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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체제-열전(안동대 이윤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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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기(史記) 체제 - 열전(列傳)




1. 열전의 성격과 의미




*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 “ 정의를 扶持하고, 불굴의 기개를 지녔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功名을 세운 사람들에 대하여 70편의 열전을 만들었다”




* 「열전(列傳)」의 성격과 인간의 활동 : “열전(列傳)”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그 중 「열(列)」을 「예(例)」 즉 배열, 서술로 보고, 동시에 「전(傳)」은 「주해(注解)」의 의미로 보는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 즉 열전을 “예시적(例示的)인 주해(注解)”로 이해하여, 본기(本紀)와 세가(世家)에 대한 주해(注解)로서 「열전」의 기능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는 󰡔춘추󰡕에 대한 「公羊傳」의 기능과 거의 같다. 즉 현실의 정치와 역사는 제왕 및 그를 둘러싼 제후를 주축으로 진행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역시 개인의 활동이란 의미에서 열전을 작성. 따라서 「열전」에는 “해석”이라는 의미와 후일의 「전기(傳記)」라는 의미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함.

* 사마천은 열전을 전(全)생애의 전기(傳記)라는 의미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즉 권61 「관안열전(管晏列傳)」에서는 전체 공적(公的) 경력을 무시하고 그 대신 그들의 개성을 나타내는 몇몇 일화를 소개함. 당시의 소위 「전기」의 형식이 생애를 그대로 의미 없이 나열하기보다는 그 중 특별한 일을 기록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마천은 어떤 유형의 인간이든지 그 인간에게서 善行(美德)을 찾고자 하였고, 그 같은 선행이 갖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했다. 예컨대 조고(趙高)의 경우, 진말(秦末) 실력자이면서 善行과는 거리가 먼 권모술수에 능한 권력 추구자로서 타인의 열전에 부정적으로 묘사, 단 자신은 개인적 열전이 없음. 사마천이 고의적으로 무시. 즉 사마천이 역사적으로 “말살(抹殺)‘해 버림.

** 여하튼 사마천(司馬遷)은 개인의 능동적 활동을 통해서 역사가 창조되고 추진된다는 신념을 「열전(列傳)」을 「본기(本紀)」에 대한 “例示的 注解”로 설정케 한 것이라 여김. 이와 같은 열전의 이해만이 상이한 체재의 「본기」와 「열전」이 내적으로 긴밀하게 관련되고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아울러 사마천의 인간중심의 역사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나 사태의 진전은 개인의 노력․결의․판단․행동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또 다수의 참여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것을 사마천이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 「열전(列傳)」의 형식 : 1인의 전기(傳記), 혹은 2인 내지 數人의 전기, 주변의 이민족(夷狄)의 역사. 동시대의 여부와 관계없이 비슷한 성격의 인물을 한 열전에 담기도(「굴원가생(屈原賈生列傳)」, 「유림열전(儒林列傳)」, 「유협열전(遊俠列傳)」, 「자객열전(刺客列傳)」, 「영행열전(佞幸列傳), 「골계열전(滑稽列傳)」, 「순리열전(循吏列傳)」, 「혹리열전(酷吏列傳)」 등)

2. 「열전(列傳)」의 특징과 사마천의 역사의식




* 역사적 인물의 평가와 관련한 결정론의 공통점 : 「열전」 이해와 관련하여

1. 어떠한 개인이라 할지라도 역사를 새로이 만들 수는 없다. 그의 천재적 능력이나 창의성 내지 위대성은 단지 시대정신, 사회적 현실여건, 문화 등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발휘됨

2. 위인의 행위는 일차적으로 역사과정을 통해 그 의미가 결정됨. 아무리 그의 행위의 동기, 의도, 목적이 숭고하고 위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최종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오직 역사.

3. 아무리 위대한 사상체계나 행위라 하더라도 시대적 여건이나 문화적 환경이 그것이 알맞게 성숙되어 있을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함.

4. 그러므로 偉人이란 역사적, 사회적 제 세력의 대변자이며 상징임에 불과. 위인이란 한 마디로 역사법칙의 지표(Index)요 도구, 수단이며 결과일 뿐.




(1) 정신과 물질사이




전체 70편의 「열전」 중 「백이열전(伯夷列傳)」(권61)이 첫머리에 등장 : 전체 「열전」의 서론(序論) 혹은 총론(總論)의 성격을 지님.




