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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5:01:274383 
간추린 중국사
양승국

다음 글은 경기대 남정휴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옮겨왔습니다.



간추린 중국 역사


중국역사는 현 고고학상의 발굴성과에 의하면 40∼50만년전의 원인(北京人)단계에까지 소급된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중국역사의 시작은 3황(皇), 5제(帝)의 전설시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3황이라 함은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헌원씨(軒轅氏)를 가리키는 말이며, 5제란 소호(少昊), 전, 곡, 요(堯), 순(舜)을 지칭하는 말이다.


복희씨는 일명 포희(包羲), 희황(羲皇), 황희(皇羲), 태호(太昊)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끈을 매듭지어 그물을 만듦으로써 사람들에게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고, 팔괘(八卦)를 창조해 천문지리와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견했다고 한다. 신농씨는 처음으로 나무를 깎아 쟁기를 만들고, 나무를 꾸부려서 자루를 만들어,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 백가 풀을 맛보아 처음으로 의약을 만들어 백성의 질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마지막 3황인 헌원씨는 배와 수레를 만들어서 전에 다니지 못하던 곳을 다닐 수 있게 하는 등 문화를 크게 일으킨 것으로 전해진다.


5제(五帝) 중에서는 중국의 유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제왕으로 칭송받고 있는 요·순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진다. 요(堯)는 어진 정치를 펴 전쟁을 없애고 태평한 사회를 만들었으므로 주변 부락이 동맹하여 그를 영수로 추대했다. 그는 인자한 성품으로 백성들을 덕으로 감화시켰으며, 홍수조절을 위해 물을 다스리기도 했다. 만년에 왕위를 아들 단주에게 물려주지 않고 어진 신하인 순(舜)에게 넘겨줌으로써 후세의 유가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순(舜)임금은 요(堯)로부터 군위를 선양받아 초보적인 통치국가의 기본을 다진 인물로서 요임금과 함께 유가에서 최고로 받들어지는 성군이다. 요임금처럼 덕으로 백성을 다스렸으며, 소(韶)라는 아름다운 음악을 지었다. 만년에 자신의 아들에게 천자의 지위를 물려주지 않고 치수를 잘 한 우(禹)에게 군위를 선양했다.


3황(皇) 5제(帝)의 전설을 이어서 기원전 21세기, 중국 사상 최초의 왕조(王朝)로서 하(夏)나라가 세워졌다. 아직까지 하(夏)의 존재를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적 발굴은 없지만, 성왕 우(禹)에서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16세기, 폭정 걸(桀) 때에 멸망하기까지 17대 약 5백년 동안이었다. 근래 은허(殷墟)와 이리두(二里頭) 문화유적이 발견됨으로써 하왕조의 실재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걸(桀)왕의 주지육림으로 하(夏)왕조가 멸망하고, 탕왕(湯王)이 은(殷)왕조를 개창했다. 현재, 실증적으로 확인되어 있는 최초의 왕조는 은(殷)나라이다.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멸망하기까지 31대 약 6백여년에 걸쳐 중원(中原)을 지배하였다. 하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華北)일대에서 번성했으며, 수도는 은허가 발굴된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일대이다. 한자의 초기 형태인 갑골문자를 사용했으며, 제사용으로 청동기를 사용할 정도로 문화수준이 높은 국가였다.


주(周)왕조는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전 249년까지 은(殷)나라에 이어 성립된 중국의 고대 왕조이다. 처음에는 은나라에 귀속된 속국이었으나 문왕(文王)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이 은의 폭군 주(紂)를 몰아내고 건국했다. 주(周)는 은(殷)의 말기에 처음 시작된 봉건제도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국가로서 봉건제에 의해 혈연관계가 없는 부족까지도 주의 친척으로 보는 유사혈연제를 만들어 제후로 봉하고 유사시 무력을 동원하도록 하여 강력한 무력국가를 만들었다. 이러한 주도 서융(西戎)이라는 유목민의 침입을 피해 기원전 770년에는 동쪽 낙양(洛陽)으로 천도했다. 동쪽으로 옮겨갈 때까지를 서주(西周)라 하고,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한다. 동주시대에는 국력이 쇠약하여 각 제후들에게 실권을 빼앗긴 채 명목만 남은 국가가 되었다. 기원전 256년 진(秦)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25명의 제왕이 514년간 동주왕조를 이끌었다. 동주시대는 곧 춘추전국시대에 해당한다.


