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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전( 宋史筌 ) 요열전( 遼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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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전( 宋史筌 ) 요열전( 遼列傳 )

야율경(耶律璟)의 어렸을 적 이름은 술률(述律)이니 덕광(德光)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그의 선조는 선비족(鮮卑族)으로 모용씨(慕容氏)에게 격퇴되어 세 부족으로 나누어졌는데 거란(契丹)은 그 중의 하나이다.

당(唐) 나라 이후에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대하씨(大賀氏)라 불렀고 그 후에 다시 요연씨(遙輦氏)로 변경하였는데, 해락(楷落)이라는 이가 처음으로 왕이라 일컬었으며 흠덕(欽德)에 이르러서는 흔덕근가한(痕德菫可汗)이 되었다. 광계(光啓 : 唐僖宗의 연호)중엽에 유인공(劉仁恭)이 자주 전쟁을 일으켜 그 뒤로 점점 쇠약하여졌는데, 질랄부(迭剌部)의 우두머리로 열리(涅里)의 후예인 이리근(夷离菫) 아보기(阿保機)가 거란의 모든 부락을 다 차지하였는데 이리근이란 군마(軍馬)를 통솔하는 큰 벼슬 이름이다. 요연씨가 끝내 멸망하니 아보기가 이름을 고쳐 억(億)이라 하였다. 어릴 적 이름은 철리지(啜里只)이고 호는 세리씨(世里氏)라 하였으니, 세리가 곧 야율이며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천우(天祐 : 後唐 哀帝의 연호) 정묘년(요 태조(遼太祖) 1, 907), 황제라 자칭하였고 그 뒤 천성(天成 후당 명종(明宗)의 연호) 병술년(요 태종 1, 926)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55세이고 위를 참칭한 지 20년 만이었다. 연호를 신책(神冊)ㆍ천찬(天贊)ㆍ천현(天顯)이라 고쳤으며 시호(詩號)를 신열천황제(神烈天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조(太祖), 묘호(墓號)를 조릉(祖陵)이라 하였다.

아들 덕광(德光)이 위에 오르니, 덕광의 어렸을 적 이름은 요골(堯骨)이며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청태(淸泰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연호) 병신년(요 태종 11, 936), 석경당(石敬瑭)을 책립(冊立)하여 진제(晉帝)로 삼았다.천복(天福 후당 명종의 연호) 무술년(요 태종 1, 938), 진 나라가 유주(幽州)ㆍ계주(薊州) 등 16주를 떼어주었다.개 운(開運 후진(後晉) 출제(出帝)의 연호) 병오년(고려 정종 1, 946), 진(晉)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 이름을 대요(大遼)라 하였으며, 얼마 후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46세이고 위를 참칭한 지 21년 만이었다. 연호를 회동(會同)ㆍ대동(大同)이라 고쳤으며 시호를 혜문황제(惠文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 묘호(墓號)를 회릉(懷陵)이라 하였다.

형(兄)의 아들 완(阮)이 위에 오르니, 완의 어릴 적 이름은 올욕(兀欲)이며 인황왕(人皇王)인 배(倍)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후주(後周) 광순(廣順 후주(後周) 태조(太祖)의 연호) 신해년(고려 광종 2, 951), 찰할(察割)이 완을 시해(弑害)하니 향년이 34세이고 위를 참칭한 지 5년 만이었다. 연호를 천록(天祿)이라 고치고 시호를 장헌황제(莊憲皇帝)라 하고 묘호를 세종(世宗), 묘호를 현릉(顯陵)이라 하였는데, 사실이 《당서(唐書)》ㆍ《오대사(五代史)》에 적혀 있다. 완이 시해를 당하였으므로 경(璟)이 수안왕(壽安王)으로 위에 올라 조회할 적에 한(漢)의 예(禮)를 사용하였다.

건륭(建隆 송태조(宋太祖)의 연호) 원년(광종 11, 960), 송나라 군대가 북한(北漢)의 석주(石州)를 포위하므로 경이 아랄(阿剌)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게 하였다.

건덕(乾德 송태조의 연호) 2년(광종 15, 969), 조빈(曹彬)이 석주를 포위하므로 경이 달열(撻烈)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으나, 빈이 격퇴시켜 도망가게 하였다.

개보(開寶 송태조의 연호) 2년(광종 20, 969), 측근의 신하인 소가(小哥) 등이 경이 몹시 취한 틈을 타서 회주(懷州)에서 시해하였다. 경이 술을 즐기고 사냥을 좋아하였으며 살생(殺生)을 즐겨 살을 잘게 썰며 시체를 잘게 써는 등 형벌이 문란하여 국인(國人)들이 원망하고 따르지 않았다. 향년이 39세이고 위를 참칭한 지 19년 만이었다. 연호를 응력(應曆)이라 고쳤으며 시호를 경정황제(敬正皇帝)라 하고 묘호를 목종(穆宗)이라 하였으며 회릉(懷陵)에 부장(附葬)하였다.

둘 째 아들 현(賢)이 위에 오르니 현의 자는 현녕(賢寧)이요 어렸을 적 자는 명의(明扆)이고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겨우 네 살 되던 해 찰할의 난을 만났는데 경이 그를 양육하여 아들을 삼았더니 경이 시해를 당함에 이르러 갑기(甲騎)를 거느리고 회주에 와서 위에 올랐으며, 상서령(尙書令) 소사온(蕭思溫)의 연연(燕燕)을 들여보내게 하여 왕후로 삼았다. 현이 풍질(風疾)에 걸렸으므로 연연이 국사(國事)를 결정하였다.

황제가 친히 한(漢) 나라 북방을 정벌하므로 현이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게 하니 이계균(李繼筠)이 역습으로 반격하여 대파시켰다.

6년, 반역의 무리인 소가(小哥) 등을 체포하여 사형시켰다.

7년, 황제가 처음으로 조서(詔書)를 가진 사신을 보내니 현이 야율창(耶律昌)을 보내어 송나라에 들어와 조회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이 교통하였으며 승려 소민(昭敏)을 승니도총관(僧尼都摠管)으로 삼고 시중(侍中)을 더 겸하게 하였다.

8년, 탁주 자사(州刺史) 야율종(耶律琮)이 웅주(雄州)의 지방 장관 손전흥(孫全興)에게 편지를 보내어 화친하기를 요구하니, 황제가 명을 내려 허락하게 하자 현이 사신을 보내어 화해하게 하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 황제가 반미(潘美) 등에게 명령을 내려서 북한(北漢)을 정벌하게 하니 현이 사신을 보내어 군대를 일으킨 까닭을 묻게 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하동(河東)이 명령을 거역하니 죄를 묻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만일 북한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화친한 언약을 옛날같이 지킬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있을 뿐이다." 하고 황제가 친히 북한을 정벌하기 위하여 진주(鎭州)에 군대를 주둔시키니, 현이 야율사(耶律沙) 등을 보내어 지원하게 하였으나 전쟁의 상황이 불리하여 죽고 다친 자가 많았었다. 황제가 북한의 왕 유계원(劉繼元)의 항복을 받고 유주(幽州)와 계주(薊州)를 취하고자 드디어 현이 야율휴가(耶律休哥)를 보내어 구원하게 하자, 송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황제는 노거(驢車)를 타고 도망하였다. 현이 한광사(韓匡嗣)를 보내어 진주(鎭州)로 쳐들어가게 하였으나 도검할(都鈐轄)인 유정한(劉廷翰) 등이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남원 추밀사(南院樞密使) 곽습(郭襲)이 사냥하는 것을 간하므로 가상히 여겨 그 말을 받아들였다.

5년, 소돌이(蕭咄李) 등이 안문(贗門)으로 쳐들어갔으나 대주 자사(大州刺史)인 양업(楊業)이 그들을 크게 격파시키니 현이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가서 와교관(瓦橋關)을 포위하였으며, 휴가는 물을 건너서 전투를 하여 송나라 군대를 크게 대패시키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방어하므로 현이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와서 휴가를 우월(于越)로 삼았는데 우월이란 아주 귀한 관직이다. 휴가는 지모가 뛰어나 병사들에게 경솔하게 송나라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6년, 상경(上京)의 한나라 군대가 협박으로 희은(喜隱)의 아들 유예수(留禮壽)를 왕으로 세우려 하니. 유수(留守) 서실(徐室)이 그들을 사로잡았으나 뒤에 희은과 함께 처형되었는데 희은은 현의 종족으로 모반하였다가 잡혀서 감금당한 자였다.

7년, 현이 만성(滿城)에 쳐들어갔으나 패배하고 돌아왔다가 초산(焦山)에서 죽었다. 현이 사람을 임용하면 의심하지 않고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는 반드시 벌을 주었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한(漢)나라를 도와 주었기 때문에 군대는 격파당하여 많은 장수를 죽게 하였다. 향년 35세이고 위에 있은 지 14년 만이었다.

연호를 보령(保寧)ㆍ건형(乾亨)이라 고치고 시호를 강정황제(康靖皇帝)라 하고 묘호를 경종(景宗), 묘호를 건릉(乾陵)이라 하였다. 맏아들 융서(隆緖)가 위에 오르니 융서의 어릴 적 자는 문수노(文殊奴)이고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처음에 양왕(梁王)으로 봉하여졌는데 글씨와 그림과 음률을 잘했으며 시도 능하고활쏘기도 잘하였다. 위에 오른 나이가 스무 살이므로 소후(蕭后)가 정사를 듣고 결단하였다.

