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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22:10:164974 
진문공의 논공행상과 인사정책
양승국
일반

진문공(晉文公)의 논공행상과 인사정책

진문공은 제환공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된 당진(唐晉)의 군주다. 여희의 란을 피해 19년 동안 그를 따르던 가신들과 중원의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기원전 636년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올라 8년 동안 재위에 있다가 기원전 628년에 죽은 사람이다. 그는 42살에 본국에서 도망쳐 61세에 군주의 자리에 오르고 69세에 죽었다. 그가 위대한 것은 그가 패자로 군림했던 기간은 비록 8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대로 끝난 다른 패자들과는 달리 당진이라는 나라 자체를 패자의 지위로 끌어올린 점이다. 제환공, 진목공, 초장왕, 월왕 구천, 오왕 부차 등은 자기가 재위 중이거나 혹은 사망함으로써 패자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진문공만은 패자의 지위를 자기의 후계자들에게 전했다. 즉 그가 구축한 것은 단순히 다른 패자들과는 달리 물리력 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전한 것이다. 당진이라는 나라는 진문공이 구축한 시스템을 이용하여 춘추시대 거의 전 기간 동안 패자의 지위를 유지한 것이다. 진문공이 구축한 시스템은 인재등용에 그 핵심이 있으며 그는 인재라는 생각이 들면 아무리 원한에 사무친 원수라도 기용했으며, 자기에게 헌신적으로 노력을 했더라도 인사 원칙에 벗어 날 경우는 가차없이 제거했다. 그는 19년 동안의 유랑생활을 끝내고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르자 그 동안 자기를 따라 다녔던 가신들에게 논공행상을 행했다. 그러나 그 대상에 들지 못한 호숙(壺叔)이라는 사람이 문공에게 원망하는 소리를 했다.
" 신은 포성(蒲城)에서부터 주공을 따라다니기 시작하여 19년 동안 발이 부르트도록 천하를 유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곳에 머무르게 되면 침식을 수발했으며, 길을 떠나게 되면 거마를 점검하면서 한번도 주공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 주공께서 유랑할 때의 노고에 보상하는 상을 다른 사람에게 내리시면서 유독 저에게만 내리시지 않으신 것은 혹시 신에게 무슨 다른 죄가 있어서 입니까?"
그러자 문공이 다음과 같이 자기의 포상 기준을 이야기했다.
" 그대는 이리 가까이 오라. 내가 이유를 밝혀 주겠다. 무릇 나로 하여금 인의로써 이끌어 폐부(肺腑)를 개통하여 깨닫게 하는 자를 제일 높은 상을 내렸다. 나를 지모(智謀)로서 보좌하여 나로 하여금 여러 제후들 면전에서 욕됨을 면하게 하는 자 이를 그 다음 상으로 하였다. 머리 위에 쏟아지는 시석과 날라 오는 화살과 창에 몸을 돌보지 않고 나를 보호한 사람을 맨 마지막 상으로 하였다. 고로 제일 높은 상은 덕(德)을 칭송하여 상을 내린 것이며 다음 상은 그 재주에 대하여 상을 내렸고, 마지막으로 그가 세운 공에 대하여 상을 내린 것이다. 나를 위하여 천하를 유랑한 너의 노력은 단지 일개 필부가 행한 노력이니 앞서 말한 세 가지 상 다음에 해당하니 세 가지 상을 모두 행한 연후에 너에게도 상이 내려 질 것이다. "

