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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7 18:46:0827 
3. 봉건론(封建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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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봉건론(封建論)
- 중당 때의 문인 유종원(柳宗元)이 군현제의 이점을 논하다. -

진시황 이래 1천 년 후에 태어난 유종원(柳宗元)이 처음으로 봉건제를 타파하고 시행한 군현제에 대해 논했다.
자가 자후(子厚)이고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으로 당 대력(大曆) 8년인 서기 773년에 태어난 유종원은 21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33세의 나이에 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이 되었다. 당 정원(貞元) 21년인 그 해 정월에 덕종(德宗)이 죽고 순종(順宗)이 즉위하자, 유우석(劉禹錫), 왕숙문(王叔文), 왕비(王伾) 등과 함께 정치개혁운동에 가담했다. 개혁운동의 목적은 환관이나 그들을 이용하는 귀족의 세력을 누르고 당나라의 정치를 쇄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의 급진적인 개혁운동은 보수파의 저항에 부딪쳐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다가 결국은 순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태자에게 양위하고 황제의 자리에 물러나자 개혁파는 모두 물러나고, 유종원은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후 다시는 중앙에 돌아오지 못하고, 43세 때에는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옮겨져 47세로 임지에서 죽었다. 유종원은 봉건사회의 구조에 대하여 의문을 가진 합리주의자였다. 유종원은 진시황이 봉건제를 타파하고 실시한 군현제의 잇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자연계는 과연 처음이 있었는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람은 과연 어떻게 처음 태어났을까?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사실에 가까운 주장을 했는가? 나는 처음이 있었다는 주장이 사실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밝힐 수 있겠는가? 나는 봉건제의 설명을 통해 그것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봉건제는 옛 성왕들인 요(堯)임금, 순(舜)임금, 우왕(禹王), 탕왕(湯王), 문왕(文王), 무왕(武王)을 거쳤으나 그 중 누구도 없애지 못한 제도다. 없애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형세가 그렇게 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형세가 조성된 때가 아마도 자연계의 원시상태였을 것이다. 그런 형세가 원시상태가 아니라면 봉건제가 발생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봉건제의 시행은 옛 성인들의 본마음이 아니었다.
인류가 원시상태에서 만물과 함께 생겨났을 때는 온 세상은 들풀과 수목으로 빽빽하게 뒤덮여있었고 들짐승들은 무리를 지어 사방으로 뛰어다녔으나 사람은 싸우거나 물어뜯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털이나 날개도 없어 추위를 견디거나 먹을 것을 얻을 수도 자신을 지킬 수도 없었다. 그래서 순경이 말했다.
「사물을 빌려 이용해야만 하는 존재는 반드시 서로 다투게 되고, 다툼이 그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아가 그의 명을 따랐다. 지혜롭고 사리에 밝은 사람에게 복종하는 자가 많이 생기게 되었으나 반대로 옳은 일을 일러주어도 잘못을 고치지 않은 자들에게는 반드시 고통을 안겨주어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군장이 서고 형법과 정치가 발생했으며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었다. 다시 집단이 나뉘어져 다투게 되었는데 그 규모는 커지고 상태는 더욱 치열해졌다. 그래서 세상은 군대와 덕치가 필요해졌다. 또 더욱 큰 군대와 덕을 지닌 자들에게 모여든 여러 집단의 우두머리들이 명을 받들어 그들의 백성들을 안정시켜 마침내 제후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 다시 다툼은 더욱 커지고 더욱 큰 덕을 지닌 자가 나타나면 제후들은 찾아가 명령을 따르고 자신의 봉국을 안정시켜 방백(方伯)과 연수(連帥)가 출현하여 투쟁의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다. 그리고 더 큰 덕을 지닌 자가 나타나자 방백과 연수와 같은 무리들이 달려와 명을 받들어 그들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이에 천하는 한 사람의 통치자 아래 모이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아전이 생기고 현장이 생겼으며 현장이 모여 제후들을 받들었으며 제후들은 다시 방백이나 연수를 받들고 연수와 방백들은 천자를 따랐다. 위로는 천자로부터 아래로는 아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은덕을 베푼 사람이 죽게 되면 백성들은 그들의 자손을 받들어 수령으로 받들게 되었다. 그래서 봉건제는 성인들이 지닌 본마음이 아니었고 단지 형세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제도인 것이다.
