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중국사
1. 선사
2. 삼대
3. 춘추전국
4. 진한
5. 위진남북
6. 수당오대
7. 송요금원
8. 명청
9. 국공
10. 인민공화국
11. 통사
· 오늘 :  712 
· 어제 :  966 
· 최대 :  6,990 
· 전체 :  2,165,214 
 
  2009-05-04 11:58:165233 
중국 13왕조의 도읍지 西安(서안) - 1
운영자

중국 13왕조의 도읍 서안(西安)




목차

1. 서(序) 1

2. 장안성(長安城)의 연혁 2

3. 중국 역대왕조 황제릉 9

4. 당제국의 장안성 17

5. 장안성의 구조 27

6. 장안성의 유적.유물 34

7. 진시황의 병마용 46

8. 에피소드 54











1. 서(序)




“秦中自古帝王州(진중자고제왕주)”라고 할 정도로 서안은 중국 역사상 도읍지를 세운 곳으로 가장 많고, 기간도 가장 긴 도시이다. 서주(西周: 기원전 1134-기원전 771), 진(秦: 기원전 350-기원전 207), 서한(西漢: 기원전 206-기원 8), 신망(新莽: 기원 9-24), 동한(東漢 헌제초), 서진(西晉 愍帝: 313-316), 전조(前趙: 319-329), 전진(前秦: 351-383), 후진(后秦: 384-417), 서위(西魏: 535-556), 북주(北周: 557-581), 수(隋: 581-618), 당(唐: 618-907)의 수도였던 서안(西安)은 근 1,100여 년간 중국 고대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다.




2. 장안성(長安城)의 연혁




기원전 1062년, 주나라 사람의 활동 지역이 관중 분지 서부의 주원(周原: 지금의 섬서성 기산(岐山) 부풍현 일대)에서 지금 서안시 서남 교외 풍하(灃河)유역으로 옮겼다. 주문왕(周文王)은 풍하(灃河) 서안에서 풍경(豊京)을 건설하고 도읍으로 삼았으며, 무왕(武王)은 기원전 1057년 은(殷)나라를 멸하고 주왕조(周王朝)를 창건한 후에 풍하 동안에 호경(鎬京)을 세워 왕도로 삼았다. 이로써 서안지역은 장기간 중국고대 정치, 경제, 문화 중심이 되었다. 호경은 서주 왕조 정치의 중심이 되고, 풍경은 제사 종묘와 문화 오락의 장소가 되어 중국 역사상 제일 먼저 “쌍자성(雙子城)”을 형성하였다.




춘추 전국시기, 진나라가 관중분지에서 일어났다. 기원전 683년 진헌공(秦獻公)은 도성(都城)을 옹성(雍城: 섬서 鳳翔縣 경내)에서 역양(櫪陽: 서안시 閻良區 武屯鄕)으로 옮겼다. 헌공의 뒤를 이은 진효공(秦孝公)은 상앙(商鞅)의 건의에 따라 기원전 350년에 또 함양(咸陽)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진이 강성해지자 계속 확장되어 효문왕(孝文王) 장양왕(莊襄王 : 기원전 250-247) 당시엔 궁궐과 관청건물이 30여리나 뻗어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이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중앙집권적인 통일제국을 수립하였다. 진의 수도 함양은 북으로 지금의 함양시 함양원(咸陽原)에서 남으로 지금의 서안시 서쪽 교외 삼교진(三橋鎭)일대까지 위하(渭河) 양안의 광활한 지역에 걸쳐 건설되었다. 진시황은 통일 후 “천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천도시켰다” 함양은 적어도 5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거대도시였다.




진시황(秦始皇)은 외치(外治)에도 뛰어난 군주였다. 북으로 흉노를 격파하고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했다. 전국시대 각 국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요동에서 지금의 감숙성 남부의 민현(岷縣)인 임조(臨洮)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건설했으며,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와 해남도까지 정복해 군현을 설치했다. 시황제는 ‘성격이 사납고 신하를 엄격히 다스리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만기(萬紀)를 친람(親覽)’하는 정력적이고 유능한 군주였다.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5차에 걸쳐 전국을 순행하며 자신의 공덕을 새긴 비석을 여러 곳에 세웠다.(섬서 역사박물관에 탁본이 있음)




함양을 대표하는 궁전은 아방궁(阿房宮)과 함양궁이다. 함양궁의 궁전건물 중 하나로 추정되는 것이 함양시 동쪽 15리 지점에 있는 진궁 1호 건축 유적지이다. 기원전 212년 위수 남쪽에 건설된 대규모 조궁(朝宮) 가운데 하나였던 아방궁은 진시황이 죽기 직전 완성했다. 72만명을 동원해 수년을 공사한 끝에 낙성된 화려한 궁전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아방궁은 1만여 명이 앉을 수 있고, 11m 높이의 기를 세울 수 있으며, 황제 전용도로가 사방으로 뻗쳐 이궁 별관까지 연결됐다. 의장(意匠)의 홍대(弘大)함과 공정(工程)의 거대함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경탄하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다.” 라는 기사처럼 수년 간, 수만 명을 동원해 건설된 거대한 건축물이었지만 정작 진시황 자신은 아방궁을 제대로 이용하지도 못하고 죽었다. 2세 황제 호해도 마찬가지였다. 진시황이 죽자 ‘진승과 오광의 기의’를 기점으로 각지에서 연이어 붓물 터지듯 기의가 일어났다. 초패왕 항우(項羽: 기원전 232-기원전 202)에 의해 함양궁과 아방궁을 불태워버렸다.




서한 시대의 장안은 그 전대 진나라 함양(咸陽)과 같이 우선 궁전을 짓고 지형에 따라 성곽을 쌓았다. 성의 둘레는 25.1Km였으나 위와 같은 사정이었으므로 판축법(版築法)으로 축성된 성벽은 정연하지 못했다. 거리가 이룩된 다음에 이를 둘러싼 것이다. 한 고조 유방 때에는 아직 성벽이 축성되지 못하고 2대째인 혜제에 이르러 겨우 성벽이 쳐진 것이다. 진나라의 별궁이었던 흥락궁(興樂宮)을 개축하여 장락궁(長樂宮:동궁)으로 개칭하여 유방의 집무처로 하고 따로이 미앙궁(未央宮:서궁)을 군신이 배알하는 곳으로 하였다. 미앙궁은 남쪽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에 성벽을 축성할 때 커브를 만들어야만 했다. 장안성의 북쪽에는 강이 있었으므로 그 흐름에 따라 경사진 곳이 많다.




