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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숙적' 마오와 장제스의 20세기 '초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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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숙적' 마오와 장제스의 20세기 '초한지'
14. 마오를 다시 말한다
현이섭·언론인 heawoonh@naver.com 2011년 07월 15일 금요일


장제스는 1927년 4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南京)정부를 수립하고 국민당 좌파 정부인 왕징웨이의 우한(武漢)정부를 무너뜨려 권력을 오르지 하면서 베이징 북양군벌에 대한 3차 북벌에 나섰다. 장제스는 1928년 2월 허난성(河南省)일대를 장악한 군벌 펑위샹(馮玉祥), 산시성(山西省)을 기반으로 한 군벌 옌시산(閻錫山)과 연합해 당시 최대의 군벌인 펑톈(奉天)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공격했다.

일본의 조종을 받던 장쭤린은 일본이 지지를 철회하자, 이들 연합군에 패배해 베이징과 톈진을 포기하고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만주로 후퇴하던 중 6월 그가 탄 열차를 일본군이 폭파시켜 그 자리에서 폭사했다. 그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국민당에 합류했다. 베이징에 입성한 장제스는 겉으로 중국 전역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다. 장제스는 이때 북쪽의 수도라는 뜻의 베이징(北京)을 ‘북쪽의 평화’라는 의미로 베이핑(北平)으로 바꿨는데, 1949년 10월 마오가 신중국을 창건하면서 다시 베이징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



장제스는 1928년 신해혁명 기념일인 10월 10일에 내란과 군벌시대의 종언을 선언해 난징정부가 중앙정부임을 천명했다. 하지만 중국 곳곳에서 군벌들의 통치가 여전했고, 북벌과정에서 새로운 군벌이 생겨나기도 했다. 마오가 말한 신군벌은 광시(廣西) 군벌로 급성장한 리종런(李宗仁)과 바이충시(白崇禧)로 근거지인 광시뿐만 아니라 구이저우, 후난, 후베이까지 장악했다.

군벌 리지천(李濟琛)은 광둥성을 통치하고 있었다. 구 군벌인 양선(楊森)은 쓰촨성, 옌시산은 산시성, 펑위샹은 허난성, 장쉐량은 만주 등을 관할했다. 장제스는 국민당에 합류한 이들에 대한 지역 통치권을 사실상 인정해 군벌들의 할거양상은 그대로였다. 여기에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의 경우 윈난은 가로회(哥老會)의 우두머리였던 독군 룽윈(龍雲)이, 쓰촨 남부지역에서는 숙질간인 군벌 류샹(劉湘)과 류원후이(劉文輝), 티벳은 군벌 성스차이(盛世才)가 각각 장악해 난징정부의 통치 사각지대였다. (주석 55)

여기에 공산당은 ‘혁구(革區)’ ‘소비에트 근거지’ ‘혁명 근거지’ ‘해방구’ '공산당 근거지‘ 등의 이름으로 장악한 지역을 자치지역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최초의 근거지이자 가장 영향력이 큰 곳이 마오와 주더가 합류한 징강산 근거지였다. 이들은 6개현으로 구성된 이 지역에 소비에트 정부를 건립하고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소비에트‘ 라는 용어는 중국공산당이 러시아 10월 혁명을 추구하고, 소련의 지원과 영향력, 호감 등을 고려해 따다 쓴 것으로 이 지역 안에서 독자적인 통치권을 행사한다.

