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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의 대운하
운영자

수양제 양광은 605년 남북을 관통하는 대운하의 건설을 지시했다. 공사의 중요 부분은 로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의 건설이었다. 황하남안의 통제거공사는 낙양부근에서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동남으로 흐르게 하고, 변수(汴水 : 하남성 개봉근처를 흐르던 강, 지금은 이미 말라서 존재하지 않음)로 들어가게 하였고, 황하와 회하의 두 강을 잇는 물길이 되었다. 광제거는 어하(御河)라고도 부르는데, 황하, 변수와 회하의 3개의 강물을 연결시킨 시작이었다.


수나라의 수도는 장안이었으므로, 당시의 주요 조운노선은 강남운하에서 경구(지금의 鎭江)에 도착하여 장강을 건너고, 다시 산양독을 따라 북상하였다가, 다시 광제거로 들어가고, 황하, 위하(渭河)를 거슬러 올라가서 최종적으로 장안까지 가는 것이다. 황하이북에 개설한 영제거는 심수(沁水), 기수(淇水), 위하(衛河)등의 강물을 수원으로 하여 물을 끌어들여 항해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천진서북에서는 노구(蘆溝, 지금의 영정하)를 이용하여, 직접 탁군(涿郡, 지금의 북경)에 도달하는 운하이다.



수나라가 건설한 대운하를 구간별로 살펴본 것이다.





첫째,

황하와 통하는 광통거(廣通渠). 수나라때 만든 중요한 운하는 장안에서 황하로 통하는 광통거이다. 수나라초때는 장안이 수도였다. 장안에서 황하로 이르는 물길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자연강물인 위수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나라때 만든 인공강인 조거(漕渠)였다. 위수는 깊이가 얕고, 모래가 많으며, 강물이 구비져서, 항해하기에 불편했다. 동한때는 낙양으로 옮겼으므로, 조거는 수리를 하지 않아서, 일찌감치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수나라때는 할 수 없이 새로 물길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개황원년(581년) 수문제는 대장군 곽연(郭衍)을 조거대감으로 임명하고, 장안-황하간의 수운을 만드는 것을 책임지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완성한 부민거(富民渠)는 여전히 동부의 양식을 서부로 운송하는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3년후에 부득이 다시한번 개조공사를 하게 된다. 이번 개조공사는 물길을 더 깊고, 더 넓게 파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큰 배도 지나다닐 수 있게 하고자 하였다. 개조공사는 걸출한 공사전문가인 우문개(宇文愷)가 주재한다. 노동자들의 노력하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 해에 준공한다. 새로운 물길은 위수를 주요 수원으로 하여, 대흥성(서안시)에서 동관(潼關)에 이르는 300여리였고, 광통거라고 이름을 붙였다. 새로운 광통거는 운송량이 옛날 것보다 훨씬 많았고, 관중에 양식을 운송하는 것 외에도 많은 부유함을 가져다 주게 된다.



둘째,

강회와 통하는 어하의 개보수. 수양제가 즉위한 후, 정치중심은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겨진다. 그리하여 황하, 회하, 장강간의 수상교통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이리하여 남부의 양식을 북으로 운송하고 동남지역을 통제하기 쉽도록 하고자 하였다. 대업원년(605년), 우문개로 하여금 동경낙양의 건설을 책임지게 한다. 매원 200만명이 투입된다. 동시에 상서우승 황보의에게 명하여, "하남회북 여러군의 남녀 100여만을 동웒여, 통제거를 파도록" 지시한다. 이외에, 회남의 농민 10만을 동원하여, 산양독을 확장공사하도록 한다. 공사규모의 크기와 범위가 넓음은 모두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통제거는 동서 두 구간으로 나뉠 수 있는데, 서쪽구간은 동한때의 양구(陽溝)를 기초로 하여 팠다. 서로는 낙양서쪽에서 낙수(洛水) 및 그 지류인 곡수(谷水)를 수원으로 하여 낙양성남쪽을 통과하여 언사의 동남쪽에 이르고 다시 낙수를 따라 황하로 들어간다. 동쪽구간은 서로는 형양(熒陽) 서북의 항하변상의 판저(板渚)에서 시작하여, 황하를 수원으로 하여, 지금의 개봉시 밍 기현, 수현(縣), 영릉, 상구, 하읍, 영성등의 현을 지나, 다시 동남으로 지금의 안휘 숙현, 영벽, 사현을 지나고 다시 강소의 사홍현을 지나 우이(盱眙)현에 도달하여 회수로 들어간다. 두 구간의 길이는 거의 2000리에 이른다. 산양독은 북쪽은 회수남안의 산양(지금의 강소성 회안시)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남쪽으로 향하여 강도(양주시)의 서쪽에서 장강과 만난다.