두수(頭須)라는 사람은 진문공이 적국(翟國)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경리를 담당한 가신이었다. 진문공은 진혜공(晉惠公)의 밀명을 받고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적국으로 잠입한 시인(寺人) 발제(勃<革+是>)를 피해 황급히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경리를 책임지고 있었던 두수는 진문공을 따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도망쳐 버렸다. 제나라로 도망치던 진문공과 그 일행들은 노자가 없어 도중에 굶주림에 시달렸다. 구걸하던 중이에게 농부들은 흙덩이를 주며 희롱하였고 보다 못한 개자추라는 가신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오려 내어 국을 끓여 진문공의 허기를 채워주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두수라는 사람이 노자를 가지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 두수라는 사람이 진문공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진문공이 두수를 꾸짖자 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신은 주공의 재물을 훔쳐 주공으로 하여금 밥을 굶게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제가 주공께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일입니다. 만약에 주공께서 밖으로 나들이를 하실 때 신으로 하여금 주공이 타고 다니시던 수레의 말고삐를 잡게 하신다면 온 나라 백성들이 보고 듣게 되어 주공께서는 옛날에 저지른 다른 사람들의 죄에 연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 되면 여성과 이극의 무리들도 의심하는 마음을 풀게 될 것입니다."
극예와 여성이란 사람은 진문공을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처형된 진혜공의 가신들이다. 진문공은 두수로 하여금 외출 할 때 자기의 수레를 끌게 함으로써 진혜공을 따랐던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또한 시인 발제란 사람은 진헌공과 진혜공의 명을 받아 진문공을 두 번이나 살해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한 번은 헌공의 명을 받아 포성(蒲城)으로 쳐들어갔다가 담 넘어 도망가는 진문공을 향해 칼을 휘둘러 그의 옷소매를 베어 진문공을 거의 죽음 직전으로까지 몰고 간 일이 있었으며 후에 다시 진혜공의 명을 받아 적국(翟國)으로 잠입하여 진문공을 살해하려고 했었다. 발제를 피해 황급하게 도망치느라 여비도 챙길 겨를이 없었던 진문공과 그 일행들은 도중에 굶주려 많은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 발제가 어느 날 진문공을 찾아 온 것이다. 진문공이 화가 치밀어 발제를 꾸짖었다.
" 너는 옛날에 포성에서 과인의 소매 자락을 칼로 베어 하마터면 너의 칼 아래 비명횡사 할 뻔했다. 여기에 아직도 그때 입던 옷을 버리지 않고 갖고 있다. 이 옷을 볼 때마다 너에 대한 원한을 잊을 수 없었다. 네가 또 적(翟) 땅에 와서 나를 죽이려고 할 때 혜공이 삼일의 기한을 주고 길을 떠나라고 했는데 너는 다음날 바로 길을 떠나 다시 한번 너에게 죽을 뻔하였다. 요행히 하늘이 도와 너의 독수를 피할 수 있었다. 지금 과인이 입국하여 이 나라의 군주가 되었는데 너는 무슨 낯짝으로 나를 만나러 왔느냐? 빨리 도망쳐서 몸을 피하지 않고 이곳에 얼씬거리면 너를 잡아 참수형에 처하게 하리라!"
발제는 자기가 문공을 죽이려 했던 입장을 당당하게 설명했다.
" 주공이 나라밖에서 19년 동안이나 유랑생활을 했다는데 아직도 세상의 물정을 잘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주공께서는 선군 헌공(獻公)과는 부자지간입니다. 혜공(惠公)은 즉 주공의 동생입니다. 그 부친 되는 사람이 그 자식과 원수가 되었고 또한 그 동생이란 사람이 그 형 되는 사람과 원수가 되었는데 하물며 보잘것없는 환관 주제인 발제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발제는 한갓 미관 말직에 있던 사람이라 그때는 오로지 헌공과 혜공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어찌 주공이 있는 줄 알았겠습니까? 옛날에 관중(管仲)이 공자규(公子糾)를 위해 환공의 허리띠를 맞추었지만 환공은 관중을 용서하고 임용하여 뒤이어 천하를 호령하는 백주(伯主)가 되었습니다. 주공의 소견이 이렇게 좁아 터져 허리띠에 화살을 맞은 원한을 잊으시지 않으시겠다니 이것은 맹주가 되고자 하시는 뜻을 버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신을 보시지 않으시겠다 하니 이것은 신으로서는 손해볼 것이 없으나 단지 제가 가 버린다면 주공께 화가 머지 않아 닥칠 것인 데 그것이 걱정스럽습니다."
문공의 용서를 받은 발제는 진혜공의 잔당들인 여성과 극예의 반란 음모를 고했다. 진문공은 발제를 용서함으로 해서 극예와 여성의 반란으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또한 후에 서신(胥臣)이라는 가신이 자기의 후임 자리인 육경(六卿)에 해당하는 하군부장(下軍副將)에 반란죄로 처형된 극예(<谷+邑>芮)의 아들 극결(<谷+邑>缺)을 천거하자 주저하지 않고 임용했다.

