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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47. 두영과(竇嬰) 전분(田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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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47. 두영전분(竇嬰田蚡)

1269. 吳楚爲亂(오초위란),

오초가 연합하여 란을 일으켰을 때

1270. 宗屬唯嬰賢而喜士(종속유영현이희사),

황실의 외척들 중에 오직 두영(竇嬰)만이 어질고 선비들을 좋아했으며

1271. 士鄕之(사향지),

선비들의 마음도 역시 그에게 쏠렸다.

1272. 率師抗山東滎陽(솔사항산동형양).

군사를 인솔하고 나아가 산동의 형양(滎陽)에서 오초의 반란군을 막았다.

1273. 作<魏其武安列傳>第四十七(작<위기무안열전>제사십칠)

이에 <위기무안열전> 제사십칠을 지었다.


위기후(魏其侯)1) 두영(竇嬰)은 문제(文帝)의 황비인 두태후(竇太侯)2)의 사촌오빠 아들이다. 두씨들은 조상 대대로 관진(觀津)3)의 세족들이었다. 문제 때 두영은 오(吳)4)나라의 상국이 되었으나 병으로 면직되었다.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그는 첨사(詹事)5)가 되었다.

양효왕(梁孝王)6)은 경제의 동모 동생으로 그 모친 두태후가 극진히 사랑했다. 양효왕이 황제에게 조현을 올리기 위해 상경했을 때 황제는 그가 자기의 동모제라는 이유로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는 아직 태자를 세우지 않았었다. 이윽고 연회가 무르익어 술이 거나해졌을 때 황제가 모친의 마음을 기쁘게 할 목적으로 말했다.

“ 천추 후에 황제의 자리를 양왕에게 전할까 합니다.”

과연 태후가 매우 기뻐했다. 곁에 있던 두영이 잔에 술을 따라 바치며 말했다.

“ 천하는 고조황제의 것으로써 그 자리를 전할 때는 반드시 부자상속으로 하라고 정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나라의 규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황제께서는 어찌하여 함부로 그 자리를 양왕(梁王)에게 전하려고 하십니까? ”

두태후는 이 일로 인해 두영을 싫어하게 되었다. 두영 역시 그의 관직이 자기 신분에 비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해서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사직했다. 그러자 태후는 두영을 태후궁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의 명부에서 삭제하고 봄과 가을에 입궁하여 올리는 조현도 막아버렸다.

 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오초(吳楚)를 포함한 칠국7)이 한왕조에 반란을 일으키자 종실과 두씨 일족을 통틀어 두영처럼 유능한 자가 없다고 생각한 황제는 그를 불렀다. 두영이 입궁하여 황제를 알현하고 몸이 아파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고사하자 두태후 역시 매우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황제가 말했다.

“ 천하가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여있음에도 왕손(王孫)8)은 어찌하여 사양만 한단 말이오?”

황제는 두영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황금 천근을 하사했다. 두영은 원앙(袁盎)과 란포(欒布) 등 여러 명장과 관직에 나갈 기회를 잡지 못하여 집에 머물고 있던 유능한 선비들을 천거했다. 또한 하사받은 황금은 정전의 행랑(行廊)에 진열해 놓고 군리가 지나갈 때마다 필요한 만큼 재량하여 가져가 군비에 쓰게 하여 집으로는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두영은 형양(滎陽)을 굳게 지켜 제(齊)와 조(趙) 두 나라의 군사가 반란군에과 합류하는 것을 감시했다. 이윽고 칠국의 란이 진압되자 위영은 위기후(魏其侯)에 봉해졌다. 이에 여러 유세객과 빈객들의 몰려와 위기후에게 의탁했다. 효경제 때 조정에 모여 나라의 큰일을 의론할 때는 매 번 열후들은 위기후와 조후(條侯)9)에게는 감히 례를 같이 하지 못했다.

경제 4년 기원전 153년, 율태자(栗太子)를 태자로 세우고 두영을 태자의 사부로 삼았다. 경제 7년 기원전 150년, 율태자를 태자의 자리에서 폐출시켰으나 위기후는 논쟁으로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위기후는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관직을 버리고 남전(藍田)의 남산 밑으로 들어가 몇 개월을 숨어 지냈다. 위기후의 여러 빈객들과 변사들이 찾아와 그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그를 산중에서 나오게 할 수 없었다. 양인(梁人) 고수(高遂)가 찾아가 위기후에게 말했다.

“ 능히 장군을 부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황제이고, 능히 장군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분은 태후입니다. 장군은 태자의 사부이면서도 태자의 폐출에 대해 능히 쟁론을 벌이지 못하고 또한 쟁론을 벌였음에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죽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병을 핑계로 이곳으로 들어와 조나라의 미인을 품에 끼고 한가로이 숨어서 지내며 조현도 올리지 않으면서 서로 제휴하여 시비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황제의 허물을 세상에 널리 드러나게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만약에 태후와 황제가 함께 노하여 죄를 묻는다면 장군과 처자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위기후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곧바로 몸을 일으켜 산중에서 나와 예전처럼 조현에 참석했다. 도후(桃侯) 유사(劉舍)가 승상의 자리에서 면직되자 두태후가 여러 번 위기후를 후임으로 언급했다. 경제가 말했다.

