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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31. 경포(黥布)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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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마천의 사기 싸이트에 올려져 있던 [최정설의 사기읽기]를 옮겼습니다.



[경포열전]



1. 머리말


자비로운 천사들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보이느라고 종종 그림이나 문자, 혹은 사람의 모습이나 소리 같은 것을 우리앞에 펼쳐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다만 경탄할 뿐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항용 쓰는 언어로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나, 불굴의 정신으로 그 의미를 파 들어가면 마침내 그 찬탄스럽기 그지 없는 의미에 이르는 것도 가능하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천사들을 찬양하고, 영원한 사랑을 접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문신을 하고 다니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신은 흔히 자신만의 상징을 갖고 싶어 하든지 혹은 조직의 일원으로서 다른 조직과 구별되는 것을 표시하는 것에 쓰이는 것 같다. 옛날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 고대에는 문신을 사람에 대한 형벌의 한 종류로써 사용했다. 죄인의 얼굴에 문신을 새겨 평생 그것을 지우지 못하게 하는 한편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죄인의 의미로서 사용했다. 이렇게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문신은 '다른 것과의 구별'이라는 것으로 사용된 것 같다.


앞서 서술했지만 문신은 중국 고대에는 죄인에 대한 형벌로 사용했다. 그런데 {사기열전}을 보다 보면 墨刑 즉, 문신형을 당한 죄인의 몸으로 漢의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이를 발견 할 수 있다. 그가 바로 경포이다. 사마천은 왜 그를 列傳에 入傳했을까. 그것은 물론 그가 漢의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인데 이것은 [경포列傳]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경포열전]을 읽다 보면 한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그것이 바로 경포의 호칭이다. {사기}에 드러나는 경포의 호칭은 대략 6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경포列傳]에 드러나는 경포에 대한 호칭(경포와 英布)은 나머지 4가지가 단지 관직명인데 반해 이름과 관련되었고 그것이 쓰인 상황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史記}에서 유독 주인공의 신체적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을 열전명으로 서술한 것도 특이하지만 명확한 이유가 잘 드러나지 않는 호칭을 사마천이 쓰고 있다는 것도 사마천의 필법으로 볼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다. 司馬遷은 {史記}를 저술하면서 인물의 호칭으로 대표되는 필법을 다채롭게 구사하면서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부분이 해명된다면 사마천의 필법을 한가지 더 검증할 수 있는 부분이 될 것이다. 이글에서는 [경포列傳]에 나타나는 이러한 경포의 호칭과 관련된 몇가지 사항을 살펴보기로 한다.


2. [경포列傳]의 내용


처음에는 오로지 처음에만, , 이 이름을 짜맞추는 것으로 시작하라. 짜맞추어진 것을 읽어보고, 바퀴를 이리 굴려보기도 하고 저리 굴려보기도 하듯이 여러 각도에서 음미해 보라. 그대로 두면 안된다. 그리고 이 이름이 그대의 공굴리기를 이기지 못해, 그대의 상상력이 일으키는 혼란을, 그대 생각속에서 공굴려지는 것을 이기지 못해 그 내용물을 강화시키거든 이 이름은 그대로 두고 그 이름으로 돌아가 물어보라. 그 이름에서 나온 지혜의 말씀 한마디가 그대 손에 잡히기 까지 그 이름을 떠나지 마라.


[경포열전]에서 살펴볼 수 있는 몇가지 사항에 들어가기 앞서 우선 [경포열전]의 내용을 살펴보자.


초반부에는 楚나라 사람인 경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경포는 舊 六國중 초나라 지역인 六사람이다. 소년 시절 그는 어떤이에게 관상을 보았는데 관상을 본사람이 경포를 보고 형벌을 받은후 왕이 된다고 하였다. 과연 그는 후에 형벌을 받은후 秦始皇陵의 공사가 한창인 麗山에 가서 노역을 하며 호걸들과 사귀다가 후에 떼도둑이 되었다.


陳勝이 반란을 일으키자 경포는 파군(番君)을 만나서 그의 무리와 함께 군사를 모으고 파군의 딸을 아내로 삼는다. 장한(章邯)이 진승을 격파한 후 그는 秦의 左右校尉를 청파(淸波)에서 공격하고 동쪽으로 나아간다. 그후 그는 項梁의 휘하로 들어가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워 항량이 楚懷王을 옹립한후 當陽君에 봉해진다. 項梁 사후에도 그는 항우를 따라 秦을 공격하여 공을 세운다. 楚가 승리한 것은 경포가 여러 차례 공을 세운 덕분이었다. 秦의 20만 대군을 습격하여 파묻어 죽인후 그는 九江王이 되었다.


