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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22:08:214333 
12살에 진나라의 상경이 된 감라 이야기
양승국
일반

치자상경(稚子上卿)


파격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나 파격인사라는 말은 모든 격식이나 규범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입각하여 인사를 행한다는 말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역사상 존재했던 왕조의 수명이 길었던 것은 물론 기득권층이 마련했던 제도의 우월성에 기인한 것도 있었겠지만 반면에 기득권층이 그 만큼 세력이 커서 새로운 인물들이 제도권에 쉽게 등장할 수 없었던 풍토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과는 달리 중국의 역사를 보면 파격적인 인사의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신분, 나이, 출신 등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에 따라 파격적으로 인사를 기용하는 사례가 많이 있다. 우리가 중국 사람들에게서 배워야할 것은 파격인사에 대한 전통이다. 나이 80에 기용된 사람은 강태공이고 70에 기용된 사람은 백리해다. 반대로 나이 12살에 기용된 감라라는 동자의 이야기도 있다. 또한 죄수의 신분에 있던 사람을 발탁하여 재상에 임명함으로 해서 나라를 중흥시킨 이야기가 사기 은본기에 실려 있다.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또한 출신 성분에 따라, 학벌에 따르는 일반적이 풍조와는 달리 순전히 그 사람 본인의 능력이나 사람됨을 인사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사례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 중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명왕조를 세운 주원장인 것 같다. 중국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역사를 통틀어 주원장만큼 파격적인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거지와 왕자라는 제목의 동화는 있지만 실제적으로 거지가 수십 년 동안의 투쟁을 거쳐 황제가 된 예는 인류역사에 없기 때문이다. 파격적인 인사는 정체된 사회 조직에 활력소의 역할을 한다. 다음은 사기 사마천의 감무저리질열전(甘武樗里疾列傳)에 나오는 기사로 진나라가 6국을 병합하여 통일을 이루기 직전에 진시황을 대신하여 섭정의 자리에 있었던 여불위에 의해 12살의 감라가 발탁되는 장면이다.



연왕(燕王)은 채택(蔡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태자 단(丹)을 인질로 진나라에 보내고 진나라에 대신(大臣) 한 사람을 청하여 연나라의 재상을 맡아달라고 했다. 여불위가 장당(張唐)을 연나라로 보내려고 마음을 정하고 태사를 시켜 점을 치게 한 결과 점괘가 대길로 나왔다. 그러나 장당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연나라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여불위가 수레를 타고 친히 장당의 집에 가서 연나라에 가 줄 것을 부탁했으나 장당은 거절하며 말했다.


“ 저는 여러 차례에 걸쳐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조나라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조나라는 저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데 제가 연나라를 들어가려면 조나라 영토를 지나가야 합니다. 제가 조나라 경내를 지나가다 잡히면 십상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인데 어찌 제가 연나라에 갈 수 있겠습니까?”


여불위가 재삼 강권하였으나 장당은 결코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여불위가 승상부(丞相府)에 돌아와 당상에 혼자 앉아 장당의 일로 고민에 빠졌다. 여불위의 문객 중에 감라(甘羅)라는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감무(甘茂)의 손자로 당시 나이가 겨우 12세에 불과하였다. 여불위가 혼자 당상에 앉아 고뇌하는 모습을 본 감라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 대감께서는 무슨 일로 그렇게 고민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여불위 “ 어린아이가 무엇을 안다고 묻느냐?”


감라 “ 남의 문하에 있으면서 귀하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주인의 근심을 나누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감께서 근심하고 계신데 그 문하 된 사람이 그 일을 알지 못한다면 비록 정성을 다하여 받들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불위 “ 내가 옛날에 강성군(剛成君) 채택(蔡澤)을 연나라에 사자로 보내 강화를 청하자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연나라는 이미 그들의 태자인 단(丹)을 이미 인질로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장당을 보내 연나라의 상국(相國)에 앉히려고 태사를 시켜 점을 치게 하니 대길(大吉)로 나왔다. 그러나 장당이 한사코 연나라에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나의 명을 따르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내가 가슴을 끓이고 있는 중이다. ”