“ 태후께서는 어찌하여 제가 자리에 인색하여 위기후를 승상으로 삼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위기후는 그 위인이 교만하고 스스로 자만하여 경솔하고 부화뇌동하는 자이기 때문에 승상의 막중한 임무를 맡기기에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

황제는 결국 위기후를 쓰지 않고 건릉후(建陵侯) 위관(衛綰)을 승상으로 삼았다.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은 효경제 황후의 동모제로 장릉(長陵)에서 태어났다. 위기후가 이미 대장군이 되어 그 세력이 한창일 때 전분은 일개 랑관의 신분에 불과했다.10) 신분이 아직 미천할 때 그는 위기후의 집을 찾아가 주연석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는 태도는 마치 위기후 가문의 자제들처럼 했다. 경제 만년에 전분은 신분이 귀하게 되어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전분은 언변에 뛰어났으며, 반우(槃盂)11)와 제자백가의 설을 배웠음으로 왕태후는 그를 현능하다고 여겼다.

이윽고 경제가 죽고 그 날로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왕태후가 섭정을 행할 때 민심을 진무하는데 전분의 빈객들이 낸 계책들을 많이 채용했다. 전분과 그 동생 전승(田勝)은 모두 황태후의 동모제였음으로 경제 후삼년12) 기원전 141년 전분은 무안후에 동생 전승은 주양후(周陽侯)에 봉해졌다.

무안후는 새로이 정사를 주무르기 위해 승상이 되려고 빈객들에게 몸을 낮추고 출사하지 않고 집에 머물러 있는 명사들을 천거하여 귀한 신분으로 만들어 위기후나 기존의 장군들과 승상을 누르려고 했다. 건원(建元) 원년 기원전 140년, 승상 위관이 병이 들어 승상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황제가 승상과 태위에 누가 적합한지 조정에서 의론하게 했다. 빈객 적복(籍福)이 무안후에게 말했다.

“ 위기후는 오랫동안 조정의 귀한 신분으로 있었기 때문에 천하의 선비들이 모두 그에게 몸을 의탁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새로 몸을 일으킨 대감께서는 그 세력에 있어서 위기후에 미치지 못합니다. 만일 황제께서 대감을 승상으로 삼으시려고 하신다면 대감께서는 필히 그 자리를 위기후에게 양보하시고 대감 자신은 태위(太尉)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십시오. 태위는 그 존귀함이 승상과 동격이지만 대감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승상의 자리를 양보했다는 어진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

무안후가 찾아가 에둘러 하는 말을 듣고 왕태후는 황제에게 그 뜻을 완곡하게 전했다. 그래서 위기후가 승상이 되고 무안후는 태위가 되었다.

적복이 위기후를 찾아가 경하의 말을 올리고 다시 조의를 표하며 말했다.

“ 군후께서는 원래 선한 심성을 좋아하시고 악한 심성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군후께서는 심성이 착한 사람들의 칭송에 의해 승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니 군후께서는 장차 악한 사람들을 싫어하시게 될 것이고 또한 세상에는 악한 사람이 많은 법이라 그들은 장차 군후를 비방할 것입니다. 그래서 군후께서는 능히 군후를 싫어하는 심성이 악한 사람들도 능히 포용해야 승상의 자리를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비방으로 인해 자리에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위기후 두영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위기후나 무안후는 모두 유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조관(趙綰)과 왕장(王臧)을 천거하여 어사대부와 낭중령을 각각 삼았다. 노나라에서 당시의 저명한 유학자 신공(申公)을 초청하여 명당(明堂)을 세우려고 했으며 열후들에게 령을 내려 각자의 봉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관문을 통과할 때 조사를 받지 않아도 되게 하고 예법에 따라 길흉의 복식과 제도를 규정함으로 해서 천하에 태평한 기운을 일으키려고 했다. 동시에 두씨 종족이나 황족들 중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자들을 검거한 후에 그들의 족부(族簿)에서 삭제하고 응당의 벌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외척으로써 열후가 된 자들은 대부분 제후왕들의 공주들을 부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각기 자기들의 봉지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위기후를 중상하고 그들이 하는 말은 매일 두태후에게 전해졌다. 원래 두태후는 황로(黃老)의 학설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위기후, 무안후, 조관, 왕장 등은 유가학설을 높여 받들고 도가학설을 배척했다. 그래서 두태후는 위기후 등의 유가들을 싫어했다. 건원 2년 기원전 139년, 어사대부 조관이 황제가 동궁으로 나아가 두태후에게 정사를 보고하는 조정의례를 폐지하라고 주청했다. 대노한 두태후가 조관과 왕장 등을 파면하여 쫓아내도록 하고 다시 위기후와 무안후를 승상과 태위의 자리에서 해직하도록 했다. 승상에는 백지후(柏至侯) 허창(許昌)이 되었고 어사대부에는 무강후(武疆侯) 장청책(莊靑翟)이 임명되었다. 위기후와 무안후는 열후의 신분을 유지한 채 집안에 칩거했다. 무안후는 비록 관직을 맡지 않았지만 왕태후의 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황제의 총애를 받아 수시로 정사에 참가하여 건의한 안건들은 여러 번 채택되곤 했다. 그래서 세력을 따라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위기후를 떠나 무안후에게 붙었다. 무안후는 날이 갈수록 방자해졌다. 두태후는 건원 6년 기원전 135년에 죽었다. 승상 허창과 어사대부 장청책이 두태후의 상례를 잘 치르지 못했다고 죄를 받아 면직되자 무안후 전분은 승상이 되고 대농(大農) 한안국(韓安國)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천하의 선비들과 군국(郡國)의 제후들은 더욱 무안후에게 붙었다.

무안후는 작은 키에 얼굴이 못생긴 얼굴을 가졌으나 존귀한 척하며 거만을 떨었다. 또한 당시에는 황족 출신의 제후왕들은 대부분 나이가 들었었고 황제는 즉위했을 때 나이가 매우 어렸다. 그래서 전분이 생각하기를 황제의 지친(至親) 신분으로 승상이 자리에 오른 자기가 만일 천하의 선비들을 가혹하게 대해 그들을 굴복시켜 예의를 갖추도록 하지 못한다면 천하가 조정을 업신여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에 이르러 승상의 신분으로 조정에 들어가 정사를 상주할 때는 왕왕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해서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 끝났으나 황제는 모두 들어주었다. 그가 천거한 사람 중에는 자기 집에서 기거하는 자로써 2천 석의 관직에 발탁하기도 하여 황제의 권력을 모두 자기 손아귀에 넣었다. 황제가 말했다.

