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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5 15:24:574659 
중국 역대왕조의 토지와 조세제도
운영자

1. 수나라의 토지제도와 조세제도


1)均田法과 租庸調의 반포

수의 초기에는 북주시기의 균전과 부세제도를 계승하였으나 583년 국가가 안정됨에 따라 수문제는 균전의 새로운 법령을 반포하여 21세 이상의 남자를 정(丁)으로 규정하고 남정 한사람마다 露田 100무를 일괄적으로 분배하고 그 중 80무는 口分田露. 20무는 永業田이라고 했다. 로전은 매매가 허용되지 않았으며 본인이 사망하면 국가에 귀속되었으나 영업전은 상속이 가능했다. 부인은 노전 40무를 지급받았다. 정남은 租로써 매년 粟 2석, 絹 2丈, 棉 3兩을 바쳐야 했다. 庸에 해당하는 徭役은 매년 20일을 복무해야 했는데 물품으로 복역을 대신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규정은 부호들이 전농의 수확물을 거의 전부 거두어들이던 착취량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감소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수전과 부역의 경감정책은 토지를 갖지 못하였거나 또는 협소한 토지를 갖고 있던 농민들이 토지를 획득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농업 생산의 발전에도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한편 균전제는 지주 사유제라는 전제 하에서 시행되었기 때문에 정부는 귀족관료들이 점유한 토지에 대해서는 매우 우대하여 그들은 영업전을 확보할 수 있었을 뿐아니라 많은 경우 100경의 전토까지도 점유할 수 있었다. 또한 직분전과 공해전을 지급받는 특권도 누렸다. 직분전을 예로 들면 경관의 경우 1품에게 전지 5경, 이하각 품마다 50무씩 체감하여 9품의 경우 1경이 지급되었다. 이외에도 귀족지주가 보유하고 있는 노비에게도 농임과 똑같이 토지가 지급되었다. 이로 인하여 수대에는 대토지소유제가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토지가 비좁고 인구가 조밀한 지역에서는 농민의 토지급여가 늘 부족하여 경기 부근에서는 정마다 단지 20무 정도를 나누어 가질 수 있었을 뿐이었다.


2) 삼장제(三長制)와 호적정리

노동인구는 봉건 국가의 착취대상이자 또한 부세징수의 원천이므로 호구의 부실은 바로 정부의 재정수입에 영향을 미친다. 북조 이래 세습부호들은 농호를 은닉시켜 사속으로 만들어 정부에 대하여 호구를 신고하지 않은 채, 오히려 정호에게 생산량의 반 이상을 부세로 징수하였다. 일부 빈궁한 농민들은 부역이 가중된 상황 하에서 대개의 경우 도망하여 정부의 통제범위를 이탈하였다. 그리하여 부역수입을 확보하고 향리의 기층조직을 정비하기 위하여 수왕조는 5가를 1보로 하고 보에는 보장을 배치하며 5보를 1리로하여 이장을, 4리를 1당으로하여 당장을 배치하는 삼장제를 정비하고 이를 통하여 향리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강화하였다. 삼장의 직무는 호구에 따른 부역의 감독이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정부는 대규모의 호구조사와 등기업무를 실행하였는데 각 주와 현에서는 매년 정월에 이장과 당장이 호구조사를 책임지고 호적의 법규에 따라 연령, 인구, 호 등을 등재하도록 규정하였으며 해당자의 실제 상황에 대하여 면밀히 조사하여 호구의 은닉이나 연령의 증감 및 위법행위를 밝혀내게 하였다. 부역수입을 확대하기 위하여 정부는 또한 가족의 친족관계를 사촌형제 이하로 규정하고 균등하게 나누어 호를 구성하게 하는 한편 서로 감시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상의 방법을 통하여 수왕조는 단기간내에 대량의 누락된 호구를 밝혀냈다. 개황 3년의 통계 의하면 이 한 해 동안 전국에서 새롭게 조사되어 호적상에 등재된 남정은 40만명에 이르며 노소를 합하면 160여 만명이었다고 한다.