주 왕실은 동천과 함께 권세를 잃고 이에 대신하여 춘추의 5패 - 제(齊), 송(宋), 진(晋), 진(秦), 초(楚) - 라고 불리우는 패자가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고 전국의 7응이라고 불리운 제후 즉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연(燕), 초(楚), 진(秦)이 정치를 전단하는 시대가 시작된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은 모두 주왕실의 제후들이었으나, 당시 정치가 문란 해서 주왕실의 위력이 제후들에게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공자, 노자, 맹자 등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했으며 제지백가(諸子百家)라는 학술 사상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유파로는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종횡가(縱橫家), 농가(農家), 병가(兵家), 소설가(小說家), 잡가(雜家) 등 10대가 있었다. 각 유파는 상호 논박하면서 사상적 발전을 이루었으므로 당시 학술 문화가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사용하고 있는 한자숙어(漢字熟語)의 대부분이 춘추전국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할만큼 이 시대는 잦은 전쟁과 사회적인 혼란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이런 혼돈을 마무리짓는 패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곧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 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에 군현(郡縣)을 설치했으며,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 도량형, 문자의 서체를 통일하고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몰수했다. 대외적으로는 북쪽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고 장군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많은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만리장성이나 아방궁(阿房宮), 능묘(陵墓) 건설 등으로 인해 백성의 원성을 사게 되어 각지의 민중반란이 일어나 겨우 15년만에 그 제국은 와해되어 버렸다. 그러나 진(秦)제국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처음으로 중국에 통일국가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현재 차이나(China)라는 영어 이름도 진(Chin)에서 기원한 것이다.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초한전(楚漢戰) 끝에 BC 202년에 한나라(漢)의 고조(高祖) 유방은 숙적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격파하고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하여 통일된 왕조를 세웠다. 진(秦)이 엄중한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실패했던 것을 감안해, 법제를 늦추고 부분적으로 봉건제를 부활해 군현제와 병용하는 이른바 군국제(郡國制)을 실시했다. 한나라(漢) 시대에는 유교를 정치체제의 표본으로 삼았고, 종이와 지진계를 발명하는 등 여러 가지 과학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제(武帝)를 정점으로 하여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기원 9년 왕망(王莽)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왕망은 신(新)왕조를 건설했지만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23년 반란군에게 피살됨으로서 신왕조도 단명을 기록하며 멸망했다.


왕망(王莽)에게 빼앗긴 한나라(漢)를 부흥하려는 하남(河南)의 호족(豪族)들에게 추대된 유수(劉秀 - 光武帝)는, 기원 25년에 전국을 평정하고, 도읍을 낙양(洛陽)에 정했다. 보통 이 때 생성된 한(漢)을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하고, 한고조에 의해 건국된 한나라(漢)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 라고 부른다. 후한 말년 환관(宦官)이 득세하고 정치가 부패하여 184년 황건(黃巾)의 난이 일어나고 위(魏), 촉(蜀), 오(吳)로 천하가 삼분된, 220년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헌제(獻帝)를 폐위시키고 제위에 오르면서 완전 멸망했다.


이 후 약 45년간 조조의 위(魏), 유비(劉備)의 촉(蜀), 손권(孫權)의 오(吳)나라가 대립하는 삼국시대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는 유명한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出師表)가 등장하는 때이기도 하다. 263년 위에 의해 촉이 멸망하고 280년 진(晋)의 사마염(司馬炎)에 의해 오가 멸망하면서 삼국시대가 끝이나고 진나라(晋)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그러나 제권(帝權)을 강화하기 위해, 일족의 왕들에게 병력을 가지게 한 일은 이민족의 침입을 부른 결과가 되었다. 316년에 진나라(晋)는 흉노(匈奴)에게 망하게 되지만, 진나라의 일족으로 강남을 다스리고 있던 사마예(司馬睿)는 호족(豪族)의 지지를 받아 진왕조(晋王朝)를 재건했다. 전자를 서진(西晋)이라 하고 후자를 동진(東晋)이라 한다. 서진은 4명의 황제에 의해 52년간 지속됐고, 동진은 송(宋)의 유유(劉裕)에게 멸망되기까지 11명의 황제에 의해 104년간 지속됐다.


