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국풍
소아
대아
· 오늘 :  363 
· 어제 :  653 
· 최대 :  2,389 
· 전체 :  1,187,896 
 
  2008-03-14 11:38:095755 
정약용의 시경강의 서문
운영자
일반

시경강의(詩經講義)




(1) 서문1

與猶堂全書』第一集 詩文集 ‘詩經講義序(辛亥冬)‘,




‘독서’라는 것은 오직 뜻과 이치만을 구하는 것이다. 만약 뜻과 이치를 얻지 못한다면 비록 매일 천 권의 책을 독파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담장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비록 그렇지만 한자(漢字)의 훈고(訓詁)가 명료하지 못하면 뜻과 이치는 그로 인해 모호해지져서는 이따금씩 ‘동(東)’을 훈고하면서 ‘서(西)’라고 풀이한다면 뜻과 이치는 괴리되며 반대가 된다. 이에 옛날의 선비들이 경전을 해석할 때 대부분 훈고(訓詁)를 급선무로 여겼던 것이다. 과거와 오늘날의 문자가 다르게 사용됨은 마치 중화와 이적이 말을 함에 음이 다른 것과 같은 것이다. ‘훈고(訓詁)’라는 것은 통역이다. 통역이 그 본래의 뜻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서 그 나라 사람들에게 “중화 문물이 성대하다.”라고 말하면 이에 가소로운 오랑캐가 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독서를 하지만 몽매해서 말하면 꼭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를 일컫는 것이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모든 경전이 다 그렇거니와『시경(詩經)』은 더욱 심하다.

시(詩)란 맑게 성음과 용모나 말과 안색 밖에서 읊어야만 그 말의 맥락이 언뜻언뜻 나타나므로, 일문일답(一問一答)하는 기사문(記事文)과 같이 평범하게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글자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구(句)의 뜻이 어두워지고, 한 구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장(章)의 뜻이 어지러워지고, 한 장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편(篇)의 뜻이 이미 서로 멀리 동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소서(小序)가 폐해진 뒤에 한마디 말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훈고(訓詁)에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돕는(許與) 자가 적은 사람은 말이 꺽이게 되고, 후원이 많은 자의 말은 사리가 펴지게 되는 것이다. 경서를 해석하는 이가 참으로 선진(先秦)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문자를 널리 고증하여 많고 적은 그 중간을 절충하면 본래의 뜻이 거의 나타날 것이다. 나는 다만 뜻은 있으면서 저술하지 못했다가 신해(辛亥) 가을에 임금께서『시경문(詩經問)』 800여 조목을 친히 지어서 신에게 조목조목 대답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이를 삼가 받아서 읽어보니, 아무리 큰 선비나 대학자라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에 구경(九經)과 사서(四書) 및 고문(古文)과 모든 제자(諸子)와 사서(史書)에서 극히 짧은 말 한마디 글 한 구절이라도 시경(詩經)의 시를 인용하거나 논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차례대로 초록(抄錄)하고 이에서 인용하여 대답하였는데, 대체로 훈고(訓詁)가 분명해지자 올바른 뜻에 문제가 없었다. 글을 올리자, 임금은 어필(御筆)로 그 끝에 비평하시기를,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증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학문적 역량(蘊蓄)이 깊고 넓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대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아아!, 내가 어찌 학문의 깊고 넓은 데에 해당될 수 있겠는가. 내가 감히 사사로운 의견으로 성상(聖上)의 분부에 대답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시에서 은근히 마음 속에 은근히 타득한 바가 있는 듯해서 따로 서문을 지었고 이처럼 서술한다.




(2) 서문2

가경(嘉慶; 1796-1820) 기사년(1809) 가을 정약용 서(序)




