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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3-08 05:48:536885 
이창호 이야기-2
양승국
일반

<해외에서의 약진>

1990년 4월, 창호는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 건너가 도꾜의 일본기원에서 열린 제3회 후지쓰배에 출전했다. 그리고는 백을 쥐고 당대의 스타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 9단의 대세력을 완벽하게 격파했는데 그 장면이 운집한 고수들을 놀라게했다.<기보1>을 보자.

<기보1>

흑을 쥔 다케미야 9단은 예상대로 3연성에 이은 우주류를 펼쳐 흑1로 중앙을 크게 에워쌓았다. 백의 이창호는 지금껏 흑의 대세력이 구체화되어 가는데도 모른척 자기 모양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장면에선 더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어디로 삭감해 가느냐.A나 B의 삭감일까. 아니다. 창호니까 더 서서히, 멀리서 삭감할지도 모른다며 의논이 분분할 때 예측을 크게 빗나가는 한수가 등장했다.

<기보2>

<기보2>의 백1을 선수한 뒤 3으로 깊숙하게 침입한 수가 바로 그것이다. 다케미야 9단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검토진들도 물론 깜짝 놀랐다. 결코 무리를 하지 않고 수도승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종반의 계산으로 승부하는 창호가 폭파전문가라 불리는 조치훈 식의 초강수를 들고 나왔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게다가 이 소년이 강수를 던지자 다른 사람의 강수에 비해 훨씬 묵직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아닌가. 그 수는 다가오면 다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모종의 힘이 그 수에 거역할 수 없는 무게를 실어주고 있었다.기세가 강하고 멋을 중시하는 다케미야 9단도 결국 백3의 압력에 굴복하여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공격을 포기하고 흑4부터 10까지 후퇴한 것이다. 창호는 물론 3으로 깊숙히 쳐들어갈 때 A의 절단과 B의 건너붙임등의 맥을 보며 수습을 자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3의 강수는 이창호라고 하는 소년기사를 다시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단 한수로 다케미야의 우주류를 물거품으로 만든 이창호의 저력에 외국기사들도 서서히 공포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불후의 명수로 우주류 격파>

이바둑은 서울에서는 '90년도의 명국'으로 회자되었고 훗날 바둑TV같은데서 이창호 시리즈를 방영할 때 단골로 등장하곤 했다.창호의 다음 상대는 당시 일본의 일인자였던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이었는데 여기서는 박빙의 접전 끝에 반집을 지고 말았다. 小林은 강자답게 이창호의 끝내기에 전혀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종반전에 기막힌 묘수로 승리를 낚아챘다. 이 승부는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이창호의 뇌리에는 '강자 小林'의 이미지가 깊이 새겨지게 된다.41연승이라는 대기록이 작성된 뒤 창호에게 '지지않는 소년'이란 별호가 추가되었다. 그 지지않는 소년이 1990년 8월에 서봉수를 격파하고 명인전 도전권을 손에 넣자 바둑계는 아연 숨을 죽였다. 최고위는 지방기전이지만 명인전은 서울의 중앙기전. 15세가 된 이창호는 이미 말할 수 없는 신비감을 토해내고 있었다. '돌부처 "강태공" 전생고수의 환생'등 그 어떤 별명도 이 어눌하고 조용한 소년의 내막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조훈현의 위기가 다가왔음을 감지했다.그러나 조훈현은 세인의 우려를 비웃듯 '황제'다운 위용을 과시하며 이창호를 3대 1로 꺾어버렸다. 이 결과를 보고 기가(棋街)에서는 이렇게 관전평을 했다.

"조훈현이 잘 막아내고 있다. 그의 감각과 전투력은 역시 일품이다. 그러나 조만간 이창호의 신기(神氣)가 영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그 무엇으로도 이 소년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오랜 세월 부동의 1인자로 군림해왔던 조훈현에게 "막아낸다"라는 표현을 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曺 9단은 이겼지만 관전자들의 눈에 비친 그는 이미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한듯한 모습이었고 그마저도 어딘지 힘들어 보였다.이창호의 강력한 이미지는 이미 겨울 산맥처럼 웅혼하고 아득한 모습으로 바둑계를 멀리서 포위하고 있었다.

<바둑계를 포위하기 시작한 이창호군단>

이창호의 연승을 41연승에서 저지시킨 기사는 조훈현이 아니라 유창혁이었다. 창호는 이무렵 새로 탄생한 최대기전인 기성전 본선에서 유창혁과 만나 대 역전패를 당하고만다. 역전승의 대명사로 불리던 이창호도 유창혁의 강력한 파워 앞에서는 종종 허망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뛰어난 공격력에다 여름햇살처럼 강렬한 기풍의 소유자인 유창혁은 창호보다 9년 연상이었다. 입단시기와 단위가 비슷한데다 바둑의 명문인 충암학원(沖岩學園)의 선후배간이어서 두사람은 자연 충암연구회를 통해 자주 어울렸다. 유창혁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타입이고 어린 이창호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두사람의 기재(棋才)를 중심으로 밤낮없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그바람에 충암출신의 어린 소년기사들은 물론이고 같이 연구에 참여한 선배기사들까지도 기량이 진일보하게 됐다.

조훈현대 서봉수의 대국에선 국후복기가 별로 없었다. 설령 복기가 이루어져도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승부사가 수시로 대결해야할 적수에게 자신의 느낌과 심정을 고스란히 토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과거 일본의 막부시대 바둑 4가문(家門)은 저마다 비수(秘手)를 준비해 두었다가 쟁기(爭棋)같은 중요한 대국에서만 사용하곤 했다. 승부세계의 속성은 바로 이처럼 나를 감춰 적을 치는 것이다.

<속마음을 감추지 않는 복기>

그러나 젊은 유창혁과 특히 세상 경험이 전무한 이창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지금 알려주는 수가 다음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될 것이라는 계산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들은 바둑판 위의 진실과 그걸 바라보는 자신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로했다.

유창혁과 이창호가 등장한 이후 한국에선 진정한 집단연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유창혁이 불이라면 이창호는 물이었고 유창혁이 창이라면 이창호는 방패였다. 이 두사람은 서로 배우고 서로 보완하며 힘을 키웠다. 그 와중에서 많은 신수와 새로운 정석연구들이 나타나게 됐다. 이점, 즉 한국기사들이 정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한국바둑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오랜 세월, 정석은 곧 일본정석이었다. 일본기사들이 수백년에 걸쳐 만들고 다듬어온 정석들을 한국은 아무 비판이나 검증없이 그대로 사용해 왔다. 근 3만개에 달하는 정석들이 다 그랬다.

曺 - 徐시대에 조훈현은 일본어도 능하고 정보도 빨랐기에 일본에서 신수가 등장하면 누구보다도 빨리 입수할 수 있었다. 반대로 서봉수는 정보가 거의 차단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바람에 속기대국 같은데서 曺 9단이 일본에서 새로 연구된 신수를 들고나오면 徐 9단은 속수무책이었다. 그 한수를 배우는데 한판을 헌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바둑은 기술적으로 일본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창과 방패의 조화 - 그리고 한국류의 등장>

이창호가 등장하면서 우리 바둑에도 우리가 연구한 신 정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드디어 '한국류'(한국식 정석을 포함한 한국의 새 연구와 수법들의 총칭)는 한국바둑의 세계제패와 더불어 중국과 일본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상식으로 변했으니 참으로 엄청난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9월에 이창호는 전통의 국수전(國手戰)에서 조훈현에게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국에서의 국수는 일본에서의 명인(名人)처럼 매우 유서깊은 이름이다. 과거 조선시절에는 군(郡)의 고수를 군기(郡棋), 도(道)의 고수를 도기(道棋), 나라의 고수를 국기(國棋), 또는 국수(國手)라 불렀다. 한국에서 맨처음 시작된 기전도 바로 국수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조남철 9단, 김인 9단, 조훈현 9단등 1인자의 계보를 이어온 기사들은 평소엔 모두 김국수 조국수로 호칭되곤 했다. 

90년 9월 7일 아침, 사제지간인 38세의 조훈현 9단과 15세의 이창호 4단은 몇발짝씩 떨어진채 한국기원 문을 밀고 들어섰다. 여드름이 돋은 창호는 언제나처람 어색하고 수줍은듯 고개를 외로 숙인채 뒤를 따랐다. 그를 향해 카메라 후랫쉬가 요란하게 터졌다.

