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중국사
1. 선사
2. 삼대
3. 춘추전국
4. 진한
5. 위진남북
6. 수당오대
7. 송요금원
8. 명청
9. 국공
10. 인민공화국
11. 통사
· 오늘 :  20 
· 어제 :  58 
· 최대 :  2,389 
· 전체 :  1,509,394 
 
  2006-08-05 23:11:295291 
송과 요의 투쟁
양승국

송과 요의 투쟁





① 거란의 남진과 후진의 연운16주 할양





송과 거란(요)과의 국제관계를 고찰하는데 있어 거슬러 올라가 우선 오대 각 왕조와 요의 관계를 살펴보자.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재위 916~926)는 발해를 무너뜨리고(926년) 영역을 동방으로 넓히는 한편, 중국으로의 남진을 시도하여 연국(유주, 지금의 북경)의 유인공(劉仁恭)․유수광(劉守光) 부자를 공격하여 후량(後梁)과 진(晋, 후당)과의 다툼을 틈타, 난하(灤河) 유역의 평주․난주․영주 등 여러 주의 땅을 빼앗고, 중국진출의 발판을 쌓았다.


후당과 거란의 사이에는 전쟁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후당황제 이종가(李從珂, 폐제)는 하동절도사 석경당(石敬瑭)과 사이가 나빴다. 이종가는 석경당이 진양(산서성 태원시)에 있는 것을 불리하다고 여겨 이를 천평(산동성 동평현 부근)으로 진을 옮기게 하려고 했다. 석경당은 거란과 결탁하여 이에 대항하려고 했고, 거란에 대하여 신(臣)이라 칭하여 원조를 구하여 토지할양으로서 이에 보답할 것을 약속했다.


거란의 태종(재위 926~947)은 이 부탁을 받아들여 친히 대병을 이끌고 남하하여 진양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때 내공중인 후당군을 격파하고, 석경당을 세워 황제로 하고, 황하를 건너 낙양을 함락, 후당을 무너뜨렸다.(936년) 석경당의 나라가 후진이고 경당은 후진 고조(재위 936~942년)라 불린다.


거란은 다음해 국호를 중국풍으로 바꾸어 대요라 칭했다.(이후 성종의 983년 국호를 다시 거란이라고 했고, 다시 도종 1066년에는 대요라 고쳤다)


석경당이 후당에 대신하여 후진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거란의 원조덕분이었다. 석경당은 약속따라서 중국의 동북쪽의 구석인 연운(燕雲)16주(연(燕) 즉, 지금의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유주(幽州)․계주(薊州)․영주(瀛州)․막주(莫州)․탁주(涿州)․단주(檀州)․순주(順州)․신주(新州)․규주(嬀州)․유주(儒州)․무주(武州)의 11주와, 운(雲) 즉 지금의 대동지방의 운주(雲州)․환주(寰州)․응주(應州)․삭주(朔州)․울주(蔚州)의 5주)를 거란에 할양하고 매년 금백 30만을 바치게 되었다.


석경당은 거란에 공손히 따랐고, 거란은 점점 오만한 태도로 후진을 대했다. 후진중에는 이에 분개하여 , 신복(臣服)에 반대하는 자도 있었다. 이윽고 고조가 죽고 소제(少帝, 재위 942~946)가 즉위하자, 후진은 신이라 칭하는 것을 그만두고, 손(孫)이라 칭하여 거란에 상을 알렸다. 재상인 경연광(景延廣)의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


거란의 태종은 전례와 다른 것을 책망했다. 경연광은 불손한 말로 이에 대답하고, 진국영내에 거주하는 거란상인을 죽였다. 이에 태종은 남침을 결의하고, 946(후진 개운3․요 회동9)년, 거란군은 먼 거리를 남하하여 황하를 건너, 진의 수도 변경(하남성 개봉시)을 함락하고, 소제를 포로로 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그래서 소제는 출제(出帝)라고도 불린다.


