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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6-09 11:27:435725 
[列國志 兵法 ⑤] 진문공(晉文公)의 국가경영학..
양승국
일반

[列國志 兵法 ⑤]

진문공(晉文公)의 국가경영학

험하디 험한 후계자 다툼 속에 여러 인접국을 유랑하며 집권의 순간을 기다려온 진나라 문공. 굶주리고 박대받던 19년 세월이 그에겐 현군(賢君)의 자질을 쌓는 값진 자양(滋養)이었다. 그는 이를 토대로 집권하자마자 다채로운 국력 배양책을 쏟아냈는데, 특히 ‘초재진용(楚材晉用)’이란 성어가 생길 만큼 개방적인 인사정책은 그의 치하를 더욱 번성케 했다.

一. 여희(麗姬)의 음모

망명과 유랑 19년에 지칠 대로 지친 노구를 가까스로 추슬러 귀국하고는, 즉위하자마자 안정을 되찾고 신경지를 개척하며 부강조국을 이룩한 정치가가 있다.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覇者)로 등장한 진(晉)나라의 문공(文公)이다. 그 성공의 비결엔 현대인도 배울 점이 많다.

원래 진나라는 고대 한(漢)족이 주로 모여 살던 중원(中原)의 제후국치곤 퍽 강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헌공(獻公) 재위시에 후계자 선정문제를 둘러싼 자중지란이 심화되면서 국세가 급속히 추락하고 말았다.

헌공도 중년까지는 퍽 똑똑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내를 여읜 뒤 그 자신 전쟁을 즐기며 정복지에서 소수민족 미인들을 ‘전리품’으로 수탈해 궁중에 들여놓고 익애(溺愛)하면서부터 탈선과 오판이 잦았다. 일찌감치 찾아든 노망끼 탓인지도 모른다.

특히 여산에 살던 융족 일부를 정복해 그곳의 미인 여희 자매를 얻어 몹시 사랑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여희는 아들 해제(奚齊)를 낳았고, 그 동생은 아들 탁자(卓子)를 낳았다. 이에 앞서 헌공은 이미 선처와의 사이에 태자인 신생(申生)과, 둘째 중이(重耳), 셋째 이오(夷吾)를 뒀는데, 세 아들 모두 착하거나 똑똑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편 여희는 야만족 출신으로 배운 것은 없었으나 머리가 좋았다. 그녀는 자기 소생인 해제로 하여금 태자가 되게 하여 정복자의 나라를 거꾸로 탈취하고자 결심했다. 그 기초공사로 우선 헌공에게 최선의 봉사를 다해 사랑을 받는 동시에 유력한 대신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노력엔 빈틈이 없었다. 그 바탕 위에 전형적인 궁중 음모 3단계 작전을 구상했다. 냉정하게 병법적 시각에서만 평가한다면, 단기적으론 성공작이었다.

우리 조선왕조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 앞으로도 유사한 시도가 있을는지 또한 알 수 없으니, 정치적 경각심을 갖도록 머리의 체조 삼아 읽어나가기 바란다.

궁중 음모 3단계 전략

[제1단계-라이벌 따돌리기] 여희는 자기가 낳은 해제를 새 태자로 결정할 생각이 헌공에게도 없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나 태자 후보 경선에 나설 경쟁자들이 만만찮음을 관측했다. 라이벌들을 먼 곳으로 따돌려 경쟁력을 약화시킬 필요성을 통감했다. 그래서 유력한 안보담당 대신들을 뇌물로 매수해 헌공에게 건의케 했다.

“우리 진나라의 사활적 요충지는 곡옥(曲沃), 포(蒲), 굴(屈)인데, 나라를 수호하려면 유능한 공자님을 각기 현지에 거주시켜 다스리게 하는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헌공이 그 진언에 따라 태자 신생을 곡옥, 둘째 중이를 포, 셋째 이오를 굴에 보내 거주케 하면서 군사와 행정을 총람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게 한 것이다(中華書局, 春秋左傳 註, 北京, 2000, 上 239쪽).

그런데 영국의 처칠은 “무대 가까이 있어야 등장할 기회가 많다”고 갈파한 바 있다. 음모를 방지하고 자기 세력을 심어두기 위해서도 최고 통치자 가까이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라에 정치 중심지가 둘 있다면 먼 곳을 선택하는 것이 불리하고 위험하게 마련이다.

