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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9-02 01:38:455534 
제자백가의 전쟁론-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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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자백가의 다양한 전쟁론과 그 철학적 문제의식


(Über die Unterschiedlichkeit  der  philosohischen Anschauungen von 'hundert Schulen' in bezug auf ihre verschiedenen Kriegstheorien)




                                           宋 榮 培 (서울대 철학과 교수)


 




    ◀  목           차  ▶




1.  문제 제기:


    -- 기원전 4 - 3세기(戰國時代) 전쟁의 결정적인 사회적 역할 --




2.  법가(法家)와 병가(兵家)의 주전(主戰)론과 국가공리주의의 실현


    2.1  제법가(齊法家)의 전쟁 신중론과 필승론


         2.1.1  󰡔관자󰡕(管子)의 전쟁론


         2.1.2  󰡔손무병법󰡕(孫武兵法)


         2.1.3  󰡔손빈병법󰡕(孫臏兵法)


    2.2  진법가(秦法家)의 절대적 국가의지 실현과 농전(農戰)론


         2.2.1  상앙(商鞅)의 농전(農戰)론


         2.2.2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의전’(義戰)론과 진(秦)의 무력통일




3.  유가의 의전(義戰)론과 왕도(王道)정치의 이상


    3.1  공자의 ‘화합’의 이상사회와 천자의 ‘정벌’전쟁론        


    3.2  맹자의 ‘인정’(仁政)론의 이상과 의전(義戰)론의 의미


    3.3  순자의 ‘의병’론: 예치(禮治)의 실현과 ‘인의의 군대’(仁義之兵)론


   


4.  묵가의 ‘만민박애’[兼愛]의 이상과 ‘침략반대’[非攻]론


    4..1  묵가의 인간의 ‘노동’ 본질론과 전쟁으로 인한 민생파탄의 고발


    4..2  ‘침략반대’론과 방위론




5.   도가학파의 ‘전쟁부정’(非戰)론과 내면적 자유의 추구


     5.1 양주(楊朱)학파의 ‘경물중생’(輕物重生)론과 전쟁부정론


     5.2 송견(宋銒)․윤문(尹文)의 과욕론과 평화론


         5.2.1 ‘편견의 제거’[別宥]와 마음의 평화


         5.2.2 ‘침략반대와 무기폐기’(禁攻寢兵)론


     5.3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의 이상과 전쟁부정(非戰)론


     5.4  장자의 절대인식의 부정과 전쟁무용론


         5.4.1  장자의 상대주의적 인식론과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5.4.2  장자의 ‘자아’의 해방의식과 전쟁무위의 비유




6. 결   론


1. 문제제기  


   -- 기원전 4 - 3세기(戰國시대) 戰爭의 결정적인 사회적 역할 --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근본적인 사회적 전환의 계기는 철제농기구의 사용, 우경이나 관개수리시설 등등의 도입에 의한 농업생산력의 급격한 증가에 의하여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이런 농업생산력의 급격한 증가의 결과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소수의 봉토소유자들은 주위의 군소한 영지국가들을 무력으로 통합하여 갔다.  특히 기원전 4세기 이래 강력한 대 제후국, 말하자면 <萬乘之國>(戰車 만대의 병력을 보유한 국가)들은 당시의 전면적인 전쟁상황에서 그들의 세력강화를 위하여 각각 나름대로의 철저한 국가적인 사회개혁, 즉 변법(變法)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강해진 국력들은 필연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대 전쟁을 치르면서, 개별적인 전쟁승리와 관계없이, 혹은 쇠잔해지고 혹은 강력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보다 더 강력한 ‘하나의’ 관료적 절대주의국가에 의한 ‘다수제후국의 전쟁멸망과 그로 인한 중국고대사회 미증유의 ‘새로운 천하통일’의 실현은 당시에 필연적인 역사적 흐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같은  역사필연적으로 긴박한 전쟁상황 속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전쟁들의 내용은, 󰡔春秋左傳󰡕, 󰡔國語󰡕, 󰡔戰國策󰡕, 󰡔史記󰡕 등등에 광범하고도 극명하게 기술되어 있다. 특히 기원전 4 - 3 세기 戰國시대에는, 당시 개개 국가들의 정치적 군사적 세력중심지, 즉 도시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수 많은 군사외교전략가, 즉 縱橫家1)들의 잡다한 제안과 책략들, 말하자면 외교적인 군사음모들을 통하여, 몇몇씩 연합하거나(合縱說) 또는 그 연합전선에 대항하면서(連橫說),  그들의 온 국력을 대규모 전쟁에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전쟁을 유도 조절하므로써, 戰國시대를 가장 풍미했던 이들 종횡가들은 --- 전쟁이라는 강한힘의 논리 쓰지 않고서는 --- 경쟁하는 국가들간의 사회적 충돌과 갈등의  해결, 즉 ‘天下統一’은 이룩 될 수 없다는 전쟁옹호론을 폈다.