“ 승상께서 관리들을 임명하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소? 나도 역시 관리들을 임명하고 싶소.”

한 번은 고공(考工)13)에 속하는 땅을 청해 자기의 저택에 딸린 정원을 늘리려고 했다. 황제가 화를 내며 말했다.

“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나라의 무기고는 달라고 하지 않는 것이오!”

이런 일이 있는 후에 전분은 비로소 황제 앞에서 자기의 언행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또 한 번은 무안군이 손님들을 청하여 주연을 베풀었는데 그의 형 개후(蓋侯)14) 왕신(王信)을 남쪽을 향해 앉혀놓고 자신은 동쪽을 향해 앉아 한나라 승상은 존귀한 존재임으로 비록 개인적으로는 형이라고 하지만 자신에게 몸을 굽혀야 한다고 했다. 무안후는 갈수록 교만해졌으며 주택을 새로 증축했는데 당시의 어느 귀족들 것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했으며 그이 전답과 장원은 극도로 비옥했다. 그가 전국의 군현에 파견하여 각종 기물을 구매하려고 파견한 사람들의 행렬은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앞마루에 종고(鐘鼓)를 설치하고 곡전(曲旃)15)을 세워 위세를 과시했으며 후원의 별채에는 백 수십 명의 미인들로 가득 채웠다. 제후들이 그에게 바친 금옥과 명견이나 명마 및 기이한 애완물(愛玩物) 등은 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한편 두태후가 죽은 후 위기후는 황제와의 사이가 더욱 소원해져 등용되지 못하고 세력을 잃어 여러 문객들은 점차로 그의 곁을 떠났고 심지어 어떤 문객은 태만하고 교만하게 대했다. 오직 장군 관부(灌夫)만이 홀로 옛날처럼 변함없이 대했다. 위기후는 매일 뜻을 얻지 못한 것을 묵묵히 울분을 삭히며 오로지 관장군만을 후하게 대했다.

장군 관부는 영음(穎陰)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장맹(長孟)이다. 장맹은 영음후(穎陰侯) 관영(灌嬰)의 사인(舍人)이었다. 장맹이 관영의 총애를 받아 2천 석의 관직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은혜로 인해 그는 성을 관(灌)으로 바꾸어 관맹(灌孟)이라 했다. 오초(吳楚)가 란을 일으킬 때는 관영은 죽어 영음후의 작위는 아들 관하(灌何)가 잇고 있었다. 관하가 태위 주아부(周亞夫)에 소속되어 출전하면서 관맹을 교위(校尉)로 천거했다. 이때 관부는 천 명의 사졸과 함께 그 부친을 따라 종군했다. 당시 관맹은 나이가 많았음으로 주아부가 그를 장수로 삼기를 꺼려하자 영음후가 간청하여 간신히 군중에 남아 있을 수가 있었다. 뜻을 얻지 못해 실의에 빠진 관맹은 싸움에 나갈 때는 항상 분전하여 적의 견고한 진지를 공격하다가 결국은 오나라 군중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당시의 군법에 따르면 부자가 함께 종군했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죽게 되면 남은 사람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장례를 위해 시신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관부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 원컨대 오왕이나 그의 장군의 목을 취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

그래서 그는 갑옷을 입고 극으로 무장한 몸으로 군중에서 평소에 친분이 있고 같이 출진하기를 원하는 장사 10여 명을 모집했다. 이윽고 영채의 문을 나서 출격하려고 했으나 아무도 감히 앞으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단지 두 사람의 장사와 자기가 데려온 가노 10여 명과 함께 기마병을 구성하여 오군 진영으로 돌격했다. 오군 진영의 장군 기가 꽂혀있는 막사를 공격하여 십여 명을 살해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더 이상 계속 앞으로 전진할 수 없어 다시 말을 달려 한군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는 뒤따르던 가노들은 모두 죽고 단지 한 사람의 장사만을 데리고 생환할 수 있었다. 관부의 몸에는 10여 곳에 큰 상처를 입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으나 그때 마침 만금의 귀한 약이 있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관부의 상처가 어느덧 아물기 시작하자 그는 다시 장군에게 출전하기를 청하면서 말했다.

“ 저는 지난 번 출전으로 오나라 진영의 정세를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저를 다시 출전시켜 주십시오.”

장군이 그의 의기를 장하게 여겼으나 그를 잃을까 걱정하여 태위에게 고했다. 태위가 관부의 출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오나라 군사들을 격파되었으나 이 일로 인해 관부의 이름은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영음후가 황제에게 관부를 천거하여 관부는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다. 몇 달 후에 법에 저촉되어 파면되어 고향으로 물러갔다. 후에 관부가 집을 장안으로 옮기자 장안의 여러 유력 인사들은 그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경제 때 관부는 벼슬이 대(代)나라의 상국에 이르렀다. 경제가 죽고 금상폐하께서 처음 즉위하시자 회양(淮陽)은 천하가 교차하는 요충지라 한나라의 정예부대를 주둔시키고 관부를 회양태수로 삼았다. 건원 원년 기원전 140년 관부는 경사에 들어와 태복(太僕)이 되었다. 다음 해 관부가 장락궁(長樂宮)의 위위(衛尉) 두보(竇甫)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자기에게 대하는 태도가 건방지다고 생각한 나머지 술에 취해 구타했다. 두보는 두태후의 동생이다. 그래서 태후가 관부를 주살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황제는 관부를 연나라 상국으로 보냈다. 몇 년 후에 관부는 다시 법에 저촉되어 관직에서 물러나 장안으로 돌아와 살았다.