감라 “ 그 일은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일 입니다. 어찌하여 일찍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한번 장당 대감을 찾아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여불위가 듣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 빨리 물러가지 못할까! 이 나라의 승상인 내가 친히 가서 설득하여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것을 어찌 어린 동자 녀석이 그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감라 “ 옛날에 항탁(項橐)이라는 사람은 7살 때 공자의 스승을 했습니다. 지금 저의 나이는 이미 12살이라 제가 항탁보다는 5살이나 더 많습니다. 저를 한번 시켜보시고 아무런 성과도 없게 되면 그때 가서 저를 책망하셔도 늦지는 않을 것인데 어찌하여 천하의 일을 미리 예단하시고 화부터 내시는 것입니까?”



▶항탁(項橐)/춘추 때 사람으로 그의 나이 7살 때 공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전설적인 사람.



여불위가 감라(甘羅)의 행위를 기이하게 여기고 안색을 추스리며 말했다.


“ 나이 어린 동자가 능히 장당 장군을 연나라에 가게 만들어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면 내 마땅히 왕께 상주하여 너를 경상(卿相)의 자리에 앉게 해주리라!”


감라(甘羅)가 여불위의 허락을 받고 기다렸다는 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장당의 집을 찾아갔다. 장당은 감라가 비록 문신후(文信侯) 여불위의 문객이라고는 하나 나이가 어린 동자라 무시하는 태도로 물었다.


“ 어린아이가 무슨 일로 애써 나를 찾아왔는가?”


감라 “ 장군의 문상을 먼저 올리기 위해 애써 짬을 내어 들렸습니다.”


장당 “ 너는 어떤 연유로 나를 조문한다고 하는가?”


감라 “ 장군의 공은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의 것과 비교해서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장당 “ 무안군은 남쪽으로 원정하여 강성한 초나라를 꺾었고, 북쪽으로는 연(燕)과 조(趙) 두 나라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셨다.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못 빼앗은 성이 없었고 지금까지 함락시킨 성읍의 수효는 모두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내가 어찌 그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


감라 “ 그렇다면 선조 때의 응후(應侯) 범수(范睢)와 지금의 문신후(文信侯) 대감과 비교해서 누가 더 권세가 강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장당 “ 응후는 결코 문신후 대감과 비교할 수 없다.”


감라 “ 장군께서는 문신후의 권세가 응후의 것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장당 “ 내가 어찌하여 모른단 말인가 ?”


감라 “ 옛날 응후가 무안군을 시켜 조나라의 도성 한단성(邯鄲城)을 공략하게끔 명을 내렸으나 무안군은 한사코 응후의 명을 거절했습니다. 응후가 결국은 노하여 무안군을 함양(咸陽)에서 추방시켜 음밀(陰密)로 유배를 명했다가 길을 가던 도중에 두우(杜郵)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문신후 대감께서 몸소 장군을 방문하여 연나라에 가서 상국을 맡아 달라고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군은 거절하였습니다. 옛날 진나라에 그렇게 큰 공을 세운 무안군조차도 응후의 말을 거슬려 목숨을 잃었는데, 문신후께서 어떻게 장군을 용납하시리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장군께서는 머지않아 죽게 되실 것 같아 제가 이렇게 미리 문상을 온 것입니다.”


▶음밀(陰密)/지금의 감숙성 영대현(靈臺縣) 서남



장당이 감라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떨며 자기의 무례함에 용서를 빌며 말했다.


“ 동자는 나에게 깨우침을 주기 바라오!”


감라는 장당에게 즉시 여불위에게 용서를 빌고 그 날로 행장을 꾸려 연나라로 출발을 하겠다는 청을 드리라고 했다. 이어서 장당이 연나라로 출발하기로 한 날이 되자 감라가 다시 여불위에게 말했다.