3) 대운하건설

수양제는 즉위 후 곧바로 조서를 내려 전국적으로 수륙교통이 편리하였던 낙양을 전국을 통할하는 또 하나의 정치중심지로 만들기 우해 대규모의 장정을 징발하여 동도에 새로운 성을 조영하였다. 동도를 조영한 같은 해에 대운하의 개착도 시작되어 610년 강남 수로의 수리가 이루어지기까지 전후 6년 동안 계속되었다. 대운하는 영제거(永濟渠), 통제거(通濟渠), 한구(邗溝)와 강남하(江南河)의 네 구간으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영제거는 대업 4년에 개착되었는데 심수를 남쪽으로 끌어 황하와 통하게 하여 심수와 황하 상류의 단수를 연결시키고, 다시 위수를 따라 북행하여 백하와 상통하면서 탁군에 이르는 전체 길이 2천여 리의 낙양과 탁군간의 수로 교통을 잇는 운하였다. 대업 원년에 건설된 통제거는 낙양에서부터 곡수와 낙수의 물길을 끌어 황하에 이르며 또 판저하의 남쪽의 형양 동북에서 하수를 따라 회수 남쪽을 통과하여 산양에 이르는 것을 낙양으로부터 산양가지의 수로를 관통시켰다. 전체 대운하의 수로 길이는 4천리를 넘으며 중심으로 안휘, 강소와 절강의 광대한 지역을 경유하는 남북 교통의 대동맥을 이루었다. 대운하의 개착은 수나라 중앙정권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의 확립과 남북 경제교류의 촉진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4) 수대의 조세징수와 토지관계의 결론

수나라는 비록 30여 년밖에 존속하지 못했지만 역사상 보기 드문 성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성세는 북위말 이래 북제기에 걸쳐 吏治가 문란하여 호강들이 각 지역을 자의로 지배하고 인민들이 그들에게 의탁하거나 부의하여 세역을 기피하는 상황을 극복하고 노력한 결과였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수 문제는 북위 구경의 吏治紊亂 상황을 숙정하기 위하여 황제3년 大索貌閱令을 반포하고 高경이 상주한 輸籍法을 정하여 지방관과 향리의 부정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定簿를 만들고 세역을 경감하였으며 대공(大公) 이하는 모두 독림 호적으로 편성하여 浮客을 租調役의 징세원으로 포착하였다. 아울러 지방관에 대한 임명권을 직접 중앙정부에서 행사하고 임기제와 회피제와 같은 임용 절차를 엄격히 하였으며 지방관의 正長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하고 정장상호간의 고발을 장려하고 지방관과 장정의 부정에 대한 처벌을 엄격히 행하여 리치를 숙정하였다. 그 결과 수대의 인민들은 철저하게 편제되어 세역징수체제의 法網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치밀한 체제를 통하여 세역을 징수하였기 때문에 법규정상의 세역량은 전대에 비하여 경감되었지만 징수된 세역 총량은 증대하였고 역으로 인민들의 부담은 오히려 가중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수양제 치세 때에는 대규모의 토목공사와 고구려원정을 위한 실역을 이러한 엄밀한 체제를 통하여 동원하였기 때문에 인민들의 요역부담은 가혹한 것이었다. 더구나 수초에 전력을 반포하였고 그 뒤에도 누차 개정되어 반포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호강들의 대토지소유는 완연하였다.


이와 같이 수대에는 대토지소유제가 해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확대되는 경향을 보여 주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수초에 호강들에게 佃作하던 부객들은 비록 析籍하여 각각 독립된 호적을 갖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새로운 寬鄕인 강남으로 천도하지 않는 한 호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토지를 획득하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따라서 새로 편호화된 부객들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호강들과의 전작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결국 수초에 공세를 피하고 호강에 의부하여 전작하던 구객이 편호화 되어 징세원으로 포착되었고 이러한 析籍 및 括籍이 수대에 지속적으로 시행되었지만 토지를 소유하였다고 하더라도 매우 영세하였던 이들은 새로운 토지를 분배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강의 토지를 전작하는 생활을 영위하면서 국가에는 조조역을 부담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부객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채로 국가의 징세 대상이 되었으므로 지주와 국가에 이중으로 수탈당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결국 중국 역사상 ‘개황의 치’라고 부르는 치세를 이루었던 수왕조가 단명왕조로 끝난 원인은 몇몇 소수의 대토지과점 현상을 타파하지 않고 오히려 조장 확대시키고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까지도 징세 대상으로 삼아 가렴주구를 행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당나라의 토지와 조세제도