1)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인정 : 「백이열전(伯夷列傳)」의 내용




① 학문을 하는데 참고할 만한 서적 언급 : 六藝 - 詩․書․禮․樂․易․春秋

② 요순우(堯舜禹)의 선양(禪讓) - 악목(岳牧)의 추천으로 관직에서 인품과 능력을 수십년 검증 : 천하는 막중한 것이며 임금은 대통(大統)으로 만기(萬機)를 보살펴야 할 책임 - 천하계승의 어려움

* 요(堯)와 허유(許由), 그리고 夏나라 때 변수(卞隨)와 무광(務光) : 모두 천하를 물려준다는 말을 듣고 귀로들은 것이 부끄러워 귀를 씻음 : 그러나 사마천은 이에 관해 전해지는 말을 들었고 하남성 기산(箕山)에 올라 許由의 무덤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孔子도 언급을 안하고 󰡔시경󰡕과 󰡔서경󰡕에도 기록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고 함.

③ 그러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仁과 관련하여 󰡔논어(論語)󰡕에도 언급함. 사마천이 보기에 󰡔논어󰡕에서는 伯夷叔齊가 사람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런 까닭에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仁을 구하였다고 했지만, 사마천이 보기에 특히 백이의 채미가(采薇歌)를 보면 공자와는 다른 뜻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들의 전기를 소개)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아들로서 숙제(叔齊)에게 위를 잇게 함. 父 사망 후 叔齊는 다시 그 위를 伯夷에게 양보, 백이가 숨자, 叔齊 또한 숨어 버림. 방법 없이 그들의 동생이 계승함. 둘은 周의 문왕에게 가서 살기로 함. 그러나 西伯 昌(文王)은 죽고 무왕이 계승- 위패를 앞세우고 殷商정벌을 시도 - 이를 만류 (孝(아직 喪中)와 仁(以小逆大)에 모두 벗어난다고 함), 죽이려 하자 太公 望이 의로운 사람이라 하고 보내줌

④ 천하가 周를 宗國으로 하자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여 采薇歌 지음




“ 지금 나는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무왕은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되,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더라

신농(神農)․우(虞)․하(夏)는 어느 사이엔가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

내 어디로 돌아가리, 아! 가리라, 목숨도 이미 지쳤거니.... “




⑤ 백이와 숙제도 사람을 원망하는 뜻이 있었다. 물론 당시에 누군가가 “하늘의 도리(天道)는 私가 없으며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이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불행하게 죽은 伯夷叔齊는 착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어진 덕을 쌓고 품행이 방정(方正)한데도 굶어죽었다. 이런 예는 또 있다. 孔子의 문하에 있던 70명 제자 중 안회(顔回)도 생활고에 시달려 일찍 죽음 : 그렇다면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베풀었다는 것이 무엇인가? 도척(盜跖)은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천하를 횡행(橫行)해도 천수를 누림. 그 외에 다른 예도 수없이 많다고 함. 윤리와 도덕과 천도(天道)의 어긋남에 대하여 심각한 회의(懷疑). 아무리 조심하고 신중하고 공정하게 살아도 재앙을 받는 것은 사마천 자신을 당혹케 한다고 자문함. 그리고 결론적으로 과연 天道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⑥ 그러나 사마천은 회의에만 그치지 않고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세상이 다 혼탁하여야만 청렴한 사람이 더욱 돋보이게 된다. 부귀를 중히 여기는 속인들과 義를 중시하는 청렴한 인사와는 그 대조되는 바가 극단인 때문”이라 인식함.

⑦ 가의(賈誼)의 말을 인용 : 탐욕하는 자는 재물 때문에 죽고, 열사(烈士)는 이름을 위해 죽고, 권세를 부리고자 하는 자는 권세 때문에 목숨을 잃고 평범한 서민은 오로지 생활에 매달리게 된다“

⑧ 伯夷叔齊가 비록 賢人이지만 孔子의 붓을 통해서만 비로소 그 이름이 드러나게 됨. 顔回는 학문에 충실하였지만 孔子의 기미(驥尾)에 붙음으로서 그 품행이 더욱 돋보이게 됨. 그런 점에서 許由와 務光은 슬픈 일이다.

⑨ 사마천은 마지막으로 “시골 촌구석에 살면서 품행을 닦고 이름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덕망 있는 명사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름을 후세에 전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사마천은 결코 운명론자는 아니었으며, 인간중심의 사상을 철저히 견지하였다.

인간의 운명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표시, 특히 자신의 비극적인 생의 체험은 인간을 지배하는 운명의 힘을 강조하는 듯한 인상. 인간중심의 역사인식의 구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백이열전(伯夷列傳)」의 서(序)에서 운명론에 빠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백이열전」에는 사마천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갈등이 적나라하게 노출. 청대의 장학성(章學誠)은 󰡔문사통의(文史通義)󰡕 卷6, 「서교(書敎)下」에서 「伯夷列傳」은 단순한 열전이 아니라 70篇 列傳의 序例라고 하였다. 叔齊와 함께. 周의 殷정벌을 “以暴易暴”이라 하여 반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采薇하다 죽음. 司馬遷은 그들이 남겼다는 采薇詩에서 그 시에 원망이 담겼는가 아닌가를 의문. 인간의 운명문제를 제기함. 백이와 숙제 그리고 顔回와 盜跖의 대비. 인간의 덕행과 현실적인 인생의 화복이 항상 乖離하고 있는 사실에 크게 당혹함. 도대체 天道는 어떠한 기준으로 인간의 禍福을 결정하는가. 극단적인 회의와 운명의 장난에 대한 저주를 토로하기도. 도대체 모든 인간의 운명이란 우연에 의해서 좌우될 뿐 인간의 주체적 노력이나 덕행은 아무 관계가 없지 않은가. 숙명적 비관론?

