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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1-18 20:50:044946 
주은래 이야기
양승국

주은래 (周恩來, Zhou Enlai, 1898-1976)



인민의 벗, 주은래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며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


이 말은 중국 천안문(天安門:이하 중국 지명과 인명 표기는 한자 독음대로 표기)광장에 세워진 주은래의 추도 시비에 새겨진 글귀다. 우리나라가 김종필 총리 임명동의안을 놓고 격돌하고 있을 무렵인 98년 3월 5일은 모택동의 뒤를 이어 항상 제2인자의 위치에만 머물렀던 주은래의 탄생 1백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제2인자의 전통이란 것이 별로 없는 나라인데 반해서 중국은 그런 2인자의 전통이 확고하게 서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가시밭으로 둘러싸인 제2인자의 길


워낙 광대한 땅덩이와 수십 억에 달하는 인민을 통치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세워진 전통일지는 몰라도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 권력자보다 더 유명하고 더욱 존경을 받았던 제2인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 중 전제 왕정 시절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세 사람을 들자면 아마도 삼국지의 영웅, 제갈량과 제를 춘추전국 시대의 첫 번째 패자로 키워냈던 관중, 100여년 뒤에 관중의 뒤를 이어 제의 재상이 된 안영을 들 수 있을 것이다.(제갈량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잘 아시고 계실 테니 줄이도록 하고 관중과 안영에 대해서는 『사기』관안열전 편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하다.) 그에 비해서 우리들의 2인자 전통이란 것은 (스스로를 깍아내려 좋을 것은 없겠지만) 보잘 것 없는 편이고, 영웅을 만들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를 보더라도 사실상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이다.


가까운 근·현대사를 보더라도 이승만 정권 시절의 이기붕, 박정희 시절의 김종필 등등 우리 사회는 그 동안 2인자를 키울 수 없는 사회 분위기와 2인자를 용납할 수 없는 독재 권력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왔다. 권력이란 것이 어쩔 수 없는 '사회악'이라면 그 권력이 정점의 어느 한 인간에 집중되고자 하는 속성은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2인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권력을 견제하고 그 권력이 유지하고 추진하려는 체제를 지속시켜준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그에 대한 반론 역시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에게 있어 중국의 주은래란 부러운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은래를 우리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여러모로 복잡한 일이 될 것이다.


한때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상륙지점이 인천이 될 것임을 정확히 예견한 적국의 총리이자, 주은래의 4원칙이란 조항으로 인해 오늘날의 대우 사태에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고<4원칙이란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는 나라와 관계를 맺는 나라까지도 거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당시 코로나 자동차를 생산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던 신진자동차(대우자동차의 전신)는 당시 중국 진출에 뜻을 둔 도요타 자동차가 철수하면서 기술과 부품 공급이 끊어지자 단 한 대의 코로나도 만들지 못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중국 진출을 노리던 일본 기업들의 철수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GM과 합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독자적인 성장의 길이 가로막혀 현재의 매각 협상 단계까지 끌려 다니게 되었다>. 제3세계 비동맹 외교의 지도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우리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내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만큼 그의 업적이나 생애가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99년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0주년이었다. 그 시기에 나는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고 그 덕분에 건국 50주년을 맞이한 신중국의 새로운 면모를 몸소 살필 수 있었다. 주요 방문 장소는 상해를 비롯한 절강성 일대, 소흥과 강주, 소주, 봉화 등이었으며 노신 기념관과 장개석 생가, 주은래가 성장한 소흥 일대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주은래와 모택동의 만남 - 그리고 신중국 건설


주은래는 1898년 중국 강소성 회안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에 절강성의 소흥에 있는 큰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이곳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그는 1913년 천진에 있는 남개중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1917). 그러던 중 1919년 5·4운동으로 불리는 학생시위가 베이징에서 크게 일어나자 천진으로 돌아와 1920년 체포될 때까지 학생 시위에 적극 가담한다. 1920년 가을에 석방되어 근로장학생제도의 일환으로 떠난 프랑스 유학에서 그는 공산주의자로 평생을 살 것을 결심하고 이듬해 7월 상해에서 중국 공산당이 창립되자 유럽 지부 조직책이 된다.