이런 진문공의 인사정책이 당진으로 하여금 패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19년간 진문공을 따라 중원을 유랑했던 주요 인사들의 프로필이다.

1. 조쇠(趙衰)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22년에 죽었다. 시호(諡號)가 성(成)이라 조성(趙成子)라고 부른다. 조쇠는 사형제 중 막내였기 때문에 계(季)를 붙여 성계(成季)라 했다. 조쇠는 조성자(趙成子), 그의 아들 조순(趙盾)을 조선자(趙宣子)라 한다. 당진 헌공 때의 대부 조숙(趙夙)의 동생 혹은 손자라고도 했다. 진문공과 함께 19년 동안 중국을 유랑한 오현사(五賢士) 중의 한 사람이다. 오현사(五賢士)란 호언(狐偃), 고타(賈陀), 선진(先軫), 위주(魏<雙-又+牛>) 및 조쇠를 말한다. 진문공이 환국하여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르자 원(原) 땅의 대부에 봉해졌다. 그는 문공이 패자가 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의 후손들은 유력 세가가 되어 당진의 정권에 깊이 관여하다가 기원전 453년 진양성 싸움에서 한(韓)과 위(魏) 두 종족과 연합하여 지백이 이끌던 지가(智家)를 멸한 후에 당진을 삼분하고 전국시대를 열었다.

2. 호언(狐偃)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22년에 죽었다. 춘추 때 당진의 대신으로 진문공을 따라 19년 동안 중원을 유랑했다. 자는 자범(子犯), 구범(咎犯), 구계(臼季), 구계(咎季), 사공계자(司空季子) 등 많다. 대부 호돌(狐突)의 아들로 진문공의 외숙이다. 진문공이 19년 동안 유랑생활을 할 때 여러 가지 계책을 내어 진문공을 난관에서 구했다. 후에 진문공이 환국하여 당진의 군위에 오르자 그는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패업을 달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진문공은 호언의 건의에 따라 군사를 일으켜 망명 중에 있던 주양왕(周襄王)을 다시 환국시켜 태숙대의 란을 평정했다. 기원전 633년 당진의 상군부수가 된 호언은 진문공을 도와 성복에서 초나라 군사들을 대패시켰다. 진문공은 성복의 싸움에서 초나라를 물리침으로 해서 중원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진문공이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호언과 조쇠 두 사람의 계책에 힘입은 바가 크다.

3. 고타(賈陀)
진문공을 따라 유랑했던 오현사 중의 한 사람으로만 나와 있고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4. 선진(先軫)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27년에 죽었다. 춘추 때 당진의 정경으로 봉지가 지금의 하남성 제원현(濟源縣)인 원(原)이었음으로 해서 원진(原軫)이라고도 했다. 진문공 즉위 초에 하군부수(下軍副帥)에 임명되었다가 극곡(<谷+邑>穀)의 뒤를 이어 중군원수(中軍元帥)가 되어 기원전 633년 벌어진 성복의 싸움에서 초나라 군사들을 대파했다. 진양공(晉襄公) 원년 기원전 627년 섬진의 목공이 정나라를 습격하기 위해 출동시킨 섬진군을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三門峽市) 동남의 효산(<山+肴>山)에서 전멸시키고 섬진의 세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같은 해에 섬진에 쳐들어가 싸움 중에 전사했다.