중반부 부터는 漢나라 사람이 된 경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왕이 된 이후의 경포는 彭城에 고립되어 고전중인 劉邦에 의해(謁者 隨何의 설득으로 인해) 楚를 배신하고 漢에 귀순하여 淮南王이 되고 이전보다 더 큰 영지를 소유한다.


후반부에는 경포의 최후이다. 淮陰侯 한신의 죽음으로 경계되던 중 경포의 총희가 中大夫 賁赫과 간통한 것을 의심하자 비혁이 달아나 경포가 반란을 꾀한다고 허위보고를 하게 된다. 이에 경포는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여 최후를 맞이한다.


3. [경포列傳]의 구성과 그 의미


사마천은 [경포열전]을 왜 서술했을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경포가 훌륭해서이다. 실제 그랬다. 열전 초반부에서 중반부에 걸쳐 나와있는 모습들은 경포는 楚·漢의 핵심적 인물인 동시에 뛰어난 장수였다. 彭城전투에서 경포가 漢에 귀순하지 않았더라면 秦 이후의 혼란기를 통일한 인물은 項籍 즉, 項羽였을 것이다. 국호는 楚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되었어도 경포는 아마 왕으로 남았을 것이다. 여기에 경포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경포열전]의 구성은 이와 같은 경포의 중요성을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서술되고 있다. [태사공자서]에는 [경포열전]을 지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以淮南叛楚歸漢. 漢用得大司馬殷卒破子羽于垓下作경포列傳第三十一.


이 문장의 요점은 경포의 공은 초를 배반하고 한에 넘어오면서 항우를 해하에서 격파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즉, 경포는 군사적인 면에서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경포열전}과 그에 관한 타 열전의 기록이 주로 군사적인 면에 치중되어 있는 것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경포의 공이 한에 귀순하면서 항우를 격파하는 것인 만큼 [경포열전]은 초에서 한으로 경포가 넘어가면서 생기는 전세의 역전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중심에는 경포가 있다. 초에서의 경포 그리고 한에서의 경포를 서술하면서 이와 같은 것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4. 경포의 呼稱


지금부터는 [경포열전]에서 살펴보아야 할 몇가지 사항을 보기로 한다. 이 열전에서 우선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경포에 대한 호칭이다. 경포의 호칭은 여섯가지 ― 英布· 경포· 當陽君· ·武王·九江王· 淮南王 ― 이다. 이중에서 특히 英布와 경포가 문제의 핵심이다. 다른 나머지 세가지 호칭은 왕에 임명되었을 때 혹은 그 이후 경포 또는 英布를 부를 때 앞에 붙였던 관직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경포와 英布의 호칭은 {사기}의 곳곳에 등장하는데 이 호칭이 갖는 의미는 어떠한 것일까. 물론 이것이 그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기}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오늘날 까지도 사람들로 하여금 {사기}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사마천만의 독특한 필법으로 볼 때 이것은 일단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전제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과연 사마천은 왜 경포와 영포의 호칭을 구별하여 사용했던 것일까. 이것은 크게 세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상황에 따라 군사적인 것이 강조되는 것과 개인적인 것이 강조되는 상황을 구별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아고 둘째는 경포의 호칭에는 포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경포와 英布의 호칭은 사마천이 사용했던 자료의 차이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우선 첫번째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해 [경포列傳]에 나타나는 경포의 호칭을 표로 정리해 보았다.(뒷면의 表1과 表2를 참조)


이상의 표를 살펴보면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列傳]와 [表]에서만 英布의 호칭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表2>는 잠시 제쳐두더라도 <表1>을 보면 39 : 9의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면서 경포의 호칭이 많이 쓰이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 이것은 사마천이 {사기}의 각편을 저술했던 이유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사마천이 [本紀]와 [世家]를 지은 이유는 왕과 당시 권세를 잡고 있었던 집안이나 인물의 역사를 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表]는 연대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列傳]은 역사적인 개인의 생애를 그리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사마천의 저술 의도와 경포와 英布의 호칭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가.


[경포열전]의 논찬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太史公曰 : 英布者, 其先祖豈春秋所見楚滅英六, 皐陶之後哉? 身被刑法, 何其發興之暴也 項氏之所 殺人以千萬數, 以布常爲首虐. 功冠諸侯, 用此得王 …….


[경포열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인 위 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경포의 가계에 관한 뿐이고 다른 하나는 경포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왕이 되었다는 부분이다. 크게 보자면 인간적인 측면과 군사적인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마천은 논찬부분에서 보듯이 경포의 개인적인 면과 군사적인 측면을 구별하였다고 생각된다. 즉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英布를 군사적인 면에서는 경포를 썼다는 것이다.