1924년 여름 중국으로 돌아와 국민혁명(신해혁명-중국인들은 공화혁명이라고도 함)에 참가한다. 이 신해혁명은 손문의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의 협조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광동에서 일으킨 혁명이었다. 이 무렵 그는 당시 중국공산당의 주요 인물이자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등영초를 만나 결혼(1925)하는데 여담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중국 공산혁명 지도자의 부인 중 가장 못 생겼다고 한다. 주은래는 당시 장개석이 있던 황포군관학교에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어 장개석과의 첫 번째 인연을 시작한다. 1927년 3월 장개석의 북벌군이 상해 외곽에 도착했을 때 주은래는 국민당 군대를 위해 노동자를 조직하고 동원해 상해를 장악한다.


그러나 상해에 입성한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악명높은 우익 테러조직인 백의사를 동원해 공산주의자를 숙청하고 주은래는 간신히 무한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곧 무한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국민당 내의 좌파 인사들과 긴밀히 협조했다. 그 중에는 손문의 부인인 송경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국민당 좌파인사들이 공산당과 결별하자 그는 남창봉기(1927. 8.)를 일으키지만 국민당군에 쫓겨 다시 상해로 도피하게 된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는데 당내의 주류는 혁명 전술 교리에 입각하여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도시 혁명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요 도시를 장악하려는 공산당의 시도는 큰 피해만 냈을 뿐 실패를 거듭했다.이 시기까지 주은래는 농민혁명을 주장하던 모택동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상해를 떠나 주덕과 모택동이 조성한 혁명 근거지인 강서로 옮기면서(1931) 모택동을 이해하기 시작하여 후일 죽을 때까지 모택동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주은래는 정통 레닌주의에 따라 '도시에서의 노동자 무장봉기'를 제시한 데 반해 모택동은 '농촌에서의 농민 무장봉기'를 제시했다. 주가 소위 '전보 공산주의'를 통해 '중국 소비에트화 노선'을 철저히 추종했으나 장개석 정부의 소공작전에 쫓겨 중국공산당은 장정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1935년 준의 회의에서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시인했다. 결론적으로 모택동 노선을 강력히 지지하고 모가 중국공산당과 중국혁명을 지도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장개석의 계속되는 토벌작전으로 모택동과 주은래는 중국 중남부의 소비에트 지역을 버리고 중국 북부에 새로운 근거지를 향해 이른바 '대장정'을 떠나게 된다. (이 '대장정'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이란 에드가 스노우의 책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 책은 삼국지나 수호지 못지 않게 재미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에드가 스노우는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즈의 남편이기도 하다.)


신중국의 깃발을 올린 모택동과 주은래


모택동은 이 대장정 기간에 당을 장악하고 주은래는 그후 충실하게 그를 보좌하게 된다. 1936년 겨울 장개석이 서안(西安)에서 장학량(張學良)에 의해 연금되자 그의 목숨을 살려주도록 한 것도 역시 주은래였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에게 장개석을 살해하지 말도록 설득하고, 그 대가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일통일전선(抗日統一戰線)을 성립시킴으로써 항일전의 승리는 물론 그 뒤 중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1949년 신중국의 총리로 발탁되어 행정의 차원에서 신중국의 뼈대를 세운 것도, 1950년 중·소(中·蘇)동맹조약, 1954년 6·25전쟁과 월남전쟁에 관련된 제네바회담을 성사시킨 것도 역시 그의 공로였다.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주은래는 당시 38선 돌파를 한국군 단독으로 하고 이후 북진하여 통일을 이룩한다면 중국이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참전 의사를 경시한 UN군과 이승만 정부는 그대로 북진한다.


중국은 미국의 참전이래 한국전쟁에 참전할 분명한 의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주은래는 당시 베이징에서 있었던 전략회의에서 맥아더의 상륙작전 대상지역이 군산이나 원산이 아닌 인천이 될 것임을 미리 지적하고 있었다. 1955년 반둥의 아시아·아프리카회의를 성립시켜 중국이 제3세계에 대한 지도력을 확보한 것도, 1966년부터 10년 동안「문화대혁명」의 대광란을 수습한 공도 그의 차지다. 키신저와 교섭하여 1972년 미국과 중국의 대화해의 서곡인 닉슨과 마오쩌둥의 회담을 성사시키고 1975년 월남전을 종식시킨 파리회담을 성립시킨 공도 그의 몫이다.