신이 대답하여 가로되, 공자께서 일컬으셨던『시경(詩經)』삼백수는 지금에도 그 수(數)가 서로 부합되니 그 시문은 일찍이 이지러지거나 누락되지 않았습니다. 경문(經文)이 오래 전부터 모두 깊고 심오한 뜻이라 믿을 수 있다함은 마치 쉬운 말 같지만 그러나 그것이 난해한 까닭은 오직 찬미(贊美)와 풍자(諷刺)의 일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빈풍」의 여러 편은 '풍(風)'이면서도 '아(雅)'와 유사하며 <상호(桑扈)>이하로는 '아(雅)'이면서 '풍(風)'과 유사하고, '노송(魯頌)'과 '상송(商頌)'은 '송(頌)'이면서도 '아(雅)'와 유사하니 '풍(風)'과 '아(雅)'의 시체(詩體) 또한 난해합니다. 시(詩)에는 '육의(六義)'인 '경(經)'이 셋(三), '위(緯)'가 셋 있으니 마땅히 그것을 '풍(風)', '아(雅)', '송(頌)', '부(賦)', '비(比)', '흥(興)'이라고 일컬었고, 지금 <대서(大序)>에서는 '풍(風)', '부(賦)', '비(比)', '흥(興)', '아(雅)', '송(頌)'이라 일컫고, 또『모전(毛傳)』에서 엮은 바로는 다만 '흥(興)'만 있고 '부(賦)'와 '비(比)'는 보이지 않습니다. 공영달(孔穎達)이 말하기를 '흥(興)'으로써 '부(賦)'와 '비(比)'를 드러낸다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셋에서 그 둘을 들면 마땅히 그 하나는 절로 드러나겠지만 지금은 그 하나를 들었는데 어찌하여 그 둘이 드러나겠습니까? 또한 마땅히 '흥(興)'이라는 것은 일찍부터 편(篇)을 쫓아서 그것이 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시경(詩經)』305편 가운데에서 다만 114편만이 얻었으니 <권이(卷耳)>는 말하기를 근심하는 이가 '흥기(興起)'함이니 근심하는 이의 흥기함이 다만 <권이(卷耳)> 한 편은 아님이니 이 또한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오늘날 주자의『시경집전(詩經集傳)』이「국풍(國風)」과 「이아(二雅)」에서 각 편(篇)과 장(章)마다 삼의(三義)가 송(頌)에서 번갈아가며 매여있으며 또한 매 수(首)의 일절(一節)은 '부(賦)'로 엮어져 있음이니, 이는 모두 그 연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곧 '흥(興)'과 '비(比)'의 체(體) 또한 난해합니다. 정어중(鄭漁仲)이래로 '정변(正變)'의 설을 의심하는 자 역시 많았으니 「이남(二南)」은 '정풍(正風)'이라고 합니다만 <여분(汝墳)>에서 왕실(王室)을 근심함과 <야유사균>에서 강포(强暴)함을 근심하는 것이 어찌 변풍(變風)이 아니겠습니까? 13국은 '변풍(變風)'입니다만 <치의(緇衣)>에서 어진이를 좋아함과 <칠월(七月)>에서 임금님께 배풀음이 어찌 '정풍(正風)'이 아니겠습니까?

'소아(小雅)'의 정풍은 <상체>에서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형제를 조문함이 있고, '대아(大雅)'의 변풍은 <증민(蒸民)>에서 선왕(宣王)을 찬미함에 있으니, 오늘날 반드시 절로 아름다워서 오랑캐가 진영(陳靈)에 이르도록 경계를 나누고 지경을 분할함이 마치 하늘끝이 아득히 있는 듯 하면서도 맞닿은 곳이 없음과 같으니 정풍과 변풍의 곡조 역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노시(魯詩)》의 <산유추>를 <산유구>라 하였고, 《한서(漢書)》의 <자지선(子之還)>을 <자지영(子之營)>이라 하였으며, 가산(賈山)이란 자는 <우무정(雨無正)>을 인용하되 <상유(桑柔)>의 구절을 참고하여 사용했고, <치의(緇衣)>가 <절남산(節南山)>을 인용하였는데 특히 대다수가 선정(先正)의 절이니 이같은 종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종고낙지(鐘鼓樂之)'의 낙(樂)은 당연히 음이 '낙(洛)'은 아닙니다. '산진습령'의 '령'도 또한 마땅히 음이 '연(連)'이 되어야 함이니 이같은 종류를 일일이 거론할 수 없으니 자구음운(字句音韻) 또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리(流離)'가 혹은 일로 혹은 날짐승으로, '추우(騶虞)'가 혹은 관직으로 혹은 길짐승으로, '여려'는 혹은 '여(廬)' 혹은 '천으로, '박속'이 혹은 '성(聲)'으로 혹은 '해'로 쓰이니 이와 같은 부류가 매우 많아서 논쟁을 취합하면 조수(鳥獸)와 초목(草木)의 이름 또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소서(小序)>를 따를 것인가 어길 것인가와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주자(朱子) 이전에는 오직 여조겸(呂祖謙)만이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고, 주자 이후로는 오직 마단임(馬端臨)만의 논변이 가장 상세하니 논쟁했던 내용들이 갖추어져 있으니, 보는 이가 마름질 하듯 취사선택함에 있습니다.




