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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7-04 12:01:173079 
송사(宋史) 금열전(金列傳)-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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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금 선종 원광(元光) 2, 1223), 순(珣)이 죽었다. 순이 정력적으로 정치를 하여 정무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잘 보살펴주었다. 그러나 본성이 남을 너무 시기하고 거조에 있어도 실수가 많았다. 나이 61에 11년을 참위하였으며, 정우(禎祐)ㆍ흥정(興定)ㆍ원광(元光) 등으로 개원하였다. 시호는 성효황제(聖孝皇帝), 묘호는 선종(宣宗)이며, 능호는 덕릉(德陵)이다.


아들 수서(守緖)가 뒤를 이었다. 수서의 본명은 영갑속(寧甲速), 또 한 이름은 수례(守禮)인데, 순(珣)의 셋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왕씨(王氏)이다. 처음에 수왕(遂王)에 봉군되었다가, 나중에 황태자(皇太子)로 책립되었다.


17년(금 애종(金哀宗) 정대(正大) 1, 1224), 삼베옷을 입은 어떤 남자가 승천문(承天門)을 바라보며 웃다 말고 울더니 "장상(將相)할 사람이 없어서 웃었고, 금나라가 망할 것 같아서 울었다." 하여 대신들이 중벌로 다스리기를 청하였는데, 수서(守緖)가 "근간에 조서를 내려 온 백성에게 바른말을 구하고 있는 만큼, 말이 비방에 가까울지라도 벌을 주어서는 아니 된다. 다만 궁문은 쳐다보고 웃거나 우는 곳이 아니라 하고 곤장이나 쳐서 보내라." 하였다. 송나라 국경에 접해 사는 군민(軍民)에게 방유(榜諭)를 내려 남침을 못하도록 타일렀다. 하주(夏主)가 사신을 보내어 수호를 맺었는데, '제'라 일컫고 '신'이라 일컫지 않았다.


보경(寶慶 송 이종(宋理宗)의 연호) 1년(정대 2, 1225), 포충묘(褒忠廟)를 세워 절의로 죽은 선비 열 세 사람을 제사하고, 조병문(趙秉文)ㆍ양운익(楊雲翼)을 시켜 《구경만년록(龜鏡萬年錄)》을 짓게 하였다.


2년(정대 3, 1226), 내정(內庭)에다 익정원(益政院)을 설치하고 예부 상서(禮部尙書) 양운익 등을 설서관(說書官)으로 삼아 날마다 두 사람씩 숙직을 하며 고문에 대비케 하였는데, 운익은 학식이 넓고 바른말을 잘하여 조병문과 함께 당시의 굄을 받았다.


3년(정대 4, 1227), 몽고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철목진(鐵木眞)이 하(夏)를 멸망시켰다.


정(紹定 이종의 개원) 1년(정대 5, 1228), 몽고군이 대창원(大昌原)에 침입하였는데, 제공(提控) 진화상(陳和尙)이 크게 무찔렀다.


4년(정대 8, 1231), 몽고군이 변경(汴京)을 침노하였다.


5년(애종 천흥(天興)ㆍ개흥(開興) 1232), 몽고군이 균주(鈞州)에서 완안합달(完顔合達)을 대파하고 이어 그를 죽였다. 진화상(陳和尙)이 몽고군에게"나는 금나라의 대장 진화상이다. 대창원(大昌原)ㆍ도회곡(倒回谷)의 승리도 내가 거둔 것이다. 내가 난군(亂軍) 중에 죽게 되면 남들은 나를 국가를 저버린 자라고 하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명백히 밝히고 죽으니, 이 세상에서 반드시 나를 알아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고 외치니, 몽고군이 항복시키려 하였는데 듣지 않았다. 끝내 듣지 않자 발을 자르고 입을 찢었으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굽히지 않았다