이와 관련하여 닉슨의 회고에 의하면 72년 첫 중국 방문 당시 주은래는 자신이 암을 앓고 있으며 언제 죽게 될 지 모른다고 말하고 자신이 죽기 전에 미국과의 수교를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닉슨이 이에 감동받은 것은 물론이다. 중국이 현재와 개혁, 개방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그 초석을 깔아준 사람 역시 주은래였다. 그는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실현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오늘날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의 초석을 놓아주었으며 그의 사후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강청을 비롯한 4인방의 쇠락을 앞당겼던 제1차 천안문 사건의 발동 역시 주은래로 인한 것이었다.


강청, 모자를 벗어라.


그는 항일전, 국공내전과 중국통일 뒤의 전과정에서 정치·외교·행정·군사·경제·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빼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신중국의 실질적인 건설자이다. 주은래는 신중국 성립으로부터 총리재직 26년 3개월, 준의회의로부터 41년 동안 부동의 제2인자로 우뚝 서 있었다. 모택동의 그늘에 가려있던 주은래. 25년여 동안 모 주석의 정치적 동료로 활약하며 수상과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주은래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모택동과 달리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 초만 해도 주은래는 중국 공산당의 주요 당직을 맡으며 주목을 받고 있었고, 모택동은 그의 출세를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1934년 대장정을 계기로 주은래는 자신에게는 없는 지도자적 자질이 모택동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과 그들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해 군 위원회에서 주은래는 이름없는 부하에 불과했던 모택동을 홍군 사령관으로 추천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고, 그는 이후 자청해서 2인자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일까 주은래의 죽음에 대해 중국 인민들은 '광기의 시대였던 1966~69년(문화혁명) 당시 누구보다 질서와 합리성을 주장한 사람이자, 9개월 후 죽은 모 주석보다 중국 인민들이 더 슬퍼한 위인’으로 평가했다.


주은래는 1973년엔 72일간을 병상에서 보냈다. 병상에서도 비서들을 불러 집무를 매일 했다. 퇴원 후에도 하루 평균 16-18시간씩 일하면서 병이 깃든 자신의 몸을 혹사했다. 그는 걱정하는 측근들에게 "나처럼 역사의 무대에 내던져진 인간의 몸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란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긴 이들은 몇이나 될까?(예를 들어 총리의 근무 시간을 계산한 것이 있는데 그는 당내에서도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었다. 주 총리가 1974년 6월 1일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그해 1월부터 일한 시간을 정리한 것이 있었다. 1월에서 5월까지 총 139일에 서 12∼14시간 일한 날이 9일, 14∼18시간 이 74일, 19∼23시간이 38일, 24시간 꼬박 세운 날은 5일, 그사이 13일 동안만이 근 무시간이 12시간 내였다고 한다. 게다가 3 월 중순부터 5월말까지 일반적인 업무처리 외에도 중앙회의에 21차례 참석했고 외교활동에 54차례, 기타 회의에 57차례 참석했다고 한다.)


인민의 벗, 주은래


주은래는 방광암으로 죽어가는 초읽기의 시간 동안 혁명의 시기보다 더욱 치열한 삶을 살았다.(1972∼ 76년) 그는 미국·일본과의 수교작업, 월남전의 마무리, 문화대혁명의 폐허 속에서 국가경제를 재건하는 문제, 그리고 모의 사후에 대비한 권력의 재편성(추방당한 등소평의 재기용과 문화혁명 4인방의 거세준비 작업)과 국가노선을 개방·실용쪽으로 전환하는 과제에 몰두하였다. 등소평은 주은래의 장례식에서 "그는 소박·신중·겸손하고 사람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솔선수범했고 열심히 살았다"고 말했다. 주은래가 진정으로 충성을 바친 대상은 모택동이 아니라 인민과 국가였다. 주은래는 당대의 권력사에선 2인자였지만 인민들의 마음, 그리고 후세의 평가에선 1인자란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주은래의 죽음은 모 주석과 4인방을 크게 긴장시켰다. 그것은 그의 죽음에 따른 중국 인민의 동향과 그들의 애도 분위기가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를 감안한 탓인지 당시 중국 지도부는 그의 죽음과 관련된 기사와 행사들을 철저히 통제했다. 그런데 문제는 강청이었다.