기원 420년, 동진(東晋)의 뒤를 이어 송나라(宋)가 서서 남조(南朝)가 시작됐다. 송(宋)을 이어 제(齊), 양(梁), 후량(後梁), 진(陳)나라 잇따라 섰고 멸망했다. 한편 강북에는 서진(西晋)이 흉노에게 멸망한 뒤 북위(北魏)가 통일을 시켰다. 북위는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된 뒤 북제(北齊)가 동위를 대신하고 북주(北周)가 서위를 대신하며, 다시 북주가 북제를 멸하는 혼란이 연속됐다. 581년 수나라(隨)가 북주를 멸망시키고 589년에는 진(陳)도 멸망시켜서 남북조(南北朝) 시대는 끝이 나게 된다.


581년, 북주의 재상 양견(楊堅)이 외척(外戚)으로서의 힘을 이용하여 제위에 올랐다. 589년에는 진(陳)을 멸하면서 전국을 통일했는데, 영토는 동남으로 바다에 접하고, 서쪽으로 신강 동부, 서남으로 운남·광서 및 월남 북부, 동북으로 요하(遼河)에 이르렀다. 수의 두번째 황제인 수양제(隨煬帝)는 605년부터 6년 동안에 걸쳐, 통제거(通濟渠)·한구·영제거(永濟渠)·강남하(江南河)등 대륙을 남북으로 잇는 대운하(大運河)를 건설했다. 수나라는 대대적인 토목공사와 3차례의 고구려 징발 등 무리한 정치를 폈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민심의 이반과 불평분자의 봉기를 초래하여, 통일 후 겨우 30년만에 멸망했다.


당(唐)은 617년 태원(太原)의 유수(留守)인 이연(李淵: 唐 高宗)이 군대를 이끌고 장안을 공격하여 이듬해 수를 멸망시키고 제위에 오르면서 건국한 국가이다. 당은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된 인재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전문관료제도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대외적으로는 돌궐, 철륵(鐵勒), 투르판을 차례로 격파하고 토번(吐蕃)을 정복하는 한편, 서역의 요지에 전진기지들을 설치하는 등 사방으로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중앙의 통치력이 점점 쇠미해지면서 환관이 전권을 쥐었으며, 붕당의 투쟁이 계속됐다. 874년 황소(黃巢)의 난을 비롯한 대규모 농민 반란이 폭발하여 중앙의 집권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결국 907년에 후량(後粱)을 세운 주온(朱溫: 朱全忠)에 의해 멸망했다.


당(唐)의 역사 가운데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 측천무후(則天武后)이다. 그녀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하여 고종(高宗)과 깊은 관계를 맺은 뒤에 궁중 내의 비빈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황후를 폐위시키고 655년에는 자신이 황후가 되었다. 그녀는 고종이 중병이 들어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섭정을 통해 강력한 통치력을 과시했다. 그녀는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도 독살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등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비록 많은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무후가 추진한 정책은 중국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당대의 중국사회가 군사적·정치적 귀족계층에 의해 통치되던 사회에서 사대부 가문출신의 문인 관료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게 되었다는 점이다.


당나라의 문학 방면에서는 '당시(唐詩)' 라는 용어가 생겨날 만큼 시가 흥성했고, 이백(李白), 두보(杜甫) 등 유명한 시인을 배출했다. 당대에 들어와 불교는 더욱 발전하였다. '서유기'의 모델인 현장(玄奬), 삼장법사(三藏法師) 등이 유명하다. 특히, 통일신라와의 교역과 교류는 극히 활발하였으며 많은 승려와 학자들이 당을 내왕했는데 신라인의 집단거류지인 신라방(新羅坊)에는 거대한 사찰도 있었다고 한다.


907년에서 960년까지는 군벌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은 시기였다. 이 시대의 54년 동안 황하의 유역에는 양(梁)·당(唐)·진(晋)·한(漢)·주(周) 등 명이 짧은 왕조가 일어났다가는 망했다. 또 지방에서는 전후 14개의 여러 나라가 역시 일어났다가는 이내 망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강대한 것이 북한(北漢), 오(吳), 남당(南唐), 오월(吳越), 초(楚), 남한(南漢), 민, 전촉(前蜀), 후촉(後蜀), 형남(荊南)의 열나라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대라고 한다.