미앙궁과 장락궁으로 장안성의 1/3을 차지하고, 명광궁(明光宮), 북궁(北宮), 계궁(桂宮)을 포함하면 1/2에 이른다. 미앙궁의 북쪽에는 대저택이 들어차 있어 일반 시민의 공간은 매우 좁아서 민가는 성 밖으로 벗어났다. 민가뿐만 아니라 건장궁(建章宮) 같은 무제 시대의 궁원(宮苑)과 사당까지도 성 밖에 세워졌다. 한나라 성벽은 높이 최저가 12m, 기저부의 두께는 12-16m, 성벽 밖의 호는 너비 8m, 깊이 3m로 되어 있다. 장락궁은 다시 10Km에 이르는 토벽으로 감싸고 있으며 장락궁과 미앙궁 사이에 7동의 무기고(동서 880m, 남북 320m)가 있다.




서한 장안은 전국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더욱이 장안 주위를 견고히 하기 위해 만든 11개의 능읍(陵邑)이 건설되었다. 무릉읍(茂陵邑)의 인구는 27만 7천에 이를 정도였다. 능읍은 중앙에서 직접 관할하며 장안성과 정치상 경제상의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으며 실질적으로는 장안성의 정치와 경제구의 조성부분이다. “관중의 땅은 천하의 1/3이고, 인구는 3/10에 불과하지만 그 부는 6/10에 해당된다.”(사기)




한이후, 신(新) 헌제(獻帝) 초의 동한(東漢) 및 민제(愍帝) 대의 서진(西晉), 전조(前趙), 전진(前秦), 후진(后秦), 서위(西魏), 북주(北周) 등 왕조가 교체되면서도 장안을 도읍지로 했다. 위진남북조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사회적 변동이 심하여 인구가 크게 움직이고 민족의 대융합이 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전란이 빈번했고, 정권이 자주 바뀌었다. 흉노, 선비, 갈, 저, 강 등 소수민족이 관중으로 대량 들어와 민족의 대융합이 일어났다. 장안은 전란의 중심이 되어 경제적으로 엄정한 파괴를 받았지만 다시 회복되는 반복을 계속했다. 장안을 중심으로 민족의 대융합은 중화민족의 생기발랄한 신선한 혈액이 되고 수당 시기 찬란한 중국봉건사회의 황금기를 창조하였다.




한편 당나라 장안은 남북 8.6Km, 동서 9.7Km, 둘레 길이 36.7Km 면적 84평방킬로미터의 정리된 장방형이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개황(開皇) 2년(582)에 고경(高顈)과 우문개(宇文愷)에게 새 도읍지의 조성을 명하여 처음부터 도시 계획 하에 조성 작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로도 바둑판처럼 정연하게 되어 있었다.




수문제가 장안 건설을 시작했을 때에는 먼저 궁성과 황성을 건설하고 외곽의 성벽을 쌓았던 것이다. 황제와 신하들의 집무처로 이른바 관청지역이었던 것이다. 황실의 주거와 관청가를 조성한 다음, 그것을 감싸는 성벽을 축성하였던 것이다. 궁성의 면적은 4.2평방 길로미터, 황성의 면적은 5.2평방 킬로미터이므로 모두 9.4평방 킬로미터가 된다. 장안성의 1/9에 해당되므로 한 대 장안이 반 이상을 궁전이 점령하였던 데 비하면 주민용 공간이 매우 컸다.




황성의 남쪽 정문은 주작문(朱雀門)으로 그곳으로 남하하는 주작로가 장안 남북의 중심가에 해당된다. 이 주작로륵 경계로 동서로 나누어 동쪽을 좌, 서쪽을 우로 하였던 것이다. 치안국에 해당하는 금오위(金吾衛)도 좌우에 각기 설치되어 있었다. 시장도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로 각기 설치되었다.




궁성 구역에는 태극궁(太極宮)을 중심으로 동궁(東宮)과 액정궁(掖庭宮)이 있었다. 태종 정관 8년(634) 이제까지 궁정 구역은 습기가 많다는 이유로 황실 정원이었던 곳에 새 궁전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고종 용삭(龍朔) 2년(662)에 이것이 확장되었으며 이것이 대명궁(大明宮)이다. 대명궁 안에 함원전(含元殿), 선정전(宣政殿), 자진전(紫震殿), 인덕전(麟德殿), 삼청전(三淸殿), 연영전(延英殿)이라는 건물이 있으며 정전(正殿)은 함원전이다. 이 대명궁은 용수원이라는 구릉에 있으며 함원전은 약 15미터 높은 곳에 위치하여 그곳에서 전 장안을 굽어볼 수가 있었다.




현종은 황태자 시절 흥경방(興慶坊)의 저택에 살았고 즉위하고 나서도 그곳이 마음에 들어 궁전(흥경궁)으로 개축하였다. 그러므로 현종시기 이 흥경방이 정전(正殿)으로 대당의 정치 중심부였다. (현재 대명궁의 함원전, 인덕전, 중현문. 흥경궁의 화악상휘루와 근정무본루, 서시, 명덕문, 청룡사 유적지 등이 발굴됨)




장안성 외곽 성벽의 높이는 5미터 정도이고, 두께는 9-12미터인데 반해 궁성이나 황성 벽의 두께는 18미터에 이름(외곽보다 더 엄중함을 볼 수 있다) 외곽의 동쪽 성벽은 그 외에 한 줄기 성벽이 평행을 이루어 이중으로 되어 잇음이 발굴결과 확인됨. 두 성벽 사이는 50미터 정도 떨어져서 도로가 되어 있음. 이것은 ‘복도(復道)’라고 부르는 길로서 보통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는 길로 간주되었으나 당나라 장안의 복도는 그렇지 않았다. 성문 쪽까지 가서 복도는 고갯길을 이루어 그곳을 넘어가게 되어 있다. 이는 황제 전용 도로로서 비밀 통로라고 볼 수 있다.(현종 개원 14년(726) ‘夾城’이 구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이중 성벽이었음이 틀림없다)




당나라 말기 장안은 주전충(852-912)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 주전충은 당 소종(昭宗)을 옆에 끼고 낙양으로 달아났다.(궁과 기타의 건조물은 해체하여 그 재목을 낙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장안의 유수 우국군(佑國軍)절도사 한건(韓建)이 군사 방어의 필요에 따라 외곽성과 궁성을 포기하고 장안의 성벽을 황성의 성벽으로 축소하고 이것이 오대로부터 원대에 이르기까지 장안성의 규모로 형성되었다. 명왕조가 중국을 통일한 후, 주원장에 의해 새롭게 조성되었다.




