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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3-18 08:21:153660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비운의 장군 예팅(葉挺)
운영자

예팅은 비운의 장군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임종을 앞두고 그를 생각했다. 30년 전에 헤어진 전우가 아니던가.먼저 간 동지 곁으로 그도 간다는 설렘에서였을까?



저우언라이는 죽기 며칠 전,보좌하는 사람들에게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차(茶) 하나를 주문했다.육안과편차(六安果片茶)라고 했다.육안과편차는 중국에서 보이차나 우룽차만큼 널리 알려진 차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차왕(茶王)’으로 불릴 만큼의 값비싼 명차이다.



간신히 구해서 달여 드렸더니 저우는 차 한 모금을 입술에 묻히고는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회상하는 것이었다.보좌관과 총리의 대화.



“총리님. 누구를 생각하십니까?”

“예팅(葉挺) 동지를 생각하고 있소. 옛날 예팅 장군이 신사군(新四軍) 군장으로 있을 때,이 육안과편차 한 통을 준 적이 있어요.”



예팅은 비운의 장군이었다.저우언라이는 임종을 앞두고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1946년 4월 8일,충칭(重慶) 비행장에서 옌안으로 떠나는 예팅을 배웅했던 것이 그와의 마지막 작별이었다.30년 전에 헤어진 전우가 아니던가. 먼저 간 동지 곁으로 이제 나도 간다는 설렘에서였을까.



저우언라이는 1927년 난창(南昌)봉기의 주역이었다.예팅은 난창봉기와 뒤이은 광둥(廣東)봉기에서 군사 지휘관으로 용명을 날렸다.예팅에 대한 김산의 증언이 있다. 그 자신이 광동봉기에 참여했던 김산이 <아리랑>을 통해 예팅의 광둥에서의 활약과 당시의 위치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윽고 예팅이 명령을 내렸다. 그는 각 대오가 가야 할 곳과 적의 군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방법을 말해주었다. 그는 모든 무장 세력의 총지휘관이었으며,봉기를 책임진 혁명위원회의 우두머리였다.



저우언라이는 예팅의 ‘신사군’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그는 중국 중남부 지역에도 중공당의 중요 군사기지가 있어야 된다고 판단했다.주더의 ‘팔로군(八路軍)’은 주로 서북쪽 전선을 맡고 있었다. 1939년 봄,저우는 장제스에게 장시(江西)성에 있는 홍군 부대를 재편성할 것을 요청했다.



어려운 협상 끝에 중공당의 단독 부대인 신사군이 새로 만들어졌다.신사군의 공식 명칭은 ‘국민혁명군 육군 신편(新編) 제4군, 약칭 ’신4군‘이었다.팔로군과 신사군은 공산당의 군대였지만 이름 그대로 장제스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 소속이 되었다.예팅을 군장으로 추천한 것도 저우였다.



장쑤성 옌청(鹽城)에 가면 ‘신사군’기념관이 있다.신사군 발상지로 유명한 옌청은 여름철엔 섭씨 40도가 넘는 찜통 도시이다.예팅이 옥에 갇히고 천이(陳毅)가 사령관이 되었다. 기념관엔 천이 관련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1946년 4월 8일, 충칭에서 옌안으로 가던 비행기 한 대가 산시(陝西)성 헤이차산(黑茶山) 상공에서 기상 악화로 추락했다. 탑승원 모두가 죽었다. 보구(博古), 왕뤄페이(王若飛), 덩파(鄧發) 등 내로라는 중공당의 지도자들이 목적지인 옌안을 눈앞에 두고 목숨을 잃었다.



이 날 죽은 사람들을 중공당에서는 죽은 날짜를 따서 “사팔열사(四八烈士)”라 부르며 추모한다.예팅도 그날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그는 불과 한 달 전에 5년간의 옥살이에서 풀려난 몸이었다.저우언라이는 ‘사팔열사’를 위한, 다음과 같은 제사(題詞)를 남겼다.