“옛날에 神農은 補遂씨를 정벌했으며, 黃帝는 涿鹿지역을 쳐서 蚩尤를 사로 잡았다. 堯는 驩兜(환두)를 쳤고 舜은 三苗씨를 정벌하였다. 禹는 共工씨를 쳤으며, 湯은 夏를 정벌하였다. 文王은 崇을 쳤고 武王은 紂를 징벌하였다. 齊 桓公은 전쟁으로 천하의 覇者가 되었다. 이렇게 (모든 왕업이 전쟁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면, 어떻게 전쟁을 안할수 있겠는가! 옛부터 (제후의) 使臣들이 많은 마차를 타고 질주하면서 서로 맹약을 하고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려 하였다. 그들은 合縱說을 쫓기도 하고 혹은 連橫說을 쫓으면서, 전쟁을 계속하였다. [...] 침략전쟁이 끄치지 않으니 (맹약의) 文辭는 현란하건만,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세상의 평화를 아무리) 혀가 닳고 귀가 막힐 정도로 외쳐도 공효를 볼 수 없으며, 아무리 맹약에 대한 信義를 외쳐 보아도 天下는 서로 가까울 수 없었다. 이에 文治를 폐하고 軍備에 집중하여 죽음을 각오하는 무사를 크게 양성하고 병기를 정비하여, 전쟁터에서의 승리를 취하고자 하였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서 경제력이 커지고, 그저 안주하면서도 영토가 확장되기를 바라기만 한다면, 비록 (과거의 이상적인) 三王이나 五帝 五覇, 또는 明主 賢君이라도 앉아서 그것을 바란다면, 형세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전쟁이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지금 천하를 병합하고자 대국을 침략하고 적국의 기세를 꺽은 다음, 온 천하를 제압하여 만백성을 자식으로 삼고 제후들을 신하로 부리자면, 전쟁없이는 안되는 것이다.”2) 




그러나 전쟁이 수반하는 참상은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것이였다. 따라서 전쟁에 의한 민생의 전면적 파탄을 지적하는 전쟁반대이론의 논조 또한 매우 강렬한 것이였다.




"지금 王公大人들과 천하의 제후들은 [...] 반드시 자기의 謀臣과 武將들을 시켜서 수레(車)와 배(舟)의 군대를 진열시키고, 여기에 견고한 갑옷과 예리한 무기를 갖추고서 무죄한 나라를, 가서 攻伐하려고 한다. 그 나라의 변경을 침입해 들어가서는 그 나라의 곡식을 베어가고 수목을 베어 버린다. 성곽을 부숴버리고 하천을 메워 버리며, 가축들을 빼앗고 죽이며, 祖廟를 불질러 버린다. 백성을 도살하고 노약자를 짓밟으며 그 나라의 보물을 옮겨 간다."3)




"지금 三里의 소도시와 그 외곽 7 리를 공격하자면 精兵과 (사람을) 죽이지 않고서 그것을 얻겠는가? 죽은 사람이 많으면 수 만이 되고, 적게도 반드시 수천은 된다."4)