“ 장당 장군이 저의 말에 설득되어 어쩔 수 없이 연나라에 가기로 하신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 분의 마음속에는 조나라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원컨대, 저에게 수레 다섯 대만 빌려주시면 장당 장군보다 앞서 달려가 조나라로 하여금 그를 무사히 연나라에 보내도록 해 보겠습니다.”


여불위는 이미 감라가 재능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에 즉시 진시황을 찾아가 알현하고 말했다.


“ 옛날 선왕 때 좌승상을 지냈던 감무(甘茂)의 손자에 감라(甘羅)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나이는 비록 어리다고 하나 그는 명문(名門)의 자제라 그 지혜와 언변이 매우 뛰어납니다. 근자에 장당이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며 연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상국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것을 감라가 가서 한마디 말로 그를 설득하여 즉시 저의 부탁을 받아드리도록 했습니다. 그가 다시 나에게 청하기를 자기가 앞서 조나라에 가서 장당이 조나라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니 대왕께서는 부디 그의 청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진시황이 즉시 감라를 불러 접견을 하니 그의 키는 단지 오척에 불과하였고 그이 이목구비는 마치 그림을 보는 듯 수려하였다. 진시황이 매우 기뻐하여 감라를 향해 물었다.


“ 어린 동자가 조왕을 만나 무슨 말로 그를 대하려고 하는가?”


감라 “ 조왕의 얼굴에 나타나는 기쁨 마음과 두려움을 살펴 그때마다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그를 설득할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이는 듯이 조왕을 대할 것이니 미리 무슨 말을 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진시황이 호화롭게 장식한 커다란 수레 열 대에 종복 100명을 내주며 감라를 조나라에 보내는 사자로 삼았다.


조나라의 도양왕(悼襄王)은 그때 진나라와 연나라가 수호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양쪽에서 협공을 해 오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중에 갑자기 진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도양왕은 뛸 듯이 기뻐하며 즉시 성문 밖 20리까지 나가 교외(郊外)에서 감라를 영접했다. 그러나 도양왕은 진나라에서 왔다는 사신이 어린 동자라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생각하며 감라를 향해 물었다.


“ 옛날 진나라를 위해 주나라 땅인 삼천(三川)에 통하게 한 사람에 감무(甘茂)라고 있었다고 하던데 선생은 그 사람과는 어떻게 되는 사이입니까?”


감라 “ 그분은 저의 조부 되시는 분입니다.”


도양왕 “ 선생은 지금 나이가 몇 살이나 되십니까?”


감라 “ 올해로 12살이 됩니다.”


도양왕 “ 진나라의 조정에는 다른 나라로 사자로 보낼 연장자는 모두 동이 났습니까? 어찌하여 선생과 같은 어린 사람에게까지 차례가 돌아갔습니까?”


감라 “ 진왕께서는 사람을 쓰실 때는 각기 그 능력에 따라 임무를 맡기십니다. 연장자는 모두 큰 일을 맡기시고 연소자는 적은 일을 맡기십니다. 진나라 조정에서 저의 나이가 제일 어리기 때문에 저로 하여금 조나라에 사자로 가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도양왕은 감라의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성정과 재주가 뛰어남을 알고 마음속으로 참으로 기이하게 생가하며 다시 물었다.


“ 선생께서는 천리 길을 무릅쓰고 저희 나라를 찾으신 것은 무슨 가르침이 있어서 입니까?”


감라 “ 대왕께서는 연나라의 태자 단(丹)이 진나라에 인질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도양왕 “ 알고 있습니다.”


감라 “ 대저 연나라가 태자를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는 것은 진나라를 속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진나라의 대신 장당이 연나라에 가서 상국을 맡아보기로 한 것은 그 역시 진나라도 연나라를 속이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과 연 두 나라가 서로 속이지 않고 수호를 맺게 된다면 연나라는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도양왕 “ 진나라가 연나라와 수교를 맺으려고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라고 선생은 생각하십니까?”


