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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와 유방을 중심으로 본 초한전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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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항우와 유방을 중심으로 본 초한전쟁 고찰




Ⅰ. 序論




중국 고대 최초의 통일제국인 秦나라는 14년 만에 멸망하게 되고, 뒤이어 漢나라가 세워진다. 진 말기 진시황(秦始皇)이 죽음에 이르고 질서가 어지러워지자 전국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반란으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농민 반란이 있었다. 농민 반란으로 시작된 혼란한 상황은 진나라가 완전히 붕괴된 후, 중국 천하가 초패왕 항우(項羽)와 한왕 유방(劉邦)의 전쟁으로 양분되어 집약되게 된다. 이것을 초한전(楚漢戰)이라 한다.




초한전은 진나라의 멸망과 한나라의 성립 사이의 약 5년 동안의 전쟁시기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중국 고대에 있어서 이 시기의 사료는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의해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관한 연구는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시점은 진말의 혼란시기부터 초한전이 끝나고 유방이 한고조가 되기까지이다. 이 시기 동안 시대상황은 어떠하였고, 초한전은 어떠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중국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은 최초의 농민 출신 황제였다. 그에 맞서 싸운 항우는 초나라의 무장으로 귀족출신이었다. 이 전쟁에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항우가 천하를 재패하는데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이 두 군주는 어떠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秦末의 時代狀況




1. 始皇帝의 죽음




BC 221년 오랜 겸병전쟁을 끝내고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나라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은 통일왕조를 건설한 후에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회복에 중점을 두지 않고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육국(六國)의 궁궐 양식을 모델로 하여 수도 함양(咸陽)에 대규모의 아방궁(阿房宮)과 호화로운 여산릉(驪山陵)을 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리장성과 도로를 건설하고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흉노(匈奴)와 남월(南越)을 정벌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통일제국을 공고히 다지는데 일정 부분 긍정적인 역할도 하였지만, 여기에 장기간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투입함으로써 그것은 오히려 백성들의 조세와 부역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가혹한 형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이 조금만 법을 어겨도 그것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죄인들이 수십만에 달하였다. 이런 시황제의 정책은 진나라가 단기간에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하였고, 또한 시황제가 죽음으로써 진나라는 멸망으로 치닫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始皇帝는 B.C 221년에 10월에 다섯 번째 순행을 떠나게 되었다. 여기에 시종한 수행인은 승상(丞相) 이사(李斯), 소자(少子) 호해(胡亥), 중차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 등이었다. 始皇帝 일행은 양자강(陽子江)을 도하하여 절강성(浙江省)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회계산(會稽山)에 이르러 송덕비를 세운 후에 해상으로 북상하여 산동(山東)지방으로 올라왔는데 산동지방의 평원진(平原津)에 이르러 시황제의 병이 점차 악화되어 하북성 평향현 사구(沙丘)에서 사망하였는데 향년 50세, 재위 37년이었다. 사망하기 전에 시황제는 조고에게 유서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장군 몽염을 도와 감군사(監軍使)로서 북변에 가있는 장자 부소(扶蘇)를 불러들여 장례에 참석케 하고 제위를 잇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유서가 발송되기 전에 시황제가 사망하였으므로 평소에 부소 및 몽염 일가와 사이가 좋지 않던 조고는 호해와 이사를 설득하여 호해를 태자로 삼고, 부소에게 사약을 내리는 유서로 개조하였다. 이 음모의 성공에 의해 호해는 이세황제(二世皇帝)로 즉위하고 장자 부소는 북변에서 자살하였다.




조고의 도움으로 황제에 오른 이세는 그 이듬해 趙高를 낭중령1에 임명하였다. 조고는 항시 이세의 주변에 있으면서 모든 정치를 농단하였다. 이세는 시황제의 장례를 치룬 후에 먼저 몽염 형제를 거세하였다. 그리고 二世의 즉위방법에 불만을 품고 있던 10여 명의 근친과 대신들을 주륙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조고의 간계에 의한 것이었다. 이세황제는 다음으로 시황제가 완성하지 못하였던 아방궁 건축 사업을 재개하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인원이 다시 동원되고 헤아릴 수 없는 물자가 소요되었는데 원성과 비방이 높아가자 내란을 우려한 이세황제는 외군으로부터 새로이 5만의 군대를 징발하여 함양(咸陽)에 주둔시키고 또 부하의 반란을 우려해서 북변에 신군을 파견하여 구 부대와 교체시켰다.




이와 같이 아방궁 건축사업의 재개에 따른 막대한 노동력과 물자의 소비, 이의 충당을 위한 농민에의 가렴주구, 혹독 각박한 법치의 시행 등은 백성들의 반항과 저항을 불러 일으켜 마침내 대대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2





2. 陳勝ㆍ吳廣의 반란




秦의 말기 전국적인 반란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던 최초의 반란은 二世皇帝의 즉위 다음 해인 기원전 207년 7월에 일어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반란이었다. 당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빈농 출신의 하급장교였는데 두 사람은 징발한 900여명을 인솔하고 어양(漁陽)에서 변방을 수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도중에서 큰 비를 만나 도로가 불통하게 되어 기일을 어기게 되었다. 당시 진법에 의하면 장교가 기일을 어기게 되면 참형을 당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진승과 오광은 비밀리에 화를 면할 모의를 하였다. 당시 이세황제는 합법적으로 제위를 계승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으며 또한 扶蘇가 죽은 줄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초地에서는 옛 楚나라 장수 항연(項燕)이 민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부소와 항연의 이름을 빌어 봉기한다면 백성들이 호응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렇게 획책한 후 진승과 오광은 마침내 지휘관을 죽이고 군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진승은 장군, 오광은 도위가 되어 먼저 대택향(大澤鄕)과 기현(蘄縣)을 점령하고 이어서 기현을 점령하고 이어서 기현 이동 지역을 공격하고 서진하여 많은 성을 함락하였다. 반란군이 진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병거(兵車)가 600여乘, 기병(騎兵) 1000여명, 보졸 수만에 달했다. 짧은 시일 내에 陳勝의 병력이 이렇게 급속히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함락된 모든 성의 병졸과 秦의 학정에 시달린 부근의 농민들이 반란군에 합세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반란이 이렇게 성공하고 세력이 급속도로 신장되자 陳勝은 부대를 진에 집결하여 놓고 부근의 三老, 호걸들을 초대하여 이들의 추대에 의하여 왕이 되었다. 이에 진승은 국호를 장초(張楚)4라 하고 오광을 가왕에 봉하였다.




