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중국사
1. 선사
2. 삼대
3. 춘추전국
4. 진한
5. 위진남북
6. 수당오대
7. 송요금원
8. 명청
9. 국공
10. 인민공화국
11. 통사
· 오늘 :  1,471 
· 어제 :  819 
· 최대 :  2,389 
· 전체 :  1,759,677 
 
  2022-09-15 10:49:49141 
1200년 전 중국의 자유주의 경세가 유안(劉晏)
운영자


1200년 전 중국의 자유주의 경세가
유안(劉晏)

제1장 중국 경세가 중에서 대표적으로 특이한 인물

유안은 당현종 개원(開元) 4년인 718년에 태어나서 당덕종(唐德宗) 건중(建中) 원년인 780년에 죽은 당왕조 때 첫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중국의 주목할 만한 경세가의 한 명이다. 그러나 그는 경제에 대한 책론이나 전문적인 저서는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그의 행적은 그의 개인적인 서한이나 그가 관료로써 정책을 집행할 때 발행한 공문을 통해서이며 그것들 역시 그의 경제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자료라고는 할 수 없다. 오랜 세월 동안 당왕조의 재정업무를 담당했던 유안은 자연스럽게 업무수행 중 지시하거나 논의했던 흔적들을 남겼고, 또한 그의 속관들 몇몇이 그의 치적에 대해 언급한 내용의 자료가 전부다.

유안은 국가재정을 담당했던 행정가다. 평생 사상계나 학술계에서 활동한 행적은 없으나 그가 결코 사상가적 소질을 구비하지 안은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는 문학적으로도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내어난 인물이다. 7세 때 이미 당현종 이융기(李隆基)에게 지어 바친 송(頌)으로 여러 번 상과 격려를 받았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당현종으로부터 신동이라는 이름을 얻고 7세의 어린 나이로 곧바로 태자정자(太子正字)라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태자정자는 비서성 교서랑(校書郞)의 속관으로 정부 경적(經籍)의 오자나 탈자를 검정하는 관직이다. 7살 때 시작한 유안의 관직생활은 50년 동안 계속되었다.

당현종 이융기는 문학적인 소질이 높은 인물이다. 그가 지은 부(賦)와 시(詩)는 여타 문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문학성이 높았고 서법(書法)에도 높은 성취가 있었다. 그는 특히 음악과 무예(舞藝)에 능통했고 친히 악무단(樂舞團)을 조직하여 연습시켰는데 악무단에 속한 사람들을 이원자제(梨園子弟)라고 불렀다. 당현종은 그 일로 인해 후대의 희곡계(戱曲界) 인사들로부터 조사(祖師)로 받들여진 인물이다. 한편 어린 시절의 유안은 그의 비범한 문학적인 재능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존중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유안은 학자나 문인의 길을 걷지 않았다. 태자정자로 관직을 시작한 그는 수십 년 동안 현령, 군수, 자사(刺史), 하남윤, 경조윤, 호부시랑을 거쳐 마침내 재상격에 해당하는 호부상서, 동평장사의 자리에 올라 탁지(度支), 조용(租庸), 염철, 전운(轉運), 주전사(鑄錢使) 등의 국가의 가장 핵심적인 재정정책을 20년 넘게 담당했다. 그는 봉건시대에 보기드문 근검하고 청렴한 관료였다. 그가 재정업무를 책임진 후에는 10년을 하루 같이 자기의 모든 정력을 바쳐 공식적인 휴무일도 쉬지 않고 열심히 직무를 수행했다. 심지어는 조회에 나가기 위해 길을 갈 때에도 말채찍을 산가지 삼아 장부를 계산하기도 했다. 그가 시행한 재정정책은 당시 당나라 정권이 당면했던 심각한 경제 위기를 반전시켜 전란 중에 파괴된 국가의 생산기반을 회복하고 발전시켰음에도 자기 자신은 오히려 검소한 생활을 시종 견지하고 결국은 생을 마감했다. 말년의 그는 정적들에 의해 함정에 바져 죽음에 이르고 가산은 몰수 당했다. 그러나 몰수 당한 그의 재산은 미맥(米麥) 몇 가마와 서적 몇 수레가 다였다. 온 힘을 다해 공무에 임했던 그는 자연히 공직을 수행하면서 저술활동을 할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의 일생은 오로지 행정가로 보냈을 뿐 저술활동을 통해 학자나 사상가로써 일가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활동이란 사상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대규모로 장기간에 걸쳐 국가 재정정책을 성공리에 시행한 유안의 경우는 그것을 추진할만한 지도 사상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저술이나 논문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현세의 우리들은 그가 실행한 재정정책에 관한 역사적인 자료를 분석 및 유추를 통해서 그의 사상을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유안은 자가 사안(士安)으로 당왕조 때 조주(曹州) 남화(南華) 출신이다. 조주 남하는 지금의 산동성 동명현(東明縣)이다. 당현종 재위 후기인 천보(天寶) 연간 지금의 하남성 하읍현(夏邑縣)인 임하(任夏) 및 온현(溫縣)의 현령(縣令) 직에 재임 시에 그는 일찍이 재정업무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해 관할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안사(安史)의 란(755-763)이 발생하자 당현종은 난을 피해 사천성으로 몽진을 가고 태자 이형(李亨)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형이 당숙종(唐肅宗)이다. 유안은 숙종에 의해 탁지랑중령(度支郞中令)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중앙정부의 재정행정에 첫발을 내디뎠다. 탁지랑중령이라는 관직은 강회(江淮) 일대의 조용(租庸)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관리들의 수장이다. 그러나 유안이 당나라 조정에서 실제로 재정행정의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해는 760년 되는 해다. 그 해에 경조윤(京兆尹),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임명된 그는 탁지(度支), 주전(鑄錢), 염철(鹽鐵) 등을 관장하는 수장 직을 겸직하여 당나라 조정에서 재정행정을 총괄하는 중임을 맡게 되었다. 이 후로는 잠시 지금의 사천성 달현(達縣)인 통주(通州)의 지방장관으로 나가 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줄곧 당나라 중앙 조정에서 재정행정을 총괄하고 다시 강회(江淮) 지역, 하남, 장안을 관할하는 동로(東路)의 재정행정을 주관했다. 당시 강회 일대는 당나라 정부에 재정을 담당한 중요한 지역이었다. 안사의 란으로 하북지역의 경제적인 기반은 황폐화한 상황 하에서 특히 강회지역은 당나라 정부의 재정을 공급하여 당나라의 명맥을 이은 생명줄 역할을 했다.
안사의 란은 당왕조가 번영기에서 쇠락으로 가는 전환점이었다. 서기 755년, 노룡(盧龍)과 범양(范陽) 일대의 변경을 지키던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거병하여 당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곧바로 신속하게 남하하여 하북(河北), 산동(山東), 회북(淮北), 하남(河南) 등 각지역을 유린한 후에 당나라의 도성 장안성을 함락시켰다. 후에 반란은 평정되었으나 8-9년 동안 계속된 전란의 피해는 모두 당왕조의 중요한 통치기반이 된 지역으로써 사회경제적 기반의 파괴는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안사의 란 이후 당왕조 치하의 민호는 약 960만 호에 인구는 5200만에 달했으나 760년 유안이 재정업무를 담당한 수장에 임명되었을 때는 민호 190만, 인구 1700만으로 줄어 들어 그 감수 비율은 민호는 무려 80% 인구는 68%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폭 줄어든 민호와 인구 중에서 귀족, 관료, 승려, 도사를 포함한 세금과 요역을 부담하지 않는 민호와 인구는 각각 117만과 1462만에 이르렀다. 즉 실제로 당나라 재정을 부담하는 백성들은 76만의 호구와 237만의 인구로 당나라 총 호구의 8% 및 인구의 4.5%에 불과하여 백성들은 부담해야할 요역과 부세로 인해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안사의 란 발생 직전 날이 갈수록 부패해진 당나라 정권의 관료조직은 팽창을 계속하여 멈추지 않았으며 그 결과 국가재정은 이미 바닥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당나라 정권은 일련의 탐관오리들을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색출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천보 연간에 호구행정을 담당했던 왕홍(王鉷)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당시 당나라 조정은 해마다 대외원정을 행하여 국경을 지키다가 사망한 병졸들이 많았다. 그들은 국가 방위를 위해 군역을 나간 백성들로써 모두가 고향의 호적에 입적되어 있었다. 그런데 변방의 장수들은 사망한 병사들의 숫자를 감춰 공적을 조작하여 포상을 받으려고 했다. 그래서 수많은 전사자들이 30년 동안이나 호적에서 지워지지 않고 명부에 계속 존재했다. 당왕조의 조세제도인 조용조(租庸調)의 규정에 백성들이 변방을 지키는 군역에 나가 6년을 종군하면 6년 동안의 모든 조조(租調)를 면제하게 되어 있었다. 호구행정을 담당했던 왕홍은 ‘정명유존(丁名猶存)’ 즉 사망했으나 그 이름이 호적에 지워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향에 남아있던 가족들에게 계속 조조(租調)를 부담시켰다. 그래서 그는 30년 전에 국경을 지키다 이미 사망한 백성들에게 6년 동안의 복무기간을 면제한 30년에 해당하는 조조를 그들의 가족들에게 추징했다. 안사의 란 이후 당나라 정권은 더욱 악랄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수탈했다. 유안 이전의 재정행정 책임자는 원재(元载)였다. 그는 백성들을 강박하여 과거 8년 동안 결손난 조조(租調)를 추가로 납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백성들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자 관리들을 보내 재산을 조사시키고 적발한 재산의 절반에서 심지어는 80에서 90%까지 몰수했다. 원재의 그런 조치를 ‘백저(白著)’라고 했는데 정당한 세금 이외의 세금을 강압적으로 수탈하는 행위를 말한다. 마치 연못의 물을 말려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은 그런 방법으로는 결코 위기에 빠진 당나라의 재정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인 갈등만 한층 더 격화시켰을 뿐이었다. 관료들이 핍박을 받은 백성들은 반란의 무리에 가담하거나 아니면 산과 늪지로 도망쳐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당숙종 이형(李亨) 상원(上元)에서 대종(代宗) 이예(李豫)이 보응(寶應) 연간(760-763년)에 강회(江淮) 지역에는 원조, 진장, 방청, 허흠 등이 영도하는 대규모 농민기의를 비롯 그 기간을 전후로 계속해서 10여 년 동안 해마다 농민기의가 끊이지 않았다. 관료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수탈하자 분노한 백성들이 일으킨 민란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당나라 사회에 민생고를 심화시키고 이어서 재정적인 기반을 고갈시켰다. 이로써 실제 상황은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당나라 조정은 유안을 발탁한 것이다. 유안은 외적의 침입으로 패전을 거듭하여 당나라가 위기에 몰렸을 때 명을 받았다. 유안의 각고의 노력과 효과적이고도 적절한 정책의 시행으로 당나라 정권의 재정적인 문제는 획기적으로 호전되었다. 우선 매년 60만 민(緡)에 불과하던 소금전매사업 수익금은 600만 전으로 증가되어 당나라 조세 수입의 절반을 충당했다. 한편 수도 서울 장안에 조운을 통해 끊임없이 계속 장안으로 양식을 공급해서 수도 서울에 대한 안정적인 공급을 보증해야 했다. 그러나 유안이 책임을 맡기 전에는 장안에 양식이 제 때에 이루어지지 않아 항상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으며 어떤 때는 황제 전용 주방마저도 양식이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유안이 맡고 부터는 매년 40만 석을 운송시켰고 많을 때는 110만 석까지 달했다.
유안의 재정관리는 당나라의 사회의 경제회복을 촉진시켰다. 그가 재정행정을 담당하고부터는 당나라 정부의 통제 하의 200만 호가 안 되었던 호구 수는 300만 까지 증가했으며 그 증가된 호구는 모두 유안이 관할했던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유안이 재정관리를 맡았던 시기에 재상 원재(元載)가 범죄를 저지르자 조정은 유안에게 그 사건의 심리를 맡겼다. 유안은 법에 따라 원재를 사형에 처했다. 이 일로 인해 유언은 후에 재상의 자리에 오른 원재의 재자 양염(楊炎)에 의해 모함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유안의 재정관리에 대한 사료는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의 《식화지(殖貨志)》, 《유안전(劉晏傳)》등에 기재된 몇몇 구절 및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몇몇 기사에 산재해 있다.