이때 공산당의 소비에트 구역은 징강산 이외에 후베이성 서부에서는 허룽(賀龍), 동부에서 출발한 쉬하이둥(徐海東)은 후베이, 허난, 안후이성, 즉 '어-위-환(鄂豫皖)' 변계에 소비에트를 만들었다. 나중에 장꿔타오, 쉬샹치옌(徐向前)이 이 지역을 관할했다. 팡쯔민(方志敏)과 샤오스핑(邵式平)은 푸젠성(福建省)에 인접한 장시성 동북경계지역에서, 펑파이(彭湃)는 광둥성 하이루펑(海陸豊)에서, 덩즈후이(鄧子恢), 장딩청(張鼎丞)은 푸젠성 서부에서 각각 소비에트를 만들었다. 이처럼 장제스의 4.12쿠데타 후 지하로 잠적했던 공산당들이 중국 각 지역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장제스는 1928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산당에 대한 공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과녁은 징강산이었다. 기원전 3세기 한나라의 유방과 초나라 항우가 천하를 다툰 한초전(漢楚戰)이 20세기에 부활해 장장 20여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이게 된다. 평생의 숙적 마오와 장제스의 ’축록전(逐鹿戰)‘은 그 규모나 기간, 인명살상, 이념적인 면 등에서 역사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장제스는 마오 보다 6살 위로 1987년 저장성 소금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사숙에서 논어 맹자 등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장제스는 톈진 바오딩(保定) 속성학당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군인 양성학교인 전우(振武)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포병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귀국해 1914년 쑨원의 국민당에 들어가 측근에서 일했다. 1919년 쑨원이 재조직한 국민당의 권력지형은 우익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후한민(胡漢民), 해외 자본가 출신의 아들인 랴오중카이(廖仲愷), 좌익을 대표하는 무정부주의자였던 왕징웨이(王精衛)로 3분되어 있었다. 장제스는 국민당이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1924년 5월에 설립한 군 간부 양성학교인 황푸(黃埔)군관학교 교장을 맡았다. 8월에 랴오중카이가 암살되고, 그 배후로 지목된 후한민이 권력의 실세에서 멀어졌다. 국민당 내의 권력구조에서 우익을 대표하는 장제스의 입지가 열리기 시작했다. (주석 56)

1926년 여름, 국민당은 쑨원 사후 제2차 북벌에 나섰다. 공산당원과 좌익세력으로 구성한 북벌군은 예팅(葉挺)과 소련 군사 고문 갈렌의 지휘를 받으며 광둥성에서 우한 쪽의 북서쪽으로 치고 올라갔다. 또 북벌 총사령관인 장제스가 이끄는 북벌군은 난징과 상하이로 향하는 북동쪽으로 진군했다. 우한을 점령한 북벌군은 왕징웨이를 정부수반으로 하는 국민당 우한 좌파정부를 세웠다. 장제스는 장시성의 성도인 난창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장제스는 1920년대 상하이에서 증권 중개업을 한바 있어 친분이 있는 상하이 금융계 인사, 마피아인 청방(靑幇), 홍방(紅幇) 우두머리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상하이는 중국 최대의 항구도시로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달하면서 영국, 프랑스 등 외국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또 1919년 이후 노동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상하이 마피아 청방은 많은 도시 노동자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1927년 3월 18일 공산당의 저우언라이가 주도하는 상하이 노동조합은 80만의 노동자를 동원해 총파업을 벌였다. 4일 만에 노조 행동대원들은 상하이에 주둔한 북양군벌의 장종창(張宗昌) 부대를 북방으로 내쫒았다. 장제스의 북벌군은 전투가 끝난 3월 23일에야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후 장제스는 국민당 우파와 상하이 자본가 그룹, 청-홍방 등 상하이 마피아의 지원을 받아 4.12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의 최고 실세가 됐다. 장제스는 18일 쑨원의 국민당 정통성을 내세워 ’난징정부‘를 세우고, 3개월 만에 우한 좌파 국민당 정부를 무너뜨려 국민당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됐다. 장제스는 그 뒤 북벌을 끝내고 공산당을 축출하기 위해 대규모의 포위소탕전에 돌입한 것이다.

마오가 처음 징강산에 들어갔을 때 병력이 1천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주더와 마오 군이 합류하면서 병력이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이미 후난, 장시의 국민당 군이 여러 차례 포위공격을 해왔다. 홍군은 처음 3년 동안 힘들었던 시기를 보냈다. 장제스가 5차례의 대규모 포위공격 소탕전(圍剿)을 벌이기 직전 홍군의 병력은 3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장제스는 1차 공격 때 10만 명, 2차 20만 명, 3차 30만 명, 4차 50만 명, 5차 50만 명 등 5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공산당 포위공격 소탕전을 펼쳤다.