8년, 국호를 다시 거란이라 하고 포령(蒲領) 등을 보내어 고려를 침략하였다. 삼경(三京)과 여러 곳에 부모가 있으면서 호적을 따로 하여 동거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이웃에서 염탐하고 서로 살피도록 하여 연대 책임을 지게 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사람과 3대(代)가 함께 사는 사람은 문려(門閭)를 세워 표창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칙을 내려 사형이 이미 확정되고 판결이 정해진 자 중 원통함이 있는 자는 대(臺)에 나아가 하소연하게 하였다.

옹희(雍熙 송태종의 연호) 2년(고려 성종 4, 985), 고려의 도로가 습(濕)하다 하여 여진(女眞)을 먼저 정벌하게 하였다.

3년, 서하(西夏)의 이계천(李繼遷)이 귀순하므로 그를 정난절도사(靖難節度使)로 삼았다. 황제가 조빈(曹彬) 등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안문(鴈門)으로 나아가니 융서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막으면서 먼저 휴가 등을 보내어 여러 번 싸워 격파하자, 융서가 승리함을 기회로 대주(代州)를 침범하려 하니 장제현(張齊賢)이 그들을 격파시켜 물리쳤다. 단공(端拱 송태종의 연호) 원년(성종 7, 988), 융서가 연달아 만성(滿城)의 모든 군(郡)을 함락시키고 처음으로 주군(州郡)에서 준수한 자제(子弟)를 선발하여 추천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2년, 간의대부(諫議大夫) 마득신(馬得臣)이 격구(擊毬)하는 것을 간하자 가상히 여겨 그 말을 받아들였다. 야율휴가(耶律休哥)가 송나라로 쳐들어 가니 순검사(巡檢使) 윤계륜(尹繼倫)이 그들을 당주(唐州)에서 격퇴시켰는데 휴가가 화살에 맞아 도망쳤다. 이때부터 감히 쳐들어가지 못했다.

순화(淳和 송태종의 연호) 원년(성종 9, 990), 이계천을 봉하여 하국(夏國) 왕을 삼았다.

2년, 정난군절도사(靖難軍節度使) 이계봉(李繼捧)이 귀순하므로 서평왕(西平王)에 봉하였다. 이계천이 융서를 배반하고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3년, 소덕항(蕭德恒) 등을 보내어 고려를 침략하였다.

4년, 고려왕 왕치(王治:고려 성종)가 표문을 올려 죄를 청하고 여진과 압록강 동쪽의 땅 수백 리를 떼주었다.

5년, 처음으로 대명력(大明曆)을 시행하였는데 그것은 가준(賈俊)이 진상한 것이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요구하였으나 거기에 대한 회답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읍(郡邑)에 유시하여 경술(經術)에 밝은 이와 재주가 뛰어난 이, 특이한 이를 천거하게 하였고 고려에서 여악(女樂)을 보냈으나 받지 않았으며 놀고 먹는 백성이 없게 하였다.

지도(至道 송태종의 연호) 원년(성종 14, 995), 한덕위(韓德威)가 당항(黨項)ㆍ늑랑(勒浪) 등 부족(部族)을 타일러 진무(振武)로부터 쳐들어가게 하니 영안절도사(永安節度使) 절어경(折御卿)이 그들을 자하차(子河汊)에서 패배시켰다. 그리고 고려에서 동자(童子) 열 사람을 보내와서 거란말을 배우게 하였다.

2년, 고려가 혼인하기를 요청하므로 소덕항(蕭德恒)의 딸을 고려에 시집보냈다.

3년, 품부(品部)의 부유한 백성들에게 돈을 내도록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그리고 평지송림(平地松林)에서 사냥을 하였더니 어머니인 소씨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옛적 성인(聖人)의 말씀에 욕심을 마음껏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우리 아이가 천하의 임금이 되어 말을 달려 사냥을 하니 만에 한 번이라도 말이 성질을 부려 재갈이 벗겨지고 굴레가 부러져 수레가 뒤엎어지는 변고라도 생긴다면 나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니, 그 사실을 깊이 경계하라." 하였다.

함평(咸平 송진종(宋眞宗)의 연호) 2년(고려 목종 2, 999), 융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가서 수성(遂城)을 포위하니, 그곳의 수비대장 양연소(楊延紹)가 굳게 지키므로 마침내 퇴각하면서 여러 고을을 노략질하자 황제가 친히 그들을 방어하고 전연(澶淵)에 주둔하였다.

3년, 융서가 황제가 직접 정벌에 나섰음을 알고 노략질한 것을 놓아 주고 퇴각하니, 범정소(范廷召) 등이 추격하여 막주(莫州)에서 크게 격파시켰다.

4년, 융서가 쳐들어가니 삼로도부서(三路都部署)인 왕현(王顯)이 수성에서 전투하여 2만여 명을 목베었다.

6년, 야율노과(耶律奴瓜) 등이 정주(定州)로 쳐들어가 부도부서(副都部署) 왕계충(王繼忠)을 사로잡아갔다.

경덕(景德 송 진종의 연호) 원년(목종 7, 1004), 융서가 그의 어머니 소씨와 통군(統軍) 소달름(蕭撻凜)과 함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가 전연(澶淵)을 포위하려 하였으나 달름이 쇠뇌에 맞아 죽었다. 황제가 친히 그들을 정벌하려고 전연에 주둔하여 북성문(北城門)으로 행차하였다. 처음에 항복한 장수 왕계충이 융서에게 화친하는 이로움을 말하고 가만히 표문을 올려 사실을 조정에 알리니 조서를 내려 계충을 타이르고 조이용(曹利用)을 파견하여 융서의 병영에 나아가게 하니. 융서가 한기(韓琦)를 시켜서 이용과 함께 와서 맹약을 요청하라 하였다. 이용이 말하기를 "융서가 남쪽의 땅을 관계하려 합니다." 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땅을 돌려줄 명분이 없다. 만일 꼭 부당하게 요구한다면 나는 마땅히 결전을 할 것이요, 만약 금과 비단을 얻고자 한다면 참으로 걱정할 것이 없다." 하고 다시 이용을 보내면서 은(銀) 10만 냥과 명주 20만 필(匠)을 가져가게 하여 맹약을 성취시키고 돌아오니, 융서가 사신을 보내어 맹세하는 편지를 가지고 와서 형으로 섬기려 하였다. 황제가 이로부터 유시를 내려 예물로 해마다 교통하도록 하였다.

대중상부(大中祥符 송진종의 연호) 2년(목종 12, 1009), 융서의 어머니 소씨가 죽었다. 소씨가 임기응변하는 계략이 있어 대신들을 잘 거느렸으며, 다른 나라에 쳐들어갈 때는 갑옷을 입고 싸움을 독려하였고, 화친하는 데 이르러서도 역시 기발한 계략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성품이 잔인하여 많은 사람을 죽였다.

3년 고려에서는 강조(康兆)가 그의 임금인 송(誦)을 시해하고 마음대로 송의 형 순(詢)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므로 융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격파하여 강조를 사로잡으니, 동주(銅州)ㆍ곽주(霍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순이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기를 요청하므로 허락하고 정사사인(政事舍人) 마보우(馬保佑)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으니, 고려의 수장(守將) 탁사정(卓思正)이 사신을 살해하고 한희손(韓喜孫) 등이 보우를 내쫓음으로 융서가 소배압(蕭排押) 등을 보내어 개성(開城)을 공격하니, 순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므로 마침내 개경을 불사르고 군대를 인솔하여 되돌아가더니 항복받은 성을 모두 고려에 되돌려주었다.

5년, 고려에서 채충순(蔡忠順)을 보내어 신하라 일컫기를 요청하므로 융서가 순에게 명하여 직접 조회하게 하였으나 병을 핑계하여 사양하였다. 이보다 앞서 압록강 북쪽의 땅을 고려에 양도하였더니, 고려에서는 그곳에다 6성(城)을 쌓아 흥주(興州)ㆍ철주(鐵州)ㆍ통주(通州)ㆍ용주(龍州)ㆍ귀주(龜州)ㆍ곽주(郭州)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순이 조회하지 않는 것을 노엽게 여겨 다시 타일러 6주를 반환하게 하고 귀주(龜州)에다 태학을 설치하고 그곳의 주민에게 교육을 시키니, 본디 신라에서 옮겨온 사람들로서 문자를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 강동 6주가 압록강 북쪽이라는 기사. 즉, 압록강의 정확한 위치 비정이 중요)

7년, 해마다 야율자충(耶律資忠)을 사신으로 보내어 6주를 탈취하려 하였으나 고려에서 따르지 않으므로 소적렬(蕭敵烈)을 보내어 공격하게 하였더니, 고려에서는 여진과 함께 그들을 격파하였다.

9년, 야율세랑(耶律世郞) 등이 곽주(郭州)에서 고려와 싸워 크게 격파하고 돌아왔다.

천희(天禧 송진종의 연호) 원년(고려 현종 8, 1017), 명을 내려 부녀의 재가(再嫁)를 금지시키고 소합탁(蕭合卓) 등을 보내어 고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2년, 소배압 등이 고려와 다하(茶河)ㆍ타하(陀河)에서 전투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소배압이 패한 지명은 귀주(龜州). 고려사에는 다하(茶河)ㆍ타하(陀河)라는 지명이 없다. )

3년, 낭군(郎君) 갈불여(曷不呂) 등을 보내어 대군을 거느리게 하여 고려를 침략케 하니 고려왕 순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 바치기를 요청하므로 허락하였다.