철목진(鐵木眞)이 북으로 돌아가면서 수서(守緖)에게 항복을 권유하니 수서는 조왕(曹王) 와가(訛可)를 볼모로 보냈는데, 다시 속부대(速不臺)가 와서 무려 16일간이나 밤낮으로 성을 공격하자 할 수 없이 금과 비단을 뇌물로 주었더니 그때야 비로소 퇴군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수서는 몽고군의 재공격이 두려워서 드디어 변경(汴京)의 곡식을 헤아려 다시 관직을 팔고, 백성들로 하여금 진사(進士)ㆍ급제(及第)를 사가게 하였다. 몽고가 사신을 보내와 연합으로 금을 공격하자고 제의하므로 추신지(鄒伸之)로 하여금 몽고에 가서 회보하게 하였는데, 몽고는 성공을 한 뒤에 하남(河南) 땅을 돌려주기로 약속하였다. 변경에 식량이 고갈되어 수서가 하삭(河朔)으로 떠나자, 속부대는 다시 변경을 포위하였다.


6년(천흥 2, 1233), 몽고군이 수서(守緖)를 추격하니, 수서는 귀덕(歸德)으로 달아났다. 안평도위(安平都尉) 최립(崔立)이 변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위소왕(衛紹王)의 태자 종각(從恪)으로 양왕(梁王)을 삼아 감국(監國)을 시키고 자신은 태사(太師)가 되었다. 원수(元帥) 포찰관노(蒲察官奴)가 반란을 일으켜 조정의 관원들을 무참히 죽였다. 최립이 속부대(速不臺)에게 항복하니, 드디어 후비(后妃)ㆍ종실 남녀 및 연성공(衍聖公) 공원조(孔元措), 명유(名儒) 양섭(梁涉), 의원(醫員)ㆍ공장(工匠)을 청성(靑城)으로 데리고 갔다. 속부대가 다시 종각(從恪)과 형왕(荊王) 수순(守純) 및 딸린 족속들을 죽이고, 후비 등은 화림(和林)으로 데려가는데, 도중의 고초가 지난날 휘종(徽宗)ㆍ흠종(欽宗) 때보다 휠씬 더 심하였다. 수서(守緖)가 관노(官奴)를 죽이고 왕벽(王璧)을 잔류시켜 귀덕(歸德)을 지키게 한 다음 자신은 채주(蔡州)로 갔다. 완안아호대(完顔阿虎帶)를 걸량사(乞糧使)로 보내오며, 그에게 "송나라 사람이 나를 저버렸다. 내가 변방 장수들을 계칙하였으므로 남계(南界)의 침범이 없었는데, 이제 우리의 피폐함을 틈탄다면 이는 얕은 꾀이다. 몽고가 40여 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제 서하(西夏)에까지 뻗었으니, 서하가 멸망하면 우리에게로 침입할 것이요 우리가 멸망하면 반드시 송나라로 갈 것이다. 경은 잘 이해시키라."고 타일렀는데, 조정(송(宋)을 말한다)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맹공(孟珙)과 답찰아(塔察兒)가 연합으로 서성(西城)을 함락시키니, 수서(守緖)가 시신(侍臣)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내가 큰 과오는 없었는 줄로 안다. 이제 죽어도 한될 바는 없으나, 오직 조정(祖宗)의 전통[傳祚]이 나에 이르러 끊어진데다가 그것도 과거의 황음(荒淫), 폭란(暴亂)하던 군주들이나라를 망친 것과 같이 되었으니, 이것이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다. 망한나라의 군주들이 남에게 잡혀 죽기도 하고 또는 포로가 되기도 하는데 나는 내 뜻이 벌써 결정되었으니 이와 같이 되지는 않으리라."


