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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과 호복기사-2
양승국
일반

전국칠웅 중, 조나라는 전국말기 유일하게 진나라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었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였다. 그것은 무령왕이라는 걸출한 왕이 나타나 중산국의 병합과 함께 북방을 개척하여 그 영토를 획기적으로 확장시켰고 또한 그 동안 전차전과 보병을 위주로 한 열국들의 전투방식을 호복기사(기마병)라는 병과를 도입 기마전을 위주로 한 전술을 전투에 도입했기 때문이다. 무령왕이 도입한 기마전술은 중국의 전쟁사에서 신기원을 이룩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무령왕이 이루어 놓은 업적도 조나라 왕족들의 무능과 신하들의 분열로 동진하는 진나라의 세력을 당해 내지 못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전국시기 후반에 벌어진 진나라와 조나라와 싸움은 진나라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그 결과 중국은 진나라로 통일하게 된 것이다. 무령왕은 기원전 325년에 즉위하여 295년 그 신하들의 공격으로 사구궁에서 굶어 죽을 때까지 27년간 재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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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은 신장이 여덟 자 여덟 치1)에 달하고 얼굴은 미골(眉骨)이 불룩하게 솟아 용처럼 생겼고, 입은 새의 부리처럼 튀어나왔으며, 살쩍은 무성하게 나서두 귀를 덮었고 곱슬 수염에 가슴둘레가 석 자에 이르는 거구에 만부부당의 영웅과 같은 기상에, 사해(四海)를 집어삼키려는 뜻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령왕 즉위 5년인 기원전 321년에 한왕(韓王)의 딸을 취하여 부인으로 삼고 아들 장(章)을 낳아 태자로 세웠다. 즉위 16년에 밤에 잠을 자다가 한 미인이 거문고를 타는 켜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에 깨어서도 그 모습이 너무 생생하여 그 미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사모하게 되었다. 다음날 조당에 나가 군신들에게 꿈속의 미인에 대해 말했다. 대부 호광(胡廣)이 앞으로 나와 그 여인은 거문고를 잘 타는 맹요(孟姚)일 것이라고 말했다. 무령왕(武靈王)이 맹요를 대릉(大陵)의 고대(高臺)에 불러 접견했다. 맹요의 자태는 무령왕이 꿈속에서 본 것과 똑 같아, 다시 맹요로 하여금 거문고를 타게 해 본 결과 역시 꿈속에서 들은 소리와 같았음으로 크게 기뻐했다. 이어서 맹요를 궁중에 불러들여 살게 하고 이름을 오왜(吳娃)라고 불렀다. 오왜가 아들 하(何)를 낳았다. 이어서 한후(韓后)가 죽게되자 결국은 오왜를 정비로 삼고 태자 장(章)을 폐하고 하(何)를 대신 세웠다. 당시 조나라의 북쪽에는 연(燕)나라, 동쪽에는 호(胡), 서쪽에는 임호(林胡)2)와 누번(樓煩)3)이 있어 국경을 접하고 있고 또한 당시에 있어서 세력이 가장 강한 진(秦)나라와는 하수(河水)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무령왕은 사방에 적국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날이 갈수록 네 곳의 침략을 받음으로서 조나라의 세력이 쇠약하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이에 그는 즉시 스스로 호인(胡人)들의 복장으로 바꿔 입고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와 장화를 신은 다음에 백성들에게 호족들의 생활 습속을 따라 소매가 좁고 왼쪽 켠에 섶을 단 옷을 입도록 명했다. 그것은 백성들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활을 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무령왕은 백성들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호인들의 복장을 입도록 했다. 그래도 오랑캐의 복장은 입을 수 없다고 하면서 명을 받들지 않고 수레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 수레를 빼앗아 부숴버리게 하고 말을 타고 다니도록 했다. 이윽고 매일마다 그들을 말에 태워 사냥터로 내보내 사냥을 하게 하자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강한 군사들로 변모해 갔다. 무령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다니면서 동쪽으로는 상산(常山)4), 서쪽으로는 운중(雲中)5), 북쪽으로는 응문(應門)6)까지 이르러 수백 리의 땅을 개척하여 조나라 영토로 삼았다. 이어서 진나라를 병탄할 뜻을 품고 운중(雲中)으로의 길을 이용하여 구원(九原)7)을 통과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나라의 도성 함양(咸陽)을 기습하려고 하였다. 그 일을 수하의 장수들에게 맡길 수 없다 하여 그의 아들에게는 나라를 다스리게끔 하고 그는 몸을 빼내어 사방의 주변을 경략하는데 전념하려고 하였다. 이어서 군신들을 대거 동궁으로 모이게 하고 태자 하(何)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가 조혜왕(趙惠王)이다. 무령왕은 스스로 자기를 주보(主父)라고 칭했다. - 주보라는 말은 후세의 태상황(太上皇)과 같은 말이다.- 비의(肥義)를 상국에, 이태(李兌)를 태부(太傅)로 삼고 공자성(公子成)8)은 사마로 임명하였다. 큰아들 장(章)에게는 안양(安陽)9)의 땅을 주고 안양군(安陽君)이라고 부르게 하고 전불례(田不禮)로 하여금 보좌하도록 했다. 이때가 주난왕(周?王) 17년 기원전 298년의 일이었다.