이것이 중국고대 성벽중 제일 완전하게 보존된 성벽이다. 이 성벽의 공정과정은 홍무 3년(1370) 공사를 시작하여 홍무 11년(1378)에 완성되었다. 남쪽의 성벽과 서쪽 성벽은 남아 있던 隋唐의 성벽을 기초로 하여 더욱 높이고 더욱 두껍게 하고 아울러 동쪽과 북쪽을 향해 약 1/4 정도 확장하여 동쪽 성벽이 2886m, 서쪽 성벽이 2706m, 남쪽 성벽이 4,256m, 북쪽 성벽이 4,262m, 모두 13,912m에 이르는 규모가 되었다. 서안 성벽의 높이는 12m, 기초 넓이는 18m, 웃부분 넓이는 15m이다. 성벽이 넓고 높이 쌓을 수 있었던 것은 황토를 다진 판축(板築)으로 만든 것이다. 이 황토에 석회 및 찹쌀즙 그리고 다래즙을 섞어서 다진 것으로 굳으면 돌보다도 훨씬 더 단단해졌다.




서안 성벽은 이후 3차에 걸친 보수 작업이 있었다. 첫 번째는 1568년(明 隆慶 년간)에 섬서도지휘사(陝西都指揮使) 장지(張祉)는 원래의 흙성벽 내외에 푸른 벽돌(靑磚)을 쌓았다. 두 번째는 1781년(청 건륭 년간) 섬서 순무 필원(畢沅)이 성루(城樓)를 정리 보수하고 더욱 벽돌을 쌓고 배수계통을 완전히 수선하였다. 1983년 섬서성과 서안시 인민정부에서 대규모적인 보수와 수선 그리고 훼손된 동문, 북문의 전루(箭樓), 남문의 갑루(閘樓), 조교(弔橋: 가동교)를 보수하고, 환성공원(環城公園)을 건설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역대 황제릉




西周

주 문왕: 성은 희(姬)씨 이름은 창(昌). 황제 18대손, 계력(季歷)의 아들이다. 상왕조 말년에 주족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상의 주왕(紂王)때 서백후(西伯侯)가 되어 서주의 기초를 만들었다. 주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50년이 지나 病死하였다. 당시 97세였다. (섬서 함양시)




주 무왕: 姬發. 武王伐紂. (섬서 함양시)

주 문왕과 주 무왕의 능은 모두 섬서 함양시 북쪽 5Km의 周陵鄕 崔家村 남쪽에 있다. 이 능은 청 건릉연간 섬서순무 필원(畢沅)이 손으로 쓴 “周文王陵” “周武王陵”의 石碑가 각 하나씩 있다.

⇒ 근래 周陵은 周原 유적지 혹은 戶縣부근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함. 그 이유는 1) 주나라 陵의 葬制에는 분봉이나 나무를 심지 않는다. 2) 능묘 안의 전와(磚瓦)는 한나라에 만든 것이다. 그러나 성 중점문물 보호의 표지비(1984.12.11)는 여전히 능 앞에 서있다. 이로 볼 때, 周陵의 진부여부 논쟁은 최근까지 결론이 없었다. 강태공의 묘도 섬서 함양시에 있으며, 유왕의 묘는 섬서성 임동현 동쪽 15Km의 代王鎭 宋家村에 있다.





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 이름은 영정(贏政)으로 장양왕의 아들이다. 함양에 수도를 세웠다. 진시황은 여불위라는 설이 있으며, 법가 이사의 진언에 따라 분서갱유를 일으켰으며, 흉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아방궁을 건설, 도참설을 신봉하여 불사장생을 위한 불사약을 구해 서복을 바다로 나아가게 했다. 왕위 25년 帝位 12년, 50세에 죽고 장지는 섬서성 임동현에 있다.




진이세 호해(胡亥: 기원전 230-207): 진시황의 마지막 순행을 따라 갔다가 도중에 진시황이 죽자 조서를 위조한 조고의 음모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윽고 재위 중 진나라의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진승과 오광이 란으로 진나라는 멸망에 이르고 자신은 조고에 의해 살해 당했다. 장지는 섬서 서안시에 있다.




西漢

한고조 유방(劉邦: 기원전 256-195): 자 季, 강소 沛縣人, 원래 秦朝 정장(亭長: 10리를 관리하는 지방의 소관). 참사비(斬蛇碑: 하남 永城). 척부인 묘(섬서 함양시). 유방은 왕위 4년, 제위 8년이었으며 62세에 죽어 장릉(長陵: 섬서 함양시)에 장사를 지냈다.

한혜제 유영(劉盈: 기원전 211-188): 여태후가 실권을 장악. 미앙궁에서 죽음. 재위 7년 24세에 죽음. 안릉(安陵: 섬서 함양시)에 장사를 지냄.




한여후 여치(呂雉: 기원전 241-180): 한고조의 황후, 혜제 사후 궁중의 한 아이를 헤제의 아들로 삼아 황제로 올리고 정권을 장악함.(고조 유방의 ‘非劉氏不王’의 서약 때문) 여후는 근 16년간 정권을 장악하고 미앙궁에서 62세로 죽음. 장릉 동남쪽에 장사를 지냄.




한문제 유항(劉恒: 기원전 203-157): 고조 유방의 3자, 어머니는 박희(薄姬). 기원전 196년 대왕(代王)에 봉해짐. 기원전 180년 여후가 죽자 呂産, 呂祿이 병권을 장악하고 정변을 기도함. 승상 진평(陳平), 태위 주발(周勃) 등이 여씨의 반란을 제압하고 대왕 유항을 제위에 옹립함.

휴양생식과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함. 田租를 1/30로 감하였다. 연좌법과 肉刑을 없앰. 文帝의 절검과 절제를 일상생활화 함. 한 대 정치 경제의 안정을 도모함. 재위 23년 기원전 157년 6월 미앙궁에서 47세로 병사함. 패릉(霸陵: 섬서 서안시)에 장사를 지냄.




한경제 유계(劉啓: 기원전 189-141): 문제의 3자, 어머니 두태후. 경제는 문제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사회경제의 번영을 가져와 부고가 충실해짐. 제후들의 실력이 팽창해지자 어사대부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삭번’ 정책을 실시함. 이로 인하여 ‘吳楚七國의 亂’이 일어나고 이것을 평정함에 따라 사회적 안정을 가져옴. 그래서 사서에 ‘文景之治’라 함. 재위 16년 기원전 141년 미앙궁에서 49세로 병사함. 양릉(陽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냄.




