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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6 09:49:013499 
고선지와 탈라스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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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와 탈라스(Talas)전투


A.D.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高句麗)가 멸망당한 뒤 이국(異國) 땅인 당에 강제로 이주(移住)되어 많은 역경(逆境)과 차별속에서도 굳세게 살아간 고구려 유민(遺民)중에는 당대(當代)와 후세에 길이 빛날 위훈(偉勳)을 남긴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서도 특히 대당건설(大唐建設)에 위대한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 동서교류사(中世東西交流史)에 하나의 획(劃)을 그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고구려의 명장(名將) 고선지(高仙芝)이다. 그러나 이러한 빛나는 위훈(偉勳)에 비해 그에 관한 연구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고선지에 관한 기록은 『新․舊唐書』의 간단한 열전(列傳)과 몇 편의 소논문 그리고 백과사전에 약간의 설명 정도이다. 이는 그가 '당객경(唐客卿)' 이어서 중국사서(中國史書)에서는 간단한 열전정도만 남기고 있고, 그가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어떠한 문집이나 저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본 고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의 이주(移住)를 통해 고선지의 성장과정에 대해 알아보고 그의 서정(西征)중 중세 동서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탈라스전(戰)을 통해 그 의의와 서구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는데 주(主)로 참고한 된 글은 무하마드 깐수(Muhamad Kansu) 교수의 『高仙芝의 西征』이라는 논고(論考)였음을 밝히는 바이다.


1. 고구려 유민과 고선지

(1) 고구려 유민의 당으로의 이주 배경과 과정

당은 A.D.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다음 해(高宗總章 2년) 4월 고구려 유민에 대한 추호이주정책(抽戶移住政策)을 결정하고 많은 고구려의 유민들을 내지제주(內地諸州)로 강제 이치(理致)하였다.

이는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유민들은 항당복국투쟁(抗唐復國鬪爭)을 지속적으로 실시했고, 당은 이를 저지 하기 위한 수단으로 추호(抽戶)정책을 추진(推進)한 것이다. 또 그 추이(抽移)의 대상이 대개가 중산 이상의 계층과 건장한 자로 되어 있음을 파악할 수 있음은 이런 유형의 호민과 장정들을 그대로 남겨둔다면 항당군(抗唐軍)의 훌륭한 유인대상과 가담자가 되기 쉽다는 타산에서 당은 이러한 추호책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인들의 항당투쟁이 안동도호부의 치소인 평양성과 그 부근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추호대상자는 평양성과 그 부근의 주민 중에서 다수를 차지한 것으로 사료된다. 또 당의 내지 각처에 이주된 고구려인들 중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당의 추호정책에 의하여 강제이치된 유민 외에 누차의 여․당전쟁에서 당군에 포로가 되어 이송된 사람들도 상당수가 있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인들의 당에로의 이송경위는 각각 다르며 따라서 강제이치 후의 처우도 달랐다. 전쟁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개 노예의 신분에 얽매여 관부의 사역이나 농노, 혹은 공한지의 개척자로 고역에 시달렸다. 그에 비해 고구려 멸망 후 강제이치된 유민들은 그 대부분이 호민이나 장정들로서 전자들보다는 처지가 나은 편이었으나 역시 망국노(亡國奴)로서의 운명은 면치 못한 채 당이 필요로 하는 적소에 배치되었고, 특히 당은 고구려인의 호무정신(好武精神)을 이용하여 청장년들을 군사에 많이 복무케 하였다. 후일 당의 전쟁사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고구려인 명장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대당건설(大唐建設)에서 뿐만아니라 중세동서교섭사(中世東西交涉史)에 있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바로 명장 고선지이다.