1) 당조의 호적, 균전제, 조용조


균전제는 북위에서 시작되어 수당시대에 이르러서도 계속 시행되었다. 수당 교체기 일어난 농민전쟁으로 인구가 격감하여 중국의 인구는 300만호를 밑돌아 수나라 전성기의 반 정도에도 미치지 못한 상태였다. 황하 중하류 일대의 지역은 특히 인구가 희박하고 많은 토지가 황폐해져 있었는데 이러한 토지 분포상태는 당이 계속해서 토지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였다. 624년 당왕조는 호적 정리에 착수하여 토지의 개간과 국가의 부역징수를 증대시키려 하였다. 당대 호적 법규는 호적의 등급과 연령에 따른 인정(人丁)의 구분을 규정하였다. 당초의 전국 민호는 상중하 3등급으로 나뉘었는데 후에 경제적 발전에 의해 3등급이 실제 정황을 표시하기에 부족하였으므로, 상상 상중 상하 중상 중중 중하 하상 하중 하하의 9등급으로 확충하였다. 당 정부는 또한 각 주현에서 매년 한 차례씩 정구(丁口) 숫자를 통계하여 3년마다 호적을 만들도록 규정하였다. 정분 호적, 정구를 근거로 호등과 부역의 징수 기준을 확정하였다. 균전령과 조용조법의 시행은 모두 이것을 기초로하여 이루어 졌다.


균전령은 정남과 18세 이상의 중남에게는 1경의 토지를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그 중 20무는 영업전이고 80무는 구분전이며 노동력을 상실한 노남 독질, 잔폐자에게도 각각 구분전 40무를 지급하여 생활을 유지토록 하였다. 또한 과처첩에게는 약간을 감량하여 각각 구분전 30무를 지급하였다. 토지 지급이 충분한 지역을 관향이라 하였고 부족한 지역은 협향이라고 하였다. 협향의 구분전은 규정향의 반액을 감량하여 지급하였다. 협향에 거주하는 사람에게는 관향의 전토를 지급할 수도 있었다. 토지를 받은자가 죽으면 영업전의 경우 자손에게 상속시킬 수 있었으므로 환수하지 않았다. 구분전국가로 환수되어야 했고 환수한 후에 관부는 다시 토지를 지급받아야 할 사람에게 전토를 지급하였다. 협향에서 관향으로 이주한 사람의 경우는 구분전을 팔수 있었으나 토지를 산 사람은 그 토지의 수량이 받아야할 토지의 한계액 이상을 초과할 수 없었다. 이외에도 균전령에는 또한 관리가 품직, 작위, 직무, 훈급에 따라 별도로 여러 종류의 영업전, 직전, 훈전 등을 점유할 수 있음도 규정하였다.


당대 균전령은 실제 단지 광활한 토지를 관료지주로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배분할 때의 일종의 법정한도액을 정한 것으로서 토지사유제를 승인한 전제 위에서 시행되었다. 균전제의 실시는 당 초기의 농업생산력의 회복과 발전에 있어서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고 관리가 전토를 강점하여 토지는 재차 분배되지 않았고, 빈부간의 분화와 토지의 겸병이 더욱 심화 되었으므로 균전을 지속적으로 시행할 수 없었다. 이것은 토지소유관계의 발전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따라서 현정 때에 이르러 정부에는 이미 더 이상 지급할 토지가 없었으므로 균전법령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당의 조용조법의 규정에 따르면 1년에 1정구는 국가에 대해 조로서 속2석을 납부하고 향토에서 생산되는 산물에 따라 조로서 견, 면 3량을 납부하며 사가 생산되지 않는 지역에서는 포2장 5척, 마3근을 납부토록 하였다. 각 정은 또한 요역 20일을 복무해야 하였고 윤월은 이틀을 가산하였는데 만일 견으로 요역을 대신하려면 1일당 견3척으로 환산하여 절납케 하였는데 이것을 용이라 하였다. 이외에도 정부는 재난의 경중에 따라 조용조의 삭감 또는 면제의 구체적 방법도 규정하였다. 당대의 조용조 제도는 수대에 비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켰으며 요역 기한 및 용으로 대역할 수 있는 방법을 규정하여 농민들이 비교적 많은 시간을 농업 생산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즉 이것은 당 초기 대량의 자영농민이 존재하였던 전제하에서 시행되었던 부세제도 였다. 그러나 당 중기 이후 소농민의 파산, 균전제의 붕괴 및 빈부의 급격한 분화에 따라 조용조법도 마침내 양세법으로 대체되었다.