한편으로 빈농 출신 진승의 반란은 곧 바로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六國의 왕실 내지 지배계층이었던 기족들의 후예는 秦에 대한 보복의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각지에서 분분히 봉기하였는데 齊왕실의 후예인 전담(田儋)은 자립하여 齊王이 되었으며 魏왕실의 후예인 위구(魏咎)는 魏地에서 魏王으로 자립하였다. 그리고 楚地에서는 項燕을 비롯하여 수업이 많은 인물들이 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秦제국은 순식간에 반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와 같이 陳勝ㆍ吳廣의 반란을 시초로 하여 일어난 반란 중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項羽와 劉邦이었다.




한편 전국적으로 반란이 여기 저기에서 일어나자 秦궁서에 있던 박사 유생들은 二世皇帝에게 급히 장병을 보내어 반란을 진압하여야 된다고 상주하였는데 반란의 소리를 들은 二世皇帝가 크게 노하였으므로 박사 숙손통(叔孫通)이 반란이란 말을 群盜로 바꾸어 상주하였다. 이에 二世皇帝는 크게 기뻐하며 叔孫通에게 상품을 하사하고 반란이라고 한 유생은 하옥시켰는데 이 같은 사실은 당시 황제이념과 그 지배체제가 절대화되어 이에 도전하는 반란 같은 것은 용서할 수 없고 지방 질서를 일시적으로 교란하는 도적의 무리로 표현해야 했던 사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二世皇帝의 이같은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게 되자 지방 군현으로부터는 반란군의 상황에 대한 상세하고 정확한 보고가 끊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농민반란은 여러 가지 요인을 내포하고 있었다.




전국시대 말기의 중국사회는 비록 六國으로 분열되었지만 통일을 지향하는 기운이 각국에 조성되고 있었는데 특히 상업과 교역의 발달 및 학술 사상의 발달과 상호 교류에 의한 공동문화 인식은 통일기운을 더욱 조성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느 의미에서 볼 때 六國은 秦에 평정될 때 별로 강한 저항을 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六國民은 秦의 법치와 군현적 지배를 받아보니 견디기 힘들었다. 지방 군수에도 秦관리가 부임하여 지방의 전통과 관습을 고려하지 않고 진의 법률에 의해 행정과 재판을 획일적으로 강행하고 예외와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六國의 지배계층이었던 유력자는 그들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六國의 지배계층이었던 유력자는 그들의 특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새로 부임한 秦관리의 전횡과 압박에 희생되었으므로 불만과 원한이 쌓였다. 그러나 특권계층의 불만과 원한이 시황제의 재위시에는 그의 위엄과 정치에 대한 근면으로 표면화 되지는 못하였는데 그의 사후 이세황제의 무능과 趙高의 농단 그리고 방대한 토목공사에 재개에 따른 착취와 수탈로 야기된 단순한 농민반란은 이 같은 秦 사회 내부에 축적된 불만과 반항에 불을 붙이는 기폭제가 되어 마침내 전국적인 반란이 야기되게 된다.




陳勝ㆍ吳廣의 반란으로 시초로 하여 여러 반란들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陳勝이 보낸 주문(周文)의 병력이 西로부터 秦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주변의 군성을 함락하면서 咸陽에 육박하였다. 이에 놀란 二世皇帝는 군신을 소집하여 방비책을 강구하였으나 모두 속수무책이었다. 오직 少府 장감(章邯)이 도적은 이미 이르렀고 또 세력이 막강하므로 이제 인근의 군현병력으로 막기는 힘들다고 하며 여산(驪山)에 복역하고 있는 형도들을 석방하고 이들에게 무기를 주어 반군을 격퇴해 볼 수 밖에 없다고 상주하였다. 이에 二世皇帝는 驪山에 형도들을 사면하여 무기를 주고 章邯을 장으로 하여 이들에 대적케 하였다. 이에 章邯는 周文을 함곡관(函谷關)에서 격퇴시키고 다시 추격하여 민지(澠池)에서 周文을 패사시키고 승세를 몰아 陳勝이 주둔하고 있는 陳에 이르렀다. 이에 진승은 장감의 진군에 대항하기 위해 출전하였으나 패사하고 말았다. 장감의 활약에 의해 진승ㆍ오광의 세력은 소멸되었으나 각지의 반란과 기병은 요원의 불길처럼 확대되었으므로 장감 혼자서는 막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 장감의 활약에 의해 사정이 호전되자 秦 궁정에서는 이같은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난 원인을 규명하기 시작하였는데 조고는 이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고 또 군주 자리를 엿본다고 무고하여 이사와 그의 삼족을 주살하였다. 이렇게 이사를 거세한 조고는 자신이 승상이 되어 정치를 완전히 장악하고 전횡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나 반란군이 秦軍을 격파하고 날이 咸陽으로 육박하자 二世皇帝가 패군의 책임을 추궁할 것을 두려워하며 마침내 기원전 207년 二世皇帝를 시해하였다. 그리고 二世皇帝 형의 아들 자영(子嬰)을 옹립하여 秦王으로 세웠는데 이 때에 秦王이라고 한 것은 六國의 후손들이 자립하여 왕을 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秦王으로 등극한 子嬰은 조고가 반란군과 내통한다고 의심하여 조고와 그 일족을 주살하였다. 그리고 이미 關中에까지 진격하여 온 유방에게 옥새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렇게 되어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이었던 秦왕조는 3대 14년만에 멸망하게 된다.5




3. 項羽와 劉邦의 등장




진나라 말기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난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項羽와 劉邦였다. 項羽와 劉邦은 초한전으로 맞서 싸우게 되고, 이 중에 劉邦이 곧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가 된다.