(2) 고선지의 성장과 관직에서의 활동 (西征 이전)

천재적인 군사전략가인 고선지에 관해서는 『舊唐書』권 104, 열전 제 54와 『新唐書』권 135, 열전 제 60에 각각 열전이 소재(所載)되어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문집이나 저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세가․출생․성장과정 및 서역에서의 활동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兩唐書의 열전과 기타 산재한 내외관계 사료를 대조하면서 구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서군(安西郡)의 사진교장(四鎭校將)을 지낸 고사계(高舍鷄)의 아들이며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무예를 배우고 부친을 따라 안서군에 있었는데 그의 모습이 빼어났고, 활을 잘 쏘며, 말을 잘 타고, 용감 대담하여 약관 20여세에 벌써 부친과 동등한 계급에 이르렀다고 사서에 전하니 그는 어려서부터 천부적으로 무인으로서의 출중한 자질을 소유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찍이 그는 하서군(河西軍)에 예속되어 중급장교로 있다가 사진교장이 되었다. 20여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로 가서, 아버지가 세운 음공(蔭功)을 입어 유격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전인완(田仁琬)이나 개가운(蓋嘉運)이 안서절도사로 있던 초기에는 그리 각광 받지 못하다가 부몽영찰(夫蒙靈 ? )에 의해 여러 차례 발탁이 되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고, 개원(開元)말에 이르러 병력 2천을 거느리고 천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가 되었다가, 곧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다. 이와 같이 고선지의 급속한 승격은 그 자신의 출중한 자질에 주 요인이 있겠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그의 등용은 당시 당정부(唐政府)의 번장기용정책(番將起用政策)과 직결되어 있다.

당현종은 재위 43년간(A.D. 712 ~ A.D. 755) 개원시에는 선정으로 '개원의 치'를 이룩하여 태종이후 두 번째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개

원 말기부터 지덕일천보년간(至德一天寶年間)에는 자신이 신선을 즐기고 장생을 갈구하는 등 사치에 빠져들어 갔고, 변방의 군사부담이 가증되고 백성이 궁핍에 허덕이는 등 정세가 점차 악화되었다.

이런 시기 왕의 환심을 사 재상에 등용된 간신 이임보(李林甫)는 이족번인(異族番人)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였는데 이는 당초기 변방수비를 위해 일부 번장들을 기용했으나 요직은 주지 않았던 당의 정책에 커다란 변화였다. 이임보가 번장들을 기용한 이유는, 첫째로 이들 번장들이 당시 파쟁에 휘말려 있던 한장(漢將)들과는 달리 당파의 후원이 없어 자신이 쉽사리 조종할 수 있었으며, 둘째로 막강한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장군들이 재상이 되는 길을 막기 위해서는 그들 나름대로 생각하는 '빈천 '하고 '문맹'인 전장들을 등용시키는 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정치적으로 무기력했던 현종은 이임보의 건의에 따라 번인 가운데 고선지․안녹산(安祿山)․가서한(哥舒翰)등을 절도사로 기용하고 지방군정권을 장악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임보의 정책은 후에 번장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면서 당을 멸망에 길로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결국 이 때부터 고선지는 번장기용정책의 호기를 타고 요직에 올라 5차에 걸친 서정을 통해 명실상부한 파미르 고원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2. 고선지의 서정(西征)


(1) 시대적 배경

고선지의 누차에 걸친 서역원정의 주목적은 서역에 대한 당의 경영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데 있다. 수말당초 서역제국은 서돌궐(西突厥)에 신속(臣屬)되어 있었는데 정관(貞觀) 12년(A.D. 638) 서돌궐이 내분으로 동․서 이부로 분열되어 국력이 약화되는 기회를 이용해 당은 서역에 대한 경영을 본격화하였다. 당의 서역경영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 1기는 태종시대로서 이 시기에 당은 현재 신강성(新彊省) 동부와 중부일대를 개척함으로써 서역경영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제 2기는 고종 ~ 현종시대로서 당의 서역경영 범위를 페르시아까지 확대해 간 전성기였다. 이와같은 경영과정은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소국들, 특히 그중 큰 세력을 갖고 있던 고창(高昌)․구자(龜 )․토번(吐番:티벳)등의 국가들에 대한 제압을 통해 이루어졌다.

현종대에 이르자 토번은 서돌궐을 비롯한 주변의 번국들과 연합해 당의 서부 지역을 위협해왔고, 마침내 안사(安史)의 난 이후 당의 서부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당중기 이후 가장 위험한 적수로 등장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A.D. 740년 고선지는 달해부(達奚部)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일약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된다.