2) 당후기의 재정정책과 양세법과 전매제


당 전기에 시행된 균전제는 지주의 토지소유제를 제한하지 않았고 국가도 이미 토지의 매매를 허용하였으며 관료 지주들도 또한 직급에 따라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지주들은 구분전과 영업전에 대한 불법 매매를 통하여 사전을 겸병하였고 또는 은밀히 장적을 고쳐서 소유하고 있던 많은 전토를 은닉시켰는데 이러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평민을 사역시켰으며 이와 반대로 농민들은 점차 파산하여 토지를 상실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전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빈부의 분화는 균전제하의 소자영농의 토지소유방식을 파괴시켰으며 대지주 토지소유제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무측천이 통치 시기에서부터 전개되고 있었으며 현종의 시기에 이르러 사회적으로 겸병의 풍조가 극렬해졌다. 이외에도 전반적인 사회문란으로 난의 발생원인이 되었다. 당은 안사의 난이 발생한 이후부터 전란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므로 정부의 양병, 용병의 비용이 전에 없이 격증하였다. 이로써 국가의 재정지출은 매우 궁핍하게 되어 때로는 백관의 봉록도 정상적으로 지급할 수 없었다. 재정 경제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여러 방면에서 몇 가지 편법을 사용하여 초미의 화급함을 해소하려 하였다. 그예로 양세법과 전매제를 들어서 살펴보자.


농민개개인에게 균등히 토지를 분배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조용조를 할당한다는 당조의 재정원칙은 점차 사회변화에 맞지 않게 되었고 균전법의 이념에 배치되는 대토지 겸병이 진척되어 이에 따라 유망하는 농민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안사의 난 이후에는 본적지를 떠난 농민이 점점 많아지고 더불어 번진이 할거하여 하북삼진과 같이 호구를 신고하지 않고 조세를 상납하지 않는 곳이 생겨났다. 그래서 정부가 파악할 수 있는 호구는 740년대의 3분의 1로 감소하여 조용조로는 도저히 재정을 꾸려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780년 재상 양염의 발의에 따라 조용조제를 폐지하고 양세법이란 새로운 세법을 시행했다. 이는 여름과 가을 두차례 걸쳐 세금을 징수 하는 것으로서 조용조제가 본적지에서의 부과를 원칙으로 함에 반해 토착민과 거류민-객호여부에 상관없이 그 지역이 현재 거주자를 대상으로하여 자산의 다과에 따라 부과하는 제도 였다. 또 물납에서 원칙적으로 전납으로 변경하였으며 상인에게도 매출액에 따라 상세를 징수했다. 이세법의 실시에 의해 그때까지 본적지를 이탈하여 탈세를 꾀하고 있던 有産의 객호 180만을 납세자로 편입할 수 있엇댜. 당시의 주호는 1.130만이었기 때문에 양세법은 재정적으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조세만으로 증대하는 지출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특히 부병제가 붕괴되어 모병제로 대치되었으므로 국가가 병사에게 급료를 지급해야만 했는데 해마다 필요한 비용이 팽창했다. 그리하여 군사비에 충당할 수 있는 재원을 조세 이외의 분야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따라 우선 시도한 것이 소금의 전매이다. 안사의 난이 아직 종식도지 않았던 지덕연간756-757에 재무관교 第五琦가 강회지방에서 실시했던 것이 그 시초로서 소금의 생산원가에다 소비세를 덧붙여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 후 전매법이 정비되어 이 수익이 세입의 절반을 점할 정도로 국가의 중요재원이 되었다. 이에 맛을 들인 조정은 재정이 악화 될 때마다 소금 가격을 인상시켜 조세를 충당하였던 것이다.