유방의 자는 계(季)이고, 패(沛, 지금의 강소성 패현) 출신으로 진나라때 사수(泗水)의 정장(치안 담당 하급 관리)을 지냈다. 그는 패에서 군사를 일으켜 점차 병력을 집결시킨 후 망탕산에 웅거하였다. 유방이 봉기한 것은 진승이 7월에 대택향에서 봉기한 두달 후인 9월이었다. 유방의 인상은 높은 코에 용의 얼굴이고 왼쪽 다리에는 72개의 사마귀가 있었으며 사람을 아끼고 주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활달하였으며 큰 도량을 지니고 있어 조그마한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않았다. 유방은 휘하에 소하. 조참. 번쾌 등 한제국 건국 공신을 거느렸고 패현의 자제 3천명을 기반으로 하여 제후들의 세력과 호응하게 되었다.6




유방이 패에서 군사를 일으킬 무렵 절강성의 회계에서는 아버지 항연을 진나라 장수 왕전에게 잃은 항량(項梁)이 진나라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씻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항량은 초나라 명장 항연의 아들이다. 초나라 사람들은 이 항연의 죽음을 믿지 않으려 했다. 진승과 오광이 맨 먼저 봉기할 때 초나라 사람들의 이러한 영웅 불사설을 이용해서 항연의 이름을 사칭할 정도로 항연을 초나라 사람들에게 추앙되고 있었다.




항우(項羽 : BC233~BC202)는 진(秦)나라 말기 하상(下相: 지금의 강소성 숙천<宿遷> 서남) 출신으로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이다. 항우는 키가 8척이 넘고 세발 달린 큰 솥(鼎)을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그의 조부 항연(項燕)은 전국 말기 초(楚)나라의 명장으로 진나라 장수 왕전(王翦)에게 살해되었다. 숙부 항량(項梁)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 살인을 범하여 항우와 함께 오중(吳中: 지금의 강소성 소주<蘇州>)에 피신해 있었다. 항량은 그곳에서 숨어 지내면서 큰 부역과 상사(喪事)가 있을 때마다 항상 그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암암리에 빈객과 젊은이들을 모아서 조직적으로 훈련시켰다.




향량은 또 그에게 병법을 가르쳤지만 그는 대략적으로 대의를 파악한 후에는 더 이상 깊이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우는 재주와 기개가 탁월하여 진시황이 회계산(會稽山)을 유람할 때 그 모습을 길가에서 지켜보고는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 취하겠노라"고 말하기도 하였다.7




항우는 초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성격이 단순하면서도 자존심이 강하고 감정적이며 무력에 뛰어난 무인기질의 인물이다. 유방은 농민출신으로 자유분방하고 권모술수에 능하며 자기감정을 잘 억제하는 냉혹한 정치가형이다. 유방과 항우는 연령적으로 많은 차가 있었다. 시황제가 죽던 해 항우의 나이는 22세이고 유방은 37세였다. 두 사람이 군사를 일으킬 때도 유방은 행정 구역상으로도 가장 하급 단위인 패현에서 일어나 패현의 자제 3천명을 거느렸고, 항우는 여러 현을 지배하는 군에서 일어나 정병 8천명을 거느렸다. 따라서 이들의 리더쉽의 차이로 어느 면에서나 유리했던 항우를 제치고 초한전이 유방의 승리로 귀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Ⅲ. 楚 · 漢戰








1. 楚 · 漢戰의 배경 및 전개과정




진승의 봉기에 호응했던 반란군 가운데 가장 유력한 세력은 유방과 항우였다. 그 가운데 항우는 숙부인 항량을 수령으로 하여 진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고 초왕실의 心이란 인물을 세워 회왕으로 삼아 초의 부흥을 주창했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항우의 뛰어난 전술을 보고 점차 항우의 휘하로 결집하게 되었고 진의 반란토벌군을 각지에서 패퇴시켜 진의 명장인 장함과 왕리가 도리어 초군에 귀순하게 되었다. 이것을 鉅鹿의 전투라 한다.8




한편 유방은 반란이 일어나자 진의 토벌을 주창하면서 현의 하급관리였던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번쾌(樊噲) 등을 중심으로 3천명의 세력을 결집했으며 점차 병력이 증대되면서 항우와 연합하여 초군에 합류하였다. 이 어수선한 정국의 상황에서, 초 회왕은 제일 먼저 진의 수도인 함양에 입성하는 사람이 진의 본거지인 관중의 왕이 된다는 약속을 하였다. 초 회왕의 명령에 의하여 진의 수도 함양을 목표로 항우군과 유방군은 동남 양편에서 출발하게 된다. 이 경쟁에서 유방군은 항우군보다 한달 먼저 관중에 입성하게 되었다. 진왕 자영은 이 때 유방에게 항복을 하면서, 진은 멸망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 때 유방은 군이 함양에 도착하자 장량의 건의에 의하여 궁실과 보화 재물을 府庫에 봉하고 제후와 공동으로 관리하였으며 기타의 재물에 대해서도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또한 진의 가혹한 법치주의(法治主義)에 시달렸던 사람들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통치의 세 가지 원칙만을 제시하였다.




유방이 여러 현의 유지들과 호걸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그대들은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시달린 지가 오래되었소. 진의 정치를 비방하는 자는 일족이 몰살되었고 또한 논하는 자까지도 사형에 처해져서 시체가 시장 바닥에 내던져졌소. 나는 제후들과 약속하기를 먼저 입관하는 자가 관중의 왕이 되기로 했으며, 그렇기에 나는 마땅히 관중의 왕이 될 것이오. 차제에 나는 그대들과 약속하오. 법은 3章 뿐이오. 즉 사람을 죽이는 자는 사형이오.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도둑질하는 자는 거기에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오. 진나라에서 시행해 오던 기타의 모든 법은 모조리 파기하겠소. 이제 여러 관리들이나 백성들은 모두 안심하고 종전과 같이 생활하기 바라오. 대체로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온 것이지 침략과 포학을 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도무지 없소. 또 회군하여 팽성에다 포진한 이유는 다른 제후들의 도착을 기다려서 약속을 이행하려 하기 때문이오.9