그러나 여기에서 사마천은 덕행과 禍福은 서로 동일한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함. 부귀와 덕행은 그 추구하는 방법이 같지 않다고 인식함. 그러면서도 司馬遷은 덕행의 보상을 요구하는 마음이 있기도. 그러나 덕행의 보상이 “聲名의 後世 流傳”으로 됨을 긍정.




그러나 「백이열전(伯夷列傳)」의 결론에서 다시 우연론(偶然論)에 빠진 듯한 인상. 報償의 실현이 靑雲之士의 知遇와 관련됨으로 偶然과 밀접함. 운명론자의 인상. 그러나 史官으로서 자신의 책무와 운명을 관계지음으로서 극복함. 인간행위의 결과보다는 동기를 강조함. 즉 󰡔사기󰡕는 인간의 희망과 야망과 의지를 강조한 책이라 평가되기도 함.

일본인 학자 카이스카 시게키(貝塚茂樹)는 사마천이 열전에서 인간의 심리분석의 묘사를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것은 󰡔공양춘추󰡕의 역사철학을 부정하고 사건 당사자의 동기해명으로서 역사를 이해하려는 동중서(董仲舒)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식함. 덕행이 현실적으로 인생의 화복과 괴리(乖離)된다면 그것은 현상적 결과보다는 내적 동기로 판단할 수밖에 없으며, 그 판단에 의해 적절한 명성(名聲)을 보장해주는 것이 역사가의 책임.




2) 물질의 중요성 - 민간경제의 발달 : 화식열전(貨殖列傳)(권129)




* 내용 : 서두 “ 無位無冠인 匹夫의 몸으로 정치를 해치지도 않고 백성을 방해하지도 않으며 때에 따라 팔고 사서, 재산을 늘려 부자가 된 사람이 있으니 이들에게 갈채를 보냈다. 그래서 「화식열전」을 지었다.




卷130이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이니 이 「화식열전」은 열전의 마지막임. 「백이열전」을 정신주의라고 한다면 「화식열전」은 물질주의를 대표하는 기록이다. 대비의 형식이 확인된다.




① 노자의 小國寡民論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이해함. 道를 내세워 무위자연함을 주장하지만 이는 결국 백성의 귀와 눈을 막는 것인 셈. 神農이전의 일은 잘 모르지만 詩經과 書經에 언급한 虞夏 즉 舜禹의 일은 아는데 그 이후로 사람의 五官은 모두 좋은 것을 취하려함. 따라서 老子의 玄妙한 이론이라도 백성을 감화시킬 수 없음. 그러므로 “최선의 방법은 그들의 심성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고, 다음은 이익으로써 백성을 이끌고, 그 다음은 백성을 가르쳐 깨우치는 것이고, 강제로 백성을 규제하는 것은 이 보다 못하지만 가장 정치를 못하는 사람은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다”라고 함.




② 각 지방의 특산물 언급 : 山西 -지복과 대나무, 닥나무, 옥석; 山東-물고기, 소금, 옻, 실, 미녀 江南 - 가래나무, 생강, 금, 주석,납, 단사, 진주 등 나열하고 “ 농사꾼은 먹을 것을 공급하고 나뭇꾼은 자재를 공급하고, 기술자는 이것을 물건으로 만들고, 장삿꾼은 이것을 유통시킨다. 이러한 활동은 위로부터의 政敎에 의한 지도나 징발, 期會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그 힘을 다해 원한 것을 손에 넣는 것 뿐 : 물가가 오르고 내리고 유통되고 그 직업에 힘쓰고 하는 것이 모두 참으로 道와 부합되는 것이며 자연의 이치로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 農虞(산림수택의 개발과 관리에 종사하는 사람) 工商은 백성들의 입고 먹는 것의 근원이다. 근원이 크면 백성은 부유해지고, 근원이 적으면 백성은 빈곤하다. 이 넷은 위로 나라를 부하게 하고 아래로 가정을 부하게 하는 것. 빈부라는 것은 밖에서 빼앗거나 주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그 사람의 재능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재능이 있는 자는 부유하고 모자라는 사람은 가난한 것.


* 경제와 경영논리로 治國함의 중요성을 강조함. 齊의 管仲의 능력을 칭찬함.