제2장 중국 고대 인물 중 가장 뛰어난 재정정책가
유안의 재정행정 관리의 대상은 매우 광범위하다. 광활한 관할지역을 대상으로 조운을 이용한 양식의 수집, 운반 및 저장, 전매제에 입각한 소금의 구매와 판매 및 생산관리, 시장과 물가의 조정과 통제, 재난 방비, 구재, 흉년을 대비한 물자의 비축, 화폐의 주조 등의 업무는 모두 그의 관할 하에 있었다. 또한 그런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제도와 방법 등에 대한 규정의 제정, 개혁, 인원의 선발, 조직의 창설, 감독, 고과 등도 모두 그의 계획과 구상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가 매우 엄격하고 세밀하게 추진한 모든 국가재무 관리활동은 자신이 스스로 계발한 정책에 의해서였다. 그의 성공적인 업적은 중국 고대의 유명한 재정가였던 상홍양(桑弘羊), 왕안석(王安石), 장거정(張居正) 등의 인물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정세는 국가재정이 파탄난 상태의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이룩한 업적이었다. 유교사상의 대표적인 교리였던‘귀의천리(貴義賤利)’사상이 팽배해있던 봉건사회 체제 내에서 활동했던 고대의 재정가들은 당시의 사회지도층으로부터 많은 수모와 멸시를 받았으며 그들의 업적이 크면 클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유안의 경우는 그런 면에서 매우 이례적인 대접을 받았다. 그는 그가 활동하던 동시대인이나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광범위한 계층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심지어는 당시의 전통적인 봉건사상을 깊이 신봉하고 있던 인사들조차도 유안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는 그의 옛 동료였던 진간(陳諫)이라는 인물은 당시 유가사상에 철저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조정에 올린 상소에서 유안이 올린 치적은 관소(管蕭) 즉 중국의 대표적인 경세가로 추앙받은 관중(管仲)과 소하(蕭何)에 버금간다고 칭송했다. 《구당서(舊唐書)》에 그의 재정관리 능력에 대해 칭송하기를 ‘막힌 것을 통하게 하고 재능있는 사람을 임용했으며 나라의 살림을 부강하게 했으나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권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나라의 장래를 설계’했던 역대의 저명한 경세가들의 공적에 비해서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극찬했다. 유가의 전통적인 사상에 철저한 인물이었던 《신당서(新唐書)》의 작자 구양수(歐陽修) 역시 유안에 대해 ‘유안은 늘상 천하의 잉여 재화를 잘 부려 군사비로 충당했는데 십 수 년 간 지속된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군비 부담을 일반 백성들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충족하게 조달했다. 당나라가 안사의 란 이후 무너지지 않고 중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유안의 공로이다.’라고 칭송했다. 위와 같이 유안에 대해 논평한 사람들은 모두 봉건왕조 시대의 통치이론에 철저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유안의 재정정책과 관리는 확실히 당시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발전시켰으며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그의 그러한 재정정책을 수행했던 방법은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 봐도 매우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안을 중국 고대의 가장 훌륭한 경세가라고 불러도 전혀 무리한 일이 아니다. 다음은 유안에 의해 시행된 각 방변의 정책과 성과다.

[1] 조운(漕運)
앞서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안사의 란 이전에 이미 배요경(裵耀卿)이라는 인물은 당나라의 조운체계를 구간별로 끊어 운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배요경의 방법은 결점이 많았다. 그는 장강의 하류 지역의 양자(揚子)에서 하음(河陰)에 이르는 뱃길을 한 구간으로 만들었으나 변하(汴河)의 항로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수로와 겹치는 구간이었다. 그러나 변하와 겹치는 구간은 실제상으로 수량이 풍부하지 못해 강심은 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협소했기 때문에 남쪽으로 향하는 선박이 쉽게 변하로 진입할 수 없었고 장시간 정박하면서 수량이 늘어날 때가지 기다려야 했다. 또한 삼문협(三門峽)에서 당나라의 도성 장안(長安)까지는 황하와 위수(渭水) 두 강을 지나가야 했는데 두 강의 수세가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수의 강물은 깊지 않아서 조운선은 원하는 때에 들어설 수 없었다. 삼문협 구간에서 10여리에 달하는 육로를 이용해서 운송기간을 단축했으나 화주(華州)의 경계에 이르러 육운을 중단해야 했다. 배요경은 전 구간을 육운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조운을 위주로 육운을 보조로 하는 방법을 채용했다.
안사의 란 이후 배요경이 규정한 체계는 이미 무너졌고 수도(水道)는 오래동안 관리하지 않아 여기저기 여러 곳에서 강심에 퇴적물이 쌓여 조운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레서 각 구간이 접하는 장소에 만들어 놓은 양곡창고는 모두 훼손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삼문협 구간의 육로도 전란 중에 대부분 심하게 파괴되어 주민들은 모두 흩어져 육로운송에 필요한 인력을 징집할 수 없게 되어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밖에 수로와 육로로 이루어진 운송로의 파괴 이외도 과거 조운제도를 운영하기 위해 인력의 징집과 조직 및 관리 부문도 거대한 폐단이 존재했다. 해당 관청은 부호를 지명해서 파견하여 수송을 감독하는 부호를 조두(漕頭)라고 불렀다. 조두는 조(調)의 명목으로 농민들을 징집하여 무상으로 노역에 종사시켰던 노잡이나 민부(民扶)를 지휘 감독했다. 당시의 조운을 위해 인력을 동원했던 방법은 봉건시대에 행해졌던 전형적인 방법으로써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했고 효율성도 매우 떨어져 조운체계를 운영하는데 갈등과 어려움만 가중시켰다. 배요경이 개혁한 조운제도는 한가지만 국한되어 관련이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조운의 관리와 운영에 대한 책임이 유안에게 넘어왔을 때는 구간별로 운행되던 조운업무는 여전히 이전부터 행해지던 당나라가 전통적으로 답습해왔던 방식을 따랐고 실제적으로는 중국 역대 봉건왕조가 계승해서 시행했던 조운요역제(漕運徭役制)에 의한 체계였다. 안사의 란을 진압하던 과정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난폭한 짓을 서슴치 않던 장군들이 대거 등장해서 각 지역을 장악하고는 여행객이나 상인들의 재물을 약탈했을 뿐만 아니라 통과하는 조운선을 보면 자기들 멋대로 조운선의 항로를 막아 방해하기 일수였다. 조운을 행하는데 그와 같은 곤란과 장애는 양식의 운송을 지속적으로 이행할 수 없게 했으며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안정적으로 양식을 공급하는데 치명적인 위협을 가했다. 조운은 봉건왕조의 수도에게는 생명선과 같다. 만일 조운로가 장기간 차단되어 통행이 불가하게 된다면 당왕조는 정치적으로 더욱 심각한 위기에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종래의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조운은 옛날과 같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거나 정비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 보다 진일보한 종합적인 새로운 운영방식이 도입되어야 했다. 조운의 책임을 맡게 된 유안은 양곡의 운송을 위한 하도(河道)와 창고(倉庫)를 포함한 제반 문제를 세밀하고 철저하게 조사한 후에 조운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할 방법을 찾아냈다.