이와 같이 春秋戰國시대에는 한 도시나 한나라 전체를 유린하고 초토화시키는 대규모 전쟁들이 길면 몇 년이고, 짧아도 몇 달씩 지속되었다. 이런 엄청난 전쟁의 결과, 소국 백성의 생명 안전은 물론 경제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오로지 승리하는 몇몇 대국(예 齊, 晉, 楚, 越 등)5)에 굉장한 물질적인 富가 집중되었을 뿐이다. 여기에 물질적인 부를 소유한 자는 무엇이나 할 수 있기에 이른 것이다. 莊子는 이것을 逆說的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富는 사람을 이롭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좋은 것을 다 이루게 하고, 세력을 극치에 이르게 한다. (이것은) 至人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요, 賢人이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남의 용기와 힘을 동원하여 위세를 떨치고, 남의 지능과 꾀를 빌려서 명철한 판단을 하며, 남의 덕행을 가지고 賢良함을 나타낸다. 국가를 소유한 것은 아니나 그 위엄이 군주와 같다."6)


         


      


과거 春秋시대에 50 여 제후국들이 병립하여 단기전의 소규모였던 전쟁의 양상은 이젠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7) 이제 대규모의 전쟁 교전 국면은 이른바 七雄(韓魏,趙,齊,秦,楚,燕) 간의 싸움으로 압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히 이미 춘추 중기 이후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전쟁양상은 필연적으로 전쟁방식의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하였다. 종래의 참전인원이 많지 않았던  戰車 중심의 전쟁이 점차 대규모의 보병전으로 전환되기 시작했고 이같은 전쟁양상의 대규모화는 자연히 전쟁의 장기화를 낳게 되었다.8)  따라서 이로 인한 사회적 참상과 혼란 및 당대 민중들의 고통은 최악의 상태였다. 대규모 전쟁으로 전야(田野)와 도성은 황폐화 되거나 피로 물들었고 수십만의 포로가 학살되거나 노예로 전락했으며 광범위한 지역이 약탈되어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등지거나 기존의 사회적 신분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부모는 헐벗고 굶주리고 형제와 처자가 서로 흩어진다.”9) “토지때문에 전쟁을 하면 죽은사람이 들판에 가득하고, 도시(城)때문에 전쟁을 하면 죽은사람이 성을 메운다”10)라는 孟子의 말은  당시의 전쟁수행으로 인한 참상을 단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대규모 전쟁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은 春秋戰國시대에 본질적으로  증가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있었다고 하겠다. 이로 인한 춘추전국시대 당대의 사회적 변혁의 의미란  근원적으로 보자면 첫째 西周(11세기-771 BC)시대 이래 낙후되고 고립되어 있던 혈연적 연합체로서의 잡다한 군소의 봉건제후국가들이  역사필연적으로 소멸되고, 온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주의국가의 창출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둘째, 어쩌면 첫째의 의미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인  사회적 변혁의 의의는  종래의 소수의 혈연적 세습귀족 대신에 새로운 사회적 지도 세력으로, 春秋戰國시대 당대 사회적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사유재산제의 확립과 확산에 따른, --- 비귀족적 ---  자율적인 지식인 계층의 진출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이들 중에는 강력한 제후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절대주의국가를 창출하려는 정치혁신적인 法家의 사상가들도 있었고, 당시 긴박한 상호 겸병의 전쟁상태에서 국가의 <安危存亡>을 결정하는 위험한 전쟁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위한 원리를 제시하는 兵家들도 있었다. 그러나  군주의 절대주의[또는 覇權]의 창출이란 필연적으로 당시 새로운 지도적 세력으로 등장하는 지식인 계층의 자율성을 크게 제한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 지식계층의 자율성을 행정적[政] 또는 사법적[刑] 명령을 통하여 강하게 규제하려는 (법가의) ‘절대주의’로선을 원칙적으로 문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전통적인 지식인, 즉 ‘유’(儒)들의 정치적 학문적 활동에 우리는 또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춘추전국시대라는 새로운 확장된 역사공간에서 이들 유가적인 자유지식인들은, --- 물론 이제 그들은 ‘혈연상’에서 西周시대 봉건체제에서 상대적으로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던 귀족계층, 즉 세습적 군자(君子)들은 아니지만 ---   그러나 저들 종래 세습적 귀족[君子]들의  전통적인 행위규범[禮]에 근거하여, ‘비귀족적’인 자신들을 ‘유신’(維新)된 군자’[신유형의 君子]11) 로서 자임하면서 자신들의 자발적 계발성[또는 도덕성]에 의한 정치질서의 확립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유가적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도덕성[즉 仁]에 기초하는 하층민[民]들에 대한 포용과 조화, 말하자면 자율적 지식인들의 덕치(德治)이념을 크게 주장하고 나왔다.


