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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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4-11 09:43:045146 
사마천과 EH Carr의 역사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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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마천의 <사기>와 에드워드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1) 역사를 보는 눈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21세기 역시 또 한 세기가 지나면 역사가 된다. 수학적으로 선이 점들의 집합이라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은 역사라는 선 위의 한 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사람들마다 역사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생각하는 관점이 다양한 것도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사람이 오늘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고 집에 돌아온 사건, 이것은 과연 역사인가? 그 개인이 등굣길에 경험한 교통사고는 과연 역사인가? 또한, 흔히들 김대중 전(前)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것을 역사적 만남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과연 역사인가?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외치는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입양아와 그 친부모가 만난 것은 과연 역사인가? 우리는 이와 같은 물음에 명확한 해답을 할 수 없다.




근대 역사학의 확립자 랑케는 역사가는 모름지기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의 본래 상태를 밝히는 것을 늘 과제로 삼아야 하며, 오직 역사적 사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역사적 사실들 그 자체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크로체는 이와 같은 견해를 반대하는 역사 인식론을 주장했다. 그는 모든 사건은 현대의 역사이기 때문에, 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먼 시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역사가 실제로 서술하는 것은 현재의 요구 및 현재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하여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본다는 데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보다는 역사가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렇듯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는 학자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관을 구성하는 공간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서양의 고전을 통해서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알아볼 수 있다. 동양 역사서의 전범으로 알려져 있는 사마천의 <사기>와 서양의 역사 인식론에서 최근에 가장 주목을 받는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그런 의미에서 시대와 동서양을 초월하는 좋은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를 언급하기 전에 괴테가 파우스트의 말을 빌려서 언급한 다음 내용을 화두로 던져 본다.

“역사라는 것은 한번 보기만 해도 도망치고 회피하고 싶은 것, 쓰레기통이 아니면 폐물 창고와 같은 것, 꼭두각시의 입놀림에나 맞을법한 것, 그럴싸한 격언이 붙어 다니는 그저 거창한 사건에 불과하지.”

과연 역사란 것이 그런 것인가? 그렇게 폄하될 수 있는 것인가? 괴테의 독설을 듣고 있노라면 사마천의 <사기>는 사기(詐欺)에 가까운 것인가 허구에 가까운 것인가? 아니면 인간 탐구를 위한 위대한 역사서인가? 그런데 2000년 전의 <사기>를 오늘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괴테의 발언을 무색케 한다. 아버지의 유언을 계승하고자,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을 올바로 평가하여 후세에게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자 온몸을 던진 사마천에게 그러한 부당한 평가는 너무나 가혹하다.




(1) <춘추>의 정신을 계승한 <사기>




사마천은 왜 이토록 방대한 역사서를 쓸 수 있었으며, 쓰고자 했는가? 그 내적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개인적 차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역사적 차원이다.




역사적 차원에서 보면 진이 멸망하고 한이 성립되면서 각 정권이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배출되던 그 시기는 사마천이 시야를 넓히고, 역사 인식을 다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 셈이다. 그리고 한 대에 이르러서 진대에 일어났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사라진 책들을 복원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것 역시 사마천에게는 사기를 쓸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그의 아버지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이 되어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한무제의 무시로 화를 못 이겨 죽게 되었다. 아버지 사마담은 자신이 쓰지 못한 역사서를 서술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고, 이에 자극을 받은 사마천은 비로소 <사기>를 저술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형과 역사적 고적들을 답사하는 경험을 했고, 타고난 박학다식함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사기>라는 역사서를 쓸 수 있는 개인적 소양은 충분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면서 더욱더 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더욱 <사기>를 쓰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이릉의 화’에 연루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흉노족의 포로가 되어 항복한 이릉을 처벌하고자 주장한 조정의 신하들에 맞서 이릉을 변호한 죄로 천자가 노하게 되고, 그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에 처해지게 되었다. 일반 사대부들은 궁형을 받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 그 치욕을 감수하면서 <춘추>를 집필하기 위해 살아남은 것이다. 주위의 많은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관으로서의 사명감과 아버지에 대한 유언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전략) 유왕과 여왕 이후에 왕도가 무너지고 예악이 쇠퇴하고자 공자는 사라진 옛 전통을 다시 복구하고 정리하여 <시경>, <서경>, <춘추>를 지었기 때문에 지금도 학자들이 그것을 본받고 있다. <춘추> 이래 400년이 흘렀고 이제 한나라가 흥하여 천하가 통일이 되었으나, 나는 태사로서 현명한 군주,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천하의 역사 기록이 폐기될 것 같아 두렵구나, 너는 이것을 명심해라“