[제2단계-주적(主敵)의 제거] 적은 하나여야 한다. 공격할 때는 중점을 설정하고 거기에 힘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 이곳저곳으로 정신이 흩어지면 지고 만다. 양면(兩面) 작전은 패망의 선택이자 바보짓이다.

여희는 그 점을 잘 헤아리고 있었다. 세 공자가 합세(合勢)하지 않도록 유의한 것이다. 우선 태자 신생을 부추겨 간계에 말려들게 했다. 신생이 거주하는 곡옥의 전통음식을 헌상하면 부군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진상 음식이 도착하자 여희는 남몰래 음식에 독극물을 섞었다. 헌공이 식사하려 하자 여희가 말리면서 먼저 시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한 조각을 개에게 던졌더니 먹자마자 개가 쓰러졌다. 이어 노예에게 먹어보라 했는데 역시 죽고 말았다. 여희는 통곡하면서 말했다.

“태자께서는 어찌하여 그렇게 잔인하실까요.”

그래도 헌공은 “증거도 없는데 설마…” 하고 결론내기를 주저했다.

태자의 측근은 여희의 작란(作亂)이니 즉각 변명하자고 했다. 혹자는 외국 망명을 건의했다. 그러나 착하디 착한 태자 신생은 고민 끝에 고령의 아버지 헌공이 여희와 더불어 편안하게 여생을 마치시길 염원한다면서 자살하고 말았다(司馬遷, 史記, 晉世家).

[제3단계-‘공범’조작과 잔적 소탕] 포와 굴에 각기 움츠려 살다 그러한 정보를 접한 두 공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걱정이 태산 같았다. 수도의 동향을 알아보고자 탐문꾼을 파견하기도 했다.

한편 여희 측에서는 이를 역이용하며 잔적(殘敵) 소탕전략을 세웠다. 헌공이 철저한 조사를 엄명하자 여희는 매수한 정보원들을 시켜 “나머지 두 공자인 중이와 이오도 독살 음모를 미리 알고 있었으니 공범임에 틀림없다”고 보고하게 했다.

이에 헌공이 분노하여 군대를 보내 포를 쳤다. 공자 중이는 가까스로 도주하여 적(翟)으로 망명했다. 망명과 유랑 19년의 어설픈 출발이었다. 헌공은 또 굴을 쳤다. 공자 이오는 양(梁)으로 망명했다.

마침내 후계자 교체 음모로 빚어진 만성적 국정혼란의 시기가 개막됐다. 늙은 군주가 후처를 사랑하고 그 소생을 태자로 삼으려면 혼란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느 왕조에나 흔히 있을 수 있는 부정적 사례다. 현대의 ‘인민공화국’이라 해도 권력세습에 집착하면 유사한 사태 발생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론형성층과 유대 못해

여희의 음모로, 국내에서는 해제의 즉위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기적 성공에 불과했다. 외국으로 망명한 ‘대안’들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국내라고는 하지만 여희의 매수 작전은 귀족 관료사회의 일부에 그쳤던 것이다. 우선 군대를 장악하지 못했다. 또 반대세력 탄압에 활용할 정보기구도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 특히 여론형성층과 이해일치(利害一致)라는 유대를 설정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었다. 그러니 유사시에 국민의 외면과 방관, 지배층 내부의 혼란이 초래될 것은 자명했다. 헌공은 그 와중에 불안과 고민을 가누지 못한 채 노환으로 병석에 드러눕게 됐다. 하루는 심복이라고 믿어온 중신 순식(荀息)을 불러 말했다.

“나는 해제를 후계자로 작정했으나 아직은 어려서 여러 대신이 심복지 않고 있다. 즉위 후 반란이 있을까 걱정된다. 경은 해제를 옹립하고 수호할 수 있겠는가?”

순식이 대답했다.

“안심하십시오. 결심이 섰습니다.”

그러나 순식은 결심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세 판단이나 조건 형성은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헌공은 그 말만 믿고 순식을 재상으로 임명해 해제 옹립을 부탁했다. 헌공이 사망하자 외국에 망명 중인 중이를 영입하려는 세력과 이오를 옹립하려는 세력이 뒤질세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중이 영입파인 리극(里克)이 상중(喪中)의 해제를 궁중에서 시해했다. 순식이 해제의 동생 탁자를 즉위시키고 헌공의 시신을 매장했다. 그 다음달에 리극 등은 탁자도 시해하고 말았다. 동시에 순식도 순사했다.