당시 창호의 대국일정을 보면 이부근 12일동안 무려 10판을 두고있다. 전날인 6일에도 TV속기전을 오전과 오후로 나눠 두판을 두었다. 그리고는 휴식도 없이 도전기에 임했으니 실로 살인적인 대국일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창호는 단 한마디의 불평도 없었다. (최근 曺 9단이 왕위전 도전기를 기권한 사건이 있었지만 이때 사건의 단초가 된 것도 무리한 대국 스케줄과 한국기원과의 불협화음 탓이었다. 曺 9단은 불같이 화를 냈고 그 여파가 왕위전에도 미친 것이다.)

만약에 12일에 10판을 두라 한다면 어느 누구도 승복하지 않을 일이지만 창호는 아직 '소년'이었고 유독 불평 한마디 없는 소년이었다. (한국기원의 대국스케줄은 수시로 바뀌어 월별 예정표는 겨우 60%정도만 들어맞는다. 이런 환경속에서도 창호는 일인자가 된 오늘날까지 소위 불평이나 '까탈'을 부린 일이 없다. 한국기원 직원들로서는 참으로 편한 고객이 아닐 수 없다.)

창호는 오직 바둑으로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듯 보였다. 창호 자신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을 뺏어가는 다른 두가지가 있었으니 그 하나가 막 돋아나기 시작한 '‘여드름'이었다. 창호가 어쩌다 휴식차 전주 집에 들르면 온 가족이 이 여드름에 매달릴 정도였다.

다른 하나는 '‘선생님 가족'이었다. 선생님이 아니라 가족이라 한 것은 승부에서 이기고 들어간 날, 선생님보다는 '큰 엄마'라 부르는 조 9단의 부인이나 그 가족들 보기가 더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그러니까 1990년 국수전 도전기 첫판에서 창호는 신수를 들고 나왔다. 그것이 <기보1> 백10의 젖힘. 조훈현도 11의 실전적인 속수로 맞서 30까지 진행됐는데 당시에는 "당장 교과서에 실어도 좋을 올해의 신수상(新手賞)감"이란 평가를 받았다.

눈코 뜰새없는 일정속에서도 창호의 마음이 이처럼 새로운 준비와 시도로 가득차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실 한국바둑사에서 '창호 이전(以前)’과 '창호 이후(以後)'가 확실히 구분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앞서도 누누히 얘기했지만 창호 이전에는 정석과 포석은 물론 중반정석까지도 거의 모든 것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었다. 초창기에는 일본으로부터의 정보를 누가 더 빠르게 입수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가름되는 경우도 많았다. 서봉수 9단이 "나는 정석도 몰라요"하며 고개를 내젖곤했던 것은 "나는 정보가 없어요."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일본으로부터의 정보는 단 한번도 의심받는 경우가 없는 '교과서' 그자체였다. 책방의 바둑책은 거의 다 일본책을 번역한 것이었고 정석사전에 등장하는 3만개의 정석도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창호 이후 그같은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면서 '한국류'라 불리는 격렬하고 밀착적인 많은 수들이 하나씩 의미를 띄며 정립되어 나갔다.

<기보1> 白 : 이창호 4단, 黑 : 조훈현 9단

<기보2>

<기보1>의 신정석은 이후 몇번 더 시도되다가 사라졌는데 그걸 보면 썩 좋은 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판도 불리한 가운데 진행되어 백을 쥔 창호의 패배가 예견되고 있었는데 <기보2>에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흑1은 실리로 확실히 앞서려는 조훈현 9단의 의지를 드러낸 수. 중앙을 지키면 안전하지만 미세한 국면으로 가게된다. 창호의 장기인 끝내기 승부로 가는 것은 피곤한 일이어서 아예 쐐기를 박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흑5가 패착이 되었다.

무수한 수읽기가 내포된 가운데 14, 16, 18이 '창호의 괴력'으로 표현된 수순이다. 이 수순은 아무리 뜯어봐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호만이 감지하고 있다는 '중앙의 비밀'이 이 수순에 숨어있었다. 엷디 엷은 백의 중앙이 은근히 두터움을 띄면서 형세가 소리없이 변했다.

창호는 중앙에 살이 붙는 순간 역전을 확인했고 그다음엔 물샐틈 없이 밀어붙여 2집반을 이겼다. 그리고는 2, 3국을 내리 이겨 창호는 3대 0으로 국수 타이틀을 따내버렸다.

3대 2와 3대 0은 다르다. 상대는 아직 15살인데 조훈현은 어느날 갑자기 주르륵 밀려버렸다. 5년간 일인자 자리를 지켜온 조훈현과 그의 제자 이창호의 싸움은 이순간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창호의 괴력이 드디어 조훈현마저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훈현은 창호의 '뒷심'을 겁내고 그것이 국면운영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창호가 약점을 드러내는 포석 때 많이 리드해두지 않으면 언젠가 당하고 만다는 불안감이 조훈현의 대국심리를 흔들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바둑은 균형이며 조화다. 판위에서도 그렇지만 대국자의 정신도 그래야한다.

그런데 무언가를 겁낸다는 것 또는 '많이 리드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자체는 불균형이나 부조화에 가깝다. 조훈현의 바둑이 이로부터 점점 더 격렬해져 간 것은 그런 부조화나 불안을 일도양단하려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이 패배후 조훈현은 한국인의 영산인 백두산으로 날아가 유창혁 4단과 기성전 도전기를 두었는데 중국경찰의 개입으로 8수만에 대국이 중단되는등 우여곡절 끝에 2대 4로 패배하고 만다. 이창호에 이어 유창혁까지 가세하여 양면 협공에 나서면서 천하를 통일했던 조훈현의 영토는 조그맣게 오그라들고 만다. 잉창치(應昌期)배에서 우승하여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했던 曺 9단의 승부인생이 돌연 난파 위기에 직면하게 됐던 것이다.

<남편을 이기려는 심야의 돌소리>

91년 1월의 어느날, 조훈현 9단의 부인 정미화씨는 여느 때처럼 남편을 옆좌석에, 창호를 뒷좌석에 태우고 관철동 한국기원에 갔다. 그날 '대왕’타이틀이 창호에게 넘어갔다. 대국은 늦게 끝났다. 날은 어두워지고 추위가 몰아친 종로 거리에서 曺 9단은 어깨를 움추리고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채 걸어갔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혼자 서 있는 曺 9단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연속되는 패배에 대한 무력감이랄까. 대세가 기운 것인지도 모른다는 씁쓸함 같은 것이 그의 온 몸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바둑도 졌고 그래서 曺 9단은 친구들과 어울렸다가 새벽에 귀가했는데 남편을 맞으러 나오던 부인 정씨는 때마침 2층에서 들려오는 바둑돌 소리를 들었다. 창호는 그때까지 공부하고 있었다.

그 돌소리가 송곳처럼 정씨의 가슴을 찔렀다. 늙은 시부모에 세자녀, 그리고 남편과 창호까지 아침만해도 서너번씩 밥상을 차리면서도 일하는 사람 하나 두지않고 살림을 꾸려온 그녀였다. 그 씩씩하고 명랑한 여인이 처음으로 가슴 저미는 아픔을 느낀 것이다. 그녀는 훗날 웃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가슴이 싸한 것을 느꼈지요. 남편을 이기려는 돌소리처럼 들렸어요. 그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어요."

<7년만에 자라버린 호랑이 새끼>

7년전에 대문앞에서 처음 만난 창호는 고개를 푹 숙인채 말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뚱뚱하고 눈빛은 흐릿했으며 촌티가 물씬 나는 모습으로 남편 곁에 서있었다. 뭐라 물으면 모기소리로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참 순진도 하구나 싶었다. 가혹하고 격렬한 승부세계를 곁에서 지켜봐온 터라 이 아이가 그 험난한 동네에서 어찌 버틸까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적어도 생전에 당대무적인 남편을 위협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曺 9단쪽도 마찬가지였다. 프로들이 曺 9단에게 "호랑이를 키우는 것 아냐?"하고 물으면 曺 9단은 "그래도 10년은 걸리겠지"라고 대답하곤 했다.

물론 양쪽 다 농담이었다. 동료 프로들은 연전연승하는 曺 9단에게 "너의 유일한 적은 너의 제자"라는 식으로 놀린 것이고 曺 9단이 10년이라고 말한 것은 아무리 좁게 잡아도 10년 안엔 어림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불과 7년만에 농담은 진담이 되었고 바둑계는 이창호의 깃발로 뒤덮이고 말았다.

<바둑계는 이창호의 깃발로 뒤덮히고 사제는 분가하다>

이리하여 두사람이 함께 사는 조훈현의 연희동 집은 점차 괴이한 기운으로 덮여갔다. 두사람이 바둑을 둔 날이면 曺 9단의 부인 정씨는 남편에게 승부를 물어보기도 괴롭고 쑥쓰러워 한국기원에 살짝 전화로 알아봐야 했다.