한무제 유철(劉徹: 기원전 156-87): 경제의 아들, 4세에 膠東王에 봉해지고 7세에 황태자가 됨. 처음으로 연호를 사용함(建元). 추은령(推恩令: 제후왕의 모든 자제에게 봉지를 나누어주도록 함)을 반포하여 제후왕의 정치세력을 더욱 삭약 시킴. 동중서의 ‘罷黜百家 獨尊儒術’을 채택함. 군사상으로 흉노세력과 장기간의 전쟁에 돌입. 신 경제정책을 추친함: 염․철 전매제, 균수 평준법, 화폐 주조권 장악(오수전), 증세 조치(산민전 고민령).

무제의 외정을 통해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이광(李廣) 등의 장군이 등장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등장함. 기원전 87년 2월 순시 도중 병사함. 재위 54년 당시 70세였다. 무릉(茂陵: 섬서 흥평시)에 장사를 지냄.




한소제 유불능(劉弗陵: 기원전 94-74): 연호 시원(始元). 유촉대신인 곽광(霍光), 상관걸(上官桀) 간의 갈등관계로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상관걸이 제거됨. 재위 13년 기원전 74년 4월 미앙궁에서 병사함. 당시 21세였으며 평릉(平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냄.




한선제 유순(劉詢: 기원전 92-49): 무제의 증손으로 유거(劉据: 모함을 받아 자살함)의 손자이며 유진(劉進)의 아들임. 유순은 할머니가 사가에서 양육함. 따라서 백성들의 고통을 잘 이해하고 있음. 소제 사후 자식이 없자 곽광은 유순을 옹립하여 황제가 됨. 년호는 본시(本始).

선제는 즉위후 능력이 있는 현인을 등용하고, 형벌을 완화하고, 부렴을 경감시켜 생산의 발전을 도모하여 서한 경제의 안정을 이룩하였다. 특히 서역도호(西域都護)를 두어 한왕조의 정령이 서역으로 나가도록 하였다. 기원전 52년 흉노 호한야 선우가 칭신하며 항복하여 옴. 그리고 흉노에 굴복하였던 오손(烏孫)이나 안식제국(安息諸國)도 한제국을 받들게 됨. 변경이 안정되고 정치 안정에 경제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됨. 이 기간에 대해 劉向은 “政敎明 法令行, 邊境安 四夷淸”이라 했다. 재위 25년인 기원전 49년 12월 미앙궁에서 병사함. 당시 44세였으며 두릉(杜陵: 서안시)에 장사를 지냄.




한원제 유석(劉奭: 기원전 76-33): 연호 초원(初元). 중앙집권이 점점 약해지고 호족에 의한 대토지소유가 확대되기 시작함. 흉노의 선우와 왕소군(王昭君)의 이야기도 이때의 일임. 재위 16년 기원전 33년 5월 미앙궁에서 병사함. 당시 44세로 위릉(渭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냄.




한성제 유오(劉鷔: 기원전 51-7): 원제의 아들, 년호 건시(建始). 성제는 황음(荒淫)하고 정치에 무관심하여 외척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왕씨 일족인 왕망이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함. 농민폭동도 상시적으로 일어남. 재위 26년인 기원전 7년 3월에 중풍으로 미앙궁에서 사망 향년 45세였으며 연릉(延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냄.




한애제 유흔(劉欣: 기원전 26-기원전 1): 원제의 庶孫으로 정도왕 유강(定陶王 劉康)의 아들. 연호는 건평(建平)이라 함. 애제는 성제보다도 더 昏庸하여 궁중에 15-6세의 동현(董賢)이 있었다. 재위 6년인 기원전 1년 6월에 미앙궁에서 병사하였다. 당시 26세로 의릉(義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냈다.




한평제 유연(劉衍: 기원전 9 - 기원후 5): 원제의 손자로 중산왕 유흥(劉興)의 아들. 연호는 원시(元始)라 했다. 실질적으로 대사마 왕망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재위 5년 14세에 죽었다. 강릉(康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냈다.




서한에는 11개의 帝陵이 있다. 문제의 霸陵이 서안시 霸陵鄕 모요원촌(毛窯院村), 선제의 두릉(杜陵)이 서안시 곡강향(曲江鄕) 삼조촌(三兆村) 남쪽에 있으며 낮은 쪽 변의 길이가 175m, 높이 29m로 되어 있다. 나머지 9릉은 위하(渭河) 북안(北岸)의 함양원(咸陽原) 위에 있다.

형식상으로 두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패릉처럼 산으로 능을 삼은 형식으로, 묘장은 산애(山崖)에서 파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봉분을 만들지 않는 애장(崖葬)형식이다. 문제 부인능은 산애(山崖)의 상변에 있고, 어머니 박태후능(薄太后陵)은 산애 상변의 배후에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제는 효자이기 때문에 능의 위치 배열상 ‘頂妻背母’의 형식이었다. 다른 10개의 능은 모두 머리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드는 형식이다. 일반적으로 낮은 부분은 150 - 170m정도이고, 높이는 약 20 - 30여미터로 무릉(茂陵)의 봉분이 가장 높다.

서한의 황제능은 모두 배장묘를 갖고 있으며 능원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다. 장릉의 배장묘는 장릉 동쪽에 규모가 가장 크고 지금도 60여개의 봉분이 있다. 저명한 대신 소하(蕭河), 조삼(曹參), 주발(周勃) 등은 모두 장릉의 배장묘이다. 배장묘에서 출토된 채회보(彩繪步) 기병용(騎兵俑) 2,500여 건은 대단히 높은 예술적 가치가 있다.

서한 묘제의 제도에 의하면 황제가 즉위한 다음해부터 만들기 시작하고, 매년 국가 세수(稅收) 중 1/3을 내어 황제를 위해 거대한 능묘를 만들었다. 이처럼 생전에 만들어진 능묘를 ‘수릉(壽陵)’이라 부른다. 예를들어 한무제의 무릉은 유철이 황제에 오른 다음해(기원전 139) 자신은 자신의 능묘를 건조하기 시작하여 53년이나 걸렸다. 묘총의 낮은 부분의 동서 길이는 229m이다. 남북의 길이는 231m, 높이는 46m로 되어 있다. 무제가 죽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능 위의 수목이 이미 무성하게 자랐기 때문에 무릉(茂陵)의 공정 규모가 거대해졌다. 무릉의 묘실에는 금은보화와 살아있는 조수와 금수 등 190여 물건이 부장되었다.