배요경이 고안한 구간별 운송을 위한 운송로의 회복과 보완책이다. 우선 조운로를 남수(南水), 변하(汴河), 황하(黃河), 위수(渭水) 등 4구간으로 나누었다. 남수는 장강(長江)의 양자(揚子)에서 옛날 부차가 굴착한 한구(邗溝)로 진입한 후에 지금의 강소성 청강시(淸江市)에서 회수(淮水)로 진입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지금의 안휘성 우이(盱眙)인 변하구(汴河口)까지, 변하구간은 우이에서 변하로 들어가 개봉을 거쳐 황하구(黃河口)인 하음(河陰)까지, 황하구간은 하음에서 위수(渭水口)까지, 위수구간은 위수구에서 장안까지다. 그리고 구간이 겹치는 입구에는 대규모의 양곡창고를 건설했다. 또한 거센 물살 때문에 이용해야 했던 삼문협구간의 육로도 수로를 바꾸어 전 구간을 수로로만 이용하게 했다. 구간이 겹치는 접구처(接口處)에는 양곡을 부려 창고에 집어넣고 운반선은 원래의 출항지로 돌아가게 하고 다음 구간을 운항하는 배가 와서 다시 배에 싣고 운송을 계속하는 방법을 취했다. 즉 남수구역을 운항하는 배는 변하에, 변하구간의 운송선은 황하구간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황하구간은 위수구간을 위수구간은 황하구간에 진입할 수 없었다. 남수구간의 배는 양주(揚州)에 양곡을 저장하고, 변하구간은 하음(河陰), 황하구간은 위구(渭口), 위수구간은 장안 인근의 태창(太倉)에 양곡을 저장했다. 그리고 삼문협 구간의 급한 물살에 선박의 전복을 막기 위해 품질이 견고하고 질긴 고가의 재료를 사용하여 선박을 예인할 수 있는 밧줄을 제조한 후에 경험이 풍부한 섬부(纖夫)를 고용하여 선박을 예인하게 만들어 안전한 운항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섬부란 급한 물살을 거슬러 운항하는 화물선에 밧줄을 걸어 양쪽 강변에서 예인하는 인부들을 지칭한다. 다른 한편 과거에는 양곡을 선적할 때 개별 포장을 하지 않고 벌크상태로 적재하여 하역할 때 많은 경비와 시간이 소요되고 양곡이 쉽게 부패될 뿐 아니라 선박이 일단 전복되면 하나도 남김없이 강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던 경우를 피하기 위해 부대에 개별포장하는 방법으로 바꾸어 경비와 시간과 함께 소모율을 획기적으로 줄였을 뿐만 아니라 배가 전복되더라도 인양이 가능하도록 했다.

인력을 운영 방식을 바꿨다. 유안은 선두(船頭)를 임명하여 조운을 감독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관리들을 파견하여 방법으로 개혁했다. 그리고 요역(徭役)을 이용한 운송제도를 전문적인 유급의 노잡이꾼들을 활용한 고용제로 바꿨다. 또한 소금을 팔아 생긴 돈으로 한 번에 1000 곡(斛)을 적재할 수 있는 대형선박을 대량으로 발주했다. 당나라 때 1곡은 60키로 한 가마니다. 유안은 선박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시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발주했다. 예를 들어 시중에서 거래되는 건조비가 척 당 5백 금이었는데 유안은 1천 금을 지불하는 식이었다. 또한 인부도 요역으로 징발되는 민부(民夫) 대신 전문적인 노잡이꾼들을 유급으로 고용했다. 유안의 획기적인 개혁안은 선박을 건조하는 기술자들이나 전문적인 노잡이꾼들의 사기를 높여 운송효율이나 사고를 대폭적으로 감소시켰다. 유안의 개혁안으로 이룩한 성과는 매우 컸다. 과거에는 남수구간의 시발점인 윤주(潤州) 즉 지금의 진강(鎭江)에서 양자강의 건너 편인 양자(揚子)까지 운반하는 데 한 가마니 당 운비가 19전이 소요되었으나 유안이 개혁한 방법으로 4전으로 만들어 무려 15전을 절약했다. 윤주에서 장안의 태창까지의 운비는 과거 120전에서 30전으로 줄였으며 신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매년 장안으로 운송되는 미곡은 ‘한 되도 물에 빠지지 않았다’라고 했다. 양곡의 운송 이외도 유안은 자신이 계획하고 시행한 조운제도를 이용하여 기타 화물을 운송하는데도 적용시켜 양자(揚子)에서 지금의 개봉시인 변주(汴州)까지의 운송비를 절감했는데 한 번 운항할 때마다 2,200전 이었던 운송비를 900전으로 줄여 연간 1여 만 민(緡)을 절감했다. 1민은 천 개의 동전을 가운데 구멍으로 묶은 꾸러미 단위로 한 개의 동전을 문(文)이라고 했으며 당시 은자 2냥에 해당했다. 당태종 때 미곡 1두는 5전이고 1민은 200두, 즉 20석으로 60키로 들이 20가마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유안이 절감한 10여 만 민은 60키로 들이 쌀 200만 가마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다. 유안의 개혁안은 당나라 정부가 직면한 양식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 수도가 위치해 있는 관중에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환경을 개선하여 관중에 비록 수해나 한발이 들어도 물가가 폭등하지 않게 되었다.

[2] 소금의 전매제
당왕조 초기에는 원래 소금의 전매제를 시행하지 않았다. 후에 재정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한 결과 관료들은 점차적으로 소금의 전매제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당현종 초, 유동(劉彤)이라는 관료가 처음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무제가 시행한 소금의 전매제를 전례를 따라 소금뿐만 아니라 철과 목재 등에 대해 전매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사의 란 이전에는 실제적으로 전매제는 시행되지 않았고 단지 소금과 철의 세금을 징수했을 뿐이었다. 당숙종(唐肅宗) 건원(乾元) 원년(758년) 염철사(鹽鐵使)에 임명된 제오기(第五琦)는 서한의 재정가 상홍양(桑弘羊) 이래 전통적으로 시행되어 왔던 관에 의한 수매와 판매 방법으로 소금의 전매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소금가격은 한 말 당 10전에서 110전으로 폭등했다. 제오기가 시행한 소금의 전매제는 일시적으로 당나라 재정위기를 완화시킬 수 있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제오기가 시행한 소금전매제에 대해 “백성들의 세금은 증가하지 않았으나 정부의 재정은 풍족하게 되었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국가의 농단으로 인한 전매제는 소금가격을 급등시켜 모든 백성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가중시키고 소금의 판매를 대폭적으로 제한했다. 당나라 정부는 전매제를 시행하기 위해 관료조직을 설치하고 염관과 염리(鹽吏)를 임용했다. 비용의 증가는 막대했고 효율은 저하되었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성을 부렸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정부의 재정수입은 단순하게 증가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고려해야할 문제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결국은 제오기(第五琦)가 시도한 소금전매제의 효과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안이 소금전매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았을 때 소금전매로 증가한 재정수입은 가까스로 60만 민(緡) (혹은 40만 민(緡))에 불과하여 그것으로 소금전매제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제오기로부터 소금전매제의 운영을 넘겨받은 유안은 그동안 답습했떤 소금전매제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그의 개혁조치들은 다음과 같다.

(1) 관수관소(官收官銷)를 관수상소(官收商銷)로
관수관소는 소금를 관리하는데 정부가 수거하고 정부가 판매하는 방식이고 관수상소는 정부가 수거하고 상인이 판매하는 방법이다. 원래부터 유안은 소금전매제를 운영하는 과거의 전통적인 방법에 문제점이 많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관료기구가 번잡하고, 염관(鹽官)이나 염리(鹽吏) 등 관리들이 수가 넘쳐날 정도로 방만했다. 그래서 사서에는 ‘너무나 많은 염리는 주(州)나 현(縣) 정부의 두통거리였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또한 그렇게 많은 염관과 염리가 장악하고 있는 전매행정은 원래의 뜻대로 작동하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유안은 전매제의 운영방식을 관수관소 방식을 관수상소로 바꾸었다. 구체적인 방법은 소금의 생산은 예전처럼 정호(亭戶) 즉 염민(鹽民)이 생산하면 국가가 모두 통제가격으로 일률적으로 강제수거하여 상인들에게 판매했다. 이로써 전매제의 시행으로 들어오는 재정수입은 수매와 판매가격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익금이다. 한편 국가에서 소금을 매입한 상인들은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임의대로 소금을 처분할 수 있게 했다. 상인들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장소가 어디이건 운송하여 팔 수 있고, 판매할 량을 조절할 수 있으며, 판매가격을 마음대로 메길 수 있게 되었다. 소금을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데 드는 제반 비용은 상인의 자본력으로 해결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소금전매제를 시행하기 위해 만든 방대한 관료조직은 대폭적으로 축소되었다. 그런 인식에서 출발한 유안의 개혁안은 우선 10개소의 소금단지와 4개소의 염장을 설치했다. 염감(鹽監)을 임명하여 염민(鹽民)과 염상의 관리와 소금의 통합구매 및 상인에게 판매하는 임무 및 염장에서의 비축물량 및 판매할 소금을 저장하는 창고의 관리를 맡겼다. 상인들이 염감에게 구매대금을 납부하는 수속을 마치고 나서 염장에 출고증을 제시하고 소금을 인도받아 자비로 실어가는 형식이었다. 소금전매로 인한 재정수입을 보장함과 도시에서 합법적인 허가를 얻어 영업하는 염상의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서 불법적인 소금의 거래를 단속을 목적으로 설치한 13개소의 순원(巡院)으로 하여금 사염을 조사하여 범법자를 추포하게 했다. 유안에 의한 일련의 개혁조치들은 전매기구와 조직들 및 관련 관리들을 유지하기 위한 경비를 대폭적으로 절감시켰으며 상인들에게 공급하여 생기는 이익금의 폭을 크게 증대시키고 그에 병행하여 국가의 재정수입을 크게 확충시켰다. 이에 병행하여 상인들끼리 경쟁을 일으켜 소금가격을 안정시키는 부수적인 잇점도 있었다.

(2) 소금자원이 없는 변경과 원격지구에 상평염(常平鹽)을 설치하다.
유안의 개혁조치들은 뚜렷한 특징이 있다. 국가가 농단한 가격을 경쟁가격으로 바꾸어 놓았고 상인들의 경쟁심을 이용하여 소금가격을 비교적 저렴하게 형성시켰다. 그런 방법은 같은 시장 내에 많은 상인들이 활동하게 만들어 비교적 충분한 경쟁상태로 만드는 것이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상인들에게 교통이 불편한 소금산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변경지대나 황무지에 소금을 판매하는 것은 운송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상인들은 그런 곳을 방문하여 판매하는 것을 기피했다. 그러나 몇 몇의 소수 상인들이 일단 방문하여 판매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경쟁이 없는 독점가격이 되어 소금가격은 폭등하게 된다. 그와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유안은 한나라 때 경수창(耿壽昌)이 창안했던 상평창(常平倉)를 도입하여 소금전매제에 원용했다. 그는 변경지대나 산염지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 소금전매제도를 운영하하기 위해 상평염(常平鹽)이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국가가 일부의 소금을 변경지대나 원거리 지역에 운반하여 소금의 가격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상인들은 여전히 당지에서 자유롭게 소금을 판매한다고 해도 만일 경쟁이 제한되어 폭등한 가격이 안정이 안 된다면 국가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상평염의 소금을 방출하도록 했다. 상평염이 비록 국가기관에서 운영하기는 하지만 국가는 소금의 가격을 폭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상인에게는 경쟁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국가가 운영하년 상펑염은 소금의 가격을 폭등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여 소비자 가격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유안의 개혁으로 소금전매제에 의해 재정수입은 대폭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당시 당나라의 세수 중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큰 항목으로 발전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금가격도 안정시키기도 했다. 또한 변경지대나 소금산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는 상평염을 설치하여 소금가격의 폭등을 예방했다. 그것은 마치 ‘정부의 수입은 크게 늘어났지만 사람들은 소금이 귀하다고 여기지 않았다.’라는 말하는 것과 같았다.

