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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정열전(汲.鄭列傳)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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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1329. 正衣冠立于朝廷(정의관립우조정),

의관을 바르게하고 조정에 서면

1330. 而群臣莫敢言浮說(이군신막감언부설),

여러 신료들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여 허튼 소리를 하지 못했다.

1331. 長孺矜焉(장유긍언);

장유(長孺)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장유(長孺)/ 급암(汲黯)의 자(字)이다.

1332. 好荐人(호천인),

사람을 천거하기를 좋아했으며,

1333. 稱長者(칭장자),

사람들로부터 장자(長子)라고 칭송을 받은 것은

1334. 壯有漑(장유개).

정장(鄭壯)에게 기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335. 作<汲鄭列傳>第六十(작<급정열전>제욱십).

<급정열전>제육십을 지었다.


열전60. 汲巖•.鄭當時(급암정당시)


급암(汲黯)의 자는 장유(長孺)이고 복양(濮陽) 출신이다. 옛날 위(衛)나라 군주의 총애를 받았던 선조의 7대 손으로 대대로 경대부(卿大夫)를 지냈다. 금압은 부친의 일을 이어받아 효경제(孝景帝) 때 태자 세마(洗馬)가 되었다. 급암은 태도가 엄숙하여 다른 사람이 꺼릴 정도였다. 효경제가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급암은 알자(謁者)가 되었다. 이때 동월(東越)이 서로 공격하여 전쟁이 벌어졌음으로 황제가 급암을 사자로 보내 사정을 알아오게 했다. 그러나 급암은 동월에 가지 않고 오나라에서 돌아와 복명하기를 월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은 그들의 오래된 습관이니 천자의 사자가 힘써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내(河內)에 화재가 발생하여 천여 가구에 달하는 집이 탔다. 황제가 급암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보도록 했다. 급암이 현장에서 돌아와 복명했다.

“ 사람들이 잘못해서 화재를 일으켜 연이어 있는 집들이 불에 탔으니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신이 하남(河南)을 지나는데 그곳의 가난한 자들 만여 가구가 수해와 가뭄으로 피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부자지간이 서로 먹을 것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신이 삼가 상황에 맞게 먼저 처리하기 위해 부절을 가지고 하남의 곡식 창고를 열도록 하여 빈민들을 구제했습니다. 신은 청컨대 부절을 반납하고 성지(聖旨)를 멋대로 바꾼 죄를 엎드려 빕니다. ”

황제가 현명하다고 여겨 급압을 용서하고 그를 옮겨 형양(滎陽)의 현령(縣令)으로 삼았다. 급암은 현령으로 좌천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칭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황제가 듣고 즉시 급암을 불러 중대부(中大夫)로 삼았으나 지나치게 자주 간하므로 내직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동해태수로 옮겨 갔다. 황노의 학술을 공부한 급암은 관리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보살피는데 청렴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승(丞)과 사(史)를 잘 선발하여 모든 일을 일임했다. 그가 다스리는 방법은 큰일에만 자신이 지침을 내리고 작은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급암은 원래 병치레가 많아 자주 내실에 누워 출입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 년여의 시간이 지나자 동해군은 크게 다스려져 사람들이 칭송했다. 황제가 듣고 급암을 경사로 불러 주작도위(主爵都尉)로 삼아 구경의 대열에 서게 했다. 그의 치도는 무위(無爲)에 힘써 대체만 넓히고 세세한 법률조항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급암은 사람됨이 거만하고 예에 소홀하여 면전에서 사람을 면박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자기의 뜻에 맞는 자는 잘 대해 주고 마음에 맞지 않는 자는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이에 선비들도 역시 그를 잘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학문과 유협을 좋아하고 기개와 절의를 지녔으며 안으로는 깨끗한 몸을 지니기 위해 힘써 수양했다. 직간하기를 좋아하여 여러 번 황제의 존안을 범하고 대신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부백(傅柏)과 원앙(袁盎)의 사람됨을 앙모했다. 관부(灌夫), 정당시(鄭當時) 및 종정(宗正) 유기질(劉棄疾)과 사이가 좋았다. 그는 자주 직간을 올렸기 때문에 한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승상은 왕태후의 동생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었는데 중이천석(中二千石)의 관리들이 찾아와 인사를 올려도 그는 예를 갖추어 답례하지 않을 정도로 위세가 컸으나 금암은 전분을 볼 때는 절을 올리지 않고 항상 읍만 행할 뿐이었다.