3) 균전제 결론

당대에서는 지배체제로서 균전체제가 발전되었던 반면 토지제도로서 균전제는 상당한 문제점을 안게 된다. 관료중심의 균전체제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관인 영업전을 비롯한 공해전 직분전 이 늘어나고 수전대상도 확대되어 토지의 수요는 크게 늘어남으로써 일반 균전민에 수전토지를 확보하기 어렵게 된다. 영업전 조차 충족시킬수 없는 상황에서 토지의 환수, 호내수전(戶內受田) 호등설정(戶等設定) 등은 이러한 당장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행된 것으로 균전제의 제도적 원칙에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균전농민이 몰락하여 部曲, 客女化되어 균전체제의 인신지배에 양천제라는 새로운 유형이 확립된다. 결국 당대의 균전제는 북위에서와 같은 황지가 없기 때문에 국가권력에 의해 제도적 원칙을 관철시킬 수가 없어 토지제도의 원칙은 空文化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부과와 인신지배의 원칙에 의해 여전히 균전체제는 유지되기 때문에 토지제도로서 균전제가 사실상 이념적 지향이나 정책상의 의지는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제도적 원칙은 유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대의 균전제에 대해 그 시행여부 및 제도적 내용에 논란이 많은 것은 이처럼 균전체제의 범주와 시대적 차이에 많은 오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북조에서는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균전제가 실질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당대에서는 체제상이 의미는 상존하였다고 하더라도 토지제도로서는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대토지소유의 확대가 피할수 없는 상황에서 균전 농민을 유지시켜 균전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편법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균전체제의 범위까지 벗어나는 객호의 발전과 지세의 확대는 호등과 부곡, 객녀 기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형식상으로만 남아 있던 균전제에서 그 형식적인 의미조차 박탈해 버린 것이다.




4) 중국역대왕조의 조세제도


⑴ 조용제(租庸調)

- 조용조제도는 수나라 문제가 국가재정을 부흥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수나라 보다는 그 뒤 당나라에 와서 정비가 이루어졌다. 다시말해 이 제도는 율령체제에 의한 당제국의 기본세법이며, 당제국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이는 丁男에 대한 과세제도로 당대의 租는 정남 1인에 대해 부과한 것이다.


용은 노동력을 징발하는 것으로 20일 정도 부과되었다. 이는 주로 당시 중심지였던 장안과 낙양 근방의 국가토목사업에 사역하는 것이다.


調는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한 것으로 비단을 주로 하였다.


이런 조용조제도는 균전제가 유지됨을 전제로 한 것이나 후에 8세기 중엽( 현종의 개원말경)을 전후하여 균전제가 붕괴됨에 따라 대신하여 양세법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조용조제도 외에 당시 호세와 지세가 있었다. 호세는 호에대한 일종의 재산세이며, 이때는 천하의 호를 재산에 의해 9등으로 나누어 호등에 따라 부과하였는데 王公 이하 일반인까지 모두에게 부과되었다.


지세는 흉년에 대비하여 경지의 넓이에 따라 부과하였다.


⑵ 양세법

- 안사의 난 이후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양세법은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양세법은 표면적으로는 안사의 난으로 인해 실시되었으나 내적으로는 이미 균전제의 붕괴, 농민의 이탈 등으로 인한 사회변화를 수용하기위해 나온 것이다.


양세법은 物納制인 조용제세법과 달리 자산에 의한 전납을 원칙으로 하고, 여름, 가을 2기로 나누어 징세하였다.


이전에도 조용조세법 외에 호세와 지세가 있었는데, 안사의 난 이후 이를 증액하여 중요한 세목으로 확대하였다. 즉 호세, 지세를 기초로 그밖의 잡세를 종합하여 단일화 한 것이다.


양세법은 빈부의 차이를 인정하고, 선예산 후징수주의를 표방하였으나 빈부의 차이에서 은닉재산이나 동산에는 부과하지 않았고, 관리의 부정의 소지가 많이 이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양세섭은 당의 재정위기를 구제하였고, 당 뿐만 아니라 이후 송, 원, 명나라 중기까지 보완을 거치면서 유지되어 갔다.


⑶ 일조편법(一條便法)


- 명대의 사회, 경제 변화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은본위 화폐경제의 발달이다. 명대의 대표적인 세법으로 일조편법을 드는데 이것은 명대의 은화보급 과정과 관련이 있기때문이다.


명대 이전 송, 원대에는 각각의 동전과 지폐가 사용되었으나, 원 말기 경제파탄으로 인해 현물경제로 돌아갔다. 이 후 명나라 초기 세량, 부역 역시 현물 또는 노동력으로 징수하였다. 또한 금, 은의 화폐사용이 금지되고 동전, 지폐를 중심화폐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가격폭락으로 인해 은의 사용이 불가피해졌고, 결국 정부는 세량징수에 은으로 대납하는 것을 인정함으로 은화 유통을 국가가 공인하게 되었다.


조세의 은납화는 농민에게 경제적 변화를 주는데 은의 획득을 위해 부업경영, 상품작물의 재배 등 새로운 생산활동을 가져오게 한다. 또한 중국의 경우 은 수량 부족으로 인해 외국의 은이 막대하게 유입되는 결과를 초래하며, 부역제에 영향을 끼쳐 현물세가 전부 은납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은 경제의 보급 및 침투는 지배자의 은에 대한 요구와 결합되어 장거정에 의해 은으로 조세를 납부하는 일조편법으로 시행되었다.


