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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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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



중국 역사기술의 양대산맥,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 각각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저자인 그들은 시대배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같은 역사책이면서도, 하나는 자유발랄한 스타일의 《사기(史記)》를, 하나는 엄격하고 근엄한 스타일의 《한서(漢書)》을 남기게 된다.

우리는 이점에서 시대배경이란 무형의 족쇄가 얼마나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지 알게 되며 한대(漢代)가 한무제를 기점으로 어떠한 분위기로 변해가는 지도 위 두 역사 명저를 통해 감지하게 된다.

한편, 절대적 권력의 황제에게 정의감에 불타 직언을 하다 궁형(宮刑)에 처해진 사마천은 자신의 울분을 《사기(史記)》저술로 승화시킨다. 우리는 또한 이점에서 역경을 극복한 위대한 영혼과 만나게 된다.

■ <사기>와 <한서> 소개

《사기(史記)》는 한대(漢代)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역사책으로, 중국인의 공통시조 황제(黃帝)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당시 한무제(漢武帝)에 이르는 근 3천년을 기록한 통사(通史)이다.

모두 130편 다섯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제왕을 기록한 12본기(本紀), 제후를 기록한 30세가(世家), 뛰어난 인물을 기록한 70열전(列傳), 그리고 각종 제도를 기록한 8서(書), 연대기에 해당하는 10표(表)가 그것이다.

《사기(史記)》 이전의 역사기록은 단편적인 사실(史實)을 기록하거나 간략한 연대기적 서술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마천은 수많은 문헌과 기행(紀行)을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투영한 인물중심의 새로운 역사기술 형태인 기전체(紀傳體)를 창조했으며, 이는 후세의 정통으로 굳어져 대대로 계승되었다.

우리가 아는 중국의 정사(正史)는 모두 사기의 기술형태를 따른 것이며, 우리 나라의 대표적 사서(史書)인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고려사(高麗史) 사기의 영향을 받은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사기의 가치는 방대한 역사기록이나 최초의 정사(正史)에만 그치지 않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거의 공백상태가 되어버린 중국 고대사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계단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선진(先秦) 학술의 윤곽을 밝히는데도 필수 도서로 취급되고 있다.

한편 객관적인 서술이 생명인 역사서에서 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진한 감정을 투영시킨 문학적 서술은 동양 삼국의 허다한 독자들을 감동시켰으며, 그 감동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또한 사마천은 절대적 권력 앞에서 양심을 굽히지 않은 죄로 궁형(宮刑)에 처해졌던 비극적 인물이었으며, 그런 비극을 사기 저술로 승화시킨 정신은 그 이후 암울한 시대의 많은 인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현실의 부정부패를 과감히 비판하고 정의와 의리를 찬송하는 내용은 사마천 이후의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외에도 사마천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되뇌이며 인류의 보편적 과제인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탐구했다. 따라서 우리는 사기를 읽으며 인생의 의미, 처세의 태도, 인간관계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된다.

단 한 권의 책이 문학 사학 철학을 포괄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속에서 강자의 부당한 핍박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고 그와 동시에 약자에 대한 인류애적 동정심을 진하게 표현했다는 점은 경이롭다. 사마천의 사기가 2천여년 전의 중국 역사책이지만, 인류 전체의 고전(古典)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편 한서(漢書)는 중국최초의 기전체(紀傳體) 단대사(斷代史)로 100편 1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고의 아버지 반표(班彪)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이어 한대(漢代)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아들 반고(班固)가 보충 정리하여 완성했다. 그러나 그중 팔표(八表)와 <천문지(天文志)>는 미완성으로 남겨져 여동생 반소(班昭)와 마속(馬續)이 마저 완성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한고조(漢高祖) 원년(기원전 206년)부터 왕망(王莽) 지황(地皇) 4년까지 총 229년 역사를 기록했다.

12본기(本紀), 8표(表), 10지(志), 70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구성 및 체계는 대략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비슷하다. 단지 《사기(史記)》의 서(書)를 지(志)란 명칭으로 바꾸고 세가(世家)를 열전(列傳)으로 편입시켰으며 아울러 <형법(刑法)>, <오행(五行)>, <지리(地理)>, <예문(藝文)> 등 4개의 지(志)와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 <고금인표(古今人表)>를 추가한 점이 《사기(史記)》와 다르다. 반고(班固) 한서의 이러한 스타일은 후세 기전체 정사(正史)의 범례로 굳어졌다.

