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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7 13:47:093829 
영행열전(佞幸列傳)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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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65. 영행(佞幸)

속담에 “ 힘써 농사짓는 것이 해를 이어 풍년이 든 것 보다는 못하고 관리가 영달하는 데는 직무에 충실한 것이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단지 여인만이 미색이나 교태로 총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선비나 관리들로 또한 그렇다.

옛날에도 미색으로 군주의 총애를 얻어 영달한 자가 많았다. 한나라를 일으킨 한고조는 사납고 오만했으나 적(籍)이라는 유자(孺子)를 총애했다. 그 뒤를 이은 혜제(惠帝)도 굉(閎)이라는 유자를 총애했다. 이 두 사람은 재주나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한낱 교묘한 말솜씨로 총애를 얻어 존귀한 신분으로 황제와 기거를 같이 했다. 그래서 공경대신들은 모두 그들를 통해서 황제에게 말씀을 드릴 수 있었다. 효혜제 때 랑(郞)이나 시중(侍中)은 모두 준의(鵔鸃)1)의 깃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자개를 박은 허리띠에 얼굴은 지분(脂粉)을 발라 모두 굉(閎)이나 적(籍)의 무리를 본받았다. 두 사람은 효혜제를 모신 안릉(安陵)으로 집을 옮겨 살았다.

1. 등통(鄧通)

 효문제의 총애를 받은 사람은 사인출신으로는 등통(鄧通), 환관 출신으로는 조동(趙同)과 북궁백자(北宮伯子)가 있었다. 북궁백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장자로써 총애를 받았다. 조동은 성상(星象)과 운기(雲氣)를 보고 치는 점으로 총애를 얻어 효문제의 수레를 같이 타고 다녔으나 등통은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등통은 촉군(蜀郡) 남안(南安)2) 출신으로 노를 가지고 배를 젓는 일을 잘했기 때문에 황두랑(黃頭郞)3)이 되었다. 어느 날 효문제가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하늘에 오르려고 했으나 오를 수 없었는데 황두랑 한 사람이 나타나 효문제를 밑에서 받쳐주어 하늘에 오를 수 있었다. 문제가 뒤를 돌아보니 그 사람의 옷솔기 띠 밑에 실밥이 터져있었다. 이윽고 잠에서 깨어난 문제는 점대(漸臺)로 가서 꿈속에서 자기를 밀어 올려 준 황두랑을 찾았다. 등통을 발견했는데 그가 입고 있던 옷의 등 뒤가 터져 있어 자세히 보니 바로 꿈속에서 본 자의 모습이었다. 그를 불러 이름과 성을 묻자 성은 등씨요 이름은 통이었다. 문제가 기뻐하며 그를 높여 총애하는 정도가 날이 갈수록 극진했다. 등통도 역시 근신하며 열심히 모시기를 원했기 때문에 외부와는 접촉을 피하고, 비록 휴가를 받아도 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는 거만금을 상으로 주었는데 횟수가 열 번이 넘었고 그의 벼슬을 높여 상대부에 이르게 했다. 문제는 때때로 등통의 집에 놀이를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등통에게는 별다른 재능이 없었으며 선비를 천거할 능력도 없었다. 오로지 스스로 근신하여 자신의 몸으로 황제에게 아첨할 뿐이었다. 황제가 관상을 보는 사람에게 등통의 관상을 보도록 시켰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등통은 굶어죽을 상이라고 했다. 문제가 듣고 말했다.

“ 등통의 부(富)는 황제인 나에게 있는데 어찌 가난으로 굶어죽는다고 하는가? ”

그리고는 촉군의 엄도(嚴道)에 있는 동광산을 하사하여 스스로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등씨전(鄧氏錢)을 주조하여 천하에 유통시킨 등통의 부는 그와 같이 대단했다.

문제가 종기를 자주 앓았다. 그때마자 등통은 황제를 위해 종기를 입으로 빨아주었다. 마음이 불쾌해진 문제가 등통에게 물었다.

“천하에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하겠는가? ”

등통이 대답했다.