(2) 1․2차 서정 (西征)과 탈라스 전투

초기 승보(勝報)를 올린 고선지는 천보(天寶) 6년(A.D. 747) 제2차 서정인 소발률원정(小勃律遠征)을 단행한다. 즉 A.D. 747년에 토번(티벳)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여, 당의 서방경계의 요충지인 소발률과 연합해 서북방 20여국을 자신들에게 예속시켰다. 소발률은 당이 서방으로 향하는 문호로서 이 곳을 장악하지 못하고 토번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서역국가들이 필연적으로 토번에 함락당하여 이 지역에 대한 당의 지배가 끝장나게 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당정부는 고선지를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발탁하여 토번족의 정벌 임무를 주었다. 그는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오식닉국(五識匿國Chignan: 지금의 Shignan지방)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험난하기로 유명한 힌두쿠시준령(Darkot)을 넘어서 소발율국의 수도 아노월성(阿弩越城)을 점령하고, 사라센 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파괴하여 그들과의 제휴를 단절한다.

그는 그해 9월 소발률왕과 토번공주를 대동하고 개선하는데, 이 1차원정에서 당은 불름(佛 : 동로마)․대식(大食: 아라비아) 제호(諸胡)의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했다. 고선지는 그 공으로 홍로경어사중승(鴻 卿御史中丞)에 오르고 이어서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갈사국 정벌에 이어 천보 9년(A.D. 750) 12월에 고선지는 석국(Tashkent)에 대한 역사적인 제 4차 서정을 단행하였다. 예로부터 석국을 비롯한 昭武 9國은 지리적 특성상 당제국과 아랍(Arab)-이슬람(Islam) 제국의 사이에서 양면부연 사대주의정책(兩面敷衍 事大主義政策)을 시행하여 왔고 특히 석국은 좋은 말도 다산되는 나라였다.

이런 석국이 현종 때에 이르러 이미 당의 서쪽 지역으로 진출을 시작한 아랍 제국(大食)에 부연하였고, 이는 고선지가 석국을 정토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양당서 대식전에도 석국이 이미 아랍제국에 신속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당시 안서절도사로서 당의 서역경영을 책임진 고선지로서는 석국의 이러한 경향을 용인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석국원정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선지는 이 원정에서 너무나 난폭한 징벌전을 벌였고, 이는 후일 탈라스 전투의 불씨를 낳게 된다. 한편 석국인들이 석국정벌에서 당군이 범한 난폭성과 멸국에 한을 품게되었던 시기에 장안에 호송된 석국왕이 무모한 문신들에 의해 참살되었고(A.D. 750), 이로인해 석국왕자 원은(遠恩)의 주도하에 서역 각국와 이슬람 제국(압바스 朝: Abasian Dynasy)이 대당전쟁을 위한 동맹을 맺게 된다.

결국 고선지가 인솔한 당군과 석국-이슬람 연합군과의 격전은 A.D. 751년 7월 탈라스에서 발발하였다. 이 전투는 외형상으론 단순히 당을 일방으로 석국과 이슬람제국을 타방으로 하는 대결전이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각방의 상이한 이해관계가 뒤얽힌 전쟁이었다.

석국측은 한풀이 보복전으로 당의 사진(四鎭)을 공격하기 위해 대당전을 선포했고, 당은 석국의 보복전에 대응, 그 경영권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 대석국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한편 이슬람제국은 승승장구하는 기세를 타고 서역일원에 대한 대당의 통치권과 영향력을 제어․약화시킴으로써 그 지역에 대한 새로운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군사전으로 당과 대결하게 된 것이다.

당은 이에 대응하여 7만정벌군을 탈라스에 파견 했으나 당나라와의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Karluk)에게 좌우협공(挾攻)을 당했고, 수십 일 간 강행군을 해온 원정군이기에 지칠대로 지쳐 사기왕성한 적군에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선지는 진퇴양난의 전황속에서 부장들이 임

기응변 전술로 백석령에서 고선지의 퇴각을 엄호함으로서 구사일생으로 안서로 귀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부분의 당군은 사살되고 일부(아랍 사서에 의하면 2만)는 이슬람군에게 포로가 되어 中亞와 西亞에 펼쳐진 이슬람제국에 끌려가게 되었다.