《한서(漢書)》의 특징은 상세한 기술과 계통적인 구성에 있으므로 한대 역사를 연구하는데 극히 요긴한 자료다. (바로 이점에서 《사기(史記)》는 역사서라기 보다는 제자백가서로서 연구되어야 한다..) 물론 문학적, 사상적인 면에서 《사기(史記)》에 뒤지지만 탄탄한 구성과 세련된 문장으로 우수한 전기문학(傳記文學) 작품으로 대접받을 만하다.

주석으로는 당나라 때의 안사고(顔師古)의 해설이 정평이 있으며 청나라 때의 왕선겸(王先謙)의 《한서보주(漢書補注)》가 안사고의 해설을 보충하였다. 근대학자 양수달(楊樹達)의 《한서관규(漢書管窺)》는 왕선겸의 미비점을 일부 바로 잡았다. 중국 중화서국에서 1962년 현대식 표점을 찍어 출판한 이른바 점교본(點校本)은 안사고 주석본에 근거한 것이다.

■ 본론 및 결론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완성한 것은 대략 한무제(漢武帝) 말년으로 추정된다. 한편 반고(班固)는 한서(漢書)를 완성하지 못하고 옥중(獄中)에서 죽게 되는데 그때가 화제(和帝) 영원(永元) 4년이다. 《사기(史記)》는 서한(西漢)이고 《한서(漢書)》는 동한(東漢)에 속한다. 이 두 역사서는 기원전과 기원후 각각 90여년의 거리를 두고 있으므로 약 180년의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2000여년이 지난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위 두 역사서는 거의 연이어 나온 것으로 생각될지 몰라도 실은 거의 200년의 간격을 두고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사기(史記)》는 개인적인 저술이고, 《한서(漢書)》의 경우는 그 원고를 황제(皇帝)가 열람했기 때문에 완전한 개인적 저술이라 보기는 그렇고 국사(國史)의 냄새가 다소 난다고 하겠다.

사마천(司馬遷)은 자신의 저술이 '일가지언(一家之言: 내 독특한 견해)'이며 '장지명산(藏之名山:내 뜻을 알아줄 사람을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깊은 산중에 보관)'하겠노라 했던 것인만큼, 반고(班固)의 저술 종지(宗旨)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사기(史記)는 통사(通史)이고 한서(漢書)는 단대사(斷代史)이다. 또한 이 두 사람의 개성이나 기호(嗜好) 역시 다르며 역사적 자료의 취재나 행문(行文) 방식도 서로간에 상당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180년이란 기간이 두 역사가로 하여금 이토록 차이나게 만든 것은 시대적 환경이 상당히 변했기 때문인데, 그 관건은 사마천(司馬遷) 당시의 황제 한무제(漢武帝)가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모두 배격하고 오로지 유가(儒家)만을 국가의 정식 지도이념으로 삼은 점이다.

그런데 자세히 따져보면 한(漢)나라 초기에는 법가(法家)적인 통치술이 행해졌으며,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기에는 도가적(道家的)인 면모도 보여주고 있었고, 유가사상(儒家思想)을 강조했던 동중서(董仲舒)의 저술마저도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 상당히 침투되어 있었다.

즉, 한(漢)대의 사상적 배경은 엄밀히 말해서 오로지 유가(儒家)의 사상만이 지배했던 것은 아니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이 서로 얽히고 섥혀있어 유가(儒家)를 정부차원에서 정통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순수한 유가(儒家)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굳이 말한다면 제자백가의 쓸만한 내용을 취합하여 유가(儒家) 사상에 결합시킨 유가(儒家) 위주의 종합적 사상체계라 하겠다. 천하가 통일되면서 사상도 이를 밑받침해주기 위해 제자백가의 장점을 취합시킨 변종 유가(儒家)가 탄생한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동중서(董仲舒)가 비록 유가(儒家)를 존중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결코 유가(儒家)를 존중하는데 근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통일된 한제국(漢帝國)의 정통사상(正統思想)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합하다고 여긴 유가(儒家)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즉, 통일(統一)된 한제국(漢帝國)을 사상적으로 밑받침해줄 만한 사상으로 유가(儒家)를 채택한 것이다. 이점은 동중서(董仲舒) 자신의 다음 이야기로 증명된다:

“ ≪춘추(春秋)≫의 통일(統一)이란 것은 천지(天地) 불변의 가르침이자 고금(古今) 불변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교(邪敎)에 빠져 불순한 주장이 난무하고 있으니 위로는 임금께서 통일할 방법이 없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무엇을 따라야 할지 방황하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아둔하오나 생각하기는 육예(六藝)와 공자(孔子)의 가르침 이외의 모든 학술은 일체 금지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사설(邪說)이 두절되면 모든 생각이 하나로 집중되고, 그렇게 되면 법도가 분명해져 백성들도 따라야 할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六藝란 六經을 말함. 유가의 중요한 경전모음집)

동중서(董仲舒)의 위 주장은 학술의 독립성을 부정하면서 학술이란 현정권을 지지해야 한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한무제(漢武帝)가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학관(學官)를 임명하고 현량방정(賢良方正/품행이 방정하고 인품이 훌륭)한 인물을 발탁한 것도 모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에 근거했던 것이며, 이와 동시에 방대한 중국의 문관제도(文官制度)가 등장하여 시정(施政)의 주요 통로가 되었다.