하동절도사인 유지원(劉知遠)은 진양에서 즉위하여 후한을 세우고, 거란군을 치려고 했다. 그러자 거란군은 북으로 철수하여 , 유지원(고조)는 변경으로 들어갔다. 고조유지원의 아들인 은제(隱帝)는 실권을 장악한 곽위(郭威)에게 공격받아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곽위는 남당과 결탁하여 후한을 공격하려고, 남하한 거란을 막기 위하여 전주(하북성 복양현)에 이르러 병사들에게 옹립되어 제위에 오르고 후주를 세웠다.(951년)


후한 은제의 숙부인 유숭(劉崇)은 진양에 있었으나 곽위(태조)가 후주(後周)을 세우자, 그도 나라를 세워 북한(北漢)이라 했다. 유숭의 북한은 늘 거란과 결탁하여 곽위의 후주와 대항했다.


후주의 제2대 세종은 천하통일의 길을 착착 진행하여 , 959(후주 현덕 6․요 응력 9)년에는 거란과 싸워 연운16주의 회복의 첫걸음으로 영주․막주의 2주를 손에 넣었으나 병에 걸려 뜻을 모두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통일의 대업은 송의 태조에 의하여 이어졌다.





② 연운16주의 회복을 지향한 송의 대요(對遼)전쟁





북한은 유숭의 자손이 왕위에 있었으나, 거란은 항상 이를 도와 송에 대항하였다. 처음 송 태조(재위 960~976)는 남방의 남당공략에 주력을 기울였고, 그 전력을 북방으로 향하게 하지 못했으나, 태종에 이르러 979(송 태평흥국4․요 건향원)년, 친히 북한을 정벌했다. 그리고 거란의 원군을 격파하고 진양(산서성태원시)을 포위하고 북한국왕 유계원(劉繼元)을 항복하게 했다.


이리하여 오대이래의 지방독립정권은 하나하나 평정되어 송에 의한 전국통일의 대업은 거의 이루어졌다. 연운16주의 회복은 통일이라는 용을 그리는데 눈동자를 찍는 효과를 거두는 것이 되었다.


연운 각 주를 이민족 거란에게 빼앗긴 것은 중국으로써 큰 상처가 되었다. 우선 첫번째로 그것은 중국의 체면(面子)에 관계되는 문제이다. 이 지방은 옛날부터 중국의 영역으로서 한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을 한민족에게 있어 오랑캐인 거란의 손에 넘겨준 것은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천시하는, 화이(華夷)를 구별하는 중화적 명분론에서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두번째로 중국국토를 북적(北狄)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전략상의 큰 손실이었다. 북변의 장성(長城)선 일대의 산맥은 외적침입으로부터 중국을 방어하는데 천연의 요충지였다. 이 장성선을 남으로 넘은 연운16주지방을 적의 손에 장악당하고, 장성선상의 전략적 요지인 여러 관을 지배당하고 있는 것은 중국에 있어 국토방위상 중대한 결함을 가지는 것이었다. 오히려 거란측에 있어서는 이 지역이 중국내지를 엿보는데 있어서 중요거점이었던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송에 있어 연운 각 주의 회복은 국가적 과제였고, 또 통일을 완성시키는 최종단계이기도 했다. 즉 송의 태종은 북한을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거란군과 싸우고 역주․탁주를 빼앗고, 이어 유주를 포위했으나 패퇴했다. 이후 양군의 공방은 10여 년에 이어졌다.


그런데 당시 거란의 동쪽에서는 발해의 남은 무리들이 압록강, 동가강(佟佳江)유역에 안정국(安定國)을 세워 고려와 함께 송과 교통하고 있었고, 이러한 위협때문에 거란은 전력을 다해 송과 대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란의 성종(재위 982~1031)은 우선 안정국을 정복하고(994), 고려를 복종시키고, 대송침입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편 송측에서는 이 무렵 서북변에 당항(탕구트)족이 일어나(후술), 이것이 송의 근심이 되었기 때문에 거란으로의 공세를 저지당하고 있었다. 탕구트의 이씨가 거란의 책봉을 받아 이와 결탁한 것은 거란의 남침을 재촉하게 되었다.