일조편법은 복잡한 징수체계를 정비하여 징세의 효율화와 民의 과중한 부담을 줄이려는 조세개혁이다.


그 내용은 각종세납을 지세, 정세로 통합하는데, 田賦의 경우 토지소유기준, 요역은 토지소유한 인정수를 기준으로 하여 모두 납부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일조편법은 대토지 소유의 발전, 상품생산의 발달과 새로운 지주 전호관계를 반영한 세제라고 할 수 있다.


⑷ 지정은제

이는 청나라의 조세제도이다. 명의 일조편법을 계승한 세법이다. 이 제도의 실시 배경은 강희제때의 특별부역면제제도를 바탕으로 했다. 이는 청나라가 한족에 대해 실시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태평성세(1711) 이후 출생자에 대한 인두세를 면제해주는 제도다. 이를 실시한 동기는 기존의 일조편법의 정세가 토지 소유을 대상으로한 인정으로 하였고, 대토지 소유자들의 탈세로 토지 없는 농민, 빈민이 부담을 지게 되면서 이것을 없애고자 실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정세의 총액이 고정됨에 따라 정세를 지세에 포함 시킬수 있었다.


또한 토지를 정확이 파악하여 토지의 다과에 따라 조세를 부과하는 것은 주장함으로 이 후 옹정제 때에 전국적으로 지정은제가 시행되었다.


이는 결국, 정세와 지세가 토지세로 단일화함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토지가 많으면 그에 상응하여 많은 지세를 부담하고 가난한 농민은 정은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구와 호구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가능하고 인구증가를 가져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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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12-10-10
[] 讀史方輿紀要 (독사방여기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1〉 卷首‚ 130卷‚ 合 64冊‚ 필사본‚ 28×18.2cm 〈2〉 60冊‚ 목판본‚ 24×15
운영자 12-06-27
[] 전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비중 추이와 전망

청나라 전성기 때인 19세기 초에는 중국의 지디피는 전세계의 35%를 정점으로 했다가 1950년 대의 한국전쟁과 60년 대의 문화혁명의 여파로 5%로 하락
운영자 12-05-23
[] 중국화의 개요와 감상법

중국화의 개요와 감상법 1. 그림과 주변장르의 통일 크게 詩 書 畵를 일체로 보고, 여기에 篆刻(落款)까지 네 가지가 모두 그림의 영역에서
운영자 12-02-09
[] 중국의 인구변천사

중국의 인구통계는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2천여 년 동안 중국의 인구는 390만
운영자 06-09-24
[] 중국황제들이 성풍속도

진시황 이래 中 황실 성생활 보고서 【 황궁의 성 】 시앙쓰 지음 미다스북스 펴냄 중국은 하(夏)왕조가 세워진 이래 1911년
운영자 09-07-25
[] 충칭(重慶)의 연혁

충칭(重庆)은 기원전 11세기에 세워졌다고 하는, 반 정도는 전설적인, 파(巴)나라가 있었던 자리이다. 파나라는 중원과는 다를 문화를 가지고
운영자 08-10-24
[] 중국 13왕조의 도읍 서안(西安) -2-

5. 장안성의 구조 26 전한 시대와 당나라는 모두 ‘장안’을 수도로 하였으나 장소는 약간 달랐다. 전한 시대의 장안 남동쪽의 용수원(龍首原)
운영자 09-05-04
[] 중국 13왕조의 도읍지 西安(서안) - 1

중국 13왕조의 도읍 서안(西安) 목차 1. 서(序) 1 2. 장안성(長安城)의 연혁 2 3. 중국 역대왕조 황제릉 9 4. 당제국의 장안성 17 5.
운영자 09-05-04
[] 중국 네티즌들의 중국역대왕조에 대한 평가

강력한 한(强漢), 번성한 당(盛唐), 부강한 송(富宋), 강직한 명(硬明), 야만적인 원(蠻元), 비굴한 청(奴淸)…’.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네티즌
운영자 09-04-28
[] 간추린 중국사

다음 글은 경기대 남정휴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옮겨왔습니다. 간추린 중국 역사 중국역사는 현 고고학상의 발굴성과에 의하면
양승국 0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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