2. 임금님께서 물으시길, 시(詩)는 이해하기 어려운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주자의『시경집전(詩經集傳)』에 훈석(訓釋)이 갖추어져 있는데도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어째서인가? 풍아(風雅)의 체(體)가 어려운 것이 아니오. 흥비(興比)의 뜻(義)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오. 정변(正變)의 조(調)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오. 조수(鳥獸)와 초목(草木)의 이름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시 속에 찬미(贊美)하거나 풍자(諷刺)한 일의 같고 다름과 옳고 그름의 있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옛날의 설명 가운데 고증(考證)하고 근거(根據)할 수 있는 것으로는 <소서(小序)>가 있는데, 선유들이 취하고 버림, 따르고 따르지 않음이 서로 다르다. 그러니 의당 어떻게 절충해서 믿어야 하는가? 이것이 가장 난해한 것이다.




3. 신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물음 가운데 예로 든 10편은 모두 앞사람들의 빠짐 없는 논술이 있으니 신이 군더더기를 달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서」의 작자의 이름에 있어 주자가 근거한 바는 『후한서』<유림전>입니다. 그러나 『수서』<경적지>에 또 분명히 말하기를 "선유(先儒)들이 서로 계승해 왔다."고 하고 "모전(毛傳)의 <시서>는 자하가 처음 지었고 모공(毛公)과 위굉(衛宏)이 다시 윤색했다."고 했습니다. 『수서』<경적지>를 쓴 사람은 아마도 『후한서』<유림전>의 기록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 듯합니다. 만약 과연 위굉이 지은 것이라면 더 이상 논할 것이 없겠지만 자하가 지은 것이라면 이는 또 자하가 스스로 창안(創案)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를 공자로부터 배우고 사관(史官)에게 자문한 다음에 비로소 썼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생각하면 후학들의 존앙과 믿음이 또 다만 자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주자는 더욱 엄하게 배척한 것입니다.

신이 주자의 『시서변설(詩序辯說)』을 읽어보니 「시서」의 마구 뒤섞인 저열함을 꾸짖고 하자(瑕疵)를 적발한 것이 명백 통쾌하고, 종리(綜理)의 밀절(密切)함은 천 사람의 의혹을 깨트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비록 모공(毛公)과 정현(鄭玄)이 다시 살아나더라도 반론을 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구 고증이 전체에 두루 미치지 못하고 가려 모은 것에 누락된 것이 있으며, 혹은 오류라고 단정한 것 가운데 왕왕 선진과 서한시대의 글이 번갈아 나와 진짜임을 증명한 것도 있습니다. 예로 패풍( 風) <백주(柏舟)>가 어진 사람을 위해 지은 것이요, 정풍(鄭風) <자금(子衿)>이 학교를 위해 지은 것이며, 위풍(衛風) <목과(木瓜)>가 제환공(齊桓公)을 찬미한 것이요, 정풍(鄭風) <고구(羔 )>가 자피(子皮)를 비난한 것은 지금 이미 밝게 드러났으니 누가 아니라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음란함을 조롱하고 풍자한 시를 주자는 모두가 음란한 자가 스스로 지은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뭉뚱그린다면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소서」를 지지하고 주자의 뜻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어지러이 나타나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도 금지할 수 없었으니 이 또한 우리 학문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식(蘇軾)은 "「소서」에서 믿을 것은 머리의 한 구절뿐이다."라 했고, 주자는 그 머리의 한 구절까지도 대체로 믿거나 따르지 않았습니다. 한 예로 주남(周南) <한광(漢廣)>이 넓은 덕의 비유가 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주자가 논한 바와 같습니다. 이로부터 말한다면 「소서」는 과연 위굉이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위굉도 전해 받은 바가 있었을 것으로 삼백 편의 서를 모두 그가 창작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옛 문헌을 널리 고증하여 증거가 있는 것만을 가려서 따른다면 실수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하는 공자의 고제(高弟)입니다. 경전(經傳)에 보이는 그의 글은 고고(高古) 전아(典雅)하여 결코 「소서」의 글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주자를 기다릴 것 없이 누구나 변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주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사기(史記)』와 『국어(國語)』에 질정(質正)한 뒤에야 시서(詩序)는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는데, 『사기』와 『국어』의 글을 통해 시서의 잘못된 것을 분변할 수 있다고 한 것은 과연 무슨 말을 가리키는 것인가? 또 말하기를, "고인들은 이미 시 뜻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였다. 『좌전(左傳)』에 실린 시가들은 대부분 본의(本意)와 연관성이 없다." 하였다. 『사기』와 『국어』는 믿고 『좌전』은 믿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동래(呂東萊)의 독시기(讀詩記)에서는 오로지 시서(詩序)만을 믿었는데, 주자는 이를 그르게 여기면서 '모씨(毛氏)와 정현(鄭玄)에게 아첨하는 신하'라고 까지 하였다. 후학으로서 높이고 믿을 대상으로는 주자만 한 분이 없으니, 의당 주자의 설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자 이전 분으로 시서의 설을 따르지 않은 이는 구양공(歐陽公), 소영빈(蘇穎濱), 정어중(鄭漁仲)이고, 시서의 설을 따른 이는 여동래 한 분 뿐이다. 그렇다면 따르는 자의 많고 적음으로 잘잘못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소서가 자하가 지은 것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지은 것인가? 동한(東漢)의 유림전(儒林傳)에 "소서는 위굉(衛宏)이 지은 것이다." 하였는데, 주자가 이에 대해 "이것은 위굉이 지은 것도 아니고, 몇 사람이 지어 하나로 합한 것이다." 한 것은 대체로 자잘한 것들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위굉이 지은 것도 아닌데 자하가 지은 것일 수가 있겠는가. 주자의 견해가 이에 이르러 더욱 엄해져서 소서는 폐해지고 말았다.