무릇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사적은 먼 옛날에 일이고 주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문왕과 무왕의 사적이 상세히 전해지게 되었다. 주나라가 천하를 얻게 되자 마치 박을 타듯이 땅을 찢어 다섯 등급의 작위를 설치하여 많은 제후들에게 나라를 세우게 했다. 그래서 발이 닿는 곳에는 별이 퍼져있듯이 천하 사방에는 제후들이 포진하게 되었고 제후들은 다시 구르는 바퀴살이 살통으로 모이듯 왕실에 복종했다. 모두 함께 와서 조근을 행하고 회동했다가 흩어져서는 각기 자신의 성을 지키면서 주나라의 번신(藩臣)이 되었다. 그러나 이왕(夷王)의 대에 이르자 예절은 깨어지고 존엄은 손상되어 천자가 몸소 전당에서 내려와 제후들을 맞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선왕(宣王) 때에 이르러 중흥과 복고의 덕에 의지하여 남정북벌을 행하여 위세를 떨치기는 했으나 결국에는 노나라의 후사조차도 정할 수 없었다. 여왕(厲王)과 유왕(幽王)의 학정으로 인해 쇠약해진 주왕실은 견융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동쪽으로 옮겨 스스로 제후의 대열에 같이 서게 되었다. 이어서 구정(九鼎)의 무게를 물어 천하의 주인자리를 넘본 자도 생겼고, 천자의 어깨를 활로 쏘아 맞춘 사건도 발생했다. 주왕실의 사자를 납치한 제후도 있었으며 진(晉)나라의 일개 대부인 조앙(趙鞅)의 강박으로 장홍(萇弘)을 주살해야 했던 일①도 발생했다. 이로써 천하는 어지러워지고 제후들에게는 천자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게 되었다. 주나라는 권위를 잃은 지 오래고 단지 제후들 위에 헛된 이름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이는 마치 꼬리가 너무 커져서 흔들 수 없을 정도로 제후가 너무 강성해지게 만든 잘못 때문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천하는 12개의 나라로 나뉘어 졌다가 다시 7개의 나라로 합쳐졌으니 권위는 신하들이 세운 나라가 차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왕실은 제후의 나라에 봉해졌던 진(秦)나라에 의해 망했다. 즉 주나라가 망한 원인은 바로 봉건제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도회(都會)를 찢어서 군현을 설치했고 제후들을 폐하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천하의 험요(險要)를 점거하고서 지대가 높은 함양에 도성을 세우고 전국을 통제하고 형세를 장악했다. 이것이 진나라가 시의에 맞게 시행한 군현제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천하에 대란이 일어났는데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수많은 백성들은 노역에 빈번히 동원되고 형법의 적용은 날이 갈수록 잔혹해졌으며 나라와 백성들의 재화는 낭비되어 모조리 소진되었기 때문이었다. 호미와 곰방메를 어깨에 메고 변경의 수자리로 내몰리는 형도들은 서로 눈짓으로 모여 연합하더니 큰소리로 분함을 외쳐대며 무리를 이루어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그때 나라에 반기를 든 백성들은 있었으나 반역을 꾀한 관리들은 없었던 이유는 아래의 백성들은 진나라 황실을 원망했고 위의 관리들은 진나라의 조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천하는 서로 합세하여 진나라의 군수와 현령들을 살해하거나 범하는 일이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천하가 어지러워진 원인은 백성들의 원망한 샀기 때문이었지 군현제가 잘못 된 것이 아니었다.
이어서 천하를 차지한 한나라는 진나라의 군현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주나라의 제도를 회복시켜 천하를 나누어 황실의 자제나 친척들을 제후왕으로 세우고 공신들을 후(侯)에 봉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은 제후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위험에 빠진 생령들을 구하거나 상처를 입은 백성들을 보살피느라 한시도 쉴 틈이 없이 바삐 뛰어다녀야 했으며 급기야는 한고조는 평성(平城)에서 흉노에 의해 포위되어 곤경을 치르고 다시 전투 중에 흐르는 화살에 맞아 병을 얻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에 3대에 이르도록 국세를 회복하지 못한 원인은 모두 주나라 제도를 회복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어떤 모신이 계책을 내어 제후들의 세력을 분산시키고 약화시켜 스스로만을 지킬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처음 시작할 때 봉건과 군현을 반반씩이었지만 반역하는 제후국은 있었어도 반란을 일으킨 군현은 없었음으로 진나라의 제도가 옳았음이 스스로 밝혀졌다. 한나라를 계승한 다른 왕조의 황제들은 비록 백대가 지나더라도 군현제가 봉건제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가 일어나자 군현제를 채택하여 지방에 관리를 두어 다스리게 한 것은 실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포악하고 교활한 자들이 때때로 반란을 일으켜 주현(州縣)을 침탈했는데 그것은 주현을 설치한 데에 있지 않고 지방군대를 장악한 절도사에 있었다. 그래서 당나라 때 군대의 장령이 반역을 일으켰지 주현의 장관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군현제는 폐지하면 안 되는 선진적인 제도다.
