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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3왕조의 도읍 서안(西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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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안성의 구조 26




전한 시대와 당나라는 모두 ‘장안’을 수도로 하였으나 장소는 약간 달랐다. 전한 시대의 장안 남동쪽의 용수원(龍首原) 땅에 수나라는 수도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전한 시대의 장안은 적미(赤眉)의 기의 때 파괴당하여 황폐화되어 버렸다. 그래서 후한 때 낙양을 수도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나라는 이 황폐화된 전한 시대 장안의 동남쪽 땅에 자리잡고 ‘대흥성(大興城)’이라고 명명하였다. 수나라가 단명으로 멸망한 다음 당나라는 대흥성의 축조를 계승하였지만 이름은 장안을 부흥시켰던 것이다.

전한 시대의 장안은 그 전대 진나라 함양(咸陽)과 같이 우선 궁전을 짓고 지형에 따라 성곽을 쌓았다. 성의 둘레는 25.1Km였으나 위와 같은 사정이었으므로 판축법(版築法)으로 축성된 성벽은 정연하지 못했다. 거리가 이룩된 다음에 이를 둘러싼 것이다. 한 고조 유방 때에는 아직 성벽이 축성되지 못하고 2대째인 혜제에 이르러 겨우 성벽이 쳐진 것이다. 진나라의 별궁이었던 흥락궁(興樂宮)을 개축하여 장락궁(長樂宮:동궁)으로 개칭하여 유방의 집무처로 하고 따로이 미앙궁(未央宮:서궁)을 군신이 배알하는 곳으로 하였다. 미앙궁은 남쪽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에 성벽을 축성할 때 커브를 만들어야만 했다. 장안성의 북쪽에는 강이 있었으므로 그 흐름에 따라 경사진 곳이 많다.

미앙궁과 장락궁으로 장안성의 1/3을 차지하고, 명광궁(明光宮), 북궁(北宮), 계궁(桂宮)을 포함하면 1/2에 이른다. 미앙궁의 북쪽에는 대저택이 들어차 있어 일반 시민의 공간은 매우 좁아서 민가는 성 밖으로 벗어났다. 민가뿐만 아니라 건장궁(建章宮) 같은 무제 시대의 궁원(宮苑)과 사당까지도 성 밖에 세워졌다. 한나라 성벽은 높이 최저가 12m, 기저부의 두께는 12-16m, 성벽 밖의 호는 너비 8m, 깊이 3m로 되어 있다. 장락궁은 다시 10Km에 이르는 토벽으로 감싸고 있으며 장락궁과 미앙궁 사이에 7동의 무기고(동서 880m, 남북 320m)가 있다.

반면에 당나라 장안은 남북 8.6Km, 동서 9.7Km, 둘레 길이 36.7Km 면적 84평방킬로미터의 정리된 장방형이다. 수나라 文帝는 개황 2년(582)에 고경(高顈)과 우문개(宇文愷)에게 새 도읍지의 조성을 명하여 처음부터 도시 계획하에 조성 작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로도 바둑판처럼 정연하게 되어 있었다. (381페이지 당 장안 복원도)

수 문제가 장안 건설을 시작했을 때에는 먼저 궁성과 황성을 건설하고 외곽의 성벽을 쌓았던 것이다. 황제와 신하들의 집무처로 이른바 관청지역이었던 것이다. 황실의 주거와 관청가를 조성한 다음, 그것을 감싸는 성벽을 축성하였던 것이다. 궁성의 면적은 4.2평방 길로미터, 황성의 면적은 5.2평방 킬로미터이므로 모두 9.4평방 킬로미터가 된다. 장안성의 1/9에 해당되므로 한 대 장안이 반 이상을 궁전이 점령하였던 데 비하면 주민용 공간이 매우 컸다.

황성의 남쪽 정문은 주작문(朱雀門)으로 그곳으로 남하하는 주작로가 장안 남북의 중심가에 해당된다. 이 주작로륵 경계로 동서로 나누어 동쪽을 좌, 서쪽을 우로 하였던 것이다. 치안국에 해당하는 금오위(金吾衛)도 좌우에 각기 설치되어 있었다. 시장도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로 각기 설치되었다.

궁성 구역에는 태극궁(太極宮)을 중심으로 동궁(東宮)과 액정궁(掖庭宮)이 있었다. 태종 정관 8년(634) 이제까지 궁정 구역은 습기가 많다는 이유로 황실 정원이었던 곳에 새 궁전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고종 용삭(龍朔) 2년(662)에 이것이 확장되었으며 이것이 대명궁(大明宮)이다. 대명궁 안에 함원전(含元殿), 선정전(宣政殿), 자진전(紫震殿), 인덕전(麟德殿), 삼청전(三淸殿), 연영전(延英殿)이라는 건물이 있으며 정전(正殿)은 함원전이다. 이 대명궁은 용수원이라는 구릉에 있으며 함원전은 약 15미터 높은 곳에 위치하여 그곳에서 전 장안을 굽어볼 수가 있었다.

현종은 황태자 시절 흥경방(興慶坊)의 저택에 살았고 즉위하고 나서도 그곳이 마음에 들어 궁전(흥경궁)으로 개축하였다. 그러므로 현종시기 이 흥경방이 정전(正殿)으로 대당의 정치 중심부였다. (현재 대명궁의 함원전, 인덕전, 중현문. 흥경궁의 화악상휘루와 근정무본루, 서시, 명덕문, 청룡사 유적지 등이 발굴됨)

장안성 외곽 성벽의 높이는 5미터 정도이고, 두께는 9-12미터인데 반해 궁성이나 황성 벽의 두께는 18미터에 이름(외곽보다 더 엄중함을 볼 수 있다) 외곽의 동쪽 성벽은 그 외에 한 줄기 성벽이 평행을 이루어 이중으로 되어 잇음이 발굴결과 확인됨. 두 성벽 사이는 50미터 정도 떨어져서 도로가 되어 있음. 이것은 ‘복도(復道)’라고 부르는 길로서 보통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는 길로 간주되었으나 당나라 장안의 복도는 그렇지 않았다. 성문 쪽까지 가서 복도는 고갯길을 이루어 그곳을 넘어가게 되어 있다. 이는 황제 전용 도로로서 비밀 통로라고 볼 수 있다.(현종 개원 14년(726) ‘夾城’이 구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이중 성벽이었음이 틀림없다)

당나라 말기 장안은 주전충(852-912)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 주전충은 당 소종(昭宗)을 옆에 끼고 낙양으로 달아났다.(궁과 기타의 건조물은 해체하여 그 재목을 낙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장안의 유수 우국군(佑國軍)절도사 한건(韓建)이 군사 방어의 필요에 따라 외곽성과 궁성을 포기하고 장안의 성벽을 황성의 성벽으로 축소하고 이것이 오대로부터 원대에 이르기까지 장안성의 규모로 형성되었다. 명왕조가 중국을 통일한 후, 주원장에 의해 새롭게 조성되었다.