바둑잡지에 만화를 연재하는 박수동 화백은 2층에 사는 젊은 맹호가 1층에 사는 지친 청룡을 거세게 압박하는 모습을 그렸다.

정미화씨는 비로소 창호가 떠날 때가 된 것을 알았다. 曺 9단은 일본의 내제자 생활을 거친 사람인지라 일본에서 묵계처럼 내려오는 스승과 제자의 룰을 지키고 싶어했다. 제자는 성인이 되어 자립하거나 5단이 되면 내보내는게 전통이었다. 창호는 아직 그 어느쪽도 해당되지 않았다.

"제자는 제자고 승부는 승부"라고 조 9단은 담백하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입장은 어려워졌다. 당대 제일의 제자를 키웠다는 자부심과 함께 현실의 피곤함이 뒤범벅이 됐다.

창호는 타고난 무표정과 무거운 입으로 여전히 아무 내색이 없었지만 사실은 이무렵엔 창호도 괴로움의 수위가 상당히 높아지고 있었다.

1991년 2월에 曺 9단은 북한산(北漢山) 자락의 근사한 저택으로 이사를 갔다. 이때 창호도 3월의 고교입학을 명분으로 강남의 아파트로 분가했다. 한국바둑계 최초의 내제자인 이창호와 스승 조훈현은 이렇게 남북으로 헤어졌다.

<이창호, 드디어 1인자의 자리에 오르다>

그 2월에 창호는 조 9단을 3대 2로 꺾고 최고위(最高位)를 방어했고 3월엔 다시 국내 최대기전인 왕위전에서 맞섰다. 부담을 털어버린 曺 9단과 충암고(沖岩高) 1학년이 된 창호는 그 어느때보다 치열하게 격돌했다.

왕위(王位)는 이제 曺 9단에게 유일하게 남은 빅 타이틀이었다. 이 승부에 바둑계의 일인자(一人者) 자리가 걸려있었다.

3대 3으로 어울린 승부가 숨가쁘게 최종국을 맞이했을 때 조훈현에게서 대착각이 튀어나왔다. 창호는 중요한 고비에서 언제나 하던 것처럼 화장실로 가 조용히 세수를 하고 돌아오더니 曺 9단이 깜박한 절묘한 맥점을 던져 대마를 잡아버렸다.

<대국해설>

기보를 보자. 형세는 은은하게 백이 두터운 가운데 흑을 쥔 曺 9단이 분발하고 있다. 

<기보1>

<1보>에서 曺 9단은 흑1로 덤벼 상변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이때 흑5로 A로 잡았으면 탈은 없었다. 5로 둔 것은 백의 봉쇄를 피하는 당연한 수로 보였는데 여기서부터 이창호의 절묘한 수읽기가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8로 응수를 본 것이 수순의 시작.

<기보2>

<2보>에서 이창호는 백1부터 9까지 과감한 사석전법을 펼치며 대마를 통째 잡으러갔다. 이창호의 바둑에선 좀체 볼 수 없는 격결한 수법이어서 구경꾼들은 깜짝 놀랐다. 백11을 선수한 뒤 13으로 넘어 과연 이 흑대마는 살 수 있느냐.

<기보3>

<3보>에서 보면 曺 9단은 문제를 쉽게 생각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1, 3으로 몬 다음 흑5로 둔 것이 그것인데 백이 A로 이으면 흑10으로 두어 쉽게 사는 것은 불문가지. 그러나 잇기 전에 6으로 먹여치는 수가 있었다. 이 간단한 맥점으로 대마는 사망했다. 흑이 B로 때리면 백은 A로 잇기만 해도 대마가 죽어있다. 9로 두면 물론 10으로 들어가 죽는 것.

曺 9단은 너무 아쉬웠던지 이후 한참 더 두었지만 대마가 죽는 이 순간 승부도 끝났다.

성장한 호랑이새끼는 드디어 스승의 머리에서 일인자의 왕관을 벗겨냈다. 한국기원의 '바둑'지는 이 사건을 '이창호의 쿠테타'라고 큰 제목으로 표현했다. 돌부처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아무튼 창호가 한국의 일인자가 된 사실만은 확연했다. 이제는 아무도 창호의 태풍을 막을 자가 없어보였다.

때마침 일본의 신인왕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과 이창호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처음 추진할 때는 양측 신예최강자의 대결이라는 의미였는데 몇달 사이 창호가 정상에 올라버리는 바람에 모양이 이상해졌다. 한국쪽에선 큰 기전 우승경험이 없는 요다와 일인자라 말해도 손색이 없는 창호의 대결이 격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하는 기사도 많았지만 한국기원은 친선대결이고 또 이기면 되는 것 아니냐며 무마했다.

한국기원 관계자들이 볼 때 5번기인만큼 적어도 창호가 질리는 없어보였다.

<요다 노리모토에 대한 강렬한 첫인상>

 

요다(依田) 9단에 대한 창호의 첫 인상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짙은 눈섶에 강한 눈빛, 그리고 결연히 입을 다문 모습은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를 연상시켰다. 돌을 놓을 때는 판이 깨져라 찍어 눌렀다. 소리도 요란했다. 거의 소리가 나지않게 슬그머니 돌을 갖다놓는 창호의 눈에 요다의 모습은 마치 도끼로 바둑판을 쪼개려는 역사(力士)처럼 보였다.

본인이 고백한대로 창호는 겁이 많다. 어릴 때 선생님 집에 와서도 밤엔 무서워서 혼자 잠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창호니까 힘차게 기합을 토해내는 요다의 모습에 상당히 위축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위축 운운은 추측일 뿐이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월에 동경과 서울을 오가며 벌어진 5번기는 놀랍게도 요다의 3대1 완승으로 끝났다. 일반 팬들은 말할 것 없고 프로기사들까지도 이 결과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창호의 완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팬들은

"이창호는 해외징크스가 있다. 외국이라 실력발휘를 못한 것이다."며 자위하면서도 어딘지 떨떠름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일본에선 다시

"이창호란 소년의 바둑은 스승인 조훈현 9단을 상대하는데는 능하지만 전체적으로 아직 무르익진 않았다."

라는 말이 나왔다. 씹어보면 씹어볼수록 묘한 뉴앙스를 지닌 말이었다.

<특별대국, 이창호 3대 1로 완패>

그러나 지금와서 곰곰히 생각하면 창호가 요다에게 3대 1로 진 것은 하등 이상할게 없는 일이었다. 고수들끼리의 승부는 수(手)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좌우한다. 찰나에 일어나는 미세한 흔들림으로 승부는 결정된다. 당시 16살이었던 창호가 요다 특유의 기세에 강한 압력을 받은 나머지 그의 자랑이었던 부동심이 흔들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창호는 2년후 동양증권배에서 다시 요다 9단과 맞부딛쳤다. 실력도 더 나아졌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다시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던 상대였기에 좋은 설욕의 기회라 믿고 전력을 기울였다.

끝내기에 접어들 무렵 바둑은 요다 9단이 미세하게 앞선듯 보였으나 검토실의 프로들이나 관계자들은 창호의 승리를 믿었다. 반집이나 한집반 차이라면 끝내기의 귀신 이창호가 따라잡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믿었다. 창호도 그걸 기대했다.

하지만 요다는 조금도 밀리지 않고 버틴 끝에 1집반을 이겨냈다. 창호에게 밀리지 않는 끝내기 솜씨를 보인 요다의 모습이 이순간 한국 프로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요다가 한국기사들에게 강자의 이미지로 군림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창호의 천적 요다 노리모토>

 

창호가 요다에게 계속 밀린 것은 요다에 대한 오판 탓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창호는 요다의 겉모습과 그의 대국자세(돌로 판을 깨져라 내리 찍는)에서 강렬한 첫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요다는 겉모습과 전혀 다른 기풍을 지닌 사람이었다..

훗날 이창호 9단, 유창혁 9단과 함께 요다 9단에 대해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 요다는 공격적인 바둑인가.

"천만에. 전혀 그 반대다." (유창혁 9단)

- 요다는 매우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이는데.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의 바둑은 균형이 잘 잡힌 교과서적인 정법을 구사하는 바둑이다." (이창호 9단)

- 특별히 강한 대목은 어디인가.