승리감에 도취한 리극 등이 중이한테 특사를 파견, “영립(迎立)할 것이니 속히 귀국해 즉위하소서” 하고 권유했다. 만약 당신이 중이의 처지에 있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중이는 얼씨구나 하지 않았다. 깊은 생각 리극의 청원을 물리치면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부군의 뜻을 어기며 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래서 부군이 서거하셨어도 장례에 참석지 못했습니다. 그런 내가 어찌 귀국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大夫)께서 아무쪼록 다른 공자를 옹립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숙고를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일부 대신들이 군주를 두 사람이나 죽이고 나를 새 군주로 옹립하려 한다. 이 마당에 곧바로 귀국하면 그들이 피 묻은 손을 들어 나를 환영하겠지만, 결국 나 역시 암살당하든지 그들의 괴뢰가 되고 말 것이다. 국민이 따르지 않고, 국제적으로도 평가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귀국하면 불안만 가중될 뿐 소신을 펼 수 없겠다. 즉위하고 싶지만 현재는 그 시기가 아니다….”

二. 19년의 유랑생활 끝에 군주의 자리에 오르다.

결국 리극 집단은 이오 옹립파와 합세하여 양에 있던 이오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이오가 귀국을 서두르자 측근들이 말렸다. 길은 멀고 국내에도 반대세력이 있으니 우선 요소요소를 회유하고 무마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외교적 공약(空約)과 국내용 정치공약(公約)의 남발이었다.

그래서 이오는 이웃 강대국인 진(秦)나라의 목공에게 특사를 보내면서 친서와 선물을 지니고 가게 했다. 자신의 귀국을 보호해주면 즉위 후 하서(河西) 땅을 헌상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중국어 발음으로 진(秦)은 ‘친’, 진(晉)은 ‘진’). 그리고 국내의 리극에게는 즉위하면 분양(汾陽)의 땅을 쪼개어 봉하겠노라고 공약했다.

그러나 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라 후에 혜공(惠公)이라는 시호를 갖게 된 이오는 자기 파벌의 확장과 근위대 및 정보기구의 강화에 급급했다. 배신과 파약의 연속이었다. 리극에겐 자살을 강요했고 그후에 잔당을 모조리 숙청했다. 그 꼴을 보고 국민이 심복하지 않았다.

나아가 경솔한 혜공은 하서의 땅에 대한 할양약속을 파기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는 은인의 나라이기도 한 진(秦)나라를 치려고 했다. 두 나라 군사가 한원(韓原)에서 크게 싸웠는데, 진(秦)나라가 대승했다. 혜공은 포로로 잡혀 압송당했다. 배신자라고 처형당할 뻔했다.

혜공은 가까스로 풀려나 귀국했으나 대신 인질로 태자 어(圉)를 보냈다. 그리고 자기 파벌의 중신들과 모략을 꾸몄다. 우선 ‘제후들이 외국에 망명 중인 중이를 귀국하게 한 뒤 즉위시키려 하니 불안하다’는 이유로 암살단을 파견했다. 중이는 그 소식을 듣고 거처를 동방의 대국인 제나라로 옮겨 피신했다. 인질로 갔던 태자 어는 비밀리에 도주하여 귀국했다. 그후 혜공이 죽자 태자 어가 즉위했으니 회공(懷公)이라 칭했다.

천하가 혜공·회공 부자의 잔꾀와 배신으로 가득찬 정보 공작과 파당정치를 혐오했다. 특히 서쪽 대국인 진(秦)나라 목공은 망명 중인 중이를 찾아내어 무력으로 귀국시킨 다음, 즉위시키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진(晉) 내부에 잠재하는 내응세력과 합작하여 회공을 죽였다. 그후 중이는 귀국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곧 진(晉) 문공(文公, BC 697∼628)이다.