“ 마땅히 태자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태자가 문병을 오자 문제가 태자에게 자기의 종기를 빨라고 시켰다. 태자가 종기를 빨기는 하면서도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등통은 항상 곁에 있으면서 황제의 종기를 빨아준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가 이 일로 인해 등통을 원망하게 되었다. 이윽고 문제가 붕어하고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등통은 면직되어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어떤 사람이 등통이 주전을 훔쳐 새외로 빼돌렸다고 고발했다. 황제가 옥리를 시켜 심문한 결과 혐의가 있었음으로 죄를 논하여 등통의 가산을 모두 몰수하고 벌금으로 누만금을 더 과했다. 장공주(長公主)가 듣고 등통에게 얼마간의 돈을 하자 관리들이 재빨리 따라와 몰수했다. 그래서 등통은 비녀 하나도 몸에 지닐 수 없었다. 장공주는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의식을 내릴 수 있을 뿐이었다. 결국은 등통은 일전도 몸에 지니지 못한 채 남의 집에 의지하며 살다가 죽었다.

효경제 때는 궁중에 총애하는 신하를 두지 않았으나 단지 낭중령(郎中令) 주문인(周文仁)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다. 황제는 문인을 보통사람보다는 훨씬 크게 총애했으나 지나치게 돈독하지는 않았다.

 

2. 한언(韓嫣)

 금상황제가 사랑했던 총신에 사인으로써는 한왕(韓王) 신(信)의 후손인 한언(韓嫣)이 있었고 환관으로는 이연년이 있었다. 언은 궁고후(弓高侯)4)한칙(韓則)의 서얼(庶孼)이다. 금상폐하가 교동왕(膠東王)의 신분이었을 때 한언과 황제는 학문을 배우면서 서로 친애하게 되었다. 이어서 금상폐하가 태자로 책봉되자 한언과는 더욱 친밀하게 지냈다. 한언은 말을 잘 몰고 활을 잘 쏘았으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술이 있었다. 금상폐하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흉노를 정벌하고자 군사를 일으킬 때 한언은 어렸을 때 흉노의 풍습에 익숙했음으로 그의 신분은 더욱 존귀하게 되어 관직이 상대부까지 이르고 상을 받음이 문제 때의 등통과 비교될 정도였다. 한언이 항상 황제와 함께 기거를 같이 하고 있을 때 강도왕(江都王)5)이 입조했다. 강도왕은 황제의 명을 받고 사냥을 같이 하기 위해 상림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도로에 통행을 차단하고 길 주위의 경계를 끝냈으나 천자의 어가가 출발하기 전에 한언은 부거(副車)를 타고 기병 수천 기와 함께 사냥감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앞으로 전력을 다해 달렸다. 강도왕이 멀리서 보고 천자의 일행으로 알고 시종들을 물리치고 땅에 엎드려 천자를 알현하려고 했다. 강도왕을 본 한언은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한언이 지나간 것을 알게 된 강도왕은 노하여 황태후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다.

“ 청컨대 황도에 머물며 숙위(宿衛)를 하도록 허락하시어 한언에 비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로 인해 태후는 한언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언이 황제를 모시면서 궁녀의 처소를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음으로 궁녀와 간통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태후가 듣고 노하여 사람을 시켜 한언을 사사시키려고 했다. 황제가 대신 사죄했으나 황태후는 용서하지 않았음으로 한언은 죽고 말았다. 안도후(安道侯) 한열(韓說)은 한언의 동생으로 역시 황제에게 아첨을 잘하여 총애를 얻었다.