그녀가 마음껏 애도조차 할 수 없었던 중국 인민들의 가슴에 불을 던진 것이다. 중국공산당 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 주은래가 서거한 2일 후인 1월10일, 북경의 한 병원에서 개최된 고별식의 모습이 中央電視臺(TV방송)의 밤 뉴스로 방영되었다. 그런데 강청(江靑)이 모자를 쓴 채로 묵념하고 있는 모습을 시청하던 가두의 시민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강청과 4인방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미 죽은 주은래를 비판하는 논문을 언론에 싣기 까지 했다. 이는 주은래를 추도하는 국민 감정에 찬물을 뿌렸고, 대중의 불만은 높아갔다. 4인방의 거점인 상해에서 주은래 추도회가 개최된 1월15일 오전 9시57분, 주은래의 사망 시각에 맞춰 선박들이 일제히 규칙에 위반되는 기적을 단속적으로 30분 이상 계속 울렸다. 그리고 3월말에 이르러서는 중국 인민들의 추도 시위와 행진이 잇따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총리를 반대하는 자는 모두 타도하라』는 삐라를 뿌리며 4인방을 비판했다. 제1차 천안문 사건의 시작이었다.


제1차 천안문 사건과 주은래


3월30일, 혁명투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는 북경 천안문광장에 세워진 인민영웅기념비에 주은래를 추도하고, 4인방을 비판하는 조사가 북경시총공회의 노동자 이론그룹에 의해 나붙었다. 열흘 전부터 기념비에는 주은래 추도의 화환이 바쳐져 있었는 데, 수도 한복판에서 4인방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이 등장한 것이다. 기념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날로 늘어났다. 1976년의 淸明節(청명절)은 일요일인 4월 4일이었다. 선조와 死者를 기리는 이날, 북경의 하늘은 잔뜩 흐리고 쌀쌀한 날씨였지만, 천안문 광장은 이른 아침부터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건국 이래의 국무원 총리 주은래의 죽음을 애도하고 4인방을 규탄하는 대중 행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광장에는 전국 각지로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연 2백만 명을 웃돌았다. 首都鋼鐵公司(수도강철공사)의 청년 노동자가 눈물을 흘리며 주은래를 추도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군중들은 『주총리는 영원히 불멸 !』 『주총리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 타도하라!』고 호응했다. 청년은 『우리들은 신념을 가지고 저 야심가, 음모가를 철저히 때려부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외쳤다. 비판의 창끝이 강청 등 4인방에 향해지고 있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밤이 되어도 광장에 남아있던 군중은 흩어 지지 않고 기념비를 둘러쌌다. 그때 기념비 의 난간에 「열한 번째의 노선투쟁 大記事」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등장했다. 모택동 은 『과거 당내에서 열 번의 노선을 둘러싼 투쟁이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大記事」는 지금, 4인방과의 투쟁이 그 열 한 번째라고 주장했다. 청명절 밤, 4인방의 발의로 국무원 總理代行(총리대행) 겸 공안부장(당정치국원)인 華國鋒(화국봉)이 주재하는 긴급 정치국회 의가 열렸다. 등소평과 주은래의 맹우인 黨부주석 겸 국방부장인 섭검영 등에게 는 통보되지 않았다.


