 남쪽으로 흘러 지금의 강소성 회음시(淮陰市) 서남쪽의 홍택호(洪澤湖)에서 회수에 유입되는 지점을 말한다.

26) 후(候)/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다 답습한 직관으로 변경지역 군(郡)의 도위(都尉) 밑에 후관(候官)을 설치하고 그 밑에 전투를 담당하는 후(候)와 봉화(烽火)를 담당하는 수(燧)를 거느리게 했다.

27) 전사(傳舍)/ 옛날 행인이나 손님을 위해 휴식을 취하게 하거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관사다.

28) 제조(制詔)/ 한나라 때 황제가 내린 명령으로 모두 네 가지로 구분되었다. 제(制)는 制書로 황제가 삼공을 통하여 주군에 전달하는 명령이고 조(詔)는 조서(詔書)로 황제가 일반 백성들에게 포고문을 통하여 명을 내리는 행위다. 에 해당하는 황제의 명령이다. 책서(策書)는 관리들의 임면에 관한 명령서이며 계서(戒書)는 자사나 태수들에게 훈계하는 명령이다. 한경제가 조와 제의 형식을 겸용하여 명을 내린 것은 칠국의 반란사건을 엄격히 다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29) 조유왕(趙幽王)/ 한고조의 6남 유우(劉友)로 고조 11년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다가 혜제(惠帝) 원년 기원전 194년 조왕(趙王)으로 봉국을 옮겼다. 기원전 181년 여후(呂后)가 자신의 전권(專權)에 반대한 그를 경사로 불러 연금시키고 굶겨죽였다. 시호는 유(幽)로 조유왕이다. 오초칠국의 란에 참가한 조왕 유수(劉遂)는 그의 아들이다.

30) 비삼백석(比三百石)/ 한나라 때 가장 낮은 관리의 녹봉이다. 삼공에 해당하는 만석부터 말단 관리인 비삼백석까지 있었다. 비삼백석의 녹봉은 실제로 월 37석으로 년봉으로는 444석이다. 한나라 때 1석은 지금이 단위로 말하면 약 20리터에 해당한다.

31) 극벽(棘壁)/ 지금의 하남성 영릉현(寧陵縣) 서남으로 당시 양(梁)나라 남쪽의 접경지역이었다.

32) 하읍(下邑)/ 지금의 안휘성 탕산현(碭山縣)이다.

33) 단도(丹徒)/ 지금의 강소성 단도현이다.

34) 치전(馳傳)/ 속도가 빠른 역마다.

35) 한퇴당(韓頹當)/ 한왕 신(信)의 아들이다. 한신이 싸움에서 죽고 흉노에 남겨진 퇴당은 후에 한나라에 귀순했다.(한신노관열전)

36) 유비(劉非)/ 한경제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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