[3] 황정(荒政)
황정은 즉 재해를 입었을 대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정부의 활동으로 역대 봉건왕조의 가장 중요한 국가행정 중의 하나다. 황정 역시 유안의 재정관리의 중요한 목표였다. 유안은 안사지란 이후에 활동한 인사다. 안사의 란은 당나라가 당면한 가장 큰 재난이었다. 그 란으로 당나라의 사회 및 경제 기반은 모조리 파괴되어 백성들은 생활고로 극도의 고통을 받았다. 그 폐해는 어떤 천재보다 더 심했다. 사서에는 ‘ 대군이 지나간 후에는 반드시 흉년이 들었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천재와 인재는 서로 상승작용을 한다. 이런 황정을 구재하라는 지상명제는 유안을 극도로 압박했다. 황정에 대한 유안의 조치들의 일부는 옛날 사람들이 규정한 방법을 따랐고 일부는 그 전례를 개혁하거나 자신이 창안한 독창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한나라 때 경수창이 시행한 상평창은 역대 봉건왕조들이 효과적으로 시행했던 황정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당나라 때 성행한 상평창제도는 정상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되어 각 지역의 상평창이 비축한 양식은 충분했으나 시간이 감에 따라 비축량은 적어지고 결국은 폐지되었다. 특히 안사지란 이후 많은 지역의 상평창에는 식량의 비축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원래 있던 양식조차도 모두 다른 용도로 유용되어 창고에는 양곡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재정업무를 주관하게 된 유안은 우선적으로 상평창의 기능을 회복시키려고 했다. 소금전매제로 확보한 재원으로 양곡을 대량으로 사들여 각지의 상평창에 비축하게 했는데 그 수량은 300만 곡에 달했다. 이에 비교적 충분한 물자를 비축해서 재해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그가 황정에 대해 조치한 개혁조치와 창안한 제도는 다음과 같다.

① 방중우진(防重于賑) : 구휼(救恤)의 예방
유안은 일단 재해나 천재가 발생하면 상황이 악화되어 구휼해야 하는 사태로 발전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고 더불어서 국가는 국가대로 막대한 재정부담을 지게 된다고 인식했다. 재해가 발생하기 전이거나 혹은 징조가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정부가 해당지역의 백성들이 예방조치를 하게 하거나 양식을 비축하는데 돕도록 해서 재해가 악화되는 것을 방지해서 후에 국가가 사태를 수습하는데 들어가는 비용과 인력을 반감시키려고 했다. 진간(陳諫)은 유안의 구제사상(救濟思想)을 “환자를 위급한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 훌륭한 의사이듯이 재해를 잘 해결하는 자는 백성들을 구휼해야 할 상태로 만들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개괄적으로 표현했다. 유안은 재해의 방지를 위해 각 지방의 정보를 수집하여 관리하는 조직을 운영했다. 그가 관할하는 지역에 재해가 발생하려는 징조가 나타나거나 작물의 어린 묘의 성장에 이상징후가 생겼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신속하게 각 지구에 설치한 순원(巡院)에 통지하여 정황을 직접 확인한 후에 피해를 입은 민가를 지원할 방법을 강구하도록 했다. 즉 순원은 피해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감면하거나 양곡을 대여할 방법을 찾아 당지의 농민들 스스로 재해를 예방하거나 재해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②생산자구(生産自救)
- 이재민이라도 생산활동에 참여하여 스스로를 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

천재가 이미 발생하여 그 상태가 만연하게 된 정황 하에서는 어떻게 재해를 당한 백성들을 구제하는가? 전통적인 구호방법은 국가가 비축된 양식을 방출하여 시행한 구휼사업이었다. 그러나 유안은 그러한 소극적인 구휼방법을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턱없이 부족한 구휼미로는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방법은 국가에 커다란 재정적인 부담을 안기게 되고, 재해가 들지 않은 지구의 농민들에게는 증세하게 되어 결국은 새로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었다. 유안의 생각은 국가가 재해를 당한 농민들이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하여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진간은 유안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 왕된 사람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재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안심하고 농사를 짓거나 베를 짜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다”라고 했다. 진간의 말은 재해를 당한 농민이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하여 스스로 양식을 해결하는 것이야 말로 적극적인 구휼방법이라는 뜻이다.

③이부보농(以副補農)
- 농사 이외의 생산활동으로 이재민의 소득을 확보하게 하다. -
농촌에서 생산되는 산품은 양곡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흉년이 든 해는 주로 양곡의 생산이 대폭적으로 감소될 뿐이지 그 밖의 농작물인 임산물, 목축, 어업, 사냥, 가내수공업 등의 농민들이 부업으로 산출하는 산품들은 여전히 상당한 수량으로 획득할 수 있고 심지어는 평소보다 더 많이 생산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찍이 선진시대에는 흉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부보농(以副補農)’ 정책을 쓰곤 했다. 《주례(周禮)》에 ‘사금(舍禁)’이란 재해정책에 대한 규정이 있다. 사금이란 재해가 든 해에는 잠정적으로 산이나 늪지에 농민들의 출입을 허가하는 제도다. 산택(山澤)의 출입을 허가 받은 농민들은 자유롭게 임산물을 채취하거나 연못의 물고기들을 포획하여 재해의 피해를 경감시켰다. 유안은 중국의 전통적인 방법을 계승하고 다시 운용의 묘를 살려 당대의 환경에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이부보농’의 정책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식량관리와 상업관리를 위한 정부조직을 창설하여 자기 통제 하에 두고 재해가 든 지역의 농민들로부터 광범위하게 농가가 생산한 부산품들을 매수했다. 유안의 조치는 이재민들의 고통을 경감시켰으며 또한 그 농부산품들을 다시 시장에 내다 팔아 국가의 재정수입을 증가시켰다. 그의 그러한 조치들은 재해가 든 농촌경제를 활성시켰으며 재해가 든 농촌을 평상시로 회복하는 것을 촉진시켰다. 재해가 든 기간 동안 농민들이 가장 크게 고통받는 것은 식량의 결핍이었기 때문에 유안은 상평창의 양식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산품들을 팔아 양식을 매입하는 방법을 병행했다. 국가가 저장한 양곡을 농촌의 이재민들이 생산한 각종의 식량 이외의 부산품들과 교환한 것이다.

④이상조관(以商助官)
- 상인들을 이용하여 관리들을 돕게 하다. -

중국의 전통적인 이재민 구호는 전적으로 관료들의 일이었다. 그래서 이재민구호 사업을 “정(政)”이라는 글자 하나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재민구호 사업을 관청의 힘만으로 하는 것은 커다란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우선 동원할 수 있는 재정에 한계가 있었다. 비축식량의 방출에만 의존하다가는 필요로 하는 이재민들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었다. 재해의 피해가 심할수록 관청과 이재민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구호관청이나 구호 인원은 모두 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재해를 당한 이재민들은 농촌에 있었다. 예를 들어 상평창에서 양식을 방출할 경우, 그 양식을 광범하고 궁벽한 농촌지역까지 운송한 후에 대여하거나 판매하는 방법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렇다고 농민이 몇 십리 혹은 백리가 넘은 거리의 성시로 달려가 양식을 사는 것도 또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관청이나 그 인력들의 효율은 매우 낮을 뿐만 아니라 나태한 집무태도, 사리에 맞지 않은 행정, 온갖 작폐가 난무하는 기구로써 이재민구호사업은 봉건시대부터 가장 부패된 관료기구였다. 당나라의 재정정책의 책임자가 된 유안은 재무행정기구를 획기적으로 개혁했다. 그가 창안한 재무행정기구는 여전히 봉건시대의 관료들로 이루어진 조직이었으나 효율적인 면에서는 확실히 많은 진보가 있었다. 유안이 효율적으로 운영했던 재정행정업무는 일관되게 ‘이상조관’이라는 방법이었다. 특히 ‘이상조관’으 운영 체계는 재해대책 분야에서 가장 큰 효율성을 발휘했다. 정부가 양식과 농부산품을 상인에게 교환하면서 상인에게 가격 면에서 특혜를 주는 방법이었다. 상인은 이익을 쫓아 도시로 들어가 부산품을 팔아 양식을 매입한 후에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 다시 양식과 부산품을 교환해서 이중으로 이득을 얻었다. 상인들은 관청의 명령을 기다릴 틈도 없이 부지런히 농촌과 도시 사이를 왕래하면서 양식과 부산품들을 교환하는 매개체가 되어 정부가 구호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중요한 보조역할을 맡았다. 유안의 재해구호사업을 수행하는 방법은 우선 재해의 피해를 최소화시켜 재해지역의 경제활동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로써 이안의 ‘이상조관’ 정책은 수재와 한재(旱災)의 이해(二害)로 표현되는 자연재해를 대처하는 규범이 되었고 마침내 수재와 한재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기게 되었다. 유안이 시행한 재정정책은 괄할 구역의 호구 수를 대폭 증가시켜 자신의 관할 내이거나 기타 다른 지역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재해지역은 유안의 정책은 재해지역의 경제를 회복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 여기게 되었다.