흑차산정(黑茶山頂) 연안하변(延安河邊)

인민영웅(人民英雄) 영수불후(永垂不朽)



1998년, 북경출판사는 <저우언라이 수적선(手迹選)> 6권을 펴냈다.제1권 <제사제자(題詞題字)권>엔 170편 가까운 저우의 글씨가 실려 있다. 위의 제사도 그 중의 하나.그의 첫 번째 제사로 남아있는 글씨는, 1913년, 15세 소년 저우언라이가 선양(瀋陽)의 학교 친구들에게 보내준 글이었다.



“동심노력만리전정지일등(同心努力萬里前程指日登)”

“마음 모아 노력하면 만 리길도 단박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일 게다.



앞에서 밝힌 대로 그의 마지막 글씨는 <심알동(深挖洞) 광적량(廣積糧) 불칭패(不稱霸)>였다.“굴을 깊게 파고, 먹을거리를 비축하며, 패왕을 자처하지 말라”는 이 말은 마오가 중국 인민에게 당부한 말이었다.마오의 이 교시는 미국과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중국 외교의 절박한 생존전략이었다.



이 교시는 덩샤오핑 시대에 “도광양회(韜光養晦)”로 구체화된다.덩샤오핑은 “실력을 감추고 묵묵히 힘을 기르는” 기조를 “100년은 유지해 달라”고 당부했지만 30년도 못 가 무너졌다.



오늘의 중국은 장쩌민(江澤民) 시대의 “유소작위(有所作爲)”를 거쳐 후진타오의 “돌돌핍인(咄咄逼人)”의 지경에 이르렀다. “필요한 역할은 하겠다.”는 다짐이 “상대를 호통치고 윽박지르는”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으로 발전했다고 세계가 우려하고 있다.



1955년에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핵 잠수함 기술을 전수받으려 애썼다.소련은 나중에 극히 제한적으로 일정 부분 핵잠수함 기술을 이전하는 데 동의했다.핵 개발에 대한 중공당의 열의는 대단했다. 결국 중국은 1964년,흐루시초프의 실각과 때를 맞추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그런 마오쩌둥이, 스스로 “패왕을 자처하지 말라”고 말했다.세상의 눈과 귀를 다른 데로 돌리려는, 중국 전통의 ‘손자병법’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었을까.중국공산당 군대의 유격전술(遊擊戰術)은 유명하다. 적이 공격해오면 도망가고,적이 멈추면 교란하고, 적이 후퇴하면 가차 없이 공격한다.



“불칭패”는 교란 시기의 교란작전이 아니었을까.세계가 우려하는 오늘의 ‘돌돌핍인’은 하루아침에 그냥 돌출된 것이 아니다.



예팅의 감옥살이는 완난사변(皖南事變)에서 비롯된다.1941년 1월, 예팅이 지휘하던 신사군은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로부터 안후이(安徽)성 남부의 근거지를 떠나 일본군 전선의 배후지역을 향해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에 따라 부대는 조심조심 북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부대가 징(涇)현 마오촌(茂村)지구에 이르렀을 때, 매복하고 있던 국민당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8만 명이 넘는 국민당 군과 7일 동안 치열한 접전을 벌렸으나 거의 전멸했다.



4천 명이 넘던 부대 병력은 2천명으로 줄어들었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거나 죽었다.총사령 예팅은 부상을 입은 채로 체포되었다.장제스는 명령불복종이라는 누명을 씌워 예팅을 옥에 집어넣었다. 이 사건이 완난사변이다.



완난은 안후이 성 남부를 말한다.이 사건으로 1936년 12월의 시안(西安)사변으로 어렵사리 이루어졌던 국민당, 중공당의 합작이 자칫 깨질 뻔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팔로군과 신사군에 대주던 지원도 끊어버렸다.

시안의 팔로군 판사처도 문 닫을 지경이 되었다. 위기국면이었다.장제스 국민당의 ‘반공(反共)’의지가 또 한 번 밖으로 분출한 것이 완난사변이었다.



바빠진 것은 저우언라이였다.저우언라이는 두 가지 숙제에 부닥쳤다. 완난사변의 진상을 세상에 알려 국내외 여론을 통해 장제스를 압박하는 일과, 한 편으로 위기에 빠진 연합전선을 추스르는 일이었다.