그것은 공자의 <춘추>를 계승하는 일이었다. 천하의 왕들에게서는 버림을 받은 공자는 현실에서 정의를 세울 수 없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춘추>를 지어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이러한 공자의 역사의식을 계승하고 있었고, 그가 이루지 못한 것들은 자식인 사마천이 이어받도록 했던 것이다.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을 제대로 평가하여 후손들에게 남겨 주는 일은 사관의 신분을 지닌 사마천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자신의 삶속에서 겪은 처절한 고통, 갈등과 방황,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고귀한 목적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노력이 결국 <사기>라는 위대한 역사서를 탄생 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2) <사기> 구성의 특징




<사기>는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본기(本紀)’는 제왕의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1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역대 최고의 집권 인물, 즉 제왕의 전기(傳記)로서 사건을 연대별로 나누어 기술했다. 제왕은 최고의 정권 대표자인 만큼 한 시대에 일어났던 대(大) 사건은 그와 관련된 일들이다. 그러므로 제왕의 전기를 통해서 그 시대의 전국적인 사건들을 편년체(編年體)로 읽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제왕의 역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 하면, ‘본기’에는 ‘항우본기’나 ‘여후본기’처럼 제왕이 아니었던 사람들의 전기들도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기’에서는 반드시 제왕의 역사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통치력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을 정권 담당자로 보고 역사적 인물로 다루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표(表)’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시간적, 공간적 연관성을 도표화한 연대기로,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은 봉건 제국에서 일어난 즉위, 전쟁, 폐위, 사망 등을 기록한 연대란으로 성립되어 있다. 사마천은 ‘표’에서 가까운 시기의 사건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다루고, 먼 시기의 사건에 대해서는 소략하게 다루는 일관된 방법론으로 서술했다. 또, 구체적인 요점을 간략하게 간추렸으며, 전후 관계를 분명히 밝히는 방식을 통하여 복잡다단한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은 표의 활용은 기전체(紀傳體)가 지닐 수 있는 복잡한 사건들의 파편화를 면할 수 있다. 또한, 표 앞에 쓰여 진 짤막한 서문에는 자료의 완전함이나 정확함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한 것도 있고, 주의멸망, 진의 흥망, 한의 급격한 부흥, 주한의 봉건 제도, 흉노와의 관계에 대한 짧은 철학적 논문도 있다. 즉, ‘표’를 통해서 읽을 수 있는 역사의 변화를 짤막한 서문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서(書)’는 특정한 사회 현상을 개별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천하의 문물제도에 관한 내용과 그 발달 및 원리를 기술하여 모두 8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정의 제도, 천문, 지리, 예술, 경제 등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은 역사를 단순한 권력 투쟁과 왕조의 흥망성쇠와 같은 사건들의 과정뿐만이 아닌, 제왕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수단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다라서, 각 시대의 차이는 바로 이와 같은 원리와 수단의 차이에 있으며 정치의 성패 역시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어떤 원리와 수단을 어떻게 구현하느냐가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의 구체적인 표현인 문물제도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문물제도를 8가지의 ‘서’로 나누어 논한 것이다. 이를 통해 사마천은 좁은 의미의 정치사에서 문화 전반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정치사로 역사를 확대시켰다.




‘세가(世家)’는 정치 질서에서 제왕의 다음 위치에 있는 제후들의 사건을 시대 순으로 정리한 것으로, 총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가’는 봉건 제후들과 개국 공신들 같은, 주로 특수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의 전기이자 나라별 역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봉건 제후들의 기록에는 진섭세가와 공자세가와 같은 일시적인 정치적 지배자나 사상가에 대한 기록도 들어 있다.