[4] 평준법(平準法)
평준법은 서한 한무제 때 상홍양(桑弘羊)이 창안해서 시행한 봉건제 국가의 대표적인 물가조정정책이다. 유안의 상업자본을 이용한 재정행정업무 추진 방식은 규모 면에서 상홍양의 시책보다 훨씬 거대했고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보다 주밀하고, 보완점이 거의 없었다. 사가들은 유안의 업적에 대해 “ 유안이 시행한 평준법은 세상의 모든 물자의 가격을 안정시키고, 천하의 모든 돈벌이를 적절하게 조절했다.”고 칭송했다. 한나라 때 시행한 평준법은 물가를 통제하여 정부의 재정수입을 확보하려는 목적 외에 사적인 상행위를 배제시켜 상업자본에 타격을 가하려는데 본질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상홍양이 시행한 평준법은 경중정책(輕重政策)이 골자이기 때문에 시행과정에서 그 성향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상홍양은 자신의 평준정책에 대해서 “현관(縣官)은 실질을 잃지 말아야 하고 상인은 이익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평준(平準)이라고 한다.”라고 확실하게 정의했다.
유안이 시행한 평준법도 물론 물가를 통제하고 정부의 재정수입 확보가 목적이었지만, 사인의 상행위를 억제하려는 한나라와는 그 목적이 달랐다. 그가 시행한 수 많은 국가재무 행정활동은 모두가 상인들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이루어졌다. 그는 여러 방면에서 상인들의 이익을 고려하여 그들이 적극성을 띠게 만들었다. 그의 평준정책은 ‘정부의 재정수입을 보장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천하에 물가가 폭등하거나 폭락하는 것을 방지하게 만들었다.’라고 했다. 또한 상인들은 이익을 도모하지 말아야한다는 주장도 하지 않았다. 송조의 구양수(歐陽修)는 유안이 이룩한 업적을 ‘상인들을 배제시켜 세상의 온갖 물품들의 가격을 안정시켰다.’라고 칭송했다. ‘세상 만물가격의 안정’은 확실한 사실이나 상인들을 배제시켰다는 말은 상업을 천시했던 ‘중본억말(重本抑末)’ 사상으로 함몰된 선입견의 표현일 뿐으로 유안이 시행한 평준법을 올바르게 평가한 말이 아니다. 유언이 시행한 평준정책은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여 물가를 안정시키고 관료조직과 상인 쌍방이 모두 이익을 얻게 만들 정도로 매우 수준이 높은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의 현황이나 시장의 동태에 관한 실시간 정보를 장악할 수 있는 조직과 제도의 운영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담당하고 있던 광대한 지역의 각 도(道)에 시장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순원(巡院)에 상품의 수요와 공급 상황, 상품가격의 고저 및 변동, 기타 경제상황에 대한 정부를 실시간으로 보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역참제도를 개혁했다. 원래 공문의 수발이나 관부끼리의 연락을 담당했던 착역(捉驛) 즉 역참인은 요역으로 징발한 백성들을 선발해서 복무시켰다. 그런 것을 유안은 일반인 중에서 채용한 기수(騎手)를 역참인으로 고용한 방법으로 개혁했다. 후한 보수를 지급하고 모집한 기수들은 빠른 속도로 마치 질풍과 같이 달려 사람들은 그들을 ‘질족(疾足)’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고용한 역참인들의 활약으로 역참인은 제 시간에 물품이나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이 수집된 정보를 전달하거나 우송하는 조직은 매우 활발하게 작동했으며 각 지구의 경제상황이나 시장의 동태는 비록 극히 먼 거리에 있다 해도 수도 서울에는 불과 4-5일이면 전달될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정보를 장악하게 된 유안은 각 지구에 설치된 순원(巡院)이 물자를 방출하거나 수입하는 업무를 지휘할 수 있었으며 물자에 대한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유안은 세상의 모든 물자에 대해 경중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어 물가를 안정시키고 시장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제3장 유안이 실행한 경제사상.

유안이 시행한 수많은 경제정책은 연구할만한 경제사상으로 그 중 특히 중요한 사상은 다음과 같다.

(1) 재정과 경제의 충돌현상에 대한 인식으로써의 두회기렴(頭會箕斂)
두회기렴이란 가렴주구란 말과 같은 의미로 곶간을 모두 털어가 농민들을 기아선상에 몰아넣어 생업을 유지못하게 하는 관리들의 폭정이다. 유안의 임무는 정부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재원의 조달이다. 봉건시대의 재정은 국가의 유지를 위한 재화의 취득과 재화의 사용이다. 따라서 유안은 재정을 확보하여 봉건왕조의 정권과 봉건통치자에 기생하는 관료조직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재원을 조달해야 했다. 그래서 재정을 담당한 관료란 두회기렴(頭會箕斂)나 갈택이어(竭澤而漁) 즉 가렴주구로 농민들의 곶간을 모두 털거나, 연못의 물을 말려서 고기를 잡는 식으로 법을 운영하면 안 되고 지출을 줄여 최소한의 세원을 발굴하여야 훌륭한 재정가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경제란 재정의 기본이고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거나, 국가의 충분한 재정수입을 보장하는 것은 경제를 발전시켜 ‘하부(下富)’를 이루어야만 ‘상부(上富)’가 실현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인사들이 극히 적었다. 민간의 경제를 활성화시켜야만 국가의 재정이 튼튼해진다는 경제사상을 지니고 있었던 선구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백성들이 안심하고 경작이나 방직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침체된 경제를 회복하거나 발전시켜야만 국가의 재정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유안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재정정책을 수단으로 삼아 경제회복과 발전에 온 힘을 경주했다. 그는 재해지역의 농민들에게 세금을 감면하고 양곡을 방출하여 빌려주어 농민들의 생산기반을 개선하도록 독려했다. 또한 항재(抗災) 능력을 증강시키고 농민들이 생산한 농촌의 부산품들을 대거 수매하여 이재민들의 경제력을 확충했다. 이익을 쫓는 상인들을 이용하여 도시와 농촌 간의 물자 교류를 활성화시켜 재해지역의 경제환경을 개선했다. 이와 같은 조치들은 유안이 가지고 있던 경제사상의 발로였다. 그가 재정을 맡아 활동했던 기간 동안 뿔뿔이 흩어졌던 취락(聚落) 지역의 백성들의 점차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유랑하던 백성들이 원래 살던 부락으로 돌아온 결과 호구가 증가한 것이다. 재정과 경제는 비록 반대로 작용하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원리를 인식한 유안의 사상 덕분이었다.

(2) 경제운영의 원칙은 활성화시켜야지 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경제는 봉건사회에서 주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자연경제의 특징은 폐쇄적, 고립적, 정체적, 보수적이다. 그래서 봉건사회의 국민경제 관리사상은 경제활동을 억제시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 때에 유행했던 경중론(輕重論)은 유통시키는 화폐의 무게의 가볍고 무거운 것의 유불리에 대한 논의였다. 이후에 곡물을 포함한 모든 재화의 무게에 따른 가치의 비교에 적용하다가 더 나아가 화폐와 상품 간의 가치비교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 경중술에 통달하지 못한 경제정책 담당자가 시행하는 경제정책으로는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백성들을 가두어서 기르는 방법으로는 백성들이 이익을 취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라고 극단적인 표현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유안이 강조한 경중론에 통달하고 재화의 경중에 대해 권병을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그의 경제사상이 결국 관중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중론의 범주 안에 있음을 의미하기는 하나, 그는 오히려 경중론의 취약점인 상업활동을 통제하여 경제를 억압하여 죽여야 한다는 원래적인 의견에는 결코 동조하지 않았다. 이와는 오히려 반대되는 입장에서 경제를 활성화시켜 재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재정행정을 “ 돈의 호름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재원은 도처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손만 뻗으면 언제라도 취할 수 있다.”라고 한 말은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재정수입을 확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유안이 시행한 경제활성화 방안은 다음의 몇 가지가 있다.