중이는 마침내 19년의 유랑생활의 고초 끝에 62세의 나리로 즉위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초고령의 기적적인 정계 등장이었다. 문공이 즉위함으로써 진(晉)나라는 지루했던 다년간의 국정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유례없는 고령의 즉위였으나, 문공의 등장은 ‘준비된 집권’이었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도는 부평초마냥 적(狄), 제(齊), 위(衛), 조(曹), 송(宋), 정(鄭), 초(楚), 진(秦) 등 여러 나라로 거처를 옮기면서 때론 굶주리고 때론 모욕을 참아내면서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피해 다녔다. 도피에만 급급한 허송세월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각국의 다양한 정치현실을 심도 있게 비교 연구했다. 나아가 귀국에 대비해 미리 정책 청사진의 대강을 마련했다. 적재적소에 등용할 인재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귀국하자마자 시행착오 없이 즉각 효율적인 국정을 펴나갈 수 있었다. 그는 우선 구시대 정치의 폐해가 혼란과 불신에서 비롯된다는 데 착안했다. 그러니 새 정권의 급선무로 안정과 신뢰가 부각됐다. 신경지 개척은 그 다음의 일이다.

‘소외세력’ 포용, ‘경력파’ 무시

국내 정치에서는 우선 안정과 화합, 신뢰와 협동을 표방했다. 한편으로 집권 초창기엔 기득권층의 저항을 극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지지세력을 급속히 요직에 등용하여 새 정권의 통치기반을 공고화할 과제도 부각됐다.

당시의 기득권층은 궁정 안팎의 종실 귀족과 대부(大夫)들, 특히 벼슬을 이용해 토지를 불법 점유한 무리였다. 문공은 그들의 재산에 섣불리 손대지 않았으며, 과거의 죄악을 묻지도 않았다. 설령 민원대상이 있어 지지세력이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에도 정책적으로는 ‘과거사 규명’을 하지 않았다. 만부득이한 사안이라도 단계적인 각개격파의 원칙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지지세력의 요직 등용은 신(新)정권의 화급한 자위적 요청이기도 했다. 문공은 집권 즉시 망명 시절 줄곧 자기를 따르며 지켜준 충신들을 모두 중용했다. 도중에 멀어진 사람들이라 해도 적어도 당분간은 충성할 것으로 보고 한때의 유감을 접고 등용했다. 새 인재 등용에서는 그동안 구(舊)정권에서 푸대접받았거나 무대접으로 취급된 ‘소외권’ 인사들을 대담하게 기용했다. 또 군소집단(현대 용어로는 정당 결성 이전의 이익단체나 서클 등)을 포섭하고 단결시키는 데 유의했다고 한다(中國改革史, 河北敎育出版社, 石家莊, 1997, 20쪽).

三. 인사정책을 통한 내정개혁

한편 자신의 무능을 탓하진 않고 ‘가문’ 타령을 하는 인물, 과거 독재자에게 아부해 얻은 벼슬을 다시 내세우는 이른바 ‘경력파’ 인물들은 무시했다. 능력제, 공적 중시의 인사정책을 편 것이다. 이와 관련, ‘숨어 사는 인재’들을 발견하는 대로 천거하라고 국가기관에 지시했다.

군대 개혁에서도 인사정책을 중시했다. 능력과 업적, 공훈 위주의 승급을 관철했다. 군복무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군정합일(軍政合一) 정책을 썼더니 행정효율이 크게 향상됐다는 기록이 있다. 군복무자들을 각급 공무원으로 수시 전용한 것이 사기 고무와 효율 향상에 고루 이로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과거 박정희 정권의 초기 인사정책을 연상케 한다. 나아가 수시로 군대를 시찰해 작전 연구와 군사훈련을 점검했다고 한다. 그 결과 한동안 흩어졌던 군기가 바로 서고, 전투력이 눈부시게 향상됐다.

경제개혁에선 ‘공정한 정치로 민생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정평민부(政平民阜)’ 정책을 기조로 삼았다. 우선 부질없는 각종 규제를 철폐했다. 부패관료의 수뢰수단을 일소했고, 경제발전의 대로를 활짝 터놓았다. 오늘날에도 정부가 큰길을 닦고 전기·수도·가스만 끌어오면, 나머지는 민간이 알아서 잘해나가는 법이다. 졸렬한 ‘행정지도’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

문공은 이어서 조세경감, 채무탕감, 빈민구제, 취업확대, 상공진흥 등에 걸쳐 ‘나라의 보살핌’을 실감케 했다. 정치안정과 경제부흥을 비롯한 내실화 작업이 일단락되자 부강한 나라, 탄탄한 국력을 여러모로 실감할 수 있게 됐다. 그러한 바탕 위에 문공은 ‘패자(覇者)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러자면 신의 있는 외교,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대의명분 그리고 군사적 우세에 관한 국제적 확인이 필요했다.