(이성규 역서 p. 340 참조)




③ 商人列傳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이 전개됨

* 지리는 경제를 만들고 경제는 人情을 만든다고 인식함. 물질보다는 그에 관여하여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을 것.




* 「伯夷叔齊列傳」과 비교하여 읽을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즉 정신주의와 물질주의 대비를 알 수 있다. 정신과 물질사이의 고민을 잘 말해주는 증거라고 여김.




* 隱者, 官吏, 將軍 등 모두가 물질에 지배받는 것이란 극단적인 평가방식. 자연의 理法이라고 까지. 사람이 부유해지면 理法도 따른다고. “천하는 희희락락 다 이를 위하여 오고 천하는 양양하게 다 이를 위하여 간다”. 독특한 경제지리학 : 즉 지리는 경제를 만들고 경제는 인정을 만들어 낸다. 그 인정이 역사를 형성하고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면 물질은 모든 것의 동력일 수도. 그러나 司馬遷은 물질주의자도 그 찬양자도 아님. 財貨의 위력과 그 앞에 나약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자학적으로 묘사?




** 司馬遷의 경제사상 : 「平準書」, 「河渠書」, 「貨殖列傳」의 존재, 역사 속에 경제활동의 기재를 필수화함. 소박한 유물관점으로 사회경제활동을 파악함. 계급적 관점에서 피통치계급에 대한 동정, 물론 농업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상품경제의 자유발전을 강조함. 당시의 시대적 조건에서 상품경제를 강조한 사상가는 매우 적음. 그러나 묵자와 桑弘羊에 대한 立傳이 안된 것은 결함중의 결함.




* 司馬遷의 경제사상을 파악하기 위한 과제들




1. 역사발전의 동력(動力)과 도덕규범에 대한 인식

2. 財富관념 : 화폐와 財富와 자본을 혼돈

3. 경제방임을 위주로 한 정책을 지지함

4. 분배관념

5. 생산경영론

6. 일정한 수량의 화폐자본을 필수로 여김, 상품의 질량을 대단히 중시, 자금의 유동성 강조, 적당한 利潤率의 주장, 보편적 상품의 중요성, 적당한 시기의 중요성 강조




(2) 상징적인 인간들




「管晏列傳」 : 管仲과 晏嬰에 대한 상징성을 묘사함.

「刺客열전」, 「循吏열전」, 「儒林열전」, 「佞幸列傳」, 「滑稽列傳」 등 : 다양한 인간들

「老莊申韓列傳」 : 유가사상과 이질적인 독자적인 요소. 정치적 인간에 대한 묘사

「仲尼弟子列傳」 : 유가사상의 群像

「孟子荀卿列傳」 : 맹자와 순자 이 외에도 鄒衍, 淳于髡(순우곤), 愼到, 鄒奭 등




(3) 문화와 문학자




* 「劉敬叔孫通列傳」 : 특히 叔孫通은 고조의 곁에 있으면서 소위 “文化人”의 역할. 한 대 문화의 건설자.




* 「平津侯主父列傳」 : 공손홍이라는 교활하고 의심 많은 악인의 전형으로 그림. “曲學阿世”의 전형적인 인물로. 「유림열전」에서도. 사마천은 숙손통을 통해 문화의 기묘(정치적 신의나 의리와는 관계없기도 한 것으로 인식), 공손홍을 통해 문화인의 實態를 표현하고자 함.




* 「屈原賈生列傳」에서 굴원과 가생을 문학자와 정치적 인간의 예로 봄. 사마천 자신의 문학론을 주장하기도. 이와 반대의 분위기에서는 「司馬相如列傳」에서는 명랑, 진취, 현실적인 문학자의 모습을 그림.




* 영웅호걸의 군상 : 武人, 功臣, 서로 대립하던 두 인물의 몰락을 그린 열전. 또 다른 중심세계를 구성하던 맹상군, 평원군, 춘신군 등 열전, 자객과 유협열전 등. 특히 유협과 자객열전의 의미




(4) 민간질서의 구조 : 「유협열전(游俠列傳)」(권124)




「游俠列傳」은 班彪와 班固부자이래 貨殖列傳과 더불어 司馬遷을 이단적으로 평가할 때 그 실례로서 늘 거론되어 왔다. 사마천은 游俠문제를 다루면서 󰡔韓非子󰡕의 儒者는 文으로써 법을 어지럽히고 俠者는 武로써 禁을 범한다고 인용함. 이는 儒와 俠 모두를 비난한 한비자를 비판한 것이 아니고 儒俠양쪽을 모두 다 처벌하는 韓非子의 견해를 찬성하는 것. 즉 儒者를 칭찬하고 俠은 비판하는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고 游俠에 관심을 가지고 문제점을 직시해야한다고 파악함.