4인방의 王洪文(당부주석)은 『天安門 소동의 흑막은 등소평이다!』라고 단정했다. 역 시 4인방의 張春橋(당정치국원)는 『20년 전의 헝가리가 생각난다』라고 말했다. 4월4일 심야에 이르면 천안문 광장의 군중도 훨씬 줄어들었다. 5일 오전 1시, 화환과 간판 등의 강제 철거가 개시되었다. 약 2백 대의 트럭이 2천 개가 넘는 화환을 실어 가고, 수천의 노동자 민병과 공안경찰 등이 인민영웅기념비를 포위했다. 그때 화환을 지키던 시위대의 당번 57명이 체포되었다. 날이 새자 군중들이 다시 광장에 모여들었다. 화환이 제거되고 시위군중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수만 명이 광장에 접한 民兵 및 공안 경찰의 지휘부로 몰려가 충돌이 일어났다. 혼란 중 지휘부의 차 몇 대가 불타고, 지휘부의 건물에서도 화염이 올랐다. 저녁 6시 반, 천안문 광장에 나팔 소리가 일제히 울리고, 시장인 吳德의 목소리가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이 정치사건의 반동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들의 음모궤계(陰謀詭計)를 폭로하며, 혁명의 경계심을 강화하여 속지 말라. 혁 명 대중은 즉시 광장을 떠나라』 밤 9시, 광장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가 잠깐의 사이를 두고 점등되어 광장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호인 듯 대기하고 있던 1만의 민병(民兵)과 3천의 공안경찰, 인민해방군 북경위수구 부대가 곤봉과 가죽 벨트를 손에 들고 일제히 출동했다. 광장에 남아있던 군중은 포위되어 쫓겨갔다. 격렬하게 구타당한 군중은 잇달아 쓰러졌다. 15분 후, 광장의 바닥에는 선혈이 낭자했고 , 얼굴 등이 깨진 2백명 이상의 인민이 일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전국과 세계에 충격을 준 1976년의 「제1차 천안문 사건」이었다.〈제1차 천안문사건> 이틀 후인 1976년 4월 7일 등소평은 생애 세 번째의 실각을 당했다.


모택동은 그해 9월9일 사망하고, 화국봉이 모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1개월 후인 10월6일, 국방상 섭검영(葉劍英)은 당주석 화국봉(華國鋒)과 연합하여 최고 권력을 노리던 江靑과 그 일당인 王洪文, 張春橋, 姚文元을 체포했다. 江靑은 1981년 「反혁명집단의 首謀者」로서 최고인민 법원 특별법정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83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91년 자살했다. 이후 등소평은 표면적으로 모 주석을 실질적으로는 주은래를 추종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그것은 <제2차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역시 그러했던 것 같다.


주은래, 모택동에 기생한 권력가였는가?


간혹 주은래를 비판하고자 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주은래의 문화혁명 기간 동안의 행적을 두고 말한다. 그것은 모 주석의 뒤를 이어 당시 명실상부한 제2인자로 떠오르던 유소기가 문혁 기간 동안 총리직에서 쫒겨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 기간동안 많은 혁명동지들 역시 비참하게 죽거나 인민들이 희생당하는 과정에서 그가 침묵했다는 것이다. 또한 모택동의 주치의였던 이지수가 쓴 『모택동의 사생활』에는 모택동에 대한 주은래의 굴욕적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 주은래는 모택동에게 보고할 때는 침상 옆에 꿇어앉아서 했고 방광암 수술을 받고싶어도 모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2년간 고생했다는 것이다.


1974년 6월 주은래의 아내 등영초는 모택동 전담 치료의사단에 속한 여성 검사원에게 부탁하여 모주석으로부터 수술허가를 겨우 얻어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은래는 혁명을 그 스스로가 지속시키고자 했다. 여기서 혁명이란 문화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신중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혁명을 말하는 것이다. 문화혁명의 과정에서 주은래 역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구하지 못한 동료와 인민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주은래의 책임으로 모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나치 독일의 2인자들은 괴벨스, 히믈러, 괴링 등은 모두 제각각의 길을 걸었다.


그 중 괴벨스가 제일 영리한 인물이었지만 그 역시 광신적인 히틀러 추종자였기에 히틀러의 자살 이후 자식들마저 쏴죽이고 지하 벙커에서 자살한다. 괴링은 몰락해 가는 히틀러의 곁에서 총통의 지위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독촉하다가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런 인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주은래의 처신은 대단히 융통성있었고 유연했다. 물론 그의 처신이 항상 옳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미 모 주석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으며 주은래는 모주석의 사후에 대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중에 그가 치뤘던 고통 역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추측해 보면 신중국 수립 이전부터 모택동과 주은래의 사이는 전우이자 정책협력자로 모택동은 국가중대사를 결정할 때마다 반드시 주은래에게 조언을 구했고 주은래 또한 중국의 지도자로서의 모택동에게 적극적인 협력과 지지를 보냈다.