이것이 중국고대 성벽중 제일 완전하게 보존된 성벽이다. 이 성벽의 공정과정은 홍무 3년(1370) 공사를 시작하여 홍무 11년(1378)에 완성되었다. 남쪽의 성벽과 서쪽 성벽은 남아 있던 隋唐의 성벽을 기초로 하여 더욱 높이고 더욱 두껍게 하고 아울러 동쪽과 북쪽을 향해 약 1/4 정도 확장하여 동쪽 성벽이 2886m, 서쪽 성벽이 2706m, 남쪽 성벽이 4,256m, 북쪽 성벽이 4,262m, 모두 13,912m에 이르는 규모가 되었다.

서안 성벽의 높이는 12m, 기초 넓이는 18m, 웃부분 넓이는 15m이다. 성벽이 넓고 높이 쌓을 수 있었던 것은 황토를 다진 판축(板築)으로 만든 것이다. 이 황토에 석회 및 찹쌀즙 그리고 다래즙을 섞어서 다진 것으로 굳으면 돌보다도 훨씬 더 단단해졌다.

서안 성벽은 이후 3차에 걸친 보수 작업이 있었다. 첫 번째는 1568년(明 隆慶 년간)에 섬서도지휘사(陝西都指揮使) 장지(張祉)는 원래의 흙성벽 내외에 푸른 벽돌(靑磚)을 쌓았다. 두 번째는 1781년(청 건륭 년간) 섬서 순무 필원(畢沅)이 성루(城樓)를 정리 보수하고 더욱 벽돌을 쌓고 배수계통을 완전히 수선하였다. 1983년 섬서성과 서안시 인민정부에서 대규모적인 보수와 수선 그리고 훼손된 동문, 북문의 전루(箭樓), 남문의 갑루(閘樓), 조교(弔橋: 가동교)를 보수하고, 환성공원(環城公園)을 건설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벽에는 군사방어 시설인 호성하(護城河), 조교(弔橋), 갑루(閘樓), 전루(箭樓), 정루(正樓), 각루(角樓), 적루(敵樓), 여장(女墻), 타구(垜口) 등이 있어 성을 보호하고 있다.

성벽의 동서남북에는 각기 문이 있는데 각기 스스로의 용도가 있었다. 남문은 황제만이 다닐 수 있는 문이고, 북문은 사절단이 오가는 문, 동문은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곡식, 생필품 등의 공물들이 들어오는 문, 서문은 실크로드로 향해 열린 문으로 서방의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출입했다고 한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왔을 때 황제가 친히 남문을 열고 나가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

남문: 이 문은 서안문 중 가장 오래된 문으로 582년(수초)에 건립되었다. 그것은 황성 남면에 있는 3개의 문(함광문, 주작문, 안상문) 중 동쪽에 있는 안상문(安上門)이다. 당말 한건(韓建)이 성을 축소할 때 남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명대 이 문을 영령문(永寧門)이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서안 성문 중 가장 완벽하게 복원이 되었지만 아직 전루(箭樓)만 복원되지 못했다.

주작문(朱雀門): 주작문은 당 장안성 황성의 정남문으로 문 아래는 도시 중앙의 주작대로이다. 수․당시 황제는 여기서 慶典활동을 거행하였다. 589년 중국을 통일 할 때 수 문제가 주작문 성루에서 개선대군을 검열하였다. 당말 한건이 성을 축소할 때 이 성문을 닫아버렸다. 1985년 서안 성벽을 보수할 때 명대 성벽내에 있는 주작문 유적지를 발굴하였다. 성문의 주춧돌을 대리석으로 하고, 청석(靑石)으로 제작된 문턱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당시 화려함을 볼 수 있다. 1986년 개통됨.

물막문(勿幕門): 세칭 소남문으로 1939년에 개통되었다. 신해혁명 중 섬서의 혁명 선열인 井勿幕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정물막 선생은 손중산이 창건한 동맹회 첫 번째 회원으로 섬서 민주혁명시기 중대한 영향을 끼친 혁명가로 1917년 호법운동 중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함광문(含光門): 함광문은 당 장안 황성 남면에 서쪽으로 치우쳐진 문이다. 당말 한건이 장안성을 축소할 때, 함광문의 중문동(中門洞)과 서문동(西門洞)을 폐쇄하고 동문동(東門洞)을 보류하였다가 북송시기 모두 폐쇄하였다. 1984년 서안 성벽을 보수할 때 함광문 유적을 발굴하였다. 화강석으로 만든 성문의 주춧돌과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서문(西門): 서안의 서문은 본래 당 황성 서쪽의 중문이다. 당말 한건이 장안성을 축소할 때 남아 있다가 명대 성벽을 확대할 때 남쪽으로 이동하여 안정문(安定門)의 이름을 얻었다.

옥상문(玉祥門): 1926년 군벌 유진화(劉鎭華)가 서안성을 8개월이나 포위하여 서안 인민의 4만 여명이 동사․아사․전사할 때, 풍옥상(馮玉祥) 장군이 국민 연합군을 이끌고 와서 유진화를 격파하여 비로소 서안의 포위가 풀렸다. 1928년 이 성문이 개통되면서 풍옥상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옥상문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북문(北門): 명대 축성시 건조된 북문으로 정식의 명칭은 안원문(安遠門)이다. 신해혁명시 기의군이 만성(滿城)을 공격할 때, 이 일대 전쟁이 극렬하였다. 그래서 교전 중 북문 성루가 훼손되었다. 1983년 성벽을 보수할 때 원래의 전루(箭樓)를 회복하였다.

상덕문(尙德門): 서안 정거장 서남쪽의 상덕문은 1986년에 개통되고 곧 상덕로의 이름을 얻었다.

중산문(中山門): 1927년 풍옥상 장군의 제의로 민국 혁명의 영수인 손중산 선생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중산문 이름을 얻음. 1927년 5월 1일 풍옥상 장군은 병력을 이끌고 동정(東征)할 때, 중산문을 통해 성을 나감. 중산문에는 두 개의 문동(門洞)이 있다. 풍옥상은 이 문을 ‘東征門’과 ‘凱旋門’이라 했다. 그리고 동정을 나갈 때 다시 개선문에 와서 환영할 것을 말했지만 정국의 변화로 인하여 풍옥상은 다시는 서안에 오지 못했다.

동문(東門): 동문은 명 서안성을 구축할 때 조성된 것으로 정식명칭은 장락문(長樂門)이다. 명말 이자성의 기의군이 동문으로 서안에 들어왔다. 이자성 기의군이 동문을 통해 들어올 때, 성문 위에 걸려 있는 ‘長樂門’의 편액을 보고 주변에 있는 장병에게 “만약 황제가 오랫동안 즐거우며 백성은 오랫동안 고통스럽군”이라고 하였다. 장병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격분하여 이 성루를 불태워버렸고, 청대 다시 건축한 것이다.

건국문(建國門): 1986년 개통된 건국문은 建國路에 대해 얻어진 명칭이다.

화평문(和平門): 서안 정거장, 대안탑이 있는 것과 동일한 남북축 선상에 있는 화평문은 1953년에 개통되었다. 세계 평화를 갈망하는 뜻으로 얻어진 명칭이다.

문창문(文昌門): 비림 박물관 남측의 문창문은 1986년에 개통되었다. 이 성벽에는 군사방어 시설과 무관한 괴성루(魁星樓)가 있다. 괴성은 ‘奎星’ ‘奎宿’이라고도 하며 28성수 중의 하나이다. 이 규성은 문운흥쇠를 주관하는 신으로 사람들은 그것을 존칭하여 ‘文曲星’, ‘文昌星’이라 칭하였다. 그래서 공자묘나 학교 근처에 괴성루를 건립하였다.