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실제적인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그 결과를 면밀하게 조사와 연구과정을 거쳐 폐단이나 문제되는 점을 과감하게 도려내고 그 상처부위에 투약하는 방법으로 개혁을 진행시켰다. 예를 들어 그가 임무를 부여받기 전의 조운제도는 고인 물로 가득한 하나라의 연못처럼 어찌할 수 없었던 상태였다. 그는 친히 조운로로 이용되고 있는 물길 강변을 따라 순행하여 조운로가 막혀있는 장소와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여 장애물을 제거하거나 물길을 트려고 계획했다. 그가 제출한 방안은 핵심을 파악하여 적체구간을 철저하게 소통시킬 수 있었다. 그는 경제에 있어서 정체되는 증세를 정확히 진단해야만 비로소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② 단순한 재정행정과 경제체계를 다양화시켰다.
여러 방면의 다양한 요인들에 대해 상호작용을 촉진시켜 경제를 활성시켰다. 봉건시대의 자연경제는 단순한 경제체제로써 남자는 농사를 짓고 여자는 베를 짜는 식의 가정경제의 간단한 경제활동은 생활수준이 낮은 주요 원인이었다. 농부들의 수입은 적었고 수입원은 극도로 제한되었으며 생산을 효율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 재해를 당하게 되면 생산활동은 치명적으로 손상되고 항재(抗災)에 대한 자구능력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유안은 그런 단일화된 경제활동의 폐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재해가 든 해에는 관가의 돈을 풀어 대대적으로 농부산품을 사들여 농민들의 농부산품 생산을 독려했다. 봉건경제의 단일성은 경제를 정체시키고 경제활성화를 억제한다. 유안은 당연히 봉건시대의 자연경제를 기조로 한 단일경제 체계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일경제를 넘어 다양화를 추구한다고 해도 그 정도를 어느 정도까지 확대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③ 유안은 시장경제와 상공업은 경제활성화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당시까지 봉건사회의 경제사상에 젖어있던 인물들은 자연경제를 옹호하고 상품경제를 적대시하면서 ‘중본억말(重本抑末)’ 즉 본을 중시하고 말은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왕조 때에 이르러 상품경제가 활발하게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각도 점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때에도 비록 ‘중본억말’과 같은 교조적 사상을 비판한 사람들이 출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상품경제와 상공업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점차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유안은 사적으로 운영하는 상공업자들의 활동을 개방적으로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독려하기까지 했다. 상품경제와 상공업은 경제활성화에 필수적인 분야라는 사실을 인식했던 유안의 활약으로 당나라의 국세는 흥성해졌다. 재정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여 당나라의 재정문제를 해결한 유안은 당시 재상이었던 원재(元載)에게 서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제 조운선과 수레가 이미 아무데고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상인들의 왕래는 빈번하게 오고가며, 온갖 상품들은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시장에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상폐하의 신위(神威)에 힘입어 나라의 정세는 정관(貞觀)과 영휘(永徽)의 치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편리한 교통과 상공업의 발단은 태평성세로 가는 길이라고 인식했던 유안이 온힘을 다해 사적인 상공업자를 독려하여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공적을 이루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④유안은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유관부분들이 서로 적극적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유안이 재정업무와 경제발전에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재능이나 노력 뿐만 아니라 관련된 인력들 중 보조원이나 핵심인력을 확보해서 유관부문에서 상호 협력하면서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상인, 수부(水夫), 섬부(纖夫), 마꾼[어수(馭手)], 조선공(造船工)에서 이재민까지 아울러 그들이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힘썼으며, 그들을 재정행정과 경제활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맡도록 유도했다. 한 사람의 능력이나 혹은 소수의 사람들만으로 경제활동을 하게 하면 결국 경제는 살아나기 힘들어질 뿐이며, 각 유관부문의 당사자들을 자발적으로 참여시켜 경제활동을 하게 하면 자연히 경제는 급격하게 활성화된다. 유안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몇몇의 관련된 기미가 보였고 어떤 사람들은 이미 인식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논증을 제시한 사례로 있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이롭게 여기는 바대로 이익을 취하게 하라! 그것이야 말로 백성들에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한 말은 물질적인 이익에 대한 개인들의 관심이야 말로 적극적인 경제활동으로 유인하는 동기라는 뜻이다. 경제활동이 다양화를 찬양한 순자는 백성들이 식량만을 생산할 것이 아니라 양식 이외의 것인 임업, 목축업, 어업, 수렵, 공업, 상업 등의 산업도 모두 충분히 발전시켜 사회의 부를 증가시키고 번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한의 경세가 상홍양은 상품경제와 상공업의 발전은 ‘물산의 유무를 균등하게 만들고 온갖 재화가 서로 유통되어야 한다.’라는 법칙에 있으며 국가경제 활성화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는 나라의 경제운영을 자연경제에만 의지한다면 반드시 백성들은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재정수입은 지출을 감당할 수 없으며 물자의 많고 적음을 적절히 조절할 수가 없게 되어 경제는 침체되고 백성들은 빈곤상태에 빠지게 되는 국면을 초래할 것이라고 설파했다.
「가장 훌륭한 정치가는 백성을 선의로 다스리고, 그 다음으로는 이익으로 백성을 이끌며, 그 다음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깨우쳐서 다스리며, 강제로 백성들을 규제하는 방법은 그 다음이며, 백성들과 다투면서 하는 정치가가 가장 나쁘다.」라고 규정한 사마천의 선인론(善因論)은 경제의 역할, 번영, 부유, 경제기구의 운영 등에 관한 자연스러운 경제질서의 수립을 위한 이상적인 구상이다. 그러나 유안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경제를 살려서 그와 같은 호황국면에 이르게 하여 경제운영의 지침을 그렇게 명확하고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안이 실천한 경제정책은 전란 후의 심각한 경제난을 극복했다. 나라 안의 모든 곳은 길이 막혀있어 물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던 전운체계를 점차적으로 확실하게 정비하여 통하게 했다. 재화의 판매는 위축되었고 소금의 전매제에는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런 것들을 유안은 상인들을 참여시켜 경쟁을 유발하여 재화의 거래량을 대폭 증가시켰다. “정부가 이익을 후하게 책정하여 재화를 수매하자 사람들은 물자가 귀한 줄 모르게 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당나라의 경제는 번영의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재해가 든 해는 원래 침체된 경기로 인해 모든 경제활동이 가라앉기 마련이었지만 유안이 추진한 각종 재해대책으로 인해 오히려 재해로 인해 발생했던 ‘이해(二害)’가 ‘이승(二勝)’으로 바뀌는 현상이 벌어졌다.

(3) 상공업에 대한 인식의 변화
앞서에도 이야기했듯이 상품경제와 상공업에 대한 봉건시대의 전통적인 경제사상은 ‘억말(抑末)’ 혹은 ‘억상(抑商)’으로 표현되는 상공업에 대한 억제정책이었다. 한나라 때 경중론(輕重論)에 입각한 상품경제와 상공업은 국민경제와 재정에 적지 않게 공헌한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당시 상공업에 종사하는 계층은 노예신분의 하층민이 여전히 주력을 이루어 세력이 강대했고, 경중론자들 역시 상공업자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상공업에 종사하여 대부호가 된 상인이나 공인들은 위로는 군주를 위협하고 아래로는 하층민을 약탈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봉건군주는 경중지세(輕重之勢) 상 상공업으로 성공한 대상인들을 주요한 쟁탈의 대상으로 여겼고 동시에 한 나라에는 두 군주나 왕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립에 입각하여 대상인을 양립할 수 없는 적대세력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경중론에 의거 상인들을 억압하여 그들이 이익을 취하는 것을 막아야 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 식화(食貨)에 대한 모든 권병(權柄)을 장악”해야 한다는 유안의 경제정책은 한나라 시대의 경중론자들이 신봉하고 있던 경중지세로 실현해야 할 목표와 기본적으로는 일치했다. 그러나 유안이 필요로 했던 경중(輕重)의 권한이나 혹은 경중지세는 상인을 억압하거나 상인들로 하여금 이익을 취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상인들이나 공인들이 추구하던 이익이란 관점에서 그들을 이용하려고 했다. 유안은 상인이나 공인들을 타격해야할 적대세력이 아니라 국가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 도움을 받아야할 보조수단으로 여겼다. 그래서 조운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관리하는 조선공들 대신 개인적으로 영업하고 있던 민간의 조선공들을 고용하여 선박을 건조했고,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기능이 거의 정지상태였던 소금의 전매를 위한 관로들의 기구를 개혁할 때는 소금의 운송과 판매행위를 민간 업자에게 개방했다. 또 이재민의 구호사업을 시행할 때는 상인들을 이용하여 재해지구에서 생산된 부산품들을 농촌현장에서 수매하는 대금으로 양식을 팔게 했다.
총괄하면 한나라 때의 경중론자들은 첫째 유통영역에서의 운송문제만을 강조했지 생산방면에 대해서는 심도있는 연구와 대책이 없었다. 둘째 국가는 개인의 경제활동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상공업을 침체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셋째 상인과 공인들을 타도해야할 적대세력으로 인식하여 상인이나 공인들이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압제했다. 그러나 유안은 오히려 경제와 재정의 상관관계를 매우 중시했다. 그래서 유통에 주안점을 주어 유통망을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재정정책을 생산을 촉진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의 경제운영은 결코 경제를 죽이는 대신 살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상인들이나 공인들의 존재는 결코 국가의 공권력과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인 세력이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행정기구와 협조할 수 있는 보조적인 수단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안의 위와 같은 세 가지의 사상은 당시까지 봉건경제의 기본틀로 유지되어 왔던 경중론을 뛰어넘어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4] 국가재정를 위한 경제운영방식에서의 관점

유안은 재정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다방면의 요소들을 서로 연관시켜 시행했다. 각 방면의 사업추진은 개별적이거나 고립적으로 시행하지 않았다. 의원이 환자를 치료할 때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치료하는 식으로 문제의 근본을 놔두고 뒷북만 치면서 지엽적인 문제만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재정행정에 관련된 모든 분야의 요소들을 한 계통으로 묶어 각 요소들의 연관관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여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는 다방면의 요소들을 묶어 통합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우선 그는 국가재정 상태의 개선을 주요목표로 설정하고, 농업생산의 회복과 발전을 발판 삼아, 관(官), 상(商), 민(民) 세 방면이 모두 이익이 되는 수단을 동원한 후에 소금전매제의 개선으로 증대된 수입의 대부분을 조운제도의 재원으로 활용했다.
유안은 소금전매제도와 조운제도를 연계하기 시작해서 소금전매로 형성된 재원의 일부를 사용하여 견고한 조운선을 건조하고, 일반 요역으로 동원되었던 농부들 대신 전문적인 수부(水夫)를 고용했으며, 웬만한 충격에도 끊어지지 않은 예인용 밧줄 등을 제작하여 전운제도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물적 인적 조건을 마련했다. 또한 유안은 소금전매제도와 구황사업을 연계시켜 소금의 전매로 생긴 자금을 상평창으로 돌려 양식으로 대량으로 구입하여 구황사업을 위한 충분한 물자를 확충시켰다.
유안의 활동으로 농촌의 식량생산과 부산품생산을 상호 연계되어 농촌의 경제활동은 정상화 되었다. 부산품생산 활동으로 농촌경제를 보완하고, 농업생산을 촉진시켰으며, 구황식품으로 양식을 주는 대신 부산품을 대신 받아들였다.
또 상업과 구재활동을 연계했다. 상인들을 이용하여 양식을 판 돈으로 부산품을 사들이는 방법으로 구재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구황행정에 턱 없이 부족한 시설이나 기구, 부족한 인력문제 등을 한꺼번에 해결하여 일석이조의 국면을 촉진하는 효과를 보았다.

[5]물질적인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인간본성을 이용하여 업무에 대한 효율을 제고하고 행정업무의 질적인 내용을 개선하다.