즉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유방은 첫째로 사람을 죽인자는 사형, 둘째로 사람을 상해 입힌 자와 셋째로 도둑질을 한 자는 각각 정도에 따라 처벌한다는 세가지 조항의 법(約法三章)만을 정하였고 다른 진대의 법률을 폐지한 것이다. 또한 백성들에 대하여 일체 피해를 끼치지 않겠다 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유방보다 한달 늦게 온 항우군은 도착 즉시 항복한 진왕 자영 및 진의 종족을 주살하고 함양의 궁실을 소각하고 재물 보화들을 제장들에게 분배하여 주었다. 이때에 아방궁은 불탔으며 여산릉도 항우군사들에 의하여 도굴되었다. 항우는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고, 회왕에게 상황을 보고했으나, 회왕은 약속대로 이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항우는 분노하였고, 항우와 유방과의 관계도 미묘하게 전개되었다. 항우보다 한달 먼저 입성한 유방은 진왕을 항복시킨 대공은 있었으나 진군의 일개 부장에 지나지 않았으며 병력은 10만에 불과하였다. 반면 홍문에 포진한 항우는 4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초의 상장군으로 진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그러므로 양자간의 관계는 한때 험악해졌으나 결국 세력이 약했던 유방이 홍문에 포진한 항우의 진영을 방문하여 친히 사과함으로써 불편한 관계는 일단 해소되게 된다.10




실제로 항우에게 있어서 유방은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유방은 초회왕의 명에 의해 입관을 시도하였고, 또한 가장 먼저 입관을 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방은 입관 후 約法三章으로 제민을 慰撫하는 등 실질적인 관중왕의 권한도 행사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유방이 자신이 주재하는 질서에 편입되자, 독자적으로 유방을 제거할 수가 없었다. 이렇듯 항우의 세력은 입관 당시 諸勢力 중에서는 가장 우세하였으나, 이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11




사실 秦 멸망 이후 중국천하를 재편성한 사람은 항우였다. 그러나 당시의 민심으로 보아서는 육국의 왕족 후손들을 왕으로 옹립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실제적으로 진을 타도한 제장들의 공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항우는 먼저 진의 토평에 참가하였던 제장, 육국 왕족의 후예 그리고 진의 제장 등으로 구성된 18명을 전국 각지에 분봉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B.C 206년 彭城 을 근거지로 하는 西楚國의 왕이 되어 覇王으로 칭하였다. 그러나 무원칙적인 제후의 분봉과 영토의 분배는 제장들의 불만을 야기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유방의 불만은 가장 컸다. 또한 항우의 이같은 제후분봉은 진의 군현제도를 부정하고 봉건제도에 의한 제후분립의 형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봉 이후 얼마 안되어 불만에 찬 제후간의 불평과 충돌은 폭발되기 시작하였다. 즉 18제왕 분봉이 문제가 된 것이다. 먼저 齊相 田榮은 齊를 건국하였으나 봉호를 받지 못하여 불만이 많았고, 趙將 陳餘도 같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田榮은 반란을 일으켜 臨淄王 田都, 膠東王 田市, 濟北王 田安 등을 살해하고 자립하여 齊王이 되었으며, 陳餘도 常山王 張耳를 축출하고 대신 王 이 되었다. 그리고 燕王 韓廣도 遼東으로 가지 않으려다가 장군 臧茶에게 피살되어 영토가 臧茶에게 병합되어 버렸다. 이렇듯 제후 간에 반란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자 항우는 齊를 공격하고 동서로 분주하게 되었는데 이 틈을 타 한왕 유방도 은밀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유방은 먼저 관중으로 진출하여 雍王 章邯, 寒王 司馬欽, 翟王 董翳의 항복을 받아 관중을 병합하였다.




유방의 관중 병합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그것은 또한 관중이 지리적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관중은 동은 함곡의 요새이며 渭水 일대의 교통중심지였다. 또 토지도 비옥하여 농산물이 풍부하였으며 주와 진이 모두 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아래의 기록은 당시의 요충지라는 관중의 지리적 이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① 秦의 國土는 山을 등지고 있으며 河川을 휘감아 西方으로 막힌 견고한 나라였 다. 穆公이래로 秦始皇에 이르기까지 20여명의 王은 늘 覇者가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歷代 君主가 모두 賢明했기 때문인가. 다만 그 地理的 形勢가 그러하였기 때문이다.12








② 秦의 땅은 山에 에워싸고 있고 河水를 끼고 있어 四面이 天涯의 要塞로 堅固하게 막혀있어 갑자기 危險한 사태가 일어나도 100萬의 軍士를 動員하여 배치할 수 있습니다. 秦의 옛 터전을 차지하여 더없이 비옥한 땅을 소유한다면 이것이 바로 天然의 곡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陛下께서 函谷關으로 돌아가서 그 곳에 都邑한다면 山東이 비록 어지럽더라도 秦의 옛 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13








위의 두 기록은 모두 관중의 지리적 여건이 수성에 적합함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용이한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14 또한 관중은 秦의 고지로서 秦이 楚에게 멸망된 것을 목격한 秦人은 초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탔는데, 유방은 이 지역에 군을 설치하여 관중지역의 지리적 조건과 인적 물적 자원을 직접 확보하여 초와의 항쟁에 전진기지로 삼은 것을 의미한다.




한편 팽성을 근거지로 하여 西楚의 覇王을 자처한 항우는 18제후 봉분을 하였고, 초 회왕 의제를 살해하였다. 관중을 석권한 유방은 항우가 의제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식댈 윗저고리를 벗은 후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또한 의제를 위해 정식으로 죽음을 발표하고 사흘간 哭禮를 했다. 그런 후 사자들을 각국의 제후에게 보내어 격문을 고하게 하였다. 고조본기에 나타난 격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았다.








천하가 함께 의제를 세우고 北面하여 신하의 위치에서 그를 섬겼다. 그런데 항우는 의제를 강남으로 추방하더니 기어코 그를 죽였다. 이것은 대역무도한 행위이다. 나는 자진하여 그를 위해 죽음을 발표한다. 제후들은 모두 흰 상복을 입으라. 그리고 관내의 병사들을 모조리 동원하고, 삼하(三河 : 河南ㆍ 河東ㆍ 河內)의 선비들을 결집시켜, 남방으로 배를 타고 江漢을 하행해, 나는 여러 제후왕들을 따라서 의제를 사살한 자를 치고자 한다.