감라 “ 진나라가 연나라와 수교를 맺은 것은 두 나라가 힘을 합하여 조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하간(河間) 땅을 넓히기 위한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차라리 하간의 다섯 성을 떼어 진나라에 바치시어, 진나라로 하여금 하간(河間)의 땅을 넓히게 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진나라에 돌아가 진왕께 주청드려 장당 장군이 연나라로 가는 것을 중지시켜 그 나라와의 수호를 끊고 오히려 조나라와 강화를 맺도록 하겠습니다. 대저 강한 조나라가 약한 연나라를 공격한다면 진나라가 돕지 않을 것이니 조나라는 진나라에 바친 하간의 다섯 개 성 대신에 연나라에서 대신 보충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도양왕이 크게 기뻐하며 감라에게 황금 백일(百鎰)과 백벽(白璧) 두 쌍을 상으로 내리고 하간의 다섯 개의 성에 대한 지적도를 감라에게 주어 진왕에게 바쳤다. 감라가 진나라에 돌아와 진시황에게 지도를 바치며 조나라에 다녀온 일을 복명하였다. 진시황이 기뻐하며 말했다.


“ 하간의 땅을 어린 동자 덕분에 넓히게 되었다. 어린 동자의 지혜가 그의 몸보다 더 크도다!”


진시황이 즉시 장당의 출발을 중지시켰다. 장당 역시 자기가 연나라에 가지 않게 된 것을 마음속 깊이 감라에게 감사하였다. 조나라는 장당이 연나라로 출발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자 진나라가 역시 연나라를 돕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즉시 대군을 지키고 있던 이목(李牧)을 불러와 연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이목은 연나라로 쳐들어가 상곡(上谷)의 30여 개의 성을 점령한 다음에 그 중 19개의 성은 조나라가 차지하고 나머지 11개의 성은 진나라에 바쳤다. 진시황은 감라를 상경(上卿)에 봉하고 다시 옛날에 감무의 소유였던 전답과 저택을 감라에게 주었다. 지금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 중에 감라라는 사람이 12살에 진나라의 상경에 제수 되었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 일을 읊은 시가 있다.


片言納地廣河間(편언잡지광하간)

말 몇 마디로 땅을 얻어 하간의 땅을 넓히고


上谷封疆又割燕(상곡봉강우할연)

다시 상곡의 땅을 연나라에서 빼앗아 강역을 넓혔다.



許大功勞出童子(허대공노출동자)

이렇게 대공을 세운 사람은 어린 동자였으니


天生智慧豈因年(천생지혜개인년)

하늘로부터 얻은 지혜라 어찌 나이를 따지겠는가?



또 다른 시가 한 수 더 있다.



甘羅早達子牙遲(감라조달자아지)

감라는 조숙하였고 강태공은 만성하였다.


遲早窮通各有時(지조궁통각유시)

만성이나 조숙이나 통하게 되는 것은 모두가 시세에 따르는 것인데


淸看春花與秋菊(청간춘화여추국)

봄에 피는 꽃과 가을에 피는 국화를 자세히 살펴 보라


時來自發不愆期(시래자발불연기)

때가 되면 어김없이 피어나지 않는가?


연나라 태자단이 진나라에 인질로 와서 지내고 있는데 진나라가 연나라와의 약속을 위반하고 조나라와 수교를 맺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로는 그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해져서 진나라에서 도망쳐 귀국하고 싶었으나 혹시나 도망가다 진나라 군사들에게 잡히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감라의 이야기를 듣고 그와 교우를 맺은 다음에 그의 지혜를 빌려 연나라로 돌아가려는 계책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감라(甘羅)가 잠을 자고 있는데, 꿈속에서 붉은 옷을 입은 천계의 관리가 부절을 들고 찾아와 말을 전했다.


“ 상제의 명을 받들어 하늘나라로 모시려고 왔습니다.”


감라는 꿈에서 깨어나 얼마 있지 않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 커다란 재주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장수하지 못한다는 말대로 감라(甘羅)는 애석하게도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태자 단(丹)은 할 수 없이 진나라에 계속 머물러야 했다.