천자가 천하에서 초빙한 문학과 유자들 앞에서 말했다.

“ 나는 정치를 부흥하고자 요순(堯舜)을 본받으려고 한다.”

급암이 듣고 면전에서 말했다.

" 폐하께서는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시면서 겉으로만 인의를 행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찌 요순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

황제가 무안하여 입을 닫고 말은 하지 않았으나 얼굴에 노한 기색을 띠우며 조회를 파하자 공경대신들은 모두 급암을 위해 걱정했다. 황제가 퇴정하여 좌우의 시자들에게 말했다.

“ 심하도다, 급암의 우직함이여!”

신하들 중 몇이서 급암의 잘못을 지적하자 급암이 말했다.

“ 천자가 공경을 둔 것은 자신을 잘 보필하라는 뜻인데 어찌 신하된 자로써 황제의 뜻을 따라 아첨만을 일삼아 그 주군을 불의에 빠지게 한단 말이오. 또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몸만을 아끼면서 조정을 욕되게 한단 말이오?”

병이 많은 급암이 다시 병이 들어 세 달을 넘기자 황제가 항상 하던 대로 면직시키지 않고 병가를 여러 번 주었으나 결국 치유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병이 들었을 때 장조(莊助)가 급암을 위해 병가를 청하자 황제가 물었다.

“ 급암은 어떤 사람이오?”

“ 금압에게 직책을 맡겨 관직에 있게 하면 다른 사람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 못하겠지만 어린 군주를 보좌하는 일에 있어서는 깊고 튼튼히 하여 수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오라해도 오지 않을 것이며 가라고 손을 저어도 가지 않을 사람이니 비록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같은 장사라 할지라도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을 것입니다. ”

" 그렇소. 옛날의 사직지신이 있었다고 했는데 급암 같은 사람이 그런 자가 아닌가 하오.”

황제는 대장군 위청이 시종할 때도 옆으로 걸터앉아 그를 대했고 승상 공손홍이 평소 배알할 때도 어떤 때는 관을 쓰지 않고 대면했으나 급암을 대할 때는 관을 쓰지 않고 만나는 법은 없었다. 한 번은 황제가 무장(武帳)에 앉아 있는데 급암이 앞으로 다가와 어떤 일을 상주하려고 했다. 그때 관을 쓰고 있지 않았던 황제는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급암의 모습을 보고 장막 안으로 몸을 피한 후에 사람을 시켜 상주할 일이 무엇이냐고 묻게 했다. 황제는 급암에게 예를 갖추어 존경하기를 그와 같이 했다.

장탕이 바야흐로 율령을 바꾸고 정하는 정위가 되자 급암은 여러 차례 장탕을 황제 면전에서 질책하며 말했다.

" 그대는 정경이 되어, 위로는 선제의 공업을 기리지 못하고, 밑으로는 천하의 사악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으며 안국부민(安國富民)과 감옥을 텅비게 하는 두 가지 일 중에 하나도 이루지 못하였다. 백성을 죄에 빠뜨리고 괴롭히는 것으로써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고, 마구 법령을 자잘하게 쪼개어 자신의 공으로 삼았으니, 어찌하여 고제(高帝)의 간약(簡約)한 법을 자기 멋대로 어지럽게 바꾸었는가? 그대는 이 일로써 멸족되리라! "

급암과 논쟁을 벌릴 때마다 장탕은 항상 법조문의 심오함을 들어 지나치게 세세하게 설명했고, 이에 급암은 항상 강직하고 엄숙한 말투의 고답적인 자세로 임했으나 결코 굴복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난 급암은 장탕을 매도하며 말했다.

“ 세상에 도필리(刀筆吏)를 공경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장탕이 득세하면 틀림없이 천하의 백성들은 발을 포개어 한 쪽 다리로 불안하게 서서 곁눈질 하면서 눈치를 보게 되리라! ”

이때 한나라가 마침 흉노를 정벌하고 사방의 오랑캐를 불러 감싸 안았다. 일을 줄이는데 힘을 쏟고 있었던 급암이 황제가 한가한 틈을 타서 오랑캐와 화친하고 군사를 일으키지 말아야한다고 말했다.