5. 위주(魏<雙-又+牛>)
춘추 때 당진의 대부로 시호는 위무자(魏武子)이다. 헌공 때 필만(畢萬)의 아들 혹은 손자라고도 했다. 진문공 즉위 초에 호위무사(護衛武士)인 융우(戎右)에 임명되었다. 성복대전이 일어나기 전 해인 기원전 634년 문공이 옛날 유랑할 때 받은 치욕을 갚기 위해 위(衛)와 조(曹) 두 나라를 공격하면서 조나라의 대부 희부기(僖負羈)가 19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며 충성을 바친 자기보다 더 후대를 받는 모습을 보고 시기하여 희부기 집에 방화하여 불에 태워 죽게 만들었다. 문공이 그의 재주와 충성심을 생각하여 대부의 직위만 빼앗고 죽이지는 않았다. 후에 벌어진 성복대전에서 공을 세워 대부에 다시 봉해지고 그의 후손들은 당진의 유력 세가가 되어 조(趙)와 한(韓) 두 종족들과 함께 당진을 삼분하여 전국시대를 열었다.

6. 호모(狐毛)
춘추 때 당진의 대부로 호돌(狐突)의 아들이며 호언(狐偃)의 형이다. 19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며 중이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원래 중이와 같이 유랑생활을 하지 않고 국내에 있다가 중이가 섬진군의 지원을 받아 진격해 오자 선진(先軫)과 함께 진회공(晉懷公)의 명령을 받아 당진군을 이끌고 중이를 저격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항복했다고 했다. 성복대전 때 동생 호언의 추천을 받아 상군원수로 출전하여 초군을 격파하는데 큰공을 세웠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죽었다.

7. 서신(胥臣)
진문공을 따라다니며 함께 유랑생활을 한 가신이며 성복대전 직전 중군원수(中軍元帥)가 된 선진(先軫)의 직을 이어 받아 하군부수(下軍副帥)가 되었다. 여성(呂省)과 함께 란을 일으켜 반역죄로 처형당한 극예(<谷+邑>芮)의 아들 극결(<谷+邑>缺)을 문공에게 천거하여 하군부수가 되게 한 다음 성복대전에 종군하여 투발이 이끌던 초나라의 우군과 대적하여 당진군이 초군을 대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8. 호석고(狐射古)
부친인 호언(狐偃)과 함께 동안 진문공을 따라 중원을 유랑했다. 진양공(晉襄公)이 죽고 그 후계자를 정하는데 양공의 아들 이고(夷皐)가 나이가 너무 어려 당시의 당진의 상경 조돈(趙盾)이 섬진에 살고 있던 문공의 아들 공자옹(公子雍)을 추대하려고 하자 호석고는 진(陳)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공자락(公子樂)을 데려오려고 했다. 이에 조돈은 자기 문객인 공손저구(公孫杵臼)를 시켜 도중에 매복하고 있다가 당진으로 들어오던 공자락을 살해하게 했다. 그러나 양공의 적자인 이고를 제치고 공자옹을 세우려는 조돈의 계획에 대한 백성들의 여론이 나빠지자 조돈은 할 수 없이 이고를 군주로 세우고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르기 위해 섬진군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오고 있던 공자옹을 습격하여 전사케 하고 섬진군은 궤멸시켰다. 이고가 군주자리에 오르고 조돈이 조정의 권력을 손에 쥐게되자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호석고는 이민족이 세운 로국(潞國)으로 망명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9. 개자추(介子推)
진문공이 중원을 유랑할 때 따라다녔던 사람으로, 진문공과 함께 환국하던 중 호언(狐偃)이 문공에게 자기의 공을 내세우자 그와 같은 사람과 같은 반열에 서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아무런 작별인사도 없이 문공의 곁을 떠났다. 후에 문공이 자기를 따라다니며 유랑생활을 같이 했던 인사들에 대해 논공행상을 할 때 그 대상에서 빠지자 개자추는 노모를 등에 업고 도성을 떠나 금산(錦山)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진문공의 부름에 결코 응하지 않았다. 문공은 개자추가 자기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금산에 불을 질러 그로 하여금 산에서 내려오게 만들려고 했으나 산에서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었다. 문공이 이를 애석하게 여겨 개자추의 자손을 금산에 봉하고 이름을 개산(介山)으로 바꾸어 부르게 했다. 후세 사람들은 개자추가 금산에서 불에 타죽은 것을 기념하기 시작하여 한식절의 기원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개자추가 진문공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산에서 나오지 않자 금산 일대에 개자추를 봉하고 개산(介山)이라 불렀으며 그는 불에 타 죽은 것이 아니라 산중에서 살면서 늙어 죽었다고 했다.