6. 유적.유물




1) 종루

종루는 서안시 제일 중심의 십자거리에 위치해 있다. 높이가 36m이고, 기초 높이가 8.6m이며 매 변의 길이가 35.5m, 건축 면적이 1377.4평방미터이다. 이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사대거리는 각각 성벽의 동문, 서문, 남문, 북문과 연결된다. 서안 종루는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종루 중 가장 크고 보존이 완전하다. 서안은 명나라 때 서북지역의 군사 정치 중심이었기 때문에 종루의 건축 규모, 역사 가치와 예술 가치 방면으로 볼 때, 전국에서도 첫 번째로 꼽힌다. 종루는 명태조 주원장 홍무 17년(1384)에 세워졌다. 처음 세울 때의 위치는 현재 廣濟街 고루(鼓樓) 옆에 있었다. 명 신종 만력 10년(1582)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종루는 명대 건축의 전형적인 풍격으로 전부 청벽돌로 쌓았다. 종루 사면에 각각 높이가 6m인 문이 있어 옛날에는 마차와 행인이 그리로 다녔다. 현재는 그 문들을 봉하고 주변으로 돌아다닌다.




2) 자은사(慈恩寺)와 대안탑(大雁塔)

대안탑은 서안 남쪽 교외에 위치하고 있고, 시내에서 6Km 떨어진 대자은사내에 있다. 정관 22년(648), 황태자 이치(李治: 고종)가 사망한 어머니 문덕황후(文德皇后: 長孫皇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짓고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慈母恩德)에서 ‘慈恩寺’라 명명했다.

자은사는 황실에 의해 지어졌기 때문에 다른 사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며 당 장안성 최대 사원의 하나이다. 사찰에 들어가면 정면에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보인다. 그 앞에 ‘大慈恩寺’라고 금박 글씨가 쓰여져 있는 대형 향로가 있고 관광객들이 거기에서 향을 꽂고 기도 드릴 수 있게 하고 있다. 대웅보전 뒤의 큰 탑이 바로 서안시의 심볼로 일컬어지는 대안탑이다. 당시 절내 승방(僧房)이 1,897칸이 있어 현재의 34.5배에 달하였다. 그리고 건축물을 매우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전당(殿堂)과 탑원(塔院) 그리고 회랑(回廊)에 고급목재를 사용하고, 주옥금취(珠玉金翠)와 오안육색(五顔六色)의 채회를 하였으며, 오도자(吳道子), 윤림(尹琳), 염립본(閻立本), 정건(鄭虔), 왕유(王維) 등 저명한 화가들이 자은사에서 벽화를 그렸다고 전하고 있다. 당대의 자은사는 당말 전란에 의해 훼손되고, 현재 대안탑만 보존되고 있다. 후대 사원이 여러 번 중수하였지만 모두 당대의 규모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현존의 사원 건축은 당대 자은사의 서원(西院)에 해당된다.

대안탑은 현장법사가 인도의 안탑(雁塔)에 근거하여 설계한 것이고 당나라 652년에 건립되었다. 초기에는 5층이었고 재료는 연와(煉瓦), 석회, 흙으로 된 것이다. 대안탑은 기원 701년에 7층으로 재건하였고, 당 대종(代宗)의 대력(大歷)연간에 이르러 10층으로 또 다시 재건하였다. 하지만 그 후 전쟁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7층만 남아 있다. 지금 탑의 높이는 64m이고 탑안의 계단이 284개 있고, 제일 높은 층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어있다. 탑 남쪽 입구 양쪽에 작은 칸이 두 개 설치되어 있는데, 우실(右室)에는 당태종 이세민의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 비석, 좌실(左室)에는 당고종 이치의 “대당삼장성교서기(大唐三藏聖敎序記)” 비석이 안치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삼장법사의 공덕을 표창한 것이고, 글씨는 당나라 때 유명한 서예가 저수량의 대표작으로 서예가의 눈을 끌고 있다.

현장스님의 속명은 진의(陳禕)이고 하남성 언사(偃師: 낙양근처)인이다. 11세에 형을 따라 낙양 정토사에서 경전을 공부하다 13세에 승적을 얻어 화상(和尙)이 되고 ‘현장’이란 법명을 받았다. 사천, 성도, 공혜사 등지에 있다 23세에 장안으로 들어가 대각사에 머물렀다. 다양한 불전을 공부한 현장스님은 경전을 깊이 공부할수록 각 종파의 교리에 대한 의혹과 역경에 대한 의문이 깊어갔다. 불전 원본만이 이러한 의혹과 의문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불교발상지 천축에 가 경전을 구해와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26살 때 천축행을 주청했다. 당시 법적으로 옥문관 서쪽 출입이 금지됐기에, 현장스님의 주청은 허락되지 않았다.

정관 2년(628) 8월 현장스님의 나이 28세 때, 홀로 몰래 장안을 출발해 서행길에 올랐다. 진주(천수), 금성(난주), 양주, 과주(돈황), 옥문관에 도착했다. 옥문관을 돌파해 800리 사막 길을 붉은색 노마(老馬)를 타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걸어갔다. 5일 만에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졌으나, 닷새째 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깨어 걸으니 10리 앞에 못이 있었다. 다음날 이오(伊吾)에 도착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3). 이오를 지나 고창국(투르판), 언기(카라샤르), 능산(천산산맥 북쪽), 타쉬켄트, 사마르칸트, 마자르이 샤리프, 가필시(아프가니스탄 베그람), 잘랄라바드, 건타리국(페샤와르), 오장나국(스와트), 카시미르 서북부, 탁샤실라(탁실라), 가습미라(카시미르), 마투라, 쉬라바스티, 룸비니, 구시나가라, 나란나에 도착했다.

나란다 대학에 15개월 동안 머무르며 무착보살과 세친보살의 직계제자인 106세의 계현(戒賢) 스님에게서 유식학을 배웠다. 불교철학과 범어를 완전히 익히고, 경전들을 구한 현장스님은 641년 가을 귀국길에 올랐다.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천산남로를 이용, 520상 657부의 경전을 들고 장안에 돌아왔다. 중국을 떠난 지 17년 만인 645년 2월이었다.

장안에 돌아온 현장스님은 융숭한 환영을 받았다. 귀국 후 당태종 이세민을 만나 현장스님이 지나간 나라의 풍습과 환경 등을 자세히 물었다. 자은사 번경원(飜經院)에 주석하며 역경에 몰두, 73부 1,330권을 한역했다.

구마라집 스님과 현장스님을 2대 역경가로 평가하는데 두 사람의 역경방식은 차이가 난다. 대만 문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진홍스님은 이에 대해 “중국은 크게 2대 역경가를 꼽는데, 구역은 구마라집스님이고 신역은 당 현장스님이 대표한다. 구마라집스님은 의역을 했고, 현장스님은 직역했다. 구마라집스님의 역경 부수는 현장스님보다 작지만 경을 번역한 범위는 더 넓다. 화엄․심송율․중론․중관론 등 손을 안 댄 부분이 없다.”