* 은․서주시대의 씨족제 사회가 해체되기 시작한 춘추말기이래, 고대 중국인에게서 생성, 작용한 습속으로 성장한 임협적 기풍의 대세에서 보면 「游俠列傳」의 기록은 빙산의 일각이고, 유방과 그의 주변에 존재한 집단을 연결하는 내면적 결합의식이나 급암(汲黯)을 비롯한 궁정의 구관료들의 경향도 그렇지만 전국시대이래 진한에 걸쳐 제도적으로 완비되어 간 관료제 자체도 일단은 그러한 임협적 습속과는 별개의 국가질서원리에 입각하면서도 그 원리자체가 이 같은 사회현실에 기반을 두고 생성된 것은 아닌가. 즉 씨족제가 해체된 결과 의존할 만한 질서를 상실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율적으로 만들어진 민간질서로 출현한 것이면서 국가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이 습속에 의한 집단이 구심적으로 강화되면 될수록 집단외부에 대해 적대적 행동으로 나오기 때문에 또 생산의 場에서 단절의 행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탄압대상이 됨. 豪强의 존재도 새로운 爵制秩序에 저해되는 존재로 물론 탄압의 대상이 됨.




* 사마천의 입장은 儒俠의 문제를 파악함에 있어서 儒者가 칭찬 받고 俠이 비난받는 모순에 대해 이견을 지님. 즉 儒者가 칭찬 받는다면 俠도 인정해줘야 한다는 논리.




* 사마천은 진정한 游俠과 豪暴(호포)의 무리를 구별함.




* 유자(儒者)에 대한 칭찬 : 세상에서 많은 칭찬, 학술로 재상이나 공경․대부가 되어 그 군주를 補益하여 역사에 그 功名이 기록된 사람들은 새삼 말할 것도 없고 : 독서를 통해 홀로 꿋꿋이 행동하는 군자의 덕을 쌓았으나 정의를 지키며 현실에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고, 초라한 집에 살며 조악한 음식을 먹으며 살아감.




* 유협(游俠)에 대한 칭찬 : 비록 그 행동이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점은 있어도 그 말은 틀림없이 지키며,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수행하고, 한 번 약속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하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며, 死生․存亡이 걸린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그 덕을 내세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역시 칭찬을 받을 면이 많은데도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는 사람이 없다.




** 「유협열전」의 내용




1.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伊尹, 傅說, 姜太公, 呂尙, 管仲, 百里奚, 孔子(이들 儒者들이 말하는 소위 도를 따르는 仁人들도 이러한데 보통사람이야 말해 무심하랴)




* 중요한 지적 : 곤경을 처한 사람의 말 ; “仁義를 알아서 무엇하랴? 내가 덕을 본 사람을 유덕자로 생각 할 뿐이다.” (당시에 있어서 사회구조가 매우 私的인 성격을 가졌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 “아주 작은 것(帶鉤)을 훔치면 처형되나 나라를 훔치면 왕후가 된다”, “王侯의 門 안에 仁義가 존재한다”는 식의 이해 - 매우 현실적인 이해( 伯夷와 盜跖의 예)

* 물론 그러면서도 가치의 차이를 인정 : “ 배운 것에 구애되어 조그만 義라도 지키며 오랜 세월을 세상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사람과 자신의 주장을 굽히고 세속에 맞추어 세상과 부침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를 얻은 사람을 같이 논할 수는 없다고 인식함.




* 그러나 일개 布衣에 불과하더라도 주고받은 것이 분명하고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며 의로운 명성을 떨치고 세상의 평판을 무시하며 죽음도 불사하는 游俠들도 칭찬할 만. 당시에 있어서 영향력이 뛰어남.




* 왕족의 신분으로 근세 延陵季子, 孟嘗君, 春申君, 平原君, 信陵君 등이 있지만 지위와 부를 배경으로 쉽게 명성이 날 수 있는 위치. 그러나 閭巷의 游俠이 더 어려움. 儒家와 墨家가 그들을 배척하여 기록하지 않음 애석한 일이라 탄식함. “비록 법망에 저촉하는 일도 있었지만 사적인 도의면에서 廉潔과 겸양의 미덕이 있어서 칭찬할 만.




* 그러나 패거리를 짓거나 유력한 일족이 도당을 이루며 재산을 축적하고 빈민을 사역하거나 외롭고 약한 자를 포악하게 억누르며 자신의 욕심만 마음껏 충족시키려는 자들은 游俠도 역시 추하게 여김. 포악한 깡패라고 여김. 당시의 호족 중 망나니들




2. 개별 游俠




1) 朱家 : 호걸을 숨겨줌(당시 법체계의 엄함을 비판), 내세우지 않음. 빈천한 사람부터 도움, 그러면서 자신은 매우 검소함.