10. 전힐(顚<吉+頁>)
진문공이 유랑할 때 그 뒤를 다녔던 용력이 센 장사다. 문공이 조나라의 대부 희부기에 대해 특별대우를 하자 이를 시기하여 위주와 함께 그의 집에 불을 질러 살해했다. 진문공은 전힐은 주범이라고 하여 죽이고 위주는 죽음만은 면하게 해 주었다.

다음은 진문공이 유랑생활을 할 때 그 뒤를 따라다니던 가신들을 찬양한 칠언시(七言詩)이다.

蒲城公子遭讒變(포성공자우참변)

포성의 공자 중이(重耳)가 참소를 받아 변을 당하여


輪蹄西指奔如電(윤제서지분여전)

수레를 타고 서쪽을 향하여 번개같이 도망쳤다.


擔囊仗劍何紛紛(담낭장검하분분)

등짐을 지고 칼을 차고 찾아온

재사들이 어찌 이리 많은가?


英雄盡是山西彦(영웅진시산서언)

찾아온 영웅들은 모두가

태항산(太行山) 서쪽의 영웅들이었다.


山西諸彦爭相從(산서제언쟁상종)

앞을 다투어 따르고자 하던 산서의 수많은 영재들은


呑云吐雨星羅胸(찬운토우성나흉)

구름을 뱉고 비를 토하며 별을 잡는

기개와 포부를 가슴에 지녔었다


文臣高等擎天柱(문신고등경천주)

뜻이 높은 문신들은 천하의 기둥을 떠받들고자 했고


武將雄誇駕海虹(무장웅과가해홍)

용감한 무장들은 바다 무지개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처럼 뽐내었다.


君不見趙成子(군불견조성자)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조성자 쇠(衰)가


冬日之溫徹人隨(종일지온철인수)

자기 체온으로 사람의 뼛속까지 따뜻하게 덥힌 것을


又不見司空季(우불견사공계)

또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사공계 서신(胥臣)이


六韜三略 鐃經濟(육도삼략요경제)

육도삼략으로 부국강병을 일으킨 것을!


二狐肺腑兼尊親(이호폐부겸존친)

호모(狐毛), 호언(狐偃) 형제는

폐부 깊숙이 부친의 당부를 지키면서


出奇制變圓如輪(출기제변원여륜)

기계를 내어 닥쳐오는 변을 막기를

마치 돌아가는 수레바퀴처럼 자유자재로 하였다.


魏犨矯矯人中虎(위주교교인중호)

위주는 씩씩한 사람 중의 호랑이고


賈陀强力輕千鈞(고타강력경천균)

가타는 천근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장사였다.


顚頡昻藏獨行意(전힐앙장독행의)

전힐은 높은 뜻을 가슴에 감추고

뜻한 바를 행하는 사람이었고


直哉先軫胸无滯(직재선진흉무체)

올곧은 선진은 가슴에 막히는 것이 없었다.


子推介節誰與儔 (자추개절수여주)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개자추의 절개는


百鍊堅金任磨礰 (백련견금임마력)

백 번이나 단금질하여

아름답게 갈아 놓은 금과 같이 빛났다.


頡頏上下如掌股(힐항상하여장괵)

모두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사들인데

서로 앞다투어 중이의 손발이 되었다.