▷1)여덟 자 여덟 치/ 춘추시대의한 자의 길이는 약 22.5cm 에서 23cm 였음으로 무령왕의 신장은 약 190cm 에서 2m 정도임

▷2)임호(林胡)/ 지금의 산서성 삭현(朔縣) 북쪽에서 내몽고(內蒙古) 포두시(包豆市) 이남에 분포하여 살았던 유목민 이민족으로 기마술과 사격술에 능하였다.

▷3)누번(樓煩)/춘추전국 때 지금의 산서성 북쪽 지방에 거주하여 기마와 활쏘기에 능했던 이민족.

▷4)상산(常山)/ 하북성에 있는 항산(恒山)을 지금의 하북성 곡양현(曲陽縣) 서북쪽에 있던 산.

▷5))운중(雲中)/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자치구의 탁극탁(托克托) 동북 쪽의 변방도시를 말함.

▷응문(應門="鷹門)/무령왕이"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멸하고 그 땅에 설치한 군현의 이름. 관할 구역은 지금의 산서성 영무(寧武), 신지(神池), 오채(五寨)등의 현(縣)과 내몽고 남쪽 일부지역을 포함하였다.

▷구원(九原)/ 지금의 내몽고자치주(內蒙古自治州) 포두시(包豆市) 동북

▷공자성(公子成)/ 무령왕의 숙부이다.

▷안양(安陽)/지금의 하북성 안양시(安陽市) 서남



II. 다음 해에 주보(主父)가 한단성(邯鄲城)에서 나와 운중(雲中)을 순행했다. 대(代)1) 땅에서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누번(樓煩)으로 진군하여 그곳에서 군사들을 수습하였다. 이어서 군사들을 이끌고 영수(靈壽)로 나와 중산국(中山國)3)을 다스리기 위해 그곳에다 성을 쌓고 이름을 조왕성(趙王城)이라 했다. 오와(吳蛙)를 위해 비향(肥鄕)4)에 성을 쌓고부인성(夫人城)이라고 이름지었다. 이때가 조나라가 삼진(三晋) 중에서 가장 강성할 때였다. 무령왕(武靈王)이 진나라 산천의 형세를 살피고 진왕이라는 위인의 사람됨을 알아보려고 즉시 자기를 조나라의 사자 조초(趙招)라고 속이고, 조나라에 새로운 군주가 섰음을 알리는 국서를 지참하고 진나라로 향했다. 무령왕은 몇 사람만의 수행원만을 데리고 진나라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도중 진나라의 지형을 도면에 샅샅이 그려 넣었다. 무령왕의 행렬이 이윽고 함양에 이르러 진왕을 배알하게 되었다. 소양왕이 조나라 사신으로가장한 무령왕에게 물었다.



“ 너희 나라 왕의 나이는 지금 몇 살이나 먹었는가?”



무령왕 “ 아직 원기가 팔팔한 장년의 나이입니다.”



소양왕 “ 그런데 어찌하여 왕위를 그의 아들에게 벌써 물려주었는가?”



무령왕 “ 저희 선왕께서는 옛날 왕위를 이어 받으셨을 때 나이가 너무 어려, 나라 일을 하는데 너무 많이 익숙하지 않아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세자를 왕위에 미리 앉혀 나라를 다스리는데 미리 익숙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저희 나라 군주께서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를 비록 주보(主父)라고 칭하고 있지만, 나라 일에 아직은 손을 뗀 것은 아닙니다. ”



소양왕 “ 그대의 나라도 또한 우리 진나라를 두려워하고 있는가?”