관부는 위인이 강직하고 주벽이 있었으며 면전에서 아첨하는 것을 싫어했다. 귀척이나 세도가가 자기 곁에서 거들먹거리면 예를 갖추지 않고 반드시 그들을 능멸했으며 자기보다 못한 선비들이 그의 곁에 있거나 그들이 빈천하면 더욱 겸손한 자세로 평등하게 공경했다. 넓은 뜰에 군중이 모여 있으면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을 일으켜 천거하고 총애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비들은 관부의 이러한 행위를 칭송했다.

관부는 문학인을 싫어하고 협객을 좋아했으며 그가 일단 승낙하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지켰다. 그가 사귀는 여러 사람들은 모두 호걸이거나 크게 대활(大猾)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가 모은 가산은 수천 만 전에 거느린 식객은 적게는 수십 명에 많게는 백여 명에 달했다. 전답과 임야 가운데에 제방을 쌓고 저수지를 파서 농전(農田)에 관개가 가능하도록 해서 늘어난 권세와 이권을 기반으로 그들 종족과 빈객들은 영천(潁川) 지방을 횡행했다. 그것을 보고 영천의 아이들이 노래를 불렀다.

“ 영수(穎水)가 맑으니 관씨들은 평안하고

영수가 탁하면 관씨들은 멸족되네!”

관부는 비록 재산이 많은 부호였으나 조정에서 권세를 잃고 집에 거했음으로 경상(卿相)이나 시중(侍中)으로써 관부의 빈객이었던 사람들의 내왕이 갈수록 줄었다. 위기후 두영 역시 권세를 잃자 관부에 의지하여 평소에 자기를 앙모하다가 세력을 잃자 떠나버린 자들에게 줄을 긋고 뿌리를 뽑아버리듯이 보복하여16) 그들에 대한 유감을 씻으려고 생각했다. 관부도 마찬가지로 위기후에게 의지하여 열후나 종실의 인물들과 통해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 교분을 두텁게 나누어 마치 친하기가 부자지간과 같았다. 서로 만나면 매우 기뻐하여 싫증을 내는 일이 없었으며 자기들이 서로 늦게 교유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했다.

관부가 상중일 때 승상 전분의 집을 찾아가자 승상이 정색하며 말했다.

“ 내가 중유(仲儒)와 함께 위기후 집에 한 번 들르고자 했는데 마침 중유가 상중에 있군요.”

관부가 대답했다.

“ 장군께서 수고스럽게 위기후의 집에 왕림하시려고 하는데 이 관부가 어찌 감히 상중임을 핑계대고 마다하겠습니까? 청컨대 제가 위기후에게 말씀드려 장막과 기구들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장군께서는 내일 아침 일찍이 왕림하시기 바랍니다.”

무안후의 허락을 받은 관부는 위기후에게 달려가 무안후와의 약속을 전했다. 위기후와 그 부인은 많은 소고기와 술을 시장에서 사오고 밤이 되었음에도 집안에 물을 뿌려 청소를 마치고 장막과 기구들을 마련하여 새벽이 되어서야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이윽고 아침이 되자 사인들에게 령을 내려 승상을 맞이할 준비를 시켰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이르렀지만 승상은 당도하지 않았다. 위기후가 관부에게 말했다.

“ 혹시 승상께서 어제 한 약속을 잊어먹지 않았을까요?”

관부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이 관부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청했습니다. 승상은 마땅히 약속대로 왔어야 했습니다.”

관부가 즉시 수레를 타고 자신이 직접 승상을 모시러갔다. 승상이 장난삼아 약속한 것으로 생각한 관부는 딱히 모실 생각은 아니었다. 이윽고 관부가 승상의 집에 당도했을 때는 승상은 그때까지 자리에 누워있었다. 관부가 들어가 승상을 보고 말했다.

“ 승상께서 어제 호의를 베푸시어 위기후의 집에 왕림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위기후 부부께서는 기구를 준비하여 새벽부터 지금까지 감히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무안후가 놀라 사과의 말을 했다.

“ 내가 어제 술에 취해 중유와의 약속을 부지 간에 잊었소.”

그리고는 수레를 준비시켜 타고 가는데 그 행보가 매우 늦었다. 관부가 마음속으로 더욱 노했다. 이윽고 술좌석이 무르익자 관부가 일어나 춤을 추고 승상에게 차례를 넘겼으나 승상은 사양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관부는 자리에 앉아서 말로써 승상을 능멸했다. 위기후가 관부를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여 집으로 보내고 승상에게 사죄했다. 승상은 결국은 밤새워 술을 마시며 매우 기쁜 마음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 날 승상이 문객 적복(籍福)을 시켜 위기후 소유의 성 남쪽에 있는 전답을 달라고 청했다. 위기후가 승상을 크게 원망하며 말했다.

“ 이 늙은 몸은 비록 버려졌고 승상은 아직 귀한 신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권세로써 내 전답을 빼앗을 수가 있단 말인가? ”

위기후는 승상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위기후와 같이 있던 관부가 듣고 노하여 적복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적복 역시 위기후와 무안후 두 사람이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사실을 속이고 좋은 말로 승상에게 전했다.

“ 위기후는 늙어 곧 죽을 것입니다. 조그만 참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안후는 위기와 관부가 사실은 자기에게 화를 내며 전답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화를 내며 말했다.