<表2>를 살펴보면 [表]와 [列傳]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경포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경포의 호칭이 나타나는 부분을 보면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다든지 경포의 반란을 격파한 공으로 벼슬을 받았다든지 하는 주로 경포의 반란과 관련된 부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경포의 호칭이 쓰이는 부분일지라도 군사적인 면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설픈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 項梁渡淮, 경포, 蒲將軍 亦以兵屬焉.([項羽本紀])

ⓑ 當陽君경포爲楚將 …….([項羽本紀])

ⓒ 當陽君경포爲九江王, 都六.([高祖本紀])

ⓓ 十年十月淮南王경포, 梁王彭越, 燕王盧  …… 皆來朝長樂宮.([高祖本紀])

ⓔ 경포者, 六人也, 姓英氏.([경포列傳])


이 부분들을 보면 병사를 이끌고 와서 항우에 속하였다든지 고조를 알현했다는 것으로 경포가 군사를 이끌고 모처의 누구를 공격했다거나 경포의 반란과 관련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 부분들은 특별히 군사적인 면과 개인적인 면이 구별되지 않는 모호한 부분으로 사마천이 모호한 상황에서는 英布와 경포를 같이 썼다고 할 수 있으나 모호한 부분은 다른 해당 부분에 다른 관점을 언급해 놓는 사마천의 필법으로 볼때 ⓒ와 ⓓ를 제외하고는 (그나마 이것은 [경포열전]에 ⓒ는 布로 ⓓ는 주어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타 열전이나 [경포열전]과 겹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굳이 사마천이 모호한 상황에서는 英布와 경포를 같이 썼다고 할 수 없다. 또한 군사적인 부분에 경포라고 쓰는 것으로 보아 열전의 제목인 [경포열전]은 사마천이 경포가 형벌을 받았지만 군공을 세운 것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사마천의 궁형 컴플렉스에서 오는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보면 오히려 [英布列傳]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점으로 볼때 첫번째 가능성은 호칭의 구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주고 있지 못한 듯 보인다.