유안은 재정관리를 수행함에 있어서 시간의 절약, 비용의 감소, 효율성의 제고, 업무의 질적인 개선 등을 행정의 중점목표로 삼았다. 그것은 이전의 천년 이상 답습해온 봉건시대의 고위직 관료의 행태와는 매우 이례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점은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의 본능을 이용하여 경제운영의 원칙으로 삼을 만큼 인간의 심리현상까지도 깊이 통달하고 있던 유안의 혜안이다. 즉 선박을 모는 선부들을 그전까지는 요역으로 동원된 농민으로 충원한 것을 유급의 전문적인 선부들을 모집하여 유급으로 교체했고, 선박을 발주할 때 시중보다 높은 선가를 배정하여 견고하고 성능이 우수한 선박을 확보했으며, 역참사이를 오고가는 기수들을 높은 급여로 모집하여 재빠른 동작으로 질족(疾足)이라는 별명의 통신원을 이용하여 각 지방이 처한 경제상황의 추이를 실시간으로 파악해서 시기를 노치지 않고 적절한 대책을 세웠다. 또한 상인들을 높은 이익으로 고무시켜서 농부산품의 구매와 구휼미의 방출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유안의 재정행정의 시행방법은 그와 같이 광범위했으며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한 행위였다. 이익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하는 사람들의 본능을 자극하여 자발적으로 업무에 참여하도록 하는 방법은 선진시기에 이미 선례가 있었다. 그렇지만 유안의 방법은 그 전에 창안된 전례보다 보다 광범위했을 뿐만 아니라 예전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방법이었다. 당나라 중엽에 이르러 균전제(均田制)는 파괴되고 토지의 사유화는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지방의 대지주나 토호들은 쇠락했다. 그 결과 봉건시대의 지주와 농민들의 종속관계도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했고 상품경제는 더욱 발전했다. 또한 지방과 지방 사이에 경제교류가 빈번해지자 본격적인 상품교역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유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게 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시행한 저렴한 가격정책이나 높은 보수를 걸고 우수한 인력을 모집했다. 이와 병행해서 유급의 고용노동 정책을 채택하여 과거 경제원리를 벗어난 요역노동을 대신했다. 당나라 중엽에 출현하기 시작한 상품교역은 송나라 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그것은 유안이 파악하고 운용했던 정책이 밀알이 되어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기에서 기술한 정책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유안의 국가재무활동은 매우 가치있는 경제사상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가 소금전매제의 시행에 대해 언급한 말에 “백성들이 급하게 찾는 물품에 과세를 하면 국가재정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라는 논지는 국가가 백성들의 생필품에 과세를 부과해도 백성들은 여전히 구입을 중단할 수 없고 심지어는 구입량을 줄일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 연유로 국가는 재정수입을 효과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취지다. 유안의 재정확보 수단에 대한 인식은 현대경제학의 이론인 수요탄력성에 대한 개념을 이미 갖고 있었다는 증거다. 역대 경중론(輕重論)의 주창자들은 염철(鹽鐵)의 전매제를 부단히 주장해왔다. 염철은 백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대표적인 생필품이다. 국가가 재정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시행한 염철전매는 백성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부과되는 세금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일반 세정의 경우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납세자가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 하는 최악의 상태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도 되었다. 유안의 논점은 비록 소금전매제의 시행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발언으로 추정해보면 “국가전매제의 시행은 어떤 사람도 국가가 부과하는 세금을 피해갈 수 없다.”라는 뜻이며 그런 면에서 보면 보편성과 합리성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유안의 전매제를 보는 시각은 국가재정 문제에 대한 인식을 진일보시켰다. 그래서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해서 시행한 정책은 “정부가 이익을 후하게 책정하여 재화를 수매하자 사람들은 물자가 귀한 줄 모르게 되었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유안의 정책은 관중이 《관자(管子)》에서 주장한 “정부가 백성들에게 주는 시혜는 볼 수 있지만, 정부가 빼앗아가는 볼 수 없다.”라는 생각에서 진일보한 사상이다. 그래서 관중은 세금의 징수를 위한 형식적인 문제만을 주장했지만 유안은 재정수입을 증가시키기 위해 국가재정 행정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제4장 후대에 끼친 영향

“역사는 거울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역사적인 경험은 후인들에게 중요한 모범으로 작용한다. 유안의 재정활동은 그가 품고 있었던 경제사상을 현실세계에 실현시켰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익하고도 효과적인 재정정책의 모범을 남겨놓았다.

[1] 경제를 관리하는데 있어서 정부기구의 역할
경제가 건축물이라면 국가는 상층부에 해당하지만 경제를 운영하다보면 이해관계가 난마처럼 얽혀 있어 충돌하는 곳이다. 사유제산제와 계급 간에 상호대립이 존재하는 사회에 있어서는 언제나 갈등이 존재한다. 만일 이해계층 간에 국가의 조정이 없으면 계층간의 충돌은 처음에는 국가가 정한 질서 안에서 계속되겠지만 상호 간의 투쟁역량이 증가하면 무한투쟁으로 발전하여 계층집단과 함께 사회는 소멸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국가경제를 일정수준까지 관리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국가가 사회의 경제활동을 관리하는 것은 부패의 발생을 쉽게 야기시키고 관료주의가 팽배하게 되어 효율성의 저하되고 독단적으로 흐르게 된다. 특히 봉건주의 정권 하에서는 그런 적폐의 돌출이 피할 수 없는 문제다.
국가기관이 영리사업을 직접 경영하게 되면 농단, 특권, 부패, 탐오 등의 병폐가 반드시 발생한다. 유안은 비록 그런 병폐의 발생을 주장하는 글이나 논증을 이론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국가기관의 영리사업경영이 문제점에 대한 인식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재정 업무를 수행하면서 일관되게 정부기구의 규모를 축소시키고, 관리들을 정예화시켰으며, 상인을 정부기관의 보조수단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특히 관관(官管)과 관영(官營)을 엄격히 구별하여 시행한 후에 있는 역량을 다 발휘하여 관관관영(官管官營)을 관관상영(官管商營)으로 변화시켰다. 만일 유안에게 관관(官管)과 관영(官營), 그리고 관관관영과 관관상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었더라면 그가 벌인 사업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국가가 직접 경영해야 하는 사업, 제한적인 범위 내에 추진해야 하는 어떤 사업은 관영으로 해야 유익하고 어떤 때는 매우 효율이 크게 나는 경우도 있다. 소요되는 인력과 물자를 집중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국가는 수익성만을 위주로 한 경영방침을 따르지 않고 사업을 경영할 수 있다. 사회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경제적인 수익을 위해 경영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업들, 즉 교육, 삼림이나 하천의 관리, 생태계나 환경의 보호 같은 사업들은 국가 외는 다른 기구가 수행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자유방임주의를 주창했던 아담·스미스와 같은 학자도 그런 부분은 인정하고 있다. 사회의 경제활동을 선의로 해석한 사마천 역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간부(奸富)와 같은 부류들은 과감하게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유안이 일반적으로 시행한 방법은 국가는 경제에 대해 거시적인 측면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국가가 직접 경영하는 사업의 규모를 가능한 한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는 변경지방이나 벽지에 상평염을 경영했듯이 국가가 직영하는 사업은 계속 유지했다. 아담·스미스의 주장은 국가가 직접 경영하는 사업은 이익을 추구하면 안 된다고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교육이나 치산치수 등과 같은 사업은 이익을 내기 위해 경영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에 소요되는 경비는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유안이 운영했던 상평염 사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손해나는 사업이었지만 어떤 때는 이익을 남기기도 해서 변경민의 부담을 경감시키는데 사용했다. 정부가 수매가를 높이 쳐주면 천하에 물품이 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2]제도와 인사
인재를 임용해서 치세를 이룬다는 사상은 중국 봉건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다. 유가의 “정치란 사람에게 달려있다.”라는 논지는 전통적으로 표현되는 이론이다. 그러나 제도가 불량하면 어떻게 탁월한 능력의 인재를 발굴하여 시정(施政)에 참여시키겠는가? 인재의 활약은 국가의 정치나 행정을 일시적 혹은 국부적으로 작동시켜 그 결과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있겠지만 인적인 자원이 변동함에 따라 부지부식 간에 사라지고 마는 경향이 있다. 즉 《예기(禮記)》의 “ 인재가 있으면 정치는 훌륭하게 행해지고 인재가 없으면 정치는 폐해진다[인존거정(人存擧政), 인망식정(人亡息政)]” 구절로 귀결된다. 유안이 국가재정에 대한 행정을 주재할 때 제도와 체제를 개혁하고 새롭게 창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조운사업에 있어서는 조두(漕頭)를 폐함과 동시에 요역으로 충당했던 수부들을 급여을 지불하는 고용직으로 대체했으며, 소금전매제의 운영을 관수관소(官收官銷)를 관수상소(官收商銷) 즉 정부가 수매해서 정부가 판매하는 방법을 정부는 수매만 하고 상인이 판매하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또한 역참인을 후한 급여로 모집한 기수(騎手)로 대체하여 통신과 역참행정의 속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천하를 오고가는 기수들을 사람들은 질풍처럼 달리는 사람이라고 해서 질족(疾足)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그러나 제도 역시 사람이 집행한다. 만일 유안이 재정사업을 과거 봉건체제 하의 무능력하고 부패한 관리들의 협조만으로 집행했다면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안이 창안한 유효한 제도,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전승되어 온 인재중심 사상을 결합한 인사를 중시했던 방식이었지 결코 사람에게만 의존했던 것은 아니었다. 재능있는 인재란 항상 스스로 등장하지 않는다. 인재는 항상 존재하지만 발탁이나 임용의 방식이 정상적이지 않으면 인재로써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인재란 불변하지 않은 영원히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일정한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 일을 망치는 사람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인재란 정확한 판단 하에서 선발하여 임용한 후에 감독과 고과를 동시에 시행하는 제도 하에서 양성해야 한다. 인재를 중시하는 것은 중국고대로부터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온 훌륭한 사상이다. 인재의 선발, 임용, 양성과 고과 등의 문제를 주장하는 논술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경제 분야에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인재에 대한 사상이나 자료는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그래서 유안에 대한 자료는 매우 소중하게 다루어야할 전형적인 경제문제에 대한 것들이다.