황제가 바야흐로 유학에 심취하여 공손홍을 높이 대우하니 나라의 일은 점점 더 많아지고 관리와 백성들은 법을 교묘하게 농락했다. 그래서 황제는 법령을 나누어 세밀히 구별하려 했음으로 장탕 등은 자주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이에 급암은 항상 유학을 폄훼하고 공손홍 등을 단지 거짓되고 가식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임금에게 아부하여 용납을 받는다고 면전에서 꾸짖었다. 또 장탕 같은 도필리는 단지 법령을 깊게 하고 교묘하게 법에 저촉되게 하여 사람을 죄에 빠트려 진상을 밝힐 수 없게 만들고 백성들을 억누르는 일을 공적으로 삼는다고 질책했다.

그러나 황제에 의해 더욱 귀한 신분으로 올라간 공손홍과 장탕은 마음 깊이 급암을 미워하였고 천자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윽고 공손홍과 장탕은 빌미를 만들어 그를 죽이려고 했다. 승상의 자리에 오른 공손홍이 황제에게 말했다.

"우내사(右內史) 관할지역 안에는 종실과 고관대작이 많이 살고 있어 다스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청컨대 급암을 옮겨 우내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급암이 우내사가 돼서 수년 동안 관할지역을 다스렸음에도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대장군 위청은 더욱 존귀한 신분이 되었고 또한 그의 누이가 황후였으나 급암은 항상 동등한 예로써 대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급암에게 말했다.

" 본래 천자께서 여러 신하들이 대장군에게 겸손하게 대하길 바라셨음으로 대장군은 더욱 무겁고 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대감께서는 대장군에게 절을 올려 높이셔야 합니다. "

급암이 대답했다.

“ 대장군에게 절을 올리지 않고 읍만을 올리는 손님이 있다면 오히려 대장군의 겸손함을 밝혀 중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말을 전해들은 대장군은 급암을 더욱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자주 국가 조정에 의혹되는 일을 물어 보며 급암을 대우하기를 평소보다 더 잘했다. 회남왕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모의할 때 평소에 급암을 두려워했던 그가 말했다.

“ 직간하기를 좋아하고 절개를 지키고 의를 위해 죽으니, 옳지 않은 일로써 유혹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승상 공손홍에게 설득하는 것은 마치 덮어씌운 뚜껑을 열거나 나무를 흔들어 낙엽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천자가 흉노를 여러 번 정벌하여 공을 세운 후였기 때문에 급암의 말을 더욱 쓰지 않았다.

처음 급암이 구경의 반열에 올랐을 때에는 공손홍과 장탕은 하급 관리였다. 그러나 점점 직위가 높아져 급암과 동렬이 된 두 사람을 급암은 여전히 비난했다. 얼마 후 공손홍이 승상이 되고 후에 봉해지고 장탕은 어사대부가 되었다. 옛날 급암의 밑에서 승(丞)과 사(史)로 근무했던 부하들이 모두 승진하여 급암과 같이 동열에 서거나 어떤 자는 급암보다 더 귀하게 되었음으로 다소 마음이 불편하게 되어 편협한 마음에 원망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어 황제에게 나아가 말했다.

“ 폐하께서는 여러 신하를 쓰는 방법이 마치 쌓아 놓은 장작을 꺼내쓰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온 자가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말이 없던 황제가 잠시 후 급암이 물러가자 말했다.

“ 사람이란 과연 배운 것이 없으면 안 되겠구나! 급암의 말을 살펴보니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는구나!”

그리고 얼마 후에 흉노의 혼야왕(渾邪王)이 종족들을 이끌고 항복해오자 한나라는 거마 2만 승을 지방 관아에서 징발하려고 했으나 현청에 예산이 없어 백성들로부터 빌리려고 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말을 숨겼음으로 말의 숫자를 채우지 못했다. 황제가 노하여 장안령(長安令)을 참수하려고 했다. 이에 급암이 말했다.

“ 장안령은 죄가 없습니다. 이 급암 한 사람의 목을 베시면 백성들이 기꺼이 발을 내놓을 것입니다. 하물며 자신의 군주를 배반하여 한나라에 항복하는 흉노임으로 한나라가 현에서 현으로 서서히 호송하여 전하면 될 일임에도 어찌하여 천하에 령을 내려 소동을 일으키고 오랑캐를 받들기 위해 중국을 피폐하게 하십니까? ”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혼야왕이 당도하자 한나라 상인들과 흉노족과 거래하여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상인들이 5백여 명에 달했다. 급암이 알현할 시간을 요청하여 고문전(高門殿)에서 접견하고 말했다.