그렇다면 두번째 가능성인 경포의 호칭에는 포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은 어떠한가. 앞서 언급한 [경포列傳]의 論贊 부분은 언듯 보면 먼저 살펴보았던 개인적인 면과 군사적인 면으로 구분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앞서 皐陶를 언급한 부분은 皐陶가 봉해진 英六의 지역과 경포가 이 지역에서 舜의 신하였던 皐陶와 같이 출세한 것을 언급하여 경포가 형벌을 받고서 출세한 것을 가리키는 사마천의 동병상련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다. 논찬의 뒷부분은 당연히 경포가 출세한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논찬의 결론은 경포는 수많은 사람을 죽여 출세하였지만 자신 역시 다른 이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인과응보의 관점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부분을 사마천이 경포를 높이 평가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경포의 호칭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경포의  은 열전 안에서도 나와 있지만  刑을 받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래 이름은 英布인데  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別名으로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사람들이 별명으로 많이 불렀기 때문에 경포라고 썼던 것인가. 일면 맞는 점이 있지만 사마천의 필법으로 볼때 사마천이 단순히 그렇게 썼을리는 없다. 아마도 이점은 사마천의 경포에 대한 감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경포列傳]을 지은 이유를 경포의 공은 楚를 배반하고 漢에 넘어오면서 項羽를 垓下에서 격파하는데 공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공을 세운 것은 세운 것이지만 項羽를 배반하고 漢에 넘어온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다. [張耳陳餘列傳]의 논찬부분에도 나오듯이 사마천은 權勢와 利로써 사귀어 그것을 위해서라면 친구까지도 배반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볼때 사마천의 경포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項羽의 잔학성을 좋지 않게 평가했던 사마천이 경포 역시 좋게 평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이것은 사마천이 각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吳子胥나 屈原의 경우와 비교하면 잘 드러난다. 屈原이나 伍子胥도 경포와 마찬가지로 형벌을 당했지만 그들은 충신이었다. 반면에 경포는 공을 세웠으나 배반을 한 인물이었다. 호칭의 면에서 보자면 屈原이나 伍子胥는 모두 字로써 각각 平과 員이란 이름이 따로 있다. 이들은 열전내에서도 이름을 쓰는 경우가 극히 적다. 그러나 경포는 이름도 아닌 별명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사마천은 굴원과 오자서와 경포는 다르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으로 볼때 경포의 호칭에는 어느 정도 貶下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형벌을 받아 출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열전명을 [英布列傳]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폄하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전내에서 경포를 많이 쓴 것은 당시 사람들이 많이 부르기도 했지만 폄하의 의미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英布의 호칭은 경포에 대한 존칭으로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사마천의 기본 입장이 정해진 다음에야 인물에 대한 평가는 바뀔 수 없는 것이다. 英布의 호칭은 어떠한 경우에 쓰였던 것인가. 동일한 상황에서 경포의 호칭과 분산되어 서술되지 않은 것을 보면 무언가 다른 평가를 내리기 위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특정 지역에 관련하여 사용된 것도 아니다. 이것으로 볼때 사마천의 착오나 이용한 자료에 따라 달리 쓰여졌다고 생각된다. {史記}에서 [경포列傳]과 관련된 오류는 1군데 등장한다. [ 生陸賈列傳]에 나오는 '語在{}語中'이 그것육憐攄다. 여기에서는 [경포열전]에 그 내용이 있다고 하는데 [경포列傳]에는 이 부분이 없다. 英布의 호칭과는 성격을 달리 하지만 사마천의 착오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단, [경포列傳]의 논찬부분에서 英布의 호칭이 등장하는 것은 皐陶가 봉해진 英六의 지역과 경포가 이 지역에서 舜의 신하였던 皐陶와 같이 출세한 것을 언급하여 경포가 형벌을 받고서 출세한 것을 가리키는 사마천의 동병상련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예외로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과연 경포와 영포의 호칭 차이를 무작정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때 이용한 자료의 차이에 기인한 착오라고 할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리 사료가 부족하다지만 어느 정도의 논거 없이는 섣불리 사마천의 착오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楚漢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어떠한 자료를 이용했는가. 여러가지 자료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楚漢春秋}이다. {楚漢春秋}는 陸賈가 지은 것으로 사마천은 楚漢의 역사를 서술할때 이 책에 기초하여 서술하였다고 한다. {漢書·藝文志}에는 '楚漢春秋는 9편이 있다(楚漢春秋九篇)'고 되어 있고 班固가 주석을 달아 작자가 陸賈임을 밝히고 있다. {隨書·經籍志}와 {唐書·藝文志}에도 9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1편만이 전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楚漢春秋}에는 경포에 관련된 기사가 어떠한 것이 있으며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가. 현재 남아있는 부분 중에서 경포와 관련된 부분은 2군데에 걸쳐 등장한다. 이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英布 人相我當刑而王 豈是乎.

ⓑ 경포反 경포反羽書至上大怒.


ⓐ부분은 제목이 英布로 되어 있는데 이부분은 [경포列傳]에 등장하는 부분으로써 [경포열전]과 동일한 문장이다. ⓑ부분은 {史記}에는 등장하지 않는 부분으로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서찰을 받고 高祖가 화를 냈다는 내용이다. 위의 ⓐ와 ⓑ를 통해 볼때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것이 바로 호칭의 차이이다. 특히 ⓐ를 통해 볼때 문장까지 동일하다는 점에서 사마천이 직접 인용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와 ⓑ의 차이는 경포와 英布의 호칭 문제가 사마천이 이용한 자료의 차이에서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것으로 볼때 경포와 英布의 차이는 아마도 사마천이 {史記} 집필시 이용했던 자료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까지 경포의 호칭과 관련하여 몇가지 문제를 풀어 보았다. 사마천이 경포와 영포의 호칭을 구분하여 서술했을 3가지 가능성에 대해 살펴본 결과 첫번째 가능성은 군사적인 면과 개인적인 면으로 나누어 서술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군사적인 상황도 아니고 개인적인 상황도 아닌 모호한 부분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호칭 구분의 기준이 되지 못하였다. 두번째 가능성은 경포의 호칭에는 폄하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는 것인데 경포의 호칭에 폄하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것은 공감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영포의 호칭을 설명할 수 없는 맹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가능성은 사마천이 이용한 자료에 기인한 것으로 사마천이 楚漢의 역사를 서술할때 기본적으로 사용하였던 {초한춘추}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경포와 관련된 두분에 관한 호칭의 차이가 나타났다. 이것으로 보아 일단 사마천이 이용한 자료의 차이로 인해 경포와 영포의 호칭의 차이가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이것이 확실한 결론으로 굳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대략 두가지 사항이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초한춘추}의 전문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는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다). 자료가 존재하는 범위 내에서 해야할 일은 {한서}와 {사기}와의 비교라고 생각된다. 반고가 물론 {사기}를 첨조하여 경포에 관해 서술했겠지만 반고가 {한서}를 집필할 당시까지만 해도 {초한춘추}가 남아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반고가 {한서} 집필시 참조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사기}보다 더 자세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5. 小 結