사마천 자신은 ‘태사공자서’ 에서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둘러싸 돌고, 서른 개의 수레바퀴살은 그 중심축을 향해 있어 그 운행이 영구히 그치지 아니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충성스럽고 신뢰할 만한 신하는 주군의 수족이 되어 참된 도덕 정치로써 주군을 섬긴다. 그들에 대해 30세가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라는 것은 오행설에 따라 하늘을 동, 서, 남, 북의 네 궁으로 나누고 다시 각 궁을 일곱 수로 나눈 것이다. 서른 개의 바퀴살은 바퀴의 중심부로 모여 바퀴통에 집결하는 것이다. 즉, 모든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여 돌고, 수레바퀴의 바퀴살이 중심부오 모여 별과 바퀴의 운행이 끝이 없듯이, 군왕을 도와 그 수족이 되는 신하를 별자리나 바퀴살에 비유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본기’와 ‘세가’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본기’는 북극성이나 바퀴통에 해당하고, ‘세가’는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나 서른 개의 바퀴살에 해당하는 것이다.




‘열전(列傳)’은 제왕과 제후를 둘러싸고 역사를 이끌어 가는 많은 영웅호걸들의 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총 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열전’은 <사기>의 가장 뒤에 있으며 가장 긴 부분에 해당한다. 사마천은 넓은 의미의 정치를 창조하여 움직일 수 있는 주체에 대해서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 주체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제왕이나 제왕의 권력을 공간적으로 나눠 맡은 제후왕이 아니며, 정치, 경제, 문화와 같은 각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생을 영위하는 구체적인 개인, 즉 인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열전’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역사를 읊은 것이다. 또 ‘열전’은 단순한 개인의 생애만을 소개하기보다는 ‘본기’, ‘세가’, ‘표’에서 전개되는 사건의 흐름과 서에 서술된 문화 전반의 변천을 그 주제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의 인간보다는 인간의 행동과 의지를 통한 역사의 이해라는 관점으로 설정되어 있다. 열전에 한 시대의 각 분야나 요소를 상징할 수 있는 개인의 가장 상징적인 행적이 주로 서술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마천은 이 ‘열전’에 대해서 “의(義)를 도와서 뛰어나고 스스로 때를 잃지 아니하여 천하의 공명을 세웠으므로 70권의 ‘열전’을 쓴다.”고 했다. 70권의 ‘열전’은 인간이 곧 역사의 주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열전’은 사마천의 문장을 가장 빛나게 하는 부분으로, 시대정신 또는 그 시대의 인간상으로 상징되는 인물을 부각시켜 독자로 하여금 시대와 인간을 탐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열전 속에서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이 운명과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고 ,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괴로움과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더불어 그것을 공감하거나 또는 거기에 위화감을 느껴서 역사의 세계를 자기의 세계에 비추어 볼 수 있는, 역사를 읽는 효용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처럼 <사기>에서는 열전의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부터 사마천의 역사가적인 안목까지 느낄 수 있다. 또 대상 선정 후의 서술을 통해서는 그의 인간 탐구자적인 지혜와 예술가로서의 문장의 힘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중국의 전통적 지식인들에게 사기가 단순한 역서사거 아닌 문학으로서도 높이 평가되었던 점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열전의 인물이 결코 사마천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문학과는 다르며, 허구를 가미한 역사 소설과도 물론 다르다. 열전은 실제로 존재했던 상징적인 인간형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서술되었다는 점이 바로 문학이며 예술인 것이다.




(3) <사기>의 역사판




사마천은 어렸을 때부터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다. 열 살 이전에는 직접 논을 갈고 목축을 했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사마천이 민간 생활과 하층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생활을 잘 이해했던 것도 모두 이러한 점과 관련되어 있다.




사마천은 ‘화석열전’에서 “부유함이란 사람의 본성이라 배우지 않아도 모두들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의라는 것은 재산이 있으면 생기고 없으면 사라지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많은 예를 들어 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직업, 귀천, 현명하고 우매함, 입장의 차별을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부와 이익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태사공자서’에는 “벼슬이 없는 평민들은 정치를 방해하지 않고 또 백성들의 생활에 해를 주지 않는 상황에서 때를 맞추어 거래하여 재산을 증식하였다. 이러한 점은 지혜로운 자들도 얻을 바가 있는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사람들이 재산을 모으는 것을 격려하였다.