역경과 함께 현장스님은 “암흑에 뒤 덮인 7세기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역사지리에 한 줄기의 광명을 비추는” ꡔ대당서역기ꡕ를 남겼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서구학자들의 학술적 연구 대상이 됐으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학술탐험의 귀중한 지도 역할을 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을 샅샅이 조사한 영국의 오렐 스타인은 현장스님과 ꡔ대당서역기ꡕ를 열렬히 숭배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언종스님과 혜립스님이 지은 ꡔ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ꡕ을 ꡔ대당서역기ꡕ와 같이 보는 것이 더 좋다. 664년 현장스님이 입적하자 당 고종은 스님에 대한 존경과 애도의 뜻으로 3일간 조회를 폐했다고 한다.

대안탑이란 명칭의 유래는 여러 가지 있다. 그 중 기러기 설화가 가장 신빙성 있게 전해진다. 인도를 향해 가던 현장법사가 어느 날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일어 버렸는데 그 때 어디에선가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서 길을 인도해 주었다. 부처님이 기러기로 현신하여 자신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하여 훗날 인도에서 돌아와 탑을 짓고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해 안탑(雁塔, 기러기탑)이라고 명명하였다.




3) 천복사(薦福寺)와 소안탑(小雁塔)

사성(嗣聖) 원년(684)에 건립된 천복사는 당나라 도읍 장안의 유명한 사찰 중 하나로서 그 때 당시 개화방(開化坊) 남쪽에 위치하여 있었다. 원래 이곳은 수양제가 진왕(晉王)으로 있을 때 왕부(王府)였고, 그 후 양성(襄城)공주와 당 중종 이현(李顯)의 저택이었다. 당 중종이 즉위 후, 죽은 당 고종 이치(李治)에게 사후 백일, 獻福하기 위해 자기가 있던 왕부(王府)를 사찰로 다시 건축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獻福寺라 불렀는데, 698년에 이름을 薦福寺라고 고쳤다. 왕부를 고쳐 절을 만들었기 때문에 탑을 세울 마땅한 자리가 없어 20년 후에 길 하나 사이를 둔 안인방(安仁坊)에 소안탑을 세웠다. 그로나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 등 혼란기에 천복사는 완전히 훼손되고 소안탑만 남게 되었다. 그 후 소안탑을 중심으로 하여 천복사를 재건설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유명한 법사인 의정법사(義淨法師)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존하기 위해 자금을 대주도록 조정에 요구하여 건설된 것이라 한다. 소안탑은 707년에 세워졌다. 대안탑과 마찬가지로 역시 당나라 탑이지만 건설기간이 반세기 늦고 크기도 대안탑보다 작으므로 소안탑이라 부른다. 탑 외형으로 볼 때, 풍격이 대안탑과 완전히 다르다. 높이가 43.38m, 15층이며 평면은 사각형이다. 탑의 맨 아래층이 가장 높고 올라갈수록 층의 높이가 점차 낮아진다. 아래 층의 남․북쪽에 각기 권문(券門)이 나 있고, 그 위의 각 층마다 권창(券窓)이 있다.

1487년 섬서성에 6급 지진으로 인해 소안탑이 한 자 이상의 폭으로 가운데가 갈라졌었다. 34년이 지난 정덕 연간(1521)에 또 다시 발생한 지진 중 신기하게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이를 ‘신합(神合)’이라 전해왔다. 1555년 화음현에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소안탑 제일 윗부분의 두 층이 무너져 현재 13층 밖(38m)에 남지 않았다.

의정(義淨: 635-713) 스님: 범양(현 북경)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출가한 스님은 15살 때 인도로 구법여행 갈 것을 결심했다. 결국 당 고종 함형 2년(671), 나이 37세에 양주에서 광주로 가 배를 타고 인도행에 올랐다. 당초 여럿이 함께 떠나려고 했으나 모두들 포기하고 의정스님만 결행했다. 광주를 떠난 지 2년 뒤인 673년 갠지즈강 하류에 탐랄립티에 도착했다. 여러 성지를 순례한 의정스님은 나란다에 10년간 머물며 불경을 공부하고, 685년 귀국길에 올라 다시 해로를 이용했다. 인도에서 모은 엄청난 분량의 범어문헌(50여만 송)을 한역하기 위해 먼저 슈리비자야국으로 가지고 갔다. 그러나 역경 작업은 혼자 하기 힘든 일이었다. 다시 남해로 돌아가 도와줄 사람을 구해 슈리비자야국으로 돌아와 번역작업을 계속했다. 695년 마침내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런 점에서 의정스님은 “해로를 이용했던 중요한 스님”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구법승에게 벼슬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의정스님은 역경을 원했기 때문에 역경을 위해 머무른 사찰이 바로 대천복사, 즉 소안탑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의정스님은 68부 290권을 한역했고, 「남해귀기내법전」 「대당서역구법고승전」 등을 저술하여 중국 불교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의정스님의 구법기간은 25년으로 현장 스님의 17년보다 길고, 남긴 저술도 3권으로 현장스님의 1권 보다 많다. 물론 역경의 양을 비교하면 현장스님과 비교되지 않지만 질이나 조직 면에서는 현장스님의 그것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에 대해 정수일은 “의정스님은 율장 번역에 치중해 역경의 한 경지를 개척했으며, 저술과 역경에서 인도에 갔다 온 3대 구법승(법현스님:인도에서 경전을 가지고 온 첫 중국인, 현장스님, 의정스님)의 한 사람답게 큰 업적을 쌓았다”고 평가했다.

706년 천복사에 번경원을 두고 역경에 몰두, 모두 68부 29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경전을 한역했다.




4) 비림(碑林) 박물관




비림박물관은 서안시 남쪽 성벽 괴성루(魁星樓) 아래에 있으며 비석이 숲을 이루고 있어 비림이라고 한다. 비림박물관은 중국 전통적인 공묘(孔廟)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중국 고대비석을 제일 일찍 보존하고 명비(名碑)가 제일 많은 예술 보물고 이다.

비림은 북송 원우 2년(1087)에 당나라 비석들을 옮겨오면서 형성되었다. 이미 920년 정도의 역사가 된다. 당대 경전을 옮겨 쓰는데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당 문종은 개성 2년(837) 국자감 좨주 정담(鄭覃) 등이 경전을 감정하고 ꡔ開成石經ꡕ을 새겼다. 이때의 석각과 당 현종이 친히 써서 새긴 ꡔ石台孝經ꡕ은 원래 장안성 무본방(務本坊: 지금 남문 밖 섬서성 체육관 일대)의 국자감 태학내에 있었다. 당대 말기 주온(朱溫)이 당 소종을 데리고 낙양으로 천도하고 장안을 주둔하고 있던 우국군절도사 한건(韓建)이 장안성을 황성지역으로 축소하여 진귀한 비석이 성 밖 노천 황무지에 방치되었다. 수많은 사람의 건의가 있어서 한건과 후의 유심(劉鄩: 후량 시기 장안 지방장관)이 이들 비석을 성내 당대의 尙書省 소재지, 지금의 西大街 광장일대로 옮겨 놓았다. 이곳은 지세가 낮고 습기가 많아 비석이 쉽게 몰락되고 파손되자, 북송 조운대사 여대충(呂大忠)의 조직하고 또한 1087년에 지금의 이곳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비림 박물관에는 한나라 때부터 근대의 각종 비석, 묘지명 2,300여개가 있는데 그 중에 1,807개의 비석을 7개의 진열실과 8개의 비정(碑亭)과 6개의 비랑(碑廊)에 전시하고 있다. 석각예술실에는 100여 건의 한(漢)대부터 당(唐)대의 릉에서 출토된 석각예술과 종교 석각예술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총 면적은 31,900평방미터이며 진열실 면적은 3,000평방미터이다.