이렇게 고선지는 평생 처음으로 패전의 고배를 마셨다. 이 패전으로 그가 당조로부터 어떠한 문책을 받았는지는 미상이나 이 전쟁이 있은 직후 왕정견이 안서도호부절도사로 임명되고, 또 얼마 후(A.D. 755) 그가 당조로부터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전직에서 물러났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선지의 5차에 걸친 서정은 탈라스 전투의 패배로 빛이 바래고 만다. 후에 그가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적부원수가 되어 출정했으나 역신으로 무고당하여 참형된 것 또한 이 탈라스 전투에서의 패배로 고선지가 현종을 비롯한 당조의 지배층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 서정(西征)의 역사적 의의

『舊唐書』『新唐書』와 같은 사료를 살펴보며 고선지가 서정을 단행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징벌, 즉 석국을 비롯한 서역국가들이 당을 배반하고 이슬람제국에 복속하는 추이를 보이자 그를 징벌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보물을 탐내어 출정하였던 것으로 본 것이다.

물론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보면 지하자원을 비롯한 물자의 약탈을 목적으로 발발한 전쟁의 예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고선지의 경우 이 물욕적 동기가 그로 하여금 수 천리의 험산준령을 넘어 패전의 고배까지 감수해야 할 원정의 길에 오르게 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흥기에 처한 대당제국(大唐帝國)에게 있어서 석국(石國)을 비롯한 서역 국가들의 물자(지하자원과 양질의 말등 )가 국운성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함은 자명한 일이며, 반면에 이슬람제국이 바야흐로 문전을 위협하고 있을 때 그와 결탁한 서역국가들을 공략하는 것은 제국의 운명과 직결되는 중대사였다. 따라서 당조(唐朝)가 서역경영의 총책이었던 고선지로 하여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변방보전에 전력하게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이것이 고선지 개인적인 물욕적인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신․구당서의 내용은 근거 없는 것이다. 결국 고선지는 이 한차례의 패전 때문에 4차전승의 빛나는 전과는 상쇄되었고, 더구나 역신으로 무고 당하여 참형되었기 때문에 과다공소(過多公少)내지는 '횡포무도한 탐욕자 '로까지 매도․격하되었던 것이다.

비록 전쟁사적 견지에서 볼 때 탈라스 전투는 일단 패배로 끝남으로 인해 대당제국에게는 누를 남겼지만 중세 국제관계사, 특히 동아 문화 교류사의 시각에서 볼 때에는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이 석국의 정벌 및 대식제국(아라비아 제국)과의 충돌은 아시아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당제국의 불교 및 유교문화권 대 신흥 아라비아의 회교문화권과의 충돌로서 동아 역사상 최대의 특기할 만한 일이며, 고선지의 명성과 공헌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당과 이슬람 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충돌은 결국 양대 세력이 파미르(Pamir) 고원을 경계로 중앙아시아를 양분한 가운데 상호 정치․문화적으로 교류․협력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는 파미르고원 이서(以西)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의 통제권이 사실상 종식됨으로써 석국․강국을 비롯한 이 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진출이 본격화되어 정착되었고, 이는 송대를 거쳐 원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서북지방일대의 이슬람화의 전주곡이 되었다.

또한 고선지의 서정으로 이슬람 문화권과 한족 문화권간의 상호 이해도가 증진되었다. 단적인 예로 석국정벌에서 고선지는 양마(良馬)․보옥(寶玉)․슬슬(瑟瑟)등 귀중한 보물과 전리품을 노획하였는데 이러한 보물은 처음으로 중국에 알려졌고, 이는 신라에까지 전파되어진 것으로 추측될 정도로 서역문화가 동전(東傳)되었고, 또 무의식적인 결과이기는 하지만 탈라스전투로 인해 중국의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를 거쳐 유럽에 전수된 것은 문화사상 하나의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벌판인 타클라마칸(Taklamachan) 사막을 누비고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고원을 넘나들면서 고선지는 세계 전쟁사에 전무후무한 전공을 세웠고, 소발률정벌을 위해 거의 반년에 걸쳐 힌두쿠시(Hindukushi)의 험로를 정복한 고선지의 위용을 평가하여 이 지역을 실지 답사한 바 있는 저명한 영국의 탐험가 스테인(Stein)은 '현대의 어떠한 참모본부도 따를 수 없는 것이며, 나폴레옹(Napoleon)의 알프스(Alps) 돌파보다 더 성공적인 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비록 몸은 당에 있었지만,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후손으로서 그 얼을 세계만방에 처음으로 드날린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3. 탈라스 전투와 제지술(製紙術)의 전파(傳播)