  그밖에 우리는 또한, 군주의 절대주의든, 지식인의 덕치이든, 그것들 모두는 직접생산자[民]들의 노동활동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들의 지배구도나 통치질서는,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긍정하거나 방임하는 한, 또는 지배계층의 존귀함을 들어내기 위하여 사회적 부가 편파적으로 소모되는 한,  결국 직접생산들의 민생(民生)은 보장될 수 없다는 점에서, 法家나 儒家의 노선 모두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墨家집단의 침략전쟁반대와 만민의 공동적 이익추진의 이념 호소에 귀를 기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당시 전쟁상황 속에서 직접생산자들이 생산에 종사하고 있지만, “배고픈 자 먹지 못하고, 추운 자 옷을 못입고, 수고한 자가 쉴 수 없는”,12) 민생파탄의 측면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민생강화’를 위한 사회적 부의 최대창출에 관심을 두면서, 동시에 지배자나 통치계층 중심의 국가적 부의 소비, 소모는 물론, 특히 민생의 기반을 송두리채 파산시키는 침략전쟁을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강력한 집단활동을 통하여, 모든 인간의 차별없는 사랑과 상호의 공동적 이해의 증진[兼相愛 交相利]의 구호 아래, 모든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적극적인 방어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여러 상이한 이해관계와 그에 따른 서로 모순되는 세게관을 가진 지식인 집단[즉 諸子百家]들 간의 사상[또는 理念]과 실천적 활동들의 격렬한 대립양상은 결과적으로 그들 각 학파가 표명하는 ‘理想’을 통한 사회적 안정을 가져왔다기 보다는 오히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그리고 크게는 국가와 국가 간의 크고 작은 충돌과 전쟁을 조장할 수 밖에 없었다. 개개 인간들 사이에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집단이 개인에 대한, 또한 큰 집단이 작은 집단에 대한 범죄적 폭력의 만연과, 큰 국가가 작은 국가에 대한 무력적 전쟁을 통한 강제적 겸병과 세력확장 등등, 말하자면 각종의 --- 사적인 또는 공적인 --- 사회적 폭력의 난무는  결국 필연적으로 일부의 비판적인 지성인들에 의해서 마침내 ‘인간의 실천적 의지’와 ‘문명발전’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와 부정의 시각을 낳게 하였다. 이들 회의적인 지식인들이 󰡔論語󰡕에서는 ‘逸民’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들로부터 “輕物重生” --- 말하자면 인간개체의 생명과 자유가 첫째이며, 그 밖의 사회적 연관에서 비롯된 규범이나 이념은 부차적이라는 --- 강한 개인주의사상인 ‘道家’철학 이 발전해 나왔다고 하겠다. 이들은 --- 물리적이든 관념적이든 --- 모든 형태의 (외부적) 강제성과 폭력을 부정하고, 또한 그것들을 합리화하는 각기 다른 諸子百家들의 ‘독단적 이념들’을 파괴하기 위하여 인식의 상대성을 제창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일체의 인위적 조작과 폭력이 없는, 따라서 모든 것이 전혀 외부로부터의 강제성없이 --- 마치 산천초목이 외부로부터의 그 어떤 강력한 통제나 지도없이도 제법 사계절의 변화와 잘 어울어지며 풍성하게 생성발전하는 것처럼 --- 무심(無心)하고도 자연스럽게 자유로히 발전되 나가는 ‘무위’(無爲)의 유토피아를 제시하였다.


