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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9-11 12:08:584651 
바투가 세운 Golden Horde 제국의 영역
운영자


바투 (Batu ; 1207 ?~1255)




킵차크한국의 제1대 군주로서 칭기즈칸의 손자로서 1227년 칭기즈칸의 맏아들인 아버지 주치[朮赤]의 영지를 계승하였다. 당시 칭기스칸의 호레즘 원정에 동참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몽골로 귀환하지 않고 시르다리아 강 이북의 카자흐 초원 동반부에 눌러 앉았던 큰아들 주치는 칭기스칸의 여러 차례에 걸친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채 이 지역에 나름대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장차 240년 동안 러시아를 지배하게될 킵착 한국의 바탕이 되는 주치 울루스의 터를 닦은 것이다.


오고타이가 대칸에 올랐을 때 이미 주치는 사망하고 없었고 이 지역은 그의 둘째 아들 바투가 아버지의 유업을 받들어 통치하고 있었다.




1236년에 유럽 원정의 총지휘관이 되어 먼저 우랄강을 건너 킵착 대초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킵착이란 카스피해와 흑해 그리고 카프카즈 일대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도나우강에 이르는 광대한 서북 유라시아의 대초원지대로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투르크계의 유목민들이 크고 작은 집단을 이룬 채 갈라져 살고 있었다. 러시아는 자신들을 끊임없이 괴롭혀 온 이 투르크계 종족을 뽈로베츠(Половеч)라 불렀다. 몽골군의 첫 희생자는 볼가 강변에 사는 볼가르인들이었다. 투르크계가 7세기에 세운 볼가르는 강을 이용한 교역이 발달된 나라였다. 같은 시기인 7세기(681년)에 발칸반도 남동쪽에다 지금의 불가리아의 기원이 되는 제1불가리아 제국을 세웠던 볼가르인들과 같은 투르크계 종족이다. 몽골군은 첫 상대인 이 볼가르를 쉽게 제압했다. 몽골군은 저항하거나 혹은 달아나는 킵착인들을 손쉽게 제압하고 그들의 대부분을 그들의 기마 군단으로 흡수했다. 전쟁을 하면서 군사가 늘어나고 힘이 더 강해지는 몽골군의 특성이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원정 출발 당시 5만 명 남짓 되던 몽골군은 순식간에 15만 명으로 세배나 늘어났다.



몽골군은 루시의 여러 공국(公國)들을 공략하였다. 몽골군이 루시로 들어서서 첫 번째로 마주친 상대는 북 볼가강 유역에 있는 랴잔 공국이었다. 1237년 12월, 몽골의 푸른 군대는 혹한 속에 얼어붙은 볼가강의 하천을 이용해 랴잔공국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 전통의 도시와의 첫 전투는 몽골군에게는 어렵고 힘든 싸움이었다. 랴잔 공국은 몽골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되고 온 국토가 황폐화됐지만 바투군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랴잔의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도시 방어에 참가해 용감하게 싸웠다. 전투 엿새째 되는 날에야 몽골군은 파벽기로 겨우 성벽을 깨뜨리고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벌어진 상황은 참혹함이 극치를 이루는 학살극 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면서 도시 안에 살아 남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서 죽은 사람을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치 있는 고전으로 여기고 있는 ‘바투의 랴잔 공격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이다.




이 전투에서 몽골군도 수천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당시 몽골 장수는 바투에게 랴잔 전투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독하고 끈질기게 저항하는 용감한 자들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날개가 달린 듯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도무지 두려움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몽골군 침공의 첫 희생물이 된 라쟌은 9세기 초 스칸디나비아 상인들이 교역도시로 세운 루시의 가장 오래된 초기도시 가운데 하나다. 랴잔은 모스크바에서 동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볼가 강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는 인구가 60만 명 정도에 이르는 중소도시다.