'문혁'도 주은래가 모택동 의견의 존중과 함께 당 내부의 분열을 막기 위한 최후의 선택으로 여겨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때문에 주은래가 해야 할 일은 더욱 많아졌다. 중국 신문에서는 다들 '문혁' 중에 주은래의 중요성을 '주은래가 없는 문혁의 결과는 상상할 수 없다'고 할만큼 칭찬하고 있다. 중국 정부측은 주은래를 하나의 상징이자 신화로 만들어가고자 한다. 그것은 쿠바가 '체 게바라'를 통해 혁명과 정권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노력과 비슷하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모택동의 길도 주은래의 길도 아닌 길로 너무 많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민의 벗이었던 주은래


주은래는 중국인의 시각으로는, 군벌과 열강의 압제와 약탈로 중국인의 생존이 위태롭고 일제의 침략과 국공내전으로 중국 산하가 파멸 위기에 직면했을 때 중국인에게 위대한 희망을 품게 하고 그것을 실현시킨 「인민의 벗」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78년의 생애를 몇 가지만 더듬어보면 우리는 주은래 추모열풍의 역사적 궤적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주은래의 일화 몇 가지를 살펴보자.


주은래는 혁명가였지만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는 행정가이자 고급 관리나 다름없는 일들을 해야만 했다. 그는 중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자 공무원이었던 것이다. 한번은 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셔츠가 뜯어져 대사관으로 수선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그의 옷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총리의 셔츠는 여러 번 수선한 자국이 그대로 있었고 목 칼라며 소매가 닳아 몇 번이나 그 부분만 바꿔가며 수선하여 입었던 것이다.(실제 중국의 주은래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그가 생전에 입었다는 옷들을 전시해놓은 것을 보았을 때 이런 말들이 거짓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5·16을 혁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때의 혁명 주체 세력과 비교해보시기 바란다.) 이 외에도 전시관에는 그의 잠옷을 한 벌과 코트도 한 벌 전시하고 있었는데 처음엔 푸른색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빨고 기운 탓에 너무 닳아 보풀도 일지 않고 푸른색 무늬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그의 아내 등영초도 마찬가지였다.


속된 말로 속옷도 꿰매 입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초라한 옷이니 여러 사람이 보기에도 안 좋았고 외국인에게는 더욱 보일 수 없어서 총리는 출국 할 때면 항상 특별한 상자를 들고 갔다고 한다. 어떤 호텔에 묵든 매일 아침이면 중국측 사람이 먼저 총리의 옷을 상자 안에 잘 정리한 다음에야 비로소 호텔 종업원이 들어와 방을 정리했으므로 모르는 이들은 그 상자에 아주 중요한 기밀 문서가 들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주 총리의 낡은 옷과 그의 혼이었다. 입는 것만큼 주총리가 살았던 곳 역시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주 총리는 그 곳에서 25년을 살았다고 하는데 그 집은 너무 오래 되어 비도 새고 어둡기도 하여 수리가 필요했다고 한다. <周恩來年譜>에 기록된 것을 보면 '1960년 3월 6일. 총리가 베이징으로 돌아왔을 때 집이 수리된 것을 알았다. 그러자 총리는 그날 저녁 낚시터로 가버린 후 방을 옛날 쓰던 물건들로 바꾸라고 했다(창문 커튼까지). 전부 바꾸지 않으면 돌아와 살지 않겠다고 해서 작업인들은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라고 되어있다. 주은래는 '격려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비판이란 행위 자체가 일상화되어 있는 공산당 활동 속에서 모택동이 엄한 아버지였다면 주은래는 자애로운 어머니 역할을 맡았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주은래의 격려는 모든 중국 인민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1958년 여름 중국의 대동맥인 황하가 범람했다. 중국의 지도자는 예나 지금이나 치수문제가 통치의 기반까지 흔드는 중대사이다. 대홍수는 황하대교를 무너뜨렸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그 다음날 황하를 따라 저공 비행을 하는 비행기가 있었다. 그 비행기에는 주은래가 타고 있었고 그는 도착하자마자 복구회의를 열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어느덧 깊은 밤이 되었지만 주 총리는 홍수로 파괴된 길을 따라 3㎞를 걸었고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의 곁으로 홍수를 상대로 분투하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은래는 현장 상황을 묻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게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식사는 괜찮은가?"라고 먼저 물었다. 그는 언제나 이러한 염려를 먼저 물었다고 한다. 총리의 따뜻한 말에 모두들 "자지 못했습니다."고 말했고, 총리는 "여러분은 물 위의 영웅"이라고 칭찬했다. 복구 작업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 총리의 지시가 어떻게 떨어질 것인가 기다렸다. 그러나 총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의 예상과 다른 의외의 말이었다. "여러분 아무쪼록 의견을 내주세요." 이런 총리의 말에 모두들 크게 놀랐지만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고 어떤 이는 갑자기 일어나 "우리들은 주 총리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판에 박힌 인사를 했다.