1930년 10월, 장제스가 제1차 포위 소탕전을 벌이기 전 마오는 동원 대회에서 전투 요령을 응집한 16자로 된 대련(對聯)을 써준 일이 있었다. 대련은 이러했다. (주석 57)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퇴각한다(敵進我退). 적이 멈춰 진을 치면 우리는 교란한다(敵駐我擾).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한다(敵疲我打).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격한다(敵退我追).”
“유격전에 승산이 있다. 빠르게 진격하고 퇴각한다(大步進退). 적을 깊숙이 유인한다(誘敵深入). 병력을 집중한다(集中兵力). 각개 격파한다(各個擊破). 운동전으로 적을 섬멸하자.”

홍군의 유명한 이 16자결(字訣)은 마오의 군사 전략적인 지도사상을 고도로 응집해 개괄한 것이다. ‘16자결’은 주더와 마오가 인솔한 홍군이 유격전을 벌이면서 겪은 것을 총결하면서 마오가 창안해 낸 것이다. 1928년 1월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마오가 수이촨(遂川)성에서 전적위원회와 완안(萬安)현 위원회 연석회의를 주재할 때 처음 거론했다. 그때에는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퇴각한다 /적이 멈춰 진을 치면 우리는 교란한다/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격한다’ 등 12자였다가 이후 16자 결로 완결됐다. 홍군이 3만여 명으로 늘어나고 적에 대항하는 힘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홍군은 유격전에서 운동전으로 전략을 바꾸면서 후반부 16자결이 만들어졌다. 장시성 중앙 소비에트에 대한 장제스의 4차례 소탕전에 맞서 3차례는 마오가 부대를 지휘했다. 4차 때는 주더와 저우언라이가 이끌었다. 이 네 번의 반 포위공격 소탕전은 모두 ‘적을 깊숙이 유인해 각개격파’하는 운동전을 벌여 승리했다. 마오는 에드가 스노우에게 이런 전략 전술을 이렇게 털어놨다. (주석 58)

“징강산에서는 네 가지 16자결이 채택됐다. 이것은 유격전에 활용한 전법들을 파악하는 실마리가 된다. 홍군은 바로 이런 전법을 활용한 유격전 속에서 성장했다. 4자씩 이뤄진 이 결(訣)들은 처음에 실전 경험이 있는 많은 군인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이들은 그런 형태의 전술에 찬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체험 속에서 이 전술이 옳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홍군이 이런 전술에서 벗어나면 대체로 실패했다. 우리는 병력수가 적어서 적군보다 10배에서 20배까지 열세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자원과 전투물자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운동전과 유격전을 잘 배합시켜야만 우리보다 엄청나게 풍부하고 우세한 위치에서 싸우는 국민당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가망이 있었다. 홍군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전술은 과거나 현재나, 공격할 때는 주력을 집중시키고 공격이 끝나면 병력을 신속하게 갈라서 분리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곧 진지전을 피하고 이동 중에 있는 적의 부대를 궤멸시키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이런 전술을 바탕으로 홍군은 기동성과 신속하고 강력한 속도전을 발전시켰다. 홍군은 일반적으로 소비에트지구를 확대시켜 나가는 데, 약진이나 도약 형태처럼 점령한 지역을 뿌리 깊게 다지지 못하고 나가는 고르지 못한 전진보다는 파도 형태나 물결 형태의 전진을 찬성했다.

이런 방침은 실제적인 계획을 통해 오랜 세월 동안 군사적, 정치적 체험을 축적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술은 리리산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모든 무기를 홍군의 수중에 집중시키고 모든 유격대를 흡수, 통합시키라고 주장했다. 그는 장악한 지역을 견고하게 다지기보다는 공격을, 배후를 굳게 지키기보다는 전진을 원했고 봉기와 병행한 떠들썩한 대도시 공격과 극단주의를 추구했다.
당시 이런 리리산 노선이 당-소비에트지구 밖의-을 지배하면서 상당한 영향을 발휘해 야전지휘관들의 판단과 어긋나는 그런 노선을 홍군이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창사에 대한 공격이고 난창을 향한 진군이었다. 그러나 홍군은 이런 모험 중에도 유격대가 기존 위치를 고수하게 함으로써 후방을 적군에게 열어 놓는 일은 배격했다.”