4년, 고려에서 표문을 올려 제후국(諸侯國)으로 자칭하고 억류되어 있던 지랄리(只剌里)를 돌려 보내겠다고 요청하였는데, 지랄 리가 6년 동안 고려에 있으면서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특별히 임아(林牙)에 임명하였는데, 임아란 한림(翰林)을 말한다.

건흥(乾興 송인종의 연호) 원년(현종 13, 1022), 황제가 세상을 떠나니, 융서가 송나라 제후국의 대신들을 모아 슬픔을 표하게 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위(弔慰)하였으며, 황제의 어령(御靈)을 안치하여 자복도량(資福道場)을 1백 일 동안 세워두게 하였다. 그리고 국내에 유시하여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게 하고 황제의 휘(諱)함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바로잡도록 하였다.

천성(天聖 송인종(宋仁宗)의 연호) 5년(현종 18, 1027), 모든 장원(帳院)의 서얼(庶蘖)에게 타일러서 일제히 그 어머니를 따라서 귀천(貴賤)을 따지게 하였다.

6년, 서얼 출신으로 이미 양민이 되었다 하더라도 세습적으로 선발되는 벼슬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또 유시를 내리기를 '양국구(兩國舅)와 남ㆍ북 왕부(王府)는 일국의 귀족이므로 천인과 서얼은 본부관(本部官)에 임명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7년, 상은(詳隱)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켜 동경 유수(東京留守) 소효선(蕭孝先)을 가두어 버리고 새 나라를 건립하여 '흥요(興遼)'라 하였는데, 융서가 소효목(蕭孝穆)을 보내어 그를 토벌하게 하자 얼마 뒤에 연림이 잡혔다.

9년, 융서가 대복하(大福河)에서 세상을 마쳤는데 융서가 어머니의 상(喪)을 당해 슬퍼하여 몸이 야위어 있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연호 바꾸기를 요청하므로 융서가 말하기를 "연호를 바꾸는 것은 경사스런 의식인데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길례(吉禮)를 시행하는 것은 불효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날로서 달을 계산하는 법은 옛날의 제도라고 요청하자 융서가 말하기를 "나는 거란의 황제이다. 차라리 옛날 제도를 어기더라도 불효하는 자식이 될 수는 없다." 하였다. 병이 위독하게 되자 아들 종진(宗眞)에게 말하기를 "송나라와 맺은 맹세는 마땅히 준수하여 과실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라." 하고 세상을 마쳤으니, 향년이 61세이고 위에 있은 지 49년 만이었다. 연호를 통화(統和)ㆍ개태(開泰)ㆍ태평(太平)이라 고쳤으며, 시호를 문무대효선황제(文武大孝宣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성종(聖宗), 묘호(墓號)를 경릉(慶陵)이라 하였다.

맏아들 종진(宗眞)이 위에 오르니 종진의 자(字)는 이불근(夷不菫)이며 어머니는 원비(元妃) 소씨(蕭氏)이다. 처음에 양왕(梁王)에 봉하여졌는데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유학(儒學)을 좋아하였다. 소씨의 이름은 누근(耨斤)인데 제천황후(齊天皇后) 소씨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아들 종진을 데려다 기르면서 사랑하기를 자기의 자식과 같이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누근이 자기 스스로 황태후(皇太后)가 되어 정사를 청단(聽斷)하였다. 융서가 죽을 무렵에 종진에게 위촉하기를 "황후가 40년 동안 나를 섬겼는데 그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너를 명하여 맏아들을 삼았으니, 너의 모자(母子)는 간절히 바라건대 그를 죽이지 말라."하였었다. 융서가 세상을 마침에 이르러 좌우들이 누근의 뜻을 받아 제천후의 동생이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누근이 죄인을 신문하여 다스리면서 제천후까지 연좌되게 하니 종진이 말하기를 "나를 어루만져 키워주신 분이 당연히 태후가 되셔야 하는데 지금 도리어 그분을 죄주려 하니 옳은 일입니까?"하였으나 누근이 끝내 그를 상경으로 내쫓았다.

명도(明道 송인종의 연호) 원년(고려 덕종 1, 1032), 누근이, 종진이 설림(雪林)에 유람간 틈을 타서 사람을 상경에 보내어 제천후를 시해하게 하였다.

경우(景祐 송인종의 연호) 원년(덕종 3, 1034), 누근이 가만히 여러 동생을 불러서 작은 아들 중원(重元)을 왕으로 세우기를 논의하였는데, 중원이 그와 같은 모의를 종진에게 알리자 종진이 마침내 누근으로부터 황제의 인장을 회수하였으며 그를 경주(慶州)에 거처하게 하고, 처음으로 친히 정무를 살피면서 중원을 황태제(皇太弟)로 삼았다.

4년, 어머니인 누근을 경주에서 맞아들였다. 강정(康定 송인종의 연호) 원년(고려 정종 6, 1040), 송나라를 침략하려 하니, 북원추밀사(北院樞密使) 소효목(蕭孝穆)이 글을 올려 간절히 간하였으나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효목은 청렴하고도 근신하며 예의와 법도가 있어 늘 말하기를"추밀(樞密)은 현명한 이들을 선발하여 놓는 곳인데 무슨 일을 성취시키지 못하겠느냐? 만일 자신이 자질구레한 일을 다 하려 한다면 큰일이 지체되어 나쁜 풍속을 개선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요, 벼슬을 하면서 눈앞의 안일만을 탐하는 것은 신하의 본분이 아니다." 하니 당시에 그를 칭찬하고 소중한 신하로 여겼다.

경력(慶曆 송인종의 연호) 2년(정종 8, 1042), 소특말(蕭特末) 등을 보내와서 관남(關南)의 땅을 요구하였다. 그 당시 나라 안이 무사하므로 남쪽으로 침략할 의사를 가지고 송나라에 대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하(夏)나라를 정벌한 사실과 병기와 군영(軍營)을 증가시킨 까닭을 문의하였다. 황제가 부필(富弼)을 보내어 땅을 베어달라는 요구에 대하여 물어보자 종진이 말하기를 "송나라가 약속을 어기어 안문(鴈門)을 막고 민병(民兵)의 명부를 작성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권하였으나, 나는 말하기를 '땅을 요구해 보고 주지 않을 때 군대를 동원하여도 늦지 않다.' 하였다." 하였다. 필이 반복하여 그러한 처사가 옳지 않음을 진술하고 돌아가서 모두 보고하니 다시 필을 사신으로 삼아 화친을 맺는 것과 예물을 증가시키는 것 두 가지 의견을 소지하게 하여 보내니, 종진이 예물을 증가시키겠다는 서약서는 보류하여 두게 하고 야율인선(耶律仁先) 등을 시켜서 필과 함께 와서 해마다 돈 10만 냥과 명주 10만 필을 증가시키도록 의논하게 하였다. 황제가 정조사(正朝使)와 수절사(壽節使)를 보내어 사처에 머무르게 하였더니, 종진이 변장을 하고 가보았다.

4년 초, 국사(國史)를 편수하게 하고 야율곡욕(耶律谷欲)과 야율서성(耶律庶成) 등을 명하여 사관으로 보충시켰다. 처음에 종진이 당항(黨項: 탕구트 (서하))을 정벌하니 하주(夏主) 이원호(李元昊)가 그들을 구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여러 곳의 병사와 장수를 징발하여 종진이 직접 원호를 토벌하려고 사신을 보내와서 고하기를 "송나라를 위하여 역적을 토벌하는 것이니, 부디 화친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종원(宗元) 등을 보내어 원호를 토벌하니, 원호가 그들을 맞아 싸워 패배시켰다. 얼마 있다가 포로와 노획한 것을 돌려주었더니, 종진이 드디어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와서 운주(雲州)를 서경으로 삼았다.

6년, 임아(林牙) 소한가노(蕭韓家奴)에게 유시하여 예서(禮書)를 찬술(撰述)하게 하였다.

7년, 공주(公主)가 시부모에게 며느리로서 예절 행하는 법을 정하였다.

황우(皇祐 송인종의 연호) 원년(고려 문종 3, 1049), 종진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하(夏)나라를 토벌하였는데 야율적로고(耶律敵魯古)가 하란산(賀蘭山)에 이르러 원호의 처(妻)를 사로잡아왔다. 그리고 동생이 형을 따라 강도 노릇하는 자가 있었는데 함께 자식이 없으므로 특별히 그 동생을 용서하여 주었다.

2년, 혜감(惠鑑)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를 더해 주었다.

3년, 원호의 처를 소주(蘇州)에 가두어 두었다.

4년, 하 나라와 화친하였다. 종진이 대신에게 유시하여 말하기를 "내가 송나라의 임금과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그의 초상화를 보고 싶으니 타일러 사신을 오도록 하라." 하였다.

지화(至和 송인종의 연호) 원년(문종 8, 1054), 8방(房)의 친족에게 명령하여 두건을 쓰도록 하였다.