“ 위기후의 아들이 옛날 살인을 했을 때 이 전분이 그 목숨을 구해주었다. 나 전분은 위기후를 섬기기를 할 수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지극히 했다. 어찌 몇 경(頃)의 전답 따위를 아낀단 말인가? 더욱이 관부는 어찌하여 그의 편을 드는가? 나는 결코 그의 전답을 요구하지 않으리라!”

무안후는 이 일로 인해 관부와 위기후에게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원광(元光) 4년 기원전 131년 봄, 승상이 황제에게 관부의 종족이 영천 지방에서 횡포를 심하게 부려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고하며 그 사건의 조사를 청했다. 황제가 말했다.

“ 그것은 승상의 일인데 하필이면 나에게 청하는 것이오.”

관부 역시 승상이 간사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고 회남왕으로부터 황금을 받으면서 모의한 비밀스러운 일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집안의 빈객들이 중간에 나서서 서로 조정하여 조사와 고변을 중지하고 화해했다. 그해 여름, 승상이 연왕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혼례식을 올리려고 하자 태후가 조칙을 내려 열후와 종실의 귀척들에게 모두 참석하여 축하를 하라고 명했다. 위기후가 관부의 집에 들려 같이 참석하자고 말하자 관부가 사양하며 말했다.

“ 이 관부는 술에 취해 승상에게 실례를 하여 죄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승상과는 화해를 했다고는 하나 아직 틈이 있습니다. ”

위기후가 말했다.

“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오.”

위기후가 억지로 관부를 데리고 승상의 혼례식에 참석했다. 이윽고 술자리가 무르익자 무안후가 일어나 술잔을 받들고 축수를 하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엎드려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서 위기후의 차례가 되어 축수를 하자 오로지 위기후의 옛날 친구만이 자리를 옮겨 바닥에 엎드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무릎을 세웠을 뿐이었다. 이것을 본 관부는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관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안후에게 다가가 술잔을 올렸으나 무안후가 무릎을 세우더니 말했다.

“ 내가 술이 너무 과해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소.”

관부가 화를 냈다가 다시 빈정거리며 말했다.

“ 장군은 귀인이시라 제가 이렇게 술잔을 올리는 것입니다.”

무안후는 관부의 비꼬는 말에 아무런 응대를 하지 않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관부가 돌리는 술잔이 임여후(臨汝侯)17) 차례가 되었으나 임여후는 여전히 정불식(程不識)18)과 귓속말을 속삭이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예를 표하지 않았다. 마침 화를 참고 있던 관부가 임여후에게 폭발시키며 말했다.

“ 평소에 정불식 장군은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욕을 하더니 오늘 장자가 축수를 위해 잔을 돌리는 데 계집처럼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가?”

무안후가 듣고 관부에게 말했다.

“ 정불식 장군은 미앙궁을 지키는 이광 장군과 함께 장락궁의 위위(衛尉)로 궁궐을 경비하는 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오늘 여러 대중 앞에서 정장군을 욕보이니 중유(仲儒)가 평소에 존경하는 이광 장군의 체면도 욕보이는 것이 아니오?”

관부가 대답했다.

“ 오늘 제가 머리가 잘리고 가슴이 파헤쳐진다 해도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어찌 정장군이나 이장군을 염두에 두겠습니까? ”

빈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서서히 물러갔다. 위기후가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관부를 불러 함께 나가려고 했다. 무안후가 화를 내며 말했다.

“ 이렇듯 관부가 교만하게 된 것은 나의 죄이다.”

무안후가 곧바로 기병에게 관부를 붙잡아 두도록 명했다. 관부는 승상의 저택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적복(籍福)이 자리에서 일어나 관부를 위해 사죄의 말을 올리고 다시 관부의 목을 눌러 무안후에게 사죄를 올리도록 했다. 그러나 관부가 더욱 노하여 사죄하기를 거부했다. 무안후가 마침내 기병들을 시켜 관부를 포박하여 전사(傳舍)에 감금하도록 명하고 다시 장사(長史)에게 말했다.

“ 오늘 내 혼인식에 종실을 초청한 것은 황태후의 조칙에 따른 것이다. ”

무안후는 관부가 자기의 혼인식을 매도한 것은 불경죄에 해당한다고 하여 탄핵하여 거실에 구금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관부가 옛날 행한 일을 들추어내어 관리들을 여러 조로 나누어 파견하여 관씨 종족들을 추포한 후에 모두 기시(棄市)의 형으로 다스리려고 했다. 위기후는 크게 부끄럽게 여겨 빈객들을 청하여 경비를 대주며 관부의 석방을 부탁했으나 아무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 무안후의 관리들은 모두 그를 위한 눈과 귀가 되어 위기후와 관부 측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으나 여러 관씨들은 모두 도망쳐 숨어버렸고 관부는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안후의 비밀스러운 일을 고발할 수 없었다.

위기후가 몸과 마음을 다하여 관부를 구하려고 하자 그의 부인이 말했다.

“ 관장군은 승상에게 죄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태후의 가문에 거역했는데 어떻게 그를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위기후가 대답했다.

“ 후라는 작위는 내가 얻은 것이니 내가 스스로 버린다 해도 한 될 것이 없으나, 관장군이 종국에 죽는다면 나 혼자 어찌 살 수 있겠소?”

그는 곧 그의 가인들을 속이고 아무도 몰래 황제에게 서장을 올렸다. 황제가 불러 입조한 그는 관부가 술에 취해 실언한 정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비록 잘못은 저질렀지만 처형당할 정도의 큰 죄는 아니라고 변호했다. 황제도 그렇게 생각하고 위기후에게 음식을 하사하여 식사를 하게 한 후에 말했다.

“ 동조(東朝)에서 변론을 열겠소.”