유방은 이렇게 항우의 죄를 지목하면서 제후 왕에게 항우토벌의 격문을 보낸다. 격문을 받고 제후들이 모여 56만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15








그 즈음의 항우는 북진하여 齊를 치고 있었다. 전영이 항우와 城陽에서 싸웠지만 견디지 못하고 平原으로 도망쳤다. 평원 사람들이 전영을 죽이자 제나라는 초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초군은 제의 성곽을 불지르며 제나라 자녀들을 모조리 포박해 포로로 잡았다. 그러 인해 제나라 사람들은 초를 배반했다. 전영의 아우 田橫(전횡)이 전영의 아들 田廣(전광)을 찾아 세워 제왕으로 삼았다. 제왕은 성양에서 초에게 반란했다.




항우는 유방의 군이 동쪽에서 진격해 온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제나라와 교전중이었으므로 신경을 쓰지 못하였다. 그 틈을 이용한 유방은 다섯 제후들을 위협해 전군을 동원하여 초의 근거지인 팽성으로 돌입할 수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항우는 齊나라를 떠나 포위군 중에서 선발한 정예 3만을 앞세우고 밤낮 없이 팽성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유방은 비록 대군을 가지고 숫자만 많았을 뿐 세력이 약하여 항우의 정예군을 당하지 못하였다. 항우는 유방의 부모처자를 패현에서 탈취해 군주에 두고 인질로 삼기까지 하였다.




이 같이 유방이 항우에게 패배하자 제후들은 유방을 등지고 다시 항우에게 항복 합세 하였는데 유방의 열세를 만회해 준 것은 유방의 수하 장수였던 소하(蕭何)와 한신(韓信)이었다. 당시에 소하는 유방을 따라 종군하지 않고 관중에 남아서 유방의 수차의 군사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군량과 병력을 조달하여 유방의 세력을 진작시켰다. 또한 한신은 처음에는 항우에게 속해 있었으나 중용되지 않았으므로 유방에게 기탁하여 장군으로 중용되었다. 한신은 유방이 남쪽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魏王 표(豹)를 사로잡아 魏地를 석권하고 趙王 헐(歇)을 사로잡아 超地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동으로 진격하여 齊地를 평정하고 이를 구원하러 온 楚軍을 크게 물리쳤다. 그리하여 양 세력이 백중하여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유방는 계속된 항쟁에 지쳐 항우에게 홍문을 경계로 동과 서로 천하를 양분하자고 제의하였다. 제안의 뜻으로 항우는 군중에 억류되어 있던 유방의 부모 처자를 한으로 돌려보냈다. 양측에서는 화의가 성립되어 홍문을 경계로 천하를 동서로 양분하여 동은 楚地 서는 漢地로 정하였다. 항우는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가고, 유방 역시 군사를 몰아 서족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 때 모사 장량(張良)이 진평과 함께 유방에게 지금이 초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간언하였다. 이에 유방군이 동으로 귀환하는 항우군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전투가 재개되게 된다. 이번에는 유방군에 한신 팽월 등의 장수가 합류하여 세력이 일변하였다. 그리하여 항우는 마침내 해하에서 포위당하게 된다. 항우는 간신히 해하의 포위를 뚫고 탈출하여 양자강 서안의 烏江에 이르렀다. 강만 도하하면 항우가 기병하였던 강동 지방이였으나 항우는 도강을 포기하고 자살하고 말았다.




초한전은 이렇듯 항우가 오강에서 자살을 함으로써 그 결말을 맞이한다. 그 때 항우의 나이는 겨우 31세였다. 이렇게 항우가 죽고 유방이 천해를 제패하게 되어, 기원전 202년 최후의 승자 유방이 제위에 올라 漢高祖가 된다.16








2. 楚ㆍ漢戰의 쟁점




楚 懷王은 제일 먼저 진의 수도인 함양에 입성하는 사람이 진의 본거지인 關中의 왕이 된다는 약속을 하였다. 즉 이것을 계기로 초한전의 양상이 펼쳐진다고 볼 수 있다. 유방은 항우보다 한달을 앞서 이미 관중을 차지하여 漢王이 되었다. 항우에 앞서 입관한 유방은 초 회왕의 약속에 따라 가장 먼저 입관한 자기가 관중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항우가 입관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함곡관을 막아 제후연합군의 진입을 막으려 하였다. 유방은 이미 관중 왕으로서의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항우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초회왕의 입관불허의 명을 무시하고 입관을 한 것이다. 사실 秦의 멸망 이후 중국천하를 재편성한 사람은 항우였다. 그러나 당시의 민심으로 보아서는 육국의 왕족 후손들을 왕으로 옹립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실제적으로 진을 타도한 제장들의 공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항우는 먼저 진의 토평에 참가하였던 제장, 육국 왕족의 후예 그리고 진의 제장 등으로 구성된 18명을 전국 각지에 분봉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B.C 206년 彭城 을 근거지로 하는 西楚國의 왕이 되어 覇王으로 칭하였다. 이것은 항우가 유방을 관중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항우의 처사가 곧 초한전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초 회왕이 기존의 자립한 왕들과 유방만을 왕으로 봉하고, 항우와 장상들을 왕으로 봉하지 않은 것이 발단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회왕은 유방에게 관대하였고, 실질적인 對秦鬪爭을 수행한 항우에게는 통제를 가하였다. 항우가 진을 멸망시키고 초 회왕에게 보고를 하자 초 회왕은 항우에게 자신의 약속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항우는 아래와 같이 제후들에게 분봉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제후들의 동의를 구하여 분봉을 실시하게 된다. 이것은 항우가 직접적으로 초 회왕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었고, 항우의 세력을 알 수 있는 것이다.17