능이 완성됨과 동시에 茂鄕은 茂陵縣으로 개칭되며 각지의 부호 27만명이 이곳으로 옮겨진다. 역사학자 사마천이 이때 양하(陽夏)에서 이리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ꡔ西京雜記ꡕ의 <<茂陵秋雨病相如>>에 의하면 상여가 무릉(茂陵)의 젊은 아가씨를 소실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아내 탁문군(卓文君)이 ꡔ백두음(白頭吟)ꡕ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그 속에서 남편의 무절제를 나무라고 그와 헤어질 결심을 표명하자, 상여는 그에 감동하여 소실을 얻으려던 생각을 버렸다고 서술되어 있다.(이 작품은 후세에 만들어진 작품인 듯 함)

무릉(茂陵)의 배장묘는 12개가 있다. 위청, 곽거병, 김일제(金日磾), 곽광 등의 묘가 있다. 곽거병 묘의 石刻에는 코끼리, 소, 말, 물고기, 돼지, 호랑이, 양 그리고 맹수가 양을 먹는(怪獸食羊), 사람이 곰과 싸우는(人與熊鬪) 것과 말로 흉노를 밟고 있는(馬踏匈奴) 등 16건이 새겨져 있다.

능묘를 보호하기 위하고 실력이 있는 호족들을 장안에서 통제하여 한왕조의 통치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한초부터 능에 따라 능읍을 설치하고 공신(功臣) 귀척(貴戚) 고관(高官) 부호(富豪)의 家를 각 능읍으로 천사(遷徙)하였다. 장안 부근에 하나의 새로운 번화한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고조의 장릉현, 혜제의 안릉현, 경제의 양릉현, 무제의 무릉현과 소제의 평릉현이 가장 현저하다. 이 오릉읍 소재의 함양원(咸陽原)을 ‘五陵原’이라 하였다.

漢 元帝(기원전 40)시 陵邑을 설치하는 것을 폐지함. 강제 이주에 대한 백성의 불만과 사회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위능(渭陵)부터 능읍의 설치가 폐지됨.

隋왕조




문제 양견(楊堅: 541-604): 서위 대장군 양충지(楊忠之)의 아들. 弘農 華陰(섬서 화음의 동쪽)인. 장녀가 북주 宣帝의 황후이다. 선제가 죽고 8세의 정제(靜帝)가 즉위하자 양견이 보정(輔政)이 되었다. 승상에 임명되고 수왕(隋王)에 봉해졌으며 군정대권을 장악했다. 581년 북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국호를 隋라 하고 연호를 開皇이라 하고 장안을 도읍지로 하였다.

문제는 스스로 근검절약을 실천하였다. 594년 관중에 기근이 들어 백성이 조강을 먹자 자신의 식사에 술과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명령을 내렸다. 그의 셋째 아들 진왕 양준(楊俊)이 화려한 宮室을 만드는 것이 발각되자 대노하고 양준을 禁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신 양소(楊素)가 처벌이 너무 엄중하다고 간언을 하자 문제가 말하기를 “황자와 백성에게는 단지 같은 법률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한 황자를 위해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 문제가 엄격하고 분명하게 법을 집행하자 막강한 관리들도 감히 악을 범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탐관오리가 줄어들고 사회질서가 안정이 되어 백성들은 법을 지키는 의식이 증강되었다1).

589년 陳을 멸하고 천하를 다시 통일하여 근 300여 년간의 분열을 끝냈다. 이 수문제의 업적은 ꡔ역사상 가장 영향이 있는 일백인ꡕ 중에서 제 82위에 올라 있는 일이다.

문제는 재위기간 동안 정치 경제와 군사에 있어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균전제를 실시하여 생산을 장려하고 요역을 감면하였으며 통일화폐와 도량형의 통일, 호적을 정리하여 재정수입을 확대하였다. 체제를 개혁하여 3성6부를 창립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9품 이상의 지방관리도 중앙에서 임명하였다. ꡔ開皇律ꡕ을 제정하여 酷刑을 폐지하고 死罪 81개항을 줄여 계급의 모습을 진일보 완화하였다. 604년 7월 와병 중 둘째아들 양광(楊廣)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재위 24년이며 64세였다. 태릉(泰陵: 함양시)에 장사를 지냈다.




4. 당제국(唐帝國)의 장안성




당고조 이연(李淵: 566-635): 隴西 成紀人(감숙 泰安縣). 아버지 이병(李昞)은 북주 안주총관(安州總管) 어머니는 수문제 독고황후의 언니로 이연은 수양제의 이종사춘형이다. 7세에 唐國公에 습봉되고 후에 太原留守에 임명되었다. 618년에 칭제하고 연호를 무덕(武德)이라 하고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고조 즉위후, 각지의 할거 세력을 소멸시키고 전국을 통일함. 626년 이세민이 ‘玄武門의 變’을 일으켜 선위하고 太上皇이 되었다. 재위 9년이었으며 후에 70세로 병사하였다. 헌능(獻陵: 서안 三原縣)에 장사를 지냈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 598-649): 당 고조의 차자. 수나라 말기 당 고조 이연에게 기병을 일으킬 것을 권함. 당 건국후 진왕(秦王)에 봉해지고 상서령(尙書令)에 임명됨. 그는 두건덕(竇建德), 유흑달(劉黑闥) 등 농민기의군을 진압하고, 설인고(薛仁杲), 왕세충(王世充) 등 할거 세력을 소멸시킴. 이세민은 626년 6월 4일 현무문(玄武門: 황궁의 후문)의 변을 일으켜 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동생 이원길(齊王: 李元吉)을 제거하고 고조를 협박하여 양위하도록 함. 태종 이세민은 권력을 장악한 후, 사회안정과 생산력 발전에 힘을 쏟아 貞觀의 治를 이룩함. 태자 이건성의 책사였던 위징(魏徵)을 중용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음2). 당태종은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임과 동시에 개명된 황제였다. 재위 23년인 649년 5월에 52세의 나이로 궁중의 함풍전(含風殿)에서 사망하여 소릉(昭陵: 禮泉縣)에 장사를 지냄.