단평(端平 송 이종의 개원) 1년(천흥 3, 1234), 수서(守緖)가 원수(元帥) 승린(承麟)에게 위를 물려주었는데, 승린은 핵리발(劾里鉢)의 후손이며 백살(白撒)의 아우이다. 맹공(孟珙)이 서성(西城)을 탈취하자 수서가 유란헌(幽蘭軒)에서 목을 매고 죽으니, 11년을 참위하였고, 정대(正大)ㆍ천흥(天興) 등의 개원을 하였다. 홀사호(忽斜虎)는 여수(汝水)로 달려가 죽고, 발출로(孛朮魯) 등 5백여 명이 모두 따라서 죽었다. 승린이 유란헌에 들어가서 "선제께서 구업의 회복을 도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슬픈 일이로다." 하며 슬피 울고 드디어 시호를 애종(哀宗)이라 하였다. 여러 나인과 재신들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주검을 거두어다 강산(降山)으로 모시어 유골을 막 묻으려고 하는데 맹공(孟珙)이 답찰아(塔察兒)와 함께 들이닥쳐서 뼈를 나누어 갔다가 그후 대리옥(大理獄)에 감추어 두었다. 승린(承麟)도 난병에게 죽임을 당하니 금은 멸망되었다.


금은 동으로 길리미올적개(吉里迷兀的改)의 모든 야인의 국경을 다 차지하고, 북으로는 포여로(蒲與路) 이북에서 화로화당(火魯火疃)의 전적지까지를 변경으로 삼아서, 바른편으로 진주(秦州)로 돌아들어 다시 임황(臨潢)을 거쳐 북으로 천산(天山) 밖을 나오면 여기서 또 동승(東勝)을 감싸고 서하(西夏)를 스쳐 황하(黃河)를 건너서면 가주(葭州)를 밟고 적석산(積石山) 밖으로 벗어난다. 그리고 적석산 이남에서 왼편으로 꺾어들어 동으로 조주(洮州)를 넘어 위수(渭水)를 따라 대산관(大散關) 북쪽에 이르러 산줄기를 옆세우고 경조(京兆)로 들어가면 당등(唐鄧)에 닿게 되는데, 회수(淮水)의 중류를 경계로 하여 수도를 다섯이나 세우고 총관부(摠管府)를 마흔이나 설치하였으니, 이것이 십구로(十九路)이다. 여기서 산부(散府)가 9, 절진(節鎭)이 36, 방어군(坊禦郡)이 22, 자사군(刺史郡)이 73, 군(軍)이 16, 현(縣)이 6백 32였는데, 나중에 다시 군(軍)은 주(州)로, 보(堡)와 진(鎭)은 현(縣)으로 승격하여, 경(京)ㆍ부(府)의 주(州)가 무려 1백 79이고, 현(縣)은 51이 늘어났으며, 책(寨)ㆍ보(堡)ㆍ관(關)이 1백 22에 진(鎭)이 4백 88이다.


상경(上京)은 곧 안출호수(安出虎水)인데, 이름은 금원(金源)이며, 회령부(會寧府)라고도 일컫는다. 동경(東京)은 곧 요양부(遼陽府)인데, 발해(渤海)의 옛땅이다. 북경(北京)은 대정부(大定府)인데 요(遼)의 중경(中京)이다. 서경(西京)은 곧 대동부(大同府)이다. 중도(中都)는 곧 연경(燕京)인데 양(亮)이 천도를 하였고, 남경(南京)은 곧 변경(汴京)인데 순(珣)이 천도를 하였다.


국민성이 사납고 인물이 대개 억세어서 형제 자질이 모두 훌륭한 장수이고, 부락(部落) 보오(保伍)가 다같이 정예화된 부대로서, 일이 없으면 부지런히 밭을 갈아 의식을 자급하고 일이 있으면 힘을 다해 싸워서 적을 사로 잡아오며, 몸을 부지런히 하고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디고 군정의 징발이나 물자의 조달에도 한 집안의 일처럼 협력한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에 떨치고 일어나서 적은 인원으로써 많은 인원을 제압한 것이다. 그러나 전성기에 이르러서는 종족들이 시기를 하고 장수들이 딴마음을 먹어서 끝내는 멸망하고 말았다.