“ 무릇 흉노가 장성의 요새를 공격하여 화친을 끊었음으로 중국이 군사를 일으켜 정벌한 결과 사상자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고 그 비용 또한 수백억 금에 달했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생포한 오랑캐를 모두 노비로 만들어 종군하다 죽은 자들 집에 나누어 주고 노획한 재물 역시 그들에게 주어 천하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백성들의 마음에 보답할 줄 알았습니다. 지금 비록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혼야왕이 수만 명의 무리를 끌고 항복해 오자 나라의 창고를 비워 상을 주고, 양민을 징발하여 그들을 모시고 공경하는 일은 마치 망나니 자식을 받드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장안의 저자거리에서 물품을 사고파는 일이 간교한 법관들의 판결과 같이 변방의 관문에서 재물을 나라 밖으로 빼돌리는 행위와 같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흉노의 재물을 가지고 천하를 위로하시기는 커녕 또다시 확실하지도 않은 법조문을 들어 무지한 백성 5백을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이것은 소위 잎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를 상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신은 삼가 폐하께서 하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묵묵히 있다가 결국 급암의 청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 내가 오랫동안 급암의 말을 듣지 않았가 오늘 다시 그의 망언을 들었도다! ”

그리고 멸 달 후에 급암은 사소한 법에 연좌되었으나 사면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에 급암은 전원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한나라의 화폐를 삼수전(三銖錢)을 폐하고 오수전(五銖錢)으로 바꾸었으나 백성들은 여전히 위폐를 만들었고 그 중 초(楚)나라 지방이 특히 심했다. 황제는 회양(淮陽)은 초나라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 생각하여 급암을 불러 회양태수로 제수하였다. 급암이 엎드려 빌며 인장과 인수(印綬)를 받으려고 하지 않자 여러 번 강제로 조칙을 내려 그때서야 비로소 조칙을 받들었다.

조칙에 따라 황제를 배알하게 된 급암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신은 스스로 시골에서 천하게 살며 폐하를 다시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뜻하지 않게 페하께서 저를 다시 등용하실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항상 병이 있어 군현의 일을 보살필 힘이 없습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중랑(中郞)이 되어 대궐을 출입하면서 과오를 보충하며 빠진 것을 줍게 하십시오. 이것이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황제가 대답했다.

" 그대는 회양의 태수직을 하찮게 여기는가? 내가 금방 공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리라! 돌아 보건대 회양의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함으로 내가 단지 그대의 신망을 얻고자 함이니 누어서라도 다스리라! "

급암이 하직인사를 하고 떠나면서 대행령(大行令) 이식(李息)에게 들려 당부의 말을 했다.

“ 나는 버림을 받아 회양군에 거하게 되어 그대와 더불어 조정의 의논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소. 그러나 어사대부 장탕은 좋은 머리로 다른 사람의 충간을 막을 수 있고 속임수로 자신의 잘못을 덮을 수 있소. 교묘하고 망령된 말과 술수에만 힘써 천하를 위해 올바른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군주의 뜻에만 아부하여 황제가 원하지 않으면 그것을 따라 남을 모함하고, 황제가 하고자 하면 그 일을 칭송하며 크게 벌리기를 좋아하며 법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있소. 또한 안으로는 거짓을 품어 군주의 뜻에 영합하고 밖으로는 잔혹한 관리들을 끌고 다니며 위세를 부리고 있소. 공은 구경의 반열에 있으니 먼저 이런 것들을 황제에게 고하지 않으면 장탕과 함께 죽게 될 것이오."

그러나 평소에 장탕을 두려워한 이식은 끝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장탕이 예전에 동해군처럼 다스리자 회양군의 정치는 깨끗해졌다. 후에 과연 장탕이 몰락하자 황제는 옛날 급암이 이식에게 당부한 말을 전해 듣고 장탕을 제지하지 못한 죄를 물어 처형했다. 또한 칙령으로 급암에게는 제후국의 재상이 받는 봉록을 주어 회양을 다스리게 했다. 회양태수가 된지 7년 만에 급암은 노환으로 죽었다. 그가 죽은 후에 황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의 아우 급인(汲仁)을 관리로 등용하여 직위가 구경에 이르게 했다. 그의 아들 급언(汲偃)은 제후국의 재상까지 올랐다.