2년, 사신을 보내어 건원절(乾元節)을 축하하게 하고, 요나라 3대 임금의 초상화를 바치고 황제의 초상화를 청구하였다. 그리고 송나라 사신을 불러 낚시질하며 시를 짓게 하였고, 추산(秋山)에 유람갔다가 몸이 아파 연조국왕(燕趙國王) 홍기(洪基)를 불러 나라 다스리는 요령들을 타이르고 5방(坊)의 응(鷹)과 골(鶻)을 놓아 주었으며 낚시하는 기구를 태워버리고 세상을 마쳤다. 종진은 성품이 경박하여 늘 밤에 연회를 틈타 직접 음악을 연주하는 대열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 변장을 하여 주점과 불사(佛寺)ㆍ도관(道觀)에 드나들었으나 중[浮屠]을 더 중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친히 진사(進士)들에게 과제(課題)를 내주었으며 조례와 제도를 대폭으로 마련케 하여 아래로 모든 선비와 서민들에게까지 편의(便宜)를 진술하게 하였으니 나라가 올바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의지가 절실하였다고 하겠다. 향년이 40세이고 위에 있은 지 24년 만이었다. 연호를 개원(開元)ㆍ경복(景福)ㆍ중희(重熙)라 고쳤으며 시호를 신성효장황제(神聖孝章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흥종(興宗),묘호(墓號)를 경릉(慶陵)이라 하였다.

맏아들 홍기(洪基)가 위에 오르니 홍기의 자는 열린(涅隣)이고 어릴 적 자는 사랄(査剌)이며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처음에 양왕(梁王)에 봉하여졌다가 진급하여 연조국왕(燕趙國王)으로 책봉되었는데 천성이 침착하고 안정되었으며 엄숙하고 굳세어 매일 조회할 때면 종진이 용모를 단정히 하였으며, 종진이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여 정사를 청단(聽斷)하지 않으므로 모든 각료들이 굳게 요청하였더니, 허락하였다. 그리고 유시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박덕(薄德)한 사람으로 백성들의 윗자리에 앉아 지혜와 학식이 따르지 못하며, 여러 아랫사람들을 신임하지 못하며, 세금을 제멋대로 부과하며, 상주고 벌주는 것이 기준에 맞지 않을까 두려우니, 너희 모든 선비와 서민들은 바른말을 거리낌 없이 하라." 하였다. 또 유시를 내려 공훈을 세운 후예자와 이리근(夷离菫)ㆍ부사(副使), 기타 내직의 여러 곳에서 일보는 사람이 아니면 관(冠)과 건(巾)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중원(重元)을 황태숙(皇太叔)으로 삼아 절을 하지 않게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좌이리필(左夷离畢)에게 말하기를 "내가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나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바른말을 들어서 과실을 바로 잡고자 하였었는데, 벌써 두어 달이 지나도록 가까운 신하들에게 위임한 의사에 부응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사실을 내외의 백관들에게 명하여 각자 한 가지씩 말하게 하되 귀천(貴賤)과 노유(老幼)를 막론하고 모두 바른말을 거리낌 없이 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태학을 설립하여 선비를 길러내게 하고 5경(經)의 전(傳)과 소(疏)를 나누어 주고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배치하였다.

가우(嘉祐 송인종의 연호) 2년(고려 문종 11, 1057) 초, 종진이 황제의 초상화를 얻으려 하다가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만두었다가, 이때에 와서 홍기가 자기의 초상화를 바치고 황제의 초상화를 요구하였다. 황제가 호숙(胡宿)을 사신으로 자기의 초상화를 받들게 하여 그에게 화답을 하자, 홍의가 의장(儀仗)을 구비하여 받아보고는 놀라고 숙연해져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내가 만약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말이나 몰고 일산(日傘)이나 가지고 다니는 한 제후국의 산택(山澤) 담당 관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5년, 국사 편찬을 감독하던 야율백(耶律白)이 그들 임금의 시부(詩賦)를 순차에 따라 편찬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그것을 인하여 백에게 서문(序文)을 짓게 하였다.

7년, 동경유수(東京留守) 소하랄(蕭河剌)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강직하였으며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자질이 있었는데, 당시 정치의 부합된 점과 모순된 점을 진술하였더니, 홍기가 노엽게 여겨 그를 죽였다.

8년, 황태숙 중원이 북추밀사(北樞密使) 소호도(蕭胡覩) 등과 함께 노수군(拏手軍)을 유인하여 태자(太子) 산행궁(山行宮)을 침범하게 하니, 남원 추밀사 야율인선(耶律人先) 등이 군대를 인솔하여 그들을 방어하였다. 홍기의 어머니 소씨는 궁중을 지키던 군대를 독려하여 중원의 아들 열로고(涅魯古)를 죽이고 반역한 무리들의 가족을 멸족시키니, 중원은 대막(大漠)으로 도망하여 자결하였다.

치평(治平 송영종(宋英宗)의 연호) 원년(문종 18, 1064), 남경(南京) 백성들에게 물을 터서 벼 심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또 백성들에게 개인적으로 문자 간행을 금지시키고, 명을 내려 건문각(乾文閣)에 누락된 경서(經書)를 구하여 유신(儒臣)들에게 교정을 당부하였다. 홍기가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유람을 갔었는데, 어머니 소씨가 활을 쏘아 호랑이를 잡아서 여러 신하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게 하고 명령을 내려 각각 시를 짓게 하였다.

3년, 다시 나라 이름을 요(遼)라 고쳤다.

희령(熙寧 송신종(宋神宗)의 연호) 원년(문종 22, 1068), 영을 내려 남경에 군사도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는 모두 벼를 심게 하였다.

3년,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영을 내려 이 과에 응시하는 자는 먼저 전공한 부분에 대한 십만 언(十萬言)을 진상하게 했다. 마희백(馬希白)이 시 짓는 재능이 민첩하고 정묘하여 열 사람의 관리가 받아써도 못 따른다 하므로 그를 불러서 시험하였다.

4년, 무명 옷감과 명주 옷감의 길이가 짧고 넓이가 좁아 척도(尺度)에 맞지 않게 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부처의 유골(遺骨 사리(舍利)를 말함)을 초선부도(招仙浮圖)에 안치하고 사냥을 그만두게 하였으며, 도살을 금지시켰다.

5년, 경주(慶州)의 근문고(靳文高)가 8세(世)를 함께 살았으므로 벼슬을 내려 주었으며, 눈이 많이 내려 백성들에게 금지 구역에도 들어가 땔나무를 하도록 허락하였다.

8년, 황제가 심괄(沈括)을 보내어 국경을 정하게 하였다. 홍기의 왕후인 소씨(蕭氏)가 자태와 용모가 아름답고 시(詩)도 잘하며 음악도 좋아하더니 태자(太子) 준(濬)을 낳았다. 그 무렵 북원 추밀사 야율을신(耶律乙辛)이 정치를 제멋대로 하면서 왕후의 총명하고 민첩함을 꺼려하여 이에 궁비(宮婢) 단등(導) 등에게 왕후가 음악 담당관인 조유일(趙惟一)과 사통하였다고 무고하게 하고 을신이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유일을 멸족시키고 왕후에게는 자결하게 하였다.

9년, 홍기가 기거주(起居注)를 보려 하였는데 수주랑(修注郞) 불전(不攧)과 홀돌근(忽突菫) 등이 진상하지 않으므로 각각 곤장을 쳐서 파면시켰다.

10년, 을신이 태자 준을 시해하였다. 준이 학문을 좋아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그 당시 을신이 벌써 준의 어머니에게 해를 입히고는 그들의 무리인 소하말(蕭霞抹)의 누이를 왕후로 삼고 또 준을 해치려 하니, 호위(護衛)인 소홀고(蕭忽古)가 그 상황을 알고 을신을 죽이려 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옥에 갇혔다. 을신이 소화도알(蕭訛都斡) 등에게 명하여 홀고 등이 을신을 죽이고 준을 세워 황제를 삼으려 계략을 꾸몄다고 무고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준을 폐하여 평민으로 만들어 상경(上京)으로 옮기게 하고, 그 사건에 연루된 신하들을 모두 살해하고, 을신이 사람을 보내어 준을 살해하고는 거짓으로 병사한 것처럼 하고, 다시 준의 비(妃)를 죽였다. 홍기가 뒤늦게 준이 원통하게 죽은 것을 알고 추시(追諡)하여 소회태자(昭懷太子)란 시호를 내렸다.

원풍(元豐 송신종의 연호) 원년(문종 32, 1078), 제로(諸路)의 반승니(飯僧尼)가 36만 명이 된다고 아뢰었다.

3년, 준의 아들 연희(延禧)가 겨우 여섯 살이 되었는데 을신이 또 그를 해하려고 인하여 말하기를 "송위왕(宋魏王) 화로알(和魯斡)의 아들 순(淳)을 황태자로 삼을 만합니다." 하였으니, 화로알은 곧 홍기의 동생이었다. 그러자 북원선휘사(北院宣徽使) 소올납(蘇兀納) 등이 간하기를 "적통(嫡統)을 버리고 세우지 않음은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하자, 홍기가 미심쩍게 여겨 결정을 못하다가 흑산(黑山)에 사냥하러 가서 왕의 행차를 뒤따르는 관속들 중 많은 자들이 을신을 수행하는 것을 본 뒤에야, 을신이 제멋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여 흥중부(興中府)로 내쫓고 그의 무리들을 모두 물리쳐 버렸으며, 그 뒤에 을신을 내주(萊州)에 가두었다. 그리고 연희를 책봉하여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4년, 부마(駙馬) 소수알(蕭酬斡)의 사제(私第)에 행차하여 술을 마셨더니, 재상 양영(梁穎)이 간하기를 "천자는 신하의 집에서 술을 마셔서는 안 됩니다." 하므로 곧 대궐로 돌아왔다.