주 총리는 "우리는 모두 일가친척입니다. 환영할 필요는 없습니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문제는 다리를 어떻게 하는가 입니다. 모두 다리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므로 경험도 풍부하다. 나는 모두의 의견에 따라 하고 싶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총리는 노동자들의 경험과 열의를 신뢰했으며 그들의 자발적인 신념과 노력에 따라 일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의 신뢰에 부응하기 위해 가진 힘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고, 비가 내렸다. 어느 사람이 서둘러 우산을 받쳐 주었지만 그는 "이대로 괜찮다. 여러분도 비에 젖고 있지 않은가."라며 우산 쓰는 것을 거절했다. 협의가 끝나고 그는 "다리의 수리는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폭풍우나 홍수와 싸우기 위해서는 혁명전쟁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노동자 농민 병사가 하나가 되어 맞서는 것 외는 없습니다. 나는 중앙당을 대표하여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위도 아래도 없다. 함께 싸우자."는 이 격려가 모두에게 힘이 되었고 다리는 계획보다 빨리 복구되었다.


주은래에게 어느 서방 기자가 "중국에도 창녀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주은래의 대답은 간단했다. "있습니다. 대만에"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사실, 그리고 대만의 부패상을 한 마디로 압축한 재치. 제갈공명의 생애에서 우리가 감동하는 부분은 그의 업적(결과로만 따진다면 그는 실패한 전략가였다)이 아니라 지성의 자세이다. 주은래는 제갈공명의 덕성을 갖추었고 등소평을 통해서 자신의 꿈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공명보다도 더 성공적인 2인자였다.


주총리의 임종의 말은 "자네들(의료관계자)은 내가 있는 곳에서는 이제 할 일이 없다. 다른 동지가 있는 곳으로 가서 빨리 도와주시오"였다.


죽어서도 인민에게 모범을 보인 지도자. 주은래와 등영초 부부


중국의 최고지도자 등소평은 죽음에 앞서 『유해를 화장해 바다에 뿌려달라』,『유골을 안치하는 영당 (靈堂)을 만들지 말라』,『각막을 기증하며, 유해는 의학연구를 위한 해부용으로 써달라』는 등의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등소평의 유언은 주은래 전 총리와 그의 부인 등영초 여사가 남긴 유언과도 비슷하다. 주은래는 『자신의 유해를 화장해 조국 산하에 뿌려달라』는 말을 남기면서 지난 76년 세상을 떠났다. 등소평은 당시 장례위원장을 맡아 주의 영결식을 주관했다. 주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해 등소평이 비행기를 타고 직접 전국을 돌며 흩뿌린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의 혁명원로들의 유골이 안치돼있는 팔보산혁명공묘(납골당)에 유독 주은래의 유골이 없는 것도 그렇게 뿌려버렸기 때문이다. 92년 사망한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도 비슷한 유언을 남겼다. 그녀는 『유해를 의학 해부용으로 써달라. 그리고 해부용으로 용도가 다했을 때는 주저없이 화장하라. 화장후 재는 보관하지 말고, 고별식과 추도식도 절대 갖지 말라』고 유언했다. 등영초는 혹시 이 유언이 지켜지지 않을까 염려해, 이 유언이 생전에 남편 주은래와 함께한 약속이라고 누차 측근에게 상기시켰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녀의 유골은 팔보산 혁명묘지에 봉안돼있다. 중국인민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주은래 총리는 중국 전토에 자신의 뼈를 뿌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았다.


내용출처 : 네이버 오픈 사전,[인터넷]

http://windshoes.new21.org/person-zhouenlai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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