급암의 고모 아들 사마안(司馬安) 역시 젊은 나이에 급암과 함께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었다. 사마안은 법에 정통하여 운용하는 방법이 깊고 재치가 있어 관리 생활을 잘했다. 관직은 네 차례나 구경의 대열에 올랐다가 하남태수로 재직 중에 죽었다. 그의 형제들은 사마안 덕분에 같은 시기에 2천석의 고관에 오른 자가 10명에 이르렀다.

복양(濮陽) 사람 단굉(段宏)은 처음에 개후(蓋侯) 왕신(王信)을 잘 섬겼고 왕신 또한 단굉을 신임했다. 그래서 단굉 역시 두 번이나 구경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위(衛)나라 사람으로 관료가 된 사람들은 모두 급암을 매우 두려워하여 모두 그보다 낮은 관직을 원했다.

정당시(鄭當時)는 자가 장(莊)이고 진(陳) 출신이다. 그의 부친 정군(鄭君)은 항우 밑에서 장군을 하다가 항우가 죽자 한나라에 귀의했다. 고조가 옛날 항우의 신하들에게 이름을 부르게 하자 정군 혼자만은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고조는 조명을 내려 항우의 이름을 부른 자들에게는 모두 대부의 칭호를 내렸고 정군은 조정에서 쫓아냈다. 정군은 효문제 때 죽었다.

스스로 협객을 자처한 정장은 위난에 처한 장우(張羽)를 구해 그 이름이 양과 초 두 나라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다. 효경제 때 태자의 사인(舍人)이 되었다. 그는 5일마다 하루 씩 휴가를 얻었는데 항상 역마를 장안의 교외에 배치해 두고 옛 친구들을 만나거나 빈객들을 초빙해서 밤을 새웠지만 언제나 자신이 편향되게 처신하지나 않았는지 걱정했다. 정장은 황노의 학설을 좋아했고 장자들을 앙모하여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했다. 나이는 젊고 벼슬은 미천했으나 그가 친교를 맺은 지인들은 모두 할아버지 연배였고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명사들이었다. 한무제가 새로 서자 정장은 점차적으로 관직이 올라 노(魯)나라의 중위(中尉)가 되었다가 계속해서 제남(濟南)의 태수, 강도(江都)의 재상으로 자리를 옮기고 마침내 구경에 올라 우내사(右內史)가 되었다. 우내사에 재직 중에 무안후(武安侯)와 위기후(魏其侯)가 다툴 때 휘말려 첨사(詹事)로 강등되었다가 후에 다시 대농령(大農令)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장이 우내사에 오르자 집안의 하인들에게 경계를 주었다.

“ 손님이 오면 귀천을 따지지 말고 대문 앞에서 기다리게 하지 말라.”

그는 주인으로써의 예를 갖추고, 높은 직위의 자신을 남에게 낮추었다. 정장은 청렴했고 또한 가업을 돌보지 않았으며 봉록이나 하사품을 받으면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그가 남에게 보내는 선물은 대나무 그릇에 넣은 음식물에 불과했다. 아침 조회 때마다 기회가 왔다싶으면 천하의 훌륭한 사람들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선비나 부하 관리들인 승(丞)이나 사(史)를 천거할 때는 항상 진지하고 흥겨운 말로 그를 칭찬하고 언제나 자기보다 현능함을 인용했다. 부하 관리들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고 관속들과 이야기할 때는 항상 그의 마음을 상하게나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좋은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황제에게 전하면서도 늦게 이야기하지나 않았나 걱정했다. 산동의 여러 선비들과 빈객들은 모두 이런 정장을 한결같이 칭송했다.

 정장이 황하의 둑이 터져 홍수가 범람한 정황을 시찰하라는 명을 받자 그는 자청해서 행차를 하기 전에 5일 휴가를 청했다. 황제가 의아하게 생각하고 물었다.

“ 내가 듣기에 정장이 출행할 때 천리 길이라도 양식을 가지고 가지 않는다고 하던데 지금은 5일 동안의 휴가가 왜 필요한가? ”

그러나 정장은 조회에 나와 언제나처럼 황제의 뜻만 따르며 감히 일의 옮고 그름을 심하게 따지지 않았다. 이윽고 만년에 와서 한나라가 흉노를 정벌하고 사방의 오랑캐를 회유하자 그 일에 소요되는 비용이 막대하게 소요되어 재정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정장이 대농의 고용인으로 보증을 선 어떤 빈객은 너무 많은 빚으로 수배 중인 자가 있었다. 이때 회양태수로 있던 사마안이 이 사건을 밝혀냈다. 정장은 이 일로 함정에 빠져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승상부의 장사(長史)를 맡았다. 황제는 정장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해서 여남태수(汝南太守)로 임명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재직 중에 죽었다.