그런데 사마천(司馬遷)은 동중서(董仲舒)와 동시대의 사람이지만 이러한 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소 특별한 사람이었다. 이에 비해서 반고(班固)가 살던 시대는 이미 근 100여년의 유가사상이 차곡차곡 자리를 잡아 시대 전체가 유가의 분위기에 덮혀 있었다.
더군다나 반고(班固) 당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는 한때 유가의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했던 태학생(太學生)이었다. 게다가 광무제에 이어 등극했던 명제(明帝) 유장(劉莊)은 스스로 유학자(儒學者)로 처신했을 정도여서 한때 벽옹(벽 雍:강당)에서 ≪상서(尙書)≫를 강연하기도 했다.

명제(明帝)에 이어 등극한 장제(章帝) 유단(劉但)은 친히 백호관(白虎觀)에 왕림하여 오경(五經)의 이동(異同)을 판정했는데 -유가 경전이 필사본으로 전달되던 시절, 같은 책인데도 구절이 서로 다른 경우 이를 바로잡는 학술행위. 대단한 학문이 아니면 건들 수 없음 - 그때 반고(班固)도 자리를 같이 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저술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국가적 지도이념의 테두리를 벗어나기가 힘들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은 반고(班固)와 마찬가지로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신도(信徒)로 자처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사기(史記)≫를 펼쳐보면 사마천(司馬遷)의 경우 낭만주의적이고도 개인주의적인 냄새를 강하게 맡을 수 있다.

어떤 틀에 얽매이거나 고리타분한 유학자(儒學者)의 곰팡이 냄새가 전혀 나지 않으며 상쾌하고 생기발랄한 약동적인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사마천(司馬遷)이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서 「저는 어려서부터 생기발랄한 성격이었으며 커서는 동네에서 착실하다는 평판을 듣지 못했습니다」는 고백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물론 사마천이 종종 거론했던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이뻐해주는 사람을 위해 치장을 한다」(士爲知己用, 女爲悅己容)는 이야기는 물론 유가 도덕에 근원을 둔 발언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미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굳어진 유가사상의 맥락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다. ≪사기(史記)≫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신명나게 묘사되어 있는 형가(荊軻)와 고점리(高點離)의 방약무인한 태도는 동중서(董仲舒)가 지적한 사교(邪敎)에 가까운 행위였다. 게다가 항우(項羽)랄 것같으면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의 숙적이었는데도 사마천(司馬遷)은 버젓이 유방(劉邦)의 고조본기(高祖本紀) 위에 항우본기(項羽本紀)에 기록했다. 아마 사마천 이후의 역사가가 기록했다면 본기(本紀)에 올려놓는 것은 고사하고 열전(列傳)같은 곳에 넣었을 것이고 그 제목 또한 '항추(項酋)'나 '위초(僞楚)' 등으로 격하시켰을 것이다. -항추(項酋)란 항우란 두목자식, 위초(僞楚)란 헛깨비 초나라 출신 놈팽이 정도의 뜻 - 한편 항우(項羽)를 기록한 내용을 보자면 비록 포악한 성격이 드러나면서도 순진하고도 정이 많은 면모가 특별히 부각되어 있다. 특히나 항우(項羽)의 말로(末路)를 기록한 대목에 이르면 읽는 이로 하여금 항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묘사되어 있다. 이에 비해 유방(劉邦)은 음험하고도 위선적인 모습이 더욱 부각되어 있다.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呂太后)를 묘사한 부분은 더욱 신랄하다. 유방(劉邦)이 죽자 그의 애첩이었던 척부인(戚夫人)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에 이르자 사마천(司馬遷)은 여태후의 아들 효혜제(孝惠帝)의 입을 빌어 「이건 사람의 짓이 아니다」며 풍자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마천(司馬遷)의 기록과 비교해 볼때 반고(班固)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 대략 사마천(司馬遷)의 기록을 대폭 참고했다고는 하지만 -사마천은 한무제까지 살았던 사람이므로 한고조 유방부터 한무제까지의 역사도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반고의 경우 한서(漢書)를 지었으므로 당연히 사마천의 기록과 중복되므로 사기를 대폭 인용했던 것임 -.