동조에 임한 위기후는 관부의 좋은 점을 칭찬하고 그가 술에 취해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승상은 그를 무고해서 죄를 주려한다고 했다. 무안후 또한 관부가 행한 횡포하고 방자한 행위를 들어 비난하고 그의 죄는 대역무도하다고 했다. 위기후는 힘이 부치자 승상의 잘못된 점을 들추어냈다. 무안후가 말했다.

“ 지금 천하는 모두 태평하여 이 분(蚡)은 폐하의 폐부지신(肺腑之臣)으로 친애함을 얻었으니 권력을 쫓지 않고 단지 좋아하는 것은 개나 말을 기르며 좋은 전답과 저택, 그리고 가인(歌人)이나 배우, 솜씨가 좋은 장인들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두영과 관부는 천하의 용사들과 지방의 유력한 호적들을 불러 모아 매일 밤 정국을 논하며 뱃속과 마음속으로는 조정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쳐다보는 대신에 땅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면서 동서 양쪽의 궁전 사이를 흘겨보며 혹시 천하에 변란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대공을 세워보려고 잔뜩 노리고 있습니다. 신은 두영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진실로 모르겠습니다. ”

그래서 황제가 배석한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이오.”

어사대부 한안국(韓安國)이 말했다.

“ 위기후가 말하기를 관부의 부친은 나라를 위해 죽었고, 관부 자신은 스스로 극을 잡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오나라 반군 진영으로 돌입하여 싸움 끝에 몸에 수십 곳의 상처를 입어 그의 용맹은 삼군 중에 으뜸으로 참으로 천하의 장사였습니다. 큰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고 단지 연회석에서의 술잔을 갖고 벌어진 다툼에 불과하여 그 잘못으로 그를 주살한다는 것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다는 위기후의 말은 옳습니다. 승상 역시 말하기를 관부는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과 함께 백성들을 범하여 그 모은 재산이 거만금에 달하고 있으며 그들의 무리는 영천지방의 백성들에게 횡포를 자행하고 또한 종실을 능멸하고, 황실의 골육지친을 침범하고 있어 그것은 마치 그 가지가 본줄기보다 크고 정강이가 다리보다 커서 쳐내지 않으면 필시 찢어질 형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승상의 말씀도 옳다고 할 수 있으며 오로지 황상께서 밝은 지혜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

주작도위 급암(汲黯)은 위기후의 말이 옳다고 했으나 내사(內史) 정당시(鄭當時)는 처음에는 위기후가 옳다고 했다가 끝까지 자기 의견을 견지하지 못했다. 나머지 대신들은 아무도 감히 황제에게 자기 의견을 개진하지 못했다. 황제가 노하여 내사를 향해 말했다.

“ 경들은 평소에는 수도 없이 위기후와 무안후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이야기했소. 그런데 오늘 조정에서 변론을 벌리는 모습은 마치 멍에에 매인 망아지처럼 눈치만 보는 것이오? 내 경들을 두 사람과 함께 목을 베리라!”

황제가 즉시 자리에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왕태후에게 식사를 올렸다. 그때 태후는 사람을 시켜 조정에서 벌어진 변론을 살펴보게 해서 그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태후가 황제를 보자 화가나서 식사를 물리치며 말했다.

“ 내가 오늘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사람들이 모두 나의 동생을 짓밟으려고 하니 만일 내가 후일 죽기라도 한다면 나의 골육들은 모두 고기밥이 되지 않겠는가? 또한 황제는 자기주장이라고는 없는 석상이란 말인가? 더욱이 황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그렇듯 대신들 의견만을 쫓으려고 하니 먼 훗날 그들이 다 죽고 나면 그때는 누구를 믿고 의지하겠는가? ”

황제가 사죄하며 말했다.

“ 그 두 사람은 모두 종실에 속하는 외척들이라 조정에서 변론을 행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일은 한 사람의 옥리에게 맡겨 처결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

이때 낭중령 석건(石建)이 황제를 위해 두 사람의 사건을 분별하여 조리있게 설명했다.

무안후가 조회를 끝내고 궁문에 이르자 수레를 멈추고 어사대부를 불러 자기에 수레에 태웠다. 무안후가 화를 내며 한안국에게 말했다.

“ 장유(長孺)와 더불어 한 사람의 대머리 노인을 도모하려고 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수서양단(首鼠兩端)19)의 이중적인 태도를 위한 것이오?

어사대부 한안국이 오랫동안 생각을 하더니 승상을 향해 말했다.

“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자중자애하시지 않으십니까? 위기후가 승상을 폄훼(貶毁)하면 승상께서는 마땅히 관을 벗고 인수를 풀어 황제께 돌려주며 ‘ 신은 패부지친의 신분임에도 죄를 얻었으니 결단코 승상의 직을 다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위기후의 말이 모두 옳습니다.’라고 말씀드린다면 황제께서는 틀림없이 승상께서는 겸양의 덕을 갖추었다고 생각해서 승상의 자리에서 면직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위기후는 틀림없이 속으로 부끄러워하며 집의 대문을 걸어 잠근 후 혀를 깨물어 자살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른 사람이 대감을 폄훼하자 승상 역시 그 사람을 같이 폄훼하시는 것으로 대응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장사꾼이나 아녀자들처럼 다투신 것이니 어찌 그리 대인의 풍모가 없으십니까? ”

무안후가 어사대부에게 사죄의 말을 올렸다.