5. 신이 대답하여 말하기를,『사기(史記)』,『국어(國語)』,『좌전(左傳)』의 득실로 말하면, 좌구명이 노나라의 역사를 보고,『춘추(春秋)』의 전(傳)을 썼고 그 나머지로 따로『국어(國語)』를 만들었으니 대개 떨어뜨린 한 움큼의 이삭을 주운 것과 같습니다. 사마천이 발분하여 『사기(史記)』를 지었는데 <화식열전(貨殖列傳)>과 <유협열전(遊俠列傳)> 등에 기울인 뜻이 자못 깊었으나, 그 나머지는 정경(正經)과 외사(外史)를 모으고 쌓은 것이라 본래 소략(疏略)하고 오류(誤謬)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자가 삼사(三史)를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 것은 아마도 당풍(唐風) <무의(無衣)>를 두고 「시서」는 '진무공(晉武公)'을 찬미했다고 했는데 「사기」에는 보이지 않고, 주자 자신은 주송 <호천유성명(昊天有成命)>을 성왕(成王)에게 제시하는 시로 보는데, (그렇게 보지 않는「시서」와는 달리) 『국어(國語)』에는 증거가 있는데다가, 『좌전(左傳)』에서 읊은 정(鄭) 위(衛)의 여러 시들이 모두 지금 음시(淫詩)로 규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류(公劉)는 후직(后稷)의 증손(曾孫)이라는 『사기』의 내용을 믿기 어렵고, 소아 <상체(常 )>의 작자가 주공(周公)이라는 『국어(國語)』를 믿을 수 없으며, 정풍(鄭風) <청인(淸人)>과 진풍(秦風) <황조(黃鳥)>는 각각 사실이 있으니『좌전(左傳)』을 폐할 수 없습니다. 주자 또한 어찌 어느 한 쪽만을 따른 적이 있었겠습니까? 만약 존신자(尊信者)가 많고 적음만 가지고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것을 결정한다면 구양수·소철·정초 다만 세 사람 가운데 취할 만한 한 사람쯤이 있을 것이고, 모형(毛亨)·정현(鄭玄) 이하로 전한(前漢) 후한(後漢) 육조(六朝) 및 당나라에 이르는 동안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으로 「소서」를 믿은 사람이 줄잡아 수백 명은 될 것이니 여조겸 또한 외로운 주창자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6. 근래 연경(燕京)에서 가져온 글 가운데 시에 대해 논한 내용을 보았는데, 그 내용에 "한(漢)나라 때에 노(魯)나라의 모형(毛亨)이 훈고전(訓 傳)을 지어 조(趙)나라 사람 모장(毛 )에게 주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대소모공(大小毛公)이라고 하였다. 이들의 학설이 전수된 것을 살펴보면, 이들은 조 나라 사람 순경(荀卿)에게 전해 받았는데, 순경의 설은 그 연원이 근모자(近牟子), 맹중자(孟仲子), 이극(李克), 증신(曾申)을 거쳐 복자하(卜子夏)에까지 이르른다. 자하는 직접 성인을 본 자로 공자(孔子)가 <<시경>>을 산삭(刪削)하여 기술(記述)한 뜻을 종합하여 서론(序論)을 지어 문하의 제자에게 주었다. 지금 세상에서 익히고 있는 <<시경>> 삼백편의 소서(小序)는 비록 모공(毛公)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실로 자하에게 근본해서 설을 세운 것이다." 하였다. 이 설을 보면, 전수된 내력을 서술한 것이 자세히 갖춰진 것 같으나 주자의 설과는 같지 않다. 그리고 이른바 '모형이 훈고(訓 )를 지었고, 순경(荀卿)에게 전해 받은 것'이라는 말은 과연 어디에서 근거한 것인가? 소서의 진위(眞僞)는 참으로 <<시경>>에 있어서 하나의 큰 의안(疑案)이다. 그러나 주자가 이 설을 채택하지 않고 버린 뒤로는 의심할 것이 없어야 하는데도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니, 어떻게 하면 통렬히 바로잡아 시를 읽는 자로 하여금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할 수가 있겠는가? 원컨대 고사(古事)에 널리 통한 군자들은 자세히 강명(講明)하여 진달하도록 하라!