999(송 함평2․요 통화17)년, 거란의 성종은 송을 치라는 조서를 내리고 송의 북변을 침입했다. 이로부터 해마다 두나라는 일전을 벌였는데, 1004(송 경덕원․요 통화22)년에 이르러 성종은 대거 남진했다.


송의 진종(재위 997~1022)은 군신을 소집하여 대책을 의논했다. 왕흠약은 금릉(金陵, 강소성 남경시)로의 행행(行幸)을, 또 진요수는 성도(사천성 성도시)로의 행행을 청했다. 제는 나아가 재상 구준의 의견을 구했다.


구준은 이같은 퇴피 소극책을 권하는 자를 모조리 죽인 후 북벌의 친정군을 보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진종은 이 구준의 방책을 채용했다.


거란군은 나아가 정주를 공위했다. 구준은 망설이는 진종을 격려하여 전주에 이르렀고, 황하를 건너 20만이라고 하는 거란의 대군과 대치했다. 황제의 친정․전선출동을 맞이하여 송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다.





③ 전연(澶淵)의 동맹





한편, 거란과 송사이에는 외교교섭도 계속되고 있었다. 거란은 송의 사절 조이용(曹利用)에 대하여 관남(關南)의 땅(후주의 세종이 회복한 와교관(瓦橋關), 익진관(益津關) 이남의 지역)을 반환할 것을 주장하고, 송측에서는 진종은 토지의 할양은 승인하지 않고 화재(貨財)를 주는 것으로 거란을 납득시키려고 하여 , 구준은 더욱 강경하고 화재를 주는 것에도 반대하고 거란으로 하여금 신이라 하고 유계(지금의 북경지방)을 헌납할 것을 주장했다.


즉 이렇게 하는 것에 의해서만 백년의 평화를 지킬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수십년 후 또 다시 거란이 다른 마음을 품게될 것이라고 하였다.


진종은 수십년 후의 일은 그때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현재의 다툼을 그쳤고 인민의 괴로움을 덜기 위하여 화평을 구하고 싶다고 했으나 구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송의 내부에는 이 강경한 구준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며 “구준은 전쟁에 의지하여 자신의 권력확대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자가 생겨났다. 구준은 어쩔 수없이 화평에 찬성했다. 그러나 조이용을 거란군에게 파견하는데 있어서 진종이 “화평이 실현되면 백만의 재물을 주어도 좋다”고 말한 것을 들은 구준은 조이용을 불러 이렇게 전했다.


“황제께서는 백만을 주어도 좋다고는 하셨지만, 30만을 넘는 것은 허용하지 않겠다. 그 이상의 세폐로 화평을 맺고 돌아오면 그대를 죽이겠다”


조이용은 거란군 앞에 가서 절충하려 했다. 거란은 관남의 땅을 강하게 요구했으나 조이용은 단호히 이를 물리치고, 금백을 보내는 것으로 화평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전연의 맹이라고 한다.(전연은 전주의 옛 명칭) 맹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경은 변경하지 않는다.(관남의 땅은 송의 소유로 하고, 관이북의 땅은 거란의 소유로 한다.)


(2) 송은 형, 거란은 동생의 예로서 교제한다.


(3) 송은 세폐(매년의 선물)로 은 10만량, 비단 20만필을 국경인 웅주(雄州, 하북성 웅현)에서 거란에 교부한다.


양국 황제간에 맹세의 글이 교환되고, 성호는 옛날 것으로 하고 새로이 만들지 않을 것, 또 수로를 개굴하지 않을 것을 상호간에 맹세하고 있다. 이후 매년 황제의 탄생일․원단(元旦)에는 서로간에 사절을 파견하여 축의를 표시하는 것이 상례가 되고, 송은 국신사(國信司)를 설치하여 거란과의 외교사무를 담당하게 하고, 국서에는 스스로 남조라 칭하고 거란을 북조라 불렀다.