수도 난징(南京)을 일본군에 빼앗긴 장제스 정부는 충칭을 임시수도로 삼았다.공산당 연락처도 충칭에 설치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충칭 중공당의 총책임자였다.그는 중공당 남방국 서기의 신분으로 예팅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장제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종전이 되고도 해를 넘겨 3월에야 풀어주었다.그것도 교환조건에 의해서였다. 장제스는 예팅과 랴오청즈(廖承志)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중공군에 붙잡혀있는 국민당 제11전군 부사령관 등 5명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랴오청즈는 1925년 8월에 암살된 국민당 좌파 지도자 랴오중카이(廖㑖愷)의 아들이다.랴오중카이가 암살된 날은 저우와 덩이 결혼한 열흘 쯤 뒤였다.초기 황푸군관학교 졸업장에는 <총통 쑨원(孫文),당 대표 랴오중카이, 교장 장제스(蔣介石)>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다.



황포군관학교 시절 ‘당 대표’ 랴오중카이의 아들이 ‘교장’ 장제스에 의해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저우는 랴오중카이의 집에서 소년 랴오청즈를 처음 만났다.랴오가 1908년생이니 저우보다 열 살 아래이다. 그들은 평생 친형제처럼 지냈다.



여기서 잠깐 곁가지 이야기 하나를 하고 넘어가야겠다.1935년, 장정(長征) 중에 랴오는 장궈타오(張國燾)의 모함으로 ‘반혁명’으로 몰렸다.랴오는 홍군 제4방면군 총 정치부 비서장이었다. 그는 핵심 지휘관인 장궈타오 노선에 반대했다 해서 당적을 박탈당하고 처결을 기다리며 행군 중이었다.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정치위원 저우언라이는 마침 황하 변에 도착한 제4방면군의 상황도 알아보고

랴오의 소식도 궁금하여 장궈타오 부대를 찾았다.



저우는 유이왕바오쩐(預王保鎭)으로 떠나려던 랴오 일행을 우연히 만났다.그때까지도 저우는 랴오의 위급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저우를 만나는 순간 랴오는 정치위원인 저우에게 경례를 해야 할지, 그냥 못 본 채 얼굴을 돌려야 할지 망설였다.아버지의 오랜 지우인 저우 정치위원이 자기 때문에 곤란하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저우는 랴오 곁으로 다가갔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무 일도 모르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저우는 랴오를 압송하는 사람 앞에서 랴오의 손을 굳게 쥐고는 말없이 떠나버렸다.



그날 밤 저우는 연락병을 시켜 랴오청즈를 사령부로 불렀다.사령부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장궈타오도 있었다.장궈타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채 저우에게 묻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습니까?“

저우는 장에게 직접 대꾸하지 않고 아주 엄한 표정으로 랴오에게 연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잘못을 아는가?”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는가?”

“잘못을 고치겠는가?”

랴오는 일일이 대답했다.



저우는 랴오청즈에게 저녁을 먹고 가라고 일렀다. 랴오가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저우는 랴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장궈타오와만 이야기를 나누었다.저녁을 다 먹자 저우는 랴오를 바로 내보냈다.장궈타오가 랴오를 처결하려고 한 날이 바로 이날이었다.



저우는 자신의 직위를 내세우지 않고 장궈타오의 체면도 세워주면서 슬기롭게 랴오청즈를 살려냈다.사건은 그것으로 조용히 마무리되었다.그 뒤 랴오는 팔로군 홍콩 판사처의 책임자가 되어 주로 통일전선 사업을 맡았다.



1942년 1월에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건국 앞뒤로 신화(新華)통신사 사장, 중국청년예술극원(中國靑年藝術劇院) 원장을 지냈다.민주당파 인사들과 함께 중화전국민주청년연합회를 만들어 총회 주석을 맡았다.특히 일본과의 민간외교에 특출한 기여를 했다.



어렵게 풀려난 지 한 달 만에 예팅은 공중에서 산화(散華)하는 몸이 되었다.혁명 기간, 건국 이후, 비극적으로 간 사람이 예팅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저우의 가슴에 남는 동지들이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저우언라이는 예팅을 그리워했다.예팅과 저우언라이의 관계는 유별났다. 특히 예팅 가족과 저우의 인연도 기구했고 남달랐다.생전에 예팅이 주었던 차의 향기를 맡으며 저우는 죽음 앞에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이중/전 숭실대 총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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