5년, 거서(秬黍)로 정한 되[升]와 말[斗]의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후비(后妃) 소씨(蕭氏)를 강등시켜 혜비(惠妃)라 하였다. 그의 어머니 연국부인(燕國夫人)이 염매(厭魅 : 주술(呪術)로 남을 저주하는 것)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비(妃)의 직위를 낮추어 서인이 되게 하여 의주(宜州)에 가두었다.

6년, 을신이 송나라로 도망을 꾀하려다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중 선지(善知)를 시켜 고려에서 보내온 불경을 교정하도록 하고 널리 펴 시행하게 하였다. 원우(元祐 송철종(宋哲宗)의 연호)) 원년(고려 선종 3, 1086), 임시 한림학사(翰林學士) 조효엄(趙孝嚴)과 지제고(知制誥) 왕사유(王師儒) 등을 불러서 오경(五經)의 대의(大義)를 강의하게 하였다.

4년, 학자들에게 필수로 도(道)를 밝히고 경학을 연구하게 하였다.

7년, 생여진부절도사(生女眞部節度使) 핵리발(劾里鉢)이, 병이 위독하여 그의 아우인 영가(盈哥)에게 말하기를 "거란에 관한 일들을 잘 분별하여 성취시킬 수 있는 사람은 둘째 아들 아골타(阿骨打)뿐이다." 하고 세상을 마쳤다. 핵리발은 위엄스럽고 신중하며 지혜가 많아, 약한 것을 변경시켜 강하게 만들었으므로 창업 기반이 처음으로 커졌다.

소성(紹聖 송철종의 연호) 3년(고려 숙종 1, 1096), 세마(洗馬) 유휘(劉煇)가 글을 올리기를 "구양수(歐陽脩)가《오대사(五代史)》를 편찬하면서 우리 요나라를 사이(四夷)에 부속시켜 제멋대로 깎아내려서 헐뜯었으며, 또 송나라는 요나라를 의뢰하여 외국과 교통하며 화친을 맺어 형제국으로서의 예를 극진하게 하였는데도, 이제 와서 도리어 신하를 시켜 망령스럽게 사서(史書)를 저작하게 하고 관심을 갖지 않으니, 신은 바라옵건대 송나라가 처음 일어날 때의 사적을 자세하게 국사에 덧붙이게 하십시오." 했다. 이에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고 예부 낭중(禮部郎中)으로 전직시켰다.

4년, 하(夏)나라 사람이 와서 송나라가 요새에다 성을 쌓는다고 하자, 흥기가 사신을 보내어 하 나라와 화친하기를 요청하였다.

원부(元符 송철종의 연호) 3년(숙종 5, 1100), 유사(有司)가 관아의 공문서에 송나라 황제의 '사위(嗣位)'를 '등보위(登寶位)'라 썼다 하여 재상 정전(鄭顓) 이하의 관원의 직위를 삭탈하였다.

건중정국(建中靖國 송철종의 연호) 원년(숙종 6, 1101), 홍기가 혼동강(混同江)에서 세상을 마쳤다. 홍기가 처음 즉위하여 바른말을 요구하고 다스리는 도리를 문의하였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부정이 다투어 일어나는 데 이르러서는 자기의 동기(同氣)도 보호하지 못하였으며, 여러 부족이 배반하여 군대를 동원하였으므로 편안한 해가 없었다. 향년이 70세이고 위에 있은 지 47년 만이었다. 연호를 청녕(淸寧)ㆍ함옹(咸雍)ㆍ태강(太康)ㆍ태안(太安)ㆍ수륭(壽隆)이라 고쳤으며, 시호를 인성대효문황제(仁聖大孝文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를 도종(道宗), 묘호(墓號)를 경릉(慶陵)이라 하였다.

손자 연희(延禧)가 위에 오르니 연희의 자(字)는 연녕(延寧)인데 어릴 적 자는 아과(阿果)이다. 준(濬)의 아들로 어머니는 소씨(蕭氏)이다. 처음에 양왕(梁王)으로 책봉되었다가 진급하여 연국왕(燕國王)에 책봉되었고 즉위하여 처음으로 참최복(斬衰服)을 입었다. 그리고 명을 내려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을신에게 모함된 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벼슬을 복직시켜 주게 하였으며, 관에서 몰수한 재산을 되돌려 주게 하고 귀양간 사람들을 되돌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높여 황제ㆍ황후라 하였다. 생여진부절도사 영가가 죽고 위를 형의 아들인 오아속(烏雅束)에게 전하였는데, 오아속이 죽자 그 아우 아골타가 위를 이어받았다.

숭녕(崇寧 송휘종(宋徽宗)의 연호) 원년(숙종 7, 1102), 을신의 도당을 죽이고 그들의 자손들을 변방으로 옮기게 하고 을신의 관(棺)을 쪼개었으며, 그들의 가속(家屬)들을 을신에게 죽임을 당한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4년, 연희가 몰래 다니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시찰하였다. 그리고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하나라를 정벌하지 말도록 요청하니, 황제가 한림학사 임여(林攄)를 보내어 회답하게 하였다.

정화(政和 송 휘종의 연호) 원년(고려 예종 6, 1111), 황제가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 정윤중(鄭允中)과 환관 동관(童貫)을 부사(副使)로 삼아 보냈다. 처음에 임여가 귀국하여 요나라의 내부가 분열되어 있으니 정벌할 만하다고 말하므로 황제가 처음으로 북벌할 뜻을 두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관 등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다. 마식(馬植)이 연희에게 벼슬하여 광록경(光祿卿)이 되었는데 몰래 동관을 찾아보고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계책을 진언하므로, 관이 그를 데리고 귀국하여 성명을 이양사(李良嗣)라 고쳤더니, 황제가 조씨(趙氏) 성(姓)을 하사하였다.

2년, 연희가 혼동강에 갔었는데 생여진의 추장(酋長)들이 모두 와서 조회하고 두어연(頭魚宴)에 참여하면서 주흥이 한창일 때 연희가 추장들에게 명하여 일어나서 춤을 추라고 하였더니, 아골타만이 춤을 못 춘다고 사양하므로 두세 번 타일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뒤 연희가 비밀로 북원 추밀사 소봉선(蕭奉先)에게 유시하여 "국경의 일을 핑계삼아 그를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뒷날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하였는데 봉선은 생각하기를 "그는 예의를 모르고 또 큰 잘못이 없는데 죽인다면 덕화를 사모하는 마음을 다치게 할까 두렵습니다." 하자 연희가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자 아골타는 언희가 다른 뜻 있음을 알고 있는가 의심하였고, 또 연희가 심한 주정 때문에 나라 정치를 구휼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병을 핑계로 다시 오지 않았다.

4년, 초에 여진이 군대를 일으켜 흘석열부(紇石烈部)의 사람 아소(阿疎)가 복종하지 않는다고 성토하니, 아소가 도망을 왔었는데 이때에 와서 아골타가 사람을 보내어 아소를 찾아내려 하였으나 끝내 오지 않으므로 아골타가 마침내 여러 부족의 군대를 모집하여 은출할(銀朮割) 등을 장수로 삼아 요나라의 잘못을 하나하나 책망하여 하늘과 땅에 고한다 하고 영강주(寧江州)를 진격했다. 연희가 사공(司空) 소사선(蕭嗣先) 등을 보내어 그들을 막게 하였으나 아골타가 연달아 싸워 크게 격파시켰다. 요나라 사람들이 늘 말하기를 "여진의 군대가 1만 명만 되면 겨루지 못한다." 하더니, 이때에 와서 처음으로 1만 명이 되었다고 하였다.

5년, 아골타가 황제라 자칭하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다. 연희가 사신을 금에 보내어 화친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아골타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여 와서 야율알리타(耶律斡里朶) 등과 싸웠는데 달로고성(達魯古城)에서 패배시켰다. 연희가 또 사신을 보내 빨리 항복하라고 타이르자 아골타도 항복하기를 타이르는 회답을 보내오므로, 연희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하려고 어영도통(御營都統) 소봉선(蕭奉先) 등을 선봉으로 야율장노(耶律章奴)를 부장(副將)으로 삼았는데, 장노가 배반하여 상경(上京)으로 도망하여 종실(宗室) 위국왕(魏國王) 순(淳)을 맞아 왕으로 세우기를 계획하고 왕비의 친동생인 소체리(蕭諦里)를 보내어 순을 설득시켰으나, 순이 소체리의 목을 베어 바쳤다. 이에 광평정(廣平淀)에 나아가 행궁(行宮)을 침범한 장노는 싸움에서 지고 여진으로 도망갔다가 순라군에게 잡혀서 왕이 머무는 곳으로 압송되어 허리를 잘려 죽었다. 연희가 타문(駝門)에 이르니, 소특말(蕭特末) 등이 기마병(騎馬兵)과 보병(步兵) 45만을 거느리고 알인락(斡隣濼)에 도착하여 있었다. 그 즈음 연희가 장노의 배반 때문에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였더니, 아골타가 추격하여 크게 격파시키자 도감(都監) 야율장가노(耶律張家奴)가 배반하였다.

6년, 동경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유수(留守) 소보선(蕭保先)을 살해하자, 보선의 비장(裨將) 고영창(高永昌)이 요양(療陽)을 근거지로 국호(國號)를 참칭하고 연호를 세우므로 연희가 소한가노(蕭韓家奴)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니, 장가노가 고주(高州)를 함락시키므로 연희가 직접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아골타가 고영창을 공격하여 죽이고 동경(東京)의 주현(州縣)을 모두 탈취하였다.