바투의 원정군은 랴잔을 뒤로하고 북쪽으로 전진을 계속했다. 1237년과 1238년 사이의 진행된 이 작전은 혹한의 한겨울에 진행됐다는 점이 주목된다. 몽골의 원정군은 러시아를 상대로 혹한의 겨울에 연전 연승함으로써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이루지 못했던 위업을 이루었다. 러시아의 최대 무기가운데 하나인 혹한도 몽골군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몽골의 기마 군단은 얼어붙은 강과 하천을 이용해 목표물에 훨씬 쉽게 접근 할 수 있었다. 이들은 겨울에 러시아를 패퇴시킨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여기에 모스크바까지 포함됐지만 당시 모스크바는 아직은 나중에 크레믈린이라고 불리게 되는 성채만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에 불과해 몽골군이 크게 안중에 두지 않았다. 모스크바를 쉽게 장악한 몽골군은 황금의 고리의 중심도시 블라디미르를 공략했다. 당시 도시는 10미터 높이의 성곽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몽골군은 성 주위를 포위하고 투석기 등을 통해 밤낮으로 공격하며 성안의 사람들을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고 결국 성벽을 허물어뜨리고 들어가 이 도시를 함락했다고 카르피니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전투와 관련한 내용은 당시 볼가강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하고 있었던 도미니크회 수도사 유리앙의 정보 보고서에도 나타나고 있다. 헝가리의 베라 4세를 통해 바티칸까지 전달된 보고서에는 몽골군이 크게 3개 집단으로 나뉘어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는 것과 공격은 겨울에 얼음이 얼어 기마 군단이 이동하기 좋은 때에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인근의 수즈달리, 로스토프, 야로슬라블리 등도 블라디미르와 크게 다르지 않게 몽골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당시의 상황을 러시아의 연대기들은 몽골군의 잔혹한 행위를 오랑캐, 강도, 살인마 등 극단적인 표현을 동원해가며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모스크바 인근 지역을 장악한 바투 원정군의 다음 목표는 노보고르드였다. 노보고르드는 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530Km 떨어져 있고 당시에는 도시가 생기기 전이기는 하지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따지자면 남쪽으로 180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키예프 다음가는 강력한 공국이었던 노보고르드는 그러나 해빙기가 찾아오면서 겨우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혹한의 겨울동안 폭풍처럼 몰아치던 몽골군은 오히려 해빙기를 맞아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질척거리는 진창길이 오히려 전진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록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몇 달간의 연이은 전투에서 몽골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고 병사들도 상당히 지쳐 있었다. 바투는 전열의 재정비와 함께 병사들에게 휴식을 줘야할 필요성도 느꼈다. 그래서 방향을 남쪽으로 되돌려 킵착 초원지대로 되돌아갔다.




바투의 원정군이 원기를 회복해 다시 루시 원정에 나선 것은 1년 남짓이 지난 1239년이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인 루시의 남부와 서부지역을 점령했던 바투군은 1240년 가을, 대군을 이끌고 키예프로 접근해 들어갔다. 키예프는 바투가 최후의 목표로 삼았던 곳이다. 키예프는 루시, 즉 ‘러시아 모든 도시의 어머니’로 불리어지는 고대 러시아 민족체의 요람이었다. 훗날 러시아 제국을 이루는 중심 종족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백러시아인은 모두 여기에서부터 형성돼 나왔다. 3백년 이상 지속된 키예프 러시아는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이자 종교의 중심지로 11세기와 12세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도시가운데 하나였다. 이 시대의 연대기 작가 아담은 키예프를 가리켜 “동방의 자랑이요, 콘스탄티노플에 필적할 만 하다”고 기술했다. 몽골군 공격 당시 비록 키예프가 약화의 길을 걷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루시의 중심도시로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러시아 정벌을 마무리지은 몽골의 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동유럽 쪽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동유럽으로 기수를 잡은 몽골 연합군은 두 개의 진로를 택했다. 하나는 폴란드 , 다른 하나는 헝가리였다. 차가타이의 손자 바이다르와 카이두가 이끄는 별동대는 1241년 4월 리그니츠 평원 부근 발슈타드라는 곳에서 폴란드와 독일기사단의 연합군과 마주쳤다. ‘리그니츠 전투’ 또는 ‘발슈타드 싸움’으로 알려져 있는 전투다. 당시 유럽은 교황과 황제들이 분쟁을 하고 있었고 각 지역이 봉건영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 구성이 어려웠다. 그래서 리그니치공이 독일 기사단과 연합해 몽골군에 대항했다. 장비와 전략적인 면에서 아주 대조적인 두 집단의 싸움에서 몽골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왈발타드란 독일어로 사체의 마을이라는 의미로 이 전투 결과 너무나 많은 병사들이 죽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전투의 결과 폴란드는 거의 몽골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같은 시기에 바투와 수베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3개의 부대로 나뉘어 헝가리로 공격해 들어갔다.