비림박물관은 전형적인 사당식 건물로 현재도 여러 면에서 공묘(孔廟)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공자는 중국 유가(儒家)의 창시자이며 봉건사회에서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직위에까지 있었다. 이 성인에 대한 존경으로 공묘의 문은 동․서 양측이 열려있고, 서문을 예문(禮門), 동문을 의로(義路)라 했다. 남문은 폐쇄하여 새문(塞門)이라 하고, 문안에는 반선형(半扇形) 2개의 저수지가 있는 것이 공묘의 특징적인 건축이다. 고대제도에 따르면 국가급 공묘내의 저수지는 원형으로 하여 ‘벽옹(辟雍)’이라 하고, 지방급 공묘의 저수지는 반원형으로 ‘반지(冸池)’라 했다. 과거시험에 합격한 수재들이 공묘에 와서 배알하고 반지(冸池)에서 붓을 씻었다하여 과거에 합격한 수재들을 입반(入冸)이라 했다. 반지 이북의 석패방도 공묘의 특징적인 건축물로 영성문(欞星門: 영성은 28성수 중 取士를 주관하는 신이다.)이라 했다. 영성문df 드나드는데는 엄격한 규정이 있어서 공자제사 때 주최하는 최고의 관리만 중문을 통과할 수 있고 일반 관리들은 서문을 드나들었고, 나머지는 동문으로 다녔다.

제1진열실

제1진열실은 당 문종 개성 2년(837)에 새긴 ꡔ開成石經ꡕ이다. 개성석경은 12부의 경서를 포함하는데 114개의 비석으로 228페이지 되게 650,252자를 애유회(艾由晦), 진개(陳玠) 등의 해서로 새긴 것이다. 12부의 경서란 주역, 상서, 시경,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논어, 효경, 이아(爾雅) 등이다. 청대에 ꡔ맹자ꡕ를 9개의 비석에 새겨놓아, 후에는 13경이 되었다. 12경서는 봉건지식인들의 필독전서로서 그 당시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해 학자들이 베껴쓰는 과정에 틀린 글자가 많았기에 이를 비석에 새겨 범본(範本)으로 사용하였다.




제2진열실

여기에는 唐대의 저명한 서예가들의 비석을 전시하여 역대로 서예를 공부하는 범본이다. 그 중 당나라 초의 서예가 구양순(歐陽詢)의 황보탄비(皇甫誕碑), 구양순의 아들 구양통(歐陽通)이 쓴 도인법사비(道因法師碑), 저수량(楮遂良)의 동주성교서비(同州聖敎序碑), 안진경이 쓴 다보탑비(多寶塔碑)와 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 당나라 말기 유공권(柳公權)의 현비탑비(玄秘塔碑), 장안 홍복사(弘福寺)의 스님 회인(懷仁)이 왕희지체를 집자하여 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그리고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있다.




제3진열실

중국서예사의 변천과정을 살필 수 있다. 한에서 송에 이르는 동안 품격이 다른 서예비석을 볼 수 있다.




제4진열실

송에서 청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시문비(詩文碑)이다.




제5진열실

청나라 비석을 주로 비치했는데, 송․원․명 때의 비석도 있다. 이 비석들은 그 당시 사회활동에 대해 적어놓아 당시 사회정황과 지방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되고 있다. 일부 비석은 중요한 서예예술 가치를 갖고 있다. 이사의 ꡔ진역산각석(秦譯山刻石)ꡕ




제6진열실

청나라 시가(詩歌), 산문(賦)이 위주인데 원․명시대의 서예가들의 작품도 있다.




제7진열실

청나라 때(1646) 황제가 갖고 있던 역대 제왕과 서예가들의 친필체를 다시 새겨 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왕희지와 왕현지의 필체도 있다.


석각예술진열실

서한때부터 당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돌조각 예술품 70여건이 있는데, 능묘 돌조각과 종교 돌조각 2종류가 있다. 昭陵六駿




5) 경운종(景云鐘)

경운종은 영성문 북쪽 정자에 있는데 중국에서는 “천하 제일종”이라 한다. 당 예종 경운 연간에 만들었기 때문에 경운종이라 부르며 청동으로 주물한 것이다. 높이 2.47m, 직경이 1.65m이고 무게가 6톤이다. 종 입구는 6개의 물결선으로 되어 있고, 종의 몸체에는 학, 비천, 용, 봉황, 맹수의 머리(獸首), 만초(蔓草), 채색구름 도안이 있다. 종뉴는 한 마리 맹수 머리로 하여 ‘포뇌(蒲牢)’라 한다.

종의 중앙에는 292자의 명문이 주물되어 있는데 당 예종 이단(李旦)의 친필이다. 명문 내용은 도교와 종소리에 대한 찬미이다. 중국 CCTV에서 울리는 새해의 종소리가 바로 이 종소리이다.




6) 대하석마(大夏石馬)

鐘亭 대칭에 있는 馬亭里에 다른 하나의 문화보고가 있다. 바로 大夏石馬이다. 말의 前腿下에 새겨진 문자, 희미하지만 ‘大夏眞興六年’ ‘大將軍’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하는 흉노족 鐵弗部 혁련발발(赫連勃勃)이 418년에 건립한 정권이다. 이 해 혁련발발이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그의 장자 혁련궤(赫連樻)로 하여금 지키도록 했으며 혁련궤의 직함이 바로 대장군이다. 이 대하석마는 장안현 사가채(査家寨)에서 출토되고, 그 일대가 혁련궤의 묘지로 묘 앞에 있는 석각의 하나로 예상된다.




7) 비정(碑亭)

박물관 전반부 중추선의 양측에 7개의 碑亭이 있고, 亭內에는 각각 巨碑가 있다. 이 비정은 청대에 건립한 것이다. 비정 내에는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ꡔ石台孝經ꡕ이 비치되어 있다.




7. 진시황(秦始皇)과 병마용(兵馬俑)




1) 중국의 첫 황제

석가모니가 고인도에서 탄생한지 약 300년이 된 후, 중국 북방의 한단(邯鄲)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가 수십 년 후, 역사적인 인물로 중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그가 바로 세상에서 이름난 진시황제이다.

진시황은 성이 영(嬴), 이름이 정(政)이며 기원전 259년에 태어나 기원전 210년에 죽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전국 7웅이 할거하며 패권을 다투던 전국시대 말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자초(子楚: 장양왕)로 진 소왕(昭王)의 손자이며 안국군(安國君: 효문왕)의 아들이었다. 당시 변화무쌍한 할거전쟁의 와중에서 각 제후국간에는 상호 제약과 외교적 전략의 필요로부터 흔히 자기의 아들이나 손자를 다른 나라의 인질로 보내어 상대방의 신임을 꾀하곤 하였다. 당시 진의 안국군에게는 자녀가 매우 많았다. 그 중 자초는 적자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었으므로 진나라 궁중에서 별로 중요시되지 못했다. 때문에 진과 조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자초는 조나라에 인질로 파견되었다.