필자는 이글에서 이와같이 春秋戰國시대에 전개된  ‘전쟁격돌’의 와중, 말하자면 전쟁을 통한 중국고대사회의 근원적인 변혁과정 속에서, 이들 諸子百家들이 서로 상이한 철학적 입장에서 제기할 수 밖에 없었던 서로 대립되는 다양한 전쟁론들 --- 말하자면 法家 兵家의 主戰論, 儒家의 義戰論, 墨家의 反戰論, 道家類의 非戰[非鬪]論 등 --- 을 내용적으로 검토해 봄으로써, 우선 그들의 상이한 철학적 문제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조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이들의 상이한 철학적 세계관과 결부된 전쟁론의 의미와 한계를, 결국 이와같은 중국고대사회의 본질적인 역사적 변환, 말하자면 치열한 전쟁의 발전을 통한 전쟁의 지양과 중국고대사회의 새로운 천하통일의 완성이라는 점을 함께 고려하면서 비판적으로 평가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그점으로부터 필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역사적 격변과 그에 대응하는 적절한 안목을 찾아 보고자하는 것이다.












2.  法家와 兵家의 主戰論




2.1)   齊法家의 전쟁 신중론과 필승론




 이미 기원전 8세기 이후부터 중국의 고대사회가 철기문명권으로 진입하면서 이룩한 농업생산혁명은 사회생산력의 급격한 상승을 가져왔고 이로 인한 봉건제후국들 간의 경제적 교류와 통합은 새로운 질서의 편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에 따른 상호 경병의 전쟁은 날로 심각한 국면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管仲에 가탁하여 편집된  󰡔管子󰡕나, 󰡔孫武兵法󰡕, 󰡔孫빈兵法󰡕 등을 통하여 --- 主戰論적인 --- 제(齊)법가의 전쟁신중론과 필승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2.1.1) 󰡔管子󰡕의 전쟁론




 管仲(? - 645 BC)이 활동했던 춘추 중기에는 농업생산분야의 발전에 힘입어 상공업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진(秦)의 법가들이 중농억상(重農抑商)정책을 펼쳤던 것에 반해  󰡔管子󰡕에서는 농상병중(農商竝重) 정책이 강조되고 있으며, 상업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이 돋보인다. “창고가 차있어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13)라는 유명한 표현으로 집약되는 󰡔관자󰡕에서의 경제사상은 농업생산을 통한 인간생활의 안정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 백성들의 경제적 안정이 확보된 다음에야 비로소  도덕적 가치판단을 요구할수 있다는 매우 현실적인 사고를 보여준다고 하겠 다. 그렇다면 이들은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


󰡔관자󰡕에 의하면, 전쟁의 결과에  의해 <군주의 지위가 높아지느냐 낮아지는냐>하는 문제가 결정될 뿐만 아니라 군사력의 强弱에 의해 국가의 존망(存亡)과 안위(安危)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관자󰡕는 군비를 강화하는 데 적극 힘을써야 할것을 강조하였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나라를 남에게 주려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경고하고 있다.14)  또한 당시에 제기되고 있던 宋견․尹文의 <寢兵之說>[군비폐지론]과 墨子가 제창한 <兼愛之說>[만민의 평등박애] 등의 反戰論은 국력을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15) 󰡔관자󰡕는 전쟁이 불가피한 이유로 고대 성왕들의 전성시대에도 군대가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지금의 덕이 삼제(三帝)에 미치지 못하고, 세상이 질서가 없는데 군대를 없애기를 요구하고 있으니 이 또한 문제가 아닌가?”16)  라고 반문한다.