당고종 이치(李治: 628-683): 태종의 9자. 631년 진왕(晉王)에 봉해지고 643년 태자가 됨. 연호는 영휘(永徽)이다. 고종 즉위 초 고명대신 장손무기(長孫無忌) 및 저수량(楮遂良) 등이 조정을 장악했다. 태종의 딸 고양공주(高陽公主)의 남편인 방유애(房遺愛)는 고종에 의해 방주자사(房州刺史)로 좌천되었다. 653년 방유애는 형왕 이원경(李元景) 및 오왕 이각(李恪) 등이 모반을 일으켰다. 일이 발각되어 유애는 피살되고 원경, 각 및 고양공주는 모두 사사되었다. 이로 인해 고종의 제위는 공고해졌다. 657년 고종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 등을 파견하여 서돌궐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곤릉(崑陵), 몽지(蒙池) 두 도호부를 두었다. 당대의 판도는 고종 때 최대였다.

고종 즉위 후, 무측천을 궁의 소의(昭儀)로 받아들이고, 655년 왕황후를 폐하고 무씨를 황후로 삼았다. 고종 만년에 병이 들어 정사를 무후와 함께 봄에 따라 무후를 천후(天后)라 하였다. 그래서 조정내외에서 그들을 ‘이성(二聖)’이라 칭하였다. 683년 12월 고종은 재위 34년 56세의 나이에 궁중에서 병사하자 건릉(乾陵)에 장사를 지냈다.




무주성신황제 무측천(武周聖神皇帝武則天: 624-705): 병주 문수인(산서 文水) 아버지 무사확(武士彠)으로 목재를 판매하는 대상인. 무측천 14세에 궁에 들어가 태종의 재인(才人)이 됨. 태종 사후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가 고종 즉위후 다시 궁에 들어와 소의(昭儀)로 봉해짐. 655년 황후가 되고 고종과 함께 정치를 하여 이성(二聖)이라 불림. 683년 고종이 죽고 중종 이현(李顯)이 즉위하고 측천이 임조칭제(臨朝稱制)함. 684년 2월 측천이 중종을 폐하여 여릉왕(廬陵王)으로 삼고 예종 이단(李旦)을 세우고 계속 임조칭제(臨朝稱制). 무씨가 이씨를 대신하려는 추세가 나날이 명료해지자 이적(李勣)의 손자인 서경업(徐敬業)을 대표로 원로중신 세력은 여릉왕를 황제로 회복할 것을 호소하며 揚州에서 기병을 하였으나 3개월만에 패하고 피살됨. 690년 무측천이 칭제하고 예종을 폐하여 황사(皇嗣)로 삼고 국호를 주(周)로 삼았다. 스스로 ‘신성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동도 낙양을 신도(神都)라 하였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이다. 그녀가 황제에 올랐을 때 이미 67세로 중국 역사상 즉위시 연령이 가장 많았던 제왕이다. 705년 11월 낙양 상양궁(上陽宮)의 선거전(仙居殿)에서 병사하였다. 재위 16년, 82세의 나이였다. 건릉(乾陵)에 장사를 지냈다.




당 중종 이현(李顯: 656-710): 고종의 제7자. 처음에 주왕(周王)에 봉해지고 영왕(英王)에 다시 봉해짐. 중종 이현의 형 이현(李賢: 章懷太子)이 무측천에 의해 폐출된 후, 태자가 되었다. 년호는 사성(嗣聖)이다.

이현이 즉위한 후, 조정은 무측천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위황후(韋皇后)의 친척을 중용하였다. 2개월이 지난 후, 무측천은 폐하여 여릉왕으로 삼고 그를 방주(房州)에 14년 연금하였다. 705년 대신 장간지(張柬之)에 의해 다시 제위(帝位)로 복위하여 국호를 다시 당이라 하고 연호를 신용(神龍)라 하였다.

이현이 복위한 후, 위비(韋妃)를 황후로 삼았다. 위비가 정치에 참여하여 위후와 무측천의 조카이며 재상인 무삼사(武三思)가 하나의 견고한 세력을 결성하여 조정을 좌우하였다. 중종은 위후에 의해 독살당하였다. 중종의 재위기간은 6년이며 55세에 사망하여 정릉(定陵)에 장사를 지냈다.




당 예종 이단(李旦: 662-716): 고종의 제 8자, 무측천의 어린 아들로 예왕(豫王)에 봉해짐. 684년 2월 무측천이 중종을 폐하고 이단을 황제로 세웠다. 년호는 문명(文明)이다. 690년 무측천이 칭제하고, 이단을 폐하고 그를 황사로 삼아 武氏로 성을 바꾸었다. 705년 중종이 복위하고 그를 상왕(相王)으로 삼아 황위의 계승인으로 삼았다. 중종이 독살 당한 후, 위후(韋后)는 온왕(溫王) 이중무(李重茂)를 황제로 세우고 상왕 이단을 폐하려고 하였다. 임치왕(臨淄王) 이융기(李隆基: 이단의 아들)가 우림군(羽林軍)을 발동하여 궁중에 들어가 위후를 주살하고 위씨와 무씨 집단의 잔여세력을 청소하고 이단을 옹립하였다. 이단이 복위한 후 이융기를 태자로 삼았다. 712년 7월 이단은 태자 이융기에게 선위하고, 716년 6월 55세의 나이로 궁중의 백복전(百福殿)에서 병사하고 교릉(橋陵: 浦城縣)에 장사를 지냈다.




당 현종 이융기(李隆基: 685-762): 예종의 3자. 712년 선위를 받아 제위에 오름. 연호가 선천(先天)이었으나 후에 개원(開元)으로 고침. 현종 즉위 오래지 않아, 태평공주가 궁정의 정변을 발동시켜 현종을 폐하려고 했으나 현종은 이 사실을 알고 곽원진(郭元振), 고력사(高力士) 등이 먼저 제압하여 태평공주를 사사하여 진압하였다.

현종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음율에 뛰어나고, 歷象에도 뛰어나 다재다능하였다. 그는 영명하고 과단성이 있는 황제였다. 동주자사(同州刺史) 요숭(姚崇)을 발탁하여 재상으로 삼았다. 요숭은 권행(權倖)의 억제, 간쟁(諫諍)의 채납, 인정(仁政)의 실시, 병무(兵武)의 휴식, 대신에게 예의 등을 건의하고, 현종은 모두 채납하였다. 개원의 태평성대를 이룩함.