2) 劇孟 : 任俠으로 제후간에 명성, 吳楚7국의 난 시대에 살면서 吳楚편에 서지 않음. 그를 따르는 이가 많음. 당시 江淮의 王孟, 濟南의 간씨(瞯氏), 陳의 周庸도 호걸로 유명 - 景帝가 사자를 파견하여 모두 처형(국가 권력과 상치됨)그 외에도 연이어 나타남

3) 郭解 : 그의 父도 任俠이었지만 孝文帝때 처형됨. 성격이 못되고 급함. 복수를 대신해주기도. 도망자 숨김, 범법행위 계속: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개과천선함 절도 있는 행동, 원수를 덕으로 갚고. 사적인 부탁(踐更을 빼주는 일)의 횡횡, 報仇의 횡횡, 해결사, 큰 깡패 , 국가의 법률체계를 무시함, 따라서 국가로 보아서는 처결대상, 공손홍의 말 “곽해는 布衣에 불과한 주제에 任俠으로 자처하며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그의 화난 눈짓 하나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비록 곽해가 유생을 죽인 것을 모른다고 하지만 그 죄는 곽해 자신이 죽인 것 보다 더 크며 대역무도의 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일족과 함께 처형당함.




* 「한대(漢代)의 민간질서(民間秩序)와 임협(任俠)문제




한대의 유협(游俠) : 漢代의 국가 통치기구 가운데 특히 지방통치기구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해결 되어감. 그러나 법제적 성격의 규명이 중심이다. 그러나 고유한 목적이나 동기 그리고 고유한 생활감정의 영향은 규칙화된 기구의 성격과는 다를 수도 있다. 현실생활을 규정하는 법제화된 제도 속에 활력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주의하지 못한 문제들을 유의할 필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이의 곤경을 구하는 游俠의 윤리와 행위가 당시에 어떤 의미? 사마천의 경우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반해, 班固의 경우는 󰡔사기󰡕의 「유협열전」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 자세. 즉 “序游俠則退處士而進奸雄”이라 함(󰡔漢書󰡕 「司馬遷傳」 贊) 따라서 󰡔漢書󰡕에도 「유협열전」이 있지만 사마천과는 다른 서문을 써서 游俠을 일종의 사회규범을 무시하는 죄인으로 취급함. 荀悅 또한 󰡔前漢紀󰡕에서 游俠之徒와 游說와 游行之徒를 三游라 하여 도덕과 법과 세상을 어지럽히고 상하게 한다고 강하게 비판함. 물론 과거에 한비자도 游俠을 五蠹의 하나로 비판함.

따라서 游俠을 민간질서의 유지자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있고 국가질서를 어지럽히는 擾亂者로 지목하여 비판. 물론 이들의 행위가 국가의 법령에 위배, 이는 사마천도 일부 인정함. 그러나 특히 郭解가 관중에 들어왔을 때(茂陵에 徙民되어 옴) 민간의 환영을 받은 이유는? 사마천이 이 같이 국가질서를 범하는 집단을 立傳한 이유는? 소위 국가 통치의 외곽질서(지방통치기구)에 이 기구를 초월하는 任俠의 존재를 백성이 신뢰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 사마천과 반고 사이에 보이는 차이가 어떠한 사회적 변화에 기인한 것인가?




* 戰國시대의 새로운 인간결합관계의 성질 : “유협”




유협세력이 의존한 사회관계를 파악할 필요. 爲人報仇, 捨身救窮困, 藏亡匿死의 游俠精神은 새로운 人的 결합의 모티브, 그리고 養客의 습속이 민간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짐. 이와 같은 새로운 결합방법을 통한 지방세력의 규합이 중요한 변수로. 戰國시대 4공자의 존재도 이러한 인간관계의 기초 위에서 가능했던 것.




* 秦漢之際 劉邦집단의 성격이 바로 이 같은 입협적 질서를 이용함.




* 漢代 民間秩序의 구성과 國家秩序의 관계


* 土豪, 豪俠, 豪族이 그 중심에 있었다. 조조와 손권 등도 모두 이 범주에 속하는 질서 위에 세력을 규합하기도. 그러나 그 집단의 성격은 당시에 있어서 매우 한정된 인간관계 사이에 나타난 개별적인 성격. 자신들간에는 豪俠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豪猾로 불릴 수도. 󰡔後漢書󰡕 이후에 「游俠열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 같은 경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들을 보는 視覺이 완전히 고정된데서 즉 폭도나 범법자로 고정된 때문일 것.