󰡔관자󰡕는 전쟁의 기능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회적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할 것을 권장하지는 않는다.17) 최선의 상태는 싸우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관자󰡕의 전쟁론은 공격적이거나 호전을 부추기는 입장은 아니다. 자국의 군비강화를 통하여 상대국의 침략 의지를 사전에 무력화시켜 일체의 도발을 차단하는, 일종의 방어적인  전쟁억제책을 권장했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시위효과를 거두기 위해 󰡔관자󰡕는 “전쟁에 있어 한 나라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로써 다른 여러나라를 굴복시키면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두려워할 것”18)이라고 단언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부득이한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전쟁이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와같은 상황에 대비해서 평화시에 군비를 게을리 하지 말고 국방력을 강화해야함을  주장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재료를 모아 기술자들에게 우수한 무기를 제작하게 한다. 봄과 가을로 모의시험을 통해 단련시켜고 정예부대를 우대해 준다. 완성된 무기가 규격에 맞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고 시험에 부합되지 못한 것은 폐기한다. 세상의 호걸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세상의 뛰어난 인물들을 영입한다. 이렇기 때문에 출병하면 (군대의 위력은) 마치 나는 새와 같고, 천둥번개처럼 천지를 진동하며, 비바람이 몰아치듯 진격하니, 앞에서도 그힘을 당해낼 수 없고, 뒤에서도 해를 입힐 수 없다.  홀로 적진을 뚫고 갔다왔다 해도, 그들을 막고 포위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19)




특히 󰡔관자󰡕에서  주목할 것은 전쟁의 승패가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판단하고 있는 점이다.  경제력이 앞선 나라가 가장 우수한 무기를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관자󰡕는 우수한 무기의 확보가 곧 승리로 직결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로 보고 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잘 운용하고 병사를 조직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능력있는 지휘관의 선발이며, 군사교육훈련을 잘 받은 군대의 확보와 유지이다. 󰡔관자󰡕,「치국」(治國)편에서, “나라가 경제력이 있어야 군대가 강해지고 군대가 강하면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넓힐 수 있다.”20) 고 말하고 있다. 또한 「칠법」(七法)편에서는, “나라가 가난하고 쓰임이 부족하면 군사력이 약해지고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지게 된다. 병사들의 전투력이 약하고 사기가 오르지 않으면, 싸워서 이길 수도 없고 방어도 부실하게 된다. 싸워서 승리할 수 없고, 방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국가는 위태롭다.”21) 는 말로 강한 군사력은 결국 ‘부국’(富國)에 달려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부국강병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민생의 안정에 힘쓰고 끊임없이 생산을 늘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민생안정과 부국을 바로 군대운용의 근본으로 보는 것이 󰡔관자󰡕 군사사상의 핵심이라고 하겠다.




 “자기 백성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전력을 강화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또한  백성은 다스렸다고 하더라고 군대운용에 밝지 못해서는  않된다. 병력이 강하지 못하면서도, 반드시 적국을 이꼈던 일은 아직 없었다. 군대는 강하지만 적국을 이기는 이치에 밝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 병력이 반드시 적국을 이길 수 있어도 천하(만인)의 분수를 바로잡는 일에 밝지 못하면 또한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방도[器]가 있고, 병력을 다스리는 데는 공리[數]가 있다. 적국을 이기는 데는 이치[理]가 있고, 천하를 바로잡는 데는 분수(分)가 있는 것이다.”22)