등장인물 간개


▶여불위(呂不韋)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235년에 죽었다. 전국시대 때 진(秦)나라의 대신이며 위(衛)나라 복양(濮陽) 사람으로 원래는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에 있었던 양책(陽翟)의 대상인이었다. 당시 진나라의 공자 이인(異人)이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참으로 기화(奇貨)로다”라고 생각하고 많은 돈을 들여 그와 교우를 맺었다. 이어서 진나라에 들어가 당시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의 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 유세하여 이인(異人)을 그녀의 적자로 삼게 만들었다. 화양부인과 안국군 사이에는 적자가 없었다. 진소양왕(秦昭陽王)이 죽고 안국군이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 이인은 그의 태자가 되었다. 안국군의 시호는 효문왕(孝文王)이다. 효문왕이 소양왕의 상을 치르는 동안 갑자기 죽자 이인이 그 뒤를 이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장양왕(庄襄王)이다. 장양왕은 여불위를 진나라 상국에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고 그에게 식읍으로 10만호를 내렸다. 장양왕에게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여불위가 자기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던 애첩을 장양왕에게 바쳐서 낳은 아들이 바로 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다. 장양왕이 재위 3년만에 죽고 진시황이 즉위하자 여불위는 계속 상국의 자리를 차지하고 진시황은 여불위를 중보(仲父)로 높여 부렀다. 그러나 여불위가 자기의 옛날 애첩이었던 태후에게 천거한 노애(嫪毐)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시황은 그를 연루시켜 상국의 자리에서 파면하고 사천으로 유배 시켰다. 여불위는 사천으로 가던 도중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불위는 진나라의 상국으로 재직 중에 모두 26권으로 된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지었다.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사천으로 유배가서 지었다는 사마천의 기술은 잘못이다.


▶장당(張唐)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이 주나라를 멸하기 위해 영규(嬴樛)와 함께 보낸 진나라 장군. 영규는 구정(九鼎)과 주나라의 제기(祭器) 및 보기(寶器)들을 배에 싣고 함양으로 돌아왔고 장당은 남아서 주나라의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그 땅에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했다. 후에 장군 몽오(蒙驁)의 부장(副將)으로 조나라를 정벌했고 다시 성교(成嶠)의 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어서 진나라가 연나라와 강화를 맺을 때 진나라에 인질로 온 연나라의 태자 단(丹)에 대한 진나라의 대응 인질로 연나라에 가서 상국에 취임할 것을 여불위(呂不韋)로부터 명을 받았으나 연나라로 가는데 통과해야 할 조나라의 보복이 무서워 여불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12 살 먹은 감라(甘羅)에게 설득 당했다. 감라는 감무의 손자이다.


▶감무(甘茂)

전국 때 진(秦)나라 대신으로 감라(甘羅)의 조부이다. 하채(下蔡 : 지금의 안휘성 봉태현(鳳台縣)) 사람. 백가의 술을 배워 진혜왕(秦惠王)에게 임용되었다. 진무왕(秦武王)이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 촉후(蜀侯) 휘(煇)가 반란을 일으켰다. 감무가 무왕의 명을 받고 출전하여 촉후의 란을 평정하고 돌아오자 감무를 좌승상(左丞相)에 제수하였다. 무왕 3년( 기원전 308년)에 진나라가 삼천(三川)의 주나라 지방을 욕심 내며 주왕실을 넘봤다. 감무가 진무왕에게 상주하기를 먼저 한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의 강역을 넓히고 진나라와 한나라는 서로 국경을 접해야 한다고 했다. 진소왕(秦昭王)이 무왕의 뒤를 잇자 초나라는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한나라는 진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감무가 진소왕을 설득하여 한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이후로 우승상(右丞相) 저리질(樗里疾)과 협력하여 진나라의 모든 힘을 경주하여 위나라를 정벌하려는데 중점을 두었다.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 한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으나 진소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향수(向壽) 등의 의견과 충돌하여 그들로부터 참소를 받아 제나라로 도망쳤다. 제나라는 감무를 상경에 임명했다. 후에 초나라에 사자로 가자 진왕이 진나라에 돌아오라고 유인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후에 위나라에 가서 그 곳에서 죽었다.