또한, ‘유협열전’에서는 “유협은 그 행위가 반드시 저의에 의거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의 말에는 반드시 신용이 있었고 행동은 과감했으며 이미 승낙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하였다. 또한 자신의 몸을 버리고 남의 고난에 뛰어들 때에는 생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고, 그 공덕을 내세우는 것을 오히려 수치로 삼았다. 아마 이 밖에도 찬미할 점이 많을 것이다.”, “평민들 중의 무리로서 가령 사람에게 베풀고 구함에 허락한 일을 이행하며 천리 먼 곳에서도 의리를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의 비난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들의 장점이며 또 그것은 아무렇게나 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유생이나 은사들을 비판하고 백성들의 무리 중에서 의협심이 강한 사람을 찬미하였다.

이렇듯 백성들에 대해서는 따뜻한 눈길을 보냈던 사마천은 ‘흑리열전’, ‘봉선서’, ‘효무본기’ 등에서 지배층의 잔학성에 대해서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역대 제왕들의 업적을 들춰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황제인 한무제에 대해서도 “더욱 귀신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였다.”, “미신에 빠져서 여러 차례 기만을 당하면서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력을 함부로 사용해서 공리를 크게 일으켰고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등으로 냉엄하게 비판했다. 한나라를 세운 고조에 대해서도 “한고조는 속임수를 써서 한신을 진에서 사로잡았다.” 등의 표현을 통해 통치자의 기만을 폭로하였다.




그는 또한 하늘과 인간은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천인상관론을 주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가 자연의 변화에 상응하여 변화한다는 것을 부인했고, 반대로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에 의해 자연의 질서도 대응한다는 인간 중심의 역사관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사마천은 ‘성(盛)’속에서 ‘쇠(衰)’의 모습을 통창함으로써 사회와 역사가 변화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역사는 갈수록 진보하며 그것은 앞을 향한 발전이라고 인식했다. 이것은 사회의 전진을 촉진시키는 개혁을 긍정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4) 인간 탐구의 역사서 <사기>




사마천의 <사기> 전체가 ‘인간 탐구의 역사서’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항우본기’와 같은 부분에는 그러한 성격들이 더욱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계 질서의 중심으로서 제왕의 행적을 기술하기 위해 마련된 본기에 제왕이 아닌 항우를 수록한 것은 항우의 행동이 한때 제왕과 같은 위치를 점하였다는 이유 때문인데, 이 이유만으로 항우를 ‘본기’에 수록한 것 자체가 매우 신선하다. ‘항우본기’에는 천하의 쟁탈을 위한 유방과의 싸움을 중심으로 주로 항우의 사람됨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 인간에게 내재한 두 개의 성향이 숨 막히는 대결을 벌이는 곳이 바로 ‘항우본기’다. 진의 시황제를 멀리서 바라보고 ‘저 놈의 천하를 엎어 놓고야 말겠다.’ 고 내뿜는 것은 항우였고 ‘사내란 저쯤 되어야지’ 하고 차갑게 말한 것은 유방이었다는 이야기를 사마천은 ‘본기’의 머리 부분에 실었다. 이는 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제왕에 대한 집념과 그 방향의 차이를 인식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냉철하고 이해 타산적이며 음흉한 승자인 유방에 비하여, 정열적이고 직선적이며, 그래서 오히려 빈 구석이 있는 성격의 소유자인 패자 항우. 그는 유방에 비하여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갖기 쉬운 인간적 약점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면, 유방의 강인하고 끈덕진 성격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은연중에 갖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항우와 유방의 극적인 대결의 절정으로 유명한 홍문 잔치의 숨 막히는 장면은 수세에 몰린 유방의 전전긍긍한 계략과, 우위에 있으면서도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한 항우가 대조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반진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진의 수도를 점령하여 약탈과 파괴를 일삼은 다음, 천하를 지배하기 위한 포석보다는 먼저 고향으로 가서 오늘의 영광을 자랑하고 싶어 하던 치기 어린 항우의 행동에서 우리는 보통 사람들과 통하는 인정을 발견한다. 한편, 먼저 입성하여 그것을 마음껏 노략하고 싶었으나 장량의 계략으로 그것을 참고 진나라 사람들을 회유하는 데 성공한 유방에게서 보통 사람들을 넘어선 인간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쉽게 선악으로 따져 나눌 수 없는 두 사람의 상대적인 성격이 한데 엉클어져 엮어 내는 인간의 비극을 역사의 장에 올려놓고, 차분하게 빛나는 문장으로 표현했던 예술가의 면모까지 갖춘 역사가 사마천! 그것은 후세인이 감히 모방할 수 없는 그만의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사마천의 <사기>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닌 인간 탐구의 서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문학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지만, 역사가의 섬세한 숨결과 냉정한 태도가 배어 있는 이 작품은 분명한 역사서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역사와 문학은 서로 만나기 어려운 영역이다. 역사는 사실을, 문학은 허구를 그 주된 지향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망천의 사기는 부조화의 두 요소를 잘 결합하고 엮어 나갔다는 점에서 높은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훌륭한 고전인 것이다.