문화의 전승 수단이며 문화 발전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종이의 발명과 그 사용이 인류역사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후부터 그것을 기록해 두기 위한 각종 서사재료(書寫材料)를 사용해 왔다. 고대 이집트와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양피(羊皮)와 석판(石版)․골판(骨版)에 문자를 기록하였다. 식물성 셀룰로스(cellulose)를 주원료로 하는 현재의 종이는 중국 동한시대의 제례에 의해 처음으로 발명(105년)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와 같이 최초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종이는 곧 동아각국(東亞各國)에 전파되었으며 A.D. 3~ A.D. 4세기에는 투르키스탄(Thurkisthan)과 천산산맥 남북 각지에서 종이가 이미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종이가 아직은 양피지(羊皮紙; Parchment, 소아시아 지방에서 기원전 3세기부터 사용) 나 파피루스(Pairus)를 쓰고 있던 이슬람 제국과 그를 발판으로 서구에 전파되게 된 계기는 바로 고선지가 주도한 탈라스 전투였다. 2만명에 달하는 중국의 전쟁포로 가운데는 많은 기술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제지기술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기술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강국(康國)의 수도 사마르칸트(Samarchant)에 제지소가 건설되어 있었다. 후에 여기에서 생산된 종이를 '사마르칸트지(紙) '라고 명명하였다.

이와같이 이슬람 세계에서 제지술이 광범위하게 발달함에 따라 이슬람 세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유럽도 A.D. 12세기 중엽부터 아라비아인들로부터 제지술을 전수받아 제지업이 일기 시작했고, 이는 유럽에 르네상스(Renaissance)를 주도했다.

4. 서정의 의의

우리 역사속의 인물들 중에서는 그 역사적인 공적에 비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인물들이 많이 있다. 이는 역사속에서 그 인물을 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그 평가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고선지 장군의 경우도 이에 해당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용맹한 고구려인의 기질을 갖고 망국의 비운을 통감하며 심신을 연마 당제국에서 이민족 번장으로서는 드물게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파미르고원을 넘나들며 서정을 단행, 중앙아시아를 평정해 대당건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동-서문화교류사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나 평가는 동․서양을 통털어 그 존재를 찾기가 힘들다. 또 그가 활약했던 당제국에서조차 당객랑이라는 그의 출생적인 한계와 탈라스 전투에서의 패배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더구나 그의 조국인 우리나라에서도 그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샤반느(Chavannes)가 종래의 중국문헌 이외에 새로이 서방․아랍 등의 문헌을 섭렵하여 고선지가 세운 탁월한 사적을 발굴해내어 밝힌 《서돌궐 사료 Document Sur les Tou - Kiue Occidentaux》가 발표하고, 또한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인 슈타인이 고선지의 전적지를 직접 답사․연구하면서 부터 고선지는 현대에 들어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천재적인 전략가로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그는 5차에 걸친 서정을 통해 세계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족적(足炙)을 남겼으며, 그의 서정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크게 다음 세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대당건설에 그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당은 천산산맥 지역의 소무 9국이 아라비아와 중국 사이에서 양면사대정책을 취하면서 당의 서쪽 변경을 자주 침범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서정을 단행했고, 당시 서역행정을 총괄하고 있던 고선지가 그 선봉에 섰다. 고선지는 5차에 걸친 서정중 탈라스 전투를 제외하고 1차에서 4차에 걸친 원정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서 당제국이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두 번째로 탈라스 전투에 의해 제지술이 서양으로 전파되는 등 동-서문화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점이다. 그는 1차에서 4차에 걸친 서정을 통해서 중앙아시아의 지하자원과 양질의 말 등을 중국으로 들여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했고, 아랍 제국의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 국가에 전파되어 송․원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서쪽 변방지역이 이슬람화 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탈라스 전투 이후 중국과 아랍세력이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더 이상 분쟁 없이 정치․문화적으로 상호 교류가 이뤄짐으로서 중세 동-서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리고 잘 알려졌다시피 탈라스 전투 당시 포로로 잡혀간 중국인 제지공에 의해 중국의 발달된 제지술이 아랍 제국을 거쳐 유럽에 전파되어, 당시 문자와 서적이 보급이 보편화되지 못했던 서구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이는 A.D. 15세기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보다 시야를 넓혀서 중세 동-서교섭이나 문화교류에 미친 막대한 영향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얼과 자긍심을 드높였다는 점에서 그 서정의 의의를 확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5. 참고문헌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무함마드 깐수, 「고선지의 서정」,『史學論叢』, 일월서각.