▶백기(白起)

전국 때 진나라의 장군. 태어난 해는 확실치 않고 기원전 257년에 죽었다. 지금의 섬서성 미현(眉縣)인 미(郿) 출신으로 진나라 소양왕(昭襄王) 때 좌서장(左庶長)으로 임용되어, 좌경(左更), 국위(國尉), 대양조(大良造)의 직을 역임했다. 용병에 대단히 능하여, 한(韓), 위(魏), 조(趙), 초(楚) 나라 등을 공격하여 많은 땅을 점령하여 진나라 땅으로 삼았다. 소양왕 29년 기원전 278년 초나라의 도성인 영도(郢都)를 점령하고 그 공으로 무안군(武安君)으로 봉해졌다. 조나라와의 장평(長平) 싸움에서 이겨 그 포로 45만 명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후에 진나라의 승상이었던 범수(范睢)와 사이가 나뻐지고 다시 소양왕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가 자결을 강요당하여 죽었다. 사기 백기왕전열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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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04-05-11
[일반] 국군의날 우산을 바쳐들고 대통령을 따가리한 대한민국의 국방부장관...그리고 제나라…

한심한 대한민국의 국방부장관의 몰골을 보자니 나라의 장래가 심히 우려됩니다. 그것도 국군의날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 60만 대군의
양승국 04-05-11
[일반] 굴원이야기

굴원(屈原) 이야기 기원전 295년 진(秦)나라의 새로운 왕에 소양왕(昭陽王 : 재위 기원전 295-251년))이 올랐다. 그는 얼마 전에 초나라가 제
양승국 04-05-11
[일반] 낭만주의자 테러리스트-예양 이야기

예양은 원래 당진의 육경 집안 중 범씨와 순씨들의 가신 노릇을 차례로 하다가 후에 지백의 모사가 되었다. 한, 위, 조 삼가에 의해 지씨 종족들은
양승국 04-05-11
[일반] 너무나도 처절한 보은의 조씨고아 이야기

너무나도 처절한 보은(報恩) 이야기 옛날 기원전 550년 대인 춘추시대 중반의 일이다. 공자가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으니 공자보다
양승국 04-05-11
[일반] 당진의 군제 변천표

당진(唐晉)의 군제(軍制) 변천표 1. 문공 4년 기원전 633년 성복대전(城挓大戰) 직전의 편제 군별(軍別) 주장(主將) 부
양승국 04-05-11
[일반] 대기만성 백리해-들어가는 이야기

대기만성이라는 고사성어의 원 주인공은 강태공(姜太公)입니다. 그는 제가 보는 관점에서 봤을 때 참으로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양승국 04-05-11
[일반] 며느리를 빼앗아 신대에 같이 산 아버지 위선공과 죽음을 서로 다툰 형제 이야기

축대납식(築臺納媳) - 며느리를 가로채 신대(新臺)를 짓고 부인으로 삼은 위선공- 주우(州吁)의 뒤를 이어 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
양승국 04-05-11
[일반] 모택동전법과 기원전 565년 당진의 순앵이 착안한 이일대로 전법 비교

다음은 모택동이 그의 유명한 게릴라전 사대전법을 착안했다는 순앵(荀罃)의 이일대로(以逸待勞) 전법 원문 이다. >>>>>&
양승국 04-05-11
[일반] 무당을 하백에게 심부름 보낸 서문표 이야기

그때 업도(鄴都)1)에 수장(守將)이 비어 마땅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적황이 말했다. " 업도는 상당(上党)2).과 한단(邯鄲) 사이에
양승국 04-05-11
[일반] 무령왕과 호복기사-1

무령왕 19년 기원전 306년 봄 정월에 신궁(信宮)에서 백관들로부터 조하를 받았다. 비의(肥義)를 불러 천하의 일을 논하다가 5일 만에 끝마쳤다.
양승국 04-05-11
[일반] 무령왕과 호복기사-2

전국칠웅 중, 조나라는 전국말기 유일하게 진나라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었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였다. 그것은 무령왕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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