“ 다툴 때는 마음이 너무 급해서 그와 같은 이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황제는 어사를 시켜 관부를 비호한 위기후의 진술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을 문서에 의거 황제를 기만한 죄를 조사하도록 하고 그 결과에 따라 다시 도사공(都司空)을 시켜 탄핵하도록 했다. 일찍이 경제 때 위기후는 유조(遺詔)를 받은 바가 있었는데 ‘ 경이 앞으로 마땅하지 않은 일을 겪게 되면 마음대로 그 일을 논하여 황제에게 올리라!’라는 내용이었다. 이윽고 자신은 옥에 갇히고 관부은 멸족될 위기에 처해 사정이 매우 급하게 되었으나 조정대신들은 아무도 감히 황제에게 일의 진상을 밝힐 수 없었다. 위기후는 즉시 그의 동생과 아들을 시켜 황제에게 전황제로부터 받은 유조가 자기에게 있음을 알리게 하여 다시 한 번 황제를 알현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상서20)가 황제에게 올라갔으나 대행(大行)21) 때의 문서를 조사한 상서(尙書)는 그런 유조가 있었다는 사실을 찾지 못했다. 경제의 유조는 단지 위기후의 집의 집사가 봉하여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위기후는 선제의 유조를 위조했다고 탄핵을 받게 되어 그 죄는 기시(棄市) 형에 해당했다. 원광(元光) 5년 기원전 130년 10월, 관부와 그 가족들은 정죄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위기후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소식을 듣고 분하고 성이 나서 중풍으로 쓸어져 음식을 끊어 죽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황제가 위기후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소식을 어떻게 전해 듣고는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병을 치료했다. 조정의 공론도 위기후를 죽이지 않기로 정했다. 그러나 유언비어가 나돌아 그를 헐뜯는 말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음으로 그해 12월 그믐날 위기후와 그 종족들은 멸족되어 위성(渭城)에서 기시되었다.

다음 해 봄, 무안후가 병이 들었는데 오로지 ‘ 사죄합니다. 사죄합니다.’라는 말만 연거푸 되뇌었다. 무당을 시켜 귀신을 보게 했는데 위기후와 관부가 같이 지키고 있으면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 결국 얼마 후에 무안후는 죽고 말았다. 아들 전염田恬)이 작위를 이었다. 원삭(元朔) 3년 기원전 126년 전염이 짧은 홑옷을 입고 입공했다가 불경죄에 저촉되었다.

회남왕 유안(劉安)의 모반죄가 발각되어 치죄를 받았다. 회남왕이 옛날 조현을 올리러 입조했을 때는 무안후는 태위(太尉)였다. 그때 회남왕이 패상(覇上)까지 나아가 회남왕을 영접하면서 말했다.

“ 황제는 아직 태자가 없고 대왕께서는 황실의 종친 중 가장 현능한 고조의 손자이십니다. 만일 황제께서 갑자기 돌아가신다면 대왕 말고 누가 그 뒤를 이어 재위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회남왕이 크게 기뻐하며 무안후에게 황금과 재물을 후하게 선물했다. 황제는 원래 위기후의 일이 있을 때부터 무안후가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나 태후의 동생인 신분을 감안하여 그대로 둔 것뿐이었다. 이윽고 회남왕으로 뇌물을 받은 사건에 대해 알게 되자 황제가 말했다.

“ 무안후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에게 멸족의 형을 내렸을 것을!”

태사공이 말한다.

“ 위기후와 무안후는 모두 외척의 신분으로 중용되었고 관부는 한 때의 용맹함으로 공을 세워 이름을 얻었다. 위기후는 오초칠국의 란에 세운 공으로 몸을 일으켰고 무안후는 황제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태후가 섭정할 때를 기회로 삼아 하루아침에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위기후는 진실로 시세의 변화를 알지 못했으며 관부는 학문을 배우지 못해 불손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 도우니 이내 재앙이 생긴 것이다. 무안후는 귀한 신분에 의지하여 권력을 쫓아 한낱 술잔 하나로 원한을 품고 현능한 사람을 모함하여 해쳤다. 아아 슬프구나! 그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더니 그의 수명도 역시 길지 못했다. 결국 여러 대중에게도 추앙을 받지 못하고 악명만 떨치게 되니 아아 슬프구나! 화란이란 원래 그 까닭이 있는 법이다. ”

< 위기무안후열전 끝 >


주석

1)위기(魏其)/ 지금의 산동성 임기시(臨沂市) 남쪽에 있었던 고을 이름이다.

2)두태후(竇太侯)/ 이름은 두의방(竇猗房)으로 여태후가 궁중의 궁녀들을 제후왕들에게 나누어 줄 때 당시 대왕이었던 한문제 유항(劉恒)에게 하사되었다. 유항의 사랑을 받고 그의 소행 유계(劉啓)가 태자가 되었음으로 황후가 되었다. 한무제 재위 6년에 죽을 때까지 한나라의 정치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외척세가 참조)

3)관진(觀津)/ 한나라 때 기주자사부(冀州刺史部) 신도군(信都郡) 무읍(武邑)에 속한 고을로 지금의 하북성 무읍현 경내다.

4)오(吳)/ 지금의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을 일대를 다스렸던 서한 초기의 제후국으로 광릉(廣陵)에 도읍했다. 오왕 유비(劉濞)는 한고조 유방의 둘째 형 유중의 아들이다. 경제 때 오초칠국의 란을 일으킨 주동자다.

5)첨사(詹事)/ 진나라가 설치한 관직으로 황비나 태자의 집안일을 관장했다.