秦 따돌리고 楚 누르기

당시의 열국 정세를 볼 때 여러 제후국 중에서 패권 경쟁에 나설 만한 강대세력으로는 제(齊)·진(秦)·초(楚)·진(晉)의 4개국뿐이었다. 그중 제나라는 초대 패자였던 환공(桓公)과 명재상 관중(管仲)의 잇단 사망 이후 지저분한 후계 싸움과 간신배의 발호로 말미암아 급속히 약화되고 혼란에 빠져들어 경쟁권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제 문공이 패자가 되는 길은 진(秦)을 따돌리고 초(楚)를 누르는 방안으로 요약됐다.

다행히 문공은 망명·유랑 과정에 그 나라들에서 따뜻한 대우를 받아 군주들과 우호적인 신의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티끌만한 불신이나 적대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진(秦)나라는 문공의 귀국과 즉위에 지극히 호의적이었으며 3000명의 병력으로 호송해주기까지 한 은의가 있었다. 다만 그 인구 구성이 한족(漢族) 일색이 아니라 서주(西周)의 잔여세력과 융이라는 이민족이 합세한 나라라는 데서 이단시되기는 했다. 중원의 패자가 되기엔 시기상조의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초나라는 중원의 한족 문명에 동화되었지만 원래 남쪽의 야만족 출신으로 여겨지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망명 중이던 중이(문공)를 환대했고, 동등한 제후격으로 대접해준 은의가 있었다. 더욱이 초성왕(楚成王)은 문공에게 “귀하가 귀국해 즉위한 후에는 무엇으로 과인의 호의에 보답해주시겠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문공은 “만약 부득이 싸움터에서 회전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때 군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저의 군대를 3사(三舍·90리)에 걸쳐 후퇴시키겠습니다” 하고 약속한 바 있다. 공인의 약속은 신의로 지켜야 한다. 초는 중원 진출에 매우 적극적이며 조급해했다.

한편 중원의 약소 제후국인 진(陳)·채(蔡)·정(鄭)·허(許) 등은 국가안보를 강대세력인 초에 의존하고 있었다. 송(宋)나라도 초를 두려워하여 속국이 되다시피 했으나 문공 통치하의 진(晉)의 부흥을 보자 그 밑으로 들어가 보호받고자 했다.

초나라는 그러한 송의 표변에 분개했다. 성왕이 직접 출정하여 응징하고자 약소 동맹국들인 진·채·정·허 등의 무력을 합쳐 송나라로 진격했다. 송나라는 진(晉)에 긴급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문공은 대책회의(안보회의)를 소집했다. 장군 선진(先軫)이 출병 방침을 건의하면서 세 가지 이득을 말했다. 첫째는 문공 망명 기간에 호의로 접대해준 송나라를 구원함으로써 은의에 보답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흥한 진(晉)나라의 위세를 제후들에게 시위하고, 셋째는 그 바탕 위에 패자로 우뚝 선다는 것이다. 그 건의는 이의 없이 채택됐다.

‘간접적 접근’으로 승리

구체적인 방법론으로는, 호언(狐偃)이 전략상 아군은 송나라로 직행하지 말고, 먼저 초나라와 긴밀한 관계인 조(曹)와 위(衛)를 치자는 우회전략을 말했다. 그러면 초가 그들을 구원코자 자연히 송나라에 대한 포위작전을 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전략 역시 채택됐다.

四. 9년의 집정기간으로 패권국의 지위를 공고히 하다.

이 우회적 전략은 현대에 와서도 영국의 군사평론가 리델 하트가 극구 평가하는 ‘간접적 접근(Indirect approach)’과 발상이 동일하다. 반면에 수뇌부의 직선적 사고방식은 대체로 패전과 망국을 초래한다.

행동 개시 직전에 문공은 동쪽의 제와 서쪽의 진에 걸쳐 소외감 없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포석을 잊지 않았다. 동주 왕조에 대해서도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문공의 명령이 하달되자 진(晉)은 삽시간에 조나라와 위나라를 석권했다.

급보에 접한 초성왕도 송나라의 점령지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대신들 사이에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초나라의 대장 자옥(子玉)이 진문공의 무례를 규탄하며 결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성왕은 문공이 선정을 베풀어 국력을 배양한 데다 그 배경에 서쪽의 진과 동쪽의 제라는 강대 세력이 있음을 감안했다. 요컨대 성급한 결전을 원치 않았다. 계속 송에 대한 포위공격 태세를 유지하면서 진과의 타협적 화해를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성왕 자신은 귀국했다. 정세가 불리하니 결전을 회피해야 한다는 판단은 옳았으나 일부 요행심리와 체면유지 등에 이끌려 명확한 엄명을 내리지 못한 점은 그의 과오였다.