 정장과 급암이 처음 구경의 반열에 올랐을 때는 모두 청렴하고 사생활이 깨끗했다. 이 두 사람은 중도에 파면되어 집안이 가난했음으로 빈객들의 내왕은 점점 적어졌다. 이윽고 태수가 되어 군을 다스렸으나 그들이 죽은 후에 보니 남긴 재산은 하나도 없었다. 정장의 형제와 자손들은 정장의 공으로 인해 이천석의 고관을 지낸 자가 6-7명에 이르렀다.

태사공이 말한다.

“ 무릇 급암이나 정장과 같은 현자라도 권세가 있으면 그들의 빈객은 열 배로 불어나고 권세가 사라지면 그렇지 못했다. 하물며 일반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하규(下邽)의 책공(翟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처음 책공이 정위가 되었을 때 빈객들이 문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정위에서 물러나자 문 밖은 참새를 잡는 그물이라도 칠 수 있을 정도로 한산했다. 다시 책공이 정위로 복직되자 빈객들이 다시 찾아오려고 했다. 이에 책공이 사람을 시켜 대문 앞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붙이도록 했다.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살게 되면 진정한 우정을 알게 되고, 한 사람이 가난하게 되고 한 사람이 부유하게 되면 우정의 모습을 알게 되고, 한 사람이 출세하고 한 사람이 천해지면 비로소 우정의 진심을 알게 알 수 있도다.」

급암과 정당시 역시 그러하였으니 슬프도다!

< 급암정당시열전 끝 >

주석

1) 중대부(太中大夫)/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계승한 관직으로 조정의 공론과 고문에 응하는 직책으로 일정한 직책이 없이 황제의 명이 있을 때에 한하여 업무를 보았다. 궁중에 기거하면서 명의상으로는 낭중령(郎中令 : 후의 광록훈(光祿勛))의 속관이었으나 실제로는 광록훈의 지휘를 받지 않았던 황제의 고급 참모에 해당했다. 봉록은 1천석으로 급사중(給事中), 시중(侍中)으로 불리며 황제의 측근에서 보좌했기 때문에 영향력이 권력이 매우 컸다. 태중대부(太中大夫)라고도 했다.

2) 주작도위(主爵都尉)/ 한경제 중원(中元) 원년 기원전 144년 주작중위를 개칭해서 설치하고 제후들의 봉작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했다. 녹봉은 2천석으로 구경 중의 한 명이다. 무제 태초(太初) 원년 기원전 104년, 다시 우부풍(右扶風)으로 개편되어 내사(內史)의 좌우의 관할 중 우측 땅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의 명칭이 되고 봉작에 관한 일은 대홍려(大鴻臚)가 담당하게 되었다. 남월열전(南越列傳)에 주작도위 양복(楊僕)이 루선장군(樓船將軍)에 임명되어 남월 정벌에 나섰다.라는 기사가 있다.

3) 부백(傅柏)/ 양(梁)나라 사람으로 양효왕(梁孝王) 유무(劉武)의 장군으로 성격이 강직했다.

4) 중이천석(中二千石) : 월 180斛, 연 2,160곡(43,200 리터), 540가마 한나라 때의 1곡은 약 20리터로 지금의 한 말에 해당함. 중이천석의 관리란 삼공 바로 밑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九卿의 고위직을 말한다.

5) 맹분(孟賁)

① 춘추때 위(衛)나라 사람으로 <사기정의>에 의하면 그가 일단 노하여 고함을 치면 그 소리에 하늘이 움직였다고 했다. <시자(尸子)>에 “ 맹분은 물속에서는 교룡(蛟龍)도 피하지 않고, 산속을 다닐 때는 흉포한 호랑이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②전국 때 진무왕의 호위 무사였던 맹열(孟說)이다. 태어날 때부터 용력이 있어 평소에 살아있는 소의 뿔을 뽑았다고 했다. 그는 오획(烏獲)과 함께 용력으로 제후들 사이에 이름이 있었다. 진나라 왕으로 즉위한 진무왕이 용사들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각지의 용사들을 이끌고 진나라로 들어가 높은 벼슬을 받았다. 무왕 4년 기원전 307년 무왕이 주나라에 들어가 구정 들기 시합을 맹열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었다. 이에 그 죄를 추궁 받아 살해되고 그 종족은 멸족되었다.