6)양효왕(梁孝王)/ 태어난 해는 확실하지 않고 기원전 141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왕으로 이름은 유무(劉武)다. 한문제(漢文帝)의 아들이고 한경제(漢景帝)의 동모제다. 문제 2년 기원전 178년 대왕(代王)에 봉해지고, 4년 회양왕(淮陽王)으로 개봉되었다. 12년 기원전 168년 양왕(梁王)으로 옮겼다. 경제(景帝)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란이 발생하자, 그는 중앙군과 협력하여 란을 진압하여 큰공을 세워 경제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경제의 신임을 과신한 그는 출입 시 항상 황제와 함께 수레를 타고 다녔다. 공을 믿고 자만한 효왕은 봉국에 거대한 궁궐과 후원을 축조하고 널리 금전과 재물을 모아 양나라의 부고의 주옥과 보기는 한나라의 서울보다 더 많았다. 또한 천하의 명사들을 사방에서 불러들여 제인(齊人) 양승(羊勝), 공손궤(公孫詭), 추양(鄒陽) 등을 문하에 두었다. 후에 경제가 태자 율(栗)을 폐하자 태후는 효왕을 그 후계로 삼으려고 했으나 대신 원앙(袁盎) 등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 일로 원한을 품은 효왕은 공손궤 등과 모의하여 원앙 등을 포함한 10여 명의 대신을 자객을 보내 암살했다. 얼마 후에 일이 경제에게 발각되었으나 태후의 비호를 받아 죄를 추궁받지 않았다. 봉국에서 재위 35년 만에 죽었다.

7)오초칠국의 란/ 한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제후국인 오(吳)와 초(楚)가 주동하여 한나라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사건이다. 한고조 유방에 의해 제후왕으로 책봉된 황족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대해가자 위협을 느낀 경제가 조조(鼂錯)를 등용하여 봉국들의 세력을 삭감하려고 했다. 조조는 황제의 은혜를 장자에게만 나누어주지 다른 자제들에게도 나누어 주라는 령을 내려 제후들의 세력을 분산시키려고 했다. 이를 역사상 추은령(推恩令)이라고 한다. 이에 반발한 제후왕 들 중 교서왕,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 조왕, 오왕, 초왕 등의 7국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정부는 주아부(周亞夫), 란포(欒布), 두영(竇嬰) 등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제후왕들을 회유하기 위해 경제는 조조를 처형해야만했다.

8)왕손(王孫)/ 두영의 자다.

9)조후(條侯)/ 주발의 아들로 한경제 때 오초칠국의 란을 평정한 공으로 조후에 봉해지고 승상이 되었다.

10) 무안후 전분은 효경제의 부인 왕태후의 이부동모제다. 연왕 장도(臧荼)의 손녀인 장아(臧兒)가 왕중(王仲)과 혼인하여 그 사이에서 개후(蓋侯) 왕신(王信)과 왕태후 지(娡)를 낳고 왕중이 죽자 후에 장릉(長陵) 전씨에게 개가하여 전분(田蚡)과 전승(田勝)을 낳았다.

11)반우(槃盂)/ 황제(黃帝)의 사관 공갑(孔甲)이 지은 명(銘)으로 모두 26편의 글을 기물(器物)에 새겼서 전했으나 지금은 실전되었다.( 명(銘)은 문체의 이름으로 금석(金石)이나 기물(器物)에 새겨 그 사람의 공덕을 기려 후세의 자손에게 보이거나, 또흔 경계의 글을 새겨 조석으로 반성하는 자료로 삼는 글이다.)

12)경제후삼년/ 경제의 기년은 모두 전, 중, 후 3기로 나누어 연호로 삼았다. 경제는 후삼년 즉 기원전 141년 정월에 죽고 무제가 뒤를 이었다.

13)고공(考工)/ 소부(少府) 산하의 관청으로 기계의 고안이나 제작을 담당했다.

14)개후(蓋侯)/ 왕태후의 동모형 왕신(王信)의 봉호로 전분(田蚡)의 이부동모 형이다.

15)곡전(曲旃)/ 깃대 끝이 비스듬하게 굽은 깃발을 말한다. 고대 황제나 왕이 스승을 모시기 위해 사용했던 의장용 깃발로 전분이 이것을 장식으로 세워 둔 것은 제왕의 권위를 넘본 참람한 행위였다.

16)원문은 인승비근(引繩批根)으로 그 뜻은 ① 줄을 대고 그어서 뿌리를 뽑아버리 듯이 어느 한계 밖의 사람들은 일체 배척함 ② 두 사람이 두 가닥으로 새끼를 꼬듯 협력하여 남을 배척하고 사귀지 않음 ③ 줄을 긋듯 남의 굽은 것을 배척하여 뿌리를 뽑듯이 보복하여 유감을 씻음 등으로 번역된다.

17)임여후(臨汝侯)/ 관영의 손자 관현(灌賢)의 봉호다.

18)정불식(程不識)/ 전한 때의 장군으로 경제(景帝) 때 이광(李廣)과 함께 북쪽 변경일대의 태수를 지냈다. 수 차례에 걸쳐 흉노 정벌전에 참가했으며 군사를 다스리는 방법이 매우 엄했다. 위인이 청렴하고 강직했으며 직간을 서슴치 않았다. 후에 태중대부가 되었으며 무제 때 장락궁(長樂宮)의 위위(衛尉)를 지냈다.

19)수서양단(首鼠兩端)/ 어느 쪽 편드지 않고 두 가지 마음을 갖고 있는 것. 쥐의 성질은 의심이 많아 구멍에서 머리를 내밀고 바깥 상황을 살피면서 나갈까 말까 망설이며 결정을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20)상서(尙書)/ 원래 전국 때 설치 된 관직으로 한왕조가 따랐다. 문서의 접수와 관리를 맡았다. 군주의 명령을 직접 출납하는 요직으로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지위가 계속 높아져 당나라 때에는 육부 장관의 명칭이 되었다.

21)대행(大行)/ 대행황제의 약칭으로 황제가 죽은 후 시호가 정해지기 전까지의 칭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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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오왕비열전(吳王劉濞列傳) 46

열전46. 吳王劉濞(오왕유비) 오왕(吳王) 비(濞)는 고제(高帝)의 형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고제 7년 기원전 200년, 천하를 평정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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