전연의 맹은 서로 주장을 타협절충한 외교교섭의 산물이다. 거란은 관남의 땅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고 실리를 취했으므로 송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할 수 없는 거란의 실력의 현상에서 본다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송은 연운지방 회복의 숙원을 이룰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거란을 신복시키지도 못하고, 그 중화적 자존심이 상하게 되었는데, 겨우 동생에 대한 형이라고 하는 명목적 우위를 차지한 것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화평실현에 의하여 수렁과 같았던 오랫동안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보면 송에 있어서도 이익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④ 서하의 발흥과 요송의 화평유지





전연의 맹에 의하여 송․거란 양국간의 관계는 일단 안정되었고, 40여 년 동안 매년 사절을 정기적으로 보내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1042년(송 경력2․요 중희2) 3월, 거란은 맹약을 바꾸어 관남 땅의 할양을 송에 요구했다. 때마침 탕구트의 이원호(李元昊)가 대하황제를 칭하고 활발히 송의 서북경을 침입하고, 송은 이에 대하여 실파적인 방위전을 벌이고 있었고, 거란은 이러한 송의 어려움을 노린 것이었다. 거란의 황제는 성종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흥종(興宗, 재위 1031~1055)이었다.


흥종은 소특말(蕭特末)․유육부(劉六符)를 송에 보내어 관남 10현의 땅을 요구했고, 또 군대를 동원하여 숭에 압력을 가하면서, 서하토벌의 이유를 묻고, 연변에서 수택을 쳐내고, 수로를 연 것, 수비군을 증강한 것을 비난했다.


송의 인종(재위 1022~1063)는 부필(富弼)을 사절로서 거란으로 보내어 교섭을 하게 하였다. 부필은 흥종과 만나, “전쟁은 신하의 이익을 가져오는데 지나지 않고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군주의 이익입니다”고 주장하고 “관남 10현을 할양하면 거란은 땅을 얻고 영예를 누릴 수 있겠지만, 송은 땅을 잃고 치욕을 당할 것입니다. 형제의 나라가 한쪽은 번영하고, 한쪽은 치욕을 받는 결정으로는 화평은 유지할 수 없습니다. 거란이 요구하는 것은 10현의 조부(租賦)이므로, 그것을 위해서는 세폐증가를 고려하겠습니다”


이런 뜻을 제안하고 거란도 증폐로 만족하는데 동의했다. 단 거란은 송의 공주(황녀)를 거란으로 시집보내는 것을 제안했으나 부필은 혼인은 금후 양국의 분쟁의 원인이 되고, 지참금도 10만민(緡)에 지나지 않는다. 세폐를 증가하는 것으로 거란은 영원한 이익을 얻을 것이라 주장하여 거란의 공주요구를 단념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세폐를 은견 각 10만씩 증가시키고, 송은 은 20만량, 비단 30만필을 매년 거란으로 보내는 것을 결정하고, 양국간에 맹세의 글이 교환되고, 전연의 맹에 의하여 수립된 통호화평의 관계는 이후에도 계속되게 되었다.


이 증폐에 대하여 이를 송의 저자세의 결과라고 비난하고 거란이 허세를 부려 송을 협박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재상인 여이간(呂夷簡)이 이를 두려워 하여 과도한 양보를 하고, 오랜 해를 남겼다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송은 서하의 침입에 괴로워하고, 그 대응에 조야에 걸쳐 바쁜 시기였고, 양면 작전은 도저히 불가능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 양보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영토할양․공주출가 등을 물리치고, 증폐를 허락한다고 하는 사실 하나로 거란을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을 높게 평가해야만 할 것이다. 즉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부필의 의연한 태도와 뛰어난 외교수완의 덕택이었다.