펑더화이.
1928년 말, 신중국 건국 후 10대원수의 두 번째 자리에 오른 펑더화이(彭德懷)가 인솔한 국민당군의 대부대가 징강산에 합류해 홍군의 전력이 한층 강화됐다. 펑더화이는 앞서 7월 후난성 군벌 허젠(何健) 군단에서 근무하다 핑장(平江)에서 폭동을 일으켜 8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징강산에 왔다. 펑더화이는 마오보다 5살 아래인 1898년 9월에 마오의 고향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후난성 샹탄(湘潭)현 한 농촌의 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에는 예부터 시인묵객들이 읊었던 아름다운 샹장(湘江)의 푸른 물줄기가 가없이 흐르고 있었다. 펑더화이는 6살 때 사숙에서 ‘삼자경’ ‘논어’ ‘맹자’ ‘대학’ 등을 배웠다. 8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병들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6개월 밖에 안 된 넷째 동생은 어머니가 숨진 뒤 1개월 만에 굶어 죽었다. 10살 때 집안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정월 초하루에는 집에 밥 지을 쌀이 없어 둘째 동생을 데리고 부잣집을 찾아가 동냥질하는 거지노릇도 했다. 어떤 때는 70살 된 할머니와 4살배기 셋째 동생을 데리고 구걸에 나선 적도 있었다. 산에가 나무를 해 시장에 팔아 근근이 연명했다. 펑더화이는 엄동설한에도 짚신을 신고 나무를 해 시장에 팔거나, 물고기를 잡아 팔거나, 탄을 캐다 팔거나 닥치는 대로 일했다.

펑더화이는 유년시절 같이 사는 큰 할아버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펑더화이는 큰 할아버지가 틈틈이 해주는 청나라 말 때 홍수전의 농민반란 ‘태평군’에 관한 이야기를 비분강개하며 들었다. 펑은 이야기를 듣다보면 모두가 잘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기들만 아는 토호나 악질 지주들을 타도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펑은 10살 때부터 2년 동안은 부농인 류(劉)씨네 집에 가서 두 마리의 소를 봐주면서 꼴을 베는 일을 했다. 13살 때부터 2년 동안은 탄광에 가서 일했다. 펑은 탄광이 도산하자 광산주가 달아나 노임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펑더화이는 이때 부농과 자본가들이 일꾼들을 얼마나 잔혹하게 착취하는지를 알았다고 했다. 펑더화이가 15살이 되던 해 큰 가뭄이 들어 기근이 심각했다. 굶주린 사람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는 대지주의 집에 찾아가 평상가격에 쌀을 팔 것을 간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를 지켜 본 펑더화이는 기민들과 함께 대지주의 창고를 털었다. 펑더화이는 살기 위해 외지로 도망가야 했다. 그는 달아난 샹인(湘陰)현에서 제방 공사장의 인부가 됐다. 제방 관리들의 임금착취가 얼마나 심한지를 몸으로 체험했다. 펑더화이는 훗날 이런 유, 소년기 때 빈한하고 힘들었던 생활이 자신을 단련시켰고, 항상 이때의 생활을 기억해 자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했으며 가난한 인민들의 생활을 잊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55)중국현대사 장세노, 프랑소와즈 르 바르베에, 마리-끌레르 베르제르 지음/ 신영준 옮김 도서출판 까치
56)중국현대사 쟝세노, 프랑소와즈 르 바르비에, 마리-끌레르 베르제르 지음/ 신영준 옮김 도서출판 까치
57)毛澤東反圍剿時期的奇妙戰術 理論頻道 新華網
58)중국의 붉은별(상)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안양노 신홍범 옮김 두레


원문보기: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96373&dable=30.52.3#csidx84fff29dfeacf359807e2ce8bc24f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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