天下에 처음 難이 일어났을 때, 臨時로 諸侯의 後裔로써 秦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먼저 擧事를 하여 이슬을 맞고 들에서 三年을 보내며 秦을 멸망시키고 天下를 평정한 것은 모두 諸相諸君의 힘입니다. 義帝가 無功한 까닭으로 당연히 그 땅을 나누어 왕이 되어야 합니다.18








위와 같이 항우가 초 회왕의 약속을 무시하고 분봉을 실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신과 같이 입관한 제후들의 강력한 지지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 회왕이 내건 먼저 입관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된다는 조건은, 당시 진의 멸망에 참여하느라 관중에 늦게 가게 된 제후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초 회왕이 초의 제장들의 입관을 독려하였을 때, 각지의 제후들이 입관을 시도하기보다는 위험에 처한 鉅鹿을 구원하기 위해 모였다는 기록에서 볼 때 초회왕의 약속은 초에 속한 장수들 이외에는 그 구속력을 같지 못하는 등 보편성도 지니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항우는 입관한 제후들을 본봉하지 않고, 초회왕의 조약과 같이 먼저 입관한 유방을 관중 왕에 분봉하였다면 후에 입관한 제후들의 강력한 반발을 야기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후들이 입관을 시도한 가장 큰 목적은 진의 멸망과 더불어 수반되는 이익이었으며, 이것으로 인하여 이들을 항우를 중심으로 결집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항우 역시도 초 회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18제후왕을 분봉하고 나서 스스로 왕위에 올라 ‘西超覇王’이라 칭하고 彭城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즉 항우가 유방을 관중이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초 회왕이 자신과 제후들에게 본봉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초한전을 일으키게 되는 쟁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당시 항우는 초의 귀족으로서 또한 숙부인 항량의 지지기반이 있었던 장수였고, 4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초의 상장군으로 진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반면 유방은 진왕을 항복시킨 대공은 있었으나 진군의 일개 부장에 지나지 않았으며 병력은 10만에 불과하였으므로 항우 스스로도 자신이 관중의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항우 등이 3년간 죽음을 무릅쓰고 치른 전쟁의 결실을 초 회왕은 자신과 자립한 왕들의 몫으로 하고 말았다. 이러한 초 회왕의 논공에 대하여 항우와 제상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초 회왕의 항우와 제상들에 대한 배신이었다. 항우는 분노한 제상들을 설득할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이끌고 초 회왕과 자립한 왕들을 공략한다는 것은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립한 왕들은 전장이 秦地로 옮겨진지 이미 1년이 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었으나, 항우군은 章邯군과 대치 때 이미 군량 등 전략 물자가 결핍되어 있었으며 군사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이들을 이끌고 다시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초한전 때 유방과 항우가 두 번 씩이나 화해로 전쟁을 종식시키려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19




또 한가지 초한전쟁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시기에 관한 것이다.




초한전의 시기는 진나라 초나라 한나라가 얽혀 있어, 뚜렷이 어느 시기라는 결론이 나질 않는다. 사실 한 고조 유방은 그 자체의 정치적 전통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오로지 秦왕조 타도라는 명분 아래 기의의 정당성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반진봉기의 실마리를 제공한 진섭의 張楚정권하에서였고 진섭의 사후에도 項梁과 초 회왕하에서 楚國 정권의 일부로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항우와 대립하였던 명분도 반진동맹의 맹주이며 자신의 군주이기도 한 楚의 황제인 초 회왕을 살해하였던 죄를 물었던 것이다. 역시 유방은 자신이 反秦동맹의 맹주도 아니었고 楚의 일부로서 활동을 했던 것이며, 유방 또한 존재의 당위성이 반진이었다면 정치적 전통과 정통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유방으로서는 漢 창업의 실마리를 張楚정권과 楚義帝정권에 기댈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다시 말하면 秦의 멸망을 선도한 것은 漢이 아니었다. 秦에서 漢으로 직접 이전된 것이 아니라 陳涉, 項羽를 거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단순한 한의 전사로 편입될 성질은 아니며, 그렇다고 단순한 秦의 멸망과정도 아니다. 진섭을 세가로 항우를 본기에 편입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실제 정황을 존중한 것이었지만, 이 기간은 또 하나의 중요한 성격이 있었다. 즉 秦에 의해 일시 구현된 천하통일 체제가 와해되고 정치적인 분열체제가 재현된 것이 바로 그 것이다.20




즉 초한전은 유방과 항우의 전쟁시기이지만, 이 시기를 역사적으로 볼 때는 정치적인 분열시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Ⅳ. 項羽와 劉邦에 대한 평가




항우와 유방 초한전의 양 군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이한 조건과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평가는 어떻게 내려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




경쟁자였던 유방과 항우가 서로 이름이 없던 시절에 시황제의 행렬을 만나 똑같이 입지의 말을 던졌다고 하는 것은 기이한 일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표현에서 뒷날 사람들이 유방과 항우의 성격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당시 진시황이 순방차 절강(浙江)에 왔을 때, 항우는 숙부인 항량을 따라 구경하러 갔다가 처음 진시황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우 : 내가 저놈의 자리를 대신하리라(被可取而代也)








유방은 과거에 징용 인부로서 咸陽에 간 일이 있는데, 그 때 진시황을 처음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방 : 대장부란 마땅히 저 정도는 되어야 한다(大丈夫當如此矣).








두 사람의 표현은 궁극적으로 같은 것을 말한 것인데, 유방의 표현은 매우 완곡한 표현으로 자신은 있지만 그 자신을 숨기고 있는 데 반하여 항우의 표현은 노골적이고 직설적이다.21








둘 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표현으로, 짤막한 표현으로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부각시킨 것이다.




당시 항우가 15세가 더 많았고, 출신에 있어서도 대대로 초나라 장군을 지낸 명문 출신의 항우에 비해 유방은 이름 없는 서민 출신이였다. 군사면에서도 유방이 행정구역상으로도 가장 하급 단위인 현(縣)에서 일어나 자제 3천 명을 거느린 반면, 항우는 여러 현을 지배하는 군(郡)에서 일어나 정병 8천명을 거느렸다. 자제와 정병은 그 질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니 자제란 그저 나이가 젊을 뿐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정병이란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선발하여 철저한 훈련을 받은 군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항우는 유방에 비해 전력 면에서 절대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결국 실패자로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실패한 원인을 되짚어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성격과 통치 스타일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전쟁터에서 보여준 그토록 용맹을 떨쳤던 사나이다운 기개와는 달리 그가 끝내 초한전의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 원인에 대해 살펴보면서 유방과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항우는 용맹하였지만 지략이 없었다.