무령왕 “ 과군께서 진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그 군사들에 게 호복(胡服)을 입혀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기마병을 훈련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말을 타고 달리며 활시위를 당겨 쏠 수 있는 기마 군사들은 수효가 작년보다 열 배는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그 군사들로 진나라의 군사들을 맞이하여 대항할 수 있거나, 아니면 두 나라가 우호관계를 맺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양왕은 조나라의 사자가 자기의 묻는 말에 전혀 위축됨이 없이 분명한 어조로 대답하여 그를 매우 경건한 태도로 대했다. 이윽고 조나라의 사자가 인사를 올리고 자기의 관사로 돌아갔다. 소양왕이 그 날 저녁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조나라 사자의 풍모가 기골이 장대하고 그 태도가 위풍당당하여 남의 밑에서 신하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를 의심하는 마음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전전반측(輾轉反側)하였다. 이윽고 날이 밝자 즉시 사람을 보내 조나라 사자 조초(趙招)를 불러오라고 명했다. 진나라 관리가 공관에 가서 진왕의 명을 전했으나 조초(趙招)의 수행원이 나와서 대답했다.



“ 조초 사자 님은 병이 들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원컨대 병이 차도가 있으면 곧바로 알현하겠습니다.”



그리고 삼 일이 지났으나 사자가 그때까지 입조하지 않았다. 소양왕이 노하여 사람을 보내 강제라도 잡아오라고 명했다. 진나라의 관리가 곧바로 관사에 들려 조나라 사자를 찾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고 자기가 진짜로 조나라의 사자인 조초라고 주장하는 그의 수행원만을 잡을 수 있을 뿐이었다. 진나라의 관리가 그 수행원을 붙잡아 소양왕 면전으로 끌고 왔다. 소양왕이 물었다.



“ 네가 진짜 조초(趙招)라면 몇 일 전의 그 자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란 말인가?”



조초 “ 그분은 실은 우리 조나라의 왕인 주보(主父)입니다. 주보께서 대왕의 위용(偉容)을 몰래 살펴보시기 위해 사자로 가장하여 이곳에 납신 것입니다. 함양성을 나가신 지 이미 3일이 되었습니다. 주보께서 소신 조초에게 이곳에 남아 대왕의 치죄를 기다리라고 특별히 명하셨습니다.”



소양왕이 크게 놀라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 조나라 왕이 어찌 나를 이렇게 크게 속였단 말인가?”



소양왕은 즉시 경양군(涇陽君)에게 백기(白起)를 데리고 정예병(精銳兵) 3천을 이끌고 밤낮으로 그 뒤를 추격하게 했다. 경양군과 그의 군사들이 함곡관(函谷關)에 이르자 그곳의 수장(守將)과 사졸(士卒)들이 고했다.



“ 조나라 사자는 삼 일 전에 이미 이 관문을 빠져나갔습니다. ”



경양군이 돌아와 소양왕에게 그 경과를 보고하였다. 소양왕은 가슴이 두근거려 몇 일 간을 편안히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이윽고 몇 일이 지나서야 소양왕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초(趙招)를 예를 갖추어 후하게 대접하게 한 다음 조나라로 귀국하게 하였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를 이 일을 논했다.


分明猛虎据咸陽 (분명행호거함양)

맹호가 함양성 내에 버티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誰敢潛窺函谷關(수감장규함곡관)

누가 감히 함곡관 안을 넘겨볼 수 있었겠는가?


不道龍顔趙主父(부도여용안조주보)

용의 형상을 한 조나라의 주보가 있음을 모르는가?


竟從堂上認秦王(경종당상인진왕)

결국은 당상에 올라 호랑이 같은 진왕을 대면했도다!




▷1)대국(代國)/산서성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태항산록(太行山麓) 서쪽의 하북성 울현(蔚縣) 일대에 있었던 이민족인 북적(北狄)이 세운 나라이다. 조양자(趙襄子) 무휼(無恤)에 의해 조나라 땅에 편입되었다. 대왕(代王)의 부인은 조간자의 딸이며 조양자의 누이였다. 부친인 조간자(趙簡子)의 장례를 치르고 미처 상복도 벗기 전에, 양자는 진양성(晉陽城) 북쪽에 있던 하옥산(夏屋山 : 지금의 산서성 대현(代縣) 동북)에 대왕(代王)을 초대하고, 요리사에게 쇠로 만든 큰 국자를 들고 대왕(代王)과 그 시종들에게 음식을 권하게 했다. 이어서 락(各)이라는 백정을 시켜 쇠로 만든 국자로 대왕과 그 시종들을 쳐죽이고 군사를 동원하여 대나라를 점령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양자의 누이는 슬피 울다가 비녀를 뽑아 숫돌에 날카롭게 간 다음 자기의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대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가엾게 여겨 그녀가 자살한 곳을 마계산(摩?山)이라고 불렀다. 양자는 대나라 땅에 자기의 형인 백로(伯魯)의 아들 조주(趙周)를 봉하여 대성군(代成君)으로 삼았다. 백로는 원래 조씨 가문의 적장자였다가 조양자가 사위(嗣位)를 받는 바람에 폐위되었는데 양자가 대나라를 정복하였을 때는 이미 죽고 없어 백로의 아들을 봉하여 자기 때문에 적자의 자리를 빼앗긴 일을 보상하려고 한 것이다.