그 무렵 조나라 한단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 안국군의 부인 화양부인 그리고 자초에 대한 투자)는 정치적 두뇌와 전략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여불위와 자초와의 만남은 역사적인 사건이 되고, 그의 애첩이었던 조희(趙姬)가 자초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난 아들이 바로 영정(嬴政)이다.

자초는 귀국한 후 진나라의 왕위를 계승하여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영정을 태자로 삼았다. 기원전 246년 장양왕이 병으로 죽자 나이 어린 13세의 영정은 진나라 왕이 되었다. 이때 정치의 실권은 여불위가 중부(仲父)로서 장악하고 있었다.

기원전 238년 영정이 22살이 되자 기년궁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손수 국정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영정은 노애를 살해하고 태후를 연금하였으며, 여불위도 파면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때 이사(李斯), 왕관(王綰), 왕전(王翦), 위료(尉繚), 몽염(蒙恬) 등이 있었다. 기원전 230년부터 기원전 221년에 이르기까지 진나라는 원교근공(遠交近攻)․분심이간(分心離間)․각개격파(各個擊破)의 책략으로 10여 년간의 가혹하고 처절한 전쟁을 거쳐 韓․趙․燕․魏․楚․齊 6개의 제후국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수립하였다.

천하를 통일한 영정은 자신의 공이 삼황(三皇)보다 높고 오제(五帝) 보다 크므로 삼황과 오제를 겸할 수 있는 용어로 황제(皇帝)라는 용어를 만들고 본인이 처음이므로 시황제라 하였다. 그리고 상․주(商周) 이래의 분봉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36군으로 나누어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중앙에는 3공(승상 어사대부 태위)․9경을 설치하여 직접 황제의 명령을 따르도록 했다. 그리고 문자의 통일(소전체와 예서)과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였으며, 화폐도 반량전(半兩錢)으로 통일하였다. 한편 흉노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전국시대의 장성을 수리하고 정리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치도(馳道)를 건설하여 유사시 신속하게 병력을 지방으로 보내어 진압하도록 하였으며,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옮겨 살게 하였으며, 모든 무기를 거두어 종거동인(鐘鉅銅人) 12개를 만들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순행도중 사구평대(오늘날 하북성 광종현 경내)에서 죽었다. 그리고 2세 황제로 호해(胡亥)가 등극하였다. 진시황의 장자 부소(扶蘇)의 사망과 몽염의 반란은 오히려 2세 황제 호해의 등극에 많은 의문점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고, 그것이 ꡔ사기 이사열전ꡕ에서 보여지는 진시황 사후 이세 황제 호해의 등극과정에서 보여지는 음모설이 나돈 것이 아닌가 한다. 이어 진승 오광(陳勝․吳廣)의 농민기의로 진제국은 붕괴되기 시작하여 15년만에 멸망하였다.




2) 병마용의 발견과 진제국의 군단

1974년 초봄, 섬서성 임동현 안채향 서양촌의 양배언(楊培彦)․양지발(楊志發)․양전의(楊全義) 등 농민은 마을사람들의 결정에 따라 자기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 남쪽 감나무숲 가운데에 관개용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여기서 세계 제8대 기적이라는 진시황 병마용이 발견되었다.

1호 갱(숙위군 주력): 이 갱은 길이 230m, 넓이 62m, 총 면적 14,260평방미터로 3개의 병마용 갱중 제일 큰 갱이다. 갱내에 6,000여 점의 토용․토마와 40여 승의 목조 전차를 안치, 전차와 보병을 혼합 편성한 장방형 군진이다. 이 군진은 선봉, 주력, 후위, 익위 등 4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갱의 가장 앞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3열 경장비 보병용으로 매열 68점, 도합 204점이 있다. 머리에 투구를 쓰지 않고 속발을 하고 다리에 행전을 매고 손에 궁노를 든 이들 토용은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선봉부대이다. 선봉부대 뒤에는 격리토담에 의해 11개 동․서 향의 통로로 나뉘어져 있는데, 38종대의 전차․보병이 서로 엇갈아 배열되고 있다. 이들 토용은 대부분 갑옷을 입고 정강이에 대발을 치고 손에 창․戈․긴 창․戟 등 병장기 및 소량의 궁노를 들고 있는데 중장비한 갑사에 속한다. 이들은 전차와 유기적으로 조합된 군진 주력으로 기세가 반석같고 무너뜨릴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 갱 내의 남․북 양쪽 변두리에는 무사용이 각각 남․북을 향해 1열로 서 있는데 군진의 좌․우익 측으로 그들의 임무는 적군의 ‘성동격서(聲東擊西)’를 방지하는 것이다. 군진의 제일 후단에는 대군과 등을 지고 서쪽을 향해 서있는 무사횡대로서 군진의 후위이다. 그들의 임무는 주로 적들의 배후기습을 방어함으로써 대부대 진군시 후방의 근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2호 갱(고대 군진): 2호 갱 군진은 1호 갱의 동단 북쪽에 위치하며 1호 갱과 약 20m 떨어져 있다. 갱의 평면은 곡척형(曲尺形)으로 동서 길이 124m, 남북 넓이 98m, 면적이 약 6,000평방미터이다. 시추 및 시굴자료의 추산에 의하면 이 갱내에는 전차에 메인 토마 350필, 기병용 안마 116필, 각종 무사용 900여점, 도합 1,400 여졈의 토용․토마와 89대의 목제 전차가 있는데, 보병․기병․전차 3개 병종을 혼합 편성한 곡진을 이루고 있다. 포진방법은 4개의 작은 진을 ‘ㅁ’자형으로 잇달아 구성했다. 첫 번째 작은 진은 노병(弩兵)진으로 곡형진의 최선봉에 위치, 도합 330여명의 弓弩手로 구성되었다. 그 중 약 160명은 갑옷 중장비를 한 궤사(跪射) 토용으로 8개 종대로 나누어 진중에 자리해 있다. 그 둘레에는 약 170여 점의 전포 경장비를 한 입사(立射) 토용이 진을 에워싸고 있다. 이렇게 하면 적이 쳐들어 올 때 서기도 하고 꿇기도 하면서 번갈아 사격할 수 있어서 화살이 빗발치듯한 정세를 조성하여 적들이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두 번째 작은 진은 곡형진의 우측에 위치, 64대의 전차로 구성, 전차마다 3명의 전사가 타고 있는데 1명은 어수(御手), 2명은 갑사(甲士)이다. 전차의 앞․뒤로 수행하는 예속 보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상대적으로 집중된 순 전차편대임이 분명하다. 세 번째 작은 진은 곡형진의 중부에 위치, 전차․보병․기병으로 구성된 진이다. 이 진은 19대 전차를 위주로 하고 260여명의 보병을 보조로 하며 동시에 8명의 기병을 후미로 하였는데 군진의 편성이 매우 원활하다. 마지막 작은 진은 곡형진의 좌측에 위치한 기병진으로 108명의 기병을 위주로 하고 6대의 전차를 보조로 하였다. 이들 기병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하며 머리에는 가죽모자를 쓰고 발에는 가죽장화를 신었으며 몸에는 흉부와 배부를 보호하는 짧은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활, 다른 한 손에는 고삐를 쥐었는데 날렵하게 보인다. 전마는 피둥피둥 살이 찌고 안장과 다래가 비치되어 있다. 이런 기병들은 전쟁판에 뛰어들기만 하면 행동이 번개처럼 빠르고 동작이 선풍처럼 날쌔며 불의에 출격하여 적을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하고 용감하게 돌진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을 넘나들며 적의 보급로를 차단해 버리는 신기한 위력을 보유하고 있다.