"특별히 강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기초가 좋고 모양이 좋다. 대체적으로 수비형이며 유리한 바둑을 닦아내는 솜씨도 좋다." (이창호 9단)

- 약점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사나운 접전을 피하고 격렬한 승부를 꺼리는데 있다고 본다. 조훈현 9단이 나중에 그 약점을 캐치하고 '흔들기'로 나가 승리한 것이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유창혁 9단)

 

<첫인상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이창호>

'흔들기'란 말은 1994년 조훈현 대 요다의 동양증권배 결승전 때 등장한 말이다. 당시 TV 해설을 맡았던 필자가 처음 사용했다고 생각되는데 曺 9단이 침착하고 수비적인 요다 9단을 처음부터 공격적이고 사나운 행마로 자극하여 본연의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창호는 '흔들기'와는 거리가 먼 기풍의 소유자. 더구나 첫 인상의 강렬한 영상 탓인지 아직도 그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한채 창호는 요다에게 계속 끌려다녔다.

생각하면 창호와 요다와의 천적(天敵)관계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잘 지는 창호이고 외국에 나가면 잘 지는 창호이기에 요다와의 첫 대결에서 1대 3으로 패배한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창호는 두번째 만나면 거의 다 이겨내는 사람이기에 '전략의 명수'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그런데 이런 창호의 능력도 요다에게는 철저히 가로막혔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창호지만 가끔 "요다 9단을 만나고 싶다."고 쓰라린 마음을 토로하곤 했다. 수많은 기전에서 승승장구하면 할수록 한쪽에서 요다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러나 요다와의 전적은 1990년대 후반까지도 1승 6패로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언젠가 李 9단에게 그점을 물어봤다.

 

- 유독 요다(依田) 9단에게 성적이 그토록 나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반드시 이기려고 하니까 더 이겨지지 않았다. 이유라면 그것이 이유일 것이다."

<요다에 대한 강렬한 승부욕>

 

승부욕이 문제였다고 李 9단은 말하고 있다. 위기십결(圍棋十訣)의 첫머리에 나오는 부득탐승(不得貪勝)이란 글귀가 절로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꼭 그뿐일까. 최초에 요다를 만났을 때 창호가 심리적으로 위축감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마음의 동요를 부르고 마음의 동요는 패배를 부른다. 그리하여 첫 대결에서 1승 3패. 그 이후엔 좀더 훌륭해진 실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 숨은 모종의 그림자가 승리를 방해한다. 부담감과 승부욕에 어깨가 굳어버린다. 그리하여 1승 6패, 다음은 2승 7패. 이런 식으로 흘러왔던 것은 아닐까.

이창호란 이름은 마주앉은 누구에게나 강한 최면작용을 한다. 그러나 이창호 대 요다의 대결에선 입장이 바뀐다.   

이창호는 '돌부처'란 별명 그대로 선천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지만 요다 노리모토란 천적만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이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창호 9단이 조치훈 9단을 이기고 趙 9단은 依田 9단을 이기고 依田은 이창호를 이기는 관계는 매우 흥미롭다.  

승부와 마음의 관계는 이렇게 묘하다. 서봉수 9단은 중국바둑에 몇번 이기더니 크게 자신감을 얻었고 이것이 중국의 고수들에게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는 배경이 된다. 이창호가 당대의 거목이라 할 조치훈 9단에게 공식대국에서 6연승을 거두고 중국의 강자 마샤오춘(馬曉春) 9단에게 10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킬러로 떠오른 요다 노리모토>

요다(依田)가 '한국킬러'가 된 것도 이창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기사들에게 무적의 강자로 뼛속 깊이 각인된 이창호를 유유히 쓰러뜨리는 요다. 신산(神算) 이창호의 끝내기에도 결코 밀리지 않는 요다. 이런 이미지는 그를 만나는 한국기사들의 심혼을 흔들어 놓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이창호 대 요다의 평생 전적을 다시 보자.

 

1991 특별대국 이창호(흑) 요다(백) 백 2집반승 롯데호텔 X

1991 특별대국 이창호(백) 요다(흑) 백 4집반승 롯데호텔 O

1991 특별대국 이창호(흑) 요다(백) 백 2집반승 일본기원 X

1991 특별대국 이창호 (백) 요다(흑) 흑 불계승 일본기원 X

1993 TV아시아 이창호(백) 요다(흑) 흑 3집반승 서울 X

1993 동양증권배 이창호(백) 요다(흑) 흑 1집반승 롯데호텔 X

1998 TV아시아 이창호(백) 요다(흑) 흑 반집승 일본 지바 X

1999 춘 란 배 이창호 (백) 요다 (흑) 백 반집승 중국 우한 O

1999 TV아시아 이창호(백) 요다(흑) 흑 2집반승 중국 텐진 X 

2000 잉창치배 이창호 (흑) 요다 (백) 흑 3집승 중국 상해 O

2000 TV아시아 이창호(흑) 요다(백) 흑 6집반승 경주 O

   * 종합전적 = 4승 7패

<이창호 대 요다의 평생전적은 4승 7패>

  

특별대국에서 1승 3패한 뒤 속기대회인 TV아시아 본선과 동양증권배 본선에서 2연패하여 1승 5패. 그 뒤로 창호는 점점 강해져갔으나 요다와는 통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벼르고 벼르던 요다를 다시 만난 것은 무려 5년 만인 1998년의 TV아시아 대회. 그러나 창호 본인의 말대로 승부욕이 앞선 탓인지 박빙의 승부 끝에 반집패를 당한다. 이리하여 1승 6패.

창호는 '역전 반집승'이 전매특허였으나 요다에게는 그의 귀신같은 추격전도 잘 먹혀들지 않았다. 

1999년 중국에서 열린 춘란배 본선에서 창호는 요다에게 극적인 반집승을 거둔다. 비로소 요다란 인물이 던진 첫인상의 그물로부터 창호가 벗어나기 시작한 것일까. 이듬해 TV아시아 결승전에선 다시 2집반을 졌으나 2000년에 들어서서는 잉창치배와 TV아시아 대회서 연승하여 총 전적을 4승 7패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창호는 아직 요다에게 빚을 다 갚지 못했다. 일본의 명인이 되어 멀리있는 요다가 요즘 세계대회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바람에 만날 기회가 적어진 것이다.

요다 노리모토란 인물은 이리하여 현대바둑사에서 독특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는 조훈현 9단에게 5승 4패, 유창혁 9단에게 6승 7패, 서봉수 9단에게 4승 1패를 거두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최강의 실력자 이창호에게 7승 4패라는 압도적인 전적을 거두고 있다.

한때 '일본의 자존심' 또는 '일본 최후의 희망'으로 불린 요다 9단. 그가 앞으로 이창호와 다시 대국할 기회는 몇번이나 될까. 3번 이상 맞붙지 않는다면 그는 이창호에게 전적이 좋은채 끝난 세계 유일의 기사로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창호, 세계대회 결승에 처음 오르다>

창호와 요다가 처음 만났던 1991년에 세계바둑계는 또하나의 사건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대는 제3기 동양증권배. 준결승에 조훈현 9단 대 이창호 5단, 린하이펑(林海峰) 9단 대 조치훈 9단, 이렇게 4명이 올랐다. 여기서 창호와 林 9단이 승리하여 창호는 생애 처음 세계대회 결승전을 갖게됐다.

9월 대만에서 결승 1, 2, 3국을 치렀는데 첫판은 林 9단이 흑으로 반집을 이겼고 둘째판은 창호가 1집반을 이겼다. 3국은 林 9단의 불계승.

16세의 나이로 세계대회 결승에까지 진출했으나 아직 무언가가 부족한 모습이었고 린하이펑이란 대가에게는 한수 밀리는 모습이었다. 창호는 그러나 林 9단과의 이 결승전 이후 승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林 9단에게 깊은 호감을 품게된다.

그리고 수줍어하는 성격임에도 창호는 林 9단에 대해서만은 스스럼없이 속마음 한조각을 내보이곤 했다.

- 처음 대했을 때의 느낌은.

" 그렇게 무겁게 느낀 경우는 처음이었다."

- 무겁다는건 바둑인가 사람인가.

" 林 9단을 말하는 것이다."

 

 

<전적은 2대 2, 승부는 최종국으로>

이창호의 바둑은 네웨이핑(攝衛平), 린하이펑(林海峰),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등의 바둑과 유사점이 있다. 창호도 젊은 시절의 林 9단이 계산에서 무척 정확했음을 잘 알고 있다. 기풍도 그렇지만 창호는 바둑을 떠나 林 9단으로부터 매우 좋은 인상을 받은듯 훗날 프로기사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林 9단을 꼽곤 했다.

林 9단이 2대 1로 리드한 가운데 1992년 1월 서울에서 결승전이 이어졌다. 4국에서 백을 쥔 林 9단은 필승의 형세를 역전당해 4집반을 졌다. TV가 생중계하는등 한국 바둑팬들의 이목이 총 집결된 가운데 1월 27일 롯데호텔에서 마지막 제5국이 열렸다.