3)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1)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과거에 중심을 두는 역사관과 현재에 중심을 두는 역사관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랑케와 크로체의 변증법적 합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역사가와 역사가에게 주어진 사실들은 서로 평등한 관계에 있으며, 또한 서로 주고받는 관계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즉 역사가는 사실에 종속되는 종이 될 수도 없으며, 사실을 억압하는 주인이라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란 자신의 해석을 바탕으로 사실을 형성해 내고, 사실에 바탕을 두어서 해석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복종하는 사람이다. 결국,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인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로 그 예를 들어 보자. 훈민정음은 15세기에 창제되었다.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는 근거와 실증을 통해서 이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의 중요한 해석 대상이 된다. 따라서 그저 훈민정음이 15세기에 만들어졌고,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는 단순한 기술(記述)은 에드워드 카의 입장에서는 공허하기 그지없는 기술에 불과하다. 그 역사적 사실에 해석을 부여하는 것, 예컨대 위정자의 애민 정신에 입각한 훈민정음의 창제라든지 아니면 고도의 통치 이념(유교)을 설파하고자 했던 위정자의 교화적 의도라는 내용이 역사가에 의해 형성되고 만들어질 때, 역사에 대한 해답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에 바탕을 두지 못한 역사가는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채 무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만을 단순히 기술하는 데만 그치는 역사가 역시 무책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만을 단순히 기술하는 데만 그치는 역사가 역시 무책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결국, 역사가는 자신의 사관에 따라 해석하고 유의미한 역사로 만들어 내는 역량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카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란 결국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곧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2)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보편적인 입장에서 볼 때 사회와 개인은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간에 필요한 보충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역사가도 사회에 속해 있는 하나의 개인이다. 다른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하나의 사회 현상 속에 존재하는 인몰이다. 그리고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에서는 그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그 사회를 대변하는 사람이다. 에드워드 카는 바로 이러한 자격 때문에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역사가가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입장과 어떤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관점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할 수도 없고 평가할 수도 없다. 아울러 역사가의 입장 자체는 사회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는 에드워드 카의 언급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역사가 역시 그러하다. 또, 역사가는 어느 한 시대의 인물이며, 21세기의 역사가는 이 시대에 노출된 지식인이다. 예컨대, 이 시대의 사회적 환경을 보편적으로 20세기의 파시즘이 낡은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21세기의 역사가는 20세기의 파시즘적인 관점이나 태도로 역사를 볼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을 배제한 역사가 나름의 사관을 인지할 때, 우리는 그 역사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사가를 이해하는 순간 그 역사가가 형성해 낼 과거 사실에 대한 해석의 방향을 어느 정도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역사가와 사실들과의 상호 작용이라는 과정은 이미 위에서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그것은 추상적으로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다. 오늘날을 사는 역사가의 사회와 지난날의 역사적 사실들이 있는 사회와의 대화인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드 카의 입장에서는 과거는 현재의 빛에 의해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으며, 현재도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조명을 근거로 제대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지니는 이중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3) 역사는 과학이다




역사는 인문 과학의 영역과 사회 과학의 영역을 넘나드는 학문이다. 그런데 역사가들이 연구 과정에서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 자연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에드워드 카는 역사를 과학으로 보려 했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은 앞에서 언급한 ‘인문 과학, 사회 과학’의 과학과는 다르다. 과학의 외연은 두 가지가 있는데, 에드워드 카의 과학은 자연 과학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편, ‘인문 과학, 사회 과학’에서의 ‘과학은 ’학문‘을 가리킨다. 따라서 에드워드 카가 역사를 과학이라고 부른 것에는 당연히 그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사를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에 대한 에드워드 카의 반론을 살펴보면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역사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을 취급하고, 과학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취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특수하지만, 그 사실을 통해서 일반적인 해석을 덧붙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각각 특수하고 개별적이지만, 이것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일반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의 역사는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에드워드 카의 입장이다.