그가 스스로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다"고 과시한 것과, "키가 8척이고 힘이 세발 달린 큰 솥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고 한 ≪사기≫의 기록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의 힘과 용맹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항우는 바로 이러한 힘과 용맹을 바탕으로 숙부 항량을 따라 반진(反秦) 투쟁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항우의 용맹함을 볼 수 있는 예를 두 가지만 들어보겠다.




초한군이 광무(廣武)에서 대치하였을 때, 항우는 3명의 장사를 보내어 유방에게 싸움을 걸게 하였으나, 그들이 모두 유방의 사수(射手) 누번(樓煩)의 화살에 맞아 죽어 버렸다. 화가 난 항우가 직접 갑옷을 입고 창을 집어 들고는 싸움을 걸었다. 누번이 다시 그에게 활을 쏘려하자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누번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화살도 쏘지 못하고는 황급히 진지로 도망쳐 들어가 나오지 못하였다. 또 항우가 오강에서 자결하기 전 도망치는 도중에 한나라 장수 양희(楊喜)가 끝까지 추격해오자 항우가 말고삐를 돌려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양희의 병사들과 말이 깜짝 놀라 몇 리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항우는 바로 이렇게 삼군을 휩쓸어 버릴 수 있는 용맹한 힘으로 진나라 말기의 농민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마침내 서초패왕에 올라 권력의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우는 비록 용맹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필부(匹夫)의 용맹함에 불과하였으며, 그에게는 지략이 부족하고 앞을 내다보는 전략이 없었다. 항우가 관중에 들어간 후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관중의 왕에 오를 것을 권했지만 항우는 의외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것을 알아 주리오?"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함양을 쑥대밭으로 만든 후에 약탈한 재물과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팽성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더없이 풍요로운 관중 땅을 고스란히 유방에게 바치고 만 셈이 되었다. 진나라 때의 관중은 험준한 산하로 가로막혀 있는 천연의 요새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많아 지리적으로 도읍의 가장 적격지였다. 반면 이때의 팽성은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험준한 산하도 없고 앞으로 많은 개발이 필요한 곳이었다. 그런데도 항우는 오히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을 무시한 채 오로지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는 개인적 영예만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결국 항우는 이후 유방과의 전투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루게 되었으며, 해하에서 유방의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는 그토록 용맹한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운이 불리하여 오추마도 나아가지 않네."라는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황급히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항우는 우유부단(優柔不斷) 하였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오히려 화를 당한다는 말이 있다. 항우는 관중에 들어가기 전에 홍문(鴻門)에 주둔하고 있었고, 유방은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패상(覇上: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동남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모사(謀士) 범증(范增)이 항우에게 유방을 습격할 것을 권했지만 항우는 머뭇거리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바로 이때 유방의 배반자 조무상(曹無傷)이 항우에게 밀고하기를, "패공(沛公: 즉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고 자영(子嬰)을 재상으로 삼아 진귀한 보물을 다 차지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즉시 유방을 죽여 버리겠다는 맹세를 하지만, 이렇게 위급한 순간에 유방에게 매수당한 항백(項伯)이 돌아와서 두 세 마디 말로써 설득하자, 항우는 금새 유방을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유방의 사죄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전군의 지휘자로서 다른 사람이 공격하자고 하면 공격하고 화해하자고 하면 화해하는 이러한 우유부단한 태도는 그야말로 그를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항우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 유명한 홍문의 연회에서 범증이 여러 번 항우에게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항우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잠자코 있자 유방은 첫 번째 위기를 무사히 모면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범증이 자객 항장(項莊)을 불러서 검무를 추게 한 다음 기회를 봐서 유방을 죽이라고 하였지만 항백이 나서서 유방을 암암리에 보호하는 바람에 항장은 손쓸 틈이 없었다. 항백이 취한 비상 수단에도 항우는 오히려 조용히 지켜봄으로써 범증의 계획은 다시 실패로 끝나고 유방은 두 번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항장의 검무가 실패로 돌아간 후에도 연회석상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자 유방은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떠날 수도 없었다. 바로 이때 번쾌(樊■)가 뛰어들어 항우를 호통 쳐도 오히려 항우는 화도 내지 않고 번쾌를 장사라고 칭찬한 다음 그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으며, 그 틈에 유방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항우의 가장 큰 실수였다. 입장을 바꾸어 항우가 만약 유방이었다면 결코 그렇게 부드럽게 대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방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다음에서 알아보자.




초한군이 광무에서 대치하고 있었을 때 항우는 유방의 부친을 인질로 잡고 유방을 협박하였다. 그는 유방에게 "지금 빨리 투항하지 않으면 네 아비를 삶아 죽이겠다."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유방의 대답은 명쾌했다. "나와 그대는 회왕의 명을 받고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으니, 나의 아버지가 바로 그대의 아버지이다. 그대의 아비를 삶아죽이겠다면 삶아죽이고 나에게도 국 한그릇 나누어주기 바란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이러한 유방의 답변에 결국 항우의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사는 정치투쟁에서는 우유부단한 자가 크게 손해를 보고, 칼날이 번뜩이는 살벌한 전장에서는 아녀자의 관용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범증은 홍문의 연회가 끝난 후에 항우에게 "에이! 어린아이와는 대사를 도모할 수가 없도다."라고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22




셋째, 항우는 고집이 세고 의심이 많았다.