960년에 오대(五代) 마지막 나라 주(周)의 중신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장병들에게 추대되어 송나라(宋)를 세워서, 다음 태종(太宗)의 대에 이르러 천하를 통일했다. 송은 문치주의를 채택하여 문관관료정치기구를 확립했다. 그러나 국초 이래의 문관주의는 한편으로 군대의 약체화와 조정 대신들간의 당파싸움이라는 폐단을 낳았다. 내치와 외교상의 폐해가 누적되어 힘이 약해진 송은 1127년 여진족이 세운 금(金)의 침입을 받아 남부로 수도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이 때까지의 송을 북송(北宋)이라고 칭한다. 북송이 금에 멸망한 후 강왕(康王) 조구(趙構)는 유민과 군대를 이끌고 남방으로 내려가 황제로 즉위했다. 도읍은 남경(南京: 하남성 商丘)에 정했다가 임안(臨安:杭州)으로 옮겼다. 역사에서 이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남송은 1279년 몽골족이 세운 원(元)에 의해 멸망당했다.


송(宋)은 유교에 근본한 문관우위의 체제를 통해 중앙 정부의 군사력을 구축했고 복수합의제를 채택하여 권력의 관료집중화를 억제하기도 했다. 학문적으로는 이상주의적 학설인 신유교주의 곧 송학(宋學)이 성립했다. 그 중에서도 주자는 북송이래 이학을 집대성하고 객관적 유심주의 사상체계를 정리했는데 그의 학설은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종(神宗) 때에 등용된 왕안석(王安石)은 차례로 부국강병의 새 법을 시행했으나, 보수파의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켜 실패하고 말았다. 송은 문(文)을 숭상했기 때문에 서화(書畵), 시문(詩文), 불교(佛敎), 유학(儒學) 등 문화면의 발전도 상당한 성과를 가져왔다.


쿠빌라이는 도읍을 대도(大都: 北京)에 정하고 국호를 원(元)이라 정했다. 1279년에 남송을 멸하고 전국을 통일했다. 그들은 아시아 대륙뿐만 아니라 중동은 물론 동부유럽을 석권하는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중국의 문화·제도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다. 거대한 중국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된 원은 소수의 지배민족이 인구나 생산력면에서 훨씬 우세한 피지배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엄격한 민족차별정책을 취했다. 몽고족, 색목인(色目人), 한인(漢人), 남방인(南方人)을 엄격히 구별하고 몽고인과 색목인이 정치를 관장했다. 그러나 원의 지나친 확장과 인종차별은 각지의 민중봉기를 필연적으로 유발시켰으며 마침내는 주원장(朱元璋)이 한족의 단결을 호소, 대도를 점령하고 명(明)나라를 건국함에 따라 원나라는 멸망했다.


원은 중국 역사상 가장 활발하게 대외외교를 펼친 국가로 알려져 있는데, 서방과의 교류가 이 때부터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문화가 서방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 도시가 발달하고 상업, 수공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상인 및 시민계급의 지위가 향상됐다. 납세제도에서도 당제(唐制)를 본받아 지세·정세·상세 등을 정했으나 재무행정의 실무를 주로 서역인과 한인에게 맡겼던 까닭으로 기강이 문란해짐에 따라서 부정부폐가 심하게 되었다. 결국 몽골족은 힘(力)으로는 한족을 지배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한족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음으로써 한족이 세운 명에게 멸망하게 됐다.


명(明)은 원(元)대의 이민족 제도를 폐지하고 중국 고유의 제도로 돌아간다는 복고주의적 방침 아래 적극적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이러한 개혁들을 통해 명조는 중국사상 더욱 강화된 중앙집권에 의한 군주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명 태조는 전지측량과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이갑제(里甲制)를 실시하는 등 농업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3대 성조 이후 기강이 문란해지고 관료의 당쟁과 환관의 전횡이 심했다. 15세기에는 서몽고의 오이라트가 침입했고, 토목(土木)의 변(變)에 이어 타타르의 침입으로 국세가 심히 위축됐다. 1644년 만주를 근거지로 한 만주족(옛 이름은 여진족) 왕조인 청(淸)이 쳐들어와 중국을 점령함으로써 명(明)나라는 멸망했다. 왕조의 잔여 세력이 장강(長江 : 양자강) 이남에서 전후로 복(福), 당(唐), 노(魯), 계(桂) 등의 왕조를 세웠는데 이를 남명(南明)이라고도 한다.