바둑은 중반이후 흑의 우세로 시종했으나 끝내기에 접어들자 점점 미세해졌다.

흑을 쥔 다케미야 9단은 예상대로 3연성에 이은 우주류를 펼쳐 흑1로 중앙을 크게 에워쌓았다. 백의 이창호는 지금껏 흑의 대세력이 구체화되어 가는데도 모른척 자기 모양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장면에선 더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어디로 삭감해 가느냐.A나 B의 삭감일까. 아니다. 창호니까 더 서서히, 멀리서 삭감할지도 모른다며 의논이 분분할 때 예측을 크게 빗나가는 한수가 등장했다.

<기보2>

<기보2>의 백1을 선수한 뒤 3으로 깊숙하게 침입한 수가 바로 그것이다. 다케미야 9단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검토진들도 물론 깜짝 놀랐다. 결코 무리를 하지 않고 수도승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종반의 계산으로 승부하는 창호가 폭파전문가라 불리는 조치훈 식의 초강수를 들고 나왔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게다가 이 소년이 강수를 던지자 다른 사람의 강수에 비해 훨씬 묵직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아닌가. 그 수는 다가오면 다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모종의 힘이 그 수에 거역할 수 없는 무게를 실어주고 있었다.기세가 강하고 멋을 중시하는 다케미야 9단도 결국 백3의 압력에 굴복하여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공격을 포기하고 흑4부터 10까지 후퇴한 것이다. 창호는 물론 3으로 깊숙히 쳐들어갈 때 A의 절단과 B의 건너붙임등의 맥을 보며 수습을 자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3의 강수는 이창호라고 하는 소년기사를 다시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단 한수로 다케미야의 우주류를 물거품으로 만든 이창호의 저력에 외국기사들도 서서히 공포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불후의 명수로 우주류 격파>

이바둑은 서울에서는 '90년도의 명국'으로 회자되었고 훗날 바둑TV같은데서 이창호 시리즈를 방영할 때 단골로 등장하곤 했다.창호의 다음 상대는 당시 일본의 일인자였던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이었는데 여기서는 박빙의 접전 끝에 반집을 지고 말았다. 小林은 강자답게 이창호의 끝내기에 전혀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종반전에 기막힌 묘수로 승리를 낚아챘다. 이 승부는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이창호의 뇌리에는 '강자 小林'의 이미지가 깊이 새겨지게 된다.41연승이라는 대기록이 작성된 뒤 창호에게 '지지않는 소년'이란 별호가 추가되었다. 그 지지않는 소년이 1990년 8월에 서봉수를 격파하고 명인전 도전권을 손에 넣자 바둑계는 아연 숨을 죽였다. 최고위는 지방기전이지만 명인전은 서울의 중앙기전. 15세가 된 이창호는 이미 말할 수 없는 신비감을 토해내고 있었다. '돌부처 "강태공" 전생고수의 환생'등 그 어떤 별명도 이 어눌하고 조용한 소년의 내막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조훈현의 위기가 다가왔음을 감지했다.그러나 조훈현은 세인의 우려를 비웃듯 '황제'다운 위용을 과시하며 이창호를 3대 1로 꺾어버렸다. 이 결과를 보고 기가(棋街)에서는 이렇게 관전평을 했다.

"조훈현이 잘 막아내고 있다. 그의 감각과 전투력은 역시 일품이다. 그러나 조만간 이창호의 신기(神氣)가 영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그 무엇으로도 이 소년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오랜 세월 부동의 1인자로 군림해왔던 조훈현에게 "막아낸다"라는 표현을 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曺 9단은 이겼지만 관전자들의 눈에 비친 그는 이미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한듯한 모습이었고 그마저도 어딘지 힘들어 보였다.이창호의 강력한 이미지는 이미 겨울 산맥처럼 웅혼하고 아득한 모습으로 바둑계를 멀리서 포위하고 있었다.

<바둑계를 포위하기 시작한 이창호군단>

이창호의 연승을 41연승에서 저지시킨 기사는 조훈현이 아니라 유창혁이었다. 창호는 이무렵 새로 탄생한 최대기전인 기성전 본선에서 유창혁과 만나 대 역전패를 당하고만다. 역전승의 대명사로 불리던 이창호도 유창혁의 강력한 파워 앞에서는 종종 허망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뛰어난 공격력에다 여름햇살처럼 강렬한 기풍의 소유자인 유창혁은 창호보다 9년 연상이었다. 입단시기와 단위가 비슷한데다 바둑의 명문인 충암학원(沖岩學園)의 선후배간이어서 두사람은 자연 충암연구회를 통해 자주 어울렸다. 유창혁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타입이고 어린 이창호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두사람의 기재(棋才)를 중심으로 밤낮없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그바람에 충암출신의 어린 소년기사들은 물론이고 같이 연구에 참여한 선배기사들까지도 기량이 진일보하게 됐다.

조훈현대 서봉수의 대국에선 국후복기가 별로 없었다. 설령 복기가 이루어져도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승부사가 수시로 대결해야할 적수에게 자신의 느낌과 심정을 고스란히 토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과거 일본의 막부시대 바둑 4가문(家門)은 저마다 비수(秘手)를 준비해 두었다가 쟁기(爭棋)같은 중요한 대국에서만 사용하곤 했다. 승부세계의 속성은 바로 이처럼 나를 감춰 적을 치는 것이다.

<속마음을 감추지 않는 복기>

그러나 젊은 유창혁과 특히 세상 경험이 전무한 이창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지금 알려주는 수가 다음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될 것이라는 계산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들은 바둑판 위의 진실과 그걸 바라보는 자신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로했다.

유창혁과 이창호가 등장한 이후 한국에선 진정한 집단연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유창혁이 불이라면 이창호는 물이었고 유창혁이 창이라면 이창호는 방패였다. 이 두사람은 서로 배우고 서로 보완하며 힘을 키웠다. 그 와중에서 많은 신수와 새로운 정석연구들이 나타나게 됐다.

이점, 즉 한국기사들이 정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한국바둑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오랜 세월, 정석은 곧 일본정석이었다. 일본기사들이 수백년에 걸쳐 만들고 다듬어온 정석들을 한국은 아무 비판이나 검증없이 그대로 사용해 왔다. 근 3만개에 달하는 정석들이 다 그랬다.

曺 - 徐시대에 조훈현은 일본어도 능하고 정보도 빨랐기에 일본에서 신수가 등장하면 누구보다도 빨리 입수할 수 있었다. 반대로 서봉수는 정보가 거의 차단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바람에 속기대국 같은데서 曺 9단이 일본에서 새로 연구된 신수를 들고나오면 徐 9단은 속수무책이었다. 그 한수를 배우는데 한판을 헌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바둑은 기술적으로 일본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창과 방패의 조화 - 그리고 한국류의 등장>

이창호가 등장하면서 우리 바둑에도 우리가 연구한 신 정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드디어 '한국류'(한국식 정석을 포함한 한국의 새 연구와 수법들의 총칭)는 한국바둑의 세계제패와 더불어 중국과 일본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상식으로 변했으니 참으로 엄청난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9월에 이창호는 전통의 국수전(國手戰)에서 조훈현에게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국에서의 국수는 일본에서의 명인(名人)처럼 매우 유서깊은 이름이다. 과거 조선시절에는 군(郡)의 고수를 군기(郡棋), 도(道)의 고수를 도기(道棋), 나라의 고수를 국기(國棋), 또는 국수(國手)라 불렀다. 한국에서 맨처음 시작된 기전도 바로 국수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조남철 9단, 김인 9단, 조훈현 9단등 1인자의 계보를 이어온 기사들은 평소엔 모두 김국수 조국수로 호칭되곤 했다. 

90년 9월 7일 아침, 사제지간인 38세의 조훈현 9단과 15세의 이창호 4단은 몇발짝씩 떨어진채 한국기원 문을 밀고 들어섰다. 여드름이 돋은 창호는 언제나처람 어색하고 수줍은듯 고개를 외로 숙인채 뒤를 따랐다. 그를 향해 카메라 후랫쉬가 요란하게 터졌다.

당시 창호의 대국일정을 보면 이부근 12일동안 무려 10판을 두고있다. 전날인 6일에도 TV속기전을 오전과 오후로 나눠 두판을 두었다. 그리고는 휴식도 없이 도전기에 임했으니 실로 살인적인 대국일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창호는 단 한마디의 불평도 없었다. (최근 曺 9단이 왕위전 도전기를 기권한 사건이 있었지만 이때 사건의 단초가 된 것도 무리한 대국 스케줄과 한국기원과의 불협화음 탓이었다. 曺 9단은 불같이 화를 냈고 그 여파가 왕위전에도 미친 것이다.)