군제(軍制)는 기병과 보병이 똑같이 군량과 병기를 스스로 마련하고, 부장(部長)은 발근 (孛菫)이라고 부르는데, 싸움터에 나가면 맹안(孟安)ㆍ모극(謀克)이라 한다. 맹안이란 1천 장정의 장이고, 모국이란 1백 장정의 장인데 나중에 3백 호로 모극을 삼고 10모극으로 맹안을 삼았다.


형법(刑法)은, 풍속에 가벼운 죄는 버들 회초리로 매를 치고,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이나 겁탈을 한 자는 뒤통수를 쳐서 죽이는데, 가산도 몰수하여 10에 4는 관가에 들이고 나머지 6은 고한 자에게 보상으로 주며 아울러 죄인의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그리고 나중에는 수(隋)ㆍ당(唐)ㆍ요(遼)ㆍ송(宋)의 법을 참고하여 과거 제도도 설치하였으며, 또 요ㆍ송의 제도를 따라 장관은 발극렬(勃極烈)이라 하여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자는 암판발극렬(諳版勃極烈), 그 다음은 국론홀로발극렬(國論忽魯勃極烈)이라 하였는데, 국론은 귀(貴)하다의 뜻이고 홀로는 총수(總帥)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또 국론발극렬(國論勃極烈)을 두어 좌우에 앉혔는데 이른바 국상(國相)이다. 이상의 호칭은 단(亶)에 와서 관제를 개정하면서 모두 폐지하였으며, 오직 진무관(鎭撫官)을 독리(禿里)라 한 것과 오로골(烏魯骨) 밑에 소은탈타(掃隱脫朶)를 두고, 상온(詳穩) 밑에 마홀(麽忽)ㆍ습니곤(習尼昆)을 두었던 것은 폐하지 않았다. 그 나머지는 모두 요ㆍ송의 옛 제도를 따랐다.


요의 옛 풍속을 따라 중오(重五 음력 5월 5일)ㆍ중원(中元 음력 7월 15일)ㆍ중구(重九 음력 9월 9일)에 배천제(拜天祭)를 지내며, 군신(君臣)의 조복(朝服), 공복(公服)ㆍ제복(祭服) 및 후비(后妃)ㆍ명부(命婦)의 복장은 모두 송나라 제도를 썼다. 그리고 일상의 복장은 네 가지인데 띠(帶)ㆍ모자(巾)ㆍ반령의(盤領衣)ㆍ오피화(烏皮靴)와 토골건(吐鶻巾)은 검은 실로 망사처럼 비단을 짜서 만드는데, 위로 향한 모난 꼭대기를 뒤로 접어내린 다음 두 뿔에다 사방 두 치 가량의 모난 비단을 붙이고, 모난 비단 끝에다 다시 예닐곱 치 가량의 댕기를 다는데 이마까지 내려온다. 혹은 주름을 하나 넣기도 하며, 귀하고 현달한 자는 모자 꼭대기에 놓인 열십(十)의 실밥을 따라 구슬을 박는데 한 가운데에는 반드시 큼직한 구슬을 박는다. 또 댕기 가에도 구슬을 달고 수술을 맺는데 수술의 길이는 댕기의 반쯤 되어 아래로 드리워진다.


의복의 빛깔은 대부분이 희고, 3품 이상은 검은데, 좁은 소매아귀에 깃은 둥글고 소매폭은 큼직하며, 허리춤에 주름을 넣어서 치마를 타지 않았다. 그리고 가슴과 어깨받이에 더러는 금실로 수를 놓기도 하는데, 길이는 갈비뼈 중간쯤 오게 해서 말타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토골대(吐鶻帶)는 옥으로 된 것이 가장 상품이며, 금이 다음이고 무소 뼈와 코끼리 뿔은 그 다음이다. 과주정(銙周鞓)은 돈잎이 작은 것은 앞뒤에 붙이고 큰 것은 뒤에 붙이며, 양 옆에 쌍수술을 달고 네모난 매듭장식에는 골아(鶻鵝)ㆍ화훼(花卉)ㆍ웅록(熊鹿)ㆍ산림(山林) 등을 새긴다. 그리고 왼쪽에는 패(牌)를 차고 오른쪽에는 칼을 찬다.