명조의 관제를 보면 중앙은 원(元)제국의 정치체제를 모방하여 중서성(中書省)과 6부를 설치했으며, 지방제도는 전국을 15성에 구분하여 각성에 재정기관인 승선포정사(承宣布政司)와 사법기관인 제형안찰사(提刑按察司)를 설치하여 각각 소관업무를 맡도록하고 때에 따라서 임시로 총독 혹은 순무(巡撫)를 파견하여 군사와 민정을 독려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각성을 다시 부(府)·주(州)·현(縣)의 순위를 구분하고 지부·지부·지현을 임명하여 지방행정을 관리토록 했다. 학문적으로는 왕수인(王守仁)이 제창한 양명학(陽明學)이 많은 지지를 받았다. 원대의 문학은 희곡(戱 )이 발달한 반면 명대에는 소설(小說)이나 문학비평(文學批評)이 사회 전반에 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황관의 횡포와 함께 명조(明朝)의 몰락에 박차를 가한 것은 당파의 분쟁이었다. 처음에는 환관에 대항하여 설립됐으나 당쟁이 심해짐에 따라 타 당을 음해하는데 많은 국력을 낭비하여 만주족(滿洲族)의 중국 지배를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만주족은 국호를 청(淸)이라 명하고 1644년에 중국을 점령하므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비한족의 통치를 받게 됐다. 청의 만주족은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한족을 강압, 자기네 풍속인 변발 등을 강요하는 등 한족과의 사에에 불화가 계속됐으나 성조(聖祖: 康熙帝), 세종(世宗: 雍正帝), 고종(高宗: 건룡제)으로 이어지는 1660∼1800년의 130여년간, 훌륭한 통치를 보여 당시 중국에 있었던 예수교 선교사에 의해 그 내용이 유럽에도 소개됐고 이 때에 정비된 관료제도가 프랑스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조의 힘이 조기에 쇠진한데다 해외 중상주의(重商主義) 국가들의 끊임없는 통상압력을 받아 청조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 아편전쟁(1839∼1842)·태평천국운동(1851∼1864)·청일전쟁(1894∼1895)에 이르기까지 청조는 외세의 침략을 그대로 방치하여 점점 더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결국 1911년 손문(孫文) 일파의 혁명당에 의해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고 청나라는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졌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통치하게 된 청(淸)제국은 초기에는 명말(明末)의 혼란한 사회상이 여전히 지속됐지만,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후 통일제국으로서의 긴반을 확고히 다지고 혼란한 사회를 정비하는데 성공했다. 관제는 명조(明朝)의 그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내각과 8부를 설치했으며 정부의 여러 관직에 원(元)대와는 달리 만주인뿐만 아니라 한인(漢人)도 등용하는 비교적 관대한 인사정책을 실시했다. 외교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개방압력에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중국이 마침내 '양이(洋夷)'에게 굴복하고 반식민지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됐다. 학문적으로는 경서(經書)의 문헌학적인 비판을 통하여 사실의 진위(眞僞)를 밝히는 시에 문자의 시대적인 의미를 증명함으로써 경서 본래의 원의(原義)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고증학(考證學)이 널리 발전했다. 이러한 고증학의 영향은 다른 분야에도 파급되어 역사학·금석학·교감학(校勘學) 등의 고증적 방법에 의한 연구를 구하게 됐다.