의심이 많으면 변고가 생기고 변고가 생기면 사람을 잃는다. 이것은 범증의 퇴출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부(亞父) 범증은 70세라는 고령에도 항우를 따라다니면서 작전을 세우고 충심을 다해 항우를 보필하였지만, 이러한 충신도 항우의 의심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BC 208년 4월, 유방이 하남 형양(滎陽)에서 항우에게 포위되었다. 이것은 홍문의 연회 이후 유방을 없앨 또 한번의 절호의 기회였다. 범증은 항우에게 즉시 형양을 공격할 것을 권했다. 항우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유방의 모사(謀士) 진평(陳平)이 항우와 범증의 관계를 이간질하였다. 이때부터 항우는 범증을 의심하기 시작하여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멀어졌다. 이에 항우가 범증의 건의를 묵살하자 화가 난 범증은 항우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객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항우는 유방을 죽일 절호의 찬스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제업(帝業)을 보좌할 충신을 잃어 버렸다. 여기에서 고집이 세고 의심이 많은 항우의 실책을 엿볼 수 있다.




넷째, 항우는 잔인하고 포악하였다.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은 반드시 민심을 잃고 주위로부터 고립된다. 항우는 관중에 들어간 이후에 이미 투항한 진나라 왕자 영(嬰)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함양성을 약탈하고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또한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함양을 도륙하고 투항한 진나라 왕자 영을 죽인 다음 진나라의 궁실을 불태웠는데, 그 불길이 3개월이나 타고도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재물과 아녀자들을 거두어 동쪽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그야말로 강도와 다름없는 행위였으니, 후에 진나라 백성들이 크게 실망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외에도 항우는 천하의 비난을 무릅쓰고 숙부와 함께 내세웠던 의제(義帝) 초회왕을 죽였다. 초회왕은 비록 꼭두각시에 불과하였지만 그는 당시 진나라의 폭정에 대한한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항우의 이러한 의롭지 못한 행위는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가하고 정치적 고립에 빠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때 유방은 민심을 수습하고 민의에 따라 약법삼장(約法三章)을 공포하여 관중의 백성들과 고난을 함께 하였다.




항우는 그의 잔인하고 포악한 행위로 응분의 대가를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해하(垓下)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후에 음릉(陰陵)에 이르렀을 때 한 농부에게 길을 물었지만, 그 농부는 오히려 항우를 속이고 길을 잘못 가르쳐줌으로써 한나라 군대의 추격을 계속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 항우는 끝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오강에서 자결하기 전에 탄식하며 이르기를,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고 하였다.23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항우는 유방에 비해서 패권을 장악할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에 반해 많은 단점을 가졌으므로 유방에게 졌다고 보여진다.




한 고조가 된 유방은 농민 출신으로 거병 당초부터 그의 주변에 모이고 전국제패의 실현에 협력한 대다수는 신분이 낮은 하층 출신이었다. 따라서 유방이 새로운 통일제국인 한제국을 세울 것이라고 당시의 인물들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또 현재에도 유방과 항우의 두 명장을 놓고 항우의 기지가 발휘되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한제국을 세운 것은 유방의 능력인 것만은 사실인 것이다.




유방의 주변 인물들을 살펴보자면, 韓의 명망가 출신인 張良은 특별한 예이고, 패현의 소리였던 소하, 조참은 비교적 학문이나 지위가 있는 편이었다. 그 외에는 개 도살꾼인 번쾌나 絹織物 상인이었던 灌, 장례식 나팔수인 周勃, 마부인 夏侯., 고조와 어릴적 친구이며 무직의 무뢰배였던 盧 등, 이들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정상적 직업질서로부터 벗어난 자들이었고, 즉 유방은 말하자면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일개의 농민에서 출세하여 황제가 된 유방도 이례적인 일이지만 그의 주위에 모인 이른바 유협 무뢰의 무리가 정치의 중추를 이룬 것도 또한 전례없는 일이었다고 중국 역사는 말하고 있다.24




초한전에서 항우는 비록 계속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공고한 후방을 건설하지 못하여, 줄곧 전후방에서 작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다소 불리한 입장에 처하였었다. 또한 제후들을 분봉하면서 다소 공평성을 상실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제후들은 후에 유방에게 동조하게 된다. 반면 유방은 항우를 배반하고 투항한 한신(韓信)·진평(陳平) 등을 핵심 참모로 이용하였었다. 즉, 항우는 전쟁에서는 용맹하였으나 인재를 등용하는데 실패하였고, 유방은 조직적이지 않은 인재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초한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Ⅴ. 結論




진나라 말기에 순행을 하던 시황제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이어 시황제의 뜻과는 달리 이세황제가 등극하게 됨으로써, 진나라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수선한 진의 상황하에서 진승과 오광의 농민 기폭제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로 여러 세력들이 생겨나게 된다. 진승과 오광으로 시작된 농민 반란은 전국적인 규모로 커지게 되고, 마침내 각지에서 여러 반란세력들이 집결하게 된다.




진의 멸망을 앞두고 등장하는 여러 세력 가운데 항우와 유방이 등장하는데, 진 타도의 물결은 마침내 항우와 유방의 숨 막히는 각축전으로 집약되었다.




당시 초 회왕은 제일 먼저 진의 수도인 함양에 입성하는 사람이 진의 본거지인 관중의 왕이 된다는 약속을 하였다. 초 회왕의 명령에 의하여 진의 수도 함양을 목표로 입성경쟁을 벌이는데, 유방군은 항우군보다 한달 먼저 관중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진의 멸망에 참여하느라 관중에 늦게 가게 된 항우는 이러한 초 회왕의 처사에 불만을 가졌고, 유방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게 됨으로써 초한전을 일으키게 되는 쟁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전쟁에서 유방이 승리함으로써 기원전 202년 최후의 승자 유방이 제위에 올라 한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농민 출신이었던 유방과 대대로 장군직을 지내 명문 귀족 출신인 항우와의 대립에서 어쩌면 유방의 승리가 의외의 결과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 유방은 항우 보다 뛰어난 개인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고 인재를 잘 활용했으며, 감정에 휘말리지도 않고 언제나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로 황제의 직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항우는 여러 면에서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으나, 인재의 활용에 있어서 유방을 따라가지 못하였고, 결국은 패망의 길로 들어섰다.




유방의 승리로 성립된 한 고조, 이것은 진의 멸망과 한의 성립 사이의 어수선한 시기의 종료로써 더욱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원광대학교 마한역사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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