혹자는 말한다.
「봉건제에 의해 피봉된 제후나 후는 그 봉지를 자신의 사사로운 재산으로 여겨 관하의 백성들을 자식으로 대하고 그 지방의 풍속에 맞는 제도로 정치를 행하여 비교적 용이하게 백성들을 교화시킬 수 있지만, 군현제에 의해 임명된 주현의 지방관리들은 봉록을 탐하고 위에 잘 보여 진급만을 생각하며 무사안일한 자세로 백성들을 대할 것이니 어떻게 정치를 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문제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제후들은 교만하고 재물을 탐내고 전쟁을 좋아하여 대체로 어지러운 나라가 많았고 정치가 제대로 행해지는 나라는 적었다. 제후들을 거느린 패주(霸主)는 어지러운 나라의 정치를 개변할 수 없었고, 천자는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제후국의 군주들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자기의 봉지를 자신의 땅으로 여기고, 백성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진정으로 생각하는 군주는 백에 한 명도 없었다. 그런 폐단은 봉건제가 원인이지 정치가 잘못되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주나라 때의 제도가 그랬다.
진나라의 사적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조정은 백성들을 훌륭하게 다스릴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지만 군현에게 전권을 이양하지 않았으며 중앙의 정무대신들은 지방장관들에게 스스로 시정을 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았다. 그러니 군현은 군현제의 장점을 발휘할 수 없었고 군수나 현령들은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없었다. 오로지 잔혹한 형벌과 번잡하고 무거운 노역만을 부과하여 만 백성들의 원성만을 샀을 뿐이었다. 진나라의 잘못은 시정에 있었지 군현제 자체에 있지 않았다. 진나라의 제도가 그랬다.
한나라가 서자 천자의 정령은 군현에서만 시행되었지 제후국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자는 단지 군현의 지방장관만을 통제했지 제후왕들은 다스릴 수 없었다. 제후왕들이 어떤 황당한 짓을 저질러도 천자는 그들을 소환하거나 바꿀 수 없었다. 제후국의 백성들의 모두 제후왕으로부터 화를 입고 침탈을 당해도 조정은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시킬 수 없었다. 단지 제후왕들이 반란을 도모할 때까지 기다려서야 비로소 그들을 체포해서 귀양을 보내거나 혹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그들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당시에 그들의 죄악이 미처 드러나지 않은 정황 하에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잇속을 채우고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거나 권세를 이용하여 저지르는 전횡으로 백성들에게 엄중한 상해를 입히고 있음에도 조정은 그들을 어찌할 수 없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군현에 이르게 되면 시정은 투명하고 깨끗하게 시행되어 사회는 안정되었다. 내가 이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사례 때문이다.
한문제는 맹서(孟舒)의 훌륭함을 전숙의 천거를 통해서 알 수 있었고, 풍당을 통해서 위상(魏尙)이 억울하게 면직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한선제(漢宣帝)는 황패(黃霸)가 깊고 신중한 통찰력으로 법을 집행한다는 사실을 들었고, 한무제는 급암(汲黯)이 간약(簡約)과 청정(淸靜)으로 직무를 훌륭히 수행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황패는 승상이 되었고, 맹서(孟舒)는 태수로 복직되었으며 위상은 감옥에서 나와 원래의 장군자리로 돌아갔다. 심지어는 급암에게는 누워서 지내면서 한 지방을 다스리라는 명을 내릴 수 있었다. 관리가 죄를 지으면 파면할 수 있었고, 재주가 있으면 상을 내릴 수 있었다. 아침에 임명한 관리도 만일 그가 정도를 걷지 않으면 저녁 때 파면할 수 있었다. 저녁 때 임명한 관리가 밤 사이에 정도를 걷지 않고 기율을 문란하게 만들면 그 다음 날 아침에 파면할 수 있었다. 만일 한나라가 천하의 성읍 전부를 제후왕에게 분봉해서 그들이 바로 백성들에게 위해를 끼친다 해도 조정은 그들에 대해 근심만을 할 수 있을 뿐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맹서나 위상은 그들 방법대로 시정을 행할 수 없었을 것이고, 황패나 급암도 그들이 방식대로 백성들을 교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만일 제후왕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옳은 길을 일러주면 면전에서는 받아들이는 척 하다가 물러가서는 또다시 법령을 위반했다. 그래서 정령을 발하여 그들의 봉지를 삭감하면 제후국들 끼리 서로 내통하여 연합전선을 결성하고 음모를 꾸며 눈을 부라리면서 불시에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설사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해도 조정은 그들의 봉지를 반으로 삭감할 수 있을 뿐이고, 제후왕들은 봉지만 반으로 삭감되면 그뿐 일반 백성들은 오히려 그들로부터 더 심하게 착취를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제후왕들을 완전히 폐지하는 제도가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나라 때의 정치에서 봤듯이 전국에 군현제를 시행하고 지방장관을 임명하는 제도를 중단하면 안 되는 일이다. 군대를 잘 통제하고 지방장관을 잘 선발하면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다.