19세기 중반 두차례에 걸친 영국과의 전쟁(1840년 아편전쟁, 1856년 애로우호사건)으로 서양강국의 굴욕적인 문호개방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청조(淸朝)는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이나 자강운동(自强運動)을 통해 국력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내부의 권력투쟁과 이념의 변질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와중에 1884년 청불전쟁(淸佛戰爭),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의 패배는 청나라의 종주권을 빼앗아가는 계기가 됐다. 이 후에도 청조(淸朝)는 꺼져가는 왕조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많은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이나 입헌운동(立憲運動) 등의 개혁운동을 추진했지만 서양열강의 압력과 청조(淸朝)의 독선적인 방법으로 말미암아 개혁작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1911년 민영철도를 국유화하여 제국주의 열강에게 매각하려는 청정(淸廷)의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일어났던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불씨는 무창(武昌)에서 혁명파가 청군을 대파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손문(孫文)은 혁명정부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임시대통령(臨時大統領)에 취임하고 이 해를 민국 원년으로 하였으며, 수도를 남경(南京)에 두었다. 그해 2월 손문은 황제 퇴위와 내각책임제 실시, 남경에서의 취임 등을 조건으로 청정부의 내각총리대신 원세개(袁世凱)에게 총통직을 양보했으며, 2월 12일 선통제(宣統帝)가 원세개의 강압에 의해 퇴위하게 됨에 따라 중국 마지막 왕조인 청조(淸朝)는 268년만에 멸망하고 중국 최초의 공화정부가 수립됐다.


청말 이래 중국경제는 국내정치의 혼란과 개혁정책의 부진, 서양열강의 침투로 인해 도로 악화됐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도시지역에서는 1919년 이후 민간자본이 점차 성장하고, 토지자본이 상공업과 금융업에 투자되어 발전이 촉진됐으나 농촌경제는 파탄일로였고, 농촌인구의 도시유입, 국내외 정치의 불안 등으로 중국사회는 혼미를 거듭했다. 더군다나 원세개(袁世凱)는 열강을 배후에 업고 제국의 부활을 꾀했으며, 원세개가 죽은 뒤에는 군벌(軍閥)들이 열강의 세력을 등에 업고 각지에서 할거했기 때문에 중국의 정치·경제적 모든 측면은 서양열강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이 당시의 모든 중국의 이권은 서양열강이 차지하고 중국은 그야말로 빈껍데기만 남은 동양의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민중의 자각은 크게 깨어있어 1919년 5월 4일 북경에서 대학생의 주도로 일어난 반 제국주의, 반 봉건주의 애국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났다. 제1차대전 후 파리강화회담에서, 일본이 과거 독일이 청조로부터 할양받은 산동지역의 권리를 양도받기로 합의한 것에 북경대학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됐다. 북경정부는 학생구속과 탄압으로 이 운동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전국의 노동자, 상인계층이 가세하면서 결국 정부는 친일파 각료를 해직하고 파리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5·4운동의 성공은 중국민의 잠재력을 깨워주는 기폭제의 역할외에도 중국내에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 셈이 된 것이다.


5·4운동은 중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것이 국내의 군벌(軍閥)과 세계열강제국주의라는 것을 중국민중에게 분명하게 폭로했다. 5·4운동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인 성장을 인식한 선진 상인 지식인·노동자가 철저한 혁명을 추진함으로써 러시아혁명과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실행하려고 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21년 7월 1일 드디어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원조를 얻어서 중국공산당 제 1기 전국대표대회(全國代表大會)가 치외법권 지대인 상해의 프랑스조계내(租界內) 여학교에서 개최했다. 이후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은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과 2차에 걸친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하게 되지만 근본적인 이념의 차이로 갈라서게 된다.


제 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은 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꾀하는 것이 유리한다는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손문의 광동정부로서도 북벌(北伐)에 의한 국민혁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보다 강력하고 효율적인 당조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민당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증대됨에 따라 양측의 마찰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1927년 4월 장개석(蔣介石)의 상해 쿠데타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고 산악지대로 철수하여 스스로의 군대와 정부를 조직했다.