7. 신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근래의 유자가 "모형은 순경에게서 얻었고 자하의 설에 근원한다"고 한 것은 아마도「시씨가훈(柴氏家訓)」에서 나온 듯 합니다. 생각건대 「한서·예문지」, 「수서·경적지」에 모두 모장(毛 )이 조(趙)나라 사람이라 했으므로 모장을 가까이로는 순경에 끌어붙이고 멀리로는 자하에까지 소급하게 한 것이니, 그 내력을 반드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만경(謝曼卿), 위경중(衛敬仲)의 학문은 모두 하간헌왕(河間獻王)이 흩어졌던 경적(經籍)들을 모은 다음에 나온 것이니 <소서>가 지어진 시기는 요컨대 모장 이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근래의 유자가 또 이르기를 "고훈전(故訓傳)의 고(故)가 바로 <소서>의 첫 구절이며 공영달(孔潁達)이 이미 모형(毛亨)이 고훈전을 지었다."고 하였으니, <소서>는 실로 모형이 지은 것입니다.(모형이 시의 전을 지은 것이지 모장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자하가 <시서>를 지었다는 설은 비록 '선유(先儒)들이 서로 계승하였다.'고 하지만 믿은 사람은 오직 소통(蕭統)뿐이고, 한유(韓愈)에서부터 이미 의심하면서 "모공(毛公)이 지었다."고 말한 것이 가장 이치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원류가 이미 멀고 전수(傳受)의 계보(系譜)가 있으니 차라리 믿지 않을지언정 그것을 훼손(毁損)하거나 타기(唾棄)할 것까지 는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한 쪽을 세우고 한 쪽을 없애려 하기 때문에 각각 종묘(宗廟)의 보기(寶器)를 안고 떨어뜨려 깨어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자기 설을 고수하니 이것이 분규가 일어나는 까닭입니다.







http://www.gojunlife.com/zboard/zboard.php?id=know2&page







시경강의

필사본. 15권 5책. 1808년(순조 8) 정약용(丁若鏞) 저. 규장각도서. 1791년(정조 15) 가을 정약용이 내원(內苑)에서의 시사회(試射會)에 시종신(侍從臣)으로 참여하였으나 과녁을 맞추지 못하였으므로 왕은 벌로 그를 북영(北營)에 당직시키고, 800여 장(章)의 시경조문(詩經條問)을 과제로 내주어 40일 이내에 조대(條對)하도록 명하였다. 정약용은 40일에 20일을 더 청하여 조대를 마쳤는데, 각 조문에 신대(臣對)라고 하여 자신의 의견을 강술하였다. 1808년(순조 8) 저자가 손수 이를 편집하고 또 보유(補遺)를 만들어 원편 12권 4책, 보유 3권 1책의 5책으로 합편하였다. 책 끝에 이청(李晴)의 《구하고(九夏考)》를 부록으로 실었다. 권 1∼2의 l책은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고 유실(遺失)되었으며, 나머지가 《여유당집(與猶堂集)》 권 l∼15에 들어 있다.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2-02-10 21:16:42 한시선(으)로 부터 이동됨]

목록
2012
[일반] 시경을 왜 읽어야 하는가?