유안은 경제분야에 일할 인재를 신진사류에서 선발했다. 그는 결코 오랫동안 관료생활을 했던 기존 인사는 선발대상에서 제외했다. 젊었을 때부터 관리가 되어 수십 년 동안 재직 중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인사들은 대부분 맡은 일을 대강대강 해치우고, 결단이 필요한 일은 질질 끌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며, 교묘한 말로 사안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심지어는 상관을 모함하고 하급자는 찍어 내리며 권력을 사익을 위해 휘두르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재정업무에 투입해서 자금을 맡기고, 창고의 열쇠를 손에 쥐어주며, 장부를 관리하게 하는 것은 마치 곶간에 쥐새끼들을 기르는 경우와 같아 그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임용되기 전까지 관직을 맡아보지 못했던 신진사류들은 비교적 학식이 높고 포부를 지니고 있으며, 자기들의 전도에 대한 희망으로 명예에 대해 애착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재정업무를 맡길 경우 성실하고 청렴한 자세로 업무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안이 말하기를 “작록을 받은 선비에게는 명예가 사익보다 중하지만 작록이 없는 아전들에게는 명예보다는 이익을 중하게 여긴다.”라고 했다. 그래서 유안은 재정업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중간 간부들은 모두 신진사류들 중에서 선발하여 자신의 국가재정사업의 골간으로 만들었다.
당연히 유안이 선발하여 임용한 신진사류들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국가재정사업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러나 비록 신진사류에 해당하더라도 썩어빠진 서생이나 생업을 팽개친 문인들은 제외시켰다. “귀의천리(貴義賤利)”라는 봉건시대의 교조주의에 몰입하여 재정사업을 천하다고 여기는 불초한 유생들에게는 결코 재정업무를 맡기지 않았다.
인사을 운영하는 방침은 신진사류들에게 재정업무의 기본적인 것을 맡기고 기존의 관리들을 보좌하는 인력으로 활용했다.
봉건주의정권 하에서의 국가재정기구에 복무하는 인력은 모두 관리들로 충당되었다. 만일 새로이 임용된 신진사류들을 그들을 대신하게 한다면 기존의 관리들은 모두 직업을 잃게 되어 재정업무의 효율은 크게 떨어뜨릴 것이다. 그런 경우를 대비하여 유안은 비록 신진사류들은 중용했지만 기존의 관리들은 쫓아내지 않았다. 유안은 재정업무에 대한 자금의 관리, 창고의 운영, 장부의 기재, 회계감사 등의 중요한 업무는 신진사류들에게 맡기고 기존의 관리들에게는 오로지 문서의 지시에 따라 간단한 일만 처리하게 하여 중요한 재정업무에 대해 추호도 간여하지 못하게 하고 일상적인 행정업무만을 수행하게 했다. 봉건시대에 있어서 사인이라도 천거로 인해 관리가 되어 모든 영역에서 활동하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그것은 오랫동안 누적되어 시대에 뒤떨어진 적폐로 존재했다. 그들에게는 재정업무란 뒷돈이 생기는 아주 매력적인 좋은 자리였다. 유안이 맡았던 관할구역은 당시 당나라 국가재정의 주요수입원이었다. 그래서 권문귀척들은 유안에게 달려와 자기사람을 써 달라고 경쟁적으로 청탁했다. 유안은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만일에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경우, 그들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인해 유안이 추진하려고 하는 경제정책의 앞길에 장애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부탁을 들어줄 경우 권문세가에서 천거한 자들이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기구에 합류하게 되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재정정책 조직과 간부들은 부패화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유안은 교묘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권문세가들이 천거한 자들을 받아들여 봉록을 후하게 지급하고 재정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양성한다는 취지로 결코 그들이 재정행정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금지시켜 그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고 법을 농단하여 불법적인 수단으로 범법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기회를 차단했다. 유안은 재정업무에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거나 임용하는데 능했을 뿐만 아니라 감독이나 고과를 매기는 데에도 매우 유능했다. 사관은 그를 칭송하기를 “수천 리 밖에서 업무를 수행중인 관리가 마치 유안이 면전에서 내리는 명을 직접 받드는 것처럼 했다. 그것은 마치 침대에서 일어나 미처 정신을 추스르기 전의 비몽사몽 간의 대화임에도 하나도 숨길 수 없는 경우와 같았다.”라고 기록했다. 유안의 업적은 당나라 정부의 재정수입을 대대적으로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경제관리를 양성한 일이다. 그가 죽은 후에 한회(韓廻), 원수(元琇), 배전(裵腆), 이형(李衡), 포길(包佶), 노정(盧征), 이약초(李若初) 등의 인사들이 재정행정을 계속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유안에 의해 발탁되었다가 시기가 되자 자연이 이름을 얻게 된 경우다. 유안이 20여 년 동안 주관한 재정활동 기간 중 양성한 우수 인재들은 그의 사업을 이어받아 다시 20년 동안 계속 진행시켰다.

[3] 재정업무의 과학성과 기술성
경제주체의 관리는 필히 과학과 행정력을 기반으로 한 기술을 결합시켜 관리해야 한다. 두 가지 요인의 결합이 철저할수록 일의 성공은 더욱 용이해진다. 과학적인 관리는 과학의 한 부문이고 또한 어떤 분야의 과학이건 모두 규칙적이고 단순하며 추상적이다. 그러나 경제과학은 관리과학의 응용분야로써 반드시 실제 역사조건과 서로 결합해야 하지만, 실제역사조건은 오히려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종합적이다. 응용과학이 기대하는 효과를 얻게 하려면 과학과 행정수단으로써의 기술이 완벽하게 결합해야 하고 관리과학의 기본적인 요구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또한 융통성, 완전한 조화, 자연스러움, 무저항, 풍부한 다양성 및 몰입 등이 구현되어야 한다. 그것은 행정으로써의 관리다. 사업의 관리는 역시 기술적인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유안의 재정경제사업의 주요 목표는 시간, 비용, 정예한 기구와 인원, 효율성의 제고에서 정보의 완전한 장악이다. 그것은 모두 관리과학에 필요한 원칙에 부합하는 요인들이다. 유안은 일찍이 그러한 원칙들을 이론상으로 설파하여 발표한 적이 없으나 행동으로 그러한 기구를 창건하여 종합적으로 재정행정을 종합적으로 체현시키고 효과적으로 운용했다. 즉 신진사류를 중용했으나 기존의 관리들을 실업상태로 몰지 않았다. 또한 공개적으로 인재들을 선발했으나 권문세가들이 천거하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후한 봉록을 제공했으나 재정업무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재정업무가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리고 정부가 수매하는 물품에 대한 가격을 후하게 책정하여 물자를 귀한줄 모르게 만들었으며 재해와 재정부족이라는 이중 폐해를 재해의 해결과 재정의 확충이라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이룩했다. 그것은 모두 유안이 행한 관리행정의 기술적인 결과물이었다. 유안의 재정행정에 대한 사업수행 방식은 후대의 경제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후대에 주목할만한 경제사상으로 비교적 성공한 재정가나 행정가는 예외 없이 유안을 숭배했다. 유안이 재정활동을 수행하면서 취한 방식은 예를 들어 상인들의 활동과 시장의 힘을 빌려 국가 재정업무을 정상화시키는데 장애물이었던 적폐를 제거한 방식은 후대인들에게 계승되어 많은 효과를 보았다. 청대의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포세신(包世臣), 위원(魏源) 등이 조운(漕運)과 염정(鹽政)을 개혁하기 위해 취한 일련의 조치들은 모두 유안의 방식을 모범으로 삼아 유안이 이후 1천년 동안의 봉건왕조 역사에서 재정행정의 어떤 방면에서는 유안을 넘어선 인사가 있었지만 재정활동에서 쌓은 업적이나 재정정책에 대한 사상 방면에서는 유안을 넘어선 사람은 없었다.

중국경제사상통사 제2권 제36장 번역 전재
(북경대학출판사. 조정(趙靖) 주편(主編))
목록
2612
[] 1200년 전 중국의 자유주의 경세가 유안(劉晏)

1200년 전 중국의 자유주의 경세가 유안(劉晏) 제1장 중국 경세가 중에서 대표적으로 특이한 인물 유안은 당현종 개원(開元) 4년인 718
운영자 22-09-15
[] 고선지와 탈라스전투

고선지와 탈라스(Talas)전투 A.D.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高句麗)가 멸망당한 뒤 이국(異國) 땅인 당에 강제로 이주(移住)되어
운영자 15-07-06
[] 오대십국시대의 정국을 주도한 사타족

오대십국시대의 정국을 주도한 사타족 사타(沙陀)는 처월(處月)、주사(朱邪), 혹은 주야(朱耶) 등의 이름으로도 불려진다. 원래 당나라 때 서돌궐
운영자 14-08-23
[] 후한고조 유지원(劉知遠)과 남희(南戱) 백토기(白兎記)

후한고조 유지원(劉知遠)과 남희(南戱) 백토기(白兎記) 1. 유지원과 이삼랑(李三娘)의 이별 그리고 다시 만남 − 유지원은 의리남이었을까
운영자 14-08-21
[] 황소의 란

중국 당(唐)나라 말기에 일어난 대농민반란을 말한다. 당나라 말기 희종(僖宗)의 건부(乾符)∼중화(中和) 연간(875∼884)에 일어났다. 당나라 말기에
운영자 11-12-18
[] 중국의 드라큐라 - 조사관(趙思綰)

조사관(趙思綰 : ?-949)은 하북(河北) 위주(魏州) 출신이다. 오대(五代) 후한(後漢) 때 영흥절도사(永興節度使)로 성격이 잔폭한 성격에 사
운영자 11-10-10
[] <대의정성(大醫精誠)> 손사막

손사막(孫思邈)과 천금방(千金方) 중국 의학사상 불후의 업적을 남긴 손사막은 기원 581년에 태어나서 682년인 102살에 죽은 사람이다. 수나라
양승국 04-05-13
[] 상관완아 [上官婉兒, 664~710]

상관완아는 섬주(陝州, 지금의 河南省 三門峽) 사람으로 당(唐) 고종(高宗, 재위 649∼683) 때의 재상(宰相)인 상관의(上官儀, 608~664)의 손녀이다.
운영자 11-03-29
[] 수나라의 진나라 정벌도

북주의 왕권을 차지한 데 이어 북제를 북제를 멸하고 다시 남조의 마지막 왕조 陳나라를 정벌하여 병탄함으로 해서 삼국시대 이래 근 400년 가까이 분
양승국 06-03-15
[] 수(隋)

양견(楊堅:文帝)이 581년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양위받아 나라를 개창하고, 589년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
양승국 06-06-26
[] 당나라 전도-전기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양승국 06-06-26
[] 수나라의 대운하

수양제 양광은 605년 남북을 관통하는 대운하의 건설을 지시했다. 공사의 중요 부분은 로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의 건설이었다. 황하남안의
운영자 08-01-15
[] 수양제가 건설한 대운하

당시의 자연 하천과 하천 사이를 굴착을 해서 서로 연결하여 운하를 만들었다. 운하로 이용하기 위해 대상이 되었던 강은 하북성 북쪽에서 발원하여
양승국 04-09-09
[] 종규(鐘馗) - 중국의 역신(疫神)

종규(鐘馗) 중국의 역귀(疫鬼)를 쫓는 신의 이름이다. 《사물기원(事物起原)》에 의하면 당현종(唐玄宗)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다음
운영자 10-03-31
[] 당나라 시단의 시대구분

당(唐)나라 시대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화를 통합하고 정치 경제는 물론 사회 문화의 모든 부문에 걸쳐 기틀을 정비했으며, 인도와 서역의 문
운영자 10-03-31
1 [2][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