만약에 12일에 10판을 두라 한다면 어느 누구도 승복하지 않을 일이지만 창호는 아직 '소년'이었고 유독 불평 한마디 없는 소년이었다. (한국기원의 대국스케줄은 수시로 바뀌어 월별 예정표는 겨우 60%정도만 들어맞는다. 이런 환경속에서도 창호는 일인자가 된 오늘날까지 소위 불평이나 '까탈'을 부린 일이 없다. 한국기원 직원들로서는 참으로 편한 고객이 아닐 수 없다.)

창호는 오직 바둑으로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듯 보였다. 창호 자신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을 뺏어가는 다른 두가지가 있었으니 그 하나가 막 돋아나기 시작한 '‘여드름'이었다. 창호가 어쩌다 휴식차 전주 집에 들르면 온 가족이 이 여드름에 매달릴 정도였다.

다른 하나는 '‘선생님 가족'이었다. 선생님이 아니라 가족이라 한 것은 승부에서 이기고 들어간 날, 선생님보다는 '큰 엄마'라 부르는 조 9단의 부인이나 그 가족들 보기가 더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그러니까 1990년 국수전 도전기 첫판에서 창호는 신수를 들고 나왔다. 그것이 <기보1> 백10의 젖힘. 조훈현도 11의 실전적인 속수로 맞서 30까지 진행됐는데 당시에는 "당장 교과서에 실어도 좋을 올해의 신수상(新手賞)감"이란 평가를 받았다.

눈코 뜰새없는 일정속에서도 창호의 마음이 이처럼 새로운 준비와 시도로 가득차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실 한국바둑사에서 '창호 이전(以前)’과 '창호 이후(以後)'가 확실히 구분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앞서도 누누히 얘기했지만 창호 이전에는 정석과 포석은 물론 중반정석까지도 거의 모든 것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었다. 초창기에는 일본으로부터의 정보를 누가 더 빠르게 입수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가름되는 경우도 많았다. 서봉수 9단이 "나는 정석도 몰라요"하며 고개를 내젖곤했던 것은 "나는 정보가 없어요."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일본으로부터의 정보는 단 한번도 의심받는 경우가 없는 '교과서' 그자체였다. 책방의 바둑책은 거의 다 일본책을 번역한 것이었고 정석사전에 등장하는 3만개의 정석도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창호 이후 그같은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면서 '한국류'라 불리는 격렬하고 밀착적인 많은 수들이 하나씩 의미를 띄며 정립되어 나갔다.

<기보1> 白 : 이창호 4단, 黑 : 조훈현 9단

<기보2>

<기보1>의 신정석은 이후 몇번 더 시도되다가 사라졌는데 그걸 보면 썩 좋은 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판도 불리한 가운데 진행되어 백을 쥔 창호의 패배가 예견되고 있었는데 <기보2>에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흑1은 실리로 확실히 앞서려는 조훈현 9단의 의지를 드러낸 수. 중앙을 지키면 안전하지만 미세한 국면으로 가게된다. 창호의 장기인 끝내기 승부로 가는 것은 피곤한 일이어서 아예 쐐기를 박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흑5가 패착이 되었다.

무수한 수읽기가 내포된 가운데 14, 16, 18이 '창호의 괴력'으로 표현된 수순이다. 이 수순은 아무리 뜯어봐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호만이 감지하고 있다는 '중앙의 비밀'이 이 수순에 숨어있었다. 엷디 엷은 백의 중앙이 은근히 두터움을 띄면서 형세가 소리없이 변했다.

창호는 중앙에 살이 붙는 순간 역전을 확인했고 그다음엔 물샐틈 없이 밀어붙여 2집반을 이겼다. 그리고는 2, 3국을 내리 이겨 창호는 3대 0으로 국수 타이틀을 따내버렸다.

3대 2와 3대 0은 다르다. 상대는 아직 15살인데 조훈현은 어느날 갑자기 주르륵 밀려버렸다. 5년간 일인자 자리를 지켜온 조훈현과 그의 제자 이창호의 싸움은 이순간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창호의 괴력이 드디어 조훈현마저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훈현은 창호의 '뒷심'을 겁내고 그것이 국면운영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창호가 약점을 드러내는 포석 때 많이 리드해두지 않으면 언젠가 당하고 만다는 불안감이 조훈현의 대국심리를 흔들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바둑은 균형이며 조화다. 판위에서도 그렇지만 대국자의 정신도 그래야한다.

그런데 무언가를 겁낸다는 것 또는 '많이 리드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자체는 불균형이나 부조화에 가깝다. 조훈현의 바둑이 이로부터 점점 더 격렬해져 간 것은 그런 부조화나 불안을 일도양단하려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이 패배후 조훈현은 한국인의 영산인 백두산으로 날아가 유창혁 4단과 기성전 도전기를 두었는데 중국경찰의 개입으로 8수만에 대국이 중단되는등 우여곡절 끝에 2대 4로 패배하고 만다. 이창호에 이어 유창혁까지 가세하여 양면 협공에 나서면서 천하를 통일했던 조훈현의 영토는 조그맣게 오그라들고 만다. 잉창치(應昌期)배에서 우승하여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했던 曺 9단의 승부인생이 돌연 난파 위기에 직면하게 됐던 것이다.

<남편을 이기려는 심야의 돌소리>

91년 1월의 어느날, 조훈현 9단의 부인 정미화씨는 여느 때처럼 남편을 옆좌석에, 창호를 뒷좌석에 태우고 관철동 한국기원에 갔다. 그날 '대왕’타이틀이 창호에게 넘어갔다. 대국은 늦게 끝났다. 날은 어두워지고 추위가 몰아친 종로 거리에서 曺 9단은 어깨를 움추리고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채 걸어갔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혼자 서 있는 曺 9단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연속되는 패배에 대한 무력감이랄까. 대세가 기운 것인지도 모른다는 씁쓸함 같은 것이 그의 온 몸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바둑도 졌고 그래서 曺 9단은 친구들과 어울렸다가 새벽에 귀가했는데 남편을 맞으러 나오던 부인 정씨는 때마침 2층에서 들려오는 바둑돌 소리를 들었다. 창호는 그때까지 공부하고 있었다.

그 돌소리가 송곳처럼 정씨의 가슴을 찔렀다. 늙은 시부모에 세자녀, 그리고 남편과 창호까지 아침만해도 서너번씩 밥상을 차리면서도 일하는 사람 하나 두지않고 살림을 꾸려온 그녀였다. 그 씩씩하고 명랑한 여인이 처음으로 가슴 저미는 아픔을 느낀 것이다. 그녀는 훗날 웃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가슴이 싸한 것을 느꼈지요. 남편을 이기려는 돌소리처럼 들렸어요. 그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어요."

<7년만에 자라버린 호랑이 새끼>

7년전에 대문앞에서 처음 만난 창호는 고개를 푹 숙인채 말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뚱뚱하고 눈빛은 흐릿했으며 촌티가 물씬 나는 모습으로 남편 곁에 서있었다. 뭐라 물으면 모기소리로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참 순진도 하구나 싶었다. 가혹하고 격렬한 승부세계를 곁에서 지켜봐온 터라 이 아이가 그 험난한 동네에서 어찌 버틸까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적어도 생전에 당대무적인 남편을 위협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曺 9단쪽도 마찬가지였다. 프로들이 曺 9단에게 "호랑이를 키우는 것 아냐?"하고 물으면 曺 9단은 "그래도 10년은 걸리겠지"라고 대답하곤 했다.

물론 양쪽 다 농담이었다. 동료 프로들은 연전연승하는 曺 9단에게 "너의 유일한 적은 너의 제자"라는 식으로 놀린 것이고 曺 9단이 10년이라고 말한 것은 아무리 좁게 잡아도 10년 안엔 어림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불과 7년만에 농담은 진담이 되었고 바둑계는 이창호의 깃발로 뒤덮이고 말았다.

<바둑계는 이창호의 깃발로 뒤덮히고 사제는 분가하다>

이리하여 두사람이 함께 사는 조훈현의 연희동 집은 점차 괴이한 기운으로 덮여갔다. 두사람이 바둑을 둔 날이면 曺 9단의 부인 정씨는 남편에게 승부를 물어보기도 괴롭고 쑥쓰러워 한국기원에 살짝 전화로 알아봐야 했다.

바둑잡지에 만화를 연재하는 박수동 화백은 2층에 사는 젊은 맹호가 1층에 사는 지친 청룡을 거세게 압박하는 모습을 그렸다.