둘째, 역사는 그 성격상 예언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 과학에서 발견하는 과학적인 법칙이란 것도 어쩌면 하나의 경향성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맥락에서 역사가에게 일반화란 불가피한 것이고, 또한 일반화를 통해서 예언은 아닐지라도 미래 행동을 위한 타당하고도 유용하면서 보편적인 지침은 마련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과거에 군사 독재 시절을 경험한 바가 있다. 그리고 제 3세계는 아직도 군사 독재를 경험하고 있거나, 얼마 전까지도 경험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앞으로의 시대에는 그러한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인 경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 역사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바로 역사가라는 인간이 인간 자신과 역사적 사실들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 과학도 객관성을 담보한 학문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어느 정도까지는 그 자연 현상을 지각하는 주체인 인간과 지각의 대상이 되는 객체로서의 자연 현상 간의 상호 의존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는 다분히 주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은 이상에 가까운 것이고, 그 동안 이루어졌던 객관적인 역사 서술 역시 절대적인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점이 들 수밖에 없다.




(4) 역사의 연구는 원인의 연구이다




역사가는 많은 원인의 연결 고리를 취급할 수밖에 없다. 즉, 진정한 역사가라면 자기가 작성한 여러 가지 현상들의 원인에 대한 목록을 질서 정연하게 배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원인들의 상호 관련성을 규정하기 위해서 그것의 상하 관계도 설정해야 할 것이다. ‘결국’, ‘궁극적으로’라는 표현 방식을 통해서 수많은 원인 중 어떤 종류의 원인을 최종 원인으로 보고 그것을 모든 원인 중의 원인이라고 판단할 것에 대한 확실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에드워드 카는 이것이 역사가의 책임이자 의무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주제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이다.




결국, 역사란 무엇이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과정이다. 역사가는 다수의 인과적 연쇄 사건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들을 선택하여 그것들만을 골라내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의의에 대한 기준이 되는 것은 자신의 합리적 설명과 해석의 원형 속에 인과적 연쇄 사건을 맞추어 넣는 역사가의 능력일 수 밖에 없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복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무책임한 역사 기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을 넘어서 ‘어디로’라는 질문으로 승화되는 과정이 될 때, 역사는 더욱 유의미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5) 역사와 역사가의 만남, 그리고 부단한 상호 과정




인간의 본성 문제는 역사가가 직면한 난관 중의 하나이다. 이제 갓 태어난 영아기의 인간, 혹은 나이를 아주 많이 먹은 고령의 인간인 경우는 예외이지만,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무조건 받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이 환경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다. 역사가도 인간이고, 인간의 본성은 때로는 환경에 의존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또한, 역사가가 실제로 생각해서 쓰는 자기 자신의 역사 서술 태도를 되짚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따라서 자신의 사실을 만들어 내고, 자신의 사실에 따라 자신의 해석을 만들어 내는 연속적인 과정에 종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중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가의 역할은 어떤 사실을 일시적으로 선택한 후, 또 그것을 일시적으로 해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해석에 입각하여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일시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역사 서술이 진척됨에 따라 해석과 사실의 선택, 그리고 정리도 서로 간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거의 무의식적으로 미묘하게 변화한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에 속하는 존재이고, 어떤 사실은 이미 과거에 속하므로 이들의 상호 작용 또한 현재와 과거의 상호 작용을 포함하고 있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소유하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열매도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도 없고 의미도 없다.

1980년에 우리나라를 풍미했던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이 당대를 좌지우지하면서 과거에 대한 지평을 넓혀 주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보수주의적 사관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그 책 자체가 충격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사실을 보는 눈은 그 당시 역사가의 해석에 따라 우리에게 스펀치처럼 흡수되었다. 최근에 그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지니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이라는 책이 나왔다. 이러한 역사서의 출간은 과거의 사실을 역사가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나타난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양한 역사적 인식 태도에 대한 수용과 보편화는 그것을 인식하는 역사적 주체인 인간의 몫일 것이다. 그 인간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 현재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역사가는 그 안에 있다. 결국,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고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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