6) 하육(夏育)/ 춘추 때 위(衛)나라 출신의 전설상의 력사다. 천균(千鈞), 즉 10톤의 무게를 들 수 있다고 했다. 후에 노나라 대부 신수(申繻)에게 살해되었다고 했다. 전박(田搏)에게 살해 되었다는 설도 있다.

7) 무장(武帳)/ 천자의 위엄을 보이고 비상시를 대비하기 위해 천자가 거처하는 주변에 다섯 가지 무기를 쌓아두고 가린 장막이다.

8) 삼수전(三銖錢)/ 한무제 건원 원년(전 140년) 휴대하기가 너무 무겁고 표시와 실제의 중량이 일치하지 않았던 예전의 반량전(半兩錢)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 주조한 화폐다. 동전의 표시와 실제의 중량을 일치시켰다. 당시의 도량형으로 1수는 1/24량, 1량은 16그람으로 삼수전의 무게는 2그람이었다.

9) 오수전(五銖錢)/ 한무제 원수(元狩) 5년 (전 118) 무게가 너무 가볍고 위조가 쉬운 삼수전을 폐하고 오수전을 주조하와 새로운 화폐로 사용했다. 이때 주조된 오수전은 왕조가 바뀌어도 계속 주축 통화로 수왕조 시대까지 800년 이상 통용되어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사용된 화폐가 되었다.

10) 초(楚)/ 항우가 도읍했던 지금의 서주(徐州)인 팽성(彭城) 일대를 말한다. 한나라 초에 한신의 봉국이었다가 한신이 모반하자 동생 유교(劉交)를 봉했다. 경제 3년 (전 154)년에 유교의 손자 유무(劉戊)가 오초칠국의 란을 일으키자 피살당하고 폐국(廢國) 되었다가 다시 유무의 아들 유례(劉禮)를 봉해 다시 세웠으나 관할은 처음 36현(縣)에서 팽성 부근의 몇 개의 현에 불과했다.

11) 회양(淮陽)/ 지금의 하남성 녹읍현(鹿邑縣), 자성현(柘城縣), 부구현(扶溝縣) 일대로 기원전 278년 진나라의 장군 백기의 공격으로 초나라의 도성 영성(郢城)이 함락당하자 초경양왕이 나라를 이곳으로 옮겼다. 한나라 초기에 한고조 유방이 진군(陳郡) 영천군(潁川郡) 2개 군에 회양국을 두고 아을 유우(劉友)를 봉했다.

12) 태자세마/ 태자 소부(少傅)의 속관으로 알자(謁者)와 같은 일을 했다. 태자가 출타할 때 앞장 서서 행렬을 인도했다. 한나라 제도에 각급 관리의 자제로 충당했는데 모두 16명이었다. 말을 씻거나 고르고 말고삐를 잡고 태자를 호위했다. 질록(秩祿)은 6백석이다.

13) 왕신(王信)/ 한무제의 친모 왕태후의 오빠다. 개(蓋)는 지금의 산동성 기수현(沂水縣) 관내다.

14) 진(陳)/ 원래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순임금의 후손을 찾아 지금의 하남성 회양현(淮陽縣)인 진에 봉했으나 춘추시대에 이르로 초나라에 병합되고 이어서 秦진나라의 폭정에 처음으로 봉기한 진승이 도읍한 곳이다.

15) 장우(張羽) / 오초칠국의 란 때 양효왕의 장수로 한안국(韓安國)과 함께 힘껏 싸워 오초의 반군이 양나라를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 공을 세웠다.

16) 첨사(詹事)/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직으로 태자와 황후의 속관이다. 첨(詹)은 공급한다는 뜻으로 첨사란 태자와 황후를 위한 물품을 공급하는 직책이다. 후에 태자의 속관일 경우는 태자첨사로, 황후의 속관일 경우는 궁명을 붙여 장신궁의 경우 장신첨사 등으로 불렀다. 한경제 때 소부(少府)로 개칭되었다.

17) 대농령(大農令)/ 구경의 하나로 농사와 곡식의 일을 총괄했던 장관으로 원래의 명칭은 치속내사(治粟內史)다. 경제 후원년(전 143년) 대농령으로 개칭되었다가 무제 태초 원년(전 104년) 대사농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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