▷2)영수(靈壽)/ 지금의 하북성평산현(平山縣) 경내로써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시(石家庄市) 서북 약 20키로에 있던 성읍으로서 전국 때 위나라 장수였던 악양(樂陽)에 의해 기원전 406년 멸망당했던 중산국(中山國)이 기원전 378년에 다시 복국하여 도읍으로 삼은 성읍이 영수(靈壽)다.


▷3)중산국(中山國)/지금의 하북성 정현(定縣)과 당현(唐縣) 일대에 있었던 이족(夷族)의 제후국으로써 위나라 위문후(魏文侯) 19년 기원전 406년 위(魏)나라의 장수 악양에 의해 멸망하고 그 영토는 위나라에 편입되었으나 후에 중산국의 후손들이 원래의 위치에서 서쪽인 지금의 하북성 평산현(平山縣) 경내인 영수(靈壽)라는 곳에 나라를 다시 세웠다. 다시 조혜왕(趙惠王) 3년 기원전 296년에,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에 의해 완전히 멸망 당하고 그 영토는 조나라에 편입되었다


▷4)비향(肥鄕)/ 지금의 하북성석가장시(石家庄市) 경내 동



III. 무령왕(武靈王)이 운중(雲中)을 순행하고 한단(邯鄲)으로 돌아와서 그 동안의 일에 대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하고 온 나라의 백성들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여 5일 동안이나 먹고 마시며 즐기게 했다. 조나라의 모든 신하들이 조정으로 나와 무령왕이 이룩한 업적을 축하하였다. 무령왕이 이윽고 혜왕으로 하여금 정사를 주제 하도록 하고 자기는 그 옆에 자리를 마련하여 여러 신하들이 혜왕에게 조례를 드리는 것을 보았다. 혜왕(惠王) 하(何)는 어린나이에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착용하여 남면(南面)하여 왕좌에 앉아 있는데 비해, 체구가 장대하고 훤칠한 장부가 된 장자 장(章)은 오히려 북면(北面)하여 왕에게 절을 올려 형이 동생에게 허리를 굽히고 있는 것을 본 무령왕은 장(章)을 측은하게 생각하였다. 조회(朝會)가 파하자 무령왕은 곁에 서있던 공자승(公子勝)1)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말했다.



“ 네가 보기에 안양군(安陽君)의 모습이 어떻냐? 비록 신하들의 대열에 서서 배례를 드리고 있지만 얼굴에는 달갑지 않는 기색이 역력하구나! 내가 조나라를 둘로 나누어 장(章)을 대왕(代王)으로 삼아 조왕(趙王)과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하냐?”



조승 “ 대왕께서 옛날에 이미 일을 잘못 처리하여 지금은 군신(君臣) 간의 관계가 정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안양군을 대왕(代王)으로 봉하시겠다하니 이것은 사단을 다시 일어나 앞으로 변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무령왕 “ 모든 일의 결정은 내 생각에 달려 있는데 무엇을 걱정한단 말이냐?”



무령왕이 궁궐로 돌아오자 부인 오와(吳蛙)는 그의 안색이 변한 것을 보고 물었다.



“ 오늘 조당에서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무령왕 “ 오늘 내가 조당에서 큰아들 장(章)을 보니 형된 자가 동생에게 배례를 드리는 것을 보고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오. 그래서 장을 대왕(代王)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승(勝)이라는 놈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해서 내가 주저하며 생각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오.”