『신라 서역 교류사』

W.프랑케 저, 김원모 역,『동서문화교류사』,단국대학교 출판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배설 편저,『세계사 대사전』, 민중서림.

현규환, 『한국유이민사 上』

출처 : 해피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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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0년 전 중국의 자유주의 경세가 유안(劉晏)

1200년 전 중국의 자유주의 경세가 유안(劉晏) 제1장 중국 경세가 중에서 대표적으로 특이한 인물 유안은 당현종 개원(開元) 4년인 718
운영자 22-09-15
[] 고선지와 탈라스전투

고선지와 탈라스(Talas)전투 A.D.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高句麗)가 멸망당한 뒤 이국(異國) 땅인 당에 강제로 이주(移住)되어
운영자 15-07-06
[] 오대십국시대의 정국을 주도한 사타족

오대십국시대의 정국을 주도한 사타족 사타(沙陀)는 처월(處月)、주사(朱邪), 혹은 주야(朱耶) 등의 이름으로도 불려진다. 원래 당나라 때 서돌궐
운영자 14-08-23
[] 후한고조 유지원(劉知遠)과 남희(南戱) 백토기(白兎記)

후한고조 유지원(劉知遠)과 남희(南戱) 백토기(白兎記) 1. 유지원과 이삼랑(李三娘)의 이별 그리고 다시 만남 − 유지원은 의리남이었을까
운영자 14-08-21
[] 황소의 란

중국 당(唐)나라 말기에 일어난 대농민반란을 말한다. 당나라 말기 희종(僖宗)의 건부(乾符)∼중화(中和) 연간(875∼884)에 일어났다. 당나라 말기에
운영자 11-12-18
[] 중국의 드라큐라 - 조사관(趙思綰)

조사관(趙思綰 : ?-949)은 하북(河北) 위주(魏州) 출신이다. 오대(五代) 후한(後漢) 때 영흥절도사(永興節度使)로 성격이 잔폭한 성격에 사
운영자 11-10-10
[] <대의정성(大醫精誠)> 손사막

손사막(孫思邈)과 천금방(千金方) 중국 의학사상 불후의 업적을 남긴 손사막은 기원 581년에 태어나서 682년인 102살에 죽은 사람이다. 수나라
양승국 04-05-13
[] 상관완아 [上官婉兒, 664~710]

상관완아는 섬주(陝州, 지금의 河南省 三門峽) 사람으로 당(唐) 고종(高宗, 재위 649∼683) 때의 재상(宰相)인 상관의(上官儀, 608~664)의 손녀이다.
운영자 11-03-29
[] 수나라의 진나라 정벌도

북주의 왕권을 차지한 데 이어 북제를 북제를 멸하고 다시 남조의 마지막 왕조 陳나라를 정벌하여 병탄함으로 해서 삼국시대 이래 근 400년 가까이 분
양승국 06-03-15
[] 수(隋)

양견(楊堅:文帝)이 581년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양위받아 나라를 개창하고, 589년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
양승국 06-06-26
[] 당나라 전도-전기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양승국 06-06-26
[] 수나라의 대운하

수양제 양광은 605년 남북을 관통하는 대운하의 건설을 지시했다. 공사의 중요 부분은 로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의 건설이었다. 황하남안의
운영자 08-01-15
[] 수양제가 건설한 대운하

당시의 자연 하천과 하천 사이를 굴착을 해서 서로 연결하여 운하를 만들었다. 운하로 이용하기 위해 대상이 되었던 강은 하북성 북쪽에서 발원하여
양승국 04-09-09
[] 종규(鐘馗) - 중국의 역신(疫神)

종규(鐘馗) 중국의 역귀(疫鬼)를 쫓는 신의 이름이다. 《사물기원(事物起原)》에 의하면 당현종(唐玄宗)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다음
운영자 10-03-31
[] 당나라 시단의 시대구분

당(唐)나라 시대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화를 통합하고 정치 경제는 물론 사회 문화의 모든 부문에 걸쳐 기틀을 정비했으며, 인도와 서역의 문
운영자 1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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