3호 갱(군막: 지휘소): 3호 갱은 1호 갱 서단 북쪽에 위치, 1호 갱과 25m, 동쪽의 2호 갱과 120m 떨어져 있다. 총면적은 500평방미터도 안되는데 갱 안의 면적은 가장 크고 병용이 제일 적다. 토용 66점, 전차를 끄는 토마 4필, 목제 전차 1승이 출토되었다. 갱 내의 무사용은 전투대형에 따라 편성된 것이 아니라, 남․북 2개 곁채에 분포되어 있는데 손에 의장병 병기인 동수(銅殳)를 들고 얼굴을 마주한 채 통로 양쪽에 정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지휘관을 보위하는 경위부대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이 갱에서는 또 제사․기원을 위한 살생후의 사슴뿔․짐승뼈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3호 갱이 보통 군진이 아니라 옛사람들이 일컫는 ‘군막(軍幕)’, 즉 현대인이 말하는 사령부의 소재지임을 알 수 있다.




※ 중국고대 사회에서의 군대를 좌․중․우 또는 상․중․하 3군으로 편성하는데 진나라 때에도 역시 이러하였다. 진나라 병마용 갱의 배치를 총괄하면 3호 갱의 지휘부, 1호 갱은 오른쪽에 있는 우군, 2호 갱은 왼쪽에 있는 좌군이다. 그러면 중군은 어디에 있는가? 고고학 탐사에 의하면 원래 1호 갱 중부 북측과 2호 갱 서측 사이에 또 용 갱이 하나 있었다. 이 갱은 형상이 규격에 맞고 깊이도 다른 3개 용 갱과 같다. 다만 갱내에 토용․토마와 기타 유물이 없고 침적토에 의해 메워져 있어 사람들이 소흘히 여기고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이 빈 갱이 바로 건설을 계획하였던 중군이었는데 진나라 말기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진왕조가 신속히 붕괴됨에 따라 미처 계획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견해다. 당시 진나라의 “병사 100 여만, 전차 1,000 여승, 전마 1만 여필에 달한다”는 3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생경하게 반영하였다.

현재 발굴된 진나라 병마용 갱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이미 검, 창, 극, 긴 창, 쇠뇌, 수(殳), 화살촉, 금구(金鉤) 등 10여종의 병기가 출토되었고, 총 수량이 무려 3만여 점에 달한다.




3) 청동거마(靑銅車馬)

진나라 병마용 갱이 발견된 후, 1978년 진시황릉 채색 동거마(銅車馬)의 출토는 진시황릉 고고학 사업에서 이룩한 또 하나의 중대한 성과이다. 이 동거마는 모두 2대로 원래 진시황릉 서쪽 20Km 거리의 한 부장 갱에 매장되어 있었다. 출토시 이 2대의 동거마는 길이 약 7m, 넓이 약2.3m의 대형 나무관 속에 앞뒤로 서쪽을 향해 놓여 있었다. 동거마의 크기는 진짜 말과 수레의 1/2에 상당하다. 비록 부장물이기는 하지만 망령의 여행용 진상물로서 실용물은 아니다. 그러나 수레의 구조 및 메는 방법은 완전히 실물을 모방하여 진짜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므로 황실대가의 축소판이며 재현인 것이다.

진시황릉 동거마는 출토시의 전후 순으로 고고학자들에 의해 1호 수레, 2호 수레로 불려지고 있다. 2대의 동거마는 모두 쌍륜 단채로 네 필의 구리말을 메웠지만 형상과 구조는 서로 다르다. 漢나라 채옹(蔡邕)의 ꡔ독단(獨斷)ꡕ에 의하면 이 두 동거마는 모두 제왕법가 중의 ‘오시부거(五時副車)’에 속하는 것으로, 즉 난가대오 중 제왕승여의 수행차량이다. 1호 수레(軺車)는 고거(高車) 또는 입거(立車)라고 하는데 당시 진시황 순행차대의 선도수레였다. 수레의 차체는 가로된 장방형으로 넓이 126Cm, 길이 70Cm이며 수레 위에는 122Cm의 원형 구리산이 세워져 있고 그 밑에는 장검을 찬 동제 어관용이 서있다. 수레 위에는 또 청동방패와 궁노(弓弩)․전통(箭筒)이 하나씩 놓여 있고 전통안에는 66개의 청동화살이 담겨져 있다. 4마리의 말 중 2마리는 참마, 2마리는 복마이고 동체는 흰 색을 칠하였고 키는 모두 90Cm, 길이는 약 110Cm이다. 머리에는 은재갈에 금은 장식끈이 드리워 있고 면부에는 금방울이 장식되어 있으며 목밑에는 장식용 술이 드리워져 있다. 두 참마의 목에는 금은고삐가 매어져 있는데 그 중 오른쪽 참마의 이마에는 이 수레가 황실전용임을 표시하는 깃발이 꽂혀 있다. 중간의 두 복마는 멍에를 쓰고 끌채를 메였다. 4마리의 말은 다 갈기를 자르고 꼬리를 묶어 놓았다. 머리를 쳐들고 우뚝 서서 기민하고 날랜 표정으로 멀리 앞을 내다보고 있는 품이 곧 네 굽을 안고 달려나가려는 듯 싶다. 2호 수레는 안거(安車), 속칭 온량거라고 한다. 동거마의 총기리이는 3.17m, 높이는 1.06m, 중량은 1,241Kg이다. 수레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고 평면은 ‘볼록’ 자형을 이루었다. 앞부분은 어관의 자리이고 뒷부분은 주인의 좌석이며 둘레에 간막이를 대고 앞에 횡목, 뒤에 문을 내었으며 좌우 양측과 앞에 창문을 각각 하나씩 내었다. 창문짝에는 투조한 작은 구멍들이 밀포되어 있어 햇빛을 가리우고 바람과 먼지를 막아주면서도 탑승자가 창문으로 바깥 경치를 구경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했다. 창문의 구조는 홈을 판 미닫이로서 여닫기에 매우 편리하다. 수레 전체가 타원형의 뚜껑 밑에 놓여있는데 수레는 네모지고 뚜껑은 둥글어 이른바 “여(輿)는 땅과 같아 네모지고 뚜껑은 하늘과 같이 둥글다”고 한 사서의 기록과 상합되며 중국 고대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소박한 자연관을 구현했다. 수레 앞 부분의 구리 어관용은 몸에 단검을 차고 꿇어앉은 자세를 취하였는데 높이 51Cm로 몸에 긴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할관을 쓰고 정신을 가다듬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모양이 매우 생동적이고 정교하다. 고귀한 신분으로 하여 득의앙양해 하면서도 또 늘 황제를 수반함에 호랑이에 동행하는 듯한 공포심을 품게 되는 황실 고급 노복의 정신면모를 그대로 표현하였다.