시경을 읽어야하는 이유 http://blog.naver.com/pondfire/140098276632 시(詩)는 내용에 따라 형식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되지만 여기
운영자 10-03-10
[일반] 季札觀周樂(계찰관주락) - 노나라에 사자로 간 계찰이 시경의 노래를 듣고 품평하다. …

季札觀周樂(계찰관주락) - 노나라에 사자로 간 계찰이 시경의 노래를 듣고 품평하다. - 오(吳)나라가 계찰(季札)을 친선사절로 노(魯)나라에
운영자 13-04-01
[일반] 시경전목록(詩經全目錄)

詩經目錄 I. 국풍(國風) [1] 주남(周南) 1. 관저(關雎) : 꽌꽌 물수리 2. 갈담(葛覃) : 뻗어나는 칡넝쿨 3. 권이(卷耳) :
운영자 13-02-24
[일반] 주희의 시경집주(詩經集註) 서(序)

시집전주(詩集傳註) 서(序) 或有問予曰(혹유문여왈) 누군가가 나에게 묻기를 詩何爲而作也(시하위이작야) 시를 왜 짓느냐고 하기 (1)
양승국 05-09-22
[일반] 정약용의 시경강의 서문

시경강의(詩經講義) (1) 서문1 與猶堂全書』第一集 詩文集 ‘詩經講義序(辛亥冬)‘, ‘독서’라는 것은 오직 뜻과 이치만을 구하는 것
운영자 08-03-14
[일반] 정약용의 시경강의에 대하여

중국의 공자(孔子)가 뛰어난 시 비평가였다고 하면 어떤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이상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또 실학으로 유명한 우리나라
운영자 08-03-14
[일반] 국풍 15개국 위치 비정도

주(周), 소(召), 패(邶), 용(鄘), 위(衛), 왕(王), 정(鄭), 제(齊), 위(魏), 당(唐), 진(秦), 진(陳), 회(檜), 조(曹), 빈(豳)
운영자 11-03-29
[일반] 11. 麟之趾(인지지) - 기린의 발꿈치 -

11. 麟之趾(인지지) - 기린의 발꿈치 - 一 麟之趾(인지지) 기린의 어진 발굼치 振振公子(진진공자) 인자하고 후덕한 여러 공자들
운영자 11-03-29
[일반] 10. 汝墳(여분) - 여수(汝水)의 강둑에서 -

10. 汝墳(여분) - 여수(汝水)의 강둑에서 - 부인이 군역에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다. 여수 강변에서 땔나무를 하던 부인은 원정나간
운영자 11-03-29
[일반] 9. 漢廣(한광) -넓고 넓은 한강-

9. 漢廣(한광) -넓고 넓은 한강- 한수(漢水)는 흥원부(興元府) 반총산(嶓冢山)에서 발원하여 한양(漢陽) 대별산(大別山)에 이르러
운영자 11-03-29
[일반] 8. 芣苢(부이) -질갱이를 캐자-

8. 芣苢(부이) -질갱이를 캐세- 《소서(小序)》는 “후비의 아름다움[后妃之美]”을 노래한 시가라 했고 《대서(大暑)》는 “부인
운영자 11-03-29
[일반] 7. 兎罝(토저) -토끼그물-

7. 兎罝(토저) -토끼그물- 교화가 행해져 풍속은 아아름다워지고 그 결과 현능한 인재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등장하여 비록 토끼그물을 치
운영자 11-03-28
[일반] 6. 桃夭(도요) -무성한 복숭아나무-

6. 桃夭(도요) -무성한 복숭아나무- 문왕(文王)의 교화가 집에서부터 온 나라에 까지 미쳐 남녀의 행실을 올바르게 만들어 혼인을 때에 맞게 했을
운영자 11-03-28
[일반] 5. 螽斯(종사) - 많고 많은 메뚜기 떼

國風1•周南5 5. 螽斯(종사) - 많고 많은 메뚜기 떼 - 비(比)란 사물을 서로 비유해서 뜻하는 바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모서(毛序
운영자 11-03-28
[일반] 4. 樛木(규목) -굽은 나무

樛木(규목) - 늘어진 가지 - 가지가 땅으로 늘어진 나무를 규목이라고 부른다. 원래 시의(詩意)가 확실하지 않는 시가 중 하나다. 반복해서
운영자 11-03-28
1 [2][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