1928년 10월 북벌의 완성으로 남경을 수도로 한 국민정부가 중국을 대표하는 중앙정부가 됨으로써 이른바 '남경시대(南京時代 : 1928∼1937)'가 개막됐다.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중국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고 1930년 12월부터 1934년 10월 사이에 다섯차례에 걸친 위초(圍剿)라고 부른 포위공격전을 감행했다. 결국 1934년 10월 중국공산당은 역사적인 대장정(大長征)을 감행하여 소련에 가깝고 또 일본의 침략에 가까운 섬서성(陝西省) 연안(延安)에 도착했다. 이 대장정은 중국공산당의 9∼10만 주력부대가 6천 마일의 대행군을 계속한 끝에 겨우 7∼8천 명이 생존하여 남경정부의 전중국지배의 길을 열어 주었지만, 중국 공산당의 단결 강화와 생존에 대한 자신감을 높여주었고, 행군 과정에서 각지에 혁명의 씨가 뿌려짐으로써 후일 공산당의 집권을 위한 기반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의 약화와 분열을 틈타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정권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이 후 일본은 중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상해와 열하(熱河)까지 진군했다. 이에 중국내에서는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장개석은 국내를 안정시킨 다음에 외적을 진압한다는 소위 안내양외(安內攘外)를 주장하면서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해기 때문에 학생이나 지식인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항일을 주장한 중국공산당측은 폭넓은 동조를 받았다. 국민정부내에서도 장개석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장개석의 부하중 몇명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됐다. 이 사건이 서안사건(西安事件)으로 이 후 국민당이 중국공산당과 다시 손을 잡는 제 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항전보다는 당 세력을 확장하는데 염두을 두었기 때문에 항일전쟁과 국공간의 교전이 병행되는 이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결국 1944년 5월 국공합작은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나자 중국은 통일국가의 건설이 가장 중대한 과제로 등장했다. 전쟁 직후에는 장개석정부가 미국의 원조 덕분으로 공산당보다는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군의 유격전과 정치공작, 국민당의 내분과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정책 부재, 인플레로 인한 군 사기의 저하 등은 국민당이 중국 본토를 공산당에게 내어주고 1949년 대만으로 달아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침내 주석으로 선출된 모택동(毛澤東)은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수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대륙을 석권한 중국공산당은 한국전쟁에 출병하는 등 어려운 사정에도 1952년 전국 토지개혁을 완성했다. 토지개혁 이후 농업생산량은 급속도로 향상되어 곧 전전(戰前)의 최고수준으로 회복됐다. 이에 중국지도자들은 멈추지 않고 사회주의체제로의 이행을 가속화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삼반오반(三反五反)'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삼반오반이란 당(黨)·정(政)·군(軍)의 오직(汚職), 낭비(浪費), 관료주의 반대와 자본가의 뇌물증여, 탈세, 국가재산 탈취, 협잡, 경제기밀누설을 척결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반혁명 잔재의 청산, 계급투쟁 등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위한 기초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당 주도의 개혁, 정풍, 숙청 운동에 이어 모택동은 과도기 총노선을 제기하면서 제 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추진했다. 제 1차 경제개혁에서는 모든 자원을 자본재산업에 집중, 농업을 포함한 전체 경제를 중앙집권식 계획경제로 개조하여 부강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중에 중국 지도자들은 노동력의 활용을 극대화하는 문제를 등한시했을 뿐만 아니라 자본집약적인 공업투자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실업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제 1차 5개년계획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 중국 지도부는 중국 경제의 현대화를 가속화하려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중국 지도부내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와 그 운동을 지지하는 과격파와 반대하는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결국 소련모델을 폐기하고 새로운 자력갱생의 발전정책을 채택하여 성장을 가속화하려는 모택동의 혁명이념은 현실을 무시한 너무나 급진적이고 모험적인 정책인 것으로 판명됐다. 예컨대 지역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경작방식의 개혁은 오히려 생산량의 감소를 가져왔고, 계획의 분산은 노동력과 기타 자원의 효율적 운영을 불가능하게 했다.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의 실패는 모택동으로 하여금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는데 이후 등장한 인물이 당시 당의 제2인자였던 유소기(劉少奇)였다. 유소기의 조정·완화정책은 경제의 회복을 가져와 그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켜 주는 것 같았지만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으로 모택동에 의해 숙청을 당하게 됨으로써 권력은 다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넘어갔다. 유소기(劉少奇)·등소평(鄧小平)을 비롯한 우파 실무파를 숙청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1969년 4월 제 9기 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문화혁명을 일단 매듭짓고 임표(林彪)를 당부주석으로 승진시키면서 당규약에 그를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규정을 삽입했다. 그러나 문혁(文革)기간 동안 정치적 영향력이 급증한 군을 장악하고 있던 임표와 실질적인 중국의 실력자 모택동간에는 많은 문제에서 견해차를 보였다.이에 모택동은 강청(江淸)을 중심으로 한 4인방(4人幇)을 권력핵심부에 포진시킴으로써 임표를 제거하려 했다. 궁지에 몰린 임표는 1971년 9월 13일 모택동을 타도하려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고,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1970년대 초 문혁의 휴우증에서 벗어난 중국은 경제 활성화가 당면 과제로 떠오르게 됐다. 이에 실각한 등소평을 비롯한 많은 실무파들이 속속 복권되게 되고 이것은 기존의 권력을 잡고 있던 4인방과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4인방은 1976년 1월 총리 주은래(周恩來) 추모로 일어난 군중시위 사건인 천안문사건(4·5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등소평을 지목해 1967년에 이어 그를 다시 실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1976년 9월 9일 사망하게 됨에 따라 주은래를 뒤를 이어 제2인자로 있던 화국봉(華國鋒)이 4인방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게 된다. 화국봉은 4개 현대화계획이라는 대형 프로젝트 건설을 추진하여 중국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을 가졌지만 중공업에 치중한 경제정책은 상대적으로 경공업과 농업을 도외시 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한편 경제중심의 실용주의 노선 표방으로 등소평을 비롯한 실무파들이 다시 대거 복권하게 되고, 이는 화국봉(華國鋒)을 위시한 온건 혁명세력과 주은래노선을 계승한 등소평(鄧小平) 등 실무세력사이에 대립을 가져왔다.