진시황릉 동거마는 현재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동거마 중 차형이 제일 크고 장식이 가장 화려하고 모방이 매우 정교하고 또 완전하게 보전된 동거마이다. 그 구조의 복잡함과 기예의 정심함은 이왕에 출토된 그 어떤 구리기구도 비교할 바가 못된다. 실로 중국 ‘청동의 으뜸’으로 칭송됨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동거마의 발견은 고대 수레제조, 특히 천자의 여복제도를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실물자료를 제공했다. 동거마를 통해 우리는 당시 진시황의 난가가 얼마나 화려하였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기에 당년 한고조 유방은 황제로 되기 전에 진시황의 순행차대를 보고 부러운 나머지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러할 지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8. 에피소드




1) 당왕조 황족들의 이배혼(異輩婚)

이배혼은 현재 난륜으로 배척되고 있으나 중국 봉건사회 최전성기의 당왕조에서는 이배 통혼이 오히려 돌출되고 있다. 황족 내부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은 다음 3가지 분야에서 보여지고 있다.




1. 황제와 후비(后妃) 사이에서 보여지는 예: 당 고종이 당 태종의 비인 무측천(武則天)과 당 현종이 수왕(壽王)의 비인 양옥환(楊玉環)을 취한 경우. 전자는 당 고종이 서모(庶母)를 취한 것이고, 당 현종은 자부(子婦)를 취한 경우이다. (그 외에 또한 당 태종과 당 고종은 신하 서견(徐堅)의 두 딸을 각각 취하여 부자가 자매를 취한 경우가 되었다) 당 숙종의 외손녀가 증손인 順宗황제에게 시집을 갔다. 당 대종 외손녀 곽씨가 대종의 증손 헌종 황제에 의해 후비가 되었다.




2. 공주가 시집을 가는 예: 당 태종의 딸 동양공주(東陽公主)가 고이행(高履行)에게 시집을 갔다. 고이행의 부친은 동양공주 어머니의 외숙이다. 태종의 딸 신성공주(新城公主)는 장손전(長孫詮)에게 시집을 갔다. 장손전은 황후 장손의 당질로 공주의 남편은 자기와 내외종간이다. 현종의 딸 태화공주(太華公主)는 양기(楊奇)에게 시집을 갔다. 태화공주가 죽은 후 만춘공주(萬春公主)가 또 그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양기는 양옥환의 사촌오빠이다. 덕종의 딸 정국목공주(鄭國穆公主)는 장무종(張茂宗)에게 시집을 가고, 순종의 딸 양양공주(襄陽公主)가 또 무종의 동생 張克禮에게 시집을 갔다. 즉 형제가 고모와 조카를 취한 경우이다. 중종의 딸 안정공주(安定公主)가 위탁(韋濯)에게 시집을 갔다. 위탁은 중종의 황후 위씨의 재종동생이다. 재종 외당숙에게 시집을 간 경우이다.




3. 황족과 다른 집안과의 관계: 양씨가족과 황족에서 볼 때, 양사웅(楊士雄)의 아들 양사도(楊師道)는 당 고조의 딸 장광공주(長廣公主)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손자 양사경(楊思敬)도 고조의 딸 안평공주(安平公主)에게 장가를 들었다. 숙질이 자매에게 장가를 간 상황이다. 양사웅의 손자 양예지(楊豫之: 양사도의 아들)는 당 고조의 손녀 수춘공주(壽春公主: 이원길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고, 그리고 양예지의 사춘누이 양씨가 또한 원길에게 시집을 갔다. 즉 양예지와 사춘 누이 양씨가 사위와 장모의 관계가 되었다.

양사도와 이원길은 삼중의 다른 관계가 됨. 양사도가 당 고조의 딸인 장광공주에게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이원길은 양사도의 처남이 되고, 또한 양사도의 조카가 원길의 처가 되었으니 조카사위가 되고, 양사도의 아들인 양예지가 수춘공주(이원길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니 사돈관계가 된다.




⇒ 이처럼 당왕조에서 이배혼이 많았던 이유에 대해 당왕조의 황족이 선비화 정도가 점점 심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송대 주희(朱熹)는 ꡔ주자어류(朱子語類)ꡕ에서 “唐源流出於夷狄, 故鬧門失禮之事 不以爲異”라 했고, 어떤 사람은 당왕조가 위진남북조 시기의 이배혼 유풍을 전승하였기 때문에 당왕조 이배혼이 형성된 상황이라고도 한다.




2) 진시황제의 능은 왜 동쪽을 향하면서 서쪽에 누워있는가?

진시황제 능은 임동현(臨潼縣) 동쪽 5Km에 있으며, 남쪽의 여산(驪山)에 의지하고 북쪽으로 위수(渭水)에 임하고 있다. 진왕 정은 13세에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능을 조영하기 시작하여 36년이 지나 완성되었으며,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여 통치자의 후장(厚葬)의 풍습을 낳게 하였다. 중국 역대 제왕의 능은 대부분 남쪽을 향하면서 북쪽(坐北朝南)에 누워있다. 그것은 죽어서도 군주로서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진시황의 능은 좌서향동(坐西向東)하고 있는 것은 왜 그러한가? 역사학계의 대개 다음과 같이 3가지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1) 진시황의 능이 좌서향동(坐西向東)하고 있는 것은 진․한지제(秦漢之際)의 예의내용과 관계가 있다. ꡔ禮儀 土冠禮ꡕ “認主人東西(面向東)答拜, 乃宿賓” ꡔ사기 항우본기ꡕ의 홍문연(鴻門宴) 연회 내용중 “項王 項伯東向坐 亞父南向坐. 沛公北向坐 張良西向侍.” 이것은 모두 주인은 동쪽으로 향하면서 앉아 있는 실례이다. 그 시대에 황제(秦始皇), 제후 상장군(項羽)에서 보통의 사대부 가정에 이르기까지 주인은 모두 서쪽에 앉아서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진시황제는 생전 천하의 주인이며 사후 능묘의 매장도 坐西向東이다.

2) 진시황의 웅대한 뜻과 관계가 있다. 秦은 ‘전국7웅’ 중 서쪽에 치우쳐 있다. 진왕 嬴政이 능묘를 동쪽에 건조한 것은 六國을 정복하려는 결심을 표시하는 것이다. 후에 진이 육국을 통일한 이후 진시황은 여전히 같은 방향을 포진한 것은 사후에도 동방의 육국을 주시하겠다는 것이며 그들의 전복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3) 진시황이 동쪽을 향해 누워있는 것은 천하를 웅거하고 있는 위풍 이외에도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생전에 불사의 땅을 찾지 못했지만 사후에라도 찾기 위함이다. 즉 신선을 찾아 천국으로 인도되기 위함이다. 진시황의 일생을 보면 서불(徐福)을 동쪽으로 보내 황해를 건너가 봉래 영주에서 선경(仙境)을 찾도록 하고, 본인도 여러번 순행하여 동쪽으로 갈석(碣石)에 임하고 남쪽으로는 회계에 이르고 낭야와 지부(芝罘)일대에 있다가 돌아왔고, 동쪽의 仙境을 향해 바라보았다. 서불이 한 번 가고 나서 돌아오지 않고 자신도 여러 번 동쪽으로 순행을 하였지만 선경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묘도 동쪽을 향해 있는 것은 혼이라도 선경으로 가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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