** 卷86 「刺客列傳」 : 荊軻 :진시황의 암살기도




* 「刺客列傳」은 특정한 인물의 이름으로 列傳名을 삼지 않은 類傳에 해당한다. 특정한 역사환경 중에 동일한 유형의 인물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類傳은 사건위주로 인물을 서술함. 史記는 「類傳」의 이름으로 篇目을 정하고 있는 것이 10개 : 刺客, 循吏, 儒林, 酷吏, 游俠, 佞幸, 滑稽, 日者, 龜策, 貨殖 등




「刺客列傳」에는 曹沫(魯人), 專諸(吳人), 豫讓(晉人), 聶政, 荊軻(衛人) 등이 기록되어 있다.

*豪强의 탄압 : 卷122 酷吏列傳




* 西漢 酷吏의 작용평가

봉건사회에 있어서 嚴刑峻法시행의 관리를 지칭.




① 酷吏는 封建帝王의 법외권력을 추구하는 도구로 이용됨. 그러나 역으로 그들은 人主의 기대에 반하여 私利를 추구하기도. 대체로는 황제가 추구하는 이념과 동일한 괘도. 明君의 재위시에는 중앙권력을 보호함. 그러나 봉건전제를 강화시키는 도구로 이용. 무제때 酷吏는 중앙정권을 옹호하는 조처를 적극 시행하는 적극성. 그러나 이들을 한 편으로 제후왕을 견제하고 지방 豪强들을 억제하였지만 다른 한 편 철저하게 이들과 연결됨. 豪强地主․富商大賈와 밀접. 이후 인민을 억압하는 屠夫로 변함.




② 통치계급의 법정권력을 옹호하는 수단. 황제가 추구하는 습관적인 권력의 충실한 수단일 뿐 아니라 봉건법률의 제한을 받음. 그 역할에 대하여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함.




* 당시 한 제국이 필요로 한 것은 공손홍과 같은 유가관료는 아니었다. 대 흉노전쟁을 수행하고 국내치안을 유지하고 신 재정정책을 관철할 유능한 실무관료였다. 그것은 황제권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하고 국가의 법을 충실히 준수해서 법술의 시행에 있어서 약간의 사정도 개입하지 않는 관료였다. 「酷吏列傳」의 인물은 질도(文景시대인)를 제외한 10명이 모두 무제시대의 관료임. 酷吏와 상반되는 관료상으로서의 「循吏列傳」에 기재된 인물은 모두 전국시대의 이전 인물. 한 대 인물은 한 명도 없음. 󰡔漢書󰡕의 「循吏列傳에」 기재된 인물은 역시 宣帝이후의 인물로 무제시대 인물은 없다. 물론 武帝초기의 賢良方正의 추대는 법가나 종횡가를 배운 사람은 제외라고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제 때의 관료는 酷吏가 대표. 예컨대 장탕이 法術관료로서 대표적임. 사회불안과 酷吏의 출현은 정비례함. 한 제국의 국내모순이 심하면 심할수록 酷吏의 수요가 증가함.




* 후일 州刺史(감찰관)의 설치가 바로 이러한 정신과 일맥 함. 六條를 통한 감찰




① 彊宗豪右(대성과 호족)의 전택이 제한을 넘어 약자를 깔보고 衆寡를 해치는 것




② 二千石(郡太守)이 조서를 올리지 않고 공적인 일을 사사로이 하거나 조정을 비방하고 사리를 취하거나 백성을 침탈하는 간사한 짓을 하는 것




③ 이천석이 疑獄을 가련하게 여기지 않고 살인, 私刑남발, 미신을 믿는 것




④ 이천석이 관리를 추천할 때 공평하지 않고 사적인 정에 빠져 현자를 추천하지 않는 것




⑤ 이천석의 자제가 권세에 의지하여 군중에서 청탁을 받는 것




⑥ 이천석이 호강에 아부하고 뇌물 바치고 바른 법령을 훼손하는 것

--모두 지방관과 호족 사이의 불법제휴를 감찰하는 것

** 개인 열전의 특징: 권87 李斯( B.C280?-208)列傳의 例




① 「李斯列傳」은 총명하면서도 교활한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성격특징을 잘 확인해주는 글. 따라서 민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평가하는 눈. 聰明, 自私, 貪財의 성격.

상당히 다양한 사료를 통하여 李斯의 각종 성격특징을 확인하게 함.

* 사람의 賢不肖가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봄. 荀子에게서 공부하면서 분석한 당시의 정세를 판단으로 하여 楚를 택하지 않고 秦을 선택함.

* 韓人 鄭國의 “疲秦計”의 발각과 逐客令 그리고 逆轉

* 李斯에 대한 평가와 관련한 司馬遷의 자세는 그의 功業을 강조하기보다는 그의 성격적 결함을 지적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쓰여진 기록이 있다. 聰明과 圓滑 그리고 주견 없음과 順從 등에 대한 판단을 해 가도록 서술함. 즉 사마천은 李斯를 奴才로 서술함. 庸才로 보지는 않음. 결국 司馬遷은 德과 才를 분리하여 평가하면서 여전히 德을 上位에 둠.