3. 이연년(李延年)

이연년은 중산 출신이다. 자신을 포함해서 부모, 형제, 아내 등 모두는 원래 창우(倡優)였다. 연년은 법에 저촉되어 궁형을 방아 급사구중(給事狗中)6)이 되었다. 평양공주(平陽公主)7)가 연년의 누이동생이 춤을 잘 춘다고 말하자 황제가 접견하고 매우 기뻐하여 궁녀가 머무는 영항으로 불러들이고 연년도 불러 귀하게 만들었다. 연년은 노래를 잘 불렀고 또한 새로운 노래를 잘 지었다. 그래서 황제는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사당을 짓게 하고 음악과 가사를 지어 노래를 부르며 연주하도록 했다. 연년이 황제의 뜻을 받드는데 능했기 때문에 황제를 위해 수시로 새로운 음악을 지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연년의 누이동생이 무제의 총애를 받아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연년은 2천석의 관리가 차는 인장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협성율(協聲律)8)이 되었다. 황제와 함께 기거를 같이할 정도로 귀한 신분이 된 이연년은 한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연년은 궁녀와 음란한 행위를 저지르더니 교만하게 되어 황궁을 멋대로 출입했다. 이윽고 그의 누이동생 이부인(李夫人)이 죽게 되자 그에 대한 황제의 총애도 줄어들었다. 얼마 후에 이연년과 그 동생들은 모두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이후로 궁궐 안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외척 출신이었으나 족히 언급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은 외척 출신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한 신분이 되엇으나 그들은 뛰어난 재능으로 스스로 올라간 것이다.

태사공이 말한다.

“ 심하구나! 사랑하고 싫어하는 감정의 수시로 변하는 것이. 미자하(彌子瑕)9)의 행위는 후세 사람들에게 영행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족하여 비록 백세 후의 먼 훗날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

<영행열전 끝>


1) 준의(鵔鸃)/ 별나라에 살고 있다는 전설상의 금계(金鷄)라는 닭으로 일반적으로 닭의 미칭으로 쓰인다.

2) 남안(南安)/ 지금의 사천성 락산현(樂山縣)이다.

3) 황두랑(黃頭郞)/ 한나라 때 선박의 운행을 관장하던 하급관리로써 머리에 노란 모자를 쓴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4) 궁고후(弓高侯)/ 윈래 한왕 신의 아들 한퇴당(韓頹當)의 봉호다. 한왕 신이 한고조 유방의 의심을 받아 죽음을 피해 흉노로 달아나 살다가 흉노의 퇴당성(頹當城)에서 낳았음으로 이름으로 삼았다. 퇴당은 후에 흉노의 상국이 되었다가 한문제 14년 기원전 166년 조카 한영(韓嬰)과 함께 일족들을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했다. 2년 후인 기원전 164년 퇴당은 궁고후에 봉해지고 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여 서신으로 교서왕(膠西王)을 설득하여 항복을 받아냈으나 그 공을 모두 휘하의 장수들에게 돌렸다. 퇴당의 봉호는 아들이 한칙에게 전해졌다고 적자가 없었음으로 후국은 폐지되었다. 한언은 한칙의 서자다.

5) 강도왕(江都王)/ 한경제의 아들 유비(劉非)의 왕호다. 원래 여남왕(汝南王)에 봉해졌다가 오초칠국의 란 때 공을 세워 반란의 주모자 유비(劉濞)의 영지에 개봉되었다. 한무제 원삭(元朔) 2년 기원전 127년 유비가 죽고 아들 유건(劉建)이 사위했다. 위인이 사치를 즐기고 부패했으며 음란한 생활을 즐기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락으로 삼았다. 원수(元狩) 2년 기원전

6) 급사구중(給事狗中)/ 천자의 개를 맡아 기르는 직책

7) 평양공주(平陽公主)/ 무제의 누이로 원래 상국 조참(曹參)의 손자 평양후 조시(曹時)에게 출가해서 평양공주라고 칭했다. 조시가 악질에 걸려 일찍 죽자 대장군 위청(衛靑)에게 재가했다.

8) 협성율(協聲律)/ 음악을 관장하는 관리의 장으로 한서에는 협성도위(協聲都尉)로 되어있다.

9) 미자하(彌子瑕)/ 춘추시대 위영공(衛靈公)의 총신이다. 임금의 명을 사칭하여 어가를 훔쳐탔고, 자기가 먹다 남은 복숭아를 영공에 바쳤으나 모두 효성과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일이라고 용서받았으나 후에 총애를 잃자 똑 같은 행위로 죄를 받고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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