정미화씨는 비로소 창호가 떠날 때가 된 것을 알았다. 曺 9단은 일본의 내제자 생활을 거친 사람인지라 일본에서 묵계처럼 내려오는 스승과 제자의 룰을 지키고 싶어했다. 제자는 성인이 되어 자립하거나 5단이 되면 내보내는게 전통이었다. 창호는 아직 그 어느쪽도 해당되지 않았다.

"제자는 제자고 승부는 승부"라고 조 9단은 담백하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입장은 어려워졌다. 당대 제일의 제자를 키웠다는 자부심과 함께 현실의 피곤함이 뒤범벅이 됐다.

창호는 타고난 무표정과 무거운 입으로 여전히 아무 내색이 없었지만 사실은 이무렵엔 창호도 괴로움의 수위가 상당히 높아지고 있었다.

1991년 2월에 曺 9단은 북한산(北漢山) 자락의 근사한 저택으로 이사를 갔다. 이때 창호도 3월의 고교입학을 명분으로 강남의 아파트로 분가했다. 한국바둑계 최초의 내제자인 이창호와 스승 조훈현은 이렇게 남북으로 헤어졌다.

<이창호, 드디어 1인자의 자리에 오르다>

그 2월에 창호는 조 9단을 3대 2로 꺾고 최고위(最高位)를 방어했고 3월엔 다시 국내 최대기전인 왕위전에서 맞섰다. 부담을 털어버린 曺 9단과 충암고(沖岩高) 1학년이 된 창호는 그 어느때보다 치열하게 격돌했다.

왕위(王位)는 이제 曺 9단에게 유일하게 남은 빅 타이틀이었다. 이 승부에 바둑계의 일인자(一人者) 자리가 걸려있었다.

3대 3으로 어울린 승부가 숨가쁘게 최종국을 맞이했을 때 조훈현에게서 대착각이 튀어나왔다. 창호는 중요한 고비에서 언제나 하던 것처럼 화장실로 가 조용히 세수를 하고 돌아오더니 曺 9단이 깜박한 절묘한 맥점을 던져 대마를 잡아버렸다.

<대국해설>

기보를 보자. 형세는 은은하게 백이 두터운 가운데 흑을 쥔 曺 9단이 분발하고 있다. 

<기보1>

<1보>에서 曺 9단은 흑1로 덤벼 상변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이때 흑5로 A로 잡았으면 탈은 없었다. 5로 둔 것은 백의 봉쇄를 피하는 당연한 수로 보였는데 여기서부터 이창호의 절묘한 수읽기가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8로 응수를 본 것이 수순의 시작.

<기보2>

<2보>에서 이창호는 백1부터 9까지 과감한 사석전법을 펼치며 대마를 통째 잡으러갔다. 이창호의 바둑에선 좀체 볼 수 없는 격결한 수법이어서 구경꾼들은 깜짝 놀랐다. 백11을 선수한 뒤 13으로 넘어 과연 이 흑대마는 살 수 있느냐.

<기보3>

<3보>에서 보면 曺 9단은 문제를 쉽게 생각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1, 3으로 몬 다음 흑5로 둔 것이 그것인데 백이 A로 이으면 흑10으로 두어 쉽게 사는 것은 불문가지. 그러나 잇기 전에 6으로 먹여치는 수가 있었다. 이 간단한 맥점으로 대마는 사망했다. 흑이 B로 때리면 백은 A로 잇기만 해도 대마가 죽어있다. 9로 두면 물론 10으로 들어가 죽는 것.

曺 9단은 너무 아쉬웠던지 이후 한참 더 두었지만 대마가 죽는 이 순간 승부도 끝났다.

성장한 호랑이새끼는 드디어 스승의 머리에서 일인자의 왕관을 벗겨냈다. 한국기원의 '바둑'지는 이 사건을 '이창호의 쿠테타'라고 큰 제목으로 표현했다. 돌부처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아무튼 창호가 한국의 일인자가 된 사실만은 확연했다. 이제는 아무도 창호의 태풍을 막을 자가 없어보였다.

때마침 일본의 신인왕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과 이창호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처음 추진할 때는 양측 신예최강자의 대결이라는 의미였는데 몇달 사이 창호가 정상에 올라버리는 바람에 모양이 이상해졌다. 한국쪽에선 큰 기전 우승경험이 없는 요다와 일인자라 말해도 손색이 없는 창호의 대결이 격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하는 기사도 많았지만 한국기원은 친선대결이고 또 이기면 되는 것 아니냐며 무마했다.

한국기원 관계자들이 볼 때 5번기인만큼 적어도 창호가 질리는 없어보였다.

<요다 노리모토에 대한 강렬한 첫인상>

 

요다(依田) 9단에 대한 창호의 첫 인상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짙은 눈섶에 강한 눈빛, 그리고 결연히 입을 다문 모습은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를 연상시켰다. 돌을 놓을 때는 판이 깨져라 찍어 눌렀다. 소리도 요란했다. 거의 소리가 나지않게 슬그머니 돌을 갖다놓는 창호의 눈에 요다의 모습은 마치 도끼로 바둑판을 쪼개려는 역사(力士)처럼 보였다.

본인이 고백한대로 창호는 겁이 많다. 어릴 때 선생님 집에 와서도 밤엔 무서워서 혼자 잠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창호니까 힘차게 기합을 토해내는 요다의 모습에 상당히 위축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위축 운운은 추측일 뿐이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월에 동경과 서울을 오가며 벌어진 5번기는 놀랍게도 요다의 3대1 완승으로 끝났다. 일반 팬들은 말할 것 없고 프로기사들까지도 이 결과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창호의 완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팬들은

"이창호는 해외징크스가 있다. 외국이라 실력발휘를 못한 것이다."며 자위하면서도 어딘지 떨떠름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일본에선 다시

"이창호란 소년의 바둑은 스승인 조훈현 9단을 상대하는데는 능하지만 전체적으로 아직 무르익진 않았다."

라는 말이 나왔다. 씹어보면 씹어볼수록 묘한 뉴앙스를 지닌 말이었다.

<특별대국, 이창호 3대 1로 완패>

그러나 지금와서 곰곰히 생각하면 창호가 요다에게 3대 1로 진 것은 하등 이상할게 없는 일이었다. 고수들끼리의 승부는 수(手)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좌우한다. 찰나에 일어나는 미세한 흔들림으로 승부는 결정된다. 당시 16살이었던 창호가 요다 특유의 기세에 강한 압력을 받은 나머지 그의 자랑이었던 부동심이 흔들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창호는 2년후 동양증권배에서 다시 요다 9단과 맞부딛쳤다. 실력도 더 나아졌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다시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던 상대였기에 좋은 설욕의 기회라 믿고 전력을 기울였다.

끝내기에 접어들 무렵 바둑은 요다 9단이 미세하게 앞선듯 보였으나 검토실의 프로들이나 관계자들은 창호의 승리를 믿었다. 반집이나 한집반 차이라면 끝내기의 귀신 이창호가 따라잡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믿었다. 창호도 그걸 기대했다.

하지만 요다는 조금도 밀리지 않고 버틴 끝에 1집반을 이겨냈다. 창호에게 밀리지 않는 끝내기 솜씨를 보인 요다의 모습이 이순간 한국 프로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요다가 한국기사들에게 강자의 이미지로 군림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창호의 천적 요다 노리모토>

 

창호가 요다에게 계속 밀린 것은 요다에 대한 오판 탓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창호는 요다의 겉모습과 그의 대국자세(돌로 판을 깨져라 내리 찍는)에서 강렬한 첫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요다는 겉모습과 전혀 다른 기풍을 지닌 사람이었다..

훗날 이창호 9단, 유창혁 9단과 함께 요다 9단에 대해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 요다는 공격적인 바둑인가.

"천만에. 전혀 그 반대다." (유창혁 9단)

- 요다는 매우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이는데.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의 바둑은 균형이 잘 잡힌 교과서적인 정법을 구사하는 바둑이다." (이창호 9단)

- 특별히 강한 대목은 어디인가.

"특별히 강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기초가 좋고 모양이 좋다. 대체적으로 수비형이며 유리한 바둑을 닦아내는 솜씨도 좋다." (이창호 9단)

- 약점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사나운 접전을 피하고 격렬한 승부를 꺼리는데 있다고 본다. 조훈현 9단이 나중에 그 약점을 캐치하고 '흔들기'로 나가 승리한 것이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유창혁 9단)

 

<첫인상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이창호>

'흔들기'란 말은 1994년 조훈현 대 요다의 동양증권배 결승전 때 등장한 말이다. 당시 TV 해설을 맡았던 필자가 처음 사용했다고 생각되는데 曺 9단이 침착하고 수비적인 요다 9단을 처음부터 공격적이고 사나운 행마로 자극하여 본연의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창호는 '흔들기'와는 거리가 먼 기풍의 소유자. 더구나 첫 인상의 강렬한 영상 탓인지 아직도 그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한채 창호는 요다에게 계속 끌려다녔다.