부인의 옷은 첨군(襜裙)인데, 대부분이 감자주빛이며, 위에는 꽃가지를 수놓고, 전신에 여섯 겹의 주름을 잡는다. 웃옷은 단삼(團衫)이라 하는데 감자주빛, 또는 아청빛이나 검은 빛의 비단을 쓰며, 곧은 깃에 오지랖은 왼쪽으로 여미고, 겨드랑을 꿰맨 양 옆에 다시 쌍주름을 넣는다. 그리고 앞자락은 땅에 닿고 뒷자락은 땅에 끌리게 한다. 댕기는 적황색의 비단을 쓰는데, 늙은이는 검은 빛의 비단을 상투에 감고 옥전(玉鈿)을 꽂는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가 요의 복제이다. 시집간 여자의 옷은 붉은빛 또는 은갈색이나 연한 금빛의 비단을 쓰는데 오지랖은 마주 여미고 깃에다 채색을 넣는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

금이 처음 일어날 적에 천하에서 막강하였다. 그러나 아골타(阿骨打)ㆍ오걸매(吳乞買)가 위력으로 중국을 제압한 다음 요의 고사를 본받아 초(楚)와 제(齊)를 세워 그대로 두고 떠나갔는데도, 나라가 강하지 못해서 드디어 옛 땅(제(齊)ㆍ초(楚))을 잃고 말았다. 그 후, 단(亶)ㆍ양(亮)의 포학으로 해서 거의 무너뜨린 왕업을 옹(雍)이 다시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잘살게 하였으니 금의 운명이 1백 년이나 연장된 것도 그의 덕화가 인심에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璟)은 더 잘해 볼 뜻은 있었으나 좋지 못한 일이 날로 늘어남에 따라 민력이 고갈되어서 영제(永濟) 시대에 벌써 망할 징조가 보였고, 순(珣)이 남도(南渡)를 하고 나서는 근본을 버렸으므로 스스로 토붕지세(土崩之勢)를 불렀다. 수서(守緖)는 나라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다 끝내는 죽었으니,"한나라의 군주라면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도리를 다한 사람을 이제 비로소 보았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할 만하다.


[주D-001]빈철(賓鐵) : 단단하게 제련된 쇠인데, 요의 별호가 빈철이었으므로 이른 말이다.[주D-002]불골(佛骨) : 석가불(釋迦佛)의 뼈로, 즉 사리(舍利)를 말한다. 《法苑珠林》[주D-003]《숭문총목(崇文總目)》 : 송(宋) 왕요신(王堯臣) 등이 인종(仁宗)의 칙령을 받아 편찬한 서목으로서, 당시 소문(昭文)·사관(史館)·집현(集賢)·비각(祕閣) 4관의 장서 3만 6백 69권의 서명이 수록되어 있다.《四庫全書提要 史部目錄類》[주D-004]구종법(區種法) : 영농의 한 방법인데, 오늘날의 점파법(點播法)과 비슷하다. 즉 밭 한 이랑을 1자[尺] 5치[寸] 간격으로 1자 깊이의 구덩이를 판 다음 인분 및 퇴비를 넣고 씨를 심는 방법이다.《農政全書 農藥訣 田制》[주D-005]승음인(承蔭人) : 과거에 의하지 않고 아버지 및 할아버지의 공훈으로 얻은 벼슬, 즉 음관(蔭官)을 말한다.

- 출전 : http://history-backup.tistory.com/entry/(역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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