사요강에서 맞붙은 몽골군과 벨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의 치열한 전투 역시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와 전투 이후 벌어진 몽골군의 잔혹한 징벌행위는 헝가리 측의 기록과 페르시아 사서에 남아 있다. 그 내용은 역시 러시아 연대기와 마찬가지로 잔혹함의 극치를 이루는 내용들이다. 이후 계속적으로 몽골군의 승전이 이어졌다. 부다와 페스트라는 두 도시까지 몽골군에게 함락되면서 헝가리는 몽골군에게 거의 점령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서유럽이 몽골군의 침공에 곧바로 대응하고 나서야할 상황이었다.




1241년 7월, 도망간 헝가리의 벨라 4세를 뒤쫓아 비엔나 교외의 노이슈타드까지 접근해 들어갔던 바투의 군대는 그 해 겨울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넜다. 이제 서유럽과 몽골군의 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동유럽이 무너지면서 독일과 이탈리아 등은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도망 나온 피난민들로 넘쳐 났다. 서유럽 전체가 공포의 도가니 속에 빠져든 것은 당연했다. 유럽의 단결을 주장한 프레드리히 2세 외에는 누구도 적극적인 대응을 엄두도 내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몽골군이 진격을 멈췄다. 서유럽에게는 신의 축복이 내린 것이다. 이때가 1242년 3월로 몽골본토로부터 바투에게 오고타이가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귀환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거친 바람을 유럽 쪽으로 몰아가던 몽골의 푸른 군대는 말머리를 돌려 동쪽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놓였던 서유럽은 이 예기치 않은 상황발생으로 파멸직전에 무사히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몽골군의 주력부대가 서둘러 본토로 돌아가는 동안 바투는 헝가리 등을 유린하면서 여유 있게 볼가강변 본영지로 회군했다. 이어 킵착한국을 추스려 앞서 언급한 러시아 지배를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한순간의 악몽처럼 스쳐간 몽골군이 유럽지역에 남겨 놓은 것은 공포였다.













여기서 킵착한국은 분명히 몽골제국의 연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몽골의 일원임에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 실체는 소수의 몽골인들이 다수의 킵착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특이한 형태였다. 굳이 말한다면 몽골-투르크 유목민족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초 주치가 아버지 칭기스칸으로부터 받은 4개의 천호(千戶)를 받았다. 그러니까 4천명의 몽골인들이 주치 울루스에 소속됐다는 얘긴데 러시아 유럽 정벌 과정에서 다소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그 수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각 집단의 상층부를 형성하면서 정복지에서 흡수한 많은 투르크계 킵착인들을 거느렸다. 그래서 킵착한국은 소수의 몽골인이 지배하는 다수의 투르크계 집단이 된 것이다.




바투 일가의 몽골인들은 몽골 본토와 분리돼 사실상 별개의 집단으로 이 지역을 통치했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서 이들 투르크계통의 종족들에게 흡수 동화되면서 급속히 투르크화돼 갔다. 바투가 숨진 뒤 킵착한국을 맡은 동생 베르케는 종교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후 서북 유라시아 지역은 투르크계 이슬람 지역으로 변해간다. 그렇다고 해서 킵착한국을 몽골이 아니라고는 얘기할 수가 없다. 민족과 종교를 초월하는 것이 몽골제국이 지닌 특성이었고 러시아로부터 타타르라 불리는 이들도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투의 러시아 정벌이후 16세기 중반 모스크바의 이반 4세가 아스트라한국과 카잔한국을 흡수하면서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단절시킬 때까지 240년 동안 킵착한국은 크고 작은 지역으로 분리되기도 하고 권력의 이양 과정도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그 복잡한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다. 대신 어느 정도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킵착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지배 방식과 그 것이 러시아의 국가 형성이나 미래에 끼친 영향은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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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대백과사전>참고

"http://ytn.co.kr/new_httpd/column/mongol/mongol_read225.asp"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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