현종은 말년에 교만 태만 방자해지고, 생활이 음탕해졌다. 61세에 양귀비를 총애하였다. 양귀비는 옥환(玉環)으로 원래 현종의 18자 수왕(壽王) 모(瑁)의 비로 현종에 의해 귀비로 봉해졌다. 양귀비는 음율을 잘 타고 가무에 탁월하였다. 현종은 대시인 이백(李白)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그녀를 위해 가사를 쓰도록 하였다. 이백은 궁중의 부패현상에 불만을 느끼고 양귀비와 환관 고력사에게 죄를 지어 서울을 떠났다. 현종이 정사를 태만하고 간신 이임보(李林甫)를 재상으로 삼고 후에 양국충(楊國忠)을 재상으로 삼았다. 755년 안록산은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사사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안사의 난) 장안으로 진격하였다. 현종이 사천으로 피신하던 중 마외파(馬嵬坡)에서 양귀비는 자진하였다. 현종은 재위 44년 78세인 762년 4월 신용전(神龍殿)에서 병사하여 763년 태릉(泰陵: 蒲城縣)에 장사를 지냈다.




당 숙종 이형(李亨: 711-762): 현종의 3자. 일찍이 충왕(忠王)에 봉해지고, 738년 태자가 되었으며, 마외파(馬嵬坡) 병변후, 현종에 의해 천하 병마원수가 되어 삭방, 하동, 평로절도사를 이끌고 반란 평정의 임무를 맡았다. 756년 영무(靈武)에서 즉위하고 현종을 태상황으로 하고 연호를 至德으로 바꾸었다. 숙종 즉위 후,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을 삭방절도사와 하동절도사로 임명하고, 또한 회흘(回紇)병을 빌어 장안과 낙양을 수복하였다. 숙종은 환관 이보국을 군정대권에 임용하여 환관의 세력이 나날이 성장하였다. 재위 6년 52세에 장생전(長生殿)에서 죽어 건릉(建陵)에 장사를 지냈다.




당 대종 이예(李豫: 727-779): 숙종의 장자. 15세에 광평왕(廣平王)에 봉해짐. 안사의 난에 의해 숙종이 영무에서 즉위하자 천하 병마원수로 임명되어 안사를 토벌하였다. 이에와 곽자의 등이 당군을 인솔하고 회흘의 원조하에 장안 낙양을 공격하였다. 758년 태자로 봉해지고 숙종 사후 이보국의 옹립에 의해 황제가 되고 연호를 보응(寶應)이라 했다.

대종 즉위 후, 환관 이보국, 정원진, 어조은 등이 서로 병권을 장악하여 전권을 행사하였다. 대종 재위 17년 779년 5월 53세의 나이로 궁중 자진내전(紫辰內殿)에서 죽고 원릉(元陵: 富平縣)에 장사를 지내다.




당 덕종 이확(李擴: 742-805): 대종의 장자. 762년 대종이 천하병마원수가 되자 노왕(魯王)에 봉해지고, 안사를 토벌하였다. 안사의 난 평정이후 상서령에 임명되고, 764년 태자가 되었다. 대종 사후 제위를 이어받아 연호를 건중(建中)이라 했다. 덕종 즉위 초, 악공(樂工)을 줄이고, 환관의 수뢰를 금지하고 정국을 일신하려고 했다. 780년 재상 양염(楊炎)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용조 수취제도를 폐지하고 양세법을 실행하였다. 덕종은 번진의 할거세력을 억제하고 중앙집권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사회가 미성숙하여 오히려 대란이 일어나 장안이 점령을 당하고 덕종은 봉천(奉天: 지금 乾縣)으로 달아나고 후에 다시 영주(梁州)로 달아났다. 난이 평정된 후,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그 후 번진의 세력이 더욱 커져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그 뒤를 잇는 것에 대해서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재위 26년 64세의 나이에 궁중의 회령전(會寧殿)에서 죽고 숭릉(崇陵: 涇陽縣)에 장사를 지내다.




당 순종 이송(李誦: 761-806): 덕종의 장자. 선왕(宣王)에 봉해졌다가 779년 황태자가 되었다. 그는 환관의 전횡에 불만을 느끼고 왕숙문(王叔文), 왕비(王伾) 등과 개혁정치를 계획하고 인재를 물색하였다. 덕종 사후 제위를 이어받고 연호를 영정(永貞)이라 했다.

순종 즉위 후, 왕숙문, 왕비를 한림학사로 삼아 개혁을 영도하여 한태(韓泰), 한엽(韓曄), 유종원(柳宗元), 유우석(劉禹錫), 진간(陳諫), 능준(凌准), 정도(程導), 위집의(韋執誼) 등 혁신파들이 덕종 이래의 폐정을 혁신하려했다. 이른바 영정혁신이다. 그리고 환관이 가지고 있는 병권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반대로 진행되었다. 순종은 태자 이순에게 양위하고 왕숙문은 사사되고 왕비도 병사하였으며, 유종원 등 8인은 모두 외주의 사마(司馬)가 되었다. 역사상 二王八司馬라 한다. 개혁은 백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순종은 재위 8개월만에 806년 46세의 나이로 병사하여 풍릉(豊陵: 富平縣)에 장사를 지냈다.




당 헌종 이순(李純: 778-820): 순종의 장자. 연호는 원화(元和)이다. 헌종은 당왕조 후기 비교적 안정적인 황제였다. 정치상에 있어서 개혁을 실시하고, 번진을 잠시 평정하였다. 재위기간내에 강회(江淮)의 재무를 정돈하여 재정수입을 증가시키고 이강(李絳), 백거이(白居易) 등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당대 중흥의 황제였다. 재위 15년 43세에 환관 진홍지(陳弘志), 왕수징(王守澄) 등에 의해 살해 당하여 경릉(景陵: 蒲城縣)에 장사를 지내다.




당 목종 이항(李恒: 795-824): 헌종의 3자. 연호는 장경(長慶)이다. 당대는 헌종으로부터 8명의 황제가 환관에 의해 옹립되었다. 목종도 그 하나로 환관의 괴뢰황제에 불과하였다. 재위 4년인 824년 정월 궁중의 청사전(淸思殿)에서 30세의 나이로 죽고, 광릉(光陵)에 장사를 지내다.




당 경종 이담(李湛: 810-827): 목종의 장자. 연호는 보력(寶歷). 재위 2년만인 827년 12월 18세의 나이로 환관에 의해 피살되고, 장릉(莊陵: 三原縣)에 장사를 지내다.