周流遍歷秦齊楚(주류편력진제초)

그들은 모두 진(秦), 제(齊), 초(楚) 등의

천하를 유랑하면서


行居寢食无相離(행거침식무상리)

어디를 가서건, 머물거나 자거나 먹는 중에도

서로 헤어지지 않았고


患難之中定臣主(환난지중정신주)

온갖 환난의 와중에서도 군신의 직분을 잃지 않았다.


古來眞主百靈扶(고래진주백령부)

옛날부터 진정한 군주는

백 명의 신령이 돕는다고 했는데


風虎雲龍自不孤(풍호운룡자불고)

바람을 일으키는 호랑이와 구름을 불러오는 용이

어이하여 외롭겠는가?


梧桐種就鸞鳳集(오동종취란봉집)

오동나무는 봉황과 란새를 불러모으는데


何問朝中菀共枯(하문조중완공고)

어찌하여 조당에서는 완고(菀枯)에 대해 물어

부귀와 영화를 논하는가?


▶조성자(趙成子)/ 조쇠(趙衰)의 시호(諡號). 조쇠의 후손들은 후에 당진을 삼분하여 조나라를 세워 전국칠웅의 하나가 되었다.
▶이호(二狐)/ 호언(狐偃)과 호모(狐毛)를 말함. 중이(重耳)의 외조부는 호돌(狐突)이다. 즉 호언과 호모는 중이의 외삼촌이다.
▶위주(魏<雙-又+牛>)/ 시호는 위무자(魏武子)이다. 후에 그의 후손은 당진을 삼분하여 위나라를 세웠다.
▶완고(<艸+宛>枯)/ 헌공의 젊은 계비 여희가 태자 신생을 제거하기 위해 우시라는 광대를 태자의 후원자인 소부(少傅) 리극에게 보내 회유하라고 시켰다. 이에 리극은 우시가 부른 완고라는 노래를 듣고 여희와 신생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했다. 리극이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한 여희는 신생을 모함하여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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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04-05-11
[일반] 국군의날 우산을 바쳐들고 대통령을 따가리한 대한민국의 국방부장관...그리고 제나라…

한심한 대한민국의 국방부장관의 몰골을 보자니 나라의 장래가 심히 우려됩니다. 그것도 국군의날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 60만 대군의
양승국 04-05-11
[일반] 진문공의 논공행상과 인사정책

진문공(晉文公)의 논공행상과 인사정책 진문공은 제환공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된 당진(唐晉)의 군주다. 여희의 란을 피해 19년 동안 그를 따르던
양승국 04-05-11
[일반] 토사구팽의 화를 피한 지혜로운 범려 이야기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생리를 깨달은 범려 이야기 다음은 사마천의 사기 월왕구천세가 편 말미에 있는 범려에 부분만 발췌하여 옮긴 것
양승국 04-05-11
[일반] 12살에 진나라의 상경이 된 감라 이야기

치자상경(稚子上卿) 파격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나 파격인사라는 말은 모든 격식이나 규범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입각하여 인사를 행한다는 말
양승국 04-05-11
[일반] 임기응변의 대가 안영 이야기1

복숭아 두 개로 제나라의 세 장사를 죽이고 명장 사마양저(司馬襄苴)를 발탁, 제나라의 경공(景公)을 패자로 올린 안영(晏嬰)에 대한
양승국 04-05-11
[답변] 임기응변의 대가 안영 이야기2

영왕이 묻기를 마치자 안영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도적질을 잘 하는가?” 안자는 그것이 영왕이 자
운영자 06-10-06
[일반] 소설 편작(扁鵲)

제환공이 관중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다시 수조(竪 刁), 옹무(雍巫)와 개방(開方) 세 사람을 다시 불러 측근에다 두자 포숙아가 와서 간
양승국 04-05-11
[일반] 낭만주의자 테러리스트-예양 이야기

예양은 원래 당진의 육경 집안 중 범씨와 순씨들의 가신 노릇을 차례로 하다가 후에 지백의 모사가 되었다. 한, 위, 조 삼가에 의해 지씨 종족들은
양승국 0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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