양측은 서로 열띤 논쟁을 통해 상대방의 주장과 이념을 비방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모택동의 '단결혁명론(繼續革命論)'을 옹호한 화국봉보다는 사상을 해방하고 사실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앞을 보자 - 해방사상(解放思想), 실사구시(實事求是), 당결일치(團結一致), 향간전(向看前) - 라는 등소평의 개혁·개방노선이 전당공작(全黨工作)의 지도방침으로 채택됨에 따라 화국봉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고 등소평을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이 권력을 쥐 된다. 등소평은 당주석제를 폐지하고 총서기제를 부활하여 자기의 심복인 호요방(胡耀邦)을 총서기로, 조자양(趙紫陽)을 총리로 각각 임명했다. 등소평체제의 확립과 함께 중국은 경제의 대외개방과 농촌경제계획에 들어가 중국적인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견지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대외개방을 천명하게 됨에 따라 경제발전에 따른 정치발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보수파들은 이를 빌미로 개혁파를 맹공하게 되고 마침내 호요방(胡耀邦) 총서기가 물러나게 되면서 조자양(趙紫陽)이 총서기로 부각된다. 1989년 4월 15일 호요방(胡耀邦) 전(前)총서기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호요방에 대한 명예회복 및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이 발생하게 되고, 시민, 노동자, 지식인까지 이 시위에 참가하게 된다. 4, 5월에 걸쳐 민주화요구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천안문에는 지식인, 노동자, 일반시민, 학생 등 약 100만명이 연달아 대대적인 집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에 따라 온건파 조자양 총서기와 강경파인 양상곤(楊尙昆) 국가주석, 이붕(李鵬) 총리측이 대립하게 되고 여기에서 강경파의 우세로 1989년 6월 4일 새벽 계엄군이 천안문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던 학생, 시민들에 대한 무력진압을 전개한다. 시내 각처에서 시민과 계엄군의 충돌로 학생 36명을 포함한 319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부상자가 3,000명, 계엄군측 부상자 6,000명(당국발표)을 발생시킨 최악의 유혈사태가 발행했다.


천안문사태 이후 1990년 6월 제 13기 4중전회(中全會)서 조자양 총서기는 민주화시위를 지지,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 등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강택민(江澤民) 상해시 당서기 겸 정치국위원이 총서기로 선출된다. 11월 6∼9일의 5중전회(中全會)에서 등소평은 당중앙군사위 주석직을, 1990년에는 자신의 마지막 직책이던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강택민 총서기가 두 직책을 승계했다. 1990년 1월 11일, 북경시의 계엄령이 해제되고 천안문사태는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졌다.


천안문 사태와 소련의 붕괴로 보수파의 목소리가 커지자 개혁·개방체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1993년 3월 제 8기 전인대에서 개정된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개혁과 개방의 가속화를 촉구했다. 현재 중국은 등소평을 비롯한 개혁파가 추진하는 개방과 조정의 정책하에서 '현대화'·'민주화'·'문명화'·'사회의 강국'을 목표로 진군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서방 자본주의에 대해 과감하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개혁과 개방의 물결은 중국 사회 전반에 적지않은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산물들이 점차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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