당 문종 이앙(李昻: 809-840): 목종의 차자. 경종의 동생. 연호는 대화(大和). 문종은 황제의 권위가 환관의 괴뢰에 불과한 비참한 처지를 만회하기 위해 이훈(李訓)․정주(鄭注) 등을 한림시강학사로 삼아 835년 그들과 공모하여 대명궁(大明宮)의 후원 석류나무에 甘露가 내렸다고 속여 구사량(仇士良)을 비롯한 환관들을 이곳으로 유인하여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탄로되어 조정 중신이 도리어 환관에게 살해되니 이를 감로의 변이라 한다. 840년 정월 太和殿에서 병사하였다. 재위 14년, 3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장릉(章陵)에 장사를 지냈다.




당 무종 이염(李炎: 814-846): 목종의 5자. 문종의 동생. 영왕(潁王)에 봉해지고, 구사량은 조서를 위조하여 황태제로 세웠다. 연호는 회창(會昌)이다.

무종은 불교를 폐불 조치하고 도교를 숭상하였다. ‘삼무폐불(三武廢佛: 북위 태무제, 북주 무제, 및 당 무종)’이라 함. 재위 6년 33세에 죽어 단릉(端陵)에 장사를 지냈다.




당 선종 이침(李忱: 810-859): 당 헌종의 13자. 무종의 숙부. 환관 마원지(馬元贄) 등에 의해 황제로 옹립됨. 연호는 대중(大中). 재위 13년 50세에 죽어 정릉(貞陵: 涇陽縣)에 장사를 지냈다.




당 의종 이최(李漼: 828-873): 선종의 장자. 환관에 의해 옹립됨. 연호는 함통(咸通). 재위 14년 46세에 죽어 간릉(簡陵: 富平縣)에 장사를 지냄.




당 희종 이현(李儇: 862-888): 의종의 5자. 일찍이 晉王에 봉해지고, 환관 劉行深, 韓文約이 조서를 위조하여 12세의 이현을 태자로 삼음. 연호는 건부(乾符). 황소 왕선지의 난이 일어남. 재위 15년 27세에 죽어 정릉(靖陵: 乾縣)에 장사를 지내다.




당 소종 이엽(李曄: 867-904): 희종의 동생. 재위기간에 환관, 조정신하, 번진 간의 투쟁이 극렬하였다. 주온에 의해 살해당하고 소종의 9자인 이축(李祝: 892-908)을 황제로 삼고 哀帝라 함.




당대 황릉은 소종과 애제의 능이 어디 있는지 확인되지 않는 것 이외 18능은 섬서성 乾縣, 禮泉, 涇陽, 三原, 富平, 蒲城의 6현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동서의 길이가 1백여 킬로미터의 渭河 북안에 있기 때문에 渭北唐十八陵이라 한다. 건릉을 제외하고 나머지 능은 거의 모두가 도굴되었다.

목록
3313
[] 중국 역대왕조의 토지와 조세제도

1. 수나라의 토지제도와 조세제도 1)均田法과 租庸調의 반포 수의 초기에는 북주시기의 균전과 부세제도를 계승하였으나 583년 국가가 안정됨에
운영자 15-05-15
[] 춘추 즉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昔孔子何爲而作《春秋》哉(석공자하위이작)?󰡓 “옛날 공자께서는 무엇을 위해 《춘추》를 지으셨는가?󰡓 太史公曰(태사공왈)
운영자 15-05-13
[]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연혁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연혁 하(夏)와 상(商) 나라 때는 옹주(雍州)에 속했다. 《상서(尙書)·우공(禹貢_》에 “용문(龍門)은 우공(禹貢) 옹주(雍
운영자 13-12-15
[] 티벳의 역사

티벳의 역사 티벳이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것이 중국춘추전국시대 강족이다.강족 거주위치는 칭하이성(청해) 이고, 티벳은 같은 계열의 민족이지만
운영자 12-10-13
[] 중국 고대에 국가행사로 행해졌던 사냥의 종류.

중국 고대의 사냥법 고대의 사냥은 춘하추동으로 구분하여 각각 춘수(春蒐), 하묘(夏苗), 추선(秋獮), 동수(冬狩)라고 칭했다. 춘수(春蒐
운영자 12-10-10
[] 讀史方輿紀要 (독사방여기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1〉 卷首‚ 130卷‚ 合 64冊‚ 필사본‚ 28×18.2cm 〈2〉 60冊‚ 목판본‚ 24×15
운영자 12-06-27
[] 전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비중 추이와 전망

청나라 전성기 때인 19세기 초에는 중국의 지디피는 전세계의 35%를 정점으로 했다가 1950년 대의 한국전쟁과 60년 대의 문화혁명의 여파로 5%로 하락
운영자 12-05-23
[] 중국화의 개요와 감상법

중국화의 개요와 감상법 1. 그림과 주변장르의 통일 크게 詩 書 畵를 일체로 보고, 여기에 篆刻(落款)까지 네 가지가 모두 그림의 영역에서
운영자 12-02-09
[] 중국의 인구변천사

중국의 인구통계는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2천여 년 동안 중국의 인구는 390만
운영자 06-09-24
[] 중국황제들이 성풍속도

진시황 이래 中 황실 성생활 보고서 【 황궁의 성 】 시앙쓰 지음 미다스북스 펴냄 중국은 하(夏)왕조가 세워진 이래 1911년
운영자 09-07-25
[] 충칭(重慶)의 연혁

충칭(重庆)은 기원전 11세기에 세워졌다고 하는, 반 정도는 전설적인, 파(巴)나라가 있었던 자리이다. 파나라는 중원과는 다를 문화를 가지고
운영자 08-10-24
[] 중국 13왕조의 도읍 서안(西安) -2-

5. 장안성의 구조 26 전한 시대와 당나라는 모두 ‘장안’을 수도로 하였으나 장소는 약간 달랐다. 전한 시대의 장안 남동쪽의 용수원(龍首原)
운영자 09-05-04
[] 중국 13왕조의 도읍지 西安(서안) - 1

중국 13왕조의 도읍 서안(西安) 목차 1. 서(序) 1 2. 장안성(長安城)의 연혁 2 3. 중국 역대왕조 황제릉 9 4. 당제국의 장안성 17 5.
운영자 09-05-04
[] 중국 네티즌들의 중국역대왕조에 대한 평가

강력한 한(强漢), 번성한 당(盛唐), 부강한 송(富宋), 강직한 명(硬明), 야만적인 원(蠻元), 비굴한 청(奴淸)…’.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네티즌
운영자 09-04-28
[] 간추린 중국사

다음 글은 경기대 남정휴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옮겨왔습니다. 간추린 중국 역사 중국역사는 현 고고학상의 발굴성과에 의하면
양승국 04-05-12
1 [2][3][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