② 「이사열전(李斯列傳)」 내용




* 이야기 시작 : 郡의 하급관리시절 쥐의 이야기 - 관청의 변소에 있는 쥐와 창고의 쥐 : 처지에 따라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결정됨.

* 荀子에게서 帝王의 術을 배움 : 李斯는 본래 楚의 上蔡人, 후일 楚王은 인재가 아니고, 6국은 모두 약하여 功을 세울만하지 못하다는 판단으로 秦으로 감. 荀子에게 작별하며 한 말:

전국말기의 상황, 無官의 士人들과 遊說者들의 절호의 기회, 비천함과 곤궁함에 대한 수치와 비참함 인식, “오랫동안 비천한 신분과 곤궁한 처지에 빠져 있으면서, 세상을 비난하고 榮利를 싫어하며 스스로 無爲의 철학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은 士人의 진정한 뜻이 아니다”

* 李斯가 秦에 도착한 때 : 莊襄王이 사망한 때(B.C 249) - 呂不韋의 舍人-郎으로 천거

* 기회를 틈타 秦始皇에게 자신의 주장 : 강력한 정책의 집행을 건의 - 그 중 秦이 승세를 타고 諸侯를 부린 것도 6代가 되었다고 하여 孝公이후부터라고 인식함. * 長史에 임명됨 - 遊說와 제후간의 이간정책 실시

* 客卿에 임명됨. 그 때 韓人 鄭國이 운하(鄭國渠)건설 중 (국력소모용으로) - 음모발각으로 逐客令이 논의됨 - 이에 대한 李斯의 반대 상서

* 逐客令을 철회한 이후에 李斯의 복직과 廷尉에 임명됨. 그 후 20여년 秦은 마침내 천하를 겸병하고 王을 높여 황제를 칭하였으며 李斯를 승상으로 임명.

* 정책의 내용

郡縣의 성곽을 파괴하고 천하의 兵器를 녹임, 封建을 반대하고, 焚書를 주장하고, 기타 始皇의 통일정책의 수립과 실천에 영향력

* 부귀가 극에 달하자 탄식 : 지나치게 번성함을 경계해야 한다는 도리를 인식하고 있었음.

* 始皇 사망후 遺詔를 놓고 宦官 趙高와 二世와의 대화 중 : 二世의 초기 판단 - 德을 어기면 천하도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위험에 빠지고 사직도 단절될 우려가 있다.“

* 趙高의 李斯 설득과 몽염과의 비교, 李斯의 갈등과정

* 趙高의 時勢의 변화에 관한 언급

* 趙高와의 대화 내용에 모두 과거 역사적 사실을 통해 논의가 진행됨.

* 李斯가 결국 설득을 당한 것은 당시의 설득방식이 일반화됨. 자신들도 그러한 설득을 통해 군주를 회유함 방식에 의해 설득됨.

* 결국 扶蘇에게 자살토록 하고 몽염을 압송하여 죽이는데 성공하고 二世가 황제로 즉위함

* 二世가 황제로 즉위 후 즐기면서 천수를 누리고 싶다할 때 자신들의 음모에 대한 여론을 상기시키고 강력한 공포정치를 행하기를 건의함.

* 陳勝과 吳廣의 반란이 일어남.

* 李斯의 諫言과 二世의 答辯

* 李斯에 대한 二世의 견제와 李斯의 두려움 그리고 그의 上書내용 : 督責術에 대한 건의

* 이후 二世는 더욱 督責에 능한 관리를 칭찬하고 엄격한 통치

* 二世의 은밀한 통치행태 : 황제권력의 신비화 유도, 실제로는 인간적 약점을 황제의 신비한 권위로 가탁하여 숨기려함.

* 趙高의 李斯제거 시도와 李斯의 반격(趙高비판)- 二世의 趙高두둔-李斯제거

* 李斯의 탄식을 통한 군주의 당연한 治道는 앞서의 督責術과는 전연 다르다.

* 趙高의 고문과 취조에 다시 허위 자백함. 그리고 다시 上書함

* 3족이 멸함. 趙高의 절대권력과 “指鹿爲馬”, 조고의 이세(二世) 살해와 子嬰의 즉위 - 멸망




** 太史公曰 : 帝業을 성공시켜 삼공의 지위에 올랐지만 六藝의 근본정신을 알고도 밝은 정치로 主上의 결점을 보완하는데 힘쓰지 않고 높은 작록을 지닌 채 아부하는데 급급하여 위압적인 권위를 앞세우고 형벌을 가혹히 하였으며 趙高의 邪說을 듣고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웠다. 뒤에 諫爭하려 했지만 때가 늦었고, 세상에서는 충성을 다하고도 처형을 받았다고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俗論과는 다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李斯의 공이 周公, 召公과 비슷하였을 것이라 평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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