그러나 여태후(呂太后)가 척부인(戚夫人)을 악랄하게 보복한 부분은 <고후기(高后紀)>에서 단 한글자도 거론하지 않고 단지 <외척전(外戚傳)>에서 간단하게 언급했을 뿐이다.

≪사기(史記)≫에는 형가(荊軻)가 등장하는 <자객열전(刺客列傳)> 뿐아니라 코메디언들의 모음인 <골계열전(滑稽列傳)>, 택일(擇日)이나 금기(禁忌) 등을 관장했던 무리들의 모음인 <일자열전(日者列傳)>, 고금(古今)의 점쟁이들의 모음인 <귀책열전(龜策列傳)> 등이 있으므로 가히 오만 잡탕이자 각종 사파(邪派)의 무리가 횡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결국 당시 전체 사회의 전모(全貌)를 드러내기 위해 안배한 것이라 하겠다.

이에 비해 반고(班固)도 물론 <동방삭전(東方朔傳)>을 기록하고는 있지만 사마천(司馬遷)만큼 비정통적인 사회 저변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자료를 보존하지는 못했다.

사마천(司馬遷)은 <화식열전(貨殖列傳)>을 통해 그의 개인적인 사리관(私利觀)을 피력하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을 보자면 「천승(千乘)의 왕이나 만가(萬家)의 제후 그리고 백실(百室)의 군(君) 조차도 가난한 것을 걱정하는 판에 하물며 일반 서민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이어서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라 갈파했다.

물론 일부 특수한 인간이 소신 때문에 빈곤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예외로 치고 그 외의 빈곤한 사람에 대해서는 실패한 인생이라 보았던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다음 이야기를 보자..

「집이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시고 처자식들은 밥벌이를 못할 지경에 처했다. 게다가 명절이 되면 조상에게 제사 지내거나 술자리를 마련할 돈도 없고 또한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기본적인 의식주도 마련하지 못하는 주제에 스스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과는 이상 할 말이 없다.」

사마천(司馬遷)이 이렇게 과감한 주장을 한 이후로 어언 2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공부를 많이 한 현대 중국의 지식인들일지라도 혹 마음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이런 이야기를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 정도로 사마천은 솔직하고 용감했다.

이런 이야기를 과감하게 했기 때문에 사마천(司馬遷)은 훗날 《한서(漢書)》의 저자 반고(班固)의 호된 비난을 받게 된다. 《한서(漢書)》 <사마천전(司馬遷傳)>에서 반고는 다음과 같이 비난을 퍼부었다..

「사마천의 가치관은 성인(聖人)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있다. 인생 만사의 최고 기준을 논함에 있어 유가 사상보다 도가 사상을 우위에 놓았고, 협객(俠客)을 논하면서 고결한 인물을 뒤로 하고 간웅(奸雄)을 치켜세웠다. 또한 돈 문제로 들어가면 권력과 재물을 숭상하고 빈곤함을 경멸하였으니 이런 점들이 사마천의 오류라 할 것이다.」

사마천을 비난하는 이런 대목으로도 반고(班固)의 생각이 중국 역사상 유가 사상이 정통 사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단서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확실한 증거는 반고의 《한서(漢書)》제20권에 들어있는 <고금인표(古今人表)>다. <고금인표(古今人表)>는 이름 그대로 반고 이전의 옛 유명인사 1931명의 인품을 상상(上上)부터 시작해서 하하(下下)까지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 배열한 것이다.

여기에는 전설적인 인물 여와(女媧)도 있고 유소씨(有巢氏)도 있으며 《논어(論語)》에 등장하는 공자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춘추(春秋)》라는 역사책에 기록된 각국 제후(諸侯)도 포함되어 있다. 모두 진(秦)나라 이전 사람들이다.

반고(班固)는 유가사상에 근거한 권선징악(勸善懲惡)적 관점에서 과거 인물들을 평가한 것이 바로 이 <고금인표(古今人表)>인데, 그 내용을 보자면 상상(上上) 성인(聖人)의 그룹에는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비롯하여 주공(周公) 공자(孔子)가 들어가 있다. 공자(孔子)를 마지막 성인으로 집어넣고 공자 이후에는 성인(聖人)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맹자(孟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저 공자 제자인 안연(顔淵)이나 대정치가였던 관중(管仲)과 같은 등급 상중(上中) 인인(仁人)에 집어 넣었다. 도가(道家)나 법가(法家) 묵가(墨家) 계열의 사람들, 가령 노자(老子)나 상앙(商鞅) 신불해(申不害),묵자(墨子), 한비(韓非) 등은 모두 중상(中上)에 집어넣었으며 병법가(兵法家)에 속하는 손빈(孫臏)이나 백기(白起) 등도 역시 중상(中上)에 넣었을 따름이다.