생각하면 창호와 요다와의 천적(天敵)관계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잘 지는 창호이고 외국에 나가면 잘 지는 창호이기에 요다와의 첫 대결에서 1대 3으로 패배한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창호는 두번째 만나면 거의 다 이겨내는 사람이기에 '전략의 명수'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그런데 이런 창호의 능력도 요다에게는 철저히 가로막혔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창호지만 가끔 "요다 9단을 만나고 싶다."고 쓰라린 마음을 토로하곤 했다. 수많은 기전에서 승승장구하면 할수록 한쪽에서 요다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러나 요다와의 전적은 1990년대 후반까지도 1승 6패로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언젠가 李 9단에게 그점을 물어봤다.

 

- 유독 요다(依田) 9단에게 성적이 그토록 나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반드시 이기려고 하니까 더 이겨지지 않았다. 이유라면 그것이 이유일 것이다."

<요다에 대한 강렬한 승부욕>

 

승부욕이 문제였다고 李 9단은 말하고 있다. 위기십결(圍棋十訣)의 첫머리에 나오는 부득탐승(不得貪勝)이란 글귀가 절로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꼭 그뿐일까. 최초에 요다를 만났을 때 창호가 심리적으로 위축감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마음의 동요를 부르고 마음의 동요는 패배를 부른다. 그리하여 첫 대결에서 1승 3패. 그 이후엔 좀더 훌륭해진 실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 숨은 모종의 그림자가 승리를 방해한다. 부담감과 승부욕에 어깨가 굳어버린다. 그리하여 1승 6패, 다음은 2승 7패. 이런 식으로 흘러왔던 것은 아닐까.

이창호란 이름은 마주앉은 누구에게나 강한 최면작용을 한다. 그러나 이창호 대 요다의 대결에선 입장이 바뀐다.   

이창호는 '돌부처'란 별명 그대로 선천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지만 요다 노리모토란 천적만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이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창호 9단이 조치훈 9단을 이기고 趙 9단은 依田 9단을 이기고 依田은 이창호를 이기는 관계는 매우 흥미롭다.  

승부와 마음의 관계는 이렇게 묘하다. 서봉수 9단은 중국바둑에 몇번 이기더니 크게 자신감을 얻었고 이것이 중국의 고수들에게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는 배경이 된다. 이창호가 당대의 거목이라 할 조치훈 9단에게 공식대국에서 6연승을 거두고 중국의 강자 마샤오춘(馬曉春) 9단에게 10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킬러로 떠오른 요다 노리모토>

요다(依田)가 '한국킬러'가 된 것도 이창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기사들에게 무적의 강자로 뼛속 깊이 각인된 이창호를 유유히 쓰러뜨리는 요다. 신산(神算) 이창호의 끝내기에도 결코 밀리지 않는 요다. 이런 이미지는 그를 만나는 한국기사들의 심혼을 흔들어 놓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이창호 대 요다의 평생 전적을 다시 보자.

 

1991 특별대국 이창호(흑) 요다(백) 백 2집반승 롯데호텔 X

1991 특별대국 이창호(백) 요다(흑) 백 4집반승 롯데호텔 O

1991 특별대국 이창호(흑) 요다(백) 백 2집반승 일본기원 X

1991 특별대국 이창호 (백) 요다(흑) 흑 불계승 일본기원 X

1993 TV아시아 이창호(백) 요다(흑) 흑 3집반승 서울 X

1993 동양증권배 이창호(백) 요다(흑) 흑 1집반승 롯데호텔 X

1998 TV아시아 이창호(백) 요다(흑) 흑 반집승 일본 지바 X

1999 춘 란 배 이창호 (백) 요다 (흑) 백 반집승 중국 우한 O

1999 TV아시아 이창호(백) 요다(흑) 흑 2집반승 중국 텐진 X 

2000 잉창치배 이창호 (흑) 요다 (백) 흑 3집승 중국 상해 O

2000 TV아시아 이창호(흑) 요다(백) 흑 6집반승 경주 O

   * 종합전적 = 4승 7패

<이창호 대 요다의 평생전적은 4승 7패>

  

특별대국에서 1승 3패한 뒤 속기대회인 TV아시아 본선과 동양증권배 본선에서 2연패하여 1승 5패. 그 뒤로 창호는 점점 강해져갔으나 요다와는 통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벼르고 벼르던 요다를 다시 만난 것은 무려 5년 만인 1998년의 TV아시아 대회. 그러나 창호 본인의 말대로 승부욕이 앞선 탓인지 박빙의 승부 끝에 반집패를 당한다. 이리하여 1승 6패.

창호는 '역전 반집승'이 전매특허였으나 요다에게는 그의 귀신같은 추격전도 잘 먹혀들지 않았다. 

1999년 중국에서 열린 춘란배 본선에서 창호는 요다에게 극적인 반집승을 거둔다. 비로소 요다란 인물이 던진 첫인상의 그물로부터 창호가 벗어나기 시작한 것일까. 이듬해 TV아시아 결승전에선 다시 2집반을 졌으나 2000년에 들어서서는 잉창치배와 TV아시아 대회서 연승하여 총 전적을 4승 7패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창호는 아직 요다에게 빚을 다 갚지 못했다. 일본의 명인이 되어 멀리있는 요다가 요즘 세계대회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바람에 만날 기회가 적어진 것이다.

요다 노리모토란 인물은 이리하여 현대바둑사에서 독특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는 조훈현 9단에게 5승 4패, 유창혁 9단에게 6승 7패, 서봉수 9단에게 4승 1패를 거두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최강의 실력자 이창호에게 7승 4패라는 압도적인 전적을 거두고 있다.

한때 '일본의 자존심' 또는 '일본 최후의 희망'으로 불린 요다 9단. 그가 앞으로 이창호와 다시 대국할 기회는 몇번이나 될까. 3번 이상 맞붙지 않는다면 그는 이창호에게 전적이 좋은채 끝난 세계 유일의 기사로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창호, 세계대회 결승에 처음 오르다>

창호와 요다가 처음 만났던 1991년에 세계바둑계는 또하나의 사건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대는 제3기 동양증권배. 준결승에 조훈현 9단 대 이창호 5단, 린하이펑(林海峰) 9단 대 조치훈 9단, 이렇게 4명이 올랐다. 여기서 창호와 林 9단이 승리하여 창호는 생애 처음 세계대회 결승전을 갖게됐다.

9월 대만에서 결승 1, 2, 3국을 치렀는데 첫판은 林 9단이 흑으로 반집을 이겼고 둘째판은 창호가 1집반을 이겼다. 3국은 林 9단의 불계승.

16세의 나이로 세계대회 결승에까지 진출했으나 아직 무언가가 부족한 모습이었고 린하이펑이란 대가에게는 한수 밀리는 모습이었다. 창호는 그러나 林 9단과의 이 결승전 이후 승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林 9단에게 깊은 호감을 품게된다.

그리고 수줍어하는 성격임에도 창호는 林 9단에 대해서만은 스스럼없이 속마음 한조각을 내보이곤 했다.

- 처음 대했을 때의 느낌은.

" 그렇게 무겁게 느낀 경우는 처음이었다."

- 무겁다는건 바둑인가 사람인가.

" 林 9단을 말하는 것이다."

 

 

<전적은 2대 2, 승부는 최종국으로>

이창호의 바둑은 네웨이핑(攝衛平), 린하이펑(林海峰),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등의 바둑과 유사점이 있다. 창호도 젊은 시절의 林 9단이 계산에서 무척 정확했음을 잘 알고 있다. 기풍도 그렇지만 창호는 바둑을 떠나 林 9단으로부터 매우 좋은 인상을 받은듯 훗날 프로기사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林 9단을 꼽곤 했다. 林 9단이 2대 1로 리드한 가운데 1992년 1월 서울에서 결승전이 이어졌다. 4국에서 백을 쥔 林 9단은 필승의 형세를 역전당해 4집반을 졌다. TV가 생중계하는등 한국 바둑팬들의 이목이 총 집결된 가운데 1월 27일 롯데호텔에서 마지막 제5국이 열렸다. 바둑은 중반이후 흑의 우세로 시종했으나 끝내기에 접어들자 점점 미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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