혹자는 또 말한다.
「하(夏), 상(商), 주(周), 한(漢) 4대는 봉건제를 시행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고 진나라는 군현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빨리 망했다.」
이는 정치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의 말이다. 한나라를 승계한 위(魏)나라는 봉건제를 시행하여 귀족들에게 작위와 함께 분봉했고, 그 뒤를 이은 서진(西晉)은 옛날 봉건제만을 답습하고 제도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이 두 왕조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대단히 짧은 시간 안에 망했지 오랫동안 왕조가 계속되었다는 말을 듣지 모했다. 지금의 당왕조는 위진(魏晉)의 잘못을 바로 잡아 개변을 했기 때문에 사직은 이미 2백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고 국가의 기업은 더욱 강고해지고 있는 이유는 제후왕을 폐하고 군현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또 다른 혹자는 말한다.
「은(殷)이나 주(周)나라를 세운 임금은 성왕(聖王)이기 때문에 그들이 봉건제를 바꾸지 않고 시행했으니 후대의 우리가 그 문제를 논의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
그 사람의 말도 틀렸다. 은(殷)과 주(周) 두 왕조 때 봉건제를 바꾸지 않은 이유는 부득이해서였다. 당시 3천이 넘은 은나라로 귀의한 제후의 힘을 빌려 하나라를 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탕은 그들을 제후의 자리에서 폐할 수 없었다. 또한 8백이 넘는 주나라로 귀의한 제후들의 힘을 빌려 상나라를 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나라 역시 그들을 폐할 수 없었다. 옛 제도로 안정을 취하고 습속으로 삼은 이유는 상탕과 주무왕이 어쩔 수 없어서 그리 한 것이다. 무릇 어쩔 수 없이 한 제도는 공도(公道)가 아니다. 제후들의 힘을 자기를 위해서거나 자기 자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한 행위이다. 그것은 공도가 아니라 사적인 일이었다. 진나라가 그 제도를 바꾼 이유는 그것이 위대한 공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사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황제의 개인적인 권위를 공고하게 구축하기 위해서였고 천하의 만백성들을 자기 1인 밑에 신하로 두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천하를 위한 공도를 진나라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만은 사실이다.
천하의 상도에 따르면 선정을 행하여 나라를 안정시켜야만 비로소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현명한 사람이 위에 있고 불초한 사람이 밑에 있어야만 비로소 나라는 맑아지고 안정된다. 봉건제는 군장들이 세세대대로 세습하여 통치하는 제도이다. 세습제로 나라를 통치할 경우 언제나 현명한 사람이 윗자리에 있고 불초한 사람은 아랫자리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세습제는 백성들이 결국 태평성대를 만날지 화란을 당할지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제도다.
혹시 어떤 사람이 장차 국가에 이로운 일을 행함으로써 백성들을 관심사를 하나로 만들려고 해도 세세대대로 그들의 봉지를 세습하여 통치하는 대부들이 존재하여 제후국의 전 국토를 모두 차지하고 말 것이다. 그때는 성현이 출현한다고 해도 그가 발을 디딜 수 있는 땅은 한 뼘도 없을 것이다. 봉건제의 속성은 원래 그런 것이다. 어찌 성인이 그런 제도를 만들었겠는가? 그래서 나는 말한다.
「봉건제는 성인의 본뜻이 아니고 단지 형세가 그랬을 뿐이었다.」』

주석
①기원전 492년 당진국의 집정대신 조앙(趙鞅)이 주경왕(周敬王)에게 압력을 가해 자신의 정적을 지지하던 주왕실의 대부 장홍(長虹)을 죽이도록 강박했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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