두 거(渠)는 모두 통일된 표준에 따라 건설하고, 양쪽에 버드나무를 심고, 어도(御道)를 건설한다. 연도에 이궁(離宮)을 40여채나 건설한다. 용주선(龍舟船)은 크기가 엄청났으므로, 어하는 반드시 깊게 파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운행할 수가 없었다. 통제거와 산양독의 건설과 정비는 함께 시작하여 동시에 진행되었다. 시공때 비록 기존의 구거와 자연하도를 최대한 이용하였지만, 통일된 너비와 깊이를 요했으므로 주로 인공으로 파내는데 의존했으므로, 공사량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시간은 아주 짧게 걸렸다. 3월에 착공하여, 8월에 완공한다. 수양제는 즉시 낙양에서 용주선을 타고 후비, 왕공, 백관을 데리고 강도로 남순한다. 이것은 고대 공사역사상 기적이다. 당연히 대가는 컸다. 공사과정에서 죽은 자가 많았던 것이다.



셋째,

북쪽의 탁군에 이르는 영제거이다. 통제거, 산양독을 완공한 이후, 수양제는 황하이북에 다시 대운하를 파기로 결정한다. 즉 영제거이다. 대업4년(608년) "하북여러 군의 남녀 백여만을 소집해서 영제거를 파도록 했다. 심수를 끌어들어 남으로 황하에 이르게 하고 북으로 탁군에 이르게 하였다" 영제거는 두 구간으로 나뉜다. 남쪽구간은 심하입구에서 북으로 가서 지금의 신향, 급현, 활현, 내황(이상 하남성), 위현, 대명, 관도, 임서, 청하(이상 하북성), 무성, 덕주(이상 산동), 오교, 동광, 남피, 창현, 청현(이상 하북성)을 거쳐 지금의 천진시에 이르는 길이다.




북쪽구간은 천진에서 서북으로 방향을 바꾸어, 천진의 무청, 하북의 안차를 거쳐 탁군에 도착하는 길이다. 남북양구간은 그해에 완성된다. 영제거는 통제거와 마찬가지로 넓고 깊은 운하였고, 기록에 의하면 길이가 1900리이다. 깊이가 얼마였는지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보면 통제거와 비슷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시 용주가 다닐 수 있는 물길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업7년(611년), 수양제는 강도에서 용주를 타고 운하를 따라 북상한다. 인마와 배를 데리고 수륙의 두 길을 모두 가서 탁군에 도달한다. 도합 4000리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그럼에도 50여일을 썼으니 통항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넷째, 태호평원을 종단하는 강남하를 준설한다. 태호평원에는 운하를 만든 역사가 깊다. 춘추시대 오나라는 도성인 오(소주시)를 중심으로 여러개의 운하를 팠다. 그 중의 하나가 북으로 장강에 이어지는 것이고, 하나가 남으로 전당강에 이어지는 것이다. 이 두 개의 남북방향의 인공수로는 최초의 강남하이다. 이 강남하는 진한, 삼국, 양진, 남북조때 여러차례 정비를 거치고, 수양제때 다시 한번 준설하게 된다.


광통거, 통제거, 산양독(수양제는 후 양자를 합쳐서 어하라고 한다), 영제거와 강남하는 비록 서로 다른 시기에 건설되었고, 각자 독립한 운수수로였다. 그러나, 이 물길은 모두 정치중심 장안, 낙양을 핵심으로 하여, 동남, 동북으로 퍼져나가서, 완전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동시에 규격이 기본적으로 일치하여, 용주와 방주가 운행할 수 있게 되었고, 서로 연결이 되었다. 그래서 또 하나의 대운하를 이루는 것이다. 장안, 낙양에서 동남으로 항주까지, 동북으로 북경까지 이르는 대운하는 역사상 가장 긴 운하이다. 이것은 전당강, 장강, 회하, 황하, 해하의 5대수역을 통과하여 국가의 통일에 기여하고 남북의 경제문화교류에도 공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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