2) 송과 서하





① 송초의 탕구트족 탁발(拓拔)이씨





앞에서 말했듯이 송은 북방에 강적 거란(요)을 두면서, 서북방에 신흥의 서하도 적이었다. 이 두 적에 대하여 송은 끊임없이 긴장한 자세와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서하는 티벳계 탕구트족이 세운 나라로 섬서의 변두리, 즉 오르도스에서 은천시(銀川市) 지방을 포함하고, 감숙전체에 걸친 지역을 영토로 하였다. 그들 탕구트족은 원래 사천변두리의 동부 티벳지방(사천성 서북부)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대금천(大金川)과 아롱강(鴉礱江) 상류지역 일대에서 황하 상류지방에 걸친 산지로, 많은 부족으로 나뉘어져 생활하고 있었다.


7세기초 티벳본지(부라마프토라강 상류 찬포강 유역)에 손첸감포의 티벳족의 나라(吐蕃, 티벳)이 창건되고, 세력을 확대하자, 탕구트족의 일부는 이에 복속하였지만 탁발씨 등 여러부족은 티벳의 압력을 피하여 동북방으로 이동하고, 8세기 중엽에는 섬서 변두리에 이르고 이동을 계속하여 오르도스로 갔다.


오르도스로 들어간 탕구트족의 중심을 이룬 것은 오르도스남부의 하주(夏州)에 의거한 탁발씨로 평하부(平夏部)라 불리었다. 9세기 후반, 탁발사공(拓拔思恭)은 스스로 자사(주의 장관)를 칭하고 황소를 친 공이 있어, 당은 이를 칭찬하여 절도사의 직책을 주고 이(李)씨성을 하사했다.


탈발사공이후, 당말․오대기를 통하여 탕구트의 탁발이씨는 정난군 절도사로서 그 세력을 하주에 확립하고, 하주(夏州)․수주(綏州)․은주(銀州)․유주(宥州) 각 주 즉, 오르도스에서 섬서북부에 걸친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하주의 탁발이씨는 송대가 되어서도 사실상 독립해 권력을 오르도스지방에 유지하고 있었다. 송의 태조는 이이흥(李彝興)에게 태위의 자리를 주어 수무(綏撫)하는데 노력했고, 그 아들 이광예(李光叡), 이광예의 아들 이계균(李繼筠)의 3대를 통하여 송과 하주 탁발씨는 우호적 관계에 있었다. 이것은 산서에 북한이 있어 송의 적이 되어 있었고 송은 북한견제를 위해 이씨와의 화친을 이롭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씨는 종종 북한군과 싸웠고 979년, 송의 태종이 북한을 친정하여 이를 무너뜨렸을 때에도 계균은 병사를 보내어 송을 도왔다.

목록
2412
[] 명나라 왕세정이 편찬한 세설신어보

김장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 ≪세설신어≫와 ≪하씨어림≫의 결합−≪세설신어보≫ 중국 위진남북조 송나
운영자 20-03-11
[] 진순신(陳舜臣)과 야율초재(耶律楚材)

진순신(陳舜臣)과 야율초재(耶律楚材) 지난 1월21일 일본에 살고 있는 화인(華人) 작가 진순신(陳舜臣)(1924-2015)이 세상을 떠났다. 90세였다.
운영자 15-02-10
[] 거울제국(Mirror Empires)

거울제국(Mirror Empires) 서력으로 13세기 초반. 중국에서는 한(漢)족의 송나라와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을 시기. 유럽은 십
운영자 13-12-19
[] 학경(郝经)

학경(郝经) 1223년에 태어나서 1275년에 죽은 원나라 초기 때의 명유(名儒) 자는 백상(伯常)이고 조상의 원주지는 지금이 산서성 릉
운영자 13-12-19
[] 야율초재(耶律楚材)

야율초재(耶律楚材) 천하를 정벌하고, 지혜로 원나라를 돕다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야율초재는 금나라 장종 명창 원년인
운영자 13-12-19
[]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의 진상 - 송인종(宋仁宗) 생모의 수수께끼