7년, 연희가 음량하(陰凉河)에 가서 요동(遼東) 사람을 모집하여 군대를 만들어 여진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고 이름을 원군(怨軍)이라 하였는데, 8영(營)이나 되었다. 위주(衛州) 질려산(蒺藜山)에 주둔하였더니 금나라 사람들이 질려산을 공격하여 깨뜨리고는, 끝내 현주(顯州)ㆍ건주(乾州)ㆍ의주(懿州) 등7주(州)를 모두 빼앗았다.

(▶ 거란 지리도상 요서지방에 나타나는 철주(鐵州) 사람 양박(楊朴)이 아골타에게 예부터 영웅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 꼭 먼저 대국에 봉책을 요구하여야 한다고 설득시켰더니,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논의하고 봉책하여 주기를 요구하였다.)

중화(重和 송휘종의 연호) 원년(예종 13, 1118), 황제가 무의대부(武義大夫) 마정(馬政)을 금나라에 보내어 친선을 도모하게 하고 함께 요나라를 정벌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런데 연희가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였더니, 아골타의 답서에 금나라를 형으로 섬기고 해마다 방물바칠 것을 요청하였다.

선화(宣和 송휘종의 연호) 원년(예종 14, 1119), 아골타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니, 황제가 요나라를 협공할 것을 타일렀다. 그리고 소재(少宰) 왕보(王黼)가 화학정(畫學正) 진요신(陳堯臣)을 추천하여 요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더니, 요신이 연희의 초상화를 그려서 귀국하여, 황제께 말하기를 "관상보는 법으로 논한다면 그의 멸망이 조석(朝夕)에 달렸습니다." 하면서 그 나라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것을 그려서 함께 올렸다. 연희가 사신을 보내어 아골타를 책봉하여 동회국(東懷國) 황제로 삼았다. 이에 앞서 일곱 차례나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어 책봉하는 예를 의논하였고 금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책봉을 환영하였으나, 도착한 책봉서에 형으로 섬긴다는 내용은 없고 또 대금(大金)이라는 호칭도 않고 동회라 하였으니, 이것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의 덕화를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하여, 그들의 어긋난 예의를 책망하면서 받지 않았다.

2년, 이보다 앞서 연희가 사신에게 책봉한 초고(初藁)를 소지케 하여 금나라에 보내니, 금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낼 때 책봉한 부본을 가져가게 하여 회답을 하였는데, 연희가 금나라에서 정한 대성(大聖) 두 글자는 자기 선대의 칭호를 범하였다 하여 사신을 보내어 의논하게 하자, 아골타가 노하여 외교관계를 끊고 마침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상경(上京)을 공격했다. 이에 유수 소달불야(蕭撻不也)가 나와 항복하였다. 황제가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어 함께 요나라 공격하기를 약속하였다.

3년, 연희의 아들이 넷이었는데 장남은 조왕(趙王) 습니열(習泥烈), 차남은 진왕(晉王) 오로알(敖盧斡), 다음은 진왕(秦王) 정(定), 다음은 허왕(許王) 영(寧)이었다. 당시 여진이 군사를 일으켰는데도 연희가 사냥놀이를 하므로 진왕(晉王)의 어머니인 문비(文妃) 소씨가 노래를 지어 풍자하여 간(諫)하였다. 추밀사 소봉선(蕭奉先)은 원비(元妃)의 오라버니로 진(秦)ㆍ허(許) 두 왕의 외삼촌이었는데, 진왕(晉王)이 사람들에게 명망이 있으므로 진왕(秦王)이 위에 오르지 못할까 하여 가만히 계책을 꾸몄다. 문비의 언니가 야율달갈리(耶律撻曷里)에게 시집갔으며 동생은 야율여도(耶律余覩)에게 시집을 갔었다. 봉선 등이 문비와 부마(駙馬) 소욱(蕭昱)과 여도ㆍ달갈리 등이 진왕(晉王)을 세우려고 계책을 꾸민다고 무고하자 연희가 욱과 달갈리 그리고 문비를 죽였는데, 마침 여도가 군중(軍中)에 있다가 그 사실을 알고 크게 겁을 먹고 금나라에 항복하였다. 아골타가 여도를 길잡이로 삼아 중경(中京)으로 향했다.

4년 여도가 누실(婁室)을 인도하여 갑자기 이르니 연희가 매우 걱정을 하므로 봉선이 말하기를 "여도가 이번에 온 것은 자기의 생질인 진왕(晉王) 때문이니 그를 죽여 버리면 여도가 저절로 돌아갈 것입니다."하였다. 때마침 야율살팔(耶律撒八) 등이 진왕을 세우려고 계략을 꾸몄다가 사실이 발각되었으므로 연희가 드디어 진왕을 죽였는데, 이 때문에 인심이 흩어졌다. 금나라 군대가 원앙락(鴛鴦濼)에 있는 행궁(行宮)을 핍박하자 연희가 운중(雲中)으로 도망하였는데 점몰갈(粘沒喝)이 추격해오므로 연희가 협산(夾山)으로 들어갔다. 연희는 그제야 봉선의 충성스럽지 못함을 깨닫고 노여워서 말하기를 "나를 따르지 말라." 하자 봉선이 절하고 떠나가더니, 그 부하에게 잡혀서 묶이어 금나라 군대에 압송되었는데 연희가 다시 잡아서 죽였다. 처음에 연희가 운중으로 도망갈 때 유임된 남부재상(南部宰相) 장임(張琳)과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처온(李處溫)이 진진국왕(秦晉國王) 순(淳)과 함께 연경을 지켰었는데, 이때 이르러 처온이 대신(大臣)인 야율대석(耶律大石) 등과 함께 순을 옹립하고 연호를 건복(建福)이라 하니, 이 나라가 세상에서 일컫는 북요(北遼)이다. 얼마 지나 연희를 강등시켜 상음왕(湘陰王)으로 삼았다. 금나라 사람이 와서 요나라를 협공하자고 약속하므로 황제가 동관을 명하여 하북하동로선무사(河北河東路宣撫使)로 삼아서 대응하게 하였는데, 금나라 사람들이 서경을 탈취하자 사막(沙漠) 이남의 부족(部族)들이 모두 항복하니, 연희가 와사열(訛莎烈)로 도망하였다. 사신을 보내와서 동관에게 말하기를, “ 여진이 배반하는 것은 남조(南朝 송을 말함)도 미워할 것인데 백 년간의 화친을 포기하고 뒷날의 재화(災禍)를 장만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느냐? 재난에서 건져내며 이웃을 구휼하여 주는 것이 고금을 통한 도의이니 대국(大國)은 생각하여 보라." 하니, 동관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순(淳)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는데 연희가 격문을 천덕(天德)등의 주(州)에 전하였음을 듣고 매우 걱정스럽게 여겨 대신들을 소집하여 의논하게 하였더니, 처온(處溫) 등이 진왕(秦王 연희의 아들 정(定)을 말함)을 맞아들이고 상음(湘陰 상음왕 연희를 말함)은 거절하자는 의견을 말하니, 야율영(耶律寧)이 말하기를"진왕과 상음왕은 부자간이다. 어찌 아들을 맞아들이고 아버지는 거절한단 말인가?" 하자, 처온이 영을 죽이려 하매, 순이 말하기를 "충신은 죽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윽고 순이 죽자 군중들이 순의 처 소씨를 세워서 황태후로 삼았다. 얼마 지나 연희의 셋째 아들인 진왕 정(定)을 세워 황제를 삼고 연호를 덕흥(德興)이라 하였으며, 순에게 시호를 내려 효장황제(孝章皇帝)라 하였다. 처온이 화를 입을까 겁을 내어 남으로는 송나라와 통모하고 북으로는 금나라와 통모하여 내응하려고 하였으므로 황후가 그를 잡아서 죽였다. 아골타가 연희를 석련역(石輦驛)까지 뒤쫓아가자 연희가 낙곤수(落昆髓)로 도망하였다.곽 약사(郭藥師)가 탁()ㆍ이(易) 두 고을을 거느리고 투항하자 동관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아골타가 연경(燕京)을 침입하자 소후(蕭后)가 천덕군(天德軍)으로 도망하였다.