한편 자옥은 왕명에 따라 진과 타협하여 강화를 모색해보려 특사로 원춘을 문공한테 보냈다. 문공이 조나라와 위나라에서 철군하면 초군도 송나라에서 철군하겠다는 교환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 문공의 측근인 선진(先軫) 장군은 적장 자옥을 결전으로 유인하기 위해 오만한 그를 격분시켜 판단을 그르치게 만드는 세칭 ‘격장법(激將法)’이란 계략을 쓰자고 했다. 조와 위에는 영토반환을 조건으로 초와 단교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또 자옥이 보낸 특사를 감금했다. 격분한 자옥은 초군을 주력으로 삼아 중앙에 배치하고, 정·허·진·채 등 겁 많은 속국 병력을 우익에 배치하여 진격을 개시했다.

한편 문공은 호언의 계략에 따라 ‘퇴피삼사(退避三舍)’를 단행했다. 표면상으로는 문공 망명시에 초성왕이 베푼 우대에 보답하여 신의를 지킨다는 것.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문공의 진군이 미리 차지한 유리한 지형 안으로 초군을 유인한 것이다. 즉 아군의 우세한 병력을 집중 배치한 싸움터까지 피로한 적을 깊이 끌어들여 격멸한다는 계산이었다.

이른바 성복(城濮) 싸움은 기원전 632년 초여름에 전개됐다. 쌍방 병력은 비등했는데 합계 3만명 정도였다. 진군은 우선 초군의 약점인 우익의 잡군을 맹공하여 파급 효과를 넓혀나갔다. 그리고 적의 주력을 포위망으로 유인해 퇴로를 끊고 측면 공격으로 섬멸했다. 결과는 문공의 완승이었다. 초군의 장군 자옥은 가까스로 싸움터를 빠져나갔으나 곧 자살하고 말았다.

東周 몰락의 반면교사

그 무렵 동주(東周) 왕실은 이미 유명무실할 정도로 쇠락해 있었다. 중국 역사학자들의 통설에 의하면 ‘서주(西周) 정권의 급격한 몰락은 왕실의 동쪽을 향한 수도 이전과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이다(常金倉, 窮變通久, 瀋陽, 1998, 237쪽). 일반적으로 수도 이전은 쇠락의 길을 달리려는 꼴이라고 알려져 있다.

필자도 동감이지만 예외적 경우도 없지 않으니 ▲점령 공고화 ▲신경지 개척에 해당되는 진취적 발상이라면 달리 평가할 수도 있겠다(예를 들면 이스탄불, 워싱턴, 브라질리아 등).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중심적 근거지 포기에 따른 경제 동요와 안보 약화 ▲기민의식(棄民意識)에 따른 많은 인구의 지지 포기 ▲국론분열의 반영구화 등을 감안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 현대에 발생할 만한 특수한 문제로는 ▲‘두 집 살림’과 근무조건 악화 ▲노조활동의 이상 기류 ▲부동산 투기풍조의 새 양상 ▲행정효율 저하와 맞물린 노동생산성 저하 ▲권위와 권능에 걸친 불신의 심화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문제 상황은 어느 누구라도 감당하기 어렵다. 따라서 문제는 줄여나가야 한다. 부질없이 늘릴 일이 아니다.

하여튼 주양왕(周襄王)은 성복싸움의 결과를 보자 역학관계와 대의명분을 고루 감안해 정식으로 진의 문공을 패자(覇者)로 임명했다. 그후 진나라의 영도적 우세는 약 100년간 지속됐다. 군사력과 경제력에 보태어 국제적 공신력이 컸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개방적이고 공정한 인재등용 덕분이다.

‘초재진용(楚材晉用)’이라는 성어(成語)가 있다. 자국의 인재가 타국에서 쓰인다는 뜻이다. 원래의 뜻은 인재의 출생은 초국이 많으나 그 등용은 진국이 많다는 것이다(春秋左氏傳, 襄公, 二十之年). 지역감정이나 가문 타령, 당파 성향 등에 구애하지 않는 개방적 인사정책이 진 문공의 성공 비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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