 전쟁은 복잡한 대외적인 문제를 일거에 타결시킬 수있는 또 다른 형태의  정치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승리를 거둔다 할지라도 승전국에도 크고 작은 손실이 따르기 마련이다. 출병하여 전투에 임했을 때부터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가 소비되기 시작하는 것이며 참전한 병력만큼의 노동력이 생산현장에서 감소되는 것이다. 당시에도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손실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출동하는 그날에 나라안은 가난해지고, 전쟁을 한다해도 반드시 이길 수는 없으며, 이기게 된다해도  수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다.”23)   그 당시의 전쟁양상이 전차전 중심에서 보병전으로 옮겨가던 초기단계였고 참전병력의 규모도  전보다 늘어나기 시작했던 관계로 인해  “전쟁을 한번 치르게 되면 수 대에 걸처 축적된 국력이 다 소진된다.”24)고 하였다.  이에 따라 민생의 안전에 최대의 관심을 지닌 󰡔관자」에서의  전쟁론은 --- 주전론의 범주에 포함되지만 --- 가능하면 군대의 출동을 자제하려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점은 孫武․孫빈의 사상과 일치한다.   출병에는 명분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관자󰡕가 지지하는 군대는 영토확장만을 목적으로 하여 침략을 일삼는 군대가 아니다. 그 주장의 강도가 --- 후술하게 될 --- 儒家나 󰡔呂氏春秋󰡕의 주장들과 같지는 않지만 군사력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또한 ‘義’로운 명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병력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은 땅을 확장하는 데 있지 않고, (남의) 백성의 군주가되는 것에 있지도 않다. 義를 세워서 전승을 보다 확실히 하는 것이요, 위엄을 지극히 하여 德으로 내용을 채우는 것이다.”25)


 


“땅을 탐내면 전쟁에 힘쓰기 마련이고, 전쟁에 힘쓰면 반드시 민생이 피폐해 진다. 민생이 피폐해지면 술수가 많게 된다. 술수가 비밀에 붙여진 뒤에 전쟁을 해야 승리한다. 술수란 백성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백성을 믿지 못하면 난이 생긴다. 내란이 일어나면 (군주)자신이 위태롭게 된다. 따라서 先王의 道를 들었던 옛사람들은 군비경쟁을 하지 않았다.”26)


   


이밖에도 󰡔관자󰡕는 실질적인 작전을 운용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사전에 치밀한 군대운용계획이 필수적이며, 적국에 대한 정보수집과 아울러  우수한 지휘관의 확보와 훈련된 군대, 그리고 이들의 전쟁수행을 지원할 수 있는 전쟁물자의 확보를 강조하면서, 이것들의 준비는 곧 내치(內治)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준비가 갗추어진 군대라 할지라도 항시 적당한 때(適時)에 모든 행동을 맟추어야만 한다. 그래서 “성인은 군비를 갗추는데 힘을 쏟으며,  때를 신중하게기다린다. 그 때에 대비하며, 때에 맞추어서 일을 도모하고, 그 때가 오면 출병을 한다.”27)   이러한 적절한 때[時]에 대한 강조가 기원전 5 세기 春秋시대 말기에 나온 󰡔孫子兵法󰡕에서 보다도 오히려 戰國시대의 󰡔孫빈兵法󰡕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또한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2.2.2) 󰡔孫武兵法󰡕 




 앞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春秋시대에는 戰車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전쟁이 戰國시대에 이르러 기병과 보병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변화된 전쟁양상에 맞는 새로운 전략 전술의 필요성은 날로 높아졌고 전쟁의 경험 또한 풍부해졌다. 당시에도 이미 대규모의 야전, 공격, 방어, 기습, 매복, 첩보, 심리전 등의 전술이 존재하였으며, 그와 같은  兼幷戰爭 경험에서  누적된 군사지식의 결정체가 바로 󰡔孫子兵法󰡕(또는 󰡔孫武兵法󰡕)28)이라고 하겠다. 󰡔孫武兵法󰡕에 의하면 전쟁이란  정치적 승리를 획득하기 위한 중대한  수단이다. 따라서 전쟁수행의 주체인 군대는 국가의 가장 중추이므로 군비의 문제에는 항상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29)


󰡔孫武兵法󰡕에 의하면, 전쟁 그자체가 엄청난 국력과 인명의 소모와 희생을 담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든지 무조건 實戰을 통한 전쟁승리만이 최상의 방책일 수 없다는 것이다. 최선의 방법은 전쟁없이 다만 정치외교적 수완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요, 부득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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