5년, 북원추밀사 해왕(奚王) 회리보(回离保)가 스스로 위에 올라 해국황제(奚國皇帝)라 하더니 뒤에 자기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연희가 남경(南京)이 격파되었음을 듣고 사부족(四部族)으로 도망하였는데, 소후가 와서 뵈었더니 연희가 노하여 그를 죽이고 추존하였던 순(淳)을 강등시켜 서인이 되게 하였다. 금(金)의 알리불(斡离不) 등이 거용관(居庸關)에 이르러 야율대석(耶律大石)을 사로잡아 그를 길잡이로 응주(應州)에 있었던 연희를 습격하니, 진(秦)ㆍ허(許)의 두 왕과 여러 왕비 그리고 공주와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잡혔는데, 특모가(特母哥)가 연희의 둘째 아들 아리(雅里)와 몰래 연희의 진영으로 갔었다. 연희가 운내(雲內)로 도망하였더니 하왕(夏王) 이건순(李乾順)이 사신을 보내어 연희에게 자기 나라로 오기를 청하였다. 소특렬(蕭特烈)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끝내 금숙군(金肅軍)의 북쪽에 주둔하였다. 특렬 등이 아리를 겁박하여 서북부(西北部)로 도망하게 하여, 그를 세워 황제로 삼고 연호를 신력(神曆)이라 하였다. 처음에 장각(張殼)이 평주사(平州事)를 맡아 군대를 훈련시켜 대비하였는데 금나라 사람들이 평주를 승격시켜 남경을 삼고, 각에게 평장판유수사(平章判留守事)를 더하여 주었다. 이때에 와서 금나라 사람들이 포로로 잡은 재상 좌기궁(左企弓) 등을 데리고 연경의 부호들과 함께 동으로 이사하게 하였는데, 그 길이 평주를 지나가게 되자 각의 휘하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공이 만약 의(義)를 가지고 왕을 보좌하여 요(遼)를 다시 일으킬 것을 계획한다면, 먼저 기궁 등을 죽이고 연(燕) 나라 백성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평주(平州)를 송나라에 돌려준다면 끝내는 울타리가 될 것이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니, 각이 마침내 기궁 등을 죽이고 연희의 초상을 그려 조석으로 배알하고 모든 일은 알린 뒤에 시행하였다. 이윽고 송에 항복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황제가 명을 내려 벼슬을 후하게 더하여 주고 위로하였다. 뒤에 알리불(斡离不)에게 패배하자 황제가 죽이도록 명하고 그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금나라에 주었다. 처음에 금나라 사람이 연경을 함락시키자 소알(蕭斡)이 해왕부(奚王府)에 나아가 스스로 위에 올라 신성황제(神聖皇帝)라 하면서 연달아 경주(景州)ㆍ계주(薊州)를 함락시키더니, 얼마 지나 그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금주(金主) 아골타가 세상을 마치고 아우 오걸매(吳乞買)가 위를 이었으며, 야율대석이 금에서 돌아오자 연희가 그를 석방시켜 주고 연희도 돌아와 돌여불부(突呂不部)에서 기거하였다. 아리(雅里)가 죽자 소특열 등이 다시 종진(宗眞)의 손자 구열(求烈)을 왕으로 세웠더니, 뒤에 반란병에게 살해당하였다.

6년, 연희가 마가군(馬哥軍)에 이르렀다가 금인(金人)의 습격으로 오적렬부(烏敵烈部)로 도망하여 재차 군사를 동원하려 하므로, 대석이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대석이 끝내 자기가 왕이 되었다. 연희가 금나라와 싸우다가 패배하여 산음(山陰)으로 도망하였다.

7년, 당항(黨項)의 소곡록(小斛祿)이 연희에게 자기 땅으로 오라고 요청하였다. 천덕(天德)에 이르러 눈을 만나 식량이 떨어졌는데 야율출자(耶律朮者)가 보리가루와 대추를 진상하였으며, 연희가 휴식하려 하면 출자가 꿇어앉아 자기에게 기대게 하였다. 밤이 되어 민가에 유숙하려고 정탐하러 온 기병이라고 속여 말했으나 그집에서 알아차리고 말머리를 어루만지며 꿇어앉아 크게 슬퍼하였는데, 연희가 며칠 동안 기거하면서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절도사를 제수하였다. 그 뒤 응주에 이르러 금나라 장수 누실(婁室)에게 잡혔는데, 뒤에 강등되어 해빈왕(海濱王)으로 봉하여졌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4세이고 위에 있은 지 24년 만이었다. 연호를 건통(乾統)ㆍ천경(天慶)ㆍ보대(保大)라 고쳤으며 스스로 천조황7제(天祚皇帝)라 하였는데, 금에서 예왕(豫王)으로 고쳐 봉하고 여양(閭陽) 건릉(乾陵) 곁에 장사지냈다. 야율대석의 자는 중덕(重德)이니 아보기의 8세 손으로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한림응봉(翰林應奉)으로 뽑혔다가 요흥군절도사(遼興軍節度使)가 되었다. 그러나 연희가 쫒겨다닐 때 대석이 진진왕(秦晉王)순을 옹립하였으며 순이 죽자 연희가 대석을 책망하였으나 석방하여 주었고, 대석이 연희에게 금나라와 싸우지 말 것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추밀 소을설(蕭乙薛)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어 서쪽으로 도망하여 가돈성(可敦城)에 이르렀다.

정강(靖康 송흠종(欽宗)의 연호) 원년(고려 인종 4, 1126), 회골왕(回鶻王) 필륵가(畢勒哥)가 그를 맞아주었고, 국경 밖까지 전송하여 주었으며 군대가 만리를 행진하였다. 기아만(起兒漫)에 도착하여 황제라 일컬었으니, 이것이 서요(西遼)이다.

2년, 동으로 돌아가 호사알이타(虎思斡耳朶)에 도성(都城)을 쌓았다. 소흥(紹興 송 고종(高宗)의 연호) 6년(인종 14, 1136),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50세이고 위에 있은 지 12년 만이었다. 연호를 연경(延慶)ㆍ강국(康國)이라 고쳤으며 묘호를 덕종(德宗)이라 하였다. 아들 이열(耳列)이 어리므로 처 소씨(蕭氏)가 대신 정사를 보았는데, 이름은 탑불연(塔不煙)이고 호(號)를 감천황후(感天皇后)라 하였다. 12년, 세상을 떠나니 섭정한 지 7년 만이었다. 연호를 함청(咸淸)이라 하였다.

이열(夷列)이 위에 올랐다. 22년, 세상을 마치니 위를 참칭한 지 13년 만이었다. 연호를 소흥(紹興)이라 고치고 묘호를 인종(仁宗)이라 하였다. 아들이 어리므로 누이 보속완(普速完)에게 유언으로 명하여 섭정하게 하였는데, 호를 승천태후(承天太后)라 하였다. 뒤에 부마 소타노불(蕭朶魯不)의 아우 박고지사리(朴古只沙里)와 통간하고 이로 인하여 부마를 살해하였다. 건도(乾道 송효종(宋孝宗)의 연호) 4년(고려 의종 22, 1168), 부마의 아버지 소알리랄(蕭斡里剌)이 보속완을 쏴 죽였는데 섭정한 지 15년 만이었다. 연호를 숭복(崇福)이라 고쳤다.

이열의 둘째 아들 직노고(直魯古)가 위에 올랐다. 가태(嘉泰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원년(고려 신종 4, 1201), 사냥을 갔었는데 내만왕(乃蠻王) 굴출률(屈出律)이 군사를 잠복시켜 사로잡게 하여 그의 왕위를 차지하고는 직노고를 추존하여 태상황(太上皇)으로 삼았다. 얼마 후 세상을 마치니 위에 있은 지 34년 만이었다. 연호를 천희(天禧)라 고쳤으며 요나라가 망하였다.

내만왕(乃蠻王) 굴출률(屈出律)은 돌궐의 내만부 (乃蠻部) 출신이다. 요(遼)나라는 본디 선비(鮮卑)의 땅으로 요(遼) 일대의 늪지대에서 살았는데 유관(楡關 : 산해관(山海關))까지 1천 1백30리였다. 개척한 땅이 점점 넓어져 5경(京) 6부(府)에 1백 56개의 주(州)ㆍ군(軍)ㆍ성(城)과 2백 9현(縣), 그리고 52부족(部族)과 60속국(屬國)을 두었으며, 옛 유주(幽州)ㆍ병주(幷州)의 땅을 포괄하여 동으로는 바다에 서로는 유사(流沙)에 북으로는 여구하(臚朐河)에 남으로는 백구(白溝)에 닿아 폭과 둘레가 만 리나 되었다. 상경(上京)은 임황부(臨潢府)로 본래 한(漢)의 요동군 서안평(遼東郡西安平)인데, 요의 큰 도읍지로 뒤는 산, 앞은 바다로 농사짓고 목축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동경은 요양부(遼陽府), 중경은 대정부(大定府), 남경은 석진부(析津府), 서경은 대동부(大同府)이며 모든 주현(州縣)은 5경(京)에 분할하여 예속되게 하였다. 왕의 평상 거처에 궁위(宮衛)를 두는 것을 알노타(斡魯朶)라 하고, 행차 때 행궁(行宮)을 두는 것을 날발(捺鉢)이라 하며, 국경지대의 진지를 분할한 것을 부족(部族)이라 하였다. 일 이 생기면 침공하고 싸우고 한가하면 사냥하고 고기를 잡았는데, 그들의 왕이 가끔 춘수(春水)와 추산(秋山) 그리고 대막(大漠)사이에 행차하여 유람하였다. 그 지방은 심한 추위와 바람 때문에 수시로 옮겨다니면서 수레와 말을 집으로 삼아 가을과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고 봄과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였다.

주민들의 나이15세 이상 50세 이하를 군대에 예속되게 하였는데 늘 정규군1명에 말 3필과 타초곡(打草穀)이 따랐으며, 군영을 지킬 적에는 집에서 부리는 장정을 각각 한 사람씩 배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마다 쇠갑옷, 말등에 덮는 방석ㆍ고삐, 말의 갑옷, 활 4개ㆍ화살 4백 개ㆍ길고 짧은 창ㆍ홀타ㆍ작은 도끼ㆍ큰 도끼ㆍ작은 기(旗)ㆍ쇠몽둥이ㆍ송곳ㆍ화도석(火刀石)ㆍ말구유ㆍ사탕 1말ㆍ사탕자루ㆍ탑모산(搭傘) 각 1개, 말을 매는 끈 2백 척(尺)을 모두 각자 구비토록 하였다.