자객(刺客)으로 이름이 높은 형가(荊軻)는 중중(中中)에 넣었으며 맹상군(孟嘗君)과 여불위(呂不韋)도 중중(中中)에 집어넣었다.

한편 최하위의 하하(下下) 우인(愚人)에는 치우(蚩尤), 공공(共工), 삼묘(三苗)를 넣었고 포사(褒姒)와 달기(妲己)도 여기에 넣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유명한 진시황(秦始皇)은 중하(中下)에 넣었다는 것이 다소 의외인데 못난이 진이세(秦二世) 호해(胡亥)가 하중(下中)에 있고 환관(宦官) 조고(趙高)가 하하(下下)에 속한 것을 보면 다소 이해가 간다.

반고(班固)의 이러한 평가 작업은 그가 유가 교육을 철저하게 받지 않고서는 이렇듯 단지 옛날 책의 한 구절 한 단락에 의거하여 그 많은 인물들의 인격이나 인품을 표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인간의 인격이며 인품이란 간단하게 규정할 수 없는 것인데 마치 키를 재듯 재단했다는 것은 그가 속했던 사회와 교육 환경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가(儒家) 인물들의 고리타분함은 결코 공자나 그 직계 제자들의 진정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점에 관해서는 공자와 맹자를 통해본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참고할 것) 번문욕례(繁文縟禮)라고 일컬어지는 복잡다단한 절차와 의식는 후세 유가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그렇게 했던 이유는 문관(文官) 집단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중국인들에게 불행중 다행인 것이 반고(班固)가 《한서(漢書)》를 쓰기 이전에 사마천(司馬遷)이란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사마천(司馬遷)과 《사기(史記)》가 없이 그냥 반고(班固)로부터 중국의 정사(正史)가 시작되었더라면 중국 역사의 전통은 획일적인 문이재도(文以載道)의 방침으로 일관했을 것이다.

문이재도(文以載道)란? 모든 글은 도덕적 윤리적 관점에 복무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요즘으로 이야기하면 도덕적 테러리즘 정도가 될까?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렇지 않아도 별 재미없어 보이는 중국과 중국인이 더욱 위선적이고 더욱 무미건조해졌을지도 모르며, 또한 각가지 사상이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전통이 영영 사라질 뻔하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건- 고맙다, 사마천! -




한양대 이인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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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09-07-31
[일반] 영조가 홍낙명·이석재 등에게 《사기》의 무제본기를 읽게 하다

영조 39년 계미(1763, 건륭 28) 12월 23일(을사)일에 영조가 홍낙명·이석재 등에게 《사기》의 무제본기를 읽게 하고 담론하다. 임금이 유신(儒
운영자 09-06-30
[일반] 항우와 유방을 중심으로 본 초한전쟁 고찰

항우와 유방을 중심으로 본 초한전쟁 고찰 Ⅰ. 序論 중국 고대 최초의 통일제국인 秦나라는 14년 만에 멸망하게 되고, 뒤이어 漢나라가
운영자 09-03-13
[일반] 사기의 체제-열전(안동대 이윤화 교수)

사기(史記) 체제 - 열전(列傳) 1. 열전의 성격과 의미 *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 “ 정의를 扶持하고, 불굴의 기개를
운영자 09-03-11
[일반] 사기130 편명과 번역문 게재 현황표

사기 130편명 本紀(본기)12 (卷1-12) 五帝本紀(오제본기) 夏本紀(하본기) 殷本紀(은본기) 周本紀(주본기) 秦
운영자 09-02-15
[일반] 만화사기3

서울대가 선정한 인문고전 50선
운영자 08-09-09
[일반] 만화사기2

서울대가 선정한 인문고전50선
운영자 08-09-09
[일반] 만화사기1

서울대가 선정한 인문고전 50선
운영자 08-09-09
[일반] 이규보의 굴원유감-屈原不宜死論

屈原不宜死論(굴원불의사론) 굴원은 죽지 않았어야 함에 대한 의론 古有殺身以成仁(고유살신이성인) 예날에 자신을 죽여서 인(仁)을
운영자 08-05-05
[일반] 사마천과 EH Carr의 역사관 비교

사마천의 <사기>와 에드워드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1) 역사를 보는 눈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21세기 역시 또 한 세
운영자 0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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