송인종(宋仁宗) 생모의 수수께끼 :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의 진상 송인종 조정(趙楨)은 진종(眞宗)의 아들이다. 천희2년(1018년)에 왕이 되고,
운영자 13-10-13
[] 송사전( 宋史筌 ) 요열전( 遼列傳 )

송사전( 宋史筌 ) 요열전( 遼列傳 ) 야율경(耶律璟)의 어렸을 적 이름은 술률(述律)이니 덕광(德光)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그의
운영자 12-10-10
[] 송사(宋史) 금열전(金列傳)-2

16년(금 선종 원광(元光) 2, 1223), 순(珣)이 죽었다. 순이 정력적으로 정치를 하여 정무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잘 보살펴주었다. 그러나 본성이 남을
운영자 12-07-04
[] 宋史(송사) 金列傳(금열전) -1

宋史 金列傳 (<청장관전서> 제 23권 송사 금열전)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개명은 민(旻), 한성(漢姓)은 왕(王)인데, 핵리발(劾里鉢)의
운영자 12-05-22
[] 바투의 유럽 원정

바투의 원정 개요 전쟁주체 : 몽골족, 루스, 폴란드-독일(슐레지엔), 헝가리 전쟁시기 : 1236년-1242년 전쟁터 : 현재의 러시아, 폴란드,
운영자 12-01-28
[] 징기스칸의 정벌

징기스칸의 정벌 -푸른 이리의 후예들, 대제국을 세우다. - 거울제국(Mirror Empires) 서력으로 13세기 초반. 중국에서는 한(漢)족의
운영자 12-01-09
[] 대제국을 지배한 여자 기황후

훗날 세계 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한 기황후의 출발은 절망뿐이었다.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貢女)로 결정되었을
양승국 05-06-01
[] 구양수의 종수론(縱囚論)

종수론(縱囚論) 군자에게는 신의를 행하고, 소인에게는 형벌을 내린다. 죄과가 매우 커서 극에 달하면 사형에 처하는데, 이는 소인 중 특
양승국 04-12-07
[] 황천탕 싸움의 여장군- 양홍옥

황천탕 싸움을 승리로 이끈 남송의 여장군 양홍옥 서기 1130년 건염(建炎) 4년 한세충(韓世忠)과 양홍옥(梁紅玉)은 황제의 명에 따라 경구(京口
운영자 10-03-22
[] 文天祥(문천상)

文天祥(문천상) 자는 송서(宋瑞) ·이선(履善)이고 호는 문산(文山)이다. 강서성(江西省) 길수현(吉水縣) 출신이다. 1255년 20세때 진사에 수석
운영자 09-05-02
[] 청명상하도

淸明上河圖(청명상하도)는 청명 절기에 강의 주변 시가지를 구경한 것을 그린 것이라는 의미로 보면 될 것 같다. (上河(상하)의 上(상)은 구경하다라
운영자 09-04-28
[] 송과 요의 투쟁

송과 요의 투쟁 ① 거란의 남진과 후진의 연운16주 할양 송과 거란(요)과의 국제관계를 고찰하는데 있어 거슬러
양승국 06-08-05
[] 한세충과 황천탕(黃天蕩) 싸움

한세충(韓世忠)(1088~1151), 자는 양신(良臣)으로 연안(延安)사람이다. 남송 때 활약한 사람으로, 금에 대항한 명장의 한 명으로 꼽힌다. 한세충은 악
운영자 08-03-02
[] 바투가 세운 Golden Horde 제국의 영역

바투 (Batu ; 1207 ?~1255) 킵차크한국의 제1대 군주로서 칭기즈칸의 손자로서 1227년 칭기즈칸의 맏아들인 아버지 주치[朮赤]의 영지를 계승
운영자 07-09-11
[] 몽골기마군단의 유럽정벌전2-사요강전투

사요 섬멸전 (Battle of the Sajo river, April 11, 1241) 기동 유럽원정 몽골군의 총 병력은 12만 명이었지만, 순수 몽골 기병은 5만 명이
운영자 07-06-12
1 [2][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