사람과 말에게 식량을 공급해 주지 않고 날마다 타초곡을 사방에 내보내어 노략질하여 제공토록 하였다. 그리고 사납고 모진 사람 1백 명 이상을 선발하여 멀리 정탐군으로 삼아 선봉의 앞 뒤 20여 리의 간격으로 배치하여, 밤중에 10리나 5리쯤 행군하다가 조금씩 머물면서 말에서 내려 귀를 기울여 사람과 말의 소리를 들어보고 들리면 그들을 사로잡고, 힘으로 상대하지 못할 적에는 선봉에서 급히 연락하였다.

군대 병력은1백 6십 4만 2천 8백 명으로 궁궐 호위병과 부족 등의 군대는 포함되지 않았다. 관리는 남북으로 나누었는데 본국의 제도로 거란을 통치하고 한(漢)의 제도로는 한 나라 사람들을 대우하게 하였다.

아보기가 질랄(迭剌)과 이리근(夷離菫)을 분할시켜 남북 두 대왕(大王)을 삼았는데 그것을 북남원(北南院)이라 하였다.북추밀은 병부(兵部)를, 남추밀은 이부(夷部)를, 북남 두 왕은 호부(戶部)를, 이리필(夷離畢)은 형부(刑部)를, 선휘(宣徽)는 공부(工部)를, 적렬마도(敵烈麻都)는 예부(禮部)를 관장하였으며, 북남부(北南府)의 재상이 통솔했는데, 북쪽은 황족(皇族) 4장(帳)이며 남쪽은 국구(國舅) 5장(帳)인데 대대로 그들을 선발하는 데 참여하게 하였다. 척은(惕隱)은 종족(宗族)을 통치하고 임아(林牙)는 외교문서와 보고문서를 편수하였으며, 우월(于越)은 가만히 앉아 공사(公師삼공)의 상징으로 논의하였다. 태자(太子)ㆍ친왕(親王)이 군사상의 정무를 총괄하게 되면 그것을 천하병마대원수(天下兵馬大元帥)라 하였으며, 대원수(大元帥)ㆍ도원수(都元帥)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남북에 좌우피실군(左右皮室軍)과 황피실군(黃皮室軍)이 있었는데 모두 정예의 군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천지(天地) 신(神)을 목엽산(木葉山)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제산의(祭山儀)라 하며, 가물 때 비가 내리도록 기도하는 것을 슬슬의(瑟瑟儀)라 하며, 또 사유의(射柳儀)와 시책의(柴冊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풍속에12세만 되면 꼭 한 차례 재생의(再生儀)를 시행하였는데 그것을 부탄(覆誕)이라고도 하였으며, 어머니의 산실(産室)을 마치 처음 태어날 때처럼 설치하여 어머니의 수고롭고 애쓴 은혜를 간직하게 하였으며, 이 의식은 왕과 왕후ㆍ태자 그리고 이리근(夷離菫)만이 행사하게 하였다.

그들의 음악을 아악(雅樂)과 이적(夷狄)의 악(樂)을 섰었으며 그들의 왕과 남반(南班)의 한관(漢官)들은 한(漢) 나라의 복장을 사용하였었고, 왕후와 북반(北班)의 요(遼)나라 사람들은 본국의 복제를 사용하였는데 본국의 복장 제도로는 관료들은 관복에다 모전(毛氈)으로 만든 관(冠)을 쓰고 금으로 만든 꽃을 꽂았으며, 혹 주옥(珠玉)과 물총새의 깃을 꽂기도 하였다. 이마 옆에 금으로 만든 꽃을 드리우고 배를 짜서 좁은 띠를 만들었으며 머리는 가운데로 모아 한 타래로 만들었다. 그리고 혹 깁으로 관(冠)을 만들어 쓰기도 하였는데 그 모양은 오사모(烏紗帽)와 같았으나 차양(遮陽)은 없고 양쪽 귀를 누르지 않게 하였으며, 이마 위에는 금으로 만든 꽃을 꽂아 위에 있는 붉은 댕기에 묶어 그 끝에는 구슬을 달았다.

그리고 붉고 소매가 좁은 도포를 입고 점첩대(䩞鞢帶)를 매었는데 황록색이고, 금옥(金玉)ㆍ수정(水晶)ㆍ정석(靛石)으로 장식하였다. 그들 왕의 공복(公服)은 붉고 검은 두건과 붉고 소매가 좁은 도포를 입고 띠를 둘렀으며, 관료들도 두건에다 붉은 옷을 입었는데 그들의 평상시 복장은 주로 붉고 파란 색깔이며, 군복은 모두 옷깃이 왼편으로 되었는데 검고 푸른 색깔이었다.

그들의 형벌은4가지가 있었는데 사형ㆍ귀양ㆍ징역ㆍ곤장이며, 또 경자(黥刺 얼굴에 먹물을 넣는 형벌)ㆍ목검(木劒)ㆍ대봉(大棒)ㆍ철골타(鐵骨朶)ㆍ채찍ㆍ지지는 형법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

아보기(阿保機) 부자(父子)가 백 번 싸워 이기는 형세를 틈타 새로운 나라를 일으켰으니 그 웅장한 지모(智謀)와 큰 계략(計略)은 원대하다 하겠다. 올욕(兀欲)의 중인(中人) 자질과 술률(述律)의 잔인하고 포악함 때문에 연거푸 시해와 반역을 당하였으나 그들의 창업 기반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역대의 권위와 명령이 오히려 흡족하게 그 나라 사람들을 두렵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융서(隆緖) 때부터 거듭 이웃 나라와 화친을 굳게 하여 나라 안팎이 잘 다스려지고 편안하였으니 어찌 그렇게 성대하였는가? 연희 때 와서 간사한 무리들의 말을 높이 신용해서 자신이 국가의 기틀을 망쳤다. 금나라 군대가 한 번 쳐들어오려고 하자 나라 안에서 반란이 먼저 일어나 왕을 폐하고 세우는 모략과 배반하고 도망하는 자취가 끊이지 않고 벌떼같이 일어나서 끝내 회복시켜 부지하지를 못하였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순(淳)과 아리(雅里)가 말한 '명분이 올바르지 못하면 일을 완성시키지 못한다.'고 한 것과 대석(大石)이 억지로 연장시켜 보려고 한 것이 그중 나은 것이지만 얼마나 더 낫겠는가?

출전: 역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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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史(송사) 金列傳(금열전) -1

宋史 金列傳 (<청장관전서> 제 23권 송사 금열전)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개명은 민(旻), 한성(漢姓)은 왕(王)인데, 핵리발(劾里鉢)의
운영자 12-05-22
[] 바투의 유럽 원정

바투의 원정 개요 전쟁주체 : 몽골족, 루스, 폴란드-독일(슐레지엔), 헝가리 전쟁시기 : 1236년-1242년 전쟁터 : 현재의 러시아, 폴란드,
운영자 12-01-28
[] 징기스칸의 정벌

징기스칸의 정벌 -푸른 이리의 후예들, 대제국을 세우다. - 거울제국(Mirror Empires) 서력으로 13세기 초반. 중국에서는 한(漢)족의
운영자 12-01-09
[] 대제국을 지배한 여자 기황후

훗날 세계 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한 기황후의 출발은 절망뿐이었다.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貢女)로 결정되었을
양승국 05-06-01
[] 구양수의 종수론(縱囚論)

종수론(縱囚論) 군자에게는 신의를 행하고, 소인에게는 형벌을 내린다. 죄과가 매우 커서 극에 달하면 사형에 처하는데, 이는 소인 중 특
양승국 04-12-07
[] 황천탕 싸움의 여장군- 양홍옥

황천탕 싸움을 승리로 이끈 남송의 여장군 양홍옥 서기 1130년 건염(建炎) 4년 한세충(韓世忠)과 양홍옥(梁紅玉)은 황제의 명에 따라 경구(京口
운영자 10-03-22
[] 文天祥(문천상)

文天祥(문천상) 자는 송서(宋瑞) ·이선(履善)이고 호는 문산(文山)이다. 강서성(江西省) 길수현(吉水縣) 출신이다. 1255년 20세때 진사에 수석
운영자 09-05-02
[] 청명상하도

淸明上河圖(청명상하도)는 청명 절기에 강의 주변 시가지를 구경한 것을 그린 것이라는 의미로 보면 될 것 같다. (上河(상하)의 上(상)은 구경하다라
운영자 09-04-28
[] 송과 요의 투쟁

송과 요의 투쟁 ① 거란의 남진과 후진의 연운16주 할양 송과 거란(요)과의 국제관계를 고찰하는데 있어 거슬러
양승국 06-08-05
[] 한세충과 황천탕(黃天蕩) 싸움

한세충(韓世忠)(1088~1151), 자는 양신(良臣)으로 연안(延安)사람이다. 남송 때 활약한 사람으로, 금에 대항한 명장의 한 명으로 꼽힌다. 한세충은 악
운영자 08-03-02
[] 바투가 세운 Golden Horde 제국의 영역

바투 (Batu ; 1207 ?~1255) 킵차크한국의 제1대 군주로서 칭기즈칸의 손자로서 1227년 칭기즈칸의 맏아들인 아버지 주치[朮赤]의 영지를 계승
운영자 07-09-11
[] 몽골기마군단의 유럽정벌전2-사요강전투

사요 섬멸전 (Battle of the Sajo river, April 11, 1241) 기동 유럽원정 몽골군의 총 병력은 12만 명이었지만, 순수 몽골 기병은 5만 명이
운영자 0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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