후다 레온은 글자를 바꾸어 짜는 복잡한 글장난을 좋아한다. 그는 이렇게 바꾸어 짠 글자를 입에 올려 본다. 열쇠, 문, 메아리, 주인, 그리고 궁전…….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움베르토 에코의 글중 한 부분을 인용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의 세계는 무궁무진한 동시에 영원한 미로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찬탄스럽기 그지없는 의미에 이르기 위해 불굴의 의지를 갖고 {사기}를 살펴보고자 이러한 글을 굳이 인용하였다. 사실 사마천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열전에 쓰인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정확히 그리고 한눈에 알수 있기란 어렵다. 더욱이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도 인간인 이상 같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은 결국 후세인들의 수천가지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이것을 위해 여러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그 가능성중 그럴듯한 하나를 선택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본질에 접근해 가는 것. 그것이 {사기}를 위해 오늘날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가지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경포열전]은 이러한 점에서 살펴볼 가치가 굉장히 큰 부분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사기}에 관한 많은 연구서 혹은 연구논문 중에도 등장하지 않는 [경포열전]은 의외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른 많은 연구자 들은 아마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자료의 부족등으로 포기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은 것은 이상한 부분이다. 불굴의 의지로 임한다면 마침내 찬탄스럽기 그지없는 의미에 이르되어 우리로 하여금 사마천의 {사기}를 찬양하고, 영원한 의미를 접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6. 參考文獻


1. {史記}, 中華書局刊 標點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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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鄭範鎭 외, {史記列傳 : 中}, 까치, 1997.

4. 山根幸夫 編, {中國史硏究入門 上}, 山川出版社,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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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金聖日, [史記褒貶義法淺談], {中國人文科學 : 6}, 1987.

8. 李晟遠, {古代中國의 刑罰觀念과 肉刑 ― 非人化觀念을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 대 학원 동양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998.

9. 小島祜馬, [中國における刑罰の起源について], {古代中國硏究}, 平凡社, 1988.

10. 藤田勝久, [{史記} 項羽本紀と秦楚之際月表 ― 秦末における楚·漢の歷史評價―], {東洋史硏究 : 54-2}, 1995.

11. 金德建, [[楚漢春秋]的記事範圍和性質], {司馬遷所見書考}, 上海人民出版社, 1963.

12. 楊燕起, 兪樟華 編, {史記硏究資料索引和論文傳著提要}, 蘭州大學出版社, 1989.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09-10-31 10:14:09 열전(列傳)(으)로 부터 이동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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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09-07-31
[일반] 영조가 홍낙명·이석재 등에게 《사기》의 무제본기를 읽게 하다

영조 39년 계미(1763, 건륭 28) 12월 23일(을사)일에 영조가 홍낙명·이석재 등에게 《사기》의 무제본기를 읽게 하고 담론하다. 임금이 유신(儒
운영자 09-06-30
[일반] 항우와 유방을 중심으로 본 초한전쟁 고찰

항우와 유방을 중심으로 본 초한전쟁 고찰 Ⅰ. 序論 중국 고대 최초의 통일제국인 秦나라는 14년 만에 멸망하게 되고, 뒤이어 漢나라가
운영자 09-03-13
[일반] 사기의 체제-열전(안동대 이윤화 교수)

사기(史記) 체제 - 열전(列傳) 1. 열전의 성격과 의미 *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 “ 정의를 扶持하고, 불굴의 기개를
운영자 09-03-11
[일반] 사기130 편명과 번역문 게재 현황표

사기 130편명 本紀(본기)12 (卷1-12) 五帝本紀(오제본기) 夏本紀(하본기) 殷本紀(은본기) 周本紀(주본기) 秦
운영자 09-02-15
[일반] 만화사기3

서울대가 선정한 인문고전 50선
운영자 08-09-09
[일반] 만화사기2

서울대가 선정한 인문고전50선
운영자 08-09-09
[일반] 만화사기1

서울대가 선정한 인문고전 50선
운영자 08-09-09
[일반] 이규보의 굴원유감-屈原不宜死論

屈原不宜死論(굴원불의사론) 굴원은 죽지 않았어야 함에 대한 의론 古有殺身以成仁(고유살신이성인) 예날에 자신을 죽여서 인(仁)을
운영자 08-05-05
[일반] 사마천과 EH Carr의 역사관 비교

사마천의 <사기>와 에드워드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1) 역사를 보는 눈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21세기 역시 또 한 세
운영자 0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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