오와 “ 옛날 진목후(晉穆侯)가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구(仇)라 했고 작은아들은 성사(成師)라 했습니다. 목후가 죽자 큰아들인 구(仇)가 사위(嗣位)하여 그 도읍을 익성(翼城)에 정하고 자기의 동생 성사(成師)를 곡옥(曲沃)에 봉했습니다. 그 후에 시간이 지나자 곡옥(曲沃)의 세력이 본국인 익성(翼城)보다 더 강해져 결국은 성사의 후손들이 구의 후손들을 멸하고 본국인 익성을 병탄했습니다. 이것은 대왕께서도 알고 있는 일일 것입니다. 동생의 신분이었던 성사의 후손들도 형의 후손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었는데 하물며 형의 신분으로서 그 동생에게 임하는 것은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어린 사람에게 임하는 것과 같으니, 장차 우리 모자는 어육(魚肉)이 되고 말 것은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무령왕이 오왜(吳娃)의 말에 혹하여 장을 대왕(代王)으로 삼으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안양군(安陽君) 장(章)이 옛날 태자의 신분으로 동궁에 기거할 때 옆에서 시중을 들던 사람이 주보가 나라를 나누어 한 쪽을 장에게 주려고 주위 사람들과 의논한 것을 곁에서 듣고 아무도 몰래 장(章)을 찾아와 고했다. 장(章)이 전불례(田不禮)와 그 일에 대해 의논하자 불례(不禮)가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 주보께서 나라를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했던 것은 공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데 부인이 힘들여 간하여 그 뜻을 막았습니다. 왕의 나이는 아직 어리고, 나라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니 온 힘을 다하여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대사를 도모한다면 주보도 역시 어쩌지는 못할 것입니다. ”



장 “ 이 일은 오로지 경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대사가 이루어진다면 부귀를 같이 나누도록 하리다!”



상국(相國) 비의(肥義)와 평소에 교분이 두텁게 지내던 태부(太傅) 이태(李兌)가 몰래 찾아와 은밀히 고했다.



“ 안양군은 기개가 높은 사람이지만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있어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매우 많습니다. 거기에다 자기가 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전불례(田不禮)는 원래 기가 세고 마음이 잔인한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한 무리가 되었으니 그들은 요행을 바라며 모험을 걸어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감은 이 나라의 정사를 돌보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재상의 몸이고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니 변란이 일어난다면 필시 그 화가 먼저 대감의 신상에 닥칠 것입니다. 지금에라도 몸에 병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며 재상의 자리를 공자성(公子成)에게 넘기고 은퇴를 한다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의 “ 주보가 이 비의로 하여금 지금의 어린 왕을 받들게 명하시고 자의 직위를 존귀한 상국에 올려 이 비의로 하여금 왕의 안전을 위탁하시었오. 지금 아직 그 화가 아직 형체를 들어내지 않고 있는 마당에 내가 먼저 몸을 사려 일을 회피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일신의 안전만을 탐하는 소인배라고 욕할 것이오.”



이극이 탄식하며 말했다. <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8px; COLOR: #008080; LINE-HEIGHT: 37px; FONT-FAMILY: '한양해서'; TEXT-ALIGN: 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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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兎死狗烹)의 생리를 깨달은 범려 이야기 다음은 사마천의 사기 월왕구천세가 편 말미에 있는 범려에 부분만 발췌하여 옮긴 것
양승국 04-05-11
[일반] 12살에 진나라의 상경이 된 감라 이야기

치자상경(稚子上卿) 파격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나 파격인사라는 말은 모든 격식이나 규범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입각하여 인사를 행한다는 말
양승국 04-05-11
[일반] 임기응변의 대가 안영 이야기1

복숭아 두 개로 제나라의 세 장사를 죽이고 명장 사마양저(司馬襄苴)를 발탁, 제나라의 경공(景公)을 패자로 올린 안영(晏嬰)에 대한
양승국 04-05-11
[답변] 임기응변의 대가 안영 이야기2

영왕이 묻기를 마치자 안영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도적질을 잘 하는가?” 안자는 그것이 영왕이 자
운영자 06-10-06
[일반] 소설 편작(扁鵲)

제환공이 관중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다시 수조(竪 刁), 옹무(雍巫)와 개방(開方) 세 사람을 다시 불러 측근에다 두자 포숙아가 와서 간
양승국 04-05-11
[일반] 낭만주의자 테러리스트-예양 이야기

예양은 원래 당진의 육경 집안 중 범씨와 순씨들의 가신 노릇을 차례로 하다가 후에 지백의 모사가 되었다. 한, 위, 조 삼가에 의해 지씨 종족들은
양승국 0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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